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신유
윤대(輪對)하였다. 예조 정랑 이복휴(李福休)가 아뢰기를,
"서원(書院)은 곧 학문을 장려하는 곳인데도 요즈음에는 선비들이 학문을 갈고 닦는 효과는 전혀 없고 한갓 잡인(雜人)들이 먹고 마시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원에 의탁하여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자가 매 서원마다 거의 1백 명이나 되고 있으니, 지방 고을에서 군정의 수를 채우기 어려운 점이 꼭 거기에 연유하지 않는다 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서원을 설치한 목적이 어진이를 높이기 위한 것이므로 이를 하루 아침에 철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각 고을의 향교 곁에 따로 한 서원을 설치하고 경내의 서원을 모두 모아서 함께 제향하며 향교의 수복(守僕)을 시켜 지키도록 하는 동시에, 서원에 딸린 전토(田土)는 본 향교에 귀속시키고 노비는 본 고을에 소속시키며 원생(院生)은 각기 군역에 돌아오게 한다면 각 읍의 군보(軍保)를 채우기 어려운 걱정도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묘당(廟堂)에서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10월 3일 계해
군기시 제조 이경무(李敬懋)를 파직시켰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상차하기를,
"무기고에서 자체 추천한 낭관(郞官)을 신이 삼망(三望)을 갖추어 해조(該曹)에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조 이경무가 한두 사람으로 추천해달라고 요구하기에 신이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더니 여러 차례 오고 가면서 말이 점차 과격하여지고 심지어는 해조에 보낼 때 그 공문을 작성하지 않으려고 도장을 가지고 가겠다는 말까지도 서슴없이 말하여 보내왔습니다. 신이 비록 늙고 어둡지만 직위로 말하자면 대관(大官)인데 그가 어찌 감히 그런 패역스런 버릇을 함부로 가한단 말입니까. 신의 본직 및 겸직한 모든 직임을 빨리 해임시켜서 대관으로서 나약한 자의 경계가 되게 하시고 이어 경무에게도 잘못에 대한 벌을 내려 기강을 제고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제조의 행위는 극히 놀랍다. 국가 체통으로 보아 엄중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해당 제조 이경무에게 영영 서용하지 않는 법을 적용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연분(年分)을 마감할 때 만일 밭농사의 재해를 뒤섞어 넣은 폐단이 있으면 연분을 멋대로 정한 예[擅分例]에 따라 도신(道臣)을 논죄하는 조항이 사목(事目)에 실려 있습니다. 강원 감사 심진현(沈晉賢)이 밭농사 재해를 더 잡아달라는 청을 하여 사목을 위배하였으니, 그를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특명으로, 탁지부 사목에 의해 재해로 잡아주고 남은 수를 그대로 도백에게 넘겨 주어 완급에 따라 배정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전주 사람 이달배(李達培)가 상언하기를,
"본 고을 발봉(鉢峰)은 곧 우리 목조(穆祖)가 탄생한 곳으로서 《풍패기(豊沛記)》와 이경전(李慶全)의 가요에 모두 근거가 있습니다. 비석을 세우고 구역을 정하여 아름다운 유적임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도신에게 명하여 그 터를 직접 살펴보고 관계되는 문적들을 널리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치계(馳啓)하기를,
"목조가 잡은 집터는 범범히 발산의 남쪽이라고 일컬어오는데, 바로 현재 남문(南門) 밖의 주위 7, 8리(里)가 되는 지역이 모두 발산의 남쪽입니다. 목조가 탄생한 옛 집터가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는지 확실한 고증이 없고 지방 백성 한 사람의 어렴풋한 전설를 믿고 유지로 단정짓는 것도 사체를 신중히 하는 도리가 아니며 이경전의 가요도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그리고 《풍패기》 내용도 바로 재관(齋官)이 사사로이 수집하여 만든 등록(謄錄)이어서 그 또한 다 믿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그 일을 더 거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정대용(鄭大容)을 이조 참의로, 윤범행(尹範行)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0월 5일 을축
차대하였다.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상납할 때 지방 고을에서 돈으로 대신 바치거나 경강(京江) 가의 백성으로서 공물을 사서 대신 바치는 자는 포도청이 별도로 기찰을 가하여 수령은 장물죄로 논하여 처벌하고 경강 가의 백성은 사형에 처하라고 신칙하였다. 이는 선혜청 제조 정민시(鄭民始)와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의 말을 따른 것이다.
집의 송익효(宋翼孝)가 아뢰기를,
"작년에 남쪽 지방에는 근래에 없는 흉년이 들었는데도 다행히 성상의 구휼의 은택에 힘입어 굶어죽는 지경을 면하고 이러한 풍년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리로 논하자면 이와 같은 풍년에는 전부터 내려온 납부 기한을 물려준 환곡을 다 받아들여야 되겠지만 마치 중한 병을 치루고 나서 겨우 소생한 것과 같은데 또 묵은 빚을 독촉하여 징수하면 아마도 어렵고 곤공하게 될 걱정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지역을 똑같이 감면해줄 수는 없겠으나 풍년이 든 가운데서도 여러 읍 중에는 우열의 차이가 있을 것이니 그 중 가장 나은 곳은 근년에 밀린 몫만을 받아들이고 그 나머지는 예전대로 납부 기한을 물려주었다가 앞으로 여러해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차차로 받아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재작년 몫은 그대로 납부 기한을 물려주도록 허락하여 3년간의 몫을 일시에 묶어서 바치는 폐단을 제거하게 하였다.
장령 정의조(鄭毅祚)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좁아서 수레로 짐을 운반하는 것이 편리하지 못하고 오직 북도의 함흥(咸興) 등 여러 곳에서만 백성들이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원부(水原府)는 지형이 평평하여 함흥과 다를 바가 없으니 지금 함흥과 똑같이 수레로 운반하는 제도를 창안하여 강과 바다에서 나는 산물과 남쪽과 북쪽에서 생산되는 화물을 손쉽게 수송하여 유통하게 하면 틀림없이 고을의 수용(需用)과 주민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수레 제도를 강구하고 백성들을 지휘해서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10월 6일 병인
이조 참판 이재학(李在學)과 참의 정대용(鄭大容)을 체직하고 심환지(沈煥之)·이면긍(李冕膺)을 대신 임명하였다. 이문원(李文源)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0월 7일 정묘
전교하였다.
"경술년 치의 묵은 환곡을 북관(北關)은 이미 다 탕감하였다. 근래 들으니 경기와 황해·평안도에도 그해 묵은 환곡이 있다는데, 동일하게 대하고 경사를 함께 하는 뜻에서 어찌 한쪽은 탕감하고 한쪽은 탕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 도의 경술년 치의 묵은 환곡을 북관의 예와 똑같이 탕감하도록 하라."
10월 8일 무진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병조 참판 임제원(林濟遠)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일전의 빈대(賓對)에서 어가(御駕)를 따르는 사람들의 복색에 대해 변통의 논의가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의 아뢴 내용이 편리 여부만을 범범히 논했을 뿐 실제로 사용하는 데 있어 어떠할지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태평하고 안락한 때라 논의가 그러했던 것은 괴이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신은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복장 종류가 너무나 많은데, 군대 복장에 있어서도 융복(戎服)과 군복(軍服)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융(戎)은 군(軍)과 그 의미가 동일한 데도 굳이 구별을 두어 그 제도를 다르게 하고 이름을 융복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의의가 없습니다. 북포(北布) 온 필(匹)의 비단을 재단하여 대략 상고 시대의 의상처럼 만들고 또 절풍건(折風巾)에는 짙붉은 채색을 정교하게 칠해놓아, 넓은 소매에 넓은 채양이 이미 선명하고 아름다운데 또 치자물을 들여 장식하고 밀랍을 발라 꾸미니 모두 겉꾸밈만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갓을 쓰고는 세찬 비바람에 견디지를 못하고 이 옷을 입고는 말타고 달리기에 편리하지 못하여, 실제 사용하는 데는 온갖 방해로움만 있고 조금도 편리한 점은 없습니다. 이 제도가 《대전속록(大典續錄)》에 처음으로 보이는데,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찍이 《임진기문(壬辰記聞)》 가운데에서 고(故) 장신(將臣) 이일(李鎰)이 철릭[帖裏]과 종립(鬃笠)을 빌려 입고 썼던 일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보면 의주 파천 당시 호위 신하들의 복색을 알 만한데, 당시를 상상해보면 진흙길에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갈 적에도 오히려 남색의 철릭을 입고 자색 입을 쓴 채 바람에 쭈그러지고 비에 젖어 늘어졌을 것이니, 만일 불행히도 갑자기 적과 만났더라면 그 복장으로 어떻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평상시 군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가 갑자기 전쟁을 만나 미처 변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효종(孝宗)께서는 무비(武備)에 관심을 두어 좁은 소매의 짧은 옷을 생각하셨다가 간신(諫臣)들이 상소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새로 큰 난리를 겪은 나머지 전쟁에 임하는 차림새를 갖춘 것은 깊은 생각과 원대한 계획으로 반드시 편리한 것을 헤아리고 알맞은 점을 고려하여서였던 것입니다. 아깝게도 그 법이 문무 백관들에게 끝내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지만, 실로 태평 시절에도 전쟁에 대한 준비를 잊지 않고 아무 일이 없을 적에도 언제나 일이 있는 듯이 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역(周易)》에서는 뽕나무 떨기처럼 견고히 하라고 경계하였고 《시경(詩經)》에서는 비오기 전에 대비하라고 읊었던 것입니다. 융성했던 삼대(三代) 시절에도 봄가을로 사냥하는 제도가 있었고, 국초(國初)에도 사냥하는 일을 시행하여 조금은 옛 뜻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근세까지도 교외 거둥을 하여 군무를 다스리고 무예를 익히는 뜻을 약간은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가를 따르는 대소 관원들의 복장이 운신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매우 편리하지 못합니다. 평탄한 길 호위하는 대열에서도 왼쪽에 걸리고 오른쪽에 끌리어 불편함을 면하지 못하는데 만일 위급한 일이라도 있으면 더욱이 어떻게 몸을 놀리겠습니까. 신의 구구한 소견으로는 그래서 반드시 변경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만 당장 재정을 축내야 하는 걱정과 앞으로의 신분 구별의 문제 등도 모두 생각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조정 관원 중에 생활이 좀 넉넉한 사람은 아주 적고 지극히 궁핍한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옷 한 벌과 갓 한 개도 힘을 다하여 겨우 마련하며, 또 어떤이는 임시로 빌려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갑자기 옛 복장을 버리고 새 복장대로 따르게 한다면 물가가 급작스럽게 올라서 힘이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매사가 어려우리라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시위(侍衛)하는 관원과 근신(近臣)만 모두 새 제도를 따르게 하고 뒤따르는 백관(百官)과 도성에 남아 있던 관원이 거둥을 맞이할 때의 복장은 아직 예전대로 하게 했다가 그 다음으로 어가를 따르는 관원들도 새 제도로 바꾸게 하고 또 그 다음으로 도성에 남아 있는 관원들도 모두 바꾸게 하면 2, 3년이 지나지 않아서 옛 복장은 절로 해지게 되고 새 복장을 점차 갖추게 되어 저절로 하나로 통일이 되고 재정도 크게 축내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군복 제도를 동일하게 고치면 높은 관원과 말단 벼슬아치가 구별이 없어지고 사대부와 군졸이 서로 뒤섞이게 될 것이니, 또한 귀한 이와 천한 사람을 표시해야 하는 뜻에 어긋납니다. 신이 듣건대 우리 나라 조신(朝臣)의 복색은 성종(成宗) 때에 처음으로 사(絲)와 주(紬) 두 가지로 당상관과 당하관의 옷을 지어서 등급이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지금 군복에서도 사와 주로 품계에 따라 썼던 규정을 본받아 당상관 이상만 문단(紋緞) 사라(紗羅) 등의 비단옷을 허용하고 당하관은 근시(近侍) 이외에는 모두 모시나 명주 및 석새베[三升]로 만든 옷을 입게 하여 그것으로 신분을 구별하고 비용을 절감하도록 하며, 또 전립(氈笠) 위의 정자(頂子)에다 직급을 대략 표시하되 예컨대 도금한 것, 금으로 새긴 것, 순은으로 만든 것, 은으로 새긴 것, 말총을 맺어 만든 것, 나무로 조각한 것 등으로 구별하며 또 새의 깃과 상모(象毛)로 문관·무관을 구별하면, 역시 문란하고 혼란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군교(軍校)의 복색에 있어서는 모두 예전대로 각각 자기 힘에 따라 하게 하고 꼭 단사(緞紗)나 저주(苧紬)의 등급을 따로 두지 말며 단지 정자(頂子)로써 식별하게 하는 것이 아마 시행상 편리할 듯합니다.
