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계사
상에게 부스럼병[癤候]이 있었다. 대신·각신(閣臣)과 약원(藥院)의 세 제조(提調)를 소견(召見)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채제공(蔡濟恭)의 상소를 반포하지 않아서 그 중의 숱한 패역스런 말들을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김 판부사(金判府事)088) 가 전하는 네 글자의 흉언(凶言)089) 을 듣고는 놀랍고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 네 글자만 가지고도 곧 바로 극역(劇逆)이 되니 즉시 엄중 토죄하여 흉역을 징계하여야 됩니다."
하니, 규장각 제학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그 상소의 구절에 흉한 말이 많이 있기는 하나 만일 원소(原疏) 자체를 그르게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판중추부사 김종수가 도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입시하도록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신이 도성에 들어온 것은 실상 그 일 때문입니다. 그 상소가 내려왔더라도 비교하여 말하면 또한 한 사람의 정후겸(鄭厚謙)입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중유(仲由)를 얻고서부터 악한 말이 이르지 않았다.’ 하셨는데, 신 등이 자로(子路)의 강용(强勇)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같은 흉언을 어찌 보통의 악한 말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아래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만일 이로써 그 어버이에게 욕을 끼친다면 그 자식으로서 너무도 속이 썩고 뼈에 사무칠 것인데, 더군다나 이런 비할 데 없는 막중한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는 실로 역적 가운데에서도 비할 데 없는 역적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마음이 몹시 괴롭다. 이것이 어디 이 사람 저 사람이 서로 따지며 옥신각신할 문제인가."
하였다. 민시가 아뢰기를,
"대신이 만일 성토하려면 의당 처음과 끝을 잘 헤아려서 해야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단지 문안만 올리고 나가야지 결코 금새 말을 내었다가 금새 위축되어서 한갓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도승지 심환지(沈煥之)는 아뢰기를,
"한 제학의 말이 개탄스럽습니다. 원소를 반포하지는 않았으나 신도 귓전에 들은 말이 있습니다. 신하의 의리로써 의당 성토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될 터이니, 어찌 한가롭고 느슨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신의 미욱한 고집으로는 이를 허락받지 않고서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처럼 굳이 고집을 부리니, 대신과 면질(面質)을 시킬 수는 없으나, 경이 저 대신과 면대(面對)하여 상소의 구절에 대하여 흉역스러운 것인지 아닌지를 결판짓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사는 것도 오히려 통분하게 여기는 터에 더구나 함께 연석(筵席)에 오르는 경우이겠습니까. 신은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7월 4일 을미
전교하기를,
"머리에 난 부스럼과 얼굴에 생긴 종기가 어제부터 더욱 심해졌다. 씻거나 약을 붙이는 것도 해롭기만 하고 약물도 효험이 없어서 기(氣)가 더 막히고 쌓여서 화가 더 위로 치밀어 오른다. 얼굴은 모든 양기(陽氣)가 모인 곳이고 머리도 뭇 양기가 연결되어 있는 곳인데 처음에는 소양(少陽)090) 부위에서 심하게 화끈거리더니 독맥(督脈)091) 부위로 뻗어나갔다. 왼쪽으로는 귀밑머리 가에 이르르고 아래로는 수염 부근까지 이르렀다가 또 곁의 사죽혈(絲竹穴)092) 로도 나고 있다. 이는 모두 가슴속에 떠돌아다니는 화(火)이니, 이것이 내뿜어지면 피부에 뾰루지가 돋아나고 뭉쳐 있으면 곧 속이 답답하여지는 것인데, 위에 오른 열이 없어지기도 전에 속의 냉기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을 의가(醫家)에서는 대단히 경계하는 것이다. 성질이 냉한 약제를 많이 쓸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오직 화를 발산시키고 열어주는 처방을 써야 효과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경락(經絡)에 침을 맞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를 여러 의원들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는데, 약원(藥院)이 아뢰기를,
"삼복(三伏)에는 침을 놓지 말라는 경계가 의서(醫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잠시 경락을 소통시키는 것에 불과하므로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여 마침내 세 부위에 침을 맞았다.
