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5권, 순조 12년 1812년 4월

싸라리리 2025. 6. 24.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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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계묘

해서 감진 어사(海西監賑御史)에게 명하여 도내의 중간이 되는 고을에서 별여제(別厲祭)를 지내게 하였다. 처음에 해서의 도신(道臣)이 여기(厲氣)가 치성(熾盛)하다고 하여 여제(厲祭)를 따로 지낼 것을 장계(狀啓)로 청하자, 예조에서 임자년077)  의 전례에 의거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낼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여제를 따로 지내면 으레 근신(近臣)을 보내지만, 간혹 도신으로 하여금 지내게 한 것은 백성과 고을을 위해 폐단을 줄이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때 도신이 제사를 지내느라 왕래한다면 또한 폐단을 끼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감진 어사 김계온(金啓溫)은 이미 근신을 지냈고, 바야흐로 도내에 있으니, 그대로 일을 맡아보게 하는 것이 아주 편의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안주(安州)의 절사(節死)한 사람인 임지환(林之煥)을 증직(贈職)하고 정려(旌閭)하였다. 평안 병사 신홍주(申鴻周)가 아뢰기를,
"안주 사인(士人) 임지환은 곧 정묘년078)   노란(虜亂) 때 순절했던 사람의 후손입니다. 적변(賊變)이 일어난 초기에 임지환이 전투에 나아가기를 자원하길래 특별히 장사 군관(壯士軍官)에 차임(差任)하여 진에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올해 정월 5일에 용천(龍川)과 의주(義州)로 진병(進兵)하여 협공하는 일 때문에 진에 있던 우후(虞候)가 비밀 관문(關文)을 써 주며 임지환으로 하여금 옷솔기 안에 감춘 채 두 고을로 들어가 전해 주게 했는데 선천(宣川)에 이르러 해현(該縣)에 남아 있던 적에게 잡히게 되었습니다. 〈적이〉 비밀 관문을 뒤져 내고는 양책참(良策站)의 적괴(賊魁)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압송(押送)하였습니다. 적이 처음에는 뜰 아래에 두고서 위협하다가 돌아서서 곧 대청 위에 앉기를 청하며 여러 가지로 항복하라고 유혹하였지만, 임지환은 목소리를 돋구어 크게 꾸짖기를, ‘너희들은 죄가 쌓여 하늘에 가득한데도 아직까지 남에게 악을 돕게 하려는가? 나는 충신의 후손으로 비록 톱으로 몸을 잘라 죽인다 하더라도 너희같은 흉적(凶賊)에게는 굴할 수 없다.’ 하니, 적괴가 대노하여 즉시 내어다 참하게 하였습니다. 임지환이 드러누운 채 엎드리지 않고 타매함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으니, 양책참의 남녀들이 눈으로 보고 장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뒤 만부(灣府)의 의병장 김견신(金見臣)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오던 길에 보고서 지니고 있던 저사건(紵紗巾)을 풀어 그 머리를 싸고 그 시신을 염습한 뒤 그 동리에 내어 주고는 관사(館舍)의 북쪽에 매장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천 현감 김희(金爔)와 용천 부사 이영식(李永植)에게 관문을 보내 더 조사하여 보고하게 했더니, 임지환이 적을 꾸짖다가 해를 입은 전말은 그 당시의 통인(通引) 김인식(金仁植)과 홍치인(洪致仁) 등이 모두 ‘임지환은 본현(本縣)의 장교 독고맹(獨孤孟)과 오일형(吳一亨)에게 잡혀, 해현에 머무르고 있던 적 유문제(柳文濟)가 있는 곳으로 압부(押付)되었는데, 잡아들여 위협과 공갈이 이르지 않은 바 없었습니다. 그리고 옷깃 안에 있던 관문을 뒤져내고는 그대로 칼을 씌워 용천의 적진으로 압송하자, 적괴를 대하여 반국(叛國)한 역적이라며 꾸짖으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죽을 때에는 빨리 칼을 쓰라고 하며 꾸짖음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책참에 사는 백성인 김윤제(金允濟)·최영찬(崔永贊)이 함께 그때의 광경을 목도하였었는데, 그들의 말에 ‘임지환이 결박당한 채 도착하자 적도가 그 소회(所懷)를 물으니, 「내 어찌 너희와 같은 흉역과 말을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적도가 「어째서 흉역이라 하는가?」라고 하니, 임지환이 목소리를 돋구어 크게 꾸짖기를, 「너희 조상 때부터 나랏땅을 갈아먹고, 살아서는 자식을 기르고 죽어서는 그 땅에 묻혔으니 나라의 은혜가 아님이 없다. 그런데 지금 반국(叛國)하여 변을 일으켰으니, 대역(大逆)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적도가 노하여 참하려고 하였으나, 안색이 변하지 않았으며, 죽을 때에는 「내가 지금 죽으면 죽는 것이나, 마땅히 하늘의 해를 우러러 보고 죽겠다」고 하면서 이어 몸을 뒤집어 드러누운 채 발로 적도를 찼습니다. 적들이 찌르고 칼을 휘둘러 거의 목숨이 끊어지게 되었는데도 입에서 꾸짖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정충(貞忠)·탁절(卓節)은 포휼(褒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죽음에 임하여서도 굴하지 않았으니, 그 늠연한 기풍은 족히 적의 간담을 놀라게 하고 이목을 감동시킬 만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즉시 여쭈어 처리하게 하여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임지환은 그 자취가 본디 위포(韋布)로서 대대로 충의를 물려받았는데, 난이 일어난 초기에 분연히 진에 나아가 몸에 김희의 편지를 감추고 직접 호구(虎口)를 밟다가 적에게 잡혔으나 불굴의 기절을 세웠습니다. ‘몸을 톱으로 자른들 어찌 두려우랴?’고 한 말과 ‘너의 죄가 하늘에 가득 찼다.’고 한 말은 칼날을 받은 안고경(顔杲卿)079)  이나 톱질을 당한 장 장흥(張興)080)  에게 부끄러움이 없으니, 청컨대 특별히 병조 참의에 증직하고 정려(旌閭)의 은전을 베푸소서. 그리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집을 존문(存問)하게 하되, 만약 장사를 지냈거든 전뢰(奠酹)의 비용을 후하게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평안 병사가 아뢰기를,
"순무 중군 유효원(柳孝源)이 보낸 글에 이르기를, ‘적들이 22일의 패배를 겪은 뒤로 마땅히 기가 꺾이고 저상되는 형세가 있어야 할 터인데, 요며칠 이래로 억세고 완고함이 예전과 같아, 심지어 기생을 끼고 풍악을 하는가 하면 성을 순시하며 총을 쏘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는 날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믿는 바가 있는 것처럼 허장 성세를 벌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25일, 26일에는 남문으로부터 남녀 1대(隊)를 몰아서 내보냈습니다. 이른바 남자란 4명은 장정이고 1명은 15, 6살쯤 된 아이인데, 조금 각성하는 것이 있었으므로 모두 칼을 씌워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늙은 꼽추로 거의 죽게 된 자였고, 나머지 45명은 모두 10살 이하로 어린애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여자는 1백 3명이었습니다. 모두 잡아와 조사해 물었더니, 「저희들은 모두 가산(嘉山)·박천(博川)·정주(定州) 세 고을의 백성들로서 적도들이 성에 들어가던 처음에 『이 근처의 백성들은 성에 들어가면 살고, 들어가지 않으면 죽는다』고 창언(倡言)했기 때문에 우부 우부(愚夫愚婦)들이 죽고 산다는 말에 움직여 몰려 들어가게 된 것인데, 갑자기 어제 오늘 이처럼 내쫓으니, 비록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저희들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적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비록 성 안에 있기는 하였지만 각기 한 모퉁이에 있으면서 남자는 나무를 하고 여자는 물을 길으며 스스로 먹고 사는 데 골몰하느라 그 밖의 일은 아주 알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적들을 따라 성으로 들어가 여러 달 함께 살았으니, 한결같이 모두 진멸(殄滅)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겠으나, 그 말을 듣고 그 모습을 보건대 어리석고 몽매한지라 진실로 ‘극히 무지하여 족히 책망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적에게 있어서도 협종(脅從)이 되지도 못하고, 우리에게 귀순하여도 평민이 되기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일시에 쫓아낸 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한다면, 양식을 구하고 구원을 청하거나 정탐하는 등의 일에 어찌 반드시 장실(壯實)한 자를 버리고 이처럼 늙고 병든 사람과 어린 아이를 시켰겠습니까? 따라서 양식이 모자라 입을 덜려고 하는 계책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 긴헐(緊歇)을 논하지 않고 나오는 족족 죽인다면 영원히 귀순할 길을 막고 적에게 붙을 마음을 더욱 굳게 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잡아 가둔 5명 이외에는 모두 각각의 해당 지방관에게 넘겨 그 방리(坊里)를 조사해 편안히 살게 하고, 그 행동을 규찰(糾察)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의 이 노약한 남녀를 연일 내보낸 것에서 진실로 그것이 양식이 결핍되어 입을 덜려고 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넉 달 동안 적을 따르다가 하루아침에 와서 귀순하였으니, 헤아리기 어려운 근심이 없지 않으므로, 한편으로는 편안히 살게 하고 한편으로는 규찰하라는 뜻을 또한 신의 영(營)에서 해당되는 각 지방관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엄칙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4월 2일 갑진

포청 죄인(捕廳罪人) 한기조(韓基朝)를 순무영(巡撫營)에 맡겨 효수(梟首)하게 하였다. 처음에 용천(龍川)·철산(鐵山)에서 적을 격파한 뒤 본도(本道)에서 수색하여 올린 적도들의 문서 안에 서울에 사는 한기조가 적괴에게 올린 단자(單子)가 있었는데, 말의 뜻이 아주 패려(悖戾)하여 ‘일월 같은 성명(聖明)으로 상제(上帝)께서 권우(眷祐)081)  하신다.’는 등의 말로 적괴를 칭도(稱道)하는데 이르렀고, 또 ‘백성들의 형편이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아 온 세상이 난을 생각한다.’는 말로 서울에 사는 의관을 갖춘 백성들을 적도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였다. 포도청에서 잡아 엄하게 조사하자 변명없이 지만(遲晩)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비국의 아룀으로 인해 윤허하였던 것이다.

 

추국 죄인(推鞫罪人) 김연수(金延壽)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성기(聲氣)를 이진채(李振采)와 서로 접하였고, 종적을 몰래 박종일(朴鍾一)에게 의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천(仁川)·부평(富平)은 배를 대었으니, 국도(國都)를 옮김이 마땅하고, 남중(南中)의 병화(兵火)는 왜(倭)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혜성이 남쪽으로 옮겨가니 2월에 불로 공격하고 3월에 기병한다.’는 등의 설은 모두 흉도(凶徒)가 배포하고 선동한 계책이었습니다. 정월의 흉언에 이르러서는 그 정실을 알지 못함이 없었건만, 능히 발고(發告)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고, 죄인 윤치후(尹致後)의 결안에는 이르기를,
"서변(西變) 이후에 처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피신할 계책을 삼고자 했던 것은 죄를 이미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길을 떠날 때에 임하여 박종일이 찾아오자 여러 조목의 흉언을 전하였습니다. 그 심지어 ‘중서배(中庶輩)가 장차 양반을 도륙하고 액정(掖庭)과 결탁하며, 장차 호서(湖西)와 연접(連接)하여 심적(沁賊)의 아들과 더불어 백의군(白衣軍)을 거느리고 올라와 도성을 화공하면 진신(搢紳)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고 한 것은 모두 요망한 말이자 황당한 설로 직접 듣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두 글자의 흉언은 발고할 뜻이 없었습니다."
하며, 모두 정실을 알고도 고하지 아니하였음을 지만(遲晩)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4월 4일 병오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의 첩보(牒報)에 이르기를, ‘봉성장(鳳城將) 복녕(福寧)이 갑군(甲軍) 40명을 거느리고 부도통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즉시 군관(軍官)과 훈도(訓導)로 하여금 가서 온 이유를 묻게 하였더니, 봉성장의 말에 「나와 부도통 및 서협(署協)은 함께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귀국이 적을 평정했는지 여부를 탐지하고 이어 변방의 방수를 살피려고 왔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이미 우리 때문에 먼길을 왔으니, 한번 위로하고 호궤(犒饋)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이 일을 해당 부윤에게 알렸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안주 목사(安州牧使) 조종영(趙鍾永)이 바야흐로 부도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따로 위로하고 호궤했지만, 봉성장이 이제 이미 와서 한 곳에 머무르고 있는데 접대하는 의절을 한 곳에는 베풀고 한 곳에는 베풀지 않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품계(稟啓)한다면, 날짜가 늦어질 것이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하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우선 일체로 거행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였습니다."
하였다.

