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6권 순조4년 1804년 6월

싸라리리 2025. 6. 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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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무오

숙선 옹주(淑善翁主)의 길례(吉禮) 때 주혼(主婚)이었던 안춘군(安春君) 이융(李烿)에게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고, 당상 이하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베풀었다. 도청(都廳) 이호민(李好敏)에게는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추국하였다.

 

6월 2일 기미

추국하였다.

 

6월 4일 신유

추국하였다.

 

오의상(吳毅常)을 평안도 절도사로 삼았다.

 

6월 5일 임술

추국하였다.

 

6월 6일 계해

내각(內閣)에 명하여 화령전(華寧殿)에 응당 행해야 할 절목(節目)을 개정(改定)하게 하였다. 수원 유수(水原留守) 조대윤(曹大允)이 ‘창시(創始)하던 초기에 조례(條例)가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니, 삼가 영희전(永禧殿)·장녕전(長寧殿)의 의식(儀式)을 상고하여 원본(原本) 가운데서 번문(繁文)을 줄이고 조건(條件)을 첨가해 넣어 상식(常式)으로 만드소서.’라고 아뢰었기 때문이다.

 

추국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죄인 권유(權裕)가 물고(物故)하였다고 아뢰었다.

 

6월 7일 갑자

헌납 김회연(金會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역적 권유(權裕)의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연전의 한 상소는 뜻과 의도가 음험·참혹하고 베포한 것이 흉악·궤휼하여 오로지 대혼(大婚)을 훼방하고 선조(先朝)에 배치(背馳)될 것만을 꾀하였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대개 국혼(國婚)이 이미 정해진 초기에 일종의 불령한 무리들이 몰래 시기·질투하는 마음을 품고는 반드시 저지·실패시키고자 헐뜯는 의논이 분분하고 이설(異說)이 횡행하더니, 필경에는 역적 권유의 상소가 나오고야 말았습니다. 아! 선대왕(先大王)께서 처음 간택(揀擇)하던 날 이미 ‘이제 바야흐로 충현(忠賢)의 집안에다 정혼(定婚)하였으니, 심히 기쁘다.’고 하교하시자, 그때 입시(入侍)했던 여러 신하들이 우러러 경하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재간택(再揀擇)하던 날이 되자 여러 의위(儀衛)를 갖추어 성의(聖意)가 굳게 정해졌음을 보이셨으니,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크건 작건 누군들 알지 못하고 듣지 못했겠습니까? 이때에 이르러 저 무리들이 비록 심히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감히 입으로 발설하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선대왕의 일월 같은 밝음과 뇌정(雷霆) 같은 위엄이 저 교화를 따르지 않는 무리로 하여금 스스로 그 간계(奸計)를 꾸미고 그 화심(禍心)을 드러내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용어(龍馭)가 하늘로 올라감에 미쳐 선침(仙寢)이 채 식기도 전에 이에 감히 점차 흉악한 세력을 펼치고 곧 패려한 음모를 마음대로 꾸며 본원(本源)을 쳐서 흔들고 대의를 꺾어 실패시킬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는 실로 선조(先朝)의 역신(逆臣)이고 단지 전하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며, 또 실로 종사(宗社)의 죄인이고 단지 선조의 역신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다행하게도 성토를 능히 거행하게 되고 국문하는 일이 막 시작되자 역적 권유의 사나움과 마음의 심히 어긋남으로 말미암아 형장(刑杖)을 참으며 입을 다물고 있으니, 배나 흉완(凶頑)하였습니다. 말의 단서를 잠시 토설하다가도 다그쳐 물으면 곧 흐릿하게 뭉개버리며 사정(辭情)이 이미 꺾였으나 자복을 바치는 것을 굳게 버텼습니다. 단서를 핵실(覈實)하지 못하여 놀라움과 통분스러움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던 차에 왕법(王法)을 채 더하기도 전에 귀신의 주벌(誅罰)이 먼저 미쳤으니, 여정(輿情)의 분노가 이에 이르러 더욱 절실하여졌습니다. 흉역(凶逆)이 이 역적과 같은데도, 어찌 결안(結案)하지 않았다 하여 마땅히 베풀어야 할 율(律)을 베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해당되는 율을 추가로 베풀어 신민의 분을 씻게 하고 현재 있는 여러 죄수 또한 따로 엄하게 국문을 더하여 명백히 핵실하고 통렬히 징계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윤상규(尹尙圭)가 상소하여 역적 권유(權裕)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고 집을 부수며 여러 아들에게는 연좌율을 적용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옥당(玉堂) 【교리 박종정(朴宗正)·홍석주(洪奭周), 부교리 이회상(李晦祥), 수찬 임후상(任厚常)·신서(申漵), 부수찬 민사선(閔師宣)이다.】 에서 연명 차자(聯名剳子)로 역적 권유에게 노적률(孥籍律)을 베풀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추국하였다.

 

6월 8일 을축

이문회(李文會)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추국하였다.

 

