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기미
예조가 각 능의 봄에 행하는 참배에 대하여 품지(稟旨)하니, 전교하기를,
"경과(慶科)도 소중하기 때문에 이달 안으로 거둥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능은 거의 다 참배하였으니 봄에 참배할 거둥을 가을 뒤로 물려서 행하더라도 인정과 예의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가을이 된 뒤에 다시 여쭈라."
하였다.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와 우의정 김희(金憙)가 연명(聯名)으로 상소하기를,
"신들이 남에게 망극한 말을 듣고 전에 없던 변괴를 목격하고는 간략히 인피(引避)하고 바삐 상소를 올리느라 당연히 밝게 변별하고 통렬히 진정해야 될 문제에 대해서는 대략 한 마디도 언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아,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의 사이는 사람의 큰 인륜(人倫)이며 하늘과 땅의 떳떳한 법이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통하여 온 의리입니다. 그러므로 임금과 아버지의 자리는 같지 않지만 충성과 효도는 두 가지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는 신들에게 있어서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나 은혜로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와 같습니다. 이제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어버이가 무궁한 효성으로 제삿날을 만나 슬픈 마음이 감정을 자극하여 신체에 손상을 끼쳤을 경우 그의 자식된 사람이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곁에서 보호하기를 극진히 다하여 다행스럽게도 점차 건강하게 되었다면, 가령 길을 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를 보고 들었을 적에 필시 처음에는 측은히 여기어 걱정하다가 종당에는 또 흔쾌히 기뻐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맹자(孟子)가 이른바 사람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천지 사이에 사는 모든 인류는 이 사단(四端)의 하나인 측은한 마음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혼자 무슨 마음을 먹었기에 신하되고 아들된 사람으로서 도리어 길을 가는 사람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일찍이 측은하고 안타까워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이 제멋대로 발설하고 느닷없이 상소를 올려 전하의 건강이 조금 안정된 지금에 와서 차마 제기할 수 없는 일을 감히 제기하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주책이라고 하고 한편으로는 과장했다고 하면서 심지어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였다는 죄목(罪目)을 전하를 보호한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돌려 보냈으니 어찌하여 천리(天理)도 없고 인심(人心)도 없는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아, 현륭원(顯隆園)에 거둥했을 때의 일을 지금 차마 뒤미처 제기할 수는 없지만, 치미는 기운을 내리는 약을 잇달아 올렸는데도 전하의 건강이 회복되는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전하를 재전(齋殿)으로 모시고 돌아오는 것은 한시가 급하였으니 전하를 업자고 요청한 것은 진실로 신하의 떳떳한 도리이며 직접 업은 것도 인정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전하를 보호하는 여러 가지 일 가운데 한 가지 일인데 어찌 업기를 청한 것과 직접 업은 것을 가지고 논란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또 신들이 지난번 뜰에서 호소한 일로 말하더라도 어찌 그만두어도 될 것을 그만두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이해 이날 모궁(慕宮)에 참배하다 보면 어버이에 대한 전하의 효성으로 볼 때 문에 들어가고 나올 적에 저절로 슬픔을 억제하려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니 전하의 몸에 받는 손상은 반드시 현륭원에 거둥했을 때보다 곱절이나 더할 것입니다. 이런 때에 대소 신료(臣僚)들이 거의 모두 걱정되고 경황없이 절박하여 정성을 다하여 건의하였으나 끝내 전하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였기에 자궁(慈宮)께 일제히 호소하여 전하의 마음을 애써 억제하려고 지난번에 일어났던 사실을 모두 말씀드려서 그날로 어가(御駕)가 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이니 이 역시 뜰을 가득 메웠던 신민(臣民)들의 함께 가진 떳떳한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이것을 가지고 곧장 주책이라고 단정하고도 충분하지 못하여 뒤따라 결론을 내어 말하기를 ‘감히 말을 찾아서 하지 못한다.’ 하여 한없는 앙심과 한없는 불평이 현저히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의 말한 맥락을 가지고 말의 본뜻을 생각해 보면 실로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가 만일 신들이 자궁에게 청하지 않아야 될 일을 청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들이 이런 때를 당하여 이런 일을 만났으니 임금의 몸을 보호하는 도리로써 자궁에게 한 목소리로 앙청한 것이야말로 의리와 일의 체면으로 볼 때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지극히 정당하다고 보았으므로 그만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서슴없이 함부로 말하여 스스로 천리(天理)를 무시하고 사람의 떳떳한 도리를 무너뜨린 죄로 빠져든단 말입니까. 심지어 ‘감히 말을 찾아서 하지 못한다.[不敢索言]’라고까지 하여 더욱더 흉악해져서 한 구절 두 구절에 장차 어떻게 해 보려는 마음이 이미 드러났으니, 이 네 글자를 가지고서도 하나의 단안(斷案)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대저 그의 상소를 가지고 논하건대, 앞의 조항에서 종이에 가득히 늘어놓은 패설(悖說)은 모두 전하를 보호하는 데 있어 배치되고, 뜰에서 자궁에게 호소한 것을 비난하고 조롱한 것으로 말하면 구구절절 헤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가슴에 쌓아둔 것은 무슨 마음이며 의심을 가지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무슨 계책이기에 지극히 중대한 관계도 고려하지 않고 막대한 윤리도 생각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서슴없이 입으로 말하고 붓으로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의 일에서 찾아보더라도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전하가 김종수(金鍾秀)에 대하여 성취시키고 도야(陶冶)하여 은혜를 준 것이 그지없습니다. 그가 만 번 죽을 것을 살려준 것은 우선 그만두고라도 효도로써 천하를 교화시키는 덕을 길이 입고 선(善)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인자함을 언제나 받은 것에 대하여는 지금 조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서 대신 감격하며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20년 동안 북면(北面)을 하고 전하를 섬긴 신하로서 차마 말하지 못할 말을 도저히 제기해서는 안 될 시기에 차마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 종수가 이를 차마 하다니 천하에 참으로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엄중히 처분하여 법을 밝게 집행하지 않으면 윤리를 어떻게 천명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어떻게 안정시키며 세변(世變)을 어떻게 종식시키며 조정의 기강을 어떻게 유지하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걱정스럽고 분개한 심정이 교차됩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명쾌하게 결단하여 조금이라도 용서해주지 말고 빨리 엄히 처벌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거듭 읽어보아도 바로 예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답습하고만 있다. 어제 내린 비답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그의 죄를 성토하건 그의 마음을 폭로하건 간에 이것은 차마 할 수 있고 이것은 차마 할 수 없다는 전말에 대해 분명하게 말을 하고 나서야 청한 말을 따르거나 거절하거나 결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온종일 들여다 보아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응답하기에 번거롭게만 만들고 있으니 혹간 의리와 명분을 다하지 못한 점은 없다고 하겠는가. 경들이 번거롭게 하는 데에 연유하여 가슴이 치미는 증세가 기약한 것처럼 찾아드는 것을 어쩔 수 없으니, 약원(藥院)에 물어 보라."
하였다.
약원이 문안 여쭙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2월 2일 경신
약원이 세 차례 면대하기를 요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상소하기를,
"신이 그저께 죄를 무릅쓰고 상소를 올려서 말이 나온 뿌리를 캘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자수하여 공초(供招)를 받게 하라는 전교를 받고는 명을 들은 뒤로 곧장 엄하게 조사하고 끝까지 캐어보면서 밤을 꼬박 새우고 하루를 지냈건만 끝내 자수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은 진실로 땅을 뚫고 들어가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엊저녁에 전리(田里)에 추방한 죄인 김종수(金鍾秀)에게 녹사(錄事)를 보내어 물어보았더니 귀가 먹어서 분명하게 듣지를 못했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죄인이 이미 분명하게 듣지 못했다고 자복(自服)하였으니 거짓으로 늘어놓은 말이 신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나, 다만 말을 전한 사람을 끝내 바른 대로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수하여 공초를 받는 일이 아직까지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약원(藥院)에서 구두로 아뢸 때에 응대하는 번거로움을 끼쳐드렸으니 이는 첫째도 신의 죄이고 둘째도 신의 죄입니다. 빨리 엄할 벌을 내리소서.
아, 김종수의 죄를 이루 다 벌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머리를 우러러 엄한 벌을 받게 해 달라고 슬피 말하느라 감히 그의 죄를 일일이 다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통분하고 놀라운 마음은 실로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더하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대략 진술하니 전하께서는 살펴주소서. 아, 저 종수도 눈이 달린 사람의 무리인데 어찌 모두 똑같이 부여받은 천성이 그에게만 없겠습니까. 그런데 북면(北面)한 신하로서 전하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고 가슴 치미는 증상이 겨우 내려간 때에 차마 제기할 수 없는 문제를 차마 제기하고 차마 발설할 수 없는 말을 차마 발설하여 조금도 꺼리는 마음이 없이 예사로운 말로 보아 제멋대로 글을 날리어 급급하게 상소를 올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그의 마음 먹은 것은 길을 가는 사람도 안다고 하는 것이니 이를 차마 한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할 수 없겠습니까.
그날 정청(庭請)을 거행한 것은 전하를 보호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이 해 이 날에는 전하의 마음이 갑절이나 더 통한(痛恨)을 느끼게 되는데 자궁(慈宮)의 마음이 바로 전하의 마음이고 전하의 마음이 또한 자궁의 마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자궁의 마음을 풀어드린 다음에야 전하의 마음을 돌릴 수가 있을 것이니 신들이 우리 자궁에게 다급히 일제히 소리쳐 호소하지 않고 어느 곳에 간절하게 진달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이를 주책이라느니 말을 찾아서 하고 싶지 않다느니 하는 등 먹고 있는 마음을 헤아릴 수 없고 하는 말이 음흉하여 품고 있는 속내를 종잡을 수 없어서 마치 귀신이나 불여우같기만 한데 이는 하루 아침에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닙니다.
이는 기필코 국가에 화(禍)를 입히려고 흉측한 마음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서 그의 실정이 환히 드러나고 진심이 탄로되었으므로 신명이 함께 벌을 주려 하고 국민이 모두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비단 자궁과 전하의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실로 종묘 사직의 죄인이 된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규정된 형벌을 바르게 적용하여 왕법(王法)을 명쾌하게 시행하지 않으면 하늘의 떳떳한 도리는 무너지고 사람의 기강은 끊어지게 되어 앞으로 나라는 나라꼴이 되지 못하고 사람은 사람 노릇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결단을 크게 내려 빨리 천벌을 시행함으로써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큰 윤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떨어지지 않고 환히 빛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방(朝房)에서 있었다는 한 문제는 그의 상소에서 보았으나 일찍이 경들에게 물어보지 못하였는데 경이 먼저 상소문 가운데의 만났다는 사실을 제기하여 말하였기에 위로하고 권면하는 뜻으로 스스로 발뺌을 하도록 허락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경의 상소를 보건대, 그에게 물었더니 그가 귀가 먹어 분명히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고 하니, 그렇다면 전한 말은 그렇지 않았는데 듣는 사람이 잘못 들은 것일 것이다. 경이 전한 말은 곧 그날 일어났던 광경을 추후하여 말하려는 충심에서 나온 것이니 이 역시 신하의 직분과 인정에 있어 당연한 일이다. 경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나는 경이 첫 상소에서부터 조방이라는 두 글자를 제기한 것에 대해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더구나 그의 죄범은 이 한 가지 문제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듣지 못했다고 해서 더해질 것도 없으며 잘못 전했다고 해서 감해질 것도 없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덧붙여 진술한 바 천벌을 내리라는 말은 참으로 지극히 원통한 생각이 있는 이상 당연히 원통함을 호소할 만하다. 그러나 만일 정말로 그와 같은 죄가 있다면 원래 법을 맡은 사사(士師)가 있으니 이는 더듬더듬 찾아내어서 억측으로 판결할 일이 아닌 것이다. 내일 반열에는 의당 정승들이 다 참석해야 될 것이다.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나와서 일을 보라."
