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5권, 순조 12년 1812년 3월

싸라리리 2025. 6. 24.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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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계유

남공철(南公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추국하였다.

 

3월 2일 갑술

추국하였다.

 

3월 3일 을해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신의 영의 중군(中軍) 유효원(柳孝源)이 치보(馳報)하기를, ‘지난달 26일에 안주(安州)에 도착하여 정주(定州) 대진(大陣)의 경군(京軍)과 향군(鄕軍) 중에 병들거나 다치고 사망한 자가 많다고 들었기 때문에 성천(成川)의 유능한 포수 1백 명을 해당 장령(將領)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와서 소속시키게 하였고, 안주성(安州城)의 정군(丁軍) 중 1백 11명을 또한 우후(虞候) 이익(李榏)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와서 진으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28일에는 정주성(定州城) 밖에 도착하여 전 중군 박기풍(朴基豊)과 교대한 뒤 경군과 향군 8천 3백 29명을 통령(統領)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추국 죄인(推鞫罪人) 박종일(朴鍾一) 등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일찍이 강화 죄인(江華罪人)의 아들이 죄가 없다고 여겼고, ‘이처럼 서구(西寇)가 평정되지 않은 때를 당해서는 마땅히 촉한(蜀漢)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남과 수작하였으며, 이진채(李振采)의 두 글자 흉언을 듣자 ‘의리에 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라고 하였고, ‘조정에 기강이 없다.’는 말을 듣자, 또 ‘변통이 있어야 합당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거사할 때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분원(分院)의 군사로 돕겠다.’고 하였고, 일이 이루어진 뒤에 대해서는 ‘마땅히 내응하는 사람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훈장(訓將)은 가히 감당할 수 있으며, 전라도 도백에 차임되기를 원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흉악한 극적(極賊)의 큰 죄안(罪案)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한 음모를 의리라 하자 제멋대로 다섯 자의 흉언을 발설하였고, 말이 종실(宗室)이 잔약하고 조정에 사람이 없음에 이르자 또 여덟 자의 흉언을 발설하였습니다. 또 이진채와 더불어 사당(私黨)을 맺고서는 정월 13일에 부도한 흉언을 지어내어 인심을 선동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거사하는 계책을 듣자, ‘이 말이 가장 낫다.’고 하였으니, 대역 부도(大逆不道)임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3월 4일 병자

양사(兩司)에서 【대사간 윤행이(尹行頣), 사간 이지연(李志淵), 장령 홍명주(洪命周), 지평 박승현(朴升鉉)·유춘동(柳春東), 헌납 임업(任㸁), 정언 이엽(李燁)·안상묵(安尙默)이다.】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박종일(朴鍾一)이 기회를 만들어 흉악한 계획을 빚어내었던 것은 심적(沁賊)이 바로 그 원인입니다. 아! 역적 인(䄄)의 여러 아들들이 아직까지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이미 실형(失刑)이 큰 것 이거니와, 옛날 천오장(千五壯)과 유한순(兪漢淳)이 가탁(假托)한 것 또한 이 역적이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까닭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더욱이 이번 역모(逆謀)의 배포(排布)는 가면 갈수록 더욱 참독(慘毒)하니, 이 역적을 끼고 인심을 선동하였고 이 역적을 끼고 흉도들을 꾀고 불러모았던 것입니다. ‘마땅히 촉한(蜀漢)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곧 이 역적에 비긴 것이며, ‘변통이 있어야 합당하다.’는 말 또한 이 역적을 지적한 것입니다. ‘의리에 해롭지 않다.’는 말과 ‘이 기회를 타서 거사한다.’는 계책이 심역(沁逆)을 근본으로 삼지 아니함이 없으니, 만약 그 근원을 캐본다면 첫째도 심적이요, 둘째도 심적입니다. 흉악함이 이 역적과 같고, 패역(悖逆)함이 이 역적과 같은데도 예전처럼 용서한다면 인심이 안정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역적 인(䄄)의 여러 아들을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쾌히 전형(典刑)을 시행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후에 걸쳐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아홉 번 연명 차자를 올리고, 초토(草土)의 대신 또한 상소하였으며, 의금부의 상소가 한 번, 승정원의 계사(啓辭)가 한 번, 경재(卿宰)의 상소가 한 번, 대부(大夫)·시종(侍從)의 상소가 한 번, 종친(宗親)의 상소가 한 번, 의빈(儀賓)의 상소가 한 번, 음관(蔭官)의 상소 또한 한 번, 무신(武臣)의 상소가 네 번, 태학생(太學生)의 상소가 한 번, 상유(庠儒)의 상소가 두 번, 도헌(都憲)·간장(諫長)의 상소가 각각 세 번, 양사(兩司)·옥서(玉署)의 차자가 모두 네 번, 삼사(三司)의 합사(合辭)가 마흔 다섯 번·연명 차자가 세 번이었다. 그 나머지 여러 상소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임금이 여러 번 엄한 하교를 내려 삼사(三司)를 모두 번갈아 내치고, 탕제의 봉진(封進)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 대신이 누차 연석(筵席)에서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추국하였다.

 

3월 5일 정축

추국하였다.

 

3월 6일 무인

추국하였다.

 

송영(宋鍈)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3월 7일 기묘

추국하였다.

 

경과(慶科)의 정시(庭試)를 가을을 기다려 설행(設行)하라고 명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서북(西北)에 진휼을 실시한다는 이유로 시기를 물리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강계(江界) 등 세 고을의 의병에 대해 도신과 수신으로 하여금 위로하고 호궤(犒饋)할 것과 여러 고을에서 모집한 장사 군관(壯士軍官)에게는 따로 진무(軫撫)를 더할 것을 명하였으니 비국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이 치계(馳啓)하기를,
"초3일에 성경 장군(盛京將軍)이 서협(署協)을 차출하여 보냈는데, 서협이 갑군(甲軍) 15명을 거느리고 중강(中江) 건너편에 나와 공문(公文) 1통을 주었으므로 열어 보았더니, ‘성경 장군이 초멸(剿滅)된 역비(逆匪)가 위험을 무릅쓰고 잽싸게 달아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특별히 서협을 보내 관군(官軍)을 독솔(督率)케 하고, 앞으로 가서 방위하며 강안(江岸)을 끊어 초멸하고자 한다. 청컨대 역비가 무슨 연유로 일어났는지, 현재 있는지 없는지와 개선을 알려 안정되어 무사한지의 시말을 자세히 속히 복부(覆付)하여 일을 헤아리는 데 편리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답통(答通)에 ‘며칠 안가 초평(剿平)할 것’이라는 뜻으로 말을 꾸며서 주었는데, 이미 대국(大國) 관군이 앞으로 와서 방위하는 일이 있었으니, 이쪽 편의 찰방(察訪)을 더욱 경계하고 엄히 해야만 했으므로 연변(沿邊)의 여러 진(鎭) 및 파수(把守)에게 각별히 신칙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식과 반찬, 떡과 고기 등의 물건을 건너 보내어 주었더니, 그대로 강가에서 돌아갔습니다."
하였다.

 

3월 9일 신사

추국하였다. 모반 죄인(謀叛罪人) 김익순(金益淳)이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이 김익순이 적에게 항복하여 첩문(帖文)을 받은 죄를 조사하고 또 함거(檻車)로 압상(押上)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추국을 설시했던 것이다.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적병이 처음 일어났을 때 방어하는 계책을 본받지 않은 채 흉적의 선봉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항서(降書)를 보냈고, 군관(軍官)의 가짜 첩문을 태연히 받았으며, 인과(印顆)와 부신(符信)을 명령대로 싸보냈습니다. 그리고 날뛰는 마음을 품고 만나기를 청하여 공손히 문안 인사를 나누고, 대청에 올라가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말미를 받고 돈과 쌀을 받았으니, 나라를 배신하고 적을 따르는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죽음을 면할 계책을 내어 적의 수급(首級)을 사서 수기(手記)를 꾸며 주었으니, 흉악하고 패려한 뱃속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모반 대역임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3월 10일 임오

평안 병사가 아뢰기를,
"귀성 부사(龜城府使) 조은석(趙恩錫)의 첩정(牒呈)에 ‘순무 중군(巡撫中軍)의 관문(關文)으로 인해 본부의 군병 중에서 정장(精壯) 1백 명을 뽑아서 대진(大陣)으로 보냈습니다.’라고 하였고, 희천 군수(熙川郡守) 김문기(金文基)의 첩정에는 ‘본군(本郡)의 향인(鄕人) 김인복(金麟福)·양홍(梁鴻) 등이 의병 40명을 모집하고, 또 유향(儒鄕)들 가운데서 1천 냥의 돈을 마련해 군장(軍裝)과 군량을 갖추어서 출전하기를 자원하였으므로 대진으로 보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3월 11일 계미