그리고 신이 생각하기에 참으로 제도가 그렇게 바뀌고 나면 철릭과 주립 등의 복색은 다른 데 쓸 곳이 없을 것이니 일체를 영원히 혁파한 뒤에야 비로소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마련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철릭에 있어서는 무신이 평상시에 입는 것이고 도신(道臣)이 관아에서 직무를 볼 때 입는 복색이므로 예전 대로 입게 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신의 이 상소를 내려보내 묘당으로 하여금 취사선택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에서, 철릭을 제거하고 군복을 착용하는 것이 실용적이고 재물을 절약하는 중요한 방법임을 강력히 말했는데, 고증이 해박하고 분석이 자세했으며 심지어 효종 때의 고사까지 인용하여 밝히면서 그대로 서슴없이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저번에 중신 이문원(李文源)이 연석에서 아뢰었을 때 그 말 끝에 즉시 승락을 못하고 따를까 말까 주저했던 것은 다만 풍속을 따라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여론이 어떠한지를 들어보고 싶어서였던 것인데, 경의 청이 또 이와 같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대신과 여러 재신들에게 널리 물어 의견 통일을 본 다음 품처(稟處)하도록 해야겠다."
하였다.
10월 9일 기사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이 상차하기를,
"신이 군복 문제에 관해 구구한 소견이 있습니다. 융복 제도가 어느 때에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요컨대 백 년을 전해온 것만은 분명하며, 전립 위의 호랑이 수염과 새깃도 역시 차근차근 장식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 전하여지지만 그 역시 시행된 지 벌써 오래된 것인데 어떻게 갑작스럽게 바꾸겠습니까. 교외에 거둥하는 것은 곧 군사의 행군이며 또 효종 때 한 번 시험한 전례도 있으므로 시위의 복색을 조금 바꾼다는 것은 혹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모시고 뒤따르는 백관들이 모두 군복을 착용하는 것은 자못 등급을 밝히는 뜻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정전에 나와 앉을 때나 대가가 거둥할 때 운검(雲劍)·보검(寶劍)과 병조·도총부가 구별이 전혀 없는 것도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성 안과 밖을 구별하여 혹은 시행하고 혹은 시행하지 않으면서 군복과 융복 제도를 함께 두기로 하면 그 폐단과 그 비용이 도리어 더 심해질 것입니다. 다시 널리 물은 다음 재량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군복에 관하여, 빈대(賓對)하던 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마치 한 입에서 나오듯하여 너무 흐리마리한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 경이 다른 주장을 내세우니 또한 옳은 생각이다. 널리 물어서 품처하라는 명을 이미 내렸으니 이 차자도 묘당으로 하여금 똑같이 살펴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이성규(李聖圭)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홍억(洪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0월 11일 신미
일차 유생 전강(日次儒生殿講)을 거행하였다. 상이 시관(試官) 등에게 전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태조(太祖)의 탄신일이다. 제술(製述) 시험으로 강경(講經) 시험을 대신한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하고는, 그대로 경서(經書)를 전공하는 유생을 제외하고는 제술로써 강경을 대신 하게 하고 ‘금척(金尺)’으로 송(頌)의 제목을 삼았다. 그리하여 제술에서 수석한 생원(生員) 이동만(李東萬)과 강경에서 수석한 유학(幼學) 김효수(金孝秀)는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윤대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군복의 편리 여부에 대하여 대신과 제신(諸臣)들의 의견을 모아 보았더니,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는 아뢰기를 ‘철릭을 버리고 군복을 착용하자는 주장은 크게 이해가 걸려 있는 일인데 누군들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다만 나라의 법이 언제나 제도를 변경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며 사람들 마음도 처음 보는 제도는 의아하게 여기는 법이니, 지금은 우선 능행(陵幸) 때 시위와 근신들에게만 실시하고 앞으로 서서히 편리 여부를 보아가며 그 다음으로 백관들에게까지 미치면 그것이 신중한 뜻을 가지고 가부를 시험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였고, 병조 판서 정호인(鄭好仁), 장용 대장 김지묵(金持默), 훈련 도정 조심태(趙心泰), 금위 대장 이한풍(李漢豊)은 모두 군복으로 제도를 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옛 제도를 변경하려면 당연히 신중을 기해야 하고 그래서 판부사 박종악(朴宗岳)도 그러한 차론(箚論)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의 생각으로는, 군복과 융복이 모두 시위에 쓰는 복장인데 한 반열 안에서 누구는 군복을 입고 누구는 융복을 입는다는 것은 구별을 하는 데에도 전혀 의의가 없고 의장만 번잡할 뿐일 것입니다. 더구나 전립(戰笠)과 협수(狹袖)를 배위하는 반열이 이미 시험삼아 착용했던 전례도 있으니, 의리에 어긋나지만 않고 쓰기에 편리하다면 변경하는 일이라는 데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순전히 군복만 착용하는 것으로 그 제도를 통일하는 것이 아마 번잡을 줄이고 편리함을 취하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차제에 또 하나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근래 벼슬아치들의 공복(公服)이 소매와 깃의 폭이 점점 넓어져서 자못 옛날 제도에 어긋나고 심지어 조례(皂隷)들의 철릭 소매도 따라서 넓어져서 거의 온 폭의 비단을 쓰기까지 하니 그 낭비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이 역시 바로잡을 방도를 충분히 의논하여 공복의 소매와 깃을 한결같이 옛 제도를 따르게 하고 조례들의 철릭도 되도록 짧고 좁게 하면 옛 제도를 다시 찾고 비용을 줄이는 실질적인 효과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창의(氅衣)는 그것이 비록 한가롭게 지낼 때 입는 옷이기는 하나 그 역시 조정 관원들의 복장임에 틀림없는데 공복 안감을 이왕 푸른색을 쓰면서 자기 집안에서는 반드시 흰색을 입도록 하고 있으니, 이 또한 뒤섞여 복잡할 뿐만 아니라 한갓 낭비만 하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선왕조에서도 일찍이 흰옷 입는 것을 엄금한 일이 있었으니 이렇게 의장(衣章)을 바로잡는 날에 흰색 창의는 영원히 금지하여 잘못된 습속을 꼭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옛날에 없던 일이라도 참으로 유익함이 있으면 단연코 시행하여야 될 것이다. 더구나 이 군복 제도는 예로부터 있었던 것이며 또 더구나 온천에 거둥할 때 입었던 사실이 의문(儀文)에 기재되어 있는 데이겠는가. 그러나 여러 사람들 말이 모두, 융복을 없애고 나서 군복을 착용함이 합당하다고들 하는데, 전립과 철릭은 이미 옛 제도에 속한 것이며 함흥 본궁(本宮)에도 간수해둔 것이 있으니 융복을 없앨 수는 없다. 군복 통용 문제는 일단 그냥두고, 덧붙여 진술한 두 가지 조항은 연석에서 대면할 때 말하겠다."
하였다.
