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경오
하교하기를,
"어제 대신의 말로 인해서 듣건대 관서의 환곡을 받은 백성들이 병화(兵火)까지 겹친데다 기근과 여질(癘疾)로 인하여 죽은 자가 서로 이어졌으며, 이따금 절호(絶戶)된 것도 많아서 올 가을에 장차 인인(隣人)과 동족(同族)에게 징봉(徵捧)하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불쌍하게 죽은 그들은 이미 논할 것이 없지만, 오직 이 살아 남은 백성들 역시 난리를 겪고 굶주리고 병들었으며, 그 자신이 납부해야 할 것도 또 흉년을 당했으니, 차마 독촉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또 어찌 차마 인인과 동족에게 바치기를 요구하겠는가? 호남은 기사년196) 에 흉년이 든 이후에 특별히 군오(軍伍)에서 이미 죽은 자는 생전의 신포(身布)를 모두 견감하기를 허락하였는데, 하물며 이 관서의 민정(民情)이야 호남보다 십분 더 긴박한 것이겠는가? 공곡(公穀)이 줄어드는 것이 비록 안타까운 것이기는 하나 나로서는 서도 백성들의 생활을 펴게 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어찌 아끼겠는가? 작금(昨今)의 관서 절호(絶戶)에서 받아간 신·구 환곡은 모두 호남의 절호 군포의 예에 의해서 일체로 모두 탕감하여 관서의 죽으려다가 살아난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조정의 상례에 벗어난 혜택을 고루 입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관서의 죄수에 대하여 대신이 도신으로 하여금 작처(酌處)하게 하였고, 지난번 연달아 하교했었는데, 대저 소민(小民)이 무지하여 순종하고 반역하는 것은 모두 위의 도솔(導率)하는 것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니, 어찌 지난번 협종(脅從)한 무리들을 사람마다 충의(忠義)를 따져 귀양보내고 죽여야 하겠는가? 도신은 마땅히 당(唐)나라 헌종이 채주(蔡州) 사람을 용서해 주고197) , 송(宋)나라 태조가 강남(江南) 사람들을 용서해 준198) 뜻을 따라서 흠휼(欽恤)하는 도리로 소결(疏決)하라. 만일 이러한 마음을 어기고 시속(時俗)의 의논을 따른다면 나로 하여금 후세에 어떤 임금이 되게 하겠는가? 당(唐)나라 무후(武后)도 강북(江北)의 반민(叛民)을 용서하였는데, 내가 어찌 무후만도 못하겠는가? 긴요한 범인을 세밀하게 캐묻고자 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니, 이달 20일 내에 도신이 몸소 옥부(獄簿)를 들고 속히 결방(決放)하라."
하였다.
9월 2일 신미
주강하였다.
전 장령 조장한(趙章漢)이 상소하여 빨리 책훈(策勳)을 명해 서적(西賊)을 토평(討平)한 공로를 수답(酬答)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조정의 명령은 시행했다가 중지하는 한탄이 있어서는 안되며, 더군다나 병장(兵將)의 상벌은 나라의 대사인데, 어찌 침착하지 못하게 논정(論定)하여 반행(頒行)한 후에 갑자기 다시 뒤늦게 추가로 고치겠는가? 국체(國體)의 전도됨이 책훈해야 할 자를 책훈하지 않는 것보다 더 심하게 되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9월 3일 임신
주강하였다.
9월 4일 계유
주강하였다.
9월 5일 갑술
주강하였다.
홍석주(洪奭周)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6일 을해
조윤대(曹允大)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9월 7일 병자
송면재(宋冕載)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9월 9일 무인
주강하였다.
이희갑(李羲甲)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10일 기묘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소대하였다.
9월 11일 경진
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평안 병사 신홍주(申鴻周)는 삭직하고, 감사(監司) 정만석(鄭晩錫)은 함사(緘辭)로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도신이 부내(部內)를 순력할 때에 수신(帥臣)의 연명(延命)199) 하는 것을 친비(親裨)로 하여금 대신 받도록 하자, 친히 받지 않는 것이라 하면서 끝내 거행하지 않아 체례(體例)와 크게 관계되었고, 도신은 갈등을 생기게 하여 번거롭게 등문(登聞)한 것으로 인하여 묘당에서 청한 것이었다.
