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1권 순조8년 1808년 8월

싸라리리 2025. 6. 1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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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갑오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를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바친 책자를 지금 바야흐로 고람(考覽)하고 있는데, 그 나머지는 언제쯤 공역을 마칠 것이며, 장차 몇 권이나 되겠는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정서(正書)를 시작하였는데, 권수는 10책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연행(燕行) 때 급포(給包)한다는 것은 무슨 물건인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당초에 정례(定例)는 삼(蔘)으로 포(包)를 만들었는데, 근래에는 은포(銀包)로 대신하고, 더러 잡물(雜物)을 섞어 쓰기 때문에 또한 잡포(雜包)라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신(功臣)에게 사패(賜牌)하는 전결(田結)과 노비(奴婢)는 본가에서 매번 죄다 절수(折受)하는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공신에게 사패할 경우 원래 지명(地名)을 정하여 내려 준 일이 없었고, 본가에서 잡고 정하여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북관 개시(北關開市)가 폐단이 매우 많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 근심을 없앨 수 있겠는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개시에 대한 법은 옛날에 정한 규례(規例)가 없었는데, 고(故) 북백(北伯) 신 이이장(李彛章)이 상호(商胡)의 나오는 수를 작정하여 어김이 없게 하였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기요람(萬機要覽)》의 여러 편(篇)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절실하고 긴요한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재용편(財用篇)은 경비(經費)를 출납(出納)하는 정사에 대해 갖추 진술하였고, 군제편(軍制篇)은 융무(戎務)를 절제하는 방도에 대해 상세히 실려 있으므로, 예람(睿覽)하시는데 매우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물편(貢物篇)은 진배(進排)한 물종(物種)의 값과 마련한 수효가 매우 많은데, 당초에 값을 정한 것이 오로지 적게 취한다는 뜻에서 나왔으므로, 공가(貢價)와 물가(物價)가 현저하게 다른 것이 매우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주(小註)에 실린 각 고을에서 진배하는 월령 삭선(月令朔膳) 또한 공가(貢價)를 회감(會減)070)                                             하는가?"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물선은 모두 해도(該道)의 저치미(儲置米)로 회감합니다."
하고, 서영보가 말하기를,
"혜청(惠廳)을 설치하기 전에 고 상신 이원익(李元翼)이 경기에서 먼저 대동법(大同法)을 시작하며 물산(物産)을 참작해서 가본(價本)을 상정(詳定)하고 매달 진상하는 여러 물종을 모두 대동(大同)과 저치미로 회감하였습니다."
하고, 심상규가 말하기를,
"판적(版籍)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그 가운데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이 가장 상세하게 갖추어졌습니다. 대개 옛날에 양역의 폐단은 실로 이것이 백성들의 골수에 사무친 원한이었으므로, 숙묘조(肅廟朝)부터 이 상황에 깊이 진념(軫念)하여 호포(戶布)와 감포(減布)의 말을 어지럽게 올렸으나, 감포는 공용(公用)에 해롭고 호포는 갑자기 시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영묘조에 이르러 결전(結錢)을 처음 정하였는데, 이른바 어세(漁稅)·염세(鹽稅)·선세(船稅)와 선무포(選武布)의 명색이 모두 균역(均役)의 제도에 들어갔으니, 그것은 2필의 역사에 견주어 진실로 힘을 펴고 폐단을 구제하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폐단이 되어 도로 백성들의 원망이 많아졌으므로, 선왕조 때 일찍이 균역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자, 마땅히 그 자손의 성쇠(盛衰)를 징험하겠다고 하교하셨습니다."
하고, 서영보가 말하기를,
