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신유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였다. 상이 맹추(孟秋)에 전알하려 하였으나 제신들이 상의 건강이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이유로 8월로 물리어 행할 것을 청하였었다. 상이 예조에 전례를 상고해 보도록 명한 다음에야 허락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길일을 가리지 않고 전알을 행하자 대신과 약원(藥院)의 제신들이, 더위가 아직 대단하므로 물려 행할 것을 번갈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 큰비가 내리니 ‘종묘에 가을 전알을 행한 날에 단비가 내렸다.[秋謁日得甘霔]’는 제목으로 금직(禁直)하는 제신들에게 부(賦)로써 응제(應製)하도록 하고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경기 관찰사와 황해도 관찰사에게 유시하였다.
"단비가 좍좍 쏟아져서 거의 높은 곳이건 낮은 곳이건 두루 흡족히 내렸다. 그러나 경기의 교동(喬桐)과 황해도 연안(延安)·배천(白川) 등지의 농삿일에 대하여는 지극히 마음에 걸린다. 비록 때늦은 감은 있으나 이번 비가 과연 골고루 흡족하여 곡식들이 다시 살아나게 될 수 있겠는가? 읍치에서 본 강우량만을 보고하지 말고 수령에게 관내를 두루 살피게 하고 겸하여 각종 곡식의 결실 상태를 덧붙여서 보고하도록 한 다음 장계로 보고하라."
8월 3일 계해
이조 판서 김사목(金思穆)을 회양부(淮陽府)에 부처(付處)하고 참판 정범조(丁範祖)와 참의 이면긍(李勉兢)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이달 초하루의 종묘 전알 때 그 반열이 난잡하자 상이, 경호하는 범위 안으로 함부로 들어온 사람과 임금 행차를 맞이하는 반열에 나중에 도착한 관원들을 모두 이름을 조사하고 잡아다가 단죄하게 하였는데, 명이 떨어진 지 몇 날이 되었는데도 이조가 조사하여 고발하는 초기(草記)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또 각 관아의 제조가 있는 아문의 으뜸 당상을 모두 파직시키라고 명하여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 예조 판서 김상집(金尙集), 형조 판서 조종현(趙宗鉉), 공조 판서 이치중(李致中), 한성부 판윤 구상(具庠), 수어사(守禦使) 이문원(李文源), 총융사(摠戎使) 정민시(鄭民始), 장용사(壯勇使) 김지묵(金持默)이 모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얼마 안 되어 파직된 사람들을 모두 서용하고, 이지는 호조에, 문원·민시·지묵은 대장에 잉임(仍任)시켰다.
이갑(李𡊠)을 예조 판서로,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4일 갑자
성균관(成均館)에서 칠일제(七日製)100) 를 실시하였다.
우의정 김희(金憙)를 소견하였다. 전에 김희가 네 차례나 상소하여 사면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여러 차례 돈유(敦諭)하였었다. 그렇다가 상이 태묘를 전알하려면 반열을 지휘할 사람이 없다 하여 숙사(肅謝)하도록 타일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김희를 소견한 것이다. 김희가 아뢰기를,
"저번에 채제공(蔡濟恭)이 올린 상소 내용에 대해 신이 당시 번임(藩任)으로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듣지는 못하였으나 아직까지 그에 대한 처분을 내리지 않고 계신 것은 사실 답답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상소에서 함부로 지껄인 자구(字句)를 가지고 죄라고 한다면 가하지만 원소(原疏) 전체를 싸잡아서 배척한다면 장차 의리를 어느 곳에다 둘 것인가. 현재 북면(北面)하고 나를 섬기는 사람들이 참으로 내 마음을 자신들 마음처럼 이해한다면 어찌 그 일을 가지고 거듭 나의 마음을 언짢게 하겠는가."
하니, 김희가 아뢰기를,
"신이 외지에 있어서 자세히 듣지 못한 까닭으로 조금 전에 그런 말을 올렸던 것인데, 지금 성교(聖敎)를 받들고서야 비로소 환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권엄(權𧟓)을 파직시키고 전 진안 현감(鎭安縣監) 박화원(朴華源)을 결성현(結城縣)으로 귀양보냈다. 이에 앞서 화원이 기민 먹일 곡식[賑穀]을 훔쳐 차지하고는 재상(災傷) 입은 논밭의 세금을 감면해준 것이라 허위 보고를 하였다는 것으로 암행 어사의 장계에 올랐으므로 도신(道臣)에게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던 것인데, 이때 이르러 의금부가 도신의 조사 장계를 복주(覆奏)하자, 판부하기를,
"작년에, 재상 입은 논밭의 조사에 관해 신칙한 전교가 정말 어떠하였던가. 더구나 기민 먹이는 그 일로 말하면 더욱이 얼마나 다잡아 살펴야 할 일인가. 암행 어사의 서계(書啓)와 연주(筵奏)가 너무도 낭자하며 특별히 조사를 시행하라고 전교했던 것인데 그 아래에서 감히, 조사해내기 어렵다고 말하고서 이제서야 비로소 이와 같이 기록하여 아뢴단 말인가. 삼가 두려워할 줄 안다면 어떻게 감히 조사하기 어렵다는 그 두 글자를 입밖에 낼 수 있단 말인가. 부임한 이후로 부지런히 면려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모든 행하는 일이 그처럼 해괴하니, 이와 같은 도백이라면 교체로 인한 맞이하고 보내는 폐단만을 염려하여 기강을 허물어뜨리도록 그대로 맡겨둘 수는 없는 일이다. 전라 감사 권엄에게 불서용(不敍用)의 법을 적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문순(金文淳)을 이조 판서로, 홍양호(洪良浩)를 예조 판서로, 이득신(李得臣)을 형조 판서로, 변득양(邊得讓)을 공조 판서로, 신사운(申思運)을 한성부 판윤으로, 윤숙(尹塾)을 판의금부사로, 이서구(李書九)를 전라도 관찰사로, 이엽(李燁)을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8월 5일 을축
‘태아검이 가을물처럼 새파랗다.[太阿如秋水]’로 부(賦)의 제목을 삼아 금중(禁中)에 직숙하는 제신들에게 응제(應製)하도록 하여 시권(試券)을 거두고는 문임(文任)인 홍양호(洪良浩)·이병정(李秉鼎)·민종현(閔鍾顯) 등에게 평가하여 등급을 매기게 하고 직접 성적을 고찰한 다음 임제원(林濟遠) 등 9인을 뽑아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그리고 양호 등에게도 제진(製進)하도록 하였다.
