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 병오
이존수(李存秀)·홍석주(洪奭周)·임한호(林漢浩)·한치응(韓致應)을 비변사 제조에 차임하였다.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적당(賊黨) 김익명(金益明)이 공칭(供稱)하기를, ‘정복일(鄭復一)의 지휘를 받아 서림진(西林鎭)의 가장(假將)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방수(防守)하다가, 철산창(鐵山倉)의 쌀 70석을 실어다 군량에 썼고 또 마음대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진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라고 했는데, 흉악한 정절(情節)이 그래도 정경행(鄭敬行)이나 정성한(鄭聖翰)이 적의 거괴(巨魁)가 된 것과는 같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영(營)에서 시원하게 해당 율(律)을 시행할 요량으로 있습니다. 적에게 항복한 죄인 이장겸(李章謙)은 그의 공초(供招)에서 비록 말을 했다가 숨겼다하면서 희미하게 하려 했지만, 이미 항서(降書)를 바쳤고 또 인부(印符)를 보내었음이 적도들의 문서 가운데서 탄로났으므로, 격식을 갖추어 의금부로 압송합니다. 선천부(宣川府)의 장교 임경천(林擎天)의 공초에는, ‘작년 12월 19일 적도들이 선천에 들어왔을 때 전 부사(府使) 김익순(金益淳)은 그때 검산성(劍山城)에 있었는데, 향소(鄕所)의 김응종(金應宗)이 힘써 투항할 것을 권하자, 마침내 항서를 써서 보냈고, 이어 고을로 내려와 여염집에 거처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적장이 불러들여 대청 위에 앉히고 술과 고기로 대접하며 군관 전령(軍官傳令)에 제수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공초한 바를 보건대, 투항한 것이 확실합니다. 김응종은 달갑게 흉적이 되어 내응하여 힘써 고을 원의 투항을 권하였으니, 중죄에 둠이 합당하기 때문에 잡아서 엄하게 핵실(覈實)하여 보고하라는 뜻으로 선천 부사에게 분부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적도에게 항복한 진장(鎭將) 유재하(柳載河) 등 다섯 죄인을 엄히 문초하였더니, 유재하는 ‘적보(賊報)를 듣고 촌가(村家)로 가서 피해 있었는데, 진의 장교 김처백(金處白)이 적당을 거느리고 돌격해 들어와 인부(印符)를 탈취하였습니다.’라 하고, 왕도항(王道恒)은 ‘적도들이 난입하여 결박을 짓고는 인부를 강탈하고 칼을 씌워 선천의 옥에 가둔 뒤 김익순과 더불어 함께 해읍(該邑)의 아전의 집으로 갔습니다.’라 하고, 김인후(金仁厚)는 ‘적군이 이미 진의 아래에 닥치자 진의 장교 등이 항서(降書)를 써보냈고, 저는 애초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다. 인부는 겁이 나서 풀어 보냈습니다.’라 하고, 이진열(李震說)은 ‘적도들이 결박을 지워 선천으로 압송해 가다가 인부를 탈취하고, 이어 칼을 씌워 며칠 가두어 두더니, 적괴가 잡아들여 위협하고 공갈하며 종군(從軍)하게 하였으나, 신병(身病)을 핑계대자 놓아 보냈습니다.’라 하고, 김홍섭(金弘涉)은 ‘적변(賊變)을 듣고 장도(獐島)로 향해 달려가다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잡혔는데, 곽산(郭山)에 이르러 인부를 탈취당하고 칼을 씌워 군옥(郡獄)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러다 곽산 수령이 군사를 이끌고 수복한 뒤 옥을 열고 내 보내었기 때문에 선봉으로 출전하여 적도 이명전(李明銓)을 추격해 잡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무리들이 만약 투항하지 않았다면, 인부가 어찌 적들에게 있으며 목숨을 어찌 보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욱이 왕도항·김인후·이진열의 투항은 이미 적도들의 문서에 드러났는데, 다섯 죄인이 꾸며대는 것이 모두 똑같은 투식(套式)이니, 문서가 드러나지 않은 자 또한 이미 드러난 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모두 의금부로 압송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절도사 박기풍(朴基豊)의 정월 27일의 첩보(牒報)에 ‘어제 2경 초에 적도의 졸개 1명이 발군(撥軍)이라 가칭하고 흉서(凶書)를 와서 전하였기 때문에 뜯어 보았더니, 진서(眞書)와 언문(諺文) 두 장의 종이였는데, 곧 만부(灣府)의 의병장 허항(許沆)과 김견신(金見臣) 등에게 보내는 것으로, 그 말이 지극히 흉패(凶悖)하였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흉적(凶賊)이 세력이 다하여 감히 편지로 이간시켜 포위를 벗어나려는 계책을 낸 것입니다. 허항·김견신 두 사람이 용천(龍川)과 철산(鐵山)에 모여 있는 적들을 소탕하여 평정한 뒤 지금 또 성 아래로 바싹 진격하자, 이에 간특(奸慝)한 편지로 심복의 근심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니, 더욱 지극히 흉악합니다. 적의 졸개에게 적의 정황을 물었더니, 성 안에 있는 군량은 조직(租稷) 7백여 석에 불과하여 열흘거리에도 차지 않아서 공격하지 않아도 자진(自盡)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적도들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말을 잘 타는 40여 명을 데리고 장군(壯軍) 1백 50명을 뽑아 관군의 모양으로 꾸며 동문(東門)으로 달아나 안주(安州)로 향하고자 한다.」’ 하였습니다만, 이것 또한 약한 무리의 형세가 궁하고 계획이 졸렬한 말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어찌 반드시 떠벌려 말을 하여 기미를 누설한단 말입니까? 흉서는 단단히 봉하여 순무영(巡撫營)에 올려 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2월 4일 정미
부호군 오연상(吳淵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이제 막 서읍(西邑)에서 갈려 왔기에 고을의 형편과 민정(民情)에 대해 대략 보고 들은 것이 있습니다. 대개 관서(關西)의 농사일이 재작년 가을에는 곡식이 여물지 않았고, 작년에는 들판이 온통 시뻘겋게 타버려 오곡은 고사하고 무릇 구황(救荒)하는 곡식 등속도 모두 흉년을 면하지 못하였는지라, 저 원망하며 구덩이에 뒹구는 무리로서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요역(徭役)에 시달린 나머지 집을 버리고 가산을 탕진하게 되어 서로 부축하고 끌며 지경을 나오는 자가 계속되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돌림병이 크게 번져 길거리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서로 이어지매, 이에 불령(不逞)한 자들을 모으고 백성들의 근심과 괴로움을 빌미로 감히 흉악한 계책을 싹틔워, 이에 성읍(城邑)이 함락되던 날 소를 노략질해 주린 사람을 먹이고 창고를 도둑질해 급한 사람을 도우니, 저 어리석은 소민(小民)들이 한때 음식을 먹여주는 것을 이롭게 여겨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서로 따랐던 것입니다. 정주성(定州城)에 들어가 웅거하고 있는 적도들은 태반이 이와 같은 부류입니다. 지금 왕사(王師)가 멀리 임하매, 이들은 이미 솥 안의 물고기가 되었으니, 그들은 마음속으로 ‘우리 무리들의 죄는 이미 주륙(誅戮)을 용서받지 못하고, 성을 깨트리는 날 비록 목숨을 보전한다 하더라도 또 의뢰해 살아갈 의식(衣食)이 없으니, 차라리 힘을 다해 굳게 항거하다가 적이 살면 함께 살고, 적이 죽으면 함께 죽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것인즉, 전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졸개들 입니다. 