10월 12일 임신
비안 현감(比安縣監) 유한우(兪漢寓)가 상소하기를,
"본현의 각종 곡식이 도합 1만 8천여 섬인데 응당 창고에 있어야 할 1만 5천여 섬 중에 허위로 기록된 것이 1만 2천 2백여 섬이나 됩니다. 아전들이 축낸 것이 7천여 섬이고, 백성들이 축낸 것이 5천여 섬인데, 신이 보리 환자를 받을 때 한 사람 한 사람 샅샅이 조사하였더니 지정하여 물릴 곳이 없는 자가 10명에 4, 5명이나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자와 살아남은 자를 두고 말하여도 거듭 흉년이 든 나머지 다행스럽게도 추수가 있게 되었으니 당연히 집안이 서로 경하하면서 이런 풍년을 즐겨야 할 것인데도 지금 근심하는 사람이 많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 이유는 전에 쌓여 온 포흠을 지금에 와서 반드시 그 수량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포호(逋戶)는 오직 멀리 벗어나가기만을 생각하고 있고 평민들은 마구 징수당할까 두려워서 온 경내가 불안에 떨며 몸둘 바를 몰라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아전이 축내고 백성이 축낸 것 가운데 지정하여 징수할 곳이 없는 3천 6백 섬은 일체 면제하고 그 밖의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연한을 정하고 부과하는 정도를 너그럽게 하여 국가의 곡식이 완전히 소모되지 않으면서 백성들의 힘이 조금이나마 펴지게 하면 온 경내 사람들이 편안히 살 희망이 있을 것 같습니다.
본현의 원래 호수는 2천 9백 19호인데 군역(軍役)에 응해야 할 한정(閑丁)은 5백 호에 불과하며 그것도 작년과 올해에 굶주림과 전염병 때문에 흩어졌거나 사망한 사람이 몇호인지도 알 수 없으니 현재 남아 있는 호수는 4백 호 미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군총(軍摠)은 도합 1천 8백 86명이나 되기 때문에 한 몸이 3, 4명 몫의 군역을 겸하게 되고 한 동네에서 수십 명의 군포(軍布)를 징수하게 되며, 군사 대장마다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이 본현의 군적을 조사해 보았더니 언양(彦陽)·지례(知禮)에서 옮겨온 자가 있으며, 또 듣기에 근래에 전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면긍(李勉兢)이 상소를 올려 요청한 일로 인하여 양인(良人) 장정을 각 고을에 나누어 보낸 것이 1천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옮겨 가고 옮겨 온 군대 인원수는 그 전례가 매우 많은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본현의 군적에 등록된 자로서 도망쳤거나 죽은 자의 대신으로 거리에 관계없이 여러 고을에서 5백 명 정도를 분담하여 넘겨보내주면 경내의 해묵은 고질적 병폐가 가셔질 수 있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안 고을의 폐단은 일찍부터 충분히 들은 바였다. 너를 그 곳에 보임(補任)한 것은 그 폐단을 바로잡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상소 내용을 보니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더욱 알게 되었다. 저번에 영천(榮川)에는 고을 원이 올린 상소로 인하여 소생시키고 구제하는 행정을 크게 시행하였는데, 이제 어찌 한 곳은 그렇게 하고 한 곳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회계(回啓)하게 하여 기필코 폐단을 바로잡도록 하겠다."
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용보(徐龍輔)를 소견하고 풍덕(豊德) 지방의 백성들의 실정을 물은 다음 전교하기를,
"경기 풍덕 지방의 몇 면(面)은 연안·배천과 접경하고 있으니, 백성들의 실정이 우려스럽다. 저번에 번(番)드는 일은 중지하도록 조치를 취하였으나 겨울 이후로 백성들 사정이 어떠한지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 도백을 불러 물어보니 과연 생각했던 바와 같다. 만일 마음을 기울여 돌보아주지 않으면 이 지역과 저 지역이 굶주리고 배부른 차이가 현저할 것이니, 이 어찌 동일하게 보고 골고루 베풀어주는 정사이겠는가. 재해가 더욱 심한 3개 면 중에서 그 우열을 가려 심한 곳은 새 환곡의 3분의 1과 군포(軍布)·신공(身貢)의 전부를 납부 기한을 물려주고, 그 다음 등급은 4분의 1이나 혹은 절반을 납부 기한을 물려줄 것이며, 그 밖에도 백성들을 편하게 할 일이면 수령을 엄중히 신칙하고 충분히 강구해서 각각 자기 고장에 편안히 정착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3일 계유
정대용(鄭大容)을 이조 참의로, 조종현(趙宗鉉)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비안 현감 유한우를 소견하고 고을의 병폐를 물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 비안 현감 유한우의 상소를 보니, 군액과 환곡의 수가 절반 넘게 비고 축이 났습니다. 그 읍의 병폐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즉시 알아내지 못하였으니, 해당 도신은 파직시키고 전후 역임한 수령들은 모두 잡아다가 신문하여 준엄하게 처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환곡의 폐단에 관하여 이미 그것을 바로잡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는데 어떻게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 지정하여 징수할 곳이 없는 3천여 섬은 특별히 탕감하고, 그 나머지는 곡식을 받아들이는 일을 도신에게 맡길 것이며, 군정(軍丁)에 관한 일은 군적에 등재된 이외의 4백여 명은 전부 혁파하고, 그 중에서 뒤에 나오는 일이 없을 수 없는 자는 도백이 여유 있는 고을에다 배정하게 하고 그 전말을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명색이 고을이 있고 수령이 있으면서 근 2만 섬의 곡식 총수량 중에서 남은 수량이 2천 섬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데도 그럭저럭 덮어두었다가 이제서야 비로소 발각되었으니, 그러한 수령을 엄중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겠는가. 직접 고발을 받아서 잡아 가두고 엄하게 조사하라. 도백을 놓고 말하더라도 작년에 이미 조사하여 바룬 일인데 감히 알지 못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인가. 도신 정대용도 잡아다가 신문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이윤경(李潤慶)을 햇수를 정하지 말고 금갑도(金甲島)에 충군(充軍)하라고 명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장계하기를,
"초산 부사(楚山府使) 조흥진(趙興鎭)이 공문을 올려 아뢰기를, ‘본부의 화전(火田)에서 매년 세미(稅米)로 바쳐야 할 실제 수량은 1천 6백여 섬인데, 올 가을에 집복(執卜)한 수량에 준하여 묵은 밭과 폐기한 밭을 계산하면 백지(白地)에서 징수한 세금이 7백여 섬이나 됩니다. 대체로 본부는 거듭 흉년을 만나서 민호(民戶)가 날마다 줄어들고 화전도 해마다 묵거나 폐기됩니다. 세안(稅案)을 열람해 보면 다른 데로 떠나간 지 벌써 오래되었고 화전터를 답사해 보면 삼(杉) 나무나 회(檜) 나무가 벌써 아름드리 자라 있는 경우가 많은데도 화전에 매긴 조세의 총액은 본래 정한 대로 있어서 전에 70, 80호가 바치던 세금을 지금은 혹 3, 4호에서 징수합니다. 심지어는 원래 화전을 경작한 적도 없고 동쪽서쪽으로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백성들에게 신락세(身落稅)라는 명목을 붙여 이름을 적어서 세안을 만들어가지고 해마다 한 말 닷 되의 곡식을 받아 정해진 총 세액의 부족한 숫자를 채우기까지 합니다. 현재 백성들의 정황이 매우 불쌍한데 만일 지금 당장 변통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백성들이 다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또 본부는 본래 곡식이 많은 고을이지만 호수와 곡물의 수가 서로 맞지 않기로는 열읍(列邑) 가운데에서 가장 심합니다. 몇해 전에 조정에서 적곡(糴穀)의 폐단에 매우 마음을 써서 특별히 혹 발매(發賣)하거나 옮겨다 파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고 혹 상정례에 준하여 돈으로 환산해서 바치게도 하여 4만 섬 가량을 차츰차츰 줄여주었기 때문에 본부의 백성들에게는 그보다 더할 수 없는 혜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진휼미(賑恤米)를 나누어줄 때 모두 새로 받아들인 곡식 중에서 정갈하고 영근 곡식을 쓰는 바람에 묵어 썩은 잡곡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어 지금 쌀로 환산하면 5천여 섬이나 되고, 또 먹을 수가 없게 된 것도 근래에 쌀로 환산해서 3천 섬이나 되는데 이것들은 결국 전부 버리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턱없이 징수하는 화전세를 감면하려고 한다면, 미리 민간에 약속하여, 묵어 썩은 5천 섬을 내년 봄에 온 경내에다 환곡으로 골고루 나누어주고, 또 거칠어서 먹을 수 없는 것 가운데서 2천 섬쯤을 위의 묵고 썩은 곡식과 합쳐 도합 7천 섬을 해마다 나누어준 다음 그 모곡(耗穀)을 받아 화전세의 줄어든 총액을 대신 메꾸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그 밖에 해마다 2천 섬씩을 호조의 상정가(詳定價)로 전례에 따라 발매하여 회계에 올라 있는 원 액수를 줄여나가면 국가로서는 쓸모없는 곡식을 쓸모있는 것으로 만들게 되고 화전민에 있어서는 화전을 묵히거나 폐기하는 일이 없어 턱없이 징수하는 병폐를 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본부의 사정이 이미 이와 같으니 그 부사의 보고한 바에 따라 화전세 가운데 턱없이 징수하는 7백여 섬은 특별히 감면하여 주고, 묵어 썩은 잡곡을 쌀로 환산한 5천 섬과 거친 잡곡을 쌀로 환산한 2천 섬은 해마다 모곡을 받아서 줄어든 세금 액수를 채우면 되겠습니다. 또 호조의 상정가로 발매하는 조항은 해마다 2천 섬씩을 떼어 발매하면 민생을 구제하는 데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후 부임했던 부사들이 한결같이 방치하여 이처럼 숱한 곡식을 버리는 폐단을 만들어 놓았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모두 직접 고발을 받아서 무겁게 처벌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초산에 곡식이 많다는 것은 일찍부터 익히 들은 바이다. 몇해 전에 4만 섬을 한정하여 따로 보태주는 정책을 썼던 것은 오로지 백성들을 편하게 하자는 뜻이었는데, 돈이 부족했던 까닭에 곡식이 거칠어지는 폐단을 낳았고 호조의 상정가로 발매하도록 한 것도 도리어 백성을 해롭게 한 고통이 되었으며, 그 밖에 세금을 거두면서도 턱없이 물리어 백성들을 그처럼 괴롭혔다고 하니, 그 어찌 애써 신칙한 본뜻이겠는가.
