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7권 순조5년 1805년 1월

싸라리리 2025. 6. 1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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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병술

하교하기를,
"이달은 곧 빈풍(豳風)001)  에서 말한 쟁기를 수리하는 달로 다시 새해가 되어 모든 일이 시작되는 때인데, 천하의 근본이야 농사보다 무엇이 앞서겠는가? 평안함을 누리는 것은 애써 노력하는 데 달려 있고, 공을 이루는 것은 과업(課業)을 권면하는 데 달려 있는데, 과업을 권면하는 책임은 돌아보건대, 방백(方伯)·수목(守牧)의 신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비로소 남쪽 들에 나가서 농사를 짓게 하되, 시기를 어기게 하지 말고 동요시키지 말며 봄에는 부족한 것을 살펴 도와주어서 삼가 가을 수확의 경사를 맞이하되 산더미처럼 수확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할 것으로 팔도 감사(八道監司)와 사도 유수(四都留守)에게 하유한다."
하였다.

 

노인들에게 특별히 세찬(歲饌)을 반사하고 이어 존문(存問)하라고 명하였는데, 해마다 하는 전례이다.

 

1월 2일 정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세수(歲首)의 호궤(犒饋)002)  를 행하였다.

 

응당 가자(加資)할 노인에 대해 하비(下批)했는데, 1백 세가 된 사람이 45인이었다.

 

1월 5일 경인

김시근(金蓍根)을 의정부 검상으로 삼았다.

 

1월 7일 임진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히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과 혜경궁(惠慶宮)에 치사(致詞)·전문(箋文)·표리(表裏)003)  를 올리고, 이어 진하를 받고 교서를 반포하였다. 대왕 대비전에 친히 전문을 올리기를,
"봄볕이 점점 길어지니 묵은 해가 새해로 바뀜을 맞게 되었으며, 보갑(寶甲)이 엄연히 다가오니 장수가 점차 더하여짐을 기뻐합니다. 현호(顯號)를 곧 선양하기 위해 욕례(縟禮)004)  를 먼저 거행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 광헌 융인 대왕 대비 전하(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大王大妃殿下)께서는 성덕(聖德)의 배양이 구면(裘冕)005)  에서 높았고 덕화(德化)가 염유(簾帷)006)  에 흡족하였습니다. 지난 경신년007)  부터 여중 요순(女中堯舜)이라는 큰 이름을 누리셨으며, 나 소자(小子)를 보호하여 더욱 창성하게 할 연모(燕謨)008)  를 넉넉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 성대한 덕이요 지극하신 곤원(坤元)이시므로, 이에 보령(寶齡)이 주갑(周甲)이 되어 다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인원 왕후(仁元王后)께서 70세를 누리신 경사를 뒤따르니 옥첩(玉牒)에 광휘(光輝)가 더하게 되었으며, 온 나라 사람의 만수(萬壽)를 송축하는 마음을 따르니 요상(瑤觴)으로 기쁨을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태화(太和)가 태운(泰運)을 회복하는 절후를 당하여 감히 장락궁(長樂宮)009)  에서 호숭(呼嵩)010)  하는 의식을 모방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은혜는 자천(慈天)에 깊었고 정성은 날이 가는 것을 아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만분의 일이나마 이런 마음을 모사(摸寫)해 내는 뜻에서 감히 변변찮은 정성을 조금 바치오니, 구오(九五)011)  의 강녕(康寧)을 누리시면서 오직 복록(福祿)이 더욱 성대해지기 바랍니다."
하고, 혜경궁에 친히 전문을 올리기를,
"자애로운 화기(和氣)가 두루 퍼지니 북두칠성[璇杓]이 바로 삼시(三始)012)  의 방향에 속해 있고, 길한 경사가 점차 이르니 보령(寶齡)은 꼭 칠순(七旬)을 넘었습니다. 어떻게든지 하찮은 정성을 펴기 위해 이에 이전(彛典)을 따라 행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 (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邸下)께서는 존엄하신 수모(壽母)로서 돈후한 마음으로 다시 성인(聖人)을 탄생시키시었으며, 장추궁(長秋宮)013)  을 화락하게 모셨으니 이런 큰 복을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보호를 받았으니 후손을 위한 연모(燕謨)014)  를 물려주신 것입니다. 아! 큰 복이 천년토록 이어갈 것이고 엄연한 봉력(鳳曆)은 팔순(八旬)의 장수를 누릴 것입니다. 자극(慈極)의 회갑(回甲)을 맞는 경사가 한꺼번에 일시에 이르렀으니, 생각건대, 보주(寶籌)가 을묘년015)  의 환갑의 아름다움이 있은 뒤 또 10년을 더 보태게 되었습니다. 이에 창륙(蒼陸)에 덕을 펴는 절후를 당하여 대강 동정(彤庭)016)  에서 복을 비는 정성을 바칩니다.
삼가 생각건대, 큰 음덕(陰德)을 우러러 의지하여 삼가 큰 서업(緖業)을 이어받게 된 것입니다. 겸손하신 깊은 마음에서 비록 책보(冊寶)에 드러내어 누차 찬양하는 것을 사양하고 계시지만 하늘이 내려 주신 경사가 이제 이르렀으니, 실로 욕의(縟儀)를 겸하여 거행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황승원(黃昇源)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9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語文學)


