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9권, 정조 18년 1794년 3월

싸라리리 2025. 8. 8. 09:38
반응형

3월 1일 무자

전교하였다.
"초시(初試)는 비록 열 차례를 보더라도 한 번 회시(會試)를 거치고 나면 모두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임금이 성적을 매기는 시험이 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 예전 숙종조에 때때로 사관(史官)을 보내어 여러 유생들에게 제술 시험을 보이고 직접 그 성적을 매겨서 등급이 뛰어난 사람은 전부 급제를 주었는데 이 내용이 태학(太學)의 규정과 《일기》에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근년에 이를 계승하고 인재를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역시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제술 시험을 실시하였다. 옛날과 지금의 시의(時宜)가 다르기 때문에 초시에 붙이기는 하였지만 어찌 시관(試官)이 성적을 매기는 시험과 뒤섞이게 할 수 있겠는가. 이번 정시부터는 임금이 성적을 매기는 초시에 합격한 사람들은 한 번 합격한 것을 한 차례로 따져주고 열 번 초시에 합격한 사람들은 열 차례 회시(會試)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는 내용으로 규정을 정하고 성균관에 분부하여 법전에 기재하게 하라."

 

3월 2일 기축

이재학(李在學)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제주 위유 안핵 순무 시재 어사(濟州慰諭按覈巡撫試才御史) 심낙수(沈樂洙)를 특별히 제주 목사로 삼았다. 낙수가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세 고을을 순무(巡撫)하는 임무를 띠고 1월 7일 제주에서 떠나 바닷가를 따라 돌면서 세 고을과 아홉 진보(鎭堡)를 두루 돌아보고 14일에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순행하는 길에 5리나 10리마다 남녀 노소들이 연달아 떼를 지어 제가 탄 말 앞에 빙둘러서서 앞을 다투어 말하기를 ‘윤음(綸音) 책자를 모두 듣거나 읽었습니다. 전하께서 섬사람들을 이토록 극진히 생각하시어, 흉년을 당한 저희들의 어려운 목숨이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이는 모두 작년에 육지의 곡식을 옮겨서 보내준 전하의 은택 덕분입니다.’라고 하면서 목이 메어 흐느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람까지도 있었습니다.
신이 두루 마을을 다니면서 형편들을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작년의 농사는 큰 흉년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정의(旌義)의 오른쪽 방면, 대정(大靜)의 왼쪽 방면, 제주의 오른쪽 방면 등 세 방면은 풍재(風災)를 가장 많이 입어 거의 참혹한 흉년을 만난 것과 같았습니다. 게다가 가을과 겨울에 환곡(還穀)을 받으면서 그 친족에게 물린[徵族]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살림이 조금 실팍한 집도 저축했던 곡식이 다 비게 되어 현재 봄철의 곤궁함을 당하는 정도가 다른 곳에 비하여 더욱 심합니다. 말 앞에 빙둘러서서 호소하는 백성들이 아직 부황난 사람은 없었으나, 식구의 수를 따져서 나누어 주는 환곡이 언제나 열흘도 넘기지 못한다고 하면서 신에게 계문(啓聞)하여 곡식을 옮겨다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신이 처음 섬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백성들이 곡식을 옮겨다 주는 것을 이롭게 여겨 큰 흉년이 들지 않았더라도 반드시 그러한 요행수를 바란다는 것을 대충 알았기 때문에 곡식을 옮겨다 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을 일체 타일러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호소는 거의 중지되었습니다만 더욱 심하게 피해를 입은 세 지방의 요청은 갈수록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신이 거듭 매번 곡식을 옮겨오자면 섬이나 육지가 모두 폐단이 있으므로 경솔하게 시행하기가 어렵다는 말로 타이르고 시험삼아 묻기를 ‘너희들이 만일 곧은 뱃길로 항해하여 강진(康津) 등의 고을에 배를 대고 곡식을 받아가지고 오고 미역을 운반해 가서 곡식값 대신 바치는 것을, 마치 육지에 사는 백성들이 형편에 따라 다른 고을에 가서 환곡을 받아오는 것처럼 한다면 의당 이런 내용으로 장계를 올려 요청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원하지 않았으니 아직 형편이 다급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24일에 장계로 올린 보고에서 한 차례 배정할 곡식의 수량이 부족하다고 한 데 대해서 다시 대략 마련하여 겨우 분배하였습니다만, 더욱 피해가 심한 마을은 매번 차례를 돌며 식구를 따져 지급할 적마다 언제나 부족하여 여러 날 양식이 떨어지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부득이 조금씩 등급을 올려 나누어 주었더니 원래의 곡식 수량이 또 축이 났습니다. 이것은 그래도 형편에 따라 고쳐나갈 수 있겠으나, 섬에 심는 보리는 모두 가을 보리라서 작년 가을에는 보리 종자가 아주 귀하여 온 섬에서 보리를 간 면적이 태반이나 보통 해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설사 보리가 익은 뒤라 할지라도 가을 곡식이 익기 전까지 목숨을 잇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이것이 더욱 안타까운 일이므로 미리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곡식을 옮겨오고 미역을 옮겨가는 일로 섬과 육지에서 수송할 때 그 일을 이용하여 농간을 부리는 폐단은 우선 논하지 않고 그냥 두더라도 바닷가의 나주(羅州) 등 고을의 뱃길은 내해(內海)라고는 하지만 섬사람들이 수시로 왕래하는 곳이 아닙니다. 때문에 한평생 배부리는 일에 익숙한 섬 안의 사공이나 격군(格軍)이라도 미역을 옮겨갈 때 배를 침몰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닷가 각 고을에서 겨우 연해안의 가까운 바다 정도나 왕래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큰 바다의 파도 속으로 들어간다면 배를 침몰시키지 않은 경우는 다행히 임금의 복에 힘입은 것이나 종전에는 매번 침몰되는 수가 많았습니다.
육지에 사는 죄없는 백성들을 배가 쉽게 침몰되어 반드시 죽고야 마는 곳으로 가볍게 내보내고 운반하던 곡식도 침몰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며 필경에는 섬사람들도 미역을 바치는 일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전하께서 섬사람들을 돌보는 데 애쓰는 지극한 뜻에 비추어 실로 완전한 방책이 될 수 없습니다. 곡식을 옮겨다주는 한 가지 문제는 결코 해마다 쉽게 시행하도록 허용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섬은 토질이 척박하고 재해가 많아 세 고을을 통틀어 수확한 곡식의 총수량이 2만 섬에도 차지 않기 때문에 흉년이 든 해에는 외지의 곡식이 아니면 온전히 살아나갈 방도가 없습니다.
제민창(濟民倉)을 설치한 것은 진실로 성조(聖朝)가 먼 지방의 백성들을 생각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책에서 나온 조치입니다. 신이 이를 설치한 규모(規模)를 모르는 터에 어떻게 감히 경솔히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현재의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강진(康津)이나 해남(海南) 등지로 제민창을 옮겨서 섬사람들로 하여금 왕래하며 수납(受納)하게 하고 각각 그 고을로 하여금 주고받는 일을 주관하도록 하며, 또 도신(道臣)에게 총괄하여 살피도록 해서 편리한 대로 운반하여 혹은 미역을 먼저 바치고 곡식을 받기도 하고 혹은 곡식을 먼저 받고나서 미역을 바칠 수도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농간이나 폐단을 막는 것은 또한 절목을 얼마나 엄하게 만드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조천포(朝天浦)나 미북포(未北浦) 등에서부터 남당도(南塘島)나 고달도(古達島) 등의 포구까지는 큰 바다로 나가는 뱃길이 일직선으로 마주 대하고 있으므로 사공이나 뱃사람들이 저쪽이나 이쪽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물길에 익숙하여, 원근의 섬들과 아침 저녁의 날씨에 대해서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환히 알고 있습니다. 이익에 급급하여 함부로 떠나는 고깃배나 장삿배를 제외하면 전혀 침몰될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섬에서 먹여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곡식이 도착하는 기쁨이 있을 것이고 바닷가의 곡식을 운송하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바다를 건너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한때의 옅은 소견을 함부로 논하는 것은 지극히 황송한 일이지만, 삼가 나름대로 편리 여부에 대해 생각한 바를 말씀드렸습니다.
보리가 익은 뒤의 일을 미리 조치하는 일은, 곡식의 수량을 많이 떼어줄 필요는 없으며 영솔하여 운반하는 것도 이제 다시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도신을 시켜 강진과 해남 두 고을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곡식을 절반 정도인 2천섬 가량을 떼어 제주 등 세 고을에 현재의 완급을 헤아려 적당히 나누어 받아가게 하고 이어서 미역을 바치게 하면 편리할 듯합니다. 또한 창고를 옮기는 데 대한 편리 여부도 먼저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올린 장계를 묘당에게 품처하도록 하소서.
신이 순시하는 길에 백성들이 폐단을 호소하여 낸 정장(呈狀)이 1백여 통에 이를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거두어들인 잘못된 관례와 지탱하기 어려운 고질적인 폐단은 현재 낱낱이 조사해서 개혁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거행한 일의 형편과 순시할 때의 해변을 방비하는 상태, 군기(軍器)의 정비와 군사의 실상과 목장·요새 등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복명(復命)할 때 응당 조목별로 열거하여 서계하겠습니다."
하였다. 낙수가 또 전 목사 이철운(李喆運)의 죄를 논하여 아뢰기를,
"대체로 세 고을의 굶어서 죽은 사람의 숫자가 6백여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서 얼핏 보아도 극히 놀랍습니다. 그런데 봄과 여름 사이에 섬 전체에 전염병이 크게 성하였고 거듭 흉년이 들어서 병든 사람은 굶어서 죽고 굶은 사람은 병들어 죽었는데, 조건없이 지급하여 구제한 하룻치의 양식이 장정은 5홉에 불과했으니 굶주리고 병든 사람을 일일이 온전하게 살리는 데에 방도가 없습니다. 이른바 굶어죽었다는 것도 여러 날 곡식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가 부황이 나서 죽은 사람들이고 보면, 상정(常情)으로 헤아려 볼 적에, 관장(官長)이 된 사람이 고의로 수수방관하여 그렇게 돌보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옮겨온 곡식과 환곡으로 이익을 취하여 마구 낭비하고 굶주리는 사람 수와 진휼한 곡식의 수량을 허위로 기록하여 숫자를 채운 따위의 일은, 설사 스스로 말하게 하더라도 오로지 한마음으로 굶주린 사람을 구제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면(面)과 리(里)에서 사망한 사람에 대한 보고를 처음에는 직접 하라고 했다가 곧바로 명령을 전하여, 다만 조건없이 곡식을 지급한 사람 중에서만 보고하게 하고 환곡을 먹은 사람[還民]은 논한 사실이 없었음이 면임(面任)의 공초(供招)에서 나왔습니다.
진휼하는 일이 끝난 뒤 남은 곡식을 명목을 바꾼다는 핑계로 보리가 아직 익지 않아 백성들이 굶주리는 때에 나누어 주어 유용한 것이 벌써 형편없는 짓인데, 이른바 남은 곡식을 옮기다 배가 침몰하여 유실된 수량을 보충한 것은 번거롭게 보고하고 싶지 않은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고, 환곡의 남은 수량으로 아전들이 빼먹은[吏逋] 수량을 채워주고는 아전과 백성을 똑같이 대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곡식 한 알이 사람의 목숨과 관계되는 때에 굶주린 백성들의 입 안에 들어갈 물건을 서슴없이 문서를 만들어 지급하고 또 잡비로 돌려썼으니, 이른바 명목을 바꾼다는 핑계로 유용한 것은 곡식이 귀할 때 모리 행위를 했다는 지목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고한록(高漢祿)이 바친 곡식의 수량을 더 보태어 기록한 것은 환산하는 법에 준하면 축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수량은 계문(啓聞)한 것과 다릅니다. 돈을 꾸어준 일에 관련되어 뭇사람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굶주린 사람의 숫자를 더 보태어 계문한 것에 비하면 그래도 작은 일입니다. 일마다 성실하지 못하고 문제마다 진실이 없으니 여러 가지 숫자가 대신(臺臣)이 상소에서 열거한 것에서 절반을 줄인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말썽과 백성들의 원망은 모두 여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말총을 가지고 쌀을 거둔 것과 큰 전복이라는 명칭을 지어낸 것은 비록 작은 문제이기는 하나 원망을 얻은 것은 역시 큽니다. 보리 종자를 다른 것과 바꾸어 판 것과 녹비(鹿皮)와 백랍(白蠟)으로 다른 물건을 사들인 것은 모두 군관(軍官)이 스스로 담당해 한 것이고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역시 그 수효를 다 조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대신이 상소에서 이른바 양복(凉鰒)을 사고 팔았다는 한 조목에 많은 수입이 그에게로 들어갔다는 자취는 없지만 당해 목사(牧使)의 갖가지 범한 죄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네가 바다를 무사히 건너가서 백성들의 마음이 위로가 되었다. 대체로 말과 글이 오히려 이처럼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단 말인가. 여러 가지 폐단은 편리한 대로 바로잡아서 섬에 사는 백성들이 삶을 즐기고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도록 하라.
창고를 옮기는 문제는 묘당이 품처할 것이다. 배로 실어나르는 곡식이 아니더라도 구제하여 살릴 수만 있다면 육지의 백성들이 그에 힘입어 짐을 덜 수 있을 것이니 아주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때에 수령을 만일 서툰 사람에게 맡긴다면 어떻게 멀리 큰 바다 가운데 사는 백성들을 밤낮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풀어 주겠는가. 너를 승진시켜 목사로 임명할 것이니 조정에 와서 행하는 사은(謝恩)은 그만두고 직무를 살피라.
문과의 시권(試券)은 올라오기를 기다려 성적 순위를 매겨서 내려보내겠다. 그리고 섬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전각(殿閣)을 지어서 어제(御題)를 봉안(奉安)하기를 원하고 네가 벌써 백성들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 집짓는 일을 시작하였다고 하였으니, 합격한 시권 가운데 장원한 것은 외각(外閣)에 명하여 인쇄해 보내도록 하겠다. 이 뜻을 모두 잘 알도록 하라.
이번 경과(慶科)에서는 경사를 널리 축하하는 의도에서 본 도에서 올라온 선비와 무사가 있는지를 물어서 별시(別試)를 보이려고 하였는데 단지 한량(閑良) 한 사람만 여러 차례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으므로 특별히 금군(禁軍)으로 임명하여 돌려가며 전랑(殿廊)을 수직하게 하고 적당히 요미(料米)를 주며 내년의 경과를 다시 보게 하겠다. 무과에 응시한 사람으로서 급제를 받은 사람과 문과와 무과에 합격한 사람은 내년 봄에 시기를 맞추어 올려보내서 동시에 합격자를 발표할 수 있게 하라.
네가 이제 목사로 승진하여 임명되었으니 휴대하는 밀부(密符)는 전 목사가 받았던 것을 그대로 휴대하여, 왕명을 받들고 왕래하는 사행(使行)의 뒤치다꺼리에 의한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라. 전 목사의 죄상은 네가 열거하여 따진 것을 보고 알지 못했던 것을 잘 알게 되었다. 조정에서 수령을 임명해 보내서 백성들을 무마하게 하는 것은 임금의 백성들에 대한 걱정을 나누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거늘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감히 이처럼 두려워하고 삼가지 않았는가. 기민을 먹이는 행정은 더더욱 형편없기 짝이 없다. 네가 이른바 일마다 성실하지 못하고 문제마다 진실이 없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꼭맞는 죄목이다. 우연히 그렇게 되었거나 아니거나는 논할 것 없이 굶어죽은 사람이 그다지도 많다는 내용을 보고는 내심 깜짝 놀랐으며, 더욱이 잘못된 관례가 있거나 없거나는 따질 것 없이 기민을 먹인 숫자를 허위로 기록한 일을 차마 할 수가 있는가. 더구나 섬의 백성들을 위하여 폐단을 제거하는 조항 중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명령을 내린 것은 바로 왕위에 오른 최초에 공물(貢物)을 면제하는 일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아주 큰 전복을 영원히 면제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하교가 과연 어떠하였는가. 그런데 그가 감히 서울에서 요구하는 데 쓸 것이라고 핑계하고는 강제로 큰 것을 받았을 뿐아니라 이내 구멍이 뚫리지 않은 전복까지도 요구하여, 이 호소할 데 없는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니, 어찌 지극히 밉지 않겠는가. 이밖의 잡다한 범죄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일에 속한다.
전 목사 이철운(李喆運)은 잡아오기를 기다려 해부(該府)로 하여금 우선 일반적인 범죄는 내버려두고 엄하게 형벌하여 공초(供招)를 받아서 기필코 법을 따져 엄하게 처벌하겠다. 섬의 군교(軍校)와 아전으로서 포악한 짓을 도와 백성들을 들볶은 무리들은 네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대소 백성들을 모이게 한 다음 군정(軍政)에 관련된 자는 엄하게 곤장을 쳐서 조리를 돌리고 민정(民情)에 관련된 자는 특별히 엄하게 형벌하여 모두 법을 따져 무겁게 다스리라. 너는 이 내용을 가지고 섬안에 선포하라. 양가(梁哥) 사인(士人)에 관한 일은 ‘억울함은 말하였으나 터무니없이 모함한 것은 아니므로 증거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대신(臺臣)과 벌써 질문에 따라 억지로 대답한 일이 있으니 모두 헛말이 아니라고 하여 그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다. 네가 다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처리하라.
작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신음하는 소리가 저러하다는 것을 이미 들었는데 만일 그 죄를 형편없는 목사에게만 넘긴다면 흉년만을 죄로 여기는 것보다 더 심한 부끄러움이 된다. 대체로 목사를 적임자로 뽑지 못한 것도 곧 조정의 책임이다. 너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곳에 가서 고아와 과부들을 모아서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제문(祭文)을 읽으면서 위령제를 지낸 다음 그 사실의 전말을 장문(狀聞)하라."
하였다.