두 가지 폐단을 바로잡는 일은 모두 장계로 요청한 대로 시행하게 하고, 조세 감면과 다른 것으로 대신 지급하는 일은 올해부터 시행하도록 하라. 턱없이 징수하는 폐단은, 감영과 고을에서는 단지 화전세만을 말하였으나 원전(元田)에 대해서도 터무니없이 물리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폐단을 바로잡는 때를 당하여 어떤 것은 하고 어떤 것은 아니하여서는 안 될 것이니 경이 다 알아서 일체를 바로잡도록 하라.
오늘 마침 비안현(比安縣)의 환곡에 대한 폐단으로 인하여 처분을 내린 일이 있었으니, 조정에서 모든 백성을 동일하게 보는 도리에 있어 서쪽 백성이라고 영남 백성과 똑같이 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밤을 지새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신신당부하는 것인데 도백과 수령인 자들이 또 여전히 그럭저럭 지내면서 일신의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 어찌 자기 직분을 다했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10월 15일 을해
정언 홍수만(洪秀晩)과 교리 정상우(鄭尙愚)가 상소하여, 죄인 이윤경(李潤慶)에 대한 충군(充軍) 명령을 취소하고 의금부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여 진상을 밝히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황해도 관찰사 이조승(李祖承)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저번에 황해도 연안 등지의 떠도는 백성들에 대해 도신에게 탐문하였더니, 연안은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호수가 4백 90호이고, 배천은 38호, 해주는 44호, 안악(安岳)은 19호라고 하였습니다. 도신과 수령이 그들을 구제하지 못하고 떠돌아 흩어지도록 방치하였으니, 흉년에 이들을 교체하는 데 따른 폐단 때문에 너그럽게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도신에게는 견책 파면의 벌을 내리시고 연안·배천·해주·안악 등지의 수령들은 모두 잡아다가 신문하여 엄히 처리하도록 하소서. 또한 돌아오지 않고 떠도는 자들은 모두 다시 모이게 하여 다 돌아오고 나면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몇해 전에 서도 지방에서 있었던 일과는 같지 않지만 백성들을 편하게 할 대책을 미리 강구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제 고장에서 정착하도록 하지 못한 죄는 차이가 없다. 여러 명의 수령들에 있어서야 조정에 건의를 올릴 길이 그들에게는 없고 백성들 세금을 감면해줄 힘이 그들에게는 없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저 앉아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형편인데 그들을 어떻게 깊이 책망할 것인가. 형편없는 자는 도백인 것이다. 만일 조금이나마 임금의 근심을 나누어 담당하는 도백의 직책을 훌륭히 수행할 마음이 있었다면 보인(保人)이 바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실정을 장계로 아뢰는 일까지 수신(帥臣)에게 뒤질 것이 뭐겠는가. 첫째도 도백의 죄이고 둘째도 도백의 죄인 것이다. 경들이 요청한 견책 파면의 처벌은 오히려 가벼운 처분에 속한다.
대체로 그의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근밀(近密)에 있어 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는 배나 더 성실하고 부지런하리라 생각하고 여러 차례 망설이다가 몸 돌볼 겨를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로 기대를 저버렸으니, 밤낮으로 서도 지방을 걱정하고 있는 내 마음을 체득하지 못한 것이다. 그와 같은데도 한결같이 너그럽게 용서만 하고 내년 보리가 익기를 느슨하게 기다린다면 한겨울과 춘궁기의 백성들 생활에 대하여 마음을 놓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촛불을 밝히게 하고 거듭거듭 신칙하면서 새 도백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은 이차적인 일로 친 것이다. 황해 감사 이조승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평소 인망과 실적과 관리 재질이 있는 사람을 골라 보내라."
하였다.
전 비안 현감(比安縣監) 조형규(趙亨逵)를 의주부(義州府)에, 정동표(鄭東杓)를 청주목(淸州牧)에 귀양보냈다. 환곡을 허위로 기록한 때문이었다.
10월 16일 병자
이태영(李泰永)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10월 18일 무인
기한을 물려주었던 광주(廣州)·남양(南陽)·안성(安城)·안산(安山)·용인(龍仁)·진위(振威)·시흥(始興)·과천(果川) 등의 고을과 수원부(水原府)의 임자년 몫 환곡을 탕감하였다. 전교하기를,
"경기의 여덟 고을에서 나무를 심는 일로 해마다 백성들을 부렸는데 수령에게는 수고에 보답하는 일을 대략 베풀었으나 백성들은 동일하게 보는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소중한 일을 위하여 백성들을 부렸으니 당연히 감사하게 여기는 뜻을 보여주는 정사가 있어야 될 것이다. 올해 조금 풍년이 들었다 하여 작년에 기한을 물려준 환곡을 독촉하여 받아들이려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시기에 은혜를 베풀면 실정에 맞는 정사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8개 고을의 임자년 몫 환곡으로 민간에 있는 것들을 특별히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수원부에도 광주 등지의 고을에 적용한 예에 따라 하도록 명하였다.
이득신(李得臣)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0월 20일 경진
차대(次對)하였다. 상이 대간을 입시하도록 명하자 사관(史官)이 돌아와, 임시철(林蓍喆)과 송익효(宋翼孝)가 지금 막 들어오고 있다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송(宋)나라 영종(英宗)은 옛날의 중간 정도 되는 임금이었으나 비록 미관 말직에 대해서라도 그 성명으로 부르지 않았었다. 우리 나라 가법(家法)도 그러하여 내가 궁중에 있을 때면 비록 주서(注書)라 할지라도 그냥 성명만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주서라고 부른다. 이것도 조정의 예절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상이 대사헌 임시철 등에게 전교하기를,
"바르고 충성 어린 말을 아무에게서나 듣기를 바랄 수는 없으나 요즈음은 침묵이 풍조를 이루고 회피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다. 내게 혹 자신만 훌륭히 여기고 남은 보잘것 없이 여기는 잘못이 있어서인가? 또 혹은 자신의 지혜를 뻐기면서 남의 바른 말을 천리 밖에서 막는 기색이라도 있어서인가? 성토에 관계되는 일이면 소장이 날마다 쌓이고 그렇지 않으면 벼슬아치들끼리 서로 경계하는 말까지도 들을 수가 없으니 이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위로는 임금이 한 일의 옳고 그름과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과 즐거움에 관한 문제를 모쪼록 각기 숨김없이 다 말하라."
하고, 좌의정 김이소(金履素) 등에게 전교하기를,
"창의(氅衣)를 푸른색으로 하자는 것과 소매를 넓게 만드는 폐단에 대해 영상(領相)이 초기(草記)에 첨부하여 아뢴 일이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창의 문제라면 임금이 지시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만일 법령으로 정하였다가 준수하지 않아 실행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차라리 법령을 만들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선왕조에서 휘양[揮項]을 금지했던 일이나 연전에 있었던 철릭에 관한 일을 보면 미루어 알 수가 있다. 만일 경들이 솔선하여 입는다면 모방을 잘하는 지금 풍조로 보아 풍속이 일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니, 이소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창의도 조복(朝服)의 하나이면서 집에서 늘상 입는 옷으로도 되어 있어 사람마다 푸른색과 흰색 두 벌을 반드시 갖추어두고 관아에 나올 때는 푸른색 창의를 입고 집에 있을 때는 흰색 창의를 입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캐보면 대체로 우리 나라 풍속이 흰색을 숭상하기 때문인데, 지금 만약 흰색을 모두 바꾸어 푸른색으로 통일하면 예제(禮制)에도 부합될 뿐 아니라 아마 번잡함을 더는 데도 일조가 될 것입니다. 신들이 당장 오늘부터 솔선하여 푸른 창의를 입겠으며, 혹 상복(喪服)을 입게 되면 그때는 흰 두루마기를 지어 입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소매 넓이가 속옷의 소매 모양 정도에 불과하였다. 어진(御眞)을 우러러보거나 또는 여러 신하들의 화상을 보게 되면 상상할 수가 있다. 이 근래에는 넓은 소매가 점차 더욱 넓어져서 그 넓이가 한 자 하고도 두어 치, 또는 3, 4치나 되니 이 역시 낭비의 한 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예전의 모양을 없애려고 이미 지어진 옷을 잘라버리면 보기에 해괴할 터이니 도리어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예전에 지은 옷을 잘라버릴 필요가 없음은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제에 어긋나고 또 낭비와도 관계되니 이 역시 당연히 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이문원(李文源)이 아뢰기를,
"공복 차림에는 순전히 검정색 신을 신으면서 편복(便服)에는 간혹 흰색 신을 신기도 하여 전혀 의의가 없습니다. 능 행차 때 연한 옥색 옷차림에 이미 검정 건과 검정 띠를 착용하므로 또한 검정 신을 신는 것이 조금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이 뒤로는 공복과 사복을 따지지 말고 흰색 신은 영원히 없애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푸른색 창의에 대한 문제는 푸른색으로 하거나 않거나를 법으로 제도를 정할 것은 없다. 창의는 옛날에 없던 것이 근래에 생긴 복식이 아니고 수십 년 이래로 조복이 되었으며 푸른색을 숭상하는 것은 단지 벼슬아치들에게 있어서의 인사요 도리였을 뿐인데 지금 만약 그것을 하나로 통일하도록 하교하였다가 혹 차질이라도 있게 되면 명령을 선포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경들은 그렇게 알도록 하라. 그리고 검정 신 문제는, 궐문 안에서는 신지 못하도록 금령이 이미 있고 뭇사람들 눈에도 익어져 있다. 그러나 머리와 발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경의 말이 매우 좋다. 지금부터는 흰색 신은 일체 엄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송익효(宋翼孝)가 아뢰기를,
"근래 풍습이 특이한 것을 좋아하여 문체(文體)가 괴벽한 것이 많습니다. 연경(燕京)에서 사가지고 오는 서적이 오로지 새롭고 특이한 것을 취하기 때문에 그런 서적은 처음보는 것이라서 즐기고 좋아하여 쉽게 현혹되어 빠져듭니다. 바라건대 엄격히 금지하고 지금부터는 연경에 가는 길에 서적을 사오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특이하고 괴벽한 책은 말할 것이 없고 사서·삼경이라 하더라도 예전에 나온 것만 해도 엄청난 양으로 많기 때문에 근래에 책 사오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거듭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그대 말이 지금 또 그러하니 사신과 관서(關西)의 도신에게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전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경무(李敬懋)를 서용하여 그전 직책을 다시 제수하였다.