 

4월 5일 정미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金載瓚) 등이 임금의 환후가 평복된 데 대한 진하(陳賀)를 날짜를 가려 거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리고 이어 각 전궁(殿宮)의 방물(方物) 물선(物膳)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역적 심적(沁賊)의 아들이 역적의 와주(窩主)가 되었다 하여 연석(筵席)에 올라 법대로 처리하여 난의 근본을 끊을 것을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나아가 우러러 청하자 물러가라고 명하였으나, 물러가지 않았다. 임금이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가서 승전색(承傳色)을 시켜 말을 전해 물러가도록 하유(下諭)하니, 여러 신하들이 비로소 물러나왔다. 대신이 다시 연명 차자로 극력으로 말하자, 비답하기를,
"전의 비답에서 이미 나의 뜻을 하유하였다. 선대왕의 성덕(盛德)을 감히 계술(繼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외정(外廷)의 사람 중에서도 무고한 사람들은 소석(昭晳)하여 살려낸 경우가 많이 있거늘, 종반(宗班)의 사람이 알지 못하는데 가히 죽일 수 있겠는가? 하늘의 해를 보지 못하게 엄하게 방수(防守)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알 수가 있었겠는가? 비록 내가 부덕하여 반드시 죽이고자 할지라도 대신과 삼사의 도리로는 마땅히 간쟁(諫諍)하여 죽이지 않게 해야 옳을 것인데, 지금은 내가 반드시 살리고자 하나 경들은 나로 하여금 죽이게 하고자 하니, 경들은 어찌하여 불인(不忍)한 마음을 먹지 않는가? 이처럼 비답한 뒤에도 경들이 즉시 그치지 않고 또 다시 쟁집(爭執)한다면, 경들은 나를 저버리고 선왕의 성덕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알리노니, 즉시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의주 부윤 조흥진(趙興鎭)이 아뢰기를,
"병과(餠果)와 주찬(洒饌)을 넉넉히 갖추어 중강(中江)의 북쪽 건너편으로 달려가 노고를 위문하고 궤유(饋遺)하자 사례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누이 간청하자 비로소 받으며 ‘우리들의 이번 행차는 황지(皇旨)를 받든 것이니, 직분(職分)에 당연한 일이라 지나치게 우려하고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거듭 노고를 위문하신 것에 지극히 감사하고 있으니, 호궤 한 가지 일은 더욱 마땅히 거론할 수 없습니다. 다만 황성(皇城)에 달려가 아뢸 시일이 급박하니, 만약 진짜로 적기(賊奇)가 있거든 반드시 문자(文字)로 빨리 통고해 주기를 바라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4월 13일 을묘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고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다. 그 교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과인이 병이 나서 오랫동안 위예(違豫)한 근심이 간절했더니, 하늘이 기쁨을 내려주어 빨리 회복되는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기에, 팔도가 함께 기뻐하는지라, 십행(十行)의 사륜(絲綸)을 널리 선포하노라. 내가 외람되게도 4백 년의 큰 기업을 이어받아 억만 년의 영원한 명(命)을 기원하고, 조종(祖宗)의 무거운 부탁을 받아 항상 깊은 못가에 임한 듯 엷은 얼음을 밟고 있는듯 조심하였건만, 백성과 나라가 어려운 때를 당해 금의 옥식(錦衣玉食)에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나이가 바야흐로 한창 때인데도 오히려 만기(萬機)는 피로를 끼치고, 추위와 더위는 절선(節宣)하는 데 쉽게 어긋나 혹 육기(六氣)가 여기(沴氣)가 될까를 두려워하던 차에 때마침 청연(淸燕)이 조섭(調攝)의 방도를 잃어 영위(榮衛)가 조화를 상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의원들이 여러 가지로 치료하느라 내원(內院)에서는 여러 달 돌아가면서 직숙하고, 뭇사람들의 걱정이 아주 간절한지라 외정(外庭)에서 매일 후반(候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병세는 나아갔다 물러났다 심했다 덜했다 하며 일정하지 않았고, 따뜻하게 하거나 서늘하게 하거나 허증(虛症)을 보충하거나 실증(實症)을 씻어내거나 함이 적절하지 않았다. 생각건대 한 때의 뜻하지 않은 재앙이 신명(神明)의 도우심으로 다음날 곧 낫게 되었으니, 진실로 성인도 병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바인 것이다. 그런데 저 오랑캐와 같은 자들이 서울에 몰래 숨어 있다가 ‘이 때가 기회다.’고 여기매, 북을 울리는 소리에 문득 관서(關西)에서 경보(警報)가 발생하였다. 저 적도들이 감히 항거함이 통탄스럽고, 시사(時事)가 마치 끝이 없는 듯함이 한탄스럽기도 하다만, 민정(民情)이 따라서 소동하여 거듭 전궁(殿宮)에 근심을 끼치자, 나 소자를 사랑하시어 도리어 저 하늘의 음즐(陰騭)을 바라셨다. 우리 선왕께서 다행하게도 경록(景籙)을 빨리 다다르게 하시어, 옛날의 병이 이제 나았으니, 마치 천지에 태평한 기운이 돌아오고, 유부(兪跗)082)  와 편작(扁鵲)의 신공(神功)으로 해와 달이 바야흐로 떠오른 것처럼 건강해졌으니, 종팽(宗祊)의 상서로운 운수가 거듭 열리게 되었도다. 그리하여 지난날 의원들의 처방이 효험이 없어 온 신료(臣僚)들의 마음을 태웠으나, 지금은 우모(羽旄)의 넉넉함을 다투게 되어 만백성이 기쁜 낯빛을 지으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불러온 것이겠는가? 실로 나라의 무강한 복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조금 나았을 때 더 조심하라는 경계가 도리어 깊으니, 내 몸을 돌아보매 두려운 듯하고, 저 수척한 많은 백성들에 대한 생각이 곧 간절해져 선한 생각의 실마리를 애연(靄然)히 깨닫는도다. 상제(床第)가 겨우 편안해졌으나 어찌 고사리를 캐는 정벌하러 나간 군사들을 잊을 것인가? 시저(匙箸)가 겨우 회복 되었으나 더욱 구렁에서 뒹구는 주린 백성들을 걱정하게 되노라. 이제 오랜 질병을 시원하게 떨쳐버린 날, 마땅히 실질적인 은혜를 미루어 넓히는 도리를 생각해야 마땅할 것인데, 정하(廷賀)하자는 여러 사람들의 청에 몰려 이미 청묘(淸廟)의 명인(明禋)083)  을 이미 행하였고, 숭호(嵩呼)하는 이장(彛章)을 따라 이에 대정(大庭)에서 널리 고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 일이 혹시라도 예대(豫大)하여, 평소의 뜻이 겸손함을 이루지 못한 데서 나왔겠는가? 그래서 천지(天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仁德)을 체념(體念)하여 은혜를 베풀고 덕을 펴며, 뇌우(雷雨)가 작해(作解)하는 뜻을 본받아 때와 허물을 말끔히 씻어주겠노라. 이달 13일 어둑 새벽이전의 잡범으로 사죄 이하는 모두 용서한다. 아!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병을 다스리는 근본이니, 감히 섭생의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나라의 병을 고침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기술과 같으니, 마땅히 백성을 오래 살게 하는 방도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다 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 제학 조윤대(曺允大)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註 082] 유부(兪跗) : 고대의 명의.[註 083] 명인(明禋) : 밟고 깨끗하게 하여 제사지냄.

 

진하(陳賀) 때의 예방 승지(禮房承知)인 김시근(金蓍根)에게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원릉(元陵)의 능 위 사초(莎草)를 개수(改修)하고, 정부(政府) 이하에게 시상할 것을 명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예조 판서 이집두(李集斗)는 숭록 대부(崇祿大夫)를,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이면긍(李勉兢)은 숭정 대부(崇政大夫)를, 지방관인 양주 목사(楊州牧使) 김효건(金孝建)은 가의 대부(嘉義大夫)를 가자 대부(加資大夫)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성상의 환후가 평복(平復)된 것을 기념하는 경과(慶科)를 증광시(增廣試)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자전(慈殿)의 육순(六旬) 하경(賀慶)이 더욱 중요하니, 가을을 기다려 경사를 합해 증광시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5일 정사

평안 병사가 ‘가산(嘉山)의 증 병사(贈兵使) 김대택(金大宅)의 아들 김지후(金趾垕)와 고 영(令) 한호운(韓浩運)의 아들 한맹린(韓孟麟)과 영변(寧邊)의 초관(哨官) 김재철(金再哲)의 아들 김구장(金九章)이 모두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며 전투에 나아갈 것을 자원하였다.’고 치계(馳啓)하였다.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안주 목사(安州牧使) 조종영(趙鍾永)의 첩정(牒呈)에 ‘제가 이 달 7일 아침에 급히 당도했는데, 의주 부윤과 본부의 훈도(訓導)가 먼저 명을 받들어 노고를 위문할 뜻을 전했더니, 도통(都統)의 말에 「지금 장마가 져서 영접하기가 곤란하니, 날이 맑기를 기다려 서로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그 말에 의거하여 어제 해당 부윤과 같이 중강(中江) 북쪽 편의 막사(幕舍)를 설치한 곳으로 가서 훈도를 보내 먼저 서로 만나보는 의절(儀節)에 대해 문의하게 했더니, 도통의 말이 「저는 황지(皇旨)를 받들고 이곳에 온 것이니, 아마도 임금의 환후를 묻는 예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며 이어 예를 행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제가 나아가 석상(席上)에 서서 궤고(跪叩)의 의식을 행하자, 도통과 봉성장(鳳城將)이 또 몸을 굽혔다가 손을 들며 우리 성상의 안부를 물었으므로 「아주 편안하시다」고 답하였습니다. 함께 들어가 자리에 앉은 뒤 훈도를 통해 말을 전하게 하기를, 「지금 소방(小邦)의 토적이 평정되지 않음으로 인해 번거롭게 군사를 거느리고 멀리까지 와서 수고롭게 하였으니, 감사함이 진실로 많다」고 했더니, 답하기를, 「저는 황명(皇命)을 받들고 이곳에 와서 어려운 일을 물어보고 변방을 살피는 중인데 다행하게도 병이 드는 것을 면하였고, 귀국에서 사신을 보내 노고를 묻는 성대한 예까지 있으니, 감사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이어 묻기를, 「그대들이 지나온 길이 정주성(定州城)을 거쳤으니, 적세(賊勢)의 강약과 양초(粮草)의 다소를 생각건대 반드시 알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달 27일 적도들이 목책을 겁략했을 때 도망해 흩어진 자들이 많이 있어, 의주부(義州府)에서 공문을 써서 보냈으므로, 사유를 갖추어 황상(皇上)께 급히 아뢰었고, 이른바 도망해 흩어진 무리들은 과연 즉시에 모두 잡았습니다. 그런데 당초 황유(皇諭)에 정주성의 흉적들이 평정된 뒤에 철수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저의 떠나고 머무름은 전적으로 적도들을 격파하는 것의 빠르고 늦음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이번의 토적은 날이 갈수록 점차 궁박하여 위축되고 있습니다. 적도 중에서 귀순하는 자가 심히 많이 있고 또 양초(粮草)가 점차 떨어지고 있으니, 형세상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컨대 오래지 않아 마땅히 사로잡힐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도통이 또 「어찌하여 즉시 격파하지 않아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날이 갈수록 점차 피곤하게 합니까?」라고 묻기에, 「이는 우리 백성이 우리 백성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임금께서 특별히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베푸시어 거괴(巨魁)로서 반드시 죽일 자를 제외하고 협력하여 따른 무리들은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경계하셨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또한 전승(全勝)하고자 감히 지나치게 살육을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시일이 조금 지연되게 되었습니다. 목책을 겁략할 때 도망해 흩어진 부류들은 이미 모두 뒤쫓아 잡아 그 정절(情節)을 조사한 뒤 혹은 참(斬)하기도 하고 혹은 용서하기도 했습니다」라고 했더니, 답하기를, 「그렇다면 다행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묻기를, 「홍경래(洪景來)를 어찌하여 효유(曉諭)하여 초안(招安)하지 않는가?」라고 하길래, 「홍경래는 범한 바를 용서할 수 없어 반드시 죽을 것이고 귀순할 길이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초안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세를 헤아려 보건대 오래지 않아 평정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도통이 또 묻기를, 「우리들의 이번 행차는 곧 황지를 받들고 온 것이니, 마땅히 사은(謝恩)함이 있어야 할 터입니다. 장차 자문(咨文)으로 사은하고자 합니까? 마땅히 사은사(謝恩使)의 차견(差遣)이 있어야 하겠습니까?」라고 하길래, 「비직(卑職)은 이미 외임(外任)에 있기 때문에 능히 들어서 알지 못합니다만, 이 일은 오로지 조정에서 의정(議定)하기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더니, 도통이 다시 묻지 않았는데, 그 기색을 보니, 대개 자문을 상주(上奏)하는 일과 사신을 보내는 일을 없어서는 안될 일로 알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도통은 산서(山西) 서안부(西安府) 사람인데 군공(軍功)으로 직급이 2품에 이르렀으며, 그 사람됨이 염간(廉簡)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자문과 전사(專使)의 타당성 여부를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4월 16일 무오