6월 9일 병인

사헌부 【집의 홍수호(洪受浩)이다.】 에서 아뢰기를,
"아! 통탄스럽습니다. 역적 권유의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신유년(辛酉年)099)   여름에 올린 한 통의 상소는 흉악함을 내포하고 화(禍)를 쌓아 암암리에 효경(梟獍)의 뱃속을 드러내려 한 것이었으니, ‘도인(都人) 윤(尹)·길(姞)’ 등의 어구는 배포(排布)한 것이 음험·궤휼하였고, ‘곡돌 사신(曲突徙薪)’이니 하며 끌어다 견준 것은 지적하는 뜻이 흉측·참혹하였습니다. 이 한 단계로도 그 대혼(大婚)을 훼방놓으려는 흉측한 뱃속과 선왕께 배치(背馳)된 역절(逆節)이 여지없이 탄로되었습니다. 그가 오늘날 북면(北面)하는 신하로서 국운(國運)이 불행한 때를 타서 의란(疑亂)·형혹(熒惑)시키며 몰래 불령한 계책을 도모하고, 이런 일을 차마 하였으니 아! 또한 참혹한 일입니다. 난신(亂臣)·적자(賊子)가 상기(常紀)를 간범(干犯)하는 것이 옛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만, 어찌 이 역적처럼 지극히 흉악·패려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또 그가 바친 원사(爰辭)와 현착 문서(見捉文書)의 부도(不道)하고 불만스러워 한 말은 나오면 나올수록 더욱 흉측해져, ‘외조(外朝)에서는 알지 못한다.’는 말과 시구(詩句)에서 인용한 뜻에 이르러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그의 방조(傍祖)인 권필(權鞸) 때의 일로 스스로를 비유한 것은 더욱 얼마나 천지가 다하도록 없는 지극한 역절(逆節)이요 대죄(大罪)이겠습니까? 무릇 횡목(橫目)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라면 뼈가 떨리고 쓸개가 울렁거리지 않는 이가 없어 곧장 손으로 찢고 입으로 씹으려 하였는데, 타고난 천성이 사납고 사특하여 형장(刑杖)을 참으며 끝까지 버텨 왕법(王法)을 채 펴기 전에 귀신의 주벌(誅罰)이 먼저 미쳤으니, 신인(神人)의 분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아! 원소(原疏)의 음험·참독함에서 역적의 뱃속을 가리기 어렵고, 국초(鞫招)의 흉측·참혹함에서 단안(斷案)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한(漢)나라 법의 불경률(不敬律)과 《춘추(春秋)》무장(無將)100)  의 죽임은 바로 이런 역적을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흉역(凶逆)이 이 역적과 같은데, 어찌 미처 결안(結案)하지 않았다 하여 마땅히 베풀어야 할 율(律)을 베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꿇어앉히고 참(斬)하는 형(刑)을 비록 미처 시원하게 거행하지는 못하였습니다만, 노적률(孥籍律)은 결코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청컨대 물고(物故)한 죄인 권유에게 빨리 노적률의 형전을 베푸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추국하였다.

 

6월 10일 정묘

대사간 이문회(李文會)·지평 이윤겸(李允謙) 등이 상소하여 역적 권유에게 추가로 율(律)을 베풀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추국하였다.

 

6월 11일 무진

추국하였다.

 

6월 13일 경오

경기·해서에서 진휼(賑恤)을 끝마쳤다. 【경기 통진(通津) 등 다섯 읍진(邑鎭)의 기민(饑民)이 3만 3천 9백 78구(口), 진휼 곡식이 3천 1백 70석 영(零)이었고, 해서는 연안(延安)·배천(白川) 두 읍의 기민이 5만 6천 4백 95구, 진휼 곡식이 2천 6백 70석 영이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482면
【분류】구휼(救恤)

 

6월 14일 신미

추국하였다.

 

6월 15일 임신

추국하였다.

 

조윤대(曹允大)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6월 16일 계유

이경일(李敬一)을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로 삼았다.

 

6월 17일 갑술

월식(月食)하였다. 【자정(子正)부터 인시(寅時) 초에까지 9분(分) 2초(秒)를 먹었다. 처음에는 동북쪽이 이지러졌는데, 식(食)이 정북(正北)쪽으로 심해졌다가 다시 서북쪽으로 둥그렇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482면
【분류】과학-천기(天氣)

 

6월 19일 병자

차대(次對)하였다.

 

6월 20일 정축

추국하였다.

 

6월 21일 무인

평양 등 4읍의 물에 떠내려간 민가(民家) 3백 67호에 따로 휼전(恤典)을 베풀라 명하였다.

 

추국하였다.

 

6월 22일 기묘

추국하였다.

 

양사(兩司) 【대사간 이문회(李文會), 집의 홍수호(洪受浩), 장령 윤상규(尹尙圭)·강휘옥(姜彙鈺), 헌납 김회연(金會淵)이다.】 에서 연명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죄인 심노현(沈魯賢)이 동참한 정절(情節)을 그가 이미 승복하였고 이미 결안(結案)을 받았으니 이번에 지정률(知情律)로 감한 것은 아는 바로 전에 없던 예(例)입니다. 더구나 문안(文案)이 내려지지 아니하여 부대시(不待時)101)  의 형법(刑法)으로 하여금 며칠이 지나도록 거행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이 어찌 실형(失刑)한 가운데서 또 국체(鞫體)를 크게 잃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죄인 심노현의 율을 애초의 결안(結案)에 의거해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심노현의 일은 저앙(低仰)하려는 것이 아니다. 흠휼(欽恤)102)  하는 도리에 있어서 바야흐로 다시 옥사(獄事)를 안찰(按察)했던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고 처리하려고 한다."
하였다.

 