이에 앞서 종묘 추향(秋享) 때 제례를 대행하면서 재랑(齋郞) 임광백(任光白)이 실수하여 술잔을 엎질렀다. 상이 봉심했던 사관(史官)을 통하여 이를 듣고는 의금부에 명하여 잡아다가 신문하고 죄를 논하게 하였다. 의금부가, 이에 대한 근거할 만한 법이 없다고 여쭈자, 상이 승정원에 명하여 고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의 연주(筵奏)를 찾아보고 결과를 아뢰게 하였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종묘서지(宗廟署誌)》를 상고해 보니, 숙종(肅宗) 정묘년에 상이 영의정 남구만에게 묻기를 ‘대왕의 신위 앞에 술잔을 드리고 나서 헌관(獻官)이 왕비 신위 앞에 이르렀을 때 촛불을 손질하는 사람이 만약 대왕 신위 앞에 드린 술잔을 엎질렀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구만이 아뢰기를, ‘이미 드린 술잔을 혹 엎질렀을 경우는 헌관이 다시 술그릇이 있는 곳으로 가서 술을 다시 부어 올려야 할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제 10실에서 잔을 엎지르는 일이 있더라도 헌관이 그때 전(殿) 안에 있으면 다시 가서 술을 부어 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초헌관(初獻官)이 전에서 내려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뒤 아헌관(亞獻官)이 잔을 드릴 때 혹시 처음 드린 술잔을 엎지르거나, 아헌관(亞獻官)이 전에서 내려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뒤 종헌관(終獻官)이 잔을 드릴 때 혹시 첫 번째 드린 잔이나 두 번째 드린 잔을 엎질렀을 때는 초헌관과 아헌관이 벌써 예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갔기 때문에 아마 다시 올라가서 잔을 드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렇게 예식을 정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또 선왕조 계해년에는 상이 친히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 대축(大祝) 이천보(李天輔)가 축문을 읽고 나서 본래 있던 자리로 되가져다 두려다가 소매에 술잔이 걸려 술이 쏟아져 어의(御衣)를 적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상이 여러 집사(執事)들에게 어찌할 것인가를 물었으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수복(守僕) 박진태(朴震泰)가 예전에 있었던 예를 들어 여쭈었으므로 호조에 명하여 쌀과 베를 제급(題給)하도록 하였습니다. 기묘년 동향(冬享) 대제(大祭) 때는 제 1실의 대왕 신위 앞에 술잔을 드린 다음 왕비 신위에 드리던 술잔을 엎질렀는데 종묘령(宗廟令) 안종제(安宗悌)를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 때 이르러 의금부가 죄를 재심리하여 광백에게 탈고신 이등(奪告身二等)을 적용할 것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였다.
10월 21일 신사
장용영 대장(壯勇營大將) 김지묵(金持默)이 아뢰기를,
"본영(本營)의 일로 하여 전좌(殿座)할 때는 대소 군무를 지구관(知彀官)이 대(臺) 아래에서 거행해야 하지만 분부를 받고 명령을 전달하는 일과 신전(信箭)을 받드는 일 등의 절차에 있어서는 아직 정해진 규정이 없습니다. 예전 용호영(龍虎營)을 새로 창설했을 때 금원(禁苑)에서 진법(陣法)을 익히는 등의 그 영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는 사대부 출신 내금위(內禁衛)가 선전관을 겸임한다는 것이 병조의 등록(謄錄)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영의 정원 외 장용위(壯勇衛)는 이미 본영 소속이고 또 지벌(地閥)도 있어서 내금위에 비하여 체면이 자별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본영에서 진치는 법을 익히거나 활쏘기 시험을 하는 등 모든 행사 때는 임시 어좌를 꾸미거나 명령을 전달하는 일 등을 정원 외의 장용위가 맡아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변사가 장용 외영(壯勇外營)의 군제(軍制)에 관한 절목(節目)을 아뢰었다.
【보군(步軍)을 바로잡는 데 대한 절목. 1. 본부(本府)가 방영(防營)일 때는 보군의 정원 총수가 26초(哨)였는데 정원수가 많아서 구차스럽게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본부가 장용영의 외영으로 승격되어 부 전체의 군사를 모두 묶어서 편성하였으니 군제를 반드시 정밀하고 알차게 하기를 힘쓰며 군량도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조달이 된 뒤라야 군호(軍戶)와 군보(軍保)가 서로 도와서 병력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26초 가운데서 근본이 확실하고 체력이 건장한 양정(良丁)으로 13초를 뽑아 부대를 편성하고, 13초는 보군(保軍)으로 강등하여 쌀을 거두어 군사를 기르게 하고 정군(正軍)의 자리가 비게 되면 차례대로 승급시켜 채우되 경영(京營)의 대년군(待年軍)의 예와 똑같이 한다. 그러나 다만 지금은 양정을 확보하기가 극히 어려워서 보군을 양정으로 채우면 7초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나머지 6초는 부득이 사천(私賤)으로 우선 숫자를 메우되 이는 3년을 기한하여 양정으로 바꾸어서 13초의 수를 맞추게 한다. 1. 13초를 이미 3사(司)의 편제로 정하였으니 좌사·중사·우사로 그 사의 이름을 정하고 전사와 후사는 각각 5초를, 중사는 좌초·중초·우초의 3초로 마련한다. 1. 군수품을 실어나르는 복마군(卜馬軍)은 애당초 기병과 보군에 분배하지 않고 각 초에서 혼동하여 사역을 시키므로 자못 일정한 규정이 없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보군 13초의 매 초마다 7필의 말을 마련하여 소속시킨다. 1. 장령(將領) 중 천총(千摠)의 직임은 별로 긴요하지 않기에 내영(內營)에서도 설치하지 않았으니 외영도 내영의 예에 따라 설치하지 않는다. 3사(司)의 파총(把摠)은 경내에서 경력이 있는 당상 무관으로 차출하고, 각초(各哨)의 초관(哨官)은 일곱 자리는 수문장(守門將)·부장(部將)으로 추천받은 자를 임명하고 여섯 자리는 편제를 정하되 선전관·수문장·부장으로 추천받은 사람 중에서 전직 조관(朝官)으로 참상(參上)·참하(參下)와 출신(出身)을 통틀어 차출한다. 추천받은 출신을 이미 별군관(別軍官)으로 편성하였으니 초관을 분배하여 추천하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또 별군관은 군총(軍摠)과는 달리 겸임에 구애받지 않는다. 1. 본부는 원래 외도감(外都監)이기 때문에 군사들 복색도 훈련 도감의 예를 모방하여 전건(戰巾)과 홑동달이[單挾袖], 사방 색깔에 맞춘 더그레[號衣]를 갖추어 간편하고 비용을 줄이는 방도로 하고, 서울 군영의 예에 따라 스스로 마련하게 한다. 군기인 조총(鳥銃)·환도(環刀)·남날개[南飛箇]·화승(火繩)·화약·탄환 등의 물품은 본부의 군기소(軍器所)에 있는 것을 나누어주며, 역시 내영(內營)의 단총수(單銃手)에 대한 규정에 따라 기대장(旗隊長)과 사수(射手)의 활과 화살도 자체 마련하지 말도록 한다. 1. 보군(保軍)의 신역(身役)은 양인(良人)이면 쌀 6두나 돈 2냥씩을, 종이면 쌀 3두나 돈 1냥씩을 외영(外營)에서 편리한 대로 받아들인다. 1. 해마다 원(園)에 거둥할 때에는 몇개의 사(司)와 몇개의 초(哨)가 고을 경계에 모여 대기하였다가 어가(御駕)를 맞이하여 따르며, 읍과 원소(園所)의 역참에서 빙 둘러서서 호위하는 등의 절차는 유수(留守)가 그 날짜 전에 분부를 받아 거행하도록 한다. 보군의 유방(留防)에 대한 절목. 1. 이미 외영을 설치하였고 또 군제를 정하였으니 이제 이 보군도 내영의 향군(鄕軍)들과 함께 번갈아 번을 서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설치한 초기 단계라서 갑자기 의논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해마다 동짓달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우선 행궁(行宮) 방어에 임하게 하여 번갈아 번을 서는 폭으로 치고 또 유방할 때는 날마다 무예를 연마하여 성취함이 있도록 한다. 1. 13초의 군사를 5번(番)으로 나누어 편성하고 번드는 차례는 15일로 기한을 정한다. 