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6권, 순조 12년 1812년 11월

싸라리리 2025. 6. 2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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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경오

사관을 보내 진선(進善) 송치규(宋穉圭)를 돈유(敦諭)하였다.

 

11월 2일 신미

의주 부윤 오한원(吳翰源)이 아뢰기를,
"칙사의 목패문(木牌文)과 예부의 자문(咨文)이 나왔는데, 이르기를, ‘조선국에서 세자의 책봉을 청하므로 정사와 부사를 삼가 파견하여 부절(符節)을 가지고 먼저 가게 한다. 책봉 세자 정사 위서 산질 대신(委署散秩大臣) 공맹주(公孟住), 부사 내각 학사 염선(廉善), 육품 통관 왜극경액 태평보(倭克經額太平保), 팔품 통관 박경경 평영보(博慶景平寧保)가 10월 21일에 출발하기로 정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해승(李海昇)을 경원부(慶源府)에 정배하였다. 이해승이 한 곳에 머물러 기일을 어기고 탐학(貪虐) 불법(不法)한 죄로써 대론(臺論)에서 죽이기를 청하니, 대신이 행사(行査)하기를 청하였다. 도계가 이르자 임금이 대신에게 물으니, 영의정 김재찬과 좌의정 한용귀 등이 말하기를,
"군사를 멈추고 적을 놓아 보내어 앉아서 군사를 쓸 기회를 놓친 것은 군율(軍律)에 있어서는 사죄(死罪)에 해당되고, 백성들의 재산을 마구 빼앗고 창고의 재물을 훔쳐 꾸어준 것은 장률(贓律)에 있어서 사죄에 해당되는데, 두 가지 죄를 이제 이미 자복(自服)하였으니, 진실로 사형을 피하기 어렵지만 서쪽의 경보(警報)가 겨우 진정되었고, 은혜로운 윤음(綸音)이 크게 반포되어 죄가 흉적에 관계된 자도 모두 살려 주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죄수의 죄는 비록 용서할 수 없으나 특별히 사죄를 용서해 차등(次等)의 율을 시행하는 것은 실로 처음부터 끝까지 광탕(曠蕩)하는 은전에 합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3일 임신

이상황(李相璜)을 한성부 판윤으로, 조의진(趙義鎭)을 공충도 수군 절도사로 삼고, 박종경(朴宗慶)을 연접 도감 제조로, 남공철(南公轍)을 관반(館伴)으로 차출하였다.

 

11월 4일 계유

양사에서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고 대신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서 모두 김한록의 손자를 시켜 상언하게 한 사람을 조사하기를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5일 갑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하교하기를,
"번쩍거리는 빛과 천둥치는 소리가 겨울철에 나오니, 이는 나 소자가 덕에 밝지 못해 하늘의 노여움을 부른 것이 아니겠는가? 두려운 마음으로 들으면서 스스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이번 초5일부터 초7일까지 감선(減膳)하고, 대신(大臣)과 삼사(三司)로부터 초야(草野)에 이르기까지 내 과실을 직언하여 미치지 못한 바를 돕게 하라."
하였다.

 

승정원에서는 의계(議啓)로, 옥당(玉堂)에서는 연명한 차자로써 모두 진계(陳戒)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1월 6일 을해

영의정 김재찬, 좌의정 한용귀, 우의정 김사목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진면(陳勉)하고, 인하여 퇴척(退斥)하기를 청원하니, 비답하기를,
"나 소자가 해마다 하늘의 명령을 대양(對揚)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하늘이 순순히 경계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부덕함으로 인해서 이처럼 전에 없던 재변을 이르게 하여 해마다 거듭 만나게 되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은가? 이제 경들의 정성스럽게 말한 것을 보니, 종이 폭에 가득한 직언에 매우 흠탄하는 생각이 든다. 경들은 더욱 천명을 대양(對揚)해야 하니,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수찬 유정양(柳鼎養)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심영석(沈英錫)·이탁원(李鐸遠)은 잘못이 있으니, 아울러 대망(臺望)을 개정하고, 의망(擬望)한 전관(銓官)을 추고하소서."
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한 가지를 지적하여 초기(草記)하라고 비답하였다.

 