그러나 원흉(元兇)과 거괴(巨魁) 외에야 어찌 모두 순리를 버리고 역리를 본받아 마음속으로 정말 붙좇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지금 감싸서 위로하고 은혜로 쓰다듬어 그 미혹된 바를 깨닫게 한다면, 저들 또한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 반드시 은혜에 감격하고 의리를 생각하여 무기를 버리고 귀순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근이 든 나머지 또 창양(槍攘)을 겪어서, 여리(閭里) 사이에는 표략(剽掠)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약육 강식의 상황이 되니,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곤궁하고 쟁기와 보습을 들지 못하여 경작을 바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민(西民)이 남지 않게 될 상황이 장차 목전에 있는데, 만약 각별히 위로하고 구휼하여 그 마음을 감복시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장차 서로 모여 도둑이 될 것이니, 실로 도모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빨리 명확한 유지(諭旨)를 내리셔서 본도(本道)의 각종의 공헌(貢獻)과 부세(賦稅)를 몇 년을 한정하여 견감해 주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군정(軍丁)에서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것은 비록 평시에도 백성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폐가 됩니다. 더욱이 여러 고을에서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지금 두 달 동안 들판에서 비바람을 맞고 지내며 몰아 채찍질하여서 사망한 사람이 무수하니, 진실로 불쌍히 여길 만합니다. 그러니 파해 돌려보낸 뒤 만약 다시 전례와 같이 바칠 것을 독촉한다면, 거북이 등에서 털을 찾고 뿔없는 양을 내놓게 하는 격으로 채찍을 치고 칼을 씌워 가두는 일을 장차 만신 창이가 되어 신음한 나머지에 베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더욱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분부하여 작년의 군포로서 채 거두지 못한 것은 일체 정지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영(營)에서 바치는 관공(官供) 중에서 백성에게서 나온 것으로 아래 것을 덜어 위에다 보태는 것의 경우는 모두 헤아려 감해주어 조정에서 다친 사람처럼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는 덕의(德意)를 보인다면, 어려움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기틀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삼남(三南)의 곡식을 더 갈라 주군(州郡)에 나누어 주되, 식례(式例)에 구애되지 말고 되도록이면 넉넉하게 진급(賑給)할 것’과, ‘도과(道科)를 설행하여 많은 선비들을 위로하고 선부(選部)에 신칙하여 따로 더 수습할 것’과, ‘절도사영을 도로 영변(寧邊)에 설치할 것’과, ‘각도의 도신과 수신이 한 해 씩 걸러 진관(鎭管)의 여러 고을을 순행(巡行)하여 허액(虛額)을 점열(點閱)하고, 습진(習陣)을 가르치는 일’을 청하고, 또 ‘희천 군수(熙川郡守) 김문기(金文基)가 철옹성(鐵甕城) 관할 아래에 있는 고을의 수령으로서 변이 일어난 초기에 첩보를 보내었으나 방보(防報)하고 나아가지 아니한 죄’를 논하고, ‘개천 군수(价川郡守) 임백관(任百觀)은 비록 머뭇거린다 하여 수신(帥臣)이 감죄(勘罪)할 것을 청하였지만, 임백관이 전에 도신(道臣)의 지위(知委)로 인해 본성(本城)에 나와 부임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으로 죄를 입는 것은 억울하다.’고 하였다.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묘당으로 하여금 즉시 여쭈어 처리하게 하여, 실효(實效)가 있게 하라. 그리고 말단의 일 또한 해부(該府)로 하여금 다시 더 상세히 조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복계(覆啓)하여 임백관을 분간(分揀)하였다.
하교하기를,
"한번 적변(賊變)이 있고 난 이래 관서(關西) 백성의 일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여 마음이 초조하고 눈앞이 늘 캄캄한지라, 자도 잠자리가 편치 않고 먹어도 맛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대개 기근이 든 끝에 군대가 이어 일어났으니, 백성들의 먹을 것은 이미 저축(抒柚)055) 에서 비고, 관의 저축 또 비만(飛輓)056) 에서 바닥이 났다. 불쌍한 우리 몇 만의 생령들이 모두 새는 배 안에 타고 있으면서 옹옹(喁喁)057) 거리며 경각지간에 거의 빠질 형편에 있으니, 아!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내가 덕이 없어 백성의 부모가 되었지만 이미 하늘의 마음을 능히 잘 받들지 못해 비오고 볕나는 것이 질서를 잃게 만들었고, 또 능히 먼 땅까지 감싸서 편안히 해 주지 못하여 이에 용사(龍蛇)가 뭍에 오르는 것을 보았으니,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하건대,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 먹여주기를 기다리며 거의 죽어가는 모습을 생각하매, 어찌 불 속에 있는 것을 구해내고 물에 빠진 것을 건지려는 생각을 늦출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백방으로 생각해도 아무 계책이 없구나. 저 한 도에서 공헌(貢獻)하는 방물(方物)은 모두 우리 백성의 고혈(膏血)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물건을 감해 주는 것이 돌아보건대 대단히 위급한 지경에 무슨 도움이 되랴마는, 징독(徵督)의 고통을 면제해 줌이 그래도 족히 책임을 벗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도신에게 명하노니, 무릇 진헌(進獻) 등으로 백성에게서 나온 것에 관계된 것은 풍년이 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모두 정지하고 견감하게 하라. 환곡(還穀) 중에 흉년을 만나 정퇴(停退)한 것에 이르러서는 본디 백성을 구휼하는 은혜로운 정사에서 나온 것이나, 포부(逋負)058) 를 해마다 징봉(徵捧)하는 것은 도리어 백성을 괴롭히는 고질이 되었다. 하물며 창이(瘡痍)에서 아직 소생하지 못하고 있는데, 차마 추호(追呼)059) 에 거듭 지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옛 환곡으로 정퇴한 것이 있거든 또한 일체 탕감토록 하라. 또 군오(軍伍)에게서 군포(軍布)를 거두는 법은 대개 평소 무사할 때에 있는 것인데, 이번에 갑옷을 입고 병장기를 들고서 이미 그 죽을 힘을 썼으니, 또 다시 살갗과 골수를 치고 벗기며 그 신역을 겹쳐 징수한다면 결코 어진 사람의 정치가 아닐 것이다. 한 도 안에서 군사를 징발한 여러 고을의 당년 조 신포(身布)를 또한 견감하고 받지 않는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성화같이 관서의 도신과 수신(帥臣)에게 알려, 조정의 지극한 뜻을 보이게 하라. 그리고 민사(民事)로써 진달해 알릴 것이 있거든 비록 격례(格例)를 벗어난 것일지라도 조목조목 치계(馳啓)하라는 뜻으로 글을 만들어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2월 5일 무신
차대하였다.
추국(推鞫)하였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 우의정 김사목(金思穆), 판의금 심상규(沈象奎), 지의금 박종섭(朴宗燮), 동의금 김상휴(金相休)·박명섭(朴命燮)이다.】 서적(西賊) 정경행(鄭敬行) 등을 국문(鞫問)한 것이다.