하였다.
2월 3일 신유
상이 영희전(永禧殿)을 참배하려 했으나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약원(藥院)이 합문(閤門)에 나와 진맥(診脈)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직숙(直宿)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원임 대신과 시임·원임 각신(閣臣)이 면대(面對)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2월 4일 임술
약원이 들어가 진맥하기를 청하고 또 직숙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2월 5일 계해
약원이 진맥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김종수(金鍾秀)를 평해군(平海郡)에 부처(付處)하였다.
삼사(三司)가 【 대사헌 임시철(林蓍喆), 대사간 이정규(李鼎揆), 집의 신대윤(申大尹), 사간 이석하(李錫夏), 장령 이익회(李益恢), 지평 강빈(姜儐)·윤행철(尹行喆), 헌납 홍수만(洪秀晩), 수찬 송익효(宋翼孝), 부수찬 이상황(李相璜), 정언 남이익(南履翼).】 합계(合啓)하기를,
"아, 통탄스럽습니다. 적신(賊臣) 김종수(金鍾秀)는 패악(悖惡)한 요소를 모두 다 가지고서 오로지 흉측한 화를 도모하기로 작정하고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오직 음흉한 속셈을 행하는 것으로 직무를 삼고 국가에 대해서는 윤상(倫常)을 없애는 것만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전하여 답습하는 근원이 있고 쌓아온 본심이 있었는데 급기야는 이번에 올린 흉측한 상소에서 극에 달하였습니다.
아, 그가 이른바 거짓을 꾸미어 임금을 속였다고 말한 것들은 무엇 때문에 발설한 것입니까. 현륭원(顯隆園)에 거둥했을 때에 있었던 일은 신들도 직접 보았던 것인데 이제 차마 다시 제기하여 거듭 전하의 마음을 슬프게 할 수는 없으나 그 당시의 초조하고 절박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떳떳한 천성이 있는 사람치고 누군들 피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아, 저 종수도 우리 전하를 북면(北面)하여 섬긴 한 사람의 신하인데 유독 무슨 마음으로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을 때가 바뀌고 일이 벌써 지나간 뒤에 발설하여 마치 기회를 틈타 흉계를 성사시키려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까. 그가 꾸민다느니 속인다느니 말한 것은 바로 그 사실이 없는 것을 거짓으로 떠벌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가 어떻게 이런 말을 차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실 당시 정청(庭請)을 거행한 것으로 말하면 오늘날 신하들의 지극히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그는 이내 자궁(慈宮)에게 정청한 것을 가지고 주책이라고 말했으니 또 무슨 흉측한 심장으로 하는 말입니까. 그것이 정리에 부당해서입니까, 체면에 부당해서 그런 것입니까.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심지어는 말을 찾아서 하지 않겠다고까지 하여 마치 말할 만한 것이 숱하게 있는데도 아직 발설하지 않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가 무한정하게 품고 있는 나쁜 마음을 드러내놓고 헐뜯고 배척하여 여지없이 모두 토로하였으니 이런 짓을 또 차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하루 아침에 생긴 연고가 아니니, 대체로 그것은 쌓이고 빚어져서 경우에 따라 함부로 마구 발로하는 것입니다.
아, 뱀같이 사악한 사람이라도 교화시켜서 백성으로 만들 수 있겠지만, 종수가 어찌 전하의 신하가 되려고나 하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효심을 지니시어 올해에 철마다 느끼는 감회가 갑절이나 더 간절하여 마음을 상해서 건강을 해치지 않는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때에 흉측한 상소를 불쑥 올리어 마침내 가슴이 치미는 증세를 더하게 만들었으니 이렇게 죄악이 가득 찬 사람을 어떻게 한 시각인들 천지간에 용납하여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전리(田里)에 방축한 죄인 김종수에게 우선 중도 부처(中道付處)의 처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2월 6일 갑자
약원(藥院)이 진맥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경모궁(景慕宮)의 춘향(春享)을 대리하여 지내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직접 지낼 것을 명하였다가 상이 남전(南殿)020) 에 아직 제사를 지내지 않았는데 먼저 경모궁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명을 내린 것이다.
2월 7일 을축
약원이 진맥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성 정대용(鄭大容)을 소견(召見)하였다. 대용이 아뢰기를,
"이번 경과(慶科)의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바로 응시하는 사람에게 모두 응시를 허락하는 문제에 대하여 일찍이 전교하셨습니다. 다만 경과에는 이미 초시(初試)가 없으므로 응시(應試)하는 여러 문제를 품의하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응시자의 경우 바로 응시하는 사람의 시지(試紙)와 유생(儒生)의 시지는 체재와 모양이 본래부터 동일하지 않고 또 바로 응시하는 사람은 시지를 다른 사람이 옮겨 쓰지만 유생은 자신이 직접 쓰게 되어 있으니 이것만도 갖가지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한 시장(試場) 내의 시권(試券)에 하나는 어보(御寶)를 찍고 하나는 관인(官印)을 누르는 등 절차가 서로 뒤섞이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 전후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아도 끝내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아래에서 거행하는 데에 의문과 불편한 점이 많으므로 감히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의 말이 또한 당연하다. 자신이 직접 쓰는 것과 다른 사람이 옮겨 쓰는 차이쯤이야 관계될 것이 없겠으나 시지에 어보를 찍는 것과 관인을 누르는 일을 서로 뒤섞어 하는 것은 정말 어떻겠는가. 의견을 수렴하여 비답 중에서 적절한 말로 처분하겠다."
하였다.
경과(慶科)의 정시(庭試)에서 문과(文科)는 초시(初試)를 설행하고 무과(武科) 초시와 알성시(謁聖試)의 시험은 시험장을 나누어 각기 따로 설행하도록 명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시임과 원임 대신들에게 문의하고 이어서 또 문형(文衡)과 일찍이 문임(文任) 벼슬을 지낸 사람 및 여러 장신(將臣)들에게 수의(收議)하였습니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은 의논드리기를 ‘문·무 두 과거를 같은 날 시취(試取)하는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 보이는 정시는 소중함이 특별한 만큼 구별을 지어서 나누어 소속시키자는 좌상(左相)의 의논이 좋을 듯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아주 옛부터 보기 드문 이런 경사를 만나 경사를 널리 축하하는 도리에 있어서 초시도 반드시 합설(合設)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열흘께로부터 날짜를 나누고 장소를 나누어 거행하면 거자(擧子)가 비록 많더라도 도착하는 대로 응시 명단에 따라 행할 경우 정한 날짜에 방방(放榜)할 수 있을 것이니 초시에서부터 각각 설행한다 해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 문과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초시를 설행하여 널리 많은 선비를 취할 경우 비단 실질적인 인재를 선발하는 방도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경사의 의식을 빛내고 온 나라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도에도 더욱 관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문과와 무과에 바로 응시하는 숱한 사람들이 모두 합격자로 호명되는 은전을 입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은 의논드리기를 ‘이번의 정시와 알성시는 곧 두 가지 과거이지만 초시는 한 가지입니다. 초시에는 낙방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곧 한 과거를 실패한 것이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억울한 점이 있을 듯하지만 이미 정해년의 전례가 있고 지금 처음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이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전시(殿試)에서의 정원 수가 정해년에 비하여 현격하게 많으니 이번에는 결코 하룻만에 시험을 마칠 수가 없습니다. 2백명은 먼저 알성시에 응시하게 하여 합격자를 그날로 발표하고, 3백 명은 다음날 행하는 정시에 붙여서 문과와 무과에 바로 응시하는 사람들과 함께 전시를 설행하면 장애가 없을 듯합니다. 다만 초시 합격자 5백 명 중에서 앞에 2백 명 뒤에 3백 명으로 한 번 구별한 다음 두 과거에 나누어 붙이고, 두 시장(試場)의 합격자 5백 명 중에서 각각 합격자 명단의 웃머리에 든 1백 명을 떼내어 알성시에 붙이면, 남은 인원은 각각 1백 50명이 되어 두 시장의 인원수를 합쳐 3백 명이 되는데, 이 사람들은 정시의 전시에 붙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합격자 중에서 아무개에서부터 아무개까지는 알성시에 붙이거나 정시에 붙이거나 하는데다 또 두 과거를 하룻밤을 간격으로 치루게 되는 만큼 합격자 명단에 든 자라도 아무개는 갑(甲)으로 알성시에 응시하고 아무개는 을(乙)로 정시에 응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분주하고 소란스러워 혼잡스럽게 될 것이 필연적인데 이런 때에 또 하례(下隷)들과 한통속이 되어 협잡을 부리며 법을 범하는 자가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반드시 두 시장의 초시의 합격자를 며칠 전에 방방하여 거자(擧子)들이 명백하게 알도록 하여 과장(科場)에 도착해서 얼떨떨하고 난잡해지는 폐단이 발생하지 않게 해야 좋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은 의논드리기를 ‘정해년의 경과(慶科)에서 알성시의 합격자와 같은 날 방방(放榜)한 전례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올해의 경사는 옛날부터 드물게 있는 경사이니 과거는 정해년과 같아도 경사를 빛내고 기쁨을 기념하는 면에 있어서는 정해년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하룻동안에 문과와 무과에 바로 응시한 숱한 사람들을 같은 날 방방하는 것이 형편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의 체면으로 따져보더라도 아마 이렇게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날짜를 나누어 방방하는 것이 신중하게 거행하는 뜻에 합치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초시 합격자 5백 명을 구별지어 나누어 붙이는 것으로 말하면 경과의 사체(事體)야말로 소중함이 특별한 만큼 다른 과거에 비교하여 같이 하기가 어려우니, 초시에 합격한 사람 가운데 웃머리의 2백 명은 정시에 붙이고 아래의 3백 명은 알성시에 붙이는 것이 고르게 처리하는 방법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좌의정 김이소(金履素)는 의논드리기를 ‘병조의 회계(回啓)에 정해년의 전례를 상고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다음 달에는 먼저 알성시를 25일에 거행하고 그 다음 날 또 정시를 설행하게 되어 있고 보면 초시에 5백 명을 합하여 뽑는 것은 설사 정해년의 전례를 따른다 해도 전시에 있어서는 구별하여 나누어 붙이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더구나 곧바로 전시에 응시하는 숫자가 지극히 많으니 결코 같은 날 시취하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초시 합격자 5백 명 가운데 각 시장(試場)의 상위 합격자 1백 명씩은 알성시에 응시하게 하고, 하위 1 백 50 명씩 도합 3백 명은 정시의 전시에 응시하게 하며, 곧바로 응시하는 숱한 사람들은 모두 정시의 전시에 응시하도록 하면, 처리하는 방법에도 맞고 구차스러운 폐단도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제도에 관계되는 문제인 만큼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대제학 홍양호(洪良浩)는 의논드리기를 ‘이번 두 과거의 전시를 만일 정해년의 전례를 따라 같은날 합해서 설행한다면 거자(擧子)들에게 폐단을 덜어주는 방도는 되지만 문과 무과에 곧바로 응시하는 숱한 사람들을 한 때에 모두 시험에 붙이기는 어려움이 있으니 이는 진실로 전하의 전교와 같습니다. 