9월 12일 신사
주강하였다.
반궁에서 구일제(九日製)를 설행하였다.
이집두(李集斗)를 형조 판서로, 이원식(李元植)을 평안도 절도사로 삼았다.
9월 13일 임오
주강하였다.
도당록(都堂錄)200) 을 행하였다. 【영의정 김재찬, 좌의정 한용귀, 우참찬 김계락, 홍문 제학 박종경, 이조 판서 조윤대, 참의 송면재이다.】 4점(點)을 받은 사람은 박시수(朴蓍壽)·정문시(鄭文始)·남혜관(南惠寬)·강세백(姜世白)·유응환(兪應煥)·고정봉(高廷鳳)·조석정(曹錫正)·정조영(鄭祖榮)·한용의(韓用儀)·홍희필(洪羲弼)·이엽(李燁)·김염(金鐮)·홍기섭(洪起燮)·이동영(李東永)·이종목(李鍾穆)·조경진(趙經鎭)·임처진(林處鎭)·신재식(申在植)·이진연(李晉淵)·이항(李沆)·윤치겸(尹致謙)·박기굉(朴基宏)·이노집(李魯集)·이종운(李鍾運)·이재수(李在秀)·유정양(柳鼎養)·홍희근(洪羲瑾)·김유근(金逌根)이다.
9월 14일 계미
조계(趙𡹘)를 삼도 통제사로 삼았다.
9월 15일 갑신
차대하였다. 좌의정 한용귀(韓用歸)가 아뢰기를,
"서도 백성으로 난리를 만나 도망쳐 숨고 흩어져 다른 도에 있는 자들이 눌러 살 계책이 없고 고향에 돌아갈 길이 없으니, 각 해당 지방관으로 하여금 두루 경내를 조사해서 만약 의지할 데가 없고, 돌아갈 생각은 있으나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무리가 있으면 자량(資糧)을 도와주어 본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경사(京司)의 전(錢) 3만 냥과 영남의 쌀 1만 석을 호조(戶曹)에 나누어 줄 것을 명하였는데, 칙수(勅需)가 부족하다고, 대신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혜경궁(惠慶宮)에 체증(滯症)이 있어 약원(藥院)에서 직숙하였다.
9월 16일 을유
서춘보(徐春輔)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9월 17일 병술
올해 이달은 바로 정종 대왕(正宗大王)께서 탄생하신 주갑(周甲)이다. 임금께서 마음 조급하게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한 달 전에, ‘9월 20일 후에 건릉(健陵)에 가서 친제(親祭)하고. 곧 바로 화령전(華寧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겠다.’고 명하였었는데, 대신이, ‘옥후(玉候)를 정섭(靜攝)하신 나머지 기력(氣力)이 상절(常節)을 회복하지 않았으므로 수고롭게 3사(舍)201) 나 되는 곳까지 가서 재숙(再宿)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차자로, 혹은 주달로 중지하기를 강력히 청하였고, 자전(慈殿)과 자궁(慈宮) 역시 누누이 만류하였었다. 때마침 혜경궁의 환후(患候)가 있어 비로소 건릉의 전알(展謁)을 명년으로 미루어 정하라고 명하였으며, 또 금년은 태조 대왕(太祖大王)이 나라를 세워 등극하신 여덟 번째 되는 회갑(回甲)이라고 하여 장차 건원릉(健元陵)에 나아가 전알하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를 보내 화령전에 가서 작헌례를 행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금년의 이달 탄신일이 멀지 않았는데, 소자의 사모하는 마음이 가면 갈수록 더욱 미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능침에 배알하여 그 일분의 충정(衷情)을 펴고자 하였으나 사세가 구애되어 예를 행할 수 없으니, 오운(梧雲)202) 을 바라보매 비통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다. 