[註 003] 표리(表裏) : 옷의 겉감과 안찝.[註 004] 욕례(縟禮) : 번잡한 예식.[註 005] 구면(裘冕) : 대구(大裘)와 면관(冕冠). 교사(郊祀) 등의 대사(大事)가 있을 때 입는 천자(天子)의 성복(盛服)으로, 여기서는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 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수렴 청정(垂簾聽政)한 것을 가리킴.[註 006] 염유(簾帷) : 수렴 청정을 가리킴.[註 007] 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註 008] 연모(燕謨) : 편안하게 할 계획.[註 009] 장락궁(長樂宮) : 한(漢)나라 고조(高祖) 5년에 모후(母后)를 받들기 위해 세운 궁전으로, 혜제(惠帝) 이후 황제의 모후는 이곳에 거처하였음. 황제가 거처하는 미앙궁(未央宮)은 서쪽에 있는 데 반해 이 궁전은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조(東朝)라고 함.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대왕 대비(大王大妃)와 대비전(大妃殿)을 가리키는 말로 쓰임.[註 010] 호숭(呼嵩) : 서로 따라 송축(頌祝)함.[註 011] 구오(九五) : 여기서는 《서경》의 홍범구주(洪範九疇)에서 오복(五福)을 말한 것임.[註 012] 삼시(三始) : 정월 초하루.[註 013] 장추궁(長秋宮) : 후한(後漢) 때 황후가 있는 궁인데, 여기서는 왕대비를 지칭함.[註 014] 연모(燕謨) : 편안하게 할 계획.[註 015] 을묘년 : 1795 정조 19년.[註 016] 동정(彤庭) : 궁전(宮殿).

 

반교문(頒敎文)에 이르기를,
"신극(宸極)의 정성이 미더우니 지극한 즐거움을 만세(萬歲)토록 받들게 되었고, 전궁(殿宮)에 칭하(稱賀)하니 길한 경사가 삼원(三元)017)  에 겹쳐 이르렀다. 이에 세 번 호숭(呼嵩)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십행(十行)의 고문(誥文)을 반포한다.
돌아보건대, 소자(小子)는 어린 상태에서 바로 태모(太母)에게 보호해 주신 공덕을 받고 자랐다. 염유(簾帷)에 광림(光臨)하심을 우러러 4년 동안 개도(開道)해 주시는 훈계를 받들었으며, 면구(冕裘)의 조용한 모습을 받들매 팔방이 자애로 감싸준 인자함을 송축하였다. 대의(大義)를 일월(日月)처럼 밝혀 이에 선조(先朝)의 모열(謨烈)을 천명하였으며 성대한 혼례(婚禮)는 주량(舟梁)018)  의 제도를 거행하여 백세토록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번창할 길을 열어놓았다. 나라의 운명이 지금에 이르도록 아름다움을 누리게 되었는데도 훌륭하신 덕을 지녀 자신의 공을 참여시키지 않았다.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를 누리게 되는 것이니, 끝이 없기를 송축한다.
이에 황천(皇天)이 산처럼 큰 복을 내렸는데, 바로 이 해가 사록(沙麓)019)  의 기년(紀年)이 돌아온 해인 것이다. 명협(蓂莢)020)  의 잎사귀가 처음 돋아나니 봄 햇살이 바로 삼양(三陽)021)  에 속해 있고, 보주(寶籌)가 더욱 높으니 천성(天星)이 곧 육갑(六甲)을 한바퀴 돌았다.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고사(故事)를 상고하건대, 진실로 옥첩(玉牒)을 선양(宣揚)하기에 합당하고, 나의 영고(寧考)022)  의 효성스러움을 추념(追念)하니 어찌 요상(瑤觴)을 올려 크게 드러내는 행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 자궁(慈宮)께서 팔순(八旬)을 바라보는 장수를 누리게 된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아주 드물게 있는 기회인 것이다. 과궁(寡躬)이 의지하여 보호받은 것이 더욱 깊었으므로 장락궁(長樂宮)에서 화락한 안색으로 받들어 모셨다. 돌아보건대, 하찮은 정성이지만 장수하신 것이 기쁘고 앞으로 모실 날이 얼마 안 남은 것이 두려운 마음 함께 간절하여 신원(新元)에 큰 복이 내릴 것을 빌었다. 50세, 60세에서 더욱 장수하여 강녕(康寧)을 누리라고 한 노궁(魯宮)023)  의 기쁜 연회가 부러울 것이 뭐 있겠는가? 넓고 두터우며 영원한 정성은 실로 헌원씨(軒轅氏)의 1백 세와 똑같이 되기를 바란다.
보갑(寶甲)에 휘호(徽號)를 선양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사양하는 의덕(懿德)을 돌이킬 수 없었는데, 자위(慈闈)께서 같은 경사를 만나셨으므로 우선 군정(群情)의 송축하고 기뻐하는 뜻을 따르게 되었으며, 마침 만백성이 고루 기뻐하는 일을 맞게 되어 이에 두 경사를 아울러 칭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북두칠성[璇杓]의 숙기(淑氣)를 바야흐로 맞이하였으니 이날은 오직 인일(人日)024)  이고, 보력(寶曆)의 경사스런 운수가 더욱 창성하게 되도록 하늘이 나를 도울 것이다. 인정과 예문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바로 아름다운 휘호를 선양하기에 마땅하고, 아름다운 상서(祥瑞)가 이제 이르니 어찌 풍정(豊呈)을 올리는 길한 날을 늦출 수 있겠는가? 감싸 길러줌을 받은 모든 사람이면 그 누가 마음으로부터 기뻐서 날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날이 가는 것을 아끼는 정성에 있어 바야흐로 1백 세의 많은 장수를 누릴 것을 축수하는 마음이 간절한데, 온 나라 안에서 노래하고 송축하니 태평이 올 아름다운 징조를 점칠 수 있다.
이달 초7일 매상(昧爽) 이전부터 시작해서 잡범(雜犯)의 사죄(死罪) 이하는 죄다 사유(赦宥)하여 면제시키라. 천지처럼 살리기 좋아하는 덕이 이미 동물(動物)·식물(植物)에까지 모두 감싸 주었으니, 뇌우(雷雨)가 가뭄을 풀듯이 의당 하자(瑕疵)를 다 씻어 주어야 한다. 아! 북두(北斗)와 남산(南山)처럼 장수하기를 비는 것이 어찌 나 한 사람의 경사에 그칠 뿐이겠는가? 춘대(春臺)025)  의 수역(壽域)에 오르는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같이 아름답게 여겨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때문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의당 모두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황승원(黃昇源)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497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語文學)