대체로 정해년에는 그 당시에 곧바로 응시하는 사람의 숫자가 적었었지만 이번에는 무과에서 곧바로 전시에 응시하는 사람이 거의 6백 명에 가깝고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하는 사람도 5백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응시시켜서 하룻동안에 급제의 순위를 매기기는 실로 어려우니 그 일의 형편을 헤아려보면 주선할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정한 날짜대로 설행하는 것이 아마도 사리에 적절할 듯합니다. 또 초시를 가지고 말하자면 5백 명을 두 과거에 나누어 붙일 경우 비단 구별하기 어려운 형편일 뿐이 아니라 먼 지방의 응시자들이 장차 각기 두 과거에 응시하려고 할 텐데 만일 같은 날 합해서 설행한다면 희망을 잃을 한탄이 있을 것입니다.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묵는 폐가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비용을 들이는 것이 도리어 소중한 과거보다는 가볍다고 여길 것이니 초시를 이틀에 나누어 설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진실로 응시자들의 소원을 들어 주는 데 맞을 텐데 두 초시를 치루는 사이에 조금 날짜를 늘인 다음에야 군색하고 착란한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시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알성시와 정시를 연일 계속해서 설행하면 알성시의 당일 합격자 발표는 곧 밤중에 이루어질 텐데, 이튿날 새벽에 또 과장(科場)을 연다면 비단 과거의 진행에 군속스러울 뿐만 아니라 많은 응시자들도 편리하지 못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더구나 전하께서 연일 대청에 나오게 되면 건강을 조절하는 방도에 해로움이 있을 것이니 만일 길일(吉日)이 있으면 조금 날짜를 조정하는 것이 실로 온당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행 사직(行司直) 정창순(鄭昌順)은 의논드리기를 ‘문과는 임금이 직접 나와서 알성시를 보이므로 바로 당일 방방(放榜)하는 과거이지만, 정시(庭試)는 이미 초시를 제외하고 한결같이 옛 규정을 따라 다 심사한 다음 급제의 순위를 매기어 합격자 명단을 내며 명단을 낸 다음에 날을 잡아 방방(放榜)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과거를 같은 날 설행한다는 것은 형편상 불가능하니 본래 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과는 알성시(謁聖試)와 정시(庭試)에 모두 초시가 있고 각각 당해 규정이 있으니 그 규정으로써 날짜를 나누어 시취(試取)하되 알성시의 초시에 합격한 사람은 알성시에 응시시키고 정시의 초시에 합격한 사람은 정시에 응시시키며 모두 합격한 사람은 두 곳에 다 응시하도록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날짜가 촉박하여 수용하기가 어려우면 초시의 개장(開場)을 정한 날짜보다 당겨 정하고 먼 지방에서 오는 거자(擧子)들을 도착하는 대로 명단에 올리어 뒤미처 올린 단자(單子)까지도 모두 응시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러면 이미 오랫동안 머무는 폐단을 덜어주게 되고 또 과거 날짜에 미치지 못하는 우려도 없게 될 것입니다. 서울과 시골에서 곧바로 응시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문과에서 본디 알성시에 곧바로 응시하는 예가 없으니 의당 정시에 붙여야 될 것인데 그 숫자가 또한 많지 않으니 성적 순위를 매기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과는 인원 수가 이미 많은 만큼 난잡스럽게 될까 우려되니, 곧바로 응시하는 사람들은 순서대로 반으로 갈라서 각각 정시와 알성시에 붙여야 혼잡스러운 폐단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홍문관 제학 민종현(閔鍾顯)은 의논드리기를 ‘이번의 정시는 실로 국가의 막대한 경사를 위해서인 동시에 알성시 역시 보일 차례가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시골 선비들을 위로하는 데에 마음을 써서 이렇게 연일 과거를 설행하라는 명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명칭이나 체제가 본디부터 동일하지 않은데 지금 만일 무과의 초시를 합하여 설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문과까지도 아울러 합하여 설행한다면 아마 온당하지 않게 될 듯합니다. 곧바로 응시하는 숱한 사람들이 합격을 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함께 경사를 나누어 갖는다는 뜻에 어긋남이 있을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날짜를 갈라서 설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무과의 초시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네 개의 시험장으로 갈라서 시취한다 하더라도 난잡스러움을 금지하고 시험을 거부하는 폐단을 방지하는 것은 오직 시장(試場)을 얼마나 잘 단속하고 규정을 제대로 이행하게 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역시 합하여 설행하고 아울러 시취하여 과거의 명칭을 혼합해서 구별이 없도록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정해년의 전례를 근거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올해의 경과(慶科)와 알성시(謁聖試)는 애당초 결정한 내용에 따라 각각 따로 설행하는 것이 사리에 적절한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장용 대장(壯勇大將) 김지묵(金持默)은 의논드리기를 ‘정해년에 날짜를 갈라서 한 예가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경과의 전시(殿試)를 보일 때 곧바로 응시하는 문과와 무과의 숱한 사람들과 무과의 초시에 합격한 5백 명을 하루동안에 모두 처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틀로 갈라서 거행하되 무과의 초시에 합격한 5백 명 안에서 3백 명을 떼내어 정시에 붙이고 그 나머지 2백 명은 알성시에 붙이면 아마 적절할 듯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제도에 관계되는 문제이므로 가볍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경무(李敬懋)는 의논드리기를 ‘정시와 알성시의 초시를 같은 날 합설(合設)하여 모두 5백 명을 뽑으면 그 인원 수가 전일에 비하여 1백 명이나 증가하는데 이는 실로 경사를 널리 나누어 갖자는 거룩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곧바로 응시하게 하면 그 인원수가 2천 명에 가깝게 되어 당일 합격자 명단을 내는 데는 반드시 군속스럽게 될 것입니다. 원 시험의 초시에서 합격한 5백 명 이외에 곧바로 전시와 회시(會試)에 응시하는 사람들은 날짜를 갈라 먼저 시험을 보이고 전시를 보이는 날 함께 성적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마 적절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한풍(李漢豊)은 의논드리기를 ‘정시와 알성시의 전시를 정해년의 전례를 따라 같은 날 설행하면 곧바로 응시하는 예에 든 사람들은 응시할 수 없게 되는데, 예전부터 특별한 전교가 있을 경우에는 응시를 허락했던 때가 더러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곧바로 전시와 회시에 응시하는 사람들의 수가 1천여 명이나 될 정도로 많은데 원 시험의 초시에 합격한 5백 명을 합쳐서 시험을 치루게 하면 당일 창방(唱榜)의 경우 반드시 군속하게 될 것이니 날짜를 갈라서 설행해야 구애되는 점이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초시에 합격한 5백 명을 구별하는데 대해서는 초시와 합격자를 낼 때에 합격한 사람들 중에서 먼저 3백 명을 뽑아 정시에 붙이고 다음에 2백 명을 뽑아 알성시에 붙여서 나누어 응시하게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서유대(徐有大)는 의논드리기를 ‘정시와 알성시를 연일 설행하는 것은 실로 거자(擧子)들의 폐를 덜어주자는 훌륭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무과의 초시에 대한 문제는 끝내 편리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5백 명을 합쳐서 뽑아가지고 26일에 보이는 정시에 응시하게 하면 곧바로 응시하는 숱한 사람들을 조치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만일 날짜를 갈라서 더 설행하게 되면 인원수를 구별하여 앞뒤로 갈라 붙이는 일도 참으로 구애되는 걱정이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무과 초시에 합격한 3백 명은 애당초에 정한 날짜에 시취하여 26일에 보이는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고, 알성시의 초시는 정시(庭試)의 합격자를 낸 다음 한 2, 3일쯤 기다렸다가 2백 명을 시취하여 전시에 응시하게 하면, 과거의 체면을 존중하고 무과에 응시한 거자들을 위로하는 방도에 있어 적절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일전에 여러 장신(將臣)들의 의논을 수합하여 초기(革記)를 올리면서 이미 저는 별로 다른 의견이 없다고 진달드렸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경과(慶科)와 알성시(謁聖試)의 초시(初試)를 네 개의 시장(試場)에 나누어 동시에 설행하게 되면 거자(擧子)들의 시험을 거부하는 행위와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어디에서나 다 있게 될 것입니다. 설사 일일이 활쏘기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일일이 엄하게 막으려고 해도 그 형편은 극히 편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인원수를 늘려서 합설(合設)하라고 한 전교는 참으로 지당합니다.
전시를 가지고 말하면 초시에서 인원수를 전부 합하여 설행하였으니 역시 정시와 알성시를 구별하여 이틀에 걸쳐 나누어 붙일 필요가 없고 한결같이 정해년의 전례를 따라 같은 날 시취(試取)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원 시험의 초시와 곧바로 응시하는 인원수가 매우 많아서 미처 하루만에 합격자 명단을 낼 수 없을 경우에는, 원 시험의 초시에 합격한 5백 명은 장전(帳殿)에서 활쏘기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곧바로 응시하는 인원들은 절반으로 나누어 모화관(慕華館)이나 북영(北營)에서 시취한 다음 적중시킨 화살 수를 따져서 그 성적 순위를 정하는 것이 사리에 적합할 듯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애당초 알성시를 경과를 보이는 하루 전에 거행하려 했던 것은 알성시를 보일 햇수가 지나치게 늦어진 것이 근래의 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과 초시를 합설(合設)하거나 분설(分設)하거나 모두 지장이 있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공통된 의논이다. 또 곧바로 응시하는 사람의 시권(試券)에 대한 한 가지 문제도 과연 대사성이 거론한 것과 같은 문제점이 있으니, 이러나 저러나 응당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겠다.
영상이 말한, 문과와 무과에 각각 초시를 설행하여 경사를 빛내고 인심을 위로하는 방도로 삼자고 한 것은 매우 좋기는 하지만, 먼 지방의 많은 선비들이 필시 13일까지 오지 못할 것이다. 영부사가 말한, 무과의 초시에 합격한 5백 명을 정시와 알성시로 나누어 이틀에 걸쳐 시험에 붙이기를 대략 정해년의 예에 따르자고 한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선왕(先王) 정해년의 알성시와 경과의 초시와 전시를 모두 같은 날 합하여 실시했었고 보면 정해년의 예에 비추어 볼 때 또한 틀린 점이 있다.
대저 두 과거를 합하여 실시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기는 하지만 이번의 경과는 소중함이 각별한데 그렇게 하면 편리함만을 따랐다는 혐의가 있을 것이다. 두 정승의 의논 가운데 장점을 채택하여 문과에는 초시를 실시하여 선비들을 위로하고 무과는 두 과거에 나누어 붙여서 소중함을 보이게 한다면 그런대로 각각 근거가 있게 될 것이다. 경과의 문과 초시는 이 달 25일에 먼저 실시하고 무과 초시는 당초에 정한 날짜에 따라 실시하며 전시와 합격자 발표는 관례에 따라 길일(吉日)을 잡아 날짜를 나누어 시행토록 하라. 알성시는 26일에 실시하여 많은 선비들을 위로하라. 이미 초시를 실시하게 되었으니 무사들도 반드시 각각 따로 실시하는 것을 원할 것이다. 경과(慶科)의 소중함이 어떠한가. 으당 골고루 기뻐하게 해야 할 것이다. 알성시의 무과 초시도 13일에 장소를 갈라서 시장(試場)을 베풀고 하루나 이틀 정도 뒤로 물려서 시취(試取)토록 하라."
