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경인
윤대(輪對)를 하였다.
예조가 10일의 왕대비 탄신일에 진하(陳賀)할 때 행하여야 할 절차에 대하여 여쭙자, 전교하기를,
"이미 자전의 전교를 받았고 또 내년 봄에 가서 다시 청해야 할 일도 있고 하니 올해의 탄신 축하는 자전의 전교에 따라 표리(表裏)를 올리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11월 2일 신묘
초계 문신(抄啓文臣)에 대한 친시(親試)를 거행하였다.
11월 3일 임진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고 동향 대제(冬享大祭)에 쓸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고, 이어 의식에 대한 예행 연습을 실시하였다.
11월 4일 계사
경모궁에 친히 제사를 드렸다.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1월 5일 갑오
상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면서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러 공시 당상(貢市堂上)에게 명하여 공시인(貢市人)들의 고질적인 폐단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게 하였다. 육상궁에 도착하여 참배를 하고 다시 연호궁(延祜宮)과 선희궁(宣禧宮)에 나아가 참배한 다음 육상궁으로 돌아와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고 이어 예행 연습을 행하였다.
전에 예조가 육상궁의 중삭제(仲朔祭)를 친히 행할 것인지에 대해 여쭈었는데, 전교하기를,
"올해는 바로 갑술년128) 이후로부터 1백 년이 되는 해이다. 선왕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이해 이날의 제향을 어떻게 대신 행하도록 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친히 행하는 것으로 전례 절차를 마련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양정재(養正齋)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상이 재실이 퇴락한 것을 보고 선왕이 자주 임하였던 곳이라 하여 호조에 명하여 수리하도록 하였다.
11월 6일 을미
육상궁 동향 대제를 친히 지냈다. 예를 마치고 전교하기를,
"옛날 선왕의 전교를 마치 지금 들은 듯이 귀에 선하다. 오늘 친히 제사를 행한 뜻은 선왕이 하시던 대로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 이 궁에서 이 제를 행하고서 어떻게 무언가 뜻을 보이는 조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본궁의 사친(私親)으로서 문무과에 합격한 사람은 모두 선왕조 때 여러 차례 등용의 은전을 입었으나 새로 합격한 사람 중에는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초관(哨官) 최정악(崔廷岳)을 오늘 정사에서 6품으로 올려 등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광 군수(靈光郡守) 김재익(金載翼)과 전라도 병마 절도사 이수붕(李壽鵬), 관찰사 이서구(李書九)를 파직시키고 잡아들이게 하였다. 이유는 도내 각 고을의 절제(節祭)를 조례대로 설행하겠다고 치계하고 이어 헌관(獻官)의 관직과 성명까지 끝에다 죽 적어놓고는 재익은 고을의 유생을 시켜 대신 행하게 하였고 수붕은 편비(褊裨)를 시켜 대신 행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회유(回諭)하기를,
"나라에서 중대하게 여기는 것으로 제사보다 더한 것이 없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신이 와서 흠향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인데 더군다나 싫어해서 될 일인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수신(帥臣) 또는 읍재(邑宰)의 몸으로서 혹은 막료(幕僚)를 시켜 대신 행하게 하고 혹은 고을 사람을 시켜 대신 행하게 하였으니, 그 원인을 캐보면 바로 싫어해서이다. 그것이 어디 거듭 신칙하고 타이른 본의이겠는가. 음관이나 무관 출신의 수령들이라면 책망할 것도 없겠지만 하대부(下大夫)로서 임금 좌우에 있다가 나간 자들이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영광 군수 김재익은 우선 파직시키고 난 다음에 잡아오라. 그리고 둑제(纛祭)는 사체가 읍사(邑祀)보다 더 중대한데 병영(兵營)에서 편비로 제사의 임무를 띠게 하고 임금이 볼 계목(啓目)에다 그렇게 써서 보고한 것은 너무나도 해괴한 일이다. 그도 잡아들여 추문한 후 처리하도록 하라. 또 도신으로 말하더라도 다년간 근밀(近密)의 자리에 있으면서 달리 보고 느낄 만한 것은 없었으나 제사에 관한 일만은 혹 나의 본의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제멋대로 하게 놔두었으니 그 역시 추고하도록 하라.
이어서 해조로 하여금 지금 내린 전교를 낱낱이 들어서 각 도에 엄중히 신칙하도록 하고 큰 기가 있는 곳의 헌관은 병조 판서를 차출하여 보낸다는 것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고 또 그때 연주하는 악장(樂章)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쓰게 되어 있으니 그 존엄함이 정말 어떠한가. 병조 판서가 해야 하는 일을 병사와 수사가 어찌하여 감히 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큰 고을의 큰 기가 있는 곳은 모두 영장(營將)이나 수령이 헌관을 하도록 일체 엄히 신칙을 하라."
하였다.
홍낙유(洪樂游)를 문신 겸 선전관(文臣兼宣傳官)으로 임시 임명하여 교동부(喬桐府)의 기민 정책에 부정 유무를 조사하게 하였다.
제품에 관한 도식을 각처의 향소(享所)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상이, 크고 작은 제사 의식이 통일되지 않아 이따금 임시 조절하는 바람에 경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하여 봉상시에 명하여 도식을 만들게 하고 직접 수정을 가하였는데, 제물을 진설하는 일에서부터 떡과 초의 크기와 계절따라 달리 쓰는 나물·과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정한 도식이 있어 한 눈에 훤하게 만들고 그것을 봉사시와 각처의 향소에다 나누어 보관하도록 한 것이다.
11월 7일 병신
이홍운(李鴻運)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1월 11일 경자
장령 강봉서(姜鳳瑞)가 상소하기를,
"제주도는 여러 차례 흉년이 들었지만 지난해처럼 추수할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굶어 죽은 사람이 몇천 명이나 되는지 모르는데, 올해 8월에 또 큰 바람이 연일 불어서 정의현(旌義縣)과 대정현(大靜縣)은 적지(赤地)나 다름없고 제주 좌면(左面)과 우면(右面)도 혹심한 재해를 입어 내년 봄이면 틀림없이 금년보다 배나 더 굶주림을 호소할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 이철운(李喆運)은 밤낮없이 술에 취하여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환곡을 마구 받아들이면서 매 섬[斛]마다 반드시 두서너 말의 여유 곡식을 더 받고 나누어줄 때는 곡식 1말과 7, 8되[升]에 불과한데도 그 남은 곡식은 끝내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이송한 곡식 1만 포는 전적으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큰 말로 받아들이고 끝에 가서는 작은 말로 나누어주어 매섬에서 2말씩 남은 것이 합하여 1천여 섬이나 됩니다. 그리고 해남(海南)에서 옮겨 올 곡식의 남은 숫자인 11섬은 애당초 실어오지도 않고 군교를 보내어 돈으로 환산해서 베와 명주를 샀습니다.
애당초 곡식을 요청할 때도 진창(賑倉)에 보관된 쌀 1천 3백여 섬은 재해에 따라 탕감해 주는 백성들 환곡 속에다 뒤섞어놓아 아예 장계도 올리지 않았고 세 고을의 기민(飢民)을 뽑아 조건없이 곡식을 준 백성의 수는 2천여 명에 불과한데도 4천 명으로 보고하였으며, 이리저리 주선하여 마련한 곡식이 3백 섬에 지나지 않으면서 6백 섬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명월 만호(明月萬戶) 고한록(高漢祿)이 자진하여 바친 곡식은 쌀 60섬과 벼 60섬에 지나지 않는데도 5백 섬으로 보고하였습니다.
기민 먹이는 일이 끝난 뒤에 스스로 자신의 공으로 여기고 속으로 무언가 크게 바라고 있었는데, 한록은 정의 현감(旌義縣監)에 임명되고 목사인 자신에게는 표리(表裏)를 상으로 주는 정도에 불과하자 왈칵 성을 내면서, 나라에서 하는 일이 가소롭다고 하였다니 그것이 어디 관장으로서 할 말입니까. 신은 철운은 삭직하고 한록에게 내린 상도 시행하지 말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제주도는 먼 곳인 데다가 큰 바다가 가로막혀 임금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고 백성의 고통이 위에까지 알려지기 어려우므로, 만일 목사가 적임자가 아닐 경우 조정이 어떻게 무고한 섬사람들이 앉아서 받는 혹심한 괴로움을 알겠는가. 작년에 굶어 죽은 백성의 수를 네가 말하였는데, 이를 보니 참으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육지의 백성들이 굶주려 전전하면서 다른 곳으로 갔어도 그들이 다시 돌아와 살기를 기대하는 뜻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대로 도백(道伯)을 엄중히 징계하고 있는데 더구나 섬 안에서 굶어 죽은 자가 몇천 명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하니 전대에도 들어보지 못하였고 후대에도 들어보지 못할 일이라고 하겠다. 설령 소문으로 전하는 말이 사실과 틀려서 천이 줄어 백이 되고 백이 또 줄어 십이 된다 하더라도 어찌 흉년을 탓할 일이겠는가. 마치 내가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심정이다. 본 제주목에 목사다운 신하가 있었던들 이런 말이 어찌 너의 입에서 나왔겠는가. 그것 말고도 백성들을 학대하고 나라의 곡식을 도둑질한 따위의 허다한 죄과는 모두 용서할 수 없는 죄에 해당한다. 나라에 법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그와 같은 목사를 즉시 그 범죄 사실을 명확히 조사하여 크게 징벌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너의 상소는 묘당에 내려보내 죄상을 조사하여 처리할 방도를 해당 당상관들이 논의하여 의견 일치를 본 후 간단히 적어 보고하도록 하고, 아울러 해당 목사 이철운과 정의 현감 고한록 등을 조사하고 그들에게 적용할 법도 함께 의논하여 아뢰게 할 것이다.
성주와 백성과는 비록 신분의 차이가 있다지만 너의 직책은 바로 사헌부 관원으로서 그 직책이 임금의 잘못까지도 다 논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성주와 백성과의 관계를 따질 것이 뭐겠는가. 내 그래서 이렇게 좋은 말로 비답을 내리는 것이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신들과 의논하였더니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말하기를 ‘이철운의 죄범은 당연히 잡아다가 엄중히 조사하여 사실을 밝혀내고 법대로 처단해야 됩니다. 그러나 다만 염려되는 바는 잡아온 뒤에 그가 스스로 사형에 해당되는 죄임을 알고 한결같이 변명만 한다면 1만 리 바닷길을 사실을 밝히기 위해 가고 오고 하자면 적잖은 세월을 허비하게 될 것이고, 또 큰 흉년을 막 겪고 나자 금년에도 흉년을 면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신음하는 참상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의당 위로하여 정착해 살도록 하는 조치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 밖의 불법을 저지른 여러 문제들도 낱낱이 조사하여 그 범죄 진상을 밝혀내야 할 것이니 안핵 어사(按覈御史)를 보내 철저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고 그 죄를 분명히 가려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조사한 후 적용할 법조문은 당연히 사형에 해당하므로 그가 지은 죄의 경중을 논한다 해도 더하거나 덜 것이 있을 수 없겠습니다. 이철운에게는 우선 그 섬에다 정배하는 법을 적용했다가 어사의 장문이 있기를 기다려 잡아다가 법대로 처리하고, 고한록에게 내린 상전을 환수하는 건은 그 죄가 곡식의 섬 수를 허위로 불려서 임금을 속였으니 잡아다가 신문한 후 엄히 다스리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였고,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와 우의정 김희(金憙)도 다른 의견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차피 사실을 조사하고 백성들을 정착시키고 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우선 그 임무에 적합한 강명(剛明)한 사람을 사(使)나 어사를 따질 것 없이 당상 3품 또는 삼사(三司) 중에서 통틀어 뽑아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조사를 어느 곳에서 해야 할 것이며, 법은 어떤 법을 적용해야 할 것이며, 이철운에 대하여 조사하기 이전에 우선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와 이 상소문 내에 언급된 미처 품처(稟處)하지 못한 여러 조항들에 대해서도 시임 대신들이 다시 논의한 후 원임 대신에게 비변사 낭청을 보내 상세히 물은 다음 간단히 적어 올리도록 하라.