"당(唐)나라의 조용조(調庸租)의 법으로 말하건대, 호조의 전세(田稅)는 조(租)이고 병조의 가포(價布)는 용(庸)이고 혜청의 대동(大同)은 조(調)인데, 대개 토지가 있으면 조(租)가 있고 사람이 있으면 용(庸)이 있고 집이 있으면 조(調)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 제도가 끝내 상세하게 구비되지 못하여 황구(黃口)·백골(白骨)에게 징세(徵稅)하는 것이 곳곳에서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 되어 나라가 무사하지만, 만약 벗어나 불행한 일이 있으면 지금의 모양으로 어떻게 변란에 대처하겠는가? 대개 오위(五衛)를 혁파하고 군문(軍門)을 설치하고부터 외방의 군정(軍政)에 대한 폐단이 갈수록 더욱 이와 같아졌으니, 어떻게 하면 특별히 경장(更張)할 방책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군문을 설치한 후부터 어영군(御營軍)·금위군(禁衛軍)·포보(砲保)·아병(牙兵)·기병(騎兵)·보병(步兵)의 명칭이 있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상번(上番)하여 혹 베를 바치기도 하고, 또 족보(族保)·인보(隣保)가 있어 힘을 합해서 장송(裝送)하는 바탕을 삼기도 하지만, 그 나머지 속오군(束伍軍)의 경우에는 모두 지극히 가난하여 의뢰할 바가 없는 무리입니다. 대개 우리 나라는 고역(苦役)이 군정(軍丁)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다시 신법(新法)을 만들 필요는 없고, 수토신(守土臣)을 엄중히 신칙하여 첨정(簽丁)에 대한 점검을 거듭 밝히면, 거의 실효(實效)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각읍의 표하군(標下軍)과 양영(兩營)의 군사들의 번상(番上) 및 척후병(斥堠兵)·복병(伏兵)이 모두 속오군의 명색인데, 그 모양을 보면 소활(疏闊)함이 막심하다. 일차 사습(日次私習) 때에도 또한 좌작 진퇴(坐作進退)의 절차를 알 수 있겠는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척계광(戚繼光)이 말하기를, ‘향곡(鄕曲)의 우매한 군졸도 시정(市井)의 교활한 무리보다 낫다.’ 하였습니다. 대개 향군은 기한(饑寒)을 갖추 겪어서 보통 때 근고(勤苦)하였으므로, 갑자기 적군과 대진(對陣)하여도 어모(禦侮)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소 연습하면, 둔하고 용렬하여 비록 효맹(驍猛)한 경군(京軍)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만약 완급(緩急)에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논하면, 향군만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군용(軍容)에 있어서 오로지 척법(戚法)만 숭상하는데, 월도(月刀)·십팔기(十八技)는 모두 적군과 대진하여 쓸 만한 법인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송(宋)나라                     악비(岳飛)는 군사를 쓰는 데 가장 익숙하였는데, 삼련(三練)의 법이 있었으니, 연수(練手)·연담(練膽)·연족(練足)입니다. 연수란 궁검(弓劍)을 교묘하게 쓰며 몸을 숨긴 채 적을 방어하는 것이고, 연담이란 지략(智略)을 운용하여 적을 보고도 굽히지 않는 것이고, 연족이란 버선에 모래를 담아 두었다가 적과 대진하면 벗어버리는 것이니, 대개 발을 가볍게 하여 용감하게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또 연인(練人)·연목(練目)의 법이 있는데, 이것은 장수된 자가 스스로 깨닫는 신묘함입니다. 오늘날의 월도·십팔기가 비록 삼련의 법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또한 전혀 쓸모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버선에 모래를 담는 법은 곧 갑옷을 무겁게 한다는 뜻이다. 옛날에 군사를 잘 훈련시키는 자가 군사들에게 철갑(鐵甲)을 겹쳐 입게 하였다가, 전쟁에 임해서는 벗어버리게 하였으니, 또한 몸을 가볍게 하여 용기를 배양하는 방도인 것이다. 근래에 군사들을 점열할 때 각각 초리(草履)·화구(火具)·전대(纏帶)·표자(瓢子)를 지니게 하는 것 또한 좋은 법이다."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군심(軍心)을 얻는 것이 근본이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은 말단입니다. 비록 구궁(九宮)·육화(六花)의 법이 있다 하더라도 인심을 잃는다면, 방촌(方寸)의 안이 모두 적국(敵國)이 될 것이니, 모두 장수 된 자가 수시로 지도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외(京外)의 영문(營門)과 각 고을의 여러 진에는 군기(軍器)가 비치(備置)되어 있는데, 정교하고 예리하게 한다면 변란에 임하여 가져다 쓸 수 있겠는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근래에 이른바 수보(修補)한 것이 도리어 고물(古物)의 완전하고 튼튼한 것보다 못한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 조간자(趙簡子)는 동안우(董安于)로 하여금 진양(晉陽)을 관장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에 전죽(箭竹)으로 벽을 만들고 철촉(鐵鏃)으로 마룻대를 채웠으니, 옛사람의 나라를 위한 성력(誠力)을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승지                     이광익(李光益)이 말하기를,