하였다.
황해도 수군 절도사 이해우(李海愚)가 치계(馳啓)하였다.
"대청도(大靑島)와 소청도(小靑島)에 중군(中軍)을 파견하여 그곳의 형편을 두루 살피게 하였습니다. 대청도는 면적이 제법 넓어서 밭으로 개간할 만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 수목을 베어내고 모래와 돌더미를 깎아내어 편편하게 고루자면 한 철이나 달을 가지고는 될 수 없습니다. 지금 26호의 민호(民戶)가 산에 의지하여 움막을 치거나 땅을 파서 방을 만들어 사는데 육지로 나와 먹을 거리를 구하려고 하면 관청에서 실시하는 금령(禁令)이 지극히 엄하여 그곳에 앉아서 목숨이 다 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참으로 절박하고 가엾습니다. 소청도는 산세가 가파르고 골짜기가 좁아서 개간할 만한 땅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터를 잡아 살 곳은 못됩니다. 현재 22호의 민호가 허술하게 움막을 치고 사는데 대청도와 별로 다름이 없는 실정입니다.
두 섬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모두 중국 배를 걱정하고 있는데 대체로 이 두 섬이 중국 배가 왕래하는 중요한 길목에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쪽으로는 소강(所江)과 2백 리, 북쪽으로는 백령진(白翎鎭)과 30리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무단히 내버리기는 참으로 아깝습니다. 이른바 이주민 모집에 응한 사람들은 모두 변함없는 마음[恒心]과 일정한 생업[恒産]이 없는 사람들로서 거의가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바로 흩어져 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만일 관청에서 단속을 하여 그들이 제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면 반드시 모집에 응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또 제멋대로 출입하도록 하면 수목을 베어내고 온 섬을 뚫어서 앞으로 간악한 사람과 죄를 짓고 도망친 죄인들의 소굴이 될 것이니 유익함이 없을 뿐아니라 아마 도리어 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중국 배가 나올 적에 많으면 간혹 20, 30척이나 되고 적은 경우에도 10, 20척이나 되는데 두 섬이 비어 있는 관계로 예사로 짐을 풀어놓고는 왕래하면서 고기를 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백성들이 살고 있는 뒤인만큼 제멋대로 왕래하도록 놔둘 수는 없습니다. 응당 추격하여 체포하거나 오는지 감시해야 할 것이니 두 섬에 근무할 방졸(防卒)의 숫자를 최소한 백 명은 배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방졸들이 받을 요미(料米)와 터를 잡고 사는 백성들을 우선 구제할 대책을 당장 조치해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제멋대로 거취(去就)하게 놔두고 다시는 단속하지 않는 것이 사건이 터지기 전에 대비하여 폐단을 없애는 방도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묘당에게 하나로 확정하라고 분부하소서."
2월 9일 정묘
영희전(永禧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대사헌 임시철(林蓍喆)이 상소를 올려 김종수(金鍾秀)의 사내종과 데리고 다니는 하례(下隷)를 신문하자고 청하니, 전교하기를,
"헌장(憲長)의 상소에서 한 말은 아주 옳지 않은 점이 있다. 사내종과 데리고 다니는 하례를 어떻게 신문할 수 있는가. 더구나 조방(朝房)에서 있었던 일은 대수롭지 않은 일 중에서도 대수롭지 않은 일일 뿐만이 아니다. 게다가 그가 귀가 먹어서 분명하게 듣지 못했다고 하였지만 이를 전한 사람이 영상 이외에 어찌 다른 사람이 있는가. 몸이 풍헌(風憲)을 맡은 대사헌이 되어서 법에 없는 이런 요청을 하는가. 김종수(金鍾秀)야 천만 번 벌을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다만 조정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원소(原疏)는 되돌려주고 상소문을 받아들인 승지는 추고하라.
이 상소로 인하여 그 때 대신들이 어가(御駕)를 수행한 경재(卿宰) 이하의 관원들이 대동한 하례를 추문(推問)한 일이 있었음을 비로소 알았다. 이 역시 어찌 지극히 불가한 일이 아닌가. 이미 스스로 자수하여 공초(供招)를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또 재상의 하례들을 추문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는 재상들의 죄목을 속이고 숨긴 죄로 단정하는 것이다. 대신들의 처사는 매우 개탄스럽다."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처분에 대한 명을 기다리니, 전교하기를,
"승지가 하는 말을 듣건대 좌상과 우상이 그 당시에 녹사(錄事)까지도 아울러 잡아다가 힐문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이 경재(卿宰)가 대동한 하례를 대신 다스린 것이야 이것에 비하면 잘못된 것이 없다 해도 괜찮을 것이다. 좌상과 우상의 처사로 말하면 어찌 개탄할 뿐이라고만 하겠는가. 어찌하여 그렇게도 상소문에서 한 말에 대하여 지나친 의혹을 가지고 너무나도 신문하는 일에 주책을 부린단 말인가. 경은 모쪼록 안심하고 명을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2월 10일 무진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와 우의정 김희(金憙)가 처분에 대한 명을 기다리니, 전교하기를,
"‘모두 내 탓이라고 여겨 소극적으로만 행동하지 말라.’고 주자(朱子)가 경계하기는 하였다마는, ‘앙갚음하려고 사단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 범중엄(范仲淹)의 말도 있다. 해당된 율(律)을 적용한 뒤이고 보면 구태여 전례에 없는 예를 만들 필요는 없겠기에 바로 운운(云云)하는 말을 하지 않고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경들이 전번에 올린 상소에서 털어놓지 못한 말을 다시 털어놓은 데 있어서는 말할 수 있는 길이 막혀서 감히 하지 못했던 것같다마는 그 뒤에 경들이 행한 처사로 말하면 과연 의리에 대체로 합당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전자를 따르자면 조정의 체면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후자를 따르자면 신하의 직분을 수행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경들은 한 번 생각해 보라. 명을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정치순(鄭致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문원(李文源)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문원은 곧바로 교체하고 임희증(任希曾)으로 대신 삼았다.
2월 11일 기사
명정문(明政門)에 거둥하여 도기 유생(到記儒生)의 제술(製述) 시험을 직접 보이고 편전(便殿)에 돌아와서 강경(講經) 시험을 보였다. 제술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生員) 황만령(黃萬齡)과 강경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최봉화(崔鳳和)를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이창한(李昌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12일 경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시험에 합격한 유생들을 소견(召見)하고, 서북 지방의 별부료(別付料) 무사들에게 활쏘기를 시험보였다.
상이 정성 왕후(貞聖王后)021) 의 제삿날이 가까워오자 전조(銓曹)에 명하여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022) 의 사손(祀孫)을 가려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창한과 장령 홍극호(洪克浩)가 대각(臺閣)에 나와서 오시(午時)가 지나도록 전계(傳啓)하지 않자 처음에는 귀양을 보내라고 명하였다가, 승지가 숙배(肅拜)하는 일이 지체된 데에 원인이 있다고 아뢰자, 죄가 내시에게 있다고 전교하고는 이내 내시를 귀양보내고 창한 등은 용서하였다.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와 우의정 김희(金憙)가 면직되었다. 이소 등이 함께 도성(都城) 밖으로 나와서 그대로 현옥(縣獄)으로 향하였다. 전교하기를,
"온 종일 한결같이 처분의 명을 기다리고 있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들었을 적에 의혹스럽지 않겠는가. 이미 상소를 올려 호소할 길이 막힌 것을 알았으면 오늘 아침에 번거롭게 군 것은 도대체 어쩐 일인가. 또 그 상소에서 한 말은 그를 성토하는 데 열변을 토했을 뿐, 세속을 깨우치고 뭇사람들을 살려주는 데 무슨 털끝만큼이라도 도움됨이 있는 것이었는가. 본 의리는 금령에 관계되는 것인데 누가 감히 오늘 다시 제기한단 말인가. 죄인이 죄인으로 되는 것은 사소한 잘못이 엄청나게 큰 잘못으로 되는 데 연유하는 것이니 참으로 이른바 아주 작은 물줄기가 산을 넘는 큰 홍수가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사리가 비록 말 밖에 있는 숨겨진 것이라 하여도 과연 분석하여 변파할 수 있는가. 대신이 이러하면 그 나머지 사람들이야 앞으로 어떻게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을 하겠는가. 전례에 따라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한 비답은 성실함이 부족하여 도리어 예(禮)로써 신하를 부리는 의리가 아니라 하겠다. 좌의정 김이소와 우의정 김희를 정승에서 면직시키라."
하였다.
김이희(金履禧)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기정(朴基正)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홍억(洪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김종수(金鍾秀)를 평해군(平海郡)에 귀양보냈다. 삼사(三司)가 【 대사헌 김이희, 집의 허질(許晊), 사간 이현묵(李顯默), 장령 이유수(李儒修), 헌납 김희채(金熙采), 지평 신숙(申淑), 정언 이동면(李東冕), 교리 권평(權坪)·장지현(張至顯), 수찬 이정운(李貞運), 부수찬 이상황(李相璜).】 합계(合啓)하기를,
"아, 통탄스럽습니다. 김종수가 차마 할 수 없는 행위를 차마하는 것이 어떻게 이 막다른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흉측한 상소가 불쑥 나온 것은 비록 오늘에 있었지만 참으로 그 원인을 구하여 보면 그 차마하는[忍] 한 글자의 유래가 일조 일석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상께서 해와 달처럼 밝은 덕을 가지고 어찌 환히 비춰보지 못하는 곳이 있겠습니까. 지난날 조정에 어려움이 많고 인물이 적었을 때 그같은 사람도 혹 조금이나마 보필이 되고 한 가지 일이라도 충성을 바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없는 좋은 제우(際遇)를 만나 전하가 대리 정사를 행하실 때부터 순서에 관계없이 특진시켰고 처음 즉위하셔서는 사대부들 중에서 으뜸가는 은총을 입어 벼슬이 정승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일찍이 조그마한 공로는 쌓은 것이 없이 한갓 하늘까지 가득차는 수많은 죄만을 저질렀는데, 인자한 마음으로 포용하여 목숨을 살리기 좋아하는 덕을 흡족하게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거꾸로 즐겁게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으나 바로 건져 주었으며 그가 스스로 죽을 죄로 나아갔으나 매번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설령 짐승이나 목석같다 할지라도 당연히 은혜를 새기고 법을 두려워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태도를 바꾸어 국가를 위하여 신하의 직분을 조금이나마 다하려고 애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밤낮으로 궁리하는 것은 갖가지 방법으로 임금을 속이고 의혹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임금도 눈 안에 없고 이 때문에 국시(國是)도 저버렸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결코 차마 제기할 수 없는 말을 차마 제기하여 말하며 결코 차마 글로 쓸 수 없는 내용을 차마 글로 쓰는 등 습관이 마음과 함께 굳어지고 위세는 지위와 함께 자라나서 점점 그칠 줄을 모르고 자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윤리가 무너져서 막히고 예의가 허물어져 인심이 나쁜 곳으로 빠져 들어가며 세도(世道)가 퇴폐해진 것은 어느 것이나 종수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차마 한 소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올린 흉측한 상소문에 이르러 장차 어떻게 해 보려는 마음이 더욱 탄로되었고 패역스런 행위가 모두 드러났습니다. 그가 함부로 상소를 올린 시기로 말하면 앞에 하거나 뒤에 하지 않고 꼭 경모궁(景慕宮)에서 어가(御駕)가 돌아온 뒤이며 연석(筵席)에서 문안을 올린 나머지에 사람들이 모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때를 맞추어 그만이 언짢게 여기며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임금의 바로 앞에서 그는 그저 함부로 전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겉으로는 마치 구구절절 자복하고 사사건건 자신의 죄를 아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속에 가득찬 차마하는 마음은 은연중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돌아서기가 무섭게 이렇게 지극히 흉측한 말로 지면을 가득 채운 상소를 가지고 차마 전하의 건강이 겨우 편안해진 때에 올렸던 것입니다.