대신(臺臣)의 상소에, 굶주린 인구가 2천 명인데 그 배나 되는 숫자로 턱없이 보고하였다 하고 또 굶어 죽어서 골짜기를 메운 시체가 몇천 명이나 되는지 모른다고도 하여 그 말이 서로 모순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굶주린 백성들을 뽑은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아니면 진휼 대장에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밖에 단지 줄거리만 거론한 여러 조항들도 그 대신에게 물어봐야지만 내용을 알겠다. 더구나 아주 조그만 지역인데 전해들은 내용이 사실과 틀릴 리야 있겠는가. 자세히 알고 나서야 조사할 수가 있을 것이니 장령 강봉서(姜鳳瑞)를 정원이 패초(牌招)하여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실을 조목조목 진술하게 한 다음 아뢰도록 하라. 이철운·고한록은 먼저 그 벼슬자리를 비우게 하고 따로 적임자를 뽑아 추천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신 강봉서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굶어 죽은 섬사람들의 수를 신이 하나하나 명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별도리(別刀里) 한 곳으로 말하더라도 주민이 불과 1백여 호(戶)인데 굶어 죽은 사람이 80여 명이나 됩니다. 한 마을이 이 지경이니 온 섬을 미루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이 고향에 내려간 시기가 6월 말, 7월 초였는데 도로와 마을 사이에 죽은 사람이 잇달아 있어서 듣고 보기에 지극히 애처로웠습니다. 대략적으로 논하자면 진휼을 하였거나 하지 않았거나를 따질 것 없이 굶주림 때문에 죽은 사람이 아마 수천 명뿐이 아닐 것입니다. 그 밖의 여러 가지 범법한 일들은 민간에 전해지는 말들이 파다하고 뭇사람 눈을 가리기는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신은 정말로 사실에 의거하여 말한 것입니다.’ 하였고, 신 낙성(樂性)은 말하기를 ‘이철운이 저지른 여러 가지 불법 사례에 대해 어사를 내려 보내 엄중히 조사해야 된다고 아뢰었던 바 지금 비지(批旨)를 받고 다시 헤아려보니 진휼을 끝마치고 올린 계본(啓本)에, 세 고을에 조건없이 곡식을 지급한 굶주린 인구가 모두 2천 6백 명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대신이 말한, 허위로 4천 명으로 늘렸다고 한 것이 날조한 말이 되며 또 1만여 섬이나 되는 곡식이 일제히 사고없이 제주에 잘 도착하였다고 이미 도장(道狀)과 읍계(邑啓)로 보고 되었으면 해남에서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곡식 11섬도 아마 그럴 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세 고을의 원래 호수가 1만여 호에 불과한데 굶어 죽은 사람의 수가 몇천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남아있는 인구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런 몇 가지 문제를 놓고 서로 참고하고 비교해 보면 그밖에 다른 말들도 말마다 모두 정확한 것이라고 보장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네 글자로 된 패설(悖說)129) 에 있어서는 즉시 그 죄를 분명히 밝혀서 적당한 형을 시행함이 마땅한데 대간의 상소는 삭직(削職)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역시 생각 밖의 일이었습니다. 만일 대간의 말이 사실과 틀리지 않는다면 관계됨이 매우 중대하여 성주와 백성이라는 신분 관계를 따질 것이 없는 일입니다. 이철운은 단연 법대로 처단해야 하겠지만 만약에 혹시라도 한 때 길거리에서 들은 말을 서슴없이 보고한 것이라면 일반 다른 사람에 있어서도 반좌율(反坐律)이 적용되는데 더구나 그 고을 백성으로서 고을 수령을 무고한 경우이겠습니까. 철운을 철저히 조사하여 혹시 변명하는 일이 있으면 대관의 체면이 중하기는 하지만 서로 대질시켜서 사실을 밝혀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의금부에서 다루고 혹시 연관된 점이 있어 신문해야 될 사람이 있으면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그 사람을 감영으로 잡아들여 사실을 조사한 뒤 장계로 아뢰게 하는 것도 불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밖의 굶어 죽은 사람의 많고 적음과 곡식 장부의 조작 같은 문제는 신임 목사가 실상을 조사해도 될 것이니 따로 어사를 내려보낼 필요는 없겠습니다. 또 이 사건은 중대한 사건이어서 철저하고 엄격하게 조사해야 되지만 그 고을 백성이 자기 고을 수령을 논죄한 사건인데 그 지역에 가서 그 사건을 조사한다는 것도 일의 체통을 중시하고 풍속을 바루는 도리가 아닙니다. 이철운은 의금부에서 잡아다가 엄히 신문하게 하고 어사를 내려 보내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이소(履素)는 말하기를 ‘이철운의 네 글자로 된 패설은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단지 한낱 왕명을 받은 신하를 시켜 이런 사건 내용을 대충 신문하게 하는 것은 조정을 존중하고 완악한 자를 징계하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들여 엄히 조사하게 하고, 뒤이어 어사를 내려 보내 그 섬에 가서 응당 신문해야 될 사람들을 잡아다가 굶어 죽은 백성들의 실지 숫자와 장물을 취득하고 불법을 저지른 여러 가지 사건들을 낱낱이 조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으며, 신 희(憙)는 말하기를 ‘먼저 철운을 본도에 정배시킨 다음 어사를 파견하여 대관이 상소에서 논한 여러 가지 사항들을 물어보아야 될 사람들에게 상세히 묻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본사(本司)의 낭청을 원임 대신들에게 보내 의논하게 하였더니,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은 말하기를 ‘이철운이 했다는 네 글자의 말은 대관이 필시 직접 듣지는 못하였을 것이고 당연히 곁에서 듣고 말을 전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의금부에서 잡아다가 엄하게 국문하고 철운과 대질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을 백성이 자기 성주를 장물죄로 몰아붙인 일은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아무래도 아주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후로 3백 60 고을의 백성들이 만일 이것을 전례로 삼는다면 풍속이 날로 각박해져서 백성을 다스려야 할 수령이 앞으로 그들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니 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는 신 낙성과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면서 성주와 고을 백성과의 신분 관계 문제에 대하여 주장하기를 ‘그 사실을 조사하여 필경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되면 반좌율 적용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당연히 가중되어야 할 것이고,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른바 패설(悖說)에 관한 법 적용이 단지 난언(亂言) 죄에 그치고 큰 역적으로 처리되는 데에 이르지 않는다면 성주와 고을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그 조항은 고발을 당한 자로 논하기에는 부당하고 고발을 한 자로 논해야 맞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원임 정승이 성주와 고을 백성과의 신분 관계에 대해 마음을 쓴 것은 비답 중의 은미한 뜻과 바로 일치하고 있지만 의당 결말을 기다려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철운 문제에 대한 조정의 처분은 당연히 몇천 명이 굶어 죽었는데도 그것을 남의 나라 일 보듯 하고 손쓰지 않은 것을 중점으로 다루어야지 탐관오리 노릇을 한 것이나 패설 따위는 다 둘째 문제로 처야 할 것이다. 어사는 뽑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별도로 조사를 하여 대관의 말과 틀림이 없으면 죽은 사람에게는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주어야 할 것이고 장물을 취득한 관리는 법에 따라 그 죄를 다스리는 일이 바로 지금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전 교리 심낙수(沈樂洙)를 제주(濟州)·대정(大靜)·정의(旌義) 등 고을의 안핵 어사로 임명하여 며칠 이내로 현지로 떠나게 하고 해당 수령을 임명하여 보내는 동안 목사 임무를 임시 대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철운의 패설 부분은 영부사의 논의대로 처리하되 이름을 엄국(嚴鞫)으로 하면 추국청을 설치해야 되는 사건이 될 터이니 국문의 명칭은 영상의 논의대로 하도록 하라. 다만 대질 심문을 하는 과정에서 혹간 난처한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형편을 보아 가면서 다시 처분이 있을 것이다. 정원으로 하여금 장령 강봉서를 접대청으로 패초(牌招)하여 철운에게 그 말을 듣고 대관에게 전한 사람의 성명이 누구인가를 조목조목 대답하게 한 다음 이어 의금부로 하여금 철운을 잡아다가 신문하게 하고, 들은 자와 전한 자도 도백이 잡아서 해조로 올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철운의 네 글자로 된 패설이 만일 아무나 보통 말하듯이 ‘우리 나라 일은 가소로운 것이 많다.’라는 식으로 한 말이면 애당초 죄가 될 것이 없고 만일 진정으로 우리 형정(刑政)을 꼬집어서 그러한 말로 비난한 것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 그렇게 된 것인지 저렇게 된 것인지를 알아야지만 어사의 조사 대상 항목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니 대관에게 상세히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승정원이 아뢰기를,
"장령 강봉서에게 물었더니, 그의 말이 ‘이철운이 말한 네 글자 패설은 바로 금년 4월 기민 구제를 마치고 베푼 잔치 자리에서 한 말인데, 신이 조정에 돌아와서 고을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의견을 아뢰려고 그 곳 선비 양지온(梁之蘊)과 의논하였더니 지온이 몇 가지 조항을 기록하여 보여주었는데, 그 중의 한 가지가 바로 철운이 말했다는 패설로써, 신도 그 말이 한때의 망발이라는 것을 물론 알았지만 마침 그가 저지른 불법을 논열하면서 내킨 김에 끌어다 썼던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대관이 대답한 말을 보니 그 내막이 과연 생각했던 대로이다. 이철운이 했다는 ‘나랏일이 가소롭다.’는 말은 얼핏 보면 패설인 듯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이는 늘 예사로 하는 말이다. 국(國)을 공(公)으로 새기면 임금을 지적하여 배척한 말이 아니고 소(笑)를 가(呵)로 새기면 비웃는 뜻이 없다. 이는 마치 세상 사람들이 곧잘 ‘우리 나라 일은 가소로운 것이 많다.’고 하고 예사로운 말과 같은 것으로, 이야말로 이른바 말의 표현 때문에 그 본뜻을 곡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옛날 정자(程子)가 생지위성(生之謂性)을 논하면서 이르기를 ‘이치에는 선과 악이 있다.[理有善惡]’ 하였는데, 자양(紫陽)130) 이 이를 해석하기를 ‘이치 리(理) 자는 당연히 합할 합(合) 자로 보아야 된다.’ 하여 이치에는 선과 악이 없다는 것을 밝혀 후인들의 의혹을 풀어 주었던 것이다. 대 현자도 그가 한 말의 뜻을 새기자면 의심을 일으키는 곳이 있는데 무식한 무관 출신 수령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을 죄로 여길 것 없다.
또 기민 구제 정책에 대해 상을 주는 제도는 10등급으로 되어 있는데 표리(表裏)와 새서(璽書)가 제 2등으로 높고 벼슬이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은 제 10등의 최하위가 된다. 대체로 표리가 물품으로는 보잘것없지만 이는 바로 임금이 하사한 것이다. 지금 어떤 무식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 무식한 말로, 우리 나라의 상 주는 규정은 극히 가소롭다고 한다면 그것도 패설로 결론을 내리고 그 듣는 족족 조사하여 법을 적용하고 죄를 줄 것인가. 이렇게 볼 때 철운이고 대관이고 모두 따져 물을 것도 죄줄 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철운에게는 의심을 말끔히 씻을 한 조건이 또 있는 것이다. 즉 기민 구제를 마치고 베푼 잔치는 4월에 있었고, 상을 주는데 대한 회계(回啓)는 5월에 있었으며, 유서(諭書)를 반포하기는 7, 8월 사이에 하였을 것인데 상전의 등수가 어떻게 매겨질지를 어떻게 미리 예측했겠는가. 그 곳 선비 양지온이 그 연회에 직접 참여하지도 못한 고을 백성으로서 귓전에 전해 들은 말로 이런 내용을 엮어서 성주를 탄핵하는 매개를 제공하였으니 패설이 있었거나 없었거나를 따질 것 없이 풍교(風敎)가 무너지고 습속이 각박한 것이다.
전 목사 이철운은 단지 굶어 죽는 백성을 구제하지 않은 것과 구제할 물자를 도둑질 해먹은 두 가지 일만을 가지고 의금부에서 잡아다가 진상을 알아내도록 하고 지온은 안핵 어사에게 부쳐서 엄히 실정을 조사한 후 그 죄에 맞는 법을 적용하여 처단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대용(鄭大容)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1월 12일 신축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황인점(黃仁點)에게 유시를 내렸다.
"떠난 일정을 따져보니 아마 의주 객관에 도착했을 듯한데 힘든 길을 가는 중에 탈이나 없었는지? 여섯 번이나 계주(薊州)의 얼음판 길을 오갔으니 유독 많은 수고를 하였다. 《북정(北征)》의 시(詩) 가운데는, ‘바위에 옛 수레바퀴 자국이 나있네[石戴古車轍]’ 하여 그 모습 그대로를 한 폭의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경이야말로 사행에 있어 알 것 다 알고 모든 것이 눈에 익었을 것이다. 사행으로서의 책무를 더욱 정돈 신칙하기에 마음을 쓰고, 변경의 금령을 거듭 가다듬고 밝혀서 저 사람들로 하여금 전에 왔다가 지금 또 다시 오는 훌륭한 정사(正使)임을 알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내가 경에게 마음을 다해 바라는 바이며, 이어 조심조심 갔다가 평온하게 오기를 바란다."
비변사가 황해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의 장계에 의거하여 곡식 7천 섬과 공명첩(空名帖) 5백 장을 떼어주어 연안(延安) 등 고을의 기민 구제에 쓰도록 할 것을 계청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에 연신(筵臣)의 말을 들으니, 전임 도백이 사진(私賑)을 위하여 널리 부유한 사람을 모집하여 민심이 소란해지고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모두 피곤을 느끼는 폐단이 있었다고 하였다. 대체로 자원해서 곡식을 바치도록 강요하는 일은 조정의 금령이 있을 뿐더러 삼남 지방에 있었던 일이 귀감이 되고 있으니 도백에게 엄히 신칙하여 부유한 집에 대하여 억지로 징수하지 말도록 하라. 그런데도 잘못을 답습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기를 권한다면 조정의 명령을 따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공명첩으로 말하면 많이 떼어주는 것이 어려운게 아니라 강제로 나누어주는 것이 폐단이 되고 있으니 2백 장만 지급하고 만일 기민 먹일 것이 부족할 경우에는 곡물을 더 요청하더라도 안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분부하도록 하라. 근래 들어 공명첩을 서슴치 않고 요구하기도 하고 허락하여 떼주기도 하는데 자못 선왕조의 특별 하교에 의하여 규정을 만든 본래의 취지에 위배되는 일이다. 금관자·옥관자가 팔도에 두루 퍼져 마치 돌과 같이 천해 진다면 그것이 무슨 장려하는 도구가 될 것이며 강제로 수여하는 절차에 따른 폐단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옛 규정을 회복하여 절대 가볍게 허락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4일 계묘
대신(大臣)과 각신(閣臣) 그리고 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과 제주 어사 심낙수(沈樂洙)를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철운의 네 글자 패설은 이제 이미 죄명을 완전히 벗었다. 대체로 요즘 와서는 탄핵의 소리가 없었지만 혹간 있다 하여도 거의가 강봉서와 같은 류들이니 그것이 조정의 수치다. 그러나 그의 상소 가운데 굶어 죽은 사람이 몇천 명이라고 한 것은 그 얼마나 깜짝 놀랄 일인가. 그곳은 바다 밖의 아주 먼 지역이라서 밤낮으로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는 곳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뒤부터는 밤에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하니, 좌의정 김이소(金履素)가 아뢰기를,
"근래 성주와 고을 백성과의 사이에 명분과 의리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지만 제가 섬사람으로서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징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상도 봉서를 죄주어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나의 생각에는 철운의 장물 취득죄도 죄 중에서 큰 죄인데 아직 조사하여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 결과를 보아 봉서를 죄주더라도 늦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저들끼리 무르익도록 놔둔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11월 16일 을사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 그리고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조심태(趙心泰)를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심태에게, 수원에 성을 쌓는데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물었다. 심태가 아뢰기를,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두 군영에 딸린 향군(鄕軍)을 10년 동안 1개 초(哨)를 줄이면 해마다 근 1만 냥의 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향군에 있어서는 번들러 올라오는 폐단이 없어지고 본영으로서는 폐단이 될 근거가 없어지는 일이니, 우선 대강 수효를 충분히 토의해 보고 다시 여쭙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육상궁(毓祥宮)과 연호궁(延祜宮)의 사철 제향이 언제나 같은 날이기 때문에 연호궁 제향에는 따로 재계하는 절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두 궁의 4계절 제향을 각각 다른 날로 하면 연호궁 제향에도 똑같이 재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금위영이 이날 군사 훈련의 자체 실시 여부에 대하여 여쭈니, 전교하기를,
"경은 규정에 의한 휴가 제도도 모르고 또 《대학(大學)》에 아랫사람이 싫어하는 것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라고 한 문구도 보지 못하였는가. 요즘은 재계를 하고 있는데 비록 자체 훈련이라 하더라도 어찌 감히 나팔을 불고 징과 북을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고 대포를 쏘는 등의 일을 규정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5월에는 하지 않았는데 이달에는 한다는 것도 역시 해괴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뒤로는 이달 12일부터 16일까지는 자체 훈련까지도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7일 병오
전교하였다.
