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정사
개성부 유수 이병정(李秉鼎)이 장계하기를,
"이 달 28일 본부(本府)의 남부(南部) 조정리(造井里)에 우연히 화재가 발생해서 혜민 구리가(惠民九里街)와 곽장 삼리(郭莊三里)까지 연소하여 민가 6백 44호가 불타고 7명이 불타 죽었습니다. 불타 죽은 사람을 도와주는 은전(恩典)을 규정에 따라 제급(題給)해야 될 것입니다. 신의 유수영(留守營)에서도 불이 난 집에 돈과 쌀을 적당히 주고 개인 산판의 재목을 넉넉히 베어내도록 허락하여 하루 속히 안주하게 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개성 유수의 장계 가운데 화재를 당한 민가의 숫자를 보니 측은한 마음을 가눌 수 없다. 집을 잃고 울부짖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계유년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화재를 당한 호수와 불에 타 죽은 사람의 수효가 서로 비슷하다. 도와주는 은전과 곡식을 실어다 주며 신포(身布)와 군역(軍役)에 대하여 햇수를 한정해서 감면해 주는 일을 모두 계유년의 예에 따라 시행하고, 유수에게 엄히 신칙하여 특별히 도와주어 빨리 안주하게 한 다음 그 전말을 보고하게 하라. 숱한 백성들이 노숙(露宿)하면서 방황하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전례의 있고 없음을 따지겠는가. 부사과(副司果) 서유문(徐有聞)을 개성부 위유 어사(慰諭御史)로 임명하여 이 전교에서 말한 내용을 가지고 위로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정창순(鄭昌順)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4월 2일 무오
금천(衿川)에 행궁(行宮)을 지었다. 경기 감사 서용보가 아뢰기를,
"현륭원에 거둥할 때의 연도에 있는 지방 가운데 과천(果川) 지역은 고갯길이 험준하고 다리도 많기 때문에 매번 거둥할 때를 당하면 황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또 길을 닦을 적에 백성들의 노력이 곱절이나 들어가므로 상께서 이런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여러 차례 편리한 방도를 생각해보라는 명이 있었기에 전후의 도신(道臣)들이 모두 금천으로 오는 길이 편하다는 내용을 이미 진달하였었습니다. 신이 이번에 살펴본 바로는 비단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현저한 차이가 없을 뿐아니라 지대가 평탄하고 길이 또한 평평하고 넓으니 이 길로 정하는 것은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년 거둥 때에 거행할 여러 절차에 대한 문제는 이미 전교를 받았으므로 관아의 수리와 길을 닦는 등의 일은 지금 당장 착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서(關西)의 남당성(南塘城)을 쌓고 남은 돈이 아직 1만 3천여 냥이 남았다고 하니 우선 가져다가 쓰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4월 3일 기미
인정전에 나아가 춘향(春享)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 문서에 친히 서명하였다. 이어 태묘(太廟)에 나아가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펴보고 그대로 재숙(齋宿)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 봉상시 제조 서유방(徐有防), 전생서 제조 이득신(李得臣)을 소견하고 전교하기를,
"친향(親享) 때의 홀기(笏記)에서 희생의 털과 피를 담은 접시에 대한 절차는 소주(小註)로 처리해서는 안 되니, 이 뒤로는 ‘헌관이 내려가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獻官降復位]’고 하기 전에 먼저 ‘축사가 희생의 털과 피를 담은 접시를 철거하여 재랑에게 준다.[祝史撤毛血盤授齋郞]’는 문구를 부르고, 임금의 행례는 영신(迎神)하는 음악이 여덟 곡 끝날 즈음에 시작하는 것이 좋겠으니, 이것을 규정으로 정하라."
하였다. 봉상시 제조 서유방에게 이르기를,
"친제할 때와 섭향(攝享)할 때의 희생의 수가 다른가?"
하니, 유방이 아뢰기를,
"똑같이 소는 한 마리를 쓰지만 양과 돼지는 섭행할 적엔 조금 줄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양은 친향할 때에도 섭행할 때의 수를 따라 하는 것이 합당하겠는데, 이는 감히 절약하려는 것이 아니다. 양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 억만 년 유구히 전해갈 방도에 있어서 깊이 생각해야 될 일인 것이다."
하였다.
4월 4일 경신
태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4월 5일 신유
차대하였다. 송도 위유 어사(松都慰諭御史) 서유문(徐有聞)을 소견하였다. 상이 좌의정 김이소에게 이르기를,
"태묘(太廟)의 대향(大享) 때에 수복(守僕) 두 사람이 60명의 공신 위패(功臣位牌)를 내오자면 내오고 들여갈 적에 조심스럽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제 만일 목판(木板)을 만들어 10여 명의 위패를 담아서 차례로 받들어 내어 온다면 좋을 듯하다. 선왕께서 늘 공신의 위패를 경건하게 받드는 일을 엄하게 신칙하곤 하였었다. 그리고 경의 선대에도 공신이 있는데 매번 받들고 나오면서 조심하지 않는 것을 볼 적마다 자손된 마음으로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하니, 이소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였다. 전교하기를,
"죄인 김종수(金鍾秀)를 가시울타리를 쳐서 막으라는 전교는 우선 그만두라."
하니, 승지 서미수(徐美修)가 아뢰기를,
"종수의 죄악은 한도에 꽉찼고 처단하는 법안도 이미 갖추어졌습니다. 신이 감히 명을 받들어 쓰지 않을 수는 없지만 역시 금새 반포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속히 반포하라."
하니, 정언 이조원(李肇源)과 지평 정만석(鄭晩錫)이 간쟁하려고 막 일어났다가 엎드리자,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은 모두 처단할 만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대간들은 한 마디도 죄를 성토하는 말이 없다. 심지어 이조원은 마치 집안 사람을 보호하려는 것과 같으니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명색이 대간으로서 이미 그의 죄를 성토하지 못했다면 또 어째서 자기 마음을 폭로하지 못하는가. 말할 만한 단서가 있으면 말하고 말할 만한 단서가 없으면 말하지 않을 뿐이다. 한결같이 흐리멍덩해서야 되겠는가."
하니, 조원 등이 아뢰기를,
"오직 조금 전에 내린 전교를 도로 거두고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마디의 말도 없었으면서 어떻게 처분하라는 말인가. 이른바 당연히 처분해야 될 죄란 무슨 죄인가?"
하니, 조원 등이 아뢰기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의 종수의 죄는 무슨 죄인가?"
하니, 조원 등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종수에게 죄가 없는 것인가?"
하니, 조원 등이 아뢰기를,
"합계에서 전부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사가 합계한 내용을 다시 아뢸 수 있겠는가? 김종수를 아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각의 체모는 명백하게 말하는 것이 귀중하다. 이미 내린 명을 철회하기를 청하려고 한다면 그의 죄가 이러하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 옳다. 사람마다 모두 공론이 있는 것이다. 늘상 종수를 구하려는 사람이, 적용하는 형률(刑律)이 여기에까지 이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여도 불가하지 않으며, 늘상 종수를 공격하는 사람이, 적용하는 형률을 당연히 여기에 그쳐야 한다고 말하여도 불가한 것이 아니다. 일찍이 대신을 지낸 사람에 대해 섬에 귀양보내는 처벌이 가볍다고 한다면 그 죄를 알만 하건만, 한 마디도 그의 죄를 명백하게 말하지 않고 그저 조금 전에 내린 전교를 도로 거두라고만 청해서야 되겠는가. 그 벼슬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할 만한 일이다."
하니, 조원이 일어났다가 엎드리면서 말을 하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자리로 돌아가라. 만일 간쟁하려거든 물러가서 하라. 정언이 대간의 사체를 제대로 모르니 김종수에 대한 결말이 날 때까지 교체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조원 등이 다시 아뢰려고 하자 무겁게 추고하게 하였다. 김이소가 아뢰기를,
"대간이 아뢴 것에 대한 비답에서 매번 지루하고 번거롭다는 전교를 내리시는데, 삼사가 간쟁하여 논란을 벌일 때 어찌 지루하고 번거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덕으로 언제나 너그럽게 처분하시므로 세도(世道)에 아주 방해가 됩니다. 삼사의 여러 신하들의 기를 지나치게 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부교리 박윤수(朴崙壽)와 부수찬 심규로(沈奎魯)가 일어났다가 엎드려서 아뢰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옥당 관원들을 금부 추고하라. 빨리 나가라."
하니, 서미수가 아뢰기를,
"김종수와 같은 아주 나쁜 큰 죄에 대하여 엄하게 처분하더라도 오늘날의 인심이 어떨지는 보장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이처럼 용서하게 되면 아마 무궁한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헌 조종현(趙宗鉉), 집의 최중규(崔重圭), 장령 오태현(吳泰賢)·홍극호(洪克浩), 지평 정만석(鄭晩錫)·신광악(申光岳), 부교리 심규로, 정언 이조원, 부수찬 박윤수가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하고,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은 죄인 김종수에게 빨리 전교를 내려, 삼사로 하여금 죄주기를 잇달아 청할 수 있게 하여, 빨리 해당 형률을 시행해야 한다.’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종현 등이 품고 있는 생각을 아뢰기를,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은 죄인 김종수는 죄악이 환하게 드러났고 처단하는 죄안도 이미 갖추어졌는데도 지금까지 천지 사이에 숨을 쉬고 있게 하였으니 그래 가지고서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처벌해야 될 형률이 시급한데도 전교를 내리지 않고 있고, 징벌해야 될 법이 더없이 엄한데도 합사(合辭)가 오랫동안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빨리 전지를 내리어 왕부(王府)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고 삼사로 하여금 잇달아 가중 처벌에 대한 요청을 올리게 하여 빨리 해당하는 형률을 적용해서 왕법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경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오늘은 재일(齋日)이 벌써 지났으므로 죄안을 만들어 처결하려고 한다."
하였다.
안치(安置)한 죄인 김종수에게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는 처벌에 대한 전지는 다시 처분을 기다리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그의 죄를 밝히고 그의 마음을 폭로한다.[明其罪暴其心]’는 여섯 글자는 바로 사형에 처할 것인가, 사형에 처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마지막 법이 되는 것이다. 근래 그를 성토하는 말들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거의 한갓 남의 입만을 바라보고 하는 말들이니 이러면서도 그의 죄를 밝혔다고 한다면 되겠는가. 그의 마음을 폭로하는 한 문제에 있어서는 설령 폭로할 만한 단서가 있다 하더라도 그 집안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누가 뱃속에 들어 있는 본심을 알아서 원통함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의 죄를 밝히지도 못하고 그의 마음을 폭로하지도 못한 채 장차 어떻게 지레 앞질러서 사형에 처할 수 있겠는가. 아주 미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다짐을 받은 다음이라야 법을 상고하여 죄를 결정하는 것인데 그가 형편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대신의 반열에 있던 사람이 아닌가. 그를 처리하는 방도는 오직 법을 담당한 관아에 맡기어 그 진상을 조사하는 것뿐인데 몸소 악역(惡逆)을 범한 죄 이외에는 국문하지 못한다는 것이 법전(法典)에 기재되어 있다. 이미 범죄의 증거를 잡지 못하고 형률을 적용하는 경우라면 설사 이 정도에서 그치더라도 충분하다고 할 만하다. 이에 대한 전지는 아직 내버려두고 다시 처분을 기다리라."
하였다.
삼사가 품고 있는 생각을 아뢰기를,
"신들이 조금 전에 품고 있는 생각을 진술하여 특별히 윤허를 받고 당연히 아뢸 말씀을 진달하려던 참에 잇달아 내린 전교를 받들고는 서로 돌아보면서 놀랍게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그의 죄를 밝히고 그의 마음을 폭로하는 것이 마지막 법을 적용하는 근거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심적(心跡)은 그의 상소문에서 환히 드러났으니 이제 다시 무슨 폭로할 마음이 있겠으며, 그의 죄악에 대해서는 합사(合辭)에서 열거하였는데 또 무슨 다시 밝힐 죄가 있겠습니까. 그의 배반하려는 마음이 드러났고 쌓인 죄악은 한도에 꽉찼으므로 단지 머리 하나가 붙어 있는 귀신일 뿐입니다. 설사 직접 대하여 누누이 타이를지라도 신들은 오직 엄하게 성토하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대사헌 조종현이 품고 있는 생각을 아뢰기를,
"직접 대하여 타이른 뒤에 번거롭게 하는 것은 황공한 노릇이지만 성토가 한창 엄하게 일어나고 뭇사람들의 분함을 풀지 못하였으니, 빨리 내린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이면긍(李勉兢)·서미수(徐美修)·유한녕(兪漢寧)·이노술(李魯述) 등이 연명으로 아뢰기를,
"신들이, 안치한 죄인 김종수를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는 처벌에 대한 전지를 우선 내버려두라는 전교를 보고, 머리를 맞대고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며 실로 지극한 걱정과 한탄을 누를 수 없었습니다.
아, 종수의 죄는 진실로 당일 사형에 처하여 빨리 국시(國是)를 정하였어야 했습니다마는 그의 이름이 대신의 반열에 있기 때문에 점차 형률을 높이다 보니 저절로 지연되게 되었습니다.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는데 대한 전지는 우선 내버려두라는 명이 뭇사람들이 우러러 처분을 기다리는 때에 갑자기 내릴 줄을 어찌 생각인들 하였겠습니까. 종수의 상소문 가운데 종이에 가득 늘어놓은 차마 할 수 없는 흉언(凶言)들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고 그의 손으로 써서 바친 것이므로 조사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이것이 이미 그에 대한 단안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만큼 형적과 심보를 남김없이 드러내었는데 다시 무슨 그의 죄를 밝히지 못한 것이 있으며 그의 마음을 폭로할 것이 있겠습니까.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분함이 치받쳐서 서로 이끌고 와서 연명으로 호소하니 조금 전에 내린 전교를 도로 거두시고 응당 시행해야 될 형률을 빨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에게 처벌하는 것을 아껴서가 아니라 신문하지 않았으면 법을 적용할 수 없으며 또 신문하는 것도 어렵다. 그 사람도 요즈음 매우 속을 썩여 마음이 산란해 하고 있으며 그에게 참으로 폭로할 만한 마음이 없다고 보장하기도 어렵다. 가끔 정상적인 도리를 잃는 경우가 있는데, 다 밝혀내지 못한 죄가 있는지 또 어떻게 알겠는가. 의심스러운 죄는 차라리 가볍게 처벌하여 정해진 법을 어기는 편이 나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함부로 헤아려서 오늘의 처분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지평 정만석과 정언 이조원이 아뢰기를,
"신은,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은 죄인 김종수에 대한 전지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명에 대하여, 참으로 놀라운 심정 누를 길이 없습니다. 간쟁하여 주장하는 의리를 감히 바쳤으나 윤허를 받지도 못하고 거듭 추궁만을 받았습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용서해 주자거니 죽이자거니 하는 의리와 허락을 않는 것과 간쟁하는 것은 윤허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각각 맞도록 하는 일에 해로움이 되지 않는다. 한때의 추궁은 잘못 노여워한 데 지나지 않는다. 어찌 이런 일을 가지고 인혐할 수가 있는가. 사직도 하지 말고 물러가서 기다리지도 말라."
