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 갑술
하교하기를,
"선파(璿派)164) 자손의 진상(進上)이 경사를 만나면 반드시 하는데, 이는 특별한 과례(科例)에서 나온 것이니, 이후에는 다시 하지 말라는 일로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7월 6일 병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를 책봉하였는데, 【임금은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자리에 오르고, 도감(都監)과 도제조(都提調) 이하는 계단 위로 나가 서쪽을 향해 선다. 전교관(傳敎官)이 꿇어앉아 전교를 아뢰고, 집사자(執事者)가 교명(敎命)과 책인안(冊印案)을 마주 들고 정문(正門)을 거쳐 나간다. 전교관이 동계(東階)에서 내려와 사자(使者)에게 나아가 동북쪽에 서향하여 서고 집사자가 책인안을 들고 정계(正階)에서 내려와 전교관의 남쪽에 서면 도감 도제조 이하가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간다. 집사관(執事官)이 교명함(敎命函)을 받들고 전교관 앞으로 나아가면 전교관이 교명함을 받아 정사(正使)에게 주고 정사는 북향하여 꿇어앉아 받아서 교명함을 상에다 올려 두는데, 상을 드는 자가 마주서서 들어 준다. 책함(冊函)과 인수(印綬) 역시 모두 위의 의식대로 한다. 임금이 안으로 들어가면 왕세자가 책(冊)을 희정당(熙政堂)에서 받고 쌍동계(雙童髻)와 공정책(空頂幘)과 칠장복(七章服) 차림으로 나온다. 교명(敎命)과 책인(冊印)을 배봉(陪奉)할 때의 지영(祗迎)은 정사가 교명과 책인을 안(案)에 두면 사서(司書)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배위(拜位)로 나가서 예를 행하고 책위(冊位)로 올라가 꿇어앉는다. 정사가 교명함을 가져다가 왕세자에게 주면 보덕(輔德)이 꿇어앉아 대신 받고, 정사가 책함(冊函)을 가져다가 왕세자에게 주면 사서(司書)가 꿇어앉아 대신 받으며, 정사가 인수(印綬)를 가져다가 왕세자에게 주면 익찬(翊贊)이 꿇어앉아 대신 받고, 사서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내려가 다시 배위(拜位)에서 예를 마치고 안으로 돌아간다.】 죽책문(竹冊文)에 이르기를,
"저사(儲嗣)165) 를 세우는 것은 종묘(宗廟)의 중함을 잇는 것이고 위호(位號)를 바르게 정하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매어 놓는 것이니, 이는 바로 고금의 공통된 법도이며 또한 우리 나라 조종(祖宗)의 구전(舊典)이므로, 비로소 드러난 책례(冊禮)를 선양하여 크게 이장(彛章)166) 을 거행한다. 아! 원자(元子)의 의포[日表]가 영명(英明)하고 타고난 성품은 어질고 효성스러워, 말을 하자 문자(文字)를 식별할 줄 알았고 솔선하는 행위는 빈사(賓師)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깊은 사려와 준수한 자태가 의젓하여 가르치지 않아도 깨달았으며, 시청(視聽)하고 동작하는 즈음에 이미 대인(大人)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에 기도(器度)가 숙성(夙成)하고 또 체구가 날로 성장함을 보겠다. 주(周)나라에 자손을 내려 준 것은 모두 인(仁)을 쌓아 온 덕이며, 한(漢)나라에서 태자(太子)의 이름을 정한 것은 모두 일찍 세우기를 원하였던 것이었으니, 우리 나라의 예(禮)에도 진실로 부합되고 여러 사람의 의논도 같았다. 길(吉)한 상서(祥瑞)가 다 이르니 성조(聖祖)167) 께서 나라를 처음 여신 해를 만나게 되었고, 의문(儀文)을 간략히 하니 지난날 영원하기를 기원한 마음을 본받는다. 이에 너를 명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너는 위의(威儀)를 힘써 닦고 계명(戒命)을 공손히 지켜야 한다. 