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정사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대봉심(大奉審)을 행하였다.
삭출(削黜)한 죄인 이시수(李時秀)·김관주(金觀柱)를 서용(敍用)하라 명하고, 모두 판중추부사에 제배(除拜)하였다.
미관 첨사(彌串僉使) 이존경(李存敬)을 파직하고, 용천 부사(龍川府使) 안종후(安宗厚)를 잡아다 감률(勘律)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병영(兵營)으로 하여금 장자도(獐子島)의 범월인(犯越人)을 엄하게 곤장을 치고, 황력 재자관(皇曆䝴咨官)132) 에게 부쳐 성경(盛京)으로 입송(入送)하게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평안 감사 이서구(李書九)의 장계(狀啓)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해진(該鎭)의 순변(巡邊)이 살피고 신칙할 때 저쪽의 배 3척이 장자도 포구(浦口)에 정박하고 있었고 저쪽 사람 25명이 몰래 섬 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방에 포위하고 수색하여 잡았더니, 12명은 배를 타고 달아났고 5명은 ‘운수물금첩(運水勿禁帖)’이 있었기 때문에 방환(放還)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8명은 모두 체포하였는데, 5명을 성급하게 지레 방환한 것은 제멋대로 한 일이었습니다."
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8월 2일 무오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희생과 제기(祭器)를 살폈다. 제조(提調)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본궁(本宮)의 제향(祭享) 음악은 애초 3성(三成)133) 을 썼는데, 뒤에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의논함으로 인해 9성(九成)134) 으로 고쳤습니다. 그런데 궁(宮)의 제향 예절(禮節)은 태묘(太廟)에 견줄 경우 간략함과 번잡함에 차이가 있으니, 성수(成數)를 3에서 9로 증가한 것은 혹 음악에는 여유가 있으되 예(禮)는 부족한 염려가 있기 때문에 옛날 우리 선조(先朝)에서 한없는 성효(聖孝)로 사물을 창조하시는 예지(叡智)를 미루어, 이에 장악원(掌樂院)의 신하에게 먼저 등가(登歌)·헌악(軒樂)의 강수(腔數)135) 를 줄여 절주(節奏)를 늦추고 그 음(音)에 조화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악장(樂章)은 친히 찬(撰)하시어 내리겠다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궁검(弓劍)을 더위잡을 수 없게 되었는지라136) 함영(咸韺)·장소(章韶)의 아름다움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궁의 제향 악가(樂歌)를 보건대, 전날 연주하던 악보(樂譜)도 선조께서 개정하신 뜻도 아닌지라, 장절(章節)이 혹 연속되지 않고 철조(綴兆)137) 도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제향과 음악은 사체가 지극히 공경스럽고 지극히 중대한 것이니, 예의(禮義)로 헤아려 보건대, 인순(因循)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선조의 채 끝마치지 못했던 뜻과 사업을 추술(追述)하고자 새로 악장을 찬해 이 강수에 조화시키고자 하신다면, 제작(制作)의 성대한 일은 성인(聖人)이 아니면 의의(擬議)할 수 없는 것이니, 오늘날 뭇 신하들 중에서 누가 능히 한 기(夔)138) 의 직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악(樂)의 9성은 삼가 선조의 성명(成命)을 준행하고 악장 및 강수는 한결같이 전날 연주하던 바에 의거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함을 얻을 것 같습니다. 청컨대 대신과 예관(禮官)에게 하순(下詢)하시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3일 기미
약원(藥院) 제조 한만유(韓晩裕)와 부제조 이익진(李翼晉)을 파직하라 명하였다. 동가(動駕) 때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대신(大臣)이 상소하여 논했기 때문이었다.
8월 4일 경신
차대(次對)하였다. 임금이 경모궁(景慕宮)의 악장(樂章)에 관한 일을 가지고 대신(大臣)과 예조 판서에게 서로 의논하여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니, 대신이 ‘호조 판서 이만수(李晩秀)·좌참찬 조진관(趙鎭寬)이 모두 선조(先朝) 때 그 일에 참여해 알고 있는데, 조진관이 지금 바야흐로 연석(筵席)에 올라 있다.’며 하순(下詢)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참찬 또한 소견을 진달하라."
하니, 조진관이 말하기를,
"비궁(閟宮)139) 의 악장(樂章)을 애초 3성(三成)을 썼다가 뒤에 9성(九成)으로 고친 것은 대개 하늘을 제사지낼 때는 6성(六成), 땅을 제사지낼 때는 팔성(八成), 인신(人神)을 제사지낼 때는 9성을 쓰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수(成數)의 많고 적음은 단지 쓰는 바가 각각 다름에 관계된 것이고, 일무(佾舞)에 2·4·6·8의 등급이 있는 것과는 같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궁의 악(樂)을 9성으로 고쳐서 쓸 경우 향례(享禮)가 태묘(太廟)에 비해 조금 간략하여 언제나 악은 여유가 있는데 예(禮)는 부족한 한탄을 초래하였으므로, 선조(先朝) 기미년140) 에 특별히 장악원에 장보(章譜)를 개정할 것을 명하셨던 것이고, 천신(賤臣)은 제거(提擧)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가 성교(聖敎)에 의거해 성수는 벌여 아홉으로 하고, 강수(腔數)는 줄여 간략함을 따랐으며, 전폐(奠幣) 이하는 또 이 단락마다 곡조를 달리하였으므로 모두 영신곡(迎神曲)의 장단에 의거해 그 강수를 줄인 뒤 기미년 겨울 납일(臘日)부터 올려 썼던 것입니다. 다만 강조를 이미 줄였으니 악장에 장구(長句)를 쓰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때 마땅함을 따라 친히 찬(撰)하시겠다는 명이 있었으나, 곧 선조께서 승하하시는 슬픔이 있게 되었으므로, 이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예관(禮官)과 충분히 상의한 뒤 한 가지를 지적해 품지(稟旨)함이 옳다."
하였다.
경재(卿宰)·시종(侍從)이 시관(試官)의 망(望)에 오르는 것과 제향(祭享)의 역(役)을 규피(規避)하는 버릇에 대해 신칙하라고 명하였으니, 대신(大臣)의 말을 따른 것이다.
김달순(金達淳)을 선혜청 제조에, 민태혁(閔台爀)·조윤대(曹允大)를 비변사 제조에 차임(差任)하였다.