하였다.
지평 홍극호(洪克浩)를 삭직시키고 집의 최중규(崔重圭)를 교체하였다. 중규는 일을 아뢰려고 하자 교체시키라고 명하였고 극호는 앞으로 나와서 일을 아뢰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종전의 행동에도 놀랄 만한 일이 많았다. 응당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야 되겠으나 우선은 대신 흑산도(黑山島)로 쫓아 보내라."
하니, 좌의정 김이소가 철회하기를 요청하자 이내 삭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장단(長湍)의 마병(馬兵)을 별효사(別驍士)로 개칭하게 하였다. 총융사(摠戎使)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지금 장단 부사 서유화(徐有和)의 보고를 보건대, 본부(本府)가 방어영(防禦營)이 되어 있을 때에 별효사와 마병이란 명칭이 있었는데 방어영을 폐지한 뒤로부터 별효사는 폐지하고 단지 마병만 남았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기피하여 대오를 채울 수가 없어서 군사 장비와 전마(戰馬)가 전혀 모양을 이루지도 못합니다. 만일 별효사라고 개칭하면 군제(軍制)에 있어서 별로 장애될 것이 없고 사람들이 모두 들어오기를 원하여 대오를 채우기 쉬울 것입니다. 이처럼 변통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4월 6일 임술
김이익(金履翼)을 이조 참의로, 민태혁(閔台爀)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이성(金履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승지 민창혁(閔昌爀)이 아뢰기를,
"이번 남해에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은 죄인 김종수에게 형률을 더 높여 적용하는 전지를 내버려두라고 명한 것은 이게 어쩐 일입니까. 그의 상소문 가운데 몇 군데는 차마 말할 수도 없고 차마 제기할 수 없는 내용을 아무 어려움없이 썼습니다. 그같은 대우를 받고 그같은 지위에 있었으면서 오늘의 조정에 무슨 불만이 있길래 감히 이런 윤리를 무시하고 도덕을 파괴하는 행동을 한단 말입니까. 그의 죄를 밝히고 그의 마음을 폭로한 다음에 순서대로 법을 적용해야 됨은 참으로 전하의 전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배반하려는 마음을 가진 자에 대한 처벌은 그 법이 매우 엄중합니다. 불만과 불평을 말 속에 띠고 있는 것이 배반하려는 마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 그것이 어찌 그의 죄를 밝히고 그의 마음을 폭로한 명확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아직껏 숨을 쉬게 하고 즉시 처단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진실로 뼈에 사무치도록 마음이 아픈 점입니다. 아직 내버려두라는 명을 도로 철회하여 응당 시행해야 될 법을 빨리 거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혼자서 아뢴 것은 고 중신(重臣) 이담(李潭) 이후에 처음 있는 예이다. 관례에 따라 비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하였다.
지평 정만석(鄭晩錫), 정언 이조원(李肇源), 교리 윤제동(尹悌東), 부교리 이상황(李相璜), 수찬 정동관(鄭東觀)이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세 번 아뢰어, 김종수에게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게 한 전지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극력 요청하니, 모두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김이소가 차자를 올리기를,
"김종수의 죄가 어떤 죄입니까. 상소문에서 한 말이 지극히 흉측하여 처단하는 죄안이 벌써 성립되었는데 어찌 밝혀지지 않은 것이 있으며, 품고 있는 마음이 지극히 끔찍스러움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데 어찌 폭로할 속마음이 있겠습니까. 그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서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의 죄를 따지자면 만 번을 죽인다 해도 남음이 있습니다.
오늘 전하에게 북면(北面)하여 섬기는 모든 신하들은 누군들 피눈물을 흘리며 성토하여 빨리 법에 따라 형벌을 즉시 시행하는 것을 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전례를 열어놓는 데에 구애되어 여태 응당 집행해야 될 법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이미 윤허를 받은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는 처벌까지도 아울러 중도에 중지하게 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일찍이 대신의 반열에 있었기 때문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지 못하고 지레 앞질러 법을 적용하는 것이 혹 잘 살펴서 처결하는 데 결점이 된다고 한다면 이는 또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범죄의 진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대신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죽게 된 경우에서 살릴 방법을 구하는 것이 진실로 성인이 신중하게 죄인을 심리하는 정사입니다. 그러나 지금 종수는 그의 속마음에 싹트는 것을 자기의 손으로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런만큼 종이에 가득 찬 흉측한 말과 전편에 늘어놓은 도리에 어긋나는 말은 바로 그의 진짜 속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어찌 물어볼 만한 단서가 있으며 토해내지 않은 속마음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임금이 내리는 영단을 내려 하늘의 처벌을 행해야 됩니다.
대각의 여러 신하들이 합문 밖에 엎드려 면대하기를 청한 지가 밤을 지새우고 점심나절이 되었는데도 불러서 접견하지도 않고 여태껏 윤허를 하지 않으니, 혹 훌륭한 전하께서 마음을 돌리는 거룩한 덕에 결점이 있게 될까 걱정됩니다. 어제 내린 전교를 도로 거두어 차례대로 징벌하는 방도를 만들어주어 세도(世道)에 다행스럽고 여론에 부응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경연에서 할 말을 다하지 못하여 지금 또 글을 가지고 대신 진술하였는데, 경은 감동을 주고 사리에 맞는 것이 글이 말보다 낫다고 여기는가. 어제는 어찌하여 소략하게 말하고 지금은 어찌하여 속속들이 말하는가. 이것이 저으기 의혹이 된다. 이렇고 저렇고 따질 것없이 한 마디로 가름하여 그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경하게 처벌하여 정해진 법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바로 신중하고 신중하여 형벌을 잘 적용하는 것이다. 경은 모쪼록 이해하기 바란다."
하였다.
대사간 김이성(金履成)을 특별히 발탁하여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성이 상소하기를,
"살기를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짐승도 그러한데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 되어서 어찌 스스로 자기의 목숨이 아까운 줄을 모르겠습니까마는, 신하이면서 임금을 속이는 것은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이에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다 진술하여 여하한 처벌도 받을 것을 기다리겠으니 성상은 굽어 살피소서.
아, 김종수가 전후에 지은 범죄는 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체로 그가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은, 남의 훌륭한 일을 가로채고 남을 이기기를 힘써, 문득 조심해야 할 일에는 소홀히 합니다. 이것이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언제나 적고 분해하고 거스르는 기운은 항상 많게 된 까닭인 것입니다. 전에 되돌려 준 상소문을 가지고 논하더라도, 신도 역시 그 개략적인 내용을 뒤미쳐 들었는데 어째서 그다지도 불인(不仁)함이 심합니까. 우리 자궁(慈宮)께서는 왕비의 덕에 걸맞는데도 중간에 운이 좋지 못하여 끝내 백성들의 국모(國母) 자리에 임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백성들의 지극히 가슴 아픈 일입니다. 더구나 전하를 낳아서 세손(世孫)에게 뻗쳐서 종묘 사직과 백성들이 만세토록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전하에게 북면하여 섬기는 신하들은 진실로 국모처럼 받들어 섬기면서 각각 충성과 사랑을 다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히 차마 들을 수 없는 성토를 가지고 무슨 문제만 있으면 곧장 제기하여 효성스런 마음의 슬픔을 더하게 하는 것입니까. 또 같은 날 특별한 은혜를 두 집안에 똑같이 내렸는데 김한로(金漢老)가 총관(摠管)이 된 데 대해서 불가하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 무슨 마음입니까. 이제 만일 이것을 가지고 죄를 성토하면 그가 무슨 말로 스스로를 변명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번에 올린 상소문의 내용에서 이른바 주착(做錯)이라는 것이 무엇을 명확하게 지적하여 한 말인지 아직 알 수 없는데, 극률(極律)로 논하는 것은 아마 죄인을 신중히 심리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생각건대, 전하의 뜻은 경미한 죄로 죄를 주어 살 길을 붙여주려고 하는 것이지만 죄명이 분명하지 않으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으면 왕법이 무거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죽을 죄를 무릅쓰고 생각하건대, 종전의 죄는 당연히 처벌했어야 되는데도 처벌하지 않았고 뒤에 일으킨 죄는 당연히 사실을 밝혀냈어야 되는데도 밝혀내지 않았으니, 성인이 죄의 경중에 따라 저울처럼 꼭 맞게 처결하는 뜻은 아마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진실로 한결같이 숨기는 것이 없이 충심을 다하고 천명(天命)을 기다릴 뿐인 것입니다. 만일 화(禍)와 복(福) 두 글자를 가슴 속에 먼저 붙여놓고 교묘하게 안배하면서 자신만을 보전하려고 꾀한다면 나라를 배반하고 임금을 저버리는 일을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겠습니다. 신이 요즈음 성토하는 것을 보건대, 주착이라는 두 글자에서 그 실체를 집어내지도 못하고 모호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보니 이미 풍속을 깨우쳐주는 뜻에 어둡고 금지된 말까지를 발설하게 되었으니 불성실한 성토가 무엇이 이것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한 번 사실을 밝혀내는 데 대한 요청을 하는 것은 바로 삼사의 책임이건만 여러 달 동안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았으나 끝내 듣지 못하였으며, 상의 앞에 나아가 아뢰는 말은 사실(私室)에서 하는 말과 달라 허위가 풍습으로 굳어져서 거의 얼굴을 대하고서 속이는 듯하였습니다.
아, 세도(世道)의 바르지 못함이 어떻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전하의 태양같은 밝음으로 이런 풍습을 굽어 살펴보고 어제의 전교를 내리기까지 하였고, 또 그의 죄를 밝히고 그의 마음을 폭로하는 것으로 마지막 처결하는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어찌 종수의 다행이겠습니까. 세도는 이로부터 바루어질 것이고 왕법(王法)은 이로부터 펴질 것이며 예법도 이로부터 엄격해질 것이니, 이는 참으로 나라에 있어 만세토록 다행이 되는 것입니다.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자는 계청은 윤허를 받았으나 전지를 내리지 않아 거행하지 못하였다면 한갓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는다는 이름만 있고 그에 대한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의 말은 무거워지지 못하고 왕법은 믿음이 없어질 것이니, 참으로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빨리 전지를 내려서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바른 도리를 밝게 보여주고, 다음에는 법전에 구애되지 말고 진상을 밝혀내어 그의 숨기는 말에 과연 명확한 죄가 있으면 엄격한 왕법을 적용하여 결코 용서하지 않아야 됩니다.
신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위태로운 사람으로서 그저 임금에게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 뿐이고 혐의에 가까운 점은 회피하지 않았으니 설사 전하의 아주 밝은 굽어 살핌을 입는다 하더라도 어찌 곧장 날아오는 공격의 화살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죄인을 비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마는 신이 비록 어둡고 못난 사람일지라도 어찌 조금이라도 그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 스스로 죽을 죄에 빠지는 것을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진실로 전하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몸과 집안을 보전하였기 때문에 차마 마음 속에 있는 터무니 없는 말을 가지고 도리어 전하를 속일 수는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신의 어리석은 충심을 가엾게 여기고 특별히 살피시어, 혹 신의 말을 옳다고 여긴다면 신의 요청을 빨리 윤허하여 상세히 조사할 길을 열어주고, 옳지 않다고 여긴다면 신의 죄를 시원히 바루어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예쁘고 미운 점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너에게는 경솔하게 나서는 병통이 있는데 간혹은 그 병통이 도리어 장점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너를 버리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지금 네가 올린 상소에서 의리와 분수에 대하여 마치 대쪽을 쪼개듯이 분명히 갈라놓았다. 한 번 읽었을 때 눈이 번쩍 떠지고 두 번 읽었을 때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으니 너는 참으로 내가 알았던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
네가 김종수를 성토하는 여러 조항에서, 그가 유독 김한로(金漢老)를 총관(摠管)으로 임명한 데 대해서는 불가하다고 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그 죄가 이번에 범한 죄보다 위에 간다고 말하였으며 또 종전의 죄는 당연히 처벌했어야 되는데도 처벌하지 않았고 이번에 범한 죄는 당연히 밝혀냈어야 되는데도 밝혀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를 형정(刑政)에 대한 결점으로 귀결시켰는데, 이것은 네가 아직 내가 임시 방편에 의하여 적절하게 대처한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 열거한 주착에 대한 진상을 조사해야 된다고 청한 것과 같은 구절은 현재의 사정에 있어서 더욱 절실한 문제로 일마다 옳고 구구절절이 타당하니 너의 말은 공정한 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공정한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너의 상소문 가운데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는다는 이름은 있고 그 실상은 없어서 왕의 말은 무거워지지 못하고 왕법은 믿음이 없어질 것이니, 이는 작은 근심이 아니다.’라는 등의 말도 법을 집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의논이다. 나라의 법을 펴기 위하여 특별히 너의 요청을 허락하여 즉시 승정원에게 어제 내린 전교를 시행하지 말도록 하고 섬에 귀양보낸 죄인 김종수를 바로 그곳에 가시울타리를 둘러쳐 막을 것을 의금부에 분부하겠다.
너는 또 ‘법전에 구애받지 말고 진상을 밝혀서 엄격한 왕법을 적용하여 용서하지 않아야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아주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법은 어떤 경우이건 변경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리저리 굴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야 참으로 말할 것도 없지만 그의 지위를 보게 되면 일찍이 대신의 자리에 있었으니 결코 법을 깨뜨리면서 국청을 설치하여 70살이 지난 사람에게 모진 고문을 가할 수는 없다. 이는 결단을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한없이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근래의 풍속이 마주 대해서는 속이고 마음 속으로는 그르게 여기어 사람들이 자기의 본심으로 마음을 쓰지 않는 때인데 너는 감히 너의 본심에서 나온 말을 글로 써서 상소를 바쳤다. 나라에는 늦추고 당기는 융통성을 부리는 정사가 있는데 이를 너에게 먼저 시행하지 않고 누구에게 먼저 적용하겠는가. 너를 특별히 가선 대부 병조 참판에 제수하여 임금을 섬김에 있어 속임이 없는 사람의 선창자가 되도록 하겠다."