11월 7일 병자

대사헌 조득영(趙得永)이 상소하기를,
"아! 선정신 이황(李滉)의 말에, ‘외척이 어진 것은 나라의 복이 되지만 만약 어질지 못하면 나라의 화가 되는 것을 알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속이 그릇되고 각박해서 어진 자는 항상 적게 되니, 지금의 외척 역시 어찌 낱낱이 다 어질기를 보장하겠습니까? 비록 어질기가 두광국(竇廣國)·음식(陰識)238)  과 같다 하더라도 조정 일에 간여하여 군덕(君德)에 흠을 입히지 못하게 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현자를 어찌 쉽게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현인을 높이고 외척을 낮추는 것이 바로 우리 선조의 성덕과 지선(至善) 가운데 하나의 큰 규범이었으니, 더욱이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중주(中主)239)  인데도 오히려 귀행(貴幸)을 억제하고 상사(賞賜)를 헤아려 처리하여서 정관(貞觀)240)   때에는 외척이 패가(敗家)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한(漢)나라 마황후(馬皇后)241)  는 현비(賢妃)였는데도 당나라의 장손 황후(長孫皇后)242)  가 ‘일찍부터 스스로 검억(檢抑)하지 못하고 다만 거마(車馬)의 사치만 금하여 본원(本源)은 열어 둔 채 말단의 일만 돌보았다.’고 배척하면서 매우 한탄하고 애석해 하였습니다. 전감(前鑑)이 분명하고 패망한 예가 도도(滔滔)하니,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오늘날을 살펴 보면 외척이라고 이름한 자가 무릇 몇 집이나 됩니까? 영광이 비록 탁룡(濯龍)243)  의 극에 이르렀으나 근칙(謹飭)함이 유목(類鶩)244)  에도 아주 드물어 혁혁(赫赫) 자자(藉藉)하게 사람들의 지목을 받고 있으니, 반드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위로는 친근한 〈외척을〉 가까이 한다는 비난을 끼치고 아래로는 부귀를 믿는 재난을 부르게 되어 마침내 끝을 마치지 못하는 것을 기대하게 될 것이니, 공사(公私)간의 불행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가령 저 사람이 이 사람보다 낫고 갑(甲)이 을(乙)보다 낫다고 하더라도 소소한 월단평(月旦評)245)  에 불과합니다. 이런데도 엄중히 방한(防限)을 세우고 크게 징창(懲創)하지 않는다면 세가·대족들이 모두 서로를 이끌고 외척의 범위 안으로 들어가 찌거기를 핥고 이익을 탐해 풍속과 교화를 어지럽히게 될 것이니, 후세에 오늘날의 논하는 자가 일필(一筆)로 단정하기를, ‘괴란(壞亂)’이라고 할 것이니, 어느 겨를에 선부(善否)246)  와 우열을 분변하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온 나라의 공공(公共)한 말을 가지고 전하를 위해서 진달하겠습니다.
외척 박종경(朴宗慶)은 요행히 지극히 가까운 친척에 의탁하여 많은 은택을 후히 입었으니, 진실로 조금의 이성(彛性)이라도 있다면 마땅히 백 배나 겸양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인데도 그는 어찌하여 심술(心術)이 바르지 못하고 수단이 더욱 교활해야 합니까? 석갈(釋褐)247)  한 지 몇 해 안에 재빨리 재상의 반열에까지 이르렀지만 탐려(貪戾)가 본디 그의 기량(伎倆)이요 호화와 사치를 부려 전혀 분수를 모르고 있습니다. 전원(田園)과 장획(臧獲)248)  을 팔도의 전장에 두어 산과 바다를 포괄하여 구마(狗馬)와 음악, 여색으로 사시절을 즐겁게 놀며, 항상 술과 가무에 빠져 있습니다. 제택(第宅)이 연속되어 멀리 바라다 보이나 집모퉁이에서 원망이 높고, 인척들이 아첨하느라 번갈아 드나드니 요행의 문이 열려 기세를 부립니다. 동암(東巖)에 있는 명승(名勝)의 지대(池臺)는 주인이 본디 있는데도 어렵지 않게 빼앗아 친구들과 술마시는 놀이터로 만들었으니, 두헌(竇憲)249)  이 심원(沁園)250)  을 빼앗은 것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남부(南部)는 사송(詞訟)하는 아문(衙門)으로 도성의 지도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함부로 철훼하여 기첩(妓妾)의 사실(私室)을 넓혔으니, 전분(田蚡)251)  이 무기고를 빼앗은 것도 이보다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기세의 공갈에 속아 세상의 반이 거의 모두 이[虱]처럼 빌붙었고 뇌물이 폭주(輻輳)하여 여러 도(道)에서 거북 등에 털을 깎듯이 무리하게 청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서울과 지방의 재산이 모조리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가 흩어지고 대소(大小)의 전장(典章)은 과감히 금석(金石)을 헐고 무너뜨리는 데 쓰여져 있습니다. 과장(科場)에서는 사정(私情)에 따라 탁란(濁亂)시키니 응견(鷹犬)252)  이 생각해 낸 것은 그들의 애증(愛憎)을 치우치게 하며, 사람의 목숨을 마음대로 죽이니 이사(吏士)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 이런 흉독(凶毒)에 걸려야 합니까? 부인(符印)을 갖고 있는 장수는 사체가 중하므로 행동 거지를 마땅히 신중하게 해야 하는데도 각영(各營)을 불러모아 교외에서 방자하게 생소(笙簫)를 불어 댔으니, 이와 같은 대장의 직임이 예전에도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괴극(槐棘)253)  은 높은 자리인데 공례(公禮)를 마치기도 전에 비천한 창기와 분대(粉貸)254)  를 이끌고 와 당상(堂上)에서 무례하게 놀았으니, 이러한 주회(籌會)는 욕됨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모두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다만 조정의 직책은 권직(權職)·요직(要職)·청직(淸職)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여 비록 재식(才識)이 통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히 전담하여 겸찰(兼察)할 계책을 내지 못하는 것은 이는 다만 정력(精力)이 두루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체모가 미안해서입니다. 참으로 명기(名器)255)  란 지극히 중하여서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며, 더군다나 권력이란 더욱 신하가 감히 훔쳐 농간할 것이 아닙니다. 아! 저 박종경이 무슨 재능과 덕망이 있고 무슨 식견이 있습니까? 장점과 능사(能事)로 말한다면 부귀한 집안의 어리석은 아들로서 다만 금곡(金穀)의 모리(牟利)에 밝을 뿐이며,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 것으로 말한다면 면선(綿線) 제학(提學)으로 도리어 은근(銀根)256)  의 비웃음을 받는 것보다 심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관작(官爵)을 모조리 움켜쥐고서 좋은 청관(淸官)·화직(華職)만을 요구하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여 일이 권력과 관계되면 자기의 물건으로 보며, 사면(四面)에 부리를 박고 있으면서 자신이 모두 담당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른바 문권(文權)·무권(武權)·전권(銓權)·주권(籌權)과 갑병(甲兵)의 권세·전곡(錢穀)의 권세·전부(田賦)의 권세·주사(主司)의 권세·시정(市井)의 권세를 모두 장악하여 의기 양양하게 좌우로 권력을 휘둘러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안에 있어서는 재앙(災殃)이 될 뿐만이 아니라 밝은 세상에 있어서도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신이 본디 그가 어려서부터 지각이 없고 귀한 집에서 생장하여 멋대로 기세를 부린 것임을 알고 있는데, 스스로 오랫동안 전권(專權)을 누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재앙을 만들면 도피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 습성을 반성해 고치지 않고 오직 하고자 하는 대로 한다면 끝장에 가서는 해가 어느 지경에까지 이를지 모르게 될 것이니 비록, 우리 전하의 사랑하고 살려주고자 하는 덕으로도 시종 법을 굽혀서 보호해 주지 못할까 두려우니, 어찌 매우 불쌍하고 근심되지 않겠습니까? 아! 오직 임금만이 위엄과 복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의 교훈이요, 총리(寵利)를 차지하지 말라는 것이 은나라 이윤(伊尹)의 경계이니, 미리 방두(防杜)를 엄히 하여 그의 권한을 조금 재탈(裁奪)하는 것만 못합니다. 예를 들면 한가로움이 장창(張昶)257)  의 봉조청(奉朝請)과 같이 하고, 물러남이 사마광(司馬光)이 분묘(墳墓)를 지키기 위한 것과 같게 하여 나라의 정사에 참섭(參涉)하지 못하게 하고, 벗들과 결탁하지 못하게 하여 영원히 사적(仕籍)에서 뽑아 버리고 전리(田里)로 내쳐두면 혹 조금이나마 결점(缺點)을 고치게 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성조(聖朝)의 관대함으로 이전의 허물을 불문에 부쳐 위로는 사은(私恩)을 온전히 하여 공의(公議)를 펴고, 아래로는 영총(榮寵)을 받들어서 문호(門戶)를 보전하게 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그의 아버지와 형이 애쓴 공로와 지킨 충성은 왕실에 마음을 두어 충역(忠逆)에 엄하였는데, 역적 권유(權裕)가 흉소로 대혼(大婚)258)  을 방해할 때 기미를 밝히고 간사함을 꺾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역적 김달순(金達淳)이 패악한 주달로 삼조(三朝)를 무핍(誣逼)할 때 간특함을 구별하고 악을 미워하여 혼자서 의리를 붙잡을 자가 누구였습니까? 확고하게 의리를 지켜 족히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고, 사람들 모두가 현명하다고 기리고 있으니, 마땅히 귀신이 제사를 받지 못해 굶주릴 염려를 생각해야 하는데, 어찌 이 집안에서 이처럼 부형을 배반하고 나라를 등지는 패악한 자제가 있을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교동(蕎童)이 날뛰는 것들은 어찌 주벌(誅罰)하겠습니까만 어린애가 우물가로 기어가는 것은 차마 그대로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우선은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 다스리는 것이 법(法)을 적용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신이 이런 간절한 걱정을 품어 온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생각건대 그도 역시 사람이니, 혹시라도 허물을 뉘우쳐서 종적을 거두게 되면 그 죄를 반드시 성토하여 발간(發奸)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며 그로 하여금 개과 천선하는 길이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근래에 보건대 그가 총애(寵愛)를 믿고서 재차 범죄하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권세의 기염이 치성해서 감히 누가 힐문(詰問)할 수도 없으므로 앞으로의 근심이 말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만약 대중을 따라서 두려워하며 겁을 먹고, 끝내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이 전하를 저버린 것이며 신의 마음을 저버리고, 관명(官名)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의척 박종경에게 엄중히 물리치는 법을 쾌히 시행하여 영원히 보전하는 은혜를 내리소서."
하였는데,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라고 비답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 중신(重臣)의 처지가 어떠한가? 오늘이 또 어떠한 때인가? 그의 처지로써 오늘날에 의지하고 믿고 있는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친근해서 그렇겠는가? 첫째도 나라 일을 위해서이고, 둘째도 나라 일을 위해서이다. 갑자기 허무하고 망측한 말로써 이처럼 진소(陳疏)하기를 다시 여지없이 하였으며, 더군다나 그 끝에서 한 말들은 더욱더 아주 형상할 수 없는 욕으로 매우 놀라우니, 연전에 수립한 공이 있다고 하여 용서할 수가 없다. 대사헌 조득영에게 빨리 견삭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훈련 대장 박종경이 영교(營校)를 시켜 와서 명소패(命召牌)를 반납했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대소(臺疏)의 말은 조리도 없고 많이 나열한 말들은 이미 근사(近似)하지도 않은데, 중신(重臣)인 처지로서 장차 어떻게 그 임용(任用)을 면하겠는가? 비록 망측한 무고를 당했다고는 하지만 처지가 어떠하며 맡은 중임(重任)이 어떠한데, 이러할 때에 이처럼 경솔한 일을 하는가? 거조(擧措)가 경솔하여 매우 마땅치 못하다. 훈련 대장 박종경을 패초(牌招)하여 명소패를 전해 주라."
하였다.

 

11월 8일 정축

주강하였다.

