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8권, 정조 17년 1793년 9월

싸라리리 2025. 8. 7. 16:03
반응형

9월 1일 신묘

윤대(輪對)하였다.

 

급제한 지 60돌을 맞이한 노인 영흥(永興)의 가선 대부 김찬주(金贊胄)를 소견하고 삼군문(三軍門)에 명하여 잔치 비용을 지급하게 했으며 그가 고향에 내려가게 되면 도신(道臣)이 잔치 비용과 옷감을 넉넉히 지급하라고 하였다.

 

9월 2일 임진

장용영 제조(壯勇營提調)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본영에서 급료로 주는 쌀이 아직도 넉넉하지 못하여 달리 융통하여 숫자를 채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혜청이 삼남에서 진상하는 약재(藥材)를 임시로 감해준 대가로 받은 쌀 1천 섬은 아직 귀속된 곳이 없고, 호남에 있는 호조가 사들인 쌀과 별검미(別檢米)109)   중에서 모조(耗條)를 합한 1천 섬 및 한성부에서 가져다가 쓰고 낸 모조 1천 섬은 진휼청에서 요청하고 있는 것이지만 진휼청은 다른 곳에서도 옮겨다 쓸 수 있는 형편이니, 이상의 것을 합한 쌀 3천 섬을 본영으로 떼어 넘겨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성부 항목의 본가(本價) 3천 냥은 본영에서 해마다 보내주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본영에서 관할하는 둔토(屯土) 가운데 가산군(嘉山郡)의 논 17결(結) 68부(負) 9속(束)과 정주목(定州牧)의 논 2결 7부 2속은 미처 면세받지 못하였습니다. 규정에 따라 면세하여 주소서."
하니, 따랐다.

 

승지 서매수(徐邁修)가 아뢰기를,
"수원(水原) 궐리사(闕里祠)의 축문(祝文)에 수결을 두는 것으로 해조에서 초기(草記)로 윤허를 받았습니다. 축문에 대신 수결하는 일은 그 사체가 중대하고 시골에 사는 유학(幼學)이 제향을 대행하는 일도 지극히 외람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성(尼城)의 궐리사에서 행하는 예와 똑같이 향촉(香燭)과 제품(祭品)은 그 고을에서 마련하여 보내고 향실(香室)에서 대신 수결하는 그 조항은 그만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예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성의 궐리사는 선비들이 사적으로 제사 모시는 곳에 지나지 않으므로 일찍이 선왕조 신해년에 본현의 공자 영정(影幀)을 향교에 봉안하라는 전교가 있었다가 곧바로 고 유신(儒臣) 박필주(朴弼周) 상소에 의하여 각도의 공자 영정을 모두 예전대로 봉안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애당초 조정 지시에 의하여 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원 궐리사 창건에 있어서는 사체가 이와는 같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이미 읍지(邑誌)에 근거할 만한 바가 있다 하여 특별히 그 곳의 형태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도록 명하고 이어 내각(內閣)에 모셔졌던 성상(聖像)을 그곳으로 옮겨 그곳 영당(影堂)에 모셨던 영정과 함께 봉안하게 하였으며, 그때 전교에서는 궐리사의 편액(扁額)을 써서 내려보내고 봄·가을 제향에 향과 축문을 지방관에게 내려보내라고 분부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유생들이 사적으로 세운 사당과 비교하여 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신 수결하는 것은 일의 체모가 중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삼성사(三聖祠)와 역대 시조의 사당에는 모두 대신 수결을 두어 왔으니 궐리사도 그렇게 마련하여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시골 사는 유학이 왕명을 받들어 제향을 대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정말 외람된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번 예조 초기에 대해 내린 비답에 대략 이르시기를 ‘향과 축문을 내리는 경우 사체가 자별하므로 유생이 제사를 주관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지방 고을의 그와 같은 제사에 향반(鄕班)이 혹 대행하기도 하는데 더구나 공자 사당에 공씨가 술잔을 드리게 하는 것이 뭐가 불가하겠는가.’ 하시면서 이어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게 하였는데 대신들도 다른 의견이 없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저 전후 내리신 전교대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두 말 모두 일리가 있다. 공씨가 공자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더 귀한 일이니 벼슬이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은 없다. 다만 축식에 대해 결정하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것은 그럴 법도 하다. 지방관이나 판관(判官)이 초헌(初獻)을 드리고 공씨가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드리는 것으로 규정을 정하라."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장계하기를,
"증 목사(牧使) 이사룡(李士龍)의 후손 19명과 증 참판(參判) 시문용(施文用)의 후손 14명을 모두 불러 보고 그들의 살던 곳과 사적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사룡이 살던 곳은 본 고을 북면(北面) 작촌(鵲村)에 있는데 전전 임신년110)  에 경내의 사민(士民)들이 사당을 세우고 충렬사(忠烈祠)라고 편액하였고, 제물은 관가에서 마련해준다고 하였습니다. 또 뒷산 기슭에 그의 묘가 있고 그의 7대 적장손(嫡長孫) 이광신(李光臣)이 현재 남면(南面) 조곡(租谷)에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문용은 동방에 온 이후로 동면(東面) 대동방(大洞坊)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또 집 뒤에 단(壇)을 쌓아 놓고 달마다 초하루 보름이면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였답니다. 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 마을을 대명동(大明洞)이라고 부르고, 그의 후손들은 다른 마을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사룡의 8대손 응준(應俊)은 군직(軍職)에 기용하였고, 시문용의 6대손 유영(有榮)과 7대손 한익(漢益)은 식량을 마련하여 떠나보냈습니다."
하니, 상이 이사룡 후손을 단지 그 고을에서만 수용하게 할 수는 없다 하여 그 중에서 활쏘기와 말달리는 재능이 있는 자 세 사람을 뽑아 삼군문(三軍門)의 대장들로 하여금 양식과 말을 마련하고 그들을 불러와 권무 군관(勸武軍官)에 부직(付職)하도록 하였다.

 

9월 4일 갑오

상이 원릉(元陵)111)   참배를 가면서 관왕묘(關王廟)에 들렀으며, 태릉(泰陵) 동구에서 점심 수라를 들었다. 원릉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건원릉(健元陵)112)  ·휘릉(徽陵)113)  ·현릉(顯陵)114)  ·혜릉(惠陵)115)  ·숭릉(崇陵)116)  을 두루 참배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 원릉을 참배하고 나니 나의 감회가 더욱 깊다. 정월달 진전(眞殿)에서 행한 참배 의식에서 특별히 이 제사에 애쓴 제신들에게 예외로 시상했던 것은, 하나는 선왕의 은혜를 미루어서였고, 하나는 이 해에 대한 나의 감회를 나타낸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 해에 또 이 달을 만나고 보니 정월달과는 또 비교가 안 된다. 친제(親祭) 때 아헌관(亞獻官)이었던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과 종헌관(從獻官)이었던 행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씩을 보는 앞에서 내어주고, 찬례(贊禮)였던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과 예방 승지 서매수(徐邁修)에게는 각각 반숙마(半熟馬) 1필씩을 하사하며, 집례(執禮) 이동직(李東稷)과 대축(大祝) 김조순(金祖淳)은 모두 가자(加資)하라."
하고, 이어 제집사(諸執事)와 본릉의 능관(陵官)에게는 품계를 올려주거나 차등있게 상을 주게 하였다. 점심 수라를 들던 곳에 돌아와서는 경기 관찰사와 각종 직무를 맡은 차사원(差使員)들을 소견한 뒤 환궁하였다.

 

9월 5일 을미

상언(上言)한 66통에 대해 재가를 내리고 기묘 명현(己卯名賢)인 시산정(詩山正) 이정숙(李正淑)에게 시호를 주었으며, 상주(尙州)에 사는 효녀 김일(金鎰)의 딸에게는 정려(旌閭)를 내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남원(南原)에 사는 유학(幼學) 이가춘(李可春)이, 자기 방조(傍祖)인 시산정 정숙에게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어달라고 상언하였습니다. 정숙은 기묘 명현으로서 사화(士禍)를 입었는데, 성조(聖祖)로부터 이미 벼슬을 추증받는 은전을 입었고 또 선왕께서도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신 바 있으나 아직까지 시호 논의를 못하였던 것입니다. 숭선정(崇善正) 이총(李灇)의 전례를 따라 내려주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시호 내리는 은전을 시산군에게 베풀지 않고 어디에다 베풀 것인가. 더구나 숭선정 등 여러 종신(宗臣)들에게는 벌써 다 내렸는데 어느 사람에게는 내리고 어느 사람에게는 안 내리면 되겠는가. 회계(回啓)한 대로 시행하고 시호를 내릴 때는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상주(尙州) 유학(幼學) 안광리(安光履) 등이, 고 의사(義士) 김일(金鎰)과 그 딸의 충성과 효도에 대하여 증직과 정문의 은전이 있기를 바란다는 상언을 하였습니다. 김일이 절의에 죽은 뛰어난 행적에 있어서는 저번에 도신(道臣)의 보고에 의하여 충신 의사의 제단(祭壇)에 배향(配享)하도록 특별히 전교를 내렸고 보면 비록 정문과 증직을 하지 않더라도 충성과 절의를 드러내 장려하는 국가 방침에 별로 흠될 것이 없을 것이니 그냥 두더라도 되겠으나, 김일의 딸로 말하면 나이 어린 여자로서 아버지 시체를 경황없는 난리 속에서 찾아내고 백비(白碑)를 세워 뒷사람의 평가를 기다린 그 뛰어난 성효(誠孝)에 대해 장려의 은전을 내리는 것이 아마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고 의사 김일의 딸이 행한 탁월한 사적에 있어서는 백비를 세워서 뒷사람들의 공의(公議)를 기다린 그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절행(節行) 이외에 식견이 뛰어났음을 더더욱 알 수가 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정려를 내리는 조치가 있어야 될 것은 당연한데 저번에 도신의 장계를 보고 일을 시행하려다가 못한 것은 신중히 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많은 선비들의 호소가 이와 같으니 여론이 대체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특별히 정문을 세워주는 은전을 베풀어 풍속과 교화를 진작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9월 6일 병신

천둥과 번개가 쳤다.

 

9월 8일 무술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우박이 왔다.

 

전교하였다.
"요즈음 날씨가 조금 따뜻하여 서리 올 시기가 좀 늦춰질 것 같아 다행스러우나, 계절로는 천둥 번개가 들어갈 때인데도 아침에 한여름과 다름없이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번개가 번쩍번쩍하였다. 모든 자기 반성의 일에 있어 차라리 지나치게 할지언정 미치지 못하는 점은 없어야 되겠다. 지금이 10월은 아니라 하여도 어떻게 도움을 구하는 문제를 소홀히 하겠는가. 위로 현재 시행하는 정사의 결함과 아래로 관원들의 허물에 대하여 반성하는 일에 도움을 줄 만한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삼사(三司)의 말할 책임이 있는 신하들은 각각 이를 받들어 드날릴 좋은 잠계(箴戒)를 진술하라."

 

성균관에서 구일제(九日製)를 보이었다.

 