"한 해의 역서와 인구수를 올려 바치는 일은 모두 국가의 중대한 일로써 그것을 어찌 상의원의 명주·모시나 사옹원의 어물, 장원서의 과일·채소 따위에 비할 것인가.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제조(提調)가 직접 살펴서 바치고 혹은 정부와 예조가 함께 입회하여 봉해 올리는 경우도 있으면서 서운관(書雲觀)과 한성부(漢城府)에서는 그 일을 낭청에게 일임해 버리고 심지어는 승정원을 거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그것을 바로잡아야 되겠다. 이 뒤로는 그 해 역서와 인구수는 영사(領事)와 판윤(判尹)이 승지에게 청하여 직접 올리도록 규정을 정하여 주고받을 때 경건한 마음을 표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이에 앞서 사역원이 아뢰기를,
"근래 변경의 금령이 없다시피 되어 몰래 하는 장사치들이 득실대고 있는데, 차후 그것을 단속할 방법을 사행이 의주부에 갔을 때 의주 부윤과 상의하여 규정을 만들어 올려보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 아뢴 말을 재가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변사가 그 절목을 올렸다.
【1. 잠상이 거래하는 물품 중에 금·진주·초피·인삼 등은 휴대하기는 아주 쉽고 적발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러므로 의주의 장사치들이 온갖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남모르게 물건을 가지고 넘어가는데 그 방법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심지어 해삼을 담은 자루나 다시마를 넣은 포대 속 등 곳곳에 몰래 감추는 폐단이 있는데도 포대를 저울로 달 적에 낱낱이 검색하지 않으며 무작위로 뽑아서 검색할 적에는 검색하는 장교와 아전들이 한통속이 되어 이리저리 둘러 맞추어 끝내기 때문에 언제나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많다. 지금부터는 저울로 달 때 포대를 무작위로 뽑아서 달지 말고 모조리 검색을 하여 빠뜨리는 걱정이 없도록 하라. 또 영리한 장교를 선정하여 포대를 달 때 별도로 사찰하도록 하여 간사한 행위를 막는다. 1. 꾸러미 점검법의 의미는 본래 엄밀한 것인데도 근년 이래로 점차 해이해져서 유명 무실하게 되어 잠상의 폐단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되었다. 비단 종류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가령 한성부에서는 비단·공단의 값은 10여 냥이나 되고 팔사단(八絲緞)과 모단(冒緞)의 값은 5, 6냥이 되는데 꾸러미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물건 이름만 들추어 은으로 환산한 값으로 감해 주고 몰래 정량을 초과한 수량은 이리저리 둘러맞추어 넘겨버린다. 그리고 검색할 적에는 명주와 비단의 등급과 품질은 구분하지 않은 채 단지 필 수의 많고 적음만을 따지기 때문에 기준 꾸러미 이외에 더 넣은 수량은 적발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는 낱낱이 대조하고 살펴서 전과 같은 혼잡스러운 폐단이 없도록 하며 돌아오는 짐을 검색할 적에도 무작위로 골라서 하지 말고 몽땅 검열을 실시한다. 설사 가죽을 담은 상자 따위라 할지라도 하나도 빠뜨림이 없게 하여 간사한 농간을 부리는 틈을 막는다. 1. 은 짐이나 다른 여러 가지 짐을 북경까지 가지고 들어가는 것도 있고 책문에다 떨구어 놓는 것도 있는데, 책문에 떨구어 놓는 것은 애초 꾸러미를 점검 장부에 들어 있지도 않아 너무 허술한 정도뿐만이 아니므로 역시 잠상이 농간을 부리는 하나의 틈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규정을 엄격히 세우지 않으면 안되므로 지금부터는 책문에 떨구어 놓은 짐의 수효를 책문에 들이고 난 다음 곧장 장부를 만들어 사신에게 바치고 돌아와서 강을 건넌 뒤에도 한결같이 북경으로 들여간 화물의 예대로 점검하여 간사한 농간의 폐단을 막는다. 1. 무역에 관한 규정은 비할 데 없이 엄격한데도 근래에 책문의 물품 중에 모자 한 종류만 해도 명색 조차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이 없다. 이른바 찾지 못했다는 것이 정말이라면 찾지 못한 자체가 벌써 법에 어긋난 일인데 더구나 이러저리 둘러맞추고 엉터리로 농간을 부리는 잔꾀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지금부터는 일체 금지하되 만일 이를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잠상을 처벌하는 법으로 처벌하도록 하라. 1. 잠상들의 물품을 포교들이 압수하여 바치면 그 절반을 상으로 주는 것이 전례이기는 하지만 매번 그들과 짜고 그대로 덮어두는 폐단이 많았다. 반드시 중한 상을 내려야지만 끝까지 뒤밟아서 잡아들일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압수하여 바친 물품 전부를 상으로 주고 비단 포교들 뿐 아니라 관속(官屬)이나 백성을 막론하고 압수하여 바치는 자가 있으면 그들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하도록 규정을 정한다. 1. 압록강 연안의 상하에는 몰래 국경을 넘어가는 길이 많다. 의주부에서는 지키는 파수꾼의 숫자를 종전에 비하여 더 많이 정해서 밤낮으로 염탐하고, 순찰하게 하고, 별도로 장교를 정하여 때없이 불법을 적발해서 소홀하게 하는 폐단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청수(靑水)와 수구(水口) 두 진(鎭)은 더욱 넘어가기 좋은 길목이므로 진장(鎭將)을 엄히 신칙하여 파수하는 등의 일을 각별히 하게 한다. 두 진의 경내에 만일 잠상이 있었는데도 진장이 이를 압수하여 바치지 못한 사실이 본부에 의해 적발이 되었을 때는 해당 진장에 대해 각별히 죄를 논한다. 그리고 그 진의 경내에 사는 사람이 압수하여 바친 경우에는 본부의 사람이 압수하여 바친 예와 똑같이 시상을 한다.】 그리고 이번 사행부터 시작하여 크고 작은 북경 사행을 이 규정을 절대 준수하고 감히 위반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21면
【분류】무역(貿易) / 사법(司法)
그리고 이번 사행부터 시작하여 크고 작은 북경 사행을 이 규정을 절대 준수하고 감히 위반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8일 정미
춘당대에 나아가 초계 문신(抄啓文臣)에게는 친시(親試)를, 선전관에게는 활쏘기와 강경 시험을 보이고, 이어 문관·무관의 총점수를 따져 상을 내렸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우의정 김희(金憙)가 아뢰기를,
"신은 푸른 색 옷을 입는 일에 대하여 구구한 견해가 있습니다. 서울은 굳이 법을 만들어 지시하지 않아도 날이 갈수록 서로 보고 저절로 본받겠지만, 각도는 비록 서울을 표준으로 삼는다고는 해도 일단 그에 대한 공문이 없으면 필시 의문을 가지고 일률적으로 착용하지 않을 염려가 있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하나로 통일하도록 공문을 보내 서울과 지방이 들쭉날쭉해지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백성이란 마치 물과 같아서 휘저으면 물결이 일고 잠잠한 물이라야 거울처럼 비춰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왕위에 오른 뒤로 이른바 정사를 했다는 것이 작은 혜택이건 큰 혜택이건 한 가지도 백성들에게 미친 것은 없고 도리어 다리드리는 문제, 술 금하는 문제 등으로 작년에 한 가지 금령을 내리고 올해 또 한 가지 금령을 내리고 있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법의 의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창옷은 그것이 불과 조관(朝官)들이 입는 것인데 그것을 푸른 색으로 하는 것쯤이야 매우 쉬운 일이다. 저번에 영상이 그 의논을 올렸을 적에도 즐겁게 듣고 그의 말을 옳게 여겼으면서도 금령 선포를 보류했던 것은 대체로 이를 시행하다가 이내 도로 위반하는 것보다는 제각기 만들어 입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선비나 일반 서민들의 겉옷과 속옷을 일제히 고쳐 만들게 하면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 말고도 그렇게 행할 수가 없을 듯해서였다. 명주·무명·모시·갈포로 지은 옷을 계절에 따라 바꾸어 착용하고 푸른색과 흰색을 각기 용도에 맞도록 물들여 입는 것이 벼슬이 높고 집이 넉넉한 사람은 별로 어려울 것이 없겠지만 저 가난한 선비와 곤궁한 백성들이야 무슨 힘으로 그렇게 하겠는가. 설령 넉넉히 마련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금령까지 선포한다는 것은 절대 안될 일이다. 따라서 서울과 지방에 알려야 한다는 경의 청이 꼭 옳다고 할 수 없으니, 이 비답 취지대로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여 각기 명확히 알도록 하라. 그러나 서울 재상들 집에서는 감히 이 비답을 방패막이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이익(金履翼)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19일 무신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의정부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이 예조 당상을 거느리고 청대하여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낙성 등이 아뢰기를,
"오늘이 바로 동지(冬至)입니다. 내년 갑인년은 자전이 만 50세가 되는 해이고, 자궁의 연세는 60세가 되는 해입니다. 이는 실로 우리 나라에 처음 있는 경사로써 이 기쁨을 기념하는 방법은 오직 자전과 자궁에게 존호(尊號)를 올려 숨은 덕을 나타내는 데 정성을 다하고 운이 창성한 경사를 크게 축하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상께서 어버이의 만수 무강을 비는 효심에서 앞으로 거행해야 할 축하 행사에 관해 무언가 청이 있었을 것이나 그 행사가 국가 전례에 관계되는 일이기에 감히 이렇게 와서 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에 있을 나라의 경사는 역사적으로 드물게 있는 일이다. 옛날 장렬(莊烈)131) ·인원(仁元)132) 두 왕후는 모두 높은 수를 누렸으나 오늘의 경사로 말하면 더욱 드물고 특이한 점이 있다. 자전은 선왕께서 칠순을 바라보던 해에 혼례를 치루셨는데 지금 만 50세가 되셨고 자궁은 나를 낳아 기르시고 천승(千乘)의 봉양을 누리시면서 나이 육순에 오르셨으니 이는 우리 집안에 일찍이 없었던 일로써 만수를 비는 나의 정성이야 경들의 청이 있기 전에 이미 의견을 아뢴 바 있지마는 자전께서는 늘 겸손한 마음으로 굳이 거절을 하시고, 우리 자궁께서는 환갑이 곧 다가오고 있어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를 봉양하지 못한 내 슬픔을 더욱 가눌 수가 없는 것이다."
하고는 이어 목이 메어 한참을 울먹이다가 이르기를,
"내 마땅히 지성껏 마음을 돌리도록 힘쓸 것이지만 나의 마음이 이러한데 자궁의 마음이야 더욱 어떻겠는가. 오늘을 기뻐하고 옛날을 슬퍼하는 심정을 어떻게 비유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묘년 경사 축하 때는 경자년에 있었던 일을 추억하면 허락을 받아낼 가망이 없었지마는 선왕의 효성이 끝내 감동을 시켰던 것이다. 나도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또 경들의 한 마디 말이 나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하였다. 낙성이 아뢰기를,
"신들의 천박한 정성으로 감히 감동되시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마는 빈계(賓啓)와 정청(庭請)을 앞으로 차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선왕과 비궁(閟宮)에 휘호를 추상하는 일은 그 사체가 중대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이 경사는 실로 선왕의 영령이 보살피고 도와주신 일이고, 또 올해는 특히 다른 해와 달라 선왕으로서는 탄강하신 지 1백 주년이 되는 해이고 비궁으로서도 육순이 되는 해로써 이미 우연한 일이 아니며 마치 때를 기다린 듯합니다.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빨리 존호 올리는 전례를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의 휘호는 글자 수가 너무 많아 더 올리고 싶어도 다시 훌륭한 덕을 형용할 만한 다른 글자가 없고 또 인원 왕후(仁元王后)에게 존호를 올릴 때에도 그때마다 숙종(肅宗)에게 존호를 올리지는 않았다. 나는 존호를 더 올리지 않는 것이 선왕의 뜻을 받드는 도리라고 생각한다."
하자, 낙성이 아뢰기를,
"성상의 전교가 그러하시니 신들이 감히 그대로 받들지 않겠습니까마는 비궁의 휘호만은 내년이 다른 해와는 다르므로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 등도 똑같은 말로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더없이 중대한 일이니 경들은 물러가서 우선 빈계부터 올리도록 하라."