정대용(鄭大容)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6일 병인
상참(常參)을 행하고 겸하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 홍낙성 등이 아뢰기를,
"상이 건강이 여러 날 동안 평안하지 못하다가 곧바로 회복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더없이 큰 경사입니다. 의당 축하하는 의식을 거행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언 윤익렬(尹益烈)이 아뢰기를,
"요사이 수령으로서 죄를 범한 자에 대해 그 지역에 정배(定配)하라는 명이 흔히 있었습니다. 그것이 비록 그의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낌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사죄하게 하려는 뜻으로 하신 것이기는 하지만, 전임 관원을 그곳에 귀양살게 하면 그곳 백성들은 그대로이고 그의 위엄은 여전히 남아 있어 비록 평소에 원망을 산 부류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로 폐단을 끼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 뒤로는 수령의 귀양을 그가 부임했던 고을로 보내지 않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말이 매우 좋다. 어찌 꼭 지금 이후부터 그렇게 할 것이 있겠는가. 이 앞서 그 지역에 정배했던 자들도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귀양사는 곳을 옮겨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교리 어용겸(魚用謙)이, 의리를 밝히고 기절(氣節)을 숭상하며 염치를 힘쓰는 것으로써 기강을 진작시키고 형정(刑政)의 근본을 확립하자고 계청(啓請)하고, 또 아뢰기를,
"요사이 간혹 처분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데서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전주(銓注)하는 즈음에 추천자 이외에 더 써넣은 사람이 낙점(落點) 받기까지 하여 관방(官方)에 어긋남이 있고 또 국가 체면도 손상되니 성조(聖朝)의 좋은 일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그 아뢴 것을 가상히 여기어 특명으로 응교에 올려 추천하도록 하였다.
민종현(閔鍾顯)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8월 8일 무진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과 문관·음관(蔭官)·무관으로서 2품 이상인 경재(卿宰)와 내각(內閣)·삼사의 제신들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 등을 소견한 것은 나의 뜻을 말하여주려고 해서이다. 요즈음 나타나고 있는 좋지 못한 꼴들을 보고 연석에 올라온 제신들도 어찌 요량되는 바가 없겠는가.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을 차마 말하고 감히 제기하지 못할 것을 감히 제기하는 것은, ‘의리를 밝히고 윤리를 바루자.[明義理正倫綱]’는 이 여섯 글자에 지나지 않고 있다. 전 영상(領相)이 상소한 말을 경들은 정말 어느 사람에게 들었으며 또 무슨 일을 가지고 죄를 삼는가?"
하니,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 좌의정 김이소(金履素)가, 모두 원소(原疏)를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문제에 만일 범법한 사실이 있다면 전 영상이라고 하여 무엇을 아낄 것이며, 혹시 이와 반대가 된다면 또 전 좌상이라고 하여 무엇을 아낄 것인가. 전 영상의 상소 가운데 한 구절의 말은 곧 아무해[某年]101) 의 큰 의리에 관한 핵심인데, 내가 양조(兩朝)의 미덕(美德)을 천양하고픈 마음이 있으면서도 감히 한번도 이를 제기하지 못한 이유는 참으로 이 일이 아무해에 관계된 것이어서 감히 말하지도 못하고 또 차마 제기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 영상의 상소 가운데는 비(非) 자 한 구절로 말머리를 꺼내고 즉(卽) 자 한 구절로 말을 끝맺었는데, 즉 자 이하의 내용은 아무해의 일과 관계되어 있는 지극히 중대한 일이었다. 가령 전 영상이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기로 작정하고 미덕을 천양하려는 애타는 마음과 피끓는 정성에서 한 말이라 하더라도 내가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전 영상이 감히 말하였으니 그 겉면만을 얼핏 본다면 그의 죄는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비지(批旨)로 이미 부월(鈇鉞) 같은 엄한 뜻을 보인 이상 오늘 조정에 있는 신료들이 어떻게 놀라 통분해 하지 않을 것이며 전 좌상이 성토(聲討)한 것도 형편상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 영상이 남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감히 말한 것은 대체로 곡절이 있어서였다. 전 영상이 도승지로 있을 때 선조(先朝)께서 휘령전(徽寧殿)에 나와 사관(史官)을 물리친 다음 도승지만을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어서(御書) 한 통을 주면서 신위(神位)의 아래에 있는 요[褥] 자리 속에 간수하도록 하였었다. 전 영상의 상소 가운데 즉 자 아래의 한 구절은 바로 금등(金縢)102) 가운데의 말인 것이다.
내가 처음 왕위에 오른 병신년 5월 13일 문녀(文女)103) 의 죄악을 드러내어 공포할 적에 전 영상이 윤음(綸音)을 교정하는 일에 참여하여 아뢴 것이 있었고 승지와 한림(翰林)을 보내어 이를 받들어 상고한 일까지도 있었다. 지금 물러가기를 청하는 상소에서 죽음에 임박하여 이런 진실을 말한 것은 전 영상만이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혼자서 그 일을 말한 것이니, 이는 속에서 우러나온 충성과 의리의 발로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전 좌상은 이런 본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단지 그 표면에 나타난 것만을 의거하여 지난 여름 이후로는 감히 말하지 못할 의리로써 성토한 것이니 이 또한 속에서 우러나온 충성과 의리에서 발로된 것이다.