김계락(金啓洛)을 형조 판서로, 조윤대(曺允大)를 예문관 제학으로, 이존수(李存秀)를 경기 관찰사로, 이회식(李晦植)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3월 13일 을유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순무 중군(巡撫中軍)의 첩보(牒報)에 ‘이 달 8일 밤 4경에 적들이 서북문으로부터 몰래 나와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과 의병장 허항(許沆)의 진을 습격하여 불을 놓고 포장(鋪裝)한 것을 태우며 어지러이 찌르고 쳤는데, 때가 마침 캄캄한 밤인지라 서로 유린(蹂躪)하였습니다. 새벽녘이 되어 순천 부사(順天府使)의 진에서 군사를 출동시켜 와서 구원하자 적들이 비로소 퇴각해 흩어졌는데, 혹은 성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사방으로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함종 부사의 군사 중에 죽은 자는 70명이고, 다친 자는 1백 37명이었으며, 적도로서 아군에 죽은 자는 46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주 군관(義州軍官) 정내홍(鄭來鴻) 등과 곽산 장교(郭山將校) 김은성(金殷成)이 적군 고종현(高宗賢) 등 4명을 잡아 와서 바쳤으므로, 적정을 캐물어 보았더니 ‘적의 양식이 거의 다 떨어져가는 판이라 만사 일생(萬死一生)의 책으로 적장 홍경래(洪景來)는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성가퀴를 파수(把守)하고 우군칙(禹君則)·홍총각(洪總角) 등은 장건(壯健)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함종 부사의 진부터 시살(廝殺)하고 이어 차례로 무너뜨리고자 한 것’이라고 하길래 즉시 모두 효수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집사(執事) 이정량(李廷良)은 중상을 입고 죽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병사(兵使)의 첩보를 받아보니, ‘초산(楚山)과 영변(寧邊)의 총수(銃手) 등이 적군 10여 명을 총살하였고, 의병 진 중에서 창에 맞아 죽은 자가 3명, 다친 자가 3명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예조에서 ‘각 식년(式年)의 경외(京外)의 충·효·열의 문서’를 정부(政府)에 보고했는데, 등급을 나누어 초계(抄啓)하였다.
충신 정려질(忠臣旌閭秩)          【보은(報恩)의 고 부호군            이명백(李命百)은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의 문인(門人)으로 왜변(倭變) 때 창의(倡義)하여 보은을 지키다가 적암(赤巖)의 전투에서 죽었고, 청산(靑山)의 고 주부            박문강(朴文綱)은 정축년 노변(虜變) 때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를 따라 음죽(陰竹)에서 죽었다.】 효자 정려질(孝子旌閭秩)          【서울 사는 고 참봉            오재능(吳載能)·고 교관(敎官)            홍석보(洪錫普)·고 현령            홍헌유(洪獻猷)·고 도정            윤면원(尹勉遠)·고 참판            유의(柳誼)·고 학생 장후근(張厚根)·고 생원 이광유(李光裕)·고 학생 김치형(金致亨)·고 생원 홍헌모(洪憲謨), 경주부(慶州府) 고 사인(士人) 허호(許浩), 개성부(開城府) 고 사인            한광겸(韓光謙), 여주(驪州) 고학생 구석의(具錫儀), 영동(永同) 고 통덕랑(通德郞)            이현규(李顯揆), 목천(木川) 고 사인            김수필(金壽弼), 옥구(沃溝) 고 양인(良人) 정시손(鄭時孫), 전주(全州) 고 한량 백행량(白行良), 상주(尙州) 고 사인            홍도운(洪道運), 금산(金山) 고 학생 조응방(曹應邦), 안동(安東) 고 학생 금홍달(琴弘達), 고 학생 이한오(李漢伍), 거제(巨濟) 고 학생 정유(鄭游), 평산(平山) 고 동지(同知)            조만길(趙萬吉), 평양(平壤) 고 사인            김취의(金就義), 위원(渭原) 고 사인            강건항(姜建恒), 안변(安邊)장교 신만화(申萬和), 함흥(咸興) 고 부사            위광익(魏光翼)이다.】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          【서울 사는 고 사인            강언성(姜彦成)의 처 이씨(李氏)·고 학생 이원식(李元植)의 처 최씨(崔氏)·고 통덕랑            김노직(金魯直)의 처 송씨(宋氏)·고 교관            홍석보(洪碩普)의 처 조씨(曹氏)·고 학생 이철운(李轍運)의 처 유씨(柳氏)·고 생원 홍헌모(洪憲謨)의 처 윤씨·고 사인            임우전(林雨田)의 처 정씨(鄭氏)·고 한량 김유항(金有恒)의 처 신씨(辛氏)와 고 학생 장후근(張厚根)의 처 이씨·고 군수            정문재(鄭文在)의 처 김씨·무의공(武毅公)            조심태(趙心泰)의 처 송씨·고 생원 정우영(鄭祐榮)의 처 윤씨·고 헌납            정지원(丁志元)의 처 이씨·고 목사            홍술조(洪述祖)의 처 이씨·고 생원 조의철(趙宜喆)의 처 이씨·고 학생 서경보(徐慶輔)의 처 김씨·고 현령 남성로(南省老)의 처 조씨(趙氏)·양인 김세봉(金世鳳)의 처 박성(朴姓)·고 학생 박종건(朴宗謇)의 처 김씨·고 동지            이사룡(李思龍)의 처 고씨(高氏)·고 학생 이장철(李章喆)의 처 송씨, 개성부 고 학생 진득충(秦得忠)의 처 임씨(林氏), 고 사인            이영필(李英弼)의 처 김씨와 그의 종질(從姪)인 이응번(李應蕃)의 처 김씨, 영평(永平) 고 학생 김순인(金順仁)의 처 변씨(邊氏), 안산(安山) 고 사인            이도용(李道容)의 처 김씨, 적성(積城) 고 학생 경육(慶焴)의 처 남씨(南氏), 파주(坡州) 고 사인            김한규(金漢奎)의 처 조씨(趙氏), 통진(通津) 고 주부            윤재익(尹在益)의 처 이씨, 과천(果川) 고 학생 홍유룡(洪有龍)의 처 전씨(全氏), 양주(楊州) 고 사인            홍선영(洪善泳)의 처 조씨(曹氏), 여주(驪州) 고 학생 이광모(李光模)의 처 박씨·고사인 권순건(權順健)의 처 이씨, 연산(連山) 고 사인            백상준(白尙準)의 처 송씨, 서원(西原) 고 사인            오세환(吳世煥)의 처 김씨, 목천(木川) 고 사인            남섭(南燮)의 처 김씨, 공주(公州) 고 부사            유회원(柳晦源)의 처 김씨와 고 사인            이익선(李翼善)의 처 한씨(韓氏), 회덕(懷德) 고 충목공(忠穆公)            이시직(李時稷)의 처 이씨, 홍산(鴻山) 고 처녀 윤씨, 익산(益山) 고 사인            권시하(權時夏)의 처 조씨(趙氏), 창평(昌平) 고 사인            양학언(梁學彦)의 처 이씨, 남평(南平) 고 양인 박처준(朴處俊)의 처 김성(金姓), 함평(咸平) 고 부장(部將)            윤해(尹海)의 처 강씨(康氏)와 고 사인            김석규(金碩圭)의 처 진씨(陳氏), 무안(務安) 고 사인            서익천(徐益天)의 처 정씨(鄭氏), 남원(南原) 고 사인            김익(金釴)의 처 이씨, 고부(古阜) 고 사인            김방수(金芳洙)의 처 정씨(丁氏), 동복(同福) 고 양인 정쌍룡(鄭雙龍)의 처 이성(李姓), 창녕(昌寧) 고 사인            성효열(成孝悅)의 처 손씨(孫氏), 경주(慶州) 관노(官奴) 현옥(顯玉)의 처 황아(黃娥), 안의(安義) 고 사인            전세적(全世績)의 처 허씨(許氏), 영덕(盈德) 고 사인            신길환(申吉煥)의 처 권씨(權氏), 선산(善山) 사노(私奴) 복재(卜才)의 처 김녀(金女), 밀양(密陽) 고 사인            이석린(李錫麟)의 처 박씨, 통천(通川) 고 사인            임붕원(林鵬遠)의 처 고씨(高氏), 원주(原州) 고 사인            권유(權愉)의 처 원씨(元氏), 금성(金城) 고 사인            배정로(裵廷老)의 처 진씨(秦氏), 금화(金化) 고 사인            이한유(李漢裕)의 처 한씨(韓氏), 횡성(橫城) 고 사인            김광한(金光漢)의 처 원씨(元氏), 정선(旌善) 고 공생(貢生)            고지걸(高志屹)의 처 김성(金姓), 삼척(三陟) 고 공생 김윤근(金允瑾)의 처 남성(南姓), 재령(載寧) 고 업무(業武) 손언장(孫彦章)의 처 한씨(韓氏), 장연(長淵) 고 사인            박한성(朴漢成)의 처 김씨, 서흥(瑞興) 고 사인            신재순(申在舜)의 처 유씨(柳氏), 해주(海州) 고 영리(營吏) 지상함(池相涵)의 처 김성(金姓), 의주(義州) 고 사인            백광련(白光鍊)의 처 최씨, 곽산(郭山) 고 학생 지덕룡(池德龍)의 처 김씨, 삼등(三登) 고 통덕랑            주평(朱坪)의 처 김씨, 강계(江界) 고 학생 김성삼(金省三)의 처 김씨, 평양(平壤) 고 사인            김이곤(金理坤)의 처 이씨, 개천(价川) 고 사인            이일초(李日初)의 처 김씨, 영흥(永興) 고 학생 김왕추(金旺秋)의 처 장씨(張氏), 함흥(咸興)의 고 학생 이종눌(李宗訥)의 처 김씨·고 학생 한명갑(韓命甲)의 처 진씨(秦氏)·고 급제(及第) 유혜중(柳惠重)의 처 이씨, 삼수(三水) 전 권관(權管)            김성정(金聖鼎)의 처 박씨, 부령(富寧) 출신(出身) 이원배(李元培)의 자부(子婦) 장씨(張氏)·양씨(楊氏), 이원(利原) 고 무인 연재협(延再協)의 처 엄씨(嚴氏)이다.】 효부 정려질(孝婦旌閭秩)          【서울에 사는 고 현령            홍헌유(洪獻猷)의 처 이씨, 예천(禮泉) 고 사인            이진헌(李鎭憲)의 처 권씨(權氏)이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영동(永同)의 고 목사(牧使)            이수(李洙)는 기사년 곤전(坤殿)께서 손위(遜位)하셨을 때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폐(廢)했던 사람이다. 청도(淸道)의 고 만호(萬戶)            박경선(朴慶宣)·고 장사랑(將仕郞)            박경인(朴慶因)은 왜변(倭變) 때 의병을 일으켜 전사(戰死)했던 사람이다. 안의(安義)의 고 사인            전우석(全虞錫)은 무신년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변 때 창의(倡義)하여 역적을 잡았던 사람이다. 대구(大丘)의 고 부장(副將)            허득량(許得良)과 그의 종제(從弟) 고 정(正) 허복량(許復良)은 정축년 노변(虜變) 때 경상 병사            민영(閔栐)을 따라 쌍령(雙嶺)에서 전사했던 사람이다. 고 현령 최계(崔誡)와 그 아우 최인(崔認)과 그 종자(從子) 최동보(崔東輔)는 왜변 때 창의하여 공을 쌓은 사람이다. 