대호군(大護軍) 김이익(金履翼)이 나이 70임을 이유로 예경(禮經)을 인용해 치사(致仕)를 바라니, 비답을 내려 허락하였다.

 

4월 18일 경신

비국에서 아뢰기를,
"웅악(熊岳) 부도통(副都統)과 봉성장(鳳城將)이 있는 곳에 이미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보내어 따로 노고를 위문하고 호궤(犒饋)하는 예를 베풀었습니다만, 적들이 평정된 후 철수하는 때가 마땅히 오래지 않아 있을 것이니, 철수할 때에도 또한 노고를 위문하여 보내는 의절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시켜 전날 노고를 위문하고 호궤했던 전례에 의거하여 조정의 명령을 전하여 알리게 하고, 후히 호궤하는 예를 베풀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4월 19일 신유

김노응(金魯應)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4월 20일 임술

추국 죄인(推鞫罪人) 이장겸(李章謙)이 복주(伏誅)되었다.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적의 예봉을 채 보지도 않고 항서(降書)의 규식(規式)을 베껴 스스로 서명하고는 적진에 보냈고, 인부(印符)를 풀어 따로 이향(吏鄕)을 정해 적괴에게 바쳤습니다. 적군이 부에 들어오자 대청에 오르게 하고 술을 대접했으며, 첩(帖)을 받아 돈과 쌀을 관리하였습니다. 집사(執事)의 군복(軍服)을 빌려 입고서는 공손히 하직(下直)의 예[禮數]를 행하였으니, 이것은 이미 만 번 죽여도 가벼운 죄입니다. 항서 안에 있는 여덟 자의 흉언과 잡혀들어올 때 넉 자의 패설(悖說)은 나라를 배반하고 적을 따른 진장(眞贓)·단안(斷案)이 아님이 없으니, 모반 대역(謀叛大逆)임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4월 21일 계해

