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27권, 정조 13년 1789년 5월

싸라리리 2025. 8. 2.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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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정사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고, 희생과 기명을 살피고서 향축(香祝)에 친히 서명하였다.

 

5월 2일 무오

경모궁의 여름 제향을 친히 행하였다. 차대하였다.

 

병조 판서 정호인(鄭好仁), 어영 대장 이주국(李柱國)을 파직하였다. 호인과 주국이 어떤 일로 서로 겨루었는데, 주국이 호인을 침해하는 내용의 상소를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조 판서에게 진실로 먼저 잘못이 있지만 어영 대장의 상소도 조정의 체통에 관계된다. 앞으로 무장(武將)들이 조금만 제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모두 장차 ‘중신(重臣)을 위해 애석히 여긴다.’는 등의 말로 어려움없이 상소할 것이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병장도설(兵將圖說)》 가운데 대군(大軍)·중군(中軍)의 제도와 어그러지지 않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병조 판서와 어영 대장을 아울러 파직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이문원(李文源)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장령 신광요(申匡堯)가 상소하기를,
"윤시동이 작년 겨울에 올린 한 장의 소는 바로 김상로(金尙魯)와 홍계희(洪啓禧)의 수법을 수호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은 것일 뿐입니다. 대체로 상로와 계희가 역적을 모의한 동기는 조진도(趙進道)를 삭과(削科)하던 날에 있었는데, 시동의 소에도 진도를 복과(復科)시키라는 명을 강력히 저항하였으니, 앞뒤가 서로 호응하여 같은 생각에서 흘러나온 것임이 분명하여 숨길 수 없습니다. 그 상소문 가운데 ‘이윤욱(李允郁)이 영남 사람으로 능히 이런 논의를 하였기 때문에 그때의 전교가 계셨다.’고 한 것은 은연중 윤욱의 말을 의리로 만들어 감히 비길 수 없는 곳에 끌어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후의 흉론(凶論)을 더욱 굳게 지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었으니, 이것이 과연 알지도 못하고서 함부로 덤벙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섬으로 귀양보내는 전형을 결단코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론이 일을 말하는 대간에서 일어났는데도 전하께서는 곧 당인(黨人)들의 편벽되고 사사로운 행동으로 돌리셨습니다. 그러나 신이 보기에는 말을 해야 되는데도 말을 하지 않는 저 사람들이 당인들의 사사로운 행동으로 귀결됨을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설혹 말이 나온 출처가 있다 하더라도 지극히 공정한 논의가 되는 데 해로울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비답 가운데 편벽되고 사사롭다[偏私]는 두 글자를 속히 거두어 주소서.
조진도를 특별 전교로 복과시키신 뒤에 그 내리신 전교를 향교(鄕校)에 봉안하려 하자, 본부(本府)의 부사 신익빈(申益彬)이 향교로 전령하기를 ‘이 전교를 이 향교에 봉안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 하고서, 교임(校任)에게 지시하여 향교를 비우게 하고 많은 관교(官校)를 풀어 전교를 모시고 있는 유생을 몰아 쫓아내었기 때문에 부득이 다른 곳으로 이송하였습니다. 그 전령이 그때까지도 유생 이진동(李鎭東)의 집에 있었는데, 사림이 일제히 분개하고 물의(物議)가 떠들썩하게 일어나자 그 전령을 도로 찾아와 흔적을 숨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생들이 죽을 각오로 저항하며 내주지 않자 잡아다가 가두겠다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그 심보를 궁구해 보면 또 시동과 한가지이니, 관직을 빼앗고 도성 밖으로 내쫓는 전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중신이 말하기 어려운 혐의를 생각지 않은 것이 어찌 다만 경솔하다 뿐이겠는가. 진실로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말이 어쩌면 이처럼 맞지 않는가. 너의 일도 매우 타당치 못하다. 덧붙여 진술한, 대간에 내린 비답 중의 어구(語句)를 환수하라는 것은 윤허하지 않는다. 신익빈의 일에 대해서는, 원비(原批)의 정본(正本)을 연석(筵席)에서 이미 친히 받도록 하였고, 이어 본향(本鄕)으로 돌아가서 간직해 봉안하도록 하였다. 먼 외방에서 풍설로 전하는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번거롭게 아뢰는 것은 무엄하기 그지없다. 앞으로는 영(營)·읍(邑)이나 유생을 막론하고 다시 이 일을 제기해서 아뢰는 일이 있을 때에는 모두 향전율(鄕戰律)로 논죄할 것이며 이를 조장한 관장(官長)에게는 갑절의 전형을 시행할 것이니 빠짐없이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남을 공격하는 것과 스스로를 변명하는 상소가 비록 조금은 다른 것 같지만, 이번 일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 어찌 한 사람 두 사람이 오늘 또 내일 마치 심상하게 옛것을 베끼는 일처럼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자구(字句)가 딱 들어맞지 않으면 더욱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이렇기 때문에 이 일은 도리어 무엄한 혐의가 있다. 당해 대신(臺臣)을 체차하라."
하였다.