좌의정 서매수(徐邁修)가 아뢰기를,
"옛날 영묘(英廟) 초년에 신축년141) ·임인년142) 의 사화(士禍)를 당했던 나머지 인정(人情)이 분울(憤鬱)하여 급급하게 원옥(冤獄)을 신설(伸雪)하고 난역(亂逆)을 토죄(討罪)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습니다만 유독 고(故) 장령 민익수(閔翼洙)만은 강개하게 창론(倡論)하기를, ‘오늘날의 의리는 마땅히 군무(君誣)를 변명(辨明)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할 것이다. 군무가 변명되면 여러 신하들의 원통함은 신설을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신설될 것이다. 신하된 자가 군무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개인적인 사사로움에 뒤질 수 있단 말인가? 지킬 바 이 한가지의 말은 아홉 번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 뒤 몇몇 병집(秉執)했던 사류(士類)들이 몸을 깨끗이 하여 인퇴(引退)하며 ‘이 의리가 펴지지 않고 있으면, 차라리 구학(溝壑)에서 말라 죽겠다.’고 한 것은 모두 고 장령의 창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영묘조(英廟朝) 50여 년 동안 대의(大義)가 해와 별처럼 밝았던 것은 또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청컨대, 증직(贈職)하고 시호를 내려 풍성(風聲)을 수립케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한용귀(韓用龜)가 아뢰기를,
"화령전(華寧殿) 행례(行禮) 때의 복색(服色)은 마땅히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면복(冕服)으로 마련해야 할 것인데, 비국(備局)의 사례(事例)로 계하(啓下)한 것은 삼가 선원전(璿源殿) 및 장보각(藏譜閣) 작헌례(酌獻禮)와 봉안각(奉安閣) 전배(展拜) 때 곤복(袞服)으로 행례하는 의절(儀節)을 인용하고 있으니, 청컨대 신의 조(曹)로 하여금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그리고 곤포로 행례함은 모두 특교(特敎)로 인한 것이고 원래 정했던 예의(禮儀)가 아니니, 감히 끌어대어 예(例)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선원전 전배 때의 복색에 의거해 마련하라."
하였다.
이의필(李義弼)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추국(推鞫)하였다.
8월 5일 신유
추국하였다.
8월 6일 임술
추국하였다.
박종래(朴宗來)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8월 7일 계해
이집두(李集斗)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추국하였다.
8월 8일 갑자
죄인 이안묵(李安默)을 추국하고 정법(正法)하였다.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평소 역적 권유(權裕)와 서로 마음이 연결되어 언의(言議)가 서로 투합하였는지라, 치밀하게 음모를 꾸미며 항상 불령한 마음을 품었고 난만(爛漫)하게 화응(和應)하며 몰래 틈을 엿볼 뜻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역적 권유가 흉소(凶疏)를 꾸며낼 때에 이르러 저의 작년에 죽은 아우를 시켜 ‘소초(疏草)를 얽은 뒤 요컨대 서로 의논하자.’고 말을 전하게 하자, 그 뒤에 역적 권유가 과연 소본(疏本)을 보내 보여 주었으므로 처음에는 ‘잘 되었다.’고 답해 보냈습니다. 다음날 또 소본을 보내어 깎고 윤색(潤色)하게 하였으므로, 제가 이미 하단(下段)에 인용한 문자가 흉언(凶言)인 줄을 알아 ‘장로(長老)의 글은 깎고 고치기 어렵다.’고 답하고는 즉시 소초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상소가 나온 뒤 역적 권유를 찾아가 만나 흉소의 뜻을 난만하게 수작하였고, 그 국정(鞫庭)에서 초사(招辭)를 바칠 때가 되어서는 곧 ‘삼간택은 하지 않는다.[三揀不爲]’란 넉 자를 저의 마음에서 내어 저의 입으로 발설하였으며, 심지어 ‘여음유석(如音有釋)’의 설로 방자하게 공초(供招)를 바쳤습니다. 저의 전후의 정절(情節)이 〈선왕의 뜻에〉 배치되고 〈대혼(大婚)을〉 훼방놓으려는 단안(斷案)이 아님이 없었고, 흉패한 마음이 역적 권유와 한 꿰미에서 나왔으니, 대역 부도(大逆不道)가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다.
좌의정 서매수(徐邁修)와 우의정 이경일(李敬一)의 연명 차자에 이르기를,
"결안(結案)한 죄인 심노현(沈魯賢)의 지극히 흉악한 정절(情節)이 남김없이 환히 드러나 역적 이안묵(李安默)과 이미 차등이 없으니, 당초 다시 지정률(知情律)을 받들어 결안한 것은 이미 크게 실형(失刑)한 것인데, 조율 단자(照律單子)가 내려지지 아니하여 아직까지도 머리를 부지하고 사는 것은 국법이 이미 어그러진 것이라 사람들의 분이 갈수록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환입(還入)의 단자를 내려 즉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죄수의 단자를 아직까지 내리지 아니한 것은 능히 상량(商量)할 바가 없지 아니하여, 한번 다시 경들에게 물어보고 처리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8월 9일 을축
추국하였다.
8월 10일 병인
차대(次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심노현(沈魯賢)의 의율(議律)은 비록 지정 불고율(知情不告律)로 감한다 하더라도 또한 적절하지 않으니, 먼 악도(惡島)에 정배(定配)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서매수(徐邁修)와 우의정 이경일(李敬一) 등이 말하기를,
"심노현은 정절(情節)이 지극히 흉악하고 옥안(獄案)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결코 부생(傅生)143)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만약 감사(減死)로 고친다면, 반드시 뒷날 무궁한 폐단을 열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그대로 따르겠다. 그 나머지 위협을 받아 따른 무리들은 경중을 나누어 참작·처분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서매수가 말하기를,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은 실로 흠앙(欽仰)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혹시라도 왕부(王府)의 법의(法意)에 어긋남이 있다면 실로 봉행(奉行)하기 어렵겠습니다."
하였다.
청석진(靑石鎭)에 첨사(僉使)를 두었다. 일찍이 개성 유수(開城留守) 서미수(徐美修)가 진(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적이 있었다.