금등 속의 말은 하나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니 이 어떠한 미덕인가. 단지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장차 묻혀진 채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 지금 전 영상의 상소로 인하여 그 단서가 발로되었고 그대로 잠자코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동호지필(董狐之筆)이라는 네 글자에 있어서는 그 뜻이 대개 이 다음에 동호와 같은 훌륭한 사가(史家)가 있어서 전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신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면 지금 굳이 들추어내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이 역시 흉악한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는, 금등 가운데의 두 구절을 베껴낸 쪽지를 여러 대신들에게 보여주게 하고는 【피묻은 적삼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 이르기를,
"내가 이덕사(李德師)와 조재한(趙載翰)을 사형에 처하게 하던 날 문녀와 김상로(金尙魯)도 처단했을 것이지만 나는 그때 이미 금등의 글 가운데 들어 있는 선왕의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그 뜻을 약간 반영하였던 것이다. 내가 비록 보잘것 없기는 하지만 일단 결정을 하려면 저울질을 해보고 결정하지 어떻게 내맘대로 경중을 좌지우지할 것인가. 내가 차마 이 말을 하는 것은 나도 생각이 있어서이다. 요컨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 영상이 상소에서 말한 것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또 전 좌상이 준엄한 성토를 한 것도 내면의 사실을 모른 데에서 나온 것임을 알리고 싶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또 분명히 밝혀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오늘날의 신하들은 언제나 한 가지 문제가 일어나면 곧 그것을 제멋대로 추측하는 버릇이 있어서 예컨대 전례(典禮) 문제 같은 것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을 의심하고 있으니 그것이 어디 감히 마음이나 둘 일인가. 즉위한 처음에는 으레 정청(庭請)이 있으면 뒤에 애써 따르곤 하지만 나는 세 번의 사양에만 그치지 않고 세 가지 일은 끝까지 사양하며 여러 신하들이 그 뜻을 따라줄 것을 바랐다. 그 첫째는 강왕(康王)이 면류관을 벗은 일이 선유(先儒)들로부터 예가 아니라는 비난104) 을 받았기 때문에 차마 문에 임하여 조하(朝賀)를 받지 못했던 것이고, 둘째는 영릉(永陵)105) 을 추존하는 일은 선왕(先王)께서 비록 유언까지 하였으나 다시 더 신중을 기함이 합당했던 것이고, 셋째는 왕대비전의 칭호에 대하여 왕(王) 자 위에 대(大) 자를 감히 더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속된 견해에 얽매이어 맨 아래 한 조항 이외에는 모두 거론할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이것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더구나 전례에 관한 문제를 감히 의논한단 말인가. 병신년 3월 10일의 하교를 보면 나의 본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분명히 밝혀두는 것은 대체로 ‘대고(大誥)’의 뜻을 모방하여 사람마다 그 뜻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이다. 지금으로부터는 다시 이를 빙자하여 이러쿵저러쿵 시끄럽게 구는 일이 있으면 사람마다 성토할 것이다. 오늘 이후로 사리를 천명할 책임은 오로지 경 등에게 있는 것이다."
하였다.
8월 9일 기사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추향(秋享)에 쓸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펴보았다.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를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의리를 밝히고 윤리를 바루는 일에 대하여 이미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는데 한 번 말을 꺼내기에도 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또 어떻게 차마 말하랴만 오늘 경을 만났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전에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을 오늘은 차마 말하는 이유를 내가 먼저 말하리라. 아무해의 사변은 차마 제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이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차마 제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양조(兩朝)의 미덕을 천명하기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여태껏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했기에 차라리 덮어둔 채 드러내지 않은 지가 지금 거의 10년이나 되었는데도 끝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는 도리상은 그러할지라도 양조(兩朝)의 미덕이 그대로 드러나지 못할 염려가 있는 것이며 세변(世變)이 거듭 생겨나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을 한 번 말하여 사람마다 알도록 한 다음이라야 양조의 미덕이 천추 만세에 환히 드러날 것이며 거듭 생겨나는 세변도 이로부터 영원히 그치게 될 것이다.
전 영상의 상소문 가운데는 비(非) 자 아래의 말과 즉(卽) 자 아래의 말이 있는데 비 자 아래의 말도 이미 차마 제기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즉 자 아래의 말은 더욱이 차마 제기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내용인 것이다. 이는 대체로 그 일이 아무해에 일어난 망극한 사변 가운데의 핵심적인 내용에 관계된 것이고 상소를 올려 세초(洗草)할 것을 청한 내용 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전 영상이 설사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기로 작정한 마음이 있었더라도 차마 제기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을 제기하여 나에게 들려준 것은 죄가 되는 것이고 가령 그 마음이 옛날의 미덕을 드러내기 위한 데에서 나왔더라도 도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막중한 자리에 미치게 한 것도 죄이며, 옛날 일을 언급하면서 선조에게까지 언급이 된 것도 역시 죄인 것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극형의 죄안(罪案)이 되는데 내 그의 상소문을 한 번 보고서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 상소를 쓴 것인지 금새 판단이 안 서서 비답과 전교 등으로 부월보다 더 준엄한 뜻을 보였던 것이다. 이를 보았거나 들은 뭇신하들로서 그를 엄중히 성토하려 했던 것은 경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군들 그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겠는가.