 

이조 판서 조윤대(曹允大)가 상소하여 유정양(柳鼎養)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탁원(李鐸遠)은 바로 고 판서 이진검(李眞儉)의 현손입니다. 출계(出系)한 형 이진유(李眞儒)가 불행하게도 근래에 역률(逆律)을 추시(追施)당했지만 이진검은 관작이 예전 그대로이며, 그의 아들 이광태(李匡泰)도 이어서 침랑(寢郞)을 제배하였고, 그의 육촌 동생 이진원(李眞源)·이진수(李眞洙), 칠촌 조카 이광세(李匡世)·이광보(李匡輔)도 후에 모두 현관(縣官)이 되었으며, 그때 유복친(有服親) 역시 모두 방애됨이 없었습니다. 이제 5대가 지난 후에 어찌 흠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또 이는 방손(旁孫)인데 어찌 후예라고 하겠습니까? 그와 같은 처지에서 화관 요직(華官要職)을 지난 자가 전후로 어찌 한정이 있기에 유독 이 사람만 저지 당해야 하겠습니까? 심영석(沈英錫)은 바로 고 판서 심단(沈檀)의 증손인데, 신축년259)   섣달에 심단이 빈객이 되어 울면서 충언을 진달해 힘껏 흉악한 환관을 성토함으로써 영고(英考)께서 포상하고 매양 그 간절한 충성을 칭찬하여 그 자손에 이르기까지 권우(眷遇)하심이 특이하여 그의 팔촌 손자 심각(沈慤)을 약원 제거(藥院提擧)에 특제(特除)하셨습니다. 그때 하교하시기를, ‘심각이 누구의 손자인가? 그의 종조 심단이 성정각(誠正閣)에서 아뢴 일편 단심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경신년260)   여름에 이르러서 신이 지신사(知申事)가 되고, 심영석이 기주관(記注官)으로 경연에 들어갔는데, 선조(先祖)의 성교(聖敎) 중에 성정각의 고사를 특별히 들어 공을 수립한 것이라고 하교하셨으니, 이는 신이 친히 들은 바로서 전후의 사실이 모두 《승정원일기》에 기재되어 있으며, 또 그의 종숙(從叔)인 심단의 사손(祀孫) 심박(沈璞)은 일찍이 대각(臺閣)에 통망(通望)되었지만 정정(訂正)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손자에 있어서는 구애됨이 없었는데, 그의 증손에 있어서는 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고는, 곧바로 체면(遞免)하기를 구하니, 비답하기를,
"과연 경의 말과 같다면 유신(儒臣)의 말이 지나쳤다."
하였다.

 

