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기축
경모궁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이때 상이 슬픈 심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흐느껴 울면서 겨우 행례를 하고는 재전(齋殿)으로 돌아와 시임과 원임 대신·각신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홍낙성 등이 아뢰기를,
"경사를 축하하는 의식이 바로 앞에 다가와 모든 사람들이 기뻐서 마구 뛰며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성상께서는 이것으로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마는 심회를 스스로 억제할 수 없다."
하였다.
경모궁의 도제조 이하 관원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는 은전을 베풀어 예방 승지 정대용(鄭大容)은 가선 대부로 승진시키고, 대축(大祝) 윤치성(尹致性)과 전사관(典祀官) 이우진(李羽晉)은 통정 대부로 승진시켰다.
인정전에 나아가 자전(慈殿)의 오순(五旬)과 자궁(慈宮)의 육순에 대한 경사를 합동으로 축하드리고 중외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왕은 말한다. 새해의 정월 초하루를 맞이하여 모든 복이 온 천지에 가득한데, 덕 있는 이는 복록과 장수와 명성을 기필코 얻는 법이라 두 경사가 자전과 자궁께 다 모이니, 모든 사람들이 천세를 드높이 부르고 이날에 태평의 운이 돌아왔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비(大妃)께서는 공은 더없이 크고 덕은 깊이 드러나 왕후의 존귀한 자리에 올라 부의(婦儀)는 제왕의 덕에 짝하였고, 상서롭고 빛나는 덕화로 덮어주어 인자한 은혜가 두루 높았다. 인륜은 이를 힘입어 밝혀졌고 큰 복록은 이에 끝없이 이르렀다. 왕비의 교화를 편 지 30년이 지나서 높은 연세가 어느덧 50에 오르셨다. 선왕의 1백 세 되는 해를 만났으니 하늘에서 받은 복록을 징험하겠고, 대비의 만수 무강을 비니 초승달 같은 무궁한 복록을 더욱 기뻐하는 바이다. 이는 참으로 나라의 큰 경사이니 어찌 경사를 크게 빛내는 행사를 늦추겠는가.
또 우리 자궁께서는 아름다운 덕을 계승하셨으니 그 훌륭한 덕은 이루 형용하기가 어렵다. 선왕께 사랑을 받아 유순한 법도가 일찍이 드러났고, 내가 어릴 적에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르쳤으니 길러주신 은혜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내가 즉위한 뒤로부터 언제나 장수를 비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한두 숟가락 밥을 뜨는 순간에도 잊지 못하여 옥같은 자태 더욱 건강하시기를 바랐고, 온화한 낯빛으로 곁에서 모실 때에는 영원토록 소자를 보살펴 주시기를 원하였다. 아, 신명이 보답을 내리어 참으로 장수와 복록을 다같이 누리셨다. 북당(北堂)의 훤초(萱草)가 서로 푸르르니 자궁은 건곤(乾坤)의 합한 수 60에 이르렀고, 동조(東朝)의 봄기운이 길이 성하니 대비는 《주역》 대연(大衍)의 수 50에 응하였다. 덕과 성품이 모두 훌륭함을 우러르니 의당 온종일 성대한 의식을 거행해야 하고, 한편 기쁘고 한편 두려운 마음 함께 느끼니 은공을 갚는 정성이 간절하구나. 그러나 겸손하시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간소하게 하라는 훌륭한 뜻을 여러 번 보이셨다.
예전 선왕께서 이 연세에 찬양했던 의식을 소급해 보면 마치 병부(兵符)를 합친듯이 꼭 들어맞으니, 후손이 이를 이어가는 도리에 있어 당연히 따라야 할 일이다. 하례하는 전문(箋文)과 폐백을 드리는 행사는 먼저 올 정월에 거행하고, 옥책(玉冊)으로 존호(尊號)를 올리고 술잔을 드리는 잔치는 서서히 을묘년을 기다려서 행할 것이다.
이에 자전(慈殿)의 큰 덕화를 미루어서 온 나라의 백성들과 함께 이 경사를 하례하노니, 이달 초하룻날 날이 밝기 이전의 잡범(雜犯)으로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석방하고, 관직에 있는 벼슬아치는 각각 한 품계씩 올려주되 자궁(資窮)이 된 자는 대가(代加)하라.
아, 기성(箕星) 분야의 우리 나라에 노인성(老人星)이 비치니 장수를 주는 별빛을 앞다투어 바라보고, 동조(東朝)의 누대에 봄햇살이 오래 머무니 맑은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는 것을 모두 칭송한다." 【대제학 홍양호가 지어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39책 3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436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사법(司法)
명하여 치사(致詞)·전문(箋文)과 예물함(禮物函)을 마주 받들어 올린 승지 이의필(李義弼)·유강(柳焵)과 통례(通禮) 유숙(柳)·정이옥(鄭履玉) 등에게는 모두 가자하고, 70세 이상의 조관과 80세 이상의 사서(士庶)들에게는 모두 한 품계를 올려주며, 공인(貢人)들에게는 묵은 빚 3천 섬을, 시민(市民)들에게는 부역 60일을, 성균관에 딸린 푸주간[懸房]에서 근무하는 사람에게는 10일분의 세금을 각각 면제해 주고, 제도(諸道)의 묵은 환곡 10만 섬 가운데 물에 빠진 쌀을 건져서 나누어준 것 중에 가장 오래된 연도의 몫은 탕감하여 주도록 하였다.
편전에 나가서 각신과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올린 전문을 받고 전교하였다.
"천 년 만에나 한 번 있을 경사를 만나 자전과 자궁 두 분께 천세를 세 번 부르는 의식을 거행하니, 즐겁고 경축하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겠는가. 오늘 태학의 유생들이 올리는 전문을 직접 받을 때 대궐의 뜰에 들어온 유생들이 이렇게도 많았다. 반장(泮長)으로 하여금 유생의 명단을 받아 도기(到記)에 점수가 차기 전이라도 먼저 시취(試取)하여 수석을 차지한 한 사람은 이번의 경과(慶科)에 응시하게 하도록 하라. 과거의 명목이 너무 많은 데에 가깝다고 말하지 말라. 많은 선비들이 앞다투어 와서 참여하는 데 대해서는 당연히 권장하는 뜻을 보이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팔도(八道)와 삼도(三都)에 윤음(綸音)을 내렸다.
"풍년 들기를 비는 마음이야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지난해 밀보리가 풍년이 든 것은 하늘이 내려준 덕을 입은 것이니, 이렇게 계속하여 풍년이 들기를 축원하는 마음은 올해가 작년보다 갑절이나 더하다. 모래 첫 신일(辛日)에 몸소 풍년 들기를 비는 제사를 사직단에서 거행하려 하는데, 신명이 감응하는 것은 나의 마음에 달려 있으므로 나는 지금 몸과 마음을 재계하고 있다. 아, 너희 팔도의 방백과 삼도의 유수들도 나의 백성을 위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는 고심과 지성을 체득하여, 농사를 권장하는 방도에 관계되는 모든 일에 각각 마음을 다하여 행하라. 개간하지 않은 땅이 없고 사람마다 부지런하지 않은 자가 없도록 하여 원조(元朝)에 신칙한 내용에 실질적인 성과가 있도록 하라."
신사운(申思運)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편전에 나가 원자가 모시고 앉은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가자된 사람들의 숙배를 받았다. 이날 품계가 오른 사람은 3백 21명이었는데 모두 천세를 불렀다. 상이 자리에 앉게 하고 내주(內廚)에서 음식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1월 2일 경인
상이 사직단에 나아가려고 하였는데 이때 아침 내내 봄비가 내렸다. 그러자 약원(藥院)은 말로 아뢰고 옥당(玉堂)은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섭행(攝行)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사직단에 나아가 재숙하였다.
1월 3일 신묘
사직단에 곡식이 잘 되기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그대로 태묘를 참배하였다.
전교하였다.
"조상을 제사하는 도리는 성경(誠敬)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성경이 지극한 다음에야 신명의 감응을 말할 수 있다. 체(禘) 제사에서 이미 강신(降神)을 한 다음에는 제사 지내는 사람들의 정성이 없어져서 태만하다고 공자(孔子)도 탄식하였다. 지금 태묘의 큰 제사를 지내는 데에 대한 의문(儀文)에는 조절해야 할 부분이 많다. 만일 성경이 처음 신(神)을 맞이할 때와 차이가 없게 하려면 지극히 중하고 엄격한 전례(典禮)라 하더라도 의당 충분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성경에 도움이 되고 의문에 손상이 없는 것은 바로 적대(炙臺)를 받드는 절차를 바로잡는 일이다. 집사가 많다 보니 신중하게 고를 수 없고 이미 신중하게 고르지 못하고 보니 사람마다 몸을 깨끗하게 재계하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올라다니며 바쁘게 움직일 때에는 혼잡하여 뒤죽박죽이 되니, 제물을 올리는 일이 지체되는 것은 오히려 이차적인 일에 속한다.
또한 억만 년 영구히 행할 대책으로 말하더라도 조절할 것에 대하여 더욱 마음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현재 사용하는 도식(圖式)이 원래 정한 의절과 어긋나고 있는 것도 상탁(床卓)이 좁은 데에 연유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소·양·돼지의 적대를 담은 세 상자를 바깥 큰 상자에 합하여 담아 놓는다면, 봉조관(捧俎官) 한 사람이 들어와서 천조관(薦俎官)에게 전달하고 천조관은 이를 받아서 대축(大祝)에게 주고 대축은 묘사(廟司)와 함께 적대의 상에 받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올해의 춘향 대제(春享大祭)부터 이를 기록하여 규례로 삼으라. 희생(犧牲)을 담는 상자를 만들어 둔 지가 벌써 오래되었으나 봄철의 참배하는 날을 기다려 규정을 정하는 것은 대체로 그 사유를 미리 고하는 의리를 부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봉조관을 임명하는 데 있어 친향(親享)할 적에는 각 묘실(廟室)에 1명씩 배정하고 섭향(攝享)할 적에는 통틀어 5명을 배정하면 된다. 그리고 대향(大享) 때의 진설 도식(陳設圖式)은 한결같이 원의 도식(原儀圖式)의 예에 따라 종묘서(宗廟署)에 보관하도록 하라."
1월 4일 임진
상이 예조 판서 민종현, 호조 판서 심이지, 봉상시 제조 서유방 등에게 이르기를,
"이번에 정한 도식은 새로 만든 것이 아니고 바로 《오례의》에 기재되어 있던 것을 다듬어 정리한 것이다. 나아가 적대를 받드는 한 절차에 대해서 섭향할 때 단지 봉조관 5명이 제물을 둔 곳에서부터 세 차례를 왕래하다 보면 서로 연속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청결에도 결함이 있을 듯하다. 이제 만일 제기(祭器)를 점검하는 곳에 미리 받들어 두었다가 제1실(室)의 적대를 받들어 올릴 적에 각 묘실의 희생 담은 상자를 연속하여 올린다면 예절에 있어서도 잘못된 것이 없고 억만 년 영구히 전할 계책도 될 것이다."
하니, 종현 등이 아뢰기를,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이 하여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섭향할 때 봉조관이 세 차례에 나누어 적대를 받들고 왕래하게 되므로 적대를 올릴 적에 서로 연속이 되지 못함을 알 수 있으니 어찌 공경에 흠결이 되는 단서가 아니겠는가. 지금부터는 섭향할 적에 진설할 때를 기다려서 제2실 이하 각 실의 희생을 담은 상자를 모두 제물을 둔 곳으로부터 먼저 제기를 검사하는 곳에 가져다가 임시로 놓아 두라. 그리고 제례를 행할 때 제1실의 봉조관과 천조관 및 모든 봉조관들은 남쪽의 신정문(神正門)과 곁문[夾門]으로 나누어 들어가고, 친향할 때에는 각실마다 각각 봉조관이 있으니 제물을 둔 곳에서 곧장 적대를 받들고 나아가게 하라."
하니, 종현이 아뢰기를,
"태묘의 큰 제사를 지낼 때 축사(祝史)가 희생의 털과 피를 담은 쟁반을 드리는 일과 대축이 쑥과 서직(黍稷)을 태우는 절차를 매번 동시에 병행하기 때문에 분답스러워 공경에 흠결이 되는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제1실에서 새벽에 강신의 절차를 행한 뒤에 곧장 희생의 털과 피를 올리는 절차를 행하고 적대를 올린 뒤에 곧장 쑥과 기장을 태우는 절차를 행하여 각 묘실에서도 이를 따라 하게 되면 의문(儀文)은 질서를 잃지 않을 것이고 제사를 진행함에도 더욱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상이 초계 문신(抄啓文臣)들이 대부분 마음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진작 면려할 방도를 생각하여 장차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에 관한 사목(事目)을 고쳐 만들려고 이에 현재 초계 문신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없애게 하였다.
축하하는 전문(箋文)을 올리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온 차사원(差使員)들이 곡식이 잘 되기를 비는 제사에 거둥할 때 어가를 따르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자 상이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농사를 중시하는 뜻을 모른다 하여 처음에 각각 그 지방에 귀양을 보내라고 명하였다가 곧바로 중지하고 단지 그 벼슬만을 삭탈하여 고을 밖으로 쫓아내게 하였다.
1월 5일 계사
춘당대에 나아가 군사들을 호궤(犒饋)하였다.
1월 6일 갑오
전교하였다.