다만 전 영상이 차마 제기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내용을 혼자서 말한 데에는 대체로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선대왕(先大王)께서 휘령전에 친림했을 적에 전 영상이 도승지로 입시하였었는데 사관을 문밖으로 물러가게 한 다음 선대왕께서 한 통의 글을 주면서 신위(神位) 밑에 있는 요의 꿰맨 솔기를 뜯고 그 안에 넣어두게 하였던 바 그것이 바로 금등 문서였던 것이다. 내 그 내용을 반포하는 것이 막중한 관계가 있고 또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아픔을 참고 억울함을 간직한 채 오늘까지 끌어온 것은 오로지 차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녀의 처분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는 그 속에 약간의 언급이 있었던 것이다. 전 영상의 상소문 가운데 즉 자 이하는 바로 아무해 이전의 흉도(凶徒)들이 한 흉악한 말이었는데 아무해 이후에 선대왕께서 즉각 이를 깨닫고 이 금등의 글을 내렸던 것이고 전 영상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혼자서만 이를 말하게 된 것이다.
그 상소문이 나온 뒤로 조정이 시끄럽게 들끓었으나 그대로 방임했던 것은 내가 차마 제기할 수 없어 아직껏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인데, 오늘에서야 한 번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나서 비로소 말하게 된 것이다.
나는 세초하는 일로 상소를 올린 것은 단지 그런 기록을 아예 이 세상에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 밤낮으로 동동거리며 잊혀지지 않는 것은 초야의 조각난 문서도 잘못된 내용이 잘못 전해지는 것이 대부분인데 더구나 정승의 상소문은 사체가 중한 것으로 비록 봉하여 불태워 버리게 하더라도 승정원에서 그것을 본 사람이 있고 연석(筵席)에서 들은 사람도 있으며 또 이를 베껴쓸 때에도 필시 듣거나 본 사람이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는 사이 한 번 전해지고 두 번 전해지면 틀림없이 세상에 전파될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또 이제 와서 내가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여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가 도리어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실이 세상에 멋대로 전파되도록 내버려둔다면 세상에서 이를 보는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볼지 모를 일이니, 그렇다면 한때에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은 작은 문제이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그 사실이 후세에 흘러 전하게 되는 것은 관계됨이 매우 중대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신은 그때 마음과 몸이 모두 떨렸었습니다. 차마 꺼내지 못할 말을 감히 꺼낸 것이 더욱 더 흉참한 일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특히 차마 꺼내지 못할 말을 꺼내 성토하는 것도 차마 하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에 감히 꺼내지 못하고 다만 동호지필 그 네 글자를 가지고 성토했던 것입니다. 신이 전에 올린 상소는 오로지 그의 상소문을 반포하여 그것이 역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것을 청한 것이었는데 그 상소문을 지금 보여주신다면 신이 올릴 말씀이 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채제공(蔡濟恭)에게 사관(史官)을 보내 본래의 상소문을 봉하여 올리도록 하였는데, 제공이 벌써 불태워 버렸다고 하면서 올리지 않았다. 이에 상이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일성록(日省錄)》의 등본을 가지고 빈청(賓廳)에 가서 종수에게 보여주도록 하였다.
8월 10일 경오
차대(次對)를 하고 겸하여 윤대(輪對)를 하였다.
이문원(李文源)을 한성부 판윤으로, 심이지(沈頤之)를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황해도 관찰사 이조승(李祖承)이 연안(延安)·배천(白川) 두 고을의 농사 현황에 대하여 치계하고, 또 조정이 백성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있다는 뜻으로 백성들을 위로하고 타일러서 경솔히 다른 지방으로 가지 못하게 할 것을 말하였다. 회유(回諭)하기를,
"이 장계를 보니, 두 고을의 농사와 백성의 형편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함을 깨닫겠다. 수령들을 엄중 신칙하여 남녀 한 사람도 다른 지방으로 떠나가지 못하도록 하되, 구속하거나 잡아매두면 도리어 그들 감정을 건드릴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 밖에 왜 편안히 정착시킬 좋은 방도가 없겠는가. 먼저 부담을 가볍게 해 줄 방책을 세우고 다음에 즐겁게 살아갈 알맞은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남자나 여자라도 제 고장을 떠나거나 굶주려 골짜기를 메우는 일이 있으면 방백은 그것을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부끄러움으로 인식하고 수령들은 자신이 구렁텅이에 밀어넣은 것처럼 여겨 언제나 그것을 생각하고 그 일에 대하여 애쓰고 그 일에 독실하고 그 일에 대해 조심하여 한 발자국을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오직 백성들을 구제할 방도만을 생각하고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야말로 참으로 남을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하는데도 백성들이 신음한다면 이는 조정이 인재를 고르지 않고 그냥 맡긴 꼴이 되는데 그 얼마나 부끄러운 노릇이겠는가.
지금부터 내년의 보리가 수확될 때까지는 두 고을 백성들을 위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무진 애를 쓰고 조금도 편히 있을 수 없는 때이다. 도백과 수령들도 이 전교를 듣고서야 착실히 마음을 먹고 지혜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영과 고을의 정당(政堂)에 이 전교를 크게 써붙이고 밤낮 늘 눈으로 보면서 우리 두 고을 백성들을 소생하게 해야 될 것이다."
하고, 또 승정원에 명하여 똑같이 교동(喬桐) 절도사에게도 하유하게 하였다.
8월 13일 계유
차대하였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윤조(輪操)를 내년부터는 합동 조련에 구애받지 말고 중지했다가 약간의 풍년이 들거든 규정에 따라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수어사 이문원(李文源)의 건의를 따른 것이다.
8월 14일 갑술
이문원에서 재숙(齋宿)하였다.
8월 15일 을해
선원전(璿源殿)에서 차례를 올렸다.