하였다.
정언 이조원(李肇源)은 귀양보내는 형률을 시행하고 지평 정만석(鄭晩錫)은 시골로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어제 오늘 이조원 등의 행동은 귀막고 방울 도적질을 하거나 언청이 아가리에 토란 비어지듯 하는 꼴이니 어찌 전대사간044) 의 죄인이 아닌가. 이틀 동안 합문 밖에 엎드려 있은 것이 과연 성심으로 그렇게 한 것인가. 아니면 위엄이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인가. 정언 이조원은 우선 그 벼슬을 교체시키고 의금부에 가두어서 귀양보내는 형률을 시행하고, 지평 정만석도 남의 의견을 따라 굽실대는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니 삭직시켜 시골로 내쫓으라."
하였다.
4월 7일 계해
직제학 김재찬(金載瓚)을 특별히 발탁하여 지돈녕부사로 삼았다. 김재찬이 상(喪)을 마치자 상이 그의 선대를 생각하여 이 명이 있었다.
내각이 강제 문신 추절목(講製文臣追節目)을 바쳤다. 【 1. 강제(講製)에 대한 사항은 모두 원절목(原節目)에 따라 시행하되 강경과 제술에는 사람마다 각각 잘하는 것이 있다. 강경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반드시 제술을 잘하는 것이 아니며 제술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강경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강경과 제술하는 사람을 초계(抄啓)한 뒤에 강경에 응하거나 제술에 응하는 일은 모두 원하는 데 따라 나누어 소속시킨다. 1. 강경 시험과 제술 시험을 막론하고 너무 드물게 보이면 해이해지는 조짐이 있을 수 있고 너무 잦게 보이면 익히고 연습할 겨를이 없게 될 것이다. 달마다 제술은 친시(親試) 한 차례와 과시(課試) 한 차례로 하며, 강경은 단지 과강(課講) 한 차례만 시행한다. 그러나 시험 횟수를 3분의 1로 줄였기 때문에 공부를 꾸준히 하지 않고 방심할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강경하는 책의 시작과 끝은 매 차례마다 전절목 가운데의 첫 번째와 두 번째에 하던 것을 합하여 한 번에 한다. 1. 강경과 제술을 나누어 소속시킨 것이 각각 잘하는 능력을 취하여 실속있는 공부를 시키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지만 역시 그저 강경만을 하고 제술은 하지 않거나 그저 제술만을 하고 강경을 하지 않아서는 되지 않는다. 강경에 응하는 사람들은 매달 친시를 행할 때 제술에 응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제술에 응시하고, 제술에 응하는 사람들은 4계절의 첫달에 과강(課講)을 행할 때 강경에 응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강경에 응시한다. 그리고 강경하는 책의 시작과 끝은 모두 정해진 규정에 따라 거행한다. 1. 문의(文義)에 정통한 사람이라 하여 꼭 구두(句讀)에 익숙한 것은 아니니 제술에 응하는 사람들은 모두 책을 보고 강경하는 것[臨講]을 허락하되 다만 문의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지 고증이 해박한지를 취한다. 강경에 응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이미 경서를 연구하는 데 전념하도록 하였으니 깊이 사색하고 탐구하는 겨를에 여력으로 글을 외우기에 충분할 것이므로 모두 책을 보지 않고 돌아앉아서 외우는 것으로 규정을 정한다. 1. 강경에 응하는 사람들은 과문(科文)에 익숙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선 부화(浮華)한 것을 접어두고 실질적인 공부를 하려고 자원하여 강경에 응하였으니 7서(書)를 모두 통달하고 난 다음에는 정력이 이미 넉넉하고 문장에 대한 구상도 날로 새로워져서 그 결실된 꽃이 문장으로 발표되어 훌륭히 볼 만한 것이 많을 것이다. 앞으로는 강경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젊은 사람은 7서의 강경을 마친 다음 제술하는 쪽으로 옮긴다.】
【태백산사고본】 39책 39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61면
【분류】인사(人事)
4월 8일 갑자
전의 현감(全義縣監) 김사의(金思義)가 광주(廣州)의 사근(沙斤) 객점을 지나갈 때 객점 주인이 야단을 부리면서 욕지거리를 한 일이 있었는데 부윤(府尹) 임도호(林道浩)가 그 사람의 죄를 매우 경하게 다스렸다. 경기 관찰사 서용보(徐龍輔)가 객점 주인을 무겁게 처벌하고 도호가 경하게 다스린 죄를 탄핵하여 아뢰자, 회유(回諭)하기를,
"전번에 법종(法從)045) 이 배 안에서 곤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수령이 객점에서 곤욕을 당했다는 말을 들으니, 기강을 멸시하고 분수를 업신여기는 일이 묘하게도 도내에서 연거푸 일어났다. 경은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고 수령은 삭직시키겠다."
하였다.
4월 9일 을축
관동(關東)에서 경서를 공부하는 유생 돈령 도정(敦寧都正) 박사철(朴師轍)과 동몽 교관(童蒙敎官) 최창적(崔昌迪)이 올라왔다. 소견(召見)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물어보면서 아주 지극하게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김재찬(金載瓚)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성연(洪聖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10일 병인
강화부 유수 이홍재(李洪載)를 파직시키라고 명하고 이어서 해부(該府)에게 잡아다가 신문하도록 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용보는 잡아다가 처리하고 병부(兵符)는 도사(都事)가 대신 차고 대신 살피라고 하였다.
영부사 채제공(蔡濟恭)을 고양군(高陽郡)에 부처(付處)하라고 명하였다. 제공이 합문 밖에 나와서 면대하기를 요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각신·승지·옥당이 합문 밖에 나와서 면대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상차하기를,
"지금 강화 유수 이홍재에게 선전관을 보내어 그의 병부를 빼앗고 잡아오라는 전교를 보았습니다. 대체로 서로 직접 면대하여 직무를 교대하는 직임(職任)은 무거운 죄를 범하였다 하더라도 반드시 직접 부신(符信)을 주고받은 다음에 잡아오는 것이 바로 바꿀 수 없는 확고한 법입니다. 더구나 이 섬은 역적 이인(李䄄)이 살아 있는 곳이므로 지키는 책임자를 한 각도 잠시 비울 수가 없습니다. 홍재가 범한 죄가 어떤 것이기에 전에 없던 이런 조치를 취하여 뭇사람들의 심정이 놀라고 두려워서 어쩔 바를 모르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즉시 새 유수를 밤낮없이 달려가게 하여 섬 안에서 직접 부신을 주고받은 다음 홍재를 잡아오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유수를 직접 교대하기 전에 잡아온 전례는 한 둘이 아니다. 경기 관찰사가 대신 일을 살필 것인데 어떻게 직접 교대하기 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경기 도사·중군·경력·통진 부사·김포 군수를 모두 잡아오고, 경기 관찰사와 강화 유수의 병부는 후임이 교대할 동안 기역(畿驛)의 찰방을 가도사(假都事)로 임명하여 임시로 차게 하라고 명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승지·삼사의 모든 신하들이 면대하기를 요청하였으나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왕대비가 모든 신하들에게 언문 전교를 내렸다.
"내가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국가를 위하여 조금이나마 도와서 보호하는 보탬이 되려고 해서이다. 그러나 연전에 역적 인에 대한 형률을 적용하는 일로 여러 차례 말하였건만 조정이 비단 머리가 부서지도록 강력히 간쟁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또 나의 성의가 주상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저번에 강교(江郊)에서의 당황스러운 사태까지 있었다. 그러므로 그 뒤로부터 나는 스스로 잠자는 것과 음식에 대한 일을 낮추고 박하게 하여 나의 뜻을 보여서 주상을 감동시키려고 하였다. 그동안 다행히 그 일을 다시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마음에 위안이 되어 거의 죽은 뒤에 선대왕의 얼굴을 뵈올 수가 있게 되었었다.
지난 겨울부터는 상의 마음이 달라진 점이 있는 듯하므로 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만류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요즘에 또 석방하려는 기미가 있기 때문에 내시를 보내어 길을 막고 못가게 하면서 내전(內殿)에서 몸소 주상에게 만류하였다. 그런데 오늘 들으니 가마와 종자를 모두 갖추어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사태가 매우 급하게 되었는데도 누설하지 못하도록 엄금하였기 때문에 내시와 궁속들이 감히 와서 고하지 못하였다. 내가 비록 짐작으로 그런 기미를 알기는 하였지만 마음과 뼈마디가 모두 떨렸다. 대신 이하 백관들은 몇백 년간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나라를 위하여 역적을 성토하는 일에 대수롭지 않게 대처하고 있다. 만일 오늘 날의 의심나고 염려스러운 나의 마음과 같다면 내 어찌 세상에 살아있을 생각이 있을 것이며 경들 또한 무슨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겠는가. 눈앞에 닥친 일을 가지고 만류하느라 나의 병이 더 심하여졌다가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기에 경들에게 알도록 말하는 것이다."
명하여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을 부처하게 하고 승락없이 문을 밀치고 들어온 여러 신하들과 합문 밖에서 물러가지 않는 대신들을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시종하는 당상관과 당하관은 의금부에서 추문하고, 합문 밖에서 물러가지 않는 승지는 잡아다가 처리하며, 합문 밖에서 물러가지 않는 경재(卿宰)들은 잡아다가 추문한 다음 모두 당직(當直)에게 넘기도록 하였다. 낙성 등이 자전의 전교를 받들고 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가 대현문(待賢門)에 당도하자 문에 자물쇠가 굳게 채워지고 액례(掖隷)들이 늘어서서 지키므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전교하기를,
"영의정이 된 사람이 어찌 억측을 할 수 있으며 또 어찌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가. 경례(敬禮)는 경례이고 분의(分義)는 분의이다. 영의정 홍낙성을 우선 성문 밖으로 내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성문 밖으로 내치라는 명이 내린 뒤에 설사 자전의 전교를 받들고 왔다고 하더라도 이미 다른 대신이 있는 만큼 어떻게 감히 덮어놓고 그대로 머물러있을 수 있겠는가. 전 영의정 홍낙성을 영부사 채제공과 같은 형률로 시행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간 죄는 진실로 전혀 용서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마는,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신들은 죽음이 있을 뿐 들어가지 못하면 물러갈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전의 언문 전교를 받들고 와서 문 밖에서 방황하게 되니, 비단 뭇사람들의 심정만 억울할 뿐아니라 전하의 타고난 효성으로서 만일 자전의 전교가 소중함을 생각하신다면 어떻게 신들로 하여금 끝내 전하와의 면대를 얻을 수 없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제신들이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자전의 언문 전교는 관례에 따라 번역해서 승전색에게 말을 만들어 계품해 주기를 요청하는 것이 도리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계품하여도 허락하지 않으면 합문 밖에 나와서 면대하기를 구할 것이요, 면대하기를 구하여도 허락하지 않고 합문을 닫아버리기까지 한다면 이내 합문을 밀치는 것은 그대로 혹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서로 이끌고 곧장 몰려들어왔으니 어찌 이런 나라의 체면이 있겠는가. 내가 자전의 전교가 소중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경들의 처사도 이와같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경들의 이번 행위는 제멋대로 마구 한 행위에 가까우니 조정의 체면은 결코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제신들이 합문을 밀치고 들어가자 문짝이 부서지기까지 하였다. 일제히 중희당(重熙堂) 앞의 창 밖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며 다급한 소리로 아뢰기를,
"강화도에 있는 역적이 살아있어서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이 마치 한 가닥 머리카락과도 같은데 저번에 강가에서 일어났던 일 때문에 지금까지 뼈마디가 떨립니다. 다행히 우리 자전의 덕택으로 오늘이 있게 되었는데 전하께서 이번에 행한 조치는 또 무슨 일입니까. 가마와 종자를 이미 갖추어 보냈건만 신들은 듣지를 못하였으니 자전께서 언문 전교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신들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접견하여 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지금 희정당에 있으니 대신은 입시해도 괜찮다."
하였다. 제신들이 물러가려 하지 않고 면대해줄 것을 힘껏 요청하자, 전교하기를,
"대신이 이미 자전의 전교를 받들고 왔다고 말하였으니 동시에 접견하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성정각(誠正閣)에 나와서 입시할 것을 명하였다. 종악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기를,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앉아서 제신들을 기다린 지 오래되었다. 한결같이 침전(寢殿) 안에서 서로 버티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도리인가."
하였다. 이때 제신들이 아직까지 중희당 앞에 있었는데, 사관을 보내어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온 제신들이 모두 당도하였는가 묻게 하였다. 사관이 들어와서 모두 당도하였다고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어느 때 전교를 내렸는데 이제서야 비로소 당도하였는가. 무엄한 신하들을 나는 만나고 싶지 않다."
하고는, 마침내 일어나서 내전으로 들어갔다. 종악이 옷자락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미처 잡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소(履素) 등이 선화문(宣化門) 밖에 나와서 면대하기를 요청하고 자전의 언문 전교를 번역하여 바쳤다. 상이 전교하기를,
"만일 합문을 닫아버렸다면 밀치거나 두드리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내가 어느 전각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곧장 좁은 길을 찾아 동쪽으로 서쪽으로 제멋대로 마구 들어왔으니 비록 바쁘고 다급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어찌하여 협양문(協陽門) 밖으로 물러나가서 반열을 지어 앉지 않는가."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희(金憙)가 백관들을 거느리고 구전(口傳)으로 왕대비전에 아뢰기를,
"신들이 조금 전에 내린 자전의 전교를 받고 놀랍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몰라 서로 이끌고 전하에게 면대하기를 청하여 문을 두드리며 부르짖었으나 접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위급한 형편이 경각에 닥쳤는데도 호소할 곳이 없기에 자전께 일제히 호소하오니 전하의 마음을 힘껏 돌리시어 위태로운 형편을 편안한 쪽으로 전환되도록 하소서."
하니, 언문으로 비답하기를,
"경들은 당연히 힘껏 성의를 쌓아서 전하께 허락을 받아야 되는데 어찌 나에게 와서 호소하는가. 조정의 일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니 경들은 물러가라."