[註 017] 삼원(三元) : 정월 초하루.[註 018] 주량(舟梁) :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후비(后妃)를 위수(渭水)에서 맞이할 때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만들어 맞아왔다고 한 데서 연유된 말로, 임금의 친영(親迎)을 뜻함.[註 019] 사록(沙麓) : 춘추 시대 진(晉)나라에 있던 토산(土山)의 이름인데, 이 토산이 무너지자 일관(日官)이 "645년 뒤에 성녀(聖女)가 태어날 것이다."고 예언하였음. 그 뒤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후(后)인 원후(元后)가 이곳에서 태어나 645년 뒤인 애제(哀帝)가 죽은 뒤 섭정(攝政)하였음.[註 020] 명협(蓂莢) : 요제(堯帝) 때 조정의 뜰에 난 서초(瑞草)로, 초하룻날부터 한 잎씩 나서 자라고 16일부터는 한 잎씩 져서 그믐에 이른다고 함. 전(轉)하여 달력의 뜻으로 쓰임.[註 021] 삼양(三陽) : 《주역(周易)》 괘(卦)의 세 양효(陽爻). 여기에서는 삼(三)은 오행(五行)에서 목(木)에 속하고 목은 사시(四時)에서 봄에 속하므로, 정월(正月)에 이르는 말로 쓰임.[註 022] 영고(寧考) : 정조(正祖).[註 023] 노궁(魯宮) : 《시경(詩經)》 노송(魯頌)편의 비궁(閟宮)장을 말함.[註 024] 인일(人日) : 정월 초7일.[註 025] 춘대(春臺) : 태평성대.

 

특지(特旨)로 부사과 김용주(金龍柱)를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김용주는 대왕 대비의 종제(從弟)이다.

 

하교하기를,
"오늘은 곧 대왕 대비전의 보갑(寶甲)이 곧 돌아오고 혜경궁의 팔순(八旬)을 바라 보는 탄일(誕日)을 칭하하는 날로 두 경사가 한꺼번에 이르렀으니, 큰 복록은 끝이 없겠다. 힘써 동조(東朝)께서 사양하는 성심(聖心)을 돌이켜 장차 보책(寶冊)을 올리려 하는 것은 장수를 축원하는 정성을 펴는 나머지에 이는 전례(典禮)가 지극히 중하고 체모(體貌)도 지극히 존엄한 것이다. 자궁(慈宮)께서 굳게 사양하시는 지극한 뜻을 받들어 따라서 단지 칭하하는 일만 행하고 휘호를 올리는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은 기쁨을 기록하는 뜻을 부친 가운데 정리(情理)에 몹시 마땅하고 계술(繼述)하는 일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廷臣)들은 기뻐서 송축하는 날 나의 이런 뜻을 알아주기 바란다."
하고, 이어 표리(表裏)를 친히 올릴 적에 마주 들어준 승지인 우승지 민창혁(閔昌爀), 좌부승지 이보천(李普天)에게 가선 대부를 가자(加資)하고, 통례 유전(柳烇)·윤우열(尹羽烈)에게는 통정 대부를 가자하고, 치사관(致詞官) 이하에게는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라고 명하였다. 조신(朝臣) 가운데 61세가 된 사람에게 추은(推恩)하는 것은 또한 선조(先朝) 을묘년026)  의 전례에 의거 거행하게 하였다. 이경운(李庚運)·최헌중(崔獻重)·신봉조(申鳳朝)·김처한(金處漢)·오재광(吳載光)·박종주(朴宗柱)·서유화(徐有和)에게는 가선 대부를 가자하였고, 신대귀(申大龜)·김일주(金日柱)·변경우(邊景祐)·권행언(權行彦)·이채(李采)·박종우(朴宗羽)·송수연(宋守淵)에게는 통정 대부를 가자하였다.

 

시망(諡望)에 대해 하비(下批)하였다. 증 이조 판서 이상(李翔)에게는 문목(文穆)을, 증 이조 판서 민익수(閔翼洙)에게는 문충(文忠)을, 공조 판서 윤봉구(尹鳳九)에게는 문헌(文獻)을, 증 좌참찬 민우수(閔遇洙)에게는 문원(文元)을, 증 이조 판서 송명흠(宋明欽)에게는 문원(文元)을, 증 이조 판서 김원행(金元行)에게는 문경(文敬)을, 증 이조 판서 김양행(金亮行)에게는 문간(文簡)을, 증 이조 판서 박재원(朴在源)에게는 충헌(忠獻)을, 증 도승지 정백형(鄭百亨)에게는 충경(忠景)을, 우참찬 박수량(朴守良)에게는 정혜(貞惠)를, 증 좌찬성 이유민(李裕民)에게는 정민(貞敏)을, 증 영의정 조상경(趙尙絅)에게는 경헌(景獻)을, 영의정 한익모(韓翼謨)에게는 문숙(文肅)을,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에게는 효정(孝靖)을, 지돈녕 박필균(朴弼均)에게는 장간(章簡)을, 지중추 홍봉조(洪鳳祚)에게는 효간(孝簡)을, 이조 판서 윤급(尹汲)에게는 문정(文貞)을, 이조 판서 남태제(南泰齊)에게는 청헌(淸獻)을, 이조 판서 서호수(徐浩修)에게는 문민(文敏)을, 예조 판서 심풍지(沈豊之)에게는 정간(貞簡)을 시호로 내렸다.