강학(講學)이 아니면 이치를 밝힐 수 없고, 덕(德)이 향상되려면 몸을 성실히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항상 간사한 자를 멀리하여 미연(未然)에 방지할 것이며, 빨리 좋아하는 놀이를 떨쳐 버리어 무엇이 해롭겠느냐고 말하지 말라. 위미 정일(危微精一)168) 의 가르침에 조심하고, 예악 서수(禮樂書數)의 공부에 부지런하라.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 되니 일마다 문왕 세자(文王世子)169) 를 따르고 배워서 상성(上聖)의 영역에 이르러 반드시 ‘순제(舜帝)는 어떤 사람인가?〈 나도 순제가 될 수 있다.〉’고 하라. 환관(宦官)과 시첩(侍妾)을 가깝게 하는 때를 적게 하고 현사(賢士)를 가깝게 하는 때를 많게 하면 반드시 측근에 모두 바른 사람을 기대할 수 있고, 거북점을 쳐서 따르고 서인(庶人)에게 물어보아도 길(吉)하다고 해야만 역시 수(壽)와 녹(菉)이 끝이 없게 됨을 증험하게 될 것이다. 오늘 귀에 대고 일러둔 말을 잘 생각하여 온 나라가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다리는 바에 부응하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남공철(南公轍)이 지었다.】 하였다.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적자(嫡子)를 세우고 이름을 바르게 정하는 것은 바로 만세의 정상적인 도리이며, 일찍이 유시하여 미리 세자를 세우는 것 역시 삼대(三代)170) 의 정치가 장구했던 지략이었다. 이에 이장(彛章)을 거행하여 철명(哲命)171) 을 부여한다. 아! 너 원자(元子)는 모습이 준수하고 자질이 영명하였다. 큰 경사로 인해서 태어났음을 진실로 알겠으니 아름다운 상서가 여러 차례 드러났고, 사물을 대하는 가르침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지혜가 스스로 열렸다. 우뚝함이 거인(巨人)같아 엄연한 의표(儀表)가 본받을 만하고 위엄은 두려워 할 만하며, 천성(天性)에 타고난 것은 온화하게 어른을 공경하고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았다. 유선(諭善)과 속료(屬僚)의 관원들은 선조(先朝) 때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을 잘 따를 것이고, 옷을 단정히 입고 나와서 절하는 모습에서 오늘날 백성들의 칭찬하는 노래가 〈원자에게로〉 돌아감을 기쁘게 여긴다. 몸은 비록 손을 이끌고 다니는 아이이지만 바탕이 사실 종사(宗社)를 공고히 하게 되어, 처지가 이미 책봉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성대한 전례(典禮)를 우선 늦추려 하였는데, 이해에 와서 사람과 천도(天道)가 같이 길한 데 맞으므로 유사(有司)가 굳이 청하게 되었다. 나라의 계통을 잇는 의리를 깊이 생각하여 이에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다리는 정성에 답하기로 하였다. 이에 너를 명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너는 어릴 때의 그 마음을 보존하고 《효경(孝經)》의 뜻을 통달하라. 비록 옛날 태어날 때부터 아는 자질일지라도 반드시 학문의 공에서 힘을 입었었는데, 더군다나 몽양(蒙養)172) 하는 단서에는 마땅히 의방(義方)의 훈계를 향해야 한다. 정성 온정(定省溫凊)173) 하는 아들의 직분을 다른 데에서 구할 것이 아니며, 인외 엄공(寅畏嚴恭)174) 하여 가법(家法)을 서로 이로써 전하도록 하라. 기이한 노리개를 좌우에 가까이 하지 말아서 지기(志氣)가 더욱 새롭게 하고, 평상시에 현사(賢士)를 늘 접하면 간사한 자들이 저절로 멀어지게 된다. 구용(九容)175) 과 사물(四勿)176) 의 경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습관이 천성처럼 되면, 마침내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다스림도 마음으로 터득하여 몸소 실천하게 된다. 