밀양(密陽)의 고 참의(參議)            손조서(孫肇瑞)는 단묘(端廟) 때 육신(六臣)의 일이 있고 난 뒤 뉘우치고 스스로 폐기(廢棄)했던 사람이다. 상주(尙州)의 고 처사(處士) 채득기(蔡得沂)는 정축년에 남한 산성에서 내려온뒤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스로 깨끗함을 지켰던 사람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 사는 고 지사(知事)            황운하(黃運河)·고 학생 유해균(柳海均)·고 남학 교수(南學敎授)            현계정(玄啓楨)·고 학생 이혼(李混)·고 감역(監役)            김정주(金鼎柱)·고 학생 심사정(沈師定)·고 사인            홍병오(洪秉五)·고 서윤(庶尹)            홍계서(洪啓瑞)·고 동지(同知)            이사룡(李思龍), 수원부(水原府) 고 참봉(參奉)            윤형로(尹衡老), 양주(楊州) 고 학생 이삼석(李三錫), 장단(長湍) 고 사인            한광세(韓光世), 양천(陽川) 고 통덕랑            김숭제(金嵩濟), 부여(扶餘) 고 사인            최사백(崔賜百), 영동(永同) 고 사인            최복원(崔復源), 목천(木川) 고 정랑(正郞)            조명(趙銘), 공주(公州) 고 사인            윤박(尹搏), 서원(西原) 고 사인            송상휘(宋尙輝)·홍귀서(洪龜瑞), 진천(鎭川) 고 통덕랑            정도(鄭棹), 전주(全州) 고 사인            조대수(趙大壽)·이진운(李鎭運), 영암(靈巖) 고 직장(直長)            신사준(愼師浚), 장수(長水) 고 동지            김성보(金聖輔), 능주(綾州) 고 사인            박헌가(朴獻可), 고부(古阜) 고 사인            송수현(宋守賢), 금구(金溝) 고 사인            송정모(宋廷模), 지례(知禮) 고 사인            이수호(李遂浩), 함창(咸昌) 고 사인            조수구(趙守球), 고성(固城) 고 사인            백봉래(白鳳來), 영월(寧越) 고 사인            엄계태(嚴啓泰), 강릉(江陵) 고 사인            신갑동(辛甲東)·고 생원 최현민(崔顯珉), 성천(成川) 고 현감            나홍점(羅弘漸), 강서(江西)고 학생 한태형(韓泰亨), 상원(祥原) 고 학생 방덕일(方德一), 중화(中和) 고 학생 한창대(韓昌岱), 용강(龍岡) 고 사인            김진수(金震秀), 삼화(三和) 고 사인            김처겸(金處謙)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1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효자 정려질(孝子旌閭秩)          【서울 사는 고 참봉            오재능(吳載能)·고 교관(敎官)            홍석보(洪錫普)·고 현령            홍헌유(洪獻猷)·고 도정            윤면원(尹勉遠)·고 참판            유의(柳誼)·고 학생 장후근(張厚根)·고 생원 이광유(李光裕)·고 학생 김치형(金致亨)·고 생원 홍헌모(洪憲謨), 경주부(慶州府) 고 사인(士人) 허호(許浩), 개성부(開城府) 고 사인            한광겸(韓光謙), 여주(驪州) 고학생 구석의(具錫儀), 영동(永同) 고 통덕랑(通德郞)            이현규(李顯揆), 목천(木川) 고 사인            김수필(金壽弼), 옥구(沃溝) 고 양인(良人) 정시손(鄭時孫), 전주(全州) 고 한량 백행량(白行良), 상주(尙州) 고 사인            홍도운(洪道運), 금산(金山) 고 학생 조응방(曹應邦), 안동(安東) 고 학생 금홍달(琴弘達), 고 학생 이한오(李漢伍), 거제(巨濟) 고 학생 정유(鄭游), 평산(平山) 고 동지(同知)            조만길(趙萬吉), 평양(平壤) 고 사인            김취의(金就義), 위원(渭原) 고 사인            강건항(姜建恒), 안변(安邊)장교 신만화(申萬和), 함흥(咸興) 고 부사            위광익(魏光翼)이다.】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          【서울 사는 고 사인            강언성(姜彦成)의 처 이씨(李氏)·고 학생 이원식(李元植)의 처 최씨(崔氏)·고 통덕랑            김노직(金魯直)의 처 송씨(宋氏)·고 교관            홍석보(洪碩普)의 처 조씨(曹氏)·고 학생 이철운(李轍運)의 처 유씨(柳氏)·고 생원 홍헌모(洪憲謨)의 처 윤씨·고 사인            임우전(林雨田)의 처 정씨(鄭氏)·고 한량 김유항(金有恒)의 처 신씨(辛氏)와 고 학생 장후근(張厚根)의 처 이씨·고 군수            정문재(鄭文在)의 처 김씨·무의공(武毅公)            조심태(趙心泰)의 처 송씨·고 생원 정우영(鄭祐榮)의 처 윤씨·고 헌납            정지원(丁志元)의 처 이씨·고 목사            홍술조(洪述祖)의 처 이씨·고 생원 조의철(趙宜喆)의 처 이씨·고 학생 서경보(徐慶輔)의 처 김씨·고 현령 남성로(南省老)의 처 조씨(趙氏)·양인 김세봉(金世鳳)의 처 박성(朴姓)·고 학생 박종건(朴宗謇)의 처 김씨·고 동지            이사룡(李思龍)의 처 고씨(高氏)·고 학생 이장철(李章喆)의 처 송씨, 개성부 고 학생 진득충(秦得忠)의 처 임씨(林氏), 고 사인            이영필(李英弼)의 처 김씨와 그의 종질(從姪)인 이응번(李應蕃)의 처 김씨, 영평(永平) 고 학생 김순인(金順仁)의 처 변씨(邊氏), 안산(安山) 고 사인            이도용(李道容)의 처 김씨, 적성(積城) 고 학생 경육(慶焴)의 처 남씨(南氏), 파주(坡州) 고 사인            김한규(金漢奎)의 처 조씨(趙氏), 통진(通津) 고 주부            윤재익(尹在益)의 처 이씨, 과천(果川) 고 학생 홍유룡(洪有龍)의 처 전씨(全氏), 양주(楊州) 고 사인            홍선영(洪善泳)의 처 조씨(曹氏), 여주(驪州) 고 학생 이광모(李光模)의 처 박씨·고사인 권순건(權順健)의 처 이씨, 연산(連山) 고 사인            백상준(白尙準)의 처 송씨, 서원(西原) 고 사인            오세환(吳世煥)의 처 김씨, 목천(木川) 고 사인            남섭(南燮)의 처 김씨, 공주(公州) 고 부사            유회원(柳晦源)의 처 김씨와 고 사인            이익선(李翼善)의 처 한씨(韓氏), 회덕(懷德) 고 충목공(忠穆公)            이시직(李時稷)의 처 이씨, 홍산(鴻山) 고 처녀 윤씨, 익산(益山) 고 사인            권시하(權時夏)의 처 조씨(趙氏), 창평(昌平) 고 사인            양학언(梁學彦)의 처 이씨, 남평(南平) 고 양인 박처준(朴處俊)의 처 김성(金姓), 함평(咸平) 고 부장(部將)            윤해(尹海)의 처 강씨(康氏)와 고 사인            김석규(金碩圭)의 처 진씨(陳氏), 무안(務安) 고 사인            서익천(徐益天)의 처 정씨(鄭氏), 남원(南原) 고 사인            김익(金釴)의 처 이씨, 고부(古阜) 고 사인            김방수(金芳洙)의 처 정씨(丁氏), 동복(同福) 고 양인 정쌍룡(鄭雙龍)의 처 이성(李姓), 창녕(昌寧) 고 사인            성효열(成孝悅)의 처 손씨(孫氏), 경주(慶州) 관노(官奴) 현옥(顯玉)의 처 황아(黃娥), 안의(安義) 고 사인            전세적(全世績)의 처 허씨(許氏), 영덕(盈德) 고 사인            신길환(申吉煥)의 처 권씨(權氏), 선산(善山) 사노(私奴) 복재(卜才)의 처 김녀(金女), 밀양(密陽) 고 사인            이석린(李錫麟)의 처 박씨, 통천(通川) 고 사인            임붕원(林鵬遠)의 처 고씨(高氏), 원주(原州) 고 사인            권유(權愉)의 처 원씨(元氏), 금성(金城) 고 사인            배정로(裵廷老)의 처 진씨(秦氏), 금화(金化) 고 사인            이한유(李漢裕)의 처 한씨(韓氏), 횡성(橫城) 고 사인            김광한(金光漢)의 처 원씨(元氏), 정선(旌善) 고 공생(貢生)            고지걸(高志屹)의 처 김성(金姓), 삼척(三陟) 고 공생 김윤근(金允瑾)의 처 남성(南姓), 재령(載寧) 고 업무(業武) 손언장(孫彦章)의 처 한씨(韓氏), 장연(長淵) 고 사인            박한성(朴漢成)의 처 김씨, 서흥(瑞興) 고 사인            신재순(申在舜)의 처 유씨(柳氏), 해주(海州) 고 영리(營吏) 지상함(池相涵)의 처 김성(金姓), 의주(義州) 고 사인            백광련(白光鍊)의 처 최씨, 곽산(郭山) 고 학생 지덕룡(池德龍)의 처 김씨, 삼등(三登) 고 통덕랑            주평(朱坪)의 처 김씨, 강계(江界) 고 학생 김성삼(金省三)의 처 김씨, 평양(平壤) 고 사인            김이곤(金理坤)의 처 이씨, 개천(价川) 고 사인            이일초(李日初)의 처 김씨, 영흥(永興) 고 학생 김왕추(金旺秋)의 처 장씨(張氏), 함흥(咸興)의 고 학생 이종눌(李宗訥)의 처 김씨·고 학생 한명갑(韓命甲)의 처 진씨(秦氏)·고 급제(及第) 유혜중(柳惠重)의 처 이씨, 삼수(三水) 전 권관(權管)            김성정(金聖鼎)의 처 박씨, 부령(富寧) 출신(出身) 이원배(李元培)의 자부(子婦) 장씨(張氏)·양씨(楊氏), 이원(利原) 고 무인 연재협(延再協)의 처 엄씨(嚴氏)이다.】 효부 정려질(孝婦旌閭秩)          【서울에 사는 고 현령            홍헌유(洪獻猷)의 처 이씨, 예천(禮泉) 고 사인            이진헌(李鎭憲)의 처 권씨(權氏)이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영동(永同)의 고 목사(牧使)            이수(李洙)는 기사년 곤전(坤殿)께서 손위(遜位)하셨을 때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폐(廢)했던 사람이다. 청도(淸道)의 고 만호(萬戶)            박경선(朴慶宣)·고 장사랑(將仕郞)            박경인(朴慶因)은 왜변(倭變) 때 의병을 일으켜 전사(戰死)했던 사람이다. 안의(安義)의 고 사인            전우석(全虞錫)은 무신년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변 때 창의(倡義)하여 역적을 잡았던 사람이다. 대구(大丘)의 고 부장(副將)            허득량(許得良)과 그의 종제(從弟) 고 정(正) 허복량(許復良)은 정축년 노변(虜變) 때 경상 병사            민영(閔栐)을 따라 쌍령(雙嶺)에서 전사했던 사람이다. 고 현령 최계(崔誡)와 그 아우 최인(崔認)과 그 종자(從子) 최동보(崔東輔)는 왜변 때 창의하여 공을 쌓은 사람이다. 밀양(密陽)의 고 참의(參議)            손조서(孫肇瑞)는 단묘(端廟) 때 육신(六臣)의 일이 있고 난 뒤 뉘우치고 스스로 폐기(廢棄)했던 사람이다. 