하니, 낙성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몇 년 동안 가슴속에 맺혀 있던 생각을 언제나 한 번 진술하려 하였으나 주저하며 머뭇거린 것이 지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천 년에 한 번 오는 기회를 만나 감히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효성은 신명을 감동시키고 학문은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꿰뚫었습니다. 왕위에 계신 지 거의 20년에 교화는 청명하고 온 나라가 태평을 누려 그 높고 넓은 덕을 백성들이 어떻다고 명칭할 수 없고 빛나고 찬란한 치적은 역사에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늘의 해와 같은 덕을 모두 밝혀내어 사랑으로 받드는 아랫사람들의 정성을 조금이나마 펴는 것은 역시 천성을 가진 신들로서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성상의 한결같은 겸손한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때에 요청하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옛말에도 이르기를, 백성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하늘도 반드시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존호를 올리자는 청을 빨리 허락해 주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하는가. 그것은 바로 열성조에서 이미 시행했던 전례이다. 오직 우리 세종(世宗)과 효종(孝宗)만 시호가 있었을 뿐인데 내 어찌 감히 두 임금을 본받으려고 지나치게 겸손하겠는가. 더구나 내가 일찍이 선조에게 청을 올린 일이 있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굳이 거절하고 또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인정이나 사리로 보아 그것을 차마 받을 수도 없고 감히 따를 수도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경들도 행여 나의 말할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내가 선대의 덕을 높이고 보답하는 길이라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지만 예(禮)란 인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도 있고, 의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것도 있기 때문에 의리와 관계되었을 경우 인정대로 다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의 처지로서야 인정으로 보나 사리로 보나 어떻게 한 글자인들 존호를 받을 것인가. 오늘의 존호가 옛날로 치면 바로 봉선(封禪)인 것이다. 삼대 이후로 현명한 임금들은 모두들 그렇게 해 왔고 또 굳이 꼭 거절할 것까지는 없지마는 나의 경우는 인정이나 사리로 보아 남달리 받을 수 없는 속사정이 있으니 경들은 다시 더 말하지 말라."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신들이 어떻게 감히 성상을 삼대 이후의 임금들과 같다고 보겠습니까. 더구나 육선공(陸宣公)133) 이 이른바 사실 무근의 명망만 차지하고 실지 은덕은 손상되었다고 한 말도 후세 임금들에게는 좋은 교훈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는 말 못할 속사정이 있다는 하교로 굳이 거절하는 구실을 삼으려고 하시지만 그것은 사실상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종(眞宗)을 추존할 때도 그가 대통을 이어받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더 큰 호칭을 올려야 한다고 했다면 나는 감히 따르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이 문제라면 차마 힘써 따를 수 없는 것이 바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으로 보아 어찌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니, 제신들이 일제히 일어나 강력히 청하였으나, 상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낙성이 아뢰기를,
"원자(元子)가 점점 자라고 슬기로운 자질을 천부적으로 타고났으니 그야말로 이 나라 억만년 무궁한 복입니다. 세자 책봉의 성대한 의식을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는데, 성상께서는 비록 천천히 하자고 하시지만 내년은 다른 해와 다릅니다. 빨리 책봉 의식을 거행하여 위로는 자전과 자궁께 기쁨을 드리고 아래로는 만백성의 희망을 한 데 모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도 물론 좋지만 내후년은 바로 자전의 연세 51세가 되고 자궁은 환갑이 되는 해이며, 또 그 이듬해는 원자가 7살이 되는데 숙종(肅宗)이 책봉되던 나이이고, 또 그 이듬해는 원자가 8살이 되는데 바로 내가 책봉되던 나이이다. 내년 갑인년부터 정사년까지는 어느 해고 다 좋지만 나의 생각은 7, 8세가 되기까지 기다리고 싶다."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빈청에서 아뢰기를,
"아, 훌륭합니다. 오늘은 바로 내년을 여는 동짓날이며 내년은 곧 우리 나라의 천 년에 한 번 있는 좋은 기회이자 모든 복이 몰려올 희망찬 해이기도 합니다. 자전의 연세가 50이 되고 자궁의 연세는 60이 되는데 옛부터 제왕들이 즐거운 일이나 경사스러운 일을 꼽을 때 이중의 한 가지만 있어도 아주 드문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의 도타운 도움을 받고 거룩한 왕업을 이어받아 위로는 자전과 자궁을 효성으로 받들고 아래로는 원자에게 무궁한 복록을 끼쳐주게 되었으니 좋은 경사가 한 해에 거듭 이른 것이요 상서로운 기운이 온 나라에 넘치고 있어 비단 우리 나라에만 일찍이 없었던 일이 아니라 아마 역사책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일일 것입니다.
우리 자전의 아름다운 덕과 훌륭한 업적은 인원 왕후와도 같으시고 큰 공로와 지극한 교화는 요(堯)의 딸을 능가하니, 윤리 강상을 백대에 밝히시고 종묘 사직을 만 년토록 공고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궁께서는 전하를 낳아 길러서 나라의 앞날을 열어놓았으며 경사가 원손에게 미치게 하여 국가의 기틀이 반석처럼 공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천승의 봉양을 갖추어 누리시고 장수까지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의 지극한 효성과 한편 기쁘고 한편 두려워하는 정성으로 이해에 이런 경사를 만났으니, 이를 칭송하고 빛내는 방법에 대하여 신들의 구구한 말씀이 있기 전에 이미 그 사실을 아뢰고 애써 마음을 돌리게 하셨겠지만 지금 이 막대한 국가적 경사는 모두가 하늘이 돕고 영령이 도우셔서 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생각건대 우리 경모궁(景慕宮)의 어질고 효성스런 성품은 신명을 감동시키고 말없이 스며드는 덕화는 온 나라에 흘러 넘쳤습니다. 복잡한 정무를 모두 주상의 뜻에 맞도록 처리하였고 궁궐 밖을 나오지 않았으나 명성은 이미 백성들 마음속에 배어 있어 그 훌륭한 덕과 빛나는 광영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신 해, 어느덧 육순이 다가오고 역사 깊은 나라의 운은 영원토록 전하여질 것이니, 전에 없던 경사를 만나니 받들어 모시지 못한 한이 더욱 애절해집니다. 끝없이 사모하는 전하의 마음과 보답하고 싶은 신민의 정성으로 숨겨진 덕을 들추어내어 경사를 거듭 내린 하늘의 뜻에 보답하는 것이 천리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어찌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양(陽) 하나가 다시 돋고 새해가 곧 다가와 성인이 동지를 만났으니 성대한 복록이 몰려올 것입니다. 종묘 사직에 있어서는 무궁한 영광이 되고 신민에 있어서는 고루 기뻐하는 기회가 되는 이때 화봉인(華封人)이 빌던 내용134) 대로 궁궐 뜰에서 세 번 만세를 부르고 빈지초연(賓之初筵)135) 의 시를 노래하며 공당(公堂)에서 만수 무강을 비는 것입니다. 훌륭한 업적을 천양하여 비석에 새기고 현창한 옥책을 경건히 올려서 크나큰 영광을 펼치는 일이야말로 당연히 준행해야 할 떳떳한 전례이며 뭇백성들이 마음으로 함께 축하하는 일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자전에게 여쭈어 빨리 자전과 자궁에게 존호를 올리고 하례하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할 것이며 경모궁에 존호를 올려 거룩한 덕을 찬양하고 전하의 효성을 빛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신들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구구한 정성은 언제나 전하의 공덕을 찬양하여 하늘의 해처럼 그려내고자 하니 위로는 열성조에서 당연스럽게 행했던 전례를 따르고, 아래로는 온 나라 백성들의 똑같은 소원을 펴소서. 그런데 전하께서는 지나친 겸손으로 언제나 자신을 높이지 않는 뜻을 가지셨기에 신들은 주저하여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지 못하고 이런 억눌린 심정을 품어온 지 지금 18년이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하늘이 돌보아 나라의 경사가 냇물처럼 모여들고 옛날에 없던 경사를 만나 온 나라가 고루 기뻐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천하가 다 아는 성상의 효성과 거룩한 덕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오늘의 무궁한 복을 오게 한 것이기에 신들이 비로소 입을 열어 요청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 훌륭합니다. 우리 성상의 독실한 행실과 지극한 덕, 위대한 공적이 온 나라에 넘치고 모든 제왕들의 으뜸이 되므로 그 높은 덕을 백성들은 이름도 지을 수 없으며 빛나는 업적은 역사에 이루 다 쓸 수가 없습니다. 신들의 좁은 소견으로 어찌 감히 그 만분의 일이나마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삼가 조야에서 칭송하는 내용과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을 가지고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전하의 효성을 말하면 타고난 천성과 날을 아끼는 효성으로 인륜에 독실하여 신명과 하늘을 감동시켰습니다. 10년 동안 약시중을 들어 깊은 사랑에서 타이름을 받으셨으며 복잡한 정무를 대신 처리하며 국가를 다스리는 노고를 나누어 맡는 중대한 부탁을 받았습니다. 자전과 자궁을 훌륭히 봉양한 효성은 동해에 비길 만하고 경모궁과 현륭원(顯隆園)에 대한 전례를 정한 것은 참으로 백대의 법이 될 만합니다. 의리에 관한 정미한 분석은 한(漢)나라 송(宋)나라를 능가하고 정성과 공경이 지극하기로는 요(堯)와 순(舜)을 필적할 만합니다.
은인(銀印)과 유서(諭書)로 선왕이 지극한 효성을 밝혔고 날마다 참배하고 달마다 성묘하는 데서 백성들은 사모하는 마음에 감동하였습니다. 왕업의 발판이 되었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북관(北關)에다 비석을 세웠고, 열성조의 훌륭한 교훈을 천양하기 위하여 종묘에다 보감(寶鑑)을 만들어 바쳤습니다. 조종(祖宗)을 법으로 삼으려고 《갱장록(羹墻錄)》을 편찬하였고, 제사를 경건히 지내기 위하여 제품(祭品)에 대한 규정을 예로 정하였습니다. 진전(眞殿)에 초하루와 보름으로 참배를 몸소 행하여 춥거나 덥거나 빠뜨리지 않았으며 묘궁(廟宮)에 봄가을 제사를 대행시킬 적에는 밤이 새도록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세실(世室)을 미리 정하여 선왕의 공렬을 더욱 빛냈고, 규장각을 새로 지어 조상의 훈계를 경건히 모셨습니다. 정성을 다하고 신중을 다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중대한 예를 거행하자 하늘이 굽어 살피시고 땅도 영험을 바쳐 천 년에 한 번 만나는 길조를 잡았고 30년 동안 쌓인 염원을 풀었습니다. 그 고을과 마을을 옮겼는 데도 백성들은 옮긴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고 소나무와 노송나무를 심었으나 관의 재물을 쓰지 않았습니다.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혼정 신성의 예를 대신하였고, 행궁(行宮)을 지어 우러르고 의지하는 생각을 담았습니다. 공경하고 조심하여 받드는 정성은 순일하고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성상의 학문을 두고 말한다면 하늘이 낸 총명과 슬기로 일취 월장하여 하늘과 사람, 성품과 운명의 원리에 관해 훤하였고 역대 성왕이 주고받은 심법을 이어받았습니다. 성스럽고 더욱 성스러워 직접 《자양회통(紫陽會統)》을 편집하였고 앞 사람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여 마침내 《태극강설(太極講說)》을 저술하였습니다. 신진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팔도에서 선발하여 영재를 길렀고 사학(邪學)을 물리치기 위해 한 마디로 어리석은 풍속을 깨우쳤습니다. 치란 득실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사전(史筌)》을 만들었으며, 촉급하고 저속한 글을 읽지 못하게 하기 위해 경전(經傳)을 인출하여 반포하였습니다. 대체로 학문으로 말하면 땅과 바다를 한 품에 안은 것 같고, 문장으로 말하면 높은 하늘의 은하수 그것이었습니다. 어제 세 책은 한 글자 한 마디가 만세의 법이 되고, 윤음이 한 번 내리면 서민 남녀들이 사방에서 전송하고 있습니다. 몸소 실천하고 마음에 체득한 것이 그대로 덕화(德化)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학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하게 여겨 비를 세우고 사우를 짓게 하였으며, 선비를 우대하고 어진이를 찾아 옥백(玉帛)으로 불러서 고무하고 진작함으로써 한 세상을 빛나는 문화의 세계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늘을 공경하는 것으로 말하면 밤낮으로 상제를 대하는 듯 엄숙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섬돌에는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를 설치하였고, 뜰에는 풍향을 재는 장대를 세웠습니다. 비오고 개는 일기에 일념을 두어 도에서의 장계를 잠시도 지체하지 말게 하였으며, 혹간 재해라도 만나게 되면 수라에 몇 가지 음식만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해와 달이 비치는 한 태만한 몸가짐을 하지 않았으며, 바람과 구름의 신에게 제사하는 의식을 새로 정하였습니다. 심지어 일반적인 글을 쓸 적에도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하는 정성을 다하십니다.
백성을 보살피는 것으로 말하면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은혜를 베풀고 행여 다칠세라 걱정하는 마음 간절하십니다. 정월의 첫 번째 신일(辛日)에는 해마다 몸소 농사가 잘 되기를 빌며, 정월 초하루에는 권농의 윤음을 내리십니다. 내수사에 속한 노비를 찾아내는 제도를 폐지하여 공천(公賤)들이 다시 사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고, 궁방(宮房)에서 토지를 떼어 받는 제도를 폐지하여 힘없는 백성들이 억울하게 세금을 무는 괴로움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에 관한 규정을 거듭 신칙한 것은 한(漢) 문제(文帝)가 육형(肉刑)을 제거한 것과 같고, 백성을 사랑하고 돌볼 규칙을 반포한 것은 주(周) 문왕(文王)이 고독(孤獨)에게 은혜를 베푼 것과 일치합니다. 죄인을 심리하는 일에 애를 써서 반드시 죽을 사람을 살게 할 방도를 구하였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길을 열어서 원통한 처지를 모두 씻어주었습니다. 수재나 화재로 집이 떠내려가고 무너진 백성은 모두 구조를 하였고, 가뭄과 홍수와 전염병으로 고통을 받으면 이내 조세를 감면하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창고를 열고 배로 실어오는 곡식도 부족하여 내탕고(內帑庫)의 재물을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고,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기 위하여는 신포(身布)와 호환(戶還)이 승려에게도 혜택이 미치게 하였습니다. 전복을 따서 바치는 수량을 감해 주어 바닷가 백성에게도 혜택이 미쳤고, 섣달에 바치는 제도를 폐지하여 깊은 산골짜기에도 은택이 미쳤습니다. 여름에 꿩사냥을 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편안하고, 가을에 바치는 게를 절반으로 줄여 바닷가 백성들의 부담이 가벼워졌습니다. 장물 취득과 탐관 오리를 엄격하게 다스리고 법을 잘 지키며 열심히 근무하는 관리를 발탁하는 등 한밤중까지 마음 쓰시는 것이 오직 백성들을 화합하게 하고 나라의 운명이 영원하기를 비는 데 있습니다.