"안주(安州)의 군기고(軍器庫) 가운데에 수십 개의 큰 항아리를 묻어 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납촉(蠟燭)·고유(膏油)로서, 겉면은 먼지 흙과 다름이 없으나, 가운데에 있는 것은 흡사 신성(新盛)한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옛사람의 설시(設始)하여 미리 대비하는 뜻이 어찌 깊고 원대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군기 가운데 궁시(弓矢)·간척(干戚)·창검(鎗劍)·총포(銃砲) 중 어떤 것이 가장 긴요한 것인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천지가〉 개벽(開闢)한 후에 곧 궁시(弓矢)가 있었으므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호시(弧矢)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부족한 것은 음습(陰濕)할 때 조화를 운용할 수 없고, 또 그것이 명중시키는 것이 2, 3백 보(步)에 지나지 않으므로, 적이 가까워진 후에야 비로소 편전(片箭)을 쏘게 되는데, 재빠르고 굳세고 멀리 쏘아야만 가장 군중(軍中)의 정교한 기술로 여겼으나 모두 조총(鳥銃)에 뒤지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총포의 제도는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갑옷을 뚫고 뼈를 꿰뚫어 사람이 확실하게 죽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총포가 나오면서 명장(名將)이 없었다는 말은 과연 믿을 만하다."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주(周)나라 때부터 이미 이 제도가 있었는데, 명(明)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은 화거(火車)에 포를 적재하고, 싸울 때에는 적과 대진하여 연달아 쏘고 그쳤을 때에는 겉에서 둘러싸 성을 만들었으니, 이른바 태산(泰山)의 높이와 삼척(三尺)의 한계는 거마(車馬)가 능이(凌夷)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훈국에서도 아직 그 제도가 있었으므로, 효묘(孝廟)께서 특별히 1백여 냥(兩)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하고, 이광익이 말하기를,
"왜국(倭國)에서는 오로지 총포를 숭상하였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도 임진란을 겪고부터 이 법이 구비되었는데, 명목 또한 많습니다."
하고, 서영보는 말하기를,
"나라의 대정(大政)에 있어서 경비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므로,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에 3년의 저축이 없으면, 나라는 나라다울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나라의 경용(經用)이 고갈되었는데, 집집마다 혜택을 입게 하는 방책은 양전(量田)만한 것이 없으니, 만약 두루 간국(幹局)에 통달한 사람을 양전사(量田使)·균전사(均田使)로 차출하여 그 세금과 부역을 균등하게 하고 나머지 은결(隱結)을 적발하게 한다면, 백성들은 속여서 바치는 한탄이 없고 나라는 경용이 넉넉해지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관에게 반사(頒賜)하는 녹봉이 1년 동안 얼마나 되며, 한(漢)나라의 만석군(萬石君)이란 것은 또한 작위(爵位)의 높고 낮은 것으로 따졌는가, 녹봉이 많고 적은 것으로 따졌는가?"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1년 동안 반사할 녹봉은 합계가 1만 7천여 석이 되는데, 군자창(軍資倉)에는 이 수가 있지 않습니다. 한나라 만석군은 석분(石奮)071)                                             의 부자(父子) 5인의 질록(秩祿)이 각각 2천 석이었으므로, 합쳐서 계산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적(糶糴)의 법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10분의 1을 모곡(耗穀)으로 받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하였으며, 재해를 입은 해에 고루 나누어 주면 백성들이 과연 실효(實效)를 받는가?"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항상 고루 흩어 주었다가 거두어 들이는 법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로 인하여 명색(名色)이 늘어나 많습니다. 모곡을 받는 것으로 말하면, 바로 참새나 쥐가 먹어서 줄어든 것인데, 이것을 백성들에게 더 취하여 그 줄어든 것을 보충하는 것입니다. 1석마다 1두(斗) 5승(升)을 취하여 혹 공곡(公穀)에 돌리거나 혹은 관용(官用)을 만듭니다. 모곡을 받아들이는 제도는 《대전(大典)》에 실려 있지 않고 《속전(續典)》에 비로소 보이는데, 세종조(世宗朝) 때에는 대구(大丘)의 적모(糴耗)를 견감해 주었고, 선묘조(宣廟朝) 때에는 모곡이 조금 있다는 계사(啓辭)가 있었으니, 환곡(還穀)에 모곡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제도 또한 오래 된 것입니다."
하고, 서영보가 말하기를,
"재(災)란 시재(施災)하는 것을 말합니다. 토지가 있는 백성은 농사가 흉년이 들면, 횡렴(橫斂)할 수 없으므로, 집재(執災)할 때 황손(蝗損)·해손(海損)을 미처 옮기지 않거나 늦게 옮겼다는 등의 명색으로 각각 재감(裁減)하는데, 바로 위에서 덜어 백성을 돌본다는 뜻입니다. 서북(西北)에서는 비총(比摠)으로 본도에서 회감(會減)하고, 삼남(三南)에서는 집재하여 감영(監營)에 보고하고 감사가 묘당에 보고하면, 비로소 계품하여 구획(區劃)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곧 그 지역에서 제급(除給)하는 것이 아니므로, 백성들이 받는 혜택은 적고 나라에서 줄여서 받아들이는 것은 많습니다."
하였다.