전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을 파직시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작년에 영남 지방이 입은 재해가 아주 크다고는 하지만 1만 결(結) 가까이 되는 면적이 다 재해를 입었다는 것은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전 감사 정대용에게 파직의 벌을 내리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호조가 연분 사목(年分事目)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표정(俵政)106) 은 백성들이 살고 못사는 데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라서 재작년에는 도백에게 일임하였고 작년에는 그가 장계로 요청한 내용대로 따라주었다. 그것은 대체로 상례(常例)를 따르지 않고 백성들의 편리를 되도록이면 도모하려고 해서였다. 그러나 실지 효과가 있었다고는 듣지 못하였고 백성들의 피폐는 전과 똑같으니 올해에는 묘당(廟堂)에 일임하여 그 능력 여부에 따라 가부를 결정하게 해야겠다. 이 사실을 각 도에 공문으로 알리라."
하였다.
8월 16일 병자
일차 유생 전강(日次儒生殿講)107) 을 실시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사폐(辭陛)하였다. 상이 소견하고 이르기를,
"본도는 이제 겨우 기민 먹이는 일이 끝났다. 올 가을은 풍년이 들 희망이 있기는 하지만 굶주리던 끝이어서 백성들의 생활에 대한 관심이 누그러지지 않는다. 경은 모쪼록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기필코 소생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각진(各鎭)의 급대 절목(給代節目) 4책을 바치고, 또 아뢰기를,
"호렴(戶斂)을 폐지하고 급대하게 한 일은, 진에 딸린 백성들은 가죽을 벗겨내는 듯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진장(鎭將)에 있어서는 골수에 스며드는 은혜를 입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신으로서는 지나친지 몰라도 걱정이 있습니다. 환자의 모곡(耗穀)은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드는 해에 따라 늘어나고 줄어들어 일정하지 않으며 읍민(邑民)은 진에 속한 백성에 비하여 고되고 편한 정도가 차이가 납니다. 이쪽에서는 혹 그대로 유지하기 어려울 때도 있는데, 저쪽에서는 혹 분수 밖의 것을 바라기도 합니다.
종전의 호렴을 할 때에는 진에 속한 백성들이 약간의 혜택을 무언 중에 입은 경우도 있었으나 한 번 급대함으로부터 다시는 손을 쓸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몇 가지 일들이 혹시 오랜 뒤에 폐단을 낳지나 않을까 하여 참람함을 생각지 않고 감히 이렇게 덧붙여 말씀을 올립니다."
하니, 회유하기를,
"경의 장계를 보니 일의 형편상 진실로 그러하겠다. 그렇다면 조정 명령은 백성들에게 신의를 보여야 되고 환자의 모곡도 균일하게 배정하여 읍민과 진의 백성들을 동일하게 대하여 골고루 은혜가 미치도록 해야 할 것인데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모쪼록 처리하기 어려운 일들이라도 시행하기 쉬운 적절한 방법을 별도로 강구하여 하나로 요약하여 보고하라."
하였다. 이때 와서 병모가 사리를 따지며 장계를 올렸는데, 임자년108) 절목에 비하여 많은 부분이 고쳐졌다. 상이 묘당에 명하여 그 장계를 되돌려 보내게 하고 전교하기를,
"애당초 조정 명령은 진에서 거둔 모곡으로 진의예고단을 구하려 하였을 뿐이다. 가령 진의 모곡으로 부족하면 근처의 창고에 보관된 고을 모곡을 떼어 지급하면 될 것이다. 도신(道臣)은 고을 모곡을 진의 백성에게 지급하면 그것이 고을 백성들의 고통거리가 될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고을에다 바치거나 진에다 바치거나 모곡을 바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더구나 삼남(三南)의 수군(水軍)이나 변장(邊將)들도 모두 육지 백성의 결전(結錢)으로 진의 비용을 급대하고 있지 않는가.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조정 명령은 신의를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도백으로 하여금 애초에 내린 전교대로 거행하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8월 17일 정축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장용영(壯勇營)의 활쏘기 시험을 행하였다.
8월 18일 무인
조포(造脯)에 대한 규격을 바로잡았다. 전교하기를,
"지금 내가 밤낮 잊지 못하고 생각하는 것이 사전(祀典)인 것이다. 제사 전례는 곧 선조를 받드는 일 가운데 한 가지인데 어떻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경건한 마음과 신중한 절차를 극진히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제물 가운데는 보(簠)·궤(簋)·변(籩)·두(豆)에 담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변에 담는 12가지 제물 가운데 포(脯)가 그 하나인데, 그 포의 척도가 가장 예의(禮意)에 어긋나고 있다. 옛날에는 포의 길이가 8치[寸] 남짓 하였는데 지금은 1자[尺] 3치이며, 너비는 1치 반이었는데 지금은 3치 반이고, 두께는 2푼[分]이었는데 지금은 1치 3푼이나 된다. 심지어 제물을 진설할 때에 포를 담은 변을 두 세개씩 더 사용하기도 하니 예의는 그만두고라도 경건과 신중에 있어 과연 얼마나 흠이 되는 일인가. 대저 척도의 길이를 예기척(禮器尺)으로 8치 남짓한 것을 쓰는 것은 《의례(儀禮)》의, 포는 1자 2치 짜리를 쓴다고 하는 기록을 근거로 삼은 것인데, 주척(周尺)의 1자 2치는 곧 예기척의 8치 남짓한 것이다. 열성조에서 예를 제정할 적에 비록 하찮은 제물이라도 모두 질서가 있어 그처럼 훌륭하였다. 이와 같았기 때문에 옛적 우리 효종(孝宗) 신묘년에 옛 제도를 다시 수정하여 호조와 봉상시에 명하여 이를 받들어 준수하도록 하였으며, 숙종(肅宗) 을유년에 와서는 또 포 규격의 증가 문제로 거듭 신칙하는 전교를 내려 효종 때의 수교(受敎)를 준수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때에는 포의 너비를 겨우 5푼, 두께를 3푼 늘렸는데도 오히려 너무 크다고 하였는데, 만일 요즈음의 10배나 더 커진 것을 잘못된 그대로 쓰도록 내버려둔다면 이는 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선왕조 갑자년에도 도로 옛 규격대로 만들도록 하라는 유시가 있지 않았던가.