동지성균관사 김이교(金履喬)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태어나서 머리털이 마르기도 전에 이미 김한록(金漢祿)에 대해 들었는데, 그는 화심(禍心)을 품고 있는 아주 큰 역적으로 다만 귀신이나 도깨비처럼 황홀하게 스스로 그 형체의 그림자를 숨겨 간사한 자들에 의지했는데도 사람들이 감히 힐문(詰問)하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천도가 시종 어긋나지 않고 대의(大義)가 시종 사라지지 않아서 병인년261)   여름에 역적의 정상이 다 드러나 천토(天討)를 드디어 행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그때에도 역시 여러 신하의 뒤를 따라서 신의 조부 충정공(忠正公) 신 김시찬(金時粲)이 분명한 말로 드러내 놓고 배척한 까닭과 재종형 고 참판 신 김이성(金履成)이 여러 차례 연석에서 아뢰어 우러러 성지(聖旨)를 질정(質正)한 일이며, 신 형제가 흉도에게서 갖가지로 꾀임과 협박을 받은 상황을 진달하였으니,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로 성토할 즈음에 은미하고 간략하게 말하고 끝까지 철저하지 못하게 된 것은 참으로 이 일이 지극히 중대하여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재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하늘이 흉얼(凶孼)을 꾀어내어 스스로 그 죄악을 발설하게 하였으니, 신은 청컨대 그 말을 다하겠습니다. 일전에 대신(臺臣) 김진(金鎭)의 상소가 나온 이후에야 비로소 이른바 상언(上言)이라는 것을 얻어 보았는데 그 가운데 당나라 중종(中宗)의 일로써 문난(問難)한 것이 신사년262)   봄에 있었다고 하면서 이동윤(李東允)이 편찬한 《언행록(言行錄)》을 인용해 신의 족형 김이양(金履陽)이 연조(年條)를 변환(變幻)하고 허실을 현란시켰다고 하였는데, 아! 참으로 교묘히 하려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되었습니다. 김한록의 흉언은 말을 한 것이 한때만이 아니었고 들은 자들도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덮어 숨길 수가 없게 되어 온 세상이 모두 성토하지만, 그러나 말로 전하는 데 불과하고 명문(明文)으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이 혼자 항상 생각하기를, 연대가 오래된 후에 흉도가 만약 애초에 이런 흉언이 없었다고 버틸 계획을 한다면 조정에서 대응하려는 자들이 장차 증거할 만한 일이 없을 것을 걱정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자기 입으로 토해 내어 변명한 말없이 공초(供招)를 바쳤으니, 이후부터는 세상이 끝나도록 영원히 이 죄안을 번복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신은 마땅히 근심이 풀려 다행으로 여깁니다. 만약 김한록의 말이 과연 예사로운 문난이었다면 평상시에 강론한 바가 무엇 때문에 이것에 언급하였겠습니까? 참으로 예사로운 문난이었다면 《언행록》에 기록된 것이 무엇 때문에 이처럼 상세하였겠습니까? 신의 족숙 김교행(金敎行)이 배척하고 이동윤(李東允)이 기록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언행의 기록은 추기(追記)에서 나온 것이고, 배척해 거절했던 일은 그 당일에 있었으니, 이는 기록이 있고 없고를 기다리지 않고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신사년 이후라고 운운(云云)한 것은 집안에서 전해 들은 것이 그러했기 때문에 김이양의 연전 상소에서 그 들은 바를 기술하여 말한 것에 불과한데, 처음부터 이동윤의 기록 가운데 있는 말을 중요시하여 말하지 않았으니, 변환하여 할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따라 참으로 신사년 봄이라고 한다면, 아! 신사년은 과연 어떤 때였습니까? 나라의 근심이 위태롭고 몹시 급해 조정과 산야에 있는 대소 신하들이 오직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자 한 것은 모두 마음속에 있는 깊은 근심과 원려(遠慮)를 아뢰어 회포를 풀고 한 번 죽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의 한 집안에서 온양(醞釀)한 것이 하루아침 하루저녁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에 변고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마음대로 할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때에 문란한다는 이름을 빌려 흉사(凶邪)한 논의를 제일 먼저 제창한 것이니, 그것이 아주 흉패(凶悖)함은 장차 신사년 이후에 한 것보다 더 심함이 있습니다. 또 신이 일찍이 듣건대, 당시 호우(湖右) 지방의 사대부로서 도학(道學)과 명절(名節)을 서로 숭상한 자들이 아주 많아서 서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자신은 비록 주리(州里)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 말은 국론(國論)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저 김한록이란 자는 흉계를 품고도 감히 갑자기 이룰 수가 없어 반드시 그러한 사람들에게 질정(質正)하고 그러한 처치에 자중(自重)하고자 하여 틈을 엿보고 속임수를 써서 출입하며 시험해 보았는데, 이쪽에서 되지 않으면 다른 쪽으로 옮겨서 했습니다. 신의 집안 제부(諸父) 이외에도 친히 그 흉언을 듣고서 배척한 자 역시 한두 명의 사우(士友)가 있었으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말한 것이 한때에만 한 것이 아니요, 들은 것이 한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이며, 연전에 신의 족질(族姪) 김희순(金羲淳)의 상소에서 말한 ‘신의 조부의 족제(族弟)와 지우(知友)가 일찍이 그 말을 배척하면서 통분하게 여겼다.’라고 한 것도 또한 이런 뜻입니다. 바로 그 경우에는 각기 남모르는 통분을 품고서도 감히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했으나 추후에 서로 전해지고 널리 퍼지게 되면서 비로소 부합(符合)됨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제야 김한록의 흉역스런 마음이 남김없이 탄로났던 것입니다. 그후에 이르러 그의 조카 김귀주의 흉언이 계속해서 나왔는데, 외쳐대는 것이 서로 응하고 맥락이 서로 이어짐이 한 판(板)에서 찍어 낸 것과 같고 한 꿰미에 꿴 듯하였으니, 이것은 ‘사마소(司馬昭)의 마음은 길가는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다263)  .’는 격입니다. 아! 역시 두렵고 위태로웠습니다.
그 상언에서, 또 그 집안이 임진년264)  에 상소한 일을 장황하게 몰아서 은연중 혼동시켜 흐지부지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더욱 심하게 의리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가 처음에는 마음속에 품고 잊지 않았다가 입으로 발설했다고 하면 본래 인친(姻親)은 아니지만 바로 친구인데, 어찌 차마 악역(惡逆)이란 지목(指目)을 까닭없이 그에게 가하였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신의 조부와 여러 집안의 어른들이 죽은 것은 모두 임진년 이전인데, 당시에 일찍 변석(辨釋)하고 엄중히 배척한 것이 어찌 죽은 몇 년 후의 일에 관계되겠습니까? 역시 그 사이에 변명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또 듣고서 즉시 진고(陳告)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스스로 변명하는 단서를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릇 이른바 위에 아뢰고 아래로 반포하여 그 전형(典刑)을 분명하게 시행하는 것은 반드시 때를 기다려야 하고, 형세 역시 할 수 있을 때와 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를 깊이 헤아리지 않고서 실행한다면 실패하지 않음이 적어서 국가를 위하는 생각이 되지 못합니다. 그가 또 후손들이 시종 서로 좋게 지낸 일로써 배척을 당하지 않을 증거로 삼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그렇지 않음이 있습니다. 사마광(司馬光)의 《속수기문(涑水記聞)》265)  에 여이간(呂夷簡)266)  과 요화(瑤華)의 일267)  이 기재되어 있는데, 여이간의 죄악을 사마광이 알지 못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가 여씨(呂氏) 여러 사람을 처리한 것이 원한을 감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상이 드러나지 않고 전형(典刑)을 가하기 전에는 일찍이 사사로이 절교하지 않은 것이 옛부터 그러했던 것이니, 이것이 또한 어찌 신의 집안 여러 사람에게 누(累)가 되겠습니까? 설사 그의 말대로 신의 집안 부형(父兄)에게 모조리 정상을 알고 있었다는 율(律)을 적용하고 자질(子姪)들에게 원한을 숨긴 죄목을 돌리더라도 어찌 김한록이 역적질을 하여, 연줄을 타고 벗어나려는 계제를 삼는 것보다 낫겠습니까? 단지 그 계책이 더욱 허술함만 볼 수 있습니다. 아! 다행하게도 신의 조부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사우(士友)들에게 경고하여 역적질한 간사한 마음이 싹트는 것을 꺾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또한 불행하게도 신의 조부의 귀에 들려서 오늘날의 추악한 욕을 매개(媒介)하여 지하(地下)에서까지 부당한 역적으로 된 것입니다. 아! 신이 더욱 비분 통완(悲憤痛惋)해 하는 것은 그가 감히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핑계하여 함부로 ‘선왕의 지극한 효의 덕을 무함하면서 선왕을 어떤 지경에 두는 것인가?’라는 등의 말을 글에다 어렵지 않게 썼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祖) 때 신의 재종형 김이성이 이 일을 연석에서 진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성교(聖敎)에서 이르기를, ‘그와 악을 함께 한 홍양해(洪量海)는 이미 스스로 주극(誅殛)에 이르렀고, 김귀주 역시 이 죄에 해당된다. 이제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다시 사단을 일으키고자 하지 않는 것은 본래 깊은 뜻이 있는 바이다.’라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선조 때 이미 그 간사함을 밝히고 계셨던 것인데, 엄중한 형벌을 산택(山澤)이 독물(毒物)을 포용하는 것처럼 하는 중에 부쳐 두면서 언제 일찍이 김한록을 역적이 아니라고 여기고 징토(懲討)를 참소하는 말이라 하였습니까? 김관일(金觀日)을 수용(收用)하는 데 이르러서는 대성인의 권도(權度)가 천지의 조화에 비유될 수 있어 우로(雨露)268)  와 뇌정(雷霆)269)  을 함께 행하여도 서로 어긋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의 말하는 것이 빙자하고 억양(抑揚)하면서 ‘선조에서는 돌보아 주심이 이러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처분이 이러하다.’라고 하여 마치 성상께서 도리어 선조 때의 사실을 잘 몰라 참소하는 말에 흔들리는 것처럼 하였으니, 아! 그 말의 방자 무엄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경예(鯨鯢)270)  는 주벌이 되었으나 그 잔당들은 아직 남아 있어서 독사와 전갈과 같은 독을 죽을 때까지 오히려 쏘아 대니, 신은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처음에 극역(劇逆)을 제거할 때에 발본 색원(拔本塞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 오늘날 불꺼진 재[灰]를 다시 부는 조짐이 있게 되었으니, 이 역시 불충하고 무상(無狀)한 신들의 죄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엄중한 처분을 가하여 견고한 경계를 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김귀주와 김한록의 죄는 예로부터 들어 왔으니, 경이 번거로이 아뢰지 않더라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대의가 이미 밝혀졌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한 것이며 연좌(連坐)된 자 역시 옛날의 포용하신 성덕(聖德)과 대도(大度)를 우러러 본받은 것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부수찬(副修撰) 윤치겸(尹致謙)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방금 내리신 하교를 보건대 도헌(都憲) 신 조득영(趙得永)을 처분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신은 미처 그 원본을 보지 못하여 비록 그 사의(辭意)가 어떠하였는지는 알지 못하나, 대체로 그것이 중신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중신의 처지가 어떠하며 의지해 믿고 있음이 어떠한데,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이처럼 논척(論斥)하겠습니까? 비록 성심(聖心)에 감동되게는 못하더라도 현재 구언(求言)하시는 아래에서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는 자라면, 위로 임금의 잘못에서부터 아래로 백관들을 경계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말하고 논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는 것이 곧 그의 직분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말을 하게 해놓고 이제 다시 말 때문에 죄를 주셨는데, 그의 직책은 헌장(憲長)이며, 그 일은 성지(聖旨)에 응한 것이니, 사체가 훼손되고 언로(言路)가 막혀서 성덕(聖德)에 누가 될까 싶습니다. 신이 막 언로를 열라는 한 가지 일로써 우러러 면려한 바가 있어 이미 깊이 유념하겠다는 비답을 받았었는데, 일찍이 며칠이 되지 않아서 처분하심이 이러하니, 신은 그윽이 성조(聖朝)를 위하여 이 일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삼가 청원하건대 특별히 전 도헌(都憲)을 견삭(譴削)하라는 명을 중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득영의 처분은 언관으로서가 아니다. 중신의 처지가 어떠한 것인데 구언에 대한 응지(應旨)라 이름하여 조리에 맞지 않고 이치에 가깝지 않은 말로써 중신을 논열한 것을 어찌 응지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어찌 대소(臺疏)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빨리 처분한 것이다. 이 사람이 갑작스레 앞장서서 신구(伸救)한 것이 참으로 무슨 뜻인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이를 엄중히 처분하지 않으면 국가의 기강이 장차 떨치지 못하고 국사를 의탁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니, 그대에게 빨리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여 도성 밖으로 쫓아내는[門外黜送] 법을 시행한다."
하였다.

 

11월 9일 무인

수찬 유정양(柳鼎養)을 문계(問啓)271)  한 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라 명하였다.

 

