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7권 헌종6년 1840년 12월

싸라리리 2025. 5. 2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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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정사

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민치성(閔致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행교(李行敎)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조덕영(趙德永)을 함경도 병마 절도사로, 이은빈(李誾彬)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2월 6일 임술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下敎)하기를,
"재작년 봄에 놓아 보내라고 한 명은 나의 뜻한 바가 있었으나, 대계(臺啓)가 한창 일어났기 때문에 금오(金吾)에서 거행하지 못하였다. 이제 해가 더욱 오래 되었는데 명령을 그대로 덮어두는 것은 사체(事體)에 크게 어그러지고, 또 내가 이 일에 대해서는 쟁집(爭執)하는 논의에 대해 끝내 석연하지 않으니, 반드시 용서하고야 말 것이다. 추자도(楸子島)에 안치(安置)한 죄인 강시환(姜時煥)을 연전의 성명(成命)에 따라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왕부(王府)에 엄히 신칙(申飭)하여 곧 놓아 보내게 하라."
하였다.

 

12월 10일 병인

이경재(李景在)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13일 기사

이약우(李若愚)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2월 15일 신미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장단부(長湍府)의 아비를 죽인 죄인 이창석(李昌錫)을 이제 이미 잡아 가두었으니, 법례(法例)에 따라 삼성 추국(三省推鞫)073)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결안(結案)을 받고 부대시 능지 처사(不待時凌遲處死)074)  하였다.

 

12월 17일 계유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유근(金逌根)이 졸서(卒逝)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중신(重臣)의 곧고 성실한 모습과 넓고 높은 식견과 밝고 통달한 재주를 다시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의리로 고락을 같이하고 능히 선대(先代)의 무공(武功)을 뒤이어 변함 없이 나라를 위하여 근로한 것이 오래 드러났으니 국가에서 의중(倚重)한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불행히 집에서 병으로 오래 앓아 내가 보지 못한 지 이제 몇 해 만에 문득 서단(逝單)을 보니 내 마음이 이처럼 몹시 슬픈데, 더구나 우리 동조(東朝)의 매우 절박한 슬픔이겠는가? 졸한 판돈녕 김유근의 집에 동원 부기(東園副器)075)   1부(部)를 실어 보내고 원치부(元致賻) 외에 별치부(別致賻)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넉넉히 실어 보내게 하고,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김 유근의 자(字)는 경선(景先)인데,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아들이다. 성품이 결백하고 솔직하며 곧고 성실하여 뜻에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문득 용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굽히지 않고 귀한 체한다는 이름이 있었는데, 만년에는 절조를 굽혀 공근(恭謹)하였으나, 그 미워하는 것이 너무 심하므로 남을 용납하는 도량에 있어서는 끝내 논할 만한 것이 있었다. 임진년076)   이후로 군국(軍國)의 사무가 그 몸에 모였는데, 공사(公事)에 진력하여 사정(私情)을 끊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요구하지 못하니, 중외(中外)에서 모두 칭찬하였다. 사무의 경륜(經綸)은 그의 잘하는 바가 아니나,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감싸는 일념은 대개 명확하였다. 문학을 좋아하고 시(詩)에 능하였는데 시에는 원대(元代) 사람의 기풍이 있었다. 병을 얻어 말을 못한 지 4년 만에 졸하니, 상하가 모두 탄식하며 슬퍼하였다.

 

12월 19일 을해

박영원(朴永元)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2월 21일 정축

오는 정월 초하룻날의 진하(陳賀)를 3월 초이렛날로 물려서 정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2일 무인

도정(都政)을 시행하고, 하비(下批)하여 이가우(李嘉愚)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23일 기묘

희정당(熙政堂)에서 수령(守令)·변장(邊將)으로 처음 벼슬하는 사람들을 소견(召見)하였다.