동짓달 16일부터 전사(前司)를 시작으로 첫 차례는 3개 초가 하고 둘째 차례는 2개 초가 번을 서며, 다른 사(司)도 이런 식으로 교대한다. 중사는 3개 초로 되어 있으므로 두 차례로 나눌 필요가 없고 사 전체가 번을 선다. 1. 번을 들 때는 해당 사의 파총과 각 초의 초관이 군사를 통솔한다. 군영을 아직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번드는 장소는 편의에 따라 이동할 것이다. 파총은 평상시 장령(將領)이 입직(入直)하던 곳에서 입직하고 초관은 각각 자신의 군사들이 번을 든 곳에 배치되어 입직하면서 통솔하도록 한다. 지구관 1명과 기패관(旗牌官) 2명은 반드시 사리에 밝은 사람에게 맡겨 함께 지휘 감독하게 한다. 1. 자체 훈련은 날마다 실시하되 첫 날과 마지막 날은 훈련장에서 하는 규정과 똑같이 연습하고 중간 날에는 18가지 무예를 《무예도보(武藝圖譜)》에 의거하여 가르치고 시험을 보인다. 번을 든 지 제 11일이 되는 날에는 활쏘기와 화포쏘기의 시험을 보이고 약간의 시상을 실시한다. 1. 자체 훈련할 때나 무예를 시험할 때 교사(敎士)가 없을 수 없으므로 번드는 초는 각초마다 진법 교사(陣法敎士) 1명과 기예 교사(技藝敎士) 1명을 선정하여 전일하게 가르치도록 한다. 1. 번이 교체할 때마다 상번(上番)하는 군사와 하번(下番)하는 군사는 같은 사의 편제를 이뤄야 되므로 반드시 새 번과 묵은 번이 합동 훈련을 하여 사의 단위로 하는 훈련법을 알도록 한다. 중사(中司) 3개 초는 단독으로 번을 서므로 하번하기 하루 전 합동 훈련 조례에 따라 전체적인 훈련을 실시한다. 1. 양인 군보 8백 40명이 각각 쌀 6말, 천인 군보 7백 20명이 각각 쌀 3말을 내는데 쌀을 맡아 거두는 사람 몫을 제하고도 실제 거두는 쌀이 4백 68섬이고, 자기 집에 있는 군관 1백 47명과 금군의 군포를 무는 군관 1백 2명이 각각 쌀 6말을 내는데 쌀을 맡아 거두는 사람 몫을 제하고도 실제 거두는 쌀이 97섬 3말이어서 쌀이 도합 5백 65섬 2말이다. 이 중에서 번든 군사에게 각종 급료로 지급하는 쌀과 잡비로 쓰는 쌀 3백 73섬 11말을 제하고 나면 남는 쌀이 1백 91섬 7말이 된다. 이것은 본부(本府)에 저장해두고 필요한 데 쓰도록 한다. 친군위(親軍衛)의 유방에 관한 절목. 1. 군제의 정원을 줄여서 골라 뽑은 것은 정예한 군사를 편성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기예를 연습하는 일이 가장 요긴한 업무이다. 좌열과 우열로 번을 나누고 외영(外營)에 주둔 근무하면서 한편으로는 행궁(行宮)을 호위하고 한편으로는 날마다 기예를 익혀야 된다. 보병의 근무기간이 동짓달·섣달·정월 이 석달이므로 기병과 보병이 동시에 번을 서는 것은 서로 불편한 점이 있을 듯하다. 반드시 봄·가을 농한기에 열을 나누어 번을 정하되 2월에는 좌열이 3개 번으로 나누어 매번이 10일간씩 34명이 교대하여 근무하고, 10월에는 우열이 좌열의 예와 같이 근무한다. 그리고 번을 들 때는 전진 후퇴의 동작을 겸해 익혀서 기필코 기예를 익힌 효과가 있도록 한다. 1. 부대가 편성된 날짜가 얼마 안 되어 마상 기예(馬上技藝)의 기초를 전혀 알지 못하는데 이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매 열(列)의 장교 가운데서 각종 기예에 익숙한 사람을 교관으로 정하여 가르치고 완전히 익히도록 한다. 1. 이번에 줄인 마보(馬保) 4백 44명 중에 쌀을 맡아 거두는 사람 8명을 제하면 실제 거두는 쌀이 1백 74섬 6말이고, 물자 수송 군사를 줄인 1백 명 중에 쌀을 맡아 거두는 사람 2명을 제하면 실제 거두는 쌀이 39섬 3말이며, 전에 마보를 줄인 2백 4명 중에 쌀을 맡아 거두는 사람 4명을 제하면 실제 거두는 쌀이 80섬이므로 이를 도합하면 2백 93섬 9말이 된다. 장령들 급료로 지급할 쌀과 콩 34섬 12말과, 친군위가 유방할 때 급료로 지급할 쌀과 말먹이 76섬 8말과, 기수(旗手)·원역(員役)의 갖가지 급료로 지급할 80섬 9말을 제하면 남아 있는 쌀은 1백 1섬 10말이 되는데, 이는 외영에 저장해두고 각종 필요한 비용에 대비한다. 친군위의 도시(都試)에 관한 절목. 1. 본부의 마병은 도시가 있고 관무재(觀武才)가 있어서 권장하는 방도가 원래 잘 서있지만 지금 군제를 개편하는 때를 당하여 격려하고 성취시키는 방도를 더욱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봄·가을 두 차례 보이는 도시는 송도와 강화도에서 실시하는 예에 따라 시행하며 규정도 송도의 예를 따른다. 철전(鐵箭)은 1백 보 밖에서 3시(矢)를, 유엽전(柳葉箭)은 1순(巡)에 5시를, 편전(片箭)은 1순에 3시를, 기추(騎蒭)는 한 차례에 5시를, 편추(鞭蒭)는 한 차례에 여섯 번 명중시키며, 조총(鳥銃)은 1순에 3방을 명중시키면 합격자로 한다. 1. 좌열과 우열에서 장원을 차지한 사람과 유엽전·편전·기추에서 전부 맞힌 사람은 신역(身役)과 성명 그리고 기예에서 얻은 점수를 기록하여 계문(啓聞)한다. 좌열의 친군위로서 첫 번째 차례에 장원하였거나 전부 맞힌 사람은 가선(嘉善)이면 위장(衛將)에 제수하고, 절충(折衝)과 추천을 받지 못한 출신[無薦出身]이면 모두 가자(加資)하며, 장교로서 전함(前啣)이 한량(閑良)이면 곧장 전시(殿試)에 응시한다. 두 번째 차례에 장원하였거나 전부 맞힌 사람은 가선이건 당상이건 논할 것 없이 변장(邊將)에 제수한다. 우열의 친군위 한량으로서 장원하였거나 전부 맞힌 사람은 좌열의 예에 따라 곧장 전시에 응시하되 모두 순서대로 구별하고 기록해서 계문하고 해조의 품처(稟處)를 기다린다. 1. 좌열 가운데서 2등이나 3등을 한 사람은 창감(倉監)이나 고감(庫監)으로 차서에 따라 임명하고 어가(御駕)를 수행하는 임무는 그대로 가진다. 우열 가운데서 2등을 한 사람은 곧장 회시(會試)에 응시하고 3등을 한 사람은 본부가 보관하고 있는 쌀로 시상하며 그 일체를 계본을 작성하여 아뢴다. 1. 장원한 사람으로 위장(衛將)에 제수된 자는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에 딸린 기사(騎士)의 예에 따라 전직을 그대로 겸임하게 하며, 곧장 전시에 응시한 사람은 발표를 기다려 별군관(別軍官)으로 전직시켜서 벼슬길을 터준다. 1. 도시의 시관(試官)은 유수(留守)가 주관하고 중군(中軍)과 종사관(從事官)이 참시(參試)하는데, 복장은 융복(戎服)을 입고 거행한다. 유수영(留守營)의 별군관에 관한 절목. 1. 별효사(別驍士)를 창설했을 때 그 선발을 신중하게 하고 그 명칭을 좋게 했던 것은 경내의 무사들이 모두 격려되고 고무되는 효과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출입이 무상하여 대오(隊伍)가 빌 정도로 되었고 한갓 도시와 관무재를 보일 때 서울과 지방 한량들이 요행수로 과거나 차지하려고 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생각하면 군사 행정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지금 군제를 개편하는 이때 당연히 폐단을 바로잡고 실효있는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추천을 받아 뽑힌 한량들이 모두 친군위의 우열에 소속되었기에 무과에 급제한 많은 무사들이 홍패(紅牌)를 안고서 억울하다는 한탄을 할 것이다. 별효사(別驍士)의 명칭을 별군관(別軍官)으로 고치고 그 곳에 원래 살던 사람으로서 무과에 급제한 자 중 사대부 출신으로 선전관 추천을 받은 사람과 중인(中人)·서출(庶出)로 부장(部將)이나 수문장(守門將) 추천을 받은 사람 및 장용군(壯勇軍) 출신을 통틀어 임명 보충하되 말을 바치고 소속에 들게 한다. 그러나 2백 명 정원은 너무 많으므로 그 절반을 줄이고 1백 명으로 좌열과 우열을 편성하여 유수영(留守營)에 직속시켜 뒤를 차단하는 임무를 맡게 한다. 1. 경내의 무과에 급제한 사람으로 이미 군관에 소속되어 있으면 특별히 권장 발탁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초사(初仕) 한 자리는 좌열이나 우열에 떼어주고 5월과 동짓달에 도시를 실시하여 매 기간에 장원한 각 한 사람을 합격한 화살 수에 따라 기록하고 계문(啓聞)하여 매 도목 정사 때 수용의 자료가 되게 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침체해 있는 인사를 진작시키고 한편으로는 무예를 강습시켜, 경내 무사들이 출세하는 길이 이 길이 아니고는 없게 하여 앞날의 기피하는 습관을 막는다. 1. 무과 출신이 적어서 정원을 채우지 못하면 우선 자리를 남겨두고, 혹 출신한 사람이 많고 자리는 적어 정원이 넘치면 다시 품지(稟旨)하여 제도를 정한다. 1. 우열 친군위는 한량들이 과거를 차지하는 길이 되고 좌열과 우열의 별군관은 출신들이 벼슬에 나가는 계단이 되고 있다. 