"경사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권장하는 뜻을 보여주기 위하여 오늘 시취(試取)의 행사를 거행하기는 하지만 식년과(式年科)가 앞에 닥쳐 있어 과거가 중첩된다. 지금의 사습(士習)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요행을 바라거나 청탁을 넣는 폐단이 다시 나오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경과(慶科)는 경과이고 나라의 법은 나라의 법이다. 오늘 시행하는 시취로부터 책을 끼고 들어오거나 남의 손을 빌려 글을 짓는 부정 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거듭 엄중히 신칙한다. 이처럼 거듭 명령하는 것은 말한 것을 특별히 실천하려고 해서이다. 말을 해놓고 실천을 못하면 남들에게 어찌 비웃음을 받지 않겠는가. 이 뒤로 불법을 저지르는 자는 해당 법조문대로 처결하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이 전교를 반장(泮長)으로 하여금 대궐문에 써서 걸게 하여 모든 유생들이 분명히 알도록 하라."
명정전에 나와 전문을 올린 유생들을 직접 시험보이어 수석을 차지한 진사 이면승(李勉昇)을 전시에 곧장 응시하게 하였다.
조경(趙瓊)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수원부에서 문과에 곧장 응시하게 된 이석조(李奭祚)는 나이가 81세이므로 당연히 수직(壽職)으로 통정 대부가 되어야 하는데, 과거의 합격자를 발표하기를 기다려서 결재를 받으라고 명하였다.
1월 7일 을미
성균관에서 인일제(人日製)를 설행하였다.
앞으로 수원부에 성을 쌓으려고 팔도에 명하여 성지(城池)의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서 바치게 하였는데,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 윤범행(尹範行)이 그려 바친 그림이 매우 조잡하였으므로, 그의 관직을 삭탈하여 잡아다가 추문하게 하고 이우현(李禹鉉)을 대신 임명하였다.
1월 8일 병신
편전에서 재숙하였다. 태묘에 섭행하는 춘향(春享)이 내일이었기 때문이다. 호조 판서 심이지에게 희생을 담은 상자를 받들어 드리게 하였다. 승지 서미수(徐美修)·이우진(李羽晉)을 천조관으로 삼고 불러서 이르기를,
"근신을 천조관으로 삼아 보내는 것은 의절을 바로잡은 다음에 처음으로 거행하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삼가 도식(圖式)대로 따라 의절을 어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사폐(辭陛)하는 수령을 소견하고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한동(金翰東)에게 일렀다.
"근래에 들으니 네가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여 심지어는 도내의 사람들조차 서로 배척한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그가 하는 일을 보고 그 어떤 의도에서 하는 일인지를 관찰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지 살핀다.’ 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앞뒤가 서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나는 몹시 싫어한다. 너는 전철을 고쳐서 날로 새롭게 되는 방도를 생각하라."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徐龍輔)가 아뢰기를,
"수원부를 독립 관아로 나눈 뒤로는 홍제원(弘濟院)에서 하던 중국 칙사(勅使) 접대를 옮겨 소속시킬 곳이 없습니다. 이 뒤에는 중국 칙사를 접대할 때 정부의 승지·내시와 관찰사·원접사에 대한 여러 가지 공급을 모두 면제해 주고 부리는 역관과 역졸에게는 건량(乾粮)을 지급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황해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에게 유시하였다.
"모두 함께 경축하는 때에 본도의 몇 고을에 대한 진휼의 일로 인해서 늘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다. 나의 밤낮으로 애쓰는 이 마음을 체득하여 마음을 다해서 잘 돌보아 한 사람도 굶주려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시 서완세(徐完世)가 휴가를 받아 호남의 담양(潭陽)에 갔다가 길을 우회하여 무장(茂長)에 당도해서는, 읍민(邑民)이 산송(山訟)에서 패소(敗訴)했다 하여, 읍리(邑吏)를 꾸짖으며 그 고을 수령에게 빨리 고하여 그 송사의 판결을 뒤집도록 하였으나, 현감 신우상(申禹相)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도신 이서구(李書九)가 치계하여 완세를 엄하게 처벌하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수령은 완세를 내쫓지 못하였고 서구는 완세의 죄를 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구에게는 녹봉 10등을 감하고 우상은 옥리에게 내려 추문하게 하였다. 담양 부사 이정인(李廷仁)은 완세가 제멋대로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고 묻지 않았다 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완세는 도신으로 하여금 엄하게 형장을 쳐서 끝까지 추문한 다음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이정규(李鼎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9일 정유
명정전에 나아가 조참례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하늘에 천명(天命)이 영원하기를 구하는 근본은 참으로 백성들을 화합하게 하는 데에 있고 백성들을 잘 보호하는 방법은 탐오한 풍습을 징계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각도에 특별히 신칙하여 자세히 탐문해서 보고하게 하여 무거운 법으로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좋다. 일전에 개성 유수의 말을 듣고 미처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 묻지 못하고 단지 착복한 재물을 받아내게만 하였었다. 어제야 비로소 자세히 들어보니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도 이런 무엄한 버릇이 있었다. 그러니 어찌 대단히 한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신이 탐오를 징계한다[懲貪]는 두 글자로 백성들을 화합하게 하는 급선무로 삼았으니 그의 말이 매우 옳다. 모름지기 대신이라도 법망(法網)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없어야 법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에 대해서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경재의 반열에 있고 유수의 직임에 있는 사람이 새로 반포한 사목(事目)을 무시하고서 꾸어쓰고 횡령하여 국가의 재물에 손을 댄단 말인가. 규정을 정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렇게 허물어뜨렸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제 들으니 전 유수 김노영(金魯永)이 가장 그렇다고 한다. 이러한 위치에 있으면서 그러한 불법을 범하였으니 단지 보잘것없는 사람이 무엄한 짓을 한 것 정도로만 말할 수 없다. 명목은 꾸어썼다고 하지만 어찌 관리를 맡은 자가 직접 도적질한 법조문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 사이에는 비록 사우(祠宇)를 모시고 받드는 데에 쓴 것도 있고 노인을 위한 수연(壽宴)을 많이 열어주는 데에 쓴 것도 있기는 하지만, 사사로운 것을 가지고 어떻게 공적인 규정을 덮어 가릴 수 있겠는가. 불법을 저지른 것은 매한가지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곱절 더 무거운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개성 유수 김노영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라."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전 유수 김노영이 이미 먼 지방으로 귀양가는 처벌을 받았으니, 그 이외의 국가 재물을 불법으로 사용한 모든 사람들도 사용한 수량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구별을 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 가운데 임기 전에 앞질러 교체되고 사용한 수량도 적은 자의 경우는 물론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몇백 섬이나 되는 수량을 떼어먹은 자에 대해서는 다같이 죄를 따져서 처벌하는 것이 징계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신은 전 유수 이시수(李時秀)와 이가환(李家煥)에게도 모두 귀양보내는 벌을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수량이 가장 많은 데다가 그 지위가 어떠한가. 이것이 김노영에 대하여 특별한 처분을 하게 된 까닭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경이 아뢴 말도 옳다. 대체로 죄가 발각되기 전에 제 스스로 속죄한 자는 자수한 경우와 다름이 없으므로 따지지 않는 것이지만 사면령이 이제 막 지났으니 의당 참작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전 개성 유수 이시수는 관직을 삭탈하여 내쫓는 벌을 시행하고, 이가환은 백수(百數)의 분량을 횡령한 명목이 있으므로 의당 차등을 두어야 하니 관직을 삭탈하라."
하였다.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조 참판 심환지가 아뢰기를,
"을미년001) 의 역변(逆變)은 옛날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조정에 있는 모든 신하들은 마치 지주(砥柱)처럼 버티고 서서 의리를 유지하고 홍수를 억제하듯이 역적을 막아 끊어야 합니다. 어찌 감히 자신의 몸이나 지키고 집이나 보전할 계획을 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사이 두세 번의 도목정에서 소통(疏通)시킨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전하께서 소통시켜주려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교를 받았다고 해서 감히 어기지 못하고 나라의 헌법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자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후보의 명단에 덧붙여 써넣기까지 합니다. 이로 인하여 역적의 아들·사위·아우·조카와 모든 인척들에 대하여 다시는 죄의 대소 경중을 가리지 않고 일률적으로 죄를 벗겨주고 용서하는 속에 마구 섞어서 넣었습니다. 그리하여 홍낙신(洪樂信)·홍낙임(洪樂任)·홍낙윤(洪樂倫)도 모두 품계를 올려서 관직을 주었으니, 《명의록(明義錄)》 세 편(編)에 실려 있는 대의(大義)가 장차 깡그리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설사 전하께서 지극한 효성으로 자궁(慈宮)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신다고 하더라도, 의리를 훼손하고 법도를 깨뜨리는 데에 있어서는 진실로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낙임 등에게 벼슬을 제수한 명을 속히 철회하고, 그날 전교를 반포한 승지와 망단(望單)을 써 올린 전관(銓官)을 모두 무거운 벌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무 지나치다. 이런 경사를 빛내고 기쁨을 새기는 때에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이번 일은 절로 참작할 점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장령 임장원(任長源)이 또 홍낙임 등의 일을 가지고 아뢰었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총융사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북한 산성의 환곡에 대한 폐단은 그 정도가 너무나 심합니다. 이른바 환곡을 뉘어두고 그에 대한 이자만을 받아들이는 일[臥還], 환곡을 빼내어 유용하고 허위 문서를 꾸미는 일[反秩], 사사로이 나누어주는 일[私分], 도거리로 받아가는 일[都受], 남의 환곡을 대신 바치고 그 댓가를 불려 받는 일[防納], 다른 사람에게 옮겨서 주는 일[移施], 남을 시켜 대신 받는 일[代點], 허위 장부를 꾸며 횡령하는 일[虛逋] 등의 모든 폐단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올해의 새 환곡은 대부분 여러 해 묵은 환곡을 그대로 허위 문서를 만들어 놓은 것이므로 그 친족에게 물리지 않을 수 없으니, 실로 도민(都民)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단서가 됩니다. 이는 오로지 보환(保還)002) 과 부환(部還)003) 의 소치입니다. 해마다 당연히 나누어주어야 할 환곡이 2만 섬에 가까운데 이를 오로지 60, 70명의 보주인(保主人)의 손에 맡기니 각 사람의 이름 아래에 적어도 수백 섬씩이 돌아갑니다. 부환은 보주인들이 성 안의 무뢰배들을 거짓으로 꾀어서 많은 수량을 타가게 하여 모두 낭비하게 하고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 이르러서는 그 친족들에게 물립니다. 이 폐단을 없애지 않으면 군량미는 필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면 기사년004) 에 정한 절목(節目)에는 각 고을에 옮겨주는 것이 그래도 백성들이 제각기 받아가는 것보다 낫다 하여 서울 부근 기읍(畿邑)에 분배하여 내어주고, 남은 수량은 능군(陵軍)과 역졸(驛卒)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와서 다시 보환과 부환으로 만든 것은 지극히 부당합니다. 지금부터 옛 규례를 회복하여 각 고을에 모두 옮겨주고 능군과 역졸들이 제각기 받아가는 것도 폐단이 많으니 이것도 지방의 각 고을로 넘겨서 그 곳에서 받아 먹도록 해야겠습니다.
북한 산성의 평창(平倉) 부근에 사는 백성들과 부역을 진 무리들이 등환(等還)005) 이라고 일컬으면서 한 사람이 받아가는 수량이 수십 섬이나 됩니다. 이 역시 지방 고을의 예에 따라 통환(統還)006) 으로 나누어주어 함부로 받아가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다만 보환을 없애버리면 평창에서 모집하여 들어오게 한 백성들은 의지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됩니다.
평상시의 보주인들이 봄에는 한 섬에 3되[升]씩의 이자를 받아먹고 가을에는 2말[斗]씩을 받아먹는데 이를 전부 지방 고을로 옮겨주면 백성들에게 미치는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옮겨주는 환곡 중에서 1섬마다 봄에는 전처럼 3되를, 가을에는 1말씩을 보주인에게 제급(題給)하면 공사간에 양쪽이 다 편리할 것입니다.
다만 현재 산성의 군량이 과반수나 축나서 8만 섬의 군량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2만 섬도 되지 않고 이번에 받아들인 것은 겨우 3만 섬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이를 모두 지방 고을로 옮겨준 뒤에 한 번 흉년이나 만나고, 또 경기 감영에서 받아서 그대로 유치하겠다고 요청하거나, 바치는 기한을 물려주거나 돈으로 대신 바치기를 요청한다면 북한 산성에는 장차 남아 있는 곡식이 없을 것입니다. 고 상신 조현명(趙顯命)은 받아서 그대로 유치하는 것은 한때의 작은 은혜에 지나지 않고 산성에 곡식을 저장하는 것은 국가의 대계(大計)인만큼 그 일의 시행을 허락할 수 없다 하였고, 고 중신 원경하(元景夏)는 고을로 옮겨준 환곡을 수량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고을의 수령은 해유(解由)에 구애를 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진달하여 규정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의당 옛 제도를 다시 밝혀서, 도신이 받아서 유치시키겠다거나 바치는 기한을 물려달라거나 돈으로 대신 바치기를 요청하는 경우에는 역시 규정을 어긴 법조문에 따라 처벌하고, 본청(本廳)이 특별 환곡이라는 명목으로 사사로이 주는 경우에도 무겁게 처벌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환곡을 나누어주고 수량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묘당에서 절목을 만들어 계하(啓下)를 받아서 이를 준수하여 시행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이 일을 물었다. 좌의정 김이소가 그 말대로 따르고 수신(帥臣)을 모두 논죄할 것을 요청하니, 전교하기를,
"그 가운데서 아주 형편없고 가장 살피지 못한 자는 이방일(李邦一)이다. 그에게는 경들의 말대로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라. 이주국(李柱國)은 허위 문서를 꾸며 횡령한 환곡의 수량이 신해년과 임자년의 두 해에 가장 많았으니 살피지 못한 죄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방일에 비하면 불법을 저지른 죄상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으니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주국에게는 우선 관직을 삭탈하는 법을 시행하라.