6월 23일 경진

좌의정 이시수(李時秀)와 우의정 김관주(金觀柱) 및 연명 상소하였으나 채 비답을 받지 못했던 전 양사(兩司)의 여러 대신(臺臣)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전(慈殿)께서 경 등에게 하교하실 것이 있어 지금 바야흐로 수렴(垂簾)하고 계신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수렴이야말로 얼마나 막중·막대한 일입니까? 경신년103)  에 천붕(天崩)한 초기에 신 등이 울며 우러러 청하였더니, 자성(慈聖)께서도 울며 억지로 따르셨습니다. 그리하여 4년 동안 종사(宗社)를 안정시키시고 성궁(聖躬)을 보호하셨으니, 자성의 덕과 공은 천고에 탁월하십니다. 그리고 작년 겨울 신 등을 특별히 부르셨을 적에는 환히 유시하시고 철렴(撤簾)하셨으니, 그 광명 정대함은 백세(百世)가 지난 뒤라도 할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너무나도 예사롭지 아니한 일이 있습니다. 신은 하교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오나, 주상께 하교하셨다면 주상께서 스스로 신 등에게 널리 유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일을 간책(簡策)에 쓰고 팔방에 반포한다면 자성의 덕에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즉시 도달(導達)104)  하시어 빨리 수렴의 명을 정침(停寢)토록 하소서."
하고, 김관주의 아룀도 대략 같았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수렴의 중대함을 알지 못하랴? 그리고 또한 어찌 철렴한 뒤에 다시 이런 일을 하랴? 옛날 우리 명성 대비(明聖大妃)105)  께서 사친(私親)의 일 때문에 또한 이런 일이 있었으니, 그때는 뭇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사류(士類)를 몰아내고 있었는지라 대비께서 또한 부득이 수렴하셨던 것이다. 국조(國朝)에 이미 이런 전례가 있으니,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 행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내 지식이 없는 일개 부인으로서 겸하여 병까지 많으니, 조정의 일을 어찌 참여해 알 수 있겠는가? 지난번 국가의 위의(危疑)를 당하여서는 국조(國朝)의 옛 전례를 준행하여 힘써 따르도록 노력해 왔다. 주상의 보령(寶齡)이 이제 15세가 되었고 예덕(睿德)이 일찍 성취되어 직접 만기(萬機)를 총괄하고 있다. 이와 같은데, 내 어찌 철렴하지 않으랴? 차후로의 일은 전적으로 뭇 신하들이 잘 보도(輔導)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어찌 나랏일에 대해 대충대충 보고만 있으랴? 조정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나는 진실로 계획을 세워 한 바도 없지만 또한 지나친 잘못도 없는데, 매번 사단이 있을 때마다 곧 나를 들어 말하고 있으니, 지금 조정의 모양은 선왕의 의리와 모두 흐릿해지고 있다. 근자에 듣건대, 양사의 연명 상소에 ‘10월에는 길함이 없어 삼간택(三揀擇)을 하지 않는다.’는 구어(句語)가 있었으나 성명을 노출시키지는 않았다 하고, 이른바 ‘일관(日官)을 끼고 장차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것도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그러나 대간의 상소에서 아무리 노출시키지 않았다 할지라도 외간에서 지목하며 말을 자자하게 전하고 있으며, 나 또한 얻어들은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니 이미 지적한 사람이 있다면 어찌하여 솔직하게 진달하지 않고 모호하게 덜어 숨겨 그 의혹을 불어나게 하는가? 옛날 명성 대비 때 주상께서 춘추가 한창이셨으나 그래도 품지(稟旨)한 뒤에 행하셨다. 지금 우리 주상도 또한 반드시 일에 따라 나에게 품정(稟定)하고 있으니, 지금 나의 일이 어찌 조정의 정무(政務)에 간예하고 권세를 전행(專行)하고자 하는 계책이겠는가? 또한 어찌 아무 일 없이 수렴하는 것을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겠는가? 대간의 상소가 명백하게 말하지 아니하여 한갓 말만 시끄러운 상황을 불러 일으키기에 한번 불러 묻고 심중에 있는 분을 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대간의 상소에 말한 바는 신이 원본(原本)을 보지 못했기에 쓴 말이 어떠한 것인지 지적한 바가 누구인지를 감히 상세히 알지 못하나, 옛날 명성 대비 때에는 흉도(凶徒)들이 근종(近宗)을 끼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는 것을 도모하여 그 기미가 심히 급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이런 예사롭지 아니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자전께서 하교하시고자 하는 일을 만약 전하께서 세 번 문안 인사를 드릴 즈음에 조용히 상세하게 알려주셨다면, 전하께서 반드시 마땅히 자교(慈敎)를 선포하여 마땅히 죄주어야 할 사람을 엄하게 처분하셨을 것입니다. 이미 철렴한 뒤 매번 한 가지 일이 있을 적마다 또 다시 수렴한다면, 어찌 자전의 덕에 크게 관계됨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은 자성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폐부에 새겨 두고 있으니, 눈으로 자성의 덕에 장애가 있음을 보고도 사실대로 고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자성의 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앙품(仰稟)하여 속히 도로 정침토록 하소서."
하고, 김관주의 아룀 또한 같았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대저 대간이 이미 말한 바가 있다면 명백하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공덕이 없는 사람이라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반드시 나를 들어 말하니, 크게 놀라고 분하게 여길 바로다. 경신년106)   후로 내가 나랏일을 직접 담당하였다. 비록 여항(閭巷) 사이의 일로 말할지라도 집안일에는 반드시 가장이 있어 주장하는 법인데, 지금 주장한 사람은 나이니, 내가 홀로 담당한 일로 이런 해괴한 말을 들으니, 그 분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무슨 말씀인들 품하지 않겠으며, 자성께서 또한 무슨 말씀인들 다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자성의 하교를 신 등에게 선포하신다면 그 말의 허실이야 어찌 조사해 낼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대간의 상소는 또 조항진(趙恒鎭)의 일을 논하며 조항진을 처분한 전교(傳敎)까지 제기해 언급했는데, 조항진은 존호(尊號)의 일로 선류(善類)를 해치고자 하였으므로 이 처분이 있었던 것이며, 주상 또한 이미 처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이것을 말하니, 어찌 말이 되겠는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이것은 비답을 받은 상소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대의(大意)만을 들었고 전편(全篇)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대신(臺臣)의 말이 과연 잘못이라면 이것은 바로 인신(人臣)의 극죄(極罪)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뜻을 도달(導達)하시되 만약 죄줄 만한 것이 있으면 위에서 처분하시기를 천만번 옹축(顒祝)합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옛날 선인 태후(宣仁太后)107)  는 만세(萬歲) 뒤에 군소배(群小輩)가 비로소 허구 날조하고 속이며 핍박하는 계책을 내었다. 지금 나는 한 가닥 숨이 아직도 붙어 있으나 남은 해가 많지 않은데, 쇠모(衰暮)한 노경에 이런 해괴한 말을 들었는지라, 한번 나의 분한 심정을 죄다 유시하고, 또한 주상이 처분하는 일을 참여해 듣고자 하여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어찌 나 자신으로부터 처분하는 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경 등은 시험삼아 생각해 보라. 선왕의 큰 의리가 장차 이런 무리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 것이고, 침척(侵斥)과 무핍(誣逼)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군신(君臣) 상하가 마음을 함께 하여 협찬(協贊)하는 도리이겠는가? 주상이 어찌 저쪽이나 이쪽에 대해 애증(愛憎)이 있으랴마는, 인심과 세도가 이런 극도의 지경에 이르렀다. 경 등은 나의 오늘의 거조(擧措)를 실덕(失德)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비록 분통스런 일이 있다 해도 또한 한마디 말도 발설할 수 없다는 것인가? 선조(先朝) 때는 나 또한 일찍이 언교(諺敎)가 있었다. 참으로 경 등의 말과 같다면, 언교 또한 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그때의 언교는 신 또한 일찍이 삼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처분하실 일이 있다면 비록 언교가 없다 하더라도 성상께서 어찌 처분하지 아니하시겠습니까?"