선전관 추천이건 부장·수문장 추천이건 논할 것 없이 무과에 급제하고 나서 추천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면 유수영에서 취재(取才)한 다음 소속시키는데, 이미 유수영 취재를 거쳤으면 병조의 장귀천(將鬼薦) 취재에 이중으로 응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유수영에서 시취(試取)한 뒤에 그에 관한 기록을 작성하여 병조에 보내고 그것을 근거 자료로 삼게 하는데, 역시 금군(禁軍)의 예에 따라 반드시 6개월 기한을 마친 뒤에 도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여 비로소 벼슬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출신 가운데서 만일 금군으로서 어가(御駕)를 수행하여 이미 6개월을 마친 사람은 달수에 구애받지 않는다. 1. 본영에 소속시키는 시취 규정은 출신자를 장귀천하는 규정에 따라 육냥전(六兩箭)을 90보 거리에서 3발을 쏘아 맞히고, 유엽전(柳葉箭)을 1순에 5발을 쏘아 2발을 명중시키고, 편전(片箭)을 1순에 3발을 쏴서 1발을 명중시키며, 기추는 한 차례에 5발을 쏴서 1발을 명중시키며, 병서(兵書)는 조통(粗通) 이상을 하여 도합 5기(技)에서 3기에 합격한 자를 뽑는다. 출신자로써 추천을 거치지 않고 취재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이 규정을 준용하고 이미 취재를 거친 사람은 2기에 합격한 것으로 간주한다. 1. 이미 군관으로 명칭을 고쳐 대열을 만들었고 또 마군(馬軍)의 편제에도 들지 않았으므로 별도로 장령(將領)을 둘 필요는 없고 서울에 있는 군영의 별장(別將)이 권무 병방(權務兵房)을 겸임하는 예에 따라 친군위의 별장이 병방 직무를 겸임하게 한다. 그리고 장무 군관(掌務軍官)은 풍채가 좋고 힘이 있고 근면하고 재간이 있어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하되 좌열과 우열에 각각 두 사람씩을 정하여 병방과 함께 전담하여 일을 처리하게 한다. 새로 소속시킬 때의 취재는 유수가 반드시 직접 실시하여 체모를 높이고, 합격한 무리들은 유수가 명령을 전달하고 임명한 다음 도안(都案)을 작성하여 한 통은 내영(內營)에 올려보내고 한 통은 유수영에 비치한다. 1. 사회(射會) 규정은, 유엽전은 5순, 기추는 3차(次), 편곤(鞭棍)은 1차, 그리고 별기(別技) 가운데서 1기를 1차 보는 것으로 한다. 그러나 여름의 6·7월 두 달과 겨울의 동지·섣달 두 달은 말 위에서 하는 기예는 제외한다. 1. 도시 규정은 별효사(別驍士)를 시취할 때처럼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실려 있는 대로, 철전(鐵箭)은 1백 보 거리에서 3시를, 유엽전은 1순에 5시를, 편전은 1순에 3시를, 기추는 한 차례에 5시를, 편추는 한 차례를 실시하여 시취한다. 1. 도시를 보이는 날짜는 기간 전에 날을 잡아 계문(啓聞)하며, 시관은 유수를 주시관으로 하고 중군과 종사관을 참시관으로 하며 융복을 입고 시행한다. 1. 원(園) 행차 때 어가가 머무는 일, 어가를 맞고 기다리는 일은 유수가 임시해서 분부를 받들어 거행한다.】 상이 내영 외영의 모든 절목을 모두 인쇄하여 각 군영과 다섯 곳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간수하고 제신들에게도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17면
【분류】군사(軍事)
상이 내영 외영의 모든 절목을 모두 인쇄하여 각 군영과 다섯 곳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간수하고 제신들에게도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10월 22일 임오
동지 겸 사은 정사 황인점(黃仁點)과 부사 이재학(李在學), 서장관 정동관(鄭東觀)을 소견하였다. 그들이 하직 인사를 한 것이다.
홍억(洪檍)·민종현(閔鍾顯)을 지경연사로, 황승원(黃昇源)을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10월 23일 계미
호조가 양향 이정 절목(粮餉釐整節目)을 바쳤다. 이에 앞서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양향청(粮餉廳)의 1년 세입(稅入)으로 1년 동안의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호조에서 쌀·베·돈을 가져다가 쓰는 것이 거의 한정이 없습니다. 만일 지금 당장 변통을 하지 않으면 뒷날 폐단이 이루 말하기 어렵겠습니다. 대체로 근년의 결세(結稅) 총액이 가장 많았던 해는 바로 기해년125) 과 경자년이었는데 작년과 올해 지출한 것과 비교하면 거의 3천여 냥(兩)이나 부족합니다. 각 연도의 지출에는 약간 남거나 모자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 숫자를 맞추어 그 부족분을 보충하지 않을 수 없는데, 현재 재정을 마련할 방도로는 다른 방도가 없어 부득이 쓰고 있는 경비 중에서 좀 긴요하지 않은 경비를 우선 적당히 줄여보고 있지만 그 수량은 5백여 냥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나머지 3천 냥 가까운 돈은 떼어낼 만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신이 삼가 연석에서의 하교를 받들어 근래 예산 외에 더 쓴 경우를 조사하여 뽑아본 결과는 무예 별감(武藝別監)의 군복값과 등유값 그리고 겸내취(兼內吹)의 누른색 철릭값 등에 지출된 돈이 2천여 냥이었습니다.
대체로 경비가 부족한 것은 지출 증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둔결(屯結)이 줄어든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신이 지난봄에 그 원인을 깨끗이 바로잡을 방법으로 묵은 둔전을 조사하자는 말을 올리어 다행히 윤허를 받고 각도에 공문을 발송하였는데 황해도를 제외하고는 조사하여 보고한 곳이 없으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둔세(屯稅)의 원래 총액수는 7천 결인데 해마다 줄어서 이제 3천 결 이내가 되었고 또 3천 결도 조금씩 흉년을 당하면서 재해로 인하여 면세하는 경우가 늘 계속되고 있습니다. 갑신년126) 에 세금을 매길 때 원래 가볍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풍년이건 흉년이건 더내고 덜내고 하는 일이 없게 하자는 뜻에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방 고을에서는 군수(軍需)의 중요함을 생각지 않고 둔민(屯民)들의 요구만을 들어주어 오직 삭감하는 것만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지금 폐단을 바로잡는 때를 당하여 모두 조사해서 본래의 결수(結數)를 채우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입니다. 결수가 적어서 상납할 일이 없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두고라도 결수는 많은데 조세를 적게 내어 지나치게 형평이 맞지 않는 곳은 도신(道臣)에게 엄히 신칙하여 신임하는 비장(裨將)을 파견해서 고을 수령과 함께 측량하여 낱낱이 실제대로 환원시키도록 하여 조금이나마 폐단을 바로잡는 데 보탬이 되게 하소서.
또 면세(免稅) 문제로 말하면, 3천 결에 대한 면세는 바로 사목(事目)에 규정되어 있는데 근자에 와서 혹 재상전(災傷田)으로 처리하고 미처 원상대로 환원시키지 못하였거나 토지를 다른 것과 맞바꾸어서 현재 줄어진 숫자가 거의 수백 결이 됩니다. 이 문제는 면세가 안 된 숫자를 찾아내어 다른 둔전에다 그 수만큼 면세를 실시하고 그대로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시고, 그밖의 조세 납부에 따른 폐단에 관하여도 엄격히 절목(節目)을 정하여 별단으로 작성하여 재가를 받은 다음 각도에 공문을 보내 감히 어기지 못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폐단을 바로잡는 이 시기에 예전에 없던 것이 근래에 있게 된 것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이 뒤로는 정례에 따라 내려주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지가 아뢰기를,
"협련군(挾輦軍)이 예전에는 4백 명에 불과하였는데 지금은 6백 명이나 됩니다."
하니, 상이 이 뒤로는 전례에 따라 4백 명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지가 또 아뢰기를,
"연(輦) 앞에 배치하는 군사가 예전에는 40명이었는데 지금은 98명이나 됩니다."
하니, 상이 60명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이르러 절목을 바쳤다.