 

경상우도 암행 어사                     여동식(呂東植)이 서계하여, 의령 현감(宜寧縣監)                     박종구(朴宗球), 산청 현감(山淸縣監)                     정유순(鄭有淳), 합천 군수(陜川郡守)                     안명원(安命遠), 사천 현감(泗川縣監)                     이원욱(李元煜), 전 안의 현감(安義縣監)                     송흠시(宋欽詩), 상주 목사(尙州牧使)                     정동교(鄭東敎), 전 목사                     이면휘(李勉輝), 전 거제 부사(巨濟府使)                     이영건(李永建)·권환(權煥), 전 함안 군수(咸安郡守)                     이유엽(李儒燁), 김천 찰방(金泉察訪)                     유진택(柳鎭澤), 전 소촌 찰방(召村察訪)                     심여(沈鋁) 및 전 통제사                     이당(李溏)·유효원(柳孝源), 전 우병사                     이신경(李身敬) 등의 잘 다스리지 못한 실상을 논하니, 아울러 경중에 따라 감죄(勘罪)하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함양 군수(咸陽郡守)                     남주헌(南周獻)은 그 치적에 대해 승서(陞敍)의 은전(恩典)을 베푸소서."
하고, 별단(別單)을 올려 환곡(還穀)·군정(軍政) 및 통영(統營)의 병고(兵庫)와 호고(戶庫)의 폐단, 각 고을에서 이전(移轉)하는 일, 연로의 능로군(能櫓軍)에 대한 일, 어전(漁箭)의 일, 봉산(封山)072)                                             에서 외람되게 나무를 벤 일, 성주(星州)에서 금(金)을 캔 일, 사원(祠院)을 사사롭게 설치한 일을 말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데 따라 채택해서 시행하게 하였다. 이튿날 임금이 여동식을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서계와 별단 이외에 아뢸 만한 일이 있는가?"
하니, 여동식이 말하기를,
"수령들이 잘 다스리는지의 여부와 백성과 고을의 폐막(弊瘼)에 대해서는 서계 가운데에 이미 우러러 진계(陳啓)하였습니다. 외읍(外邑)을 경동(警動)시킬 도리는 오로지 어사를 보내는 데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열읍(列邑) 가운데 농사 형편에 대해 흉년을 고한 곳에서 혹 전련(顚連)하여 유리(流離)하는 탄식에 이르지는 않았던가?"
하니, 여동식이 말하기를,
"도에 나갔을 때 설진(設賑)하기를 청하는 백성들이 더러 있었는데, 대저 흉년이 든 곳으로 판단되는 데가 많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효자·열녀·충신으로 절의가 탁이한 자가 있었는가?"
하니, 여동식이 말하기를,
"가장 탁이한 것은 한 가문에서 7명의 효자가 있다는 것인데, 별단에 대략 진계하였습니다."
하였다.

 

8월 5일 무술

내각(內閣)에서 어제(御製) 경춘전기(景春殿記)의 인본(印本)을 바치니, 베껴 쓴 각신 심상규(沈象奎) 등에게 시상하였다.

 

8월 6일 기해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말하기를,
"지금 접위관(接慰官)의 장계(狀啓)와 임역(任譯) 무리들의 수본(手本)을 보았더니, 수작한 것이 더욱 상세하고 세밀하였습니다. 대저 저 사람들의 정상이 점점 매우 급해지기에 이르러 바야흐로 십분의 지두(地頭)에 있어서 한 섬[一島]073)                                             이 장차 멸망할 근심이 있게 되었으니, 차라리 한번 죽음을 무릅쓰고 다툴 것입니다. 관백(關白)이 말한 가운데, ‘만약 청을 허락받지 못하면 마땅히 새로 도주(島主)를 뽑겠다. 도주를 새로 뽑는 날은 곧 구도주는 목숨을 마치는 때이다. 일이 극도에 달해 지극히 억울하겠지만, 차라리 조선의 방내(方內)에서 죽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왜관(倭館)에 있는 차왜(差倭)의 입장으로는, ‘도군(島君)이 이와 같이 되면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니, 저 무리가 마땅히 죽음으로써 다툴 것입니다. 당초에 교린(交隣)에 대한 일은 대마 도주가 실제로 주장하였었는데, 이제 갑자기 곧바로 강호(江戶)에 통한다면, 이는 대마도에 대해 의심한 때문이지만, 전후에 친신(親信)이 왕복했던 것은 모두 허망한 데로 돌아갈 것입니다. 국법(國法)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엄중하고 혹독하여 반드시 한 섬이 멸망하는 화(禍)가 있게 되었으니, 어찌 지극히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오로지 저들로 하여금 강호에 보고해서 한 섬의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합니다. 당초에 강호에 사람을 보내려 했던 것은 저들과 가부(可否)를 상의함으로써 말의 허실(虛實)을 증험하려 한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는데, 이제 듣건대, 강호의 집정(執政)이 바야흐로 접대차 대마도에 나왔다고 하니, 곧바로 강호에 통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한 역관을 치송(馳送)하여 대마도에 와서 있는 집정과 그 역지(易地)의 가부에 대해 상확(商確)하겠다는 뜻으로 서계(書契)를 고쳐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간사한 역관의 무리들에 대한 일은 어찌 저들이 실수한 것이 아니겠는가? 곧바로 강호에 사신을 보내면 어떻겠는가?"
하니, 김사목(金思穆)이 말하기를,
"비록 강호에 신사(信使)를 보내더라도 대마도는 반드시 과거의 길에 막히게 되어 들어가지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호에 있어서의 대마도는 북경(北京)에 있어서 봉황성(鳳凰城)과 같은가?"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만약 신사가 있으면 대마 도주는 으레 강호에 따라서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순문한 후 그대로 따랐다.