관군(官軍)이 정주(定州)를 수복하였다. 평안 감사가 ‘이 달 19일에 관군이 정주성을 수복하고 적괴(賊魁) 홍경래(洪景來) 등을 참획(斬獲)하였다’고 치계(馳啓)하였다. 하교하기를,
"관군이 오랫동안 폭로(暴露)하고 있으므로 밤낮 안절부절하는 마음을 속에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승첩(勝捷)의 소식이 문득 이르렀다. 여러 군사들이 분투하고 용맹을 떨친 나머지 적병을 대파하여 적괴(賊魁)의 머리를 참하고, 그 잔당들도 깡그리 잡아 함거(檻車)로 올려보내니, 너무나도 통쾌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며, 여러 장수들의 공훈도 지극히 가상하게 여기노라. 하지만 난이 평정된 뒤에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한데, 백성과 고을을 복구하는 정사(政事)와 논공 행상하는 일이 십분 마땅함을 얻은 뒤에라야 서민(西民)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신칙하여 차차 강구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신의 영(營)의 중군(中軍) 유효원(柳孝源)이 치보(馳報)하기를, ‘거인(距闉)084)  과 굴토(掘土)는 성을 공격하는 요법(要法)입니다. 그런데 이 달 3일부터 시작하여 동성(東城)에 거인을 쌓고 북성(北城)에 흙을 파기 시작해서 18일에 끝을 냈습니다. 그래서 우선 각 장령(將領)을 단속하고 몰래 성 밖의 사면(四面)으로 나아가 진을 치게 하였습니다. 당일 4경에 화약 수천 근을 지하도에 감추고, 곁의 구멍으로부터 불을 붙이자, 조금 있다가 화약이 폭발했는데, 형세는 신속하고 소리는 우레같아 체성(體城) 10여 간이 대석(臺石)·포루(鋪樓)와 함께 조각 조각 부숴져 무너졌습니다. 북성에 매복하고 있던 적들은 모두 깔려 죽었고, 성가퀴에 늘어서서 지키던 졸개들 또한 모두 달아나 흩어졌습니다. 성 북쪽에 있던 관군들이 일시에 몰려 들어가니, 성 안의 적들이 새가 놀라듯 짐승이 달아나듯 모두 서남 쪽 모퉁이에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동방이 막 밝아오려고 하여 드디어 깃발을 세우고 독전하자, 동쪽·서쪽·남쪽의 여러 진에서 성에 사닥다리를 걸치고 올라갔는데, 앞을 다투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사방에서 포위하여 뒤지고 수색해 잡아내어 한 사람도 빠져나간 자가 없었는데,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경계를 거듭 엄하게 약속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쌓인 분에 격발되어 군사들이 모두 손에 칼을 들고 살육하여 절로 아주 많은 사람을 죽인 결과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적괴로서 홍경래와 같은 자는 온 군사들이 반드시 생포하고자 하는 자였건만, 마침내 탄환을 맞고 죽었으므로 참수해 올려보내 헌괵(獻馘)에 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칭 부원수라고 하는 김사용(金士用)은 전에 이미 죽어 묻어두었고, 선봉장 홍총각(洪總角)과 정주(定州)의 가쉬(假倅) 김이대(金履大)와 가산(嘉山)의 가쉬 윤언섭(尹彦涉)과 자칭 부원수라고 하는 양시위(楊時緯) 등은 모두 생포하였기에 함거에 실러 보냅니다. 우군칙(禹君則)·이희저(李禧著)는 온 성 안을 두루 찾아 보았지만 아직 잡지 못하였습니다. 혹시 성이 무너질 때 깔려 죽었는지 지금 바야흐로 상세히 조사하고 있는 중이니, 추후에 등문(登聞)할 요량으로 있습니다. 본주(本州)는 지금 이미 수복되었기에 해당 목사인 임재수(林裁洙)로 하여금 관사[衙舍]에 들어가 거처하며 뭇 일들을 정돈케 하였고, 중군은 돌아와 본진(本陣)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내의 군병은 장차 이번 20일에 간단하게 호궤한 뒤 그대로 즉시 돌려 보낼 예정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순무 중군이 반사(班師)할 때 순무영의 개부(開府)를 철파하고 관서 수령들이 겸하고 있는 소모사(召募使)의 직함도 모두 감하(減下)085)  토록 하라고 명하였으니 비국의 아룀을 따른 것이다. 이에 앞서 임금이 오랫동안 위예(違豫)하여 조야(朝野)가 몹시 두려워하고 있던 차에 때마침 혜성이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몇 장(丈)이나 되었고 그 빛은 땅을 비추었다. 혜성은 혹 치우기(蚩尤旗)라 일컫기도 하는데 전쟁의 조짐이라고도 하므로, 민심이 소란스러워, 도성 안의 사대부들 중에는 왕왕 가족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는 자가 있기도 하였고, 관서 지방에는 기근이 들어 유망(流亡)하는 사람이 심히 많았다. 이에 불령한 무리들이 기회를 타서 갑자기 날뛰어 명리(命吏)를 죽이고 창고를 열어 도당(徒黨)을 불러모으자, 청천(淸川) 이북의 6, 7 고을이 모두 적수(賊藪)에 떨어졌고, 부신(符信)을 나누어 가지고 인(印)을 찬 무리들은 겁을 집어먹고 지키지 못하여 혹은 도망하고 혹은 항복을 애걸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향(吏鄕)과 백성들은 천대받아 버려진 데 대해 원한을 쌓아왔고, 가렴 주구에 오랫동안 시달려왔던터라 한 번 소리치매 메아리처럼 응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외로운 성에 겨우 숨만 쉬고 있게 된 이후에도 오히려 또 완강하게 버티며 미혹하게 변할 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왕사(王師)를 폭로(暴露)시켜서야 겨우 이에 평정할 수 있었으니, 아! 개탄스런 일이다. 이만수(李晩秀)와 같은 자는 숭품(崇品)086)  에다 중망(重望)을 지니고도, 나가서 변방을 안찰(按察)했으되, 일에 성근 나머지 처음부터 어루만져 통어하는 방도를 잃어 도주(盜鑄)와 모반이 자신의 관할 안에서 일어났음에도 또한 능히 집찰(緝察)하지 못하였고, 절도사 이해우(李海愚)는 숙장(宿將)으로서 적변을 듣자 아득히 어찌할 줄을 몰랐다. 오로지 안주 목사(安州牧使) 조종영(趙鍾永)만이 창졸간에도 뭇사람들에게 맹세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지킬 계책을 세우고 난민으로서 달아나고자 하는 자를 참하여 진정시키니, 적들이 그가 대비함이 있는 것을 엿보고는 감히 범하지 못하고 흉봉(凶鋒)이 조금 저상(沮喪)되었다. 그러다 송림(松林)과 곽산(郭山)의 싸움에서 차례로 승첩(勝捷)을 알리고, 만부(灣府)의 장사(壯士)들이 창의군(倡義軍)과 협력하여 선천(宣川)과 철산(鐵山)이 이미 수복되매 적들이 비로소 위축되었다. 논자들은 조종영에 대해 강회(江淮)를 가리고 차단한 공이 있다 하였으니, 대개 안주(安州)를 지키지 않았다면 도 전체가 어지러워 다시 손을 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무 중군(巡撫中軍) 박기풍(朴基豊)은 누차 이긴 기세를 믿고 처음 들이닥친 예봉에 의지하여 토역(討逆)을 따랐더라면 한 번 북소리에 성가퀴를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유약하고 겁이 많았던 나머지 위엄있는 명령을 떨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경영(京營)의 군졸들이 겁략(劫掠)을 자행하여 평민들을 소동하였다. 그리고 전투 때에는 토병(土兵)을 앞세웠으며, 늠사(廩賜)가 고르지 않아 이 때문에 여러 번 패하였다. 새 중군 유효원(柳孝源)이 이르러 기율(紀律)이 자못 엄하니, 여러 군사들이 비로소 능히 명을 받들어 성을 깨뜨렸던 것이다. 묘당에서는 이에 성을 깨트린 후 잡은 적들을 모두 죽인 것을 그의 실수로 논하여 죄를 주었다. 그러나 ‘협종(脅從)한 자는 다스리지 말라.’고 한 것은 곧 한때 잘못을 저질렀으나 능히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한 자를 위해 한 말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자들은 서로 모여 모반하였던터라 애초 수종(首從)을 구분할 수 없었으니, 비록 다 죽였더라도 지나친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이것을 허물로 삼아 삼군(三軍)087)  을 해체(解體)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또 상이 공에 걸맞지 않아 죽은 뒤에 증시(贈諡)했으니, 족히 격려하고 권장할 만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순무사 이요헌(李堯憲)은 그 지망(地望)에 의지하여 멀리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으나, 관찰사 정만석(鄭晩錫)은 어지러운 즈음에 임무를 맡아 청렴하고 부지런하였으며, 자신은 검약하고 백성들은 넉넉하게 해주어 품어 보호한 것이 마땅함을 얻었으므로, 서토(西土)가 그를 의지하였다. 장령(將領)은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이 가장 용감한 것으로 드러났고, 의병장 허항(許沆)은 만인(灣人)으로서 적을 멸하고자 하는 데 뜻을 두었으니, 적들이 가장 꺼리는 바였다. 그러므로 윤욱렬과 허항의 군사는 여러 번 예봉을 꺾었고, 허항은 끝내 순절하였던 것이다. 수령은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이 사기(師氣)를 격려하였고, 영변 부사 오연상(吳淵常)은 내응자(內應者)를 잡아 참하였으니, 모두 기록할 만한 공적이 있었다. 그 나머지는 보잘것이 없어 족히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순무영에서 바야흐로 해영(該營)을 철파(撤罷)할 것과 가두어 놓고 있는 죄인 김처한(金處漢)을 의금부로 옮길 것을 청하였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진에 있는 군총(軍摠) 【경영군(京營軍) 7백 24명, 송영(松營)의 기사(騎士) 1백 5명, 병우후(兵虞候) 이해승(李海昇)·이익(李益) 진의 장교와 군졸 6백 99명, 순무 중군(巡撫中軍) 이정회(李鼎會) 진의 장교와 군졸 8백 37명, 박천 군수(博川郡守) 이운식(李運植) 진의 장교와 군졸 2백 43명, 숙천 부사(肅川府使) 전 영장(營將) 이유수(李儒秀) 진의 장교와 군졸 6백 89명, 삭주 부사(朔州府使) 윤민동(尹敏東) 진의 장교와 군졸 6백 98명, 정주 목사(定州牧使) 서춘보(徐春輔)·임재수(林裁洙) 진의 장교와 군졸 3백 61명,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주성(鄭周誠) 진의 장교와 군졸 1백 91명, 함종 부사(咸從府使) 후영장(後營將) 윤욱렬(尹郁烈) 진의 장교와 군졸 1천 5백 51명, 순천 군수(順川郡守) 우영장(右營將) 오치수(吳致壽) 진의 장교와 군졸 7백 92명, 초산(楚山) 영병 중군(領兵中軍) 김치화(金致華) 진의 장교와 군졸 2백 90명, 의병장 전 부사(府使) 민수현(閔修顯) 진의 장교와 군졸 1백 43명, 의주(義州) 의병장 장낙현(張洛賢) 진의 장교와 군졸 1백 명, 의병장 김견신(金見臣) 진의 장교와 군졸 2백 22명, 의병장 김우종(金禹鍾) 진의 장교와 군졸 1백 74명, 의주 영병장(領兵將) 허항(許沆) 진의 장교와 군졸 2백 96명, 개천(价川)에서 스스로 나선 대솔(儓率) 93명, 북쪽에 매복했던 이인협(李仁協) 진의 장교와 군졸 1백43명, 동쪽에 매복했던 최천학(崔天鶴) 진의 장교와 군졸 1백 89명, 서쪽에 매복했던 박대욱(朴大郁) 진의 장교와 군졸 2백 43명, 창의장(倡義將) 박대관(朴大觀) 진의 장교와 군졸 18명이니 총계는 8천 7백 97명이다. 이는 2월에 진에 있던 군인의 총계로서 전후에 더하고 덜함이 있어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9면
【분류】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창의(倡義)하여 진에 나아간 질(秩) 【의주 의병장 김견신(金見臣)은 창의하여 군사를 모집해 백마 산성(白馬山城)에 주둔하고는 방어장(防禦將) 김계환(金啓煥) 등과 더불어 그 지경을 범하는 적들을 쳐서, 9급(級)을 참하고, 2명을 사로잡았으며, 군기(軍器)와 마필을 빼앗았다. 정월 11일에 광화(光化)의 사잇길을 따라서 용천(龍川)·자포원(者浦院)·양책참(良策站)으로 나갔는데, 적도들이 그대로 무너졌기 때문에 3일에 허항(許沆)과 합세하여 서림(西林)으로 진공(進攻)해 42명을 생포하였다. 또 허항과 더불어 진군하니, 철산(鐵山) 및 운암성(雲暗城)에 주둔하고 있던 적들이 모두 무너졌다. 이어 동림성(東林城)으로 돌아 적 4명을 잡고, 이어 정원(定原)에 이르러 북문(北門) 밖에 진을 쳤다. 성을 깨뜨릴 때 먼저 오른 사람은 향도관(鄕導官) 김국추(金國樞) 삼형제와 무사(武士) 박정모(朴禎模)·한응좌(韓應左)·김계엽(金啓熀)·박성묵(朴聖默)·백해윤(白海潤) 등 5명과, 강응필(姜應弼) 등 4명과, 현리(縣吏) 김내순(金乃淳)·의병 백광철(白光哲) 등 3명과, 방어장(防禦將) 손양척(孫陽倜)의 선봉 홍용혁(洪龍赫) 등 9명과, 같은 고을의 영병장(領兵將) 홍여일(洪麗一)의 영장(領將) 한윤좌(韓允佐)와 기사(騎士) 신탁(申鐸) 등 4명이었다. ○강계(江界) 의병장 송지렴(宋之廉)은 창의하여 적을 토벌했고, 의사(義士) 6명은 각각 출전에 필요한 자장(資裝)을 마련해 갖추었다. 모집에 응한 군사 계운해(桂運海) 등은 전후로 적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고, 성을 깨뜨리는 일에도 그의 힘을 많이 입었다. 같은 부(府)의 영장(領將) 호일성(扈一成)은 송지렴의 진에 소속되었다. 정원(定原)의 의병장 현인복(玄仁復)은 자신이 최마(衰麻)를 입고 있었는데도 군사를 모집해 창의하여, 관군이 처음 도착했을 때 땔감과 물, 솥, 동이 따위를 또한 많이 마련해 주었고, 또 사민(士民)들에게 포유(布諭)하여 충의(忠義)를 격려하였으며, 땅에 굴을 파는 일에도 수고를 많이 하였다. 창성(昌城) 의병장 전 권관(權管) 강인학(姜仁鶴)은 곧 병자년에 순절한 사람인 강백룡(姜白龍)의 7대손이다. 종인(宗人)들을 창솔(倡率)하여 스스로 양식과 병기를 갖추고 대진(大陣)에 소속되었는데, 응모한 군사는 강씨(姜氏) 29명이다. 의주 소모장(召募將) 훈련 판관(訓鍊判官) 장낙현(張洛賢)은 별군직(別軍職)으로 토적(討賊)을 자원하여 의주의 일곱 의사(義士)의 자손과 더불어 창의·모병(募兵)해 정원의 북성(北城) 밖에 진을 쳤다. 응모한 군사는 오세권(吳世權) 등 38명 이었다. 태천(泰川)의 소모장 이시복(李時復)은 군졸을 모으고 돈과 곡식을 거두어 군기(軍器)와 잡물을 마련해 대진으로 찾아가 소속되었다. 장사 군관(壯士軍官) 구채문(具采文) 등 28명과 벽동(碧潼) 소모장 김경로(金慶魯), 김진방(金鎭邦) 등 6명은 군사를 모집하여 진으로 나아갔다. 철산(鐵山) 소모장 진사(進士) 박대관(朴大觀) 진사 김지순(金之純) 등 43명은 말린 양식을 마련하고 혹은 마필을 내기도하여 김견신의 진으로 와서 소속되었다. 희천(熙川) 소모장 김인복(金麟福)과 양홍(梁鴻)은 군사를 모집하여 진으로 나아갔다. 평양 소모장 장운한(張雲漢)과 오필련(吳必鍊)은 동지들과 창의하고 진으로 나아갔다. 태천(泰川) 소모장 백사증(白士曾)·희천 소모장 함의형(咸義衡)·강서(江西) 소모사(召募士) 전 참봉 이인화(李仁華) 등은 동지로서 힘이 있는 사람 9명을 불러모아 함종 부사의 진으로 와서 소속되었다. 용천(龍川) 소모사 안택륜(安宅侖)과 향인(鄕人) 김응면(金應勉) 등 6명과, 향인 이지렴(李志㾾) 및 그 아우 이지락(李志洛), 사인(士人) 차신국(車信國) 등은 진으로 나아갔다. 정원(定原) 소모사 김기영(金基英)과 같은 현의 소모사인 도사(都事) 최대식(崔大寔)은 박사(博士) 박영현(朴榮顯), 본 현의 사인 백이환(白彛煥) 등과 더불어 창의하여 진으로 나아갔다. 같은 현의 복수하려는 군사 한맹린(韓孟麟)은 고 영(令) 한호운(韓浩運)의 아들로서 그 아비가 용맹을 세우고 죽자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진으로 나아갔다. 가산(嘉山)의 복수하려는 군사 김지후(金趾垕)는 그 아비 김대택(金大宅)이 용맹을 세운 뒤 죽자 그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진으로 나아갔다. 운산(雲山)의 소모장 이승렬(李升烈)은 적변이 일어난 초기에 직접 가서 면칙(面飭)해 충의를 격려하였으며, 소모장 전 부사(府使) 민수현(閔修顯)과 장사 군관(壯士軍官) 김천옥(金天玉) 등 12명과 응모한 군사 전기현(田芑顯) 등 20명은 자원하여 진으로 나아가 출전하였다. 출신(出身) 김우종(金禹鍾)과 군관 한용섭(韓用涉) 등 7명은 각각 참획(斬獲)한 것이 있었는데, 많고 적음이 같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19면