 

진호 경과(進號慶科)를 정시(庭試)로 하도록 명한 것은 법전(法殿)의 준공이 경사와 합쳤기 때문이었다.

 

1월 9일 갑오

제도(諸道)의 봄 조련(操鍊)을 정지시켰다.

 

1월 10일 을미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박종경(朴宗慶)·김이영(金履永)·임한호(林漢浩)를 발탁하여 아경(亞卿)027)  으로 삼았는데, 좌의정 서매수(徐邁修)가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삼남(三南)의 솜이 귀한 고을의 대동목(大同木)과 영동(嶺東)의 재상(災傷)을 당한 고을의 정퇴(停退)한 대동포(大同布)는 돈으로 상납하게 하고, 관서(關西)의 재상을 당한 읍진(邑鎭)의 신삼(信蔘)을 정퇴한 것은 금년과 명년에 나누어 배정하여 상납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였는데, 이는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의 말을 따른 것이다.

 

특별히 대사헌 윤광보(尹光普) 등을 삭직시켰는데, 조참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大臣)이 대사성 이문회(李文會)가 기한 안에 승상(陞庠)을 감단(勘斷)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삭직시킬 것을 청하고, 전라 감사 정대용(鄭大容)의 전최(殿最)028)  에는 중(中)과 하(下)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으로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종래(朴宗來)를 이조 참판으로, 정동관(鄭東觀)을 참의로, 김면주(金勉柱)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권상신(權常愼)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심상규(沈象奎)를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대왕 대비가 미령(未寧)하였으므로, 약원(藥院)에 직숙(直宿)하라고 명하였다.

 

1월 11일 병신

약원에서 모두 직숙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삼제조(三提調)를 소견(召見)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또 함경 감사 이익모(李翊模)의 전최(殿最)에 중(中)과 하(下)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으로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2일 정유

대왕 대비에게 진어할 인삼(人蔘) 일냥쭝을 넣은 삼귤음(蔘橘飮) 1첩(貼), 일냥쭝을 넣은 삼계음(蔘桂飮) 2첩을 달여서 들여오도록 명하였다.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고 태추문(泰秋門) 안으로 옮겨서 직숙하라고 명하였다. 약원의 삼제조와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을 소견(召見)하였다.

 

묘사궁(廟社宮)과 산천(山川)에 기도하라고 명하였다.

 

오시(午時)에 대왕 대비가 경복전(景福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빈전(殯殿)은 환경전(歡慶殿)에 설치하고 혼전(魂殿)은 문정전(文政殿)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 호조 참판 김노충(金魯忠), 부호군 김용주(金龍柱), 승지 김재창(金在昌), 전 현령 김재삼(金在三), 감찰 정의(鄭漪),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 호조 정랑 김사희(金思羲), 호조 좌랑 김사직(金思稙), 현감 김노경(金魯敬), 전 참봉 박제일(朴齊一), 대사헌 김면주(金勉柱)를 종척 집사(宗戚執事)에 차임하였다.

 

이조에서 수릉관(守陵官)은 서춘군(西春君) 엽(燁)으로, 총호사(摠護使)는 서매수(徐邁修)로, 빈전 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는 한용귀(韓用龜)·조상진(趙尙鎭)·민태혁(閔台爀)으로,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는 조진관(趙鎭寬)·이의필(李義弼)·한만유(韓晩裕)로,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는 임시철(林蓍喆)·김면주(金勉柱)·이면긍(李勉兢)으로 계하(啓下)하였다.

 

임시(壬時)에 대행 대왕 대비(大行大王大妃)의 목욕(沐浴)을 행하였고, 자시(子時)에 염습(殮襲)하였다.

 

1월 13일 무술

신시(申時)에 대행 대왕 대비의 소렴전(小斂奠)을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1월 14일 기해

재궁(梓宮)의 안에 바르는 일과 관의(棺衣)를 채보(彩黼)로 하는 것은 정축년029)  의 예(例)에 의거해서 하라고 명하였다. 비단붙이는 대내(大內)에서 내렸다.

 

1월 15일 경자

오시(午時)에 영상(靈牀)을 환경전으로 옮겨서 봉안(奉安)하였다.

 

1월 16일 신축

정시(丁時)에 대행 대왕 대비의 대렴(大斂)을 행하고 이어 재궁(梓宮)에 봉하(奉下)하였으며, 성빈전(成殯奠)을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재궁의 바깥 길이는 7척(尺) 2촌(寸)이고, 밖의 너비는 2척 8촌이고, 바깥의 높이는 2척 6촌 3푼이다. 안의 길이는 6척 6촌이고, 안의 너비는 2척 2촌이고, 안의 높이는 2척 3푼이며, 두께는 3촌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98면
【분류】왕실(王室)

 

빈전 도감에서 아뢰기를,
"재궁을 새로 만들어 토우(土宇)에 두었을 적에는 외면의 옻칠을 두 번 하고 그뒤로 하루 걸러 또는 이틀 걸러 한 번씩 스물 아홉 번을 하는데, 옻칠이 고르게 펴진 뒤 또 네 번을 더 칠합니다. 경술년030)  ·갑진년031)  의 예(例)에 의거 서른 다섯 번 칠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개 재궁의 구합목(舊合木)은 척량(尺量)이 모두 부족한 탓으로 신합목(新合木)을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

 

전 전라 감사 정대용(鄭大容)이 임소(任所)에서 졸(卒)하였다.