2월 6일 기유
추국하였다. 모반 대역 죄인 정경행(鄭敬行)·정복일(鄭復一)·정성한(鄭聖翰), 모반 죄인 최봉관(崔鳳寬)이 복주(伏誅)되었다. 이에 앞서 관서의 도신·수신이 적괴(賊魁) 정경행·정복일 등이 모반한 정절(情節) 등을 엄중히 조사하여 의금부에 압송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연 이틀 동안 의금부에서 추국을 설행하여 지만(遲晩)을 받았던 것이다. 정경행은 철산(鐵山) 사람인데, 충신의 후손으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고 자신은 현달한 벼슬을 하였으나, 국가에 반기를 들고 적에게 붙어 비장(裨將)·유영장(留營將)·도지휘(都指揮) 등의 위첩(僞帖)을 받아 적이 시키는 대로 정성을 다해 수행하였다. 심지어 흉추(凶醜)에게 글을 보내 적군이 들판에 거처하는 것을 염려했고, 나라의 곡식을 도둑질해 흉도(凶徒)들의 군량으로 제공하였으며, 군사가 관군에 항거하면 적에 임하였다 하고, 명리(命吏)를 장살(狀殺)하면 포악한 자를 제거하였다고 일컬었다. 세 번 생각한다는 경계(警戒)와 절충한다는 말은 전적으로 적을 위해 힘을 다바치고자 하는 데서 나와 오로지 적의 세력이 펼쳐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흉당(凶黨)의 모주(謀主)로 은연중 자처하였다. 정절(情節)이 모두 드러나 천지간에 용납되기 어려우니, 모반 대역이 확실하였다. 정복일은 철산 사람인데, 청북(淸北)의 거족(巨族)으로서 앞장서서 극역(劇逆)한 혈당(血黨)이 되었고 가짜 유영장(留營將)의 첩(帖)을 받아 몰래 서찰을 통하며 힘써 흉계를 도왔다. 민병을 뽑아 적군에 보태 주고, 창고의 곡식을 실어다 도적들의 양식으로 제공하였으니, 어느 것인들 지극히 흉악한 짓이 아니리오마는, 적병을 의기(義旗)라 일컬었으며 적이 오는 것을 기뻐하여 이마에 손을 얹고 기다리다. 용천(龍川)·철산의 군사를 많은 수를 불러 모으고 만부(灣府) 사람에게 사람을 보내 속이고 유혹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 중에서 한 가지만 있을지라도 만 번 찢어 죽여도 오히려 가벼울 것이니, 모반 대역이 확실하였다. 정성한은 철산 사람인데, 관서(關西) 벌열(閥閱)의 족속으로 조정의 망극한 은혜를 받았건만, 감히 불궤(不軌)한 마음을 품어 달갑게 적당이 되어, 적의 가짜 첩을 받고서는 용천의 원이 되었고, 적을 위해 성을 지킴에는 기각(掎角)의 계책060) 을 올렸다. 심지어 사도(使道)라 일컬으며 애휼(愛恤)하는 은택을 칭송하였고, 유영(留營)에 웅거하여 책응(策應)의 노고를 다 바쳤다. 군량이 부족할까 염려하자 부유한 백성에게서 쌀가마니를 긁어들였고, 그 거행이 미치지 못함을 혐의쩍게 여기자 수족이 갖추어지지 아니하였음을 한탄하였으니, 모반 대역이 확실하였다. 최봉관은 선천(宣川) 사람인데, 흉역(凶逆)의 심보를 가져 몰래 적괴와 내통하여 은표(銀標)와 가짜 첩을 달갑게 적장에게서 받고 동쪽·서쪽으로 지휘함에 수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문보(文報)와 첩제(牒題)가 흉참(凶慘)한 적병의 패함이 아님이 없었건만 와언(訛言)이라 일컬었고, 관군이 오자 적병이라 불렀다. 적의 장수를 높여 북영(北營)이라 하고, 서울 사람을 질시하여 남인(南人)이라 불렀으며, 창곡의 곡식을 훔쳐내어 적을 위해 군량으로 운반하였고, 말편자를 갖추어 보내어 적군에게 대어 주었으니, 모반한 것이 확실하였다. 그래서 모두 정법(正法)대로 하고 노적(孥籍)도 법대로 집행하였으며, 철산과 선천을 강등하여 현(縣)으로 삼았다.
2월 7일 경술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방금 절도사 박기풍(朴基豊)의 이달 4일의 보고를 받아보았더니, ‘윤제(輪梯)를 만들었는데, 높이는 성을 굽어 볼 만합니다. 바깥에는 두터운 판자를 설치하고, 또 쇠가죽으로 가려, 위에는 총수(銃手)를 숨겨두고 안에는 구졸(驅卒)을 감추어 육박전으로 성을 넘을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순영 중군(巡營中軍) 이정회(李鼎會)·박천 군수(博川郡守) 이운식(李運植)이 동남쪽을 시살(廝殺)하고,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이 서문(西門)을 습격하고, 삭주 부사(朔州府使) 윤민동(尹敏東)·전 부사(府使) 민수현(閔修顯)·판관(判官) 장낙현(張洛賢)·출신(出身) 김우종(金禹鍾) 등이 동북쪽을 협공하고, 순천 군수(順川郡守) 오치수(吳致壽)·우림 장(羽林將) 허항(許沆)이 소서문(小西門)으로 진공하고, 초관(哨官) 이기정(李基鼎)이 동문 밖에서 매복하고, 집사(執事) 이동은(李東殷)·별무사(別武士) 매경은(梅景殷) 등이 서문 밖에 매복하고, 정주 목사(定州牧使) 서춘보(徐春輔)·숙천 부사(肅川府使) 이유수(李儒秀)·가산 군수(嘉山郡守) 정주성(鄭周誠)·파총(把摠) 윤지겸(尹之謙)·초관 방우정(方禹鼎) 등이 남문을 합력해 공격하고, 개천 군수(价川郡守) 유상필(柳相弼)이 유진장(留鎭將)이 되어 치중(輜重)061) 을 지키고, 절도사는 마보병(馬步兵)을 통령(統領)하여 뒤에서 책응(策應)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어제 5경(更)에 일제히 공격하자, 흉적들이 윤제가 4, 5십 보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총과 활을 쏘므로, 윤제에 매복해 있던 관군들도 또한 총탄을 쏘았더니, 적들이 모두 헛간 안으로 숨고 피하였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북채를 잡고 독전(督戰)했는데, 날이 저물어 캄캄해지자 흉적들은 몸을 숨긴 채 성가퀴를 따라 돌아가며 총을 쏘았고, 관군들은 노출된 채 앉아 비를 맞았기에 총의 화약이 모두 젖었으므로 손을 쓸 방도가 없어 부득이 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경군(京軍)·향군(鄕軍) 중에서 탄환에 맞아 죽은 자는 13명이고 다친 사람은 72명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2월 10일 계축
하교하기를,
"저 양주(楊州) 한 고을은 곧 능침(陵寢)이 있는 곳이고 경기도의 근본이라, 조정에서 권념(眷念)하는 것이 다른 고을에 견주어 본디 달랐었다. 그런데 이제 전 쉬신(倅臣)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거듭 흉년이 든 끝에 또 춘궁기를 당하여 구렁에 뒹구는 황급한 정상이 더욱 불쌍하고 딱하니, 어찌 따로 뜻을 보이는 일이 없을 수 있으랴? 각 아문의 상납을 모두 추수 때까지 기다려 정퇴(停退)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해서(海西)의 급박한 기황(飢荒)이 봄에 이르러 더욱 심한데, 징발(徵發)의 폐단이 아직까지 그치지 않으니, 백성들의 절박한 형편이 관서(關西)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해도(該道)의 삼세(三稅)를 특별히 추수 때까지 한정하여 정퇴하도록 하라. 기내(畿內)의 백성들이 궁하여 근래에 또 심히 어렵겠으나, 연해안에 있는 고을의 형편은 더욱 말할 수 없을 지경일 것이다. 보다 심한 읍진(邑鎭)의 각항(各項)의 징납 또한 추수 때까지 한정하여 정퇴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서사(西師)의 노고를 위문하고 하교하기를,