【분류】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전투에서 사망한 질(秩) 【자원하여 출전한 장수의 경우는 제경욱(諸景彧)·김대택(金大宅)과 의주(義州) 영병장 허항(許沆)이다. 각 고을 장교의 경우는 영변(寧邊)의 별장(別將) 김재철(金再哲), 덕천(德川)의 초관(哨官) 박경덕(朴景德)·박경채(朴景采), 강서(江西)의 중군(中軍) 이인보(李仁輔), 초관 정성철(鄭成哲)·이시택(李時宅)·김여호(金呂浩)·이삼덕(李三德), 용강(龍岡)의 초관 최신묵(崔信默), 함종(咸從)의 마병 별장(馬兵別將) 최정호(崔正浩)·김일권(金日權)·이만영(李萬永), 은산(殷山)의 초관 정경유(丁敬裕)이다. 이상은 함종 부사(咸從府使)가 겁략을 당했을 때 창에 찔려 죽은 사람이다. 중화(中和)의 중군(中軍) 윤동번(尹東蕃), 초관 우흥엽(禹興燁), 강계의 의사(義士) 송심명(宋心明) 이상은 대진(大陣)이 겁략 당했을 때 창에 찔려 죽은 사람이다. 안북(安北)의 장사 군관 한철득(韓哲得). ○군졸은 양덕(陽德) 군졸 5명, 평양(平壤) 군졸 6명, 의주(義州) 군졸 31명, 영변(寧邊) 군졸 21명, 안북(安北) 군졸 31명, 정원(定原) 군졸 7명, 숙천(肅川) 군졸 6명, 삼화(三和) 군졸 5명, 함종(咸從) 군졸 15명, 삭주(朔州) 군졸 3명, 초산(楚山) 군졸 7명, 성천(成川) 군졸 4명, 강계(江界) 군졸 1명, 귀성(龜城) 군졸 2명, 중화(中和) 군졸 4명, 순천(順天) 군졸 2명, 가산(嘉山) 군졸 2명, 박천(博川) 군졸 4명, 덕천(德川) 군졸 4명, 상원(祥原) 군졸 3명, 위원(渭原)·벽동(碧潼)·개천(价川) 군졸 각 1명, 순안(順安) 군졸 26명, 강서(江西) 군졸 7명, 용천(龍川) 군졸 3명, 삼등(三登) 군졸 2명, 용강(龍岡) 군졸 19명, 영유(永柔) 군졸 3명, 강동(江東) 군졸 4명, 맹산(孟山) 군졸 7명, 태천(泰川) 군졸2명, 은산(殷山) 군졸 8명, 선천(宣川) 군졸 1명, 영원(寧遠) 군졸 6명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9면
【분류】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대진(大陣) 및 각읍의 군량 【쌀 5만 6천 70석 영(零), 각 곡식 5천 9백 74석 영, 장(醬) 3백 38석 영, 소금 2백 48석 영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9면
【분류】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행진(行陣) 및 각읍에서 수첩(守堞)할 때 사민(士民)이 보조한 군량의 질(秩) 【의주(義州)의 유학(幼學) 홍득주(洪得周)가 곡식 1천 2백 18석과 돈 5천 2백 냥을 내어 가장 많았다. 합계는 돈 1만 4천 4백 96냥이고, 각 곡식 2천 1백 44석, 소 1백 61마리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9면
【분류】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성을 깨뜨렸을 때의 절제(節制) 【병우후(兵虞候) 이익(李榏), 삭주 부사(朔州府使) 윤민동(尹敏東), 태천 현감(泰川縣監) 김견신(金見臣), 중초 초관(中哨哨官) 손태영(孫泰永), 의주 영병장(領兵將) 정내홍(鄭來鴻), 강계(江界) 의병장 송지렴(宋之廉), 복병장(伏兵將) 문영철(文永哲)·구집(具楫), 진주(晉州) 창의사(倡義士) 신은권(申殷權), 집사(執事) 김인환(金仁煥) 등의 군졸 1천 8백 83명이 북성(北城)을 공격하고, 숙천 부사(肅川府使) 이유수(李儒秀),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주성(鄭周誠), 창의장(倡義將) 장낙현(張洛賢)·박대관(朴大觀), 의병장 김경로(金慶魯)·이시복(李時復)·김지환(金之煥)·김용손(金龍孫)·조철진(趙喆鎭)·최진일(崔鎭一)·유형원(兪逈源)·이용현(李容鉉)·함의형(咸義衡)·현인복(玄仁福) 등의 군졸 2천 1백 14명이 동성(東城)을 공격하고, 순무 중군(巡撫中軍) 이정회(李鼎會), 박천 군수(博川郡守) 이운식(李運植) 등의 군졸 9백 52명은 남성(南城)을 공격하고,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 유격장(游擊將) 구시방(具始芳)의 군졸 1천 2백 72명은 서성(西城)을 공격하였다. 순천 군수(順川郡守) 오치수(吳致壽)의 군졸 6백 69명은 서소문(西小門)을 공격하고, 정주 목사(定州牧使) 임재수(林裁洙)의 군졸 3백 45명은 동쪽 길에 진을 쳤다. 개천 군수(价川郡守) 유상필(柳相弼)은 진에 머물러 있었고, 소모장 김우종(金禹鍾), 의주 의병장 한영기(韓永琦)는 북성을 협공하였다. 복병장 최천학(崔天鶴), 의병장 강인학(姜仁鶴)·원영정(元永丁), 소모장 김전(金篆) 등의 군졸 4백 11명은 남쪽·서쪽·북쪽 세 길에 군사를 매복시켰고, 초관 이기정(李基鼎), 별무사(別武士) 매경은(梅景殷), 집사 윤성동(尹星東), 교련관(敎鍊官) 이동은(李東殷), 송영(松營)의 백총(百摠) 박징희(朴徵禧)·집사 최정복(崔貞福) 등의 기병(騎兵) 1백 19명은 서쪽·동쪽·남쪽 세 길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복병장 김종평(金宗平) 군졸 30명은 달천교(㺚川橋)에 매복했고, 파총(把摠) 윤지렴(尹之㾾) 등 4명의 군졸 50명과 집사 김명숙(金命淑) 등 14명과, 대솔 군관(帶率軍官) 전 부사(府使) 조운구(趙雲衢) 등 9명은 모두 북성에서 독전(督戰)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9면
【분류】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성을 깨뜨릴 때의 사적(事蹟) 【땅파기는 3일부터 시작했다. 역사(役事)를 시작할 때 군졸 3백 명을 6번으로 나누고 윤번으로 부역(赴役)하여 사흘을 일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운산(雲山)의 연군(鉛軍)을 썼는데, 모두 11명이었고, 땅을 판 곳으로부터 성 아래까지는 1백 6, 70보 쯤 되었다. 처음 땅을 팔 때는 10보 간격으로 끊어 7군데를 팠는데, 구덩이의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2자 5촌(寸)이었으며, 너비도 또한 그와 같았다. 먼저 빈 섬으로 흙을 담아 축장(築障)을 만들어 화살과 탄환을 피하였으며, 만약 파는 것이 축장을 지나치면 방패로 그 등을 보호하고, 축장을 향해 걸어나가 옮겨 쌓았다. 그리고 또 다시 축장의 뒤에서 흙을 팠는데, 이미 팠으면 연목(椽木)을 그 가운데 가로질러 빈 섬으로 그 위를 덮고, 또 흙을 그 빈 섬 위에 덮어 적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그 앞 30보에서 언덕이 끝나고 구덩이가 되었으므로, 북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다시 남쪽으로 또 그 앞 60보에서는 사방 1자 8촌의 크기로 파서 북장대(北將臺) 아래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런데 역부(役夫)들이 땅 속으로 다녀 방향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 위를 둘레가 7촌이 되게 파서 땅밖까지 이르도록 하고는 그 안으로 깃발을 세워 그 방향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성 아래에까지 이르러서는 판 것이, 길이가 3자, 너비가 3자 5촌, 높이가 2자 5촌이었다. 역사를 시작한 것이 18일에 끝났으니 무릇 60일이 되었다. 사용한 화약은 1천 7백 11근, 연지(燃紙)를 싼 것이 또 90근으로 도합 1천 8백 근이었다. 18일 밤에 먼저 상(床)과 소목(燒木)과 빈 섬으로 굴 안에 깔고 화약을 가운데 쌓았다. 또 종이로 화약을 싸되 둘레는 손가락 하나 정도, 길이는 세 발 쯤으로 하여, 죽통(竹筒) 안에 넣었다. 죽통은 둘레가 지팡이로 삼을 만 하였는데, 그 반을 쪼개어 안에 있는 막힌 마디를 긁어내고 다시 하나의 조각으로 합쳐 땅 속으로 넣은 다음 진흙으로 그 구멍을 막았다. 그리고는 잘 마르고 썩은 화승(火繩)을 가져다 큰 엄지 손가락처럼 다시 겹쳐 끈을 만들어 그 죽통 끝에다 매달았다. 19일 동이 틀 때에 불을 붙이니, 일시에 성이 무너졌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0면
【분류】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도(道) 안의 방수(防守) 【읍성(邑城)이 11곳, 산성(山城)이 6곳, 각진보(各鎭堡)·각영애(各嶺隘)·각로(各路)의 요해처(要害處)가 4백 6곳이다. 만부(灣府)의 성을 지킨 장령(將領)은 1백 28명, 군사는 2천 37명, 민정(民丁)은 1백 69명이었고,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지킨 장령은 1백 67명, 군사는 9백 97명이었으며, 영변성(寧邊城)을 지킨 장교는 1백 20명, 군사는 2천 2백 33명이었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0면
【분류】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적도(賊徒)를 정법(正法)한 질(秩) 【김익순(金益淳)·이장겸(李章謙)·정경행(鄭敬行)·정복일(鄭復一)·정성한(鄭成漢)·김이대(金履大)·최이륜(崔爾崙)·홍총각(洪總角)·장봉첨(張奉僉)·윤언섭(尹彦涉)·나대곤(羅大坤)·최봉관(崔鳳寬)·유재하(柳載河)·양시위(楊時緯)·우군칙(禹君則)·이용태(李龍泰)·허우(許瑀)·정상현(鄭尙賢), 이상은 능지 처사(凌遲處死)하였다. 김우학(金遇鶴)·김우갑(金遇甲)·강수흥(康守興)·이만봉(李萬奉)·남익현(南益顯)·김해옥(金海玉)·김인덕(金麟德)·남명희(南命熙)·이유복(李有卜)·이명흡(李明洽)·강윤성(康允成)·김용경(金用京)·박동(朴同)·이익수(李益秀)·이제초(李齊初)·김국주(金國柱)·김국신(金國信)·이무실(李茂實)·박성신(朴聖臣)·박인식(朴仁植)·김채룡(金采龍)·박춘엽(朴春曄)·명용운(明龍雲)·한택빈(韓宅彬)·문종저(文宗著)·김지범(金芝範)·나철소(羅哲素)·박삼옥(朴三玉)·한신행(韓信行)·김상진(金尙珍)·김이구(金履九)·김사검(金士儉)·이영수(李英秀)·박상현(朴尙玄)·계일항(桂一恒)·김달성(金達成)·김익명(金益明)·김인백(金仁白)·김대욱(金大昱)·김용천(金龍天)·장한원(張漢元)·송계득(宋桂得)·계심항(桂心恒)·양춘택(楊春宅)·이맹억(李孟億)·이윤승(李允升)·서취삼(徐就三)·김창재(金昌才)·김창근(金昌斤)·계응렬(桂應烈)·오일형(吳一亨)·계동(桂同)·김치련(金致鍊)·박채경(朴采景) 그리고 서울 사는 한기조(韓箕朝)와 유한순(兪漢淳), 이상은 효수(梟首)하였다. 장홍익(張弘益)·최이항(崔爾恒)·조문형(趙文亨)·박인복(朴仁福)·박인초(朴仁初)·이상항(李尙恒)·김양욱(金陽郁)·김상주(金尙周)·원대천(元大天)·한일항(韓一恒)·장한우(張漢羽)·김훈(金勳)·정대성(鄭大成)·노계룡(盧啓龍)·정진항(鄭振恒)·한처곤(韓處坤)·허익신(許益信)·박정간(朴正幹)·유홍묵(劉弘默)·장호익(張浩益)·정지상(鄭志相)·박정용(朴正用)·김창배(金昌培)·양재학(楊載鶴)·김대훈(金大勛)·김봉추(金奉秋), 이상은 처참(處斬)한 자들이다. 홍경래(洪景來)는 탄환에 맞아 죽은 것을 참(斬)하였고, 김창시(金昌始)는 조문형(趙文亨)이 참하여 바쳤으며, 이희저(李禧著)는 의병인 함의형(咸義衡)이 참하여 바쳤다. 유문제(劉文濟)·오용손(五龍孫)·백종회(白宗會)·김정우(金鼎禹)·최봉일(崔奉日)·신덕관(申德寬)·김맹첨(金孟瞻)·김기백(金起白)·김석하(金錫河)·김명효(金明孝)·이항엽(李恒燁)·이응저(李膺著)·서성각(徐成珏)·박대원(朴大元)·서광전(徐光田)·최봉운(崔奉雲)·이언항(李彦恒)·최치민(崔致民)·강창현(康昌玄)·최대형(崔大亨)·김이욱(金履郁)·박용연(朴龍淵)·박문혁(朴文赫)·김치용(金致用)·이정수(李廷秀)·정진교(鄭眞僑)·이흥철(李興喆)·강득황(姜得璜)·이대원(李大元)·김돌석(金突石)·강우서(康右西)·박대원(朴大元)·이장호(李長浩)·홍한곤(洪漢坤)·이득천(李得千)·장봉헌(張鳳憲)·박현우(朴玄右)·박성신(朴聖臣)의 딸 박소앵(朴小鸚), 이상은 처참된 자들이다. 김사용(金士用)은 창에 찔려 죽었고, 김윤해(金允海)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김치관(金致寬)·문영기(文永基)·한지겸(韓志謙)·박계련(朴界璉)·고윤빈(高允斌)·김성각(金成珏)·김진명(金振明)·홍명(洪命)·계항대(桂恒大)·장지운(張志運)·김치관(金致寬)·홍이일(洪履一)·정신지(鄭信之)·명문규(明文圭)·윤태현(尹太賢)·김국신(金國臣)·홍이팔(洪二八)은 병화(兵火)에서 죽었다. 이상은 경폐(徑斃)한 자들이다. ○이상은 평안 감사 정만석(鄭晩錫)이 편집한 《계첩기략(啓牒紀略)》과 안주 목사 조종영(趙鍾永)이 편집한 《관서평란록(關西平亂錄)》에 실린 바를 서로 참조하여 뽑아 넣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0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변란-민란(民亂)