하고, 김관주는 말하기를,
"삼가 오늘의 거조를 보건대, 자충(慈衷)이 절실히 분해 하시는 바를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렴은 어리석은 신이 사죄(死罪)를 범한다 할지라도 적이 성려(聖慮)가 주밀(周密)하게 생각하시는 데 미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의 근 30년 동안 지성으로 고심한 것이 오로지 의리를 부식(扶植)하는 데 있었으니, 오늘날을 위하는 도리는 진실로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고 선왕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 인심이 점차 옛날만 못하여 대신(臺臣)의 토죄(討罪)를 청하는 글에 성명을 노출시키지 않고 가리어 숨기고 말하니,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할 것인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자성께서 이미 이 일이 과중함을 아신다면 즉시 회오(回悟)하심이 마땅하며, 만약 처분하실 것이 있으면 전하께서 품지(稟旨)하여 처분함이 실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철렴할 때 어찌 ‘큰 형정(刑政)은 참여해 듣겠다.’고 하교하지 않았던가? 나의 이 일을 그릇되었다 여기니, 나의 실덕(失德)을 내가 스스로 아노라. 이것은 내가 스스로 감당하겠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어찌 다만 큰 형정뿐이겠습니까? 비록 미세한 일이라 할지라도 전하께서 안에서 우러러 자성께 고하시고, 자성께서 전하를 협찬(協贊)하신다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길래, 수렴하여 신 등을 대하시어 이런 하교까지 내리시는 것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어떠한 거조이겠습니까? 실덕을 스스로 감당하시겠다는 하교는, 신 등이 우리 자성을 섬긴 지 몇 년인데, 어찌 이와 같은 하교를 받들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즉시 속히 도로 정침(停寢)하심이 자성의 공덕에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뜻을 도달(導達)하시어 멀지 아니하여 복구[不遠復]하시는 도리108)  로 삼으소서."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내 무슨 공덕이 있으랴? ‘공덕’ 두 글자는 거짓말로 나를 속이는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신 등이 비록 지극히 무상(無狀)하나 대신의 직임을 더럽히고 있으면서 면전에서 ‘거짓말’이란 엄한 하교를 받자오니, 두렵고 떨려 진달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마땅히 나가 부월(鈇鉞)의 주벌(誅罰)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은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는가? 앞으로 나아오면 마땅히 다시 하교함이 있을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나아가 엎드렸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지식이 없어서 3, 4년 안에 한 가지도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없었다. 단지 망극한 가운데 선왕의 성헌(成憲)을 준행하여 끌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일컬을 만한 공덕이 없었으므로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소신(小臣)은 이제 엎드려 ‘거짓말’이란 하교를 받았습니다. 남의 신하가 되어 이런 죄범(罪犯)이 있고서, 어찌 일각인들 천지 사이에서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나의 실덕은 견식(見識)이 없는 소치가 아님이 없다. 본정(本情)을 죄다 말하느라 언사(言辭)가 이와 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일로 나를 꺾어 누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수렴한 일을 사책(史策)에 쓴다면 진실로 마땅히 나의 죄과(罪過)가 될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신이 또 이런 하교를 받으니, 남의 신하가 되어 즉시 죽어 없어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고, 김관주가 말하기를,
"신은 진실로 너무나도 황송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교하시는 사이에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조용한 마음으로 찬찬히 살펴보고 조용하게 도리를 말씀하셔도 무슨 불가할 것이 있길래 곧 이처럼 너무나도 과중한 거조를 하시는 것입니까?"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견식이 없어 실언한 것이다. 그러니 경은 이것을 가지고 인죄(引罪)할 것이 없다. 지금 세도(世道)를 돌아보건대 단지 두 대신만이 있을 뿐이니, 어찌하여 이처럼 지나치게 인죄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이런 죄명(罪名)을 졌으니, 어찌 감히 다시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만, 구구하게 충성을 바치기를 원하는 정성을 끝내 누르기 어렵습니다. 이번의 예사롭지 않은 일을 어찌 오랫동안 다시 정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비록 심히 무상하나, 혹 털끝만큼이라도 자성의 덕에 비평한 것이 있다면, 눈을 밝게 뜨고 성토함을 어찌 혹 한 시각인들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번의 일은 진실로 너무나도 예사롭지 아니한 것이니, 도로 정침하는 것이 한시가 급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마음을 돌리도록 힘써 하소서."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경 등은 이미 나의 말을 옳지 않다 하고, 또 사단을 만들어 내고자 반드시 인구(引咎)하려고 하니, 진실로 몹시 개탄스럽다. 차후로는 만약 말할 만한 일이 있으면 마땅히 언교(諺敎)를 써서 내릴 것이며 나는 들어가겠다."
하고, 드디어 문을 닫으니, 이시수는 말하기를,
"오래지 아니하여 복구하시는 자성의 덕이야말로 신은 이루 다 흠앙(欽仰)할 수 없습니다. 신이 비록 무사(無似)하오나, 대신의 이름을 띠고 있는데 삼가 두 구절의 엄한 하교를 받았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스스로 세상에 서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엄한 주벌(誅罰)을 내리시어 신하의 분수를 바로잡게 하소서."
하고, 김관주는 말하기를,
"자성께서 하교를 내리시매 황공하여 몸이 떨릴 뿐입니다. 신은 좌상과 더불어 실로 다름이 없으니, 신 또한 마땅히 물러나 엄한 주벌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 대간 이기경(李基慶) 등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연명 상소는 대단한 실수였다. 차후로는 아무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명백하게 말하여 이런 상소처럼 말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니, 이기경 등이 말하기를,
"신의 연명 상소 가운데서 윗 조항의 구어(句語)는 길거리의 전문(傳聞)이 아니고, 곧 유생이 현관(賢關)109)  에 써 보낸 글입니다. 그리고 아랫 조항에 운운한 바는 조항진(趙恒鎭)에 대한 처분이 과중하였음을 이른 것이 아닙니다. 대개 장석윤(張錫胤)의 상소에 은연중에 언뜻 비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른바 ‘궐전(闕典)’ 운운한 것으로 보아 조항진이 어찌 전혀 죄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좌의정 이시수와 우의정 김관주가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죄(待罪)하니, 사관(史官)을 보내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좌의정 이시수와 우의정 김관주가 도성 밖으로 나가니, 사관을 보내어 다시 돈유하게 하였다.