8월 11일 정묘
양사(兩司) 【집의 홍수호(洪受浩), 사간 한흥유(韓興裕), 장령 정한(鄭瀚), 지평 임백희(任百禧), 헌납 한영규(韓永逵), 정언 홍희준(洪羲俊)이다.】 에서 연명 차자를 올렸다. 대략 이르기를,
"난적(亂賊)이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어찌 역적 권유(權裕)와 같은 자가 있었겠습니까? 소어(疏語)의 음험·궤휼함과 시구(詩句)의 흉악·패려함이 이미 그의 단안(斷案)이었는데, 부도(不道)한 마음을 속에 감춘 채 불령한 무리를 불러 모으고는 팔뚝을 휘두르면서 허풍을 치고 입술은 나불거리며 창도(唱導)하고 응답하여, 몰래 대혼(大婚)을 훼방놓을 것을 도모하고 스스로 선왕께 배치(背馳)되는 죄과(罪科)를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차례의 형신(刑訊)에도 한결같이 끝까지 버텨 현륙(顯戮)을 채 더하지 아니하여 귀신의 죽임이 먼저 이르렀으니, 지금 만약 채 결안(結案)하지 않았다 하여 마땅한 율(律)을 베풀지 않는다면, 이것을 두고 나라에 삼척(三尺)144) 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꿇어앉혀 목을 베는 형(刑)은 비록 시원하게 거행하지 못했지만 노적률(孥籍律)은 결코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치밀하게 체결(締結)했던 것은 곧 이안묵(李安默)·심노현(沈魯賢) 등 여러 국청(鞫廳)의 죄수입니다. 역적 이안묵을 정법(正法)한 뒤 여러 죄수들을 차례로 자세히 캐어물어 오직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심노현의 경우, 본디 역적 권유의 응견(鷹犬)이자 역적 이안묵의 효시(嚆矢)로서 서로 내통한 자취가 국안(鞫案)에 이미 환히 밝혀져 있고, 동참했던 데 대한 율(律)에 승복(承服)이 이미 이루어졌음에도 지정률(知情律)로 감률(減律)하셨으니 이미 전에 없던 법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오래 되었다 하여 아직까지 부대시(不待時)의 법을 아끼고 계십니다. 저으기 생각건대, 불령한 무리들이 이로부터 마음을 내고 난역(亂逆)의 일어남이 또다시 자취를 이을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죄인 심노현의 문안(文案)을 빨리 반하(頒下)하도록 하시고, 처음 받은 결안으로 곧 시행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연석(筵席)에서 대신(大臣)에게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죄인 심노현을 추국하고 정법(正法)하였다.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이 자는 불령한 무리로서 평소 화(禍)를 즐기는 마음을 쌓아 왔는데, 역적 권유(權裕)와는 사는 곳이 서로 가깝고 뜻이 서로 투합하였는지라 역적 권유의 일이라면 참여해 알지 못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역적 권유의 흉소(凶疏)가 나올 즈음에 미쳐서는 자주 왕래하면서 암암리에 모의하였던 것이니, 역적 권유가 소초(疏草)를 내보여 주면 이 자는 분판(粉板)에다 써서 답하여 흉악한 모의와 패려한 말들을 오직 남이 알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역적 권유의 흉소 가운데 인용한 바 ‘도인(都人) 윤(尹)·길(姞)’이니, ‘곡돌 사신(曲堗徙薪)하여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느니 하는 등의 허다한 구어(句語)는 대혼(大婚)을 훼방놓으려는 흉계와 선왕께 배치(背馳)되는 역절(逆節)이 아님이 없었으니, 이 자가 시종 일관 통모(通謀)한 상황이 이제 이미 죄다 드러났습니다. 역적 권유가 적소(謫所)로 갈 때에 이르러서는 ‘잘 꾸민 바둑판을 가지고도 일이 성사되지 못하였다.’는 말을 김우광(金宇光)에게 전하였고, 또 ‘힘을 다해 정계(停啓)하겠다.’는 말로 역적 권유에게 소식을 전했으니, 역적 권유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음과 역적 권유를 아끼고 비호했던 정절(情節)이 더욱더 밝게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감히 국정(鞫庭)에서 납초(納招)할 때에는 혹은 ‘「바둑판을 꾸몄다」는 말은 악역(惡逆)과 관계가 없다.’느니, 혹은 '정계하는 일은 친구가 좋게 여긴 바이다.'느니, 혹은 ‘지금 와서 의리가 비로소 밝아졌지만 그때는 옳고 그름이 채 정해지지 않았다.’느니 하여 말마다 패만(悖慢)하고 절절이 흉악하였습니다. 역적 권유와 더불어 한통속이었음이 남김없이 탄로났으며, 정절(情節)을 알고도 고(告)하지 아니하였음이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하였습니다."
하였다.
8월 12일 무진
주서(注書) 홍재민(洪在敏)을 가두었다. 홍재민이 까닭없이 경출(徑出)145) 하자 정원(政院)에서 전례에 따라 금추(禁推)하라는 전지(傳旨)를 받들었던 것이다.
8월 13일 기사
대신(大臣)과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고 주서(注書) 홍재민(洪在敏)의 상소를 내리며 말하기를,
"그 상소에 인용한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의 일이 어찌 이번의 일과 같겠는가? 대신(臺臣)과 유생(儒生)의 처분은 내가 모두 우러러 자성(慈聖)께 품(稟)하여 했던 것이니, 이 이외에 무슨 대양(對揚)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이 상소의 구어(句語)는 비록 조정의 사람들을 공척(功斥)한 것이지만 그 알맹이는 고 상신의 일을 인용한 것이니, 내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다."
하니, 좌의정 서매수(徐邁修)가 말하기를,
"자성의 종사(宗社)를 위하고 성궁(聖躬)을 보호하신 넓고 큰 공(功)과 사업에 애초부터 어찌 일찍이 변명(卞明)할 만한 무함(誣陷)이 있었겠습니까? 시험삼아 철렴(撤簾)의 일로 말씀 드린다 하더라도, 군하(群下)가 우러러 청하기를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전하의 춘추가 한창 때가 되었다며 즉일로 환정(還政)하셨으니, 거조(擧措)가 탁월하였습니다. 이 어찌 지난 사첩(史牒)에 있는 바이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전 우상(右相)의 부주(附奏)에 대한 비답을 보았더니, ‘자성께서 잘못이라 생각하지는 않으시나 그럴 듯함이 있다.’고 하신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 비답이 반하(頒下)된 이후 비록 거의 평소 지극히 우매한 자라 할지라도 환히 시원스레 이해하여 다시는 의심을 더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소가 나와 마치 변무(卞誣)할 것이 있는데도 조정 신하들이 변무하지 아니한 것이 있는 양 여기니, 신들은 참으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참으로 털끝만큼이라도 핍박한 일이 있었다면 내가 대양(對揚)하려 한 바는 조정 신하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했을 것이니, 그렇다면 나에게 능히 대양하지 못했던 허물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일이 순조롭게 완결지어진 뒤에 이 상소가 또 어떤 까닭으로 나오는 것인가? 이 조짐이 장래에 해쳐 이간함이 되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경 등의 의견이 만약 이 상소를 옳다고 여긴다면 내 마땅히 수용하여 허물로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은데 만약 그르다고 한다면 널리 확청(廓淸)하는 도리를 또한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하니, 서매수가 말하기를,
"세도(世道)가 날로 패퇴(敗頹)하고 변괴(變怪)가 층층이 생겨나, 조정은 장래에 편안할 날이 없을 것이니, 신 등은 참으로 몸이 떨리고 한심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의 상소에 논한 바는 비록 고 상신 김수항 때를 인용했지만, 그때는 흉역(凶逆)이 조정에 있어 국세(國勢)가 위태로웠으니, 지금과 어찌 판연히 다르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이경일(李敬一)이 말하기를,
"지금의 시기가 고 상신 때와는 실로 아주 다릅니다."
하였다. 서매수가 말하기를,
"신은 곧장 국문(鞫問)을 청해야 마땅하고 대각(臺閣)의 신하 또한 마땅히 공의(公議)가 있을 것이나, 또한 위에서 곧바로 엄한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하순(下詢)한 것은 경 등의 의논을 듣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 경 등이 만약 죄를 청하기까지 한다면 내 마음에 도리어 편안하기 어렵다. 대간(臺諫) 또한 이 뜻을 알아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서매수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비록 죄를 청한다 하더라도 무슨 전하께 편안하기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관계된 바가 얼마나 지극히 중대합니까? 그리고 그는 또 기주(記注)의 직임으로서 근밀(近密)한 곳에 출입하면서 부주(附奏)에 대한 비지(批旨)를 보았을 터이니, 또한 환히 알아 그 사이의 사실에 대해 다시는 의혹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말한 바를 이처럼 장황하게 말하고 은연중 언뜻 내비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의심의 단서를 야기시켜 마치 참으로 변무(卞誣)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 신하들이 변명(卞明)하지 않은 것이 있는 양하였으니, 어찌 심히 위험하고 패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 또한 내가 환히 유시하는 뜻을 알아야 옳다."