"서사가 달을 넘기며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으니, 폭로(暴露)의 정상과 굶주리고 목마른 고통이 눈에 선하여 밥 먹는 동안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더욱이 성을 공격하는 즈음에 죽거나 다칠 염려가 없을 수 없으니, 더욱 딱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간절하다. 전에도 누차 전교를 내려 나의 뜻을 모두 갖추어 말했다만,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과연 능히 마음을 다해 선양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에 선전관을 보내노니, 달려가 노고를 위문하고, 이어 따로 호궤(犒饋)하여 나의 위무(慰撫)하는 지극한 뜻을 보이게 하라. 그리고 대소 장령(將領)들이 기율(紀律)을 엄히 밝혀 군졸들을 무마하고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온전한 공을 도모하도록 할 것이며, 군사를 거느린 여러 장수들 중에서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은 자가 있거든 먼저 법을 집행하고 뒤에 등문(登聞)하라는 뜻을 절도사에게 직접 신칙하라. 만부(灣府)의 장사(將士)들에 이르러서는 창의(倡義)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적을 토벌하기를 자원하여 전후의 여러 번 전투에서 번번이 공을 이룸이 있었으며, 대진(大陣)으로 와서는 노고를 두루 겪었으니, 그들이 먼 곳 사람으로서 능히 위를 향한 의리를 안 것을 깊이 가상하게 여기노라. 선전관은 따로 의주(義州)의 의병장이 있는 곳에 가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선전관 김견신(金見臣)은 난의 초기에 창의(倡義)한 사람으로, 군사를 모집해 적도를 토벌했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참획(斬獲)한 것이 가장 많았다. 의주(義州)를 온전토록 하고 용천(龍川)과 철산(鐵山)을 수복한 것은 곧 이 사람이 먼저 창의한 공이다. 우림 장(羽林將) 허항(許沆)은 들어와서는 주획(籌劃)이 타당함을 얻었고, 나가서는 전투에서 앞에 섰었다. 청북(淸北) 대로(大路)가 일거에 확청(廓淸)되게 한 것은 곧 이 사람이 충성을 바친 힘이다. 이제 또 두 사람이 정주(定州)로 진군하여 평정할 것을 자임하니, 모두 지극히 가상하게 여기노라. 마땅히 차례로 보답하여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이나, 김견신만 특별히 맨 먼저 거의(擧義)한 공으로 관서(關西) 수령의 현재 비어 있는 자리에 우선 특별히 제수하라."
하였다. 이때 태천 현감(泰川縣監)에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사(兩司)에서 연명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전 수신(帥臣)이 해를 넘기면서 도적을 길렀다가 그 때에 임하여 겁을 낸 정상은 이미 대략 전의 차자에 진달했습니다. 다만 지금 왕사(王師)가 시일을 허비하며 오래 버티는 것은 전적으로 성을 공격하는 어려움에 있겠으나, 당초 저 적들이 정원(定遠)의 성으로 들어가 웅거해 부리를 서리고 꼭지를 굳게 하여 갑자기 공격해 함락시키지 못하게 한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아! 평안 병우후(兵虞候) 이해승(李海昇)은 곧 전 수사의 지친(至親)인데, 사람됨이 본래 탐욕스럽고 비열하여 그의 동료들 사이에 끼이지 못하는 자입니다. 북관(北關)의 편비(褊裨)062) 의 직임에 있을 때부터 백성들을 괴롭혀 가렴 주구한 것이 끝이 없을 정도였고, 곡식 장부를 조작한 것이 이르지 않은 데가 없어, 그 독이 한 도에 두루 미쳤고 온갖 악을 모두 갖추었으므로, 지금까지도 북관 백성들의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그리고 관서의 좌막(佐幕)이 되었을 때는 옛날의 악을 뉘우치지 않고 묵은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어, 무릇 모리(牟利)하는 정사와 청탁하는 폐단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심해져 뇌물을 받는 것을 능사로 알고 백성을 침학하는 것을 기량으로 여겨 서민(西民)의 인심을 크게 잃었으니, 마침내 도적들의 난이 일어나게 만든 것은 이해승이 한 바가 아님이 없습니다. 그리고 작년 가을 이후로 또 본도(本道)의 병우후의 직임에 제수되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이쪽저쪽에서 재물을 긁어 들이되 더욱 꺼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송림(松林)의 전투에서 전 수신이 이해승에게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을 맡기자, 장사(壯士)들이 해체(解體)하지 않음이 없었고, 서민(西民)들은 도리어 적들을 도울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촌민(村民)을 많이 죽여 수급(首級)의 수를 불리느라 즉시 빨리 나아가지 않으며, 박천 나루에서 머뭇거리느라 적들을 놓아 주어 정원의 성으로 들어가게 해 놓고도 나흘동안 진격하지 않아 흉적들로 하여금 그 사이에 백성들을 꾀어 성으로 들어와 꼴과 양식을 쌓고 험한 곳에 웅거하도록 했으므로 공격해 함락시키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지금 군사를 주둔시켜 서로 버티고 앉아서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모두 당일 기회를 잃었던 소치입니다. 자신이 주장(主將)이 되어 한 군대를 절제(節制)했으니, 이해승이 적을 놓아 준 죄를 전 수신이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전 수신의 일에 대하여 더욱 너무나도 놀라고 분통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영변(寧邊)에서 내응한 적 남윤강(南允剛)은 곧 남윤묵(南允默)의 얼제(孼弟)인데, 남윤묵의 아들이 그의 비장(裨將)이 되었으니, 당초 적변(賊變)이 일어났을 때 마땅히 정탐(偵探)을 바꾸어야만 했을 것인데도 이미 능히 형찰(詷察)을 먼저 일삼지 못했고, 남윤강이 내응한 것 때문에 참살(斬殺)된 이후 적의 조카가 막비(幕裨)에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여 영변부의 치보(馳報)에 쓰인 명자(名字)를 급히 고쳐 남명강(南明剛)으로 장계(狀啓) 안에 써 넣었습니다. 그것이 조지(朝紙)063) 에 나옴에 미쳐서는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놀라고 분통스러워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 무엄하고 방자함이 어찌 이런 극도의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일은 그냥 버려두고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은 평안 병우후 이해승을 빨리 본도(本道)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해 밝혀 경내에서 효시(梟示)하여 서북의 백성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순창현(淳昌縣)에 찬배한 죄인 이해우(李海愚)는 멀리 귀양 보내는 것에 그칠 수 없으니, 또한 본도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여 아뢰게 하는 것과 잡아다 핵실하여 실정을 알아내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지금 이 조사하는 일은 온 군대가 반드시 소동할 것이니, 적이 평정된 뒤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전 수신과 함께 조사하는 일을 일체로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이해승은 청컨대 우선 삭직(削職)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11일 갑인
박윤수(朴崙壽)를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2월 12일 을묘
김이도(金履度)를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로 삼았다.