9월 9일 기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어가(御駕) 수행 장사(將士)와 각신(閣臣)·승지·사관(史官)·의빈(儀賓)·종실 재상·차사원(差使員) 등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대사간 임제원(林濟遠)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바라는 것이 바른말이니 신이 언로(言路)의 폐단을 말하여도 되겠습니까? 언로가 열리고 막힌 데 따른 관계가 어떠한 것입니까. 요즘처럼 잠자코 말하지 않는 것이 풍조를 이룬 적은 없었습니다. 대신은 오직 예예하고 대답만 하는 것으로 묘당(廟堂)의 정책을 삼고 삼사(三司)는 말하기 싫어하여 회피하는 것으로 자신의 계책을 삼아 ‘어물쩍 넘어간다.[媕婀]’는 말이 그대로 당세의 유행이 되었습니다. 한 물에 휩쓸리듯 온 세상이 다 그러하여 앞으로 말이 없는 나라가 될 판인데,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옛날의 사실을 두루 보아도 바른말 하다가 죄를 얻은 사람이 일찍이 없지 않았으나 임금의 위엄 아래에서도 훌륭한 말은 들리었고 먼 곳으로 귀양을 가면서도 바른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시 정신과 기백이 형벌이나 상을 받는 데에서 벗어나 은연중 부합되고 감동됨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후로 나랏일로 상소한 사람에 대해 그 말이 사리에 맞지 않아도 조금도 죄를 주지 않았는데 이는 참으로 훌륭한 덕(德)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말을 쓰지 않고 보니, 한결같이 너그럽게 포용만 하는 것이 자연 남의 바른말을 싫어하는 안색을 지어 바른말하는 사람을 천 리 밖에서 막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에 대하여 그 뜻은 따르지만 그 명령은 따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조정의 관원들을 낱낱이 헤아려 보건대 화려한 관직을 무난하게 얻고 높은 자리를 탈없이 누리는 사람치고 한 가지 일을 논하거나 한 마디 바른말을 올린 댓가로 그런 위치에 있게 되었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익이 있는 곳에는 사람의 마음이 물처럼 그리로 쏠리는 것인데, 바른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잘되는 것만을 보았기 때문에 부형(父兄)과 사우(師友) 사이에도 일종의 의논으로서 마침내 그렇게 하는 것을 몸을 편안히 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신묘한 방법으로 삼아 서로서로 경계하여 그저 어물쩍 넘어가게만 한 것입니다.
징계하고 성토하는 말과 누구나 다 하는 논의에 있어서는 말하여도 폐해가 없기 때문에 장주(章奏)가 날로 쌓이기는 하나 마치 탁본을 한 것처럼 똑같으니 전하의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은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세초(洗草)하거나 불태워버리는 것이 곧 일반적인 규정이 되었고 머물려두거나 되돌려주는 것이 이미 전례가 되어버렸으니, 올빼미가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오지 않는다고 하였듯이 그 역시 간하는 말을 오게 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수문장(守門將)이 어떻게 소차(疏箚)를 알며 병조가 출납(出納)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들로 하여금 올리는 말을 금하게 하는 법을 창출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까.
아, 나라를 유지하는 도구는 바로 기강(紀綱)인데 이른바 기강은 일조 일석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법령으로 조르고 형벌로 위엄을 가하더라도 만일 지극히 공명 정대한 마음으로 주관하지 않으면 온 세상 사람들을 격동시키고 모든 관원들을 진작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꼭 기강을 확립하려고 한다면 왜 근본문제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벼슬과 녹봉은 임금이 아랫사람들을 제어하는 도구이므로 예로부터 명철한 임금 훌륭한 군주는 일찍이 명기(名器)를 신중히 다루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에 있어 인재가 융성하기로는 반드시 목릉(穆陵)117)   때를 일컫지마는, 삼가 《갱장록(羹墻錄)》을 상고하면 정2품 이상의 벼슬은 겨우 15, 16명에 지나지 않았고 문관의 가선 대부(嘉善大夫)도 2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김계휘(金繼輝) 같은 청백하고 중한 인망을 받은 명신(名臣)도 ‘나 또한 참판에 불과하다.’ 하는 속담이 생겨나게 하였으니 그 얼마만큼 어렵고 신중히 한 것입니까. 재위한 40년 동안 갖가지 정사에 잘못된 것이 없고 온갖 법도가 바르게 되었으며 군비(軍備)와 예법(禮法)이 찬란히 갖추어졌었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공기(公器)가 너무 가볍게 되어 비포(緋袍)에 옥관자(玉貫子)를 단 당상관이 길에 가득하고 금장식 초피관(貂皮冠)을 쓴 자가 궐정(闕庭)에 가득합니다. 아침에는 인사 행정의 권한을 잡고 저녁에는 문형(文衡)을 담당하며, 나가서는 감사 자리에서 위엄을 부리며 앉아있고 들어와서는 국정을 요리하는 자리에서 활개치는 자들이 모두들 꼭 통달한 재주와 식견을 가진 것은 아닐진대 그것이 벌써 아쉬운 일입니다. 그리하여 품계는 원래부터 등급이 없게 되고 관직은 엽관(獵官)에 의하여 임명되므로 나이가 조금 많고 벼슬한 지 좀 오래되었으면 백에 하나의 장점도 없는 사람이라도 순차적으로 올라가 높은 벼슬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벼슬자리는 가면 갈수록 구차해지고 조정에서는 매번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옛 성왕(聖王)이 벼슬자리를 만들고 직임을 분담시켰던 뜻이 실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고을 수령은 백성 다스리는 일을 맡긴 자인데도 제수하자마자 금새 바꾸어 버리니 전혀 위임한 효과가 없고, 대각(臺閣)은 바른말을 훌륭히 하라는 책임을 지운 것인데도 잠깐 맡겼다가 금방 갈아치워 이미 돌려가며 차임되는 벼슬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도나도 가지각색으로 나와 혼란스러움이 대단하고 요행으로 진출하는 길을 막지 못해 엽관 운동이 심합니다. 참으로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관직은 실없이 차지하는 게 아니고 좋은 벼슬은 함부로 점유할 수 없음을 알도록 하여 차츰 자기를 아낄 방도를 생각하고 요행으로 차지하려는 바람을 끊어버리게 한다면 그것이 세도(世道)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 한(漢) 무제(武帝)는 고작 욕심 많은 임금에 지나지 않았지만 신선을 찾으려 하면서는 봉래산(蓬萊山)과 영주산(瀛洲山)을 다 뒤지고 나서야 그만두었고 무력을 쓰려고 하면서는 북방 사막지대의 오랑캐를 소탕하고 나서야 그만두어, 마음 먹은 것이면 기필코 이루고야 말려 했기에 선유(先儒)들이 그의 굳센 의지를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서 구차히 편안하려고만 하는 마음만 갖지 않는다면 한 번 정돈하는 일은 금방 사이일 것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려하여 하지 않습니까. 세월은 머물러 있지 않고 의지는 쇠퇴하기 쉬운데, 격려하고 분발하는 뜻이 점차 예전만 못하여 임시로 때워나가는 구차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습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만나서도 매번 결단이 부족하고 어떤 일을 당하여서도 끝내 화끈하게 처리하지 못하니, 큰 일을 할 만한 자질이 있으면서도 지금껏 큰 일을 해놓은 실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고 규정 사이에서만 맴돌면서 고작 그것으로 정치의 형식이나 갖추고 세상 사무를 수응할 뿐이라면 이는 명철하신 전하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니, 가납(嘉納)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9월 10일 경자

묘당(廟堂)을 신칙하여 자주 회의를 갖도록 하였다.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판으로, 정대용(鄭大容)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문원(李文源)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9월 11일 신축

차대(次對)를 하고 겸하여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어사(御史) 윤치성(尹致性)을 교동부(喬桐府)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여 타이르게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교동에 흉년이 들었다는 보고를 듣고 구제할 방도를 의논하려고 하였는데, 관찰사 정창순(鄭昌順)이 마침 남도(南道)를 순시하고 돌아왔다. 상이 교동의 농사 형편을 물었으나 창순은 대답하지 못하고 단지 수신(帥臣)이 보고하여 올릴 것이라고만 말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절도사 허근(許)이 치계하기를,
"신의 병영(兵營)은 염분이 많아 곡식이 잘 안 되는 곳인데 가장 혹심하게 재해를 입어 한눈에 보이는 들판에 낫을 댈 만한 곳은 전혀 없고 비축한 곡식도 텅 비어서 구제할 대책이 없습니다. 본도(本道)와 호서(湖西)·해서(海西)의 바닷가에 접해 있는 고을의 곡식 4천 8백 섬만 특별히 옮겨주어, 한편으로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정착시킬 밑천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내년 봄의 종자와 농사짓는 동안 먹을 양식을 삼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밤에 이 장계를 보고는 즉시 비변사로 하여금 복주(覆奏)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백성을 구제하는 행정은 도신이 주관할 문제이지 수신이 제멋대로 구제곡을 청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잡아다가 신문할 것을 계청하였다. 상이 그 상주(上奏)를 묻어두고, 빈대(賓對)에 나와서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옷을 찾아 입고 대청에 나와 전교하기를,
"저번에 기백(畿伯)이 남도를 순시하고 돌아온 날 그를 불러 교동 백성의 삶에 관한 일을 물었는데, 대답이 정확하지 못했고 앞으로 폐단을 바로잡을 대책과 현재 세금을 면제하고 구제해줄 정책을 모두 수사(水使)의 장청(狀請)에다 밀어버렸으니 그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해서의 옹진(瓮津)은 재해지 등급을 매기는 데 넣지 않았어야 될 것이고, 통영(統營)의 곡식을 청하는 일도 당연히 통제사(統制使)가 청하도록 했어야 할 것 아닌가. 그 당시 처분을 내리려다가 말을 하는 사이 마침 대책을 주선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놔두었던 것이다. 어젯밤에 교동 수사의 장계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저번 연석(筵席)에서 아뢴 그의 말이 참으로 무엇을 몰라서 그랬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묘당의 회계(回啓)에서는 수신(帥臣)만을 논하고 도백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으니, 요즈음 나라 기강이 해이해진 것도 그 원인이 필시 이러한 경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해당 도신 정창순이 격식을 깨뜨리고 백성들의 고통을 소홀히 한 죄에 대하여는 우선 함사(緘辭)로 하여 무겁게 추고하고, 수신의 장계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특례로 품처(稟處)하게 하라. 굶주리는 백성들의 실정을 장계 내용을 보면 더욱 알만한데 만일 일찌감치 부담을 덜어주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섬사람들이 어떻게 온전히 살아가겠는가. 애초에는 겨울이나 내년 봄에 어사를 파견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혹시라도 때늦었다는 탄식이 있을 것 같다. 이에 입시한 옥당 윤치성을 교동부 어사로 임명하는 것이니 농사 형편을 순찰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타이른 다음 돌아오라."
하고, 이어 치성을 소견하고 신칙하여 보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교동에 앞서 떼어준 1천 섬의 곡식은 적지 않은 양이고 설사 부족하더라도 당연히 도신과 상의하여 편리한 방향으로 빌려와야 될 터인데 다른 도의 5천 포(包)나 되는 곡식을 이내 거듭 요청하였습니다. 1천 호(戶) 정도 되는 자그마한 지방에 환자곡과 진휼곡(賑恤穀)으로 쓸 밑천이 이와 같이 지나치게 많아서는 안 됩니다. 도신에게 다시 헤아려보고 보고하게 하소서. 그리고 해당 수신이 먼저 감영을 거치지도 않고 제멋대로 장계를 올린 것 역시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잡아다가 신문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일이 서툰 사람에게 맡기기 어렵다 하여 기민 먹이는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전지(傳旨)를 받들라고 명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장릉(莊陵)118)  에 쓰는 제물(祭物)로서 다른 도(道)에서 바치는 것 중 동래(東萊)의 해모(海毛)와 호초(胡椒), 선산(善山)의 황률(黃栗), 진주(晉州)의 표고(蔈古), 충주(忠州)의 찹쌀과 멥쌀 등은 그 수량이 매우 적은 데다가 먼 지방에서 수송하여 바치므로 매번 정해진 기일을 어기게 되어 도리어 공경심이 부족하다는 탄식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본도 영읍(營邑)에서 마련하여 봉진(封進)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광흥창에서 녹봉(祿俸)을 지급하는 일이 갈수록 어수선해지고 창고에 딸린 구실아치들의 농간도 갈수록 더욱 심하여져서 10여 년 동안에 쌀과 콩의 축난 것이 수천여 섬이나 됩니다. 폐단을 바로잡고 농간을 방지하는 대책에 대해 호조에서 그 절목(節目)을 만들었지마는 그 폐단의 근원을 구명해보면 창관(倉官)을 적임자로 얻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선부(選部)가 서열에 따라 임명하는 사람이 반드시 다 적임자는 아닐 것이니, 본창의 주부(主簿)·봉사(奉事)·부봉사(副奉事) 이 세 자리 중에서 주부는 예전의 태창령(太倉令)을 모방하여 영(令)의 자리로 만들고 실직(實職) 관원 중에 일찍이 수령을 지낸 자로서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을 호조가 특별히 골라 의망(擬望)을 갖춘 다음 낙점(落點)을 받아 2년을 기한으로 세금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그 동안은 자리를 옮기지 말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부봉사는 다른 관아의 직장(直長) 자리와 서로 바꾸고, 직장과 봉사 두 자리도 호조가 실직 참하관(參下官) 가운데에서 선발 추천한 뒤 낙점을 받아 임명하며 전직에서 근무한 달수를 통계하여 30개월의 근무 일수가 찬 뒤에 이조에서 그 자리에 따라 임시로 주부에 승진시키되 단부(單付)로 재가를 받아 출륙(出六)시켜야 되겠습니다. 6개월 동안은 사송(詞訟)의 일을 맡고 6개월 동안은 그대로 본창에 근무한 일수로 계산하여 기한이 차기 전에는 다른 관직으로 옮길 수 없게 하고, 그의 재직 기한이 차도록 한 되나 한 홉의 곡식도 축난 것이 없어야만 비로소 수령으로 추천을 받을 수 있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조는 원 벼슬자리를 잃지 않게 되고 태창의 행정은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전중(殿中)이 창고를 감독하는 문제는 그 법을 둔 본래의 뜻은 엄중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창고의 큰 병폐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모든 폐단을 고치자면 우선 그것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창고 안의 남고 모자란 것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고 녹봉을 지급할 때의 혼란도 금지하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을 한대야 실상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창고의 문을 여는 날 그곳에 나가 잠긴 상태를 살펴보고는 곧장 들어오고, 창고를 닫는 저녁에 또 가서 잠그는 일을 감시하게 하여 옛 규약만 존속시키고, 그 나머지 내고 들이는 따위의 절차에 대해서는 일체를 본창에 맡기면 폐단을 없애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가 광흥창의 폐단을 바로잡는 데 대한 절목을 아뢰었다.
【1. 녹봉을 지급하는 일의 체모는 지극히 존엄하고 중대한 것인데 병조에 녹봉에 관한 대장이 있기는 하지만 난잡함이 매우 심하고 이조에서는 원래 대장을 만들어 보내준 예가 없으므로 창고에 속한 구실아치가 사적으로 관안(官案)을 베껴서 이를 가지고 녹봉을 지급한다. 당연히 받아야 될 사람인지 받지 않아야 될 사람인지를 해당 창고에서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지급하여 손실을 당하는 폐단이 종종 있다. 이 뒤로는 매달 21일에 녹봉을 받아야 될 인원을 이조와 병조가 일일이 조사하여 도장을 찍은 다음 명부를 만들어서 호조에 보내면 호조의 낭관(郞官)이 해유(解由)와 월등(越等)이 있고 없고를 조사하여 응당 지급해야 될 인원의 총수를 죽 적어서 해조(該曹)에 이첩하여 녹봉을 지급할 대상으로 삼는다. 명부를 만들어 보낸 뒤에 혹 관원이 교체되는 일이 있으면 새로 임명된 사람이 출근한 뒤에 이조와 병조에서 즉시 공문을 보내어 이에 의거하여 조치할 수 있는 근거가 되게 한다. 잘 관리하지 못했거나 착오를 일으킨 폐단이 있을 때는 해조의 낭관과 구실아치를 호조가 초기(草記)로 죄 줄 것을 청한다. 1. 녹봉을 지급할 때는 대신 이하를 이름을 부르면서 지급하는데 감히 순서를 뛰어넘지 못하도록 규정이 지극히 엄격한데도 요즘은 상사는 상사대로 사납게 굴고 그 아랫것들은 앞다투어 마구 들어와서 곡식의 좋고 나쁨과 분량의 많고 적음을 놓고 제멋대로 퇴짜를 놓거나 고르기도 한다. 심지어 쌀이나 콩을 흩뿌려 짓밟기도 하고 창고 담당 아전을 두들겨 패기까지 하여 이와 같은 북새통에 무뢰배들은 이를 기화로 섞여 들어와서는 곡식을 도둑질해 간다. 이는 대체로 본창이 제사(諸司)에 물품을 바치는 일이 많은 관계로 매번 바칠 적에 바로 아랫것들이 그 중에서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들의 행패가 아무리 심하여도 창고의 구실아치는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창고의 관원은 금지하려 해도 호령이 시행되지 않는다. 이 뒤로는 호조 판서가 때때로 친히 창고에 가서 지급하는 일을 감독하여 만일 난잡스러운 폐단이 있으면 비록 대신이 장관인 관아의 하례일지라도 본창에서 죄를 다스리고 해당 관원은 호조에서 초기로 죄를 논하여 처리한다. 1. 창고 관원에게는 해유(解由)에 대해 걸리는 법이 있는데도 요즈음에는 폐지한 채 적용하지 않는 까닭에 원역(員役)들이 곡식이 축나도 받아들이는 일에 힘을 쓰지 않고 앞당겨 지급하거나 꾸어주기를 제멋대로 하고 있다. 이 뒤로는 창고 관원이 다른 관아로 옮겨가는 자가 있으면 호조의 낭청이 창고의 장부를 가져다가 살펴서 축난 것이 있으면 관원이건 구실아치이건 따지지 말고 축낸 양이 10섬 이하는 즉시 받아내고 10섬 이상은 받아낸 뒤에 초기로 파면을 청하며 1백 섬 이상일 때는 ‘공금 유용 협잡법[那移反作律]’을 적용하여 엄히 다스린다. 1. 각 창고의 곡식이 축나는 원인은 전적으로 당상관을 무시하고 나누어 주는 일을 맡은 창고 관원이 제멋대로 창고를 여는 데에 기인한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본 창고에서 나누어 줄 섬[石]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12달로 분배하고 윤달이 있는 해에는 13달 분으로 분배하여 놓으면 세 사람의 맡은 관원이 이를 각 창고에 나누어 쌓아두고 단단히 자물쇠를 채우고 굳게 봉하여 두었다가 녹봉을 지급할 때 당상관이 창고를 갈라 맡겨준 다음 비로소 창고를 열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창고에 쌓아둔 곡식은 그 달 안에 모두 지급하고 다른 창고는 다시 건드리지 말며 혹 창고 관리를 맡은 구실아치가 축낸 것도 그 달 안에 숫자에 맞게 받아서 창고에 들여놓는다.】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08면
【분류】재정(財政)