 

3월 3일 경인

명하였다.
"다섯 곳의 제향(祭享)에 보낼 향관(享官)을 뽑기가 어려울 때에는 음관 출신의 당상관과 당하관 가운데 일찍이 목사나 부사를 지낸 사람들을 변통하여 나누어 배정하며 기내(畿內)의 다섯 능(陵)에 대한 한식제(寒食祭)의 여러 집사(執事)들은 인근 고을의 수령과 기내 역참(驛站)의 찰방으로 임명하는 것을 아울러 규정으로 정하라. 설·동지·단오·추석에도 아뢴 다음 변통하여 임명하라."

 

모든 공씨(孔氏)의 본관(本貫)을 곡부(曲阜)로 쓰도록 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이번 알성시의 방목에서 공윤항(孔胤恒)의 본관을 곡부로 쓰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윤항은 이미 방목에 곡부로 썼으니 공자(孔子)의 후손인 모든 공씨들에게 똑같이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이 내용으로 거행 조건을 내서 알리어 서로 틀리게 쓰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규장각 신하, 성균관 당상, 예조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검교 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가 아뢰기를,
"예조의 초기(草記)에 대해 내린 비답에 따라, 임금이 점수를 매기어 각 연도의 초시(初試) 합격을 은사(恩賜)한 유생의 성명을 방금 내각(內閣)의 방목(榜目) 모음과 4관(館)의 등록(謄錄)에서 조사해 내었습니다. 그런데 응시한 횟수를 따져서 응시를 허락한 것이 이미 특별한 대우에서 취해진 것이지만 과장(科場)의 법규도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과거의 규정을 엄격하게 하고 사체(事體)를 소중하게 하는 방도에 있어서 일정한 규정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다음부터는 임금이 성적을 매겨서 반포한 뒤에 회시에 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거나 점수를 줄 사람에게는 직부첩(直赴帖)의 규정을 대략 모방하여 본각(本閣)에서 제때에 즉각 증명서를 만들어 주고 본각과 예조에서 각각 명부를 만들어 비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의 경과(慶科) 이전에 임금이 성적을 매겨서 초시 합격을 은사한 사람은 모두 이 명령이 있기 전의 일에 소속시키고, 지금 이후의 과거 합격자부터 응시 횟수를 따져서 감해주는 일을 또한 오늘의 연교(筵敎)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증명서는 지금 만들어 주되 그중에서 여러 차례 초시에 합격한 사람은 매 순차마다 한 장의 증명서를 만들어 주어 한 번 과거를 볼 때 한 장의 증명서를 사용하게 하고, 과거가 끝난 뒤에는 증명서를 갖다 바치게 하여 본각에서 지워없앤 뒤에 계품하게 하되, 한결같이 전시(殿試)의 직부첩의 관례에 따라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동지성균관사 정창순(鄭昌順)·서유방(徐有防), 대사성 정대용(鄭大容) 등이 아뢰기를,
"임금이 고과하는 시험은 다른 시험과는 다른 특별한 것인데 한 번 회시에 응시하고 나면 다른 응시자와 뒤섞어 더는 논하지 않으니 참으로 미안한 일입니다. 일전에 내린 분부는 참으로 지당합니다. 어제 각신(閣臣)이 회차를 구별하여 증명서를 만들어 주고 대조하여 증빙하자는 말은 과연 조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로써 절목(節目)을 만들어 준수하여 시행하는 것이 아마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민종현은 아뢰기를,
"유생의 시권(試券)을 임금이 성적을 매기는 것은 실로 드물게 있는 훌륭한 일이니 지금 각신과 성균관 당상의 아뢴 말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앞으로 임금이 성적을 매겨서 초시에 합격한 유생으로 회시에 응시하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한다는 뜻으로 내각에 증명서를 바치면 내각에서 원안과 대조하여 증명한 다음 예조에 통보하여 응시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삼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각의 공문을 경유하지 않은 경우에는 모두 응시를 허락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욱 완전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승지 이면긍(李勉兢)이 아뢰기를,
"임금이 성적을 매기는 초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각신의 진달(陳達)에 따라 증명서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규정을 만들어 시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시관(試官)이 점수를 매겨서 회시에 곧바로 응시하거나 점수를 준 사람에게도 응당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무과는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는 사람이건 회시에 응시하는 사람이건 따지지 않고 합격자 명단을 낸 뒤에 본원(本院)에서 증명서를 내주고 병조에서 명부를 만들어 비치하여 과거에 임하여 대조하고서 응시를 허락했습니다. 문과만은 애당초 고찰할 만한 문서가 없이 내키는대로 시험에 응시하고 있으니 아마도 과거의 규정을 엄격히 하는 데에 위배됨이 있는 듯합니다. 더구나 지금 임금이 성적을 매겨서 초시에 합격시킨 사람에게 증명서를 내어준 뒤에 시관이 성적을 매겨서 초시에 합격한 사람들도 더욱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는 사람은 무과에서처럼 인원수가 많지 않으므로 설사 거론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지금으로부터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하는 사람과 점수를 준 사람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내각(內閣)에서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예에 따라 본원에서 일일이 증명서를 만들어 주고 예조에서 명부를 만들어 비치하였다가 매번 시험에 응시할 때면 증명서를 예조에 바쳐서 대조하여 고찰하는 바탕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실제 사고가 있어서 응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원시험이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이 진시(陳試)를 보는 예에 따라 서울은 예조에 그 사유를 제출하고 시골은 본관(本官)에 그 사유를 제출하여, 본관은 이를 순영(巡營)에 보고하고 순영은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따로 그 명부를 만들어 계하한 뒤에 다음 번 과거에 응시하게 허락해야 합니다. 시험이 지난 뒤에는 이미 과거에 응시했던 증명서는 예조에서 본원에 바쳐서 삭제한 다음 계품(啓稟)하게 하는 일도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제주(濟州) 등에 특별히 어사를 파견하여 보인 시험에 합격하여 전시에 곧바로 응시하게 된 사람들도 증명서를 만들어 지급하라."
하였다.