가령 윗 부분에서 정청(庭請)을 한 일을 비난하고 배척한 한 문제로 말하면, 이야기를 하자니 치가 떨리고 생각하자니 뼈가 갈립니다. 아, 전하의 신하로서 전하의 사모하는 마음이 지나침을 직접 보고 전하의 건강이 더 나빠지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서 대소 신료(臣僚)들이 동일한 심정으로 자궁(慈宮)의 앞에서 다급한 소리로 호소한 것은 그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며 그 의리는 태양처럼 환히 밝다고 할 것입니다. 대체로 이 해 이 달 이 날에 자궁이 느끼는 슬픈 마음은 바로 전하께서 느끼는 슬픈 마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자궁의 마음을 풀어야 빨리 전하의 마음을 되돌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우리 자궁께 호소하지 않고 어디를 통해 전하에게 이르겠습니까.
이를 두고 그는 먼저 상당한 주책을 저질렀다 하고 이어서 감히 말을 찾아서 하지는 않겠다고 하는 등 이미 드러내어 사납게 외치고 또 한없는 나쁜 속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만일 사람이라면 어떻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만일 전하의 몸을 보호하려고 자궁에게 앙청한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천리(天理)가 없는 것이고, 만일 신료들이 뜰에서 호소하는 것을 자궁에게 듣도록 한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신하로서의 예절이 없는 것입니다. 천리가 없으면 어지럽게 되고 신하의 예절이 없으면 불경(不敬)이 되는 것이니, 이는 비단 자궁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전하의 죄인이며 또한 종묘 사직의 죄인이 되는 동시에 천하 만세의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 종수가 차마 하지 못할 짓을 차마 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에 관계되는 것을 곧장 차마 말하였으며 이미 차마 말하고 또 차마 말하여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마는 이번에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을 차마 말한 일이 또 등대(登對)하여 죄를 자복한 지 며칠도 되지 않은 때에 나오고 말았습니다. 국가가 그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차마 하며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을 차마 말하여 점점 더욱 심하여져서 이렇게 막바지에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종수에 대하여 살려주고 건져준 것이 벌써 여러 차례였는데도 한 장의 흉소(凶疏)를 올리어 스스로 죄안(罪案)을 작성하고 말았습니다. 이런데 빨리 천벌을 시행하여 즉시 왕의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면 난신 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앞으로 군신 부자간의 큰 윤리와 큰 법이 남김없이 폐지되고 무너질 것입니다. 어찌 두렵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온 나라의 여론이 물끓듯 하고 뭇사람들의 분함이 더욱 간절하니 그 소굴을 파괴하고 뿌리를 뽑아버릴 방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또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의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효성으로 오늘 철따라 느끼는 슬픔이 곱절이나 더 간절하여 전하의 건강이 혹시라도 다시 나빠지지나 않을까 염려되는데 신민들이 조바심하면서 애를 태우는 것이 언제나 이 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종수가 흉소를 불쑥 올린 행위 때문에 일전의 가슴 치미는 증세가 더욱 낫지 않게 되었으니 그의 더할 수 없는 죄악은 더욱 한 시각도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평해군(平海郡)에 중도 부처(中道付處)한 죄인 김종수에게 우선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의금부가 종수를 명천부(明川府)로 멀리 귀양보낼 일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법은 법이고 죄는 죄이다. 유형(流刑)·방축전리(放逐田里)·찬축(竄逐)·사형은 각각 등급이 있는만큼 가볍고 중하게 처벌하는 일을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게 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왕부(王府)의 정해진 법인 것이다. 평해는 서울과의 거리가 근 8백 리나 되는 지역이므로 이름은 중도(中道)라고 하지만 실은 먼 지역이다. 이 고을에 부처(付處)를 정한 일이 한두 번 예전과 근래에 시행한 예가 있었으나 역시 좋은 예는 아니다. 그 때에 전교를 내리고 싶었으나 혹간 기회를 엿보는 길을 열어놓을까 염려되어 하지 못했었다. 지금 아뢴 내용대로 법을 더하여 시행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여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인데, 장차 땅 끝이 다한 곳에 보내려고 한단 말인가. 도사(都事)가 계속하여 내려가는 것도 백성과 고을에 폐가 되는만큼 부처한 그 지방에서 그대로 먼 곳에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3일 신미
편전(便殿)에 거둥하여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이이첨(李以澹)은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였다.
2월 14일 임신
김이익(金履翼)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15일 계유
영남 지방의 무사로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의 숫자가 적자, 전교하기를,
"영남은 지역이 큰 도이다. 그런데 나라의 행사인 과거에 참여하는 사람은 다른 도의 큰 고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본도가 공자(孔子)나 맹자(孟子)의 고장처럼 학문이 왕성한 고을이라고 말하지 말라. 활을 쏘는 무예가 천한 것이 아니다. 공자도 활쏘기를 한 것을 보면 이를 좋아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문무(文武)를 다같이 쓰는 것은 국가를 장구하게 보전하는 방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시험을 보지 않아도 본디부터 잘하는 것은 성인이고 시험을 쳐야 잘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신칙하되 기한을 엄히 정하여 독촉하지도 말고 포기하게 내버려두지도 말게 하라. 그리고 고을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으면 수령은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보고하고, 감사와 병사는 그 사람을 불러 시험을 보인 다음, 재주와 무예가 뛰어난 사람은 관서 지방의 예에 따라 장계로 보고하게 하며 지체가 좋은 무변(武弁)으로서 앞으로 진취할 수 있는 능력이 넉넉한 사람은 특례로 권장하도록 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황해도 이성(利城) 사람 공현덕(孔賢德)을 전교한 대로 불러다가 물었더니 꽤나 힘이 있기에 활과 화살을 지급하여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거미 주(蛛)와 붉을 주(朱)의 음이 서로 비슷한 것을 가지고서도 옛사람은 오히려 귀중히 여겼는데,023) 더구나 공씨의 성으로 말하면 어떤 성이며 이번의 과거는 또 어떤 과거인가. 이번의 과거 합격자에 공윤항(孔胤恒)은 문과의 급제자로 발표되었는데 현덕이 만일 급제에 오르게 되면 윤항과 함께 특례로 다같이 알성시(謁聖試)에 붙여서 합격자로 발표하라."
하였다. 현덕이 과연 합격하였다고 무과 시험장에서 보고하니, 전교하기를,
"두 공씨가 함께 알성시에 급제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특하고 기쁘지 않은가. 공윤항은 새로 급제한 사람을 발령할 때 곧바로 전적(典籍)에 붙이고 장원(壯元)한 사람의 예에 따라 일산과 말을 주도록 하라. 공현덕도 이것에 준하여 곧바로 훈련 주부에 붙이고 각각 법에 규정된 풍악을 주도록 하라. 과거가 끝난 뒤 고향에 돌아갈 때에도 역말을 지급할 것이며 도신은 잔치할 비용을 주고 풍악을 베풀어 주어 공자를 존숭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 나라로 온 그 후손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7일 을해
판중추부사 김이소(金履素)와 김희(金憙)에게 도성에 들어오라고 돈유(敦諭)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번 경과(慶科)의 정시(庭試) 초시(初試)에 대한 시권(試券)을 고사(考査)할 때 인재를 널리 수용하는 방도를 미리 묘당(廟堂)에게 강구토록 하여 초기(草記)를 올리게 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전에 없던 이런 큰 경사를 만나 모두들 몰려온 많은 선비들을 장소를 나누어 시취(試取)하는 것은 바로 드물게 있는 훌륭한 일입니다. 그 인재를 널리 수용하는 방도를 동료 재상들과 주고받으면서 함께 상의하였습니다.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은 의논드리기를 ‘30, 40년 이래로 과장(科場)의 폐단이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증가하여 이제 고질병이 되어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빌미는 애당초 정시의 초시에서 근원이 생겨난 것입니다. 대체로 정시의 초시를 세 개의 장소로 나누어 보이는데, 그 인원 수가 많을 적에는 1천 명이나 되고 적은 경우에도 5, 6백 명이나 됩니다. 그래서 거자(擧子)들이 애당초 과거로 보지 않고 공공연히 청탁하여 남이 알거나 말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시관(試官)이 된 사람도 과장(科場)으로 보지 않고서 대뜸 「이는 친구의 자질(子姪)이 응시하여 녹명(錄名)한 것인데 하필 박절하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서 비밀암호를 만들어 주어 마치 속담에서 이른바 곗술에 낯내기처럼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과장에 적용하는 법이 아주 문란해져서 이런 현상을 보고 듣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과거마다 당연히 이렇게 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여 마침내 지난 날 세 층으로 연속되었다는 칭호가 있게까지 되었고 국법(國法)은 남김없이 완전히 결딴이 나고 말았습니다. 시관은 임금의 좌우에 있는 시종(侍從)의 벼슬아치임에도 농간질을 이처럼 하고 선비들은 후일 공경(公卿)이 될 후보인데 어긋난 행동을 이처럼 하니 신은 매양 천정을 쳐다보면서 탄식하여 그칠 바를 몰라 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처음에 이런 폐단을 깊이 살피시고 크게 개혁하고 바로잡으려고 생각하여 문임(文任)과 재상들에게 각각 좋은 대책을 진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 때 끝내 감히 한 마디도 밝은 명령에 답하는 말씀을 올리지 못했었는데, 이는 조정에 가득차게 나온 의논이라고 해보았자 혹간 그 지엽적인 폐단을 바로잡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며 혹은 한갓 도움이 없을 뿐 아니라 또 폐단만을 낳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번거로움을 더는 좋은 방도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뒤 과거 제도의 개혁은 없었으나 정시의 초시에 있어서는 역시 계속해서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사세가 절박함으로 인하여 부득이 장소를 나누어 3백 명을 시취하라는 명이 있었으며 인재를 널리 수용하는 방도를 묘당을 시켜 강구하여 보고하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신이 만일 거기에 꼭맞는 방안을 강구한 것이 있었다면 어떻게 감히 처음 즉위하여 두루 물었을 적에 말하지 않고 지금에 와서야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말한다면 단지 시관을 잘 가리는 일에 달렸을 뿐인데, 시관을 잘 가리려면 반드시 문안(文眼)이 있고 공정한 마음이 있고 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논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문안이 있더라도 공정한 마음이 없으면 주옥(珠玉)같은 인재를 헌신짝처럼 버릴 것이며 공정한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문안이 없으면 옥과 비슷한 돌을 주옥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런 조건을 가지고 말한다면 고시관(考試官)을 고르는 것도 역시 적임자를 얻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좋은 사람이 없다[無好人]는 세 글자는 신이 감히 입으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조정의 신하 중에도 왜 그 책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잘 고르기만 하면 그런 사람을 얻을 것입니다. 시권(試券)을 정해진 시간 이전에 일찍 바치는 문제 역시 크게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폐단입니다. 시험 제목을 자시(子時)나 축시(丑時)에 내걸도록 명하였으니, 해가 뜨기 전에는 감히 시권을 바치거나 받지 못한다는 뜻을 미리 시험보는 장소와 선비들에게 알리어 조금이라도 어기는 일이 없게 하면, 폐단을 바로잡는 데 있어서 지엽적인 것에 속하지만 아주 작은 도움이 없지는 않을 듯합니다.