 

서영보(徐榮輔)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대사간 임제원(林濟遠)이 상소하기를,
"올 가을 삼남(三南) 지방 농사 형편은 비오고 개이는 일기가 알맞아 파종과 김매는 시기를 잃지 않은 관계로 이 근래에 보기 드문 풍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듣기에 논이 있는데도 모를 내지 못한 곳이 많이 있고 이미 모를 내기는 하였으나 너무 늦게 낸 곳도 많다고 합니다. 이는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퍼져서 인력이 미치지 못한 소치이기도 하지만 실은 일소[農牛]가 너무나 귀한 소치라고 합니다. 농가의 으뜸으로 치는 물건 중에는 소가 제일인데 소를 길러 번식시키는 일은 점차 그전만 못하고 날마다 마구 잡아먹는 일은 이 근년에 가장 심해졌습니다. 이름 있는 고을이나 큰 도회지에는 성균관 하례들이 푸줏간을 설치하고 가난한 집과 피폐한 마을에서는 미욱한 백성들이 소를 잡아 고기를 나누어 먹습니다. 심지어 큰 거리의 늘어선 가게에는 쇠고기 파는 것을 업으로 삼는데 쌓아놓은 고기가 마치 산더미 같습니다.
그런데 그 폐단을 논하자면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이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소 한 마리의 값이 거의 백금(百金)이나 되어 논밭을 갈 만한 소가 없어서 사람이 대신 논밭을 파게 되므로 모를 내지 못한 것이나 늦게 내는 것은 형편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 어찌 세운(歲運)의 탓이겠습니까.
아, 소를 도살하는 일을 나라 법으로 크게 금하고 있고 더구나 지금 농사를 망치는 폐단이 모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금지하는 법을 거듭 밝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도신(道臣)은 속전(贖錢) 거두는 일을 꺼려하여 묻지도 않고, 수령은 혹간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할까봐 내버려두어 수십 년 동안 언제나 하는 단속으로만 그침으로써 금지하는 법이 전혀 없는 것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계속 나가다간 논밭이 어떻게 묵지 않겠습니까. 각도에 특별히 신칙하여 엄중히 금지시키고 법을 어기면서 소를 도살하는 무리들은 일체 엄한 벌로 다스리면 아마 백성을 위하고 농사를 중히 여기는 실질적인 정사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재해에 관한 정책은 흉년이 들 적마다 조정에서는 마음을 써서 걱정하고 감영과 고을에서도 마음을 다하여 혹시 조그마한 면적의 땅이라도 재해에 대한 면세에서 빠질까봐 애를 쓰기 때문에 백성들이 억울한 징세(徵稅)를 면할 수가 있지만, 풍년이 든 해에는 몇해 동안의 수확량을 평균으로 따져서 그 해의 총수확량으로 잡고 퇴짜놓는 것을 일삼아 각박하게 규정을 만들기 때문에 가련한 백성들만 그 해를 입고 있어 그것을 더욱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올해는 큰 풍년이 들기는 하였으나 재해가 된 것이 대체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초불(初不)’이고 또 한 가지는 ‘내불(內不)’이고 또 한 가지는 ‘만이(晩移)’입니다. 완전히 씨를 뿌리지 못한 것을 ‘초불’이라고 하고 절반은 모를 내고 절반은 내지 못한 것을 ‘내불’이라고 하고 모를 전부 내기는 하였으나 제철이 벌써 지났거나 김을 매지 못하여 끝내 결실을 거두지 못한 것을 통틀어서 ‘만재(晩災)’라고 합니다. 이는 모두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소가 아주 귀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근래 재해를 잡는 규정에 있어 ‘초불’ 한 가지는 응당 면세 대상이 되지만 ‘내불’과 ‘만재’는 허실(虛實)이 뒤섞이기 쉬운 까닭에 흔히 거론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올해처럼 비가 충분히 내린 때에는 이런 따위의 재해 명목은 사리에 맞지 않으므로 수령은 감사에게 감히 말하지도 못하고, 감사는 묘당(廟堂)에 감히 보고하지 못하여 필경에는 백징(白徵)하게 되니, 이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겨우 얼마 되지도 않는 곡식을 수확하고서 정량의 세금을 맞추어 바치게 되니 더욱더 억울한 일입니다.
영재(永災)에 있어서는 나라 재정에 크게 관계되는 만큼 결수(結數)를 한정하여 정한 규정이 전부터 있으나, 작년 같은 전에 없던 수재로 봇도랑이 평지가 되고 논밭 두렁이 뒤바뀐 경우는 결코 한두 해 동안에 도로 논밭으로 일굴 수가 없습니다. 영남 지방처럼 마구 보고한 경우는 참으로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잘못이 있으나 그 밖의 각도에 있어 정해진 숫자대로 똑같이 따른다면 다소 백징의 폐단이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것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에 대한 문제는 경의 말이 적절하다고 하겠다. 그저께 연중(筵中)에서 묘당으로 하여금 별도 대책을 강구하여 정하도록 신칙하였었는데 지금 경의 상소 내용이 또 이와 같으니 각도에 엄히 신칙하여 실질적인 효과가 있도록 해야겠다. 조세 문제는 이번에 각도의 근만(勤慢)에 대해 그 일체를 묘당에 위임하였다. 그 일이라면 민생 고락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므로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낱낱이 신칙하여 조그마한 면적의 땅에 대해서라도 무리한 조세 징수가 없도록 하라고 해야겠다."
하였다.

 

이최원(李㝡源)을 하동현(河東縣)에 이배(移配)하고, 홍경두(洪景斗)를 금성현(金城縣)에 귀양보냈다.
이에 앞서 후조창(後漕倉)119)  의 조운선(漕運船)이 침몰하였는데 이최원이 당시의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서 언양현(彦陽縣)으로 귀양갔다. 그런데 이때 와서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치계하기를,
"이최원과 창녕 현감(昌寧縣監) 홍경두가 국가의 정당한 조세 규정을 무시하고 쌀과 돈을 바꿈질하는 통에 이렇게 아전과 뱃사공이 빌붙어 농간을 부리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의금부의 평의(評議)에 따라 이최원도 좀 더 먼 지역으로 이배한 것이다.

 

9월 12일 임인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를 소견(召見)하였다. 종수가 수차(袖箚)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채제공(蔡濟恭)의 상소를 널리 알려 보여주신 이후 처음으로 연석(筵席)에 올라 제공이 역적인지 아닌지를 비로소 아뢰게 되었으나, 본디 말이 어눌하고 또 병으로 정신이 혼미하여 부득이 수차로 아뢰는 바입니다.
아, 금등의 글이 나오자 두 임금의 덕이 더욱 빛나고 성상의 효성에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선왕(先王)의 어제(御製)는 하늘에 있는 해와 별같아 애당초 우리 전하가 일언 반구라도 따로 언급하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니, 이는 하늘을 두고 감히 말할 수 없다는 지극한 효성과 정밀한 의리에 꼭 들어맞는 일로서 진실로 효도와 우애가 신명을 통하지 않고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진선 진미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지 않고 살아 이 일을 보게 되니 기쁨과 슬픔이 엇갈려 한없이 속으로 되뇌이고 있습니다. 가령 거듭 일어나는 세상의 변고를 두고 말하더라도 의리에 대해 이미 입에 올릴 거리가 없기에 흉악한 계획을 꾸밀 마음도 내지 못할 것이니, 영원히 환란을 막는 일이 지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제공의 죄악에 있어서는 그가 상소에서 직접적으로 범한 세 조항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가장 무거운 죄안인데도 상께서 용서하는 쪽에다 두신 것은 바로 금등의 글을 그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남들이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을 그 혼자서 말했어도 용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가령 제공이 참으로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바칠 정성이 있었다면 금등에 대한 말을 곧바로 제기했어야 옳고, 설령 금등이란 두 글자가 엄중하여 감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면 두 임금의 아름다운 덕만을 천양하여 온 세상이 다 알게 하는 뜻으로 완곡하게 돌려서 말을 하고 간절한 정성을 보임으로써 어쩔 수 없이 옛날의 일에 언급했음을 보였어야 그것이 바로 신하로서의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더구나 금등에 관한 일을 저만이 알고 있었다면 백대에 전할 만한 두 임금의 미덕에 대하여 제 아무리 사람의 마음이 없고 신하의 본분이 없는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감동하고 애달프게 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말하기를 ‘아직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못했다.’ 하고, 또 감히 말하기를 ‘백대 이후에는 무엇을 가지고 신빙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아, 그렇게 소중하고 존엄할 수 없는 자리에서 차마 꺼내지도 못하고 감히 말할 수도 없는 사실을 쓰면서 일찍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을 마치 잊은 것처럼 속이고 고의로 더없이 망측한 말을 만들어내어 우리 두 임금의 미덕과 성상의 효성을 묻어버리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그렇게 사람들 마음을 현혹시키고 온 세상을 선동시키려고 한 그 뜻이 과연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아, 역시 흉측합니다.
그의 상소 가운데 숱한 음흉한 말들을 감히 제기하지 못하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일체 모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나가지만,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벌써 그가 흉역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판별이 된 것입니다. 우리 성상의 하늘처럼 포용하는 큰 덕을 신도 살뜰히 받들고는 싶지만 많은 사람 눈을 가리기 어려운 데 있어서는 어찌하겠습니까. 신의 차자를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낱낱이 물어보소서. 그리하여 만일 신이 한 말을 옳지 않다고 하는 자가 있으면 신이 면대하여 따지겠습니다."
하였다.