 

3월 5일 임진

이날 모든 승지들이 전부 봉심(奉審)하러 나가고 승정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전교하기를,
"한림(翰林)은 청환(淸宦)이지만 서북 지방 출신의 겸춘추(兼春秋)가 있고 또 별겸 춘추(別兼春秋)가 있다. 승지에 있어 위장 가승지(衛將假承旨)와 각신 가승지(閣臣假承旨)는 겸춘추나 별겸 춘추와 그 성격이 대략 같다. 이 뒤 이런 때에는 입직하는 각신(閣臣)은 가승지로 임명하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올라와서 승정원에서 수직하는 것을 영원히 규정으로 삼으라."
하였다.

 

3월 6일 계사

양사(兩司) 【 대사헌 홍명호(洪明浩), 대사간 임시철(林蓍喆), 집의 윤서동(尹序東), 사간 최헌중(崔獻重), 장령 서유련(徐有鍊), 지평 윤제동(尹悌東)·홍수호(洪受浩), 헌납 장지현(張至顯), 정언 정만석(鄭晩錫)·남이익(南履翼).】 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김종수(金鍾秀)에 대한 처형을 아직껏 지체하고 있으니 이 어찌 신민(臣民)들이 한 시각이라도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의리입니까. 다만 그가 대신을 지낸 까닭으로 법을 적용함에 원래 순서를 두기는 했지만 매번 한 등급의 형률을 높일 적마다 판하하는 전교를 질질 끌어왔으므로 삼사(三司)의 논계가 세월만 허비하고 맙니다. 이제 절도(絶島)에 안치하자는 대간의 아뢴 요청은 이미 윤허하였으나 금오(金吾)가 올린 초기에 대해서는 여태껏 계하하기를 망설이니 뭇사람들의 분해하는 마음은 더욱 격렬해지고 공론은 더욱 들끓고 있습니다. 더구나 전교가 내려오기 전에 지레 형률의 명칭을 가하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금방 내리셨으므로 대각(臺閣)이 쟁집할 길이 막혀버렸습니다. 우려와 분함이 극에 달하여 두려움과 의혹됨을 누를 길이 없으므로 이에 감히 재계를 하고 일제히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종수를 안치하자는 초기를 빨리 허락하여 왕의 법을 제때에 시행함으로써 하늘의 응징을 즉시 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하기를 망설인 것이라면 어찌 다만 연명으로 차자만 올리고 말 일인가.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요청해도 될 것이며 면대를 요청해도 될 것이다. 대계(臺啓)는 이미 윤허하였으나 연거푸 재계하는 날을 만났고 재계하고 난 다음날은 곧 과거 급제자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비답 내리는 일을 지체한 것은 대체로 헤아리는 것이 있어서인데 어떻게 감히 이런 박절하게 독촉하는 차자를 올린단 말인가. 원차(原箚)를 돌려주라. 이를 받아들인 승지가 한 마디 말도 없이 들인 것은 직무를 태만이 한 것이 매우 심하다. 승지 이면긍은 먼저 금부 추고 전지를 받들고 여러 대간들은 우선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옥당(玉堂) 【교리 박윤수(朴崙壽), 부교리 신대윤(申大尹)·홍수만(洪秀晩), 수찬 오태현(吳泰賢)·이정운(李貞運), 부수찬 심흥영(沈興永)·이상황(李相璜).】 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양사가 연명으로 올린 차자를 돌려주고 여러 대간들을 무겁게 추고하라는 전교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신들이 차자를 보지 못했으나 그 차자의 내용은 짐작하여 알 수 있습니다. 형률의 등급을 높일 것을 청한 합계는 지난번에 이미 윤허를 받았으나 절도에 안치하기를 청한 초기에 대해서는 여태껏 계하하기를 망설이기 때문에 해부(該府)는 거행하지를 못하고 삼사(三司)는 잇달아 이를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의 이목(耳目)을 담당하는 직임에 있으니 일에 따라 진달(陳達)한 것은 실로 엄중하게 처벌하려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므로 본래 죄를 줄 만한 일이 없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박절하게 독촉했다는 등의 지엄한 전교를 내리어 지나치게 꺾어버림으로써 다시는 감히 입을 벌리어 판하하기를 청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진실로 어떤 문제를 말할 때마다 언제나 독촉한다는 데에 혐의가 되어 감히 말하지 못하게 되면 이는 대간이 끝내 말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대각(臺閣)을 설치한 뜻이며 또 어찌 엄하게 성토하는 의리이겠습니까. 대간이 올린 차자를 돌려주라는 명과 여러 대간들을 무겁게 추고하라는 명을 속히 철회하고, 이어 윤허하는 명을 내리어 성토하는 정성을 펴도록 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별겸 춘추 홍낙유(洪樂游)가 아뢰기를,
"외사(外史)들이 감히 그저 날씨에 대해서만 써서 바치지 말라는 뜻을 전후에 누누이 신칙했을 뿐 아니라 더구나 지난 겨울에 특별 전교를 내린 것은 그 얼마나 지엄한 것이었습니까. 그런데도 경상·충청·함경·황해의 4개 도에 있는 외사들은 신칙한 전교를 이행하지 않고 그저 잘못된 관례만을 따라 예전대로 날씨만을 적어서 보고하였으니 지극히 놀랍습니다. 또 적어서 보낸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풍속이나 민물(民物) 및 그밖의 기록할 만한 일들은 진실로 고을마다의 일기(日記) 아래에 달아서 기록해야 되는데도 따로 책을 만든 것도 있고 위아래에 뒤섞어 써넣은 것도 있으니 격식은 뒤죽박죽이 되고 기록한 내용은 모호하기만 합니다. 본관(本館)에서 각도의 외사들에게 엄중한 관문(關文)을 보내어 마음을 써서 정리하여 바치도록 하라고 엄하게 신칙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각도에 외사를 설치한 것은 그 법의 의미가 매우 중하므로 문관 출신의 수령과 찰방 중에서 으레 외사의 직책을 맡기어 마음을 써서 임무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경기는 도사(都事)가 일기를 정리하여 보내면서 애당초 외사를 겸한다는 칭호도 없으니 춘추관의 영사(領事)와 감사(監事)에게 자문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따랐다.

 

충청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장계하기를,
"평신진(平薪鎭)의 군적(軍籍)을 분리한 조치는 실로 고질적인 폐단을 바로잡고 목장에서 일하는 백성들의 살림을 소생시키려는 거룩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신은 밝으신 명에 따라 고을과 진(鎭)에 공문을 돌려 관문(關文)과 제사(題辭)를 주고받기도 하고 얼굴을 대하여 강구하기도 하면서 세밀하게 힘써 처리하여 이제 겨우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응당 시행해야 할 사항들을 아래에 열거하였으니 모두 해시(該寺)를 시켜 복계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사복시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형원의 장계를 보건대 평신진에 소속된 대산(大山)·이원(梨園)·창택(倉宅)의 세 목장에 대한 군적을 분리하는 사항들을 아래에 열거한 것이 모두 26개 조항인데 다 조리가 있으니 모두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소서.
군정(軍政)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세 목장 안에 이미 6백 명이 넘는 한정(閑丁)이 있으니 본진(本鎭)에 군포(軍布)를 바치는 군정으로서 각 고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본진의 목장 내로 옮겨 정해야 되겠습니다. 목장 안에 있는 서산(瑞山)·태안(泰安)·면천(沔川) 세 고을의 군액(軍額)에서 이번에 면제받은 4백 명을 많고 적음을 따져서 좋은 방편에 따라 본진의 군포를 바치던 군정을 목장에 이속하여 준 대신으로 충당하게 되면 고을에 있어서는 병을 핑계하는 걱정이 없을 것이고 진에 있어서는 가까운 곳에서 취하는 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호남의 법성진(法聖鎭)에서 이미 그러한 전례가 있었으니 역시 장계에서 요청한 대로 시행하소서.
관원의 성적을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는 전지·군사·환곡에 대한 여러 정사를 전적으로 주관한다고는 하지만 한 사람의 첨사(僉使)를 세 곳에서 그 성적을 고과(考課)하는 것은 이미 이차적으로 참고할 것이 없으므로 새로운 예를 만들기 어렵습니다. 만일 잘한 일이나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함께 의논할 때 승진시키거나 강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순영(巡營)에서 기록하는 한 가지 조항은 그만두고 그저 수영(水營)에서 예전처럼 함께 의논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겸목관(兼牧官)의 성적 평가도 본시에서 예전처럼 성적을 고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모두 회계한 내용대로 시행하라. 수군(水軍) 4백 명을 서로 이속시키는 것은 과연 두 쪽이 다 편리한 이점이 있다. 육군의 명색(名色)과 각종 보인(保人)의 처리에 있어서는 대략적인 의견도 없으니 이 한 문제는 다시 도신(道臣)에게 물어서 즉시 조목별로 열거하여 보고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도태할 것은 도태시킬 것이다. 이것은 고을과 진의 백성들이 모두 부담이 적어지게 하려는 것이니 말을 만들어 공문을 보내라.
매월 바치는[月令] 약재(藥材)와 식료품은 그 수량이 모두 미미하니 면제하는 것이 옳겠다. 제조(提調)가 이미 연교(筵敎)를 받았으니 응당 알려주었겠지만 이른바 무부(巫夫)에게 물리는 베와 약재를 바치는 보인(保人)은 탕감하라."
하였다.

 

3월 7일 갑오

충청도 관찰사 이형원이 면천에 사는 노인 이동형(李東馨)에게 제급(題給)할 음식물과 옷감에 대하여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처음에는 그저 1백 8세인 줄만 알았었는데 지금 경의 장계 끝에 기록한 생년(生年)을 인해 생각해 보니 정묘년036)  에 태어났다면 과연 연세가 얼마인가. 예전 선조(先朝) 때 관서(關西) 사람 신수채(辛受采)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 나이가 많은 사람을 존경하는 거룩한 뜻에서 특별한 은전을 내린 것이 과연 어떠하였던가. 옛날의 처분을 거슬러 생각하면 마치 어제의 일인 듯하다. 이 노인에게 다시 한 자급(資級)을 더하여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삼도록 하라. 더구나 이렇게 문벌이 좋음에랴. 도총관을 제수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삭주(朔州)의 별무사 서덕겸(徐德謙)과 아들 별무사 서유화(徐有華)는 모두 곧바로 이번 전시(殿試)에 응시하여 다 합격하였습니다. 문과나 무과를 따질 것 없이 부자를 동시에 합격자로 발표하는 것은 규정에 위배됩니다. 덕겸은 합격자로 발표하고 그 아들은 다음 과거에 응시하기를 허락하여 합격자로 발표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곧바로 과거에 응시시킨 데에 이미 선후의 차이가 있으니 동시에 기예를 겨루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시에 함께 응시할 수 없는 규정에 있어서는 어찌 변방 고을의 백성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겠는가. 특별히 응시를 허락한 것으로 하라."
하였다.