 

5월 4일 경신

선공감 제조 이문원(李文源)을 불러 보았다. 문원이 아뢰기를,
"능(陵)·원(園)·묘(墓)의 사초(莎草)를 개수(改修)하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지만, 고유(告由)하는 것이 너무 빈번하기 때문에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는 역사(役事)가 작은 곳에는 능관(陵官)이 씨를 부려 사초를 보충할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습니다. 석물(石物)과 사초는 일의 체모에 있어 차이가 없으니, 석물에 회를 발라 약간 보수하는 것도 사초하는 경우 씨를 부려 보충하도록 한 예에 따라 능관으로 하여금 해조(該曹)와 왕복하여 편의에 따라 거행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타당합니다."
하니, 가하다고 하였다.

 

박천행(朴天行)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정창성(鄭昌聖)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5월 5일 신유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김익휴(金翊休)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6일 임술

주강(晝講)하였다.

 

이방일(李邦一)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5월 7일 계해

춘당대에 거둥하여 전경 무신(專經武臣)들에게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김이주(金頤柱)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기언정(奇彦鼎)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고 첨정(僉正)        권산해(權山海)의 관직을 회복하였다. 경주(慶州)의 유학(幼學) 권종락(權宗洛)이 격쟁(擊錚)하고 말하기를,
"12대조 고 첨정 산해는 장릉(莊陵)012)                  의 이부(姨夫)가 되는 신하로 평소부터 지조가 굳어 사류(士流)의 추앙을 받았으며 호를 죽림(竹林)이라 하였습니다. 문묘(文廟) 경신년에 녹사(錄事) 및 주부(主簿)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단묘(端廟) 갑술년에 비로소 종부시 첨정으로 나아갔으나, 단종이 양위(讓位)함에 미쳐서는 항상 한 번 죽을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누차 제수하는 명이 있었으나 끝내 나가서 숙배(肅拜)하지 않았습니다. 병자년에 권자신(權自愼)·성삼문(成三問) 등이 먼저 옥에 갇히자 산해는 하늘을 우러러 눈물 흘리며 ‘이것이 진실로 하늘의 뜻인가.’ 하고 드디어 높은 집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습니다. 뒤에 체포령이 내렸으나 이미 죽었으므로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관작을 삭탈하는 데 이르고 벌이 전가 사변(全家徙邊)하는 데 이르렀으며, 또 자손들을 1백 년 동안 금고(禁錮)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절개를 세운 대략입니다. 산해는 바로 고 재상        문경공(文景公) 권진(權軫)의 종손(從孫)이자 현릉(顯陵)013)                  의 국구(國舅)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사위입니다. 영종 대왕께서 선대왕의 성덕을 본받아 생육신(生六臣)과 사육신(死六臣)들에게 모두 벼슬을 추증하고 정문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또 생육신들에게 시호를 주는 은전을 내리셨는데, 신의 조상의 충절도 실로 생육신·사육신과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이조가 아뢰기를,
"산해의 순절(殉節)이 실로 육신과 똑같이 아름다우니 추복(追復)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5월 8일 갑자

소대하였다.

 

5월 9일 을축

채홍리(蔡弘履)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호(尹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10일 병인

문희묘(文禧廟)에 가서 전교하였다.
"문희묘의 기일(忌日)에는 의소묘(懿昭廟)의 예에 따라 10일부터 11일까지 재계할 것이다."

 

5월 11일 정묘

은신군(恩信君)의 사당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상이 친히 잔을 올리는데 눈물이 흘러 곤룡포를 적시고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하니 좌우가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전교하기를,
"은신군(恩信君)이 친왕손(親王孫)으로 낙천군(洛川君)의 제사 받드는 것을 주저하기 때문에 연전에 곧장 연령군(延齡君)의 사당만을 모시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시 전례를 상고하건대 이러한 처지로서 상례(常例)를 뛰어넘어 제사를 주관한 견줄 만한 사례가 많았다. 연령군 내외의 사판(祠版)에 아직까지 달선(達善)이란 옛 호(號)를 쓰고 있는 것은 의의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예제(禮制)에도 크게 어긋난다. 오늘밤이 바로 낙천 부인의 기제일(忌祭日)인데, 낙천 부인의 병이 위독할 때 이미 죽은 뒤에 사판을 꼭 써주겠다는 말로 위로한 일이 있었으니, 오늘 내가 이곳에 거둥한 일이 우연만은 아니다. 종친부로 하여금 본가(本家)에 일러 즉시 신주를 고쳐 쓰게 하라."
하고, 이어 낙천군 내외에게 치제(致祭)할 것을 명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달을 당하니 어버이를 그리는 마음 더욱 그지없다. 무진년 이전에 나를 보호해준 공을 생각할 때 내가 어찌 감히 하루인들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 차례로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을 방문하였다.

 