아!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기까지 혹시라도 이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일취 월장(日就月將)하여 거의 영원히 현덕(顯德)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 영돈녕(領敦寧) 김조순(金祖淳)이 지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30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165] 저사(儲嗣) : 왕세자.[註 166] 이장(彛章) : 상전(常典).[註 167] 성조(聖祖) : 태조.[註 168] 위미 정일(危微精一)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로,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隱微)하니, 오직 정일(精一)하게 하여 중정(中正)을 잡아야 한다."고 하였음.[註 169] 문왕 세자(文王世子) : 《예기(禮記)》의 편명.[註 170] 삼대(三代) : 하·은·주(夏殷周).[註 171] 철명(哲命) : 현명한 가르침.[註 172] 몽양(蒙養) : 어린이를 교육함.[註 173] 정성 온정(定省溫凊) : 부모를 모시는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는 일.[註 174] 인외 엄공(寅畏嚴恭) : 공경하고 두려워함.[註 175] 구용(九容) : 《예기(禮記)》 옥조편(玉藻篇)에 나오는 말로, 수신(修身)과 처세(處世)하는 데 응당 가져야 할 아홉 가지 태도. 즉 발걸음은 정중하게, 손은 공손하게, 눈은 단정하게, 입은 조용하게, 소리는 고요하게, 머리는 곧게, 기색은 엄숙하게, 설 때는 덕스럽게, 안색은 장엄하게 갖는 일.[註 176] 사물(四勿) :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말로, 예(禮)에 어긋나면 보지 말고, 예에 어긋나면 듣지 말고, 예에 어긋나면 말하지 말고, 예에 어긋하면 행동하지 말라는 네 가지 경계임.
하였다.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적자(嫡子)를 세우고 이름을 바르게 정하는 것은 바로 만세의 정상적인 도리이며, 일찍이 유시하여 미리 세자를 세우는 것 역시 삼대(三代)170) 의 정치가 장구했던 지략이었다. 이에 이장(彛章)을 거행하여 철명(哲命)171) 을 부여한다. 아! 너 원자(元子)는 모습이 준수하고 자질이 영명하였다. 큰 경사로 인해서 태어났음을 진실로 알겠으니 아름다운 상서가 여러 차례 드러났고, 사물을 대하는 가르침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지혜가 스스로 열렸다. 우뚝함이 거인(巨人)같아 엄연한 의표(儀表)가 본받을 만하고 위엄은 두려워 할 만하며, 천성(天性)에 타고난 것은 온화하게 어른을 공경하고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았다. 유선(諭善)과 속료(屬僚)의 관원들은 선조(先朝) 때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을 잘 따를 것이고, 옷을 단정히 입고 나와서 절하는 모습에서 오늘날 백성들의 칭찬하는 노래가 〈원자에게로〉 돌아감을 기쁘게 여긴다. 몸은 비록 손을 이끌고 다니는 아이이지만 바탕이 사실 종사(宗社)를 공고히 하게 되어, 처지가 이미 책봉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성대한 전례(典禮)를 우선 늦추려 하였는데, 이해에 와서 사람과 천도(天道)가 같이 길한 데 맞으므로 유사(有司)가 굳이 청하게 되었다. 나라의 계통을 잇는 의리를 깊이 생각하여 이에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다리는 정성에 답하기로 하였다. 