【1. 본청의 둔전 가운데 3천 결은 실제 결수로 면세한다는 규정이 일찍부터 있어 왔는데도 간혹 3천 결이 차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번에 연주(筵奏)하여 옛 규정대로 하기로 하였으니 일체 정해진 규정대로 면세하지 못한 실제 결수 중에서 3천 결을 채워 면세하기로 규정을 정한다. 1. 본청의 둔세(屯稅)를 절충 조절할 적에 되도록 가볍게 한 것은 대체로 풍년이건 흉년이건 조세 가감이 없도록 하기 위한 뜻에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방 고을에는 여유있는 곳에서 곡식을 옮겨다가 모자라는 곳에 보충하는 방도가 있는데도 조금만 흉년이 들면 곧장 탈을 잡아 감면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이는 기경(起耕)하는 데 따라 세금을 매기는 경우와는 사정이 아주 다른 것이다. 지금부터는 각종 공세(公稅)의 납부 기한을 물려주거나 면제해 주는 때라도 본청의 둔세에 한해서는 핑계를 대어 기한을 물리거나 감면하지 못하고 일체 규정에 따라 정해진 숫자에 맞추어 바치게 한다. 1. 본청의 둔세를 혹 돈으로 대신 바치기도 하고 배로 곡식을 운반하기도 하여 해변과 산골짜기에 따라 각각 정해진 것이 있다. 풍년이 들면 곡식이 여유가 있고 흉년이 들면 곡식값이 뛰는 것은 원래 자연적인 이치인데도 풍년이 들어도 돈으로 대신 내는 것을 반드시 기한을 물리거나 감면하려 하고 흉년이 들면 바칠 곡식을 반드시 돈으로 대신 내려고 하여 풍년이건 흉년이건 탈을 잡아 보고하면서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 뒤로는 돈으로 대신 바치겠다는 요청과 값을 덜어달라는 문서를 지방 고을에서 감히 번거롭게 보고하지 못할 것이고 본청에서는 이의 시행을 허락하지 않겠으며 일체 돈이건 쌀이건 정한 규정에 따라 상납한다. 1. 세금의 납부 기한은 그 군(郡)·읍(邑)의 거리가 멀고 가까움을 우선 고려하여 돈·곡식·무명·베로 구별하여 세금을 매겼는데도 지방 고을에서는 정해진 규정대로 이행하지 않고 아랫것들이 제멋대로 농간을 부리어 기한을 넘기고 거친 곡식으로 바꿔치기하는 폐단이 고을마다 모두 있다. 이 뒤로는 상납 기한을 넘기는 경우와 쌀과 베의 좋은 것을 거친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경우에는 해당 수령을 초기(草記)로 논죄하여 법에 따라 처리한다. 1. 둔전은 그 고을 수령이 관리하기로 되어 있는 것인데 고을 수령이 공공 조세는 생각하지 않고 대부분 사사로운 안면 관계로 반호(班戶)와 둔장(屯長)을 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반호는 둔토를 자기 물건처럼 인식하고 세금을 감면해주므로 본청에 피해가 돌아오게 하고, 절반을 나누어 차지하므로 둔민(屯民)에게도 원망이 미치게 되어 갖가지 폐단이 모두 여기에서 생겨난다. 지금부터는 고을 수령이 혹 사사로운 안면으로 반호와 둔장을 바꾸어 둔전의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본청이 듣고 보는 대로 초기로 논죄하여 법에 따라 처리한다. 1. 본청의 둔세는 그것이 친병(親兵)의 비용으로 쓰이기 때문에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한 포대의 곡식이나 한 냥의 돈이라도 거두지 못했을 경우 그것이 해유(解由)에 구애가 된다는 규정이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는 옛 규정이 그렇다는 것을 밝힌 것이지만 만일 거짓으로 해유를 낸 자가 있으면 발각되는 대로 초기로 엄히 논죄하여 법에 따라 처리하고, 해유는 취소할 것이며 근무 일수를 따져 무겁게 죄를 다스린다. 1. 세곡의 수량을 적은 장부를 만들어 멀고 가까운 거리에 따라 10월부터 동짓달 내에 마감하며 세곡을 바치는 곳도 멀고 가까운 거리에 따라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4월 내에 빠짐없이 상납하고, 돈으로 바꾸어 바치는 몫도 이듬해 3월부터 4월 내에 상납한다. 그러나 근래에 지방 고을들이 이러한 규정을 무시하고 장부를 마감하는 일, 돈으로 바꾸어 바치거나 곡식으로 상납하는 일 등을 한 가지도 기한을 지키지 않아 매우 놀랄 일이다. 각도에 엄중히 신칙하여 기한에 맞추도록 하고 만일 기한을 넘긴 수령이 있을 때는 본청에서 초기로 논죄하여 감영에서 곤장을 치고 5년 동안 금고(禁錮)에 처하도록 한다.】 전교하기를, "이 별단을 이대로 준수하고 어기지 말도록 하라. 경은 경의 아버지가 이를 선왕조에 건의한 일이 있었는데 경이 또 이번에 이 규정을 만들었으니 이 일이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 폐단을 바로잡는 조치에 있어 다른 사람과는 더욱 다를 터이니 마음을 단단히 차리고 일을 추진하여 실질적인 성과가 있도록 하라. 그리고 또 각도에 엄히 신칙하여 조금이라도 전처럼 소홀히 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418면
【분류】재정(財政)
[註 125] 기해년 : 1779 정조 3년.[註 126] 갑신년 : 1764 영조 40년.
전교하기를,
"이 별단을 이대로 준수하고 어기지 말도록 하라. 경은 경의 아버지가 이를 선왕조에 건의한 일이 있었는데 경이 또 이번에 이 규정을 만들었으니 이 일이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 폐단을 바로잡는 조치에 있어 다른 사람과는 더욱 다를 터이니 마음을 단단히 차리고 일을 추진하여 실질적인 성과가 있도록 하라. 그리고 또 각도에 엄히 신칙하여 조금이라도 전처럼 소홀히 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4일 갑신
금산현(金山縣)의 1백 세된 노인 여선걸(余善傑)을 소견(召見)하였는데, 그의 자손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뜰에 오르도록 한 다음 술을 내리고 비단도 하사하였다. 전교하기를,
"경상도 금산에 사는 1백 세 노인 여선걸이 근력이 강건하여 말을 타고 서울에 들어와서 도보로 대궐 밖을 왕래한다고 듣고 오늘 그를 불러 접견했더니 깨끗한 얼굴이 불그레하여 마치 60세 안팎의 나이와 흡사하였으며, 아이같이 튼튼한 이와 동자 같이 더부룩한 검은 머리가 세상에 드문 상서로운 인물이었다. 또 출생한 해를 물었더니 갑술년이라고 대답하였다. 나이 많은 노인을 존경하고 우대하는 도리상 당연히 특별한 뜻을 보여야 할 것이다.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특초(特招)하고 오위 장(五衛將)에 단망(單望)으로 임명하도록 하며 이어 동지중추부사를 예겸(例兼)하게 하라. 또 탁지장(度支長)으로 하여금 옥관자를 만들어 지급하도록 하고 음식물·옷감과 잔치에 필요한 물품은 그 도로 하여금 마련하여 지급하도록 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말도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6일 병술
장용영(壯勇營) 군사들의 요패(腰牌)에 관한 규정을 정하여 궐문을 출입할 적에 증명이 되도록 하였다. 이는 본영의 아룀에 따른 것이었다.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영 군사에게 대비교(大比較) 시예(試藝)를 실시하였다.
의주 부윤 이의직(李義直)이 헌서 재자관(憲書齎咨官) 홍택복(洪宅福)의 수본(手本)을 가지고 치계하였다. 수본에 아뢰기를,
"영길리국(咭唎國)은 광동(廣東) 남쪽에 있는 해외 나라로서 건륭(乾隆) 28년127) 에 조공(朝貢)을 바쳐왔었는데 올해 또 바쳐왔고, 두목관(頭目官)으로 온 매카트니〔嗎戛𠶀, McCartney〕와 스탠턴〔呢嘶噹㖦, , Stanton〕 두 사람은 영길리국 왕의 친척이었으며 그들이 바친 공물(貢物)은 모두 19종입니다. 【서양 포랍니대리옹(布爉尼大利翁) 큰 틀 1대는 하늘의 해·달·별과 지구의 전도(全圖)에 관한 것인데 해·달·별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만일 일식·월식 및 별의 도수가 어긋나게 되면 모두 틀 위로 나타나며 그 일이 발생할 연월일시를 아울러 가리켜준다. 또 시간을 알리는 종이 있는데 이름을 천문지리표(天文地理表)라고 한다. 좌종(坐鍾) 한 틀은 천문 기구가 있는데 지구와 하늘 위의 해·달·별이 어떻게 운동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므로 천문을 학습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천구전도(天球全圖)는 하늘을 쪽빛으로 만들고 금과 은으로 별을 만들었으며 안에 은사(銀絲)로 하늘 각곳의 도수를 구별하였다. 지구전도(地球全圖)는 천하 만국과 4개 주(州)의 산·하천·바다·섬들을 둥근 지구 표면에다 그렸고 또 바다의 뱃길과 서양의 배를 그려넣었다. 갖가지 모양의 기구 11합(盒)은 기후를 관측하는 것과 해·달빛의 변화를 찾아내는 데 관계되는 것으로 천기(天氣)가 어떨지를 미리 알 수 있으며, 기후를 탐지하는 틀 1좌는 기후의 변화를 관측할 수 있는 것이다. 동포(銅炮)와 서과포(西瓜砲)는 군사 조련용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모두 조금 구분이 있으며 홍모국(紅毛國)의 군사가 현재 수행 중인 공사(貢使) 앞에 나와서 포 쏘는 법을 시험삼아 펼쳐보이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긴 의자가 1개인데 사람이 몸 절반을 그 위에 얹어놓고 마음대로 빙빙 돌리게 되어 있었다. 집에서 사용하는 저절로 불을 붙이는 기구는 그 안에 갖가지 새 병과 헌 병 따위를 채웠으며 그 화구(火具)는 유리·자기·금·은·철 등을 녹일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한 덩이 큰 유리로 만들어졌다. 갖가지 인쇄한 그림과 도상(圖像)은 홍모국과 영길리국 왕의 온 가족의 인물상과 함께 성지(城池)·포대(砲臺)·당실(堂室)·화유(花囿)·향촌(鄕村)·선척(船隻)의 각종 그림이었다. 채등(彩燈)이 하나인데 유리에 도금하여 만들었고 벽에 걸어놓으면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나갔으며 금선전(金線氈)은 정밀하고 촘촘하게 만들었는데 방안에 까는 것이고, 대융전(大絨氈)은 대전(大殿) 위는 까는 것이며, 말안장이 한 개인데 누런 황금색을 겉에 입혔으며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졌었다. 수레가 2대인데 1대는 따뜻하고 1대는 시원하며 모두 기계 장치가 있어서 굴러갈 수 있었다. 군기(軍器)는 10가지인데 길고 짧은 자동 화기와 칼 등으로서 그 칼은 구리와 쇠를 깎을 수 있었으며 크고 작은 금은선(金銀船)이 있는데 홍모국의 전선(戰船) 모양으로 되었고 배 위에는 1백 개의 작은 동포(銅砲)가 있었다. 익력가(益力架)가 한 대인데 사람이 움직일 때 기력을 증진시키고 정신을 건강하게 하여 주며, 잡화 한 꾸러미는 홍모국 물품인데 곧 치니양포(哆呢羊布)와 구리와 쇠로 만든 기구들이었다.】 그런데 만들어진 것들이 기이하고 정교하여 서양 사람들의 미칠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10월 27일 정해
영남 조창(漕倉)에 비상용으로 둔 돈 4만 꿰미를 선혜청에 떼주도록 허락하였다. 이는 제조 정민시(鄭民始)의 말을 따른 것이다.
형조의 옥안(獄案)을 심리하였다.
10월 28일 무자
황해도 지방의 공도회(公都會)와 도시(都試)를 정지하였다. 이는 도신(道臣) 이태영(李泰永)이 재해로 하여 물려서 행할 것을 계청했기 때문이었다.
정창순(鄭昌順)을 예문관 제학으로, 민태혁(閔台爀)을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10월 29일 기축
차대(次對)하였다.
춘당대에 나아가 문무 제신들에게 편을 지어 활쏘기를 하게 하였는데, 문신이 한편이 되고 무신이 한편이 되어 점수를 따져서 돈내기를 한 다음 날을 잡아 장용영(壯勇營)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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