행행(幸行)은 비록 하지 못하더라도 어찌 뜻을 보이는 일까지 없어야 하겠는가? 화류(華留)203) 에 분부하여 탄신일(誕辰日)에 진남루(鎭南樓) 앞 뜰에다 사민(四民)을 모아놓고 노장(老壯)과 유약(幼弱)으로 등급을 나누어서 쌀을 주고, 경내의 유생(儒生)과 무인(武人)을 별시례(別試例)에 의해서 문(文)은 향교(鄕校)에 과장을 설치해 10인을 한정하여 과차(科次)하고, 무(武)는 사장(射場)을 좋은 곳에 설치하여 20인을 시험해 뽑아서 별단(別單)으로 올리고, 경내(境內) 61세 되는 사람은 초계(抄啓)로 올리고, 본부(本府)의 저자 백성들의 요역(徭役)을 한달 동안으로 한정하여 견감함으로써 멀리서 사모하는 구구한 정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건릉령(健陵令)은 승서(陞敍)하고 참봉은 승륙(陞六)하며, 수복(守僕) 등에게는 쌀과 베를 시상하고 화령전(華寧殿) 부장(部將) 소속도 같은 예로 시상하라.’고 명하였다. 해당 유수가 과장을 설치하여 유생과 무사를 시험하고 그 시권을 올리기에 미쳐 문임(文任)에게 과차(科次)를 정하라고 명하여 문과에서 수석을 차지한 심동윤(沈東潤)과 무과에서 수석을 차지한 최운서(崔雲瑞)에게 모두 직부 전시토록 하였다.
9월 18일 정해
함경도의 중령(中嶺)과 부전령(赴戰嶺) 두 보(堡) 별장(別將)을 모두 남관(南關) 출신(出身)의 친기위(親騎衛)에서 시취(試取)하여 자벽과(自辟窠)204) 로 삼으라 명하였는데, 묘당에서 도계(道啓)를 인해서 청한 것이다.
9월 20일 기축
의금부에서 평안 감사 정만석의 죄인 공초 계본(啓本)으로 인하여 말하기를,
"김대훈(金大勛)은 이름을 써 넣어 약속을 맺은 제일 첫머리에 있었고 종사관과 참모들은 그 좌측 가운데에 들어 있었으며, 박성신(朴聖臣)의 집에서 장정을 모아 용만(龍灣)205) 을 공격할 계책을 내었습니다. 장홍익(張弘益)은 최봉관(崔鳳寬)의 가까운 인척이고 박성신의 혈당(血黨)으로, 길에서 장교(將校)를 죽였는데 그 사위가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밤을 틈타 관아를 침범했을 때는 그 아우가 앞장섰습니다. 이침(李琛)은 홍경래가 자결하려고 하자 눈물을 흘리며 만류했으며, 구성(龜城)을 침범하려 할 때에 앞장서서 뒤따라왔습니다. 그의 아비 이정환(李廷桓)은 적의 중군이 된 것 이외에 이희저(李禧著)를 따라서 적의 거괴(巨魁)가 되었는데, 성이 격파된 후에 고아(孤兒)·과부(寡婦)들이 원통하다고 울면서 모두 이 역적이 흉폭하게 날뛴 것을 원망하였으며, 정진항(鄭振恒)과 정진교(鄭眞僑)가 초롱[燈籠]을 만들어 보낸 것과 김이대(金履大)가 인부(印符)를 받은 것, 최이륜(崔爾崙)이 아헌(衙軒)에 누워 있던 일을 참여해서 보아 자세히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또 적도들의 문부(文簿)를 살펴보니 좌영장(左營將)의 직임을 차출해서 모두 최이륜의 무리에 열록(列錄)하였습니다. 임용(林溶)은 관(官)에 있을 때 난리를 듣고는 뛰어나갔으며, 적편에 있을 때 초모(招募)하는 글을 보고서 달려 들어가, 창감(倉監)에서 승진되어 좌수(座首)가 되어 백종회(白宗繪)와 함께 정성으로 김이대(金履大)를 섬겼습니다. 최이항(崔爾恒)은 적의 중군(中軍) 최천표(崔天杓)의 아들이며, 적의 진장(鎭將) 최이륜의 아우로서 관청에 들어가 살면서 죄수의 공초로 증빙을 삼아 적의 늠료(廩料)를 받아 먹었습니다. 문부가 적발되매 4개월 동안 성에서 항거하다가 성이 격파되자 도망가서 생명을 보존했는데, 동행한 자는 우군칙(禹郡則)과 장호익(張浩益)이었습니다. 그는 큰 역적 장홍익(張弘益)의 아우로 신현(薪峴)에서 난리를 피울 때에는 박인복(朴仁福)과 함께 악행을 저질렀고, 군아(郡衙)에서 변을 일으킬 때에는 정사용(鄭士用)을 인도하여 흉악을 행하였습니다. 