광주 유수 김희순(金羲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삼사에서 차자와 상소문이 나옴으로 인해서 비로소 김한록의 손자가 상언한 것이 있어 승정원에서 물리친 것을 알았습니다. 신이 비록 원본을 보지 못하였으나 대개 그 말을 듣건대, 신의 집안을 도리어 헐뜯어 그의 옛날 적안(賊案)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니, 아! 이는 참으로 지난 역사에서 듣지 못한 일대 변괴입니다. 이는 유독 신의 집안의 사분(私憤)일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도 깊이 염려하고 문득 돌아보면서 두려워하기를 말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말은 조리가 없고 기탄(忌憚)함이 없어서 모두 교묘하게 술책을 꾸며 허실(虛實)을 현란시킬 계책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신의 집안에 대하여 잡아 쥐고 모함해서 더럽힘이 끝이 없는데, 신이 진실로 변명하고자 한다면 흉얼(凶孼)과 시끄럽게 대질(對質)하듯이 하는 것과 같아서 신의 치욕이 되어 신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또 그 말 가운데, ‘신사년272)  의 강설(講說)이다.’라는 말이 있고, ‘신의 집안과 절교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으며, 또 ‘선왕께서 버리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변명하고자 한 것이 마침 그것을 변명하기 어렵게 한 것이요, 그가 벗어나고자 한 것이 스스로를 구속하게 된 것이니, 신은 청컨대 자세히 진달하겠습니다.
대저 이른바 ‘강설’이란 것이 무슨 일이었습니까? 이에 그 당나라 중종(中宗)의 일을 가지고 신의 조부 김교행에게 물었는데, 신의 조부가 주부자(朱夫子)의 ‘천리 인심(天理人心)의 논의로써 대답한 것입니다. 대저 천하의 일 가운데 말할 만한 것에 어찌 한정이 있기에 하필이면 당나라 중종의 일로써 물어야 하며, 또 어찌 하필이면 이때에 이런 일을 물어야 했겠습니까? 글로 인해서 뜻을 가탁하여 관련시켜 끌어대며 언뜻 비추고 있지만, 가려서 물을 즈음에 흉악한 마음씨를 가리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의 조부가 바른 의리에 의거하여 매우 엄격한 말로써 물리친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전번 상소에서 이른바 ‘신의 조부가 마음으로 주벌한 까닭이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 집에서는 감히 이런 문답을 숨기지 못하고 이미 있었다고 말하면서 심지어 옛날 동지 신 이동윤이 기록한 신의 조부의 행록(行錄)으로써 증거를 삼았으니, 천고의 장안(贓案)이 이미 갖추어져 스스로 그의 입에서 나왔는데, 어찌 신의 입에서 발설하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비밀로 이 한 조항을 얻어내지 못하면 그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이미 연조(年條)의 후선(後先)으로서 듣는 사람을 현혹시키고 죄안을 혼란시킬 계획을 하려고 하였으니, 그 역시 매우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연조를 가지고 말하다면 신사년 다음 해가 어떠한 해입니까? 그 조짐을 밟아본다면 그 무리들이 국가에 변고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고 앞서서 화란(禍亂)을 빚어온 것이 바로 이때에 있었으니,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의 역절(逆節)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김한록으로 말하면 김귀주와 비록 두 몸이지만 한마음이므로, 앞에서 창도(唱導)하고 뒤에서 화응하며, 동쪽에서 속이고 서쪽에서 떠벌려서 참여하지 않은 모의가 없었고 도모하지 않은 변고가 없었습니다. 흉언으로 선동하는 데에 화단을 일으킬 마음이 서로 연결되었는데, 그 탄로난 것이 설사 같은 때가 아니었더라도 그 자취는 마치 한 판(板)에 찍어 놓은 것과 같고, 근원과 맥락을 찾아보면 한 새끼줄에 꿴 것과 같으니, 이런데도 오히려 연조의 후선을 가지고 가리울 수가 있겠습니까? 아! 신의 조부가 호우(湖右) 사우(士友)의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김한록이 맨 먼저 신의 조부에게 이 논의를 물은 것은 장차 신의 조부의 의논을 채택하여 화란을 선동하는 날에 중요한 밑천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인데, 신의 조부가 한 마디로 딱 자른 것은 진실로 이미 그 마음을 주벌하여 그 간담(肝膽)을 꺾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초야에 있는 사람이 대부의 뒤를 따르지 않고 있으므로, 비록 목욕 재계하고 나서 성토할 것을 본받고자 하였으나 형세가 그러할 수가 없었으며, 더군다나 신의 조부는 오래지 않아서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 그 집에서 비록 신의 조부가 고발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렇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런 말을 낸 것이 한 번 신의 집에서 강문(講問)하기에 그치지 않고 이미 계속해서 다른 자리에서도 발설해서 유독 신의 조부만이 들은 것이 아니라 신의 족조(族祖)도 들었으며, 유독 신의 집에서만 들은 것이 아니라 들은 자가 온 세상에 가득하였고, 그 발자취를 이어서 역적 김귀주가 실지로 말하였으니, 무릇 어찌 많은 사람의 입을 막을 수가 있고 많은 사람의 귀를 가릴 수가 있기에 오히려 감히 한 귀절로 문난(問難)한 것을 가지고 우연히 나온 범연한 논의로 돌리는 것이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한 번 흩어지면서부터 김한록의 성취(聲臭)가 다시는 신의 집안과 접하지 않았으니, 다시 절교하고 절교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 없으나 그 마음속으로 주벌하는 의리만은 신의 집에서 서로 지켜온 논의였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성토하지 못한 것은 대개 까닭이 있습니다. 그 말한 것을 귀로 듣고 오히려 마음에 놀라워하였으나 입으로 외는 것은 감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선조가 들은 이후에 자손이 이어받아 발설하는 일의 지극히 어렵고 신중한 것은 내가 듣고서 내가 외는 것처럼 쉬운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니, 이것이 신의 집안에서 꾹 참고 마음속에만 분개함을 담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의 족숙 고 참판 신 김이성(金履成)이 연석에서 아뢰어 그 죄를 성토했으나 처분을 받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선왕께서 그의 죄안을 통촉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었던 것이니, 신의 집안에서 마음으로 주벌한 것이 비록 다른 사람보다 배나 더했습니다만, 성토가 당일에 드러내지 않은 것 역시 이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미 미처 성토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사색(辭色)에 나타내는 것은 아주 불가하므로 신이 분노를 꾹 참고서 마침내 반드시 시기를 기다렸다가 발설했던 것입니다. 고인들도 이러한 경우에 그 처신함을 역시 이렇게 하는 데에 불과하였으니, 신이 그런 사람을 낱낱이 들 수가 있는데, 그것으로 절교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삼아야 하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건대 우리 선대왕께서 그 죄를 지은 집안에 은혜를 내려서 죄를 주지 않고 덮어두어 드러내지 않으며 그 사이에 권도(權度)를 굽혀 애쓰신 것은 여러 신하들이 감히 엿보아 헤아릴 바가 아니나, 저들 흉역배가 더구나 감히 그걸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서 요행히 도피할 증거를 삼아야 하겠습니까? 구선복(具善復)이 복죄(伏罪)하였는데도 그를 처음에 임용한 것은 선왕께서 일찍이 역절(逆節)을 살피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그가 감히 선왕 때의 일을 오늘날에 핑계대면서 우리 성상의 총청(聰聽)을 현혹시키려 하니, 어찌 무엄한 마음과 불궤(不軌)의 계획이 마음속에 맺혔다가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가 강설(講說) 한 구절이 그에게 조금도 숨김이 없이 나온 큰 장안(贓案)이 되는 것을 알았다면 무릇 어찌 이 한 조항을 말했겠으며, 이에 이미 말하였으면 무슨 말로 도리어 신의 조부를 무함하겠습니까? 그들이 그림자와 발자취를 감추고 거의 10년이나 해오던 흉론(凶論)이 신의 집안을 말미암아서 그 뿌리가 드러나게 되었다면, 마땅히 신의 집안을 원망하고 해칠 마음이 배나 될 것이지만 이제 남을 쏘려는 것이 곧 자신을 쏘고 만 것이 되었으니, 그가 잘 헤아리지 못함을 많이 보겠습니다. 그가 신의 집안에 이와 같이 한 까닭은 그 뜻이 신의 집안에만 오로지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우리 조정을 엿보려는 것입니다. 엿볼 만한 틈이 있으면 의리를 현혹시키고 충역(忠逆)을 뒤섞어 놓으며, 충역과 의리를 뒤집어 놓아 어지럽히고 나면 이제야 난리를 생각하고 화란을 좋아하게 되어 여러 좋지 못한 무리들이 기회를 틈타 일어나고 발꿈치를 연이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근심이 김한록뿐만이 아니게 되니, 김한록의 손자가 올린 한 장의 상언이 바로 그 조짐으로, 신이 지난번에 말한 ‘유독 신의 한 집안의 사분 사통(私憤私痛)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우려되고 두렵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바는 이미 지난번 처분이 오히려 뿌리를 남겨 두고 베지 않는 탄식이 있기 때문에 이제 다시 무성하여 퍼지게 된 조짐이 있습니다. 만약 이 지경에 이르러서 자세히 조사하여 부월(斧鉞)273)  을 가하지 않는다면 신은 참으로 나라가 편안하게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삼사에서 논계(論啓)한 말을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마음으로 지키는 것을 이미 어제 재신(宰臣)의 비답에 유시하였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1월 10일 기묘

호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이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어기고 응하지 않으니, 하교하기를,
"그 사람의 말로써 그런다면 광망(狂妄)하고 두서가 없는 말을 족히 따질 것도 못되며, 처지로써 그런다면 의지하고 믿는 것 이외에 승후(承候)의 소중함이 어떠하겠는가? 의리로 처신한다고 하면서 마음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으니, 호조 판서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빨리 시행하라."
하고는, 이내 남공철로 대신하였다.