보환과 부환을 혁파하는 일은 지금 이미 규정을 정하였으니, 이 뒤로 만일 규정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해당 총융사는 도형(徒刑) 3년에 처하여 귀양보내고 2년 동안 금고(禁錮)하며, 특별 환곡의 금령을 어기고 법을 범한 자도 같은 죄로 처벌하라.
해마다 환곡을 모두 받아들였다는 장계가 있는데도 유명무실함이 이러하다. 묘당의 문관 출신 비변사 낭청을 시켜 초기를 올리고, 임명하여 보낼 때에 창고의 물품을 조사하는 일도 규정을 정하도록 하라.
기내(畿內) 천 리의 지역도 백성들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도성 밑에 사는 백성들이겠는가. 이 뒤로 도민(都民)들은 절대로 환곡을 받지 말 것이요 설혹 강제로 환곡을 주는 경우에는 한성부에 와서 고발하여 해당 총융사의 죄를 따져 처벌하는 근거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보환과 능졸·역졸들이 불법으로 받거나 미리 지급하는 따위의 잘못된 규정을 모두 혁파하고, 경리청(經理廳)의 예에 따라 양주(楊州)·파주(坡州)·통진(通津)·인천(仁川)·부평(富平)·고양(高陽)·김포(金浦)·교하(交河)·안산(安山)·양천(陽川)·적성(積城)·포천(抱川)·과천(果川)·금천(衿川) 등의 14개 고을에 옮겨주고, 승창(僧倉)의 환곡은 예전대로 총섭(摠攝)을 시켜 주관하도록 절목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였다.
대사헌 임시철(林蓍喆)이 아뢰기를,
"전후하여 개성 유수를 죄의 경중에 따라 처분한 것은 실로 탐오를 징계하기 위한 법에서 나온 것이니, 수량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이미 법을 위반한 것이 있으면 전혀 징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유수 정범조(丁範祖)에게 파직시키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지평 박윤수(朴崙壽)가 아뢰기를,
"신이 동복현(同福縣)에서 막 교체되어 돌아왔는데, 읍민 이세옥(李世玉)은 집안이 몹시 가난한데도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를 섬깁니다. 손가락을 깨물어 병을 구완하였고 성실한 성품과 독실한 행실로 온 고을이 칭찬합니다. 그의 아내와 아들 네 사람도 모두 감화되어서, 세옥이 병들자 그의 아내와 아들들이 앞을 다투어 다리의 살을 베어 치료한 관계로 병이 곧바로 나았습니다. 한 집안에 5부자의 효행은 옛날에도 드물게 있는 일이니, 좋은 풍속을 세우고 세상 사람들을 격려하는 방도에 있어서 의당 권장하는 정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도신에게 사실을 채탐하여 보고하게 해서 표창하는 은전을 베푸소서."
하니, 따랐다.
정언 윤제동(尹悌東)이 아뢰기를,
"벼슬길의 적체가 날마다 더욱 심해져만 갑니다. 대체로 국초(國初)에는 처음 벼슬에 나가는 길이 매우 적었고 내직과 외직의 참상(參上) 자리는 문관과 무관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벼슬자리는 항상 여유가 있고 사람들은 한 곳에 오래 적체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 벼슬에 나가는 길이 점점 넓어져서 음관이 날로 많아짐으로 인해 음관의 수가 거의 문관·무관과 서로 비슷하여 세 갈래로 등용을 하다 보니, 한 번 쫓겨나면 되돌아오지 못하므로 권력자에게 청탁하는 풍습이 더욱 심해지고 억울한 처지를 풀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다시 변통하여 벼슬에 들어오는 길을 줄이지 않으면 참상관의 적체되는 폐단을 끝내 바로잡을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폐단을 바로잡을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말이 옳다. 묘당이 전조의 신하들과 함께 상의하여 확정하고 초기를 올려 품처하라."
하였다.
무신 겸 선전관 이광엽(李光燁)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인차외 만호(仁遮外萬戶)로 있었기에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두 고을의 병폐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두 고을은 녹용과 사향을 공물로 바치는데, 심약(審藥)이 제마음대로 조종하여 그 물품 대신 값을 받아 물품값으로 받은 돈은 북청(北靑)의 부유한 장사꾼에게 주고 부유한 장사꾼은 삼수·갑산에서 헐값으로 사향을 사들입니다. 녹용에 있어서도 물품의 값을 마련하여 바치니 그 폐단이 더욱 심하여져서 주민들의 태반이 고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년 10월이 되면 함흥(咸興) 지방의 부유한 장사꾼들이 삼수·갑산의 백성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고 노랑가슴 담비 가죽을 거두어들이는데, 반드시 그 이익을 노려 기필코 전부 받아내니 주민들이 만에 하나도 지탱하여 보전할 형편이 못 됩니다. 조정에서 북쪽 백성들의 가난하고 쇠잔한 형편을 걱정하여 무명을 내려보내면 부유한 장사꾼들이 빚을 받기 위하여 중간에서 탈취해가니, 백성들이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것은 모두 부유한 장사꾼들의 소행입니다. 그들의 그 지방 왕래를 절대 금지하고 더 받은 자는 빚을 준 문서를 불태우고 죄를 논하여 무궁한 폐단을 막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산삼과 녹용에 관한 폐단을 듣고 나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간사한 백성을 도백에게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방도도 역시 도백에게 좋은 방편을 따라 바로잡도록 하라. 그리고 해마다 북쪽의 백성들을 위하여 실어보내는 목화와 무명에 대해서 근래에 더욱 특별히 신칙하여 단속하였는데도 도리어 간사한 백성들이 독차지한 것은 매우 부당할 뿐만 아니라 또한 몹시 형편없는 짓이다. 이 역시 도백에게 네가 아뢴 대로 각별히 바로잡은 다음에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예전에 수정장(水晶杖)을 받드는 충의위(忠義衛)도 조참(朝參)에서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진술했었는데, 너 역시 시위하는 보잘것 없는 무변(武弁)으로서 임금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를 알고 있으니 지극히 가상하다. 그에 해당하는 벼슬을 병조 판서에게 승진시켜 천거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서유대(徐有大)를 주사 대장(舟師大將)으로 삼았다.
1월 10일 무술
변득양(邊得讓)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이득신(李得臣)을 형조 판서로, 구상(具庠)을 공조 판서로, 이치중(李致中)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월 12일 경자
현륭원에 참배하기 위하여 이날 신시에 대궐을 출발하였다. 지나는 길에 관왕묘(關王廟)를 들러 망해정(望海亭)에서 조금 머물렀다가 과천(果川)의 행궁(行宮)에 당도하였는데 날이 아직 저물지 않았다. 전교하였다.
"본현(本縣)에서 유숙하여 앉아서 첫닭이 울기를 기다려 떠나려고 하는데, 백성들에 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해를 만났으니 당연히 경축하는 뜻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묵은 환곡의 1년 몫을 탕감하여 주도록 하라."
장용영·훈련 도감·금위영의 세 군영에 속한 부대에서 반과(盤果)에 대한 금령을 범한 군사가 많았는데, 문관 출신의 비변사 낭청으로서 부정을 사찰하는 사람에게 적발되어 보고되었다. 세 군영의 장신(將臣)들을 잡아들여 매우 심하게 꾸짖고 내보냈다.
1월 13일 신축
첫닭이 울자 어가가 과천의 행궁을 떠나 사천(沙川) 행궁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수원 행궁에 도착하였는데 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
어가가 현륭원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향(香)을 피우려 할 적에 상이 간장이 끊어질 듯 흐느껴 울었다. 겨우 의식을 마치고 이어 원(園)에 가서 봉심하였는데, 상이 더욱 오열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자 곁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울면서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영의정 홍낙성과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나와 아뢰기를,
"지금이 바로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때입니다. 신들이 등으로 업어야겠습니다."
하고는, 그대로 보여(步輿)를 내오자 상이 이를 물리치고 곁에 모신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원에서 내려와서야 비로소 보여를 타고 재전(齋殿)으로 돌아왔다.
대신·각신과 약원이 의관을 거느리고 들어와 진맥을 하고 소합원(蘇合元)을 드렸다. 낙성이 아뢰기를,
"재전은 조섭하는 데에 불편하니 행궁으로 돌아가 지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서 하룻밤 자면서 사모하는 정성을 조금이나마 펴려고 하니 경들은 다시 더 말하지 말라."
하였다. 점심 때가 지나서 상이 편여(便輿)를 타고 구역 안의 여러 산기슭과 새로 정한 화소(火巢)를 두루 살펴보고 옛 향교의 터에 올라 각신 정민시 등에게 이르기를,
"이곳의 지형이 매우 아름답다."
하고, 훈련 대장 조심태에게 이르기를,
"오늘 여러 산기슭을 살펴보면서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나가며 두루 다 돌아보았는데, 새로 심은 나무들이 거의 모두 울창하게 자랐다. 지금부터는 다시 나무를 심느라 큰 힘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겠다."
하였다. 날이 저물어 재전으로 돌아와서는 예방 승지 이면응(李冕膺)과 대축(大祝) 어용겸(魚用謙)에게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1월 14일 임인
수원 행궁으로 돌아와서 본부의 유생과 무사를 시취(試取)하였다. 부(賦)의 제술에서 수석을 차지한 민영조(閔榮祖)와 무예에서 수석을 차지한 송복동(宋福同)을 모두 전시에 곧장 응시하게 하였다.
문관 출신 비변사 낭청인 홍대협(洪大協)·정만석(鄭晩錫) 등이 어가를 수행하는 제사(諸司)에서 마부와 말을 너무 많이 세운 것과 반과에 대한 금령을 위반한 자를 잡아서 보고하자, 유사에게 명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자 내각 제학 정민시가 아뢰기를,
"모든 군영의 군사로서 요패(腰牌)만 있고 장표(掌標)가 없는 사람에 대하여 비변사의 낭청이 모두 너무 많이 세운 것으로 논하였는데, 군사들은 요패가 있기 때문에 애당초 장표를 지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장표가 없는 것 때문에 너무 많이 세웠다고 한다면 많은 군사들이 누군들 장표가 없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1월 15일 계묘
상이 높은 곳에 올라 고을터를 바라보고 곁에 모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 6호였었는데 지금은 1천여 호나 되는 민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 되어 어느덧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으니 지리(地理)의 흥성함이 절로 그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
하였다. 인하여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성 쌓을 터를 두루 살펴보고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산꼭대기의 가장 높은 곳을 골라 잡았으니 먼 곳을 살피기에 편리하다. 기세가 웅장하고 탁트였으니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장대(將臺)라고 이를 만하다. 지금 깃발을 꽂아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인가를 철거하자는 의논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같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007) 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花)자와 화(華)자는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 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가 마치 꽃송이와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유천성(柳川城)은 남북이 조금 길게 하여 마치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면 참으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어제 화성과 유천의 뜻을 이미 영부사에게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성을 좁고 길게 하여 이미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고 나면 북쪽 모퉁이의 인가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곳에 세 굽이로 꺾이어 천(川) 자를 상징한 것이 더욱 유천에 꼭들어맞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아(貳衙)008) 에 이르러 배종하는 시임과 원임의 대신 홍낙성 등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까 팔달산에서 멀리 바라보니 영부(營府)가 웅장하고 여염(閭閻)이 즐비하여 참으로 큰 도회지였다. 5, 6년 안에 취락을 이루고 도회지를 형성하는 것이 이렇듯 빨랐으니 내 마음의 기쁨은 진실로 한량없다. 성터의 형세에 대해서는 이제 막 감독하는 당상관에게 하교하였다. 이 성을 쌓는 것은 장차 억만 년의 유구한 대계를 위함에서이니 인화(人和)가 가장 귀중한 것이다. 또 먼 장래를 생각하는 방책을 다해야 하는데, 아까 성터의 깃발 세운 곳을 보니 성 밖으로 내보내야 할 민가가 있었다. 어찌 이미 건축한 집을 성역(城役) 때문에 철거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인화를 귀중히 여기는 뜻이 아니다. 성지(城池)의 남쪽과 북쪽 사이의 거리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가까운 결점이 있으니, 먼 장래를 생각하는 방도에 있어 더욱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화산과 유천이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우리 나라의 억만 년 유구한 태평 시대를 여는 기업이 될 것이다. 성을 쌓을 때 버들잎 모양을 본뜨고 내천 자의 형태를 모방하여 구불구불 돌아서 기초를 정하고 인가들도 성 안에 들어와 살게 해야 할 터인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낙성 등이 아뢰기를,
"전하의 계책은 신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아의 뒤에 있는 작은 동산에 올라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평지 가운데서 이 언덕이 갑자기 우뚝 솟아올라 이아의 터를 만들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하였다. 이어서 일자문성(一字文星)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의논드리기를,
"이곳의 일자문성은 겹으로 되어 있고 용연(龍淵)의 모래 삼각주[砂角]가 왼쪽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와서 옷깃을 여민 형국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문성(內文星)에 성을 쌓되 성의 형태를 조금 축소하여 모래 삼각주에 뒤지게 하고 외문성(外文星)에는 따로 토성(土城)을 쌓아 내성을 보호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유수 조심태에게 이르기를,
"이 성을 곧장 외문성에 쌓되 용연의 모래 삼각주와 내문성을 넘어가게 해서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좋겠다."
하였다. 인하여 용연에 나아가 귀봉(龜峰)을 가리키면서 심태에게 이르기를,
"오른쪽은 귀봉이고 왼쪽은 용연이어서 거북과 용이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그 이름 역시 우연하지 않다."