 

3월 8일 을미

이철모(李喆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제주 목사 심낙수(沈樂洙)가 상소하기를,
"생각건대 제주도는 호남의 방벽이 되며 말이 생산되고 귤을 바치는 곳으로서 진실로 이롭게 쓰이는 곳이지만 이보다 더 중대한 것이 있습니다. 일본의 대판(大坂)과 강호(江戶), 중국의 복건(福建)과 강남(江南) 사이에 끼어 있는 섬이므로 동쪽이나 서쪽에서 순풍을 타고 한번 돛을 올리면 5, 6일의 노정에 불과합니다.
고려 때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이 섬에 웅거하자 김방경(金方慶)이 토벌하러 오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풍랑을 만나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라의 안위(安危)가 이 한 번의 일에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방경으로 말하면 세상에 드문 명장(名將)이므로 작은 섬을 한때 웅거한 반적(反賊) 정도는 언제든지 멸할 수 있었으나 ‘나라의 안위가 이 한 번의 일에 달렸다.’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외국과 연통(連通)할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베푼 혜택이 누적되고 흡족하며 제도가 엄숙하였으므로 가정(嘉靖) 연간에 10백여 척의 해구(海寇)가 침략하였으나 완전히 사로잡는 공을 세웠으며 동쪽에서 오는 배는 한 척도 다시는 가까이하지 못하였습니다. 임진 왜란에 나라를 중흥(中興)한 것은 호남 지방의 힘이었으며 이 섬에는 다행스럽게도 충돌이 없었던 데에 힘을 입은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그러한 점을 알고 수령을 뽑는 데 있어 모략이 있는 무신(武臣)을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근래 30, 40년 동안 언제나 무신을 등용하여 매번 보충하는 때가 많았으며 간간이 문관을 임명하는 때도 있었으나 무신만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재물을 긁어들이는 길의 명목이 점점 많아졌으며 심지어 한 치[寸] 정도의 미역이나 한 자[尺] 되는 가죽까지도 값이 쌀 때 샀다가 비싸게 팔아서 이문을 챙기는 행위가 마치 장사치와 같게 되니 백성들이 관장(官長) 보기를 사랑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은 언제나 없습니다. 비상시에 대한 대비는 한결같이 잊어 버리니 온 섬의 군사의 총수는 한 개 부대가 되기에 충분한데도 군사의 정원이 비는 대로 내버려두고 있으니, 이는 모두 수령을 적임자로 뽑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본래의 험한 석벽(石壁)이 섬 전체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외적의 침입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화북포(禾北浦)와 조천포(朝天浦) 이외 지역인 수산포(水山浦)·서귀포(西歸浦)·모슬포(摹瑟浦)·명월포(明月浦) 등의 펀펀한 항구의 모래 사장에는 큰 배를 정박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듣건대 해마다 바람이 잔잔할 때면 엄청나게 큰 배가 우도(牛島) 등 2, 3 리(里)의 사이에서 닻을 내리고 물을 긷는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분별할 수 없는 배가 나타나면 으레 비국에 보고하였으나 근래에는 중지하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신이 보기에 관북(關北) 지방의 10주(州) 가운데 회령(會寧)이 제법 정사가 잘 되고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들이는 행위도 적은데 이는 대체로 그 수령이 문벌과 인망(人望)이 자못 무거워 자신의 앞길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섬은 회령보다 더 중요한 요해지일 뿐만이 아니므로 신의 생각에는, 제주 목사를 문벌과 명망이 알려진 무신(武臣)으로 뽑아 보내며 두 고을의 수령도 앞길이 환한 나이 젊은 무인을 임용하면 거의 잘될 것입니다.
선조(先朝) 계축년037)  에 어사 심성희(沈聖希)가 아뢰기를 ‘제주는 멀리 바다 가운데 있는 관계로 불법(不法)이 많이 행해지고 있으니 강진(康津)은 제주로 가는 문에 해당하는 만큼 시종(侍從)으로 수령을 삼아 언제나 염찰(廉察)하여 임금에게 직접 아뢰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그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제주목의 판관(判官)을 시종신(侍從臣)으로 뽑아 보내면 실질적인 효과가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거룩한 전하께서 섬의 백성들을 위하고 바다의 방어를 위하여 마음을 쓰지 않는 때가 없어서 배로 곡식을 수송하여 먹여주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장려하며 간혹 어사(御史)를 파견해 폐단을 바로잡지만 어사가 탄 배가 떠나자마자 폐단은 다시 종전과 같아지곤 합니다. 이른바 절목(節目)이라는 것도 모두 빈껍데기의 문서가 되고 마니 섬의 백성들을 위하는 계책으로는 수령을 제대로 뽑는 한 가지 일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못난 사람이라고 하여 그 말까지 폐하지 마소서.
신이 쫓겨나 있던 중에 갑자기 이 명을 받고 의리에 따라 그 곳에 가서 임무를 수행해야 되겠기에 조심스럽게 명을 받들었는데 본주의 목사로 발탁하여 임명한 데 대해서는 더욱 황송한 마음이 더하였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뒤로 날짜를 한정하여 일을 마무리하였으나 전부터 앓던 병이 차츰 일어나고 각기병이 더 생겨나서 점점 심해진 지가 벌써 열흘이 넘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림을 호소하는데도 환곡을 저장한 창고의 문서를 전혀 살펴보지 못하고 그대로 폐기한 채로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몸은 외롭고 마음은 약해져서 스스로 목숨에 대한 위태로운 마음이 많이 생겨나서 외로운 등불 아래에서 파도소리를 듣노라면 진실로 살아서 왔다가 죽어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됩니다. 신의 정상을 가엾게 여기어 곧바로 대신할 목사를 임명하여 신으로 하여금 고향에 돌아가 죽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실로 수령을 가려 뽑으려 한다면 너는 당연히 남에게 양보하지 않아야 된다. 병이 이렇다고 말을 하지만 참으로 이른바 국가의 일을 위하여 쉴 겨를이 없는 것이니, 너는 노력하여 일을 살피도록 하라. 상소문에서 말한 문제와 장계(狀啓)에서 품청(稟請)한 내용은 묘당에게 사리를 따져 회계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3월 9일 병신

상이 황단(皇壇)에 나아가 희생을 살펴보고 돌아와서 편전에 나와 재숙(齋宿)하였다. 황단에 제향을 지낼 때 성문을 닫지 않을 경우[留門]에는 특별히 병조 낭청을 공북문(拱北門)에 배정하여 잡인을 엄금하라고 명하고 인하여 규정으로 정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을 재실에서 소견하고 이르기를,
"황단을 맡아보는 유사(有司)는 으레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으로 임명하였는데 이것은 대체로 옛 관례를 따라 내시(內侍)를 수직관(守直官)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한려(漢旅)로 수직관을 삼고 있으니 황단의 유사를 한려로써 임명하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동서(東西)도 분간하지 못하니 이 뒤로는 황단을 맡아보는 임무를 각각 나누어 관장시키고 향례(享禮) 때 거행하는 절차를 경이 홀기(笏記)로 써서 지급하여 외어 익히게 하되 그것이 너무 복잡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니 간략하고 상세하도록 힘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제단(祭壇) 위에 이미 황화문석(黃花紋席)을 쓰고 준소(罇所)에도 황화문석을 쓰는 것은 자못 예제(禮制)에 어긋난다. 이 뒤로는 준소에 무문황선석(無紋黃縇席)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훈장(訓將)이 5초(哨)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북문 밖을 빙둘러서서 지켜야 될 것이니 막중한 향례를 거행하는 장소를 잡인들이 내려다보게 내버려두어서야 되겠는가.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3월 10일 정유

춘당대에 나가 경과(慶科) 정시(庭試)의 급제자를 방방(放榜)하였다. 승지를 시켜 동반과 서반의 벼슬아치들에게 분부하기를,
"근래에 선생(先生)이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가서 보지 않는 것이 이미 나쁜 풍습이 되었다. 이번의 경과는 그 성격이 자별하니 만일 과거의 명칭에 생각이 미친다면 경사를 빛나게 하는 방도에 있어 어찌 전교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문관과 무관들은 나갈 때에 문과나 무과를 따질 것 없이 한두 곳이라도 반드시 새로 급제한 사람을 가서 보고 감히 곧장 돌아가는 일이 없게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새로 급제한 사람이 은문(恩門)038)  을 찾아가 보는 것은 옛 관례가 바로 그러하였는데 듣자니 근래에는 모두 시행하지 않는다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번에 급제한 모든 사람들은 여러 시관들을 일일이 가서 찾아보도록 하라."
하였다.

 

예문관 제학 심환지(沈煥之)를 특별히 능주 목사(綾州牧使)로 보임하였다. 이것은 여러 번 상의 부름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중비(中批)로 이석조(李奭祚)를 정언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나이 70을 사는 것도 희귀한 일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80세이겠는가. 전적 이석조의 문장과 식견은 직접 성적을 매길 때 익히 알았고 문벌도 좋으니 정언으로 제수하라."
하였다.

 

민종현(閔鍾顯)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 황인점(黃仁點)과 부사(副使) 이재학(李在學)이 돌아오면서 압록강을 건넌 다음 치계하였다.
"저 청(淸)나라의 사정은 조정에 별다른 일이 없고 변경도 평안하여 별로 말할 만한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는 병진년에 정사를 황태자에게 넘겨주는 한 문제는 벌써 지난해에 황제의 유시(諭示)를 내린 바 있고 올해 가을부터 잇달아 은과(恩科)를 베푼다고 하며, 통역관들도 크고 작은 공사(公事)를 내년 안에 모두 마무리짓고 병진년에는 칙사(勅使)의 행차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황제의 정력은 5, 6년 전에 비하여 조금 줄어든 것 같기는 하나 아직도 건강하여 세전(歲前)과 세후(歲後)에 여러 차례 예전과 똑같이 거둥하였습니다. 잔치 자리에서나 등불 놀이를 할 때 시신(侍臣)들의 부축을 받지 않고 어탑(御榻)에 오르내렸으며 듣고 보는 여러 상태가 모두 평상시에 비하여 줄어든 것이 없고 연일 힘을 써서 몸을 움직였으나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월 그믐날에 비로소 원명원(圓明園)으로부터 환궁(還宮)하였으나 2월에는 또 천진(天津)에 거둥하여 수위(水圍) 놀이를 관람한다 합니다. 이른바 수위 놀이라는 것은 많은 선척을 물가에 빙둘러 벌여놓고 거위나 오리 따위를 때려서 몰아내고는 무사들을 시켜 일제히 활을 쏘게 하여 잡은 수에 따라 상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진은 북경(北京)에서 남쪽으로 2백 40여 리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정사를 넘겨주는 문제는 이미 기한이 정해졌으므로 황제의 뜻에는 반드시 맡길 사람을 정하여 놓았을 터이지만 지극히 엄하고 비밀로 하기 때문에 조정의 벼슬아치건 천한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않으므로 탐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자(皇子) 네 사람 가운데 제8왕은 주색에 빠져 있고 또 다리에 병이 있어서 본디부터 인망이 없고 제12왕·15왕·17왕 세 사람 중에서 15왕이 오랫동안 금중(禁中)에 있으면서 학업을 부지런히 힘쓴다고 합니다마는 인망이 있는 곳은 명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황손(皇孫)인 정군왕(定郡王) 면은(綿恩)은 바로 황제의 큰 아들 영황(永璜)의 맏아들인데 가장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전에 내린 황제의 유시에 ‘여러 황손들 중에서 면은이 나이가 가장 위일 뿐 아니라 기영(旗營)의 여러 사무를 나누어 맡아본 뒤로부터 일처리가 매우 타당하기에 은상(恩賞)을 더 많이 주는 바이니 면은은 더욱 부지런히 힘써서 기필코 은총에 보답하도록 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근년에 와서 해외의 여러 나라들이 들어와 조공(朝貢)을 바치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지난해 여름에는 최남단의 여덟 나라가 또 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그 가운데 길리국(咭唎國)에서 바친 것은 여러 가지 측후(測候)하는 기구와 시원하고 따뜻한 수레, 구리로 만든 그릇 등 도합 10여 가지로써 지극히 정교하여 서양 나라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길리국은 속칭 홍모국(紅毛國)이라고 하는데 광동(廣東)의 남쪽에서 뱃길로 수천 리 밖에 있습니다. 수십 년 이래로 중국과 통하지 않다가 지난해에 처음으로 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그 나라 사람들의 얼굴 모습은 노랑털에 곱슬머리이며 추악하고 사나워 보였습니다. 황제를 조견(朝見)할 때에는 예절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조정의 정사에 대한 잘잘못은 자세히 알지 못하겠으나 화신(和珅)과 복장안(福長安)이 권세를 부리는 것이 날로 심해져 제멋대로 위복(威福)을 농락하고 뇌물을 주고받는 길을 크게 열어놓아 호사스럽고 부귀한 생활은 황실에 비견할 만하니, 입이 있는 사람은 모두들 말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눈을 흘깁니다. 그리고 선창 장군(船廠將軍)은 곧 황족(皇族)인데 불법을 많이 자행하며 국가의 재물을 제멋대로 써서 창고가 텅 비었는데 정신(廷臣)의 탄핵에 의하여 대신 복강안(福康安)을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창은 심양(瀋陽)의 북쪽에 있는데 신이 돌아올 때 연도의 각 역참(驛站)들을 보니 대접하는 장막[供帳]을 성대하게 준비해 놓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략 들어보니 선창은 바로 중요한 지역이고 그가 범한 죄 또한 가볍지 않기 때문에 대신을 특별히 수천 리나 되는 지역에 보냈다고 합니다."