 

1월 17일 임인

진시(辰時)에 성복(成服)하였다. 【복제(服制)의 의주(儀注)는 이러하다. 전하(殿下)는 자최(齊衰) 3년이고, 왕대비(王大妃)·왕비(王妃)·혜경궁(惠慶宮)·가순궁(嘉順宮)은 자최 3년이며, 내명부(內命婦)의 빈(嬪) 이하는 자최 3년이고, 상궁(尙宮)·수규(守閨) 이하는 자최 3년이고, 친녀(親女)는 자최 3년이며, 친손녀(親孫女)는 자최 기년(朞年)이고,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은 자최 기년이며, 종친과 문무 백관의 아내는 졸곡(卒哭)에 제복(除服)하고, 동성(同姓)·이성(異姓)의 시마(緦麻) 이상의 친척은 시임(時任)·전함(前銜) 및 무직인(無職人)을 막론하고 자최 기년을 백관들과 함께 하고, 동성·이성의 시마 이상의 딸은 자최 기년을 친손녀의 복(服)과 같게 하고, 수릉관(守陵官)과 시릉 내시(侍陵內侍)는 자최 3년이고, 내시(內侍)·사알(司謁)·사약(司鑰)·반감(飯監)은 자최 3년이고, 사서인(士庶人)은 기년에 제복(除服)하고, 자최를 받지 않은 사람의 아내와 서인(庶人)의 딸은 모두 백의(白衣)를 입고 졸곡이 지나면 제복한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98면
【분류】왕실(王室)

 

오정원(吳鼎源)을 고부사(告訃使)로, 강준흠(姜浚欽)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좌의정 서매수(徐邁修)가 아뢰기를,
"대행 대왕 대비전에 존호(尊號)를 더 올리는 것에 대해 전에 이미 의정(議定)하여 직접 올렸습니다만, 아직 책보(冊寶)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산 사람을 섬기듯이 하는 의리에 있어 그대로 빈전(殯殿)에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상호 도감(上號都監)은 또한 이미 차출하였습니다만, 당상과 낭청은 사체를 중하게 하는 도리에 의거하여 헤아려 보건대, 이번의 도감과 합설(合設)해서는 안됩니다. 신의 의견에는 전에 설치한 도감을 즉시 회동(會同)하게 하여 시호(諡號)를 올리기 전에 길일(吉日)을 가려 책보를 올리는 것이 아마도 예의(禮意)에 합당할 것 같기에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들에게 하순(下詢)하기를,
"각기 의견을 진달하라. 옥책문(玉冊文)의 내용을 구성함에 있어 이런 때에 구애되는 단서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서도 의견을 진달하라."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병모(李秉模), 판부사 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 우의정 이경일(李敬一) 등이 모두 말하기를,
"애사(哀事)와 경사(慶事)가 다르기는 하지만, 합설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상호 도감을 합설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의필(李義弼)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서영보(徐榮輔)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조상진(趙尙鎭)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좌의정 서매수가 약을 맛보는 직책에 있으면서 망극한 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때에 이르러 대명(待命)하니,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양사(兩司) 【장령 김희화(金熙華), 지평 이계(李㬖), 대사간 조윤수(曹允遂), 사간 조태영(趙台榮), 헌납 김시근(金蓍根), 정언 김염(金鐮)이다.】 에서 아뢰기를,
"시약(侍藥)한 의원(醫員)들을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바루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월 18일 계묘

좌의정 서매수(徐邁修)가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감죄(勘罪)하여 줄 것을 청하였으나,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려 안심하고 일을 보게 하였다.

 

김면주(金勉柱)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시임·원임 대신과 육조(六曹)의 장아(長亞)032)  ·당상, 양사의 장관, 관각(館閣)의 당상이 빈청(賓廳)에 모여 대행 대왕 대비전의 시호를 정(貞)  【큰 계책을 잘 성취시키는 것이다.】 순(純) 【중정(中正)하고 정수(精粹)한 것이다.】 이라고 하고, 휘호(徽號)는 소숙 정헌(昭肅靖憲), 전호(殿號)는 효안(孝安), 능호(陵號)는 경릉(景陵)으로 의정(議定)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의 이 망극한 슬픔은 나의 효성이 천박(淺薄)한 데 연유된 것이지만, 대계(臺啓)에 대해 아뢴 대로 윤허한 것은 곧 사면(事面)을 중히 하고 국체(國體)를 보존시키기 위한 뜻에서였다. 그런데 정축년033)   성교(聖敎)에서는 자전(慈殿)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 특별히 의원들을 석방시켰다. 그리고 이어 뒤의 임금들은 나의 이런 뜻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고 전한 훈계가 분명하니, 오늘날에 있어 어찌 감히 우러러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원들을 특별히 모두 분간(分揀)하여 방송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9일 갑진

약원·빈청·승정원·옥당에서 잇따라 힘써 상선(常膳)을 진어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다가 누차 아뢰고서야 이를 허락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와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의하면, 졸곡(卒哭) 뒤의 시사복(視事服)은 베로 싼 익선관(翼善冠), 포포(布袍), 베로 싼 오서대(烏犀帶), 백피화(白皮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공제(公除)034)   뒤와 졸곡 전의 시사복에 대해서는 증거할 만한 예문(禮文)이 없습니다. 정축년035)  ·병신년036)  ·경신년037)  에는 모두 대내(大內)에서 써서 내려서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만들어 들여오게 했었습니다. 지금도 이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렇게 하게 하였다.