하였다. 박종악 등이 경재와 백관들을 거느리고 다시 면대하기를 요청하니, 전교하기를,
"오늘의 행위는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합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온 일은 번쾌(樊噲)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그것은 문을 닫아 걸었기 때문에 밀쳐서 열은 것이다. 지금은 애당초 문을 닫아건 일이 없었음에도 이내 밀쳐서 여는 행위를 하였으니 이 어찌 신하의 분의로서 할 수 있는 짓인가. 만일 이를 속죄하려거든 즉시 빨리 나가라."
하였다. 종악이 아뢰기를,
"신들의 죄는 만 번 죽음을 당하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마는, 다급하게 면대를 청하는 때라서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문을 밀치느라 스스로 큰 죄에 빠져들어가는 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물러가라는 전교를 받기는 하였으나 죽어도 감히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
하고는, 대신 이하 제신들이 관(冠)을 벗고 희인문(熙仁門) 밖에 꿇어 엎드리니, 전교하기를,
"만일 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돌이키고 싶거든 문 안이나 문 밖이 관계가 없다. 이미 물러가서 속죄하라고 일렀는데 어째서 물러가지 않는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면 어찌 할 작정인가. 의당 합문을 닫으라는 전교를 내릴 것이다. 합문을 닫게 되면 수라도 물리치고 정사도 보지 않을 터이니 그렇게 알라."
하였다. 대신과 제신들이 모두 협양문(協陽門) 밖에 물러가서 엎드리자, 전교하기를,
"합문을 닫으려다가 문틈을 조금 열어놓은 것은 경들이 나가는 길을 열어놓으려는 생각에서이다. 한나절 동안이나 서로 버티다가 기어코 합문을 닫고 난 다음에 그만두려고 하니 어찌 이러한 신하의 분의가 있단 말인가."
하고, 또 전교하기를,
"관을 썼다가 다시 벗는 것은 그래도 괜찮겠지만, 이미 관을 쓰라고 명했는데도 관을 쓰지 않으니 어찌 이렇게 아이들 장난과 같은가."
하니, 종악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죽을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감히 관을 쓰겠습니까. 만일 불러서 접견해 주신다면 당연히 관을 쓰겠습니다."
하였다.
합문을 밀치고 들어온 정민시(鄭民始) 등 11명의 제신들을 고양(高陽)에 귀양보내고 【제학 정민시, 검교 직제학 서유방(徐有防), 원임 직제학 서정수(徐鼎修), 원임 직각 윤행임(尹行恁), 검교 직각 남공철(南公轍), 수어사 이문원(李文源), 이조 판서 김사목(金思穆),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 병조 판서 정창순(鄭昌順),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이다.】 대신은 파직시켰다.
전교하기를,
"경재들은 비록 강제로 쫓아낼 수 없으나 시종신으로 있는 당상관과 당하관은 병조로 하여금 축출하게 하라."
하였는데, 병조가 즉시 이를 거행하지 않고 제신들도 물러가지 않자, 또 전교하기를,
"병조 참의와 참지를 파직시키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시종신으로 있는 당상관과 당하관을 모두 의금부에서 추고하라."
하였다. 또 기로소 당상관 이외의 경재들을 모두 잡아다 처리하라고 명하고, 또 합문에서 물러가지 않고 있는 경재들을 모두 삭직하라고 명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삭직한 뒤에도 여태 합문에서 물러가지 않는 경재들은 모두 당직관에게 넘기고, 합문에 엎드려 있는 승지는 모두 잡아다 처리하며, 남소(南所)의 위장(衛將)을 가승지(假承旨)로 임명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귀양가게 되고 의금부에서 추고받게 된 제신들이 모두 나갔다. 종악·이소·희 등이 가승지와 사관을 거느리고 합문 밖에 엎드렸다. 합문 밖에 엎드려 있는 대신들에게 모두 삭직시켜서 축출하는 법을 적용하라고 명하였다. 종악 등이 말하기를,
"4백 년 동안 이어온 종묘 사직이 마치 한올의 머리카락처럼 위급하게 되었는데, 경재와 제신들은 잇달아 귀양을 가고 단지 신들 몇 사람만 남았습니다. 신이 비록 나아가지는 못하나 머리가 부서져서 피를 뿌리더라도 감히 합문 밖을 텅비게 할 수 없으니, 단지 한 번 죽기만을 알 뿐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합문 밖에 엎드려 있는 대신에게 부처(付處)의 벌을 더 적용하라."
하였다. 종악 등이 말하기를,
"조정이 텅비어 나라가 장차 위태롭게 되었으니 신들은 감히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합문 밖에 엎드려 있는 대신들을 광주목으로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였으나 종악 등은 끝내 물러가지 않았다.
통장(統長)과 수문 별감(守門別監) 등에 대하여 훈련 대장이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군대의 위엄을 베풀고 곤장을 친 다음 조리를 돌리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제신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올 적에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4월 11일 정묘
전교하기를,
"밤을 지새우고 새벽까지 서로 버티는 것은 나라의 기강에 크게 관계된다. 당직 도사는 먼 곳으로 귀양보낼 대신들을 압송하여 샛문을 열고 나가고 가승지도 내보내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이미 승지가 없는데 사관은 어째서 감히 물러가지 않는가. 액례(掖隷)들을 시켜 압송해 나가 연영문(延英門) 안에 잡아두고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먼 곳으로 귀양가게 된 대신들이 아직도 여기에서 나가지 않은 것도 이미 지극히 놀라운 일인데, 이제는 승지와 사관도 없는데 어찌하여 나가지 않는가."
하니, 대신들이 마침내 금호문(金虎門) 밖으로 물러나갔다. 전교하기를,
"대신을 먼 곳으로 귀양보내라고 한 전교는 도로 들이고 선전관 2원이 돈화문(敦化門)과 금호문 두 곳을 지켜서 들어오는 경재들을 일체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판중추부사 박종악은 충주목(忠州牧)으로, 전 좌의정 김이소는 홍주목(洪州牧)으로, 판중추부사 김희는 청주목(淸州牧)으로 부처하겠다고 아뢰었다.
각신 정민시(鄭民始)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자, 그 상소문은 금호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모두 쫓아보내라고 명하였다.
이명식(李命植)을 병조 판서로, 홍억(洪檍)을 예조 판서로, 신사운(申思運)을 공조 판서로, 임희증(任希曾)을 판의금부사로, 이정규(李鼎揆)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기정(朴基正)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한광계(韓光綮)를 형조 판서로, 유당(柳戇)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문을 밀치고 들어왔던 제신들 가운데 삼사의 관원들은 매우 무엄하였지만 혹 용서할 점도 있으니 분간(分揀)하라. 그리고 승지·사관과 무장들을 일체 분간하라."
전 지평 강극성(姜克成)을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전 지평 강극성이 도끼를 가지고 와서 합문 밖에 엎드려 직접 혈서(血書)를 써서 바치면서 역적 이인(李䄄)의 머리를 베어 종묘 사직을 편안히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되돌리지 못하면 도끼에 엎어져서 죽으려고 합니다. 도끼는 가지고 들어올 적에 수문장이 빼앗았다고 당해 수문장이 지금 막 와서 보고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하는 행위가 흉측하고 패역스러우니 이것이 어찌 기절(氣節)인가. 이렇게 기회를 엿보는 간사한 꾀에 대해서는 의당 내가 직접 국문하여 엄하게 처치할 것이니 당장 거행하라. 장소는 숙장문(肅章門)으로 하고 호위는 베풀지 말라."
하였다.
왕대비가 언문 전교를 제신들에게 내려 말하기를,
"충성과 의분이 있는 신하를 장차 국문하여 엄하게 처치하려고 하는데도 조정에서는 한 마디도 만류를 청하는 말을 올리는 사람이 없다. 나는 어제부터 잠을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하고 있다. 오늘 제신들이 하는 일은 한심스럽다. 충신을 경들은 구원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승지·각신·삼사의 관원들과 2품 이상의 관원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면대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강극성을 잡아다가 국문하겠다는 전교를 철회하고 절도(絶島)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의금부가 강극성을 거제부(巨濟府)의 절도에 귀양보내겠다고 아뢰었다.
별겸 춘추(別兼春秋) 서유문(徐有聞) 등과 전 승지 이면응(李冕膺) 등이 모두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각사의 서리들이 상소를 올리자 그 상소를 받아들인 승지를 잡아다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봉조하 정존겸(鄭存謙) 및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 등, 안춘군(安春君) 이륭(李烿) 등과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 등, 판중추부사 이명식(李命植) 등, 사직 윤숙(尹塾)과 수원부 유수 조심태(趙心泰) 등, 판돈녕부사 이풍(李澧) 등, 거상(居喪) 중인 신하 서유린(徐有隣)과 거상 중인 신하 안책(安策)이 상소를 올렸는데, 모두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거상 중인 신하 김문순(金文淳) 등이 상소하니, 전교하기를,
"저촉되는 말이 많아 금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였다. 특별히 평상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엄하게 처분할 수는 없으나 그대로 둘 수만도 없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제도를 위반한 형률로 다스려 처리하도록 하라."
하니, 의금부가 문순 등에게 장 일백에 속전(贖錢)을 받고 고신(告身)을 소급하여 모두 빼앗는 형률을 적용하자는 의논을 드렸다.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인 진사 이소구(李韶九) 등과 진사 홍대형(洪大衡) 등이 상소를 올리자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전 지의금부사 구상(具庠)이 상소하기를,
"이제 혈서를 올려서 몸을 다 바치는 소원을 대신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혈서를 올리는 것은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이 상소를 돌려주고 우선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초계 문신(抄啓文臣) 최광태(崔光泰) 등, 승문원 부정자 이홍달(李弘達) 등, 이조 참의 김이익(金履翼)과 선전관 허식(許侙) 등, 첨지 김희(金爔) 등이 상소하니,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4월 12일 무진
성균관이 아뢰기를,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이 오늘 저녁에 식당을 베풀지 않은 채 제생(諸生)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하기를 ‘신들이 난적이 뛰쳐나와 윤리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서로 이끌고 대궐문에 나아가서 호소하였으나 전하께서는 전혀 반응이 없으셨다. 신들이 대궐문에 머리를 깨부수고 손수 나라의 역적을 찢어죽이지는 못하지만, 어떻게 차마 선비의 관을 쓰고 선비의 옷을 입은 채 성균관에 발을 들여놓아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인재를 배양하는 은혜를 저버리겠는가. 역적 인을 죽이기 전에는 결코 감히 선비로 자처하면서 얼굴을 쳐들고 식당에 들어가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 무리들을 어찌 식당에 들어가도록 권할 것이 있겠는가. 다른 유생들을 응당 들어가도록 권할 것이지만 이 역시 요긴한 일은 아니다. 공자의 사당에 재실이 비었을 경우에는 으레 예관이나 또는 사관을 보내어 수직하게 되어 있으니, 이는 바로 공자의 사당을 존경하는 아름다운 규정이다. 예조 낭청 한 명에게 번드는 일을 마친 한림(翰林)과 함께 공자 사당에 나아가 수직하도록 하고 제생들은 그들의 말대로 내보내라."
하였다.
문을 밀치고 들어왔던 제신들의 귀양보낼 곳을 강화부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구상을 가장 먼 변방에 안치하라고 명하였다가 곧바로 강화부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강화부 유수로 삼았다.
병조 판서 이명식이 경재·시종·백관과 함께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 합문 밖에 나아와 면대를 요청하였다. 명식은 귀양보내고 따라온 경재들은 모두 김포군(金浦郡)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대비가 언문 전교를 제신들에게 내리기를,
"죄인이 지금 들어온 것 같은데 나는 알아볼 길이 없으니 조정은 그 일을 살피라."
하였다. 또 언문으로 제신들에게 전교를 내리기를,
"그저께 대신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나에게로 와서 청할 때 조정이 청하도록 위임한 것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허락을 얻어낼 수 있는 도리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줄곧 적막하기만 하니 나의 본의가 어디에 있으며 국가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때에 조정에서 한편으로는 내린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요청하는 외에 또 어찌하여 한편으로는 엄하게 구속할 방도와 일이 터질 조짐을 방비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겉으로 한갓 허락을 얻어내지 못할 행위만을 하고 있는가. 나도 이제 생각할 방법이 있다. 조정이 참으로 이렇게 한다면 내가 병중에 있지만 몸을 돌볼 수가 없으니 그리 알라. 이 언문 전교는 어제부터 전달하려고 하였으나 내시가 상이 내린 전교를 두려워하여 지금까지 전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정이 어찌 나의 말을 듣고 하겠는가. 이제는 나에게 올리는 모든 공상(供上)을 전부 물리칠 것이니 그렇게 알라."
하였다.
경재 조종현(趙宗鉉)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돈화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면대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모두 의금부에 잡아 가두고 백관들은 쫓아내라고 명하였다.
전교하였다.
"자전의 전교가 반포되기에 이른 것은 나의 성의가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자전의 전교도 감히 받들지 못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이번의 조치가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와서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여 자전의 전교를 애써 거두게 하는 방도는 오직 나의 성의가 자전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에 달려있으니, 어찌 제신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현재의 사체와 도리로는 지금 장차 자전의 전교를 도로 거두어들일 것을 강력히 청하는 일 때문에 지체할 수가 없다. 전 좌상을 사옹원 도제조로 삼아 죄명은 우선 분간하고 날마다 올리는 공상을 내일 도제조가 봉하여 올리라."
의금부가 홍수보(洪秀輔) 등에게는 성문 밖으로 내쫓는 법을 시행하고, 조종현 등에게는 각각 곤장 50대에 속전을 거두며 현직에서 해임하여 놓아보낼 것으로 아뢰니, 전교하기를,
"비록 제일 낮은 벌 중에 낮은 벌로 처벌하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일반적으로 명령을 어긴 경우에 내리는 형률로만 적용할 수 있겠는가. 다시 법조문을 상고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 강화 유수 이홍재(李洪載), 통진 부사(通津府事) 김이용(金履容), 김포 군수(金浦郡守) 유한준(兪漢雋), 양천 현감(陽川縣監) 김반(金鎜), 경기 도사(京畿都事) 김기상(金箕象), 강화 경력(江華經歷) 권이성(權彛性) 등을 석방하였다.