2월 13일 병진
이면긍(李勉兢)을 호조 판서로, 이집두(李集斗)를 판의금부사로, 박주수(朴周壽)를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삼았다.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절도사의 보고를 받아보니, ‘10일에 초산(楚山)의 총수(銃手) 35명과 순무 중군(巡撫中軍)이 거느린 창수(槍手) 20명으로 남문(南門) 밖에다 매복을 설치했습니다. 그날 밤부터 새벽까지 안개가 사방에 막혔는데, 날이 밝으락말락 할 때에 복병이 적도들의 습격을 받아서 죽은 사람이 1명, 다친 사람이 3명이었고, 조총 17자루를 잃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2월 15일 무오
순무영(巡撫營)에서, 전 선전관(宣傳官) 이용현(李容鉉)이 전투에 나가기로 자원하였다고 아뢰었다.
2월 16일 기미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절도사가 보고하기를, ‘적진에서 나온 박진벽(朴振碧)의 공초(供招)에, 「적괴(賊魁)가 토포 병방(討捕兵房) 김삼홍(金三弘)을 시켜 저와 함께 산군(山郡)으로 가게 했는데, 김삼홍에게는 은자(銀子) 5편(片)과 돈 10냥을, 저에게는 은자 4편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또 김삼홍에게 봉서(封書)를 주며 말하기를, 몰래 이 편지를 가지고 급히 창성(昌城)·벽동(碧潼) 등지로 가되 만약 호마(胡馬)를 타고 나오는 사람을 만나 이 편지를 전해 주면 반드시 대군(大軍)의 후원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삼홍이 그 편지를 옷깃에 감추고는 저와 함께 성을 넘어 산길을 따라 몰래 길을 갔는데, 제가 그 편지를 대진(大陣)에 바치고자 하였으나 김삼홍이 듣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김삼홍을 잡아 온 즉, 흉서가 여전히 옷깃 안에 있었고, 역절(逆節)이 과연 박진벽이 공초한 내용과 같았습니다. 성 안의 사정을 캐 물었더니,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는 거의 2천 명에 가깝고, 군량은 석 달을 버틸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우선 효수하여 대중들을 경계하고 흉서는 순무영으로 올려 보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2월 18일 신유
평안도 절도사 박기풍(朴基豊)을 삭직(削職)하고, 신홍주(申鴻周)로 대신하였으며, 유효원(柳孝源)을 순무 중군(巡撫中軍)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부교리 조봉진(曹鳳振)과 부수찬 강세륜(姜世綸)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청북(淸北)의 여러 군은 거의 다 수복되었고, 홀로 정원(定遠)의 한 탄환 같은 땅만 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조금이나마 용병술을 아는 사람이 토벌했더라면 자신이 스스로 북채를 잡고 맨몸으로 성가퀴에 올라 반드시 한 발길에 밟아 부수어 버릴 수 있었을 것인데, 적들이 힘껏 천위(天威)에 항거한 지 해가 이미 바뀌었고, 관군이 들판에서 폭로(暴露)한 지 이미 한 달이 되었습니다. 아! 저 수신(帥臣)은 군사를 끼고 스스로 호위만 하며 도적들에게 여유를 주어 토벌을 지체하면서 나라를 위해 힘을 낼 바를 생각하지 않으니, 군율로 논하건대 어떤 죄에 두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선봉의 날카롭고 둔함은 본디 병가의 상사이겠으나 한 번 포성(砲聲)을 듣자 곧장 물러났고, 적의 첩자가 왕래하는 것은 곧 계략을 쓰는 기관(機關)인데 더 캐물어보지도 않고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았습니다. 대진(對陣)한 허다한 날 동안 적장이 누구인지도, 적군의 많고 적음도 까마득히 알지 못한 채 한 번도 등문(登聞)함이 없었습니다. 철초(鐵鍬)와 구거(鉤車)는 제승(制勝)의 방략에 익숙하지 못하고, 화포(火砲)와 운제(雲梯)는 모양만 내는 기구로 버려둔 채 겁을 집어먹고 위축되어 감히 접전하지 못하였으니, 옛부터 장수된 자 중에서 어찌 이처럼 우매하고 졸렬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지금 관군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사상자가 이어지고 있는데, 만약 군사들이 지쳐 싸우지 않는다면 장래의 근심은 이루다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적이 만약 이 기회를 엿보아 알아차리고 불의에 충돌해 나온다면 또한 어떻게 그 마구 돌진해 나오는 세력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전 수신이 토벌을 늦추었다 하여 죄를 입은 것이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평안 병사 박기풍(朴基豊)을 먼저 삭직(削職)하고 잡아다 문초하여 그 대신 따로 재략(才略)이 장수가 되기에 합당한 자를 차임하여 보내는 일을 결단코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청컨대 옛날 감무(監撫)의 전례를 따라 따로 한 사람의 근신(近臣)을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군대에 가서 기무(機務)를 감독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그대로 따르고, 감무에 관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였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과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서사(西師)가 아직도 승첩(勝捷)을 아뢰지 않으니, 이것은 진실로 수신의 죄입니다. 다만 적을 공격하는 어려움은 성을 공격하는 것만한 것이 없는 법인데, 이제 만약 조정으로부터 멀리서 절제사를 제수하고 천리 밖에서 독전(督戰)하면서 한 달 사이에 세 번 그 장수를 바꾸는 것은, 지난 역사를 살펴보건대 이미 제승(制勝)의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 장수된 자로 하여금 물러나서는 조정의 명령을 두려워하고 나아가서는 요행스런 공을 바라며, 갑자기 육박전을 할 계책으로 망녕되이 생짜로 치는 행동을 하게 한다면, 이 1만 명도 안되는 군사로 전군(前軍)은 이미 진군했는데, 후군이 뒤를 잇지 못하여 하나라도 혹시 잘못됨이 있을 경우 장차 그 뒷일을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병기(兵機)의 득실을 반드시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들으니 바야흐로 공격할 도구들을 크게 갖추어 일거에 승리를 거둘 계책을 꾸미고 있다 하는데, 만약 사기(師期)에 채 못미쳐 먼저 주장(主將)을 죄준다면 군사 작전이 한 번 흩어져 다시 모을 수 없을 것이고, 단거(單車)로 달려가 대신하는 자가 과연 전의 수신보다 나을 것인지도 또한 감히 반드시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신을 신문하여 처벌하는 것은 우선 조금 천천히 하여 뜻을 오로지 병무(兵務)에 기울여 반드시 온전한 공을 도모하게 하소서. 