이에 너를 명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너는 어릴 때의 그 마음을 보존하고 《효경(孝經)》의 뜻을 통달하라. 비록 옛날 태어날 때부터 아는 자질일지라도 반드시 학문의 공에서 힘을 입었었는데, 더군다나 몽양(蒙養)172) 하는 단서에는 마땅히 의방(義方)의 훈계를 향해야 한다. 정성 온정(定省溫凊)173) 하는 아들의 직분을 다른 데에서 구할 것이 아니며, 인외 엄공(寅畏嚴恭)174) 하여 가법(家法)을 서로 이로써 전하도록 하라. 기이한 노리개를 좌우에 가까이 하지 말아서 지기(志氣)가 더욱 새롭게 하고, 평상시에 현사(賢士)를 늘 접하면 간사한 자들이 저절로 멀어지게 된다. 구용(九容)175) 과 사물(四勿)176) 의 경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습관이 천성처럼 되면, 마침내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다스림도 마음으로 터득하여 몸소 실천하게 된다. 아!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기까지 혹시라도 이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일취 월장(日就月將)하여 거의 영원히 현덕(顯德)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 영돈녕(領敦寧) 김조순(金祖淳)이 지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30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165] 저사(儲嗣) : 왕세자.[註 166] 이장(彛章) : 상전(常典).[註 167] 성조(聖祖) : 태조.[註 168] 위미 정일(危微精一)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로,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隱微)하니, 오직 정일(精一)하게 하여 중정(中正)을 잡아야 한다."고 하였음.[註 169] 문왕 세자(文王世子) : 《예기(禮記)》의 편명.[註 170] 삼대(三代) : 하·은·주(夏殷周).[註 171] 철명(哲命) : 현명한 가르침.[註 172] 몽양(蒙養) : 어린이를 교육함.[註 173] 정성 온정(定省溫凊) : 부모를 모시는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는 일.[註 174] 인외 엄공(寅畏嚴恭) : 공경하고 두려워함.[註 175] 구용(九容) : 《예기(禮記)》 옥조편(玉藻篇)에 나오는 말로, 수신(修身)과 처세(處世)하는 데 응당 가져야 할 아홉 가지 태도. 즉 발걸음은 정중하게, 손은 공손하게, 눈은 단정하게, 입은 조용하게, 소리는 고요하게, 머리는 곧게, 기색은 엄숙하게, 설 때는 덕스럽게, 안색은 장엄하게 갖는 일.[註 176] 사물(四勿) :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말로, 예(禮)에 어긋나면 보지 말고, 예에 어긋나면 듣지 말고, 예에 어긋나면 말하지 말고, 예에 어긋하면 행동하지 말라는 네 가지 경계임.
하였다.
7월 7일 정축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하례를 받았는데, 반교문(頒敎文)에 이르기를,
"말하노라 희경(羲經) 【《주역(周易)》을 가리킴.】 에 이명(离明)의 상(象)을 나타냈는데 곧 한 정(貞)의 아름다움을 두었고, 한사(漢史)177) 에 세자를 일찍 세우는 글을 징험하면, 바로 오래도록 장구히 다스리려는 방책에 편안하게 한 것이었다. 이는 참으로 우리 나라에도 있어 온 예(禮)로서 비단 선대의 철왕(哲王)만이 행하던 것은 아니었다. 이에 여러 사람의 소원에 따라 현저하게 책봉을 선양(宣揚)하였다. 생각건대 저사(儲嗣)는 종묘의 근본이어서 국조(國朝)의 계통을 전함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아! 훌륭한 조상들이 크게 나타내고 계승하여 편안한 계책을 자손에게 남기셨고, 위대하게도 조종(祖宗)께서 공덕(功德)을 쌓으시어 큰 복조(福祚)를 후손에게 드리워 주셨다. 