하였다. 대체로 용연 기슭은 앞면이 석벽(石壁)으로 되어 있고 아래에는 작은 소(沼)가 있는데, 그 물은 광교산(光敎山)에서 흘러나와 석벽 아래에 이르러 물이 돌아흐른다. 이곳에서 휘돌아나와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읍치(邑治)를 경과하는데, 기슭을 따라가다가 꺾여지는 곳에 장차 다리를 걸쳐놓고 성을 쌓아 수문(水門)을 만들려는 것이다. 상이 심태에게 이르기를,
"일자문성이 두 겹으로 되어 있으니 더욱 두껍고 공고한 기상을 보겠고, 용연의 기슭이 용의 머리로 되어 있고 석벽이 웅크린 것처럼 솟아 있으니 풍기(風氣)가 응결되어 매우 활기찬 기상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겸하여 수해(水害)를 막는 공이 있게 되었으니 마치 이 성쌓는 역사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곳인 듯하다. 지리와 지세가 매우 좋아서 오늘 살펴본 뒤로 나의 마음은 매우 만족스럽다. 성을 쌓는 역사의 큰 줄거리는 이러하니, 예컨대 여기에 윤색(潤色)을 더하는 데에 있어서는 이를 맡아 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미륵당 고개[彌勒堂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잠시 쉬면서 승지에게 이르기를,
"언제나 현륭원에 갔다가 돌아올 적에는 나의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더디어지고 배양재[陪養峙]를 지나 이 고개에 이르면 절로 고개를 들고 서성거리게 된다."
하였다. 사천(沙川) 행궁에 이르러 잠시 쉬고 과천 행궁에 이르러 오늘밤부터 내일밤까지 통행금지를 완화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성문은 관광하는 사람들이 다 들어가기를 기다려 빗장을 잠그라고 명하였다. 망해정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환궁하니 밤 2경이 넘었다.
상언(上言)한 문건 87통을 결재하였다.
1월 16일 갑진
신응주(申應周)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정대용(鄭大容)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각사와 각영에서 계축년의 회계 장부를 바쳤다. 호조·양향청·선혜청·병조·훈련 도감·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에 현재 남아 있는 물량이 황금은 2백 99냥, 은자(銀子)는 41만 9천 1백 28냥, 돈은 1백 14만 4천 1백 67냥, 명주는 96동(同) 17필(疋), 무명은 3천 5백 94동 27필, 모시는 47동 28필, 삼베는 1천 4백 54동 32필, 쌀은 26만 9천 6백 19섬, 좁쌀은 1만 1천 5백 10섬, 콩은 2만 8천 7백 37섬, 피잡곡(皮雜穀)이 9천 5백 38섬이었다.
1월 17일 을사
사폐하는 병·수사와 수령들을 소견하였다.
면천(沔川)에 사는 1백 8세 된 노인 이동형(李東馨)에게 숭정 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특별히 제수하여 지중추부사의 벼슬을 주라고 명하였다. 이어 도백으로 하여금 봄철에 순시를 나갈 때 직접 안부를 묻고 쌀·고기·옷감을 주고, 그의 아들 81세 된 노인 이정설(李廷卨)에게는 가자하도록 하였다.
대사헌 임시철이 상소하기를,
"더없이 엄한 것은 법이고 지극히 중한 것은 의리입니다. 아, 저 홍인한(洪麟漢)과 김귀주(金龜柱)는 이 얼마나 큰 역적이며 간악한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그의 숙부나 조카들이 응당 연좌될 죄에서 요행이 벗어난 것만도 이미 형벌을 잘못 시행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갑자기 죄를 씻어주고 순서를 뛰어넘어 벼슬에 임명하여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처럼 해주었습니다. 전에 없던 이런 경사를 만나 두 집안 사람들을 기억해주는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자전(慈殿)과 자궁(慈宮)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경사를 축하하려는 고심과 지성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법이 무너질 염려가 있고 의리가 묻혀버릴 걱정이 있으니 원컨대 내린 명령을 속히 철회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 첨사 김서정(金瑞貞)이 상언(上言)하기를 ‘양주(楊州)에 방어영을 설치하는 데에 대한 논의는 있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또 수어사가 출진(出鎭)했을 때에는 양주가 방어영이 되었다가 도로 들어온 뒤에는 방어영을 광주(廣州)로 이속시켰습니다. 도로 소속시키고 안하고는 따질 것 없이 북관(北關)으로 가는 큰 길에서 양주가 요충입니다. 또 세 개의 사잇길이 있으니 하나는 평강(平康) 삼방곡(三防谷)으로 통하고 하나는 낭천(狼川) 주소령(注所嶺)으로 통하고 하나는 회양(淮陽) 법수현(法首峴)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읍치(邑治)의 뒤로부터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북쪽에는 울대현(蔚垈峴)이 있고 서쪽으로는 백석면(白石面)을 따라 곧장 관서(關西)로 통하고, 또 하나는 삭녕(朔寧) 경계로부터 해서(海西)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마치 한 곳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수레바퀴살처럼 이 고을에서 여러 갈래로 길이 뻗어 있는데, 도성(都城)으로부터 철원(鐵原)까지 2백 20여 리의 사이에 방어가 될 만한 곳이 하나도 없으니 정말로 허술한 근심이 있습니다. 요충을 설치하는 방도에 있어서 양주를 방어영으로 승격시키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다만 양주는 수어청의 중영(中營)으로서 전영(前營)인 광주와 후영(後營)인 죽산(竹山)과 함께 3영(營)으로 편제가 되어 있는데, 지금 만일 방어영을 설치하면 수어청의 중영은 장차 귀속될 곳이 없게 되니 이것이 구애되는 단서가 됩니다. 그런데 만일 파주(坡州)의 방어영이 총융청의 중영을 겸하고 있는 것을 끌어다가 구실로 삼는다면 이것도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총융청에 비록 북한 산성이 있기는 하나 경리청(經理廳)으로부터 총융청에 이속되었기 때문에 영장(營將)은 본래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는 규정이 없습니다. 수어청은 남한 산성 안에 세 영장의 정해진 근무지가 있어서 만일 조련 연습을 할 때가 되면 세 영장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게 되므로 이 역시 예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비장(裨將)과 장교 이하의 뒤를 돌봐주는 자본을 더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 갈라서 맡길 방도가 없으니, 이러나 저러나 가볍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그만두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월 19일 정미
춘당대에 나아가 서총대(瑞蔥臺)의 활쏘기 시험을 거행하였다.
형조가 전교에 따라 원리(院吏)009) 의 죄를 다스리면서 하루에 곤장 1백 50대를 쳤다. 상이 이 말을 듣고 승지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형정(刑政)은 알맞게 정한 법이 있어서 장죄(杖罪)에는 1백 대를 넘지 못하고 형신(刑訊)에는 30대로 한정하며, 겸하여 고문(拷問)하는 기간도 며칠로 한정한 것이 바로 일정한 법이다. 이미 1백 대를 친 뒤에 다시 다스리라는 명이 있으면 당연히 초기로 품지하여야 하는데, 형조가 이를 시행하지 않았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 뒤로는 형신에는 30대를 치고 장죄에는 1백 대를 치고 나서 다시 죄를 다스리라는 특별 전교가 있으면 품지하여 거행하는 것으로 규정을 삼으라."
하였다.
1월 20일 무신
상이 장차 경모궁의 탄신일에 참배하려 하자 시임·원임 대신과 약원·내각의 관원들이 면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약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저녁에 경모궁을 참배한다는 명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밤을 꼬박 새우며 걱정하다가 날이 새기를 기다려 달려와 바로 앞에서 그 명을 속히 철회하는 말씀이 있기를 바랐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면대하기를 청하였건만 접견을 이루지 못하여 지극히 초조하고 절박한 심정을 누를 수가 없습니다. 이해 이달 이날에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정리와 예절을 펴고자 하시는 전하의 타고난 효성이야 누군들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삼가 생각건대 지난번 경모궁에 제사를 드릴 때와 일전의 현륭원 제향 때에 곁에서 모신 신하들이 놀라고 초조하여 경황이 없었는데, 다행히 약을 조금 드신 데에 힘입어 전하의 옥체가 평안하시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지난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진정하지 못하는데, 만일 내일도 무궁한 효성으로 슬픔을 억누르기 어려운 때를 당하여 또다시 경모궁의 제사 때와 현륭원의 제향 때와 같은 증후가 있게 되면 전하의 옥체에 대한 손상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매년 이날 참배할 적이면 전하께서 슬픈 얼굴로 목메어 흐느끼시되 19년을 마치 하루처럼 하시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더구나 올해의 이날은 경모궁의 제사와 현륭원의 제향을 지낸 뒤이니 그 감회가 어떠하겠습니까. 지난 일을 미루어 볼 적에 반드시 옥체에 손상이 있을 것을 환히 알면서도 힘써 정성을 쌓아 상의 마음을 권하여 돌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호하는 직분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임금의 모습이 순임금의 국그릇이나 담장에도 나타나 보였던 것은 곧 사모하는 그 모습이 어디에나 나타나는 증거이니, 참배를 하고 안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오늘 우러러 체득해야 될 점은 도리어 부모가 자식이 병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데에 있지 않겠습니까. 참배했을 적에 가슴에 치미는 증세가 예상대로 올라오고 뭇사람들이 전처럼 어쩔 줄을 몰라할 것을 전하께서도 필시 환히 아실 터인데, 그래도 참배를 하신다면 우리 자전과 자궁께 끼치는 걱정은 어떠하며 또 밝게 오르내리시는 우리 선왕의 혼령께 끼치는 걱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전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아마 신들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철회하실 것입니다. 합문 밖에 와서 서로 이끌고 함께 호소하니 잠시 불러서 접견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째서 이러는가. 애초에는 하룻밤을 묵으려고 하였으나 당일에 참배한다는 명을 내린 것은 그래도 참작하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즉시 물러가라. 만일 합문 밖에 머물러 있으면 이때 나의 마음은 심란스러워질 뿐이니 어찌 나의 마음을 체인(體認)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경은 나이가 높은 원보(元輔)로서 어찌 내가 다 말하기를 기다려서 체인하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세 차례나 대면하기를 청하였으나 미약한 정성이 미치지 못하여 윤허하시는 비답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전교를 거듭 내리시니, 신들은 더욱 초조하고 절박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자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 이에 감히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자궁의 앞에 호소하려 하오니 신들의 외람된 죄는 만 번 죽어도 가볍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미처 여쭙지도 못하고 벌써 떠날 준비를 명하였는데, 경들은 어째서 이렇게 하는가."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뜰에서 혜경궁에게 계달하기를,
"이해 이날 전하의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새로워져서 경모궁에 참배한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타고나신 뛰어난 효성과 생신을 맞이한 느낌으로 인하여 몸소 참배하심으로써 조금이나마 정리와 예의를 펴려고 하시니, 오늘의 모든 신하들이 누군들 감동하여 체인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모든 신하들의 마음이 매우 초조하고 절박한 점이 있어서 여러 차례 면대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접견을 허락하지 않으시므로 호소할 길이 없어 더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기에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다급한 말로 자궁께 우러러 진술합니다. 일전 현륭원에 직접 제사를 드릴 때의 경황없고 초조했던 정상에 대해서는 어머님의 뜻을 잘 받드시는 우리 전하의 효성으로 혹시라도 어머님의 마음에 걱정을 끼칠까 염려하여 아마 어머님께 알려지지 않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 자궁께서 어떻게 굽어 살필 수 있었겠습니까. 청컨대 그 내용을 대략 말하여 내일 참배하는 일을 결단코 만류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출궁(出宮)하던 날에는 밤새도록 거둥하여 마치 무엇을 찾는 것처럼 허둥지둥 정신이 없었고, 현륭원에 이르러서는 아침 수라도 들지 않은 채 겨우 위패(位牌) 앞에 나가자마자 눈물이 먼저 흘러내렸고 향을 피울 때에는 엎드려 흐느끼면서 목이 메이고 가슴이 막혀서 의절(儀節)을 행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대신과 근신들이 죽을 죄를 무릅쓰고 좌우에서 부축하여 겨우 침문(寢門)을 나와서는 그대로 원(園)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때의 이 정경은 사람의 마음을 지닌 자로서는 차마 우러러볼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능상 가까이에 이르러서는 슬픔을 더욱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전하께서는 기운과 정신을 잃기까지 하셨는데, 그때의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탕제(湯劑)를 한 번 올리고 강변(薑便)을 두 번 올렸으며, 차를 끓여 올린 것이 또 몇 번인지도 모를 정도였건만 그때마다 물리치고 들지 않으시므로 점점 더 초조해져서 평상시의 예절을 차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신이 직접 업으려고까지 하였고 혹은 상의 손을 잡고 혹은 어의(御衣)를 부여잡기까지 하였으나, 뭇신하들의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여 상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날이 이미 저문 뒤에는 모든 신하들이 ‘전하께서 이때의 마음으로 자궁(慈宮)의 이때의 마음을 우러러 생각한다면 결코 감정대로 절도를 넘어서 이처럼 자신을 가볍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는 뜻으로 누누이 아뢰고는 죄를 무릅쓰고 부축하여 겨우 재전(齋殿)으로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그날의 일을 자궁께서 직접 보셨더라면 자궁의 안타깝고 절박하실 그 마음을 어찌 뭇신하들의 마음에 비하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심장과 간장이 모두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내일 경모궁을 참배하게 되면 사모하는 효심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 요전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이고, 또 그날의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 일이 다시 빚어질 것입니다. 한 번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옥체의 손상을 받은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아랫사람들의 놀란 마음도 여태까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또 한 번 있게 되면 종묘는 어떻게 하며 사직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늘 뭇신하들이 자궁의 마음이 바로 전하의 마음이요 전하의 마음이 바로 자궁의 마음임을 모르는 바가 아닌 만큼 이때에 이런 말씀을 어떻게 차마 올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라의 중함을 깊이 생각하시고 슬픔을 애써 억제하는 방도를 생각하시어 전하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도 우리 자궁께 달려 있고 전하의 마음을 돌리는 것도 우리 자궁께 달려 있습니다. 원컨대 자궁께서는 전하를 잘 이끌어서 기필코 참배한다는 명을 속히 중지하게 하여 주시기를 천만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혜경궁이 언문으로 비답을 내리기를,
"이제 곧 내전에서 권고하겠다."