5월 12일 무진

이주국(李柱國)을 훈련 대장으로, 김종수(金鍾秀)를 예문관 제학으로,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조시위(趙時偉)를 제주목(濟州牧)에 이배(移配)하고 가극(加棘)하였다. 전교하기를,
"조시위에 대해 처단한 듯하기도 하고 용서한 듯하기도 하여 감죄(勘罪)를 한 듯하기도 하고 감죄를 아낀 듯하기도 하니, 이런 형정(刑政)이 어디에 있겠는가. 일찌감치 이미 처단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국문을 하지 않고서는 율(律)을 바르게 적용할 수가 없고 국문을 하자면 반드시 먼저 증거를 청할 것인데 나라 사람들의 말이 어찌 증거가 되겠는가. 그렇다면 지레 죽어버리게 만들거나 환배(還配)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지금까지 끌어오면서 결단하지 못한 이유이다. 비등하는 나라 사람들의 말을 직접 들었으리라고 꼭 찍어 말할 수는 없으나, 그의 처지로서 이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단안(斷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신하로서 이런 죄명(罪名)을 지고서 산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살고 있는데도 평범하게 섬에 안치한 것을 가지고서 거의 법을 끝까지 시행한 것으로 여기니, 형정이 있은 이래로 들어보지 못한 바이다.
이러한 즈음에 승정원에 쌓인 소장(疏章)으로 말하면 그 중에 남이 올리니까 덩달아 올린 자들은 자연 책임이나 떼우려는 데로 돌아가고, 사감(私憾)을 풀려는 자들은 마치 일망 타진하려는 듯이 하여, 현연히 두 패로 갈리어 패싸움을 하고 있으니, 일개 시위의 해가 어찌하여 이렇게 심한 데까지 이르렀는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한 죄인을 죽이는 뜻으로 논하건대 저의 범죄가 비록 처단할 수도 있고 용서할 수도 있는 사이에 있다 하더라도 단연코 형조로 보내어 시원하게 전형을 바루어 무죄한 많은 세신(世臣)들에게 속죄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위로 누를 끼치고 아래로 해를 끼쳐 공사(公私)가 괴로움을 받는 것이 약으로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한 건(件)은 본래의 사건에 비하면 오히려 큰 일은 버려두고 작은 일을 따지는 데 해당하니 놀랍고 분개스런 마음 또한 크다.
대체로 불량(不良)하고 불령(不逞)한 자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는데도 국청(鞫廳) 열기를 청한 계사(啓辭)가 윤허를 받지 못했다 하여 그대로 구차하게 편배(編配)로 감죄한다면 끝내 형정에 어그러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금갑도(金甲島)에 안치한 죄인 조시위를 우선 제주로 이배(移配)하여 가극(加棘)의 전형을 실시하라. 앞으로 비록 잡아다가 국문하고자 하더라도 섬에 안치하여 가극한 여부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이에 앞서 섬으로 귀양보내어 가극하는 처분에 대해 번번이 정지하기를 청했었는데 도리어 어떨지 모르겠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자세히 알게 하라."
하였다.

 

헌납 유광국(柳匡國)이 상소하여, 첫머리에 역적을 응징해 토죄할 것을 진술하고, 이어 아뢰기를,
"얼마 전에 사헌부 신하 성정진(成鼎鎭)이 상소하여 여러 역적들을 논죄할 적에 유독 김우진(金宇鎭)과 조시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진실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서둘러 그의 이름을 사적에서 깎아내고 개차(改差)하는 전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성정진의 일이 어찌 이처럼 기를 쓰고 남의 작은 허물을 들추어낼 일인가. 의도를 가지고서 보는 자와 무심히 말한 자를 놓고 볼 때 누구의 잘못이 경하고 중하겠는가. 너의 일은 진실로 옳지 않다."
하였다.

 

장령 정택부(鄭澤孚)가 상소하기를,
"사헌부 신하의 상소에 김우진·조시위 같은 역적을 빼놓고 논죄하지 않은 것이 무슨 돌아보며 두려워할 것이 있어서 그랬다는 말입니까. 전라 감사를 천거함에 있어 처음부터 이미 불리했는데도 재차 또 고의로 범한 것이 무슨 친분이 있어서 그랬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모두 기강이 떨쳐지지 못하고 전형(典刑)이 행해지지 않고 의리가 밝지 않아서이니, 엄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구(字句) 사이에 진의를 모호하게 드러냈으니, 어디에 이처럼 흐리멍덩한 수법이 있는가.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원소(原疏)는 네가 도로 찾아가 세상 도리에 해를 끼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아까 내린 전교 속에도 대략 언급한 바가 있거니와, 정택부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진실로 말할 것이 있으면 공평 정직하게 말하면 도리어 무슨 안 될 것이 있단 말인가. 원소 중 몇 구절은 분명히 지적한 것이 있으나, 하단(下段)의 말은 매우 눈에 걸리고 의도를 담아 돌려 말한 것도 많았다. 이렇게 하고서야 조정의 체통이 언제나 존엄해지고 세상 도리가 언제나 안정이 되겠는가. 지금 만약 이런 풍습이 자라도록 버려둔다면 오늘날 조정에서 누가 사람을 천거하려 하겠는가. 오늘의 폐단이 되는 이외에 후일의 폐단에 더욱 관계가 있으니, 장령 정택부를 삭직하라."
하였다.