신은 여기에서 또 절실하게 염려되는 일이 있습니다. 전후에 보이는 절제(節製)와 도기(到記)·응제(應製)·전강(殿講) 때에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이나 점수를 준 사람이 모두 몇명쯤 있었습니다. 점수를 준 사람은 은사(恩賜) 때문에 초시의 시험장에 따로 앉게 되지만 회시에 곧바로 응시하는 사람은 그의 입장에서 초시는 소용이 없기 때문에 이미 한가로이 놀게 되니 그의 친족이나 친구들을 위하여 소매를 내저으며 시험장에 들어가 마음대로 대신 글을 지어주는 것은 형편상 반드시 있게끔 마련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마음 놓고 한 사람당 3, 4편의 글을 짓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이같은 행위를 철저히 금지하지 않으면 과거 시험장의 엄격한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반장(泮長)에게 신칙하여, 이미 초시에 합격을 따낸 사람으로서 남의 시험을 도와주기 위해 시험장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회시에 함부로 마구 들어온 사람을 처벌하는 형률(刑律)을 적용하도록 하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은 의논드리기를 ‘과거에 대한 폐단이 근일과 같이 심한 때는 없었습니다.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비유하건대 마치 제방을 쌓아 물을 막는 것과 같아서 끝내 바로잡을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수십 년전 사간원에 있을 때에 상소를 올려 얼굴을 마주 보고 시험을 치루는 것[面試]이 가장 요긴한 방도라고 논한 적이 있습니다. 전하의 총명으로서 혹 기억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는 예전이나 후일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정해진 시간 이전에 일찍 시권을 바치는 폐단입니다. 어제 시험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 이전에 일찍 바친 시권은 일체 폐기하고 취하지 말라는 밝은명을 받았습니다. 풍속을 바로잡고 세상 사람들을 권면하려는 훌륭한 전하의 뜻에 대해 신은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이번의 과거는 곧 예전에 없던 큰 경사에 의한 것인만큼 그 경사를 널리 축하하고 기쁨을 새기는 도리에 있어서 혹시라도 주옥과 같은 인재를 빠뜨린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 시작하여 엄격한 규정을 만들어 한편으로는 마주 보고 시험을 치르게 하고 한편으로는 정해진 시간 이전에 일찍 시권을 바치는 행위를 금지하게 한다면 그런대로 간편하고 번거롭지 않게 되어 두 가지가 다 좋을 것이며 내려오던 오래된 폐단도 한 번에 개혁할 수 있고 선비들의 각박한 습관도 크게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근래에 과거의 폐단이 더욱 심하여졌으므로 갑자기 짧은 사이에 바로잡을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더구나 신의 혼미한 정신과 식견으로 풍속을 바로잡을 어떤 대책이 있겠습니까. 다만 먼저 과거 시험장을 엄격히 규제하여 권력가에 청탁하는 사습(士習)을 바로잡아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전에 일찍 시권을 바치는 근래의 폐단을 결단코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의마(倚馬)024) 의 재주는 진실로 사람마다 요구할 수 없는 것인데 짧은 시간에 어떻게 자기의 재주를 다 발휘하겠습니까. 자시(子時)나 축시(丑時)에 제목을 내어 걸라는 명이 이미 있었으니 시권을 받는 시간도 몇 시로 한정하고 한정한 시간이 되기 전에는 시권을 받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니, 그러면 거의 인재를 널리 수용하는 방도와 주옥같은 인재를 놓칠 데 대한 걱정에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유사(有司)의 신하가 전하의 지시를 어떻게 시행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시험장에 엄격히 신칙하고 인하여 또 많은 선비들에게 알리는 것이 아마도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영부사의 의견대로 시행하라. 시권을 받는 시간을 한정하는 데 대한 문제는 영상(領相)과 영부사의 의견이 모두 좋다. 이번 봄의 도기과(到記科)에 대한 성적 순위를 매기면서 가장 늦게 제출한 두 시권을 특별히 장원에 둔 것은 많은 선비들에게 이를 알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더구나 경과(慶科)가 목전에 닥쳤고 감시(監試)도 멀지 않았으니 이 내용을 과거의 절목(節目)에 기재하여 거듭 엄격히 신칙하라. 정시(庭試)의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의 명단을 내는 것이 늦어진다 하여도, 시권을 고사하는 예를 보면 사흘을 넘기지 않고 있으니 24일 밤 삼경에 시험 제목을 내어 걸고 27일 신시에 합격자 명단을 내게 되면 조금도 군속스런 폐단이 없을 것이다. 시권을 받는 시간을 조금 늦게 한정하는 것은 더욱 안 될 것이 없다. 정해놓은 규정에 따라 세 시간으로 한정하여 동이 틀 때에 시권을 바치라고 소리친 다음 시권을 받도록 하라. 곧바로 회시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전시(殿試)에서 본 시권은, 정시의 초시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문에 들어온 다음에 받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선비를 대접하는 뜻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오해받을 혐의를 멀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교서관이 《규화명선(奎華名選)》을 인쇄하여 바쳤다.
신축년025) 과 계묘년026) 의 두 해에 선발된 초계 문신(抄啓文臣)들이 응제(應製)한 시문을 편집하여 책 이름을 《규화명선》이라 하고 특명으로 인쇄하여 바치게 하였는데, 이는 장려하기 위한 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2월 19일 정축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대사간 박기정(朴基正)과 장령 이유수(李儒修)가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먼 곳으로 귀양보낸 죄인 김종수(金鍾秀)를 평해군(平海郡)에 그대로 안치하라는 명을 철회하고 명천부(明川府)로 멀리 귀양보내자는 요청을 빨리 윤허하여 법을 더하여 처벌한 뜻이 있도록 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법을 엄격히 하려는 데 뜻이 있을 뿐 그의 사정을 봐 주려고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김종수에게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더 시행하였다.
삼사가 【장령 강문회(姜文會), 지평 안정선(安廷善), 교리 권평(權坪)·장지현(張至顯), 정언 이동면(李東冕), 수찬 이정운(李貞運)·오태현(吳泰賢), 부수찬 심흥영(沈興永)·이상황(李相璜).】 합계(合啓)하기를,
"그가 일찍이 대신을 지낸 것 때문에 당해 형률을 즉시 시행하지 못하였었는데 또 재일(齋日)을 만나게 되어 성토하는 큰 의논을 즉시 이어서 일으키지 못하였습니다. 부처(付處)한 그 곳에 그대로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적용하여 아직까지 숨을 쉬게 해 준 것만도 형벌을 잘못 시행한 것이니 엄격한 법을 속시원히 시행하는 것이 하루가 급합니다. 평해군(平海郡)에 귀양보낸 죄인 김종수에게 우선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합계한 처음에는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자고 요청하였었는데, 상이 승지 이익운(李益運)에게 하문하기를,
"오늘 대간들이 대청(臺廳)에 나왔으니 응당 김종수에게 형률을 더 높이는 것을 요청할 텐데 어떤 형률을 요청한다고 하는가?"
하니, 익운이 아뢰기를,
"조금 전에 전계(傳啓)하였는데 절도 안치로써 요청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적용하는 형률의 명칭은 본래 순서가 있는 것이니 이번에는 극변으로 멀리 귀양보내는 것으로 그 형률의 명칭을 정해야지 어떻게 지레 절도에 안치하는 것을 요청할 수 있는가. 이는 죄인을 봐 주려 해서가 아니라 법률이란 규례를 위반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승지는 대청에 가서 전달하라."
하였다. 이에 삼사가 극변에 멀리 귀양보내는 형률을 적용한 것이었다. 의금부가 경원부(慶源府)의 극변으로 멀리 귀양보낼 것을 아뢰었다.
강화부 유수 이홍재(李洪載)를 소견(召見)하였는데, 그가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2월 20일 무인
전교하였다.
"삼일제(三日製)를 내일 인정전(仁政殿)에 직접 나가서 보이겠다. 그런데 이번 경과(慶科)의 문과와 무과의 초시(初試)에서 3백 명을 합격시키는 것은 정묘년027)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육순을 축하하는 경과의 초시에서 3백 명을 뽑은 전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무과에서 실질적인 인재를 빠뜨릴까봐 염려되니 하나의 무예에서 우등한 사람은 따로 명단을 만들어 아뢰도록 하라. 경사를 널리 축하하는 방도에 있어서 선비와 무사를 어찌 다르게 대하겠는가.
또 들으니 시골 선비로서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이 역시 많다고 하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한강을 건너 돌아가게 할 수 있겠는가. 내일 시권(試券)의 첫 머리에 서울 출신의 선비는 경(京) 자를 쓰고 3도(都)와 8도(道)의 선비들은 각각 출신 고을을 쓰도록 하라. 우리 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은 오로지 과거에서만 뽑기 때문에 벼슬에 나가는 길이 더욱 좁아졌다. 예전에 먼 지방 사람들에게까지 두루 미치게 한 것은 더할 수 없는 제도였는데, 근래에는 경기와 호서(湖西)에도 미치지 못함은 물론 한강 안쪽과 도성(都城) 밖 사이에도 미치지 못하며 요행수로 급제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남산(南山)과 북악(北岳) 사이에 사는 집안들 뿐이다. 이처럼 구차해서야 인재를 등용하는 기회를 넓히려고 한들 될 수가 있겠는가. 직접 시험보이는 화제(花製)028) 를 시기를 앞당겨 시행하도록 명한 것도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내일 시취(試取)한 뒤에 서울과 시골을 통틀어 수석을 차지한 한 사람은 급제를 주도록 하라. 또 2백 명은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거나 점수를 주되, 서울 선비는 두 가지 기예에서 각각 5명씩만 뽑고 그 나머지는 모두 시골 사람들에게 붙여주어서 나라의 경사를 널리 축하하며 인재를 널리 구하는 조정의 뜻을 보여주도록 하라."
전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에게 정승 직을 다시 제수하고, 판중추부사 김희(金憙)에게 도성에 들어와서 사은 숙배하라고 일렀다.
2월 21일 기묘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삼일제(三日製)를 거행하였다. 문 안에 들어온 유생의 숫자가 2만 3천 9백여명이나 되어 뜰에 전부 수용할 수가 없자 인정전 뜰에서 금천교(禁川橋) 밖에까지 늘어 앉도록 하였다. 거둔 시권(試券)이 1만 5백 68장이었는데,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김취강(金就强)은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였고,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토록 한 사람이 1백 명, 점수를 준 사람이 1백 명, 상을 준 사람이 1백 명이었다.
2월 22일 경진
정호인(鄭好仁)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김종수(金鍾秀)에게 절도(絶島)에 안치하는 법을 더 올려 시행하였다.