내의원이 직숙(直宿)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시종신(侍從臣) 강봉서(姜鳳瑞)의 아버지 강시양(姜時揚)의 나이가 70이니 통정 대부의 품계에 올려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제주도 출신의 시종신은 읍지(邑誌)를 상고해 보아도 처음 있는 일이다. 그 아비의 나이가 80에 가까워오니, 지금 전례에 따라 가자(加資)를 한다면 희귀한 일이 될 듯하다. 장령 강봉서에게 오늘 안으로 근친(覲親)하기 위하여 올린 휴가 신청을 허가하여 노인의 귀밑머리에 옥관자(玉貫子)를 다는 경사를 가서 보게 하라."
하였다.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판으로, 홍억(洪檍)을 판의금부사로, 구상(具庠)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7월 5일 병신
상이 침을 맞았다.
7월 6일 정유
판중추부사 김종수가 고향에 돌아가서 상차하기를,
"신이 연석(筵席)에서 물러나온 다음날 고을과 도(道)를 통하여 봉장(封章)을 올린 것은 충성을 다하고자 했던 것으로, 더없이 중대한 일에 관계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해 듣건대 원소(原疏)가 승정원에 도착한 뒤 승지와 도신(道臣)이 사사로이 서로 주고받느라 지금껏 상이 읽어보지 못하였다 합니다. 이런 일이 전에는 있지 않았기에 이 말을 듣고는 크게 놀랐습니다. 신에 있어서야 무슨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마는, 조정을 욕되게 한 점이 있으니 즉시 상소문을 들여오게 하여 분명한 처분을 내려주시고, 그런 뒤에 승지와 도신을 각기 지은 죄에 따라 벌을 주어서 국가의 체면을 보존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직 읽지 못한 상소문에 일언 반구라도 금지하는 일에 관계되는 것이 없다면, 승정원이 기영(畿營)을 왕복하면서 상소문을 되돌려 보내어 마치 제신(諸臣)들이 올린 장주(章奏)를 물리치는 것처럼 한 것은 후일의 폐단에 관련되는 것이니, 결단코 엄격히 처치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조금이라도 이에 반하면 재상의 상소문이라 그 체면이 중하다 하더라도 금령이 또한 엄연히 존재해 있다. 금령을 거두기 전에는 어찌 단지 승지만 감히 받들어 올리지 못할 뿐이겠는가. 경도 금령 거두기를 요청하지도 않고서 그 금령을 범하는 행동을 하여 스스로 남의 흉내를 내는 죄과(罪科)에 돌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정말로 금령에 저촉되는 바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경은 사신이 돌아오는 편에 덧붙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종수가 사신 편에 덧붙여 아뢰기를,
"신의 상소문에는 금령에 저촉되는 구절은 없고 단지 신의 말을 받아들이고 신의 죄를 처결하기를 바란다는 따위의 스스로의 허물을 뉘우치는 말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승지 심환지(沈煥之) 등은 체직하여 해부(該府)에서 법에 따라 처결하도록 명하고 경기 감사는 물론에 부쳤다.
7월 10일 신축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치계하기를,
"통영(統營)에서 기민 구제를 실시할 때 부자인 김덕추(金德秋)가 자원하여 바친 쌀이 2백 91섬이고 벼가 2백 72섬이며, 탁만윤(卓萬胤)이 사사로이 기민을 구제한 쌀이 1백 36섬이고 벼가 1백 60섬입니다. 만윤은 나이가 60에 가깝고 여섯 명의 아들을 두어 음덕(陰德)을 쌓는 데 뜻을 두고 명예를 구하려 하지 않아서 번거롭게 관아의 구휼을 하지 않고 사사로이 구휼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덕추는 실직(實職)을 제수하고 만윤은 상을 주도록 명하였다.
7월 13일 갑진
수원부의 마병(馬兵)을 장별대(壯別隊)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이는 장용영(壯勇營)의 아룀에 따른 것이다.