 

3월 11일 무술

명광문(明光門)에 나와 문과와 무과에 새로 급제한 사람들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이조승(李祖承)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재찬(金載瓚)을 규장각 직제학으로 삼았다.

 

한림(翰林)의 후보자에 대한 권점(圈點)을 도당(都堂)에서 거행하게 하였다. 도당이 시임(時任) 별겸 춘추(別兼春秋) 홍낙유(洪樂游)·서유문(徐有聞)과 일찍이 한림을 역임한 이상황(李相璜)·이중련(李重蓮)·서유구(徐有榘)·임경진(林景鎭)을 관례에 따라 모두 삭직(削職)하기를 계청하니, 전교하기를,
"도당의 회권(會券)에 관한 규정에는 한림과 별겸 춘추가 없고 난 뒤에야 하게 되어 있다. 어제 별겸 춘추 서유문의 말에 따라 승지가 아뢰는 말을 듣고 당상관 중에는 과연 별겸 춘추를 삼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도당에게 회권하라는 명을 하였다. 이 초기(草記)를 보니 홍낙유·서유문 외에도 일찍이 한림을 역임한 사람이 숱하게 있으니 이 사람들을 별겸으로 삼을 만하며 또 3명을 채울 수도 있겠다.
당초에 승지가 도당에서 회권하기를 요청한 것은 극히 소홀히 한 행위이다. 당해 승지는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고 잘못 아뢴 별겸 춘추 서유문은 삭직시키며 외임(外任)으로 나간 사람과 지방에 있는 여러 사람들은 모두 규정에 따라 삭직시키라.
경들은 물러가서 일찍이 한림을 역임한 사람 중에서 별겸 춘추를 관례를 대조하여 정원을 채운 다음 계하를 받을 것이며 즉시 패초하여 본관에서 회권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양덕(陽德)의 민가 10백여 호가 불에 탄 사건을 치계하니, 그들의 신포(身布)를 면제해주고 새 환곡과 묵은 환곡을 감면해주라고 명하였다.

 

부수찬 심흥영(沈興永)이 상소하기를,
"신이 새로 임명된 날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간단히 소회를 피력하고 겸하여 심환지(沈煥之)를 문형(文衡)의 추천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정범조(丁範祖)의 당파를 좋아하는 습관을 논하였으나 승정원의 저지로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승지의 책무는 바로 임금의 명령을 전하고 신하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 신하들의 장주(章奏)가 만일 금하는 것을 범하였거나 격식에 어두웠을 경우 의견을 주고받으며 수정하게 하는 것이 왜 불가하겠습니까. 그런데 근일 승지들은 곧잘 마구 호통을 치면서 이서(吏胥)를 끌어내어 쫓아버림으로써 장주를 끌어안고 허둥지둥 도망을 치도록 하니 사방에서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성대(聖代)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신이 지난번 상소를 올릴 때에도 승지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실정에서는 오랫동안 벼슬을 차지하고 있을 수 없으니 빨리 체직시키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어 허락하지 않았다.

 

한림(翰林) 후보자에 대한 권점(圈點)을 행하였다. 【별겸 춘추 이상황(李相璜)·이중련(李重蓮)·임경진(林景鎭).】  세 개의 권점을 받은 사람은 박종순(朴鍾淳)·박종경(朴宗京)·오태증(吳泰曾)·유태좌(柳台佐)·이존수(李存秀)·조만원(趙萬元)·구득로(具得魯)·홍명주(洪命周)였다.

 

3월 12일 기해

한림에게 소시(召試)를 거행하고 이어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대사헌 이조승(李祖承)을 체직하였다. 이는 주대(奏對)에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대사간 이철모(李喆模)를 파직시켰다. 철모가 아뢰기를,
"김종수(金鍾秀)의 죄는 전하께서 이미 환히 살피고 계시며 성토하기를 청하는 말이 한창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으므로 신은 다시 장황하게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계(臺啓)는 이미 윤허를 받았지만 의금부의 초기(草記)에 대해서는 여러 날 동안 윤허를 내리지 않으므로 법부(法府)에서는 법을 거행하지 못하고 삼사(三司)에서는 계속해서 아뢰지 못하고 있습니다. 빨리 처분을 내리어 성토하는 의논이 나오는 길을 열어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를 망서리려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니, 의금부의 초기에 대해서는 가까운 시일에 비답을 내리겠다."
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이철모가 전계(傳啓)하면서 단지 ‘종수의 죄는 전하께서 환히 살피고 있다.’고만 말한 것은 그 말이 매우 모호하여 극히 놀랍다. 파직시키라."
하였다.

 

규장각 대교의 후보자에 대한 회권(會圈)에서 오태증·이존수가 추천되었는데 이존수를 규장각 대교로 삼았다.

 

신광리(申光履)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13일 경자

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을 참배하고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시신(侍臣)들에게 밥을 내려주고 여러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였다. 선희궁의 소원(小園)에 도로 와서 화전(花煎) 놀이를 하면서 상이 칠언 절구로 시를 짓고는 군신들에게 화답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3월 14일 신축

제주 판관을 간혹 시종신으로 임명하여 보내며 대정(大靜)과 정의(旌義) 두 고을의 수령도 지체와 장래성이 있는 사람을 더러 뽑아 임명하라고 명하니, 이는 제주 목사 심낙수(沈樂洙)의 소청(疏請)에 따라 비변사에서 회계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대사간 신광리, 집의 이병철(李秉喆), 사간 신대윤(申大尹), 장령 이일운(李日運), 이정운(李貞運), 지평 강빈(姜儐)·강극성(姜克成), 헌납 어석령(魚錫齡)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죄인 김종수를 섬으로 귀양보내자는 대계(臺啓)는 윤허를 받은 지가 이제 며칠이나 되었습니다. 다만 전교가 내리지 않는 연유로 의금부에서는 거행하지 못하고 삼사에서는 계속해서 아뢰지를 못하고 있으니 국가의 기강으로 헤아려 보아도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빨리 절도(絶島)에 안치하라는 전교를 내리어 응당 거행해야 될 형률을 속시원히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떻게 감히 이처럼 독촉할 수 있는가. 경들을 교체하겠다."
하였다.

 

김종수를 남해현(南海縣)에 안치하였다.

 

부교리 이경명(李景溟), 부수찬 윤제동(尹悌東)·이익모(李翊模)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먼 곳으로 귀양보낸 죄인 김종수를 절도로 안치하자는 초기(草記)는 다행히 계하되었습니다마는, 연명으로 차자를 올린 양사의 여러 대간(臺諫)들을 독촉한다고 꾸짖고 처벌로 벼슬을 체직시킨 것에 대하여 신들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아, 적신(賊臣)이 법을 위반하고 함부로 글을 올려서 차마할 수 없는 말을 차마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떠한 죄악이며 어떠한 변괴입니까. 그런만큼 오늘 성토하는 것은 비단 양사의 여러 신하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아마 대부(大夫)와 국민들도 똑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윤허하는 말씀을 망설이고 있으니 뭇사람들의 심정은 답답해하고 세상 사람들의 여론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직언(直言)하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피를 적시며 울음을 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항의하는 차자를 올려 강력하게 청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를 두고 독촉한다고 말하는데 대하여 신은 그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늘날 부족한 것은 강개한 의기로 성토하는 기풍이어서 연석(筵席)에서 주저하여 말하지 못하고 잠자코 입을 다문 채 떼지를 못하는 사람이 모두 이런 부류들입니다. 그런만큼 이러한 신하들은 의당 추켜야지 억눌러서는 안되는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견책을 주고 꺾어버리니 거룩한 전하의 시대에 이런 지나친 처사가 있으리라고는 일찍이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절도에 안치하자는 대계에 이미 윤허를 내렸으니 형률을 더 높일 데 대한 요청이 급하게 되었으므로 절차에 따라 거행하는 조치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신(臺臣)을 지레 교체하였으니 일제히 호소할 길이 없게 되어 공의(公議)를 펼 수 없고 나라의 체면이 손상되었으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빨리 대신들을 교체하라는 명을 철회하여 성덕(聖德)을 빛내고 성토하는 일을 엄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의 대사간은 참으로 죄가 있었고 오늘의 여러 대간들도 매우 옳지 않다. 어떻게 추켜세우는 것과 억누르는 것을 서로 혼동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3월 15일 임인

내원(內苑)에 나와 꽃을 감상하고 물고기를 낚았다.

 

3월 16일 계묘

서미수(徐美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묘향산(妙香山) 서산 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사당에 수충사(酬忠祠)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는 동시에 제위전(祭位田)을 주었다. 이는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의 요청을 따른 것이었다.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상소를 올려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3월 17일 갑진

경모궁에 참배하였다.

 

3월 18일 을사

춘당대에 나가 장용영의 무사들에게 봄철에 행하는 활쏘기 시험을 거행하였다. 이어서 제술 시험을 베풀고 합격한 유생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좌의정 김이소가 상에게 아뢰기를,
"신은 저번날 등대(登對)한 자리에서 전 대사간 이철모(李喆模)의 행동을 목격하고 놀랐으나 그 자리에서 바로잡지 못하였었는데 지금 대소(臺疏)를 보니 부끄러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철모의 죄는 귀양을 보내더라도 오히려 가벼운 처벌인데 근본이 원래 있기 때문에 처분을 아직 망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인심이 점점 잘못되어가는 것이 철모에게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엄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서로서로 잘못된 곳으로 빠져들어가게 되어 비단 철모 한 사람에게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빨리 처분을 내리어 세도(世道)에 다행스러움이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번에 죄인이 연석(筵席)에 나왔을 때 철모를 비난하고 헐뜯는 데에 온 힘을 다하였지만 철모는 도리어 너그럽게 성토하였는데 혹시 좋아하고 미워함이 전후에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명색이 대부(大夫)이면서 지향하는 것이 한결같지 않아서 아침에 이랬다가 저녁에 저랬다 하는 것이 바로 습속이 되었다. 나는 항상 이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
하였다.