 

빈전(殯殿)에 나아가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1월 20일 을사

예조 판서 한용귀(韓用龜), 도감 당상 김면주(金勉柱), 관상감 제조 조진관(趙鎭寬)이 산릉(山陵)을 간심(看審)하는 일 때문에 나갔었는데, 여차(廬次)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간심을 행하는 것을 의당 원릉(元陵)에서부터 시작하였던가?"
하니, 한 용귀가 말하기를,
"먼저 원릉에 나아가 봉심(奉審)한 뒤 각릉(各陵)의 국내(局內)에 봉표(封標)한 여러 곳도 또한 똑같이 간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릉과 같은 등성이에 신조(新兆)038)  를 점지할 경우 연운(年運)이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조진관이 말하기를,
"만일 원릉과 같은 등성이에다 한다면 금년에는 곧 이로운 것이 작은 연운입니다만, 여러 곳의 봉표에 기록된 것을 가져다가 상고하여 보니 ‘구영릉(舊寧陵)의 좌우 등성이에는 모두 길지(吉地)가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구영릉이라고 한 것은 곧 지금의 원릉을 말하는 것입니다. ‘좌우의 같은 등성이에 있는 각처(各處)의 연운도 또한 모두 길하고 이롭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명릉(明陵)의 전례에 의거하여 원릉과 같은 등성이에 길지(吉地)를 점지할 수 있게 된다면 정리(情理)와 사체에 있어 모두 흡족하게 될 것이다. 경 등은 모쪼록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 두루 상세히 간심토록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우주(虞主)039)  를 만드는 것과 봉안할 처소(處所)에 대해 계품(啓稟)하니, 경신년040)  의 전례에 의거하여 하라고 하교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함경도 관찰사로, 이윤겸(李潤謙)을 배왕 대장(陪往大將)으로 삼았다.

 

빈전에 나아가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1월 21일 병오

빈전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이집두(李集斗)를 혼전 당상(魂殿堂上)에 차임하였는데, 이는 민태혁이 외임(外任)으로 나가기 때문이었다.

 

1월 22일 정미

산릉 당상(山陵堂上) 임시철(林蓍喆)을 병 때문에 체직시키고, 조윤대(曹允大)로 대신하였다.

 

산릉을 간심한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신 등이 상지관(相地官)과 행 호군(行護軍) 정욱(鄭旭)·김상택(金尙澤), 행 부호군 최익(崔翼), 광릉 영(光陵令) 김응일(金應一), 장악원 주부 윤수구(尹守九) 등과 더불어 원릉(元陵)의 능 윗쪽의 왼편을 간심하고 나서 다음으로 구목릉(舊穆陵)의 오른쪽 등성이와 숭릉(崇陵) 오른쪽 신좌(申坐)의 봉표(封標)가 된 곳으로 나아가 간심했는데, 지사(地師)들이 모두 말하기를, ‘원릉의 능 윗쪽의 왼편은 혈성(穴星)이 존엄하고 안대(案對)가 균정(均正)하여 참으로 조금도 결점이 없는 대길지(大吉地)이다. 오른쪽 원혈(原穴)이 다 좋고 다 아름다운 것으로 더불어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구목릉 오른쪽 등성이와 숭릉의 오른편에 이르러서는 용혈(龍穴)과 사수(砂水)가 또한 모두 안길(安吉)하지만 원릉의 왼쪽과 견주면 오히려 두어 격(格)이 감소된다. 건원릉(健元陵) 왼쪽의 한 등성이와 구영릉(舊寧陵)의 청룡(靑龍) 쪽에는 부족한 점이 많이 있어 의의(擬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1월 23일 무신

여차(廬次)에서 산릉을 간심한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예조 판서 한용귀(韓用龜)가 말하기를,
"지사(地師)들이 말한 내용에 이곳은 과연 조금도 결점이 없는 대길지(大吉地)라고 하였습니다. 원릉의 국내(局內)와 각릉의 국내에 있는 여러 곳을 또한 모두 봉심했습니다만, 모두 원릉의 국내에 비어 있는 왼쪽 땅이 혈성(穴星)이 존엄하고 광명하여 원혈(原穴)과 조금도 뒤질 것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신 등의 범안(凡眼)으로 살펴보아도 또한 조금도 결점이 없는 대길지로 여겨졌습니다. 망극한 가운데 아주 몹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행 대왕 대비전께서는 평소 백성을 돌보고 비용을 아끼신 성대한 덕은 곧 팔도의 백성이 다같이 우러러 알고 있는 것이다. 뒷날의 경용(經用)을 우려하시어 비록 의금(衣衾) 등의 차림일지라도 일체 모두 미리 준비하여 두셨고 또 은자(銀子) 3천 냥과 기타 필요한 데 들어갈 각가지 색깔의 비단붙이도 또한 조처하여 두셨으니, 아! 성대하도다. 소자(小子)는 이것을 보고 더욱 더 목이 메어진다. 삼가 그 유의(遺意)를 받들어 장사(葬事)를 담당하여 준비하는 신하들에게 반포하여 보이노니, 각기 이런 뜻을 삼가 준행토록 하라. 이를 인하여 생각건대, 이번 각 도감에서 일을 거행함에 있어 폐단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진배(進排)하는 물종(物種)을 한결같이 구식(舊式)을 따라 두려운 마음가짐으로 생각하여 살펴 계칙함으로써 하속(下屬)들이 중간에서 조종하여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빈전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좌의정 서매수(徐邁修)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거조(擧條)에 대해 내린 비지(批旨)를 살펴보건대, 상호 도감(上號都監)을 합설(合設)하여 거행하라는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옥책(玉冊)과 시책(諡冊)은 아름다운 덕을 천양(闡揚)하는 데 있어서는 똑같습니다만, 애사(哀事)와 경사(慶事)라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죽은 이 섬기는 것을 산 사람 섬기듯이 하는 것은 정성을 다하고 효도를 극진히 한다는 데 있어서는 똑같은 것입니다만, 절문(節文)은 같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 도감에 차출한 당상과 낭청은 전에 휘호를 의정(議定)하여 직접 올렸던 처음에 있었으니, 옥(玉)을 다듬고 금(金)을 새기는 데 관계된 모든 공역(工役)은 의당 당초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맡긴 연후에야 국체(國體)를 존엄하게 하고 사면(事面)을 중하게 할 수 있습니다. 대신(大臣)들이 합설하는 것이 온편하다고 한 의논은 경비를 진념(軫念)하여 힘써 간략하게 줄이는 쪽을 따르려는 뜻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의 의견은 이런 등등의 부분에 대해서는 의당 국체와 사면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사소한 경비는 또한 돌볼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바라건대, 신의 차자를 가지고 다시 대신들에게 하순(下詢)하시어 막중한 예전(禮典)으로 하여금 의제(儀制)를 완벽하게 갖추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다시 하순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 대신들이 이의(異議)가 없다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졸곡(卒哭) 전에 당전(當殿) 이하 능전(陵殿)·궁원(宮園)·묘묘(廟墓)에서 향(香)을 받는 것과 분향(焚香)할 때의 복색(服色)은 이왕의 전례에 의거하여 모두 최복(衰服)으로 마련했습니다만, 이제 《보편(補編)》에 의거하건대, 졸곡 전 공사(公事)에 관계된 일에는 베로 된 공복(公服)을 입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향을 받거나 분향할 때의 복색(服色)도 의당 공복에 의거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컨대,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마땅하다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25일 경술