삼사(三司)가 【 대사헌 정호인, 사간 이현묵(李顯默), 장령 강문회(姜文會), 지평 신귀조(申龜朝), 교리 장지현(張至顯), 정언 이동면(李東冕).】 합계하기를,
"그가 일찍이 대신을 지낸 관계로 특별히 처벌을 요청함에 순서가 있어서 당해 형률을 아직까지 제때에 시행하지 못하였으므로 나라의 법이 오랫동안 시행되지 못하고 지체되자 뭇사람들의 분함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경원부(慶源府)의 변방에 멀리 귀양보낸 김종수에게 우선 절도에 안치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황인점(黃仁點)과 부사(副使) 이재학(李在學)이 치계하였다.
"신들 일행은 지난 해 12월 22일에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곧장 예부(禮部)에 나아가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바쳤는데, 한인(漢人) 시랑(侍郞) 유약운(劉躍雲)이 여러 낭관들을 거느리고 공경히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신들은 남소관(南小館)에 가서 묵었습니다.
24일, 황제가 영안사(永安寺)에 가서 향을 피운다는 사실을 예부가 알려줌에 따라 신들은 당일 꼭두새벽에 서장관 및 역관(譯官)과 함께 신무문(神武門) 밖에 나가서 대기하였습니다. 먼동이 틀 무렵 황제가 황옥 소교(黃屋小轎)를 타고 나왔는데 신들이 맞이하는 곳에 이르러 가마를 멈추고 묻기를 ‘국왕은 평안한가.’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평안합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전송한 뒤에 예부가 ‘황제가 환궁(還宮)할 적에는 맞이하는 절차를 생략해도 된다.’고 하기에 곧바로 남소관에 돌아왔습니다.
27일, 예부에서 알려주는 대로 신들은 홍려시에 나아가 설날 아침에 거행하는 조참(朝參) 의식의 연습을 행하였는데,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와서 함께 의식을 연습하였습니다. 예부가 알려준 내용 가운데 ‘28일 황제가 직접 태묘(太廟)에 제사를 지내는데 두 나라의 사신들이 전송하고 맞이해야 된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당일 꼭두새벽에 신들이 오문(午門) 밖에 나가서 전송을 하고 제례를 마치고 어가(御駕)가 돌아올 때에도 맞이하였습니다.
29일, 황제가 보화전(保和殿)에서 연종연(年終宴)을 베풀었는데 신들은 예부가 알려주는 대로 당일 꼭두새벽에 보화전에 들어갔습니다. 홍려시의 관원이 신들을 인도하여 보화전의 섬돌 위에 앉혔으며 유구국의 사신은 신들의 아래에 앉았습니다. 날이 환하게 밝자 황제가 전에 나오니 음악을 연주하며 음식을 올렸으며 여러가지 놀이가 벌어졌습니다. 신들에게도 잔치 음식이 나왔는데 두 사람이 한 식탁을 함께 먹었으며 각각 낙차[酪茶] 한 순배를 돌렸습니다. 조금 지나 예부 상서 덕명(德明)이 황제의 명에 의하여 신들을 인도하여 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어탑(御榻) 앞에 이르자 황제가 손수 술잔을 들어 신 인점에게 직접 주기에 신은 꿇어앉아 술잔을 받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다음에 신 재학에게도 주기에 신도 꿇어앉아 술잔을 받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잔치가 끝난 다음 광록시(光祿寺)가 잔칫상을 실어 보내었고 또 세찬(歲饌)도 각각 한 상씩 보내왔습니다. 날이 저문 뒤에 통역관이 대궐 안에서 귤과 석류를 싸가지고 와서 두 사신과 서장관에게 각각 10여 개씩 나누어 주었는데 이는 남방에서 바치는 공물이 이제 막 도착하였으므로 이렇게 나누어 준 것이었습니다.
이 해 정월 초하룻날 5경(更) 무렵에 신들이 서장관 및 공식 사절(使節) 27명과 함께 오문 앞에 나아가 대기하였습니다. 꼭두새벽에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당자(堂子)에 나왔다가 조금 지나 환궁하였는데 문무 백관들이 맞이하고 전송하는 절차를 이미 생략하였으므로 신들에게도 예부에서 생략하도록 하였습니다. 날이 환하게 밝을 무렵 황제가 태화전에 나와 조하(朝賀)를 받았습니다. 신들은 태화전 뜰에 들어가 서반(西班)의 끝에 앉아 있다가 다같이 세 번 꿇어앉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절차를 행하였습니다.
2일, 황제가 자광각(紫光閣)에서 세초연(歲初宴)을 베풀었는데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당일 꼭두새벽에 자광각에 들어갔습니다. 해가 뜬 뒤에 황제가 소교(小轎)를 타고 나오기에 신들이 맞이하고 따라 들어가 반열의 차례대로 앉았습니다. 황제가 자광각에 나온 뒤 음식을 올리고 여러가지 놀이가 벌어졌습니다. 신들 두 사람에게 각각 한 상씩을 주고 또 낙차 한 순배를 돌려주었습니다. 예부 상서가 황제의 명에 의하여 신들을 인도하여 어탑 앞에 이르자 황제가 신들에게 직접 술잔을 연종연 때와 마찬가지로 주기에 신들이 꿇어앉아 술잔을 받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잔치가 끝난 뒤에 내무부(內務府)를 시켜 신들에게 상품을 주었습니다. 정사(正使)에게는 비단 3필(匹), 장융(漳絨) 3필, 팔사단(八絲緞) 5필, 오사단(五絲緞) 5필, 큰 주머니[大荷包] 1쌍, 작은 주머니[小荷包] 2쌍을 주었는데, 내무부 대신 화신(和珅)이 나누어 주는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세폐(歲幣)와 방물(方物)을 잘못된 점이 없이 규정대로 바쳤습니다.
6일, 황제가 원명원(圓明園)에 거둥하였는데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당일 꼭두새벽에 삼좌문(三座門) 밖에 나아가 대기하였습니다. 날이 환히 밝을 무렵 황제가 황옥 소교를 타고 나오기에 신들은 전송한 뒤에 돌아왔습니다.
10일, 황제가 원명원에서 환궁하였는데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삼좌문 밖에서 맞이하였습니다.
12일, 황제가 기곡단(祈穀壇)에 나아가 재숙(齋宿)하기에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당일 꼭두새벽에 오문(午門) 밖에 나아가 전송하였습니다.
13일, 곡식을 비는 제사가 끝난 뒤에 황제는 원명원으로 거둥하였고,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당일 꼭두새벽에 삼좌문의 반열 자리에 나아갔는데 예부 상서 기균(紀昀)이 반열을 통솔하였습니다. 어선방(御膳房)의 관원이 황제의 명에 의하여 만두 한 그릇을 가지고 신들의 반열에 와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날이 환히 밝을 무렵 황제가 나왔는데, 각로 화신이 곁에서 신들이 맞이하는 뜻을 아뢰자 황제가 가마의 창으로 자세히 내다 보았습니다. 신들은 예부가 알려준 대로 그대로 원명원에 따라가서 행궁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오후에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에 들어가서 외반(外班)에 나아갔습니다. 석양이 되어 황제가 합문 앞으로 나오자 여러 가지 잡기(雜技)와 등불 놀이를 차례로 진행하였습니다. 내무부가 과일·숙육(熟肉)·원소병(元宵餠) 등의 음식을 신들에게 주었는데 내무부 대신 화신·김간(金簡) 등이 나와서 살펴보았습니다.
14일, 신들이 또 산고수장각에 들어갔는데 황제가 자리에 앉은 다음 신들에게 내반(內班)으로 들어오게 하여 낙차[酪茶] 한 순배를 주고 나서 외반으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등불 놀이와 음식을 준 것은 13일과 꼭 같았습니다.
15일, 꼭두새벽에 황제가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에 나와 방생연(放生宴)을 베풀었습니다. 신들은 먼저 전각의 섬돌 위의 반열에 나갔다가 다시 홍려시 관원의 인도로 전각의 기둥 밖에 앉았습니다. 조금 지나 황제가 전각 위에 나와 앉자 음악을 연주하고 놀이를 진행하였는데 이는 자광각(紫光閣) 등의 잔치에서 진행한 것과 대략 같았습니다. 예부 상서가 황제의 명에 의하여 신들을 인도하여 어탑 앞에 이르자 황제가 직접 술잔을 주었는데 신들은 꿇어앉아서 받고 머리를 조아리기를 전날처럼 하였습니다. 잔치가 끝난 뒤에 개인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오후에 또 산고수장각에 들어갔는데 황제가 자리에 앉은 다음 신들이 내반(內班)으로 들어가자 낙차를 한 순배 주었고 신들은 외반(外班)으로 나왔습니다. 음식을 주고 등불 놀이를 하는 것은 전과 같았으나 화포(火炮) 놀이를 더 진행하였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뒤에 예부가 황제의 뜻에 의하여 신들에게 시(詩)를 지어 바치게 하였으므로 신들은 각각 칠언 율시 1수 씩을 지어서 예부에 보냈습니다.
16일, 예부가 황제의 명에 의하여 사신들은 우선 물러가라고 하므로 신들은 객관(客館)으로 돌아왔습니다.
18일, 신들이 또 원명원에 갔습니다.
19일, 꼭두새벽에 예부가 신들에게 가상(加賞)하는 예단(禮單)을 수령하라고 알려주므로 신들은 예부의 조방(朝房)에 나아갔습니다. 예부 낭중 명선(明善)이 대단(大緞) 2필, 견전지(絹牋紙) 4권, 붓 4갑, 먹 4갑, 벼루 2장, 복(福)자를 넣은 방전지(方牋紙) 1백 장, 조각하여 옻칠을 입힌 다반(茶盤) 4개를 전하여 주기에 신들이 이를 상통사(上通事)와 역관(譯官)에게 주어 귀국하여 복명하는 날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들에게는 각각 단(緞) 1필, 견전지 2권, 붓 2갑, 먹 2갑씩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이날 오후에 산고수장각의 내반으로 들어갔는데 황제가 자리에 앉은 다음 응제(應製)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사은(謝恩)하기에 신들도 똑같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황제가 신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는 이르기를 ‘너희들이 돌아가서 모쪼록 나의 뜻으로 국왕에게 안부를 전하도록 하라.’ 하기에 신들은 다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물러나 반열에 앉은 다음 낙차를 주었으며, 등불 놀이·화포 놀이를 하는 것은 15일에 한 것과 꼭 같았습니다. 황제가 내전(內殿)으로 들어갈 때 신들에게 뒤를 따르도록 하였으므로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몇개의 문을 지나가자 앞에 호수가 있고 한창 얼음이 얼었는데 황제가 썰매를 탔습니다. 종관(從官)과 신들도 썰매를 타고 경풍원(慶豊園)으로 따라 들어갔는데 전우(殿宇)와 등불은 산고수장각과 대략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신들은 섬돌 위에 앉아서 등불 놀이를 관람하고 조금 지난 뒤에 물러나왔습니다.
20일, 꼭두새벽에 예부가 알려준 대로 원명원으로부터 곧장 오문 앞으로 나아가서 서장관 및 공식 사절 27명과 함께 상품을 수령하였습니다.
24일, 신들이 예부에 나아가 하마연(下馬宴)을 받고 객관에 돌아와서 곧이어 상마연(上馬宴)을 진행하였습니다. 표문(表文) 7통은 18일 개봉한 다음 내각(內閣)에서 청어(淸語)로 번역하여 들였는데 그날로 ‘알았다’는 말을 관례대로 내렸습니다.
30일, 회답하는 자문(咨文) 22통을 받고 2월 2일에 북경(北京)을 떠났습니다.
황제의 유시(諭示)는 이러합니다.