 

내탕고(內帑庫)의 쌀 30포(包)와 돈 백 꿰미를 특별히 성균관에 주었다.
전교하기를,
"제술 시험에 합격한 유생들에게 장전(帳殿)에 특별히 식당(食堂)을 베풀어 주라. 그런데 근래에 들으니 본관(本館)의 경비 중에서 이 행사에 쓴 것이 가장 많다고 하는데 이는 드물게 베푸는 까닭이다. 내탕고의 쌀 30포와 돈 1백 꿰미를 특별히 성균관에 지급하여 선비를 기르는 데 필요한 비용에 보태고 아울러 선비를 예우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진휼청 당상 정민시가 아뢰기를,
"근래 각도의 감사들이 올린 보고를 보면 버린 어린이에게 요식(料食)을 주는 데 대하여 《자휼전칙(字恤典則)》에 그 연한을 정하지 않았으므로 어린이가 성장한 뒤에는 의당 제한이 있어야 되겠다고 합니다. 대체로 7, 8세의 나이가 되면 제발로 뛰어다니면서 스스로 먹을 수가 있으니 7살로 한정하여 요식을 주고 8살 이후에는 요식 주는 일을 중지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좌의정 김이소가 7살로 한정하기를 청하자 따랐다.

 

이득신(李得臣)을 형조 판서로, 황승원(黃昇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이익(金履翼)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철모(李喆模)를 영광군(靈光郡)에 귀양보내었다. 정언 이조원(李肇源)이 상소하기를,
"김종수의 죄는 삼사의 아룀에서 이미 전부 열거하였습니다. 대저 의리는 천하 사람들이 다같이 따르는 것이지만 자기의 생각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배치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충애(忠愛)는 다함께 가지고 있는 떳떳한 마음이지만 자기와 연관되지 않은 일이면 서슴없이 대립하게 됩니다. 그날 뜰에서 호소한 일은 의리로 말하면 천하 사람들의 공변된 도리이고 충애로 말하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떳떳한 마음인 것입니다. 저 종수는 유독 무슨 마음을 먹었길래 갑자기 글을 올려서 차마 제기할 수 없는 문제를 차마 말할 수 없는 날에 차마 제기하는 것입니까. 마음씀이 음흉하고 말을 만든 것이 흉칙하니 천리(天理)와 인정에 구해보아도 어떻게 차마 이럴 수 있습니까.
그리고 높은 대우와 충분히 성취시켜준 은혜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있게 된 이후로 자주 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만큼 저 종수도 떳떳한 천성(天性)이 있을 것인데 그는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고 윤리와 기강을 어지럽게 했습니다. 그 죄는 설사 그에게 스스로 말하게 하더라도 어떻게 자신의 죄를 풀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처벌이 오랫동안 지연되니 뭇사람들의 심정은 더욱 답답해 합니다. 제왕의 영단을 크게 내리어 빨리 죄에 걸맞는 형률을 시행하소서.
전 대사간 이철모는 대면한 자리에서 아뢴 말이 모호하고 가진 뜻이 불분명한 동시에 아주 간략한 몇 마디의 말로 마치 책임을 메꾸려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보다 더 심한 불성실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논사(論思)하는 신하들이 함께 연석(筵席)에 있었으면서 잠자코 한 마디의 말도 언급한 일이 없었으며 연명으로 올린 차자에서도 이름을 지적하여 드러내놓고 규탄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전 대사간 이철모를 빨리 귀양보내는 벌을 실시하고 그날 연석에 있었고 연명으로 차자를 올린 옥당의 관원들은 모두 견책하여 삭직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첫번에 진술한 죄를 처결하는 문제는 어찌 너희들의 말을 기다리겠으며, 형률을 더 높이는 문제도 어찌 너희들의 요청을 기다리겠는가. 이철모를 귀양보내는 문제는 혹 규탄하는 글이 대사헌의 소매 속으로 들어가서 그가 인피하고 먼저 물러났기 때문에 이렇게 소홀히 한 것은 아닌가. 아니면 연석에서 응당 꾸짖고 규탄하는 주대(奏對)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듣고 혐의를 합리화시키느라 이런 애매한 내용을 아뢴 것인가. 그도 아니면 덕(德)으로 원혐(怨嫌)을 같으려고 완곡하게 말한 것인가. 성토보다 더 엄한 것이 없기에, 이러니 저러니 논할 것없이 그의 불성실한 죄를 캐어보면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는 처벌에 대해 달게 받을 것이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3월 19일 병오

황단(皇壇)에 나와 망배례를 행하였다.

 

황단에 의식을 거행할 때 충신의 후손과 조관(朝官)으로서 반열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잡아다가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까닭없이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이조와 병조에서 규찰하고 의정부가 초기(草記)를 올려 죄를 처벌하라고 명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행임은 곧바로 교체하고 이면긍(李勉兢)으로 대신 삼았다.

 

서유병(徐有秉)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가 곧바로 교체하고 오의상(吳毅常)으로 대신 임명하였다.

 

3월 20일 정미

차대하였다. 청나라 갔다가 돌아온 동지 정사 황인점(黃仁點)과 부사 이재학(李在學)을 소견하였다.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정은(丁銀)039)  은 품종이 끊어져버렸고 광은(礦銀)은 적게 나므로 호조의 1년간 세금으로 받아들이는 수량이 겨우 6백 냥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북경에서 무역하는 갖가지 물건을 모두 돈으로 지출하는 관계로 해마다 적어도 4, 5만 냥 이하로는 되지 않으니 이것도 경비를 지탱하기 어려운 단서가 됩니다. 그리고 돌아온 사신 일행의 사정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앞으로 몇년 사이에 청나라나 우리 나라의 사신이 몇차례나 내왕할런지 알 수 없으니 은화(銀貨)을 애써 모을 방법을 미리 강구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신이 지난해 이 문제를 두고 걱정하다가 은화가 풍부하게 많이 산출되는 곳을 정확히 알게 되면 은점(銀店)을 열자는 뜻으로 연석(筵席)에서 진달(陳達)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 뒤에 간혹 은맥(銀脈)이 있음을 보고하는 경우가 있으면 즉시 그 도(道)에 공문을 띄워 물어보았으나 그 도의 감사나 수령은 부질없는 일로 간주하고 민폐를 끼친다고 하면서 한결같이 막아버리므로 은맥이 있는지 없는지의 실상을 정확히 조사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의당 별다르게 시행하는 조치가 있어야 되겠기에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비로 쓰는 것 외에도 앞으로 사신의 왕래에 쓰일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신에게 위임하여 성심껏 채취하되 민폐는 조금도 끼치지 말고 조금이나마 경비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
하였다.

 

남해현(南海縣)의 절도(絶島)에 안치한 죄인 김종수(金鍾秀)를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는[荐棘] 처벌을 더하였다. 삼사(三司) 【장령 조진정(趙鎭井), 헌납 심갱(沈鏗), 교리 윤광보(尹光普), 정언 이조원(李肇源).】 가 아뢰기를,
"김종수는 절도에 안치하는 처벌로써 그칠 수는 없습니다. 남해현의 절도에 안치한 죄인 김종수를 우선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대사간 김이익(金履翼)을 체직하였다. 이는 연석(筵席)에 나와 체신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장령 조진정(趙鎭井)이 연석에 나와 전계(傳啓)하면서 뒤죽박죽 체신없는 행동을 하자 교리 윤광보(尹光普)가 사판에서 이름을 지워버리고 대간의 후보 명단에서 영원히 빼버리기를 요청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비단 대각에만 욕을 끼쳤을 뿐아니라 조정의 수치도 아주 심하다. 이런 사람을 대각으로 추천한 죄는 가볍지 않다."
하고, 전관(銓官) 이갑(李𡊠)은 파직시키고 구상(具庠)은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게 하였다.

 

김재찬(金載瓚)을 이조 참판으로, 정치순(鄭致淳)을 이조 참의로, 이재학(李在學)을 공조 판서로, 김이희(金履禧)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3월 21일 무신

황해도에 수군 우후를 더 두었다. 황해 수사 이해우(李海愚)가 아뢰기를,
"행영(行營)과 본영(本營)에 바람이 잔잔하거나 바람이 세게 불 때를 따라 수사와 중군(中軍)이 번갈아 머물러 있습니다마는 이른바 중군이란 실상은 편비(褊裨)입니다. 사람은 변변치 못하고 지체는 약하므로 아랫사람들을 장악하도록 요구하기 어렵습니다. 또 행영은 비록 바람이 세게 부는 때을 당하더라도 바다를 방비하는 중요한 지역이므로 잠시도 비워둘 수 없는데도 거의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신의 수영(水營)에만 우후(虞候)가 없는 것은 아주 잘못된 제도인데 만일 경력과 인망이 있는 사람을 임명하여 보내면 통제하는 방도에 있어 반드시 효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후를 두는 데의 어려운 문제는 단지 급료를 주는 일인데 중군(中軍)의 원래 급료에 조금만 더 보태면 되고 장교와 군사 등의 요포(料布)에서 3백 섬의 곡물을 얻을 수 있어서 충분히 분배가 됩니다. 신의 수영에서 관리하는 군량미의 이자로 받는 쌀 1백 50섬과 좁쌀 2백 섬을 제급(題給)하게 하겠습니다. 묘당에게 품지하여 분부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황해도의 수영과 행영에 수사와 중군이 머물러 있을 때 편비에게 임시로 중군의 명칭을 붙여서 머물러 지키게 하는 것은 과연 아주 허술한 일입니다. 수용할 자본도 마련하기 어렵지 않으니 장청(狀請)한대로 시행함을 허락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판으로, 송영(宋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라도 병마 절도사 오의상(吳毅常)을 이윤겸(李潤謙)으로 교체하였다. 김희(金爔)를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가 곧 윤범서(尹範敍)로 교체하였다.

 

3월 22일 기유

희정당에 나가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의 두 본궁(本宮)에 옷·폐백·향·초를 직접 전달하였다. 각신(閣臣)과 경기 감사가 동대문 밖에까지 모시고 나가서 지방관에게 교대하여 전달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 앞서 각신 이만수(李晩秀)가 영남 지방에 왕명을 받들고 나갔다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편지 모음과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대학속혹문(大學續或問)》을 가져다 바쳤었다.
이 때에 이르러 상이 그 권수(卷首)에 서문을 쓰고 도산 서원(陶山書院)과 옥산 서원(玉山書院)에 소장하게 하였다.

 

3월 24일 신해

차대하였다. 호조 판서 심이지가 아뢰기를,
"신이 어제 명을 받고 옛 도총부 터와 보루각(報漏閣) 터를 돌아보고 도형을 만들어 바칩니다. 그러나 흠경각(欽敬閣)은 들보와 서까래가 썩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처럼 큰 집을 그 누가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세 칸짜리 누수각(漏水閣)은 단지 그 이차적인 일에 속한다. 틀림없이 쓰러질 염려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노릇이다. 흠경각은 이름을 새겨보고 뜻을 생각하면 실로 소중함이 있다. 진실로 쓸모가 없다면 주(周)나라의 명당(明堂)까지도 맹자(孟子)는 헐어버리기를 청하였다. 이 건물도 헐어버리려면 철거해 버리고 남겨두려면 수리해야 될 것이니 정말 수리하려 한다면 설사 손대기 어렵다 하더라도 어찌 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하였다. 이지가 아뢰기를,
"고쳐 건축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니,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단지 기와만 고쳐 덮고 썩고 비 새는 곳이나 손질하여도 수리한 태가 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건물은 세종(世宗) 때 지은 집으로 우리 나라에서 제일 웅장한 건축인데 지금껏 우뚝 솟아 있어 마치 영광전(靈光殿)과 흡사하다. 이 건물을 만일 수리하면 조상의 사업을 계승하는 한 가지 일이 될 것이다. 12선동(仙童) 등의 의기(儀器)를 만드는 법이 문헌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어서 충분히 모방하여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희정당(熙政堂) 앞에 있는 자명종(自鳴鍾)의 물방울이 부딪쳐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도 바로 옛날의 남겨준 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런 의기는 정우태(丁遇泰) 같은 사람은 충분히 만들 수 있겠으나, 지극히 정교한 제도를 모방함에 있어서는 이런 뛰어난 장인(匠人)을 어디에서 구하여 오겠는가."
하였다.