권유(權𥙿)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사옹원 도제조 김이소를 소견하였다. 전교하기를,
"요즈음 제신들의 접견을 굳이 거절하였으나, 나의 정성이 미약하여 자전을 감동시키지 못한 때문에 언문 전교에서 정상적으로 올리는 공상마저 받지 않겠다는 말씀까지 언급하였으니, 송구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형용할 수가 없다. 규정된 대로 공상을 올리는 방도에 대하여 내가 직접 도제조에게 타이르려고 한다."
하니, 승지가 사옹원 도제조와 함께 입시하였다. 이소가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말하기를,
"전하의 가슴 치미는 증세가 더하여졌으므로 아랫사람들이 몹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을 불러 접견하는 것은 소중한 일을 위해서이다. 우선 오늘의 일을 놓고 말하면 경들이 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은 마치 내가 자전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과 같다. 언문 전교 중의 ‘응당 물리치겠다.[當却]’는 두 글자는 번역이 잘되지 못하였으니 응당 물리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벌써 물리친[已却] 것이다. 이때 나의 마음이 어찌 매우 안타깝지 않겠는가.
어제 아침 이후로 다시 문안을 드리지 못하였으니 나의 도리로는 힘껏 성의를 쌓아 응당 자전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게 할 방도를 생각해야 된다. 내일부터 경이 제조와 낭청들을 거느리고 정상적으로 올리는 공상을 직접 올리되 혹 도로 내려보내더라도 정성을 쌓아 다시 올려야 할 것이다.
자전에게 올리는 탕약(湯藥)도 종전의 처방대로 지어서 달여 들이도록 하라. 이밖의 일들은 비답에서 다 말하였기에 다시 말할 것이 없다. 제 선왕(齊宣王)은 한 나라의 힘으로 여덟 나라를 복종시키는 것도 오히려 어렵게 여겼는데, 내가 어떻게 천 명이나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과의 수응을 감당하겠는가. 이런 연유로 어제 오늘 기력이 몹시 피곤하기 때문에 내전으로 들어가겠다."
하니, 이소가 옷자락을 붙잡으려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전각에서 내려가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전교하기를,
"대신은 관을 쓰라."
하였으나, 이소가 끝내 쓰지 않으니, 전교하기를,
"이처럼 서로 버티면 나의 가슴 치미는 증세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경들이 물러간 뒤에야 비로소 쉴 수가 있으니 경은 모쪼록 이를 이해하라."
하니, 이소가 비로소 물러가자 액례를 시켜 합문 밖까지 부축하여 나가게 하였다. 이소가 울면서 아뢰기를,
"아까 연석에 나아가 한 마디의 말도 못하고 물러가니 오직 속히 처분을 내리기만을 바랍니다."
하였다. 인하여 합문 밖에 대기하는 승지들을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승지가 만일 전교한 내용을 상세히 전달했더라면 대신이 어찌 이렇게 하겠는가."
하고, 또 이소에게 타이르기를,
"어째서 이처럼 나를 피곤하게 하는가. 빨리 나가라."
하였다. 이소가 아뢰기를,
"면대하기를 요청한 지 며칠만에야 비로소 전하의 앞에 나왔으나 한 마디도 아뢰지 못하였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죽을 뿐 살아서 나갈 생각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연거푸 차마 들을 수 없다는 전교를 내리자 이소가 의금부로 달려가 엎드려서 명을 기다렸다. 전교하기를,
"불러서 접견한 것은 소중함이 있어서이다. 자전이 도로 내려보낸 탕약을 다시 봉하여 들여보내야겠다. 의당 내국(內局)의 신하를 불러서 만날 것이니 경은 명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들어오라. 밤 시간이 거의 끝나가니 날이 밝기를 기다려 자전에게 날마다 올리는 공상을 경이 살펴 봉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내의원이 아뢰기를,
"왕대비전에 올린 탕약을 도로 내려보내는 조치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아랫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안타까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곧장 대비전에 호소하고 싶지만 제멋대로 하는 데에 관계될까봐 합문 밖에 나와 면대하기를 요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방금 내가 약을 드시기를 힘써 청하였으니 경은 물러가 내의원에서 대기하라."
하였다.
거상(居喪) 중인 신하 이시수(李時秀)·이만수(李晩秀)와 심상규(沈象奎)·구익(具㢞)이 상소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전 대사간 박기정(朴基正)과 훈련원 정 오재연(吳載衍) 등, 금군(禁軍) 김수연(金守淵) 등, 사학 유생(四學儒生) 심옥(沈鈺) 등, 우윤 신광리(申光履), 대사성 정대용(鄭大容), 사죄신(死罪臣) 성덕우(成德雨), 첨지 이만운(李萬運) 등,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 정택주(鄭宅柱), 군기시 정 윤시룡(尹始龍) 등이 상소하니, 모두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4월 13일 기사
내의원이 탕약을 받들고 곧바로 대비전의 합문 밖에 나아가서 아뢰니, 답하기를,
"상에게 강력히 철회하기를 요청하는 일을 어찌 경들의 말을 기다려서 하겠는가. 도리로 따져보아도 어떻게 감히 곧장 요청하여 번거롭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옹원 도제조 김이소가 왕대비전에 아뢰기를,
"신이 전하의 전교를 받들고 방금 공상 물품을 모셔 올렸는데 지금 받아들이지 말라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이에 아랫사람의 마음에 애타는 정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이렇게 여쭈오니 특별히 받아들이시기를 천만 바랍니다."
하니, 언문으로 비답하기를,
"죄인이 성 안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되었는지 모르는 터에 지키는 사람도 없고 또 쫓아보내는 일도 없으니 조정의 처사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모든 공상하는 물건을 어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교하였는데 지금 왜 올리는가."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사옹원 도제조 김이소가 왕대비전에 공상 물품을 모셔 올렸으나 연거푸 받아들이지 말라는 전교를 받고 애가 타고 가슴이 막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면서 합문 밖에 나와 면대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자전의 마음을 애써 돌리게 하는 일에 대하여 어찌 경이 면대를 요청한 뒤에 청하겠는가. 모두가 나의 성의가 감동시키지 못하여 자전의 마음을 번뇌하도록 한 것이니 내 또한 무슨 마음으로 평상시처럼 잠을 자고 음식을 먹겠는가. 그리고 일의 체모나 도리에 있어 어찌 한 시각인들 날마다 올리는 공상을 지체할 수 있겠는가. 밤을 지새우며 지금까지 정성을 쌓아 권하였으니, 경들이 다시 나아가 봉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사옹원 도제조 김이소가 재차 왕대비전에 아뢰기를,
"신이 전하의 하교를 받았는데 다시 대비전에 나아가 공상을 봉하여 들이라는 전교였습니다. 늘상 드시는 음식을 들지 않으시므로 전하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시고 아랫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날마다 올리는 공상을 다시 봉해 가지고 왔으니 즉시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소서."
하니, 언문으로 비답하기를,
"나는 부녀자로서 지식은 없지만 국가를 위하여 피끓는 마음만은 이미 많은 날을 쌓아왔건만 조정에는 한 사람도 힘을 도울 자가 없다. 명색이 대신이라는 사람이 처음 와서 공상을 받아들이라고 청하였으나 나는 그래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종전대로 해내려온 어제 이전에는 참으로 한심하였다.
부녀자의 행동거지로 밖에 나가는 것이 괴이쩍기는 하지만 국가를 위하여 어제는 밤을 지새우며 내시와 액례들을 많이 보내어 죄인을 땅바닥에 꿇어앉히고 그의 죄를 조목조목 열거하고는 빨리 가도록 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때문에 오늘은 궁방(宮房)에서 말과 사람을 구하여 자전의 명으로 돌려보내려 한다고 하여 이미 길을 떠났다. 대전이 자전의 전교를 받들어 ‘성문 밖으로 내보내기는 하지만 전교를 하기 전에는 결코 보내서는 안 된다.’고 전교하였으므로,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한 채 아직도 그대로 있다고 한다. 제신들이 전교도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기는 어려우나 이런 때에도 힘을 쓰지 않겠는가. 대신의 거행하는 일이 연전에 비하여 영 못하다. 나를 너무 만홀하게 대하므로 자리에 있기가 부끄럽다. 무슨 생각이 있겠는가. 경은 그것을 알라."
하였다.
홍양호(洪良浩)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대사간 권유, 집의 신대윤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고 이조 참의 김이익이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창성위 황인점(黃仁點) 등이 상소하자, 봉하여 되돌려주라고 명하였고, 금은군(錦恩君) 박종규(朴宗珪) 등과 전 승지 한만유(韓晩裕), 거상 중인 신하 신헌조(申獻朝)·정내백(鄭來百)·장석윤(張錫胤)이 상소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지방의 유생인 진사 서정보(徐鼎輔) 등과 유학 강석보(姜錫輔) 등이 상소하니, 모두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오위 장 이영철(李永喆) 등과 각 군영의 초관(哨官) 등 및 시민(市民)과 공인(貢人) 등이 상소하니, 모두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각신 김재찬(金載瓚) 등이 상소하기를,
"길거리를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서로 전하는 말을 들으면, 자전은 흉적을 내쫓게 하여 흉적이 이미 길거리로 나왔는데 상이 곧바로 머물러 두라고 명하였다 합니다. 아, 우리 전하의 너무나도 지나친 조치가 어떻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조정의 신하들이 미처 알지 못한 것을 자전이 먼저 알았고 조정의 신하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것을 자전이 혼자 처리하여 성 안에 들어온 역적을 거의 귀양지로 돌려보내게 되었는데, 이내 전하는 종묘 사직의 존망도 돌아보지 않고 사리와 체면이 전도되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자전의 명을 어기고 이런 조치를 취하기까지 하실 것을 신들이 어찌 꿈엔들 생각하였겠습니까.
아, 자전은 조정의 신하들을 깨우쳐 주었으나 조정의 신하들은 이를 잘 받들지 못하였고, 자전은 조정의 신하들을 지도하였으나 조정의 신하들은 받들어 거행하지 못하였기에 자전 혼자서 운용하고 혼자서 결단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전께서 그토록 노심 초사하여 진실로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나라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전하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극한 정성이 미치는 곳에 신인(神人)이 모두 울었건만, 자전의 뜻을 먼저 알아 받드는 전하의 효성으로써 이제 전혀 정상이 아닌 조치를 취하기까지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들은 오장이 타는 듯하고 정신이 황란하여 긴 말을 올릴 겨를이 없습니다. 이에 한 줌 몸 속의 피를 바쳐 땅에 엎드린 채 호소하오니 흉적을 넘기어 빨리 사형을 집행해서 위로는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온 나라 신민들의 소원을 따르소서."
하니,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강화부 유수 조윤대(曺允大)를 개차하고 의금부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윤대가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경기 감영에 거둥하였다. 상이 간편한 가마를 타고 궁궐을 나와 경기 감영에 도착하여서는 명하여 각 군영의 군사들로 감영의 담장 밖을 빙 둘러싸고 호위하면서 안팎의 문을 파수하여 뒤쫓아오는 백관들을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과거 응시를 금지당한 유생 민명혁(閔命爀) 등이 경기 감영의 문 안에 함부로 들어와서 상소를 올리니, 전교하기를,
"과거 응시를 금지당한 유생이 어떻게 감히 상소를 올리는가. 되돌려 주라."
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용보(徐龍輔)를 잉임시켰다.
전 좌의정 김이소가 면대하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소가 아뢰기를,
"방금 듣건대, 자전께서 사제(私第)로 거둥하겠다는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어찌할 바를 모를 일이며 이 무슨 광경입니까. 이 전교를 받고는 대소의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놀라 당황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효성으로써 어찌하여 이런 때의 이런 조치가 지극히 지나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종실(宗室)의 한 역적을 위하여 자전께서 사제로 거둥하겠다는 언문 전교를 받고서도 어찌 한 시각인들 지연시켜서 우리 자전께 종묘 사직을 위한 무궁한 걱정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즉시 어가를 돌리도록 명하여 자전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따라서 신에게 전하와의 접견을 허락하시어 피눈물을 다한 정성을 바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전의 전교라도 감히 받들지 못할 것이 있어 여러 날 정성을 쌓아 애써 마음을 돌릴 방도를 다하였다. 이때에 압송하여 돌려보내는 것을 중지시키는 조치는 털끝 하나 용납될 수가 없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서 돌아오는 것도 도리에 어긋난다. 또 오랫동안 막혀 있던 나머지 급히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전도된 처사인 줄을 알면서도 의위(儀衛)를 차리지 않고 이곳에 쫓아와서 한나절 동안 회포를 푸노라니 이제야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 같다. 또한 이미 그를 그의 집으로 먼저 보냈으니 이제 곧바로 환궁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승지를 보내어 자전에게 품지한 말이 있으니 응당 그가 와서 답한 전교를 전달받은 다음에 돌아가겠다. 경은 죄명을 입은 몸으로 규정을 어기고 면대를 청하였으니 나라의 체통에 크게 관계된다. 속히 물러가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내일은 의당 통유(洞諭)할 내용이 있으니, 고양(高陽)에 부처한 두 대신과 강극성(姜克成) 이외의 경재 이하 귀양보낸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여 내일 통유할 때에 맞추어 와서 대기하도록 하라. 그 나머지 성문 밖으로 축출한 사람들도 놓아보내라."
환궁하였다.
의금부에 수감한 모든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각신·승지와 약원·삼사의 관원들이 합문 밖에 나아와 아뢰기를,
"아까 내린 전교를 보고 이미 흉적이 성문 안으로 도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재 위급한 사기(事機)가 더더욱 급박하기에 와서 면대를 청합니다."
하니, 모두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죄를 진 신하 김이소가 말하기를 ‘아까 내린 비답에서 이미 그의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전교를 받고 모골이 송연해지고 가슴이 찢어지려고 한다. 규정을 어기고 면대를 요청한 것이 나라의 체통에 관계되기에 지극히 황송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라의 위태로움이 털끝 하나 용납할 틈도 없을 정도로 다급하기에 신은 감히 죄인으로 자처할 수 없어 이렇게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면대하기를 요청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이소가 제신들을 거느리고 합문 밖에 엎드려 다시 아뢰자, 전교하기를,
"내일 통유하겠다는 명이 이미 있었는데도 지금 어째서 이처럼 번거롭게 하는가. 하룻밤 사이에 무슨 조금도 늦추지 못할 일이 있기에 밤을 지새우며 합문에서 대기까지 하는 것인가. 만일 다시 면대를 요청하거나 이런 계사를 받아들이는 일이 있으면 사알(司謁)을 응당 엄하게 처분하겠다."