하였다.
상이 장차 경모궁에 나아가려고 하자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중지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경모궁에 도착하여 참배를 마치고 재전에 머무르자 약방·내각·정원에서 면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시임·원임 대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서 혜경궁에게 아뢰기를,
"뭇 신하들의 마음이 초조하고 절박하여 서로서로 이끌고 와서 호소합니다. 권고하겠다는 비답을 받고 전하의 마음을 힘써 돌릴 것이라고 우러러 기대하였으나, 상의 수레가 벌써 재실에 나아갔고 인하여 밤을 지내면서 의식을 거행하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당일에 환궁할 때에도 오히려 지극히 안타깝고 절박함을 누르지 못하는데, 하물며 지금 이틀을 재전에서 지내면서 새벽녘에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효성스런 마음이 더욱 가이없을 것입니다. 전하의 옥체가 거듭 손상을 입는 것이 더더욱 어떠하겠습니까.
뭇신하들이 아무리 우매하다 하더라도 우리 자궁과 전하의 오늘의 마음은 더욱 더 억제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이야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이달 이날에 있어 우리 자궁의 마음을 너그럽게 위로할 분은 오직 우리 전하뿐이고 우리 전하의 마음을 너그럽게 위로할 분은 오직 우리 자궁뿐입니다. 당연히 아침 저녁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이렇게 저렇게 위로를 드려야 하는데 이 때에 자리를 떠나 밤을 지샌다면 또다시 일전의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자궁의 지극히 자애로우신 덕으로 여기에 생각이 미친다면 필시 신하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서둘러 상의 마음을 돌리게 할 방도를 생각하실 것입니다. 애가 타고 가슴이 막혀 다 함께 대궐의 뜰에 나와 자궁의 앞에서 일제히 두서없는 말로 호소하오니, 원컨대 자궁께서는 전하의 마음을 인도하여 기필코 당일로 환궁하게 하신다면 종묘 사직에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하니, 혜경궁이 언문으로 비답하기를,
"만일 세상에 살아 있는 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의당 환궁할 듯하니 이런 뜻으로 우러러 청하겠다."
하였다.
상이 승전색에게 구두로 전교하기를,
"지금 정원에서 올린 주본(奏本)을 듣건대, 경들이 이때에 이렇게 자궁께 소란을 떨고 있으니, 나의 마음은 더욱 어떠하겠는가. 경들이 즉시 물러가면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환궁하겠다. 이때에 이처럼 소란을 떨어 나의 마음을 더욱 스스로 진정할 수 없게 하니 자궁의 마음이야 또 어떠하겠는가. 밤을 지내려는 조치도 경들이 나의 마음을 돋군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경들이 만일 물러가지 않는다면 어찌 도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사관이 대궐에 있는 여러 대신들에게 가서 전달하였다. 낙성 등이 아뢰기를,
"신들의 마음이 애타고 절박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백관을 거느리고 자궁께 호소했던 것인데, 비답을 받고 보니 말씀의 뜻이 매우 슬퍼서 감격의 울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비답을 받들고 와서 면대하기를 요청합니다."
하므로, 비답하기를,
"어떻게 감히 이때에 자궁의 마음을 받들지 않겠는가마는 현재 가슴에 치밀어오르는 기운을 자신의 힘으로 수습할 수가 없다. 몇 마디의 비답도 때가 지나면 불러주어 쓸 수 없는 형편임을 바로 여러 신하들이 아는 바이다. 경들은 즉시 물러가라. 지금의 정신으로도 체모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야 어떻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청(庭請)하는 일은 아주 온당치 않다. 이는 굳이 거절하는 말이 아니니 즉시 중지하라."
하였다.
정청하여 재차 혜경궁에게 아뢰자, 상이 비로소 환궁하였다.
1월 21일 기유
우레가 치고 번개가 쳤다.
1월 22일 경술
약원의 세 제조를 소견하였다.
사폐하는 곤수(閫帥)를 소견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를 소견하고 전에 올린 차자를 봉하여 돌려주었다. 이에 앞서 종수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홍낙신(洪樂信)·홍낙임(洪樂任)·홍낙윤(洪樂倫)에게 품계를 올려 벼슬을 주라는 명에 대하여 거룩한 시대에 이러한 조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인심은 안정되지 않고 세도는 한심스럽기만 하니 신이 이제 길을 떠날 때를 당하여 어떻게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까.
아, 을미년과 병신년의 역변(逆變)은 전고에 없었던 변입니다. 큰 역적의 아들과 조카가 목숨을 보전하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것인데, 더구나 직접 흉모를 부려 죄인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는 홍낙임 같은 자이겠습니까. 신은 앞으로 한 권의 《명의록(明義錄)》을 읽을 곳이 없어지게 될까봐 걱정이 됩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저도 모르게 몸에 소름이 끼칩니다. 신이 비록 변변치는 못하지만 어찌 전하께서 자궁의 마음을 위로함에 있어 최선을 다하시는 뜻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성인은 어버이를 섬기는 데 있어 도리에 위배되지 않게 하는 것을 효성으로 여기는데, 의리의 요체를 환히 꿰뚫어 보시는 전하로서 어찌하여 이 일이 성인의 효성이 아니라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생각건대 자궁의 훌륭한 덕으로서 전하가 더욱 성인이 되시기를 바라는 지극한 심정에 있어 어찌 당신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로 인하여 법을 훼손하는 것을 걱정하고 안타까와 하시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앞서 내린 명을 속히 철회하소서."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종수가 입시하여 아뢰기를,
"현륭원에 제향을 올릴 때 신하들이 안타깝고 절박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실정을 듣고 신하된 마음에 놀랍고 걱정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한강가에서 현륭원에 가는 행차를 맞이할 때 가마 앞에 나가서 안부를 여쭤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설 전에 고을과 도를 경유하여 올린 상소와 연초에 떠날 때를 당하여 올린 차자에 대한 비답을 모두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황송하여 감히 문안을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전에 올린 상소는 이미 연신(筵臣)을 시켜 회답하게 하였으나, 세초에 올린 차자에 대해서는 그 차자의 말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 어찌 헤아림이 없겠는가. 나의 마음은 경이 알 것이고 경의 마음은 내 또한 알고 있는데 경은 어찌 많은 말을 하는가."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신도 전하의 뜻을 헤아리고 있기에 처음에는 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끝내는 주저하면서 했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비답을 주시니 신이 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의당 처리하는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봉하여 돌려주겠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신이 막 행장을 꾸려서 시골로 돌아가려던 즈음에 약원이 들어가 진맥한다는 말을 듣고 문안을 드리기 위하여 들어왔는데, 이렇게 조용히 조섭하시는 가운데 어떻게 감히 긴 이야기를 늘어놓아 전하께 응대하는 수고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신이 한마디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 여름의 일에 대하여 전하의 ‘털끝만큼의 차이가 아주 엄청난 잘못으로 된다.[差毫謬千]’는 등의 전교를 신은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하의 탁월한 효성과 고명한 학문은 모두 인(仁)에 정밀하고 의(義)에 익숙한 경지에서 이룩된 것이기에 신은 더욱더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바로 신이 제 주장만을 집요하게 가졌던 소치로 저도 모르게 의리를 공박하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감히 다시 이 일을 제기하지 않겠습니다마는, 신이 만일 저의 어리석은 견해를 굳게 지킨다면 신만 낭패를 당할 뿐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서로 잘못 유도되어 반드시 신 때문에 낭패를 당하는 사람이 많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진실로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다시는 감히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만일 다시 이 일을 제기한다면 신은 어떠한 인간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막힘없는 식견으로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은 늦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경이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의미에서 꼭 한 편의 글을 지어 간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지금 이후로는 이 일을 다시는 글로 쓰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문형(文衡)을 집에서 천거하는 것은 드문 예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과연 주저하였으나 바로 정원이 전례를 끌어다가 아뢰었기 때문에 곧장 후보자를 불러주었습니다. 신과 고 정승 이성원(李性源)은 이휘지(李徽之)에게 천거를 받았고 황경원(黃景源)과 서명응(徐命膺)은 김양택(金陽澤)에게 천거를 받았는데, 아마 모두 집에서 천거했던 듯하며 품계도 서열에 맞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형의 직임은 중한 것인데 도당(都堂)에서 명단을 바꾸고 서열을 고치는 것은 천거를 신중히 하는 뜻이 아닐 듯하기에 신이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째서 단일 추천(單一推薦)으로 하지 않았는가?"
하자, 종수가 아뢰기를,
"심환지(沈煥之)에 대해서는 본디 그의 병통을 아는 터이고 또 문장에 있어서도 갑작스런 경우에 대처하여 재빨리 짓는 재주도 없으나 역적을 성토하는 한 가지 일만큼은 확고한 주관을 세웠기 때문에 과연 으뜸으로 추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홍양호(洪良浩)의 문장에 있어서는 곧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제일인 까닭에 신이 두 사람을 다같이 추천한 것인데 이는 인재를 아끼는 공변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밖에도 갑작스런 경우에 대처하여 재빨리 글을 짓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 있기는 하나 외방에 있으므로 제때에 미쳐 오기가 어려운 까닭에 거론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형의 직임은 단지 문재(文才)만을 취해서는 안 된다. 선비들을 진퇴시켜 조정에 필요한 인재를 얻는 길이 오로지 문형에게 달려있다. 그런데 현재 조정 신하들 중에서 옛사람의 글을 많이 읽은 사람으로는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전하의 하교가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이병모(李秉模)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판중추부사 김종수가 아뢰기를,
"문원(文苑)의 옛 관례에 의하면 받은 권점(圈點)이 같을 경우 품계에 따라 임명한다는 말은 문형도 이미 그 말이 정확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대저 전임 문형이 문형의 후보자를 추천만 하고 권점을 치는 데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곧 종전에는 아주 드문 예입니다. 이제 만일 전임 문형이 후보자를 추천만 하고 권점을 치는 데에는 참가하지 않는 때에 후보자의 명단과 순서를 바꾸어놓는 규정을 새로 열어놓는다면 이는 문형을 선출하는 것이 추천하는 데에 있지 않고 권점을 치는 데에 달려있게 됩니다. 문원의 격례(格例)가 가장 엄격하기에 신이 결단을 못 내리고 유보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형을 선발하는 원칙을 소중히 하는 점에 있어서는 경의 말도 근거가 있으니 이 권한을 경은 주장하도록 하라. 거꾸로 추천한 예도 없지만 순서를 바꾼 것도 전례가 없으니, 이번에 명단을 바꾸지 말 것이며, 이 뒤에도 거꾸로 추천하지 말도록 하는 일을 문원의 고사에 기재하라."
하였다.
1월 23일 신해
동지중추부사와 첨지중추부사의 자리를 열 개 더 만들어 돌려가며 노직(老職)을 임명하게 하였는데, 이는 병조 판서 서유방(徐有防)의 요청을 따른 것이었다.
이조 참판 심환지(沈煥之)를 체차하고 정범조(丁範祖)를 대신 임명하였다.
1월 24일 임자
차대하였다. 상이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에게 이르기를,
"조진관(趙鎭寬)의 상언(上言)에 대한 회계 내용을 경들에게 자문하여 처리하려고 한다. 대저 조엄(趙曮)이 그때에 전장(銓長)으로서 전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일을 하였기에 탐오를 따지는 한 가지 일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우선 처리하기에 급급하여 전임 도신의 말만을 믿고 처리하였었다. 애당초 어사를 보내서 조사하지 못하였으므로 조엄의 장오에 관한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다."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평양 감사로 있으면서 대강 들은 바에 의하면 그가 원망을 얻게 된 것은 오로지 관아의 빚을 받아들인 한 가지 일에 연유되었습니다. 예컨대 매달 분배하여 조치한 따위의 일을 가지고 본다면 잘 처리한 일도 많았습니다."
하고, 행 사직 이문원(李文源)은 아뢰기를,
"신은 조엄과 대대로 혐의가 있는 관계이지만 공사를 논함에 있어서는 혐의 때문에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귀양살이를 할 때에 대략 들으니, 그는 여러 가지 필요없는 경비를 줄이고 숱한 국가의 빚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도내의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던 것이요, 탐오에 대해서는 억울하다고 이를 만한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는 떳떳한 법이 있으니 의당 어사를 보내어 자세히 조사하여 처리해야 한다. 어사로서 적당한 사람을 경들이 한두 명 선발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소 등에게 이르기를,
"일전에 김 판부사를 불러 접견하였는데 판부사가 말하기를 ‘재작년 여름 이후에 전개되었던 일에 있어서, 털끝만큼의 차이가 엄청난 잘못을 가져온다[差毫謬千]는 전하의 하교를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하의 고명한 학문과 탁월한 효성에 대하여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살게 되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것으로서 비단 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점차 서로 잘못 유도되면 장차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뒤에는 다시 이 일을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은 글을 지어서 보관하라.’고 하였더니, 판부사가 ‘이 일은 다시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글로 남기는 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판부사의 말이 이러하니 경들은 많은 복을 받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래서 경들을 위하여 그의 말을 외워주는 것이다."