빈전에 나아가 주다례를 행하였다.

 

산릉을 재차 간심한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신 등이 상지관(相地官)을 데리고 당일 오시(午時)에 원릉의 능 윗쪽 왼편으로 달려가서 주봉(主峯)에서 혈처(穴處)에 이르기까지 다시 상세히 간심했는데, 지사(地師)들이 모두들, ‘혈성(穴星)의 존엄함과 체세(體勢)의 균정(均正)함이 처음 간심할 때에 견주어 더욱 분명함을 깨닫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신 등의 범안(凡眼)으로도 더없는 대길지(大吉地)임을 알 수 있었으니,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에 의거 헤아리건대, 일마다 흡족하게 되어 더없이 다행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비록 다른 곳에 이와 대등한 자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이를 버리고 저것을 취할 수 없는데, 더구나 국내(局內)의 두 곳을 두루 살펴보고 의의(擬議)하는 사람들이 용세(龍勢)와 수법(水法)에 차등이 나는 것이 현저하게 드러나 대등한 위치에 두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릉(本陵)의 왼편은 지세(地勢)가 평탄하게 여유가 있어서 상석(象石)의 설치를 물려서 안배하기에 충분하였으며, 곡장(曲墻) 밖의 보토(補土)할 곳은 수십 척(尺) 안팎에 불과하였습니다. 이어 여러 지사들과 함께 정혈(正穴)의 좌향(坐向)에 대해 되풀이하면서 상의했는데, 모두들 오른쪽의 원혈(原穴)에 따라 또한 해좌 사향(亥坐巳向)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우선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산릉을 결정하는 하교가 있기를 기다린 다음 전례에 의거 봉표(封標)한 뒤 이어 되돌아갈 계획으로 있습니다. 봉표하는 곳이 이미 본릉의 곡장 안쪽에 있으니, 고유(告由)하는 절차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살펴 마련하게 하소서. 봉표에 관한 길일(吉日)·길시(吉時)도 또한 추택(推擇)하여 계하(啓下)해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1월 26일 신해

빈전(殯殿)에 나아가 아침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산릉을 봉표하는 길일은 정월 27일로 택정(擇定)하였으며 원릉의 고유제(告由祭)도 같은 날에 설행하게 했는데, 예조의 아룀을 따른 것이다.

 

1월 27일 임자

빈전에 나아가 주다례를 행하였다.

 

산릉을 간심한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이달 27일 묘시(卯時)에 신 등이 지사들을 데리고 가서 다시 봉심(奉審)하고 나서 해좌 사향(亥坐巳向)으로 정혈(正穴)을 재정(裁定)한 뒤 전례에 의거 봉표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파자(把子)를 빙 둘러 설치하여야 하는데, 본릉(本陵)에 핍근(逼近)하여 미안스러운 점이 있기에 단지 유지(油紙)·도기(陶器)·초석(草席) 등의 물건으로 둘러싸서 묶어놓고 봉서(封署)041)  하였습니다."
하였다.

 

