5월 2일 임자
모셔 올린 열성(列聖)의 모훈(謨訓)을 봉모당(奉謨堂)에 봉안하고, 이문원(摛文院)에 나아가 시임·원임 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였다.
5월 10일 경신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성학(聖學)을 힘쓰고 유현(儒賢)을 초치(招致)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사복(嗣服)한 이후로 여러 번 초치(招致)한 일이 있었으나 〈유현은 오지 않고〉 백구(白駒)045) 가 길이 공곡(空谷)에 매어 있으니, 이것이 내가 자겸(自慊)해 하는 바이다. 《시경(詩經)》에 이른바 ‘나를 멀리 버리지 말라.’ 하는 마음을 늘 잊지 않고 하전(厦氈)046) 의 맑게 갠 낮에는 언제나 발돋움하여 바라보는 생각이 간절하였는데, 지금 경(卿)의 말을 들으니, 다시 경경(耿耿)함을 깨닫겠다. 송 좨주(宋祭酒)와 조 유현(趙儒賢)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게 하라. 도승지로 하여금 별유(別諭)를 대신 짓게 하여 지방관에 나누어 보내어 여러 유현들에게 유지(諭旨)를 전하여 조속히 길을 떠나 나를 위하여 번연(幡然)히 마음을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창원(昌原)·마산(馬山)의 7포(浦)에 내수사(內需司)에서 강제로 세액(稅額)을 정한 것을 우선 혁파하고 제도(諸道) 가운데 이렇게 수세(收稅)하는 폐단이 있는 것은 일일이 이정(釐正)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관시(關市)에도 오히려 정세(征稅)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상선(商船)이겠는가? 가령 거기에서 받는 세금이 수용(需用)에 도움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우리 백성들에 해를 끼친 것을 알았다면 무엇을 아껴서 혁파하지 않겠는가? 해도(該道)에 명령을 내려 혁파하게 하고, 이외에도 이러한 일이 있으면 일일이 관문(關文)으로 보내어 혁파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팔도(八道) 유생(儒生) 김칠환(金七煥) 등이 상소하여 문강공(文康公) 신(臣) 김창흡(金昌翕), 문경공(文敬公) 신 김원행(金元行), 고(故) 좨주(祭酒) 신 김이안(金履安)을 석실 서원(石室書院)에 추배(追配)하게 할 것을 청한 일로 인하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삼현(三賢)은 이 서원에 곧 조손(祖孫)과 부자(父子)를 전에 이미 배향(配享)한 곳인데, 삼현이 도학(道學)과 명의(名義)를 닦은 것이 수연(粹然)히 빛나 백세(百世) 뒤에도 관감(觀感)하고 숭모(崇慕)하게 되었습니다. 돌아보건대 그 곳은 형제(兄弟)끼리 학문을 닦은 곳이요, 부자(父子) 간에 교훈을 주고받은 곳으로, 모두 이 물과 이 언덕에서 있었습니다. 지금 추배하자는 논의는 다만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에 화합할 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돕고 어진이를 본뜨게 하는 정사(政事)에 있어 먼저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청컨대 유소(儒疏)의 청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부교리 최재후(崔在厚)의 상소를 방금 살펴보건대, 고 참판 신(臣) 서춘보(徐春輔)가 신미년에 충성을 다한 절개를 갖추어 진달하면서 잇따라 그에게 추증(追贈)을 허락하고 시호(諡號)를 내리며 사손(祀孫)을 기용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지(批旨)에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셨습니다. 고 무재(武宰)는 유서(由緖)깊은 공신(功臣)의 집안으로, 정묘(正廟)께서 예외의 은혜로 대우하심을 입어 마음속으로 맹세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힘을 다한 공적은 민멸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임신년047) 추류(醜類)들을 섬멸시킨 전역(戰役)이 있기에 미쳐서는 충의(忠義)를 분발하고 사졸(士卒)을 권장해 이끌어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유신(儒臣)이 지금 청한 바는 곧 당일 군중(軍中)에서 칭송한 나머지입니다. 청컨대 추증의 은전(恩典)을 허락하여 내리시고 포가(褒嘉)의 정사를 거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황단(皇壇)에 친향(親享)하는 날 윤 학사(尹學士)의 사손(祀孫)을 등용시키라는 명이 계셨는데, 사손 전부사(府使) 윤태긍(尹泰兢)은 늙고 병들어 사환(仕宦)의 공직(供職)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아들을 초사(初仕)에 녹용(錄用)하라는 뜻으로 해조(該曹)에 분부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남병철(南秉哲)을 형조 판서로, 김병국(金炳國)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5월 15일 을축
시임·원임 대신(大臣) 및 국구(國舅)·기사 당상(耆社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대호군(大護軍) 홍기섭(洪耆燮)도 함께 입시(入侍)하게 하라."
하였고, 홍지(紅紙) 한 폭(幅)을 내렸으니, 곧 경사(慶事)를 기록하여 칭송한 칠언 절구(七言絶句)의 시(詩)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것은 내가 친히 쓴 것이니, 경 등은 돌려 가면서 본 뒤에 갱진(賡進)048)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 등이 받들어 읽고나서 아뢰기를,
"갱진한 뒤에 원폭(原幅)을 도로 대내(大內)로 들여가야 합니까?"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흥근(金興根)은 아뢰기를,
"규장각(奎章閣)에 봉장(奉藏)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들여보낼 필요가 없다. 정 대신(鄭大臣)이 수상(首相)으로 있으니, 영수(領受)해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도희(金道喜) 등이 아뢰기를,
"하나뿐인 원본을 나누어 영수할 수 없으니, 매우 섭섭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각폭을 써서 여러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면 되겠는가?"
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마땅히 각기 대대로 전할 진귀(珍貴)한 보물이 되겠으나, 신 등이 어찌 감히 우러러 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써서 내리겠다. 갱운(賡韻)은 연석(筵席)에서 물러난 뒤에 지어서 올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경사스러운 탄신(誕辰)을 맞이하여 기뻐하고 송축(頌祝)함이 한정이 없는데, 듣건대 ‘향외(鄕外)의 유생(儒生)들이 아직껏 머물러 있는 자가 많다.’고 한다. 내일의 응제(應製)는 반중(泮中)049) 에서 설행할 것이니, 내각 제학(內閣提學)은 개문(開門)하기를 기다려 패초(牌招)하고, 무사(武士)는 훈장(訓將)으로 하여금 훈련원(訓鍊院)에서 시사(試射)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7일 정묘
이장오(李章五)를 이조 참판으로, 김병주(金炳㴤)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5월 23일 계유
경기(京畿) 양주(楊州) 유생(儒生)인 유학(幼學) 이연긍(李淵兢) 등이 상소하여 고(故) 영상(領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을 석실 서원(石室書院)에 추배(追配)하게 하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 서원의 향사(享祀)에 김충헌을 아직까지 배향(配享)하지 못한 것은 실로 흠궐(欠闕)된 법전이니, 그대들의 소청이 진실로 옳다. 곧바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5월 24일 갑술
김병교(金炳喬)를 예조 판서로, 박장복(朴長復)을 공조 판서로, 이돈영(李敦榮)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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