 

비국에서 아뢰기를,
"삼가 상고해 보건대, 효종조임진년088)  의 역옥(逆獄) 뒤 재주관(齎奏官)을 보내 토역(討逆)한 정상을 상주(上奏)하였고, 영조조 무신년 【1728 영조 4년.】  적변(賊變) 때에는 재자관(齎咨官)을 보내 적당(賊黨)을 집포(緝捕)089)  할 것을 청한 뒤 공미(貢米)를 감해 준 일로 별사(別使)를 보내 사은(謝恩)하였었는데, 이미 사행(使行)이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겸주토역장(兼奏討逆狀)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은 이미 전개(專价)가 없으니, 청컨대 임진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단지 재주관만 보내 적을 평정한 전말을 상세히 주문(奏文)에 갖추어 쓰고, 또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되, 재주관은 임진년의 사복 첨정(司僕僉正)으로 정해 보낸 전례에 의거하여 선발해 들여보내고, 주문(奏文)과 자문(咨文)은 문관(文官)으로 하여금 찬술(撰述)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주문(奏文)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은 삼가 아룁니다. 곧 소방(小邦)이 불행하여 흉역(凶逆)이 난리를 일으키매 주토(誅討)한 전말을 두루 진달하고 우러러 황람(皇覽)을 번독(煩瀆)하는 일입니다. 의정부의 장계(狀啓)에 ‘지난해 12월 22일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해우(李海愚)의 비보(飛報)에 의거하건대, 그곳 가산군(嘉山郡)의 토적(土賊) 홍경래(洪景來)·이희저(李禧著)·우군칙(禹君則)·김사용(金士用)·김창시(金昌始)·이제초(李齊初)·정경행(鄭敬行)·홍이팔(洪二八) 등이 광비(礦匪)를 불러모아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하고는, 이달 18일 밤에 본군(本郡)에 틈입(闖入)하여 쉬신(倅臣) 정시(鄭蓍)를 죽이고, 흉봉(凶鋒)을 마구 펼쳐 사방으로 나가서 겁략을 하면서 잇달아 정주(定州)·박천(博川)·태천(泰川)·곽산(郭山)·선천(宣川)·철산(鐵山)·용천(龍川)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있는데, 그 세력이 심히 성합니다.’라고 하였기에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이에 의거해 즉시 그 절도사가 도내(道內)의 병변(兵弁)을 전파(專派)하여 빠른 시일 내에 나아가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원임 대장(原任大將) 이요헌(李堯憲)을 차임하여 양서(兩西)·개부(開府)·왕성(王城)을 순무(巡撫)하게 하고, 선봉 유효원(柳孝源)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가 적들을 토멸하게 하였습니다. 이달 29일에는 안주 병우후(安州兵虞候) 이해승(李海昇) 등이 박천 지경으로 진박(進薄)하여 적병을 대파하니, 적들이 마침내 밤에 달아나 정주성으로 들어가 웅거하였습니다. 그러자 유효원 등은 경외의 군사를 나누어 보내 본성(本城)을 에워싸고 있고, 곽산 군수(郭山郡守) 이영식(李永植) 등을 조발해 보내어, 의주 영병장(領兵將) 김견신(金見臣)과 허항(許沆) 등과 회합(會合)해 선천과 철산 등의 지방에 주둔한 적들을 초격(剿擊)하게 했던 바, 적장(賊將) 김창시와 이제초 등을 참하고 정경행 등을 생포하여 함거(檻車)로 왕성에 보냈습니다. 함락된 바 열군(列郡)도 모두 수복되었는데, 오로지 정주 한 성만이 함락되지 않아 저윽이 도적들이 험한 지형을 믿고 흉악한 짓을 할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약 독전(督戰)하면 안행(顔行)090)  을 손상시킬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여러 장령(將領)들에게 신칙하여 목책(木柵)을 세우고 매복을 설치해 함부로 진격하지 못하게 하고, 흉추(凶醜)들이 향화(向化)하여 잘못을 고쳐 변할 줄을 알게 만들려고 했습니다만, 단지 저 적이 악을 쌓은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어리석고 사나와 뉘우치지 않는지라 몇 달 동안 계속 포위하여 사졸들이 폭로(暴露)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것을 걱정하고 고민하여 밤낮으로 안절부절하던 차에 성명(聖明)께서 소방을 굽어 보호하시는 은혜를 입게 되었으니, 특별히 도통(都統)에게 하유하여 변문(邊門)과 강 연안의 험한 곳에 진거(鎭據)하여 순사(巡査)·방수(防守)토록 하셨던 것입니다. 천위(天威)가 미치는 바에 흉도(凶徒)들의 간담이 떨어졌고, 황령(皇靈)이 도우시는 바에 장사(壯士)들이 더욱 용감해져, 이에 이해 4월 19일에 그 성을 공파(攻破)하고, 적괴 홍경래 등은 잡아서 참하고, 적의 선봉 홍이팔 등은 생포하여 칼을 씌워 왕성으로 보냈으며, 적의 소굴을 소탕하여 남은 흉추들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흉적들이 성을 차지함이 본디 굳어 오랫동안 관병에 항거하였으니, 만약 천조(天朝)에서 굽어 자휼(字恤)하시어 성무(聖武)를 혁연(赫然)히 펼치지 않았더라면, 소방의 미약한 힘으로 어떻게 제때에 초멸(剿滅)할 수 있었겠습니까? 신은 대소 배신(陪臣)과 함께 승첩(勝捷)의 소식을 듣자마자 더욱 황은(皇恩)을 찬송하고 감격해 마음에 새겼습니다만,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의정 대신(議政大臣)이 조사해서 아뢴 데 의거하건대, ‘이번의 역변(逆變)은 평소 쌓아온 별다른 모의가 아니라 모두 불령(不逞)한 추류(醜類)들이 처음에는 산골짜기의 잠채(潛採)하는 무리들을 꾀고, 마침내는 흉년의 유개(流丐)가 된 백성들과 체결(締結)해 기회를 타서 절발(竊發)하고 갑자기 창궐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봉채(蜂蠆)091)  의 독에 쏘여 여러 군(郡)이 분궤(奔潰)하여 마침내 성조(聖朝)에 근심을 끼쳐 동쪽을 돌아보게 만들었으니, 말이 이에 미치매 두려움을 견딜 수 없나이다. 이제 수모(首謀)한 역적 이희저·우군칙·정경행·김사용·홍이팔 등과 지당(支黨)인 정성한(鄭聖翰)·정복일(鄭復一)·최봉관(崔鳳寬)·김이대(金履大)·윤언섭(尹彦涉)·양시위(楊時緯) 등에 대해 전형(典刑)을 밝게 바르게 하고, 그 밖의 한 번이라도 관련된 자 및 연좌된 지속(支屬)은 그 경중에 따라 의의(議擬)하여 허물을 단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속으로서 법망을 빠져 나간 자들에 대해서는 따로 집포(緝捕)하는 것 외에 위에서 말한 전말을 천청(天聽)에 아뢰는 것이 실로 편익(便益)하겠습니다.’라고 하였기에 이에 의거해 갖추어 아뢰는 것입니다. 이제 저윽이 찬찬하게 생각하건대, 신은 선조의 서업(緖業)을 이어 지키면서 이런 역란(逆亂)을 만났으니, 신의 부덕이 환란을 방지하는 데서 실수한 소치가 아님이 없는지라, 제자신을 돌이켜 스스로 허물하건대 마음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소방의 변고는 진실로 감히 진독(塵瀆)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으나, 신이 용렬함에도 능히 흉추를 섬멸한 것은 실로 황상(皇上)의 위덕(威德)이 멀리까지 입혀져 이미 내복(內服)과 같은 데 힘입은 것이며, 또 전례가 있어 무릇 크고 작은 사정에 관계된 것을 상문(上聞)하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전후의 사장(事狀)을 감히 이렇게 진주(陳奏)하는 것입니다. 신이 지극히 긍황(兢惶)092)  하고 병영(屛營)093)  하는 것은, 소방이 불행하여 흉역이 난을 일으킨 나머지 주토(誅討)한 전말을 두루 진달하여 황람(皇覽)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사리가 이러한지라, 삼가 갖추어 주문(奏聞)합니다."
하였다.

 

4월 22일 갑자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예조 당상을 거느리고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천위(天威)가 더해지는 바에 서적(西賊)이 이제 이미 소탕되었으니, 위로는 구중(九重)의 소의 한식(宵衣旰食)의 근심을 펴게 되었고, 아래로는 팔도의 분울(憤鬱)한 감정을 씻게 되었습니다. 길사와 경사가 한꺼번에 모여드니, 기쁨을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상하에 포고하는 것과 대정(大庭)의 숭호(嵩呼)는 곧 응당 행하여야 할 법이니, 청컨대 즉시 날짜를 가려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외도(外道)의 방물(方物)은 정지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4월 24일 병인

의주 부윤 조흥진(趙興鎭)이 정주(定州)의 적이 평정된 일로 정문(呈文)을 써서 삼도 낭두(三道浪頭)의 부도통이 있는 곳으로 전송하였다고 아뢰었다.

 

4월 25일 정묘

차대하였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정주를 평정한 향군(鄕軍)은 이미 돌아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오(隊伍)에 나아간 군사들은 모두 농사를 짓는 백성들인데, 넉 달 동안 싸움에 임하였다가 하루 아침에 고향으로 돌아가 진휼곡(賑恤穀)과 환자(還子)를 모두 잃고 병농(兵農)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형편상 목전의 생활도 지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들판에서 폭로(暴露)하게 하고, 또 굶주림과 유리(流離)를 면하지 못하게 한다면, 자휼(字恤)하는 어진 정치가 아닐 것입니다.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따로 요량하여 각각 환자를 주거나 진휼곡을 주도록 하고, 비록 환자와 진휼곡을 준 뒤라 하더라도 만약 존무(存撫)하여 안정되게 살게 하는 방도가 있거든 반드시 마음을 다 기울여 일을 처리하게 하소서. 또 해당 고을로 하여금 특별히 연역(烟役)094)  을 면제해 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순무 중군이 이제 장차 반사(班師)할 것인데, 군사들이 지나는 곳은 백성들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입니다. 왕의 군대는 소문만 있지 소리는 없는 법이라, 군사들 중 삿갓 하나라도 취하거나 한 포기의 벼라도 손상시킨 자는 군중(軍中)에서 즉시 참하고 조리를 돌렸으니, 군율(軍律)의 엄함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청컨대 중군 이하의 여러 장령(將領)들에게 주전(廚傳)을 번거롭게 하지 못하게 하여서 그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하고, 군졸 중에 혹 범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주장(主將)을 죄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순무 중군이 반사(班師)하여 서울에 도착하는 날에는, 청컨대 순무사(巡撫使)로 하여금 기고(旗鼓)를 인솔하고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그대로 도령(都領)이 되게 하고, 병조 판서와 각영(各營)의 장신(將臣)은 각각 군용(軍容)을 갖추고 또한 모화관에서 출정했던 장사(壯士)들을 맞이해 위로하되, 그대로 순무사와 더불어 함께 그대로 돈화문(敦化門)에 나아가 호궤(犒饋)하게 하소서. 그리고 순무사는 표신(標信)을 기다려 각영(各營)의 출정한 장사들을 풀어보낸 뒤에 이어 기고를 거느리고 교장(敎場)으로 나아가 참괵(斬馘)한 수급(首級)을 두루 보이게 하되 또한, 병조 판서와 각영의 장신들이 함께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서울의 돌림병이 근래에 점차 치성(熾盛)하게 번져, 유개(流丐)로서 의지할 곳 없이 바야흐로 앓고 있거나 이미 병들었으면서도 붙어 살 곳이 없는 자들이 신음하면서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이미 사망한 자의 경우는 엎어진 시체가 널려 있어도 묻어줄 사람이 없으니, 아주 불쌍하고 측은합니다. 낭관(郞官)을 보내어 각 해당 부관(部官)과 함께 원근의 방곡(坊曲)을 두루 살피게 하되, 이미 앓았지만 채 소생하지 않은 자와 바야흐로 앓고 있어 안위(安危)를 분변할 수 없는 자를 구별하여 낱낱이 진휼청에 보고하게 하고, 진휼청에서는 막(幕)을 지어 편안하게 살게 하고 양식을 주어 치료해 주게 하소서. 그리고 사망자의 시체가 그냥 버려져 있는 경우는 자내(字內)095)  의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보이는 대로 즉시 매장하라는 뜻을 한성부의 진휼청과 각 군문(軍門)에 신칙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서울 백성들이 바치기를 원한 보향전(補餉錢)으로서 바야흐로 순무영(巡撫營)에 있어 미처 내려보내지 못한 것을 도신(道臣)에게 보내어 도내(道內)의 군용(軍用)의 비용에 보태게 하고, 관서(關西)의 여러 적들의 적몰(籍沒)한 재산도 아울러 본도의 난을 겪은 각 고을의 공용(公用)의 비용에 붙이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재찬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조 참의 이조원(李肇源), 예조 참판 이상황(李相璜), 평안 감사 정만석(鄭晩錫)은 정경(正卿)으로, 의주 부윤 조흥진(趙興鎭), 부호군 오연상(吳淵常)·김굉(金㙆)·엄기(嚴耆) 등은 아경(亞卿)으로 발탁하고, 지훈련(知訓鍊) 이득제(李得濟)는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더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으로 삼았다. 좌의정 김재찬의 말을 따른 것이다.