 

소령원(昭寧園)·수길원(綏吉園)의 탈이 있는 곳을 수개(修改)하라 명하고, 탁지(度支)로 하여금 거행하게 할 것을 드러나게 정식(定式)을 삼도록 하였다.

 

어영 대장                     이요헌(李堯憲)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갑인년074)                                             에 화성(華城)의 성역(城役)에 대한 물력(物力)을 각처에 대하(貸下)하고 도로 보고하게 하였을 때 본청에서는 상번(上番)하는 5초(哨)의 향군(鄕軍) 가운데 초마다 각각 27명을 제외한 도합 1백 35명은 상번을 줄이고 그 신포(身布) 및 자장(資裝)·보전(保錢)을 거둠으로써 한 해에 얼마씩 나누어 헤아려 견감하는 것으로 삼았는데, 이제 이미 보고를 마쳤습니다. 이제 11월부터 시작해서 번을 회복하여 징립(徵立)해야 마땅하겠지만, 향군의 번상(番上)이 가장 백성과 고을의 고질적인 폐막(弊瘼)이 되고 있으니, 비록 약간 명은 번을 줄인다 하더라도 폐단을 더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옛날에 징상(徵上)하던 것을 회복시킨다면 15년 동안이나 제번(除番)에 편안하게 여겼던 나머지 그 폐단이 되는 바가 새로 시작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또 군액(軍額)으로 말하건대, 제번한 후 그 사이에 올라왔던 자들은 명색이 비록 5초이지만 4초의 군사에 지나지 않았고, 그 가운데 만약 병고(病故) 등의 잡탈(雜頉)이 있었으면, 각처의 입직(入直)과 행진(行陣)은 매번 대오(隊伍)가 갖추어지지 못한 폐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의 뜻은, 지금 제번한 자들은 전에 했던 그대로 제번하고, 지금의 향군 5초의 액수(額數)를 합쳐서 4초를 만들고, 서울에서 용감하고 건장한 사람을 모집하여 따로 1초를 만들어 5초의 제도를 갖추게 한다면, 백성과 고을에 있어서는 번을 회복하여 폐단이 늘어나는 탄식이 없을 것이고, 군제(軍制)에 있어서는 대오가 갖추어지지 못하는 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며, 혹 전체의 액수가 정번(停番)할 때를 당할 경우 1초의 군사를 항상 도성에 있게 한다면, 여러 가지 배번(排番)하는 도리가 거의 소홀하지 않아서 절제하고 단속하는 방도가 향군보다 나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또 서울의 표하(標下)의 제색군(諸色軍)은 옛날부터 액수가 적어서 매번 부족함을 근심하였는데, 50명을 한정해서 더 뽑고, 그 제번하고 거둔 포(布)로 새로 모집한 1초와 표하 50명의 요포(料布)를 견주어 헤아린다면, 접제(接濟)할 수용(需用)을 넉넉하게 분배(分排)할 수 있고, 또한 잉여도 있을 것이며, 5초의 제도에 손상됨이 없고 표하는 액수를 늘일 수 있는 효과가 있을 것이니, 양쪽을 다 편하게 하는 방도에 적합할 듯합니다. 청컨대 대신과 장신들에게 순문하여 조처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두루 순문하자 모두 매우 편리하다고 말하니, 그대로 따랐다.

 