 

9월 13일 계묘

선원전(璿源殿)에서 차례를 지냈는데 대신과 2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을 나아와 참석하게 하였다. 차례를 마치고 수직한 중관(中官)·전감(殿監)·수복(守僕) 등에게 활과 화살, 쌀과 베 등을 하사하였다.

 

전교하였다.
"고 의사(義士) 이사룡(李士龍)의 후예를 녹용(錄用)한 일이 있었다. 더구나 의주(義州) 사람 증 참판 최효일(崔孝一)은 충민공(忠愍公)120)  의 외우(畏友)이자 그 절의가 이사룡보다 한 등급 더한 사람인데이겠는가. 그 두 집안의 공로를 보답하는 데 있어 부족한 점이 없어야겠는데 효일의 집에 내려진 것은 추배(追配)하는 한 가지 일에 지나지 않으니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숙종(肅宗) 때는 참판을 추증하였고, 선왕(先王)께서는 그의 사적을 기록한 책의 이름을 《수훈천추(樹勳千秋)》라고 내리시고, 또 곧 그의 후손을 선전관에 특별 녹용하도록 명하셨으니, 두 임금의 거룩한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달 19일이 바로 효일이 절의를 세운 날이니 향(香)과 축문을 내려보내고 지방관을 시켜 그날 그의 사당에 가서 제사를 지내게 하라. 그처럼 미천한 사람을 특별히 선전관에 녹용하도록 한 것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은전(恩典)이었는데 듣기에 미처 시행하지 못했다고 한 듯하니 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닌가. 병조로 하여금 그 후손의 이름을 물어 즉시 선전관으로 추천하게 하고, 이 뒤로 그 집안 사람으로서 무(武)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출신천(出身薦)이나 남행천(南行薦)을 논하지 말고 반드시 모두 천거하도록 하는 일을 모든 무장들로 하여금 알고 있게 하라."

 

우의정 김희(金憙)가 상차(上箚)하기를,
"신이 못난 몸으로 외람되이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인재를 추천하는 일로 임금을 섬기고 있다고 자처할 수는 없지마는,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서도 추천하지 않는다면 신의 죄가 클 것입니다. 전 참봉 김재익(金載翼)은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탐구하고 실천을 독실히 하며, 전 감역 박윤원(朴胤源)은 독실히 배우고 예를 좋아하며 법도에 맞는 몸가짐을 하고, 유학(幼學) 심사동(沈師東)은 경술(經術)이 정밀하고 깊으며 행실이 방정 근엄하고, 유학 김이검(金履儉)은 재주가 높고 식견이 넓으며 학문에 나아가고 몸을 닦는 데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모두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고 말과 행동이 훌륭하다는 소문이 있어 오랫동안 사우(士友)의 존경을 받아오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을 특례로 발탁하여 이미 가려 뽑은 여러 유신(儒臣)들과 함께 불러들여 경악(經幄)의 반열에 두시면 사림(士林)의 용기가 솟고 조야(朝野)의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성상의 학문을 돕고 세상 풍교를 바로잡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행여 전하께서 못난 사람이라 하여 그 말까지 버리지 마시고 바로 전조(銓曹)에 명하여 김재익·박윤원은 모두 경연관으로 임명하고 심사동·김이검도 차례로 등용하시면 그게 바로 유학을 존숭하고 도학을 중하게 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 그 차자를 돌려주고 또 타이르기를,
"대신은 인재를 추천하는 일이 바로 임금 섬기는 일인 것인데 더구나 선비를 추천한 일이겠는가. 경의 본의는 매우 좋다. 그러나 보통의 법이라면 혹 특례로 할 수도 있으나 이 일에 있어서는 한 사람의 견해만 가지고 감히 인재 선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선왕의 수교(受敎)에 소상히 실려 있어 지극히 엄절하다. 기주(記注)를 상고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뒤에, 여러 대신과 해조(該曹)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정원을 갖추어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고 추천한 다음에 우선 유현(儒賢)의 직에 부친다고 또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실리게 되었다. 수교가 벌써 그렇고 법이 또 그러하니 경의 말이 좋기는 하지만 이를 어기기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경의 이번 일은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나온 듯하여 우선 되돌려 보내어 경의 마음을 편안히 하는 동시에, 추천한 여러 사람에 대해서는 수교와 법전의 규정에 따라 의논에 참여해야 될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고 그 취사를 결정하겠다."
하였다.

 

9월 14일 갑진

우의정 김희가, 차자를 도로 내려준 데 대하여 다시 차자를 올려, 규례에 어두운 죄를 적용해줄 것을 청하자, 비답을 내려 위로하였다.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윤호(尹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홍양호(洪良浩)를 판의금부사로, 이가환(李家煥)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9월 15일 을사

전교하였다.
"요즈음 밤낮으로 잊지 못하는 한 가지 생각은 경기의 교동(喬桐)과 해서(海西)의 연안(延安)·배천(白川) 등지에 대한 것이다. 그 곳 농사 실태에 관한 장계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별도 조세 감면의 혜택을 주고 이어 어사를 파견하여 위로하려고 생각하였었다. 일전에 교동에서 곡식을 요청한 일로 인하여 우선 암행 어사를 보냈으나 인접한 지역에서는 더디어서 기다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 병조 정랑 홍대협(洪大協)을 연안·배천 등 고을의 농사 형편을 살피고 백성들을 위로하는 어사로 임명하는 바이니, 내일 사조(辭朝)하도록 하라."

 

9월 16일 병오

육상궁(毓祥宮)과 연호궁(延祜宮)을 참배하고 선희궁(宣禧宮)에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선희궁 재실(齋室)에 나와 해서 위유 어사(海西慰諭御史) 홍대협을 소견하였다. 상이 대협에게 이르기를,
"팔도가 모두 풍년이 든 때에도 연안·배천 두 고을은 큰 흉년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도백의 장계를 보건대 백성들의 황급한 상황을 알 수 있으니, 그대가 가서 그곳의 농사 형편을 자세히 살피고 조세 감면과 기타 구제 정책에 대해 도백과 상의한 다음 복명하도록 하라. 기타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묻고 찾아서 알아 오도록 하라."
하였다.

 

연안 등의 고을에 사는 노인과 백성들을 타일렀는데, 그 윤음(綸音)에 이르기를,
"해서 지방은 산과 바다가 둘러 있고 붉은 흙과 진흙이 뒤섞여 있다. 민간 풍속은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농삿일에 힘을 다 쏟는데도 농사는 흉년이 잦고 풍년은 드물다. 그리고 연안·배천 두 고을은 한 눈에 들어오는 널다란 들판이 틔여 있지만 들판에 물대는 시설이 없어 비가 조금만 적게 와도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내가 서쪽 지방에 대해 늘 이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여름 가을이 교체되는 때에 농가의 가뭄이 달포하고도 열흘이나 지나다가 때로 가랑비라도 내리면 곧장 해서 지방에도 같이 내렸는지 묻곤 하였지만 여러 곳에 내린 비가 유독 해서 지방에는 내리지 않아 수확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농사 형편이 벌써 결판이 나버렸다. 이에 나의 서쪽 지방을 염려하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하여 밤이나 낮이나 잠시도 감히 편히 지내지를 못하는 것이다. 백성이 지극히 어리석으나 역시 지극히 영묘하기도 한 것인데, 나의 이러한 마음을 십분 이해하여 믿고 두려워하지 않아 다른 곳으로 흩어져 떠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체로 올해는 각도의 농사가 조금은 나의 눈쌀이 펴지게 되었는데 해서의 몇 고을은 풍년 거지와 다름이 없으니, 모든 백성을 동일하게 보는 내 마음으로 너희들을 생각할 때 내 몸이 아픈 정도가 아닌 것이다. 너희들은 이런 심정을 알기나 하는가.
먼저 도신에게 신칙하여 정착시킬 대책을 모두 강구하도록 하였고 다음으로 수신(帥臣)에게 유시하여 미리 환곡의 상환 기한을 물리거나 조세를 면제한다는 명령을 반포하게 하였으나, 이런 조치가 어떻게 너희들의 다급한 처지를 구제하고 너희들의 도탄에 빠진 생활을 건져낼 수 있으랴. 그런데도 너희들이 안심하고 정착하도록 하려고 자꾸만 중복되는 것도 불사하고 부득불 이 윤음을 내리는 것이니, 너희들도 알고 있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팔도가 똑같이 풍년이 들어 곡식이 풍족한데 몇 고을 먹고 살기 어려운 정도야 지나치게 애태울 것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더욱 차마 잠시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을마다 사고(社鼓)121)  를 울리며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있는데 곁에 있는 한두 사람만 굶주려 부황이 나서 예상(翳桑)의 고통122)  을 면치 못한다면 군자(君子)는 그들에 대해 몇배나 더 가련하게 여길 것이다. 일찍이 관북(關北) 지방에도 하교한 바가 있지만 옛사람이 말한,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한 그 비유가 역시 너희들에게도 이해가 될 것이다.
본도에서 농사 실태에 관한 장계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넉넉히 돌보아주는 은전을 베풀려고 하였으나 겨울철이 점점 가까워져서 조세 납부를 독촉하기 시작할 것이니 이 때에 유시하지 않으면 이미 때가 늦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어사 홍대협(洪大協)을 보내 연안 등의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의 농사 형편을 자세히 살피도록 하고 그 다음으로 이 위로의 유시를 너희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모쪼록 분명하게 듣고서 안심하고 정착하여 살도록 하라.
연안의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에는, 올해 상환해야 할 환자를 내년 가을까지 수량을 나누어 기한을 물려주고 다른 물품으로 대신 바칠 수 있으면 대신 바치도록 하고 해묵은 환자는 전량 기한을 물려줄 것이다. 그리고 경외(京外)의 각종 신공(身貢)과 군역(軍役)에 당하는 쌀과 베는 절반은 탕감해주고 나머지는 모두 기한을 물려주며, 균역청의 면세(免稅)받은 토지의 결미(結米)는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하고, 증렬미(拯劣米)는 기간을 따질 것 없이 모두 탕감하도록 하라. 그리고 연안 이외에도 그 재해가 연안과 같거나 더욱 심한 고을은 이 조례를 적용할 것이며, 아주 심한 고을 다음 정도 되는 마을과 조금 결실이 된 마을은 어사에게 맡겨 적절히 등급을 나누어 매기되 백성들에게 편리가 돌아가도록 힘쓰게 할 것이다. 그밖의 기민 먹이고 돌보아주는 일 등 너희들에게 유리한 일과 기타 각 고을의 민정(民情)에 대해서도 도신(道臣)과 어사를 시켜 그 실정에 따라 정확히 헤아려서 아뢰고 처분을 기다리도록 할 것이다. 아, 너희 노인과 백성들은 모쪼록 명심하여 듣고 마음편히 정착해 살도록 하라."
하였다.

 

경기 바닷가 고을의 곡식 2천 섬을 교동부(喬桐府)에 떼어 주었다. 관찰사 정창순(鄭昌順)의 장계에 따른 것이다.