‘계축년 4월 26일에 선대 황제의 명을 받고 하늘의 도움을 입어 황제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황제에 오른 이후로 천하가 태평하고 먼 지방 나라들도 귀화(歸化)하여 큰 공로와 빛나는 업적이 다행스럽게도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황제에 즉위한 햇수가 꼭 60년이나 되었으니 실로 25세에 즉위한 임금으로서는 얻기 어려운 일이다. 전에 일찍이 즉위한 지 61년이 되면 정사(政事)를 돌려주는 것이 합당하다는 명을 내렸었다. 즐거운 이 은택이 충만하였으니 천하의 신민(臣民)들과 함께 이 복을 나누어 가져야 될 것이며 사림(士林)에게 혜택을 주는 은전을 더욱 미리 거행해야만 마땅하다. 건륭(乾隆) 59년 가을로부터 특별히 향시 은과(鄕試恩科)를 열고 60년 봄에는 회시 은과(會試恩科)를 실시하며 60년 가을에는 바로 사황제(嗣皇帝)의 은과 향시를 보이고 병진년 봄에는 곧 사황제의 원년(元年)을 기리는 은과 회시를 시행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따라 당연히 시행해야 될 사항들을 해부(該部)에서는 전례를 살펴서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각 직례성(直隷省)에서는 응시자를 널리 뽑아 60년의 회시에 응시하게 한 다음 해부에서는 주청하여 처리할 것이다. 다만 현재 정사를 물려 줄 시기가 멀지 않기에 짐(朕)은 날마다 더욱 힘써서 감히 조금도 자만함을 가지지 않고 천하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늘이 보살펴주는 복을 같이 맞이하려 하고 있다. 이 내용을 가지고 통지하여 알리도록 하라.’"
윤사국(尹師國)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2월 23일 신사
식년 감시(式年監試)를 시행할 때 서울과 지방의 조흘강(照訖講)에 대한 규정을 거듭 분명히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과장(科場)이 문란하기는 서울이나 지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손으로 붓을 잡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모두 분수에 없는 생각을 가지고 함부로 과거에 응시하는 폐단이 숱하게 일어납니다. 그 이유를 캐어보면 조흘강을 제대로 닦아 행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의 제과조(諸科條)를 살펴보면 ‘과장에 응시하는 사람으로서 조흘강을 마쳤다는 증서와 호패(號牌)가 없는 사람은 과거를 정지시킨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조항을 가지고 보면 예전에는 서울과 지방에서 똑같이 조흘강을 거행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 지방에서는 이 법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과장이 엄격하지 못한 것과 사습(士習)이 바르지 못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연유합니다.
올해에는 7도(道)에 신칙하여 조흘강을 과거 날짜 전에 시험을 보이되, 각각 그 지방관이 각별히 엄격하게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자기가 글을 짓고 자신이 직접 글씨를 쓴 사람을 뽑아 명단을 적은 책자를 만들어 경시관(京試官)인 도사(都事)에게 보내고 시험장에 응시자가 들어올 때 그의 조흘첩(照訖帖)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세히 고찰하고 나서 있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응시를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시험을 마친 다음에 만일 요행수를 써서 참여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지방관은 무겁게 그 죄를 다스리고 경시관인 도사도 죄를 논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문관이나 음관(蔭官) 출신의 수령인 경우에는 직접 조흘강을 받게 하고, 무관 출신의 수령인 경우에는 그 지방 유생들을 이웃 고을의 문관이나 음관 출신의 수령에게 보내서 조흘강을 받게 하며, 지방 선비로서 경시(京試)에 응시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공문(公文)을 받아가지고 와서 4관(館)029) 에 제출한 다음에 비로소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기를 허락해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신칙한 뒤에 혹간 문필(文筆)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서 요행수로 향시(鄕試)에 응시한 사람이나 공문도 없이 경시(京試)에 불법으로 응시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거자(擧子)를 법사(法司)에 넘겨 당해의 법을 적용하며, 지방관은 초기(草記)를 올려 엄중하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글은 잘 하면서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범주로 섞여 들어간다면 글을 가지고 선비를 뽑는 본의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시험을 보일 때 그저 문장을 잘 하는지의 여부만을 보고 글씨의 좋고 나쁨은 따지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서울과 경기 지방의 유생이 4관에서 조흘강을 받는 것은 원래 새로 정한 절목(節目)이 있으니 이에 따라 거행하기를 특별히 신칙하여 실질적인 효과가 있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24일 임오
이갑(李𡊠)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이번 경과(慶科)의 무과 시험장에 80이나 70살 먹은 거자(擧子)의 숫자가 많다. 또 듣건대 먼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나이 높은 사람을 존경하는 도리로 보아 당연히 별도로 마음을 쓰는 조치가 있어야 되겠다. 전시(殿試)를 보이는 날 대령시키라고 명하기는 하였으나 어떻게 늦추어 기다리게 할 수 있겠는가. 내일 대령을 시키도록 하라. 선비와 무사의 대우를 어찌 다르게 하겠는가. 더구나 초시가 내일 있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유생으로서 나이가 70이나 80이 된 사람은 시험지의 첫머리에 각각 자기의 나이를 써넣게 하라. 70세 된 사람들 중에서는 세 시험장에서 각각 세 사람씩을 뽑고 80세 된 사람은 예컨대 격식에 틀리는 곳이나 제목 이외의 것을 말한 구절이 없거든 절대로 까다롭게 점수를 매기지 말고 모두 정원 외의 합격자로 붙여 전시를 보이는 날 따로 앉혀놓고 문예를 겨루어 인재를 뽑는 방도로 삼으라. 세 곳 시험장의 시관(試官)들이 상세히 알도록 하라."
2월 25일 계미
춘당대(春塘臺)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춘당대에 거둥하여 경과(慶科)를 시험보였다. 응시 명단을 낸 가운데 나이가 80이 된 무사는 베로 만든 과녘을 설치하고 화살 세 대 이상 적중시키면 뽑았는데 응시한 19명이 모두 합격하였으므로 다같이 급제를 주었다.
상이 승지 서영보(徐榮輔)에게 이르기를,
"알성시(謁聖試)는 경과(慶科)가 아니기는 하지만 바로 경사 때문에 설행하는 과거이니 이 역시 경과라고 하겠다. 선조(先朝) 무진년의 경과를 보일 때 인원 왕후(仁元王后)가 과장(科場)에 나와 관람했던 고사(故事)를 삼가 계승하여 자전(慈殿)030) 과 자궁(慈宮)031) 을 모시고 과장에 나가 관람할 것이다. 자전과 자궁께서 제신(諸臣)들에게 음식을 하사할 텐데 이것도 고사를 계승하여 하는 것이다."
하였다. 영보를 시켜 제신(諸臣)에게 유시하게 하고, 문과와 무과의 시관(試官) 후보자로서 패초(牌招)를 받은 사람과 승지, 사관(史官), 시위(侍衛)한 종재(宗宰)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도록 하였다.
정창순(鄭昌順)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2월 26일 갑신
문묘(文廟)에 작헌례를 거행하고 돌아와서 춘당대에 거둥하여 문과와 무과의 시험을 보였다. 문과에서는 김근순(金近淳) 등 6명을 뽑고 무과에서는 박제가(朴齊家) 등 31명을 뽑아서 방방(放榜)하였다.
훈련 대장 조심태(趙心泰)를 수원부 유수로 삼았다.
서유대(徐有大)를 훈련 대장으로 삼았다.
예문관 제학 심환지(沈煥之)를 파직시키고 정민시(鄭民始)를 대신 임명하였다.
이한풍(李漢豊)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2월 27일 을유
알성시에서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소견(召見)하였다.
병조 판서 서유방(徐有防)을 교체하고 구상(具庠)을 대신 임명하였다.
예문관 제학 정민시를 교체하고 전 예문 제학 심환지를 잉임(仍任)시켰다.
대사간 박기정(朴基正) 등이 합계(合啓)하여,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한 죄인 김종수(金鍾秀)에게 가시울타리를 겹으로 둘러치는 법을 더 적용하자고 청하니, 전교하기를,
"합계하여 아뢴 말이 격식에 어긋나니 대청(臺廳)에 나온 대간들을 모두 체직시키라."
하였다.
홍명호(洪明浩)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시철(林蓍喆)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032) 의 직계 자손에서 다시 갑과(甲科)에 급제한 사람이 나왔으니 천리(天理)는 속일 수 없다. 작년에 목릉(穆陵)033) 을 참배하면서 영상(領相)을 돌아보고 지난날에 대한 느낌을 누를 수 없다고 말했었는데, 이번에 연흥 부원군의 사손(嗣孫)과 당내(堂內) 간의 지극히 가까운 친척이 급제하였으니 어찌 느낌을 표시하는 조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034) 의 제사를 받드는 손자가 급제했을 적에 특별히 동부승지에 제수하고 어사화(御賜花)를 머리에 꽂고 사은(謝恩)하게 하였었다. 이 집안 사람이 급제하였는데 어찌 상례(常例)를 적용하겠는가. 새로 급제한 김선(金銑)을 예조 좌랑에 단일 후보로 추천하여 내일 사은하도록 하라. 그리고 내일 연흥 부원군과 부부인(府夫人) 노씨(盧氏) 내외의 사당에 치제(致祭)토록 하라.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지을 것이다. 헌관(獻官)은 영의정을 보내도록 하라."
2월 28일 병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정시(庭試)의 전시(殿試)를 보였다. 문과에서 권준(權晙) 등 50명을 뽑고 무과에서 정내승(鄭來升) 등 8백 17명을 뽑았다.
전교하였다.
"유 문충공(柳文忠公)035) 의 경륜(經綸)과 사업은 부녀자와 어린이들도 아는 바이다. 요사이 성을 쌓는데 대한 방략(方略)을 열람하기 위하여 그의 유집(遺集)을 책상에 두고서 그의 글을 자세히 읽는 가운데 그 사람에 대해 더욱 알게 되었다. 이런 때에 이 집의 봉사손이 급제하였으니 마치 도와준 사람이 있는 듯하다. 장원한 시권(試券)에 대해 명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등급을 내려 2등의 자리로 하라고 비답하기는 하였다만 어찌 기념하는 조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새로 급제한 유상조(柳相祚)를 전적(典籍)에 단일 후보로 추천하고 고 영의정 문충공 유성룡(柳成龍)의 집에 승지를 보내어 제사지내도록 하라."
2월 29일 정해
상이 편전(便殿)에 거둥하여 과거의 순위를 정하였다. 82세 된 장성좌(張聖佐)에게 특별히 급제를 내리고 정원 외에 붙이도록 하였다.
문과에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소견(召見)하였다.
경과(慶科)의 정시(庭試)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들 가운데 유학(幼學) 임성진(林星鎭) 등 6명은 내년 봄의 감시(監試)에 특별히 응시하게 하고 생원(生員) 조의석(趙宜錫) 등 4명을 첨지(僉知)로 추천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는데, 상이 그들의 나이가 모두 70, 80세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명을 한 것이다.
홍양호(洪良浩)를 판의금부사로, 서유방(徐有防)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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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실록39권, 정조 18년 1794년 3월 (5) | 2025.08.08 |
| 정조실록39권, 정조 18년 1794년 1월 (6) | 2025.08.08 |
| 정조실록38권, 정조 17년 1793년 12월 (10) | 2025.08.07 |
| 정조실록38권, 정조 17년 1793년 11월 (6) | 2025.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