하니, 사간 한흥유(韓興裕) 등이 말하기를,
"이런 곳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죄에 대해 죄준 연후에야 흉도(凶徒)·난역(亂逆)이 또한 마땅히 그칠 줄을 알 것입니다. 비록 성상께서 곧장 처분을 내리셔도 또한 난안(難安)치 않을 터인데 하물며 신 등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누차 그만둘 것을 명하였으나 대신(臺臣)이 힘써 청하여 마지아니하니, 임금이 엄한 하교를 내려 여러 대신(臺臣)을 모두 체직시켰다가 대신(大臣)과 승지의 쟁집(爭執)으로 인해 정침(停寢)하였다.
주서(注書) 홍재민(洪在敏)이 상소하기를,
"신은 재주가 짧고 식견이 없어 한 가지도 선한 형상이 없는지라 시종(侍從)의 끝자리에서 수를 채우는 데도 넉넉함이 없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우리 성상께서 굽혀 비호해 주시는 은혜에 힘입어 기주(記注)에 대죄(待罪)하면서 닿는 곳마다 혹이 생겨났지만, 한 번도 견책(譴責)이 몸에 이르지 아니하여 신으로 하여금 일월의 경광(耿光)을 가까이서 우러러보게 하고, 운결(隕結)146) 의 보잘것없는 정성을 펼 수 있게 하였으니, 아! 신의 한 몸은 신의 소유가 아닌지라 항상 간뇌 도지(肝腦塗地)하여 전하를 위해 죽을 것을 원한 지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스스로 삼가 대왕 대비의 애통(哀痛)해 하시는 하교를 보고 채 반도 봉독(奉讀)하기 전에 뱃속의 피가 들끓어 오른 것이 수십 일을 지나도록 하루와 같았습니다. 진실로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만, 경신년147) 이후로 세도(世道)와 나라의 기강이 다시 여지가 없게 된 것이 어찌하여 이런 극도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까? 참으로 자성(慈聖)의 하교와 같다면, 자성의 종사(宗社)를 위하고 성궁(聖躬)을 보익(輔翼)하신 지극한 정성과 자애(慈愛)로 우리 성상의 주량(舟梁)의 큰 경사스런 예에 대해 이런 핍박·무함(誣陷)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상제(上帝)께서 감림(鑑臨)하고 열성(列聖)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만고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 자성께서는 곧 4년 동안 수렴(垂簾)하신 군모(君母)이시니, 온 역내(域內)의 신민(臣民)이면 누군들 자성께 북면(北面)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에 감히 이와 같은 지극히 흉악·패려한 계책과 윤리라고는 없는 말을 마음에 싹틔우고 입으로 발설하여 크나큰 천지 사이에서 천하 후세의 의혹을 불어나게 하고 자성께서 빛나게 염유(簾帷)를 거두신 성덕(盛德)의 일이 있는 터에 그날의 예사롭지 아니한 일이 있게 만들었으니, 이 어찌 오늘날 신자(臣子)가 얼굴을 들고 사람을 마주 보며 영화와 녹(祿)을 탐내고 바랄 때이겠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숙종 대왕 원년(元年)에 명성 대비(明聖大妃)께서 숙종 대왕과 더불어 함께 편전(便殿)에 나아가시어 수렴하고 친히 유시하시던 날은 오늘날의 큰 변괴(變怪)와 견주어 본다면 또한 경중의 구별이 있었는데도, 고(故)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은 앞장서서 대양(對揚)하되 비록 아홉 번 죽는다 한들 후회함이 없었으니, 만약 문충공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일을 보게 한다면 장차 나라에 기강이 있고 신하에게 분의(分義)가 있다 하겠습니까? 신처럼 보잘것없는 말단의 천한 사람도 또한 세록(世祿)의 후예로 선왕의 청아작육(菁莪作育)148) 의 교화를 입어 약간이나마 같이 얻은 병이(秉彛)149) 를 보존하고 있어 북면(北面)하여 우리 전하와 자성 전하를 섬긴 지 이제 이미 5년입니다. 임금의 기강과 신하의 분의가 손댈 수 없이 되었음을 눈으로 보고도 오히려 또 기한(飢寒)을 두려워하고 이익과 녹(祿)을 돌아보느라 구태 의연하게 지금까지 세월만 그럭저럭 보낸 것은, 애초에 온 동토(東土) 수천 리에서 끝내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으리라고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고, 또 신의 직임이 언책(言責)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또한 생각해 보건대, 신처럼 미관 말직에 있는 사람은 유독 청조(淸朝)의 사대부가 아니라 하여 의리에 불가한 것이 있을 경우, 죽을 때까지 자정(自靖)할 계책을 세울 수가 없겠습니까? 신은 비록 못나서 저 안중에 군모(君母)가 없는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따라다녔으나, 차라리 죽을지언정 실로 이는 평일에 배우지 아니한 바입니다.
아! 신의 목숨은 오늘 끊어질 것입니다. 재앙이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아 만들어졌으니,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대략 문자를 들이고 금경(禁扃)에 경출(徑出)하니, 삼가 원하건대, 빨리 주극(誅殛)을 더하시어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불충(不忠)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 아! 난신(亂臣)·적자(賊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어찌 이번의 권유(權裕)·이안묵(李安默)·심노현(沈魯賢)·정재민(鄭在民) 등의 여러 역적처럼 지극히 흉악·패려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무릇 횡목(橫目)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자려 하지 않으며, 한 하늘을 이고 함께 살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재민(在民)’이라 이름하는 흉적(凶賊)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천신(賤臣)의 이름과 진실로 음(音)과 글자가 같고 다른 구분은 있으나, 사람에게 읽게 하면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와 더불어 그 이름을 같이하지 아니함은 실로 상정(常情)에 그만둘 수 없는 바에 관계됩니다. 신의 이름을 ‘재은(在殷)’으로 고쳐 이것과 함께 앙철(仰撤)하오니, 바라건대, 윤허를 내려 주소서. 그리하여 죽기 전이 아니라야 보잘것없는 정성을 이룰 수 있다면, 대원(大願)을 견딜 수 없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조금 전에 대신(大臣)과 양사(兩司)에 순문(詢問)하였다. 그러나 일이 과궁(寡躬)에 속하는지라 말을 찾아 처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상소에는 비답을 내리고 싶지 않다. 도로 돌려주라."
하였다.