내가 외람되이 큰 기업을 지키기에 이르러서 다행히 원량(元良)이 예질(睿質)을 갖추어 탄생하였는데, 하늘이 보호하여 도우시는 권념(眷念)을 내려 아들 낳기를 바라매 상서로움을 나타내었고, 비상한 길조는 영장(靈長)으로서의 틀림없음에 맞아 헌칠한 풍채로 태어났다. 용모와 말이 법도에 맞아서 막 걸음을 배우면서부터 위의(威儀)가 엄연하게 이루어졌으며, 총명함과 효우(孝友)가 마음에 근본한 것은 가르치기 전부터 생각이 먼저 열렸다. 국가의 근본은 왕세자가 태어나자 이미 정해졌으니 목을 빼고 바라는 신민들의 마음을 묶어 놓았고, 옷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자 전궁(殿宮)에 재롱을 부리는 즐거움[繞膝之樂]을 드렸다. 오직 이에 덕성(德性)이 일찍부터 성취되어 바로 큰 호(號)를 가하기에 합당하게 되었다. 주(周)나라의 아름다운 규례를 본받기를 생각하면 보필하여 인도하는 것은 오직 일찍부터 가르치는 데 두어야 하며, 만약 저 명(明)나라의 구전(舊典)을 상고한다면 봉책(封冊)이 마땅히 어린 나이에 있어야 한다. 키가 거인(巨人)처럼 커서 일찍이 지각이 있다는 칭찬이 전파되었으니, 어린 아이라고 말하지 말라. 이에 부업(父業)을 계승하는 책임이 있다. 천명이 거듭되니 마침 성조(聖祖)께서 등극(登極)하신 해를 만났고, 별이 주갑(周甲)을 알리니 영고(寧考)178) 께서 탄생[虹流]하신 해와도 부합된다. 이미 7월 초6일이 왕세자로 책봉하여 칠장복(七章服)을 몸에 걸치고 엄연히 현단복(玄端服)으로 조계(阼階)에 올랐으며, 이존(貳尊)으로 체통을 계승하니 주불(朱芾)179) 의 차림으로 의가(宜家)180) 를 점치게 되었다.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는 조정에 있는 이를 간택하여 화려함을 이어 저사(儲嗣)를 돕는 예를 갖추었으며, 여연(輿輦)과 의장(儀仗)은 전에 쓰던 것을 주어, 선조(先朝)에서 복(福)을 아끼던 마음을 본받았다. 거북점과 시초점이 길(吉)함을 알리고 경사(卿士)와 서민도 따르니 드러난 호(號)를 소양(少陽)181) 의 자리에 올렸으며, 번창하고 성대하게 복을 누리고 장수하여 복록이 만년의 기반을 연잇게 하였다. 이에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곧바로 대정(大庭)에서 반고(頒告)를 행한다. 일월 성해(日月星海)에서 휴상(休象)을 점치니 팔도[八域]에서 큰소리로 노래하고, 홍업(洪業)이 정려(鼎呂)182) ·태반(泰磐)처럼 안정되니,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었다. 천뢰(洊雷)183) 가 길함에 합당하니 진실로 기천 영명(祈天永命)을 도모하게 되었고 큰 은택을 널리 베푸는데 어찌 소탕(疏蕩)하는 은전을 아끼겠는가? 이달 초7일 새벽 이전의 잡범 사죄 이하는 모두 용서한다. 아! 종묘의 제사를 부탁하게 되었으니, 주 문왕(周文王)이 근심이 없는 것에 가깝고, 송옥(訟獄)과 구가(謳歌)하는 자들이 돌아갈 데가 있게 되었으니, 하계(夏啓)184) 에게 희망을 거는 것처럼 기쁘다. 사물을 대하는 가르침에 부지런하여 덕이 이루어짐을 곧 보게 되겠고, 어린애에까지 미치는 사랑을 미루어서 아름다움을 함께 기뻐하려고 한다. 이에 교시하니,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예문 제학 조윤대(曹允大)가 지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3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어문학-문학(文學)
[註 177] 한사(漢史) : 한서(漢書).[註 178] 영고(寧考) : 정조(正祖).[註 179] 주불(朱芾) : 붉은 색의 무릎덮개.[註 180] 의가(宜家) : 장가를 들어 집안을 다스림.[註 181] 소양(少陽) : 세자.[註 182] 정려(鼎呂) : 구정(九鼎)과 대려(大呂).[註 183] 천뢰(洊雷) : 장자(長子)에게 전위(傳位)함을 이름.[註 184] 하계(夏啓) : 우(禹)임금의 아들.
하였다.