상주(尙州)의 고 처사(處士) 채득기(蔡得沂)는 정축년에 남한 산성에서 내려온뒤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스로 깨끗함을 지켰던 사람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 사는 고 지사(知事)            황운하(黃運河)·고 학생 유해균(柳海均)·고 남학 교수(南學敎授)            현계정(玄啓楨)·고 학생 이혼(李混)·고 감역(監役)            김정주(金鼎柱)·고 학생 심사정(沈師定)·고 사인            홍병오(洪秉五)·고 서윤(庶尹)            홍계서(洪啓瑞)·고 동지(同知)            이사룡(李思龍), 수원부(水原府) 고 참봉(參奉)            윤형로(尹衡老), 양주(楊州) 고 학생 이삼석(李三錫), 장단(長湍) 고 사인            한광세(韓光世), 양천(陽川) 고 통덕랑            김숭제(金嵩濟), 부여(扶餘) 고 사인            최사백(崔賜百), 영동(永同) 고 사인            최복원(崔復源), 목천(木川) 고 정랑(正郞)            조명(趙銘), 공주(公州) 고 사인            윤박(尹搏), 서원(西原) 고 사인            송상휘(宋尙輝)·홍귀서(洪龜瑞), 진천(鎭川) 고 통덕랑            정도(鄭棹), 전주(全州) 고 사인            조대수(趙大壽)·이진운(李鎭運), 영암(靈巖) 고 직장(直長)            신사준(愼師浚), 장수(長水) 고 동지            김성보(金聖輔), 능주(綾州) 고 사인            박헌가(朴獻可), 고부(古阜) 고 사인            송수현(宋守賢), 금구(金溝) 고 사인            송정모(宋廷模), 지례(知禮) 고 사인            이수호(李遂浩), 함창(咸昌) 고 사인            조수구(趙守球), 고성(固城) 고 사인            백봉래(白鳳來), 영월(寧越) 고 사인            엄계태(嚴啓泰), 강릉(江陵) 고 사인            신갑동(辛甲東)·고 생원 최현민(崔顯珉), 성천(成川) 고 현감            나홍점(羅弘漸), 강서(江西)고 학생 한태형(韓泰亨), 상원(祥原) 고 학생 방덕일(方德一), 중화(中和) 고 학생 한창대(韓昌岱), 용강(龍岡) 고 사인            김진수(金震秀), 삼화(三和) 고 사인            김처겸(金處謙)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1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          【서울 사는 고 사인            강언성(姜彦成)의 처 이씨(李氏)·고 학생 이원식(李元植)의 처 최씨(崔氏)·고 통덕랑            김노직(金魯直)의 처 송씨(宋氏)·고 교관            홍석보(洪碩普)의 처 조씨(曹氏)·고 학생 이철운(李轍運)의 처 유씨(柳氏)·고 생원 홍헌모(洪憲謨)의 처 윤씨·고 사인            임우전(林雨田)의 처 정씨(鄭氏)·고 한량 김유항(金有恒)의 처 신씨(辛氏)와 고 학생 장후근(張厚根)의 처 이씨·고 군수            정문재(鄭文在)의 처 김씨·무의공(武毅公)            조심태(趙心泰)의 처 송씨·고 생원 정우영(鄭祐榮)의 처 윤씨·고 헌납            정지원(丁志元)의 처 이씨·고 목사            홍술조(洪述祖)의 처 이씨·고 생원 조의철(趙宜喆)의 처 이씨·고 학생 서경보(徐慶輔)의 처 김씨·고 현령 남성로(南省老)의 처 조씨(趙氏)·양인 김세봉(金世鳳)의 처 박성(朴姓)·고 학생 박종건(朴宗謇)의 처 김씨·고 동지            이사룡(李思龍)의 처 고씨(高氏)·고 학생 이장철(李章喆)의 처 송씨, 개성부 고 학생 진득충(秦得忠)의 처 임씨(林氏), 고 사인            이영필(李英弼)의 처 김씨와 그의 종질(從姪)인 이응번(李應蕃)의 처 김씨, 영평(永平) 고 학생 김순인(金順仁)의 처 변씨(邊氏), 안산(安山) 고 사인            이도용(李道容)의 처 김씨, 적성(積城) 고 학생 경육(慶焴)의 처 남씨(南氏), 파주(坡州) 고 사인            김한규(金漢奎)의 처 조씨(趙氏), 통진(通津) 고 주부            윤재익(尹在益)의 처 이씨, 과천(果川) 고 학생 홍유룡(洪有龍)의 처 전씨(全氏), 양주(楊州) 고 사인            홍선영(洪善泳)의 처 조씨(曹氏), 여주(驪州) 고 학생 이광모(李光模)의 처 박씨·고사인 권순건(權順健)의 처 이씨, 연산(連山) 고 사인            백상준(白尙準)의 처 송씨, 서원(西原) 고 사인            오세환(吳世煥)의 처 김씨, 목천(木川) 고 사인            남섭(南燮)의 처 김씨, 공주(公州) 고 부사            유회원(柳晦源)의 처 김씨와 고 사인            이익선(李翼善)의 처 한씨(韓氏), 회덕(懷德) 고 충목공(忠穆公)            이시직(李時稷)의 처 이씨, 홍산(鴻山) 고 처녀 윤씨, 익산(益山) 고 사인            권시하(權時夏)의 처 조씨(趙氏), 창평(昌平) 고 사인            양학언(梁學彦)의 처 이씨, 남평(南平) 고 양인 박처준(朴處俊)의 처 김성(金姓), 함평(咸平) 고 부장(部將)            윤해(尹海)의 처 강씨(康氏)와 고 사인            김석규(金碩圭)의 처 진씨(陳氏), 무안(務安) 고 사인            서익천(徐益天)의 처 정씨(鄭氏), 남원(南原) 고 사인            김익(金釴)의 처 이씨, 고부(古阜) 고 사인            김방수(金芳洙)의 처 정씨(丁氏), 동복(同福) 고 양인 정쌍룡(鄭雙龍)의 처 이성(李姓), 창녕(昌寧) 고 사인            성효열(成孝悅)의 처 손씨(孫氏), 경주(慶州) 관노(官奴) 현옥(顯玉)의 처 황아(黃娥), 안의(安義) 고 사인            전세적(全世績)의 처 허씨(許氏), 영덕(盈德) 고 사인            신길환(申吉煥)의 처 권씨(權氏), 선산(善山) 사노(私奴) 복재(卜才)의 처 김녀(金女), 밀양(密陽) 고 사인            이석린(李錫麟)의 처 박씨, 통천(通川) 고 사인            임붕원(林鵬遠)의 처 고씨(高氏), 원주(原州) 고 사인            권유(權愉)의 처 원씨(元氏), 금성(金城) 고 사인            배정로(裵廷老)의 처 진씨(秦氏), 금화(金化) 고 사인            이한유(李漢裕)의 처 한씨(韓氏), 횡성(橫城) 고 사인            김광한(金光漢)의 처 원씨(元氏), 정선(旌善) 고 공생(貢生)            고지걸(高志屹)의 처 김성(金姓), 삼척(三陟) 고 공생 김윤근(金允瑾)의 처 남성(南姓), 재령(載寧) 고 업무(業武) 손언장(孫彦章)의 처 한씨(韓氏), 장연(長淵) 고 사인            박한성(朴漢成)의 처 김씨, 서흥(瑞興) 고 사인            신재순(申在舜)의 처 유씨(柳氏), 해주(海州) 고 영리(營吏) 지상함(池相涵)의 처 김성(金姓), 의주(義州) 고 사인            백광련(白光鍊)의 처 최씨, 곽산(郭山) 고 학생 지덕룡(池德龍)의 처 김씨, 삼등(三登) 고 통덕랑            주평(朱坪)의 처 김씨, 강계(江界) 고 학생 김성삼(金省三)의 처 김씨, 평양(平壤) 고 사인            김이곤(金理坤)의 처 이씨, 개천(价川) 고 사인            이일초(李日初)의 처 김씨, 영흥(永興) 고 학생 김왕추(金旺秋)의 처 장씨(張氏), 함흥(咸興)의 고 학생 이종눌(李宗訥)의 처 김씨·고 학생 한명갑(韓命甲)의 처 진씨(秦氏)·고 급제(及第) 유혜중(柳惠重)의 처 이씨, 삼수(三水) 전 권관(權管)            김성정(金聖鼎)의 처 박씨, 부령(富寧) 출신(出身) 이원배(李元培)의 자부(子婦) 장씨(張氏)·양씨(楊氏), 이원(利原) 고 무인 연재협(延再協)의 처 엄씨(嚴氏)이다.】 효부 정려질(孝婦旌閭秩)          【서울에 사는 고 현령            홍헌유(洪獻猷)의 처 이씨, 예천(禮泉) 고 사인            이진헌(李鎭憲)의 처 권씨(權氏)이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영동(永同)의 고 목사(牧使)            이수(李洙)는 기사년 곤전(坤殿)께서 손위(遜位)하셨을 때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폐(廢)했던 사람이다. 청도(淸道)의 고 만호(萬戶)            박경선(朴慶宣)·고 장사랑(將仕郞)            박경인(朴慶因)은 왜변(倭變) 때 의병을 일으켜 전사(戰死)했던 사람이다. 안의(安義)의 고 사인            전우석(全虞錫)은 무신년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변 때 창의(倡義)하여 역적을 잡았던 사람이다. 대구(大丘)의 고 부장(副將)            허득량(許得良)과 그의 종제(從弟) 고 정(正) 허복량(許復良)은 정축년 노변(虜變) 때 경상 병사            민영(閔栐)을 따라 쌍령(雙嶺)에서 전사했던 사람이다. 고 현령 최계(崔誡)와 그 아우 최인(崔認)과 그 종자(從子) 최동보(崔東輔)는 왜변 때 창의하여 공을 쌓은 사람이다. 밀양(密陽)의 고 참의(參議)            손조서(孫肇瑞)는 단묘(端廟) 때 육신(六臣)의 일이 있고 난 뒤 뉘우치고 스스로 폐기(廢棄)했던 사람이다. 상주(尙州)의 고 처사(處士) 채득기(蔡得沂)는 정축년에 남한 산성에서 내려온뒤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스로 깨끗함을 지켰던 사람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 사는 고 지사(知事)            황운하(黃運河)·고 학생 유해균(柳海均)·고 남학 교수(南學敎授)            현계정(玄啓楨)·고 학생 이혼(李混)·고 감역(監役)            김정주(金鼎柱)·고 학생 심사정(沈師定)·고 사인            홍병오(洪秉五)·고 서윤(庶尹)            홍계서(洪啓瑞)·고 동지(同知)            이사룡(李思龍), 수원부(水原府) 고 참봉(參奉)            윤형로(尹衡老), 양주(楊州) 고 학생 이삼석(李三錫), 장단(長湍) 고 사인            한광세(韓光世), 양천(陽川) 고 통덕랑            김숭제(金嵩濟), 부여(扶餘) 고 사인            최사백(崔賜百), 영동(永同) 고 사인            최복원(崔復源), 목천(木川) 고 정랑(正郞)            조명(趙銘), 공주(公州) 고 사인            윤박(尹搏), 서원(西原) 고 사인            송상휘(宋尙輝)·홍귀서(洪龜瑞), 진천(鎭川) 고 통덕랑            정도(鄭棹), 전주(全州) 고 사인            조대수(趙大壽)·이진운(李鎭運), 영암(靈巖) 고 직장(直長)            신사준(愼師浚), 장수(長水) 고 동지            김성보(金聖輔), 능주(綾州) 고 사인            박헌가(朴獻可), 고부(古阜) 고 사인            송수현(宋守賢), 금구(金溝) 고 사인            송정모(宋廷模), 지례(知禮) 고 사인            이수호(李遂浩), 함창(咸昌) 고 사인            조수구(趙守球), 고성(固城) 고 사인            백봉래(白鳳來), 영월(寧越) 고 사인            엄계태(嚴啓泰), 강릉(江陵) 고 사인            신갑동(辛甲東)·고 생원 최현민(崔顯珉), 성천(成川) 고 현감            나홍점(羅弘漸), 강서(江西)고 학생 한태형(韓泰亨), 상원(祥原) 고 학생 방덕일(方德一), 중화(中和) 고 학생 한창대(韓昌岱), 용강(龍岡) 고 사인            김진수(金震秀), 삼화(三和) 고 사인            김처겸(金處謙)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1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효부 정려질(孝婦旌閭秩)          【서울에 사는 고 현령            홍헌유(洪獻猷)의 처 이씨, 예천(禮泉) 고 사인            이진헌(李鎭憲)의 처 권씨(權氏)이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영동(永同)의 고 목사(牧使)            이수(李洙)는 기사년 곤전(坤殿)께서 손위(遜位)하셨을 때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폐(廢)했던 사람이다. 