좌의정 서매수(徐邁修)와 우의정 이경일(李敬一)이 연명 차자를 올려 국청(鞫廳)을 설치해 홍재민(洪在敏)을 엄하게 신문할 것을 청하고, 이어 후원(喉院)에서 한마디도 입계(入啓)한 말이 없었음을 논하여 모두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조금 전 연석(筵席)에서 이미 나의 뜻을 유시하였으니, 경 등은 또한 반드시 이해할 것인데, 또 어찌하여 번거롭게 청하는가? 대저 그 상소 중 한 구어(句語)는 곧장 온 조정의 신료(臣僚)들을 무륜(無倫)·망측한 죄과(罪科)로 몰아넣으려 한 것이었기에 말하지 아니한 가운데 나 또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때문에 경 등을 소견(召見)했던 것은 공의(公議)가 어떠한지를 묻고자 했던 것이다. 만약 그 죄상을 논하자면 진실로 용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어찌 그만 책망할 수 있으랴? 곧 나의 정성이 족히 사람들을 미덥게 하지 못하고 덕이 족히 사람들을 감화시키지 못하여 능히 온 세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사물마다 각각 지극히 당연한 의리가 있음을 환히 보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홍재민과 같은 자가 어린아이가 우물에 기어들어가듯 몽롱하게 스스로 빠졌던 것이니, 슬퍼할 일이지 노할 일이 아니다. 가르치지 아니하고 형(刑)을 쓰는 것은 성인(聖人)이 하지 아니하신 바이니, 내 비록 덕은 없으되 차마 이런 일을 하지 못하겠다. 경 등이 모름지기 일개 홍재민을 성토하는 데 급급하지 말고, 나갈 때 고(告)하고 들어와 말하는 즈음에 천명(闡明)·발휘(發揮)하여 모르는 사람을 알게 하고 아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실마리를 풀어가게 해서 백성의 뜻이 하나가 되고 세도가 안정되게 한다면, 군신(君臣) 상하가 모두 화평(和平)의 복을 누릴 것이고, 홍재민 또한 장차 전날 견해의 패려함과 오류를 스스로 뉘우쳐 날로 선(善)한 데로 옮겨가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 한 의리가 홍재민을 성토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니, 경 등은 그것을 깊이 생각하라. 승선(承宣)의 일은 파직한다면 지나친 것이다."
하였다.
양사(兩司) 【사간 한흥유(韓興裕)·장령 정한(鄭澣)·헌납 한영규(韓永逵)·정언 홍희준(洪羲俊)이다.】 에서 연명 차자로 홍재민(洪在敏)에 대해 국청(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죄인 정재민(鄭在民)을 추국(推鞫)하고 정법(正法)하였다.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평소 역적 권유(權裕)와 이웃에 살며 절친하게 지내 수시로 왕래하였으므로 무릇 모든 크고 작은 일에 서로 관계를 맺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무릇 역적 권유는 흉소(凶疏)의 초본(草本)을 얽을 때에 이르러, 역적 권유가 소초(疏草)를 저에게 내어 보이며 ‘교목 세가(喬木世家)의 사람들 중에 스스로 올바른 데로 돌아간다 하면서 실제로는 올바른 데로 돌아가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상소를 써서 올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상소를 올린 뒤에는 저에게 ‘이번의 이 한 통의 상소는 대혼(大婚)을 훼방놓을 수 있다.’고 하였고, 또 지난 겨울에는 역적 권유가 저에게 ‘지금 마땅히 국구(國舅)가 될 사람은 본래 의리를 지키는 쪽의 사람이 아니고, 경신년150) 6월 이후로는 이 사람은 더욱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니 대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반드시 그러리라고는 알 수 없으니, 다만 이 상소를 올려놓고 두고 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미 이렇게 지극히 흉악·패려한 말을 듣고도 예사롭게 들어 넘기고 그와 더불어 난만(爛漫)하게 수작하였음에도 전후 엄히 신문하는 아래에서 한결같이 내내 숨기다가 이제 와서 정적(情跡)이 다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실토하였으니, 정절(情節)을 알고도 고하지 아니하였음이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다.
8월 15일 신미
지난달 대신(大臣)이 입시(入侍)한 뒤의 일과 홍재민(洪在敏)의 일에 관계된 장소(章疏)는 모두 봉입(捧入)하지 말고, 비록 대신의 상소라 하더라도 곧장 도로 돌려줄 것이며, 해당자는 즉시 원찬(遠竄)한다는 전지(傳旨)를 받들라 명하였다. 승지 김종선(金宗善)이 환수(還收)할 것을 계청(啓請)하자 특별히 체직시켰다. 승지 조덕윤(趙德潤)·이문회(李文會)가 연명 상소하여 정침(停寢)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려 허락하였다. 대신이 이로 인해 서명(胥命)하니, 유시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연명 차자를 올려 광구(匡救)하고, 이어 홍재민의 일을 논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주서(注書) 홍재민(洪在敏)이 단교(單敎)로 인해 방송(放送)되었다. 승지 조덕윤(趙德潤)과 이문회(李文會)가 연명 상소하여 정침(停寢)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조진관(趙鎭寬)을 호조 판서로 삼고, 이어 건릉 개수 도감 제조(健陵改修都監提調)에 차임하였다. 신대곤(申大坤)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양사(兩司) 【집의 홍수호(洪受浩), 사간 한흥유(韓興裕), 장령 정한(鄭瀚). 지평 임백희(任百禧), 헌납 한영규(韓永逵), 정언 홍희준(洪羲俊)·신재명(申在明)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여 말하기를,
"역적 권유(權裕)의 죄를 이루 다 주륙(誅戮)할 수 있겠습니까? 신유년151) 여름에 한 통의 상소에 ‘도인(都人) 윤(尹)·길(姞)’ 등의 어구(語句)는 배포(排布)한 것이 음흉·궤휼하였고, ‘곡돌 사신(曲堗徙薪)’이니 하며 끌어다 견준 것은 가리킨 뜻이 흉악·참독(慘毒)하였으니, 이 한 단락만 가지고도 그의 대혼(大婚)을 훼방놓으려는 흉측한 뱃속과 선왕께 배치(背馳)되려 했던 역절(逆節)이 남김없이 탄로되었습니다. 또 그가 바친 원사(爰辭)와 압수된 문서 가운데 부도(不道)하고 불만스런 말이 나오면 나올수록 더욱 흉측하였는데, ‘외조(外朝)에서는 알지 못한다.’는 말과 시구(詩句)에서 인용한 뜻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했습니다. 비록 채 결안(結案)하지는 못하였으나, 곧 이미 결안한 극역(劇逆)이오니, 마땅히 베풀어야 할 율(律)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물고(物故)한 죄인 권유에게 빨리 노적법(孥籍法)을 베푸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심노현(沈魯賢)은 본래 불령한 무리로서 평소 화(禍)를 즐기는 마음을 쌓아 왔으니, 무릇 괴이하고 패려한 의논에 관계된 것이라면 주장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무릇 역적 권유의 흉소가 나올 즈음에 이르러 조용하게 필담(筆談)을 나누고 난만(爛漫)하게 모의하였으되, 사람을 사주해 정계(停啓)토록 하는 일을 사사로운 호의(好意)로 여겼고, 바둑판을 꾸몄다는 말은 악역(惡逆)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혹은 ‘이제 와서 의리가 비로소 바르게 되었으나 그때는 옳고 그름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동참했던 죄를 그가 이미 승복하였으니, 법에 있어서 마땅히 옮겨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정률(知情律)을 지금 이미 거행하였으니, 실형(失刑)이 더욱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청컨대 죄인 심노현에게 빨리 노적법을 시행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정재민(鄭在民)은 손수 패려한 통문(通文)을 내어 자신이 묶인 채 오랫동안 갇혀 있었으니, 기회를 틈타 화(禍)를 즐기려는 버릇이 그 오직 오래 되었습니다. 역적 권유와 절친한 이웃이 되어 역적 권유를 모주(謀主)로 삼고 있었는데, 그가 흉소의 초본(草本)을 얽어낼 즈음에 미쳐서는 치밀하게 모의하고 난만(爛漫)하게 수작하였으니, 혹은 ‘대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하고, 혹은 ‘교목 세가(喬木世家)가 올바른 데로 돌아가지 아니한다.’