전라좌도 암행 어사                     이면승(李勉昇)이 서계하여, 금산 군수(錦山郡守)                     조영경(趙榮慶), 전 군수                     유한기(兪漢紀), 전 흥양 현감(興陽縣監)                     이계(李㬖), 전 광양 현감(光陽縣監)                     김종철(金宗喆), 전 보성 군수(寶城郡守)                     권사억(權師億), 전 남원 부사(南原府使)                     임병원(林秉遠), 전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주현(李周顯), 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윤명렬(尹命烈), 정읍 현감(井邑縣監)                     윤택렬(尹宅烈), 전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의수(李義秀), 진안 현감(鎭安縣監)                     이희찬(李羲贊),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건식(李健植), 전 운봉 현감(雲峰縣監)                     신순(申純), 임실 현감(任實縣監)                     민치성(閔致成), 무주 부사(茂朱府使)                     이영수(李英秀), 순천 부사(順川府使)                     임후상(任厚常), 곡성 현감(谷城縣監)                     이종명(李宗明) 등의 잘 다스리지 못한 실상을 논하니, 아울러 경중에 따라 감죄(勘罪)하게 하였다. 또 순창 군수(淳昌郡守)                     이광헌(李光憲), 옥과 현감(玉果縣監)                     윤정진(尹定鎭)의 치적을 말하니, 아울러 승서(陞敍)의 은전(恩典)을 시행하게 하였다. 별단(別單)을 올려 환곡(還穀)을 고가(高價)로 집전(執錢)하는 일, 민고(民庫)의 곡식을 함부로 내주는 일, 군정(軍丁)을 수괄(搜括)하는 일, 대동(大同)을 저축해 두었다가 획급(劃給)하는 일, 통곡(統穀)을 변통하는 일, 훈국의 대변선(待變船)에 대한 일, 금산(錦山)의 무세(貿稅)에 대한 일, 봉산(封山)의 송정(松政)에 대한 일을 말하고, 또 전 전주 부사(全州府使)                     이여절(李汝節), 전 승지                     이주현이 향리에 살면서 불법을 행하는 일을 말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데 따라 채택해서 시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면승을 소견하고 말하기를,
"호남 한 도는 민속(民俗)과 물정(物情)이 어떻던가?"
하니, 이면승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린 듯이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어서 다른 것을 돌아볼 틈이 없는데, 어떻게 민속이 좋은지의 여부를 논하겠습니까? 환곡과 민고(民庫)의 폐단을 만약 변통하지 않는다면, 한 도가 장차 텅 비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민고의 폐단이 어떻던가?"
하니, 이면승이 말하기를,
"1년 동안 쓰는 것을 모두 백성들에게 거두어 민고에 맡기는데, 조관(照管)할 바가 없어서 해마다 함부로 내주니,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광주 목사                     윤명렬은 우도에서 서계하여 치적(治績)을 말하였는데, 여기서는 잘 다스리지 못한 실상을 논하였으니, 어찌하여 현저하게 다른가?"
하니, 승지                     김이영(金履永)이 말하기를,
"듣는 것과 보는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 도 가운데 크게 잘 다스리지 못한 것은 누구인가?"
하니, 이면승이 말하기를,
"광양 현감                     김종철이 크게 불법(不法)하였기 때문에 이미 봉고 파직(封庫罷職)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보성군(寶城郡)에서 환곡(還穀)을 파양(簸揚)한 것은 조정의 연석(筵席)에서 탕감하라는 명이 있었다."
하자, 이면승이 말하기를,
"보성의 백성들은 이러한 드문 은혜를 입게 되었으니, 반드시 고무(鼓舞)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보성에서 환곡을 파양하여 축난 쌀이 3천 8백 석 영이었다고 도신이 장문하니, 임금이 나라의 곡식이 비록 중하다 하나 민폐를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탕감해 주라고 하교하였다.

 

8월 8일 신축

고양군(高陽郡)의 행궁(行宮)에 나아가 경숙(經宿)하였다.

 

8월 9일 임인

영릉(永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히 제사하였다. 이어서 순릉(順陵)과 공릉(恭陵)에 나아가 전알하고 저녁에 파주(坡州)의 행궁에서 유숙하였다.

 

8월 10일 계묘

소녕원(昭寧園)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친히 제사하였다. 이어서 수길원(綏吉園)에 나아가 전배하고 다시 고양군의 행궁에서 유숙하였다.

 

능관(陵官)·원관(園官) 이하에게 상전(賞典)을 베풀고, 자운 서원(紫雲書院)·파산 서원(坡山書院)·풍계사(豊溪祠),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과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묘(墓) 및 월산 대군(月山大君), 고 상신 황희(黃喜)·황보인(皇甫仁)·이건명(李健命)·김익(金熤),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 증 찬성                     이유번(李楡蕃), 봉조하(奉朝賀)                     홍봉한(洪鳳漢)의 묘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양주(楊州) 등 세 고을의 유생들에게 응제(應製)하여 시취(試取)하도록 명하였다.

 

8월 11일 갑진

환궁(還宮)하였다.

 

8월 12일 을사

우박이 내렸다.