 

병조가 금군(禁軍)에 관한 절목(節目)을 아뢰었다.
【1. 취재(取才)는, 한량(閑良)이나 출신(出身)을 따지지 않고 각자 활쏘기 시험에 응시할 사람은 반드시 금군 중에서 세 사람의 보증인을 세운 다음에 응시를 허가하는 것이 본래 정한 법의 본의인데도 근래에 와서 그저 안면에 따르고 그 사람의 품격은 따지지 않는다. 이 뒤로는 취재할 때 합격한 사람의 용모와 내력과 사는 곳을 검열하여 조금이라도 조건에 맞지 않은 점이 있으면 추천한 보증인 세 사람을 죄의 경중에 따라 곤장을 치고 도태시킨다. 1. 금군으로서 도태되었을 경우, 만일 스스로 빠졌다가 다시 소속되려는 자가 아니면 일체 취재를 보이고 나서 소속시키는 것이 본래 정한 규정인데, 근래에 와서 잘못된 전례를 그대로 따라서 죄의 경중이나 근무한 기간이 오래인지 짧은지는 따지지 않고 가까스로 도로 임명되기만 하면 곧장 공공연히 모두 예전의 근무 일수를 통합하여 계산해준다. 이는 실로 각 군문(軍門)에 없는 일이니, 이 뒤로는 재임 기간 중에 부모의 초상을 당하여 스스로 빠졌다가 다시 소속되려는 경우 이외에는 예전의 근무 일수를 통산하지 말아서 요행수를 바라는 작태를 근절할 것이다. 1. 화포(火砲) 군사 가운데 각 번(番)의 2명은 군기시와 각 군영의 별파진(別破陣)으로서 결원에 따라 채우는 자리로 본래 정해져 있으므로 원래의 금군과는 판이하게 구별된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금군을 모면하려는 멀쩡한 건달들이 아침에 별파진으로 들어가서는 저녁에는 화포를 맡는 곳으로 옮겨가는가 하면 그대로 또 원래의 금군으로 속여 바꿔치기도 하는데, 무예는 까맣게 모르면서 관마(官馬)만 그대로 차지하고 있다. 현재 화포를 맡은 군사로서 금군에 들어간 사람이 무려 수십 명이나 되는데 계속 이대로 두고 보면 6백 명의 금군이 앞으로 다 멀쩡한 건달이 되고야 말 것이다. 이 뒤로는 화포를 맡는 군사의 자리가 비면 반드시 속이고 금군으로 바꿔치기한 사람 수십 명을 차례차례 도로 모두 보충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한 명도 남은 자가 없이 다 돌려보낸 후에야 각 해당 별파진으로 규례에 따라 들어오게 허락할 것이다. 1. 금군들이 서로 번들 차례를 바꾸는 일은 별로 해로움이 없을 듯하지만 화포를 맡은 군사가 들락날락하고 근무 일수를 줄이고 늘리는 농간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관마를 바꾸어 주는 일도 당연히 금지해야 되는 것인데, 시골에 사는 금군들이 날마다 관마를 부려서 삯을 받고 짐을 실어 나르다가 병들어 힘이 다하면 서울에 사는 금군의 관마와 값을 따져 바꿔치기를 하니, 어떻게 말이 야위어 못쓰게 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금군의 번을 바꾸는 것과 관마를 바꾸어 주는 것을 일체 금한다. 1. 금군에게 지급하는 관마에 대해서는 원래 정해진 규정이 있는데, 근년 이래로 마음 내키는대로 농간질을 한다. 금군의 속임에 넘어가 외람되이 주고, 염초(焰硝)를 불법으로 바꾸어내는 것도 그대로 받아주는 일이 숱하여 혼란하기 그지없다. 겨우 일일이 조사하여 자신의 말로 바꾸어 바치게 하였으나 앞으로 이런 폐단이 절대로 없으리라고는 보장하기 어렵다. 반드시 불시에 점검하여 마안(馬案)을 대조해서 만일 사적으로 바꿔치기하여 털빛이 서로 다르면 해당자는 엄히 곤장을 쳐서 도태시키고 정(正)과 영(領)도 죄를 준다. 1. 말을 바친 자로서 순차를 어기고 구전(口傳) 발령을 받으려는 경우, 포교(捕校)의 이름을 빌어 공무(公務)에 애썼다고 하면서 연줄을 놓아 청탁해서 서열을 따지지 않고 곧 구전 발령을 받는다. 계묘년 절목(節目)에 포교가 순차를 어기는 일에 대한 금지 조항이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도 근년에 와서 남김없이 예전처럼 되어버렸다. 이 뒤로는 한결같이 말을 바친 선후에 따라 임명하고 포교의 순차를 어기는 일은 엄단할 것이다. 1. 강(講)으로만 취재(取才)하는 것은 단지 체아직(遞兒職) 자리의 교련관(敎鍊官)으로 산관(散官)이 된 자에 한하여 허가하였고, 기본 취재에는 분기마다 2명만을 뽑는 것이 본래의 절목이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일찍이 화포를 다루던 군사였거나   이인강(二人講)123) 에 합격한 자도 추절목(追節目)이라 일컬으며 아무 때나 강을 받으니 혼란하기 그지없다. 지금으로 부터는 체아직 자리의 교련관과 당상 군관(堂上軍官)으로서 산관이 된 자에 한하여 옛 규례에 따라 반드시 기본 취재를 할 때 시취(試取)하되 2명을 초과함이 없게 할 것이다. 이밖에 병조 판서가 집무할 때 강을 시험하는 한 조항은 영원히 막을 것이며, 이른바 화포수와 이인강 등의 추절목은 지워 없애고 시행하지 않을 것이다. 항오 교련관(行伍敎鍊官)으로서 산관이 된 자는 이미 본청(本廳)의 화포수 한 자리에 수용한다는 한 절목이 있으니, 강을 시험하고 말을 바쳐서 금군이 되는 것은 근래의 잘못된 규정이므로 영영 막아버릴 것이다. 1. 각 군영의 군교(軍校)로서 산관이 된 자들은 모두 다시 들어오는 길이 있으나, 오직 본영(本營)의 항오 교련관으로서 벼슬이 떨어진 자는 도로 소속되는 방법이 단지 화포수 한 자리일 뿐이고 다른 길은 없다. 대체로 금군 자리의 취재를 할 적에는 이인강에 합격하지 않았다 하여 승인하지 않고, 항오 교련관 자리의 취재를 할 적에는 현재 군대에 있지 않다고 하여 승인하지 않으니, 비단 그네들만 억울한 것이 아니라 인재를 잃는 걱정이 없지 않다. 전임 장교라 하더라도 본래는 항오 교련관이었으니 항오 교련관 자리의 취재에 응시를 승인하는 것이 사리에 있어 당연한 일이다. 이 뒤로는 항오 교련관의 자리를 취재할 때에는 특별히 응시하는 것을 승인할 것이다. 재임 중에 부모의 초상을 당한 자는 다른 경우와 원래 다르므로 더욱 각별하게 돌봐주어야 되며 반드시 간간이 사람을 골라 임명해야 될 것이다. 1. 완력이 세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자를 평소에 금군으로 일컬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없어졌다. 교련장에서 말달리는 걸음이 들쭉날쭉 빠르고 느려서 임금을 호위해 가거나 행진을 할 적에 뒤에 처지거나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벌어지며, 각종 활쏘기의 기술도 모두 무디어졌다. 지금부터는 각번의 정(正)과 영(領)은 매달 활쏘기 대회를 열어, 달마다 유엽전(柳葉箭)으로 한 차례에 3순(巡)을 쏘고 기사(騎射)를 세 차례 쏘아 표적을 맞힌 화살의 수에 따라 점수를 주어 번들기를 면제하거나 번드는 날수를 더하여 상벌(賞罰)로 삼을 것이다. 진(陣)을 치는 절차에 있어서는 일체로 이를 연습하며, 기사는 종이허수아비와 짚허수아비를 편리한 대로 만들어서 하고 유엽전은 관혁(貫革)으로 하거나 소포(小布)로 하거나 경우에 따라 서로 바꾸어 쓸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410면
【분류】사법(司法) / 군사(軍事)


[註 123]【1. 취재(取才)는, 한량(閑良)이나 출신(出身)을 따지지 않고 각자 활쏘기 시험에 응시할 사람은 반드시 금군 중에서 세 사람의 보증인을 세운 다음에 응시를 허가하는 것이 본래 정한 법의 본의인데도 근래에 와서 그저 안면에 따르고 그 사람의 품격은 따지지 않는다. 이 뒤로는 취재할 때 합격한 사람의 용모와 내력과 사는 곳을 검열하여 조금이라도 조건에 맞지 않은 점이 있으면 추천한 보증인 세 사람을 죄의 경중에 따라 곤장을 치고 도태시킨다. 1. 금군으로서 도태되었을 경우, 만일 스스로 빠졌다가 다시 소속되려는 자가 아니면 일체 취재를 보이고 나서 소속시키는 것이 본래 정한 규정인데, 근래에 와서 잘못된 전례를 그대로 따라서 죄의 경중이나 근무한 기간이 오래인지 짧은지는 따지지 않고 가까스로 도로 임명되기만 하면 곧장 공공연히 모두 예전의 근무 일수를 통합하여 계산해준다. 이는 실로 각 군문(軍門)에 없는 일이니, 이 뒤로는 재임 기간 중에 부모의 초상을 당하여 스스로 빠졌다가 다시 소속되려는 경우 이외에는 예전의 근무 일수를 통산하지 말아서 요행수를 바라는 작태를 근절할 것이다. 1. 화포(火砲) 군사 가운데 각 번(番)의 2명은 군기시와 각 군영의 별파진(別破陣)으로서 결원에 따라 채우는 자리로 본래 정해져 있으므로 원래의 금군과는 판이하게 구별된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금군을 모면하려는 멀쩡한 건달들이 아침에 별파진으로 들어가서는 저녁에는 화포를 맡는 곳으로 옮겨가는가 하면 그대로 또 원래의 금군으로 속여 바꿔치기도 하는데, 무예는 까맣게 모르면서 관마(官馬)만 그대로 차지하고 있다. 현재 화포를 맡은 군사로서 금군에 들어간 사람이 무려 수십 명이나 되는데 계속 이대로 두고 보면 6백 명의 금군이 앞으로 다 멀쩡한 건달이 되고야 말 것이다. 이 뒤로는 화포를 맡는 군사의 자리가 비면 반드시 속이고 금군으로 바꿔치기한 사람 수십 명을 차례차례 도로 모두 보충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한 명도 남은 자가 없이 다 돌려보낸 후에야 각 해당 별파진으로 규례에 따라 들어오게 허락할 것이다. 1. 금군들이 서로 번들 차례를 바꾸는 일은 별로 해로움이 없을 듯하지만 화포를 맡은 군사가 들락날락하고 근무 일수를 줄이고 늘리는 농간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관마를 바꾸어 주는 일도 당연히 금지해야 되는 것인데, 시골에 사는 금군들이 날마다 관마를 부려서 삯을 받고 짐을 실어 나르다가 병들어 힘이 다하면 서울에 사는 금군의 관마와 값을 따져 바꿔치기를 하니, 어떻게 말이 야위어 못쓰게 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금군의 번을 바꾸는 것과 관마를 바꾸어 주는 것을 일체 금한다. 1. 금군에게 지급하는 관마에 대해서는 원래 정해진 규정이 있는데, 근년 이래로 마음 내키는대로 농간질을 한다. 금군의 속임에 넘어가 외람되이 주고, 염초(焰硝)를 불법으로 바꾸어내는 것도 그대로 받아주는 일이 숱하여 혼란하기 그지없다. 겨우 일일이 조사하여 자신의 말로 바꾸어 바치게 하였으나 앞으로 이런 폐단이 절대로 없으리라고는 보장하기 어렵다. 반드시 불시에 점검하여 마안(馬案)을 대조해서 만일 사적으로 바꿔치기하여 털빛이 서로 다르면 해당자는 엄히 곤장을 쳐서 도태시키고 정(正)과 영(領)도 죄를 준다. 1. 말을 바친 자로서 순차를 어기고 구전(口傳) 발령을 받으려는 경우, 포교(捕校)의 이름을 빌어 공무(公務)에 애썼다고 하면서 연줄을 놓아 청탁해서 서열을 따지지 않고 곧 구전 발령을 받는다. 계묘년 절목(節目)에 포교가 순차를 어기는 일에 대한 금지 조항이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도 근년에 와서 남김없이 예전처럼 되어버렸다. 이 뒤로는 한결같이 말을 바친 선후에 따라 임명하고 포교의 순차를 어기는 일은 엄단할 것이다. 1. 강(講)으로만 취재(取才)하는 것은 단지 체아직(遞兒職) 자리의 교련관(敎鍊官)으로 산관(散官)이 된 자에 한하여 허가하였고, 기본 취재에는 분기마다 2명만을 뽑는 것이 본래의 절목이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일찍이 화포를 다루던 군사였거나   이인강(二人講) :  용호영(龍虎營)에 소속된 금군(禁軍)의 각번(各番) 가운데 병서(兵書)에 능통한 사람 두 명씩을 선발하기 위하여 매월 두 차례 행하던 시험.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編)2 용호영(龍虎營) 제강(諸講).