산릉을 재차 간심한 여러 신하들을 여차(廬次)로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 서매수가 말하기를,
"봉표한 곳에 대해 지사들이 모두들 조금도 원조(原兆)만 못하지 않다고 하였으니, 더없이 다행스러운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봉표한 곳이 원조와의 거리가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가?"
하였다. 서매수가 말하기를,
"두 능침의 석물(石物)을 각각 배설할 경우에는 다만 재혈(裁穴)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될까 염려스러울 뿐만이 아니라, 보토(補土)하는 역사가 지나치게 호대(浩大)하게 됩니다. 만일 숭릉(崇陵)의 제도를 준행하여 두 능침 사이에 상석(象石)의 설치를 통틀어 안배한다면, 곡장(曲墻)을 원지(原地)에 쌓을 수 있고 보축(補築)도 단지 훈대(暈臺)에만 있게 되어 조역(兆域)의 형체가 또한 매우 넓고 짜임새 있게 되겠습니다. 그러나 본릉(本陵)의 난간 횡석(欄干橫石) 두 개, 수석(竪石) 세 개, 면우석(面隅石) 네 개는 형편상 이동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은 반드시 품정(稟定)한 연후에야 봉행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동하는 곳이 어느 방위(方位)인가?"
하였다. 서매수가 말하기를,
"본릉의 인방(寅方)입니다."
하고, 도감 당상 이면긍(李勉兢)은 말하기를,
"신 등이 숭릉(崇陵)의 상석 설치를 봉심하였는데, 대왕릉의 자방(子方)과 왕비릉의 오방(午方)의 주석(柱石)과 면우석(面隅石)을 모두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양쪽편의 난간이 활처럼 굽어 연접(聯接)된 곳의 상하 두 석주(石柱)의 모가 난 것이 앞쪽 두 모퉁이로 나와 있었고, 축(丑)·미(未)·사(巳)·해(亥)의 방위를 나누어 써놓은 아래로 석구(石溝)를 설치하여 두 능 사이의 수도(水道)를 통하게 했습니다. 지금 만약 이 제도를 모방하여 할 경우에는 인방(寅方)의 석물을 철거하고 축(丑)·묘(卯) 방위의 석물을 다시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결같이 숭릉의 제도를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인산(因山)은 이미 구능침(舊陵寢)과 같은 등성이에다 하게 되었는데, 상석의 설치를 새로 배치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는가?"
하니, 서매수가 말하기를,
"단지 혼유석(魂遊石)·난간석(欄干石)만 새로 배치하면 되는데, 난간과 곡장은 전의 것에다 연결시켜 빙 둘러싸게만 할 뿐입니다. 정자각(丁字閣)은 이미 본래의 정자각이 있기 때문에 다른 가각(假閣)을 건립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헐어버리면 됩니다. 단지 견고하게만 할 뿐이요 화려하고 아름답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빈전 당상 한용귀(韓用龜)가 아뢰기를,
"재궁(梓宮)에 옻칠을 하는 도수(度數)는 기해년042)  ·갑진년043)  ·경신년044)  의 예(例)에 따라 토우(土宇)에 있을 때 두 번 하는 이외에 스물 아홉 번을 더 칠하고 칠한 옻칠이 고루 펴진 뒤에 또 네 번을 더 칠하여 서른 다섯 번의 회수를 기준으로 하겠다는 초기(草記)를 윤하(允下)하였습니다. 정축년045)  ·병신년046)  ·경신년에는 은정(銀釘) 위에다 옻칠을 열 번 하여 옻칠이 고루 펴진 위에다 또 열 번을 더 칠하였으며, 또 전체에다 다섯 번을 더 칠했습니다. 이에 옻칠이 펴진 다음 네 번 더 칠한 뒤 전체에 칠을 하지 않는다면 광택에 흠결이 있게 될까 우려스러우니, 스물 네 번 칠한 뒤에 이어 네 번을 더 칠하고 나서 또 전체에다 다섯 번을 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청컨대, 이에 의거 다시 마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익모(李翊模)를 한성부 판윤으로, 이윤겸(李潤謙)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1월 28일 계축

빈전에 나아가 아침 상식(上食)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총호사(摠護使)·예조 당상·서운관 제거(書雲觀提擧)가 청대(請對)하니, 여차(廬次)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 서매수(徐邁修)가 아뢰기를,
"인산례(因山禮)를 행해야 할 달이 5월에 있게 되므로 신 등이 빈청에 모여 일관(日官)을 불러다가 충분히 상의하였는데, ‘사(巳)·오(午) 두 달은 구기(拘忌)가 있어 의의(擬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삼가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조사하여 보건대, 물려서 행한 전례는 이미 많았으며 앞당겨 정한 경우도 열 네 번이나 됩니다. 이제 만약 6월 순간(旬間)이나 6월 절(節) 이후로 물린다면 24일이 길일(吉日)이 되고, 4월 순전(旬前)이나 3월 절(節) 이내로 앞당긴다면 초7일이 길일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절(禮節)이 매우 중대하여 앞당기고 물리는 것에 모두 어려운 점이 있으니, 청컨대 대신들에게 널리 순문(詢問)하여 예전(禮典)에 합치되게 하도록 힘쓰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망극한 가운데 산릉을 원릉(元陵)과 같은 등성이에다 정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에 있어 매우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이번에는 새로 정한 능호(陵號)를 쓸 필요가 없으니, 해조(該曹)에서는 알고 있으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인산례(因山禮)를 행하는 달을 앞당기는 것과 물리는 것에 대해 대신들에게 문의(問議)하였습니다. 우의정 이경일(李敬一)은 ‘왕가(王家)의 장례(葬禮)는 본디 정해진 달이 있는 것이지만 일관(日官)의 구기(拘忌)에 대한 의견도 또한 퇴척(退斥)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전에 있었던 국조(國朝)의 인산례에 앞당기기도 하고 물리기도 했던 때가 있었던 것은 진실로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입니다. 선왕(先王)이 예법을 만든 법의(法意)가 매우 중대한 것이므로 신이 감히 억측하여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고, 영부사 이병모(李秉模)는 ‘신은 국조의 고사와 방가(邦家)의 전례(典禮)에 대해 모두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강릉(康陵) 이후에는 강릉의 전례를 다시 쓴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널리 순문하여 채택해서 쓰소서.’ 하고, 판부사 이시수(李時秀)는 ‘5월에 인산하는 법제는 예절의 정도인 것입니다. 이번에 인산하는 길일을 가리는 것은 사체가 더없이 중대한 것이니, 예월(禮月)에 구기(拘忌)가 있다면 기일을 1개월 물리는 것도 또한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고 반드시 신중히 하는 도리가 될 것 같습니다. 오직 널리 순문하여 재처(裁處)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판부사 서용보(徐龍輔)는 ‘최근의 예(例)에 의거 말하여 본다면 다만 강릉의 고사를 원용(援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또한 선정(先正)이 이미 확정한 의논이 유집(遺集)에 환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강릉 이후에는 다시 강릉의 전례를 쓴 일이 전혀 없으니, 신은 이에 대해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널리 순문하여 재처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니, 청컨대 위에서 재결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입시(入侍)할 때 다시 순문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월 29일 갑인

빈전에 나아가 주다례를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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