하였다. 이소가 제신들을 거느리고 왕대비전의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대체로 면대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대비에게 아뢰려는 까닭에서였다. 전교하기를,
"밤 시각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제신들이 이런 일을 가지고 다시 자전을 번거롭게 하니, 명분과 의리에 있어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만일 즉각 물러가지 않는다면 올리는 공상을 당장 도로 내려보내겠다."
하였다.
4월 14일 경오
각신·승지·삼사의 관원들이 면대하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죄를 진 신하 박종악·김이소·김희가 백관들을 거느리고 면대를 요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면대를 요청한다는 것은 침실 안으로 불러서 접견해주기를 청함을 이르는 것이다. 백관들은 침실 안으로 거느리고 들어올 사람들이 아닌데도 면대를 요청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매우 성의가 없는 짓이다. 이 계사를 내어주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일전에 문을 밀치고 들어왔던 3품 이하의 관원들이 모두 합문 안에 들어왔는데 어찌 이러한 기강이 있단 말인가. 그들이 들어오더라도 아무 유익한 것이 없을텐데 반드시 불법을 무릅쓰고 마구 들어오려고 하였으니, 백관들 이하 아전이나 백성들도 앞으로 차차 들어올 것인가. 《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이 전교를 베껴 넣고 만일 이를 범하는 자가 있거든 함부로 들어온 형률[攔入律]을 적용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오늘의 행위는 전도되었다고 할 만하다. 백관들을 모두 이미 내보냈다고 하였는데 내보낸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다. 그러나 백관들이 나가거나 들어오는 것도 원래 가벼운 일이 아닌데 까닭없이 잠깐 들어왔다가 금새 나가게 하는 것이 어찌 전도된 일이 아닌가."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죄를 진 신하 박종악 등이 말하기를 ‘현재의 사기는 더욱 위급해졌다.’고 하면서 2품 이상의 관원들을 이끌고 와서 면대를 요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어제 통유하겠다는 명이 있었으니 불러서 접견하기를 기다려야지 어찌 이처럼 면대를 청할 수 있는가."
하고, 또 전교하기를,
"면대를 요청하는 계사를 만일 다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으면 사알(司謁)을 응당 엄히 처벌할 것이다. 선전관이 합문 밖에 서있다가 만일 사알이 받아들이는 자가 있거든 곧장 도로 내어주고 훈련 대장은 모화관(慕華館)에서 조리를 돌리도록 하라."
하였다. 어영 대장 이경무(李敬懋)가 면대하기를 요청하자, 전교하기를,
"걱정스럽고 분개하여 면대를 요청한다는 등의 말이 《병학지남(兵學指南)》에 씌어있는가? 무신이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속히 나가라."
하였다.
어제 전교한 중에서 놓아보내라고 한 여러 사람들을 모두 분간하였다.
개성부 유수 이병정(李秉鼎)이 상소하였으나 비답하지 않았고 면대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이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그 사람의 허물을 보고 어진 사람인가 어질지 않은 사람인가를 안다.’는 뜻을 《논어》의 공자 말씀에서 취하겠다."
하였다.
한성부 판윤 유당(柳戇)과 거상 중인 신하 한용귀(韓用龜)가 상소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전 교리 최헌중(崔獻重) 등과 과거 응시를 정지당한 김후연(金厚淵) 등이 상소하니, 모두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전 판부사 박종악과 김희의 상소문을 봉하여 돌려주었다.
제신들의 상소문을 모두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대신과 경재들을 소견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신·경재·삼사의 관원들이 먼저 입시하고 3품 이하의 관원들은 협양문 밖에서 대기하라."
하였다. 상이 판중추부사 박종악 등에게 이르기를,
"통유하겠다는 일을 어제 이미 하교하였다. 오늘 경들을 만나려는 것은 별다른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면대하여 타이르려는 것이다. 이번의 조치가 지나치다는 것은 나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 또한 스스로 충분히 헤아려서 한 것이다. 다만 그 중간의 광경이 매우 좋지 못하여 빨리 결말을 매듭짓는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자전의 훌륭한 덕은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경들이 반드시 인식할 것이다. 어찌 혹시라도 자전의 전교가 합문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었던가. 이번에 탕약도 드시지 않고 언문 교서를 여러 차례 내린 일에 있어서는 모두 내 탓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나 역시 스스로 그 잘못을 알고 있다. 그러니 자전의 전교가 한 번 내렸을 적에 나의 송구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현재의 제일가는 의리는 자전의 마음을 순하게 받드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어제부터 이미 수라와 탕약을 드시고 있다. 내가 어찌 필경에는 자전의 전교를 받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런 조치를 하였겠는가. 지난해 강교(江郊)에서 소견한 것처럼 하는 것도 괜찮겠으나 그의 가족들까지 함께 거느리고 오게 한 것은 역시 내가 마음과 힘을 쓴 것이 많았는데 지금에 와서 벌어진 광경은 내가 어찌 난처하지 않겠는가.
방금 되돌려 보내려던 차에 자전의 전교를 받들었는데, 나 역시 앞으로 확실하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면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다만 경들에게 한 마디 물어 볼 말이 있다. 나의 심정에 있어 올해를 맞이하여 더욱 어떠하겠는가. 그 말을 다 하려고 하면 혹 놀라운 일이 일어날 듯하다. 오직 한 가닥 마음을 위로할 길이 있으니 매년 한 번씩 데려다가 만나는 것인데 만나고는 즉시 내려보내서 이렇게 일정한 법으로 삼으면 공적인 의리와 사적인 은혜가 둘 다 행해지게 될 것이다. 경들이 만일 이렇게 하는 것을 괜찮다고 한다면 의당 즉각 돌려보낼 것이고, 경들이 만일 이 한 가닥의 길도 열어주지 않는다면 끝내 돌려보낼 수가 없다. 경들은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또 경들의 체면과 도리에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매번 자전께 고해서는 안 된다. 한 번은 그래도 괜찮겠지만 두 번 세 번씩이나 해서야 되겠는가. 경들은 또 생각해 보라. 세월은 쉽게 흘러간다. 내년이나 내후년에 해마다 한 번씩 만나 볼 기약이 있으면 설사 오늘 내려보내더라도 나의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한 가닥 길마저도 불가하다고 한다면 경들은 기필코 내려보내려고 할지라도 나는 기필코 내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또 내가 이미 내려보내겠다는 뜻으로 자전께 고하였으니 경들이 속히 내려보내게 하려면 당연히 이 한 가닥의 길을 열어주어야 할 것이다. 만일 혹시라도 이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끝내 돌려보낼 수가 없다. 자전께서 탕약과 음식을 들지 않은 지 오늘로 만 8일이 된다. 내가 안에서 할 직분을 다한다 하더라도 그 일의 체면에 있어서 어찌 지극히 송구스럽고 안타깝지 않겠는가."
하니, 종악은 아뢰기를,
"이번의 조치는 이 무슨 조치입니까. 전하께서 이미 자전의 분부를 받든다는 것으로 전교하고는 또 매년 한 번씩 만나는 것으로 신들에게 질문을 하시니, 만일 전하의 전교대로 한다면 자전의 분부를 받드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그의 죄역이 어떠하기에 버젓이 성 안에 들어오기를 거의 보통 사람처럼 할 수가 있습니까."
하고, 좌의정 김이소는 아뢰기를,
"이 역적이 아직까지 천지 사이에 용납을 받고 있는 것만도 벌써 말이 되지 않는데 또 어찌 시행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신들에게 묻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오늘 돌려보내는 것은 눈앞에 일시적으로 분부를 받드는 데에 지나지 않고 해마다 올라오게 한다면 이것도 자전의 전교를 받드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판중추부사 김희가 아뢰기를,
"오늘의 전교가 신들에게 미칠 줄은 뜻밖입니다. 자전의 전교를 받드는 일 이외에 만일 억만년 종묘 사직의 중함을 생각한다면 어찌 이런 전교를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한 대답은 진실로 성실한 도리가 아니다. 내년에 데려오는데 있어서 어찌 그 방법이 없겠는가. 경들도 거의 알겠지만 내가 지금 이 뜻을 가지고 미리 경들에게 질문하는 것은 내년에 데리고 올 적에는 다시 오늘과 같은 광경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경들의 대답한 말이 곧 이러하니 그렇다면 끝내 돌려보낼 수가 없다. 나의 생각은 애당초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경들이 한 해에 한 번씩 만나보는 길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돌려보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나의 사정으로는 참으로 원하던 것이다."
하니, 종악 등이 일제히 같은 소리로 아뢰기를,
"갔다가 다시 오게 되면 결국 자전의 전교를 받드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내려보내겠다는 뜻으로 자전께 딱 잘라서 말씀을 올렸으나 이제 돌려보내지 못하게 된 것은 바로 경들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자전의 전교를 받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경들이 자전의 전교를 받들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니, 제학 정민시는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생각해보소서.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은 주공(周公)에게 있어서 유언 비어를 퍼뜨린 죄가 있는 데에 불과하고 또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명분이 없는데도 오히려 용서하지 않고 죽였습니다. 더구나 오늘 역적 이인(李䄄)의 죄는 비단 유언 비어를 퍼뜨린 데에 그칠 뿐만이 아니니 단지 주공에 대한 관숙과 채숙으로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한 해에 한 번씩 만나본 조치가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고 역사서에도 이미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비록 시행하려고 해도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놓았는데 신들이 어찌 전하의 마음을 인식하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오늘 내린 전교는 진실로 이른바 받들어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사직 서유방은 아뢰기를,
"시행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감히 받들어 행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이 일은 시행할 수 있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은 설사 자전의 전교를 받들었다 하더라도 내년에 다시 올 적에 자전의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하고, 예조 판서 홍양호 등은 아뢰기를,
"이 전교는 진실로 전하에게 바라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 역적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숨을 쉬게 해주고 이런 전교까지 받게 한 것은 모두가 신들의 죄입니다."
하고, 각신 서용보(徐龍輔) 등은 아뢰기를,
"이 역적을 아직까지 같은 하늘 아래서 살게 한 것은 신들의 죄이기는 하지만 오늘 어찌 이런 전교를 내릴 수가 있습니까. 진실로 전하께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외면적으로 자전의 전교를 받드는 것이 어떠한가를 따지는 데 지나지 않으면서 이렇게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이다."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신들이 비록 짐승과 같으나 어떻게 이처럼 하교를 할 수가 있습니까."
하고, 제신들은 일제히 같은 소리로 아뢰기를,
"다만 자전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만을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자전의 마음이 벌써 기뻐하고 계시다."
하니, 이소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내려보내겠다고 여쭈었기 때문에 자전의 마음이 기뻐하는 것이지만 만일 해마다 올라오도록 한다면 자전의 마음이 그때도 기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한 번씩 잠시 만나본다는 것으로 경들에게 요청하였으나 경들은 또한 들어주지를 않으니, 그렇다면 상하가 서로 버티기를 마치 요즘 대간이 아뢰는 글을 묵은 종이에 베껴 올리는 것같이 하자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사정에 있어서는 다행이라고 이를 만하다. 또 그를 두고 말하자면 어제 만나보았더니 겨우 살가죽만을 보존하고 있으므로 내려가거나 여기 머물러 있거나 도무지 관계될 것이 없었다. 애당초 데리고 오게 한 뜻에 비하면 지금 돌려보내는 것도 걸맞지 않는 일이지만 한 해에 한 번 만나겠다는 뜻은 사사로운 정을 공법(公法) 밖에서 펴자는 것이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서글퍼진다."
하니, 김희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끝내 사(私) 한 글자를 끊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매번 이런 조치가 있는 것입니다. 빨리 사 자를 제거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를 데려올 당시에 떳떳한 법으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잘못된 조치로 돌아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만일 한 해에 한 번 만나보는 일을 경들에게 허락을 받는다면 오늘 이후 데려올 때에는 내가 지나친 조치를 취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조정도 소란이 일어나는 단서가 없게 될 것이니 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이른바 한 해에 한 번씩 만나보는 것도 오히려 지나치다고 한다면 비록 순간적으로 잠시만 만나보아도 오히려 나의 마음은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청하는 것은 이런 것에 불과하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이것은 역사서에도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자전의 전교를 순하게 받드는 도리로써 처음에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지금 즉시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경들 때문이다. 자전께서 만일 이 일로 인하여 다시 탕약과 음식을 물리친다면 경은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또 말하겠다. 경들이 설사 한 해에 한 번씩 만나보는 길을 허락하지 않더라도 마치 죄인을 압송해 오는 모양으로 데려온다면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지나친 조치에 가까운 듯하기 때문에 경들에게 청하는 것이다. 경들이 나의 뜻을 분명히 알면서도 오히려 순편한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그저 지나친 조치만을 취하도록 하고 있으니 조정에 만일 나라를 몸과 같이 생각하는 신하가 있다면 진실로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니, 민시와 유방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하들에게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였다면 어찌 이런 전교를 내렸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끝내 전교를 받들 사람이 없다는 것인가?"
하니, 대신 이하가 모두 일제히 같은 소리로 아뢰기를,
"누가 감히 받들겠습니까."
하였다. 어영 대장 이경무(李敬懋)와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가 말하기를,
"신들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어떻게 감히 이런 전교를 받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경무 등에게 이르기를,
"경은 단지 무경(武經)만을 알 뿐이거늘 어떻게 역적을 성토하는 일을 알겠는가."
하였다. 종악은 아뢰기를,
"사람은 모두 떳떳한 본성이 있는데 어찌 무신이라 하여 역적을 성토할 줄 모르겠습니까."
하고, 정언 안정선(安廷善) 등은 말하기를,
"조정에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신들을 삼사의 관원으로 대우한다면 어찌 이런 전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남의 말을 따라 할 수 있는가."