고 하는 등, 팔뚝을 휘두르며 창응(倡應)하고 훼방놓는 것을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겼습니다. 동참했던 자취가 국안(鞫案)에 환히 있으니, 지정률은 너무 가볍게 처리한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청컨대 죄인 정재민에게 빨리 노적법을 시행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홍이유(洪履猷)는 곧 하나의 괴려(乖戾)한 기운이 심어진 바입니다. 그는 보잘것없는 음리(蔭吏)로서, 항상 조정의 권세를 잡고자 몰래 일망 타진하려는 계책을 품고는 참독(慘毒)한 행동을 창도(倡導)하고 앙연히 와주(窩主)로 자처하였습니다. 그가 음모를 꾸미고 뜻을 쓴 것은 전적으로 화(禍)를 즐기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그 진장(眞贓)이 탄로되어 정절(情節)을 가릴 수 없게 되자, 이에 감히 막엄(莫嚴)·막중한 곳에 빙자하여, 도리어 스스로 그 자신이 배치(背馳)되고 스스로 그 자신의 입으로 무함(誣陷)·핍박하는 죄과(罪科)로 돌렸습니다. 이 한 가지 단락만으로도 그 단안(斷案)이 될 것인데, 벌이 도배(島配)에 그쳤으니 이미 크게 실형(失刑)한 것입니다. 왕법(王法)을 채 펴지 못하여 귀신의 주륙(誅戮)이 먼저 더해졌으니, 청컨대 죄인 홍이유의 여러 자식을 여러 곳으로 흩어 유배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홍재민(洪在敏)의 죄를 이루 다 주륙할 수 있겠습니까? 기회를 타서 독기(毒氣)를 풀고자 불쑥 한 통의 상소를 올렸으니, 막중한 곳을 빙자하여 몰래 불령한 버릇을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보낸 글은 흉악·궤휼하고 가리킨 뜻은 간교·사특하여, 조정을 비방하고 청문(聽聞)을 의란(疑亂)시켰으며, 심지어 ‘주량(舟梁)의 대경(大慶)에 무핍(誣逼)을 당하였다.’고까지 하여 마치 참으로 무핍한 것이 있는 양하였습니다. 또 고 상신(相臣)이 대양(對揚)했던 것을 인용하여 마치 변명(卞明)하지 아니한 것이 있는 양하였고, 끝에 가서는 곧 ‘안중에 군모(君母)가 없다.’는 등의 말로 온 세상을 무륜(無倫)·망측한 죄과(罪科)로 몰아넣었습니다. 장황하게 늘어놓는가 하면 순식간에 언뜻 내비치기도 하면서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림이 없었으니, 그 마음에 설계한 것과 음모를 꾸밈이 아! 또한 흉악하고 참독(慘毒)합니다.
아! 경신년152) 이후 우리 동방이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누구의 힘입니까? 거룩하신 우리 자성 전하께서 5기(紀)153) 동안 국모(國母)로 임하시고, 4년 동안 수렴(垂簾)하시어 우리 성궁(聖躬)을 보호하시고 우리 종팽(宗祊)을 공고히 하셨던 것이니, 의리는 천명(闡明)되고 조정의 기상은 화락·태평해졌습니다. 이에 능히 선왕의 유지(遺志)를 추념(追念)하고 이에 정해진 문상(文祥)을 널리 거행하시어 우리의 억만년토록 끝이 없을 아름다움을 터닦아 놓으셨으니, 크고 거룩한 공렬(功烈)은 사첩(史牒)에 빛남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동토(東土) 수천 리에서 자성의 덕이 덮고 있는 하늘 아래에, 누군들 발을 구르며 춤추고 손을 모아 찬송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지난날 대신(臺臣)과 통유(通儒)의 처분도 자성의 뜻에 품결(稟決)하여 자성의 덕을 미루어 밝히지 않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대신(大臣)의 부주(附奏)에 대한 비지(批旨)를 반하(頒下)한 뒤, 무릇 병이(秉彛)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구름이 피어오르듯 감격하여 자성의 은혜를 찬송하고 성상의 효(孝)를 우러르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애초에 어찌 일찍이 무함(誣陷) 여부와 변명(卞明) 여부를 논할 만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아! 저 또한 자성과 전하의 궐정(闕庭)에 북면(北面)하고 있는 자인데, 도대체 무슨 심장(心腸)으로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 하고 가짜를 사실로 만들어 뭇사람들의 청문(聽聞)을 현혹시키고 조정의 진신(搢紳)을 몰아 죄과에 빠뜨리며, 심지어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방자하게 위로 감히 말할 수 없는 곳까지 핍박하는 것입니까? 죽기를 맹세하고 전하의 궐정에 서지 않으려 한다는 이 한 조항만으로도 이미 천지·만고를 통틀어 있지 아니한 극역(劇逆)의 단안(斷案)이니, 이는 비단 전하의 죄인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처럼 지극히 요악·사특하고 아주 흉악·패려한 역적은 비록 천번 살을 발라내고 만번 도륙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왕법(王法)을 펴고 뭇사람들의 분을 풀기에 부족하니, 어찌 일각인들 천지 사이에 용서하여 우리 동방의 오늘날 신하들로 하여금 차마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데도 끝까지 정절(情節)을 핵실(覈實)하여 상형(常刑)을 쾌히 결행(決行)하지 아니한다면, 윤리와 기강은 무너지고 의리는 캄캄해져, 장차 나라는 나라답지 않게 되고 사람은 사람답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령한 무리들이 가면 갈수록 더욱 마음을 낼 것이고, 난역(亂逆)의 일어남이 또 그 자취를 이을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핍(誣逼)의 죄에는 본래 상헌(常憲)이 있으니, 사시(肆市)154) 의 법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극역(劇逆) 홍재민을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하게 국문(鞫問)하여 실정을 캐내어 시원하게 전형(典刑)을 바루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아! 저 이동만(李東萬)에 대해 말하자니, 곧 입이 더러워짐을 느낍니다. 그는 홍이유(洪履猷)에 있어 곧 성기(聲氣)가 아득한 사이에도 발자취를 의탁하고 마음을 털어놓음은 처음에는 냄새를 좇는 뜻에서 나와 위급한 시기에 임하여서는 살 계책을 도모하여 드디어 반서(反筮)의 꾀를 꾸며, 치밀한 설계와 경영했던 맥락이 곧 홍이유와 한 꿰미에서 나왔던 것이니, 주객(主客)·경중(輕重)은 애초 논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조진정(趙鎭井)의 경우, 이미 ‘이 상소에 이름을 두었다.’고 하고는 또 ‘그 상소의 말은 알지 못한다.’ 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겉으로는 노망·패려한 데 핑계대면서 안으로는 요동하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습니까? 추조(秋曹)의 여러 죄인의 경우, 상소와 통문(通文)이 본래 절로 서로 일관되어 있고 뜻이 한 판본(板本)에서 찍어낸 것 같으니, 어찌 비천한 부류라 해서 엄한 핵실(覈實)을 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후로 작배(酌配)하라는 명을 여분(輿憤)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는 즈음에 갑자기 내리시니, 어찌 난역(亂逆)을 베고 사특한 자를 제거하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고금도(古今島)에 정배한 죄인 이동만과 진해현(鎭海縣)에 정배한 죄인 조진정을 모두 왕부(王府)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하게 국문하게 하고, 추조의 죄인 가운데서 이영복(李榮復)·김원희(金元喜)·홍종익(洪宗益) 등은 정범(情犯)이 몹시 무거운 자이니, 또한 왕부로 옮겨 가둔 뒤 끝까지 캐어물어 쾌히 전형(典刑)을 바루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의 아룀 또한 같았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6일 임신
좌의정 서매수(徐邁修)와 우의정 이경일(李敬一)이 연명 차자로 홍재민(洪在敏)의 일을 논하니, 비답하기를,
"나 또한 경 등과 삼사(三司)의 말이 근본을 바로잡고 싹을 꺾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바 또한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니, 경 등은 우선 재촉하지 말라. 내가 마땅히 다시 생각하여 처분하겠다."