 

부수찬 김재익(金載翼)이 상소하기를,
"이만식(李萬軾)을 지금까지 너그럽게 용서한 것만도 형벌을 크게 잘못 적용한 것인데, 매양 어가(御駕)가 지나는 길에 자식을 보내어 억울함을 호소하며 완전 석방해 주기를 청하기까지 하고, 또 어미가 죽었으니 돌아가서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예에 따라 말미를 청하였으니, 방자하고 기탄없는 그의 행위는 진실로 하나의 변괴입니다. 특명으로 휴가를 허락하신 것이 비록 효도로 나라를 다스리시는 정사에서 나온 것이지만, 제방(隄防)에 관계되는 것으로 바로 조정의 큰 근심거리입니다. 만식에게 휴가를 주도록 한 명을 속히 정지하시고, 이어 그 자식의 외람한 죄를 처단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정식(定式)이 있으므로 정식에 따라 거행하게 한 것인데도 너의 말이 이와 같구나. 그러나 한계를 짓기 어려우니 대신들에게 물어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때 만식의 아들이 상언(上言)하여, 돌아가서 어미의 상사를 돌보게 하여 줄 것을 청함에 특별히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정언 유현장(兪鉉章)이 상소하기를,
"호남 유생들이 상소하여 정무공(貞武公)이란 시호가 내린 고 판중추부사 기건(奇虔)의 사당에 사액(賜額)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기건은 단종조의 명신(名臣)으로 뛰어난 절개가 생육신·사육신들과 함께 사람만 다를 뿐 똑같아서 청맹과니란 핑계로 그 절개를 바꾸지 않았으므로 세조조에서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손과 현손에 미쳐 문민공(文愍公) 기준(奇遵)과 문헌공(文憲公) 기대승(奇大升) 같은 분들이 서로 뒤를 이었는데, 그 연원(淵源)이 순수하고 올바른 것은 모두 그 조상의 유풍(遺風)을 물려받은 것이었습니다. 사당을 세운 것이 이미 숙묘 갑술년이었으니 사액의 은전을 청한 것도 그때부터입니다. 바라건대 굽어살피시어 덕스런 위엄과 교화를 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액하는 일은 네가 간여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부교리 신헌조(申獻朝), 수찬 이희관(李羲觀)이 연명해 상소하기를,
"일전에 어영 대장 의망에 이방일(李邦一)을 낙점(落點)하신 일이 있었는데, 신들은 놀랍고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 방일은 병오년에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승하하여 슬픔으로 겨를이 없을 때를 당하여 장신(將臣)으로서 빈렴(殯殮)을 마치기도 전에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켰으니, 진실로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사람은 본래 김상철(金尙喆)의 가까운 인척이고 조시위의 사당(私黨)으로 평소부터 그들에게 물들어 왔으니, 그의 행적을 가지고 그의 심사를 논해보면 전적으로 무지하여 함부로 저지른 짓으로 돌릴 수만은 없습니다. 영원히 사적(仕籍)에서 삭제하고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에 와서 묵은 불씨를 되살려 일으켜, 불인(不仁)한 자를 너무 지나치게 미워해서도 안 될 일이라는 경계를 생각하지 않으니, 너희들의 일은 진실로 그르다. 더구나 이것이 어찌 연명으로 상소할 일인가. 제수(除授)의 명이 내리자마자 서로 이끌고서 일제히 청하는 것도 산만하기 그지없다."
하였다.

 

5월 13일 기사

상이 재계하느라고 정사를 보지 않았다.

 

5월 22일 무인

차대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가극(加棘)한 죄인 조시위를 살려둘 수 없다 하여 속히 처분을 내리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자의 음흉하고 고약한 성질로 말하면 비록 집안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를 비난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국론(國論) 이외에도 죽일 만한 죄가 많고 보면 국론의 유무가 어찌 족히 그의 단안(斷案)이 되겠는가. 그러나 입증(立證)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가 감히 애매하게 일에 어두운 것처럼 행동하고 사람들의 마음도 거짓에 현혹됨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마치 편벽되고 사사로운 데 관계된 것처럼 보아 장차 나라 사람의 절반이 물들게 될 지경이므로 이 가극의 거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들은 각각 그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장령 안정대(安鼎大), 지평 권중헌(權中憲)·박서원(朴瑞源), 정언 유현장(兪鉉章) 등이 차자를 올려 역적을 성토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적의(賊醫)가 독을 올린[進毒] 것은 독자적으로 한 짓이 아니라 바로 김우진(金宇鎭)과 조시위(趙時偉)의 사주를 받아서 한 짓입니다."
라는 말이 있었다. 상이 여러 대신에게 이르기를,
"유현장의 소 가운데 ‘진독(進毒)’이란 두 글자는 어찌 다만 전후의 소장에서 보고 듣지 못한 바일 뿐이겠는가.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가 만약 분명히 알았다면 이것이 어찌 상소문 사이에 끼워넣을 일인가. 입대(入對)를 청해야 하고, 복합(伏閤)해야 할 일이다. 근래 조정 신하들이 공경하고 삼가는 도리가 전혀 없어 더러 말을 골라하지 않고 말이 사실과 맞지 않는 풍조가 있기는 하지만, 이 일에 이르러서는 나도 오히려 한 번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는데 하물며 경들이겠는가. 사실 여부를 조사해서 밝히는 것이 마땅했지만 마침 연일 앉아 재계함으로 인해 지금에서야 이렇게 묻는 것이다."
하니, 대신 등이 혹은 서면(書面)으로 신문한 뒤에 처결하기를 청하기도 하고, 혹은 시위와 일체로 엄히 국문해서 사실을 캐어내기를 청하기도 하고, 혹은 사주한 자까지 아울러 조사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사람됨은 일찍이 본 바이지만 이번에 두 글자를 방자하게 쓴 데에서 결정적으로 그가 허황되고 무식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본 사건을 따져보면 관계가 어찌 다만 지극히 중대하다 뿐이겠는가."
하고, 이어 문계(問啓)하라고 명하였다. 유현장은 아뢰기를,
"‘독(毒)’ 자는 독열(毒熱)의 독 자일 뿐, 다른 독물(毒物)을 뜻한 것이 아닙니다. 신은 단지 독과 열이 같은 줄로만 알았을 뿐이므로 연명 차자를 쓸 때 여러 대신(臺臣)들과 상의하여 썼습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전교하기를,
"‘독을 올렸다[進毒]’는 두 자만을 말한 것은 ‘함부로 독열을 올렸다.[妄進毒熟]’는 뜻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다. 더구나 연전의 비지(批旨)에 독열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자세히 말하였고 보면 이른바 독열이란 말도 오히려 감히 다시 쓸 수 없는데 하물며 진독이란 두 자이겠는가. 이런 일을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버린다면 어찌 나라가 있고 임금이 있다고 하겠으며 또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도리로 악인을 죽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그가 무지해서 잘못 썼다는 것을 그가 이미 스스로 승복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체통으로 헤아려 볼 때 문계(問啓)의 예에 따라 한 번 사문(査問)하고 그만둘 수는 없다. 그렇다고 법대로 끝까지 심문하려면 한갓 왕부(王府)에 누만 끼칠 뿐이니, 유현장을 본인에 한해 먼 섬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안정대(安鼎大) 등은 아뢰기를,
"글자의 뜻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서 어려움없이 써서 올렸습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전교하기를,
"이 ‘진독(進毒)’이란 두 글자를 보고 쓰기에 알맞은 것으로 알고 썼다고 운운한 것을 보건대 부끄러움만 끼칠 뿐이니 많은 말을 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더없이 존엄한 것이 나라의 체통이고 대간의 기풍이고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로 돌려 무궁한 폐단을 열어 놓는다면 세도(世道)를 위하는 본의에 크게 어긋나니 문계한 대신(臺臣)들을 모두 체차하여 경기 연읍(沿邑)에 분산해 귀양보내라."
하였다.