의리를 천명하신 것으로 말하면 무인·기묘년의 화란의 뿌리를 찾고 병신·정유년의 역적들의 죄안을 바로잡았습니다. 살아남은 잔당들을 깨끗이 쓸어버리니 하늘과 땅의 법칙이 해와 별처럼 빛났습니다. 그리고 한 질의 《춘추(春秋)》가 있었기에 난신 적자가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다시 있게 해 준 은혜에 감격하여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의 현판이 빛나고 있고 백대의 풍교를 수립하기 위하여 영월(寧越)에 단종(端宗)의 제단이 우뚝합니다. 훌륭한 증직과 높은 품계가 신축·임인년의 누락된 충신들에게 두루 주어졌고, 추후에 배향하여 함께 제사지내기를 등자룡(鄧子龍)과 낙상지(駱尙志) 등 여러 사람들에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떳떳한 교훈을 심어놓으신 일은 천하 후세에 영원히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검소한 덕으로 말하면 평상시 곁에 있는 것은 서적뿐이고 평상시 입는 옷은 명주나 비단을 쓰지 않으며, 깔개와 요는 해어지는 대로 기워서 쓰고 의복은 여러 번 빨고 또 빨아서 입으십니다. 침전(寢殿)이 좁고 작은 것은 하우(夏禹)가 낮은 궁실에서 거처하던 일을 본받은 것이고, 음식을 줄여서 검소하게 한 것은 송(宋) 인종(仁宗)이 구운 양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보다 더하였습니다. 꼭 필요하지 않은 비용을 절감하여 내수사에 묵은 빚이 없어졌고, 경상비를 절약하여 호조에 찌지를 붙여 들이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면서도 털끝만큼도 국가의 경비는 쓰지 않았으며 변경 고을의 어려움에 마음을 써 해마다 바치는 산삼(山蔘)도 감면하였습니다. 나아가 머리에 다리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무늬있는 두꺼운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여 선대의 뜻을 이으신 덕이 더욱 빛나고 사치하는 습속이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세상의 풍습을 바로잡으신 일로 말하면 패거리를 만들어 나라를 병들게 하는 피해를 통탄하고 외척이 정치에 간여하는 폐단을 거울로 삼아 등극 초기에 가차없는 영단으로 이리저리 뒤엉킨 소굴을 쓸어버리고 도와주고 비호하는 풍습을 통렬히 배척하였습니다. 선비들을 높이 등용하여 조정이 맑고 깨끗해졌고 어진이를 조건없이 등용하여 천지의 화한 기운이 합해졌습니다. 선비를 접견하는 때가 많아지자 환관과 궁첩들은 저절로 멀어졌고 제왕의 표준을 세워 교화가 이루어지자 남과 나 사이의 간격이 없어졌습니다. 당파에 치우침없이 공평하니 온 나라가 한집안처럼 되었습니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구분을 분명히 하자 백성들의 지향이 정해졌고, 서얼의 길을 터주는 정사를 시행하자 세상에 버려진 인재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랑(銓郞)의 자리를 폐지하여 벼슬을 얻기 위해 청탁하는 풍속을 억제하였고, 선비의 추향을 바로잡아 과거에 대한 규정을 엄격하게 하였습니다. 인재를 추천하는 법을 정비하여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도 모두 등용되고, 선을 표창하고 악을 징계하는 전교를 거듭내려 효제(孝悌)가 권장되었습니다. 그 교화가 미치는 곳에 나라 전체가 따라서 감화되었으니 아, 훌륭합니다. 온 나라의 신민들이 아마도 피부와 골수에 젖어들도록 감격하고 진심으로 흠앙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는 너그러움과 인자함이 천지와 짝이 되고 영걸스럽고 명철하기는 해와 달과 같습니다. 옥안(獄案)은 언제나 가벼운 쪽으로 처결하기에 뱀같은 미물들까지도 모두 감화되었고, 세신(世臣)은 반드시 곡진히 보호해 주기에 비와 이슬 같은 은혜가 두루 흡족하였습니다. 내 마음을 미루어 진심으로 남을 대하기에 딴마음을 품어 불안했던 자들도 편안해졌고, 드러나지 않은 미세한 원통함도 모두 살펴서 억울한 한을 꼭 풀게 하였습니다. 간한 말 때문에 조정에서 죄를 받은 이가 없고, 인재를 적재 적소에 썼기 때문에 한 가지 재주가 있는 사람도 반드시 기용되었습니다. 온 백성을 포용하여 감화시키는 바람에 자신의 삶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는 신들만이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백성들의 말이며 또 백성들의 말일 뿐만 아니라 하늘과 조상들이 참으로 이를 굽어 살피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큰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고 반드시 장수하며 반드시 이름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신하된 자로서야 정성을 다해 호소하여 겸양만 하시는 전하의 마음을 기필코 되돌리고 오랫동안 쌓였던 작은 정성을 폄으로써 큰 공덕의 만분의 일이나마 천양하려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나라의 경사가 겹쳐서 장차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신들이 이 기회에 이 청을 하는 것은 사실 인정과 사리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성상으로서도 기쁨과 경사를 기념하는 마음에서 어찌 애써 여정을 따라 옥책을 함께 받으심으로써 모두 기뻐할 수 있는 방도로 삼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다 윤허를 내리시어 온 나라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 내년의 경사는 우리 나라에 처음 있는 일로 훌륭하고도 훌륭한 경사이다. 나 소자가 우리 자전을 섬기기를 마치 선왕을 섬기듯이 하고 있는데 선왕 계해년·갑자년에 이미 거행하였던 성대한 의식을 오늘에 이어서 하면 되겠다. 또 우리 자궁의 연세도 꼭 육순이 되는데 소자를 낳아 기르시고 자자손손 경사가 계속되어 이 나라 억만 년 무궁한 복록을 열어 놓으셨다. 자전과 자궁의 좋은 경사가 이 해에 모두 겹쳤으니 만세를 불러 축하하고 축배를 올려 만수무강을 빌며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로 아름다운 덕을 천양하는 것은 바로 천리와 인정으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몇 년을 손꼽아 밤낮으로 기다렸으며 간혹 곁에서 부드러운 낯빛으로 기쁨을 표시하는 잔치를 베풀고 정성을 바칠 방도에 대하여 구구절절 말씀을 올리기를 여러 번 하였으나 자전의 마음은 옛날을 슬퍼하여 지나칠 정도로 굳이 거절만 하였는데 이러한 때에 경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허락을 얻어내는 데 큰 힘이 되겠다. 이렇게 일제히 호소한 내용을 가지고 다시 가서 마음을 애써 돌리시도록 노력해 보겠다. 그리고 경모궁에 존호 올리는 의식은 이해가 오면 그 예를 거행하려던 것이 소자가 두고두고 가져왔던 숙원이기도 한데 이렇게 뭇사람들이 고마운 마음으로 청하는 데야 그 청을 따르는데 있어 어찌 다시 아뢰기를 기다리겠는가. 다만 존호를 의논하고 날을 받는 일은 당연히 자전의 허락을 받은 뒤에 해야 될 것이다.
나에게 존호를 올리겠다고 청한 일에 있어서는 설마 경들이 임방(林放)보다야 못하겠는가. 내가 연석에서 한 말은 사람마다 다 아는 바인데 경들이 알면서도 그 말을 한다면 이는 나를 믿지 못한 것이고, 믿고서도 말하였다면 이는 나를 알지 못한 것이다. 대체로 존호를 올리는 제도가 삼대(三代)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하나, 근거할 만한 의의가 있고 논리 정연한 예문도 있어 명철한 임금들이 다들 그렇게 거행하고 또 그 제도를 수명했던 것이다. 그것은 위로 하늘의 사랑에 보답하고 뭇백성의 뜻에 따라 태평 성대의 아름다운 기상을 빛내기 위한 것이었고 또 우리는 우리대로 그 제도에 관한 규정과 법이 있어 내가 일찍이 선조에게 정성껏 간청하여 윤허를 받은 바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매우 부덕하고 무능하여 모든 나라 다스리는 법과 정치 규모에 있어 선조의 크고 훌륭한 업적에 비하면 만만번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선조의 겸양한 덕으로써도 애써 뜻을 굽혀 들어주었던 일을 내가 어찌 감히 독자적으로 경들에게 어기겠는가. 경들의 요청을 따르는 것도 선조의 뜻을 따르는 일 중의 하나인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뜻은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 나의 말을 듣고서도 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결코 인인 군자(仁人君子)가 차마 할 노릇이 아닌 것이다.
예는 물론 인정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의리에 의하여 예가 제재를 당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단지 남들이 숭봉(崇奉)이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도 숭봉이 될 수 없다고 해서 첫째가는 의리를 공연히 경전에 기록해 놓기만 하는 것은 감히 하지도 않을 뿐더러 차마 할 수도 없다. 천년 뒤에나 아마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가 제재를 당해야 할 처지이면 예를 제재하고 인정에 따라야 할 일이면 인정을 따르는 것이다. 나를 이해하고 내 뜻을 체득하여 나로 하여금 처음에 품은 뜻을 이루게 하는 것이 바로 임금의 뜻을 따라 아름다운 결실이 있게 한다는 일인 것이다."
하였다.
11월 20일 기유
빈청이 아뢰기를,
"신들이 다행히도 천 년에 있기 드문 경사를 만나 감히 온 나라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청하는 말을 올리고 머리를 모아 우러러 바라면서 허락의 말씀을 공손히 기다렸습니다. 그렇다가 비답을 받고 보니 지시하신 말씀이 정녕하여 경모궁에 옥책 올리는 일은 이미 윤허를 하시고, 자전과 자궁을 위한 성대한 의식에 대해서도 애써 마음을 돌려보겠다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신들은 이를 받들어 읽고 나서 너무 기뻐 감축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신들이 세월을 두고 마음에 잊지 못했던 문제를 이제야 비로소 호소한 것은 우리 성상의 겸양의 덕으로써도 신들의 말을 옳지 않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역대 전례를 수명하지 않을 수 없고, 조종(祖宗)의 옛 사례를 계승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늘의 보살핌에 대해 보답하지 않을 수 없고 뭇백성들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등은 해와 달처럼 훤히 굽어 살피시어 미진한 점이 거의 없으나 성상의 하교 중에 이르신 바 ‘남들이 말하는 숭봉(崇奉)이라는 것’ 이하 몇 구절에 대해서는 신들이 받들고 세 번 거듭 읽으면서 감격하고 송구스러웠으며 이어서 높이 우러러 찬송하였습니다.
아, 우리 성상의 그와 같은 의리는 참으로 천지에 세워놓아도 어긋나지 않고 백세 후의 성인이 나오더라도 옳다고 할만한 의리로써 오늘의 신자들이야 누군들 대성인이 지적하신 정미한 의리에 대하여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일의 면모에는 각기 그 본래의 처지가 있고 의리도 경우에 따라서 맞게 적용해야 하는데, 비록 끝없는 효성으로 인하여 성상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만 하늘의 보살핌에 대하여 보답할 것인가의 여부와 뭇사람들의 뜻을 당연히 따를 것인지의 여부, 조종이 행한 옛 사례를 따를 것인지의 여부, 역대 전례를 수명할 것인지의 여부를 살필 뿐입니다. 온갖 이치에 훤하신 우리 성상으로서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저울질해보신 바가 있을 것인데 신들이 어떻게 감히 다시 번거롭게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선대왕이 지난 경신년136) 에 마음을 돌려 존호를 받은 것은 자전의 마음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었고, 인원 왕후(仁元王后)가 정묘년137) 에 감정을 억제하고 옥책을 받은 것도 성상의 효성에 감동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경사도 그때와 같은 경사이고 예로 보아도 마치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 같아 이 시기에 이 청을 더더욱 조금도 늦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조종이 이미 행한 전례를 상고하고 신민들이 받들어 축원하는 마음을 살피시어 빨리 밝은 명을 내리어 성대한 의식을 훌륭히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승지 홍의영(洪義榮)을 보내 그 아뢴 글을 빈청으로 되돌려보내고 이어 유시를 내리기를,
"어제 연석에서 한 전교를 듣고 어제 아뢰는 글을 올린 것은 아주 보통의 생각밖의 일로써 신하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오늘의 습속에서는 바라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 경들마저 나를 어떻게 그렇게 대우할 수 있단 말인가. 어제 내린 비답에 대해 말로 표현 못한 숨은 뜻을 경들은 이해하리라고 여겼다. 지금 내가 굳이 거절하는 것은 겸손함 때문이 아니고 따로 지켜야 할 의리가 있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는 옛 명철한 임금들이 다 그렇게 했던 것을 인용하기도 하고, 가까이는 선왕께 간청하여 허락을 얻어낸 지난 일을 들추어내기도 하여 그 전례가 근거가 있고 절차가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리고는 그 아래에서 비로소 나만은 받을 수 없다는 내 뜻을 말하였던 것이다. 가령 예는 본디 인정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 것은 상대를 높이는 전례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의리로 예를 제재한다고 한 것은 정은 비록 끝이 없지만 예는 두 가지 원칙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말하는 숭봉 운운한 것은 위의 ‘인정에 따라 만들어진다.’라는 문구와 상관된 말이고, 내가 말하는 숭봉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과, 첫째로 꼽는 의리 운운한 것은 아래의 ‘의리가 예를 제재한다.’라는 문구와 상관된 말이다. 또 예를 제재해야 될 경우에는 예를 제재하고 인정에 따라 해야 될 경우에는 인정에 따라야 한다고 두 마디로 결론을 내린 것은 내 생각에는, 그보다 더할 수 없이 높이는 전례에 있어서는 비록 의리에 입각하여 인정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보다 한 등급 아래의 일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모궁에 있어서는 이미 올린 존호 위에 또 올려도 좋지만 내 몸에 있어서는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저 세상에 계시는 어버이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이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보려는 것이다. 무릇 그렇게 해야지만 인정으로나 예로나 큰 결함이 없지 않을까 해서이다. 몇 해 전 내 화상을 그릴 적에 표제에 으레 존호를 쓰게 되어 있는 관계로 조정 신하 중에 혹자는 존호를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그 일을 감독하는 대신에게 이렇고 저렇다 말했는데 그때 그 말이 바로 어제 비답 내에 숨어 있는 뜻인 것이다. 그 대신은 내 말이 떨어지자 나의 뜻을 받들어 다시는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그 대신이 나를 위하는 마음과 나를 대하는 정성이 어찌 경들만 못하여 그러했겠는가. 경들이 나의 팔다리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비록 나의 뜻을 미리 받들어 이런 때에 나의 마음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결코 허락하지 않을 일인 줄 뻔히 알면서 예를 갖추어 요청하여 나로 하여금 고민에 빠지게 하고 고질로 된 가슴 막히는 병이 시기를 타 일어나게 만들고 있으니 이게 무슨 마음인가.