7월 16일 정미
상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皮載吉)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력을 내었기 때문이었다. 재길을 약원(藥院)의 침의(鍼醫)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비변사의 당상과 여러 장신(將臣)들을 소견하였다. 상이 정민시(鄭民始)에게 이르기를,
"수원 군제(軍制)를 아직껏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경이 전 부사 조심태(趙心泰)와 충분히 논의하여 결정하되 반드시 백성들을 위하는 조정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하라. 군정(軍政)은 정예롭고 숙련되게 하는 것이 제일이지 군사의 숫자를 많이 하는 데만 힘쓸 것이 아니니, 모쪼록 인원수를 줄이고 정예한 군사를 뽑는 것으로 주를 삼으라."
하였다.
7월 17일 무신
측우기(測雨器)와 주척(周尺)을 수원부에 하사하였다.
7월 18일 기유
관서 지방의 별비조(別備條)로 되어 있는 3천 6백 냥을 내년부터는 장용영에 떼어 보내어 군수(軍需)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장용영 제조 정민시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서정수(徐鼎修)를 동지 경연사로, 심환지(沈煥之)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희(金憙)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7월 19일 경술
지평 이경명(李景溟)이 상소하여, 윤문동(尹文東)을 목민관(牧民官)으로 추천한 전관(銓官)에게 삭직의 법을 적용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기각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20일 신해
진휼청 당상 정민시가 아뢰기를,
"본청의 필요한 비용은 방대한데 세입(歲入)은 얼마 없어서 비용을 충당할 수 없으므로, 관서 지방의 곡식을 사서 유치시켜 두고 모곡(耗穀)을 돈으로 환산하여 받아 용도에 보태는 밑천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런데 요 몇년 동안 환자[還上]를 갚을 기한을 물려 준 곡식이 2만 7천여 섬이나 되어 본청의 비용 조달이 낭패스럽게 되었습니다. 이미 경비를 위하여 사서 유치한 것이니 결코 그대로 줄어들도록 놓아둘 수는 없습니다. 올해의 가을 수확은 대풍이 들 희망이 있으니 상환 기한을 물려 준 환곡을 응당 거두어들여야 되는데, 본청에서 상환 기한을 물려 준 몫은 연조를 따지지 말고 비록 다른 관아의 곡식과 환록(換錄)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올해 안에 바치는 것으로 원래의 수량대로 꼭 채워서 한 포대라도 모자라거나 축나는 것이 없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뒤에는 비록 환자의 상환 기한을 물려 주는 때를 당하더라도 이에 대해서만은 거론하지 말도록 해도(該道)에 엄중히 신칙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1일 임자
승지를 보내어 황단(皇壇)의 위패를 봉안(奉安)한 방을 봉심(奉審)하게 하고, 행 부호군 이원(李源)은 선무사(宣武祠)를 봉심하게 하였으며,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에게는 의정부 영의정을 더 추증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날이 무슨 날인가. 아, 신종(神宗) 황제가 우리 나라를 구원하여 다시 있게 해 준 은혜는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다. 비풍(匪風)의 감상(感傷)과 하천(下泉)의 쓰라림093) 을 장차 어디에 그 만분의 일인들 표시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근신(近臣)을 보내어 위패를 봉안한 방을 대신 봉심하게 하였으며 거듭 무신(武臣) 이원(李源)을 시켜 선무사에 가서 두루 돌아보게 한 것은 주로 이 날을 기억하려 함에서이나 이것으로 어찌 기억이 되겠는가.
덕을 본받고 공을 갚는 데는 나라의 밝은 법규가 있는데, 더구나 작은 나라 배신(陪臣)으로서 명나라의 은총을 입어 천하의 명장이 된 사람은 바로 이 충무공이다. 옛적 무령왕(武寧王) 서달(徐達)의 비석을 황제가 직접 글씨를 쓰고 유사(有司)가 비 세우는 일을 맡아 하였었다. 우리도 삼가 이를 모방하여 일찍이 그 도로 하여금 비석을 깎아놓고서 비석 머리에 새길 전자(篆字) 글씨를 써서 내려보내고 명시(銘詩)를 지어 보일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였었는데, 작년에는 민생에 관한 일로 바빠서 미처 하지 못하였다. 이에 오늘 충무공 후손을 불러 물어보고 그 공역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또 생각해보면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威武)로서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加贈)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유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 공신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덕풍 부원군 행 정헌 대부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겸 삼도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하라. 비석을 세우는 날의 치제(致祭)에 대하여는 전에 명을 내려 알렸는데, 벼슬을 추증하고 선고(宣誥)하는 일도 그날 함께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춘추(春秋)》를 읽을 만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삼전(三傳)094) 을 묶어 높은 데 얹어놓지 말라. 이 의리(義理)는 우주간에 영원히 존재하고 있어 해·별과 함께 광채를 빛낼 것이다. 어찌 이를 강명(講明)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날이 무슨 날인가."