청도(淸道)의 고 만호(萬戶)            박경선(朴慶宣)·고 장사랑(將仕郞)            박경인(朴慶因)은 왜변(倭變) 때 의병을 일으켜 전사(戰死)했던 사람이다. 안의(安義)의 고 사인            전우석(全虞錫)은 무신년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변 때 창의(倡義)하여 역적을 잡았던 사람이다. 대구(大丘)의 고 부장(副將)            허득량(許得良)과 그의 종제(從弟) 고 정(正) 허복량(許復良)은 정축년 노변(虜變) 때 경상 병사            민영(閔栐)을 따라 쌍령(雙嶺)에서 전사했던 사람이다. 고 현령 최계(崔誡)와 그 아우 최인(崔認)과 그 종자(從子) 최동보(崔東輔)는 왜변 때 창의하여 공을 쌓은 사람이다. 밀양(密陽)의 고 참의(參議)            손조서(孫肇瑞)는 단묘(端廟) 때 육신(六臣)의 일이 있고 난 뒤 뉘우치고 스스로 폐기(廢棄)했던 사람이다. 상주(尙州)의 고 처사(處士) 채득기(蔡得沂)는 정축년에 남한 산성에서 내려온뒤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스로 깨끗함을 지켰던 사람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 사는 고 지사(知事)            황운하(黃運河)·고 학생 유해균(柳海均)·고 남학 교수(南學敎授)            현계정(玄啓楨)·고 학생 이혼(李混)·고 감역(監役)            김정주(金鼎柱)·고 학생 심사정(沈師定)·고 사인            홍병오(洪秉五)·고 서윤(庶尹)            홍계서(洪啓瑞)·고 동지(同知)            이사룡(李思龍), 수원부(水原府) 고 참봉(參奉)            윤형로(尹衡老), 양주(楊州) 고 학생 이삼석(李三錫), 장단(長湍) 고 사인            한광세(韓光世), 양천(陽川) 고 통덕랑            김숭제(金嵩濟), 부여(扶餘) 고 사인            최사백(崔賜百), 영동(永同) 고 사인            최복원(崔復源), 목천(木川) 고 정랑(正郞)            조명(趙銘), 공주(公州) 고 사인            윤박(尹搏), 서원(西原) 고 사인            송상휘(宋尙輝)·홍귀서(洪龜瑞), 진천(鎭川) 고 통덕랑            정도(鄭棹), 전주(全州) 고 사인            조대수(趙大壽)·이진운(李鎭運), 영암(靈巖) 고 직장(直長)            신사준(愼師浚), 장수(長水) 고 동지            김성보(金聖輔), 능주(綾州) 고 사인            박헌가(朴獻可), 고부(古阜) 고 사인            송수현(宋守賢), 금구(金溝) 고 사인            송정모(宋廷模), 지례(知禮) 고 사인            이수호(李遂浩), 함창(咸昌) 고 사인            조수구(趙守球), 고성(固城) 고 사인            백봉래(白鳳來), 영월(寧越) 고 사인            엄계태(嚴啓泰), 강릉(江陵) 고 사인            신갑동(辛甲東)·고 생원 최현민(崔顯珉), 성천(成川) 고 현감            나홍점(羅弘漸), 강서(江西)고 학생 한태형(韓泰亨), 상원(祥原) 고 학생 방덕일(方德一), 중화(中和) 고 학생 한창대(韓昌岱), 용강(龍岡) 고 사인            김진수(金震秀), 삼화(三和) 고 사인            김처겸(金處謙)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1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영동(永同)의 고 목사(牧使)            이수(李洙)는 기사년 곤전(坤殿)께서 손위(遜位)하셨을 때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폐(廢)했던 사람이다. 청도(淸道)의 고 만호(萬戶)            박경선(朴慶宣)·고 장사랑(將仕郞)            박경인(朴慶因)은 왜변(倭變) 때 의병을 일으켜 전사(戰死)했던 사람이다. 안의(安義)의 고 사인            전우석(全虞錫)은 무신년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변 때 창의(倡義)하여 역적을 잡았던 사람이다. 대구(大丘)의 고 부장(副將)            허득량(許得良)과 그의 종제(從弟) 고 정(正) 허복량(許復良)은 정축년 노변(虜變) 때 경상 병사            민영(閔栐)을 따라 쌍령(雙嶺)에서 전사했던 사람이다. 고 현령 최계(崔誡)와 그 아우 최인(崔認)과 그 종자(從子) 최동보(崔東輔)는 왜변 때 창의하여 공을 쌓은 사람이다. 밀양(密陽)의 고 참의(參議)            손조서(孫肇瑞)는 단묘(端廟) 때 육신(六臣)의 일이 있고 난 뒤 뉘우치고 스스로 폐기(廢棄)했던 사람이다. 상주(尙州)의 고 처사(處士) 채득기(蔡得沂)는 정축년에 남한 산성에서 내려온뒤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스로 깨끗함을 지켰던 사람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 사는 고 지사(知事)            황운하(黃運河)·고 학생 유해균(柳海均)·고 남학 교수(南學敎授)            현계정(玄啓楨)·고 학생 이혼(李混)·고 감역(監役)            김정주(金鼎柱)·고 학생 심사정(沈師定)·고 사인            홍병오(洪秉五)·고 서윤(庶尹)            홍계서(洪啓瑞)·고 동지(同知)            이사룡(李思龍), 수원부(水原府) 고 참봉(參奉)            윤형로(尹衡老), 양주(楊州) 고 학생 이삼석(李三錫), 장단(長湍) 고 사인            한광세(韓光世), 양천(陽川) 고 통덕랑            김숭제(金嵩濟), 부여(扶餘) 고 사인            최사백(崔賜百), 영동(永同) 고 사인            최복원(崔復源), 목천(木川) 고 정랑(正郞)            조명(趙銘), 공주(公州) 고 사인            윤박(尹搏), 서원(西原) 고 사인            송상휘(宋尙輝)·홍귀서(洪龜瑞), 진천(鎭川) 고 통덕랑            정도(鄭棹), 전주(全州) 고 사인            조대수(趙大壽)·이진운(李鎭運), 영암(靈巖) 고 직장(直長)            신사준(愼師浚), 장수(長水) 고 동지            김성보(金聖輔), 능주(綾州) 고 사인            박헌가(朴獻可), 고부(古阜) 고 사인            송수현(宋守賢), 금구(金溝) 고 사인            송정모(宋廷模), 지례(知禮) 고 사인            이수호(李遂浩), 함창(咸昌) 고 사인            조수구(趙守球), 고성(固城) 고 사인            백봉래(白鳳來), 영월(寧越) 고 사인            엄계태(嚴啓泰), 강릉(江陵) 고 사인            신갑동(辛甲東)·고 생원 최현민(崔顯珉), 성천(成川) 고 현감            나홍점(羅弘漸), 강서(江西)고 학생 한태형(韓泰亨), 상원(祥原) 고 학생 방덕일(方德一), 중화(中和) 고 학생 한창대(韓昌岱), 용강(龍岡) 고 사인            김진수(金震秀), 삼화(三和) 고 사인            김처겸(金處謙)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1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          【서울 사는 고 지사(知事)            황운하(黃運河)·고 학생 유해균(柳海均)·고 남학 교수(南學敎授)            현계정(玄啓楨)·고 학생 이혼(李混)·고 감역(監役)            김정주(金鼎柱)·고 학생 심사정(沈師定)·고 사인            홍병오(洪秉五)·고 서윤(庶尹)            홍계서(洪啓瑞)·고 동지(同知)            이사룡(李思龍), 수원부(水原府) 고 참봉(參奉)            윤형로(尹衡老), 양주(楊州) 고 학생 이삼석(李三錫), 장단(長湍) 고 사인            한광세(韓光世), 양천(陽川) 고 통덕랑            김숭제(金嵩濟), 부여(扶餘) 고 사인            최사백(崔賜百), 영동(永同) 고 사인            최복원(崔復源), 목천(木川) 고 정랑(正郞)            조명(趙銘), 공주(公州) 고 사인            윤박(尹搏), 서원(西原) 고 사인            송상휘(宋尙輝)·홍귀서(洪龜瑞), 진천(鎭川) 고 통덕랑            정도(鄭棹), 전주(全州) 고 사인            조대수(趙大壽)·이진운(李鎭運), 영암(靈巖) 고 직장(直長)            신사준(愼師浚), 장수(長水) 고 동지            김성보(金聖輔), 능주(綾州) 고 사인            박헌가(朴獻可), 고부(古阜) 고 사인            송수현(宋守賢), 금구(金溝) 고 사인            송정모(宋廷模), 지례(知禮) 고 사인            이수호(李遂浩), 함창(咸昌) 고 사인            조수구(趙守球), 고성(固城) 고 사인            백봉래(白鳳來), 영월(寧越) 고 사인            엄계태(嚴啓泰), 강릉(江陵) 고 사인            신갑동(辛甲東)·고 생원 최현민(崔顯珉), 성천(成川) 고 현감            나홍점(羅弘漸), 강서(江西)고 학생 한태형(韓泰亨), 상원(祥原) 고 학생 방덕일(方德一), 중화(中和) 고 학생 한창대(韓昌岱), 용강(龍岡) 고 사인            김진수(金震秀), 삼화(三和) 고 사인            김처겸(金處謙)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1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3월 14일 병술

