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6권 순조4년 1804년 12월

싸라리리 2025. 6. 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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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병진

소대(召對)하였다.

 

12월 2일 정사

소대하였다.

 

12월 3일 무오

소대하였다.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를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정조(正朝)·동지(冬至)의 조하(朝賀) 때는 면복(冕服)으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칭경(稱慶)·진하(陳賀) 때는 원유관(遠游冠)·강사포(絳紗袍)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준행(遵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조(東朝)께 친히 치사(致詞)와 표리(表裏)202)  를 전하는 예(禮)는 영묘조(英廟朝)계해년203)  에 비로소 시작되었는데, 면복으로 예를 행한다고 《속오례의(續五禮儀)》에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삼가 각년(各年)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았더니, 영묘조 계해년·을축년204)   두 해의 정조 때는 이미 칭경(稱慶)의 예가 없고 단지 조하만 행하였으므로 친히 전하시는 때와 조하를 받으실 때 또한 면복으로 마련했고, 병인년205)  의 원조(元朝) 때는 특교(特敎)로 인해 조하는 권정(權停)하고 단지 칭경·진하만 행하였으므로 친히 전하실 때는 면복으로 마련했고 진하를 받으실 때는 강사포로 마련하였습니다. 정묘년206)  ·신미년207)   두 해의 정조 때는 면복으로 친히 전하신 뒤 하례(賀禮)는 친림(親臨)하지 않으셨습니다. 병자년208)  의 정조 때는 조하는 권정하고, 이어 대왕 대비전에 존호(尊號)를 올리는 예를 거행했는데, 면복으로 마련하였고, 반교(頒敎) 때는 강사포로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조(先朝) 경자년209)   10월 28일 전교(傳敎) 내용에는 ‘이것을 매번 이정(釐正)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다. 진하 때의 복색(服色)은 반드시 강사포를 써야 할 것이나, 다만 대전(大殿)의 탄일(誕日) 진하 및 정조·동지의 진하 때는 면복을 쓰니, 이는 곧 조하(朝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전 진하와 같은 때는 마땅히 강사포를 써야 할 것이다. 면복을 쓴다면 예의 뜻이 그러하지 아니한 것 같으니, 이는 이미 송(宋)나라 때 범 문정공(范文正公)의 정론(定論)이 있다. 지금부터 자전·자궁(慈宮)의 탄일 진하를 친히 거행할 때 입는 복색은 강사포로 마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을 일로 전교하고 나서 경자년 이후로 자전·자궁의 탄일·정조·동지의 친히 치사와 표리를 전하시는 때 및 친히 책보(冊寶)를 올리시는 때는 위에서 입으시는 복색을 모두 강사포로 마련하였습니다. 이번 원조(元朝)의 칭경·진하 때는 어떻게 마련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대신이 경자년 수교(受敎)를 준행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4일 기미

소대하였다.

 