 

4월 26일 무진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신의 영(營)의 군관(軍官)이 정주(定州)에서 돌아와 고하기를, ‘전패(殿牌)를 봉안(奉安)한 주사(州社)와 향교(鄕校)는 모두 다행히 예전대로이고, 공해(公廨) 여러 곳도 또한 모두 탈이 없으나, 창고의 돈과 곡식은 한결같이 모두 텅비어 단지 쌀과 피곡(皮穀) 20석만 있었습니다. 성 안의 여사(閭舍)는 태반이 타버렸고, 남자는 한 사람도 없고 단지 여자와 아이들만 남아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관문(關文)으로 해당 목사에게 수습하고 변통할 방도를 물었더니, 의견을 갖추어 보고하기를 ‘때에 맞추어 조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4월 27일 기사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신의 영(營)의 중군(中軍)인 유효원(柳孝源)이 보고하기를, ‘희천(熙川)의 의병장 함의형(咸義衡)이 이희저(李禧著)의 수급(首級)을 참하여 바쳤기 때문에 이희저의 지속(支屬)으로서 잡힌 자와 평소에 얼굴을 알고 있던 자들에게 반문(盤問)했더니,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홍경래의 수급과 함께 각각 목함(木函)에 담고 생포한 홍총각(洪總角)·윤언섭(尹彦涉)·김이대(金履大)·양시위(楊時緯) 등과 함께 압령(押領)해 올려 보냅니다. 그러나 우군칙은 계속 수색했으나 아직까지 잡지 못하였는지라, 각진과 영에 엄하게 신칙하여 여러 방면으로 정탐하고 있습니다. 생포한 남녀 2천 9백 83명 안에서 여자는 8백 42명이고, 남자는 10세 이하가 2백 24명이니, 다스리지 않는 데 부쳐 모두 풀어 주었습니다. 그외 1천 9백 17명은 모두 적 중에서 이른바 친기(親騎)·장초(壯抄)·총수(銃手)·창수(槍手) 등으로서 적의 혈당(血黨)이 되었던 자들인데, 은유(恩諭)를 여러 번 반포했음에도 끝내 감격해 뉘우치지 않고 더욱 사납고 완고하여 왕사(王師)에 감심(甘心)했던 자들이니, 결코 한 시각이라도 천지간에 살려 둘 수 없는지라, 모두 진 앞에서 효수하였습니다. 병부(兵符) 2척(隻)과 인신(印信) 3과(顆)는 성 안에서 수색해 얻은 것으로 단단히 봉하여 올려 보냅니다. 관군은 경군(京軍)·향군(鄕軍)을 물론하고,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습니다."
하였다.

 

4월 28일 경오

적을 평정한 데 대한 진하(陳賀)를 인정전(仁政殿)에서 거행하였는데, 권정례(權停例)로 하였다.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그 교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한(漢)나라 백성들이 황지(潢池)에서 관병을 농락한 것과 같아 한 도에서 독을 끼친 것을 통탄스러워했으나, 주사(周師)가 회포(淮浦)를 크게 정벌하여 다행히도 뭇 추악한 무리들이 모두 섬멸되었으므로, 이제 음지(飮至)096)  하는 날을 맞아 이에 널리 큰 소리로 알리는 일을 거행하노라. 생각건대 서토(西土)의 풍속은 의기(義氣)를 숭상하여, 열조(列朝)에서 대대로 충근(忠勤)이 독실하였다. 빈가(邠駕)가 파천(播遷)할 때를 당해서는 뭇 호걸들이 울연(蔚然)히 일어나 힘을 다 바쳤고, 형우(邢憂)가 아주 심할 때에도 찬란하게 일곱 의사(義士)가 목소리를 함께 하였다. 태사(太師)097)  의 조두(俎豆)098)  가 아직 남아 있으니, 많은 선비들이 스스로 힘씀을 볼 수 있고, 서쪽 변방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우고 있으니, 실로 뭇사람들의 마음이 성(城)을 이룸에 힘입은 것이다. 내가 임어(臨御)한 이래로는 더욱 어루만지며 편안히 해 주는 정사에 힘써 선부(選部)에 신칙해 반드시 문반직(文班職)과 무반직(武班職)에 선발하게 하였고, 흉년이 들면 곡식을 옮기고 백성을 옮기는 정사로 항상 오막살이의 백성에까지 두루 구휼하는 데 부지런하였으니, 비록 저 먼 구석진 땅의 지극히 어리석은 천인(賤人)이라 할지라도 아마 구중 궁궐에서 자신이 다친 것처럼 돌보는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어진 사람이 사는 땅에서 갑자기 반역의 변고가 있을 줄 생각이나 했으랴? 놀라운 일이 어두운 밤에 졸지에 일어났던 것이니, 처음에는 한 사내가 미친 듯 부르짖었던 것이나, 흉봉(凶鋒)이 거의 회오리 바람보다 빨랐고, 어느덧 여덟 고을이 연달아 함락되었다. 늠름하게 안평원(顔平原)099)  처럼 적을 꾸짖은 의사(義士)는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고, 범양영(范陽令)처럼 활짝 문을 열어주었던 난역(亂逆)들은 어찌 그리도 많았던가? 만약 조후(條候)가 동쪽으로 나가 싸운 일이 아니었더라면, 거의 소적(巢賊)이 서쪽을 범하는 근심이 있을 뻔하였다. 역적 홍경래(洪景來)는 본디 벌레같은 미물로 오랫동안 효경(梟獍)의 악을 쌓아왔으며, 간활(奸猾)한 향리·장교와 체결(締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영 아래의 보잘것없는 아전부터 강도나 유민으로 협종(脅從)이 된 자들까지 심지어 평서 원수(平西元帥)라 일컬었던 것이다. 하늘의 법을 무시하고, 땅에 금을 그어 참위(讖緯)의 요언(妖言)을 선창(先倡)하였고, 고을 수령을 죽이고 인부(印符)를 빼앗았으니, 단지 빼앗아 웅거할 흉계로 횡산(橫山)·발해(渤海)에 무뢰배들을 불리고자 했을 뿐만이 아니라, 녹림(綠林)과 황건(黃巾)이 다시 도(道)가 있는 세상에 일어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희저(李禧著)·김창시(金昌始)·우군칙(禹君則)·이제초(李齊初)·김사용(金士用) 등은 혹 토호(土豪)와 시골의 부자들에게 의탁하여 오랫동안 이도(異圖)를 몰래 꾸며왔다. 혹은 술사(術士)니 군사(軍師)니 하며 어느덧 같이 악을 함께 하는 무리들을 도와주자, 소와 양과 같은 힘을 믿는 자들은 달갑게 조아(爪牙)가 되었고, 굼실굼실 하는 승냥이나 범과 같은 무리들은 의탁해 심복(心腹)이 되었다. 정경행(鄭敬行)·정성한(鄭聖翰)은 숙부 조카 사이로 아비도 임금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동수(銅綬)를 매고 큰 고을을 맡아 다스린 것이 일찍이 부족하지 않았건만, 잠영(簪纓)을 버리고 적의 소굴로 뛰어들었으니, 도리어 유독 무슨 마음이었던가?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도리어 주인에게 짖어대는 개를 흉내내어 때를 타 난을 조장하여 곧 봉채(蜂蠆)처럼 사람을 해쳤다. 김익순(金益淳)과 이장겸(李章謙)에 이르러서는 그 할아비의 자손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차마 적을 따라 반역(反逆)했단 말인가? 비록 믿을 만한 금성탕지(金城湯池)100)  의 형세가 없었다 하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눈물을 부리며 군사 앞에서 맹세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더욱이 접전이 있기도 전에 무슨 이유로 소문을 듣자 정성을 바치고 항서(降書)를 써서 공손히 서명을 해 주었단 말인가? 그리하여 마침내는 막중(幕中)의 빈객이 되어 가짜 첩(帖)을 받들며 예를 차림이 심히 공손하여 농서(隴西)101)  의 선비들이 부끄러움을 감내하게 하였다. 대개 적도들이 흉계를 빚어온 지 이미 오래 되고, 흉추(凶醜)들이 불어나 도모하기 어렵게 되자, 여연군(閭延郡)에서는 철기(鐵騎)를 몰래 기른다는 헛소문을 퍼뜨렸고, 가야산(伽倻山) 아래에서는 진인(眞人)을 하늘이 낼 것이라는 거짓말에 가탁하였다. 그런가 하면 도성 문에 방을 걸되, 창을 들고 대궐로 향하는 것처럼 꾸몄고, 평양의 감영에 불을 지르되, 또 쇠뇌[弩]를 매복시켜 성의 보루를 쏘려고 하기도 하였다. 약산(藥山)에서는 내응(內應)하려는 모의가 있어 거의 천참(天塹)의 험준한 땅을 잃을 뻔하였고, 살수(薩水)는 바깥으로부터의 구원을 끊어 마치 번리(藩籬)102)  에 견고함이 없는 듯하였다. 이에 적의 경보(警報)가 등문(登聞)되자, 특별히 왕사(王師)에게 나가 정토(征討)할 것을 명하였다. 원융(元戎)이 개부(開府)하자 이미 준조(樽俎)의 절충(折衝)103)  을 허락했고, 선봉이 출발하자 우림(羽林)의 숙장(宿將)104)  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저 미친듯한 적의 선봉을 박천(博川)에서 꺾자 여러 고을의 원들이 군사를 일으켰고, 궁한 도적을 정주성(定州城)으로 쫓아넣자 삼군(三軍)이 용력(勇力)을 과시했다. 바야흐로 적병이 동쪽으로 내달리자 기전(畿甸)의 백성들이 물결처럼 달아났지만, 천과(天戈)가 서쪽을 휩쓸매 만부(灣府)의 의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백리의 여러 고을들은 모두 수복되었으나, 유독 한 조각 외로운 성 만은 항복하지 않으니, 깃발을 휘두르며 성가퀴로 오르는 영고숙(潁考叔)과 같은 용맹을 대적할 자 없었고, 갑옷을 벗고 적에게로 달려간 선진(先軫)의 얼굴이 살아 있는 듯하였다. 짐승의 뿔이 막 떨어질 것처럼 위태위태 하였으니, 어찌 일거에 토벌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사마귀가 팔뚝을 휘두르며 감히 온갖 방법으로 진공하는 데 항거했기 때문에 이 몇 달 동안 포위했음에도 오히려 한 달에 세 번 승리한 기세를 늦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삭(河朔)의 깃발이 채색(彩色)을 바꾸매 원호(元昊)의 담(膽)이 절로 차가와짐이 마땅하였고, 멀리서 천위(天威)가 더해짐은 태산(泰山)이 달걀을 내리누름과 다름이 없으리라 생각하며, 그래도 저 무지하고 완악한 무리들이 변할 줄을 알 것을 기대해 잠시 솥 안에 든 물고기의 신세를 용서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혹 이모(二矛)가 세월을 그냥 보내 도적들에게 여유를 주고 난을 기른다고도 했지만, 나는 중권(中權)이 전적으로 제어하여 군사를 온전히 한 채로 승리할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랬더니, 과연 한 밤중에 채주(蔡州)로 들어갔던 군사가 이에 세 번의 북소리에 곤륜산(崑崙山)을 빼앗은 공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장성(長星)이 땅을 비추자 적의 머리가 진 앞에 떨어졌고, 불똥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역적의 주검이 참호 안에서 불타 사그라졌다. 한 방면의 소굴이 소탕되매 저 상장(上將)의 벌모(伐謀)105)  가 아름다왔고, 천리에 뻗친 음산한 기운이 시원히 쓸려버리매 저 소인이 낯빛을 바꿈을 바라게 되었도다. 하지만 비록 노(魯)나라 반궁(泮宮)의 헌괵(獻馘)에 나아갔다 할지라도, 그래도 우(虞)임금이 두 섬돌 사이에서 춤을 추어 묘족(苗族)을 감화시킨 것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도다. 가병(佳兵)106)  이 상서롭지 못함을 지극히 잘 아는터라, 이미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대해 경계하였었다. 그러나 또한 싸움을 그치게 함이 ‘무(武)’가 되는 데는 부끄러우니, 혹시라도 잘못 해를 입어 억울한 사람은 없는가? 아! 저 억새풀 속에 숨어 있던 도적의 난이 일어나게 된 계제는 실로 풀섶에 숨어 있는 도적이 그 시초가 되었으니, 무장(無將)·불궤(不軌)한 부류들이 그 틈을 탈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박종일(朴鍾一)·이진채(李振采)의 뱃속이 서로 연결되어, 크게 떠벌리고 허풍을 친 것은 차마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이었고, 정우문(鄭友文)·한광우(韓光友)의 손발이 죄다 드러나자 경영한 바는 지극히 흉참(凶慘)하였다. 따라서 전후의 죄명을 논한다면, 그 단락은 비록 계통을 달리했으나, 거의 안팎으로 화응(和應)했던 것과 같아, 마침내 난만하게 같은 데로 귀착되었다. 그래서 우정(禹鼎)107)  이 간악한 것들을 밝게 비추자 귀신 도깨비 따위가 그 형상을 피할 수 없었고, 상위(象魏)에 법을 걸어 놓자 도올(禱林)108)  ·궁기(窮奇)109)  가 모두 그 형(刑)에 복주(伏誅)되었던 것이다.
대저 어찌하여 세상의 변고가 거듭 일어났던가? 또한 나라의 운수가 불행한 탓 이었도다. 그러나 깊은 근심이 열리었으니, 황천(皇天)의 인애(仁愛)하시는 마음을 알 수 있고, 화란(禍亂)이 모두 평정되었으니, 실로 조종(祖宗)의 묵묵하게 도우시는 사랑에 힘입은 것이로다. 이미 홍경래(洪景來)·김창시(金昌始)·이제초(李齊初)·김사용(金士用)·이희저(李禧著)·정경행(鄭敬行)·정성한(鄭聖翰)·최봉관(崔鳳寬)·유문제(柳文濟)·김익순(金益淳)·이장겸(李章謙)·문영기(文榮基)·조문형(趙文亨)·유한순(兪漢淳)·한기조(韓基朝) 등을 율에 의거해 정형(正刑)하고 가산을 적몰(籍沒)하였으며, 나머지는 함거(檻車)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마땅히 같은 법을 베풀 것이다. 지난번에 간과(干戈)를 따른 것이 어찌 내 마음으로 즐겨 한 것이리오? 이제 부월(鈇鉞)에 위엄을 꾸며 난을 좋아하던 무리를 쳐서 평정했다만, 기근과 전쟁으로 화가 겹쳤는지라 고할 데 없는 저 백성들이 애닯고, 버드나무에 번갈아 내린 비와 눈에 감회가 일어나 오랫동안 종정(從征)한 장사(壯士)들을 보고 안스럽게 여기노라. 다만 염려하노니, 주토(誅討)한 뒤 의심을 내고 두려워하는 무리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춘추(春秋)》의 상경(常經)은 비록 당역(黨逆)에 관한 율이 엄하나, 천지의 큰 덕은 반드시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애(仁愛)을 앞세운다. 무릇 강개하여 충성을 바친 자는 차등을 두어 논상(論賞)하고, 실수로 적에게 붙은 자는 모두 그냥 두고 묻지 말라. 자신의 적심(赤心)을 미루어 남의 뱃속에 두매 하북(河北)의 반측자(反測子)들이 모두 스스로 안심하였고, 지팡이를 짚고 가서 조서(詔書)를 들으매 산동(山東)의 부로(父老)들이 눈물을 흘렸다. 생각건대 난적(亂賊)이 일어난 것은 대개 해마다 굶주렸던 데 연유한 것이거늘, 전쟁의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대정(大庭)에서 축하하는 것을 어찌 편안히 여기겠는가마는, 뭇 신료(臣僚)들이 일제히 기뻐하는 정성을 애써 따라 이에 팔도에 널리 알리는 소리를 펼치게 된 것이다. 부덕(否德)한 운수는 가고 태평한 운수가 오니, 바로 기쁨을 누릴 때이며, 천지가 밝게 틔였으니 마땅히 죄를 씻어주는 은혜를 미루어야 할 것이다. 이달 28일 어둑 새벽 이전의 잡범으로 사죄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없애노라. 아! 위험함이 있고 난 뒤에 안정이 되고, 난이 있고 난 뒤에야 다스려지는 것은 지난 사적(史籍)을 돌아보건대 어긋나지 아니한다. 주린 자는 먹이고 목마른 자는 마시게 하는 것은 지금이 가장 쉽도다. 형벌과 상을 나란히 행하니 아마도 역(逆)·순(順)의 나뉨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근심과 즐거움을 함께 하니, 영원히 인수(仁壽)의 기쁨을 보존할 것이로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다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 제학 조윤대(曹允大)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2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어문학-문학(文學)