오늘 빈청이 청한 일이 그 얼마나 중대한 경사이며 전례인가. 더구나 나라의 체면이 걸려 있는 문제이니 더욱이 한결같이 정성을 쌓아 자전과 자궁의 마음을 돌리기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 자전과 자궁에게 청할 일들을 다시 써서 올리라."
하였다.
11월 21일 경술
빈청이 아뢰기를,
"지금 자전의 연세가 50세가 되고 자궁의 연세가 60세가 되었으니 이는 실로 우리 나라에 처음 있는 일이며 역사에 보기 드문 큰 경사입니다. 존호를 올리고 잔치를 열어 하례하는 모든 의식 절차에 대해 덕을 찬양하고 빛나게 꾸밀 방법을 서둘러 정하여 후세의 자랑이 되게 하는 일은 비단 신들의 요청만이 아니고 바로 온 나라의 신민들이 바라고 있는 바이며, 온 나라 신민들이 바라는 일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성상께서 손꼽아 기다리면서 온화한 낯빛으로 여러 번 말씀드려 온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자전과 자궁께서 옛일을 슬퍼하시고 지나치게 겸양만 하여 위로는 전하의 효성을 펴지 못하고 아래로는 뭇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답답해질 뿐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께서 부모의 연세를 알고 있는 효성과 날짜 가는 것을 아끼는 정성으로 애써 마음을 돌리도록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셨을 것인데 신들의 졸렬한 말과 천박한 정성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마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아직껏 윤허의 말씀이 내리지 않으시니 사실 너무나 불안 초조하고 답답합니다.
더구나 우리 경모궁에 존호를 올리는 일은, 자전의 승락을 받은 뒤에 날을 정하라는 전교를 이미 받았으니 전하의 빛난 효성과 뭇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는 것을 보아서라도 잠시도 지연시킬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 자전과 자궁이 아무리 겸양하시더라도 그것을 생각하시면 아마 신들이 다 말하기 이전에 틀림없이 마음을 돌리실 것입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좋은 경사가 한 해에 한꺼번에 겹쳐들고, 큰 기쁨을 다행히 천 년 만에 만나게 되었으니 시냇물 같이 좋은 운이 밀려오고 국가의 미래는 태산 반석처럼 길이 공고할 것입니다. 이런 때에 큰 기쁨을 떨쳐 일으키고 성대한 예를 거행하면서 전하는 장수를 비는 술잔을 올리고 원손은 때때옷 차림으로 춤을 추어 넘쳐나는 화기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게 하면 하늘에 계시는 영령들께서도 아마 굽어보시고 기뻐할 것이니 이 어찌 성대하지 않으며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어제 승지가 전하는 전하의 속마음을 펴보이신 간곡한 전교를 받고는 머리를 맞대고 가슴이 막히어 땅에 엎드린 채 낙심 천만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서로 이끌고 물러나왔는데 하찮은 정성이나마 드러낼 길이 막히고 보니 신하로서의 모양이 말이 아닙니다. 지금 또 신들이 불충하고 보잘것 없어 만약 자전과 자궁을 위해 응당 거행해야 할 전례에까지도 정성과 본분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그 죄는 더욱 속죄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밤이 다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감히 이렇게 거듭 호소하니 전하께서는 위로 자전께 여쭙고 아래로 뭇 신민들의 청을 따라 떳떳한 전례에 의하여 옥책을 경건히 올리고 이어 하례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하늘의 영광된 뜻에 보답하고 큰 경사를 빛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렇게 경사스러운 때를 만나 이 정성을 펴는 길은 오로지 축하를 드리고 잔치를 열며 존호를 올리는 세 가지 길이 있을 뿐인데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일에 대하여 자전께서는 겸양만하시지만 혹시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우선은 뜻을 따르기에 힘쓰고 굳이 간청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번거롭게도 경들의 말을 빌려 거기에 빙자하여 해보려고 하는데 내 정성이 부족한 것이 부끄럽고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자궁의 허락을 얻기는 더욱 어려워 내 아무리 상냥한 얼굴과 상냥한 말을 써도 자궁을 위로해 드릴 길이 없으니 빈청에서 아뢰고 뜰에 모여 호소한다 해도 자궁의 마음을 어떻게 돌릴 것인가. 그런데 경들은 또 이렇게 청하고 있으니 더욱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하였다.
빈청이 재차 아뢰자, 비답하기를,
"자전의 허락을 받아야지만 자전도 이렇게 허락했다는 뜻으로 다시 자궁께 말씀을 드려서 마음을 돌리시도록 노력해 볼 것인데 자전이 아직도 허락을 않고 있으니 내 마음이 더더욱 답답하다."
하였다.
빈청이 세 번째 아뢰자, 비답하기를,
"경들과 뭇백성들의 뜻을 막기 어렵다는 뜻으로 여러 차례 말씀을 올렸으나 자전의 마음은 겸손하고 외경하여 쉽사리 듣지 않으실 것 같다. 지난일들과 옛날에 있었던 일들만 생각하시며 슬퍼할 뿐만 아니라 세 가지 의식을 동시에 거행하는 것은 더욱이 불가한 일이라고 하시면서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자전의 말씀이 이러한데 자궁의 마음이야 더더욱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지금 신시(申時)가 되어가는데도 아직까지 지체하면서 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빈청이 네 번째 아뢰자, 비답하기를,
"자전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 단지 정성이 부족해서라면 경들이 말한 대로 백관들 모두가 나서서 자전과 자궁에게 함께 호소해 보자는 의논은 실로 국가의 체면과 그 행사를 중히 여기는 의미에서 맞는 말이다. 그리고 또 국가 제도를 상고해 보아도 그 진행 절차가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 일을 점점 더 크게 벌리고 뭇신민들도 갈수록 더 답답해 하면 자전의 마음이 아무리 굳다해도 어찌 조금은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다시 그런 내용으로 침선(寢膳)의 여가에 조용히 말씀을 올려보아야겠다."
하였다.
11월 22일 신해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었다.
"신들이 종일토록 빈청에서 아뢰었지만 정성이 부족하여 자전과 자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였는데 뭇신민들의 심정은 더욱 답답해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모두 나와 일제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전께서는 말없는 내조로 우리 성상을 보호하였으니 주(周)나라로 치면 태사(太姒)이고 송(宋)나라로 치면 선인 황후(宣仁皇后)로서 그 높고 훌륭한 공덕을 역사에 이루 다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궁께서는 전하를 낳으시어 우리 나라의 무궁한 상서를 열었고 또 원손을 두시어 나라의 기틀을 태산 반석 같이 공고히 하였습니다. 큰 복은 남모르게 두루 받았고 연세는 더욱 높아지셨으니 아, 훌륭합니다. 이는 모두 하늘에 계시는 조종의 영령이 도우시고 성상의 지극한 효성이 감동을 준 것으로 이 나라의 모든 생명을 가진 무리이면 그 누군들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고 훌륭한 행적을 묘사하여 옥돌에 새겨서 영원토록 위대한 공렬을 전하고 저 산등성이처럼 만수 무강을 비는 의식을 올리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실로 천리로 보거나 인정으로 보거나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인원 왕후의 겸양한 덕으로도 뭇신민들의 뜻을 차마 어기지 못하였고 우리 선왕 같이 어버이 뜻에 순종하는 지극한 효성으로 정성을 다해 결국 마음을 돌리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조에 있었던 일들을 상고하면 참으로 태평 성대의 훌륭했던 일들로써 이를 역사에 기록하고 악부(樂府)에 올렸는데 그것은 자전과 자궁께서 직접 보고 들었던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겸양의 덕만을 고집하여 당연히 거행해야 할 전례를 끝까지 거절할 것입니까.
생각하건대 침선의 여가에 완곡한 말로 아뢰는 등 틀림없이 모든 방법을 다 쓰셨을 것이니 인자하신 우리 자전과 자궁께서도 왜 감동을 받고 마음을 돌려 따르려고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성대한 의식을 조금도 지연할 수 없다는 것과 뭇 백성들의 뜻을 끝까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여 자전과 자궁께 말씀드리고 분명한 유지를 내리소서."
영의정 홍낙성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에 모여 왕대비전에 호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비 전하께서는 덕이 주나라의 태사와 같아서 아름다운 명성이 일찍이 선왕조 때에 드러났고, 문왕의 어머니 같은 위치에서 사왕(嗣王)을 가르치신 공이 현저합니다. 지난 을미년138) 과 병신년139) 에는 국가의 대책을 말없이 도와 전하를 보호하는 큰 공을 남기시고 병신년과 경자년140) 겨울에는 언문 교서를 반포하여 화란의 뿌리를 제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륜 강상이 그 때문에 틀이 잡히고 나라의 기틀도 그 때문에 영원히 공고해졌습니다. 숨은 공은 멀리 송(宋)나라 선인 황후(宣仁皇后)를 능가하고, 인자한 덕화는 인원 왕후(仁元王后)와 똑같으니 온 나라 신민들이 모두 대비의 그와 같은 덕을 우러러 받드는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순(舜)과 문왕(文王) 같은 효성으로 궁전에서 기쁨을 누리시도록 받들면서 천승(千乘)의 예로 봉양하고 날마다 세 번 문안하는 정성을 바치므로 두 궁(宮) 사이에 화기가 충만하고 20년 동안 큰 복록이 쉼없이 불어났습니다. 하늘과 조종(祖宗)이 묵묵히 돕고 보살펴서 왕실을 빛낼 큰 경사를 주시고 세손의 재롱을 보는 즐거움을 주시어 우리 나라에 무궁한 아름다움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해는 갑인년이 돌아오고 있고 연세는 50이 꽉차게 되었는데 모습은 더더욱 건강하시기 때문에 우리 성상의 날을 아끼는 효성으로 봄날 같은 자전의 사랑에 보답할 정성이 더욱 간절하여 장차 만수 무강을 비는 술잔을 올리고 존호를 새긴 옥책을 올리며 세 번 만세를 부르려고 합니다. 이는 실로 전하의 큰 효성이자 우리 나라의 떳떳한 전례입니다. 더구나 선왕께서 1백 세가 되는 해이기에 천 세를 비는 신민들의 바람은 배나 더 간절하니, 비단 자전에게만 빛이 있는 일일 뿐 아니라 전하에게도 크게 위안이 될 일이기에 신들이 외람되이 여섯 번을 아뢰었으나 한 번의 허락도 받지 못하여 더없이 중대한 의식이 점점 지연되고 한 목소리로 청하는 뭇사람들의 뜻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외람됨을 무릅쓰고 서로 이끌고 대정(大庭)에 나와서 일제히 호소하는 것이니 대비 전하께서는 뭇사람들의 마음을 굽어 살피시고 특별히 허락하는 윤음을 내려서 하늘이 주신 영광에 보답하고 전하께서도 만족스럽게 여기게 하소서."
하니, 왕대비가 언문으로 비답하기를,
"내가 무슨 세상일에 대해 생각이 있겠는가. 더구나 잔치와 존호는 더욱 가당치 않지만 대전(大殿)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되고 자궁(慈宮)이 함께 받고자 하니, 이도 나라를 위한 것이지 나의 몸은 돌볼 겨를이 없다. 명년은 바로 자궁의 환갑이 되는 해이자 대전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되는 해이니 나라의 큰 경사가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경들이 명년에 가서 오늘 청한 대로 청하면 내 그때 가서 따를 것이다. 그래야지만 자궁도 잔치와 존호를 받을 것이고 대전도 등극 20년을 기념하는 하례를 받을 것인데 내가 어떻게 굳이 사양하겠는가. 경들은 그리 이해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에 나와서 혜경궁(惠慶宮)에게 말씀을 올리기를,
"지금 궁정에서 일제히 올리는 말씀은 곧 온 나라 백성들의 한마음입니다. 빈청에서 이미 여섯 차례나 아뢰었고 성상이 애써 청하신 말씀도 더욱 간절하였으며 뭇신하들의 기대도 더없이 절실하였으나 지금 4일이 지났는데도 한 마디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뭇신하들의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은 그만두고 우리 성상이 기대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하여 다시 인정과 사리로 보아 당연하고 국가의 전례로도 당연히 거행해야 한다는 것을 들어 서로 이끌고 인자한 자궁 앞에 나와 말씀올리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자궁께서는 여자 가운데 요(堯)·순(舜)이요 왕실의 태임(太任)·태사(太姒)이십니다. 경애하고 유순한 덕은 선왕께서 그 독실함을 아름답게 여겼고 정숙하고도 속 깊은 교화는 백성들이 그 교훈에 감복하고 있습니다. 너무 겸양하여 왕실의 승용 수레와 말을 이용하지 않으셨고,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손수 길쌈도 하셨습니다. 마침내 인자한 덕은 궁중에 두루 넘치고 자손을 두시는 경사도 보셨습니다. 전하를 낳아 길러서 만년 공고한 기반을 닦으시고 장락궁에 계시면서 온 나라의 모자람 없는 봉양도 받으시고 계십니다. 그 상서는 자손으로 이어져 왕위를 계승할 자손을 두었습니다.