 

6월 24일 신사

이에 앞서 5월 21일에 집의 이기경(李基慶), 사간 이동식(李東埴), 장령 권한위(權漢緯), 지평 홍시보(洪時溥), 정언 문약연(文躍淵)·윤효관(尹孝寬) 등이 연명 상소하기를,
"신 등의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저 일은 윤상(倫常)에 관계되고 죄가 악역(惡逆)을 범한 것이 권유(權裕)와 같은 자가 있는데도, 분(憤)을 간직하고 억울함을 삼킨 채 거의 마치 누설될까 두려워한 것이 이제 이미 4년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간장(諫長)의 피를 부리는 듯한 진장(陳章)으로 인해 우러러 천청(天聽)을 감동시켜 흉적의 소굴을 타파할 시기가 있게 되었고, 대의(大義)를 펼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하였으니, 신들 또한 어찌 끝내 잠자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 통탄스럽습니다. 흉역(凶逆)의 일어남이 옛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만, 윤리와 의리를 무너뜨리고 명분과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며 몰래 무군(無君)의 마음을 쌓아 제멋대로 부도(不道)한 말을 발설한 자로서 어찌 역적 권유와 같은 자가 있었겠습니까? 목욕(沐浴)의 의리110)  를 가탁해 몰래 현혹시키는 계책을 꾸미고자, 종이 가득 나열한 것이 마치 여러 역적들을 성토하는 데서 나온 것 같았지만, 전편의 맥락은 모두 선왕께 배치되는 데로 돌아갔으니, 아! 또한 속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짓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못된 입과 독한 혓바닥으로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림이 없이 어슴푸레하게 은연중 내비치면서 반복해 말하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처를 무릇 누가 알지 못했겠습니까? 처음에 교목 세가(喬木世家)의 후예임을 말하되 순욱(旬彧)111)  이 한(漢)나라를 잊었음에 견준 것은 가리키는 뜻에 소속처가 있었고, 혹은 그를 동량(棟梁)으로 맡길 만하다 일컬으면서 하순(賀循)이 진(晉)나라로 돌아간 것112)  에 비한 것은 어법(語法)을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도인(都人) 윤(尹)·길(姞)’ 등의 구절에 이르러서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발설하여 손과 발이 노출되는 것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에 앞서 곡돌(曲突)의 경계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사신(徙薪)’이란 무엇을 가리킨 것이며, ‘뒷날을 염려하여 이시(羸豕)113)  의 분변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일찍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방도입니까? 이미 ‘만약 채납(採納)을 받는다면 편안할 때 위급함을 잊지 않는 도리가 됨에 해롭지 않을 것이라’ 하고는 마침내 ‘기미를 분변하고 그림자를 살펴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고 종결을 지었으니, 곧 이 몇 구절에서 그 흉모(凶謀)와 역절(逆節)이 여지없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가 아무리 흉완(凶頑)하다 할지라도 또한 일찍이 선왕의 조정에 북면(北面)했던 자인데, 어찌 감히 막중·막대한 일에 대해 이처럼 지극히 흉악·패려한 계책을 꾸며 마음속에 싹 틔우고 입 밖에 내며 심지어 장주(章奏)에 올리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더욱이 삼가 기억하건대, 경신년114)   2월에 비로소 초간택(初揀擇)을 행한 그 다음날 특별히 나아와 빈대(賓對)를 정할 것을 명하시고, 대혼(大婚)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명백하게 유시하셨으니, 아름다운 징조가 모인 바요, 대대로 덕을 기른 집안에서 길러진 바였습니다. 사교(辭敎)가 정성스러이 되풀이되어 기쁨이 팔방에 아름다이 흘러 넘치는지라, 심지어 기일을 미리 지정한 일까지 있었고, 신 등 또한 혹 연석(筵席)에 올라 받들어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어극(御極)하신 뒤에 이르러 비록 주량(舟梁)115)  의 의식은 미처 거행하지 못했지만, 중곤(中壼)의 자리는 이미 우러르는 바 있어, 신인(神人)의 부탁과 신민(臣民)의 바람은 진실로 육례(六禮)의 길일을 점치고 난 뒤를 기다리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반드시 우리의 대혼을 훼방놓고 우리의 이륜(彛倫)을 멸절(滅絶)시켜 우리 4백 년 종사(宗社)로 하여금 안정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지극히 흉악·패려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로 말미암아 인심은 함닉(陷溺)되고 세도(世道)는 물결처럼 흔들리어 ‘10월은 길하지 않다.’는 말로 일관(日官)을 사주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삼간택(三揀擇)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집에 효유한 사림(士林)이 있었으며, 심지어 장보(章甫)116)  가 현관(賢關)117)  에 글을 써서 보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그 당시의 일관을 일체로 엄하게 국문(鞫問)하여 ‘길함이 없다.’는 말의 뿌리를 명백하게 핵실(覈實)하고, ‘삼간택은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도 또한 반드시 창설(倡說)하고 전파한 자를 모두 철저히 핵실하여 정법(正法)함으로써 난의 근본을 제거토록 하소서. 역적 권유의 임술년118)  에 가볍게 찬배(竄配)된 것은 또한 이 죄가 공초(供招)를 궐한 데 관계되니,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곧 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율(律)을 더하자는 연계(連啓)야말로 그 중대함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니 현중조(玄重祚)·정언인(鄭彦仁)이 갑자기 정계(停啓)한 것은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었겠습니까? 오직 저 현중조는 곧 일개의 권유의 영향권 속에 있는 인물이었을 뿐이었으니 성기(聲氣)가 서로 연결되어 지시하고 시키면 곧 듣는 것이 그의 본래 본색(本色)이었습니다. 그리고 통탄하고 미워할 바는 초봄의 소어(疏語)가 지극히 섬홀(閃忽)하여 흐렸다 맑았다 그 시작과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으니, 성상의 비답 중 ‘너의 상소 또한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신 것은 그 귀역(鬼蜮)과 같은 정상을 이미 통촉하신 것입니다. 본래부터의 비호하는 버릇이 곧 기량을 이루어, 가는 곳곳마다 발로되어 손재간이 몹시 익숙하였으므로, 제마음대로 열고 닫으며 전적으로 뇌롱(牢籠)119)  만을 일삼았던 것이니, 그가 ‘주극(誅殛)하여도 비단 목전의 일에 이익됨이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말하기조차 어려운 화(禍)를 장차 또한 해결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이었던 것입니까? 난적(亂賊)을 주극하는데도 진실로 이익됨이 없고, 간악한 옥사(獄事)를 끝까지 다스리는데도 도리어 화와 근심을 초래한다면, 《춘추(春秋)》의 징토(懲討)의 의리와 조종(祖宗)의 관화(關和)120)  의 법은 장차 어디다 쓰겠습니까? 전날 정계(停啓)했던 것과 이번 봄에 투소(投疏)한 것은 곧 한 모양의 수단이니, 마땅히 동료 대간(臺諫)을 협박하고 흉억(胸臆)을 방자하게 한 것입니다. 비록 정언인으로 말할지라도 경중을 분변하지 아니하고 한갓 남의 입만 믿어 지론(持論)에 근본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연명하여 참여하는 데 이르렀으니, 전헌(典憲)121)  으로 고율(考律)하건대, 어찌 중률(重律)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당시 사헌부의 여러 대신(臺臣)들은 사헌부의 계사(啓辭)를 정지하거나 계속함에 있어 직분상 그 가부를 담당해야 하는데도, 나아가지 않았다 핑계하고 끝내 반박하여 바로잡는 일이 없었으니, 동료간에 옳고 그름을 쟁집(爭執)하는 의리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신 등은 김해부(金海府)에 찬배한 죄인 현중조에게 극변(極邊)으로 멀리 찬배하는 법을 더 베풀고, 정계(停啓)하였을 때 사헌부의 여러 대신에게도 모두 견책(譴責)·삭직(削職)의 법을 베푸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 등은 이 일에 대해 또 개탄하는 바 있습니다. 역적 권유의 흉악한 상소는 곧 사람들이 함께 주륙(誅戮)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성토한 사람이 다른 일로 인해 삭직(削職)되자 기회를 틈타 상소하여 은연중 내비추며 말하되 도리어 ‘간사한 싹이요, 역적의 담이라’ 하였으니, 이것이야 말로 어찌 살을 에이듯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조용히 깊이 생각하시고 확연히 건단(乾斷)122)  을 휘두르시어, 역적 권유가 국청(鞫廳)에 나아간 뒤 엄하게 핵실·소탕해 이륜(彛倫)을 높이고 세도(世道)를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소를 살펴보고 모두 다 알았다.’고 비답하였다.