지금으로부터 제향에 쓰는 포의 규격을 《의례》와 우리 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규격을 정하고 정해진 규정을 거듭 밝혀 호조에서 놋쇠로 표준을 만들어 반포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 효종 신묘년의 수교대로 이 전교를 도제거(都提擧)가 봉상시에 써서 걸어놓고, 종묘·사직·성균관의 제사를 맡은 곳에도 각기 놋쇠로 만든 표준을 제고(祭庫)에 간수하게 하였다가 헌관(獻官)이 감봉(監捧)할 때와 승지가 봉심(奉審)할 때 놋쇠로 만든 표준으로 재보게 하라. 만일 치수가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는데 이를 밝혀내지 못했을 때는 그들에게도 당연히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데 따른 책임이 따를 것이니 각각 명심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도록 하라.
또 생각하건대 열성조에서 여러 차례 단속하고 타이르고 하셨는데도 준수하지 않는 폐단이 요즘 나타나는데 해가 오래되고 명령한 지 오래된 뒤에 지금처럼 규정을 위반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자성(粢盛)은 보·궤에 담아 올리는 것으로, 봉해 올리는 규정과 품질을 평가하는 규정이 있는데, 변·두의 제물도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이 뒤로는 봄 가을로 포를 만들어 말리고 다듬어서 비로소 쓰게 되었을 때 봉하여 올리고 품질을 평가하는 규정을 똑같이 정해야 되겠다. 과일 또한 변에 속하는데 때에 따라 서로 융통성있게 바꿔 쓰도록 선왕조 수교에 실려 있다. 그런데 그 뒤로 이 일을 맡은 신하들이 혹 선왕조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특별히 다른 제물로 대신 봉하여 올리라는 전교가 없으면 거의 예전 그대로 하고 있으니, 꼭 한 벌의 규정을 만들어 반포하여야 영원한 규례가 될 수 있겠다. 내려보낸 도식(圖式)을 《태상지(太常誌)》에 게재하라."
하였다.
수원 유수 이명식(李命植)이, 이아(貳衙)를 지을 때 절충 장군 안처윤(安處潤) 등 여덟 사람이 재물을 희사하여 공사를 도운 내용을 치계하였다. 이에 그들에게 오위 장(五衛將)과 변장(邊將) 등을 차등있게 제수하라고 명하고, 승지 서매수(徐邁修)에게 이르기를,
"수원은 새로 창건하는 곳이라 자진해서 재물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해 차등을 두어 시상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런 일이 만약 조금 지나치면 벼슬을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무리들은 모두가 벼슬 얻기를 바라는 자들인 것이다. 근래 들으니 관서(關西)와 해서(海西) 지방에 이런 일이 더욱 심하여 가끔은 공천(公賤)으로서 오위 장에 오른 사람도 있다고 하니, 관직 제도의 문란함이 극에 이르렀다. 주자(朱子)가 비록, 진정(賑政)을 도운 사람들에게 적공랑(迪功郞) 정도를 아낄 것이 뭐겠느냐고 하였지만 그것은 기민 먹이는 일과 관계되는 것이므로 이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하였다.
회양부(淮陽府)에 부처(付處)했던 죄인 김사목(金思穆)을 석방하였다.
8월 20일 경진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도기 유생(到記儒生)에 대한 강경(講經)과 제술(製述) 시험, 전경 문신(專經文臣)에 대한 강경과 제술 시험, 전경 무신에 대한 활쏘기 시험, 초계 문신(抄啓文臣)에 대한 친시(親試)를 시행하여, 도기 유생의 강경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이시련(李是鍊)과 제술 시험에서 우등한 진사 권준(權晙), 생원 황기천(黃基天)을 전시(殿試)에 곧장 응시하게 하였다.
황해도 병마 절도사 강오성(姜五成)이 치계하기를,
"연안 부사(延安府使) 유한돈(兪漢敦)이 흉년이 들었다고 하면서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가포(價布)를 여지껏 거두어 바치지 않으니 파직하여 내치소서."
하니, 상이 백성들 형편이 이와 같은데도 도신(道臣)이 한마디 말도 없다 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황해도 연안과 배천은 참으로 이른바 풍년 거지이다. 모든 지방을 똑같이 대하는 조정의 입장으로 말하면 그 고통이 마치 자신에게 있는 것과 같아서 잠자리와 음식 먹는 것이 달지 않아 작년 가을 각도에 흉년이 들었을 경우와 다름이 없다. 단지 먼저 수선을 떨고 싶지 않아서 아직까지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서쪽 두 고을을 생각하는 잊을 수 없는 마음이야 어찌 잠시나마 소홀히 되겠는가.
지금 수신(帥臣)의 장계에 대해 간단한 내용의 재가를 내리기는 하였으나 이 역시 먼저 진정시킨 다음에 구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기타 나머지 것들은 연분(年分)에 대한 장계를 기다려야 알겠지만, 당장 바쳐야 될 것에 있어서는 수신의 장계 가운데에 운운한 내용과 같다면 필시 기한을 지낼 가능성이 많다. 두 고을에서 가을 겨울에 서울에 바쳐야 될 것을 바치지 못한 자 및 금위영과 어영청에 번(番)들어 올라와야 될 군사가 있다면 혹은 기한을 물리어 받아들이고 혹은 번드는 것을 중지시켜, 우선 구원을 갈망하는 백성들의 마음부터 안정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1일 신사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이정규(李鼎揆)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기정(朴基正)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윤제동(尹悌東)을 접위관(接慰官)으로 삼았다. 이때 대차왜(大差倭) 귤공구(橘功久)가 서계(書契)를 가지고 왔는데, 이는 관백(關白)이 아들을 낳은 경사를 고하기 위함이었다.