12월 6일 신유

선조(先朝) 때 어정(御定)한 《대학유의(大學類義)》를 인간(印刊)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검교 직각(檢校直閣) 심상규(沈象奎)를 불러 선조의 어제(御製)와 《군서표기(群書標記)》의 역사(役事)를 시작했는가를 물으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군서표기》는 진실로 인간하는 것이 합당하나, 다만 그 편집하는 가운데 실린 바 여러 책들 중에 아직도 편마(編摩)가 완결되지 아니한 것이 많이 있으니, 《존주록(尊周錄)》·《주모휘집(籌謨彙輯)》·《군제대성(軍制大成)》·《여지지(輿地誌)》 등의 책은 모두 채 탈고하지 아니한 것들입니다. 먼저 《표기》 가운데다 서목(書目)만 나열하였기 때문에 또한 추가로 이정(釐正)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지금 인간하려 한다면 다시 상량(商量)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또 이 편(編)은 이미 선조의 어제 전서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전서를 인간할 때 절로 마땅히 함께 인간될 것입니다. 이번의 선조의 어찬서(御纂書)를 인간하라는 명에 대해 신 등은 진실로 너무나도 흠송(欽頌)함을 금할 수 없으니, 이 성명(成命)으로 인해 차례차례 공역(功役)이 끝났음을 알리게 된다면, 진실로 성대한 일일 것입니다. 지금 편질(編帙)이 많지 않아 곧 인간에 들어갈 것으로는 《사서집석(四書輯釋)》·《대학유의(大學類義)》·《심리록(審理錄)》 등의 여러 책이 바로 그러합니다. 또 《주역고본(周易古本)》과 같은 것은 선조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역경(易經)》은 십익(十翼)210)  을 괘효(卦爻) 아래다 나누어 붙이고 있는데, 이는 비직(費直)211)  ·왕필(王弼)212)  로부터 그러한 것으로서 점차 고경(古經)의 뜻을 잃게 되었다. 조열지(晁說之)213)  가 시작됨에 이르러 고경을 고정(考訂)함이 있었고, 여동래(呂東萊)214)  가 또 경전(經傳)을 이정(釐正)하였는데, 이것이 고역(古易)으로 주자(朱子)가 일찍이 자주 칭찬하며 본의(本義)를 따랐다. 나는 일찍이 고역(古易)에 뜻이 있어 장차 세 성인(聖人)의 예전 것으로 돌아가고 주자의 뜻을 계술(繼述)하려고 하였으니, 비록 아직까지도 그럴 겨를은 없었으나 일찍이 하루라도 이에 대해 간절하게 생각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라고 하시고, 일찍이 연경(燕京)에 가는 신하에게 《역경》을 논한 제가(諸家)의 책을 널리 구해 오라 명하셨으며, 그 편집의 의례(儀例) 또한 일찍이 누차 연신(筵臣)에게 하유(下諭)하셨습니다. 이제 만약 지시해 주시는 바를 우러러 따라 이미 정하여진 의례를 살펴 편마(編摩)한다면 책을 이룰 수 있겠습니다만, 이것은 이미 편성(編成)한 여러 책과 다름이 없으니, 지금 어떤 책이 먼저 인간하기에 적합한지 신은 감히 지적해서 우러러 아뢸 수 없습니다. 마땅히 하교를 기다려 거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책들 중에서 먼저 《사서집석》을 인간하면 좋겠는가?"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이 또한 좋겠습니다만, 이 책은 권질(卷帙)이 조금 많고 또한 거듭 교정(校正)을 더하지 아니할 수 없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대학유의》는 이미 쪼개어 정밀하게 교정하였으니, 먼저 인간하는 데 가장 편할 듯합니다. 또 이 책은 신이 또한 일찍이 선조의 하교를 우러러 들으니, 춘저(春邸)에 계실 때부터 친히 단연(丹鉛)215)  하는 공역(工役)에 납시어 재택(裁擇)·산절(刪節)하시어 성총(聖聰)을 쌓고 소비하셨다 합니다. 지금 만약 이 책을 인간한다면 우러러 성학(聖學)에 보탬이 되고 치도(治道)에 도움되는 바 있을 것입니다. 편질(編帙) 또한 간략하고 인쇄하는 공정도 어렵지 아니합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이에 생생자(生生字)216)  로 인쇄하라고 명하였다.

 

윤서동(尹序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조명집(曹命楫)을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2월 7일 임술

소대(召對)하였다.

 

12월 8일 계해

소대하였다.

 

12월 10일 을축

차대(次對)하였다. 교리 김상휴(金相休)를 강화부 안핵 어사(江華府按覈御史)로 삼았다. 해부(該府)의 중군(中軍) 이만원(李晩遠)이 불법으로 조사를 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좌의정 서매수(徐邁修)의 아룀으로 인해 겸 대사성(大司成)은 다만 일찍이 부학(副學)·각직(閣職)을 거친 사람으로 단부(單付)하고,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은 부정(副正)으로 올려서 서류(庶類)를 소통(疏通)시키는 계제로 삼으라 명하였다.