 

11월 11일 경진

전 장령 정필조(鄭弼祚)가 상소하여 재이(災異)를 그치게 할 방도를 진달하고 곧바로 조득영을 섬으로 정배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 이석호(李錫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이조 판서 조윤대(曹允大)가 일전에 대변(對卞)한 상소를 보고서 삼가 놀라 탄식했습니다. 대개 이진검(李眞儉)의 경자년274)   흉소(凶疏)와 심단(沈檀)의 임인년275)   치옥(治獄)은 몰래 화심(禍心)을 품고 선류(善類)에게 해독을 끼쳤는데, 그들이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이진유(李眞儒)의 무리와 동일한 흉도(凶徒)였으니, 그 후손이 청선(淸選)에 구애되는 것은 그래도 다행히 공의(公義)가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장(銓長)이 사정에 따라서 갑자기 통망(通望)한 것이므로 마땅히 사람들의 박정(駁正)하는 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말을 듣고서 과실로 여기는 뜻은 생각하지 않고서 도리어 종이에 가득히 떠벌려서 부회(傅會)하는 말을 만들어 놓으면서 혹 ‘그 처지가 화관 요직(華官要職)이라 일컫고, 혹은 재기(才器)와 문학(文學)을 일컫기도 하면서 심지어 화기(和氣)를 해친다.’라는 등의 말까지 있었으니, 어찌 그리 나쁜 쪽을 따르는 것이 극심합니까? 삼가 의리가 점차 막히고 어두워지는 데 이르러 시비가 이로 말미암아 어지럽게 될까 염려되니, 이것이 어찌 개탄스럽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이조 판서 조윤대에게 견파(譴罷)의 법을 결단코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 정언 안상묵(安尙默)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도헌 조득영의 상소를 얻어 보고는 삼가 놀랍고 분개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이미 윤리를 손상시키고 도리에 어그러져 세상 사람들이 침을 뱉는 바가 되어 비록 여대(輿儓)276)  ·주졸(走卒)277)  이라 하더라도 그와 더불어 서로 가깝게 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니, 그가 비록 스스로 보통 사람처럼 얼굴을 들고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입을 놀려 남을 논박하려 하더라도 또한 할말이 없을까 무엇이 걱정되기에 장손 황후(長孫皇后)가 마황후(馬皇后)를 비난한 일을 인용하면서 감히 막중 막엄(莫重莫嚴)한 자리에다 지적해 견주어 말이 변덕스럽고 뜻을 헤아리기 어려우며 분수와 의리를 범하고 멸시하여 스스로 대불경(大不敬)의 죄과로 만족하게 돌아갔습니다. 오늘날 전하의 조정에서 북면(北面)한 자로서 진실로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마음에서 싹터 입으로 발설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엄중한 처분을 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득영의 상소에 있는 말을 내가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선 참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말을 꺼낸 후이니, 나 역시 감히 한결같이 참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우선 먼저 찬배(竄配)하는 법을 시행한다."
하고는, 조득영을 단천부(端川府)로 찬배하였다.

 

11월 12일 신사

훈련 대장 박종경을 유임시키라 명하고, 패초(牌招)하도록 엄중히 신칙하였다.

 

11월 13일 임오

양사에서 【대사간 정경조(鄭景祚), 사간 남혜관(南惠寬), 장령 이윤겸(李允謙), 헌납 이재기(李在璣), 정언 김진(金鎭)이다.】  연명으로 상소하여 조득영을 외딴 섬으로 이배(移配)하는 법을 더 시행하고, 윤치겸(尹致謙)을 변방으로 귀양 보내는 법을 빨리 시행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청한 바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고는, 조득영을 진도군(珍島郡) 금갑도(金甲島)로 정배하고, 윤치겸을 홍원현(洪原縣)으로 귀양 보내었다.

 

11월 14일 계미

전관(銓官)이 혐의를 피하면서 명패를 바쳤다는 이유로 삼당(三堂)278)  을 모두 파직시키고, 김희순(金羲淳)·홍희신(洪羲臣)·김교근(金敎根)으로 대신하였다.

 

조상진(趙尙鎭)을 병조 판서로, 이조원(李肇源)을 광주부 유수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남김없이 밝혀졌는데, 어찌 다시 혐의를 피한 것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벼슬에 유임시킨 후에도 한결같이 어기는 것은 분의(分義) 이외에 또한 사율(師律)에 관계되는 것이다. 훈련 대장 박종경은 기과(記過)279)  하며 대령하라."
하고, 임전(臨殿)하여 재촉하니, 박종경이 초패(招牌)를 받들어 부절(符節)을 받았다.

 