하였다.
양사(兩司)·옥당(玉堂)·금오(金吾)의 여러 당상관이 함께 연명 상소하여 홍재민의 일을 논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옥사(獄事)를 내 어찌 그만둘 수 있으랴? 저 무리들만은 유독 선왕의 조정에 북면(北面)하지 아니하고 감히 불만스런 마음을 품어 드러나게 배치(背馳)하려는 계책을 꾸민 자였으니, 역적 권유(權裕)의 신유년155) 의 한 통 상소가 바로 그러하다. 내 진실로 어렸기에 비록 즉시 타파하지는 못하였으나 통분스러움은 마음속에 있었다. 더구나 그 시구(詩句)에서는 감히 ‘무너뜨렸다.[壞了]’는 두 글자를 썼고 공초(供招)에서는 방자하게 ‘통촉(洞燭)’ 등의 말을 꺼내었으니, 흉언(凶言)·패설(悖說)이 그 상소에 있을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臺臣)이 논한 것과 상신(相臣)이 아뢴 것이 일세(一世)의 공의(公議)이니 속일 수 없는 것인데, 상헌(常憲)을 채 베풀기 전에 경폐(徑斃)하였으니, 분통스러움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이안묵(李安默)·심노현(沈魯賢)·정재민(鄭在民)은 모두 이미 복법(伏法)되었으나, 위협을 받아 따른 무리는 경중에 따라 작처(酌處)하라고 어제 대신(大臣)에게 하유하였다. 윤치행(尹致行)은 그의 집에서 유숙하면서 그 상소를 고준(考準)하였으니, 더욱 지극히 통악(痛惡)하다. 해도(海島)에 사형을 감하여 안치(安置)하라. 이회상(李晦祥)은 그의 집안 사람으로 누차 국청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니, 무릇 누군들 ‘전혀 범한 바 없다.’ 하겠는가? 김우광(金宇光)은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무리로 왕래하며 화응(和應)하였으니, 또한 죄가 없을 수 없다. 모두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 김천손(金千孫)은 어리석은 겸인(傔人)이니, 어찌 그사이에 참여했겠는가? 권사목(權思穆)은 애당초 잡아온 것이 다른 죄수와 면질(面質)시키기 위해서였다. 모두 풀어 주라."
하였다. 정원·옥당, 금오의 여러 당상관이 정침(停寢)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8월 17일 계유
윤치행을 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에, 이회상을 나주목(羅州牧) 지도(智島)에, 김우광을 웅천현(熊川縣) 가덕진(加德鎭)에 정배하였다.
8월 18일 갑술
좌의정 서매수와 우의정 이경일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금부 당상의 말을 들으니, 어젯밤 발배 전지(發配傳旨)를 읽어 국청의 죄수로 하여금 듣게 하자, 이회상(李晦祥)이 고하기를, ‘역적 권유(權裕)의 상소는 명백히 사주한 자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말은 곧 고변(告變)이다. 대신(大臣)은 나가서 즉시 개좌(開坐)해 묻는 것이 옳다."
하였다.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을 소견(召見)하고, 정전(正殿)의 영건(營建)할 날짜를 잡아 역사(役事)를 시작하라고 명하였다.
조진관을 인정전 영건 도감 제조(仁政殿營建都監提調)로 차임(差任)하였다.
추국(推鞫)하였다.
8월 19일 을해
공조 참판 김노충(金魯忠)을 파직하였다. 문계(問啓)가 내려졌음에도 인의(引義)하고 받들어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대(召對)하였다.
8월 20일 병자
영부사(領府事) 이병모(李秉模)를 소견(召見)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전자에 김후(金𨩿)의 상소는 실로 사슴을 쫓느라 태산(泰山)의 〈험악함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 있으나, 대요(大要)는 신 한 사람을 논한 데 불과할 뿐입니다. 한 대신(大臣)을 논하고 해도(海島)에 찬축(竄逐)되어 해를 넘긴 채 돌아오지 않으니, 진실로 지나친 듯합니다. 청컨대 풀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논한 바가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처분했던 것이다. 어찌 가벼이 방석(放釋)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추국하였다.
8월 21일 정축
소대(召對)하였다.
하교하기를,
"이회상(李晦祥)의 일은 진실로 지극히 통악(痛惡)하다. 그가 난언(亂言)과 거짓 초사(招辭)로 자복하였으니, 법의(法意)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반좌율(反坐律)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했던 바를 따져본다면 어리석은 소치에서 나왔으니, 전대로 작처(酌處)하여 원래의 배소(配所)에 사형을 감하여 안치(安置)하라."
하였다. 정원·옥당, 금오의 여러 당상관 및 대신(大臣)이 모두 정침(停寢)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8월 22일 무인
소대하였다.