우리 원자는 자질이 비범한데다가 점점 자라면서 때때옷 차림으로 무릎을 돌며 춤추어 재롱을 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궁중에는 화기가 가득하고 종묘 사직은 큰 복록이 끝이 없으니 이는 우리 나라 4백 년 동안 처음 있는 경사로써 하늘과 조종이 우리 자궁의 지극한 덕과 성상의 지극한 효도를 보살피고 도우셔 큰 복을 내리시고 다시 만수 무강을 누리게 한 것입니다. 해는 어느덧 동지가 되었고 연세는 육순이 되셨으니 연세가 높으면 높을수록 길이길이 봉양하고 싶은 성상의 효성으로서야 비록 날마다 송축(頌祝) 의식을 거행하고 해마다 장수를 비는 술잔을 올리더라도 가는 날을 아끼는 마음에 오히려 부족을 느끼고 어버이를 현양하려는 마음에는 시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덕을 천양하고 좋은 상서를 두드러지게 기념하는 그 일만은 인정과 천리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일로써 온 나라의 신민들이 기뻐하며 고무되지 않는 자가 없고 날마다 성대한 의식을 시원스럽게 보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뭇사람들의 뜻도 막을 수 없지만 우리 성상이 손꼽아 오늘을 기다린 지가 모두 몇 년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궁의 자애스런 덕으로도 다소는 상대의 심정을 이해하시고 위안이 되도록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뭇신하들이 매우 어리석고 미욱하지만 허락을 주저하시는 훌륭한 뜻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효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열성조의 옛 관례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전도 천양하는 예를 함께 거행하기를 원하였고, 경모궁에 존호 올리는 시기도 승락을 기다려 날을 잡기로 되어 있는데 더욱 겸양의 덕만 내세우실 것이 아니라 빨리 성대한 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기수 가의 푸른 대나무를 들어 해와 같은 덕을 상징하고 이어 북두의 술잔을 들어 만수 무강을 축원함으로써 하늘이 내신 성상의 효성을 빛내고 전에 일찍이 없었던 국가 경사를 기념하여 태평 성대가 만 세나 이어질 기상을 보인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성상의 정성어린 간청에 감동하여 자궁께서도 틀림없이 마음을 돌리실 것이므로 아랫사람들의 천박한 정성과 어눌한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마는 성상의 간곡한 효심을 받들어 뜰을 메워선 뭇신하들의 심정을 올리기 위하여 이렇게 모두 나와 거듭 호소하는 것입니다. 꼭 허락을 내리시어 성대한 의식이 빨리 거행되도록 하소서."
하니, 혜경궁이 언문으로 비답을 내리기를,
"내 입장에서 오늘 청하는 내용을 듣고 나니 더욱 마음 잡을 길이 없구려. 그저 자전의 거룩한 뜻과 대전의 지극한 효성에 감격할 뿐이라오. 경들은 그리 이해하시구려."
하였다.
정청(庭請)한 백관들에게 윤음을 내렸다.
"오늘 천 년에 한 번 있는 경사를 만나 만수 무강을 비는 축원을 올리고 날을 아끼는 효성을 펴게 되었다. 하례 잔치를 여는 것과 존호를 올리는 것은 동일한 일로써 두 가지를 동시에 병행하는 것이 나 소자가 마음으로 지극히 원했던 바였는데 차례로 허락을 받았으니, 소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다행인 것이다.
대체로 모든 일에 있어 마음이 제일이지 의식 절차는 사실 모두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한편 기쁘고 한편 두려운 마음으로 항상 끝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성대하게 꾸미는 절차쯤은 오히려 힘을 다해 최고로 할 생각이 안 드는 것이다. 명년에 한 가지 경사 의식을 거행하고 또 내후년에 한 가지 경사 의식을 거행하여 해마다 해마다 하면서 어느 해고 거행하지 않는 해가 없이 백 년 천 년 만 년 억 년 하늘과 땅이 끝이 없듯이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 소자의 지극한 소원 중의 소원이며 큰 행복 중의 행복인 것이다.
나는 또 듣건대 어버이를 섬기는 방법은 어버이의 뜻을 받드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어버이를 존경하는 도리로는 어버이가 하시던 일을 이어가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다. 자전의 말씀이 은근하고 간곡하신데 내가 자전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고 오직 자전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뜻을 받드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삼가 선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상고해 보면 선대왕의 춘추 50세였던 계해년 정초에 경사를 축하하는 하례를 올렸고 그 이듬해 갑자년 춘추 51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서루(西樓)에서 시첩을 쓰고 정전에서 잔치를 올렸으며 인원 왕후의 춘추 60이 되던 병인년 정초에 경사를 축하하는 하례를 올리고 그 이듬해 정묘년 환갑 때에 비로소 존호를 올리고 헌수의 술잔을 받으셨다. 내년 갑인년은 인원 왕후의 병인년 또는 선왕의 계해년과 같은 해이고 내후년 을묘년은 인원 왕후의 정묘년 또는 선왕의 갑자년과 같은 해이다. 지금 자전의 오순 행사와 자궁의 육순 행사를 인원 왕후의 육순 때나 선왕의 오순 때에 행한 의식과 똑같이만 거행한다면 나는 그것이 바로 선왕이 하셨던 일을 이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년 갑인년 정월에 자전의 오순과 자궁의 육순 경사를 축하하는 의식을 거행할 것인데 먼저 그 행사에 관한 것을 종묘에 고하고 의식을 마친 뒤에는 온 나라에 대사면령을 반포하고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뽑을 것이다. 그리고 자전과 자궁께 잔치를 올리고 존호를 올리는 의식과 경모궁에 존호를 올리는 일은 예조의 관원이 내후년 을묘년에 분부를 받아서 하도록 하라. 을묘년은 바로 소자가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되는 해이니 정전에 나아가 모든 신하들의 하례도 받을 것이다. 선왕조 계해년에 행한 일을 그대로 이어하고 오늘 자전의 말씀대로 뜻을 받드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원하는 바이며 다행스러운 일이니 조정 백관들은 그리 알도록 하라."
대신과 예조 당상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영의정 홍낙성 등에게 이르기를,
"조금 전에 문자로써 분명한 유시를 내린 바 있으나 날을 아끼고 만수 무강을 비는 내 마음, 내 정성으로야 모든 기쁨을 기념하는 행사 방법에 있어 무슨 한량이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 기쁘고 한편 두려운 마음은 더욱 무어라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 경사를 축하하는 행사를 선왕조에서 했던 것과 하나하나가 꼭 맞도록 명년에는 계해년·병인년 전례대로 하고 내후년에는 갑자년·정묘년에 했던 의식대로 하여 해마다 여유있게 진행해 가면 그것이 더욱 경사와 기쁨을 늘려나가는 방도가 되지 않겠는가."
하니, 낙성 등이 아뢰기를,
"그저께 삼가 연석에서의 전교를 보고 우리 전하의 겸양의 덕에 대하여 신들은 흠앙(欽仰)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또 언급은 없으셨지만 담고 계시는 성상의 뜻도 왜 짐작이야 못하겠습니까. 다만 신들의 정성이 천박한 소치로 축복하고 싶어하는 뭇 신민들의 뜻을 끝내 조금도 펴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게 너무 답답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어찌하여 또 그 말을 꺼내는가. 빨리 그만두라. 그날 비답을 내릴 때도 가슴 치미는 증세가 약속이나 한 듯이 발작했었는데 그 일만 들먹이면 자연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일 마음속에 굳게 간직한 그 무엇이 없다면 조종조에서 해오시던 일을 왜 꼭 내 대에 와서 행하지 않으려고 하겠는가. 그리고 또 경들에게 한 마디 할 말이 있는데 내가 비록 받을 만한 위치가 된다고 하여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경들이 빈청에서 아뢴 문구 중에, 내가 당색을 잘 조정했으므로 그것이 찬양 거리가 된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부족함을 느꼈다. 지금 이 자리만 보더라도 백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경들이 하는 일은 옛사람들에 비하여 서로 존경하고 협동하는 기풍이 많이 모자란다. 경들을 이처럼 만들어 놓았는데도 당색을 조정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한 문제만 가지고도 내가 굳이 거절하는 조건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경과(慶科)를 보일 때 증광시(增廣試)로 보일 것인지 혹은 정시(庭試)로 보일 것인지 분부를 구하니, 상이 대신들의 의견을 묻자 다 정시로 보여야 된다고 말하였다.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정시를 보이면서 초시(初試) 제도를 두는 것은 인재를 선발하는 데는 도움이 없고 다만 시골 선비들을 오랫동안 서울에 머물게 하는 폐단만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초시는 안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그날로 합격자 발표를 하면 그 역시 인재 발굴을 위하여 과거를 실시하는 본의가 아니므로, 고시관으로 하여금 시권(試券)을 전부 고시하게 하여 설사 하루 이틀이 걸리더라도 구애받지 말고 오직 인재 발굴에만 마음을 쓰게 한다면 폐단만 있고 보탬이 없는 초시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왕위에 오른 뒤로 과거에 대한 규정을 개혁하지 못하였으나 경과의 정시에서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한 일은 알성시(謁聖試)를 제외하고는 아직 한 번도 시행한 적이 없었고 혹간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별도로 논하여야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경과에서도 당연히 초시를 실시하여 인재 선발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영부사의 말을 들으니 나의 뜻에 꼭 맞는다. 분잡한 폐단을 없애고 과거 규정을 엄격하게 하기만 하면 그것이 간편한 방법이기도 하고 더 나은 인재를 발굴하는 방법이기도 하여 이모저모로 편리할 듯하다. 더구나 지금 경사를 함께 나누는 이때 의당 융통성이 있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알성시를 보인 지가 무척 오래되었으므로 시골 선비들이 모두 올라오는 이때에 겸하여 보였으면 하는데 과거 명칭은 춘당대(春塘臺)로 정하고 초시가 없는 정시로 하여 경사를 함께 나누는 뜻을 보일 것이며 서울에서 오래 머무르는 폐단도 없애도록 하라.
일단 그날로 합격자를 발표하지 않기로 하면 곧바로 전시에 응시할 사람과 정시 회시(會試)에 특별히 응시할 유생 몇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시험을 보인 다음 합격자 명단 끝에다 써넣게 하라. 무과(武科)도 여기에 준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3일 임자
심봉석(沈鳳錫)을 동복 현감(同福縣監)으로 특별히 보임하였다. 봉석이 지평으로서 사헌부에 나왔다가 전계(傳啓)도 하지 않고 나가자 상이, 대간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하여 특명으로 외직에 보임시킨 것이다.
상이 예조 판서 민종현에게 이르기를,
"대신이 시골 선비들이 서울에 오래 머무는 것은 폐단이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번 경과에서 초시를 제외하라고 하기는 하였으나 시권 고시까지 꼭 당일로 끝내야 할 까닭은 없다.
대체로 당일에 급제를 발표하는 과거가 빛이 나고 보기에도 좋지만 갑작스럽고 바쁘게 진행되는 바람에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선발하려는 본의와는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내 그래서 신중을 기한 것이다. 또 과거장에서 사정을 두는 폐단이 근래에는 전처럼 그리 심하지는 않다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다는 보장도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응시자로 말하더라도 처음으로 임금을 만나는 날에 그렇게 사정을 쓴다면 어찌 낯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뒷날 경상(卿相)이 모두 거기에서 나올 것이니 뛰어난 인재를 발굴하는 방법을 더욱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11월 24일 계축
차대하였다.
탐라 어사(耽羅御史) 심낙수(沈樂洙)와 접위관(接慰官) 윤제동(尹悌東)을 불러 접견했는데, 낙수는 하직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고, 제동은 다녀온 보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상이 낙수에게 이르기를,
"백성의 재물을 탐하고 장물을 취득한 자를 밝혀내는 일 외에도 섬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경내를 돌면서 두루 살피며, 문무 인재를 시험보여 뽑는 등 일에 대해 여러 가지 마음을 다하여 거행하여 특별히 파견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선왕조에서도 한억증(韓億增)의 고사(故事)가 있기에 우선 어사로 파견하는 것이니 이러한 내 뜻을 널리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제주 어사 심낙수에게 향과 축문을 주어 한라산 산신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그 의식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있는 주현명산대천의(州縣名山大川儀)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제주 백성들에게 윤음을 내렸다.
"아, 너희 제주에 사는 모든 백성들아! 물길과 뭍길 몇천 리나 되는 곳을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길을 내왕할 때 걸핏하면 몇달이 걸리니 너무나도 멀다.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이 멀리 있다고 혹시라도 소홀히 여긴다고 생각하는가. 먼 곳에 살아도 나의 백성이며, 가까운 곳에 살아도 나의 백성이니 똑같이 나의 백성이다. 어찌 멀고 가까운 차이가 있겠는가마는 잊지 못하는 마음이 때로는 가깝게 사는 백성보다 먼 곳에 사는 백성에게 더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렵고 괴로운 생활을 자주 들을 길이 없는데다 듣기만 하면 곧 마음이 쏠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귤이 소반에 올라오면 애써 재배한 너희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고 말 떼가 궁궐 뜰에 오면 분주하게 기른 너희들의 고초를 상상하는 것이다. 언제나 북풍이 쌩쌩 불어오고 함박눈이 펄펄 날리면 공물 실은 배가 염려되어 정신이 초롱초롱해지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너희들은 너희들을 잊지 못하는 나의 이 마음을 아는가, 모르는가?
내가 듣건대 섬의 백성들이 근검하고 순박하여 즐기면서도 늘 자신을 경계하는 예스런 풍속을 다른 고을은 따라갈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한다. 노인성(老人星)이 땅을 비치고 하늘에 빛나 얼굴이 누르고 등이 굽은 노인들이 마을마다 부축을 받으며 술에 취하여 북두칠성을 바라보고 서울을 향해 앞을 다투어 장수를 기원하는 동시에, 자제들에게는 관장(官長)을 잘 섬기고 부역에 종사하며 명령을 수행하여 마치 자신의 머리나 눈을 감싸듯 보호하라고 훈계한다고 하며, 선비와 무사와 아전들은 제각기 자기 일을 익히고 농부·어부·장인·상인들도 각각 자기들의 직업에 만족을 느낀다고 하니 그곳 풍속이 참으로 좋다고 하겠다.
다만 토지가 메마르고 소금기가 있으며 가로 세로로 된 밭이랑에는 돌에 흙이 덮여있기에 높은 언덕지대나 낮은 습지대 할 것 없이 비가 고른 해건 비가 없는 해건 모두 손상을 입으며 통계적으로 세 고을은 흉년이 많이 들고 풍년은 적게 들어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전적으로 사서 쓴다고 하니 내가 너희들을 보는 마음이 육지 백성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지난해에 곡식 1만 섬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는 위급한 너희들을 특별히 구제하기는 하였지만 막 배를 띄우려 하면서 도백에게 거듭 당부하여 바다 신에게 복을 빌게 했더니 바람이 자고 물결이 잔잔하여 내왕이 순조로웠다. 따뜻한 봄날에 기민먹이는 일을 시작한 것은 내가 하루도 너희들을 마음에 잊지 못해서였는데 5월에 이르러 기민먹이는 일이 끝났다는 보고를 접하고 나서야 남쪽을 바라보면서 걱정하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었다.