책례 도감(冊禮都監)의 도제조(都提調) 이시수(李時秀), 정사(正使) 김재찬(金載瓚)에게는 안장을 갖춘 말을 면급(面給)하고, 제조 이집두(李集斗)·이면긍(李勉兢)·박종경(朴宗慶), 부사(副使) 홍명호(洪明浩)에게는 길들인 말을 면급하고,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우순(金愚淳)·보덕(輔德) 정동간(鄭東榦)·도청(都廳) 한긍리(韓兢履)·윤상규(尹尙圭)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였는데, 김우순·정동간을 가선 대부로, 한긍리·윤상규를 통정 대부로 하였다.
하교하기를,
"길한 날 좋은 때에 저사(儲嗣)의 책봉례를 이루었으니, 이는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돈독히 도와 나라에 경사를 쌓게 한 것이다. 그래서 위로는 전궁(殿宮)에 기쁨을 드리고 아래로는 신민(臣民)들의 기뻐하는 마음에 보답하였다. 더군다나 이번의 모든 의절(儀節)은 다 기묘년185) ·경신년186) 의 전례를 사용하였으니, 나 소자(小子)가 미치지 못한 슬픔은 또한 경신년 책례 때의 성교(聖敎)와 같다. 이처럼 경사를 만나 기뻐하는 뜻을 알리는 때를 당하여 역시 우러러 계술(繼述)하는 한 가지 단서로 삼겠다. 여러 도(道)의 기사년187) 구환곡 10만 석과 공인(貢人)의 전에 남아 있는 것 1만 석, 저자 백성들의 요역(徭役)은 2개월간으로 한정하고 반인(泮人)의 요역은 30일로 한정해서 탕감하라. 기사년 이후에 흉년을 만난 여러 도의 정퇴(停退)한 군포(軍布)와 전(錢)에 대해서는 수량을 나누어 견감하고, 결전(結錢) 승역(僧役) 세전(稅錢), 공전(貢錢) 역시 일체로 양감(量減)하라. 이는 나 소자가 광경(廣慶)을 우러러 계술하는 것이고, 감히 지나치게 하려고 하는 뜻은 아니다."
하였다.
책례(冊禮)와 경과(慶科)를 증광과(增廣科)에 합쳐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7월 9일 기묘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상소하여 병을 진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원하니, 비답을 내려 돈면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0일 경진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양서(兩西)188) 의 급박한 민정(民情)은 사실 다른 도에 비해 곱절이나 더 심한데, 그 곳에 기사년의 구환곡(舊還穀)이 없다고 하여 유독 견감하는 가운데 들지 못하였습니다. 양서 지방은 각년 구환곡 가운데서 일정한 수량을 나누어 견감하여 경사를 만나 널리 베푸는 혜택을 고루 입도록 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7월 11일 신사
이조 판서 박종래를 병체(病遞)하고 한만유(韓晩裕)로 대신하였다.
7월 13일 계미
우의정 김사목이 재차 상소하여 면직을 구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나에게 정성을 바쳐 질병이 있으면 약을 맛보아 올리고, 과실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해주었다. 나라 일이 어렵고 민생이 재변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는 무엇이든 경이 정성을 다해 애써서 협찬(協贊)하고 보필한 것 아님이 없었다. 돌아보건대 지금 서쪽의 병란이 있은 이후 병정(兵政)의 치적(治績)이 거의 소복(蘇復)되어 가고 있으나, 모든 조정의 일이 전적으로 경 등에게 달려 있는데, 어찌 차마 나를 버리고서 한가히 지내겠다는 것인가? 다시는 사양하지 말고 간절한 내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평안 감사 정만석(鄭晩錫)이, 투항(投降)한 죄인 네 명의 진장(鎭將)인 김인후(金仁厚)·이진열(李鎭說)·김홍섭(金弘涉)·왕도항(王道恒) 등의 범죄(犯罪)를 조사하여 빨리 계문(啓聞)하니, 의금부에 명하여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처리하라 명하였다. 김인후와 김홍섭이 항서(降書)를 써서 보낸 것은 여러 초사(招辭)에 근거가 있어 김익순(金益淳)·이장겸(李章謙)과 다름이 없으므로 금오랑(金吾郞)을 파견해 도신과 입회(立會)하여 모반(謀反)으로 결안(結案)을 받아 부대시참(不待時斬)189) 하였으며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왕도항과 이진열은 비록 의심스러운 자취가 있으나 역시 명확한 잘못이 없으므로 특별히 일률(一律)190) 에서 용서하여 왕도항은 신지도(薪智島)에, 이진열은 사도(蛇島)에다 사형을 감하여 충군(充軍)하였다.