 

지평 홍병신(洪秉臣)이 아뢰기를,
"가시를 둘러쳐 막은 죄인 김종수(金鍾秀)는 죄악이 처벌할 한정에 꽉찼으므로 성토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가시를 둘러쳐 막자는 요청은 다행히 윤허를 받았으나 시행하라는 전교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의금부의 거행이 여직껏 지체되고 있으며, 처벌을 더 높이자는 삼사의 요청이 이 때문에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은 생각하기에 서둘러 전교를 내리어 삼사로 하여금 잇달아 요청하도록 하여 속히 당해 형률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성토하는 성의는 모르는 바 아니지만 피혐하여 물러나 처분을 기다리는 처지로서 불쑥 앞으로 나서서 조신(朝臣)들이 물러간 뒤 혼자 남아[留身] 자기의 생각을 홀로 진술하는 것은 뒷날의 폐단에 관계된다.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지평 홍병신이 피혐하여 물러나 처분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 뒤에 또다시 앞에 나섰으니 비록 성토하기에 급하여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뜻에 연유한다 하더라도 대간의 체면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무겁게 추고하라는 특별한 전교가 있었지만 추고만으로 그칠 수는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그 일은 그 일이고 관례를 파괴한 것은 관례를 파괴한 것이다. 교체하라."
하였다.

 

돌아온 서장관 정동관(鄭東觀)을 소견(召見)하였다. 동관이 듣고 본 것을 적은 별단(別單)을 바쳤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1. 황제는 80의 노령에 있기는 하지만 정력이 왕성하여 해마다 정월에는 원명원(圓明園)에 거둥하고 3월에는 반산(盤山)에 가며 초여름에는 열하(熱河)에 행차하고 가을과 겨울이 바뀌는 기간에는 몽고(蒙古)의 여러 번왕(藩王)들을 모아서 만리 장성 북쪽 지역에서 사냥을 하는데 한 해 동안의 유람하는 날을 통틀어 계산하면 절반이 넘습니다. 그런데 올해 2월에는 천진현(天津縣)에 가서 수위(水圍) 놀이를 관람하려고 합니다. 언제나 황제가 지나가는 지방에 대해서는 그 해의 인구마다 내야 할 정은(丁銀)과 정량(丁粮)의 10분의 2를 감면하여 준다고 합니다.
1. 황제의 아들은 현재 생존한 사람이 4명인데 8왕·11왕·17왕은 모두 좋은 명망이 없고 오직 15왕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글을 읽으며 강명(剛明)하고 지키는 바가 있으면서 늘 금중(禁中)에 있으므로 명성이 파다하다고 합니다. 황손(皇孫) 중에서는 황제의 맏아들 영황(永璜)의 아들인 정군왕(定郡王) 면은(綿恩)이 재주와 용기가 뛰어나서 8살 때에 벌써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여 기영(旗營)을 나누어 주관하게 하였는데 가장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올해 정월에는 황제의 유시(諭示)로 표창을 하고 친왕(親王)으로 올려서 봉하였습니다. 그곳의 물의(物議)는 모두 앞으로 황제가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은 이 두 사람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들 합니다.
1. 각로(閣老) 화신(和珅)이 권력을 잡은 지 20년이 되는데 형벌이나 영광을 주는 임금의 권력을 제마음대로 하고 재물을 탐오함이 날로 심하여 안으로 공경(公卿)과 밖으로는 번곤(藩閫)이 모두 그의 집에서 나옵니다. 뇌물을 바치고 아부하는 사람은 청요직(淸要職)을 많이 얻고 중립을 지켜서 기울어지지 않는 사람은 죄에 걸리지 않으면 반드시 도태되고 맙니다. 그러니 위로는 왕공(王公)으로부터 아랫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눈을 흘기고 침을 뱉으며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유용(劉鏞)은 그를 탄핵하는 글을 올렸고 왕걸(王杰)은 그가 주는 옷을 물리치고 받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정직하고 과감하게 간(諫)하는 출중한 인물이라고 칭찬합니다. 복강안(福康安)이 조금 화신에게 등을 돌리려고 꽤나 긍지를 가지면서 인망(人望)을 모으고는 있으나 은총과 권력이 서로 동등하여 양립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황제가 두 사람 사이을 풀려고 매번 강안을 지방에 내보내어 후장(後藏)을 쳐서 평정하였고 사천(四川)을 순무(巡撫)하다가 지난해 8월에 비로소 경성(京城)으로 돌아왔는데 곧바로 양광(兩廣)040)  을 순무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강안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하기를 ‘신이 감히 수고로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황제의 연세가 높고 천진(天津)의 행사가 또 내년 봄에 있으므로 신이 이런 때에 도리에 있어 멀리 떠나기가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하면서 누차 간절히 아뢰어 겨우 허락을 받았습니다. 강안의 뜻은 오로지 화신을 염려하는데 있으며 이번의 선창(船廠)에 사실을 조사하러 나간 것도 화신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1. 중국의 인물로 말하면 수상(首相) 아계(阿桂)는 공로가 많고 인망이 높아서 위로는 황제가 위임하고 아래로는 조정 신하들이 신뢰하므로 매번 황제가 순행(巡幸)할 적이면 반드시 서울을 남아서 지키게 하였습니다. 설사 음흉하고 교활한 화신이라 하더라도 이간하는 잔꾀가 먹혀들지를 않습니다. 그는 혁혁한 사업은 없지만 충직과 청렴으로 자신을 추스리기 때문에 제법 백성들의 칭찬을 받고 있었습니다. 복강안(福康安)은 남방과 서방을 정벌하여 군공(軍功)이 현저하며 재략(才略)으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문학(文學)으로는 예부 상서 기균(紀昀)과 한림 학사 팽원서(彭元瑞)가 박식하고 바르며 문장이 풍부하고 민첩하여 조정 신하들 중에서 최고이므로 고시(考試)할 일이나 책을 편집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두 사람이 반드시 그 속에 참여하여 있다고 합니다.
1. 귀주(貴州)의 학정(學正) 홍양길(洪亮吉)이 《예기(禮記)》를 정현(鄭玄)이 낸 주석으로 고쳐서 써야 될 일을 주청(奏請)하였습니다. 이에 예부가 회의하여 말하기를, ‘진호집설(陳澔集說)을 반포하여 시행된 세월이 오래되었는데 만일 복고(復古)한다는 이름을 사모하여 어지럽게 고치기를 요청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따를 바를 알지 못하게 하면 경훈(經訓)이나 학술(學術)이 모두 도움되는 것이 없습니다. 종전대로 진호의 주석을 사용하도록 하소서.’ 하여 결국 그 일이 시행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1. 만족 기민(滿族旗民)과 한족 기민(漢族旗民)의 힘들고 편안하며 고달프고 즐거운 생활 처지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정도만이 아닙니다. 전지(田地)에 대한 조세(租稅)라 하더라도 한족이 바치는 양은 만족 기민보다 곱절이나 되며 만족의 8기(旗)에 이름이 속하기만 하면 한족은 누구도 감히 어떻게 해보지를 못합니다. 신이 관외(關外)에서 한족이 우리 나라 사람과 주고받는 말을 들었는데 그는 말하기를 ‘8기에 속한 만족은 해마다 은 24냥을 받으며 국역(國役)에 나가는 경우라도 한때 나가서 일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지만 한족 민가는 무작정 노역을 바친다.’고 하니, 이는 불평하는 말입니다. 한족으로서 비방하는 말을 하여 죽음을 당한 사람이 앞뒤로 잇달았으나 남쪽 지방의 사대부들은 아직도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릉(武陵)에 구양위(歐陽緯)라는 공생(貢生)이 있어서 거귀 격문(祛鬼檄文)을 지어 현재의 정사(政事)를 기롱하면서 저촉되는 내용을 많이 말하였는데 구양성제(歐陽成梯)라는 사람이 사사로운 혐의를 품고 관아에 고자질하였으므로 사언 선동(邪言煽動)의 형률을 적용하였고, 지현(知縣) 염중일(閻重鎰)은 이를 조사하여 적발하고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역시 엄한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1. 몽고의 48개 부락의 사람들은 모두 사나운데 근래에 와서 더욱 강성해지자 황제가 늘 견제하면서 만족·한족과 같이 벼슬을 시키고 몽고의 왕이 새로 즉위하면 공주(公主)를 시집보냅니다. 그곳의 풍속은 번승(番僧)041)  을 가장 존경하여 마치 신명(神明)처럼 공경하기 때문에 몽고인으로서 라마승이 된 사람은 서울에 있는 사찰을 주관하도록 하였으며 몽고 사람들이 숭배하는 번승이 있으면 대뜸 존경의 예를 더합니다. 연전에 반선(班禪)이 입적(入寂)한 뒤에 몽고의 여러 부락들 가운데 칸왕(汗王)의 자제들로써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종파를 차지하려고 꾀하는 자가 있어서 황제가 유시를 내려 금지하였습니다. 이를 가지고 보면 반선을 파격적으로 존경하여 받드는 것도 오로지 그 불도를 독실히 믿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열하(熱河)에 해마다 거둥하는 것은 아마 숨은 뜻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수역(首譯) 장렴(張濂)이 듣고 본 별단을 바쳤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1. 황제는 한 해 동안에 유행(遊幸)하는 일을 절도없이 하는데 새해 처음에는 원명원(圓明園)에 있으면서 등불 놀이를 관람하고 여름에는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庄)에 가며 가을과 겨울이 바뀌는 때에는 몽고의 여러 추장들을 모아놓고 구외(口外) 지방에서 사냥을 한다고 합니다.
1. 황제는 조반을 벌써 들었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조반을 찾는데 내시는 감히 이미 올렸다고 말하지 못하고 황제도 이미 들었음을 깨닫지 못한다니 그의 노쇠하여 건망증이 심하다는 것은 이를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1. 청나라에서는 으레 봄과 가을에 양모(凉帽)와 난모(暖帽)를 바꾸어 쓰는 날짜를 정하여 공포하고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군민(軍民)에 이르기까지 한날에 바꾸어 쓰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해 8월 20일 후에 황제가 열하에서 돌아오는데 이 때 날씨가 조금 쌀쌀하자 금새 난모로 바꾸어 쓰니 황제가 이미 바꾸어 썼기 때문에 모든 신하들이 따라서 난모로 바꾸어 썼습니다. 9월 그믐께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자 황제는 양모로 바꾸어 썼고 모든 신하들도 양모로 바꾸어 썼습니다. 황제가 그제서야 비로소 모든 신하들이 모자를 바꾸어 쓴 이유를 깨닫고는 말하기를 ‘모든 신하들이 정해진 날짜를 기다리지 않고 양모를 바꾸어 쓴 것은 나를 따라 행동한 것이니 이는 내가 늙은 소치인데 어찌 모든 신하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그대로 탄식해 마지 않았다고 합니다.
1. 이번에 유구국(琉球國) 사신이 정문(呈文)을 올려 말하기를 ‘본국 왕이 지난해 복자전(福字箋)과 옥여의(玉如意) 등에 대한 상사(賞賜)와 은총이 특별했음으로 인하여 감격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해마다 정기적으로 가는 사신이 바치는 방물(方物)을 대조하여 받기를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하니, 예부(禮部)에서 이 내용을 황제에게 아뢰어 명을 받아 그대로 따라 시행하게 되었으며 2월 1일에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1. 청나라 사람으로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8기(旗)에 소속되어 으레 은(銀)을 받지만, 한족은 벼슬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직업으로 삼는 것이 농사가 아니면 장사입니다. 길거리의 수레와 복장이 화려한 사람은 모두가 청나라 사람이며 모습이 파리한 사람은 다 한족이어서 빈부의 차이가 판이하게 다른 것을 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1. 청나라 사람은 비단 병권(兵權)을 전적으로 주관할 뿐아니라 또 산물이 풍부한 주현(州縣)을 골라서 모두 청나라 사람에게 벼슬을 임명하기 때문에 한족의 벼슬길은 날로 좁아져서 과거에 급제한 지 여러 해가 되어도 첫벼슬을 얻지 못한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3월 25일 임자