정지상(鄭志相)은 종사(從事)하면서 체지(帖紙)를 받았으며, 용만을 공격할 계책을 꾸몄는데, 전편(全篇)의 몇 줄은 비록 간략한 듯하나 끝 부분의 한 마디 말은 더욱 흉패합니다. 박정용(朴正用)은 그가 객지에 떠돌아다니다가 역적에게 투탁해 붙어서 점을 치는 것으로써 매우 가까이 지내게 되어 서기 종사(書記從事)라는 가장 긴요한 일을 맡았는데, 선천(宣川) 고을의 양책(良策)에는 따라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원대천(元大天)은 본디 선천 고을의 과거 출신(出身)으로 당시 김익순(金益淳)의 집사(執事)가 되었는데, 저가 읍쉬(邑倅)206) 로서 투항한 것은 비록 개 돼지만도 못하나 부교(府校)로서 그를 묶어서 구타하였으니, 곧 악독한 행위는 같은 것입니다. 또 그가 용천(龍川)까지 따라가서는 연복(燕卜)207) 을 약탈했으니, 모두 적을 도와 흉악함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한일환(韓一桓)은 진(鎭)에 남아 있으면서 체자(帖子)를 받고 창고 문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더군다나 그의 숙부(叔父) 한계성(韓啓成)은 양감(糧監)으로서 송림(松林)까지 따라갔으며, 그의 아우 한일재(韓一梓)는 다복동(多福洞)에서 부터 정주성으로 따라 들어가 문을 닫고 적과 함께 있었으니 중벽(重辟)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죄수의 정절(情節)은 모두 극역(劇逆)에 관계되어, 모반(謀叛)을 공모(共謀)한 율에 주모자와 추종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청컨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파견하여 해도(該道)의 도신과 입회(立會)하여 모반 대역으로 결안(結案)을 받아 정형(正刑)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9월 22일 신묘
진전(眞殿)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찬례 이조원에게 정헌 대부를 가자하고, 예방 승지 윤상규에게는 가선 대부를 가자했으며, 집례 박종기, 대축(大祝) 홍우섭(洪遇燮)·이헌기(李憲琦)·조봉진(曹鳳振)에게는 모두 통정 대부를 가자하였다. 인하여 화령전의 작헌례를 시행했는데, 헌관 이하에게 상전(賞典)을 시행하고, 곧 경조(京兆)208) 에서 61세 된 사람의 초계 별단(抄啓別單)으로 인하여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 지사(知事) 이만수(李晩秀), 판돈녕(判敦寧) 이언식(李彦植)에게 낭관으로 하여금 존문(存問)하라고 명하였다. 일찍이 선조에서 시종(侍從)과 선전관을 지낸 사람에게는 모두 가자하고, 양주 목사 김효건(金孝建)에게 자헌 대부를 가자하고, 이조 참판 임한호에게 가의 대부를 가자하고, 회양 부사 윤익렬, 부호군 홍희운, 경주 부윤 신서(申溆)에게는 가선 대부를 가자하였으며, 부사직 신성진(愼性眞)에게는 통정 대부를 가하였으니, 무신으로 가선 대부가 된 자가 8명, 통정 대부가 된 자가 4명이었다.
9월 24일 계사
하교하기를,
"금년은 여느 해와 다르니, 함흥과 영흥의 선파(璿派) 자손 중에 벼슬에 나아 가지 못하고 파묻혀 있는 자가 응당 많을 것이므로 특별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시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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