 

9월 18일 무신

교동  위유 어사(喬桐慰諭御史) 윤치성(尹致性)과 경기 관찰사 정창순(鄭昌順)을 파직시켰다. 치성이 복명을 하고 서계(書啓)를 올려 아뢰기를,
"본 고을의 내평(內坪)·외평(外坪)과 송가도(松家島)의 농사 형편을 두루 다니며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본 고을 논이 모두 갯벌의 소금기가 많은 땅에 있어서 전부 건파(乾播)를 하고 원래 물을 댄 곳이 없었습니다. 밭곡식은 그저 누런 콩뿐이고 기장·피·수수 등의 잡곡은 없기 때문에 논이 재해를 입게 되면 살아나갈 밑천이 없게 됩니다.
올해에는 씨를 뿌린 뒤로 줄곧 가뭄이 들다가 6월이 되어서야 겨우 호미자락 정도의 비가 내렸고 8월에 처음으로 충분한 비가 내렸으나 철이 벌써 늦어서 결실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동·서·북 3면의 40리나 되는 넓은 들판과 송가도의 10리나 되는 긴 벌판이 한눈에 보기에 쓸쓸하여 낫을 댈 만한 곳은 한 두락도 보이지 않았으며, 누런 콩도 겨우 종자를 거두기에 불과한 형편이어서 온 섬의 백성들이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신이 들판을 돌아보는 길에 백성들이 모두들 길을 막고 말을 둘러싸면서 슬피 호소하였으므로 신은 부득이 걸음을 멈추고 창고를 열어 창고에 남아 있는 봄보리 1백 37섬을 내어 끼니가 끊어진 가장 다급한 사람들을 뽑아 식구수를 따져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멋대로 처리한 죄에 대해서는 무거운 처벌이 내리기를 공손히 기다리겠습니다마는, 본부의 곡식을 이미 다 나누어 주었으니 적당량의 곡식을 옮겨다가 구제하게 하여야 될 형편입니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교동의 재해가 이미 그렇게 참혹하다니 올해 환자에 대해서 재해가 매우 심한 면(面)과 리(里)는 그 3분의 1을, 그 다음 면과 리는 4분의 1을 기한을 물려주고, 다른 것으로 대신 바칠 만한 경우는 대신 바치도록 하며, 묵은 환곡은 전량에 대해 기한을 물려주고 경외의 각종 신공과 군역 대신으로 내는 쌀이나 베는 그 절반에 대해 납부 기한을 물려줘야겠습니다. 그리고 곡식 옮겨주는 것은 이미 도신(道臣)의 청에 의하여 전후 떼어준 곡식이 도합 3천 섬이나 되니 다시 자꾸 청할 것이 없습니다. 9월에 창고를 연 것도 예전에 그런 전례가 없었는데, 백성들의 형편이 비록 절박하였다고는 하지만 법에 없는 것을 어찌 제멋대로 열 수 있습니까. 더구나 어사가 이미 연교(筵敎)를 받고 한 도를 살펴보게 되었다면 백성들의 고통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조목별로 열거하여 서계(書啓)해야 할 것인데 대충대충 말로 하여 일관성이 없습니다. 이리 보거나 저리 보거나 봉사(奉使)의 체모를 크게 손상하였으니 파직의 법을 적용함이 마땅합니다. 그밖의 기민을 구제하는 대책은 도신으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옛사람도 임금의 명령이라고 하고서 창고를 열었었다. 굶주려서 부황이 난 백성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우선 구제부터 한 것은 어사가 할 일로서 그가 한 그 일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다. 현재 봄이 오자면 아직 멀었는데 끼니를 잇기 어려운 상황은 묻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다. 수신(帥臣)을 엄중 신칙하여 특별한 예로 구제하여 한 사람도 굶어 죽는 걱정이 없도록 하라.
조세를 감면하고 기민을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는 탄환만큼 작은 섬에 대하여 등급을 나눌 필요는 없으니, 묵은 환곡은 일체 상환 기한을 물려주고 새 환곡은 재해를 입은 정도를 구별하여 절반 혹은 3분의 1을 물려서 받고 다른 물품으로 대신 바칠 만한 경우는 대신 바치도록 하며 대동미(大同米)는 특별히 내년 가을까지 기한을 물려 주도록 하라. 재해 입은 정도가 아주 심한 경우의 다음가는 면과 이에 대해서는 각 군문(軍門)·아문(衙門)·궁방(宮房)의 군보(軍保)·노공(奴貢) 및 갖가지 신공(身貢)에 대해 그 절반을 탕감해주고 절반은 기한을 물려줄 것이며, 조금 결실이 된 곳도 일체 기한을 물려주어 백성들의 힘을 조금이나마 펴지게 하라.
곡식을 떼내어 옮겨가는 즈음에 때를 놓치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되어 처음의 운반 경위와 운반을 마친 전말을 도백이 장계로 아뢰도록 엄히 신칙하였는데, 어사의 장계를 보면 섬 백성들의 절박한 형편이 이러한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연석에 올라와서도 말 한마디 없었으며 관내를 살펴보고서도 말 한마디 없었다. 심지어 9월에 창고를 여는 조치까지 있었으나 마치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경기도 한 방면에 왕명을 널리 펴는 책임을 맡은 자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벼슬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저렇듯 자신의 직무를 저버리고 있으니 경기 감사 정창순을 파직시키라."
하였다.

 

이 앞서 경기 관찰사 정창순이 치계하기를,
"파주 목사(坡州牧使) 이백연(李柏然)이 병을 핑계로 직무를 폐하고 있으니 유사(有司)에게 그 죄를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이때 와서 의금부가 죄를 평의하여 올리기를,
"수령으로서 임지에 부임한 뒤 직무를 기피하는 자는 바로 그 곳에 도배(徒配)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대신(臺臣)이, 수령을 귀양보냄에 있어 자기가 부임했던 고을에는 정배하지 말도록 아뢰어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풍덕부(豊德府)에 3년 기한으로 귀양을 보내소서."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직무를 기피한 수령을 바로 그 지역에 정배하는 것은 곧 선왕조의 수교(受敎)로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도 기재된 규정이다. 저번의 대계(臺啓)에 대해서는 좋은 말을 올리라는 뜻으로 한두 수령에 대한 처분을 즉시 도로 철회시켰던 것이다. 대신(臺臣)이 법전을 참고해보지 않고 경솔히 고치자고 청한 것은 나이가 젊고 규정에 서툴러서 그랬던 것인데 어찌 그것을 영원히 준수할 법으로 삼아 선왕조의 수교를 감히 고칠 것인가. 경들은 체차하고 백연은 석방하겠다."
하였다.

 

9월 19일 기유

서용보(徐龍輔)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9월 22일 임자

탄일(誕日)에 하례 올리는 일을 중지시켰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9월 23일 계축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9월 24일 갑인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비변사가 장용 외영(壯勇外營)의 친군위(親軍衛)에 대한 절목을 아뢰었다.
【1. 본부(本府)는 한강 남쪽의 큰 진영으로 마병(馬兵)과 보병의 군사 제도를 대략 훈련 도감을 모방하였기에 본디부터 외도감(外都監)으로 일컬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점점 더 시들고 피폐하여 끝내 헛 이름만 올린 군사가 있고 말을 완전히 갖춘 부대가 없으니 군사에 대한 정사가 너무나도 허술하다. 지금 장용 외영으로 승격한 뒤에 품격이 더욱 달라졌으며 특히 군대는 정예함을 귀중히 여기는 뜻에서 정원수를 줄이라는 명이 있기까지 하였다. 옛것을 참작하고 지금의 제도를 모방하여 초(哨)의 편제를 개혁하고 군대를 정렬하였는데 마병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쓰면 자못 우대의 뜻이 아닌 것이다.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병을 친군위(親軍衛)라 일컬었던 것은 대체로 풍패(豊沛)의 고장이라 하여 군사 선발을 엄중히 하고 칭호를 아름답게 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장용 외영의 제도는 여러 도에 비교하여 더욱 중요하니 친군위라고 고친 것은 진실로 특별한 은전에서 나온 것이다.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을 각각 1백 명으로 하고 그 제도는 훈련 도감의 말 주는 예에 따르며 탐라 목장(耽羅牧場)의 말을 내려 매기어[卜定] 군사마다 각각 한 필(疋)씩을 준다. 1. 장령(將領)은 내영(內營)의 선기 별장(善騎別將)의 예에 따라 별장 1원, 좌장(左將)·우장(右將) 각 1원으로 자리를 정하되 별장은 경내의 무관으로 이미 변경의 방어 임무를 맡았던 사람으로 임명하며 좌장·우장은 전에 내외의 장(將)이나 오위 장(五衛將)을 지낸 사람으로 임명한다. 1. 친군위의 좌열(左列) 1백 명은 경내의 전에 지방의 양반 출신 장교로서 절충 장군(折衝將軍)과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지낸 사람 및 추천없이 출신(出身)한 사람 가운데서 신체가 좋고 무예가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발하며, 우열(右列) 1백 명은 문벌이 좋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선전관·부장·수문장의 세 자리로 추천할 만한 한량(閑良)을 별도로 가려뽑아 내금위(內禁衛)의 예에 따라 3정(正) 9령(領)으로 마련한다. 1. 마병에게 3명의 보인(保人)을 딸려주는 것은 원래부터 통용되던 규정이다. 친군위를 창설한 뒤에는 마병이라는 명색은 당연히 혁파해야 되는데 그렇다면 마보(馬保)도 줄일 수 있게 된다. 친군위 한 사람당 각기 두 사람의 보인을 주되 한 사람의 보인은 돈이나 쌀을 관아에서 거두어들여 살림살이에 필요한 비용으로 쓰고 한 사람의 보인은 자보(自保)의 예에 따라 각각 자신이 모집하여 채워넣어 살림에 힘이 되도록 한다. 1. 창설 초기에 규정을 엄격히 세우지 않으면 군제(軍制)가 자칫 해이해질 우려가 없지 않다. 지방 양반으로서 무(武)를 업으로 삼는 자가 친군위를 지내지 못했으면 다른 길로 과거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모두 별군관(別軍官)에 소속시켜 벼슬길을 열어주지 아니한다. 한량(閑良)과 장교 가운데서 직무를 기피하는 자는 비단 벼슬길을 열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장교의 명부에서 이름을 도태시키고 징계하여 두려워할 바를 알게 하며 장교는 그 이력을 얻고 난 다음에야 여러 가지 직임과 각 창고의 감관(監官)으로 옮겨질 수 있다. 1. 나누어준 관마는 서울의 중앙 군영의 예에 따라 받은 지 8년 이내에 죽거나 잃어버렸을 경우에는 다른 튼튼한 말로 변상하여 세우며, 기한 안에 설사 병이 생긴 말이 있더라도 사복시로 되돌려 보내는 것은 실로 시행할 수 없는 일이므로 외영(外營)에 끌어다가 바치고 외영에서는 직접 살핀 다음 말의 명부에 그 사유를 기록한다. 그 밖의 공무로 인하여 죽은 말은 연한에 관계없이 다만 피장(皮張)만을 조사하여 처리하되 내영(內營)에 낱낱이 보고하여 대신 지급받도록 한다. 1. 표하군(標下軍)은 별장에게는 26명, 좌장·우장에게는 각각 6명씩으로 마련하여 채워준다. 1. 봄·가을에 실시하는 말 점검은 서울의 중앙 군영 예에 따라 봄에는 2월, 가을에는 8월에 별장이 좌장·우장과 함께 날짜를 정하고 모여앉아 점검을 실시하며 간혹 유수가 직접 시행하기도 하는데, 좌열·우열의 군장비와 마필 상태를 낱낱이 검열하여 군장비가 파괴되었거나 마필이 비루먹었을 때는 그 경중에 따라 곤장을 쳐서 징계한다. 그리고 벌이 있으면 상도 없을 수 없으므로 가장 살찐 마필을 한 열에서 각각 다섯 필씩 뽑아내고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여 격려한다. 1. 삭시사(朔試射)는 매달 한 차례씩 날짜를 정하여 시행하되 원래 정해놓은 날짜가 돌아오면 장령(將領)이 알려줄 것 없이 친군위들이 일제히 모여서 대기하도록 약속을 거듭 강조하고 감히 어기지 말도록 한다. 그리고 그 과목은 유엽전(柳葉箭)은 3순(巡)을, 기추(騎蒭)는 두 차례 행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하여 시행한다. 혹서기인 6·7월과 혹한기인 11·12월에는 시행하지 않는다.】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11면
【분류】왕실(王室) / 군사(軍事)

 

9월 25일 을묘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초계 문신(抄啓文臣)에게는 친시(親試)를, 가전 별초(駕前別抄)와 가후 금군(駕後禁軍)에게는 활쏘기 시험을, 무예청(武藝廳)에는 무예 시험을 실시하고, 연석(筵席)에 참석한 신하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상이, 7언 율시 첫구를 직접 짓고는 제신들에게 연구(聯句)로 화답하게 하였다.

 

차대(次對)하였다. 우의정 김희가 아뢰기를,
"저번에 신이 올린 차자는 신이 감히 고인들이 인재를 추천하는 일로 임금을 섬겼던 것처럼 자처하려는 뜻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작은 정성이지만 사실은 세도(世道)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비지(批旨)를 받들고 나서는 몇날을 두고 황송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술(經術)에 뛰어난 선비는 세도에 모범이 되는 것인데 어찌 그를 맞아들이는 일을 늦추려 하겠는가. 다만 작년에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착한 자를 추천하도록 한 데에는 생각하는 바가 있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차등(次等)의 제목(題目)인 줄을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근래에 초선(抄選)이라는 이름으로 추천을 받은 자면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려고만 하므로 초선한다는 이름만 있지 초선의 실효는 없게 되었다. 옛사람이 이른바, 들어오라고 하고서 문을 닫는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된다. 먼저 차등의 제목으로부터 시작하여 진출할 길을 열어주도록 하여 미관(微官) 서료(庶僚)를 따질 것 없이 문서 처리하는 사무부터 맡겼다가 그 가운데 참으로 경술을 기본으로 한 실적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를 경연(經筵)에 두더라도 불가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의심을 지나치게 하거나 대우를 박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경술을 중하게 하고 인재를 뽑는 데 신중을 기하여 그들의 진로를 열어주고 실질적인 효과를 얻자는 것이다."
하였다. 김희가 아뢰기를,
"신의 뜻도 곧바로 경연관을 삼으라고 청한 것은 아닙니다. 적당한 방법으로 그를 조정에 두어 사람들이 보고 모범으로 삼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이 인재를 추천하고 등용함에 있어 다만 그의 학행(學行)이 옅은지 깊은지를 보면 되지 꼭 지체를 논할 것이야 있겠는가. 경의 차자 가운데 논한 박윤원(朴胤源)에 있어서는 그의 공부와 수행이 어떤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만약 그 사람의 경술이 주자(胄子)를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될 만하다면 비록 직명(職名)이 없을지라도 때때로 개인적으로 만날 길이 있는 것이다. 개발(開發)과 보도(輔導)의 책임이 꼭 초선(抄選)이란 명목이 붙어야지만 비로소 얘기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숙종(肅宗) 때 민씨(閔氏)네 집안 사람들 가운데 산림(山林)으로서 등용된 자가 비록 많았으나 삼대(三代)의 융성했던 시기가 아니고서야 혐의스런 일이 없을 수 없었다. 한(漢)나라 광무(光武)도 황후의 친족[椒房]은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내가 박윤원에 대해 어찌 혐의가 없겠는가. 우선 세마(洗馬) 등의 벼슬을 초사(初仕)로 제수하여 그 실질적 효과를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하였다. 김희가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취재(取才)와 다름이 없는데, 어찌 학행(學行)으로 이름을 붙이고서 먼저 시험부터 해볼 수야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다. 옛날에 수레와 옷으로 공있는 이에게 상을 주었던 것도 그러한 뜻이었던 것이다. 공자는 위대한 성인이면서도 일찍이 창고를 맡은 관리가 되기도 하였고 가축의 사육을 맡은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 선비들은 낮은 벼슬을 좋지 않게 여기는가?"
하였다.