 

좌의정 이성원이 정택부(鄭澤孚)의 상소문 속의 말을 이유로 상소해 체직시켜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틈을 엿보아 남을 공격해서 뒤흔들어대고 애매한 무함까지 덮어씌우는 것이 바로 요사이 당사(黨私) 중의 한 가지 일이다. 억지로라도 힘써 나오게 하고야 말겠다는 말을 연교(筵敎)에 누차 언급한 바 있으니, 경도 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만약 가고 멈추는 것을 경에게 맡겨두어 정승의 직에서 해임되게 한다면 앞으로 누가 오늘날의 대신이 되려 하겠는가.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 기대하는 바는 오직 위에서 말한 힘써 나오라는 두 마디에 있을 뿐이니, 경은 사직소 올리는 것을 속히 중단하라."
하였다.

 

판의금부사 한광회(韓光會)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조시위의 귀양지를 옮겨 안치하라는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기를,
"김우진(金宇鎭)이 전에 전화(錢貨)를 교통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한 섬에 함께 있게 한다면 은밀히 서로 호응하리라는 것은 필연의 사세이니, 앞으로 닥칠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어영 대장 이방일(李邦一)이 옥당의 상소를 이유로 인의(引義)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전에 올린 의망 단자(擬望單子) 중에서 낙점(落點)한 것은 대체로 지난날의 잘못을 씻어주고 서용(敍用)하고자 한 것이니, 마땅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있는 힘을 다하려 해야 할 뿐이다. 사람들의 말이 과연 어떤 사단에서 기인한 것인가. 그런데도 살아서 사람이 되느냐 죽어서 귀신이 되느냐 하는 중요한 고비에서 법을 굽혀 죽음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준 것이고 보면, 어찌 감히 인사(人事)로써 섞는단 말인가. 더구나 무장(武將)은 자연 달라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의리를 배우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감히 세속에서 말하는 문신 재상들의 인의(引義)하는 잘못이나 본받아서야 되겠는가. 어영 대장 이방일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여 다시는 감히 이러저런 것으로 생각을 내어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서울과 지방의 살인 사건을 심리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살인 사건에 연루된 한경주(韓景周)는 내시(內侍)의 신분으로 외부 사람과 교통하였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히 감죄(勘罪)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법전에 ‘살인 사건에 연루된 통훈(通訓) 이하의 내조관(內朝官)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단해 심문한다.’ 하였다. 내시도 다를 것이 없으니 앞으로는 조관의 예에 따라 서울과 지방의 옥관(獄官)이 스스로 결단해 거행하라."
하였다.

 

5월 23일 기묘

좌의정 이성원을 불러 접견하였다. 성원이 사람들의 말 때문에 성 밖으로 나아갔다가 누차 돈유(敦諭)를 받고서 지금에서야 비로소 등연(登筵)한 것이다.

 

고 대교(待敎) 이곤수(李崑秀)의 천장(遷葬) 때에 전상(奠床)과 역군(役軍)을 주라고 명하였다.