그리고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마땅히 시행해야 할 죄를 시행하는 것이 아마도 온전히 하는 계책에 합당할 듯합니다. 사신(使臣)을 보내 독전하는 일의 경우는, 자고로 감군(監軍)의 법이 이미 장수에게 명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뜻을 잃은 것이니, 이제 만약 한 사신을 급히 보내 삼군(三軍)을 감독하게 한다면, 명령을 여러 곳에서 내리는 경계를 범하게 되고 일을 이루는 방책을 어기게 되어 그것이 타당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이 두 조건을 분석한 것이 지극히 절실하고 마땅하다. 전날 이미 명령을 내렸건 내리지 않았건 모두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헌납 임업(任㸁)이 다시 상소하여 박기풍(朴基豊)이 도적에게 여유를 주고 토벌을 지체한 죄를 논하고, 또 수신은 비록 죄를 진 채 거행하게 한다 하더라도 순무 중군(巡撫中軍)은 따로 무신(武臣) 중에서 장재(將才)가 있는 사람을 가려서 차대(差代)하여 각각 뜻을 오로지 기울여 빠른 시일 내에 토평(討平)하게 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려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에서 서사(西師)가 처음에 세 번 불리했던 것은 죄가 기회를 잃은 데 있다 하여 평안 병사에게 빨리 삭직의 법을 시행하고 순무 중군의 직임은 재략과 위망(威望)이 있는 사람으로 차출하여 내려 보낼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비국에서 또 아뢰기를,
"순무 중군 겸 평안 병사 박기풍은 이제 막 삭직하였습니다만, 이때 군사를 통솔하는 임무는 일의 형편이 지극히 중대하니, 잠시라도 그 직무를 비워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청컨대 새 수신이 진에 도착하기 전에는 무릇 공전(攻戰)의 기의(機宜)와 곤무(閫務)의 조치를 한결같이 모두 전대로 거행하게 하고, 각진의 장령(將領)들은 또한 모두 그대로 절제사의 명을 듣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경기 감사 권상신(權常愼)이 상소하여, 서로(西路)의 연해 고을과 해서(海西)의 평양에 근접한 지방 및 진휼을 실시한 여러 고을의 민정(民情)을 진달하고, 이어서 대동세(大同稅)의 납입을 추수를 기다려 받을 것과 관문(官門)에 불러 모아 점고(點考)하는 것을 가을을 기다려 거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부진(敷陳)한 것은 도신(道臣)이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뜻을 깊이 얻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이에 의거해 시행케 하겠다."
하였다.
2월 19일 임술
모반 죄인(謀叛罪人) 문영기(文榮基)에게 노적(孥籍)의 법을 추후 시행하였다. 애초 선천(宣川)이 적에게 함락되었을 때 도신(道臣)이 ‘고을의 장교 문영기가 적의 직첩(職帖)을 받지 않고 개연(慨然)히 자살하였다.’고 치계(馳啓)하였으므로, 비국에서 복계(覆啓)하여 본주 방어사(防禦使)를 증직했다가 본도 절도사(節度使)를 더 증직하고, 정려(旌閭)하고 후손을 녹용(錄用)하였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도신 정만석(鄭晩錫)이 다시 조사하여 치계하기를,
"선천의 향장(鄕將)과 이노(吏奴) 등이 공술(供述)한 바로는 모두 ‘흉적(凶賊) 유문제(柳文濟)가 본부에 웅거하고 있을 때 문영기를 군량 감관(軍粮監官)으로 정하여, 양미(粮米)와 주미(洒米)를 미리 갖추어 두고 기다리게 하였더니, 문영기가 요포고(料布庫)의 쌀 21석을 내어 요구에 응하였고, 적괴(賊魁)가 본부에 들어온 뒤 또 방영 중군(防營中軍)에 차정하자 수행(隨行)한 뒤 신병(身病)으로 집으로 돌아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직첩을 물리치고 자살하였다는 말은 실로 창양(槍攘) 중에 전문(傳聞)이 잘못된 데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고, 이어 증직 교지(敎旨)와 포유(褒諭)한 관문(關文)을 거두어 모아 올려 보내었다. 의금부에서 정형 죄인(正刑罪人) 최봉관(崔鳳寬)의 전례에 의거해 노적의 법을 추후 시행할 것을 계청하니, 윤허했던 것이다.
서춘보(徐春輔)를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임재수(林栽洙)를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삼았다.
2월 20일 계해
종정(從征)하여 용맹을 세운 훈국군(訓局軍) 이장갑(李長甲)에게 변장(邊將)을 증직하고, 가속(家屬)들을 후하게 구휼할 것을 명하였으니, 비국의 아룀을 따른 것이다.
2월 21일 갑자
포청(捕廳)의 수추 죄인(囚推罪人) 천오장(千五壯)과 유한순(兪漢淳)을 군문(軍門)에서 효수(梟首)하게 하였다. 천오장은 본디 고양(高陽)의 상천(常賤)으로 품팔이로 살아가다 도둑질 때문에 쫓겨나자 마침내 지극히 흉패(凶悖)한 계책을 내어 이인성(李仁成)이라 성명을 바꾸고 스스로 심적(沁賊)064) 의 아들이라 일컬으면서, 시골 백성들을 속이고 협박하여 의식(衣食)을 요구하다가 금성(金城) 땅에서 잡혔다. 강원 도신(江原道臣) 이호민(李好敏)이 은밀히 아뢰자, 비국에서 의금부의 도사(都事)를 보내어 심도(沁都)065) 의 위리처(圍籬處)에서 적간(摘奸)할 것을 청하고, 또 포청으로 하여금 천오장을 잡아오게 하여 가탁(假托)한 정절(情節)을 엄하게 조사했더니, 낱낱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유한순은 본디 영유(永柔) 사람으로 경향간(京鄕間)에 출입하면서 무뢰배 짓을 하는 데 익숙하였다. 혹은 중들에게 자취를 의탁하고 혹은 암행 어사를 가칭하기도 했는데, 간사한 정상이 탄로나 백령진(白翎鎭)에 충군(充軍)되었다. 석방되자 영유 땅에서 적괴(賊魁) 김사룡(金士龍)을 만나 역절(逆節)과 흉모(凶謀)를 난만하게 수작하였고, 그의 종용을 듣고 자금을 받아 몰래 서울로 들어와서는 사람들을 속이고 아내를 얻어 적의 눈과 귀가 되어 일의 기미를 몰래 정탐하였다. 혹은 남문(南門)의 돌기둥에 방을 붙이는가 하면 혹은 옛 장영(壯營)의 대문(大門)에 괘서(掛書)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선동시킬 계책으로 삼았다. 이어 또 관군의 소식을 탐문하여 선천(宣川)의 적의 소굴로 가서 전해 주고는 다시 김사룡의 지시를 받아 재차 서울로 들어와 궁성(宮城)의 지척의 땅에 출몰하다가 기미를 살피던 포교에게 잡혔던 것인데, 포청에 회부하여 흉악한 짓을 한 정절(情節)을 자세히 캐물어 조사했더니, 낱낱이 실토하였다. 비국에서 모두 군문(軍門)에 맡겨 효수해 뭇사람들을 경계시킬 것을 청하니, 윤허했던 것이다.