 

하교하기를,
"양사(兩司)의 상소 구절 가운데서 ‘10월은 길함이 없다.’는 말은 이미 지적한 사람이 없어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비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제 자교(慈敎)가 내려진 후로 이 일을 심상하게 처리할 수는 없게 되었으니, 그 당시의 일관(日官)에 대해 국청(鞫廳)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 위관(委官)이 지금 한 사람도 없지만, 일은 지체시킬 수 없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와 엄하게 국문(鞫問)하여 공안(供案)을 초(草)하여 봉입(捧入)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소(臺疏)에 ‘유생이 현관(賢關)에 써서 보낸 것이라고’ 말하였다. 성균관으로 하여금 유생의 편지를 찾아 들이게 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가 언서(諺書)로 하교하기를,
"내가 철렴(撤簾)한 이후로 감히 조정의 크고 작은 일을 참여해 들을 수는 없지만, 국가의 안위나 음양·진퇴에 관계되는 일에 이르러서는 태평스레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전교(傳敎) 가운데 또한 펴보인 것이 있었으니, 조정 신하들은 거의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근래 듣자니, 권유(權裕)의 일로 대신(臺臣)이 진소(陳疏)하여 국문(鞫問)을 청하자 주상이 특별히 ‘아뢴 대로 하라.’는 비답을 내렸다고 한다. 주상의 재결(裁決)·판단하는 밝음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흠경(欽敬)의 지극함을 견딜 수 있으랴? 무릇 역적 권유의 흉참(凶慘)함에 누군들 분통해 하지 아니하랴마는, 이미 징토(懲討)를 거행하여 잡아다 국문하기에 이르렀다면 거의 정절(情節)을 엄하게 핵실하고 전형(典刑)을 시원하게 베풀었을 것이다. 며칠 간의 고신(拷訊)에도 한결같이 내내 흉완(凶頑)하게 굴며 끝까지 사정을 털어놓지 않다가 마침내 경폐(徑斃)할 줄을 어찌 뜻하였겠는가? 내가 이에 더욱 심히 분통스러워 하는 바이다. 내가 또 들으니, 근래에 여러 대신(臺臣)의 연명 상소가 있어 올린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비답을 아끼니, 그 말한 바의 일에 큰 관계의 까닭이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때문에 안에서 그 소본(疏本)을 구해 보았더니, 그중 몇 구절의 말은 과연 다 심상한 말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른바 ‘10월’ 운운한 것은, 이는 대혼(大婚)의 택일(擇日)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겪은 바로 상소의 말뜻에다 견주어 보았더니, 그 가리킨 바의 과녁이 역력하여 의심할 것 없이 판연히 나 자신을 핍박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으므로, 어제 거조(擧措)가 지극히 중난(重難)함을 알게 되어 오히려 빨리 서둘러서 여러 신하들에게 직접 유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어찌 내가 즐거워 한 것이겠는가? 실로 지극히 통박(痛迫)한 나머지 반드시 한번 드러내 한 세상의 의혹을 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주상이 특별히 ‘사체(事體)로 보아 말한 자의 까닭을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순문(詢問)하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으나, 나는 이미 그 가리키는 뜻을 알고 있었으니, 그 무리들이 비록 구차하게 숨긴다 한들 또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또 듣건대, 그 무리들이 다시 ‘유생의 통문(通文)’이라며 미루어 떠넘겼다 하는데, 이것은 더욱 절통(切痛)해 할 만하다. 다른 사람들이 비록 말을 하더라도, 그들이 만약 능히 명백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처럼 중대한 말을 어찌 가벼이 남의 말을 믿어 장주(章奏)에 올릴 수 있겠는가? 이것은 결코 이럴 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비록 일개 부인이기는 하지만, 그 무리들이 감히 속일 수 있는 일로 생각하여 속이려 든단 말인가? 내 마땅히 내가 알고 있는 바로 환히 유시하고 곧게 분변하리니, 실로 그 무리들이 명백하게 고함을 기다릴 것이 없을 것이다.
대개 임술년123)  에 가례(嘉禮)의 길일을 잡은 뒤, 내가 종사(宗社)를 위한 불안한 마음 때문에 능히 날짜에 흠이 없는지의 여부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었는지라, 우연히 이런 뜻으로 글을 써보내 김노충(金魯忠)에게 물었더니, 김노충이 ‘조금 전에 일관(日官)에게 갔더니 택일기(擇日記)를 가지고 와서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날이 크게 길하나 다만 달이 국구(國舅)에 방해됨이 있는 것이 흠이 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일방(日方)을 상고해 보았더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습니다만,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어 감히 다시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으므로, 내가 ‘국구에 방해되는 것은 또한 이 흠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여 그로 하여금 다시 일관에게 물어보게 하였다. 