7월 14일 갑신
이면응(李冕膺)을 호조 판서로, 조득영(趙得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종래(朴宗來)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7월 15일 을유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판서로, 김노응(金魯應)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자궁(慈宮)께서는 팔순의 드문 나이로 기후(氣候)가 날로 달라져서 오로지 약물(藥物)과 미죽(糜粥)에만 의지하고 계시므로 소자가 침선(寢膳)을 살필 즈음에 위로해 기쁘게 해드릴 방도가 만에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 타고 민망함이 날로 더욱 심한데,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그 뜻을 받드는 것이 제일이다. 봉조하(奉朝賀) 본가 사람이 의(義)에 처하기를 고집하여 경신년191) 이후에 성문[城闉]의 1척지(尺地)를 철석같은 한계로 하여 적막하게 영락(零落)한 것이 휴폐(休廢)한 사람과 같다. 동돈녕(同敦寧) 홍낙륜(洪樂倫)은 한 번도 문후(問候)하지 않은 것이 몇 년이 되었고, 홍세주(洪世周)는 비록 관함(官啣)을 가지고 있으나 행공(行公)하지 않고 있으며, 그의 아버지는 옛날과 차이가 없어 문후하는 데 관직이 방애되지 않는데도, 그 아들은 도리어 이처럼 처의(處義)하고 있다. 심지어 봉조하의 사우(祠宇)를 경제(京第)에서 봉안하지 않고 있으니, 자궁의 심회가 마땅히 어떠 하겠는가? 봉조하의 사우를 며칠 안으로 경제에다 도로 받들고, 홍낙륜·홍세주는 번갈아 문후하게 할 것이며, 홍세주에게는 공직(供職)하도록 신칙하여 조금이나마 자궁의 마음을 위로하는 터전을 삼으라."
하였다.
대신을 보내어 영희전(永禧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하였다.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은 바로 우리 성조(聖祖)께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신 지 여덟 번째 되는 회갑(回甲)이어서 남전(南殿)에는 이미 대신이 섭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소자(小子)의 의탁하여 사모하는 정성으로써 좌명(佐命)한 여러 훈신(勳臣)에게 제향(祭享)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된다. 개국 일등 공신(開國一等功臣) 여러 사람에게 해조로 하여금 그 사판(祠版)의 소재를 물어서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여 이날을 당해서 일어나는 큰 감회를 보이게 하라."
하였다.
7월 16일 병술
월식하였다. 【18분 3초의 월식이 있었는데, 처음 이지러진 것은 해시(亥時) 초에 정동(正東)쪽 이었으며, 개기식(皆旣食)은 해시 정각이었고, 복원(復圓)은 축시 초에 정서(正西)에서부터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32면
【분류】과학-천기(天氣)
조정철(趙貞喆)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7월 18일 무자
진주 겸 주청 정사(陳奏兼奏請正使) 이시수(李時秀), 부사 김선(金銑), 서장관 신위(申緯)를 불러 보았는데,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7월 20일 경인
승지를 보내고 봉조하(奉朝賀) 홍봉한(洪鳳漢)에게 치제(致祭)하였다.
7월 21일 신묘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첫 번째로 사직서를 올렸는데, 봉한 채로 되돌려 주었다.
예조에서 고 판서 이익모(李翊模)의 졸서(卒逝)를 아뢰었는데,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하는 일 때문이었다.
심상규(沈象奎)를 호조 판서로 삼았다.