11월 15일 갑신

김이도(金履度)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익운(李益運)을 예조 판서로, 김희순을 좌부빈객으로, 서영보(徐榮輔)를 홍문관 제학으로, 박종경(朴宗京)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대호군 박종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죄는 신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 그 처지는 척완(戚畹)280)  의 반열에 있고 사람됨은 용록(庸碌)한 무리로서 구구하고 작은 정성으로 스스로 식견(識見)과 사려(思慮)를 다하고 정력을 다 쏟아 만에 하나라도 은혜를 갚고자 하였습니다만 일을 할 즈음에 다른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고 우매한 소치로 세상에서 미움을 받아 마침내는 허무한 말을 만들어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모함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작년과 금년에 흉악한 글과 패악한 상소가 앞뒤로 번갈아 나와서 위로는 군부에게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집안에 욕을 초래하였으니,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습니까? 아! 저 조득영이란 자는 일찍이 신과 비록 마음을 맺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무슨 피맺힌 원수 사이이기에 지금 그 상소한 말의 전편에 나열한 것이 천백 마디일 뿐만 아니라, 마치 급서(急書)로 고알(告訐)한 것이 놀라운 위기에 이르게 됨이 있었으니, 비록 몹시 위태롭고 두려웠으나 그 실제를 따져 보면 모두가 집어 낼 만한 것이 없고 두서가 없이 온갖 말로 추악한 욕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두헌(竇憲)과 전분(田蚡) 등의 일을 인용한 경우에 이르러서도 함정에 몰아넣고 누르는 것처럼 수단을 쓰지 않음이 없었으니, 본디 한 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지마는 어찌 한결같이 묵묵히 있으면서 그 실상을 조금이나마 폭로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말한 동암(東巖)의 지대(池臺)는 신의 족숙 고 도위(都尉) 신 박명원(朴明源)의 구장(舊庄)이었으나 오랫동안 남의 소유가 되어 있었으므로, 신이 이미 값을 주고 사들였으니, 이것이 어찌 빼앗은 것이겠으며 어찌 심원(沁園)을 빼앗은 것과 비슷하겠습니까? 남부(南部)는 바로 이웃을 사이하고 있는데 집이 퇴락한 것은 해당 부에서 팔아버리고자 하여 마침내 선혜청 이속(吏屬)들의 문서청(文書廳)으로 만들었으니, 그것이 공해(公廨)임은 마찬가지인데, 또 어찌 무기고(武器庫)를 빼앗은 것과 근사합니까? 과장에서 신이 시험을 주관한 것은 한두 번의 절제(節製)에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사정을 따라 어지럽힌 흔적이 있으며, 응견(鷹犬) 노릇을 한 자는 누구이고 사랑하고 미워한 것은 무슨 일입니까? 때려서 죽인 일은 진실로 있었습니다. 이사(吏士)는 신이 데리고 다니는 아문(衙門)의 이서(吏胥)와 사졸(士卒)이니, 신이 비록 숨기고자 하더라도 그렇게 되겠습니까? 각영을 불러 모아 생(笙)과 소(簫)를 불면서 질탕하게 놀고 공식적인 의례가 파하기도 전에 비천한 창기(娼妓)를 끌어들였다고 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눈이 보고 여러 사람의 손이 가리키고 있으니, 어찌 감히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번 서도에 정벌간 군사가 개선해 돌아오기에 당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이 기뻐하기에 간략하게 소찬을 마련해 줌으로써 기쁨을 표하는 계획이었으며, 비변사의 여러 낭관과 순무 군관들이 한 달이 넘도록 노고하였기로 마땅히 회포를 풀게 하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주며 따라서 기악(妓樂)을 보냈으니, 이 역시 승평(昇平)을 장식하고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는 한 가지 방도였는데, 이것이 과연 당상(堂上)에서 설만(褻慢)하게 한 것이며, 적의 머리를 두루 돌려 보이던 날에 6개의 영(營)이 모두 모여 진을 파하고 개선을 아뢴 것이 과연 교외에서 질탕하게 논 것입니까? 이밖에 조목으로 나열한 것도 모두 억측으로 말한 것이므로 허망하고 의현(疑眩)하게 한 것이며, 또 이른바 ‘권(權)’이란 이 한 글자는 무슨 말입니까? 진실로 혹시 조금이라도 그의 말과 같은 것이 있다면 남의 신하로서 큰 죄입니다. 더군다나 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자가 자기의 물건으로 여기고 거리낌이 없으면 그 죄가 어느 정도에 해당되겠습니까? 권(權)에도 역시 분수가 있으므로 위복(威福)의 권한이 있고, 사무(事務)의 권한이 있는데, 그가 말한 ‘무슨 권한, 무슨 권한’이란 것 역시 사무의 권한을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이 지낸 여러 직책은 곧 문무(文武)·갑병(甲兵)·전곡(錢穀)·공시(貢市)의 임무였으므로 이런 직임이 있으면 이런 일이 있게 마련이고 이런 일이 있으면 이런 권한이 있게 마련인데, 이것으로 신이 권한을 장악하였다고 논하니, 그 마음의 소재가 또한 심하지 않습니까? 오직 그 하단(下段)에 있는 ‘배치(背馳)’란 두 글자로 모함하고 더럽히는 마음씀이 아주 참혹하고 말이 아주 패악하여 곧장 역적을 옹호하고 악인을 편드는 죄로 몰아넣고 있으니, 남의 자식 된 자로서 참으로 조금이라도 자식의 마음이 있다면 이런 패악한 말을 또 어찌 차마 다른 사람에게 어렵지 않게 가하겠습니까? 대저 권유(權裕)와 김달순(金達順)의 죄에 대해서는 온 나라가 함께 주벌한 바이고 온 세상이 함께 토죄한 바입니다. 신은 신의 집안 사람과 처지가 서로 다르며 이성(彛性)도 없어지지 않았으니, 대의(大義)에 관계된 바와 대방(大防)이 있는 바에 어찌 혹시라도 분명하게 밝히는 의리에 소홀히 하겠습니까? 지금 갑자기 조득영에게 협박을 당하여 이렇게 전고에 없던 악언(惡言)을 만났는데, 말하는 자는 비록 쉽게 여기더라도 듣는 자는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그가 이미 까닭없이 신에게 원망과 악한 감정을 품어 그 분한(忿恨)을 드러내 함부로 입을 놀려 욕을 함에 이르지 않은 바가 없고, 끝에 가서는 두 글자로 억지 모함을 얽기에 힘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드러내 놓고서 화심(禍心)을 행하여 듣는 자들을 의란(疑亂)시켜서 반드시 신의 집안을 멸망시킨 후에야 그만두고자 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으면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다행히 우리 성상의 해와 달같으신 밝음으로 남김없이 통촉하여 소석(昭晰)이 갖추어 이름을 힘입게 되어 두서가 없고 현상이 없는 것으로 물리치셨으니, 비록 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변명하게 하더라도 또한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당일에 죽더라도 다시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만, 스스로 슬퍼하는 것은 신의 행실이 이미 무상(無狀)한데도 영도(榮途)에서 멀리 피하지도 못하고 처세의 방도에 어두워 또한 남의 질투를 받아 이런 낭패(狼狽)를 당하여 신명(身名)을 욕되게 하였으니, 장차 조정에서는 불충(不忠)한 신하가 되고 집안에서는 불효(不孝)한 사람이 되게 되었습니다. 매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차라리 죽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싶습니다. 또 어느 겨를에 관직의 거취(去就)를 논하겠습니까? 특별히 일이 사율(師律)에 관계됨이 있다 하여 기과(記過)하라는 명이 계셨으므로, 비록 와서 대명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미혹된 고집을 돌리기 어려워 오히려 머뭇거리고 있는데, 한밤중에 임전(臨殿)하시어 하교까지 하시니, 사지(辭旨)가 이미 엄중하여 분수와 의리가 더욱 두려웠습니다. 이에 감히 억지로 부절(符節)을 받았습니다만 내려다보고 올려다보아도 두렵기만 하고 고정된 한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궐하에서 거적을 깔고 몸을 움츠리고 명을 기다리오니, 삼가 원하건대 먼저 신이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을 개정해 주시고, 이어서 유사(攸司)로 하여금 신에게 해당되는 율을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경이 당한 일에 대해서는 찾아내어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경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경에게 무엇이 손상되겠는가? 더군다나 경이 당한 일은 그래도 부차적인 일에 속하지만 이제 경이 진달한 바를 보건대, 경의 사정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뜻을 한 번 펴도록 특별히 청한 바를 허락하여 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하였다.

 

11월 16일 을유

이득제(李得濟)를 훈련 대장으로, 이해우(李海愚)를 금위 대장으로 삼았다.

 

11월 17일 병술

옥당(玉堂)에서 【부응교 홍면섭(洪冕燮), 교리 강세륜(姜世綸)·이석호(李錫祜), 수찬 이항(李沆)·홍기섭(洪起燮), 부수찬 이엽(李墷)이다.】  연명 상소하여 섬으로 정배시킨 죄인(罪人) 조득영에게 가율(加律)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이 아닌데 가율이란 말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양사에서 【대사간 정경조(鄭景祚)·사간 남혜관(南惠寬), 헌납 이재기(李在璣)이다.】  새로 아뢰기를,
"조득영의 죄를 어찌 다 주벌할 수 있겠습니까? 천성이 음험하고 행실이 비루·패악하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익을 탐내는 것이 평생의 기량(伎倆)이며 윤리를 멸시하고 도리에 어그러짐으로써 오랫동안 당세의 지목을 받아 친지(親知)들도 또한 스스로 절교하고 온 조정이 모두 침을 뱉고 있습니다.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뒤돌아보고 꺼리는 마음이 있다면 진실로 마땅히 엎드려서 허물을 뉘우쳐 감히 스스로 평인(平人) 속에 끼지 말아야 하는데, 이에 도리어 양양하게 기세를 부려 급급히 상소하여 겉으로는 응지(應旨)라 핑계하면서 속으로는 좋지 않은 마음을 써서 전편의 말뜻이 이미 이는 남을 논박한 것이라면 또한 할 말이 없는 것은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장손후(長孫后)가 마후(馬后)를 비난한 말을 무엇 때문에 또 발설했겠습니까? 은연중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가리켜 비교하여 말이 아주 패악하고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가 비록 아주 흉악하고 참혹하더라도 역시 일찍이 전하의 조정에서 북면(北面)한 자인데, 어찌 감히 이처럼 조리가 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고 글로 써서 달가운 마음으로 대불경(大不敬)의 죄과에 스스로 빠져야 하겠습니까? 정적(情跡)이 다 드러나 단안(斷案)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만약 엄중하고 자세히 조사하여 빨리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윤리와 기강이 끊어지고,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혀서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어찌 두렵고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금갑도에 귀양간 죄인 조득영을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중히 신문하여 쾌히 왕법을 바로잡으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8일 정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이요헌(李堯憲)을 병조 판서로, 박종경(朴宗慶)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서영보(徐榮輔)를 형조 판서로, 김기은(金箕殷)을 의정부 사인으로 삼았다.

 

11월 19일 무자

대신과 예조 당상을 불러 보았다.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말하기를,
"방금 듣건대, ‘칙사(勅使)의 행차가 압록강을 건너오는 것이 이달 22, 3일 무렵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도성에 들어올 날짜를 예조에서 내달 초하루와 16일 양일로 가려 정했습니다. 초하루는 너무 촉박하고 16일은 너무 늦어서 그 사이에는 혹은 재계(齋戒)하는 날을 만나거나 혹은 기구(忌拘)해야 할 날이 있다고 합니다. 선조 때에는 영칙례(迎勅禮)가 있으면 재일(齋日)에 구애받지 말라는 하교가 계셨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의 하교에 의해서 하라."
하였다. 김재찬이 말하기를,
"초4일, 초7일, 초8일은, 이미 재일에 구애받지 말라는 하교가 계셨으니, 이 3일로 가려 정해서 편리할 대로 도성으로 들어오라는 뜻을 원접사(遠接使) 처소에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재찬이 말하기를,
"칙사 행차가 도성에 들어온 후에 주상께서 마땅히 연례(宴禮)를 베풀어야 하는데 선조에서 칙사를 맞이할 때에 만약 국기(國忌)를 만나면 원대(遠代)는 전례에 따라서 연례를 베풀고 근대(近代)는 이런 뜻을 먼저 통유(通諭)하여 사례(私禮)로써 연회를 베풀고 칙사를 수일 동안 머물게 한 후에 다시 별도의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번 이 칙사를 맞이할 때 7일과 8일은 원대의 기신(忌辰)이요, 초4일은 숭릉(崇陵)의 기신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의 전례에 의해서 하라."
하였다. 김재찬이 말하기를,
"명년의 태세(太歲)는 우리 왕대비 전하의 보갑(寶甲)이 거듭 돌아오는 해이니, 정월 상삭(上朔)에 대정(大庭)에서 하례를 거행하고 이어서 진연례(進宴禮)를 행하여야 하니, 이것은 본디 이전(彛典)에 있는 바입니다. 자전께 앙품하여 곧 성명(成命)을 내리는 것이 구구한 바람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명년에 진하(陳賀)·진연(進宴) 등의 예(禮)는 내가 내전에서 이미 누누이 앙달하였으나 자전께서는 결단코 들어주지 않으시니, 나 소자의 양지(養志)하는 정성으로는 받들어 시행할 뿐이다. 또 흉년이 들어 굶주리게 되니 자전의 마음이 더욱 이 때문에 거절하신다. 아랫사람의 마음이 비록 서운하겠으나 받들어 시행하는 이외에 어찌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진연은 그만두고 단지 하의(賀儀)만 행하여 경축하는 정성을 보이라."
하였다.