 

12월 25일 신사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들을 명초(命招)하여 하교하기를,
"오늘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거두는 것은 당초 그 청을 애써 따를 때에 이미 작정했던 마음인데, 오늘까지 기다리느라 하루가 한 해 같았다. 주상(主上)의 춘추가 한창이고, 성학(聖學)이 숙성하여 번거로운 만기(萬機)에 응할 수 있으며, 내 당초의 마음을 성취할 수 있으니, 어찌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하니, 영부사(領府事) 이상황(李相璜)이 말하기를,
"주상 전하께서 춘추가 한창이고 성덕(聖德)이 진취하여 이제 친히 서정(庶政)을 총괄하셔야 할 것이므로, 자교(慈敎)가 여기에 미치셨습니다. 갑오년077)   망극한 때를 돌이켜 생각하며 오늘의 경사스러운 일을 보게 되니, 뭇사람이 몹시 기뻐하는 진정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때 뭇사람의 청에 애써 따르신 자청(慈聽)은 오로지 종사(宗社)를 위한 대계(大計)이고, 오늘 뭇사람에게 크게 펴신 자교는 천지의 상경(常經)이니, 공경히 칭송하여 마음을 모아 경축하며 다시 아뢸 만한 다른 말이 없습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박종훈(朴宗薰)과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 번갈아 우러러 찬송하는 뜻을 아뢰었다. 이상황 등이 또 말하기를,
"신(臣)들이 오래 자육(慈育)하신 은혜를 입어 번번이 등연(登筵)하였을 때에 염유(簾帷)가 위에 있어 가까이 가르침을 받고 몸소 경계를 받은 것이 마치 어린 아이가 자모(慈母)를 의지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제부터 궁위(宮闈)가 엄밀(嚴密)하여 전일처럼 매우 가까이할 수 없을 것이니, 아랫사람의 뜻에 잊지 않고 맺히는 것을 어떻게 이루 아뢸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신은 오히려 어린 나이인데 어떻게 친히 만기를 총괄하겠습니까? 이 하교는 받들 도리가 없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내 뜻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데, 더구나 이러한 경법(經法)의 일이겠소? 내가 주상에게 바라는 것은 어찌 다른 도리가 있겠소? 오직 요(堯)가 되고 순(舜)이 되는 것일 뿐이오. 주상이 내 뜻에 따르는 것도 다른 도리가 아니라, 오직 요가 되고 순이 되는 것일 뿐이오. 이렇게 하면 내게는 여한이 없을 것이니, 이것을 힘쓰시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주상이 대내(大內)에서 여러 번 나에게 말하여 이 일을 말리려 하였으나, 이 어찌 내가 인순(因循)할 때이겠는가?"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자교가 이러하시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상황 등이 말하기를,
"자전의 하교는 천지의 상경입니다. 전하의 보령(寶齡)이 어린 나이가 아니니, 자념(慈念)을 우러러 본받고 군정(群情)에 굽어 따르소서. 이는 국가의 큰 경사이니 다시 아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조인영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내리신 자교 가운데에 이미 성덕(聖德)을 힘쓰기 바란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대내에서 또한 어찌 보도(補道)하실 방도가 없겠습니까? 이제 서무(庶務)를 친히 총괄하시더라도 혹 미처 밝게 익히지 못하신 것이 있을까 염려되면, 우리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 동조(東朝)에서 수양하시게 된 뒤에라도 일이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면 어찌 차마 잊으시겠습니까? 이제부터 늘 이끌어 가르치시는 것이 곧 신의 구구한 소망입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내 식견이 미칠 수 있다면 우리 집 일을 어찌 사양하려 하겠는가마는, 내가 이미 병이 있고 또 오래 손상되어 정신이 늘 미치지 못할 것을 염려한다. 대전(大殿)께서 온갖 일에 숙성하고, 예전에는 믿을 바가 있을 수 있었겠으나 이제는 당신이 담당할 것이니, 앞으로 절로 익숙하여지실 것이다."
