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10권 철종9년 1858년 8월

싸라리리 2025. 5. 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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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계묘

효정전에 나아가 삭제(朔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만녕전(萬寧殿)을 다시 지을 때의 감동(監董)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고, 유수(留守) 유장환(兪章煥)에게는 가자(加資)하였다.

 

이우(李㘾)를 이조 참판으로, 임태승(任泰昇)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8월 3일 을사

효정전에 나아가 아침 상식(上食), 주다례, 저녁 상식을 행하였다.

 

홍화문(弘化門) 안에 나아가 연주(練主)031)  를 지영(祗迎)하였다.

 

8월 4일 병오

효정전에 나아가 연제(練祭)를 행하였다.

 

8월 5일 정미

연주 도감(練主都監)의 당상(堂上), 혼전(魂殿)의 향관(享官), 산릉(山陵)의 수릉관(守陵官)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제주관(題主官)인 이조 참판 이우(李㘾), 향관(享官)인 이조 판서 김병학(金炳學), 황해 감사 남병길(南秉吉)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연제(練祭)를 지낸 뒤 문안하러 왔기 때문이었다. 영부사(領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순원 성모(純元聖母)께서 국모로 임어하신 지가 60년이고, 그 동안에 종사(宗社)를 두번 평안하게 한 성대한 공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신 이후 보호해 주신 노고와 교훈하여 주신 수고로움에 대한 은덕은 하늘처럼 끝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타고나신 독실한 효성으로 양지(養志)와 공양(供養)을 아울러 갖추었으며, 제사도 반드시 몸소 지내셨고 애통해 하는 것도 상례(常禮)를 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새벽 제사를 지내신 뒤 몸소 전내(殿內)에 나아가 마음에서 발하여 솟구치는 슬픔으로 곡읍(哭泣)하느라고 예절(禮節)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옛날에 이른바 유자(孺子)가 사모하는 것이라는 그것입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고 말을 들은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는데, 제왕(帝王)의 대효(大孝)는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선성후(先聖后)께서는 매양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를 가지고 자상하게 면대(面對)하여 명하신 것을 전하께서는 항상 훈계를 받으셨는데, 근래 강대(講對)를 오래도록 철폐하였으므로 신료들을 소견(召見)하는 때가 드무니, 이는 신 등이 항상 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신(近臣)과 유사신(有司臣)을 소견하시고 백성들의 고통을 자문(諮問)하시어, 이를 정령(政令)에 시행하시고 날마다 백성을 평안히 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방도를 행한다면 국세가 공고하고 평안해질 것이니, 이보다 더 큰 성효(聖孝)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의 아들이 되어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 소자(小子)가 성모(聖母)에 대한 정리(情理)는 견줄 데가 없다는 것을 경 등은 알아야 할 것이다.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이미 생겼으니, 강연(講筵)은 마침내 유념하여 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백 세가 된 노인(老人) 김일(金鎰)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김병학(金炳學)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8월 7일 기유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이승익(李承益)을 이조 참의로, 김정집(金鼎集)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8월 9일 신해

효정전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하였다.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8월 11일 계축

인릉(仁陵)의 산릉(山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지내고, 또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8월 12일 갑인

산릉(山陵)에 나아가 아침 상식을 행하였다.

 

8월 13일 을묘

인릉의 산릉 아헌관(亞獻官)과 수릉관(守陵官)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오취선(吳取善)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8월 15일 정사

효정전에 나아가 망제(望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정원용(鄭元容)이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할 것을 청하고 이어 중궁전(中宮殿)에 들어가 진찰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은 중외(中外)가 반드시 모두 알고 있는 것인데, 미리 산실청을 설치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들어와서 진찰하는 것은 이달에 날짜를 가려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6일 무오

소대(召對)가 있었다.

 

홍우건(洪祐健)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8월 17일 기미

소대하였다.

 

윤치의(尹致誼)를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8월 18일 경신

희정당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고(故) 지평(持平) 이봉상(李鳳祥)에게 도헌(都憲)을 추증(追贈)하고 겸하여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소대(召對)하였다.

 

허계(許棨)를 우변 포도 대장(右邊捕盜大將)으로, 이유원(李裕元)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8월 19일 신유

소대(召對)하였다.

 

8월 20일 임술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영부사 정원용(鄭元容)이 말하기를,
"오늘은 곧 중궁전(中宮殿)을 진후(診候)할 수 있는 길일(吉日)입니다. 삼가 들어가 진찰한 여러 의원들의 말을 듣건대, 맥도(脈度)가 조화(調化)롭고 평순(平順)하며 제절(諸節)이 만안(萬安)하여 보하는 탕제(湯劑)를 진어할 필요가 없다고 하니, 이는 종사(宗社)가 억만년토록 끝이 없이 이어갈 경사인 것입니다. 대소 군정(群情)이 기뻐하여 경축하는 마음을 어떻게 형용하여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산실청을 배설(排設)할 적에 차지법(借地法)이 있어 의당 중전(中殿)의 성씨(姓氏)를 쓰는 것을 으레 계품(啓稟)을 거쳐야 하는 것이므로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외롭고 위태로운 때에 이런 경사가 있으니, 경 등이 기뻐하고 경축하는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쁜 마음은 있으나 때가 이런 때라서 실로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하였다.

 

8월 21일 계해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소대(召對)하였다.

 

8월 22일 갑자

소대하였다.

 

8월 23일 을축

소대하였다.

 

8월 24일 병인

소대하였다.

 

지사(知事) 윤정현(尹定鉉)이 소장을 올려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8월 25일 정묘

윤정현(尹定鉉)을 치사(致仕)시킨 다음 봉조하(奉朝賀)로 삼았다.

 

8월 29일 신미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윤치수(尹致秀)를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8월 30일 임신

소대(召對)하여 《속강목(續綱目)》을 강하였다.

 

전 현감 박경선(朴慶善)을 흑산도(黑山島)에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으니, 투서(投書)하여 사람을 무함한 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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