[註 096] 음지(飮至) : 정벌에 나갔다가 개선하여 돌아와서 사당에서 술을 마시는 것.[註 097] 태사(太師) : 기자(箕子).[註 098] 조두(俎豆) : 제기의 하나.[註 099] 안평원(顔平原) : 안진경(顔眞卿)이 안사의 난때 평원의 태수로 있었음.[註 100] 금성탕지(金城湯池) : 방비가 아주 견고한 성.[註 101] 농서(隴西) : 중국(中國).[註 102] 번리(藩籬) : 울타리, 변경의 방어.[註 103] 절충(折衝) : 주석(洒席)에서 외국 사신과 담소하면서 그의 요구를 물리쳐 자국의 주장을 관철시킴. 전하여 외국과의 교섭에서 국위를 손상시키지 않음.[註 104] 숙장(宿將) : 나이도 많고 공훈도 많은 장수.[註 105] 벌모(伐謀) : 적을 격파하는 계책.[註 106] 가병(佳兵) : 날카로운 무기.[註 107] 우정(禹鼎) : 우임금이 만든 솥. 우임금이 구목(九牧)의 쇠를 거두어 솥을 만들었는데, 온갖 형상을 새겨 넣어 백성들로 하여금 간악한 것들에 대해 알게 하니, 백성들이 산림(山林)이나 천택(川澤)에 들어가도 도깨비 귀신 따위가 해칠 수가 없었다고 함.[註 108] 도올(禱林) : 악수(惡獸)의 하나. 성질이 사나워서 싸우면 물러나지 않는다 함.[註 109] 궁기(窮奇) : 악수의 하나. 착한 이를 싫어하고 악한 이를 좋아한다 함.

 

진하(陳賀) 때의 예방 승지(禮房承旨)인 김시근(金蓍根)에게 가의 대부(嘉義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삭주 부사(朔州府使) 윤민동(尹敏東)·전 영장(營將) 숙천 부사(肅川府使) 이유수(李儒秀)·우영장(右營將) 순천 군수(順川郡守) 오치수(吳致壽)·후영장(後營將)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태천 현감(泰川縣監) 김견신(金見臣)·순영 중군(巡營中軍) 이정회(李鼎會)·병영 우후(兵營虞候) 이익(李榏)과 영변(寧邊)·강계(江界)·귀성(龜城)·창성(昌城)·초산(楚山)·위원(渭原)·벽동(碧潼)의 고을 장관(將官)들은 각각 거느린 군사를 인솔하여 돌아갔고, 의병장 정내홍(鄭來鴻)·원영정(元永丁)·김전(金篆)·현인복(玄仁福)·백사증(白思曾)·송지렴(宋之廉)과 창의장(倡義將) 장낙현(張洛賢)·박대관(朴大觀)·강인학(姜仁鶴)·김경로(金慶魯)·조철진(趙哲鎭)·안택륜(安宅倫)·이지렴(李志濂)·김기영(金基英)·최대식(崔大寔)·전기현(田芑顯)·이인화(李仁華)·정언섭(鄭彦涉)·장운한(張雲漢)과 소모장(召募將) 민수현(閔修顯)·이시복(李時復)·김지환(金志煥)·김인복(金麟福)·양홍(梁鴻) 등도 모두 돌아갔습니다. 정주 목사(定州牧使) 임재수(林裁洙)·곽산 군수(郭山郡守) 정주성(鄭周誠)·박천 군수(博川郡守) 이운식(李運植)이 대동한 군사들은 순영 중군에게 맡겨 보내 각자 관(官)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송도(松都)에서 진에 나간 병졸들은 마땅히 본부에 이르러 해산해 보내야 하겠습니다만, 그 노고에 상을 주는 절차는 다를 수 없으니, 청컨대 본부의 수신(守臣)에게 경영(京營)의 예에 의거해 후하게 호궤(犒饋)하고, 들어간 물력(物力)은 공곡(公穀)으로 회감(會減)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4월 29일 신미

순무영에서 아뢰기를,
"신의 영(營)의 중군(中軍)인 유효원(柳孝源)이 치보(馳報)하기를, ‘이 달 22일에 귀성(龜城)의 우장령 방수장(牛場嶺防守將) 정몽량(鄭夢良)이 우용문(禹龍文)·최이륜(崔爾崙)·최이항(崔爾恒)·최정우(崔正宇)·김이구(金履九) 등 적도 5명을 잡아 바쳤기에 더욱 엄하게 반핵(盤覈)을 더하였더니, 우용문이란 한 명은 곧 우군칙(禹君則)으로서 콧등에 탄환을 맞은 흔적이 아직도 완연하여 전후 적의 초사(招辭)와 꼭 들어맞았습니다. 최이륜은 또 적도 중에서 음모와 흉계를 주장하지 않음이 없어, 혹은 가쉬(假倅)가 되기도 하고, 혹은 찬모관(贊謀官)이 되기도 하였으니, 또한 한 적괴(賊魁)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함거(檻車)에 실어 군관(軍官)을 시켜 압령(押領)해 올려 보내게 하였습니다. 최이항과 최정우는 곧 최이륜의 지속(支屬)이고, 김이구는 협종(脅從)에 불과한지라 모두 병영(兵營)으로 옮겨 엄하게 가두어 놓고 구경(究竟)을 기다립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의주 부윤 조흥진(趙興鎭)이 아뢰기를,
"서적(西賊)이 토평(討平)되었다는 뜻으로 부도통(副都統)에게 정문(呈文)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답하는 글에 이르기를, ‘정주(定州)를 공파(攻破)하여 우두머리 거괴(巨魁)인 홍경래(洪景來) 등은 모두 창과 총탄을 맞아 죽었고, 여당(餘黨)은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참하거나 사로잡았으며, 군사들은 호궤(犒饋)한 뒤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한 사정을 전에 정보(呈報)한 대로 급히 상주(上奏)한 것 외에 아울러 본 부도통이 거느리고 있는 병변(兵弁)을 보내어 서찰을 봉황성 변문(邊門)에 급히 전하게 하였으니, 황지(皇旨)를 기다려 준행(遵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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