하였다. 정선 등이 말하기를,
"이 역적이 한 번 섬에서 나오자 온 나라가 몹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만일 제 마음대로 왕래하도록 하면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이 당장에 오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주장하는 것은 오직 공법(公法)일 뿐입니다. 자전의 뜻을 체득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끊어버리고 의리로 처단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관이 아뢰기도 전에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하였다. 사직 김이성(金履成)이 말하기를,
"오직 자전의 전교를 받드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들어보아라. 위로는 자전의 전교를 받들고 아래로는 뭇사람들의 마음을 따르면서 그 중간에 나의 자그마한 사삿정을 끼워넣는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한 해에 한 번 만나보는 것은 애당초 영영 데려오려던 본의에 비하면 단지 맨 끝에서 맨 끝이며 가장 아래에서 가장 아래인 정도일 뿐만이 아니다. 세상에 어쩌면 국가를 몸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다만 삼사가 한 차례 합계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꺼내려고 하지 않으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개성부 유수 이병정(李秉鼎)이 아뢰기를,
"역적의 정도가 저러한데 상께서 시행할 수 없는 일을 시행하려고 하시니 누가 그 전교를 받들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권도(權道)인데 권도를 써서 도리에 맞기만 하면 경도(經道)에 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민시 등이 아뢰기를,
"역적에 대하여 어찌 권도를 쓸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경도를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그르다고 여기지 않으나 또한 부득이 권도를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경들은 고상(故相) 최명길(崔鳴吉)의 일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그가 어찌 화의(和議)를 하는 일이 척화(斥和)를 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몰라서 삼학사(三學士)같이 되지 못하였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경도를 지킬 적에도 권도를 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대신과 제신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들이 오늘 끝까지 주장하는 것도 나라를 위해서 하는 것인가."
하고는 그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렸다. 종악 등이 관을 벗고 울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 한 명의 역적 종실을 위하여 이런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리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사 일반의 필부(匹夫)일지라도 이런 말을 쉽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고인의 ‘종묘(宗廟)의 태후(太后)에 어찌하랴.’라는 말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스스로 경솔하게 하려고 하였겠는가. 나의 마음이 너무도 상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입에서 튀어 나온 것이다. 경들은 어찌하여 나의 몸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가. 고상은 종묘 사직을 위하는 일 때문에 스스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삼학사를 잡아 청나라로 보냈었다. 오늘 제신들이 모두 나의 전교를 받들어 행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권도를 따르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내가 다시 말하려고 하면 나는 본디 가슴 치미는 증세가 있으므로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동짓날 큰 예식을 강정(講定)할 때 내가 놀라운 행동거지를 했다는 것은 경들도 보고 들었을 것이다. 오늘 한 말은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비교하면 오히려 구차스럽게 데려오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털어서 말하였건만 한 사람도 마음을 다 털어놓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의 조정 형편을 또한 알 만하다. 경들은 거의 나의 마음과 근력이 어떻다는 것을 알 것이다. 밤낮없이 8일 동안 이렇게 하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경들은 경들의 몸만을 돌아본 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것인가. 인정에 크게 어긋난다. 나는 비록 스스로를 가볍게 여긴다 하더라도 경들이 어떻게 이처럼 나를 대할 수 있겠는가. 빨리 제자리로 나아가라."
하였다. 행 사직 정창순(鄭昌順)은 아뢰기를,
"신이 우리 전하를 섬긴 것이 동궁(東宮)에 계실 적부터 지금 30여 년이 되었는데, 정령을 내리고 조치를 취하는 즈음에 한 번도 잘못된 조치를 행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한 역적 종실로 인하여 지나친 조치가 자주 반복되면서 종묘 사직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애틋한 자전의 전교를 생각하지 않으니 신은 이런 점에서 진실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고, 사직 이문원(李文源)은 아뢰기를,
"이 역적은 아주 큰 역적입니다. 자전의 언문 교지가 설사 지나친 조치가 있을지라도 오직 받들기에 겨를이 없어야 될 터인데 더구나 종묘 사직을 위하고 전하의 몸을 위한 일념에서 나온 간절하고 애틋한 말씀인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요즈음의 광경은 평지에 난리가 일어난 듯 온 조정이 들끓고 있으니 전하는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상이 승지 서영보(徐榮輔)에게 전교하기를,
"승지는 합문 밖에 나가서 아까 내린 전교를 가지고 3품 이하의 관원들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회주(回奏)하라."
하였다. 영보가 회주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마 나의 전교를 받드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니, 영보가 아뢰기를,
"오늘 신하된 사람으로서 누가 이 전교를 받들겠습니까. 합문 밖의 제신들은 모두 감히 받들지 못하겠다고 강력히 말하였으나 오직 이주혁(李周爀)이란 자가 있어 전교를 받드는 것이 옳다고 하니 지극히 흉측하고 패역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혁은 들어와 앞으로 나와서 자신의 소견을 갖추어 진술하라."
하니, 주혁이 아뢰기를,
"온 나라가 함께 주장하는 공론에 대하여 신이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전하께서 이 일 때문에 건강에 손상이 있게 된다면 신은 전교를 받드는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대신과 제신들이 일제히 같은 소리로 아뢰기를,
"지극히 흉악하고 지극히 놀랍고 통탄스럽습니다. 오늘날 북면(北面)하여 전하를 섬기는 신하로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삼사의 제신들은 앞으로 나서며 일제히 같은 소리로 아뢰기를,
"이같은 세변(世變)은 전고에 없었으니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한 사람의 기(夔)이면 족하다. 다른 말은 기다릴 필요가 없이 순조롭게 일이 잘 처리되었다고 할 만하다. 즉각 행장을 꾸려서 보낼 것이니 경들은 나가라."
하였다. 종악 등은 아뢰기를,
"내려보내는 한 조항은 순조롭게 잘 처리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주혁의 말을 따라 한 해에 한 번씩 데려다 만나는 일은 순조롭게 잘 처리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주혁의 말을 옳다고 여긴다면 신들을 어느 지경에 두려는 것입니까."
하고, 이소는 아뢰기를,
"내년에는 과연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나라의 체통인가. 어찌 대신으로서 내년의 일을 가지고 마치 강박하듯이 질문할 수 있겠는가. 임금과 신하 사이는 참으로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대사간 권유(權𥙿)는 아뢰기를,
"이 역적과는 하늘 아래 함께 살지 않겠다는 마음이 떳떳한 천성을 갖춘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혁의 이 말은 흉악한 역적의 속마음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먼저 안치하는 형률을 적용하소서."
하고, 정언 안정선(安廷善), 장령 이정운(李貞運), 지평 현중조(玄重祚)는 아뢰기를,
"어찌 단지 안치하기만 청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진상을 밝혀내지 않으면 난적들이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권유 등이 마침내 일제히 같은 소리로 아뢰기를,
"이주혁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분하게 여기는 때에 감히 기회를 넘보는 마음을 가지고 이런 흉측하고 패역스런 말을 하였으니 국청을 설치하여 진상을 밝혀내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시 말하지 말고 속히 자리를 물러가라."
하니, 교리 심흥영(沈興永)이 아뢰기를,
"이주혁은 천지간에 흉측하고 패역스런 사람입니다. 대간이 혹은 안치하자고 청하기도 하고 혹은 국청을 설치하자고 청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대간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킨 것입니다. 당해 대간에게 파직시키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였다. 상이 대답하지 않으니, 흥영이 아뢰기를,
"요즈음 역적을 성토하는 일이 엄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신하들이 충성스럽지 못하고 성의를 다하지 않는 데에 연유된 것입니다. 그러나 안치한 죄인 김종수(金鍾秀)에게 가시를 둘러쳐 막는 데 대한 계사(啓辭)를 윤허한 지가 지금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도사(都事)가 여태 떠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의 심정이 더더욱 분하고 억울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시급한 일이 아니나 의당 유의하겠다."
하였다.
중비(中批)로 이주혁을 승지로 삼았다가 조금 뒤에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피혐한 여러 대간들을 체직하였다. 대사간 권유(權𥙿), 집의 신대윤(申大尹), 사간 허질(許晊), 장령 이정운(李貞運), 헌납 심갱(沈鏗), 지평 현중조(玄重祚)·김희화(金熙華), 정언 안정선(安廷善)·윤행철(尹行喆) 등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이주혁의 흉측한 말을 직접 듣고 놀랍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국청을 설치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럿이 서로 번갈아가며 아뢸 적에 혹은 절도(絶島)에 안치하자고 하면서 잡다한 의견을 진술하게 되자 유신(儒臣)이 신들의 벼슬을 파직시키라고 요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전교하였다.
"조정 신하들의 모습이 어찌 그다지도 한심한가. 평상시 마음에 박혀 있는 주관이 없어서 일을 만나면 뒤죽박죽 엉망이 되니 놀랍고 거슬린다. 일전에 대궐문을 밀치고 함부로 들어온 일은 진실로 그 죄를 성토하려 하였으나 그에 따른 폐단이 적지 않겠기에 단지 말로 책망하여 신칙하고 그만두었었다. 그런데 어제 의금부 앞에서 보방(保放)된 여러 죄수들이 의금부의 문을 함부로 마구 나간 모습을 보고 그 까닭을 뒤미쳐 물어 보니 과연 경기 감영에 거둥했을 때 그 문 밖에까지 따라간 자들의 숫자가 많았다고 한다.
버들가지를 꺾어 채소밭의 울타리를 만들고 땅에 금을 그어서 제정한 감옥이라도 막아 놓은 한계가 한 번 정해지면 한 걸음도 감히 옮겨 놓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의금부는 그 체모의 엄중함이 어떠한 곳인가. 보증인을 세우고 석방된 죄수도 곧 현재 갇혀 있는 죄수이니, 애타고 급한 것은 급한 일이고 지켜야 할 도리는 도리인 것이다. 어떻게 감히 옥을 탈출하여 거리로 나가서 성 밖에까지 쫓아올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하는 짓을 그만두지 않으면 더없이 황급할 때에는 어기지 않을 분의가 없을 것이고 무너뜨리지 못할 법이 없을 것이다. 옛날 기자헌(奇自獻) 등의 일은 유독 원통하지 않겠는가.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내버려둘 수는 없다. 정원에서 자수를 받아 잡아다 신문하여 엄하게 처리하라. 그 당시 의금부의 입직했던 도사도 잡아다가 신문하여 엄하게 처리해서 퇴폐한 풍속을 격려하라."
오늘 이전의 일을 소장(疏章)에서 언급하는 것을 금지하는 금령을 거듭 내렸다. 전교하기를,
"다시 오늘 이전의 일을 가지고 번거롭게 떠드는 사람은 전에 내린 전교에 따라 심리하여 처리한다는 금령을 거듭 밝히노니, 정원은 이를 알아서 제신들에게 엄히 신칙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오늘 이전의 일을 한 글자 반 구절이라도 소장에서 언급하는 경우가 있으면 응당 금령을 거듭 밝혀서 각별히 처분하겠다. 대신이나 경재 이하의 관원들이 이런 상소나 차자를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수문장이 의당 군률(軍律)을 적용할 것이니 이 내용을 병조와 각사에 분부하라."
하였다.
시임과 원임의 각신들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아, 역적 이인을 서울에서 가까운 섬에 살려 두어 궁중의 재물을 허비하고 그곳을 왕래하는 길의 역참을 피폐하게 하면서 그의 아내와 자식들의 입고 먹는 자본을 대어주는 것은 이미 옛날의 글에도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가 마음대로 뛰쳐나와 몰래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을 아주 다급하게 만들고 온 나라 사람들을 몸둘 바를 모르게 한 경우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매번 비정상적인 조치와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온 세상 사람들을 위협하고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아, 조치가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지금이 지난날보다 더 심하여져서 이번의 조치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을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기 때문에 바로 이번의 연교(筵敎)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일찍이 흉악한 역적을 데려다가 만나는 것을 해마다 정기적으로 하면서 뭇신하들에게 감히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쫓아보내는 조치를 앞으로 데리고 올 발판으로 삼고는 두 가지 조건을 만들어가지고 핍박하여 마지않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눈치를 보고 견제당하여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천리와 인심에 찾아보아 결코 시행할 수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신들로 하여금 받들어 행하게 하시니, 천지처럼 크신 전하의 덕에 유감이 없지 않습니다. 다시 굽어 살피시어 종묘 사직이 편안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도록 하소서."
하니, 차자를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귀양 보낸 각신들을 강화부에서 도로 귀양지로 떠나보내라."
하였다가 이윽고 분간하라고 명하였다.
협양문(協陽門)에 나가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와 어영 대장 이경무(李敬懋)를 잡아들여 엄하게 꾸짖고 유대는 곤장을 친 다음 강화부에 충군(充軍)하였다. 유대 등이 장교와 군졸을 풀어서 죄인 이인(李䄄)의 행동을 탐지하였기 때문에 이 명을 내리게 된 것이다.
4월 15일 신미
명하여 성균관 유생들에게 응시 자격 정지시킨 것을 해제하고 다시 들어오도록 권고하게 하였다.
4월 16일 임신
승지 이익운(李益運)을 강화부에 귀양보냈다. 그러자 익운이 상소하기를,
"14일에 금령을 내린 이후로 조정이 마침내 조용해졌습니다. 신 또한 조정의 한 관원이니 모든 조정의 명령에 대해서 분의상 성실히 준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의 경우는 종묘와 사직이 반드시 위태로워질 형세가 있고 국가가 반드시 망하게 될 기틀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미 종묘 사직이 반드시 위태로워지고 나라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을 눈으로 보고 마음속으로 알았으니, 그렇다면 의당 명백하게 한 번 죽어서 그 위태롭게 되는 형세와 망하게 되는 기틀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이 한 몸의 목숨이야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여길 수 있는데, 또 어찌 금령을 돌아보겠습니까.
만일 남쪽과 북쪽의 우환이 당장 눈앞에 닥쳤는데 전하께서는 그 환란의 기틀을 살피지 못하고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여 금령을 내려서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더라도 아랫사람들 또한 금령이 있다고 해서 간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의 일은 그 위급함이 남쪽과 북쪽의 우환보다 10배도 넘습니다. 신은 아침에 글을 올리고 저녁에는 극형을 받아 길 가에 묻힌다 할지라도 옛사람의 죽음으로 간하던[尸諫] 의리를 본받고자 하여 이에 감히 피눈물을 머금고 충성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신의 몸은 죽일지언정 신의 말만 들어주신다면 신은 죽어도 사는 것이나 같을 것입니다.