그래서 그가 과연 내 말대로 물었더니, 일관의 말이 ‘세전(歲前)의 10월 이후로는 다시 가합한 달이 없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사세로 보아 부득불 처음 택한 날을 쓰는 것 외에는 실로 변통(變通)할 도리가 없고, 또 생각하건대, 이런 조그마한 구기(拘忌)는 족히 염려할 것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드디어 8월 13일 연중(筵中)에서 ‘이 흠에 구애되지 않고 10월로 완정(完定)한다.’는 뜻을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관에게 분명히 알렸더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또한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사실이 이와 같은 데 불과한데, 이제 곧 이것을 가지고 죄를 성토하며 헤아릴 수 없는 죄과(罪科)로 몰아대고 있으니, 고금·천하에 어찌 이처럼 심하게 무함(誣陷)·날조하는 경우가 있었겠는가? 참으로 이른바 사슴을 쫓으며 태산(泰山)을 보지 못하는 자이다. 설사 김노충이 참으로 훼방놓으려 하는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대혼은 국가의 막중한 일인즉, 이 일을 훼방놓으려 하는 자는 외정간(外廷間)에서 사사로이 서로 경알(傾軋)하는 것에 비길 바가 아니니, 실로 아래에 있는 사람이 능히 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삼척 동자라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김노충은 곧 나의 사친(私親)이니, 이에 ‘김노충이 훼방놓으려 했다.’고 하면서 구허 날무(構虛捏無)하려는 것은 그 지적하는 뜻의 소재처가 마침내 어디로 귀착될 것인가?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바이지만, 대소(臺疏)에 이른바 ‘간악한 싹, 역적의 담’이라 한 것에 이르러서도 또 깊이 놀라고 의혹스러워 할 것이 있다. 연전에 조항진(趙恒鎭)이 상소를 올렸을 적에 내가 그 상소 가운데 있는 ‘궐전(闕典)’이란 말에 대해 그것이 넌지시 떠보고 구허 날무하는 간사한 계책인 줄을 명백하게 알았기 때문에 즉시 ‘넌지시 떠보고 구허 날무한다.’며 그 죄를 성언(成言)하고, 간삭(刊削)의 법을 베풀었다. 그러자 그때 유신(儒臣)이 나의 처분을 두고 ‘간악한 싹을 꺾고 역적의 담을 부수었다.’고 하였으니, 그 이른바 ‘간악한 싹’ 운운한 것은 곧 내가 이른바 ‘넌지시 떠 본다.’ 운운한 것이다. 이에 어찌 다름이 있는가? 오직 이와 같았기 때문에 그때 주상 또한 잘못이라 여기지 않고 그 청했던 바대로 찬배(竄配)를 베풀었던 것이니, 내가 간삭한 것과 주상이 찬배한 것은 모두 싹을 꺾고 담을 부순 처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러 대신(臺臣)들은 유신이 과감하게 ‘간사한 싹, 역적의 담’이라 말한 것을 가지고 죄안(罪案)을 삼으니, 나와 주상을 장차 어디에 두려는 것인가? 이는 과연 어떠한 사체이며 도리인가? 대체로 이 연명 상소 중 몇 구절의 말은 오늘날 북면(北面)하는 사람이라면 감히 이처럼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실로 말하고 싶지 않다. 내 어찌 지금까지 살아 있어 이처럼 어려움을 당하고 노경에 접어든 나이에 곧 이런 무한히 편안하기 어려운 지경을 당할 줄 생각이나 했으랴? 다만 스스로 슬퍼하고 마음이 아플 뿐이다.
또 생각하건대, 옛날 선인(宣仁)이 이미 세상을 뜬 뒤, 군소배(群小輩)들의 무함(誣陷)·핍박하는 말이 여지가 없어 선류(善類)들의 화가 따라서 크게 일어나 종국(宗國)이 마침내 위태롭게 기울어진 적이 있었다. 매번 지난 사적(史蹟)을 생각할 때마다 몸이 떨림을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 나는 한 가닥 숨이 아직도 남아 있음에도 목전에서 이러한 조짐을 보고 있으니, 이것이 내가 깊이 한탄하고 절실히 마음이 아픈 까닭이다. 옛날 선왕께서는 매번 나를 대하실 적마다 일찍이 사류(士類)를 부식(扶植)하라는 뜻으로 일찍이 진실하게 하교하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라에 선류(善類)가 있음은 사람에게 핏줄이 있는 것과 같으니, 사람에게 핏줄이 없으면 위태롭다.’고 하셨으니, 위대하도다! 선왕께서 지극한 정성과 고심하심이 이와 같이 부지런하심이여. 그러므로 국가가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인데, 건릉(健陵)124)  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소인배들이 기회를 타서 날뛰는 버릇이 이미 거리낌없이 다시 방자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이런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후일의 염려가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지 알지 못하겠다. 선왕의 의리가 모두 장차 무너진 뒤에야 그쳐질 것이다. 말이 이에 이르니, 어찌 애통해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대신(大臣)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이 뜻을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관주(金觀柱)가 부주(附奏)125)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연석(筵席)에서의 사실은, 좌상의 경우 이처럼 인죄(引罪)하는 것이 혹 그럴 듯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나치다 생각하고 있으니, 경이 이처럼 좌상의 거취(去就)를 본받는 것은 진실로 천부당 만부당하다. 경은 별달리 엄한 하교를 받들어 들은 사람이 아닌데 이에 번갈아 담당하고 뒤섞어 인죄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좌상은 좌상이고 경은 경이다. 만약 한 정승이 어떤 일로 인해 떠난다고 하여 여러 정승들이 모두 함께 떠나려고 한다면 중서(中書)는 비어 있지 않을 때가 없을 것이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 사관(史官)을 보내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6월 26일 계미