전교하였다.
"오늘밤은 바로 인원 왕후(仁元王后)042)  의 기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기제사가 소중하기는 하지만 대향(大享)도 소중한 만큼 오늘밤의 서계(誓戒)는 정해진 의식대로 내가 직접 행하겠다. 음악을 연주하는 절차는 없으나, 능에 제사를 지내는 때에, 제사 복장으로 전각에 나가는 것은 인정과 예문에 있어 재량함이 있어야 되겠다. 오늘밤의 서계하는 의식의 시간을 재소(齋所)에서 잠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외치기 전으로 앞당겨서 하고 이제부터 이것을 규정으로 삼으라. 대향에 대한 서계를 하는 밤에 만일 능에서 지내는 기제사와 겹치게 될 경우 서계의 정한 시간을 앞당겨 정하는 일은 오늘의 절차를 적용하라."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인정전에 나가 종묘의 하향(夏享)에 대한 서계하는 의식을 가졌다.

 

3월 27일 갑인

전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문철(李文喆)을 선천부(宣川府)로 귀양보냈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이문철은, 겉으로는 자체적으로 경비를 마련한다고 핑계하고 속으로 이익을 챙길 꾀를 실행하여 나라의 곡식과 돈을 제멋대로 굴려 이자를 챙겼습니다. 진휼에 보충할 돈과 부역 대신에 낸 돈 가운데 남은 3천 9백 40냥을 임의로 처분하여 모두 개인이 착복하였습니다. 이 죄를 가지고 맞는 형률을 적용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재작년에 경상도의 수령들이 공용을 빙자하여 공금(公金)으로 본전을 세워놓고 자기의 사복을 채웠는데 이는 필시 무관 출신의 수령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이 죄수만을 무거운 처벌로 다스리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사건이 이미 보고되었으니 어떻게 법을 굽혀 비호할 수 있겠는가. 그가 근신하지 못하여 죄를 받은 다른 죄수와 같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으니 응당 적용해야 할 형률을 시행하라."
하였다.

 

3월 28일 을묘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徐龍輔)가 장계하기를,
"일전에 마마해  권관(馬馬海權管) 정이유(鄭履綏)가 부임하던 길에 임진에 당도하여 파주(坡州)의 아객(衙客)043)  과 군교·하례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붙잡아서 길거리를 아래위로 끌고다니기까지 하였으며 행장에 들어 있던 물건도 많이 빼앗겼다고 합니다. 이는 변괴에 속하는 사건이므로 우선 공문을 보내어 당해 목사에게 조사를 시켰습니다. 파주 목사 신대곤(申大坤)이 첩보(牒報)한 내용에 ‘혐의되는 것이 있어서 조사하는 일을 거행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공문을 보내어 따져 물은 뒤에 끌어댈 수 없는 혐의를 억지로 끌어대어 부당하게 변명을 늘어놓은 것은 기강과 크게 관계되는 만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파주 목사 신대곤을 파면시키고 그의 죄상에 대해서는 당해 관청을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 아객과 군교·하례들은 신의 감영에서 사실을 조사하여 죄의 경중을 구분하고 해당되는 법을 적용하여 처벌하려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진장(鎭將)의 벼슬이 낮기는 하지만 역시 왕명으로 임명한 관원으로 어가(御駕)를 따르던 신분이 자별한데 어찌 외직에 보임된 것을 따지겠는가. 아객과 지방의 아전들이 왕명을 받고 어가를 따르던 관원을 침범하고 심지어 붙잡아서 끌고다니는 것도 부족하여 행장의 물건까지 빼앗았다고 하니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아주 놀라운 일이다. 근래 나라의 기강이 깡그리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런 일이 그치지 않는다면 장기 근무하는 변장(邊將)이 연도의 고을에 머리를 내밀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을 이미 들었고 보면 대체를 따져 처리해야 될 문제이다. 어찌 예사로운 일로 처리하겠는가.
당해 권관이 내려간 지가 벌써 퍽 오래되었는데 아니 무슨 생각으로 마음을 다해 덮어두었다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억지로 장문(狀聞)하는가. 감사의 놀라운 행위는 파직시키고 잡아다가 다스리는 것으로도 벌이 가볍지만, 다만 현재 주관하는 일이 있기에 이를 충분히 참작해 준다. 당해 감사 서용보를 함사(緘辭)하여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라. 사헌부 대간들을 패초하여 성문을 닫기 전에 추궁하는 편지를 발송하여 공초를 받게 하라.
이른바 죄를 범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기백(箕伯)을 시켜 잡아다가 엄중하게 죄를 다스린 다음 마마해(馬馬海)에 하례와 군졸로 채워 보낼 것이며 함께 말을 타고 간 여러 사람들도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라. 당해 목사는 애당초 두려워하거나 자수하지 않았고 감영의 관문(關文)을 받은 처지에 감히 인혐을 일컬은 것은 구구절절 방자한 노릇이다. 신대곤이 휴대한 밀부(密符)는 선전관을 보내어 빼앗아 오고 역시 기백을 시켜 대동강 가에 크게 위엄스런 자리를 펼쳐 놓고 잡아다가 엄하게 곤장을 친 다음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그리하여 먼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조정 관원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조정을 존중하는 것이 됨을 알게 하라."
하였다.

 

3월 29일 병진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을 소견하고, 종현에게 《대명집례(大明集禮)》에서 조복(朝服)과 제복(祭服) 및 관(冠)에 관한 제도를 고출(考出)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제관(祭冠)에 관한 일을 바로잡으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번 대향(大享)을 지낼 때를 만나 경들에게 물어서 처리하려고 한다.
대체로 조정 관원들의 장복(章服)은 원래 나라의 제도가 있으나 근래 의복을 사치스럽게 입는 것이 풍습으로 되어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말았다. 그 가운데서도 조복과 제복은 더욱 중요하므로 의당 일정한 제도가 있어야 될 것이니 제용감(濟用監)의 흑삼(黑衫)과 공조의 제관(祭冠)을 바치는 공인(貢人)을 두어 모든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실로 본의가 있는 것이다. 근래 임금을 모시고 제사를 돕는 집사(執事)들을 보면 모두 관에서 지급한 제복과 관을 쓰지 않고 따로 사사로이 만든 화려한 것을 착용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예제(禮制)를 위배했을 뿐아니라 또한 사치를 숭상하는 한 풍습에서 나온 것이다.
《오례의》나 《대명집례》 등의 관복 도설(冠服圖說)로 보더라도 다만 제관의 제도에는 그 사람의 품계에 따라 양(梁)의 수가 많고 적은 차이가 있으나 조복에 있어서는 이미 관의 모양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없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관의 제도는 조복과 제복의 구별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조복에 갖추어 쓰는 관을 제복에 통용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니 이는 비단 예설(禮說)에 대한 분명한 근거가 있을 뿐 아니라, 더구나 폐단을 줄이고 사치를 없애는 한 가지 방법이 되는 것이겠는가.
홀(笏)에 대한 경우는 상아를 사용하고 나무를 사용하는 것도 품계의 높고 낮음을 따라 하는 것인데 지금은 미관(微官)이나 일반 관료들도 모두 나무홀을 버리고 상아홀을 사용하니 어찌 옛 제도를 회복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소란을 일으키기 쉬우므로 아직 거듭 강조하지 않지만 여러 신하들 중에서도 어찌 법을 지키려는 뜻이 있으나 습속과 괴리됨에 구애하여 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다.

 

 

 

전교하였다.
"오늘의 나쁜 풍습으로는 복장이 너무 사치스러운 것과 예의 형식이 겉치레로 흐르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이것은 두 가지 갈래인 것 같지만 그 귀결은 한가지이다. 사치를 금지하면 겉치레는 저절로 제거될 것이니, 어려운 것으로부터 옛 제도로 돌아가야 한다. 근래 생초 도포[綃袍]·실로 짠 띠[條帶]·끈이 달린 신[纓靴]을 못 신게 단속하는 것은 대체로 편리한 점을 따라서 검소하게 하여 보는 데 익숙해지게 함으로써 여유있는 효과를 거두려는 것이다.
또 대향(大享) 때의 복색을 가지고 말하면, 예전에 내가 아헌관으로서 배향(陪享)했을 때에는 향관(享官)으로 나온 재신들이 대부분 공조에서 지급한 제관(祭冠)과 제용감에서 만든 흑삼(黑衫)을 착용하였었는데 지금은 인의(引儀)나 봉조관(奉俎官)들도 부끄럽게 여기면서 사치하는 풍습이 날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간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제관에 있어서는 더욱 겉치레가 많으니 《대명집례》와 《오례의》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는데 잘못된 속제(俗制)를 따라 금관(金冠)이나 칠관(漆冠)을 조복이나 제복에 나누어 착용하는 것은 이미 의의가 없는 명확한 증거인 것이다. 더구나 《대전통편》에 통용한다는 규정이 있음이겠는가. 이번 대향 때부터 헌관(獻官) 이하 집사들은 오직 웃저고리를 홍라(紅羅)와 청라(靑羅)로 만들어 입는 이외에 관(冠)과 아래 옷[裳]은 모두 통용하며 관아에서 지급한 복식은 역시 그대로 착용하게 한다. 조복을 입고 배종(陪從)하는 사람은 그대로 조관(朝冠)을 쓰고 흑단령을 입고 앞서 나가는 사람은 관에서 지급한 것으로 바꾸어 착용하며 제향을 섭행할 경우에는 대신이 헌관이 되었을지라도 관에서 지급한 것을 착용하여 나쁜 풍습을 씻도록 하라. 이번 제향에 즉시 초헌관 이하들이 모두 관에서 지급한 것을 착용하도록 하라.
홀을 상아나 나무로 된 것을 쓰는 것도 등급이 있는 것인데 지금은 도리어 통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치하게 해야 될 쪽은 통용해야 되는데도 통용하지 않고 사치해선 안 될 쪽은 통용해서는 안 되는데도 통용하고 있으니, 잘못된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는가. 의당 한결같이 옛 규정을 회복해야 되는데 품계를 정하여 명확히 구분해 잡게 하면 도리어 서로 방해가 되기도 할 것이므로 아직은 하나로 지적하여 금지하지는 않겠다. 당하관의 조복과 제복에 나무홀을 잡으려는 사람은 모두 편리한 대로 따르도록 하라."
병조 판서 구상(具庠)을 파직시켰다. 장단 부사(長湍府使) 서유화(徐有和)에게 죄가 있어 상이 병조에 명하여 잡아다가 엄하게 곤장을 치게 하였는데 구상이 상의 특교(特敎)로 곤장을 치는 예를 적용하여 재일(齋日)에도 불구하고 끝내 곤장을 쳤다. 상이 직접 제사를 지내는 예의의 중요함을 이유로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