 

우의정 이경일(李敬一)이 아뢰기를,
"조적법(糶糴法)은 처음에는 비록 백성을 위해 설치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도리어 백성을 해치는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대개 이예(吏隷)가 석(石)을 나누는 것, 알곡식을 빈 쭉정이로 바꾸는 것, 읍주인(邑主人)이 꾸어 주기를 바라는 것 등 그 폐단 되는 것이 하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환곡(還穀)을 받으라는 명령을 들으면 모두 두통이 나 콧날을 찡그리기 때문에 돈으로 환곡을 막아버리는 자도 있고 받아 나가다 버려두고 가는 자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전례에 의거해 징봉(徵捧)하니, 힘있는 백성은 온갖 계책을 써서 받지 않지만, 고할 데 없는 잔약(殘弱)한 백성들은 치우치게 많은 석(石)을 받아 심지어 1호에 10석, 혹은 수십 석이 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름은 비록 환곡을 나누어 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받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해마다 쫓아와 외치고 채찍질 하며 잔약한 백성들로부터 수십 석의 곡식을 백징(白徵)하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선조(先朝) 때 환곡의 고질적인 폐단을 특별히 진념(軫念)하시어 심지어 책문(策問)을 내어 교구(矯捄)하는 방도를 순문(詢問)하기까지 하셨으나, 아직까지도 대양(對揚)하는 사람이 있지 아니하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오직 사창(社倉) 1조(條)만이 교구할 수 있을 것이며, 선조 때의 책문 가운데도 또한 사창에 대해 하교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주자(朱子)의 사창의 규칙에다 우리 나라의 조적법을 참고하여 전례에 의거해 모곡(耗穀)을 취한다면 백성들도 즐거이 따르고 백징의 폐단도 없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절목(節目)을 만들어 내고 환곡의 폐단이 가장 심한 양남(兩南)과 양서(兩西)에 행회(行會)하되, 백성이 원하는 것을 따라 설시(設施)해야 할 것입니다. 각면(各面)에 사창 하나를 두는 뜻을, 청컨대 먼저 좌상(左相)과 연석(筵席)에 등대(登對)한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소서."
하니, 좌의정 서매수(徐邁修)는 말하기를,
"사창법의 뜻은 본디 백성을 위한 것이니 본떠 시행하는 것이 진실로 좋습니다만, 절목에 관한 일은 구애되는 단서가 없지 않을 것 같으니, 우선 몇몇 고을에 시험해 그 편리 여부를 보고 민정(民情)이 과연 편리하게 여긴다면 차차 설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행 이조 판서 황승원(黃昇源)은 말하기를,
"옛날 숙묘조(肅廟朝) 때 사창에 관한 일로 절목을 만들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시행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한결같이 사창법을 따라 설행한다면 실효가 있을 것 같으나, 신의 적은 견해로는 다시 헌의(獻議)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행 예조 판서 한용귀(韓用龜)는 말하기를,
"사창의 유법(遺法)이 아름답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예와 지금은 시의(時宜)가 다르니, 폐단이 없으리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한두 읍(邑)에 시험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한만유(韓晩裕)는 말하기를,
"현재 주(州)·읍(邑)에 외창(外倉)이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 또한 사창의 유의(遺意)인 것입니다. 그러나 같지 아니한 것은 관(官)·민(民)의 구별입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전적으로 존위(尊位)의 손에만 맡겨 버린다면, 폐단이 없으리라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약간의 크고 작은 읍부터 시행하여 심한 장애가 없고 난 뒤에 여러 도(道)에 미루어 시행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행 대호군 채홍리(蔡弘履)·행 호군 이인수(李仁秀)·행 도승지 서형수(徐瀅修)·행 부호군 박종경(朴宗慶)의 헌의(獻議)도 대략 같았다. 하교하기를,
"여러 사람의 헌의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시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옛날의 사창은 지금의 공곡(公穀)과 같지 아니하다. 지금의 공곡은 그 모곡(耗穀)이 허다히 공용(公用)이 되고 있으니, 과연 서로 장애되는 것이 없겠는가? 모름지기 다시 십분 폐단이 없을 방도를 강구하여 뒷날 연석(筵席)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12월 11일 병인

김이영(金履永)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소대하였다.