하였다.
이원을 자헌(資憲)의 품계로 특별히 올려주고 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전교하기를,
"중국 사람의 후예로서 우리 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것이 귀하고도 특이하다. 어찌 벽 사이에 사는 거미[蛛]와 주(朱)가 음이 서로 같은 정도에 비교할 것인가.095) 더구나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우리 나라를 재생시켜 준 사람의 후손으로 벼슬이 무재(武宰)에 이른 사람이야 그 귀하고도 특이함이 더욱 더 어떠하겠는가. 이날에 그 사람을 녹용(錄用)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이날을 만나 이날을 감격해 하는 뜻이겠는가. 더구나 위패를 봉안한 방을 대신 봉심하게 하여 마치 제사를 지내지 않은 듯한 지울 수 없는 생각을 못내 누를 길이 없다. 행 부호군 이원을 특별히 한 등급 품계를 올리어 지중추부사에 제수하고 이어 도총관을 겸직하게 하라. 영원백(寧遠伯)096) 의 후예가 우리 나라의 정경(正卿)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제독(提督)의 사당에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인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한풍(李漢豊)을 보내어 길일을 가려서 치제하게 하라. 제문은 내가 친히 지을 것이며 제물과 제의(祭儀)는 기유년에 행한 60돌 때의 전례를 사용하라."
하였다.
수찬 최헌중(崔獻重)이 상소하기를,
"신이 길거리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지평 이경명(李景溟)이, 윤문동(尹文東)을 관직에 임시로 의망(擬望)한 일을 상소하여 논하였다가 원소(原疏)를 되돌려 받은 뒤 처음에는 사헌부에 나아가 인피(引避)하려다가 승정원의 저지를 당하고 곧바로 물러나 돌아갔다고 합니다. 대각(臺閣)의 체면은 본래 가볍지 않은 것이고 그가 논한 것도 공분(公憤)에서 나온 것이니, 당연히 극력 주장을 세워서 상에게 올라가지 않는 한 물러나지 않았어야 됩니다. 그런데 도리어 한갓 갔다왔다하는 헛수고만을 하고 쓸쓸히 나가버리고 말았으니, 어그러진 행동으로 대각의 체면을 손상시킴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신은 이경명에 대해서는 빨리 파직시키는 벌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문동의 일에 있어서는 진실로 말할 만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난역(亂逆)이야 한정없이 많지만 역적 하재(夏材)와 같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 저 문동은 바로 역적 하재의 매부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말끔히 씻어주는 은전이 이 사람에게까지 논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전관(銓官)이 버젓이 그를 고을 수령의 직임에 추천한 것은 지극히 무엄한 일입니다. 그리고 홍병용(洪秉容) 같은 자는 또 역적 계능(啓能)의 친척이며 그가 아끼는 제자인데도 차례대로 죄를 씻고 녹용(錄用)하는 계제에 꼭 다른 사람보다 우선하였습니다. 앞의 인사 행정이나 뒤의 인사 행정에서 임의대로 마구 행하였으니 그가 비록 사정을 쓰기에 급급하였더라도 더할 수 없이 엄한 의리는 생각지 않았단 말입니까.