 

5월 24일 경진

김문순(金文淳)을 이조 참판으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김익휴(金翊休)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25일 신사

대사간 윤호(尹㬦)가 상소하여, 김우진(金宇鎭)·조시위(趙時偉)와 의원(醫員)·유온(乳媼)을 성토하니, 전교하기를,
"전에 ‘슬픔을 끼친다.[貽慽]’는 두 글자로 하교한 뒤로는 자못 조용했는데, 근래 또 갑자기 다시 시끄럽게 굴면서 여전히 옛 글을 베껴 올리니, 이 일은 성실하지 못한 데 가깝다. 이것도 이미 의심할 만한데 하물며 내가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려움없이 꼬치꼬치 말하였으니 어찌 이런 사리가 있을 수 있는가. 진실로 조시위를 섬에 가극(加棘)하는 일이 목전에 닥쳤기 때문에 그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고자 한다면 한두 언관(言官)이 그 일만을 들어 말하는 것은 오히려 괜찮다. 그런데 지금 괴상한 말들을 주워모으고 성명을 나열해 써서 문장이 늘어지지 못할까 말이 길지 못할까 걱정하듯 하였으니 어찌 더욱 한심하지 않은가. 원소(原疏)는 모두 되돌려주고 아울러 체차하라. 앞으로 별로 논란할 만한 일이 없는데도 다시 잘못된 규례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비록 하루에 1백 장의 소를 올리더라도 결코 비답을 내리지 않을 것이니, 삼사의 신하들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라."
하였다.

 