그런데 대간의 말이 나와 반신반의하던 끝에 백성들의 고통을 말할 때면 마치 내가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같은 심정에서 홍문관 교리 심낙수를 어사로 삼아 그곳에 가서 죄가 있고 없고를 빠뜨리지도 말고 과장됨도 없이 조사하여 일을 마치도록 하라고 한 것이다.
또 생각해 보니 제주에서는 어사를 12년만에 보게 되었으니 너무 뜨다고 하겠다. 어사가 가는 걸음에 갖가지 고질적 폐단을 알아보는 일, 고통스런 신역을 바로잡아 없애는 일, 모든 옥사를 심리하는 일, 인재를 발굴하는 일, 노인에게 잔치를 열어 위로하는 일, 착한 사람을 표창하고 악한 사람을 징계하는 일, 문무과 시험을 보여 인재를 뽑는 일, 전지와 포구와 군사 문제 그리고 말에 관한 정책을 신칙하고 격려하는 일, 고을 수령과 진영 장수의 잘잘못에 따라 강등시키거나 올려주는 일 등에 대하여 비변사의 신하에게 명해 조목조목 열거해서 그가 가는 길에 가져가게 하였으니 너희들에게 있어서는 다시 없는 기회이다. 너희들은 이렇게 못잊어하는 나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가.
아, 양(陽) 하나가 처음으로 생겨나서 만물이 장차 소생할 것인데 너희들은 고을 창고에 환곡을 모두 상환하고 집에서 부담없이 쉬면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갖가지 옷을 지어 아이들에게 입히고 있는가? 내년의 보리 농사는 곳곳에 큰 풍년이 들고 바다에 나가는 배는 사람마다 잘 건너다녔으면 하고 너희들을 위해 축원하는 바이다. 아, 너희 제주의 모든 백성들아!"
11월 25일 갑인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김노영(金魯永), 경력(經歷) 최경악(崔景岳)과 풍덕 부사(豊德府使) 임성운(林性運)을 파직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개성 유수 김노영이 장계 올리기를 ‘사람을 살해한 죄인 음세형(陰世亨)의 공초에 의하면, 첩 유순랑(劉順娘)과 동거하는데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온 날에 본디 친하게 지내던 주지현(朱之賢)이 순랑의 집에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분한 마음이 울컥 일어나 처음엔 때려주려 하였으나 지현이 상당한 완력이 있기 때문에 몸을 빼 피하여 달아났습니다. 세 차례나 그렇게 하다가 지난 6월에 길에서 문태혁(文太爀)을 만났는데 태혁이 말하기를, 순랑이 지금 주지현과 함께 임 조이(林召史)의 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곧장 뒤를 밟아 가보니 과연 순랑과 지현이 함께 임 조이의 집에 있기에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따져볼 겨를도 없이 먼저 오른손으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지현의 왼쪽 다리를 찌르고 다음에 왼손으로 지현의 상투를 잡고서 머리로 지현의 이마와 가슴팍을 들이받았으며 또 발길로 등줄기와 옆구리 등을 찼는데 그 다음날 지현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법에 따라 심리하여 처단하게 하고, 그 나머지 관련된 유순랑 등은 그대로 수감하고 결말이 나기를 기다려 신의 영문에서 중한 쪽으로 처리할까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옥사는 사형에 해당되는 옥사이니 의정부에 통보하여 상세한 심리를 가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판부하기를,
"일에는 원리 원칙과 임시 변통이라는 것이 있고, 법도 사건에 따라 오르내림이 있기는 한 것이지만 대체로 임시 변통은 아랫사람이 제멋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서 원칙적인 불변의 법률에 대해서 법을 맡은 사람은 더더욱 판례가 그렇다는 것만 알고 있어야지 설령 그 정상이 매우 동정이 가더라도 섣불리 자기가 융통성을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와는 반대다. 음세형은 남편이고 순랑은 첩인데, 순랑이 간부인 주지현과 저지른 음행에 대해서는 남들이 다 알 만큼 소문이 파다하였다. 세형은 우매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어서 여러 차례 간음하는 장소에 갔으면서도 도리어 뒤집어 쓸까봐 두려워하다가 다행히도 그날은 음부와 간부가 함께 한방에 앉아있는 것을 분명히 잡고서 곧장 앞으로 내달아 날쌔게 간부를 찔렀으니 이는 법조문에 이른바 간통의 현장에서 잡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세형을 엄하게 신문하여 진술을 받고 옥안을 작성하면서 논리라고는 한 마디도 없으니 이것이 법을 어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첫 번째로 불가한 것이다. 이름이 설사 화초첩이라고 하더라도 음분이 난 여자와는 전혀 달라 장가든 근거가 있고 평소 동거도 하였으며 그 여자도 남자마다 모두 남편으로 삼는 계집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음부가 간통한 죄를 그 여자에게 시행하지 않고 어디다가 할 것인가. 그런데 간부를 죽였다 하여 도리어 본 남편을 죽인다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인륜 강상이 어디 있겠는가. 두 번째로 불가한 일이다. 그리고 삼가 선왕에서 받은 전교를 상고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치마를 잡아당기거나 마주앉아 밥먹는 것을 그 남편이 보고는 분기를 내거나 혹 분한 김에 실수로 죽였을 경우에는 모두 가벼운 쪽으로 법을 적용하도록 서울과 지방의 법관들에게 반포했었다. 그런데 그 계집과 그 놈은 그 현장에서 잡혔으니 그것이 어디 치마를 잡아당기거나 마주앉아 밥먹는 것에 비할 일인가. 그렇게 막중한 수교 내용을 애당초 장계에 한 마디 거론조차 않고 곧바로 옥안을 작성하여 문서로 보고한 것은 구구절절 소홀히 한 것으로 그것이 세 번째 불가한 일이다.
유수의 직임이 비록 임금의 교화를 펴는 직임은 아니지만 역시 한 고을의 풍속 교화를 맡고 있는 사람인데 그가 처리한 일이 그처럼 상식에 반한 일을 하였으니 개성 유수 김노영을 파직시키는 법으로 처리하여 법률을 중히 하고 풍속과 교화를 부지하며 수교가 존중되도록 하라. 그리고 세형은 신임 유수로 하여금 관아의 뜰에 불러다가 타일러서 놓아보내도록 하고, 순랑도 신임 유수로 하여금 법조문을 상고하여 처리하게 하라. 그리고 경들은 법을 다루는 위치에 있으면서 의견을 내어 논리를 전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스스로 법을 위반하는 죄과를 범했으니 모두 중한 쪽으로 추고하고, 초검관(初檢官)도 옥을 꾸밀 일이 아닌 사건으로 옥사를 꾸몄으니 그 죄가 똑같으며, 복검관(覆檢官) 역시 그러하다. 경력 최경악과 풍덕 부사 임성운도 모두 파직시키라."
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11월 26일 을묘
개성부 유수 이병정을 불러 접견하였다. 하직 인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강(柳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27일 병진
상이 사옹원 부제조 서매수(徐邁修)에게 묻기를,
"요사이 들으니 조정의 신료들이 일상으로 쓰는 도자기를 모두 갑번(匣燔)141) 을 사용하며 심지어 하인배들까지도 그것을 본받는 자가 많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하니, 매수가 아뢰기를,
"참으로 그런 폐단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보통으로 구워 만든 그릇도 쓸 만한데 어째서 꼭 갑번의 그릇을 따로 만들 필요가 있는가. 병·항아리·술잔·종지 따위들도 모두 교묘한 것을 숭상하여 많이 새로 만든다고 하니 경이 도제조에게 말하여 특별히 금지시키고 다시는 구워 만들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교서를 내렸다.
"일찍이 듣건대 삭선(朔膳)으로 바치는 물품 중에 김·생선·알·광어 같은 종류는 정해진 길이와 넓이에 구애되어 풀로 붙이거나 침을 발라 규격에 맞춘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정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민폐도 아마 적지 않을 것이다. 잡히는 대로 규격에 구애받지 말고 바치라는 명이 있었는데도 그런 일들을 언제나 살피지 않고 있다. 그렇게 한 지 몇 해가 되었기에 지금쯤은 틀이 잡혔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근래 들으니 영읍(營邑)에서 바치는 것들이 예전 그대로 폐단이 있다고 한다. 오늘 마침 김을 바쳐온 일이 있어 들으니 전에 비하여 조금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침을 바르거나 풀로 붙이는 행위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묘당으로 하여금 영남·호남과 관동 지방에 거듭 엄중하게 신칙하도록 하라."
11월 28일 정사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송영(宋鍈)을 파직하였다. 관아에 출근을 늦게 하기 때문이었다. 이치중(李致中)을 형조 판서로, 구상(具庠)을 한성부 좌윤으로 삼았다.
11월 29일 무오
춘당대에 나아가 관궁(官弓)으로 중일(中日) 활쏘기 시험을 실시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의직(李義直)을 보내 고 충신 최효일(崔孝一)에게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효일의 충의를 생각하여 그의 후손 최성열(崔性烈)에게 특별히 선전관을 제수하였었는데, 이때 와서 관궁으로 실시한 중일 활쏘기 시험에 합격하자 급제를 내리고 전교하기를,
"고 충신 증 참판 최효일의 충의는 만고에 들어보지 못한 충의였다. 음직(蔭職)을 주는 일을 그 집안에 하지 않고 어디에다 할 것인가. 그래서 특별히 선전관을 제수하여 만분지일이나마 그 공로에 보답하려는 것이었는데 오늘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어찌 기특하고 훌륭하지 않은가. 선전관 최성열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연도의 고을에서 풍악과 말과 잔치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주고 증 참판의 집에 날을 받아 향과 축문을 내려보낼 것이며 의주 부윤을 보내 제를 지내도록 하라."
하였다.
구담(具紞)을 녹도진(鹿島鎭)으로 귀양보내고 전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를 파직시켰다. 관찰사 서용보(徐龍輔)가 치계하기를,
"남양 부사(南陽府使) 구담이 재해 입은 토지의 조세를 농간질하여 돈으로 환산하여 착복한 것이 1천 1백 50냥이고, 환곡을 농간질하여 훔쳐 먹은 것이 4백 70여 섬이며, 관아에서 매달 배정하는 쌀을 대동미(大同米)로 구분하여 내어주고 높은 값으로 돈을 받고 모자라는 대동미 수량은 외창(外倉)의 환곡으로 부정하게 채워넣었습니다. 개인 산의 소나무를 수없이 베어 가졌고 경 내의 부유한 백성으로부터 돈과 재물을 강제로 징수하였으며 심지어 각 관청의 관속들까지도 터무니없는 징수를 당하였습니다. 그가 범한 여러 가지가 모두 불법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진노하여 의금부에 명하여 잡아오게 하고 바로 그날 밤에 개좌(開坐)하여 엄하게 형장을 가하면서 신문하게 하니, 담이 낱낱이 사실대로 자복하였다. 판부하기를,
"저도 사람이니 이렇게 하면 살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정도는 알 것이다. 아무리 이해가 걸려있다지만 도대체 무슨 심보로 1백 리의 길을 가는데 90 리가 절반이라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겨우 수령 한 자리를 얻자마자 욕심이 꽉차서 큰 것, 작은 것 가리지 않고 탐욕을 부려 못하는 짓이 없었단 말인가. 모든 백성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행정이라면 한 가지 일이라도 빠질세라 살을 갉아내고 골수를 쪼개며 백성들 머릿수를 따져 혹독하게 긁어들였으니 양자(揚子)가 이른바, 이리가 뿔이 나고 날개까지 달렸다고 한 것이 바로 그를 두고 한 말이다. 이러한 탐관 오리를 경기 지방에 두고서 아직까지 나라 법이 가해지지 않았으니 어떻게 탐오한 관리를 징계하는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재해 농지의 조세를 농간질하여 서슴없이 한 입에 삼킴으로 해서 차마 굶어 누렇게 뜬 백성들로 하여금 터무니없이 세금을 대신 무는 고통을 받도록 하여 무고한 백성들이 하늘에 호소하도록 하였으니 하늘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오늘 붙잡혀 와서 신문을 받고 있으니 속이기 어려운 것이 이치인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여 그의 죄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다.
그러나 그가 범한 가지가지가 모두 이쪽에서 옮기어 저쪽을 채우고, 서쪽을 부숴 동쪽을 보충하는 식으로 그의 꾀가 지극히 교활하고 그 방법이 여러 가지여서 만일 법조문에 비추어 죄를 판정한다면 당연히 법을 어기고 장물을 취득한 것으로 감독자 자신이 도둑질한 조항이 준용될 것인데, 일단 준(準) 자가 붙으면 곤장을 쳐서 귀양 보내는 것이 예이니 그렇게 하면 너무 가벼운 처벌이 아니겠는가. 현재 탐오의 풍속이 날로 성하여지는 이때에 만일 엄한 법으로 무겁게 다스리지 않으면 어떻게 후인을 징계하고 다른 사람들을 금지시킬 것인가. 고신(拷訊) 기한이 차기를 기다려 다시 엄형을 가하고 자기 자신에 한하여 사형을 감하고 멀고 험악한 낙도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그가 유용한 물건들은 도백으로 하여금 낱낱이 변상시키도록 하고, 훔쳐 먹은 재해 전지의 조세는 즉시 백성들에게 돌려주되 혹간 당연히 바쳐야 할 것이 있으면 계산하여 내주기도 하라. 그리고 탐오한 관리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백성들이 그처럼 곤욕을 받았으니 누가 그 책임을 질 것인가. 오랫동안 도백으로 있으면서 바로 그 사실을 아뢰지 않은 전전 도신 서정수(徐鼎修)에게도 파직의 법을 적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대용(鄭大容)을 이조 참의로, 이경오(李敬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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