더구나 대간의 상소가 도목정(都目政)이 있을 때 들어왔으니 당연히 모를 이치가 없는데도 마치 있거나 말거나 한 것처럼 무시하면서 버젓이 도목정을 행하였습니다. 깨끗한 조정의 염치는 이미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아무 거리낌 없이 방자하게 군 행동이 더욱 문제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해당 전관에게는 벼슬을 깎는 벌을 내리시고 윤문동과 홍병용도 모두 도태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경명의 일은, 전도 착란한 그 행동이 참으로 그대 말과 같으니, 파면시키자는 청을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해당 전관의 삭직 문제는 만일 연좌(連坐)의 죄에 해당이 안 되는 경우라면 비록 이괄(李适)의 처남이나 허견(許堅)의 매부라도 구애될 것이 없었던 한 벌의 새로 정한 법령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선왕의 그 뜻을 받들어 그대로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전관도 이미 여러 차례 추천한 사실이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또 비답을 내리지 않은 상소는 승정원에서 감히 펴 보여줄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 태연하다는 등의 말을 한다는 것은 더욱이나 말이 되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7월 23일 갑인
이조 판서 이문원(李文源)이, 최헌중(崔獻重)이 상소를 올려 탄핵한 일로 대답하는 상소를 올려 사직하기를 청하니, 체직을 허락하고 김사목(金思穆)을 대신 임명하였다.
심진현(沈晉賢)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7월 24일 을묘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이 사폐(辭陛)하였다. 상이 소견하고 이르기를,
"내가 관동 지방 백성들의 생활에 관하여 밤낮 마음에 잊지 못하는 것은 고기잡이하는 집이 산삼을 공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관동 백성들의 가장 지탱하기 어려운 점이다. 이밖에 절의 중들도 공역(公役)에 시달리어 남달리 고통을 겪고 있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교서(敎書)로 말하고 연석(筵席)에서 강조하기를 거의 날마다 하였는데도 감사와 수령들 가운데 진실한 마음으로 그 뜻을 받들어 행하는 자가 없었다. 경은 모쪼록 마음에 깊이 새기어 특별히 위임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예조가 수원(水原) 궐리사(闕里祠)의 향사 의식에 대해 여쭈니, 비답하기를,
"제품(祭品)은 보(簠)·궤(簋)·변(籩)·두(豆)를 각각 하나씩 하고 술잔을 셋으로 하며, 폐백은 없고 축문은 있게 하라. 축문과 향(香)은 봄가을로 내려보내고, 공씨(孔氏)로서 대대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서 항렬이 높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세 번 술잔을 드리게 하고, 또 그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하여금 축문을 읽게 하며, 또 몇 사람으로 집사(執事)를 삼도록 하라.
향과 축문을 조정에서 내려주는 경우 일반 다른 제사와는 색다른 점이 있어 유생으로서는 그 제사를 주관할 수 없다고 말하나 이는 그렇지 않다. 지방 고을의 이와 비슷한 제사 의식에서 그 고을 양반이 대신 행사하기도 하는데 더구나 공자 사당에 공씨가 술잔을 드리는 데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아울러 사당을 지키거나 사당 일을 맡아보는 유생도 공씨 성을 가지고 대대로 사는 자가 아니면 절대로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해마다 올리는 향사를 봄 가을의 마지막 달 상정일(上丁日)에 설행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5일 병진
이문원(李文源)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7월 26일 정사
차대(次對)하였다. 상이 장령 변경우(邊景祐)에게 이르기를,
"여러 해 전부터 제주도 백성들이 계속되는 흉년으로 굶주린다고 하여, 나의 마음에 밤낮으로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섬 백성들의 고충과 폐단을 낱낱이 진술하도록 하라."
하니, 경우가 아뢰기를,
"섬에 사는 백성들은 조정에서 마치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 하는 지극한 은덕을 많이 입고 한 사람도 굶어 죽거나 여윈 사람 없이 모두들 편안히 살면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 사람이 마침 연석(筵席)에 올라왔는데 어찌 한마디의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모쪼록 평소에 듣고 본 것을 진술하라."
