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병자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등이 백관(百官)들을 인솔하고 정청(庭請)하면서 속히 분명한 유음(兪音)을 내리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뜰에 가득한 제신(諸臣)들이 끝내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는가? 내가 어찌 겉치레로 겸양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겠는가? 나는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다."
하였다.
정청(庭請)하여 다시 아뢰니, 비답하기를,
"뜰에 가득히 서서 아뢰는 말이 이처럼 거듭 되풀이 되고 있으니, 내가 어찌 계속 듣고 싶겠는가? 경(卿) 등의 계사(啓辭)를 볼 적마다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으니, 다시는 이 일로써 서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정청(庭請)하여 세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국계(國計)와 민우(民憂)가 얼마나 긴급한 때인가? 상하(上下)가 마음을 다져 먹고 실심(實心)으로써 실정(實政)을 행하더라도 오히려 홍제(弘濟)할 방책이 없을까 두려운 판국에 갑자기 겉치레로 꾸미는 일을 의의(擬議)하면서 마치 조급하게 서둘러 행해야 될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서로 바라고 함께 면려하는 의리이겠는가? 나는 부덕(否德)한 몸으로 큰 서업(緖業)을 찬승(纘承)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는 것은 열조(列朝)의 전장(典章)을 어기지 않고 잊지 않으면서 선왕(先王)의 지사(志事)를 계술(繼述)하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정치는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고 은택은 궁극에까지 미치지 못하여, 매양 스스로 생각하노라면 깊은 연못과 깊은 골짜기가 앞에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옛날 더없이 성대했던 때의 전례(典禮)를 태연히 감당하고 나서면서 이에 ‘나의 선군(先君)도 또한 행하였다.’고 한다면, 어찌 마음에 송구스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정청(庭請)을 날마다 간곡하게 하고 있는데도 면회(勉回)할 수 없는 것은 진실로 내가 부질없이 겸손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선무(先誣)를 변해(辨解)한 한 가지 일에 있어서 그 미명(美名)을 과매(寡昧)한 나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지만, 이것이 또한 전대에 없던 드물게 있는 경사이니, 이런 경사가 있는 기회로 인하여 기필코 나로 하여금 성조(聖朝)에서 이미 행한 전례(典禮)를 우러러 준행하게 하는 것은 전거(典據)할 만한 의리가 있는 것이고, 또 백성들의 대동(大同)한 심정을 끝까지 저버릴 수가 없었으므로, 여러 날 헤아려 본 끝에 이에 마지못해서 힘써 따르기는 하겠으나, 나의 마음에는 끝내 부끄러움이 있다. 의문(儀文)의 절차에 있어 혹시라도 예대(豫大)에 관계되는 것이 있다면, 이는 나의 마음을 양지(諒知)하지 못한 처사인 것이니, 경(卿) 등은 각기 잘 알고 있으라."
하였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원임(原任)·시임(時任) 대신(大臣)과 예당(禮堂)을 소견(召見)했으니,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말하기를,
"빈청(賓廳)의 계달(啓達)과 정청(庭請)으로 정성을 쌓아 연명으로 아뢰었으나 잇따라 미안스러운 하교를 내리셨으므로, 신 등의 황송하고 답답한 정성은 갈수록 더욱 옹축(顒祝)하였었는데, 전하께서 선왕의 법을 준행하는 의리로써 힘써 따른다는 하교가 있으시니, 신민(臣民)들의 경축과 환희를 어찌 형용하여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누누이 간청하는 것이 도리어 지리하게 느껴졌고, 매양 선왕을 따르라는 것으로 청하였기 때문에 비록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는 하지만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김병필(金炳弼)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대전(大殿)의 존호(尊號) 망(望)은 희륜 정극 수덕 순성(熙倫正極粹德純聖)으로 하고, 중궁전(中宮殿)의 존호 망은 명순(明純)으로 하였습니다."
하였다.
6월 2일 정축
제주 찰리사(濟州察理使) 이건필(李建弼)을 소견(召見)하였으니,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었다.
6월 3일 무인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하례(賀禮)를 받고 반사(頒赦)하였다.
하교하기를,
"진하(陳賀)할 때의 예방 승지(禮房承旨) 조병협(趙秉協), 선교관(宣敎官)인 부사직(副司直) 김원성(金元性)에게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재령(載寧) 등 고을의 표퇴(漂頹)한 가호(家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6월 8일 계미
수안(遂安) 등 고을의 표퇴(漂頹)한 가호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6월 10일 을유
송내희(宋來熙)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내준(柳來駿)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홍종서(洪鍾序)를 형조 판서로, 김병운(金炳雲)을 한성부 판윤으로, 송내희(宋來熙)를 좨주(祭酒)로 삼았다.
6월 11일 병술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6월 17일 임진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책보(冊寶)와 진하(陳賀)를 받고 반사(頒赦)하였다.
돌아온 진주사(陳奏使)를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사사(使事)가 준청(準請)한 것이 이토록 신속하게 될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더구나 패서(悖書)를 즉시 간정(刊正)하게 되었으니, 더없는 경행(慶幸)이다. 따라서 경(卿) 등이 힘과 정성을 다 기울였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하니, 윤치수(尹致秀)가 말하기를,
"성효(聖孝)가 순독(純篤)하시어 다른 나라에서 믿고 감동했으므로 사사(使事)가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니, 더없는 경행입니다. 시창(市廠)의 30여 건(件)은 이미 개각(改刻)하였으므로 한 질(秩)을 이번 걸음에 구입하여 가지고 왔는데, 어제 이미 승정원에 정납(呈納)했습니다."
하였다.
예방 승지 성재원(成載瑗), 선교관(宣敎官)인 사성(司成) 조은승(曹殷承), 선전관(宣箋官)인 부사직(副司直) 김영수(金永秀), 좌통례(左通禮) 신상흠(愼尙欽)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6월 18일 계사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한번 내린 비가 그대로 장마가 되어 아직도 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도랑과 밭두렁이 물에 잠겨 농사를 해치게 될 상황이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백성의 일을 생각하니, 너무도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사대문(四大門)에 영제(禜祭)를 지내되 날짜를 가리지 말고 재신(宰臣)을 보내어 설행(設行)하게 하라."
하였다.
존호(尊號)를 올릴 때의 도감 제조(都監提調)와 책보(冊寶)를 올릴 때의 영의정 이하의 관원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게 하였다. 제조(提調)인 예조 판서 조연창(趙然昌), 도청(都廳)인 부사과(副司果) 임승준(任承準)·이휘준(李彙濬), 독옥책관(讀玉冊官)인 행 호군(行護軍) 이유응(李𥙿膺), 독금보관(讀金寶官)인 행 호군 김병필(金炳弼)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진주사(陳奏使)의 정사(正使)인 판부사(判府事) 윤치수(尹致秀), 부사(副使)인 행 호군(行護軍) 이용은(李容殷), 서장관(書狀官)인 겸 지평(兼持平) 이인명(李寅命)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윤치수(尹致秀)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6월 19일 갑오
정원용(鄭元容)을 호위 대장(扈衛大將)으로 삼았다.
6월 20일 을미
사대문(四大門)에 영제(禜祭)를 설행하였다.
김학초(金學初)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24일 기해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6월 25일 경자
태백성이 나타났다.
6월 26일 신축
태백성이 나타났다.
김유연(金有淵)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6월 27일 임인
태백성이 나타났다.
6월 28일 계묘
태백성이 나타났다.
6월 29일 갑진
태백성이 나타났다.
안주(安州)·금천(金川) 등 고을의 표퇴한 가호(家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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