평안 감사가 ‘강계(江界)·철산(鐵山)·벽동(碧潼)의 유향(儒鄕) 송지렴(宋之廉) 등이 각각 의병을 모집하여 대진(大陣)으로 나갔다.’고 아뢰자, ‘세 고을의 유향이 창의(倡義)하여 군사와 군량을 도운 것은 매우 가상히 여기고 장려할 일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따로 논상(論賞)을 더하게 하라.’고 분부하였다.
관서(關西)의 군포(軍布)로서 작년에 미처 봉납하지 못한 것을 한결같이 모두 견감(蠲減)해 주라고 명하였는데, 도신(道臣)의 계청(啓請)을 따른 것이다.
추국(推鞫)하여, 【좌의정 김재찬(金載瓚), 우의정 김사목(金思穆), 판의금 이집두(李集斗), 지의금 박종경(朴宗慶), 동의금 이당(李溏)·김상휴(金相休)이다.】 이진채(李振采)·정우문(鄭友文)·한광우(韓光友) 등을 국문하였다. 이때 서사(西師)는 아직 미처 개선하지 않았고, 임금의 환후는 바야흐로 정섭(靜攝) 중이었는데, 이달 13일 저녁 갑자기 감히 말할 수도 없고 차마 들을 수도 없는 말이 길거리에 전파되어 온 성안이 떨고 두려워하였으므로, 포도청에서 그 말의 근원을 정탐하여 이진채 등 세 사람을 잡았다. 대신(大臣)이 국청(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윤허를 아꼈으나 마침내 허락하고, 좌의정 김재찬을 위관(委官)으로 삼아 다스렸는데, 4월 초에 이르러 국문을 마쳤다. 이진채는 사옹 봉사(司饔奉事) 박종일(朴鍾一)을, 박종일은 김연수(金延壽)와 이원박(李元樸) 및 매부인 전 정언(正言) 이영순(李永純)을, 이원박은 그의 생질인 전 교리(校理) 윤치후(尹致後)를, 윤치후는 박종일의 조카 박영철(朴永喆)을 끌어들었는데, 모두 핵실(覈實)하여, 박종일과 이진채는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정우문과 한광우는 모역(謀逆)에 동참한 것으로, 윤치후와 김연수는 정상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것으로, 모두 주살(誅殺)하였다. 이원박은 윤치후에게 고변(告變)할 것을 권하였으니, 그 자취가 정실을 안 것과 다름이 있었으나, 예언설[讖緯說]을 문답하여 흉도들이 더 소란을 떠는 근본을 이루었으며, 이영순은 국정(鞫庭)에서 자세히 캐물어 조사한 데에 비록 진장(眞贓)은 없었으나 자신이 시종신(侍從臣)이 되어 무단히 시골로 내려갔고 길에서 윤치후를 만나 떠들썩하게 수작하였다 하여 모두 죽을 죄를 감하여 이원박은 거제부(巨濟府)에, 이영순은 진도군(珍島郡)의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게 하였다. 박영철은 박종일의 연좌로 시행하게 하였다.
2월 22일 을축
추국하였다.
2월 23일 병인
추국하였다.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절도사가 보고하기를, ‘이달 19일 이른 아침 요망군(瞭望軍)의 진고(進告)에, 「적도 근 1백 명이 동문 밖으로 나왔는데, 아마도 매복을 설치하는 모습 같았다.」고 하였고, 순무 중군(巡撫中軍) 이정회(李鼎會)와 박천 군수(博川郡守) 이운식(李運植)이 장교를 보내어 치고(馳告)하기를, 「적도들이 남문 밖으로 나오자 본진(本陣)에서 먼저 접전해 치고자 하였으므로 즉시 강계(江界) 의병장 송지렴(宋之廉)에게 총수(銃手) 60명을 거느리고 동문 밖으로 가서 진격하게 하였고, 또 별무사(別武士) 정의진(鄭義鎭) 등에게는 서울 포수(砲手) 1백 명과 영변(寧邊) 포수 20명을 거느리고, 차관(差官) 이동은(李東殷)에게는 마병(馬兵) 30명을 거느리고 빨리 남문 밖으로 달려가 협공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시(巳時)에 송지렴의 회고(回告)에는, 「동문의 적장이 교전하려고 할 즈음에 먼저 총수에게 일제히 총을 쏘게 하여 적군 4명이 즉시 죽자 적도들이 달아나 성 안으로 달려 들어가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였으므로, 정예 포수 약간 명을 우회처에 잠복시켜 두고 ‘퇴군(退軍)한다.’고 큰 소리를 치며 천천히 돌아왔더니, 적들이 믿고서 의심하지 않고 성을 의지하여 아래로 굽어보기에 몰래 숨어 있던 정예 포수들이 일시에 총을 쏘자 적도 2명이 총환에 맞아 즉시 죽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의진의 회고에는, 「남문 밖에 이르러 총수들이 일제히 총을 쏘자 적도들이 곡성(曲城) 안으로 퇴각해 들어갔는데, 시체를 끌고 들어간 것이 7, 8명은 되었고, 부축해 끌고 간 자 또한 많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순영 중군과 박천 군수의 보고에는, 「당일 어둑 새벽 때 적도들이 남문으로부터 나왔는데, 검은 옷을 입고 병기를 가진 자가 거의 1초(哨)가 되었고, 비각(碑閣) 뒤로부터 성의 동쪽과 남쪽 사이에 이르기까지는 창수(槍手)로 매복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갑주(甲胄)를 입고 인기(認旗)066) 를 든 적이 곡성 밖에 서 있었고, 흰 옷을 입은 자 4, 5백 명이 후전(後殿)이 되었습니다. 총수 3,40명이 남문 밖 다리 위에서부터 오룡교(五龍橋)에 이르기까지 앞을 차단하고 어지러이 총을 쏘았으므로, 중군(中軍)이 총수와 사수(射手) 및 전면의 1초를 거느리고 총과 화살을 쏘며 전진하여 반 나절 동안 서로 4, 50보 안에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 안의 적도 중에 총을 가진 자들이 또 소서문(小西門)으로부터 나와 순천 진(順川陣)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았으므로, 해진(該陣)에서는 형세상 와서 돕기 어려웠는지라 함종 진(咸從陣)에서 나는듯이 달려가 도왔는데, 중간이 막혔기 때문에 싸움이 사시(巳時)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군수(郡守)가 또 후면의 1초를 내어 서쪽으로부터 돌출하여, 남문을 바로 핍박할 뜻을 보이니, 적군이 두려워하며 겁을 내어 몸을 돌릴 뜻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경군(京軍)이 이때를 타서 와서 도우며, 북을 치고 나아가면서 활과 총을 쏘자, 적병이 크게 무너지며 서로 짓밟으며 물러나 곡성으로 들어갔는데, 시체를 끌고 간 것이 7, 8명이었고, 부축을 받아 끌려간 자 또한 심히 많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해서 감진 어사(海西監賑御史) 김계온(金啓溫)이 장계(狀啓)로 곡산(谷山)의 잔패(殘敗)한 상황을 진달하고, 북도의 곡식 2천 석을 갈라서 진휼 밑천에 보탤 것과 서울 각사(各司)의 상납을 세전(歲前)까지 한정하여 정퇴(停退)해 줄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해서의 심각함을 생각하고 있던 즈음에 이 장문(狀聞)을 보니, 지극히 딱하도다.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라."하였다. 비국에서 안변(安邊)의 곡식 1천 석과, 고원(高原)의 곡식 5백 석을 옮겨 줄 것과 상납의 정퇴를 아뢴 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2월 24일 정묘
추국하였다.