5월 26일 임오

차대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유학(幼學) 조익(趙)의 상소로 인하여 강화(江華) 길상 목장(吉祥牧場)에 경작을 허가하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에 대해 강화부에 물었더니, 유수의 장계에 ‘본 목장의 주위에 논을 뜰 만한 땅이 거의 5, 60섬지기나 되고 밭을 일굴 만한 땅도 수백 섬지기를 밑돌지 않습니다. 목장의 말이 과거에는 4백여 마리나 되었으나 지금은 1백 36마리에 불과하니, 본부 관할인 매음도(煤音島)·장봉도(長峰島) 등의 목장으로 옮기더라도 넉넉합니다. 그리고 본 목장의 동쪽은 포구가 평탄하게 틔여 실로 남쪽에서 오는 배들이 화물을 뭍으로 내리는 첫번째 노정(路程)이고, 인천(仁川)·부평(富平)·남양(南陽)·수원(水原) 등지에서 배를 타고 강화로 올 경우에도 역시 이 길을 경유합니다. 특별히 들어가서 경작하도록 허가하신다면 편안할 시절에는 양곡을 넉넉하게 할 수 있고 위급할 때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사복시의 한 제조는 길상 목장에 소중한 것이 있다 하여 과감하게 결정을 하지 못하는데, 그가 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팔준마(八駿馬)일 것입니다. 설령 팔준마가 이 목장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어찌 경작해서는 안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제공이 아뢰기를,
"대체로 감필(減疋)한 뒤부터 군보(軍保)가 바치는 것이 쌀 6말뿐이므로 큰 고통에는 이르지 않을 것 같지만, 그 기대총(旗隊摠)에서 한 세대주에게 징수하는 것이 12, 3두는 족히 됩니다. 이렇게 징수하지 않고는 군문(軍門)에 상납할 길이 없기 때문이니, 각 군문에 엄히 신칙하시어 봉납(捧納)이나 인정채(人情債)에 있어 혹시라도 앞으로 커질 수 있는 나쁜 선례를 없애소서. 또 해도(該道)의 감사로 하여금 고을의 원들을 엄히 단속하여 쌀 받아들이는 일을 기총(旗摠)에 맡기지 말고 으레 받아들일 6말 이외에 잉미(剩米)로 1말 이상을 받지 못하게 하면 거의 곤궁한 백성들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밤낮으로 잊지 못해 하는 일념은 매양 감필·균역(均役)한 선대왕의 성덕을 계승하는 데 있었으니, 이 보미(保米)를 12두에서 6두로 감한 것도 바로 선대왕의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친 것으로 감필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목면(木綿)의 필수를 감한 것도 오히려 순전(純錢)을 감한 것과는 달라 길이의 장단과 새[升]의 굵기를 가지고 중간에서 농간하는 폐단을 막기 어려운데 하물며 이 보미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이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시정하고자 하였으나 사세를 감안할 때 방법이 없었다. 대체로 군문이 있으면 자연히 군교(軍校)가 있고 군교가 있으면 자연히 군량이 있기 마련인데, 훈련 도감의 지방(支放)은 대체로 호조의 경상비(經常費)에 의존하지만, 금영(禁營)·어영(御營) 두 영은 이 보미가 없으면 살림을 꾸려갈 방도가 없다. 이 때문에 혁파하고자 하면서도 아직 혁파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즈음에 우의정이 아뢰는 말을 들으니 더욱 가엾음을 깨닫겠다. 지금 만약 군량의 제도를 영원히 혁파하기 어렵다 하여 받아들일 때 조종하는 폐단마저 금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보미에 균역을 시행하기 전에 12두를 징수하던 폐단이 여전할 것이니, 본사는 규례에 얽매이지 말고 각별히 여러 도에 신칙하라."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증열미(拯劣米)를 백성들에 흩어주었다가 가을에 새 곡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백징(白徵)과 대동 소이하므로 백성들이 모두 돈으로 대납(代納)하기를 원합니다. 듣건대 고 상신(相臣) 정홍순(鄭弘淳)이 이런 내용으로 진달해서 윤허를 받았다고 합니다. 대체로 돈으로 받으면 처리하기 쉽고 쌀로 받으면 번번이 포흠(逋欠)이 쌓이게 되니, 설령 값을 헐하게 정하더라도 오히려 매양 탕감해 주어야 하는 누적된 포흠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홍주(洪州)에서 돈으로 바치기를 청하기 때문에 당년조(當年條)부터 차례로 체감(遞減)하여 가장 오래된 연조의 쌀값을 2냥 5전까지 줄였습니다. 이것이 본조의 규정인데 만약 선혜청이 이 규례를 모방해 사용한다면 민폐가 쌀로 징수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당년조는 3냥으로 정하고 당년조 이상은 2냥 5전으로 정하고 가장 오래된 연조의 것은 특별히 2냥으로 허락한다면,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기보다는 차라리 국가에서 손해를 본다는 뜻에 어긋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지금 호조·선혜청의 증열미 초록(抄錄)을 보건대, 간혹 경자년조가 있으니 금년까지 무려 10년이 되었고 이 이하의 것들도 7, 8년을 밑돌지 않았다. 이것을 구환(舊還)014)  과 다름없이 해마다 독촉해 징수하므로 허수(虛數)와 실수(實數)가 서로 섞이기 쉬우니 백성들에게 있어서 어찌 매우 괴로운 폐단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배가 침몰하는 지방이 늘 다른 도에 분산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도의 백성들이 여러 해 동안 받은 증열미도 마련해 바칠 겨를이 없는데, 금년 또 명년에 새로 받을 증열미는 점점 늘어날 것이니, 바다에 인접한 고을 백성들의 실정을 생각할 때 어찌 불쌍하지 않겠는가. 애당초 거론하지 않았다면 그만이지만 전에 영성군(靈城君)015)  과 고 재상016)  의 말이 있었고 지금 또 우상의 건의가 있어 작전(作錢)의 정식(定式)을 비로소 널리 여러 도에 반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에 미쳐 반드시 쉽게 행하고 쉽게 효과를 볼 수 있는 거조가 따로 있은 뒤에야 백성들이 실지의 혜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로는 증열미의 수봉(收捧)을 구환을 수봉하는 새 정식(定式)에 따라 호조·선혜청에서 기한에 앞서 여러 도에 영(令)을 반포하여 먼저 가장 가까운 연조(年條)부터 받아들이고 해마다 미수(米收)도 1년치를 넘지 못하게 할 것을 정식으로 삼고, 가장 오래된 것인 갑진년 이전의 증열미는 모두 탕감해 주라. 지금 갑진년 이전으로 한정하는 데는 뜻이 있다. 이해에 탕감하는 정사가 있었으나 각 고을의 연조(年條)의 경과된 정도가 각기 다른 데 구애되어 혜택이 고르지 못하다는 탄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남한 산성의 습조(習操) 때에 보미(保米)의 폐단이 있기 때문에 과거 병자년에 수어사 이철보(李喆輔)가 합동 조련을 실시하려 하자 대궐문 밖에 괘서(掛書)하는 변고까지 있었다. 때문에 그 뒤로는 수어사가 습조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대해 감히 마음도 먹지 못하여 윤조(輪操)마저 아울려 폐지되었으니, 이는 대체로 수어청의 규정이 습조한 뒤에야 비로소 산조(散操)를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외읍(外邑) 사람으로 군적(軍籍)에 예속된 자들은 조련의 정사가 있는지조차 모르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는가. 합동 조련은 갑자기 실시하기 어렵겠지만, 윤조는 형편을 보아 실시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니 해청(該廳)에 물어 편의에 따라 규칙을 정하라."
하였다.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부(喬桐府)에 다시 설치하고, 부사를 올려 수군 절도사로 삼고, 심도(沁都)017)  에서 겸관(兼管)하던 것을 파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전 방어사 임률(任嵂)의 장계에 의하면 ‘기해년에 제도를 고친 뒤로 관하(管下)의 5진(鎭)과 3도의 주사(舟師)가 모두 강도(江都)에 소속되고, 단지 1사(司)의 외로운 군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강도에 배를 매어 두는 곳이 거의 육지와 같으므로 상현(上弦)과 하현(下弦)에 있는 두 차례의 썰물 때를 당하면 1백 척의 배가 있다 하더라도 거의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해서(海西)·관서(關西)의 뱃길은 모두 강화 뒷쪽으로 통하지만, 삼남(三南)의 뱃길 중 하나는 덕적도(德積島) 앞바다로부터 본도(本島)를 스쳐지나 강도의 뒤로 통하고, 하나는 영종도(永宗島)로부터 강도의 앞으로 통합니다. 강도 앞바다에는 험한 손돌목[孫石項]이 있으니 적이 만약 수세(水勢)의 험하고 평탄함을 안다면 어찌 덕적도의 뱃길을 버리고 도리어 험한 손돌목을 취하겠습니까. 이를 가지고 따져볼 때 서쪽과 남쪽으로 통하는 뱃길의 요충으로는 본도(本島)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군교(軍校)들의 생활수단은 오직 통어영에서 받던 요포(料布)뿐이었으므로 통어영을 옮긴 뒤로는 이미 굶는 사람이 많아 이민(吏民)이 뿔뿔이 헤어져서 군대를 뽑을 길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론을 듣건대 모두 통어영을 강화로 옮겨 소속시킨 것이 옛사람들이 제정해 설치한 뜻에 크게 어그러졌다고들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작년에 본사(本司)의 초기(草記)에 대해 내린 비답에서 이미 은미한 뜻을 보이고서 형편을 관망하려 했던 것도 잘못된 계책이었다. 지금에 와서 관방(關防)의 허실이 이미 이러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찌 시정하기를 꺼리겠는가. 이보다 큰 수어청이나 총융청도 내직(內職)에 소속시키기도 하고 외직에 소속시키기도 하는데 하물며 한 곤임(閫任)이겠는가. 경이 아뢴 바에 따라, 오늘 도정(都政)에서 수사(水使)를 다시 설치할 것으로 재가(裁可)하고 강화 유수가 겸관(兼管)하는 것도 혁파하게 하겠다."
하였다.