 

12월 12일 정묘

소대하였다.

 

12월 14일 기사

소대하였다.

 

12월 15일 경오

개기 월식이 있었다.          【신초시(申初時) 부터 유정시(酉正時) 까지 처음에는 정동(正東) 쪽이 이지러졌다가 다시 정서(正西) 쪽부터 둥글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496면
【분류】과학-천기(天氣)

 

12월 16일 신미

소대하였다.

 

12월 17일 임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감제(柑製)를 설행(設行)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신재업(申在業)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인정전(仁政殿)이 완성되었다.

 

12월 20일 을해

한용탁(韓用鐸)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호남(湖南) 사람 고(故) 현감(縣監) 정민구(鄭敏求)는 창의(倡義)하여 존주(尊周)하였고, 정숙(丁淑)과 그의 조카 정승조(丁承祖)는 용사(龍蛇)217)  의 난(難) 때 순절(殉節)하였습니다. 청컨대 모두 증직(贈職)하소서. 그 후손 정효원(丁孝元)과 처(妻) 성씨(成氏)는 효행이 있으니, 청컨대 모두 복호(復戶)를 주소서. 손성검(孫性儉)·김덕문(金德文)·유지화(柳志和)는 효행이 있으니, 청컨대 모두 정려(旌閭)하소서. 호서(湖西) 사람 김응려(金應礪)는 효행이 있으니, 청컨대 증직하소서. 여철영(呂哲永)의 처 송씨(宋氏)와 성국진(成國鎭)의 처 조씨(趙氏)는 열행(烈行)이 있으니, 청컨대 모두 정려하소서. 해서(海西) 사람 홍이서(洪以敍)·홍이행(洪以行)·홍이채(洪以采) 형제 세 사람은 효행이 있으니, 홍이채는 청컨대 증직하고, 홍이서·홍이행은 청컨대 복호를 주소서. 김달오(金達五)는 효행이 있으니, 청컨대 복호를 주소서. 그리고 그 어머니 박씨(朴氏)는 열행이 있으니, 청컨대 정려하소서. 관동(關東) 사람 정광형(鄭光衡)은 효행이 있으니, 청컨대 증직하소서. 경기(京畿) 사람 한진구(韓鎭九)의 처 윤씨(尹氏)는 열행이 있으니, 청컨대 정려하소서."
하였다. 모두 유생(儒生)의 상언(上言)으로 인해 본도(本道)에서 조사하여 보고한 것이다.

 

12월 21일 병자

영건 도감(營建都監)의 당상관과 낭관(郞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베풀었다.

 

서형수(徐瀅修)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황승원(黃昇源), 참판 서영수(徐瀅修), 병조 판서 한만유(韓晩裕)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96면
【분류】인사(人事)

 

12월 22일 정축

재정(再政)을 행하여, 안책(安策)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곧 조윤수(曹允遂)로 대신하였다.

 

12월 24일 기묘

차대하였다.

 

소대하였다.