하니, 경우가 아뢰기를,
"조정이, 제주도의 재해(災害)가 든 해에 육지로 옮아가는 폐단을 염려하여 본전을 임피현(臨陂縣)에 내어주고 나포창(羅鋪倉)을 설치하여 해마다 그 이자를 취해서 육지에서 쌀을 사가지고 가서 먹여주었습니다. 연전에 제주도의 무신(武臣) 김귀택(金貴澤)이, 쌀을 실은 배가 칠산(七山) 앞바다에서 파선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여 곧장 나주(羅州)의 제민창(濟民倉)으로 운반하여 들여줄 것을 요청했다가 특별 윤허를 받고부터는 배가 파선되는 폐단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본전이 어디로 가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흉년을 당하면 전라 감영에서 각 고을에 푼 환자[還上]의 모조(耗條)를 떼어 주는데 거의가 쭉정이니, 애당초 본전을 주어 창고를 설치했던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도 감영에 분부하여 그 본전을 찾아내어 나주로 이송하고 또 제주목에서 감색(監色)을 뽑아 보내어 나주 관원과 함께 입회하여 돈을 나누어주고 이자를 받아 섬 백성들의 굶주림을 구제하는 밑천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일찍이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사람에게 물어보고 여쭈어서 처리하게 하였다. 또 경우에게 이르기를,
"대신(臺臣)으로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한 지 오래되었으니, 현재 행하는 정사의 잘잘못과 서울 백성들의 고통에 대하여 필시 보고 들은 것이 있을 것이다. 위로는 임금의 잘못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숨김없이 진술하라. 전(殿)에 나와 앉은 지 오래되었지만 내 피곤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나, 경우가 대답을 못하였다.
유한모(兪漢謨)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민종현(閔鍾顯)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작년 겨울에 관서(關西)와 삼남(三南)에 남몰래 갔다가 남몰래 돌아오는 암행 어사를 나누어 보내고 이미 돌아와서는 조사한 내용을 낱낱이 거론하게 한 것은 예외로 지방 수령의 성적을 고과(考課)하고 겸하여 기민(饑民)을 진휼(賑恤)하는 시기에 맞이하고 보내는 데 따른 폐단을 제거하려고 해서였다. 북관(北關)에는 이런 특례가 흔히 있었으나 관서와 삼남에는 드물게 있어서 간사한 백성이 가짜로 이를 일컫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전라도·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갈리어 돌아온 자들에게 들으면 가짜로 일컫는 일은 짐짓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수령들까지도 혹간 암행 어사가 종적을 감추고 다니는 외에 선전관이나 장용위(壯勇衛)가 내려왔다고 말한다고 한다. 다행히 도백(道伯)이 듣는 대로 의혹을 깨우쳐주어 한쪽만을 믿지는 않게 되었으나 무식한 아전과 하례(下隷)들도 믿지 않는 것을 명색이 수령으로서 그러하리라는 마음을 떨치지 못하였다니 심히 한심스럽지 않은가. 저 약간의 문식(文識)이 있다는 암행 어사도 걸핏하면 일을 그르치는데 더구나 사리를 알지 못하는 무변(武弁)이겠는가. 더구나 서캐같이 무지 몽매한 영교(營校) 따위의 천한 무리들이야 어떻겠는가. 그것이 하찮은 일인 것 같으나 조정이 존엄을 잃는 원인으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런 말을 이미 듣고서도 만일 엄격히 막지 않으면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이 뜻을 각도에 엄히 신칙하여 이 뒤로는 조금이라도 의심이 될 만한 사람이 있으면 감영에 보고하여 즉각 가짜로 일컬은 죄를 다스리는 법조문으로 처단하도록 하고, 그래도 주저하면서 즉각 뒤를 캐어 체포하지 않았다가 다른 문제로 하여 이런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해당 감사와 수령을 중형(重刑)으로 처단하여 결코 그냥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감영과 고을의 정당(政堂)에다 이를 써서 붙여두고 언제나 보면서 항상 마음에 유념하도록 하라."
7월 27일 무오
고 의사(義士) 이사룡(李士龍)을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추증하고 그 마을에 정려(旌閭)를 내렸으며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 명장(名將)으로는 충무공을 맨 먼저 손꼽을 것이지만 군사 출신으로서 천하에 이름난 사람으로는 오직 이사룡이 그 사람일 것이다. 사룡은 성주 사람으로 일찍이 군적(軍籍)에 편입되었는데, 적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 상황에서 금주(錦州)에 가서 싸울 것을 요청하였다. 거기서 명(明)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와 대치하고 있다가 실탄을 재지 않은 공포를 쏜 것이 적군에게 발각되어 적군이 여러 차례 칼질을 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세 차례를 이와 같이 하고 끝내 적군에 의해 죽고 말았다. 명나라 장수가 이를 염탐하여 알고는 장대에다 특별히 ‘조선 의사 이사룡’이라고 써서 걸었었다.