 

장용영(壯勇營)에 전교하였다.
"명(明)나라 총병관(摠兵官)이며 조선국의 정헌 대부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숭정 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가 충민(忠愍)인 임공(林公)의 공과 절개는 우주에 가득하고 해와 별처럼 빛나서, 이미 전도된 지경에서 강상(綱常)을 붙잡아 세우고 이미 끊어진 사이에서 의리를 천명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가 오랑캐가 될 뻔한 수치를 충민공이 우뚝히 일어남에 힘입어 깨끗이 씻고 또 면하게 되었으며,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높이고 보답하는 조정의 전례(典禮)가 없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충민공을 버리고 누구를 먼저하겠는가. 그러나 한갓 백세(百世) 뒤의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하여 공과 절개를 시끄럽게 칭송하게 하는 것이 그 후손을 수록(收錄)해서 그 비슷한 본보기를 찾아 보는 것만 못하니, 이 이전에 후손을 수록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던 나의 뜻이 어찌 옅은 것이겠는가.
더구나 즉위한 초기에 먼저 달천(㺚川)에 있는 사당을 중수하고, 이내 공의 셋째 형의 마을에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고 공에게도 사제(賜祭)하였음에랴. 수년 후에 또 사제하고 이어 시호를 내렸는데 제사에는 소뢰(少牢)를 사용하고 제문은 내가 친히 엮었다. 사우(祠宇)를 중수하고 무덤을 수호하는 민호(民戶)를 두었으며,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진상(眞像)을 그리게 하였다. 그러고도 마음에 차지 않아서 특별히 부조지전(不祧之典)으로 정하고 의주(義州)의 영당(影堂)에 사액(賜額)하고 사액하는 날에 또 치제(致祭)하였으며, 특별히 공의 유문(遺文)과 유적(遺跡)을 채집해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인쇄에 부쳤다.
공의 부인 정경 부인 이씨의 의열(義烈)과 절개도 공에 못지 않기 때문에 역시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을 정표(旌表)하고 그 정문의 이름을 쌍성지려(雙成之閭)로 고치게 하였다. 정문을 세우는 역사가 끝나자 또 특별히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어 그 후손들에게 주어 묘소 앞에 세우게 하되 관찰사가 조력(助力)하고 그 고을 수령이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으니, 충민공의 영령(英靈)이 있다면 영웅의 눈물이 반드시 주체할 수 없이 흐를 것이다.
근자에 충민공의 후손이 과거에 급제하고 자급(資級)이 오름으로 인하여 잊지 못해 하는 뜻을 누차 펼쳤는데, 마침 본영(本營)의 파총(把摠) 자리가 비었기 때문에 그를 차임하게 하고 와서 뵙는 날에 의복과 군장(軍裝)을 갖추어 주게 하였다. 임금은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것도 아껴야 하는 것이고 보면 은상(恩賞)을 삼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한데도 이번에 상례를 벗어나 특수한 은전으로 돌보아 주는 것은 첫째도 충민공의 집안을 위해서이고 둘째도 충민공의 집안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더구나 세대가 멀어져서 사적이 묻혔으니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면 한 영의 장교나 졸개가 어떻게 충민공의 공적과 절개를 알겠는가. 표장(表奬)에 관계된 일이면 미세한 행적까지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기입하고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에 기재하는데 하물며 충민공의 일이겠는가. 이런 내용으로 전령하여 장교와 졸개들을 효유(曉諭)한다면 풍속과 교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 옛사람의 평범한 문자(文字)보다 열 갑절이나 나을 것이니 이 뜻을 모두 각자 알도록 하라."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5월 27일 계미

형조가 죄인 필모(弼謨)를 귀양보내라는 명이 내렸으나 거행할 수 없다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금부나 본조(本曹)를 막론하고 초기(草記)로 방계(防啓)하는 폐단을 한 번 엄히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거행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경우 상소하여 소견을 진술하는 것은 직무상의 일을 가지고 간언하는 뜻에 해로울 것이 없겠으나, 승정원이나 대간의 계사(啓辭)처럼 초기로써 곧장 앞서 내린 명령을 취소하도록 청하는 것은 일의 체통으로 볼 때 산만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외번(外藩)의 국토를 지키는 신하들까지 간혹 장계로 ‘곧장 거행할 수 없는 연유를 치계(馳啓)한다.’고까지 하니 어찌 이러한 나라의 체모가 있을 수 있는가. 이후로는 초기로 취소를 청하는 잘못된 관례를 영원히 개혁하라. 외방에는 묘당으로 하여금 행회(行會)해서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이정규(李鼎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28일 갑신

춘당대에 거둥하여 전경 무신(專經武臣)들에게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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