약원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의 환후가 점차 회복되는 기쁨이 있었으므로 의관 등이 귀비탕(歸脾湯)을 의정(議定)하여 올렸다.

 

3월 15일 정해

차대하였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며칠 전의 서보(西報)에 관군이 이(利)를 잃었다고 했습니다. 궁한 도적이 궤돌(潰突)함은 병가에서 경계하는 것이니, 각진에서 만약 멀리 정료(偵瞭)를 설치하여 먼저 계엄을 일삼았더라면 어찌 죽기를 무릅쓴 적들이 감히 허점을 탈 계책을 부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급할 때 임하여 잘 대응하지 못하여 끝내 사상자가 과당한 데 이르렀으니, 함종 부사 윤욱렬(尹郁烈)은 적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중하게 논하여 감단하게 하소서. 그리고 순무 중군의 경우 만약 단속하는 것이 마땅함을 얻어 변고의 대응에 잘못이 없었다면, 어찌 적이 맨 앞의 진을 습격하는데도 까마득히 살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있었겠습니까? 청컨대 함사(緘辭)로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평안 병사가 8일에 함종 부사의 진이 겁략(劫掠)당할 때 여러 고을의 군병(軍兵) 중 사상자(死傷者)의 수효를 아뢰었는데, 그 가운데 강서(江西)의 장관(將官)인 이인보(李仁輔)는 그의 아들 이시택(李時宅)과, 안주(安州)의 출신(出身) 김득권(金得權)은 그 아들 김학엽(金學燁)과 함께 부자가 모두 죽었다. 하교하기를,
"종정(從征)한 장졸 중에 사상자의 숫자가 이처럼 많으니, 지극히 불쌍하게 생각한다. 그 가운데서 부자가 함께 죽은 경우는 더욱 측은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관문(關文)을 뛰우고 전례를 상고해 즉시 휼전(恤典)을 지급하여 처자를 위로토록 하라."
하였다.

 

추국하였다.

 

3월 16일 무자

추국하였다.

 

3월 17일 기축

추국하였다.

 

이에 앞서 한성 판윤(漢城判尹) 김이익(金履翼)이 진소(陳疏)하여 말하기를,
"사도(四都)의 유개(流丐) 중 서울에 온 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니, 사대문(四大門) 밖의 넓고 빈 땅에다 몇 칸의 움을 지어 가장 불쌍한 무리들을 모아 들어가 살게 하고, 이어 진휼청으로 하여금 그 사람 수를 헤아려 죽을 쑤어 진휼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묘당으로 하여금 시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에 와서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서울에서 진휼한 전례는 예전에는 있었지만 요사이는 없었으니, 계축년068)  ·갑인년069)  의 흉년에도 또한 일찍이 진휼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재 가까운 도의 주린 백성들이 서울로 많이 몰려들고 있으니, 진휼해 구제할 방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오부(五部)로 하여금 성 안팎의 유민(流民)을 초출(抄出)하게 했더니, 남녀 어른과 아이들이 2백 40여 명이었습니다. 청컨대 진휼청으로 하여금 툭 트이고 넓은 공해(公廨)에 불러 모아 죽을 쑤어 나누어 주고, 양식과 노자를 넉넉히 주게 하되, 차원(差員)을 정해 진휼을 실시하는 각 고을에 영부(領付)하여 원래의 진휼한 백성과 더불어 꼭 같은 예로 진궤(賑饋)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진휼청에서 아뢰기를,
"각도 유민의 수가 4백 13명이었는데, 추후에 풍문을 듣고 와서 모인 부류가 서울과 시골을 논할 것 없이 거의 3천여 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결같이 모두 죽을 먹인 뒤에 향민(鄕民)을 초출(抄出)하여 내일 다시 죽을 한 차례 먹이고 이어 건량(乾糧)을 지급해 각도로 되돌려 보내려고 합니다."
하였다. 비국에서 또 아뢰기를,
"진휼을 실시한 고을로 나누어 보낸 유민 외에 성 안팎에 머무르고 있는 자들 또한 많은데, 돌림병이 크게 번져 사망한 자가 없지 않으니, 해당 부(府)로 하여금 적간(摘奸)하여 진청에 보고해 매장(埋葬) 비용을 갖추어 주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3월 19일 신묘

평안 병사가 대역 부도 죄인(大逆不道罪人) 조문형(趙文亨)을 효수하였다고 아뢰었다. 조문형은 애초 적도로서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베어왔는데, 죄인 김익순(金益淳)이 천금(千金)을 주겠다는 수기(手記)로 그 수급을 억지로 팔게 하고는 와서 바쳤는데, 도의 조사에서 그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3월 20일 임진

돌아온 사신을 불러 보았다.

 

대호군(大護軍) 신대현(申大顯)이 졸(卒)하였다.