아, 신사년의 전투097) 에서 만일 사룡이 한 번 목숨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장차 후세에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옛날 당(唐)나라 위사(衛士)가 순절(殉節)한 일을 두고도 주자(朱子)는 오히려 그를 표창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작은 나라의 군사로서 명나라를 위하여 의리를 지켜 순절하여 특출하게 우리 나라의 빛나고 걸출한 인물이 되었는데 신분과 문벌이 미천한 관계로 아직껏 표창하는 은전이 빠졌으니 어찌 풍교(風敎)를 세우고 이륜(彛倫)을 열어주는 뜻이겠는가. 성주 포수 이사룡에게 특별히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추증하고 이어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의 마을에 정문을 세우도록 하며, 그의 후손 가운데 벼슬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군문에 등용시키고 보고하도록 하라.
저번에는 본주 목사(牧使) 제말(諸沫)의 고적(古蹟)을 보고 감회가 일어 정문을 세워주고 벼슬을 추증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또 이사룡의 일로 인하여 생각해보니 본주에 대명동(大明洞)이라고 일컫는 마을이 있다고 들었다. 이는 바로 임진 왜란 때 우리 나라를 원조해준 중국군 시문용(施文用)이 살던 옛터라고 한다. 문용의 아버지 윤제(允濟)는 병부(兵部)에서 벼슬하면서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공(石公)098) 이 주장한 우리 나라 원조 정책을 힘껏 도왔으며, 문용은 군사 사이에서 숱한 공을 세우고 그대로 우리 나라 사람이 되었다. 선조(宣祖) 때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고, 선조(先朝) 때는 참판을 추증하면서 ‘시문용 후손들을 천역(賤役)의 명단에 이름을 두지 말라.’고 전교하셨다. 그곳에 또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고 어찌 똑같은 예로 그의 자손들을 녹용할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증 참판 시문용의 후예들을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불러 보고 올려보내게 하도록 하라.
내일은 곧 이 제독(李提督)의 사당에 향사하는 날이다. 촛불을 켜게 하고 그 제문을 쓰노라니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감상이 떠올라 점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이다. 증고(贈誥)099) 에도 내일 인보(印寶)를 찍을 것이다."
하였다.
7월 28일 기미
상이 몸소 제문을 지어서 금위 대장 이한풍(李漢豊)을 보내 이 제독의 사당에 치제하고, 그 집에서 손님을 접대할 물품을 하사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이때 경기 지역이 가물다가 이날 비가 오니 관찰사 정창순(鄭昌順)이 비가 온 것을 치계하였다. 회유(回諭)하기를,
"근래 내린 소나기가 필시 이 지역이나 저 지역에 많이 내린 곳도 있고 적게 내린 곳도 있을 터인데 언제나 도에서 장계올린 것을 보면 각 고을이 보고한 것은 그저 자기 읍치(邑治)에서 본 것만을 가지고 내린 양이 많다거니 적다거니 말한다. 이 어찌 선유(宣諭) 가운데에서 말한, 각기 몸소 밭과 들에 나가서 살펴보도록 한 본의인가. 지금이 농사의 풍흉(豊凶)을 살필 때가 아니어서 오랫동안 길에 나가 있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만일 관내(管內)를 두루 탐지하려고만 한다면 어찌 방편이 없겠는가. 현재는 아무리 적은 양의 비라도 그 이익이 천금이나 만 수레의 수확과 맞먹을 것이다. 모쪼록 이런 나의 뜻을 체념하고 열읍(列邑)에 엄히 신칙하여 조금이라도 예전처럼 소홀히 여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9일 경신
수원부의 과천현(果川縣)에서 공물(貢物)로 게[蟹]를 바치는 것을 면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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