희천군(熙川郡)의 물에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민가(民家) 1백 39호와 물에 빠져 죽은 사람 41명에게 따로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지난해 의주(義州) 삼강(三江)의 물에 떠내려간 호(戶)의 예에 의해서 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연명 상소 가운데 유생의 글이라고 논주(論奏)한 바가 있었으니, 그 유생을 추조(秋曹)126)  로 하여금 ‘10월은 길함이 없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엄하게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당초의 연명 상소가 어찌 공분(共憤)하고 목욕(沐浴)하는 의리이겠는가?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데서 나오지 않음이 없다. 엊그제 자교(慈敎)가 내려진 뒤, 그 구어(句語) 중 ‘10월은 길함이 없다.’고 은연중 내비쳐 한 말이 김노충(金魯忠)을 가리켜 한 말인 줄을 비로소 알고, 나도 몰래 놀라고 탄식하였다. 그때의 일을 내 어찌 알지 못하랴? 이런 길거리에서 들은 말로 어찌 감히 그 이름을 숨기고 그 일을 캄캄하게 하여 스스로 사실과 어긋난 죄과(罪科)를 범한단 말인가? 이런 무리들은 엄하게 처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연명 상소한 여러 사람들에게 모두 멀리 찬배(竄配)하는 법을 베풀라."
하고, 이기경(李基慶)은 단천부(端川府)에, 권한위(權漢緯)는 구성부(龜城府)에, 이동식(李東埴)은 철산부(鐵山府)에, 홍시보(洪時溥)는 하동부(河東府)에, 문약연(文躍淵)은 북청부(北靑府)에, 윤효관(尹孝寬)은 순천부(順天府)에 찬배하였다.

 

6월 27일 갑신

예조에서 아뢰기를,
"건릉(健陵) 능 위의 사초(莎草)가 비로 인해 무너졌는데, 길이가 6자, 너비가 9자입니다."
하니, 위안제(慰安祭)를 날짜를 잡지 말고 설행(設行)하고 정부(政府) 이하가 나아가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다.

 

6월 28일 을유

사문(四門)에서 영제(禜祭)를 행하였다.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방향을 바꾸어 양주(楊州) 땅으로 향하니, 하교하기를,
"그날 자전(慈殿)의 엄한 하교는 노하시지 아니한 하교에 불과하고, 엊그제 연달아 ‘내가 의거할 데 없이 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내가 말하는 바를 들은 뒤 그 불가함을 진달했다면 내 어찌 그 말을 그르다고 여겼으랴? 그런데 나의 말은 기다리지도 않고 한갓 막기만을 일삼으므로 저절로 목소리가 과격하게 되어 말하는 바가 접대하는 데 막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내 바야흐로 다시금 후회하고 있으니, 대신은 심히 그르지 아니하다.’고 하교하셨다. 또 ‘중서(中書)가 텅 비어 나랏일이 안타까우니 잠자리가 편안하지 아니하다. 즉시 속히 소환하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누누이 은혜로운 하교로 분석해 보이심이 이에 이르니, 내 마음도 오히려 감동하여 기림을 깨닫게 되거늘, 경이 어찌 이것으로 깊이 인죄(引罪)하며 영원히 떠나고야 말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에 사관(史官)을 보내어 자성(慈聖)의 지극한 뜻을 선포하니, 경은 그 즉시 다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9일 병술

재차 영제(禜祭)를 사문(四門)에서 행하였는데, 이어 3차 영제는 정지하고 보사제(報謝祭)를 그날로 설행(設行)하라 명하였다. 장맛비가 맑게 개었다 하여, 선조(先朝) 계묘년127)  의 전례를 써서 단지 2차만 행한 것이다.

 

부내(部內)의 전후에 걸쳐 물에 떠내려 가거나 무너진 민가(民家) 5백 52호에 휼전(恤典)을 베풀라 명하였다.

 

봉심(奉審)하러 갔던 대신(大臣) 김관주(金觀柱) 등을 소견(召見)하였다. 김관주가 아뢰기를,
"옛날 선조(先朝) 계묘년128)  에 원릉(元陵)의 사초가 5월에 탈이 있어 8월 행행(幸行) 때 친히 임하시어 수개(修改)하신 적이 있었는데, 능 위의 형체가 높고 가파랐기 때문에 선조께서 ‘지금 비록 수개하기는 했지만 뒷날 염려가 없지 않다.’고 하교하시고 능 위의 높고 가파른 곳을 다시 평평하고 둥글게 하였습니다. 이제 이 건릉(健陵) 능 위의 형체 또한 이처럼 높고 가파르니, 일후에 수개할 때 대략 원릉의 전례에 의해 조금 평평하고 둥글게 만든다면 아마도 뒷날의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밖에 있는 대신(大臣)과 의논하라 명하였다. 김관주가 또 아뢰기를,
"소신(小臣)은 대명(待命)하고 있는 중이오나 왕역(往役)의 의리가 중대한지라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만, 일전에 자성(慈聖)의 언교(諺敎)에 ‘내 몸을 핍박한다.’는 하교가 있었고 대신(大臣)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다 알도록 하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위에서의 처분이 엄절(嚴截)하고 통쾌한지라 신은 지극히 흠앙(欽仰)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만, 아래에 있는 사람의 도리로는 이미 이런 하교를 만들었다면 진실로 마땅히 대양(對揚)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소신(小臣)을 두고 말하더라도, 자신이 강가에 있으며 삼가 엄한 견책(譴責)을 기다리느라 감히 한마디 말도 꺼내어 우러러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죄가 이에 이르렀으니, 더욱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리고 무릇 삼사의 직임에 있는 사람들도 여러 날 동안 조용히 있으면서 한 사람도 변명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국가 기강의 해이해짐과 사체의 놀라움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장서(長書)를 쓴 유생 이송호(李松祜)를 유배시키라 명하였다. 추조(秋曹)에서 공사(供辭)를 바칠 때 ‘10월은 길함이 없다.’는 말을 그의 죽은 동생에게서 들었다고 공초(供招)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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