 

8월 13일 병오

평안 감사                     조득영(趙得永)이 아뢰기를,
"덕천(德川)의 백성 김장익(金長益)이 물에 빠진 누이를 건지려 하다가 일시에 물에 빠져 죽었는데, 김장익의 처 이성(李姓)은 나이 18세로, 그 지아비가 물에 빠져 죽고부터 강가를 오르내리며 밤낮으로 슬피 울다가, 그 지아비가 물에 빠져 죽은 곳에 스스로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 정렬(貞烈)은 한때의 휼전(恤典)을 버려두고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급복(給復)하게 하고, 신칙해서 묻어주게 하여 격려하는 바탕을 삼도록 하라, 김장익도 또한 전례를 벗어나 보살펴 부조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6일 기유

예조에서 유생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고 관찰사                     신익량(申翊亮)의 충효(忠孝)의 행실에 대하여 정려(旌閭)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는데, 신익량이 갑신년075)                                             에 명나라가 복망(覆亡)한 후 자취를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
"효자인 서울에 살던 고 학생(學生) 유관명(柳觀明), 춘천(春川)의 고 사인(士人) 이광진(李光鎭)에게 청컨대, 증직(贈職)하소서. 서울에 살던 고 학생 박휴익(朴休益), 여주(驪州)의 고 통덕랑(通德郞)                     원백손(元百孫), 남포(藍浦)의 고 통덕랑                     이중규(李中逵), 서원(西原)의 고 학생 노면경(盧勉敬)과 그 처 열녀(烈女) 신씨(申氏)는 청컨대, 정려하소서. 효자인 평산(平山)의 유학(幼學) 조광찬(趙匡贊)은 청컨대, 급복(給復)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19일 임자

거둥하였을 때 파주(坡州) 등의 고을의 별효사(別驍士) 이하에게 사방(射放)을 시험하고 시상(施賞)하였다.

 

백동운(白東運)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포청에서 아뢰기를,
"양인(良人) 김내영(金來榮)은 양주 목사(楊州牧使)                     송면재(宋冕載)의 비부(婢夫)로서, 쫓겨난 데 대해 원한을 품고 지난밤에 칼을 갖고 돌입(突入)하여 먼저 송면재를 찌르고, 또 그 내상전(內上典)을 범하여 두부(頭部)를 마구 찔렀으며, 자부(子婦)와 9세의 여아(女兒) 또한 칼에 찔려서 모두 사느냐 죽느냐 하는 가운데에 있습니다. 청컨대, 추조(秋曹)에 옮겨 법에 비추어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명분(名分)과 기강(紀綱)이 비록 땅을 쓴 듯이 죄다 없어졌다고 하나, 비부(婢夫)로 처상전에 대하여 노주(奴主) 사이의 강상(綱常)과 상거(相去)가 과연 얼마나 되기에 그 분의를 범하고 기강을 업신여겨 지극히 흉패(凶悖)한 변괴를 저절렀음이 더욱 겁탈한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곧 이는 들어보지 못한 대변괴인 것이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격식을 갖추어 엄격하게 형신하여 취초(取招)한 후 정법(正法)하게 함으로써 완악(頑惡)하고 간사한 자들을 징치(懲治)하여 명분을 바로잡는 바탕을 삼게 하라."
하였다. 또 당소(堂疏)로 인하여 그 지속(支屬)은 종으로 삼고, 파가 저택(破家潴澤)076)                                             하는 등의 일을 법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8월 21일 갑인

권상신(權常愼)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영보(徐榮輔)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8월 23일 병진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서총대 시예(瑞葱臺試藝)를 행하였다.

 

8월 25일 무오

춘당대에 나아가 추도기 유생(秋到記儒生)을 시험하고, 금군(禁軍)과 서북 별부료(西北別付料)에게 시사(試射)하였는데, 강경(講經)에서 수위를 차지한 박영현(朴榮顯)과 제술(製述)에서 수위를 차지한 홍희근(洪羲瑾)에게 아울러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8월 26일 기미

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가 별군직(別軍職)에게 겨울철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8월 27일 경신