 

12월 25일 경진

정언 홍의영(洪儀泳)이 상소하여 ‘입지(立志)’·‘강학(講學)’·‘주정(主靜)’·‘근독(謹獨)’ 네 조목을 진면(陳勉)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12월 26일 신사

겨울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얼지 않았다. 예조에서 인조(仁祖)병술년218)  , 현종(顯宗)기유년219)  , 숙종 기사년220)  의 전례(前例)에 근거하여 기내(畿內)의 강이나 골짜기가 있는 고을의 얼음이 언 곳에 따로 얼음을 저장토록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29일 갑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고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청구(靑邱)221)  에 구방(舊邦)을 공고히 하니 본디 하늘의 도우심이요, 자극(紫極)222)  에 새 건물이 빛나니 며칠이 안가 이루어진 것이로다. 이에 십행(十行)을 펴 팔역(八域)에 널리 고하노라. 이 창덕궁 앞뜰을 돌아보니, 곧 내가 시조(視朝)하는 정아(正衙)로다. 왕자(王者)가 새벽에 나가 다스림은 주가(周家)의 팔창(八牕)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고, 성인(聖人)이 천위(踐位)하여 예(禮)를 행함은 한(漢)나라 조정의 구급(九級)의 존숭함을 본뜬 것이로다. 굉대(閎大)하되 사치스럽지 아니하고 질박(質樸)하되 비속하지 아니하매 영릉(英陵)의 검소함을 밝히시는 덕을 생각하겠고, 공렬(功烈)을 크게 이어받아 모의(謨議)를 크게 드러내매 열조(列朝)에서 쌓은 노고의 기틀임을 우러르게 된다. 더구나 이 두 글자의 편액(扁額)에 아름다운 이름을 내렸으니, 진실로 사덕(四德)223)  의 첫머리에서 뜻을 취하였도다. 크도다! 건원(乾元)이 만물의 근원됨이여, 군도(君道)는 인(仁)에 그치나니, 비유컨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뭇 별들이 그를 향하는 것과 같으매 덕으로 정사를 행하는 법이로다. 균석(勻石)224)  하는 하부(夏府)225)  는 현상(懸象)의 계책을 거의 진념(軫念)했고 옥촉(玉燭)226)  한 춘대(春臺)227)  에는 언제나 융동(隆棟)의 길함을 점쳤는데, 어찌 인애하신 하늘이 경계를 보이시어 이에 지난 겨울의 화재가 있을 줄 생각이나 했으랴? 공구(恐懼)·수성(修省)하는 마음으로, 비록 ‘영대(靈臺)를 짓되 빨리 하지 말라.’228)  는 뜻을 생각하였으나, 조근(朝覲)·회동(會同)하는 곳을 돌아보건대, 노침(路寢)229)  의 중건(重建)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예전대로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리 집안에는 본디 제도가 있으며 그 길일(吉日)을 점쳤더니, 경사(卿士)가 협력하여 따르지 않음이 없는지라, 이에 사도(司徒)230)  ·사공(司空)231)  을 불러 나의 긍구 긍당(肯構肯堂)232)  의 일을 돕게 하였다. 처음에는 역사(役事)가 거창하고 시기가 어려움을 생각하여 백성들의 힘으로 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침 다행히 풍년이 들고 겨울이 따뜻하니 마치 조물(造物)의 도움이 있는 듯하다. 공산(邛山)의 밋밋한 재목은 편목(楩木)·남목(楠木)·예목(櫲木)·장목(樟木)을 모두 모았고, 기원(岐原)의 고고(鼓咎)233)  는 심척(尋尺)이나 승묵(繩墨)으로도 감당하지 못하겠으나 전보다 사치스럽게 하지 않았고, 나중에 한 것도 폐(廢)하지 않도록 하여 한결같이 정해진 규례를 오직 잘 지켰도다. 비로소 이에 끝이 있게 되어 삼삭(三朔) 만에 역사를 마쳤으니, 아름답도다, 금방(金榜)의 곧 빛남이여. 의젓하도다, 보의(寶扆)가 높이 임하였다. 칼과 패옥(珮玉)을 차고 번갈아 달려나가니 천궐(天闕)은 상위(象魏)234)  에 엄숙하고, 용(鏞)·지(篪)를 함께 연주하니, 민물(民物)이 정구(庭衢)에 모여들었도다. 해옥(海屋)에 보주(寶籌)를 더했으니 바로 한(漢)나라 장락궁(長樂宮)에서 소리높여 축하하던 때를 만났으며, 쇄달(瑣闥)235)  에 신중함을 더했으니 당(唐)나라 때 연영각(延英閣)에서 연석(筵席)을 열었던 뜻에 더욱 힘쓰겠노라. 중외(中外)가 기뻐하니 이를 미루어 백성과 함께 즐김이 마땅하고, 상하에 포고(布告)하니 재이를 바꾸어 상서로움으로 만든 것이 실로 다행하다. 휘혁(翬革)236)  이 길이 빛나며 휴명(休命)의 더욱 공고해짐을 점치겠고, 봉력(鳳曆)에 명령을 반포하니 양화(陽和)가 바야흐로 찾아듦이 기쁘도다. 아! 윤환(輪奐)237)  은 더욱 빛나고 승항(升恒)을 찬송하는 소리 높도다. 이 사덕(四德)에서 인(仁)을 베풀어 정사(政事)를 펴는 것을 먼저 하였으니 고명(顧名)의 규례를 어찌 늦추며, 그 백성들에게 때로 거두고 씀을 넉넉하도록 하여 주었으니, 모름지기 경사를 함께 하는 뜻을 깊이 유념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다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 제학 황승원(黃昇源)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96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궁관(宮官) / 건설(建設) / 어문학(語文學)