8월 22일 임오
차대(次對)하였다.
동지성균관사 이병정(李秉鼎)이 아뢰기를,
"선비의 추향(趨向)을 단정하게 하고 성균관의 위상을 높이려면 무엇보다도 장의(掌議)를 적격자를 골라 임명해야 합니다. 근년 이래로 이 장의의 후보로 천거된 자가 무려 1백 80여 명이나 되는데, 어제 천거에서 떨어진 사람을 오늘 갑자기 다시 천거하여 시끄럽게 다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저속해진 선비들의 기풍을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연석(筵席)에 있는 제신들에게 전교하기를,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은 먼저 정원수를 정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는 일 이외에는 없다. 요 근래의 예로서 말하더라도, 고상(故相) 김익(金熤)이 내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명령을 받고 바로잡았었다. 정원수를 10명으로 할 것인지 20명으로 할 것인지 경 등은 하나로 지정하여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희(金憙)와 동지성균관사 정민시(鄭民始)·서유방(徐有防)이 모두 20명으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잡기(雜岐) 출신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상의 수령은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정했는데, 이는 사직(司直) 이병정(李秉鼎)의 말을 따른 것이다.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판으로, 정대용(鄭大容)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경기도 바닷가에 있는 고을의 쌀 1천 섬을 교동(喬桐)으로 옮겨주었다. 그 섬에 흉년이 든 때문이었다.
8월 23일 계미
이문원(李文源)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8월 26일 병술
이조 판서 김문순(金文淳), 참판 정범조, 참의 정대용을 체직시키고 김사목(金思穆)·서정수(徐鼎修)·이면긍(李勉兢)으로 대신하였다.
민종현(閔鍾顯)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 채제공(蔡濟恭)을 면직하고 부사(副使) 이홍재(李洪載)와 서장관(書狀官) 정동간(鄭東幹)을 모두 체직하고서, 홍낙성(洪樂性)을 정사로, 이재학(李在學)을 부사로, 정동관(鄭東觀)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8월 28일 무자
영의정 홍낙성이 상차(上箚)하여 병든 형편을 진술하고 사신 임무를 면하게 해달라고 청하자, 비답을 내려 청한 대로 하라고 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제원(林濟遠)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황인점(黃仁點)을 동지 겸 사은 정사로, 구상(具庠)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8월 29일 기축
비변사가 아뢰기를,
"수원부(水原府)를 이미 장용 외영(壯勇外營)으로 승격시키고 나서는 군사 규정을 일반 고을의 규정을 따라 쓸 수 없기에 내영(內營)의 제도를 대략 모방하여 마병(馬兵)은 벌써 장별대(壯別隊)로 편제를 변경하였으니 보병(步兵)도 똑같이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제(軍制)는 정예함을 위주로 하지 병력의 수가 많은 것이 위주가 아닌데, 속오군(束伍軍) 26개 초(哨)에 태반이 장정이 아닙니다. 13개 초에서 건장한 장정을 뽑아 정군(正軍)으로 승격시켜 따로 부대를 만들고, 그 나머지 13개 초는 낮추어 자보(資保)를 만들고 번포(番布)를 거두어 정병(正兵)을 돕게 함으로써 정호(正戶)와 자보가 서로 돕는 뜻을 갖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별효사(別驍士)의 경우는 이미 부(部)와 사(司)의 편제에 넣지 않고 무사들을 격려하고 권장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제도인데, 2백 명으로 정한 정원은 너무 많습니다. 이 역시 그 절반을 줄이고 별군관(別軍官)이라는 칭호를 붙여 좌·우 대열로 만들어 유수에게 직속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별효사를 별군관으로 만들 경우 별장(別將)도 자연 줄여야 할 것이니 장별대의 별장으로 별군관의 병방(兵房)을 겸하게 하여 관할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군제를 변경하였고 보면 장관(將官)도 내영(內營)을 모방하여 천총(千摠) 두 자리는 역시 줄여야 되겠습니다. 별장·파총(把摠)·초관(哨官)을 차출하는 규정과, 별군관·장별대를 구별하여 가려뽑는 방법, 도시(都試)를 보이고 상을 주는 방도, 보병을 정군으로 올리거나 보인(保人)으로 내리는 규정, 방어 임무에 들어갔을 때의 공급과 구제 등의 대책에 대하여 해부(該府)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초안하여 본사(本司)와 오가면서 수정을 거친 후 재가를 받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연경(燕京)에 가는 서장관과 통신 부사(通信副使)·종사관(從事官) 이외의 당하관(堂下官)은 가마를 탈 수 없게 한 규정이 지극히 엄격하나, 접위관(接慰官)과 북평사(北評事)의 경우는 잔치를 베풀고 접대를 할 즈음에 남들이 보는 위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가마를 타도록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따랐다.