부사과                     이우재(李愚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금 윤광안(尹光顔)의 공사(供辭)를 보았더니, 속전(贖錢)을 누각의 창고에 모아 놓은 것을 상실(爽實)에 돌리고, 고혈(膏血)을 몰래 빼앗은 것을 현공(懸空)077)                                             으로 핑계대었는데, 신이 만약 대거(對擧)하지 않는다면, 신은 다른 사람을 무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이 애초에 고개를 넘었을 때부터 윤광안의 탐욕스럽다는 소문이 가는 곳마다 귀가 따갑게 들렸습니다. 비록 길을 가던 부녀자와 어린아이도 침을 뱉아 욕하며 분개하여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여항(閭巷)에서 노래로 서로 전함이 있기까지 하였기 때문에, 종핵(綜核)이 지나쳐서 혹 까다롭고 세밀하기에 이르렀거나 단속이 엄중하여 쉽사리 원망과 비방을 초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진실로 깊이 믿지 않았었지만 또한 의심이 없을 수도 없었습니다. 말은 반드시 그 근원을 캐고 일은 반드시 그 실상을 조사하되, 끌어댄 증거를 참고하고 문적(文蹟)을 상고하여 모두 밝아서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비로소 그 유밀(幽密)한 마음의 자취를 보고, 비루하고 더러운 그 행사(行事)를 깊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인하여 말하기를,
"그가 안번(按藩)하던 초기부터 한 도의 아전들의 농간을 조사하여 포괄하고 뭇 백성들의 결점을 캐내어 살폈기로 항상 감옥이 가득 찼었는데, 자칫 세월을 지체하며 율(律)을 끌어대어 정배케 하고 속전(贖錢)을 거두었으므로 전후에 거둔 것이 도합 2만 8천여 냥(兩)이 되었습니다. 본영(本營)의 누각 위에 있는 창고는 곧 옛날에 청백 자사(淸白刺史)가 남는 것을 덜어서 버리던 곳인데, 돈[錢]·무명·종이·은이 수만을 헤아리기 때문에 이름을 ‘호고(虎庫)’라고 하였으니, 호고란 두려워서 감히 열어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병인년078)                                             에 불이 났을 때 이 창고만 유독 면하였는데, 계문(啓聞)하기에 이르러서는 섞어서 죄다 불탄 데에 돌렸었으니, 이는 천총(天聰)을 기만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로지 문을 열고서 마구 쓰려는 데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물(紙物)은 그 상품(上品) 수천 속(束)을 가려서 고향의 집에 실어 보냈고, 책지(冊紙) 5백 속 영은 책을 찍어 실어 갔으며, 장백지(壯白紙) 1천 속 영은 여러 고리(庫吏)에게 주었고 포목은 전체의 수를 발매하여 6백 50냥으로 작조(作租)해서 주해를 달았는데, 남은 무명은 아직 영하(營下)에 있습니다. 구리와 주석으로 만든 기명(器皿)은 사물(私物)을 만들고 이에 상자 고전(尙字古錢) 1백 7냥 영으로 작조하고는 이름을 ‘별비(別備)’라고 하였습니다. 불탄 감영의 집이 1백 40여 칸 되는데, 1백 80여 칸으로 수를 보태어 넘치게 보고하였고, 쌀 3천 석을 받아 획급한 후에 이르러서는 아울러 작조하여 보리와 바꾸게 하고는 거듭 모곡(耗穀)을 취하였으며 병인년에는 돈 1만 2천 5백 50냥 영을 더 분집(分執)하고 정묘년079)                                             에는 돈 2만 2천 4백 60냥 영을 더 분집하여 아울러 사용(私用)에 돌렸었습니다. 본부의 낙육재(樂育齋)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수요(需要) 가운데 잉여(剩餘)를 취한 것이 5백여 냥이 되었고, 각 고을의 사군목(射軍木) 가운데 잉여를 취한 것이 1천 2백여 냥이 되었으며, 봉산(封山)의 소나무를 외람되게 찍어 벤 것이 50여 주(株)가 되는데, 운반해 이르게 하는 즈음에 전부를 끌어서 운반하게 하였으므로, 인력(人力)이 갑절이나 허비되어 죽은 사람이 합쳐서 7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재목은 모두 기용(器用)을 만들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실어 보내는데, 끌어서 운반한 품삯, 잡물(雜物)의 복정(卜定)080)                                             과 승도(僧徒)·목수(木手)의 품삯을 전부 준급(準給)하지 않았으므로,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쓴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열읍(列邑)의 비갈(碑碣)·서액(書額)·고적(古蹟)과 효자·열녀의 행장(行狀)을 행관(行關)081)                                             해서 베껴 내게 하고는 죄다 가지고 갔는데, 겉으로는 비록 문자(文字)를 찾는 것에 가까웠으나, 베낀 서질(書帙)이 지극히 많았는데도 책판(冊板)이 있는 고을에 지본(紙本)을 주지 않은 채 죄다 인출(印出)했습니다. 위의 여러 조항은 불법(不法)이 아닌 것이 없는데, 그 수법이 변화 무쌍하고 조획(措劃)이 주도 면밀하였으므로, 만약 그 내막(內幕)에 앉아 있었던 자가 아니면 단서를 얻기 어렵겠지만, 정절(情節)을 상세히 구명해 보면 모두 각박하게 깊이 조사한 가운데로 좇아 나오게 되어 몰래 고혈을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의 이 소장을 금오(金吾)에 내려 주어 조목마다 상세하게 핵실(覈實)하는 바탕을 삼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사(疏辭)는 금부로 하여금 이에 의거하여 조목마다 공초를 받게 하겠다."
하였다. 그런데 윤광안의 공초에 조목마다 변명하자, 금오에서 도(道)로 하여금 조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8일 신유

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가 삼청(三廳)의 가을철 사예(射藝)를 행하고, 통장(統長) 이하에게 따로 사예를 시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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