2월 25일 무진
추국하였다.
2월 27일 경오
추국하였다.
전 평안 병사(平安兵使) 박기풍이 아뢰기를,
"전 부사(府使) 민수현(閔修顯)이 선천 현감(宣川縣監) 김희(金爔)와 대솔 군관(帶率軍官) 사과(司果) 김필기(金弼起)와 더불어 진에 나가기를 자원하였으나, 거느린 군사의 수가 적었으므로, 창의장(倡義將) 장낙현(張洛賢)에게 합쳤습니다. 그런데 각자 불러 모은 것이 한 모퉁이는 족히 맡길 만하였으므로, 민수현은 거느린 군사 87명 외에 순안(順安)의 군사 40명을 더 주어 북문 밖에 진을 치도록 하고, 장낙현은 스스로 모집한 군사 95명을 거느리고 민 수현과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문 밖에 진을 치도록 하여 서로 갈고리처럼 연결되는 형세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철산(鐵山)의 진사(進士) 박대관(朴大觀)이 창의하여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전투에 나왔길래 장낙현에게 합쳤습니다. 창성(昌城)의 전 권관(權管) 강인학(姜仁鶴)은 한 집안의 의사(義士) 42명을 창기(倡起)하여 정주(定州) 동문 밖 20리 쯤인 귀주(龜州)와 태천(泰川)의 경계에 둔을 치고 있는데, 스스로 군량을 갖추고 좁은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곽산(郭山)의 선비 원영정(元永丁)은 의병 60명을 이끌고 정주 서문 밖 15리 쯤 되는 곳에서 높은 고개의 좁은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스스로 양식을 마련해 와서 달아나는 적을 정탐하고 있으며, 태천의 한량 이시복(李時復)은 소모병(召募兵) 29명을 거느리고 순영 중군(巡營中軍) 이정회(李鼎會)의 진에 와서 합쳤습니다. 벽동 군수(碧潼郡守) 이응복(李膺福)의 첩보(牒報)에 의하면, ‘본군의 향인(鄕人) 김경로(金慶魯)가 사사로이 의사 1백 명을 모집하여 진에 나아가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각 고을의 향인들 중 소와 술, 양식을 가지고 군사들을 먹인 자들을 이름을 열거하여 아뢰니, 하교하기를,
"의사들이 군사와 양식으로 많이 도운 것이 이처름 많으니, 진실로 기특하고 아름답다. 묘당으로 하여금 후하게 논상(論賞)하여 격려·권장을 기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신의 영(營)의 중군(中軍) 이정회(李鼎會)의 첩정(牒呈)에, ‘이 달 23일 아침 해가 뜰 때에 적도 수백 명이 남문으로부터 나오면서 총수(銃手)를 시켜 어지러이 총을 쏘게 하여 전진하였으므로, 즉시 총수·사수·창수(槍手)를 출동시켜 4, 50보 사이에서 접전하게 했더니, 적도들이 곡성(曲城)으로 달아나 들어가서는 대완구(大碗口) 3좌(坐)를 일시에 함께 발사했습니다만, 아군은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창성 부사(昌城府使) 허승(許乘)의 첩정에는, ‘본부의 전 권관(權管) 강인학(姜仁鶴)은 병자년067) 에 순절한 강백룡(姜白龍)의 7대손으로서 종족(宗族) 중에서 젊고 용감한 자 42명을 창솔(倡率)하여 창의(倡義)해 적을 토벌하겠노라며 대진(大陣)으로 나아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조윤대(曺允大) 등이 연경(燕京)에서 출발하였다라고 치계(馳啓)하였다.
2월 29일 임신
추국하였다.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전 절도사의 보고에, ‘25일 자시(子時)에 윤제(輪梯) 6좌(坐)를 각진(各陣)에 나누어 보내고, 장령(將領)들이 6면으로 성을 에워싸 일시에 함께 공격했습니다. 순영 중군(巡營中軍) 이정회(李鼎會)와 박천 군수(博川郡守) 이운식(李運植) 등은 윤제를 이끌고 남문으로 들어가고,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열(尹郁烈)과 순천 군수(順天郡守) 오치수(吳致壽) 등은 윤제를 이끌고 서소문(西小門)으로 들어가고, 삭주 부사(朔州府使) 윤민동(尹敏東)은 동문으로 진격하여 공격하고,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주성(鄭周誠)과 파총(把摠) 윤지겸(尹之謙) 등은 윤제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들어가고, 숙천 부사(肅川府使) 이유수(李儒秀)는 전 선전관(宣傳官) 이용현(李容鉉)·의병장 송지렴(宋之廉) 등과 함께 윤제를 이끌고 동북 쪽으로 들어갔는데, 회(灰) 2천여 석을 운반해 한쪽 편에다 쌓아 화살과 탄환을 막고, 겸하여 성을 넘을 사닥다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굴토군(堀土軍) 11명에게는 몸을 막을 수레를 만들어 주어 일시에 아울러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태천 현감(泰川縣監) 김견신(金見臣)·전 부사 민수현(閔修顯)·판관(判官) 장낙현(張洛賢)·출신(出身) 김우종(金禹鍾) 등은 윤제를 이끌고 북장대(北將臺)로 들어갔고, 우림 장(羽林將) 허항(許沆)은 윤제를 이끌고 북문으로 들어갔는데, 서문은 생로(生路)를 열어두느라 마병 초관(馬兵哨官) 이기정(李基鼎) 등으로 하여금 서문 밖에서 조금 먼 곳에 매복해 있게 하였습니다. 개천 군수(价川郡守) 유상필(柳相弼)은 유진장(留鎭將)이 되어 치중(輜重)을 지켰고, 병사는 전후(殿後)의 책응(策應)을 담당하였습니다. 적도들은 윤제가 수십 보 안으로 진입하기를 기다린 뒤 비로소 이에 총과 화살을 쏘아댔는데, 윤제가 바싹 진입하자, 마른 섶과 빈 섬으로 화약을 싸서 화살에 걸어 어지러이 쏘아대었습니다. 회석(灰石)이 불타면 곧 끄면서 굴토군이 회석을 방패로 의지하여 먼저 성 밑에 들어갔으나, 두 졸병이 탄환과 돌에 다쳤기에 계책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문은 적도들이 옹성(甕城) 밖으로 나와 방패를 등에 진 채 화약을 가져와 직접 윤제를 불살랐으나, 날이 이미 캄캄하게 어두어 공격을 독촉할 길이 없고 화살과 돌이 어지러이 떨어져 군졸들이 많이 다쳤는지라 부득이 회군(回軍)하였습니다. 불에 탄 것 외의 각 방면의 윤제는 끌고 나올 길이 전혀 없었는데, 적도들에게 빼앗길 것이 염려되어 즉시 불태워버리게 하였습니다. 경군(京軍)은 다행히 치상(致傷)을 면하였고, 향군(鄕軍)으로서 죽은 자는 12명이고, 다친 자는 1백 44명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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