 

3월 22일 갑오

박종경(朴宗慶)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3월 24일 병신

추국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이 아뢰기를,
"돌아오는 사신 행차 중에 연복(延卜)을 〈호위하는〉 수장교(首將校)의 수본(手本)에는 ‘웅악 부도통(熊岳副都統) 녹성(綠成)이 성경 장군(盛京將軍)의 차칙(箚飭)으로 인해 군병을 거느리고 각 변문(邊門)을 지킬 요량으로 이달 17일에 봉성(鳳城)에 도착하는데, 19일에는 책문(柵門) 안에 당도할 것’이라고 하였고, 또 상유(上諭) 및 성경 장군의 차칙 공문(箚飭公文) 각 1통을 구해서 베껴 보내었으므로, 비변사에 올려 보냅니다. 3월 8일에 받든 상유에는 이르기를, ‘조선은 본조(本朝)에 신복(臣服)한 것이 가장 공순(恭順)하였는데, 이번에 토적(土賊)이 무리를 불러 모아 성에 웅거하여 겁략(劫掠)을 행하고 있으니, 이제 의주 부윤이 보낸 보고를 보건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어렵다. 조선과 봉황성(鳳凰城)은 변계(邊界)를 접하고 있는 것이 단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다. 성경 장군 화녕(和寧)이 비록 봉황성 수위(鳳凰城守尉) 복녕(福寧)과 협령(協領) 주개가(周凱歌)로 하여금 변병(弁兵)을 중강(中江) 연변의 험로(險路)에 파견하여 순찰하고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조선은 번봉(藩封)을 수비하고 있는터라 마땅히 넉넉하게 더 돌보아 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봉황성 수위 복녕이 홀로 방어하기란 어려울 것이니 재차 웅악 부도통 녹성을 파견하되, 중강 연변의 험로 여덟 곳에 변병을 은밀히 파견하여 들어가 있도록 했으니, 순찰을 빈틈없이 엄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적비(賊匪)들이 혹 변계로 달아나 들어올 경우, 그 생김새와 옷차림으로 쉽게 분변할 수 있을 것이니, 즉시 사로잡아 정형(情形)을 신문하고는, 한편으로는 장군에게 분명하게 보고하고, 주보(奏報)하도록 하라. 그리고 나서는 곧 풀어 조선에 회부해 스스로 처리하게 할 것이며, 조선에서 토적을 토벌했다는 보고를 기다렸다가 즉시 철수하는 것이 옳다. 장군 아문(將軍衙門)에 차칙(箚飭)하여 급히 칙문대로 준행해야 할 일이다.’라고 하였으며, 우병사(右兵司)에게 안정(案呈)한, 올해 3월 8일에 승준(承準)하여 군기 대신(軍機大臣)의 자호(字號)를 붙인 글의 내용에는 이르기를, ‘가경(嘉慶) 17년 3월 4일 상유(上諭)를 받들었는데, 이르기를, 「화등(和等)의 주보(奏報)를 받았다. 조선국 의주 부윤의 치보에 의거하건대, 조선의 경내에 토적이 늘어나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 하니, 마땅히 속히 봉황성의 복녕에게 신칙하여 은밀히 관병을 변문(邊門)과 강 연안 각각의 험한 곳에 관병을 파견토록 해 순사(巡査)·방수(防守)하게 하고 방어를 엄밀하게 하는 등의 절차를 일차 상주(上奏)토록 하라. 조선은 본 조정에 신복(臣服)한 것이 가장 공순하였는데, 이번에 조선에 토적이 발생하여 무리를 불러 모아 성에 웅거한 채 겁략을 행하고 있으니, 이제 조선에서 초포(剿捕)한 정황에 대해 보낸 보고를 보건대, 대수롭게 여길 수 없다. 조선과 봉황성은 변경을 접하고 있는 것이 다만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니, 그곳의 토적이 토벌를 당해 아주 긴급하게 되면 혹 도망을 쳐 강을 몰래 건너 밤늦게 변문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그래서 화등이 비록 봉황성 수위 복녕에게 신칙하여 관병을 은밀히 파견하고 순사·방수토록 하였으나, 복녕 한 사람의 독판(督辦)으로는 힘을 얻기 어려울 듯하기에, 녹성을 파견해 봉황성으로 가서, 변병을 독솔(督率)하여 변문 및 강 연안 일대를 엄밀히 순사·방수케 하라. 만약 조선국의 토적이 몰래 들어올 경우, 그 생김새나 옷차림을 분변해 알기 쉬울 것이니, 즉시 사로잡아 정황을 대강 신문한 뒤, 한편으로는 장군에게 분명하게 보고하여 사유를 갖추어 아뢰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적비(賊匪)를 변경까지 데리고 가서 조선에 회부하여 압송해 돌아가 스스로 처리하게 하라. 아울러 각처의 변문과 험한 곳을 지키는 관변(官弁)에게 엄하게 주의 시켜 한 사람의 토적이라도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게 하라. 조선은 오랫동안 번봉(藩封)을 수비하고 있는터라 마땅히 넉넉하게 더 돌보아 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녹성은 유지(諭旨)를 받들거든 즉시 그대로 처리함이 옳다. 이와 같이 녹성에게 유지를 전하고, 아울러 화등에게도 유시해 알게 하라」 하셨는데, 삼가 이대로 준행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편지를 보낼 경우, 웅악 부도통 아문(衙門)으로 유지(諭旨)에 의거해 엄밀하게 방수(防守)토록 하는 일을 준행하는 것에 대한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총순(摠巡)과 각 험한 곳을 맡고 있는 협령(協領)들에게 일체 엄밀하게 순방할 것을 모두 주의 시키도록 할 것이며, 아울러 복주(復州)에도 차칙(箚飭)하라. 지금 수암성 수위(岫巖城守尉), 수사영(水師營), 개주 협령(盖州協領) 및 성창(城廠), 애양(愛陽), 왕청(汪淸), 영액(英額), 봉황변(鳳凰邊) 등 다섯 변문(邊門)의 장경 위원(章京委員)은 주개가(周凱歌)를 도와 힘을 다해 조사하라. 그리고 봉황성 수위에게 차칙(箚飭)하여 조선국에서 토적을 평정하는 일을 끝냈는지를 탐지해 급히 보고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책문에 머무르고 있는 군사들의 장교의 수본(手本)에는 ‘부도통이 이 달 19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책문에 도착하였습니다. 데리고 온 정병(精兵)은 5백 명인데, 1백 명은 잠시 봉황성에 머물게 하고, 3백 명은 삼도(三道)의 낭두(浪頭)에 각각 파견해 보내 독어(督禦)에 대비하였으며, 1백 명은 부도통과 협령 주개가가 직접 거느리고 책문을 나가 21일에 중강(中江)에 도착한 후 정주(定州)의 토적(土賊)들을 평정했는 지 여부를 의주 부윤과 강을 사이에 두고 문답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황경(皇京)의 도통(都統)이 군사를 거느리고 강 어귀에 와서 머무르고 있다고 하니, 접대하는 등의 절차를 묘당으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해 여쭈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영조(英祖)병인년070)  에 목책(木柵)이 무너진 것을 살피는 일로 연경(燕京)의 병부 상서(兵部尙書)가 책문으로 나왔으므로, 특별히 평안 병사를 파견하여 소와 술로 노고를 위문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부도통으로 직급이 아주 다르니, 청컨대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보내어 중강으로 달려가 노고를 위문한 뒤 소와 술을 갖추어 거느리고 온 군사들에게 나누어 먹이게 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5일 정유