하니, 이소와 우의정 김희(金憙)가 아뢰기를,
"세도를 위하여 무궁한 걱정을 하였었는데 김 판부사가 이렇게 아뢰었다니 지극히 다행스럽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기묘 명현(己卯名賢) 중에 뛰어난 종친 세 사람은 바로 숭선정(崇善正) 이총(李灇)·시산군(詩山君) 이정숙(李正淑)·강녕 도정(江寧都正) 이기(李祺)입니다. 그런데 숭선정과 시산군은 모두 자손들의 상언에 의하여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받았으나, 강녕 도정만은 그의 후손인 고 정승 이창의(李昌誼) 형제가 늘 은혜를 구하는 것을 혐의로 여겨 일체 청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똑같은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두 종신(宗臣)은 모두 시호를 받았는데 강녕 도정만 여기에서 빠졌으니 참으로 은전에 흠이 되는 일입니다. 똑같이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거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교서관이 활자(活字)로 찍은 삼경과 사서를 바쳤다. 이 책들은 계축년010) 초여름에 처음으로 인쇄를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인쇄가 끝난 것이다. 전교하기를,
"이 책들을 활자로 인쇄한 것은 우리 나라에서 세 번째 있는 일이다."
하고는, 명하여 인쇄를 감독한 각신 서영보(徐榮輔)에게 말을 하사하고 내각과 외각(外閣)011) 의 신하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도록 하였다. 이어서 명하여 서울과 지방에 걸쳐 규장각·홍문관·사고(史庫)·성균관과 도산 서원(陶山書院)·석담 서원(石潭書院) 및 대로사(大老祠)에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태종(太宗)계미년012) 에 경연(經筵)에 있던 《시경》·《서경》·《좌전》의 고주본(古註本)을 자본(字本)으로 삼아 이직(李稷) 등에게 명하여 10만 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이 계미자(癸未字)이다. 세종(世宗)경자년013) 에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개주(改鑄)하였는데 이것이 경자자(庚子字)이고, 갑인년014) 에 경자자의 글자가 잘고 촘촘하다는 이유로 경연에 소장되어 있는 《효순사실(孝順事實)》과 《위선음즐(爲善陰騭)》 등의 책을 내다가 자본으로 삼아 김돈(金墩) 등에게 명하여 20여만 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이 갑인자(甲寅字)이다. 하나로 완성된 그 활자를 3백여 년 동안 써오다 보니 세월이 오래되어 점차로 글자의 모양이 이지러지게 되었다. 그러자 영종(英宗) 때에 상이 세손(世孫)으로 있으면서 갑인자를 바탕으로 삼아 운각(芸閣)으로 하여금 15만 자를 주조하여 보관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임진자(壬辰字)로서 바로 경서 정문(經書正文) 등의 책을 찍은 인본(印本)이다. 그리고 상이 즉위한 원년015) 에 다시 갑인자를 바탕으로 삼아 15만 자를 관서(關西) 지방에서 주조하여 내각에 보관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정유자(丁酉字)로서 곧 《팔자백선(八子百選)》 등의 책을 찍은 인본인데 지금 또 경서를 인쇄하였다.
명하여 삼경과 사서 각 한 부씩을 주합루(宙合樓)에 보관하도록 하고 각신에게 이르기를,
"삼가 잘 보관하라. 옛날 영릉(寧陵)016) 에는 《심경(心經)》을 순장(殉葬)하였고 병신년017) 에 선왕 능에는 《소학(小學)》을 순장하였는데, 나는 장차 그 뜻을 계승하려고 한다."
하였다.
명하여 알성시(謁聖試)와 경과(慶科)의 무과 초시(武科初試)를 선조(先朝) 정해년018) 의 예에 따라 합쳐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이번의 경과와 알성시의 무과 초시를 한날 시험장을 열 경우 서로 방해가 안 될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장용 대장 김지묵(金持默), 금위 대장 이한풍(李漢豊), 어영 대장 이경무(李敬懋)에게 물었더니, 여러 장신들이 말하기를 ‘무과 초시의 시험을 끝마치는 데에 대한 더디고 빠름은 오직 과거 규정 중의 각 무예 종목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번의 초시와 회시를 보이는 사이의 날짜가 촉박하여 주선하기 어려운 가운데 두 과거의 초시를 동시에 같이 설행한다면 거자(擧子)들이 숨돌릴 틈도 없어 몹시 혼잡해지는 폐단이 틀림없이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정시(庭試)의 초시는 전에 정한 날짜대로 설행하고 알성시의 초시는 2, 3일쯤 뒤로 물려서 과장을 열면 이쪽 저쪽을 왕래하면서 전후로 시험에 응시할 수 있으므로 숨돌릴 틈도 없는 황급한 폐단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알성시의 규정에서 예컨대 강서(講書)·기추(騎蒭) 등의 무예 시험이 없게 되면 거의 회시를 보이기 전에 합격자를 발표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네 군데의 시험장으로 나누어 함께 시험을 보일 적에 거자들이 분주하여 지장을 초래하는 점을 특별히 생각하여 응시자의 명단을 받은 처음에 미리 방(榜)을 붙여 알려주고, 정시의 초시 가운데에서 정시와 알성시에 응시할 인원수를 뽑으면 거자의 무리들도 억울하다는 탄식이 없을 듯하다.’ 하였는데, 신도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식년시(式年試)는 그 규정이 절로 다르므로 경과의 초시를 합쳐서 시취하기가 곤란하여 시험장을 네 군데로 나누어 보인 예가 있으나, 알성시와 경과의 초시는 합하여 설행한 예가 많다. 비록 눈으로 보고 기억할 수 있는 가까운 예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선왕 정해년에 있었던 알성시 때 경과의 초시도 합하여 설행하였다. 이번에는 이 전례를 따라 거행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정원수를 늘리지 않을 수 없으니 알성시의 초시에서는 2백 명을 시취하고, 5백 명에 대한 초시는 이틀에 나누어 설행하라. 전시(殿試)에 대한 한 조항은 정해년의 가까운 전례를 상고하여 초기(草記)를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경과와 알성시의 무과 초시를 이틀에 나누어 보이는 일과 전시에 관한 한 조항을 정해년의 등록을 상고하였더니, 정해년 가을에 곡식의 종자를 보관하고 누에고치를 받은 뒤에 경과를 정시로 하여 알성시와 겸해서 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무과 초시는 9월 2일로 정하였고 전시는 9월 18일로 정하였으며, 초시를 보기 전 8월 26일에 예조에서 알성시와 곡식 종자를 보관하고 누에고치를 받은 데에 대한 경과를 정시로 명칭을 정하는 뜻으로 연석에서 여쭙고 윤허를 받았습니다. 초시는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누어 각각 2백 50명씩을 시취하였고, 전시에 대한 한 조항에 대해서는 예조에서 재가를 받은 절목(節目)의 머릿말에 ‘알성시와 곡식 종자를 보관하고 누에고치를 받은 데에 대한 경과를 정시 무과로 하고 춘당대에 직접 나가 전시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틀에 나누어 보인 일은 원래 없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례가 이러하다면 전시를 당연히 한날 보여야 되겠으나, 그렇게 하자면 함께 경사를 축하하는 때에 문과와 무과의 전시에 곧장 응시하는 숱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만일 전례를 쓰지 않고 날짜를 나누어 하게 되면 무과 초시에서 시취한 5백 명을 또 어떻게 구별하여 나누어 소속시킬 것인가? 시임과 원임 대신들에게 문의하라."
하고, 이어서 문형(文衡)과 일찍이 문임(文任)·무장(武將)을 지낸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을 올리게 한 뒤에 사리를 따져 초기를 올리도록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종수가 상소하였다.
"신이 어제 성상의 앞에 나아가 성상의 사모하는 마음이 다함이 없고 옥체가 편안하지 못함을 우러러보고 신은 감탄하기도 하고 근심하기도 하였습니다. 오직 상께 응대하는 괴로움을 드릴까 두려워하여 가슴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지 못하였기에 아직껏 신의 마음은 근심스럽기만 합니다.
아, 경모궁에 거둥할 때 조정 신하들의 행위는 비록 전하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정성이 간절했고 일은 제때에 손을 써야만 했기에 몹시 황급한 나머지 미처 두루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데서 연유된 소치인 듯하나, 끝내 다소의 실수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어떻게 감히 뒤미처 그 일을 제기하여 말을 함으로써 거듭 전하의 귀를 괴롭히겠습니까.
오직 조보(朝報) 가운데 쓴 기사가 사실과 틀린 것은 그래도 바로잡을 방도가 있으므로 신은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빈청에서 올린 말 가운데 대신이 직접 전하를 업었다는 한 구절은 이 무슨 말입니까. 설령 그런 일이 참으로 있었더라도 이를 끄집어내어 과장하는 것은 합당치 못합니다. 더구나 신이 조방(朝房)에서 마침 그때 직접 눈으로 그 실상을 본 사람을 만나서 들어본 결과, 물리쳐서 멀리 가게 한 전하의 덕이 하늘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감히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거짓을 꾸며 임금 속이기를 제멋대로 한단 말입니까. 만일 추후에 제기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여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이 일을 들은 온 나라 사람들이나 후세의 의논들이 앞으로 어떻다고 말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속히 조보 가운데의 이 한 구절을 지워 없애도록 명하여 나라의 체면을 높이고 백성들의 의혹을 풀도록 하소서."
전 장령 민이현(閔彛顯)이 죽었다. 이현의 자는 공저(公著)이고 대사헌 민우수(閔遇洙)의 손자이다. 경술(經術)과 행실로 추천을 받아 벼슬이 장령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 않고, 글을 읽고 행실을 가다듬어 집안의 명성을 이었다.
1월 25일 계축
춘당대에 나아가 내금위의 봄철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상이 여러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김 판부사가 일전의 연석에서 아뢴 말은 처음으로 자신의 살 길을 찾았고 또 숱한 사람들을 살렸기 때문에 자못 다행스럽게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또 이런 행동을 하고 있으니 그 까닭을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다 하겠다. 설령 천지간에 영원히 바꿀 수 없는 큰 법칙의 안위(安危)가 순간에 달려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조금이나마 떳떳한 양심이 있다면 어찌 차마 나의 정신과 기분이 조금 안정된 이때에 그 일을 뒤미처 제기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말과 글은 절로 구별이 되는 것이니, 나의 앞에 나왔을 적에 혹 임금에게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로써 말을 하였다면 그래도 혹 조금이나마 용서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그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초조하고 절박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한 것은 여러 신하들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나의 과오로 빚어진 것인데, 지금 서슴없이 이를 글로 써서 제멋대로 올렸다. 더군다나 그의 상소문 가운데 ‘물리쳐서 멀리한 전하의 덕은 하늘과 같다.’는 등의 구절로 일방적인 찬양을 한 것은 곧 나를 더럽게 여긴 것보다 더 수치를 주었다. 즉시 처벌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종전에는 이보다 더 중대한 일에도 오히려 참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온전히 보호해 주려는 뜻으로 우선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업겠다고 요청한 말은 영부사와 영상이 번갈아가며 서로 말하였고 심지어 영상은 앞으로 나와서 옷소매를 붙잡기까지 하였다. 비록 그때 내가 정신이 혼미한 중이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기억을 하고 있는데, 그의 상소에서는 마치 오로지 한 대신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같다.