 

집의 유양정(柳養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축년281)  ·임인년282)  의 의리가 잠깐 드러나고 잠깐 감추어졌다가 영고(英考) 을해년283)  과 선조 병신년284)   이후에는 중천에 뜬 해와 같았으니, 저들이 이른바 국시(國是)가 정해졌다는 것은 바로 을해년 이전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 이후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 이후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면 이진유(李眞儒)에게 이미 역률(逆律)을 시행했으니, 이진검(李眞儉)이 범한 죄는 우선 그만두더라도 이 어찌 이진유와 같은 역적이 있는데, 그 아우와 그 조카가 감히 사적(仕籍)에 낄 수 있겠습니까? 독대(獨對)한 조항은 이진검이 처음으로 주창한 것인데, ‘6만 냥의 은화를 어디에 썼느냐?’고 한 것은 그가 과연 일에 대해 논사(論事)한 것에 그친 것이겠습니까? 이진검의 상소에 ‘신축년 일곱 역적의 상소는 강상(綱常)과 명의(名義)에 관계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윤곤(尹焜)이 사헌부 계사와 안세갑(安世甲)의 환급(還給)한 상소에 있는 것이니, 어찌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심단(沈檀)은 본디 역적 윤휴(尹鑴)의 응견(鷹犬)으로 어질고 바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 본래의 기량이므로 종묘에 고하고 형률을 적용하자는 논의를 담당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갑술년285)   이후에 폐색(廢塞)되어 복직(復職)되지 않은 것이 거의 30년이 되었었는데, 갑자기 신축년 겨울에 기용되어 천조(天曹)286)  의 장(長)이 되자 마음보를 김일경(金一鏡)과 서로 연결하고 급변(急變)을 몰래 목호룡(睦虎龍)에게 사주하여 의금부에 발탁해 두고는 무옥(誣獄)을 꾸며내 충현(忠賢)을 독살(毒殺)하고 흉악한 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드러난 것만 말한다면 요망한 박상검(朴尙儉)의 일이 나온 후에 마땅히 먼저 나국(拿鞫)을 청해 흉모를 철저히 조사했어야 하는데도, 맨 먼저 ‘국문할 필요가 없으니 속히 정형(正刑)해야 한다.’는 요청을 발론하여 비밀을 보전하려고 그 일을 증언할 사람을 죽여 없애려는 계책을 하였습니다. 임창(任敞)은 충분(忠憤)·강개(慷慨)한 자였는데 반드시 곧장 죽이려 했고, 이잠(李潛잠)은 아주 흉악하고 패악한 자인데 도리어 포증(褒贈)하기를 청하였으며, 이현일(李玄逸)과 목내선(睦來善)의 죄는 악역(惡逆)에 든 자인데도 오히려 신설(伸雪)하려고 하였으니,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원컨대 신의 상소를 가져다가 조정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 보시고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실상보다 지나친 일이 있으면 청컨대 남을 모함한 율을 받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조득영의 죄악은 곧 천고에 없던 극역 대대(極逆大憝)인데, 당상(堂上)의 차자에서 단지 가등(加等)만을 청한 것은 이미 격례(格例)에 어긋난 것이며, 사간원에서 단계(單啓)로 성토한 것 역시 늦추어주는 것이므로, 신은 실로 애석하게 여기는데, 전하께서는 또 어찌 즉시 유음(兪音)을 내리시지 않아 조득영 같은 흉악한 역적으로 하여금 하루라도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쉬도록 하십니까? 대저 조득영은 사람됨이 본디 윤상(倫常)을 파괴시키는 행실로써 화란(禍亂)을 좋아하는 마음을 더하여 처음에는 윤행임(尹行恁)의 심복이 되고 윤행임의 조아(爪牙)가 되었음을 사람들 중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연전에 공을 세운 일로써 용서하고 우대하였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이를 만한데, 더군다나 서번(西藩)의 일이 있은 이후에는 또 스스로 조용히 있을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도성 안에 살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행동하여 밤낮으로 경영하고 동서로 배포(排布)하는 것이 모두 국가에 해를 끼칠 마음 뿐이었습니다. 구언(求言)하는 기회를 틈타고 외척을 공격한 논의를 빙자하였습니다. 상서 한편의 내용에 기교가 너무 많아 이에 감히 정관(貞觀) 이하의 몇 구절 말로, 감히 말할 수 없는 엄연한 자리에다 가리켜 비교하였으니, 이런 등류의 아주 패역한 말은 비록 적(敵) 이하에게도 오히려 쉽사리 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역시 전하의 조정에서 북면(北面)한 자이니, 진실로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차마 마음에 싹터 입으로 발설하겠습니까? 무장(無將)287)  에 대한 주륙(誅戮)과 불경(不敬)에 대한 형률을 결단코 잠시라도 지체해서는 안 되는데 찬출(竄黜)하고 섬으로 찬배(竄配)하여 마치 보통의 죄인처럼 예에 따라 가율(加律)한 것을 신은 못내 통분하게 여깁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대계(臺啓)를 윤허하여 엄중히 국문하고 실정을 알아내어 쾌히 전형(典刑)으로 바로잡으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11월 20일 기축

예조에서 왕대비전의 보령(寶齡) 주갑(周甲)에 대해 경사를 칭송하고 진하할 때에 경외(京外)의 전문(箋文)·방물(方物)·물선(物膳)은 전례대로 봉진(封進)하고, 종묘·사직의 고유제(告由祭)는 정조제(正朝祭)와 겸행할 것을 아뢰었다.

 

이집두(李集斗)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거리에 떠도는 거지에게 막(幕)을 지어 주라고 명하였다.

 

11월 21일 경인

사헌부 【장령 임업(任㸁)이다.】 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섬으로 정배한 죄인 조득영을 국청을 설치하여 실정을 알아내고, 변방에 정배한 죄인 윤치겸은 나국해서 엄중히 신문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2일 신묘

조상진(趙尙鎭)을 공조 판서로, 박종래(朴宗來)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1월 23일 임진

양사 【장령 이구원(李久源)·정언 안상묵(安尙默)이다.】 에서 합계하기를,
"청컨대 섬으로 정배된 죄인 조득영에 대해 국청을 설치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쾌히 전형(典刑)으로 바로잡으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5일 갑오

차대(次對)하였다. 병조 판서 이요헌(李堯憲)을 파직하고, 금위 대장 이해우(李海愚)를 잡아다 감죄(勘罪)하라 명하였는데, 무신(武臣)이 빈대(賓對)에 불참함으로써 대신이 청한 것이다.

 

11월 26일 을미

이만수(李晩秀)를 병조 판서로, 김계락(金啓洛)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고, 졸(卒)한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에게 효헌(孝憲)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11월 28일 정유

이상황(李相璜)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종훈(朴宗薰)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관반(館伴) 남공철을 호조 판서로 옮겨 임명하였었는데, 박종경으로 대신하였다가 외방에 있어 체임(遞任)하였고, 조상진(趙尙鎭)으로 대신하였다가 병으로 체임하여 서영보(徐榮輔)로 대신하였다.

 

감제(柑製)를 반궁에서 설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이규현(李奎鉉)에게 직부 전시하게 하였다.

 

11월 30일 기해

박종경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김계락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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