하였다. 조인영이 말하기를,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전하께서 7년 동안이나 잠자코 성취되기를 기다리셨으므로, 점점 익숙해지시겠습니다마는, 보령이 아직 많지 않으시니 열조(列朝)의 옛일과 백성의 괴로움을 어떻게 죄다 잘 아시겠습니까? 보도하는 방도는 오로지 자성 전하께 우러러 바랄 것입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이제 수렴 청정을 거둔 후에는 다시 경들을 대하지 않을 것이니, 모든 성궁(聖躬)을 보도하는 도리에 대해서는 경들이 반드시 더욱 더 염려해야 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예전부터 후비(后妃)가 조정(朝政)에 임청(臨聽)하는 것은 나라의 큰 불행이다. 미망인이 매우 불행한 사람으로서 매우 불행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 7년이나 오래 되었다. 스스로 덕이 없고 식견이 얕은 것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예전의 명철한 후비와 우리 열조의 성모(聖母)의 일에 방불하겠는가마는, 천지 망극한 때를 당하여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며 청하고 나도 눈물을 흘리며 윤허하였었으니, 실로 만부득이하여 구차하게 유지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5, 6년 이래로 흉년이 잇따라 근심이 눈앞에 가득하고, 폐단이 날로 심해져서 온갖 법도가 다 어지러웠으나, 안팎 할 것 없이 수습할 수 없었으니, 이는 모두 내가 덕이 없는데도 무릅쓰고 감당하지 못할 무거운 임무를 맡았기 대문이었다. 위로 천심(天心)을 잘 받들지 못하고 아래로 세도(世道)를 떨칠 수 없어서 점점 발전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떨리고 두렵지 않겠는가? 내가 애써 따른 당초부터 이미 정한 바가 있었으니 이 해를 넘기지 않는 것이었고, 밤낮으로 바라던 것은 주상이 성취하는 데에 있었을 뿐이다. 이제는 춘추가 이미 한창이거니와, 성질(聖質)을 타고나서 예지(睿智)가 날로 성취하여 만기를 총괄해서 서정을 친히 다스릴 수 있으니, 이는 참으로 종사와 신민의 막대한 경사이다. 주상은 내 뜻이 정해진 것을 알고 누누이 말렸는데, 정리(情理)로 사양하는 뜻이 매우 슬프기는 하나, 권도(權道)는 한때의 방편이고 경상(經常)은 만세의 법칙이니, 내가 어찌 지극한 정성에 얽매어 한결같이 애써 따르며 국체(國體)를 빨리 바로잡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어진이를 가까이하여 우리 선왕의 가법(家法)을 지키기를 주상은 힘쓰시오. 서로 공경하고 화합해서 임금을 허물이 없도록 인도하여 우리 나라의 영구한 큰 사업을 돕기를 대신과 제신에게 깊이 바란다. 오늘부터 수렴 청정을 거둔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제 이미 수렴 청정을 거두었으니, 모든 공사(公事)를 들이지 말라."
하였는데, 조인영이 아뢰기를,
"우리 자성 전하께서 임청(臨聽)하신 7년 동안 우리 성궁을 보호하고 우리 서무에 부지런하여 우리 철류(綴旒)078)  의 국세(國勢)를 반석·태산처럼 공고하게 하시고, 신음하는 민생을 잠자리처럼 편안하게 하셨는데, 이제 와서는 주상께서 보령이 한창이시므로 수렴 청정을 거두신다는 분부를 내리시니, 광명(光明)하고 정대(正大)함이 천고에 뛰어나십니다. 이제 번거로운 만기를 벗어나 천승(千乘)의 나라의 봉양을 받게 되셨는데, 공(功)은 더 없이 두텁고 덕(德)은 더 없이 크시니, 무릇 옥에 새기고 이금(泥金)으로 적어 아름다움을 드날리고 공렬(功烈)을 밝히는 방도는 신들이 이 뒤에 우러러 청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드문 방경(邦慶)을 위에 고하고 아래에 선포하며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陳賀)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삼가 선조(先朝) 계해년079)  의 전례에 따라 해조(該曹)로 하여금 날을 가려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26일 임오

