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10권 철종9년 1858년 9월

싸라리리 2025. 5. 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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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계유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효정전(孝正殿)에 나아가 삭제(朔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은 곧 우리 덕종조(德宗朝)께서 탄강(誕降)하신 구갑(舊甲)이니, 옛날을 추상(追想)컨대 감회와 사모가 더욱 간절하다. 소혜 왕후(昭惠王后)께서 탄강하신 구갑도 작년의 이달에 있었는데 때마침 슬픔으로 경황이 없던 때를 만나 정성을 펼 수가 없었다. 이제 15일과 초 8일에 경릉(敬陵)에 대신(大臣)을 보내어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게 하라."
하였다.

 

9월 2일 갑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추도기(秋到記)를 행하였다. 강(講)에 유학(幼學) 박해철(朴海哲), 부(賦)에 진사(進士) 정면조(鄭冕朝)를 아울러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9월 3일 을해

소대(召對)하였다.

 

9월 4일 병자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였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였으니, 문안하러 왔기 때문이었다.

 

성원묵(成原默)을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다.

 

9월 6일 무인

태백성이 나타났다.

 

9월 7일 기묘

하교하기를,
"일전에 과시(科試)를 공도(公道)를 넓히는 뜻으로 연중(筵中)에서 칙유(飭諭)한 바 있으니, 연석에 있던 제신(諸臣)들은 나의 마음을 다 알았을 것이다. 과시의 공불공(公不公)에 국맥(國脈)의 장단(長短)이 달려 있는 것이다. 현능(賢能)한 사람을 선발하여 뒷날의 수용(需用)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것이 곧 과거(科擧)를 설치한 본의(本意)인 것이다. 그런데 근래 온갖 폐단이 마구 생겨 선비가 된 사람은 당초 거업(擧業)을 정습(程習)하지 않고서 찬자(鑽刺)032)  만을 일삼고 시관(試官)이 된 사람은 또한 국체(國體)를 돌보지 않고 청촉(請囑)만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한 번 과시(科試)를 거칠 때마다 번번이 더한층 울불(鬱沸)함을 빚었으니, 조정의 기강이 실추(失墜)되고 국사가 어그러지며 군정(群情)이 혼란하여진 것이 여기에서 연유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주사(主司)의 신하가 진실로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면려하여 먼저 가슴속에 있는 하나의 ‘사(私)’자를 제거한다면 인재가 나오지 않고 선비들의 추향이 단정하지 못하며 백성들의 뜻이 안정되지 않고 국세(國勢)가 존엄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단지 물이 더욱 깊어져 차츰차츰 젖어 들어가 빠져서 패퇴(敗頹)하는 데 이른 뒤에야 그만두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모두들 이런 뜻을 알고서 대양(對揚)할 방도를 마련하라."
하였다.

 

9월 9일 신사

태백성이 나타났다.

 

9월 11일 계미

태백성이 나타났다.

 

9월 13일 을유

식년(式年) 감시(監試)의 복시(覆試) 일소(一所)·이소(二所)에서 방목(榜目)을 올렸다. 일소에서는 유학(幼學) 최태준(崔泰準), 이소에서는 유학 이민실(李敏實)이 으뜸을 차지하였다.

 

9월 14일 병술

태백성이 나타났다.

 

의릉(義陵)033)  의 능 위를 수개(修改)할 때의 감동(監董)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고, 도신(道臣) 이인고(李寅皐)에게는 가자(加資)하였다.

 

9월 15일 정해

효정전에 나아가 망제(望祭)와 주다례를 행하였다.

 

반궁(泮宮)에서 구일제(九日製)를 행하였다. 부(賦)의 유학(幼學) 윤우석(尹宇錫)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9월 16일 무자

홍종응(洪鍾應)을 판의금부사로, 이주철(李周喆)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허습(許熠)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9월 17일 기축

태백성이 나타났다.

 

경과(慶科) 정시(庭試)의 문과(文科)를 경복궁(景福宮)에서, 무과(武科)를 모화관(慕華館)에서 행하였다. 문과에는 이조신(李肇信) 등 3인을 뽑고, 무과에는 최규오(崔圭五) 등 2백 67인을 뽑았다.

 

9월 19일 신묘

태백성이 나타났다.

 

남병철(南秉哲)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이우(李㘾)·이유원(李裕元)을 직제학(直提學)으로, 조병칠(趙秉七)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규장각(奎章閣)에서 주자(鑄字)를 주관한 당상(堂上)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9월 21일 계사

태백성이 나타났다.

 

9월 22일 갑오

태백성이 나타났다.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친히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하교하기를,
"생원 박효예(朴孝藝)·김대규(金大奎), 진사 고몽수(高夢洙)·최동익(崔東益)·한세유(韓世裕)·박민헌(朴敏憲)·이두언(李斗彦)·안형(安炯)은 아울러 오위장(五衛將)에 단부(單付)하게 하라."
했는데, 나이가 70세이기 때문이었다.

 

9월 23일 을미

혜성(彗星)이 사라졌다.

 

9월 25일 정유

남병철(南秉哲)을 판의금부사로, 이명학(李明學)을 삼도 수군 통어사로 삼았다.

 

9월 27일 기해

남전(南殿)에 나아가 순조(純祖)의 어용(御容)을 받들어 제배(躋配)하였다.

 

9월 28일 경자

반궁(泮宮)에서 응제(應製)를 행하였는데, 부(賦)에 유학(幼學) 조희일(趙熙一), 생원(生員) 김기순(金琦淳), 진사(進士) 김재현(金在顯)을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남전 증건 도감(南殿增建都監)의 감동(監董) 당상(堂上)과 작헌례(酌獻禮) 때의 헌관(獻官)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다. 당상인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김병국(金炳國),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열모(洪說謨),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영근(金泳根), 도청(都道廳)인 사성(司成) 이응인(李應寅), 부사과(副司果) 서신보(徐臣輔), 이봉(移奉)할 때의 대축(大祝)인 응교(應敎) 이유석(李裕奭), 병조 정랑(兵曹正郞) 김석(金鉐)에게는 아울러 가자(加資)하였다.

 

9월 29일 신축

서헌순(徐憲淳)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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