7월 22일 임진
이득제(李得濟)를 훈련 대장으로, 이해우(李海愚)를 금위 대장으로, 이요헌(李堯憲)을 병조 판서로, 김계락(金啓洛)을 예조 판서로, 이만수(李晩秀)를 공조 판서로, 박종래(朴宗來)를 좌부빈객으로 삼았다.
7월 23일 계사
이면응(李冕膺)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7월 25일 을미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세자궁의 예명(睿名)을 이미 정하였는데 자음(字音)에 두 가지 음이 있으니, 하나는 ‘대(臺)’ 자 음이요, 하나는 ‘영(永)’ 자 음입니다. 어느 음으로 정해야 합니까?"
하니, ‘영’ 자 음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김재찬이 또 아뢰기를,
"서란(西亂) 때 관련된 여러 죄인을 왕부(王府)192) 로 잡아 올리는 이외는 모두 도신에게 넘겨 조사해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영옥(營獄)에 갇혀 있는 자가 거의 3백 명에 가까울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서도 백성들이 적(賊)의 속임을 당해 그르치게 된 것은 모두가 굶주린 백성으로 가난하여서 사정을 알릴 데가 없었던 자로서 반드시 본심으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전후의 덕음(德音)으로 다스리지 말도록 전하였는데, 더군다나 지금은 난리를 평정한 이후로 바로 유신(維新)할 기회이니, 어찌 몇 백 명의 백성으로 하여금 허실을 구분하지도 않고 머리를 나란히 해서 시들어 죽게 하여 성상께서 법망에서 풀어 주려는 덕(德)을 어기겠습니까? 만약 범한 사실이 있어 용서하지 못할 자는 분부하소서. 계문하여 법을 쓰게 하고, 그 나머지 자취가 의심스러운 데 관계된 무리는 모두 즉시 감옥 문을 활짝 열고 등급을 나누어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뜻을 청컨대 분부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여러 도의 가을 조련을 정지하였는데, 난리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7월 26일 병신
이조 판서 이면긍을 병 때문에 체직하고 조윤대로 대신하였다.
7월 27일 정유
이만수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7월 28일 무술
윤대하였다.
우의정 김사목이 재차 청한 정고(呈告)를 봉하여 되돌려 보낸 이후에 상소하여 면직을 청원하였는데, 비답을 내려 돈면하였다.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중수(重修)가 완성되어 발문(跋文) 제술관(製述官) 이하에게 시상하고, 종부시 제조 박종경에게 정헌 대부를 가자하고, 정(正) 이지연(李志淵)에게는 통정 대부를 가자하였다.
7월 30일 경자
양서와 관동·관북·경기의 진휼을 마쳤다. 【관서의 평양 등 40개 읍진(邑鎭)은 기민이 89만 6천 7백 79명인데, 진곡(賑穀)은 절급(折給)한 쌀이 3만 6천 5백 80석 영(零)이다. ○해서의 해주 등 24개 읍진은 기민이 52만 1천 7백 62명인데, 분진(分賑)한 각종 곡식이 3만 6천 6백 20석 영이다. ○관동의 원주 등 18개 읍은 기민이 17만 7천 2백 78명인데, 분진한 각종 곡식이 1만 5천 7백 석 영이다. ○관북의 함흥 등 14개 읍은 기민이 40만 8천 8백 53명으로 진곡은 절미가 1만 7천 1백 20석 영이다. ○경기의 교동 등 9개 읍은 기민이 7만 5천 5백 87명으로 분진한 각종 곡식이 6천 6백 20석 영이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32면
【분류】구휼(救恤)
평안 감사 정만석(鄭晩錫)이 적에게 빼앗긴 각읍·진의 전곡(錢穀)의 숫자를 아뢰었다. 【쌀은 1만 6천 8백 70석 영이고, 돈은 2만 3천 냥 영이며, 군기(軍器)·집물(什物) 역시 아주 많았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32면
【분류】변란-민란(民亂) / 재정(財政) / 금융-화폐(貨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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