이러한 감히 들을 수도 없고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말을 감히 뒤미처 제기하려는 것은 과연 어떤 사람의 근거없는 말을 솔깃하게 듣고서 이렇게 운운하는 것인가. 그리고 합문(閤門)에 나와서 올린 말에 대해서는 추후에 여러 신하들에게 들었는데, 급작스러운 때에 대신이 붓을 잡을 겨를이 없어서 한 사람의 제학과 내각의 관원을 시켜 대신 짓게 하고는 곧장 정서(正書)해서 바쁘게 올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상이나 영부사를 막론하고 업기를 요청한 사람이 글을 직접 지어 올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더욱 알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가령 대신이 직접 그 글을 짓고 직접 업으려고 하기까지 하였다는 것을 정초(正草)에 썼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거짓을 꾸민 데에 가까운가. 거짓을 꾸민 것은 진실로 중죄이지만 임금을 속인 것은 더더욱 이 얼마나 죽을 죄 중의 죽을 죄인가. 그렇다면 일반 벼슬아치라도 분명하지 않은 억측으로써 없는 사실을 억지로 만들어 무함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대관(大官)의 경우와 여러 재상들인 경우이겠는가. 또 더구나 이 일을 차마 추후에 제기할 수 없는 경우이겠는가. 그렇다면 임금을 속이지 않았는데도 임금을 속였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임금을 속인 것이니, 그 죄는 곧 죽을 죄이며 그 사람은 곧 대관이다. 대관의 신분으로서 대관을 향하여 이러한 행위를 하였으니 반좌율(反坐律)을 어떻게 감히 사양하겠는가. 상소문을 봉하여 돌려보내는 정해진 규정은 더 논할 것이 없고 이미 계판(啓板)을 봉하여 두도록 명하였으니, 만일 찾아가려고 하거든 경기 감영에 이 내용을 말하고 보내서 지방에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9일 정사
사직 정민시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판부사 김종수가 상소를 올려 지난번 혜경궁께 말씀을 아뢴 일과 정청(庭請)한 일을 논하면서 말뜻이 매우 급박하여 ‘실수가 많았다.’느니, ‘거짓을 꾸며서 임금을 속였다.’느니 하여 여러 신하들의 죄를 남김없이 성토하였다 합니다. 그의 꾸지람과 공격이 여러 대신들에게 있는 듯하나 아뢴 말씀의 초안은 신이 만든 것이고 정청의 의논에도 신이 참여하여 들었으니, 진실로 이것이 죄가 된다면 신이 실로 으뜸가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당황스럽고 두려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으며 이어서 상신(相臣)을 위하여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가령 그날 여러 신하들이 진실로 잘못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이는 실로 초조하고 절박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 데서 연유된 소치이니 인인 군자로서는 당연히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다른 뜻이 없었음을 용서하여야지, 뒤에 와서 억지로 잘잘못을 논의하여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달이 다 지나지 않아 전하의 사모하는 마음이 무궁하기에 아직도 건강이 좋지 못하여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무슨 억하심정으로 차마 다시 제기할 수 없는 일을 기어코 제기하여 우리 전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단 말입니까. 참으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도 어찌 차마 다시 이를 제기하여 전하의 귀를 번거롭게 하겠습니까마는, 다만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것은 곧 신하에 있어 가장 큰 죄이기에 정말 이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사형을 받아야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또한 어떻게 무함하는 말을 뒤집어쓰고서 태연하게 스스로 변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매우 어리석기는 하지만 전하께서 경모궁에 참배하는 것은 바로 천리와 인정에 있어 당연한 것인 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생각하건대, 현륭원을 참배할 때 초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던 일은 지금 뒤미처 생각하여도 마음이 놀라서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가(御駕)가 돌아온 지 며칠이 안 되어 경모궁을 참배한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우리 성상의 타고난 효성과 친히 받들어 모시지 못한 슬픔으로써 또 이날을 당하여 경모궁을 우러러보면 때를 따라 사모하는 마음이 곱절이나 더 새로워져서, 장차 또 전일의 초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던 것과 같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때를 당해서는 전하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고 정리와 예의는 그래도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대신과 각신들이 서로 이끌고 나가서 면대를 요청하였으나 접견을 허락하지 않으시므로, 마침내 어쩔 수 없이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자궁께 전하의 마음을 돌리게 해달라고 앙청하면서 먼저 전일의 초조하던 모습을 말하여 이날 애써 억제할 방도가 나오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묘사하느라 말이 번쇄해졌으나 두 대신이 서로 번갈아 업기를 요청한 데에서 더욱 몹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진실로 임금을 보호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신하된 자로서 직접 업기를 요청한 것은 도리상에 있어 당연한 일인데 무슨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나라의 체면을 훼손시킨 것이 있기에 글로 쓸 수가 없단 말입니까. 또 이 말은 애당초 대신을 위하여 과장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때에 일어났던 광경을 이야기한 데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꾸며 만든 것을 ‘거짓을 꾸몄다.[飾詐]’고 하는 것이고, 없는 사실을 허위로 과장한 것을 ‘임금을 속였다.[罔上]’고 하는 것인데, 이 일의 실상에 대해서는 뭇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함하는 말을 가하여 남을 헤아릴 수 없는 죄로 몰아넣으니, 말하기는 아주 쉽지만 당하는 사람이야 너무나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정청(庭請)한 것이 실수라는 말에 있어서는 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이날 자궁께 말씀을 아뢰고 나자마자 어가는 벌써 떠났었으니 한때의 참배도 뭇신하들은 걱정이 절박한데 기한 전에 미리 나아가서 사모하는 효심으로 마음을 괴롭히면 편찮은 증세가 더하여져서 옥체의 손상을 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뭇신하들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지고 해결할 방도는 나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자궁께 글로 올렸던 그 내용을 가지고 서로 함께 뜰에서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자궁의 덕에 힘입어 겨우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어가가 돌아오자, 뜰에 있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가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상신의 말만이 오직 이러하니, 이 일을 크게 떠벌려서 모든 관원이 함께 나선 것이 부당하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조정 신하들이 자궁께 앙청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이해 이달을 만난 상황에서 전하의 마음이 바로 자궁의 마음이고 자궁의 마음이 곧 전하의 마음이므로, 우리 전하의 마음을 너그러이 타일러 풀어줄 분은 오직 우리 자궁뿐이고 우리 전하의 마음을 위로할 분도 오직 우리 자궁뿐입니다. 그러므로 전하의 마음을 애써 돌려보려는 뜻으로 자궁께 앙청한 것은 의리로 재어보나 일의 체면으로 헤아려보나 반복해서 생각해보아도 끝내 불가함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혹 신의 지식이 우매하여 대방가의 견해에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의 상소에 ‘감히 말을 다 찾아서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있으니, 그렇다면 필시 말할 만한 것이 많이 있는데도 다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뜻은 단지 실수라고만 지적한 데에 그치지 않은 것이니 또한 어찌 두렵고 떨리지 않겠습니까.
아, 이 상신은 은혜를 후하게 받았으니 전하를 받들고 보호하는 마음이 의당 다른 사람들보다 뒤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의 일이 있은 뒤에 생각하기를, 상신이 반드시 신들의 정성이 모자라서 전하의 마음을 곧바로 돌리지 못했다고 꾸짖을 것이니, 그러면 신들은 장차 스스로 해명할 말이 없어 그저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만 간절할 것이라고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상소에서 한 말은 이와 서로 반대될 뿐아니라 전하의 마음에 괴로움을 끼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사실이 어떤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자기 뜻대로 억측의 말을 하여 스스로 허황한 데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아, ‘예를 다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을 남들은 아첨이라고 한다.’는 경우가 옛날에도 혹 있기는 하였으나, 지금은 단지 아첨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기세를 올려 나무라고 배척하여 억지로 어떤 제목을 붙여서, 혹은 사람축에 끼지 못하는 곳에 방치하기도 하고 시비의 가운데로 밀어넣기도 하면서 전혀 애처롭게 여기거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뜻이 없습니다. 신들의 원통함은 그래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상신은 스스로 옛 글을 읽어 도리를 안다고 말하는 처지에서 그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천하의 일이란 참으로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상신이 이러한 말을 하리라고는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이 점이 신이 거듭하여 개탄하는 까닭입니다.
신은 이미 대신의 상소에서 배척을 입었고 심지어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죄명을 받았으니, 어떻게 감히 그 원소(原疏)를 찾아갔다는 것을 핑계로 하루인들 스스로 편안하게 있겠습니까. 산성(山城)에서 와서 늦게야 비로소 이 말을 듣고는 더할 나위없이 떨리고 송구스러워 대략 간절한 말씀을 올리니, 속히 위벌을 내려서 물의를 통쾌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에 김 판부사의 상소를 보다가 절반도 못보고 몹시 놀랍고 의혹스러웠다. 그러나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해주는 은혜를 특별히 베풀어 승지에게 연교(筵敎)를 베껴 보내어 스스로 속죄하는 길을 열어주도록 하였었다. 그리고 곧 들으니, 급히 심부름꾼을 보내 찾아가고는 다시 제기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경은 자궁께 올리는 말을 지어 바친 사람으로서 이렇게 스스로 인피하는 상소를 하니, 이 또한 즉시 봉하여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는 이렇게 할 일이 아니니 의당 별도로 전교를 내릴 것이다. 그 글을 지은 것은 경이지만 글을 요청한 사람은 여러 대신들이다. 더구나 김 판부사의 차사(箚辭)에서 단지 대신들만을 언급하였으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종수의 관작을 삭탈하고 전리에 방귀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대신을 뜻을 굽혀 보호하여 온전히 살려준 것이 여러 차례인데, 이것이 어찌 이 대신만을 위해서였겠는가. 일전에 올라와 연석에 나왔을 적에 지난날의 행동을 크게 뉘우치면서 지나간 의외의 잘못을 자책하고 앞으로는 다른 잘못이 없을 것임을 맹세하기에, 내가 ‘경이 오늘 꿈에서 깨어난 것은 한갓 자신만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도 살릴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튿날 저녁에 따로 한 통의 상소를 올렸기에 그 내용을 보니, 결코 정상적인 사리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떳떳한 본성으로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 신하된 사람으로서 차마 그날의 일을 이미 지나간 뒤에 제기할 수 있는 것인가. 한 마디로 잘라 말하자면 의리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감히 꺼낼 수 없는 것이니, 품은 생각과 표현한 말이 몹시 어그러지고 패역스러움은 모두 하찮은 일에 속하는 것이다.
지금 중신(重臣)이 해당 직책에 있는 몸으로 그 등본(謄本)을 목격하고 이렇게 벌주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고 이미 그렇게 된 것이면 또 숨길 수도 없는 것이기에 관례대로 비답을 내리는 것이다. 중신은 스스로 인피하기에 급급하여 ‘거짓을 꾸미고 임금을 속였다.’는 등의 조목에 대하여 변명하였으나, 나는 이런 일이 있고 없고는 도무지 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차마 하였는데 이 일을 차마 할 수 있겠는가. 이 대신의 처지로서 감히 하지 못할 이런 짓을 차마 하였단 말인가. 종전에 온전히 살려준 것은 절로 살려준 것이고 나라의 기강은 절로 기강이니, 나의 말이 지나치게 완곡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 가운데에 절로 형벌을 가하는 위엄이 있는 것이다. 판부사 김종수의 관작을 삭탈하고 전리로 추방하라."
하였다.
1월 30일 무오
영의정 홍낙성이 상소하기를,
"신이 일전에 김종수가 올린 상소 문제에 대하여 대략 들어 알았습니다. 당장 스스로 인피하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비단 원소를 이미 가져갔을 뿐만 아니라, 진실로 그날의 일을 추후에 제기하여 우리 전하의 마음을 뒤흔드는 일은 절대로 감히 할 수 없고 차마 할 수 없었으므로,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은 지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단이 일단 일어났으니 어떻게 감히 하루인들 편안히 있겠습니까.
아, 거짓을 꾸미어 임금을 속이는 것은 바로 신하에게 있어 가장 큰 죄입니다. 더구나 대관(大官)이 된 자가 한 번 이런 죄명을 쓰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세상에 몸을 붙이고 살 수 있겠습니까. 신이 외람되게 영의정이 되어 반열의 첫 자리를 차지하였으므로 시행하는 모든 일을 신이 실상 주관한 것입니다. 정청(庭請)을 주장한 사람도 신이었고 달사(達辭)를 받들어 올린 사람도 신이었습니다. 이른바 실착이라는 것이 무슨 일인지 신은 실로 알지 못하지만 만일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는 바로 신의 실착이고, 이른바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였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신은 알지 못하지만 만일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것도 바로 신이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인 것입니다. 이런 죄명을 짊어지고서 어떻게 감히 여러 말을 늘어놓아 변명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다만 신이 저번에 조방(朝房)에서 그를 만나 과연 그 당시의 초조하고 절박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던 광경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로 얘기를 나눈 사실이 있었는데, 상소 가운데에는 또 사실과 틀린 말이 없지 않다고 합니다. 그가 혹 신에게서 듣지 않고 또 별도로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이 있는지, 아니면 신의 말을 분명하게 듣지 못하여 이런 것인지 모르겠으며, 또는 신이 본디 정신과 기억이 혼란하고 말이 전도되어 앞서 그 당시에는 이미 횡설수설해 놓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또 까맣게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말을 찾아서 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따지고 보면 모두 신이 노쇠하여 혼미해진 소치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속히 위벌을 내리시어 사람들의 말에 사과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는 듣건대 ‘사람은 모두 남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사람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를 해야 하는데, 이런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하였고, ‘자기는 이 마음을 능히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의 임금을 일러 이 마음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의 임금을 해치는 것이다.’ 하였다. 늘 《맹자》 7편을 읽다가 이 장(章)에 이르러서는 세 번 거듭 읽으면서 공경심을 일으키곤 한다. 자신을 해치면서 남의 손을 빌리는 것도 그 죄를 용서받기 어려운 것인데, 더군다나 자기의 임금을 해치는 경우에 가까운 행위이겠는가.
차마 하지 못하는 것과 신하가 임금에 대하여 어쩌려고 하지 못하는[無將] 의리를 동료 재상이 올린 상소의 비답에 대략 언급하였으나, 경이 상소에서 한 말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조방에서 말을 전한 사람이 경이 아니라면 어째서 스스로 빠져나갈 방도를 말하지 않는가. 근래에 삼강(三綱)이 무너지고 구법(九法)019) 이 땅에 떨어졌다. 지금 내가 이렇게 운운하는 말은 사람이 사람을 동정하는 고심에서 나온 것이니, 경은 모쪼록 ‘이런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는 성인의 가르침을 음미하여 궁구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이 상소하였다.
"신은 궁벽한 시골에 엎드려 있느라 늦게서야 비로소 전리에 추방당한 죄인 김종수가 상소를 올려 지난번 정청했던 일을 논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자세한 내용은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지금 중신 정민시가 스스로 인피한 상소를 보니, 김종수의 상소 중에 있는 구절을 대략 들어서 말하였는데 ‘「실착이 많았다.」고 하고 또 「거짓을 꾸며서 임금을 속였다.」 하여 여러 신하들의 죄를 남김없이 성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절반도 읽기 전에 진실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아, 이해 이달은 곧 어떤 해이며 어떤 달입니까. 순(舜)임금처럼 전하의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지고 주(周) 문왕(文王) 같은 전하의 효성은 갑절이나 간절한 때입니다. 그러다가 현륭원에 참배하기에 이르러서 신들의 경황없고 초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던 모습은 지금 차마 다시 제기하지 못하지만, 오늘의 신하된 자로서 그날의 광경을 생각하면 비록 나무나 돌같이 무감각하고 돼지나 물고기 같이 몽매하다 하더라도 의당 잠결에도 놀라고 꿈결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대신이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요청한 것은 천리와 인정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차마 실착된 일이라고 지적할 있으며 또 어떻게 차마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인 죄로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일전 경모궁을 참배하는 데에 있어서는 더더욱 지극히 애가 타고 안타까웠습니다. 신도 여러 대신들의 뒤를 따라 여러 차례 면대를 요청하여 정은 극에 달하고 말은 다하였으므로 부득이 대궐의 뜰에 나가 자궁께 말씀을 드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상의 지극한 효성으로 자궁의 자애로운 뜻을 받들어 선뜻 마음을 돌려 한밤중에 어가가 돌아오자 백관과 군민(軍民)들은 기쁨이 넘쳐 서로 서로 경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 실착이며, 이것이 정말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인 것입니까? 그도 신하인데 어떻게 차마 이러한 말을 입에 올리고 글로 쓸 수가 있단 말입니까.