매년 단오날이면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영(監營)·통제영(統制營)이 부채를 만들어 조정의 관원들에게 두루 선물하는 일이 옛부터 전해오는 전례이다. 이에 앞서 이윤경(李潤慶)이 통제사(統制使)로서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당하게 되자 흉년이 들었다고 핑계하면서 연례로 하는 일을 폐지하였다. 상이 연신(筵臣)의 귀띔으로 그 일을 대강 듣고 비변사에 명하여 공문을 보내 물어보게 하였는데, 윤경이 첩보(牒報)를 올려 핑계를 대면서 부정하되, 그 말이 외람되고 거만하였다. 그리하여 연신(筵臣)들이, 중국 법의 불경죄로 그를 처벌할 것을 누차 말하였으나, 상이 그에게 죄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윤경이 다른 일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고 돌아오게 되자 감히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한강 밖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대사간 유한모(兪漢謨)가 아뢰기를,
"비밀 병부(兵符)는 사체(事體)가 아주 엄중하여 황량한 교외의 객줏집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승정원을 시켜 거두어들이도록 하소서."
하고, 또 윤경을 벼슬아치 명부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간 어용겸(魚用謙)이 아뢰기를,
"이윤경의 죄를 어떻게 이루 다 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저번에 묘당(廟堂)에서 공문으로 물었던 일은 규례에 없는 지시였는데 공문이 오고 갈 때 제아무리 교만하고 사나운 장수라도 감히 무례한 말을 묘당에 가하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더구나 그 오고 간 공문이 묘당과 서로 관계된 것일 뿐이므로 상의 전교가 있었고 없었고는 제가 감히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애당초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아, 그의 무엄한 버릇이 결국 명분을 범하고야 만 것입니다.
이른바 영리(營吏)가 사적으로 통보하였다는 그 일은 무슨 변괴입니까. 감히 더없이 존엄한 ‘연교(筵敎)’ 두 글자를 도리에 어그러진 말을 지껄이면서 멋대로 뇌까렸으니 그 국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죄가 됨에 이미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다가 또 끝에 가서는 미욱하다는 등의 말을 방자하게 늘어놓으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그가 비록 윤리도 없는 메떨어진 사내라 하더라도 어찌 임금의 존엄함은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그것도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까지 외람되고 패려궂게 한단 말입니까.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국문하여 진상을 밝혀내고 빨리 해당되는 법을 적용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대각(臺閣)이 죄를 논하여 아뢰는 일이 그 얼마나 근엄한 일입니까. 아, 저 이윤경이 범한 죄는 그 관계됨이 지극히 중대하니 그 어떠한 죄안(罪案)입니까. 그런데 저번에 그를 논하여 아뢰면서 한 말이 지극히 모호하였고 죄를 성토한다는 것이 도리어 죄를 덮어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비밀 병부를 거두어들이라는 청까지 하였으니 이는 전혀 도리가 없는 짓으로서 비단 느슨하게 논죄(論罪)한 잘못에 그칠 뿐이 아닙니다. 전 대사간 유한모도 벼슬아치 명부에서 삭제해 버리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윤경의 일은 그가 범한 죄를 따지자면 해당 벌을 모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처음에 초기(草記)를 보고 비답도 하지 않은 채 도로 내려보내면서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공문을 보내지 말도록 신칙하였으니, ‘연교’ 두 글자는 첩보나 장계에서 감히 그 말을 쓸 엄두도 내지 말았어야 했었다. 그리고 감히 하찮은 영리 무리를 내세워 이른바 사적으로 통보하였다는 말로 거리낌없이 말하였고 겸하여 패역스런 말까지 있었으니 그의 죄는 목베어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두는 그에게 있어서는 이차적인 죄에 속하는 것들인데 왜 꼭 타이르는 일을 하여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명분을 훼손시킬 것인가. 결코 하찮은 일개 무관의 문제로 하여 혹간 닥쳐올 일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그리하여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면서 그에게 해당한 벌에 대하여 한 번 널리 물어보려던 중이었다. 당분간 처분이 있기를 기다리라. 유한모 문제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8월 30일 경인
정민시(鄭民始)를 선혜청 제조로 삼았다.
각도에서 가을에 실시하는 조련을 중지하게 하였다.
해남 현감(海南縣監) 이운춘(李運春)을 연원역(連原驛)에 귀양보내고 금고(禁錮) 3년을 과하였다.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내수사의 수본(手本)에 따라, 해남현이 명례궁(明禮宮)에 바치는 세곡(稅穀)을 서울에서 사서 바친 일을 본조에서 조사했더니 본읍이 돈을 올려보내어 서울에서 사서 바친 사실이 남김없이 탄로났습니다. 관에서 거두는 조세에 대해 방납(防納)을 금지하는 법이 지극히 엄한데도 해읍(該邑)이 거리낌없이 위반한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해당 수령을 해부(該府)에서 잡아다가 신문하여 엄히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곡식의 낱알 하나하나가 백성들의 노고로 생산되는 것이므로 본디 정한 물품으로 바치더라도 오히려 그에 따른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는 것이다. 이에 즉위한 처음에, 각 궁에 바치는 곡식을 퇴짜놓는 많은 간교한 폐단을 엄히 금지하였고 심지어 각 궁에 바치는 규정을 혁파하고 공물(貢物)의 예와 똑같이 하여 호조에서 나누어 지급하도록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혜택은 돌아가지 않고 간교한 폐단이 이러하며 심지어 서울에서 산다는 말이 상에게까지 들릴 정도이니 각 궁에 직접 바치는 일을 혁파한 본의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지금 와서는 혜택이 여기도 저기도 미치지 않는다고 하겠으니 이 어찌 놀랄 일이 아닌가. 간교한 폐단이 어느 해부터 시작되었던지 그것은 따질 것 없고 조정이 앞장서서 발각되는 대로 처분해야 될 것이다. 해당 수령은 잡아다가 처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니 우선 도배(徒配)에 처하고 이어 금고(禁錮)의 법을 시행하라. 이 뒤로는 서울에서 사서 바치는 일이 발각되기만 하면 세곡을 바친 지방의 수령과 조운(漕運)을 맡은 고을의 도차원(都差員)에게도 모두 이 법을 적용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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