평안 병사가 아뢰기를,
"순무 중군이 보낸 첩보에 ‘이달 20일에 적도가 서북문으로부터 나와 목책(木柵) 안에 둔(屯)을 쳤는데, 그 수는 약 1천 명 안팎이었습니다. 의병장 허항(許沆)이 앞장서서 적진으로 돌입하여 손에 칼을 들고 적을 베자 향하는 곳마다 풀처럼 쓰러졌는데, 적도가 뒤에서 말을 찌르자 말이 꼬꾸라지며 땅에 쓰러졌고 이어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적들이 마침내 무리를 몰아 목책을 나와서 막바로 함종 부사의 진을 핍박하자, 해당 진에서는 한편으로 막아 싸우면서 한편으로 경보를 띄워 초관(哨官)        손태영(孫泰永)으로 하여금 해초(該哨)의 군사와 강계(江界)의 포수(砲手) 1초 및 마병(馬兵) 50명을 거느리고 급히 달려와 구원하게 하였는데, 지름길로 길을 잡아 목책으로 들어가 목책에 의지하여 총을 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진에서 또 앞뒤로 총을 쏘아대니, 저녁 무렵에 적들이 무너져 성 안으로 들어갔고, 각진에서도 또한 군사를 거두어 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적도 중에 죽은 자는 48명이고, 빼앗은 것은, 갑의(甲衣) 2건, 조총 20자루, 방패 78부, 대완구(大碗口) 1좌였으며, 그 밖의 군기(軍器) 또한 심히 많았습니다. 관군 중에 죽은 자는 22명, 다친 자는 2명입니다. 허항은 매번 전투 때마다 앞에 서서 누차 탁월한 공을 세웠으니, 분연히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의 죽음은 비록 가볍게 진격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이기는 하나, 더욱 곧게 전진한 정성이 드러났습니다. 가상하게 여긴 나머지 참측(慘惻)한 마음을 잇게 되니, 관렴(棺殮)의 수요를 우선 도와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행영장(行營將)        정내홍(鄭來鴻)으로 그의 군사들을 대신 거느리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순천 부사(順天府使)의 진에서 즉시 앞을 향하여 돌격하지 않은 것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구원하는 뜻에 어김이 있습니다. 함종 부사와 순천 부사의 진이 이미 좌우의 지극히 가까운 땅을 끼고 모여 있었으니, 만약 능히 머리와 꼬리가 되어 서로 구원하여 힘을 합치고 세력을 도왔더라면 어찌 흉악한 놈들이 살아 있겠으며, 의사(義士)의 목숨을 버리게 만들었겠습니까? 두 진이 모두 두려워 위축되었던 잘못이 있습니다. 허항의 충절과 열기(烈氣)는 마땅히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허항은 분연히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나아가 적을 죽였으니, 충의가 늠연(凛然)071)                  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즉시 여쭈어 처리하게 하라. 그리고 허다한 군사들이 죽고 다쳤으니 측은하다. 또한 본도(本道)에 관문(關文)을 띄워 처자를 구휼하라."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만상(灣上)의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을 격려하여 의주(義州)를 온전히 보존하고, 청북(淸北)에 나누어 웅거하고 있던 적들을 치고 아울러 다시 선천(宣川)을 수복한 것은 곧 허항과 김견신(金見臣)의 공입니다. 또 만상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대진(大陣)에 이르렀으니, 드러나게 상을 주고 작위와 봉록을 더한들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허항은 이제 앞장서서 적에게로 나아가 죽음을 각오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말이 꼬꾸라진 뒤에도 오히려 다시 도보(徒步)로 힘써 싸워 잇달아 적 4명을 죽였는데, 뭇 칼날이 고슴도치 털처럼 박히자 곧장 앞으로 나가다 죽었다 하니, 그 의백(義魄)과 충혼(忠魂)은 비록 죽어도 죽지 않은 것입니다. 청컨대 특별히 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증직하고 이어 정려(旌閭)하고 후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소서. 그리고 지제교(知製敎)를 시켜 제문(祭文)을 찬술하게 하고,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하여금 돌아가 장사지내기 전에 강신하게 하여 조정에서 특별한 예로 포이(褒貤)하는 덕의(德意)를 보이게 하소서. 전투에서 죽은 군졸들은 모두 후하게 염습(殮襲)해 돌아가 장사를 지내게 하고, 그 처자를 넉넉하게 구휼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추국 죄인(推鞫罪人) 이진채(李振采)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경향간(京鄕間)에 출몰하면서 그릇된 도로 뭇사람들을 현혹시켰고, 이어 박종일(朴鍾一)·정우문(鄭友文)·한광우(韓光友)와 더불어 혈당(血黨)이 되었습니다. 혹은 박종일의 첩가(妾家)에 모였는가 하면, 혹은 정우문의 행랑에서 치밀한 계책을 꾸미기도 했는데, 경영(經營)하고 배포(排布)한 것이 흉역(凶逆)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심적(沁賊)의 동생의 한 아들을 기화(奇貨)로 삼아 두 글자의 흉언(凶言)을 난만하게 모의하고는, 먼저 인심을 선동할 계책을 꾸몄습니다. 정월 13일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할 수도 없고 차마 들을 수도 없는 흉언을 지어내어 문 밖의 여점(旅店)과 성 안의 저자거리 등 도처에서 창설(倡說)하여 일시에 떠들썩하게 전파시켰으며, ‘2만 명의 군량의 밑천’이란 데 가탁하여, 진신(搢紳)072)  들을 화공(火功)한다는 말을 허황되게 지어내었습니다. 내응자(內應者)에 대해 허풍을 칠 때에는 ‘환관·계집종과 체결(締結)하였다.’고 하였고, 신이(神異)를 가칭(假稱)할 때는 사람이름을 가짜로 지어내었습니다. 역적 이인(李䄄)의 아들을 업고 왔다고 하고는 ‘물이 발을 적시지 않았다.’ 하였고, 섬에 있는 죄수의 아우는 서로 용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손으로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소리가 있다.’, ‘형체가 없다.’, ‘일이 없다.’, ‘염려가 없다.’는 것을 흉도(凶徒)의 군호(軍號)로 삼았으며, 진월(辰月)·갑자(甲子), 묘월(卯月)·묘일(卯日)을 거사하는 기일로 지적했습니다. 참위(讖緯)의 글은 본디 요탄(妖誕)한 것인데, 부풀리고 부회(傅會)해서 뭇사람들을 유혹하는 패병(霸柄)073)   삼았습니다. 역적질을 한 정절(情節)을 자구(藉口)074)  하지 않음이 없으니, 대역 부도(大逆不道)임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3월 26일 무술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순무 중군이 보낸 첩보에 이르기를, ‘22일 닭이 울 무렵에 적도(賊徒)들이 동남문으로부터 몰래 나와 본진(本陣)에서 수백 보 떨어진 달천교(㺚川橋)에 이르러 복병을 시살(廝殺)하고, 횃불을 들고서 전진하여 영의 채(寨)075)  를 마구 부수면서 번갈아 화약을 던져 동남의 여러 막(幕)을 태웠으며, 북을 치고 소리치면서 사방을 에워싸니 화살과 돌이 비오는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좌초(左哨)는 남쪽 목책(木柵)을, 중초(中哨)는 동북쪽 목책을, 휘하의 장사(壯士) 및 향군(鄕軍)은 서쪽 목책을 막게 하고, 별기대(別騎隊)와 송도(松都)의 기사(騎士)는 목책 밖으로 돌격하게 하여, 적병과 더불어 서로 일진 일퇴하였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에 남북의 각진에서 일제히 달려와 엄살(掩殺)하자, 적도들이 흩어져 성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막아 지켰는데, 또한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이 많았습니다. 생포한 자는 87명, 참수(斬首)한 자가 69급(級)이었는데, 생포한 자는 즉시 진 앞에서 효수(梟首)했고, 마필(馬匹)과 기계(器械)도 빼앗은 것이 심히 많았습니다. 적의 초사(招辭)에는 ‘군량은 단지 49석의 잡곡만 남아 있으므로 대진(大陣)을 겁략하여 선천(宣川)이나 곽산(郭山)처럼 곡식이 많은 곳으로 옮겨가기로 계책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홍총각(洪總角)이란 자는 그저께 서성(西城) 전투에서 손바닥에 총탄을 맞아 나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진 앞에서 죽은 아군은 8명이고, 당복(塘伏)에서 죽은 사람은 9명이며, 다친 사람은 23명입니다. 흉적의 무리들이 보름 사이에 세 번 영(營)의 채(寨)를 겁략했으니, 그들이 양식이 떨어지고 힘이 군색하여 만 번 죽을 가운데서 한 번 살 계책을 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대채(大寨)를 겁략하였으니, 반드시 그들 중 사당(死黨)을 선발하였을 것인데, 잡히고 참수 당한 자가 1백 56명에 이르고, 궤산(潰散)한 자 또한 얼마인지 알지 못할 정도였으니, 반드시 형세가 단약(單弱)하여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오랫동안 버티면서 굳게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요사이 여기(厲氣)가 크게 번져 각진의 사졸(士卒)들 중에서 사망자가 계속 발생하여, 군액(軍額)이 점차 감축되고 있기 때문에 각 고을의 총수(銃手)와 창수(槍手) 8백 41명을 다시 조발(調發)해 대진(大陣)에 보내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추국하였다.

 

3월 27일 기해

추국하였다.

 

3월 28일 경자

추국 죄인(推鞫罪人) 정우문(鄭友文)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역적 박종일(朴鍾一)에게 투신하여 달갑게 조아(爪牙)가 되었고, 역적 이진채(李振采)에게 마음을 허락하여 형제 관계를 맺었습니다. 종일을 진채에게 부탁하며 쓸만하다고 하였고, 종일에게 진채를 천거하며 신술(神術)이 있다고 하는 등, 두 역적의 흉모(凶謀)와 역절(逆節)에 화응(和應)하지 않음이 없었고 참섭(參涉)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쌓아둔 양식을 군사에게 먹인다.’는 일에 대해서는 그 배포(排布)를 듣기를 원하였고, ‘장신가(將臣家)에 화약을 묻는 것’에 대해서도 미리 그 설시(設施)를 알았으며, ‘누차 거사 날짜를 어기자 기일을 어겼다.’고 책망했고, 섬의 죄수의 사람됨을 알려 하자 그가 잘 살고 있음을 증거했습니다. 길거리의 흉언과 참위(讖緯)의 허탄(虛誕)한 말에 이르러서는 난만하게 한 가지로 귀일합니다."
하고, 죄인 한광우(韓光友)의 결안에 이르기를,
"흉악함이 이진채와 같은 자를 아비나 스승처럼 섬겼고, 박종일·정우문과 당우(黨友)의 관계를 맺어 이인(李䄄)의 아들을 만나보고자 이진채를 따라 함께 전동(典洞)으로 갔으며, 군량을 실어 오고자 하여 쌀 주인을 찾아 남양(南陽)으로 내려갔습니다. 거리의 흉언을 예사롭게 들었으니 진신가(搢紳家)를 화공(火攻)한다는 것과 같이 난만한데로 함께 돌아 갔습니다."
하며, 모두 역모에 동참하였음을 지만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홍주목(洪州牧)을 인천부(仁川府)의 현(縣)으로 강등하였다. 역적 이진채(李振采)와 한광우(韓光友)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었다.

 

3월 29일 신축

윤직(輪直)을 철파(撤罷)하였다. 약원(藥院)의 입진(入診)을 청하는 계사(啓辭)에 대해 비답하기를,
"지금은 증후(症候)가 점차 쾌복(快復)되고 있고, 조리하는 약제를 연달아 먹고 있으니, 윤직을 철파하도록 하라."
하였기 때문이다. 약방 도제조 한용귀(韓用龜)에게는 안장이 갖추어진 말을 하사하고, 자서(子婿) 제질(弟姪) 중에서 초사(初仕)를 조용(調用)하게 하였으며, 제조 심상규(沈象奎)에게는 숙마(熟馬)를 하사하고 자서 제질 중에서 초사를 조용하게 하였다. 부제조 한치응(韓致應)에게는 자헌 대부(資憲大夫)를 가자(加資)하고 숙마를 하사했다. 전 도제조 김사목(金思穆)에게는 안구마를, 전 제조 이집두(李集斗)에게는 숙마와 노비·전결(田結)을 하사했다. 그리고 모두 을축년076)  의 전례에 의해 한림(翰林)과 주서(注書)는 승륙(陞六)시키고, 의관(醫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고 상을 베풀었다.

 

조윤대(曹允大)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추국하였다.

 

3월 30일 임인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예조 당상을 거느리고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우리 나라를 묵묵히 도우시어 임금의 환후가 시원히 강복(康復)하심에 이르러, 약원의 돌아가면서 직숙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명이 있게 되었으니, 기쁜 나머지 손뼉을 치며 축하를 드림은 팔도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기쁜 뜻을 며칠 안으로 거행하여야 할 것인데, 어제 예조의 진하(陳賀) 초기(草記)에 대한 비답에 ‘하교를 기다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이처럼 큰 경사는 위로 고하고 아래로 포고(布告)하는데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선 적이 평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함께 할 것을 명하였다.

 

남공철(南公轍)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진휼청에서 오부(五部)의 백성에게 두 차례에 걸쳐 쌀과 콩 3천 9백 5석 영(零)을 발매(發賣)하였다고 아뢰었다.

 

추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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