8월 23일 기묘
양사(兩司) 【집의 한흥유(韓興裕)·사간 홍수호(洪受浩)·장령 이해청(李海淸)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아! 통탄스럽습니다. 인심은 날이 갈수록 함닉(陷溺)되고 세도(世道)는 날이 갈수록 그릇되어 가니, 나라와 집에 흉화(凶禍)를 끼친 자가 전후로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만, 어찌 이번 국옥(鞫獄)의 여러 역적들처럼 지극히 흉악·패려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아! 저 역적 권유(權裕)의 훼방·배치(背馳)코자 한 흉모(凶謀)·역절(逆節)은 곧 천지·만고를 통틀어 놓아도 있지 않았던 극심한 역적인데, 왕법(王法)은 채 펴지 못하고 노적법(孥籍法)을 아직도 아끼고 계시니, 신인(神人)의 분통이 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효경(梟獍)의 뱃속을 가진 듯 난만(爛漫)하게 동참했던 것이 이안묵(李安默)·심노현(沈魯賢)·정재민(鄭在民) 등과 같은 세 역적은 비록 이미 복법(伏法)되었으나, 그 나머지 국청의 죄수로서 옥정(獄情)에 관계되고 역모(逆謀)에 관련된 자는 진실로 철저히 궁핵(窮覈)하여 소굴을 쳐부숨이 마땅하고, 수종(首從)을 구별하여 가볍게 먼저 참작해 놓아 줄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이회상은 본래 역적 권유의 혈당(血黨)으로서 흉소(凶疏)에 참섭(參涉)하고 치밀하게 화응(和應)하였으니, 혹은 필담(筆談)으로 수작하고 혹은 서찰(書札)로 왕복하기도 했습니다. 상소가 있고 난 뒤 소식이 막혔다는 말은 근거할 만한 증거가 없고, 힘을 다해 정계(停啓)한다는 일에서 진장(眞贓)이 죄다 드러났으니, 그가 비록 주둥이가 석 자라 할지라도 다시 스스로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곧 이 한 가지 조항만으로도 이미 단안(斷案)이 되는데, 한 차례 평문(平問)하고는 고신(拷訊)을 다하지 아니한 채 몇 달을 버려두고 있다가 갑자기 작처(酌處)하였으니, 실형(失刑)의 큼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무릇 발배(發配)하는 시초에 미쳐서는 실토할 말이 있다고 하며 금오(禁吾)의 당상을 공동(恐動)시키더니 대신(大臣)이 청대(請對)하여 다시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일에까지 이르러서는, 사주하고 온양(醞釀)한 정절(情節)을 그 곳에서 반핵(盤覈)하여 그 근거와 소굴을 벽파(劈破)할 것 같았으나, 그 옛 버릇을 어떻게든 뉘우치지 못하여 흉악한 계책을 갈수록 더욱 방자하게 꾸며 한결같이 전의 초사(招辭)를 뒤집으면서 순식간에 농락하고 의심·현혹시키더니 필경에는 난언(亂言)과 거짓 초사로 자복하였으니, 세상에 이와 같이 지극히 음흉·사특하고 아주 흉측·참독(慘毒)한 극적(劇賊)·대대(大憝)156) 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범(負犯)으로 볼 때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서는 것만 해도 실로 10세(世)토록 용서한다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니, 그에게 만약 1분(分)의 병이(秉彛)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차마 다시 이런 근거없는 말로 꾸며대고 조롱하며 끌어대는 계책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반좌(反坐)에는 본디 해당되는 율(律)이 있고 거짓 초사는 마땅히 숨긴 정상을 핵실해야 하는 법이니, 이번의 원래의 배소(配所)에 안치(安置)하라는 법은 형정(刑政)으로 논하건대, 너무나도 타당성을 벗어납니다. 윤치행(尹致行)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본래 교활·사특한 인물로서 역적의 집에 유숙하면서 흉소(凶疏)를 고준(考準)하였음을 그가 이미 털어놓았으니, 글이 짧다고 핑계대며 지적하는 뜻을 알지 못했다고 한 것은 그 정상을 캐 보건대, 더욱 지극히 통악(痛惡)합니다. 동참한 자취가 남김없이 탄로났으니, 사형을 감한 것은 너무 가볍게 처리한 실수입니다. 김우광(金宇光)은 흉적(凶賊)의 사인(私人)으로 아침저녁으로 서로 지키며 명령을 듣는 데 분주하였으니, 흉모에 동참한 정절(情節)이 낭자하여 가리기 어렵습니다. 이는 미천하다 하여 삼척(三尺)을 굽힐 수 없습니다. 권사목(權思穆)은 응당 연좌되어야 할 부류에 관계되니, 일을 마땅히 차례로 거행해야 할 것이고 결코 성급하게 의논하고 참작하여 놓아 줄 수 없습니다. 김천손(金千孫)은 비록 어리석은 천한 부류라 하지만, 이미 이는 친밀한 겸속(傔屬)이고 역시 국옥(鞫獄)의 간련(干連)에 관계되니, 또한 마땅히 완전히 석방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안치(安置)한 죄인 이회상·윤치행과 도배(島配)한 죄인 김우광을 모두 왕부(王府)로 하여금 다시 엄하게 국문하여 전형(典刑)을 쾌히 바루게 하고, 석방한 죄인 권사목·김천손에게는 빨리 절도(絶島)에 안치하는 법을 베풀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8월 24일 경진
소대하였다.
하교하기를,
"전 참판 김노충(金魯忠)을 서용(敍用)하여 승후(承候)케 하라."
하였다.
임한호(林漢浩)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8월 25일 신사
차대(次對)하였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역적 권유(權裕)에게 노적률(孥籍律)을 베푸는 일로 번갈아 나아가 힘써 청하니, 임금이 나가서 서로 의논하여 하라고 명하였다. 또 홍재민(洪在敏)에 대해 국청(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 서매수(徐邁修)·우의정 이경일(李敬一)이 연명 차자로 전에 청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니, 비답하기를,
"경 등의 차자에서 전례가 있다고 또 힘써 청하니, 권유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홍 재민의 일은 경 등이 내가 조연(朝筵)에서 유시한 뜻을 깊이 유념토록 하라."
하였다.
8월 28일 갑신
화성(華城)157) 에 행행(行幸)하였다. 시흥현(始興縣)의 행궁(行宮)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는 화성 행궁에 머물렀다.
8월 29일 을유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 돌아오는 길에는 화성의 행궁에 머물렀다. 능(陵)의 동구에 이르러 유수(留守) 김문순(金文淳)에게 경내(境內)의 부로(父老)를 인솔하고 입시(入侍)하라 명하였다.
건릉 개수 도감 도제조(健陵改修都監都提調) 이병모(李秉模)에게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고, 제조(提調) 조진관(趙鎭寬)에게는 숭록 대부(崇祿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베풀었다.
8월 30일 병술
화령전(華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한용탁(韓用鐸)을 이조 참판으로, 임한호(林漢浩)를 참의로, 권손(權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돌아오는 길에 시흥현(始興縣) 행궁(行宮)에 머물렀다.
화성(華城)의 을묘년158) 양로연(養老宴)에 참연(參宴)했던 노인에게 본부(本府)에서 쌀과 고기를 내려 주라 명하였는데, 아흔 이상이 9명, 여든 이상이 2명, 일흔 이상이 99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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