 

양주(楊州)·과천(果川) 두 고을에 있는 광주(廣州) 소관의 군량미 5백 섬을 노량진(露梁鎭)에 떼주어 환곡의 밑천으로 삼도록 하였다. 장용영 제조 정민시(鄭民始)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행 부사직 이문원(李文源)이 아뢰기를,
"시위의 직책은 어가(御駕)를 호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립(朱笠)에 범의 수염과 새깃을 꽂고 철릭[帖裏]에 활을 메고 칼을 차는 것은 몸을 움직이기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복장 자체로 논하더라도 의의가 없습니다. 예전 경오년 온천 행차 때 신의 아버지가 병조 판서로서 어가를 수행하면서 군복에 전립(戰笠)을 쓰고 호위하여 왕래했었습니다. 온천에 거둥할 때의 전례를 능원(陵園) 거둥에 그대로 써도 해로울 것이 없고, 능원 거둥 때의 전례를 서울 안에서의 거둥과 전좌(殿座) 때에 그대로 써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얼마 전 능에 거둥할 때를 두고 말하자면, 병조 판서는 군복을 입고서 시위에 임하고 별운검(別雲劒)과 도총부·병조 등은 그들 역시 시위이면서 복색이 통일되지 않고 각양각색이었으니, 이를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이 뒤로는 교외에 거둥할 때는 시위와 배종(陪從)하는 백관들 모두가 군복을 입고서 어가를 호위하고, 도성 안에서의 거둥과 전좌 때에는 별운검 이하 시위하는 신들만 모두 군복을 착용하도록 하고 주립과 철릭을 입는 제도는 영영 혁파하소서. 그러면 우선 군장(軍裝)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비용을 줄이는 한 가지 방법도 될 것입니다. 대신과 장신(將臣) 및 제신들에게 물어 처리하소서."
하여, 상이 제신들에게 이를 물었다. 좌의정 김이소(金履素), 우의정 김희와 우참찬 홍수보(洪秀輔)는 아뢰기를,
"군복이 융복(戎服)에 비하여 간편하기는 하지만 바로 의장(儀章)에 관계되므로 그대로 쓸 것인지 바꿀 것인지를 널리 물어서 처리함이 타당하겠습니다."
하고, 행 사직 정민시(鄭民始)와 연풍군(延豊君) 이곤(李坤)은 아뢰기를,
"군복을 입는 것으로 제도를 정함이 타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비답하기를,
"온천에 거둥할 때의 복색은 전례가 이미 그러한데 비록 간편할 것 같기는 하지만 주립과 철릭을 한꺼번에 혁파하는 것은 바로 제도를 개혁하는 일에 관계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자세히 헤아려보고 의논하여 그렇게 하여도 폐단이 없겠음을 명확히 안 다음에 결정할 문제다."
하였다.

 

9월 26일 병진

해서 위유 어사(海西慰諭御史) 홍대협(洪大協)이 장계하였다.
"신이 연안부(延安府)에 도착하여 두루 다니며 살펴보았더니 대체로 밭과 논이 도합 6천여 결(結)인데 논이 5천 결쯤 되고 밭이 1천 결쯤 되었습니다. 밭곡식은 다행히 흉년을 면하였으나 논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누렇게 말라서 거의 낫을 댈 곳이 없었습니다.
신이 성상의 유시를 경건히 읽었더니 백성들이 모두 극도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기를 ‘이번 요역을 감면해준 조치는 실로 세상에 없는 은택이기는 하지만 현재 아주 적은 양의 곡식도 거두지를 못하여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간 사람의 숫자가 벌써 많아서 형세상 온 경내가 다 흩어져 떠도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어사는 돌아가서 이런 황급한 상황을 상께 아뢰어 주소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조정에서 간절하고 극진한 은혜를 베풀려 하니 필시 한 사람도 살 곳을 얻지 못할 걱정은 없을 것이다. 모쪼록 성상의 뜻을 이해하고 서로서로 불러들이고 위로하여서 기필코 정착해야 된다.’는 뜻으로 누누이 타일렀습니다.
각종 신역(身役)의 감면에 대해서는 유서(諭書) 내용대로 거행하였는데, 환곡에 있어서는 법이 엄중할 뿐 아니라 본부(本府)의 창고에 남아 있는 양이 매우 적어 내년까지 지탱하자면 많은 양의 환곡을 물려줄 수 없기 때문에 모두 3분의 1씩 납부 기한을 물려주었습니다. 환곡 대신으로 받을 수량의 배정은 아직 확실히 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본읍에 위임하여 다시 민정을 살펴보고 감영에 그 완급(緩急)을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배천은 연안처럼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밖의 재해 입은 고을에 대한 제반 감면 정책은 도신과 상의하여 거행하겠습니다."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 허칙(許侙)을 파직시켰다. 그의 관할 아래 있는 각진(各鎭)이 화약을 사사로이 사들였기 때문이다.

 

북경(北京)에서 예부(禮部)가 회자(回咨)하였다.
"귀 국왕이 보내온 자문(咨文)은 받아 보았습니다. 지난해 전화(錢貨)를 받기를 요청한 그 일에 대하여 본부(本部)에서 다시 자문을 보내, 정례(定例)에 맞지 않은 관계로 본부가 대신 아뢰기가 곤란하다는 뜻을 전했던 것인데, 귀 국왕이 그 자문을 접한 뒤에 앞서의 잘못을 깨닫고 깊이 후회하면서 다시 자문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귀국이 오랫동안 번국(藩國)으로 있으면서 특별한 은혜를 받아왔으나 다만 중국의 법제가 삼엄하여 모든 정례에 맞지 않는 일은 번국이 자꾸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본부에서는 전에 보내온 자문을 접하고 즉시 자세하고 친절한 회답 자문을 보냈던 것입니다. 만일 귀 국왕이 본부의 자문을 접수하고서도 다시금 은혜를 믿고 자꾸 어거지로 요청한다면 본부로서는 사실 그대로 아뢸 수 밖에 없으며 귀 국왕은 아마 죄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귀 국왕 스스로 부끄럽고 죄송한 줄을 알고 조심하며 따를 태도를 보였으므로 앞서 전화를 받게 해달라고 한 잘못된 요청에 대해 본부가 아뢰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뒤로도 귀 국왕은 번국의 도리를 성실히 지키고 정례를 엄히 준수하여 길이 은총을 받기 바라며 아울러 간절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9월 27일 정사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 김이소(金履素)가 아뢰기를,
"각도의 해묵은 환곡에 대해 이렇게 풍년이 든 해에 다 받아들여 장부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소급 연도를 한정하여 수량대로 바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관북(關北) 지방에 경술년조(庚戌年條)의 물려준 묵은 환곡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전교하기를,
"경사를 함께 나누는 해임을 당연히 백성들에게도 알려야 할 것인데 해가 오래된 것을 어떻게 소급하여 바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도백으로 하여금 국가가 백성들과 경사를 함께 나누려는 근본 취지를 십분 이해하고 직접 조사에 나서 경술년조로 명목이 잡힌 것이면 묵은 환곡이건 공·사 채무이건 그 모두를 탕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사(京司)에 상납할 돈 1만 5천 냥을 해서(海西)에 꾸어 주어 곡식을 사서 기민 구제에 보태도록 허락하였다.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해서 위유 어사(海西慰諭御史) 홍대협(洪大協)이 장계하였다.
"신이 해주목(海州牧)에 도착하여 농사 형편을 살펴보았더니 연안(延安) 경계에 접한 지역과 갯가에 위치한 곳은 전부 논이었는데 애당초 모를 심지 못한 곳이 아니면 심었어도 태반은 이삭이 말라버린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곡식이 익을 무렵 온 경내에 우박이 내려 아직 베지 않은 곡식도 재상을 입은 곳이 많아 그 참담한 모습은 연안에 비하여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밭곡식은 조금 나았습니다.
조세 감면과 구휼 정책에 관해 도신(道臣)과 상의하였는데 본 고을 연안과 인접한 지역은 재해가 똑같이 혹심하여 농사 형편을 말하자면 실로 이 지역 저 지역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재해가 더욱 심한 1백 20개 리(里) 가운데서 가장 심한 70개 리에 대해서는 조세 감면 등을 연안의 예와 똑같이 하고 당년 환곡은 3분의 1을 납부 기한을 물려주었으며, 경외(京外)의 각종 신공(身貢)과 군역(軍役) 대신 내는 쌀과 베는 그 절반을 탕감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한을 물려주었으며, 증렬미(拯劣米)는 오래된 것이건 얼마 안 된 것이건 전부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 나머지 50개 리는 연안에 비하여 당연히 차등을 두어야 되겠기에 새 환곡은 4분의 1을 납부 기한을 물려주고 각종 신공과 군역 대신 내는 쌀은 그 절반에 대해 납부 기한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가는 31개 리는 환곡은 5분의 1을 납부 기한을 물려주고 묵은 환곡은 모두 기한을 물려 바치도록 하였으며, 새 환곡을 다른 것으로 대신 바치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고을 수령이 감영에 보고하여 수량을 배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밖의 재해를 입은 고을에 대해 조세 감면의 혜택을 주는 방도를 또 도신과 상의하였는데, 안악(安岳)·강령(康翎)·옹진(甕津) 등의 고을은 바로 바닷가에 위치하여 더욱 재해가 심한 곳이었습니다. 온 지역을 통틀어 논하자면 연안과 해주같이 참담하지는 않았으나 거기서도 재해가 더욱 심한 곳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더욱 심한 곳인 안악의 46개 리와 옹진의 16개 리와 강령의 7개 리는 해주의 더욱 심한 곳 가운데서 다음 등급인 50개 리에 적용한 예에 따라 환곡은 4분의 1을 납부 기한을 물려주고 신공과 군역 대신으로 내는 쌀은 그 절반을 물려주었으며, 묵은 환곡을 기한을 물려 바치도록 하는 일과 다른 물건으로 대신 바치도록 하는 일은 감영에 보고하여 완급에 따라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더욱 심한 가운데서 다음 등급인 안악의 16개 리, 옹진의 8개 리, 강령의 6개 리에 대한 환곡은 4분의 1을 납부 기한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배천에 이르러 들판을 직접 살펴보았는데 밭과 논이 반반이었습니다. 밭농사는 대체로 흉작을 면하였으나 논농사는 연안과 접경하고 있거나 갯가에 위치한 각산(角山) 등 4, 5개 방(坊)이 재해를 입은 정도가 더욱 혹심하여 연안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밖의 5, 6개 방은 더욱 심하거나 다음 가거나 한 구분이 있기는 하지만 더욱 심한 가운데서도 다음 가는 곳이 있고 다음 가는 곳 가운데서도 조금 나은 곳도 있어 조세 경감과 구휼 정책에 있어 연안·해주에 비하여 그 수량을 줄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 심한 8개 방 가운데서 가장 심한 41개 리는 환곡은 3분의 1을 납부 기한을 물려주고 경외에 바치는 신역(身役)과 신공(身貢)은 전부 납부 기한을 물려주었으며 균역청에 바치는 세미(稅米)는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더욱 심한 16개 리는 환곡은 4분의 1을 납부 기한을 물려주고 신역과 신공은 절반을 물려주었습니다. 그 다음 등급인 3개 리는 환곡은 5분의 1을 납부 기한을 물려주었고, 조금 나은 49개 리는 논하지 않았으나 묵은 환곡은 모두 기한을 물려 받기로 하고 새 환곡을 다른 물건으로 대신 바치도록 하는 일은 본읍이 감영에 보고하여 완급에 따라 적절히 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여기서부터 더 나가보겠습니다."