희정당(熙政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모림(母臨)하신 지 40년이 되는 것을 경축하고 진하(陳賀)하는 것은 오는 3월 7일로 정하였습니다마는, 서정(庶政)을 친히 총괄하시고 동조(東朝)에서 봉양받으시는 것을 경축하고 진하하는 것도 함께 마련하라는 일을 명하셨습니다. 경사의 이름을 ‘친총서정 양륭장락 대왕 대비 모림사십년(親摠庶政養隆長樂大王大妃母臨四十年)’이라 하여 두 경사의 칭호를 합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27일 계미

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12월 28일 갑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감제(柑製)080)  를 설행(設行)하였다. 부(賦)에 으뜸을 차지한 이현공(李玄功)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12월 29일 을유

희정당에서 소대하고, 입격(入格)한 유생(儒生)을 소견(召見)하였다.

 

12월 30일 병술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치사 봉조하(議政府領議政致仕奉朝賀) 남공철(南公轍)이 졸서(卒逝)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듣건대, 원로(元老)가 장서(長逝)하였다 하니, 참으로 몹시 슬프다. 이 대신(大臣)은 단정하고 성실하며 화락하고 부드러운 모습과 온화하고 순수하며 청렴하고 근신한 절조가 있는데다가 학술이 깊고 순수하며 문장이 바르고 우아하다. 능히 그 집의 아름다움을 이어받아 일찍이 정조(正祖)의 사랑을 받았고, 순조(純祖)께서 즉위하신 처음부터 나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보도(輔導)하는 책무를 맡아 그 공로가 컸으니, 묘당(廟堂)에서 도운 노고뿐이 아니다. 더구나 치사(致仕)한 뒤로 나이가 높고 덕이 밝아서 우뚝하기가 마치 영광(靈光)이 있는 듯하였는데, 이제는 끝났다. 졸한 남 봉조하 집에 동원 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그리고 사자(嗣子)가 복을 벗거든 등용하고, 녹봉(祿俸)을 3년 동안 실어 보낼 것이며,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장사하기 전에 시호(諡號)를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남공철의 자(字)는 원평(元平)인데, 키가 크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문장을 잘하였는데 흔히 구양수(歐陽修)를 표준 삼았으며, 기가 약하여 힘이 모자랐으나 그 풍신(風神)이 화창한 부분은 가끔 닮았다. 문형(文衡)을 맡아 여러 번 공거(貢擧)를 맡았으나 뇌물이 행해지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전후 10여 년 동안에 당시의 젊은이들에 관계되는 일을 넉넉히 앉아서 진정시켰고, 진퇴하고 주대(奏對)하는 데에 본받을 만한 것이 있으므로, 조정의 진신(縉紳)이 다 칭찬하였다. 졸한 때의 나이가 81세이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라 감사 이목연(李穆淵)의 장계(狀啓)를 보았더니, 제주 목사 구재룡(具載龍)의 첩정(牒呈)에 이르기를, ‘대정현(大靜縣) 모슬포(墓瑟浦) 가파도(加波島)에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 2척이 와서 정박하여 감히 포를 쏘고 소를 겁탈하는 변까지 있다.’ 하고, 이어서 현감(縣監)을 파출(罷黜)하고 나처(拿處)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오랑캐의 배가 바다에 출몰하는 것은 본디 교활한 버릇이니, 오랫동안 해이해진 해졸(海卒) 때문에 어모(禦侮)를 튼튼히 하라고 책망하기 어렵다 하나, 온 섬의 포항(浦港)이 다 사변에 대비하는 중지(重地)에 관계되므로, 경비하는 방도를 본디 충분히 규찰(糾察)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저들은 40여 인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하여 먼저 스스로 두려워하여 달아나기에 겨를이 없기까지 하겠습니까? 변정(邊情)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해당 목사 구재룡을 파출하고 나처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경조(京兆)에서 민수(民數)를 아뢰었다. 경외(京外)를 모두 합한 원호(元戶)가 1백 56만 7백 74호인데, 남자는 3백 30만 8천 12구(口)이고, 여자는 3백 30만 9천 9백 85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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