[註 221] 청구(靑邱) : 동방의 나라.[註 222] 자극(紫極) : 궁궐.[註 223] 사덕(四德) : 인(仁)·의(義)·예(禮)·지(智).[註 224] 균석(勻石) : 곧 관석 화균(關石和鈞)을 말함.[註 225] 하부(夏府) : 왕부(王府)와 같음.[註 226] 옥촉(玉燭) : 임금의 덕이 옥(玉)과 같이 아름답고 촛불과 같이 밝으면 능히 사시(四時)의 화창한 상서로움을 이르게 한다는 고사.[註 227] 춘대(春臺) : 성세(盛世).[註 228] ‘영대(靈臺)를 짓되 빨리 하지 말라.’ :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백성을 번거롭게 할까 두려워서 영대(靈臺)를 빨리 짓지 말라고 하였으나, 백성의 마음은 즐거워하여 자식이 어버이 일을 돕듯이 하여 소집(召集)하지 않아도 저절로 왔다는 고사.[註 22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230] 사도(司徒) : 삼공(三公)의 하나. 정1품.[註 231] 사공(司空) : 공조 판서.[註 232] 긍구 긍당(肯構肯堂) : 아버지가 업(業)을 시작하고 자식이 계승함.[註 233] 고고(鼓咎) : 12척(尺) 되는 큰 북. 역사(役事)를 시작하고 마칠 때 침.[註 234] 상위(象魏) : 대궐(大闕)의 문. 옛적에는 교령(敎令)을 이 문에 게시(揭示)하였으므로, 전(轉)하여 교령(敎令)의 뜻으로도 쓰임.[註 235] 쇄달(瑣闥) : 궁문.[註 236] 휘혁(翬革) : 궁실(宮室)의 웅장 화려함을 이름.[註 237] 윤환(輪奐) : 건물이 장대·미려(美麗)함.

 

죄인 이만원(李晩遠)을 형신(刑訊)한 뒤 절도(絶島)에 충군(充軍)하되, 사전(赦前)임을 가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안핵(按覈)하는 일로 그 죄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12월 30일 을유

경조(京兆)에서 백성의 수를 바쳤다. 오부(五部)와 팔도의 총 원호(元戶)는 1백 76만 4백 69호(戶)이고, 인구는 남녀가 모두 7백 51만 4천 5백 67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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