 

9월 28일 무오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판으로, 이면긍(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임시철(林蓍喆)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경기 관찰사 서용보(徐龍輔)를 소견하였다. 용보가 아뢰기를,
"풍덕(豊德)의 서쪽 3개 면(面)은 연안·배천·교동(喬桐) 세 고을 사이에 끼어 있어 재해를 입은 현황이 세 고을과 거의 다름이 없습니다.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軍營)이 강화도에 보관하는 군량미를 바다를 건너 수송하자면 그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예전에도 흉년이 든 해에는 돈으로 대신 바친 예가 계속 있었으며 대신 바치는 돈의 액수는 시가의 고하에 따라 정하였습니다. 올해는 시가가 조금 헐하니 쌀 1섬 값을 4냥으로 치고 콩 1섬 값은 1냥 5전으로 쳐서 조금이나마 백성들이 힘을 펴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9월 29일 기미

해서(海西)에서 재해가 더욱 심한 읍과 풍덕(豊德)의 더욱 심한 면에 대하여 병조의 기병(騎兵)과 금위영·어영청에 속한 군대를 내년 보리 가을까지 번드는 일을 중지하게 하였다.

 

사복시 정 정동신(鄭東愼)을 특별히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았다. 마정(馬政)을 잘 다스렸기 때문이었다.

 

해서 위유 어사 홍대협이 복명하고 서계를 올렸는데, 그 별단(別單)에 아뢰기를,
"연안(延安)은,
1. 본부(本府)에서 7월 이후로 제 고장을 떠난 백성의 수가 무려 1천 명에 가깝습니다. 서울에 바칠 것들의 기한을 물리라고 한 하교를 듣고 나서 감격과 희망에 차 차츰차츰 도로 모여들고는 있으나, 당장 먹을 거리가 없는 백성들이 야채와 조개 따위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한창인 이때도 이와 같으니 앞 일은 뻔한 것으로 새해가 되기까지의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일만이라도 조금도 늦출 수가 없는데, 현재 창고에 남아 있는 각종 곡식은 6백여 섬에 불과하며 분수(分數)하여 받아들일 새 환곡 양이 1만여 섬이 된다고는 하나 분수한 수량대로 다 받아들일 희망은 아마 없을 듯합니다. 당장 진휼에 필요한 밑천과 내년 봄의 종자와 농사 지을 동안 먹을 양식도 전혀 없는 실정입니다. 또 해주(海州)로 말하면 창고에 남아 있는 각종 곡물이 겨우 2천 섬인데 앞으로 환곡을 받아들이는 일도 필시 뜻대로 되기 어려울 것이어서 크게 진휼을 해야 될 형편에 그 자본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도내의 형편도 곡물 생산량이 원래 넉넉하지 못한 데다 바닷가의 여러 고을들이 모두 흉년을 면치 못하여 많은 숫자의 곡식을 옮겨오기란 역시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명목의 곡식이든지 미리 변통하여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 본부의 어영군(御營軍) 80명이 강화도에서 받을 환곡이 쌀이 1백 70섬이고 누런 콩이 40섬인데, 바다를 건너 실어다가 바치는 것이 벌써 고질적인 병폐인데다 지금 흉년을 당하여 마련해서 바치기란 더욱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러니 금년 치는 우선 납부 기한을 물려주고 내년 치의 환곡까지 포개서 받게 하였다가 내년 가을에 가서 올해 치만 바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수영(水營)이 관장하는 방선군(防船軍) 군량미 1백 92섬과 봉대군(烽臺軍) 군량미 24섬은 그 수량이 많지는 않으나 올해는 쌀로 환곡을 마련하여 바치기가 겉곡식보다는 배나 더 어렵습니다. 모두 분수(分數)하여 납부 기한을 물려주기는 하였으나 백성들의 실정은 그래도 어려우니 전부를 내년 가을까지 물려주는 것이 진실로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1. 본부에서 균역청이 모곡(耗穀)으로 받는 쌀의 양이 1백 72섬인데 그 3분의 1에 대해 납부 기한을 물려준 것을 제하면 남은 수량은 참으로 얼마 안 되지만 이 때 쌀 마련하기 어려움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전부를 물려주는 것이 백성들에게 편의를 주는 길일 것입니다.
1. 본부에는 각 군문과 아문의 보미전(保米錢) 및 내노비(內奴婢)의 신공(身貢)으로서 작년 임자년에 기한을 물려준 몫이 있습니다. 올해 치를 모두 물려주었으니 작년 몫을 바치도록 독촉해야 할 텐데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전처럼 모두를 다 물려줘야 할 것 같습니다.
1. 본부는 진무영(鎭撫營)의 후영(後營)으로서 수군 조련을 하지 않고 있으나 사(司)의 조련과 초(哨)의 조련은 특별 하교에 의하여 이미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 읍의 일시적인 사사 조련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시기에는 털끝만큼이라도 백성을 동요시키는 일이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빨리 정지하도록 하고 기타 재해가 더욱 심한 각읍의 군대 점검하는 일도 똑같이 정지하는 것이 폐단을 줄이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해주는,
1. 본주(本州)의 어영청(御營廳)에 딸린 군사가 번(番)들 차례는 올 12월에 있습니다. 연안·배천의 번들 군사들은 이미 특별 하교에 의하여 정지되었으니, 본 고을도 그와 똑같이 정지해야지만 모두를 동일하게 대하는 은택이 될 것입니다.
1. 본주의 환곡은 3만 3천 8백여 섬이고 감영의 각종 환곡은 4만 7천 3백여 섬이어서 한 호(戶)당 받은 환곡이 많게는 10여 섬이나 됩니다. 그리하여 환곡 상환의 독촉을 받을 때면 백성들이 모두 도피하기 때문에 그 이웃과 친족에게서 징수합니다. 감영의 각종 환곡은 태반이 빈 쭉정이어서 백성들이 받기를 원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 해주 백성들의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큰 흉년을 만나 허다한 곡물을 더욱이나 본색(本色)으로 꼭 바르게 받아들일 수는 없게 되었으니 새 환곡의 납부 기한을 물려준 것 외에 응당 받아야 될 감영의 환곡인 좁쌀 5천 섬도 상정례(詳定例)에 따라 값을 환산하여 대신 바치도록 하면 백성이나 고을이 모두 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환산된 돈은 현재 연안(延安) 지방이 참혹한 흉년이 들기는 하였으나 상선(商船)이 많이 들어오고 있어서 시가가 다른 고을에 비하여 조금 헐하며 창고에 남아 있는 수량이 보잘것없어서 환곡으로 나누어 줄 수도 없는 형편이니, 이것을 그리로 보내면 역시 두 곳 다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
배천은,
1. 본군(本郡)은 군량곡으로 쌀·좁쌀·누런 콩을 합하여 도합 1천 2백 섬을 개성부(開城府)의 여현진(礪峴鎭) 창고에 정례로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험한 전포(錢浦) 나루가 막고 있어서 혹간 풍랑이나 얼음장이 녹아 떠내려 올 때를 만나면 길이 더디고 막히어 걸핏하면 4, 5일을 허비하게 되어 그것이 온 고을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이처럼 심한 흉년이 들었으니 받아서 본 고을에 유치해두어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해주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겠습니다.
1. 본군에는 신해·임자 두 해의 군포(軍布)와 신역(身役) 대신 바치는 쌀의 납부 기한을 물려준 몫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재해가 더욱 심한 지방의 각종 신역을 이번에 물려주었으니 이상 두 해에 이미 물려받기로 했던 몫도 일시에 독촉하여 받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모두 기한을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나머지 지방은 재해가 더욱 심한 곳과 똑같이 논할 수는 없으나 이런 흉년을 당하여 금년에 받아들일 몫과 아울러 수납한다는 것도 불쌍하고 가엾은 일입니다. 올해 납부해야 될 몫을 계산하여 그 수량을 절반으로 나누어 예전대로 기한을 물려주는 것이 역시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안악(安岳) 지방은, 양전(量田)을 올봄에 이미 시행하였으나 그 때 농번기로 인하여 우선 중지하였었는데 지금 가을 추수가 다 되었으니 당연히 다시 시작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흉년을 만나서 소요를 일으킬 염려가 없지 않으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거행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평산(平山)은, 도하(道下) 등 연안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방(坊)으로서 재해를 심하게 입은 곳은 연안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중 재해가 더욱 심한 곳은 재해를 입은 다른 고을의 예에 따라 알맞게 등급을 나누어 구제함으로써 흩어지려는 저 백성들을 정착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동일하게 대하는 은택이 될 것입니다."

 

대신과 비변사 당상과 해서 위유 어사 홍대협을 소견하였다. 상이 제신들에게 하교하기를,
"어사의 서계(書啓)를 조금 전에 읽어보았는데 백성들의 실태와 조세 감면, 기민 구제 등에 대하여 직접 물으면서 자세히 강구하는 것만 못하겠고 또 회계(回啓)로 날짜를 넘길 수 없겠기에 특별히 경들을 부른 것이다."
하고, 이어 연안의 재해 입은 정도를 대협에게 물었다. 대협이 아뢰기를,
"온 들의 곡식이 누렇게 말라버려 한 줌의 곡식도 수확할 것이 없어 보기에 참담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골고루 풍년이 든 해에 그 곳만 가뭄을 당하였으니 이를 생각할 적마다 밥을 달게 먹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에게 하교하기를,
"연안의 떠도는 백성들 실태가 어사의 서계에 오를 정도라면 해주와 배천도 이를 미루어 알 만하다. 본사(本司)에서 도백에게 공문을 보내 떠도는 민호의 실제 숫자를 보고하게 하라."
하고, 상이 또 서계에서 말한 이외의 백성들의 실정과 고을의 병폐에 대해 대협에게 물었다. 대협이 아뢰기를,
"해주에서 재해가 가장 심한 3면(面)의 세미(稅米)를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하면 백성들의 힘이 다소 펴질 것입니다."
하니, 비변사 당상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기본 조세[正供]는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하는 예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본 조세가 비록 유달리 중요한 것이기는 하나 백성에게 유익하기만 하다면 전례가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구관 당상(句管堂上)이 도신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
하였다.

 

해서 연안부의 사(司)와 초(哨)의 조련 및 그 밖의 재해가 더욱 심한 곳의 군사 점검을 모두 정지하도록 하고 해주의 환곡으로 바쳐야 될 좁쌀 5천 섬은 상정례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여 이송하도록 명하였다. 또 연안군·배천군에서 여현진(礪峴鎭) 창고에 군량미로 바쳐야 할 곡식은 재해가 더욱 심한 면에 한해 3분의 1을 납부 기한을 물려주고 그 나머지는 받아서 본읍에 유치해두도록 하고, 안악군의 양전은 우선 그냥 두도록 하였다. 이는 좌의정 김이소의 품처(稟處)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연안부의 각 군문·아문의 보미전 및 내노비의 신공과 배천군의 신해·임자 두 해 분의 군포와 신공으로 받지 못한 것들은 모두 탕감하도록 하였다. 이는 특지(特旨)였다.

 

전교하였다.
"해서에 어사를 보낼 때 가지고 간 유서(諭書)에는, 새 환곡의 납부 기한을 물려주는 그 문제에 대해 당초에는 절반을 탕감해 주려고 했었으나 앞으로 백성들의 식량을 고려하여 그 대신 군포와 신공을 탕감한다고 했었다. 그것은 차라리 공물(公物)을 줄일지언정 백성들의 식량을 덜지는 말아야겠다는 뜻에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어사가 돌아와 아뢴 것을 들으니 역시 모른 체 할 수가 없다. 그것을 듣고 나서야 어떻게 날을 넘기겠는가. 연안의 새 환곡은 그 절반에 대해 다시 납부 연기를 하게 하고, 해주·배천과 그 밖의 재해가 더욱 심한 3개 고을은 기한을 물려주되 분수(分數)를 연안에 비해 한 등급씩 올리도록 하라. 군량미가 비록 중요하기는 하지만 백성들 형편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정해진 규정에만 얽매일 수 있겠는가. 납부 기한을 물려주는 분수에 있어 환곡과 군량미를 융통하여 조절하도록 하라."

 

9월 30일 경신

우박이 왔다.

 

비변사 당상과 해서 위유 어사 홍대협을 소견하였다. 상이 해서 구관 당상 김사목(金思穆)에게 전교하기를,
"어젯밤에 연안·배천 등 고을의 농사형편을 고려하여 견감 구제의 조치가 있기는 하였으나 백성을 위한 생각이 밤이 다하도록 그치지 않아 또 경들을 모이게 한 것이다. 어제 품처한 것 이외에도 미진한 점이 있을 염려가 있으니, 경이 여러 당상·어사와 함께 익히 상의하여 혹은 도백에게 사신(私信)을 왕복하거나 혹은 묘당(廟堂)에서 공문을 발송하라."
하니, 사목이 아뢰기를,
"해서 지방의 백성들은 지난 신축년124)   재해 때 구휼해준 은전에 대해 전에 없었던 큰 혜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구휼 규모는 신축년에 비하여 조금 늘어난 정도가 아니어서 은택이 바닥날까 오히려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에게 관계된 일이면 어찌 전례에 구애받을 것이 있겠는가. 물러가서 해당 당상들과 익히 상의하여 한 사람도 살 곳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