중신은 대신들을 따라 참여하여 들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오히려 의리를 끌어다 인피하였는데, 더구나 신들은 대신의 직위에 있으면서 어떻게 감히 그의 상소를 반포하지 않은 것을 핑계로 편안히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연전에 상소를 올려 종수를 논한 적이 있는데, 만일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나무라고 배척하였다면 하필 그와 시비를 따져서 걸고 넘어지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나라에 관계되고 말이 임금에게 저촉되기에 의리상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대신의 죄를 함부로 마구 성토하였는데 신도 대신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죄를 무겁게 처벌하여 말한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소서."
좌의정 김이소가 상소하였다.
"어제 행 사직 정민시의 상소를 보고 비로소 전리에 추방당한 죄인 김종수가 일전에 찾아간 상소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상소의 내용도 대략 알 수 있었습니다.
아, 지난번 현륭원에 거둥하였을 때 애가 타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사실은 뒤에 듣고서도 심신이 떨리고 아찔하며 날이 지난 뒤에도 생각하면 꿈결에서도 혼이 놀라곤 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곧 경모궁을 참배한다는 명을 받고 나서 신들은 생각하기를 ‘전하의 효성이야 어느 때인들 깊지 않겠는가마는 사모하는 마음이 이날은 더욱 간절할 것이고 보면 현륭원에서의 놀라고 황공하던 때와 비교하여 반드시 몇 배나 더 걱정스러움이 있다.’ 하였습니다. 때문에 신들이 만부득이하여 허둥지둥 면대를 요청하였으나, 정성이 상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윤허를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밤을 지내겠다는 명이 내려졌고 어가는 벌써 길을 떠났었습니다.
신들은 이때에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다만 자궁께 호소하여 전하의 마음을 애써 되돌리는 한 가지 도리가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백관들의 초조한 마음을 합하여 세 번에 걸쳐 간절한 말씀을 모두 올렸습니다. 대체로 그 말을 만들 때에는 자궁께서 듣고 감동하여 속히 어가를 되돌아오게 할 수 있는 모든 방도를 당연히 세세히 다 말하여야 했었습니다. 그리하여 달사(達辭) 가운데에 현륭원에서 있었던 당시의 일을 어쩔 수 없이 상세히 진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달사를 지어낸 것은 설사 중신이었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정청(庭請)할 것을 발의한 사람은 신들이며 글을 올릴 것을 주장한 사람도 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신이 올린 상소를 보건대 이미 그날 정청했던 일을 김종수가 완전히 실착으로 돌렸고 심지어는 어가를 수행했던 여러 대신들이 전하의 건강을 위하여 최선의 조치를 다한 일을 끌어다가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인 것으로 아울러 돌려버렸으니, 아니 무슨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였단 말입니까.
초조하고 황급한 경우에 처해서는 초조하고 황급하게 대처하고 애써 상의 마음을 되돌려야 할 경우에 처해서는 애써 되돌리는 것이 곧 원래부터 누구나 다같이 부여받은 천성이며 신하의 본분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정청한 것을 가리켜 실착이라 하고 달사한 것을 가리켜 속였다고 하면서 조금도 동정하는 뜻은 없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말을 종이에 가득 써놓았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가 지난 2일 간에 있었던 상황을 만났더라면 반드시 수수방관만 하고 함께 부축하지 않았을 것이며 입을 다물고 함께 호소하지도 않았을 것이니, 고금을 통틀어 찾아보아도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 역시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차마 하는 자입니다.
그가 올린 상소에서 윤리를 멸시하고 본분을 어그러뜨린 것이야말로 많은 변명을 할 것조차도 없지만, 신은 이미 정승의 반열에 있으면서 뭇 신료들을 데리고 말씀을 올려 청한 것으로 인하여 남이 이를 큰 죄로 성토하였으니, 진실로 어떻게 감히 낯을 쳐들고 보통 사람과 같이 조정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속히 형벌을 내리어 남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소서."
우의정 김희(金憙)가 상소하기를,
"신이 이제 내각 제학 정민시의 상소를 보았고 이어서 또 전교를 내린 것도 보았는데, 김종수가 무엇 때문에 이런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차마 하였단 말입니까. 지난번 현륭원에 제사를 지낼 때의 일은 신이 차마 다시 제기하여 우리 전하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일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신하가 아니라 바로 무엇이든지 차마 할 사람인 것입니다. 자궁께 말씀을 올리고 정청을 한 일에 있어서는 실로 애가 타고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 가운데 어디에도 힘입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만부득이하여 나온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달사 중에서 진술한 말을 억지로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인 죄’로 돌리는 것은 아니 무슨 마음입니까.
종수의 상소를 신이 보지는 못하였으나 규장각 신료의 상소문으로 미루어 보면 차마 하지 못할 것을 차마 한 것이 분명합니다. 신하가 되어 차마 하지 못할 것을 차마 한다면 어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다만 정청할 때의 달사는 중신이 지었지만 백관을 데리고 호소할 것을 주장한 사람은 바로 대신이었습니다. 신이 변변치 못한 위인으로 외람되게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감히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말로 함부로 진술하여 청하였으니 그 죄를 논하자면 참으로 만 번 죽을 죄에 해당됩니다.
아, 신에게 진실로 조금이나마 충애(忠愛)하는 정성이 있어서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다면 남이 어찌 차마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실상 신의 죄입니다. 전하께서는 속히 위벌을 내리시어 신하로서의 본분을 다하도록 격려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은 인(仁)이니 효도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 되고, 임금을 넘보는 마음이 없는 것[無將]은 의(義)이니 충성도 의가 모여서 생기는 것이다. 대저 차마 하는 것은 넘보는 것과 가까운데 자신을 미루어 헤아리는 것[絜矩]이 바로 이런 것이다. 차마 하지 못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넘보는 마음이 없어야 된다는 것을 알겠는가. 이 뜻은 부계를 맞춘 듯이 명확하여 학문을 연구한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애석하다. 경들은 한갓 스스로 인피하는 데에만 얽매여서 그의 죄를 밝히고 심중을 드러내는 사이에 이런 행위를 차마 한 전말에 대해서는 애당초 대략도 언급한 것이 없으니, 진실로 경들을 위하여 의혹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인하여 박종악·김이소·김희 등에게 다같이 전달하여 말하라고 명하였다.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상소하기를,
"신이 중신 정민시의 상소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추방당한 죄인 김종수가 상소를 올려 지난번 정청과 달사에 관한 일을 비난했음을 알았습니다. 신은 떨리고 두렵고 당황하여 그의 뜻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였는지를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이어서 비답과 따로 내린 전교를 보니, 그의 떳떳한 본성이 상실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의리와 명분을 엄하게 붙들어 세우려는 서릿발같은 위엄이 글 속에 죽 펼쳐져 있었습니다. 신은 비록 그의 성토를 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자기에 관한 혐의는 작은 것이고 나라의 일을 위하는 것은 큰 것이니 처분을 내린 데 대하여 어떻게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상소에 숨은 뜻은 중신이 거의 다 변파(辨破)하였으나 다만 그 실착이 많았다는 구절과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였다는 말은 신을 겨냥해서 한 말이므로 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이른바 실착이라는 것은 혹 정리와 형식이 천리에 당치 않았거나 예절이 조정의 의절에 맞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날의 일은 천리로 따져보아서 과연 당치 않았으며, 조정의 의절로 상고해보아서 혹 맞지 않았습니까? 천리에 있어서나 조정의 의절에 있어서나 꼭 들어맞음을 결단코 알 수 있는데, 무슨 별다른 실착이 그 안에 숨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처럼 숨김이 없는 지조와 그처럼 용감하게 말하는 기풍으로써 유독 이 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지적하여 논핵하지 않고서 이내 짐짓 ‘말을 찾아서 하지 않겠다.’는 등의 말을 하여 마치 말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것처럼 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였다는 말은 신이 또 의혹이 많습니다. 그날의 일은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별다른 방도가 없는 데서 취해진 일에 불과한 것으로 이는 실로 전하께서 직접 보셨고 여러 사람들도 함께 보았던 일입니다. 그러니 설사 거짓을 꾸미려 하더라도 어떻게 꾸밀 수 있으며 임금을 속이려 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도 어찌 이러한 사정을 모르겠습니까마는, 정신이 쏠린 것이 오직 신 한 사람을 해치고자 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아무 순서도 조리도 없음을 자신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이 행위는 단지 그 부수적인 것이 이리저리 산만하게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그의 가슴속에 쌓여있는 것을 생각하면 뼈가 서늘해지니 신은 참으로 나라가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외람되게 반열의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많은 일을 잘못 처리하여 정승과 각신이 대신 그의 칼날을 받게 하였으니, 신이 무슨 낯으로 다시 조정의 벼슬아치들을 대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위벌을 내리시어 신의 개인적인 의리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현륭원에서 아뢴 일은 경과 영상이 서로 번갈아서 하였다. 비록 그때의 혼미한 정신으로도 오히려 기억이 된다. 그러니 자궁에게 아뢴 말을 거짓으로 꾸며 했다고 말하는 것은 경과 영상이 당연히 해당된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조보(朝報)에 잘못 썼다고 핑계하지만, 업기를 청하였거나 직접 업었거나를 막론하고 가슴에 치미는 기운이 막 그친 나머지에 그런 말을 서슴없이 거듭 곱씹어 말하는 것은 참으로 이 무슨 마음인가. 경들에게야 무슨 인피할 단서가 있겠는가.
다만 내 마음 속에 의혹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그 상소의 상단에 있는 정청에 관한 일이다. 대저 그때 뜰에서 호소한 것을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지나치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니 만일 행위가 지나쳤는지의 여부를 가지고 글을 쓰거나 말을 하였다면, 나의 경들을 위하여 둘 다 보전하려는 뜻으로써 어찌 어제의 전교 가운데 약간의 언급이나마 있을 수 있었겠는가. 경들이 이것을 가지고 인피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경은 그 사람에 대해서 전혀 돌볼 의리가 없는데도 경의 상소를 보건대 말이 완곡하여 모가 드러나지 않아서 요사이 남에게 편협함을 내보이는 나쁜 풍습을 깨끗이 씻을 만하니 매우 가상하다. 인하여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이 다시 상소하기를,
"비답을 받고 신의 죄를 신이 스스로 알았습니다. 하늘이 넋을 앗아가서 그 당시 서로 주고받은 말의 사실을 자세히 진술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이 지경에 이른만큼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이에 옛사람이 옥중에서 글을 올린 뜻을 본받아 의금부에 나가서 글을 공개한 가운데 스스로 진술하겠습니다.
그가 이른바 조방(朝房)에서 서로 만났었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신은 알지 못합니다마는 신이 그와 주고받은 말은 단지 그날 초조하고 절박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던 정상에 관한 것뿐이었습니다. 물리쳐서 멀리했다고 운운한 것에 대해서는 신이 전하께 듣지도 못하였고 우러러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늙고 패역스럽기는 하지만 이미 떳떳한 천성을 갖추고 있는 터에 무슨 마음으로 무슨 일 때문에 공연히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떠벌려서 전하겠습니까. 거짓말을 떠벌린 자가 반드시 있을 터이지만 신이 즉시 그 말의 뿌리를 캐자고 요청하지 않아 마치 신이 대신 그 당사자인 것처럼 되었으니, 이는 모두 신이 죽을 날이 머지않은 소치입니다. 삼가 신을 의금부에 내려 그와 대질을 시켜서 그 말의 뿌리를 조사하여 주시기를 천만 번 울면서 기원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하루에 두 번 상소를 올리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더구나 그도 대신이고 경도 대신인데 ‘신을 의금부에 내려 그와 대질을 시켜서…….’라고 한 말은 더욱 지나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른바 조방에서 한 말은 경 이외에 필시 다른 사람이 있을 터인데, 왜 꼭 대신을 대질시킨 다음에야 헛말을 전한 사람을 캐낼 수가 있겠는가. 만일 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의당 스스로 자수할 것이며 스스로 자수한 이후에는 당연히 의금부의 소관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경은 백관의 첫자리에 있으니 그를 자수시켜 공초를 받는 것은 곧 짧은 시각의 한 마디 호령으로 할 수 있을 터인데 어째서 관례를 넘어 상소를 올리기까지 하는가."
하였다.
부교리 송익효(宋翼孝)와 수찬 신대윤(申大尹)이 상차하기를,
"신들은 어제 내린 전교에 김종수의 관직을 삭탈하여 전리로 추방하라는 명이 있음을 보고 비로소 전번에 올린 그의 상소가 바로 하나의 큰 변괴였음을 알았습니다. 오늘 신하된 사람으로서 만일 똑같이 부여받은 떳떳한 천성이 있다면 어떻게 차마 그날의 일을 이미 지난 뒤에 다시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전후에 범한 죄에 대하여 법을 굽혀 용서하고 누누이 가르침을 주어 지금까지 온전히 살도록 한 것은 어찌 상의 지극히 인후하신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음을 고쳐서 은혜 갚기를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차마 말하였으니 이것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뜰에서 자궁께 호소한 것은 참으로 인정과 천리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 저 종수는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때 올린 말을 꾸짖고 배척하여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였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까. 품은 생각이 음흉하고 말이 패역스러워서 결코 신하로서는 마음에 생각할 수도, 입으로 발설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의 속마음을 캐어보면 전혀 헤아릴 수가 없는데 어찌 관직을 삭탈하고 추방하는 가벼운 처벌로 끝낼 수 있습니까. 바라건대 등급을 높여서 법을 적용하여 왕의 법을 다시 진작시켜서 난적들이 두려움을 알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비답을 어제는 주저하여 내리지 않고 오늘 내린 것은 각각 근거함이 있어서이다. 너희들에게는 다시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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