아, 역적 이인을 다시 강화도에 귀양보낸 것은 마치 심장을 가로지른 해묵은 회충이 달콤한 약을 받아먹고 잠시 하초(下焦)로 내려감으로써 사람이 잠시 동안 겨우 숨을 쉴 만하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회충이 치받고 올라오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환자가 의원을 꺼리고 약을 물리쳐서 병의 뿌리를 철저하게 제거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역적 행위의 근원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임자년 겨울에 대략 말씀을 진술했었거니와, 오직 전하의 잘못된 처사는 참으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릴 일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경기 감사와 강화 유수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잡아온 것입니까. 그들 자신에게 죄가 없고 나라로 보더라도 법이 아닌데, 전하께서 어떻게 법이 아닌 일로 무죄한 신하에게 강제로 처벌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사로운 생각이 한 번 일어나면 이를 억제하지 못하시니, 큰 성인의 함양(涵養) 공부가 진실로 이런 것입니까. 그리고 대신(大臣)과 각신(閣臣)은 전하께서 어찌하여 귀양을 보냈습니까. 화단의 기미를 환히 알고 사전에 대책을 취하자고 한 말을 억측으로 돌리셨는데, 이제와서 보건대 과연 억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죄없는 사람에게 불법으로 처벌하는 일은 비록 상대가 일반 백성이라 할지라도 왕자로서 의당 신중히 해야 하는 법인데, 더구나 일찍이 예로써 대우하던, 국가와 한 몸이 된 원로 대신들과 기쁘고 슬픔을 나라와 같이 해야 하는 측근의 문학지사들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역적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고 충신들에게는 위벌을 내리시니, 전하의 형정(刑政)이 과연 중도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친위병과 액정서의 무리들이 문 지키는 사람을 죽이고 목책을 헐어버렸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시키셨습니까. 전하께서는 강도(江都)의 목책을 헐어버리는 것을 마치 적(敵)의 보루를 공격하듯이 하여, 온갖 계책을 내는 데에 지나치게 생각을 쓰고 계십니다. 이것이 한때 사사로운 정을 펴는 데는 혹 뜻대로 될 수도 있겠지만, 유독 후일에 있을 끝없는 폐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가령 일종의 도적 무리가 친위병이나 액정서의 소속 하인으로 가장하고서 역적 인을 빼내어 어두운 밤에 날뛰고 다닌다면 강도 사람들이 어떻게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모골이 다 송연해집니다.
그리고 무부(武夫)들이 관문을 기찰하고 위졸(衛卒)들이 칼을 빼들고 궁문을 지키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입니까. 이는 전하께서 장신(將臣)이나 병조(兵曹)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도록 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로 아주 하천한 졸개들에게 사사로이 약속을 하신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임금의 기강이 땅에 떨어지고 국가의 체통이 낮아져버렸습니다. 더구나 칼을 빼드는 의도는 장차 사람을 찌르려는 것인데, 설령 무식한 무부가 전하의 명령 받들기에 급급하여,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가는 한 신하를 찔러 죽였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자를 죽였다는 오명을 전하께서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경기 감영에 거둥하셨는데 어찌하여 이런 지나친 행동을 하셨습니까. 임금이란 일동 일정(一動一靜)에 모두 위의가 있어 수레의 방울 소리가 추주(趨走)하는 채자곡(采齊曲)의 리듬에 맞아야 하고, 왼쪽에서는 갈도를 하고 오른쪽에서는 벽제를 하며, 의장대가 앞에서 인도를 하고, 무기를 휴대한 군사가 빙둘러 옹호를 하는 것이니, 이는 보기에도 성대하게 하면서 뜻밖의 사변에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허둥지둥 보련(步輦)을 타고 갑자기 성문을 나섬으로써 말탄 군사 하나도 따르지 못하고 수행하는 백관도 구비되지 못했으니, 의장이나 차림새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몸을 아끼는 정성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고인이 이른바, 유독 종묘와 사직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 말이 바로 오늘의 전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상과 같은 거조는 비록 천백 년 만에 한 번 있었다 할지라도 역사에 기록되어 막대한 결점이 되는 것인데, 더구나 해마다 한 번씩 되풀이하여 그것을 떳떳한 일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해마다 한 번씩 만나보겠다는 하교를 하셨는데, 전하께서는 또 어찌하여 그런 망발을 하셨습니까. 역적 인은 죄악이 넘쳐서 실로 반시각도 천지간에 살려둘 수 없는 처지이고 보면, 속히 나라의 공론을 따라 쾌히 왕법(王法)을 바로잡는 일이야 더이상 논의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에 자전(慈殿)의 분부에 못이겨 그를 다시 강도로 돌려보내는 것을 마치 사사로운 정을 끊고 국법을 제대로 시행하여 뭇신하들의 소망에 부응한 것처럼 여기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뭇신하들에게, 민망히 여기는 마음에서 염려를 풀고 ‘해마다 한 번씩 만나보겠다’는 하교에 대해서도 다시는 쟁집(爭執)하지 않기를 요구하심으로써 상하가 서로 버티는 것으로 하나의 흥정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뭇신하들이 어찌 이것을 가지고 족히 분을 풀고 걱정을 잊을 수 있다고 여겨서 의리에 어긋나는 명령을 그대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뭇신하들은 평상시 그의 고기를 씹고 그의 가죽을 깔고 자며 한 하늘 아래 같이 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의당 백 번 죽어도 뉘우침이 없이 결코 그 명령을 받들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저 적신(賊臣) 이주혁(李周爀)만은 몸을 빼내 반열에서 튀어나와서 저 흉악한 역적을 두둔하였습니다. 신은 그의 이런 꼴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를 발길로 차서 거꾸러뜨리고 손으로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역적 인이 한 번 머리를 내밀자 간기(簡驥)가 나왔고 재차 움직이자 이제는 주혁이 나왔습니다. 비록 이 일만으로 미뤄보더라도 변란의 근원이 잠재해 있고 흉악한 무리가 곁에서 틈을 엿보고 있어 그들이 기회를 타서 불쑥 튀어나왔다 하면 국가의 깊은 우려가 되는 것은 참으로 불을 보듯 명백한 일입니다.
비록 그 자리에서 국문을 하고 속히 처자까지 모조리 죽이는 형벌을 썼더라도 오히려 그 죄의 대가를 치르기에는 부족할 것인데, 승지로 발탁시키고 병마 절도사를 제수하여 마치 공로가 있는 자를 포상하듯이 함으로써 충신과 역적이 혼동되고 형벌과 상이 문란해졌습니다. 전하께 누를 끼치는 일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아직도 이런 잘못이 끝내 나라를 위망하게 하는 장본인 줄을 분명히 모르시기 때문에 전혀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사사로운 생각을 마음대로 행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깔보아 오직 자기 뜻대로 억누르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니 참으로 위망의 형세와 기틀을 통찰하신다면 신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반드시 그 화단의 괴수를 처단하고 여러 역적 무리들을 처벌하여 없애 나라의 형세를 태산 반석처럼 튼튼하게 하실 것이니, 신이 또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신은 다년간 가까이 모시던 사람으로서 저도 모르게 목을 놓아 통곡을 하면서 지금 당장 죽어버리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대궐문은 또 막히어 호소할 길이 없었다가 승지에 제수하는 명이 이런 때에 갑자기 내렸으니, 신은 참으로 조복(朝服)을 차리고 다시 향안(香案)의 앞에 끼어 앉을 뜻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만 말씀 한 마디를 올리고 죽는 것을 곧 은명(恩命)에 숙배하는 것으로 삼아 이에 전하의 결점을 바로잡는 정성을 진술하였으니, 신은 비록 이 일로 만 번 죽음을 받더라도 또한 좋은 곳으로 가듯이 웃음을 머금고 죽을 것입니다."
하였다.
명하여 전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전 영부사 채제공(蔡濟恭)에 대한 부처(付處) 이하의 율명(律名)은 모두 분간(分揀)하도록 하고, 인하여 당일에 도성으로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의금부에 현재 갇혀 있는 죄수 서매수(徐邁修) 등을 분간하고, 김이성(金履成) 등은 죄상을 조사하고 석방하였다. 의금부가 서매수·김이성 등의 원정(原情)을 가지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대단히 황급한 때였기 때문에 원정을 들어보고 죄를 정하고자 하여 이렇게 잡아다가 사실을 조사 신문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만일 평상시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곧장 해당 월옥률(越獄律)을 시행하였지, 무엇하러 조사하고 안하고를 논하겠는가. 여기 여러 공초를 보니, 서매수와 홍의호(洪義浩)는 다만 의금부의 문 밖에 나갔다고 하였으니, 만일 이번의 특별 하교가 아니었다면 즉시 해당 지역에 보방(保放)되었을 것이다. 조금이나마 용서할 만한 점이 있으니 우선 분간하여 내보내라. 이밖의 두어 죄수들의 공초에 대해서는 의금부의 문 밖과 성문 밖을 구별하지 말고 다시 조사하여 각각 같은 죄로 조율하라. 그리고 그 나머지 여러 죄수들은 월옥의 본률에서 세 등급을 감하여 처단하되, 그때에 곧 해당 당상관에게 자수한 자에 대해서는 다시 한 등급을 더 감하라. 새벽이 다 되었으니 즉시 조사하여 석방하라."
하였다.
4월 17일 계유
영의정 홍낙성,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 좌의정 김이소(金履素), 영중추부사 김희(金憙)가 합문에 나아가 면대를 요청하니, 전교하기를,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나에게 다시 끄집어내도록 하려는 것인가. 물러가라."
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용보가 아뢰기를,
"강화부의 중군(中軍) 오재중(吳載重)과 경력 이속(李涑)의 첩정(牒呈)에 ‘내수사의 별제 고응락(高應洛)과 임익현(林益鉉)이 죄인 인을 데리고 이달 15일 유시(酉時)에 본부(本府)에 도착하였으므로, 이전대로 다시 전일에 머물던 곳에다 두었다.’고 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그 사실을 알리는 문적(文跡)이 없었는데, 어찌 감히 문적으로 보고를 해온단 말인가. 경력과 중군 자리를 비워서 대신 임명하도록 하고,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고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8일 갑술
윤행원(尹行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19일 을해
좌의정 김이소를 장성부(長城府)에 귀양보냈다. 전교하기를,
"대궐문을 밀어젖히고 들어가는 일은 옛사람도 행한 자가 있었는데, 이보다 더 심하게는 임금의 곤룡포 자락을 부여잡기도 하고 거둥하는 임금의 말고삐를 잘라버린 자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의당 그래야 할 때에 과감히 그렇게 하였고 그토록 임금을 범하면서도 신하의 분의를 범하는 데는 이르지 않았었다. 그런데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신하의 분의를 다하지 못하고 분의를 범할 경우에는 그 죄는 나라의 일정한 형벌을 굽혀서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려있을 때에는 이따금 옛사람이 한 일을 본받기는 하였으나, 그 일이 지나고 나서는 죽을 죄를 추후하여 청하면서 벌벌 떨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었으니, 이는 참으로 신하의 의리로서 단지 떳떳한 법칙만을 알 뿐이요 이밖의 일은 말할 것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달 초 10일에 있었던 일은 분의를 범한 것인가, 분의를 다한 것인가, 또는 의당 그래야 할 때에 과감히 그렇게 하여 곧 옛사람의 이미 행한 일을 한 것인가. 그후에 대궐문을 마구 밀치고 들어온 것이나 의금부의 문을 뛰쳐 나온 것 정도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이른바 최초에 대궐문을 밀어젖힌 행동으로 보아서는 조정이 지금까지 존재하며 임금이다 신하다 하는 것만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때로 말하자면 합문도 닫지 않았고 면대를 요청한 것도 두세 번을 넘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무엄하고 망측한 행동을 자행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모두 놀라게 하고는 억지로 옛사람과 같이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간 것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옛사람이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갔던 본뜻이 아니고, 다만 조정을 욕되게 한 짓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여러 사람들이 다 보고 들었으니 어찌 여러 말을 기다려서야 알겠는가. 무너지는 기강에 대해서 일체 무너지는대로 내버려두고 다스려 정돈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니, 그러고도 조정이 있고 임금이 있고 신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현임 정승은 반열이 규장각·승정원·옥당·대간의 우두머리에 있는 사람이니, 의당 그에 대한 죄를 받아야 한다. 좌의정 김이소에게 먼 곳에 귀양보내는 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제주 목사 심낙수(沈樂洙)가 장계하기를,
"영주관(瀛洲館) 동편에 누관(樓觀) 하나를 지어 대일관(大一觀)이라고 편액을 걸고 이곳에다 신축년과 계축년에 내려보낸 윤음과 어제(御製)의 책문을 봉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부터 어사(御史)가 가지고 온 윤음과 유서(諭書)는 객사(客舍)의 동쪽 협실의 벽장에 소장되었는데, 신이 이를 내다가 검열해보니 최근 30년 전의 것은 모두 유실되었고, 숙종조의 을묘·병신년과 선왕조의 계축·계미년의 윤음 네 통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별도로 칸을 만들어 봉안하고 유사(有司)를 정하여 잘 수호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하유하기를,
"숙종조의 을묘·병신년과 선왕조의 계축·계미년의 윤음은 내가 받들어 보고자 하니 한 책으로 정서(精書)하여 별도로 상자에 넣어서 올려보내라."
하였다.
4월 20일 병자
병조 판서 이명식(李命植)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그를 윤허하고, 명하여 전 판서 정창순(鄭昌順)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경일(李敬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재찬(金載瓚)을 형조 판서로, 구상(具庠)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4월 21일 정축
윤대하였다.
1백 8세 된 노인 도총관 이동형(李東馨)을 불러 접견하고 연로(沿路)에 명하여 역말과 음식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제주 어사 심낙수가 유생들을 시험하여 뽑고 그 시권(試券)을 수합하여 올려보내니, 상이 친히 과차(科次)를 매기었다. 논(論)으로 수석을 차지한 대정현(大靜縣)의 유학 변경붕(邊景鵬), 책문(策文)으로 수석을 차지한 정의현(旌義縣)의 유학 부종인(夫宗仁), 시(詩)로 수석을 차지한 정의현의 유학 고명학(高鳴鶴), 부(賦)로 수석을 차지한 제주의 유학 홍달훈(洪達勛), 명(銘)으로 수석을 차지한 제주의 유학 이태상(李台祥), 송(頌)으로 수석을 차지한 제주의 유학 정태언(鄭泰彦)에게는 모두 전시(殿試)에 직부하도록 하고, 책문으로 차석(次席)를 차지한 대정현의 유학 김명헌(金命獻)은 나이가 81세가 되었으므로 특별히 급제를 내렸다. 그리고 명하여 영남과 관동 지방의 관례에 따라 그 사실을 갖추 기록하고 합격한 여러 작품들과 함께 인쇄하여 반포하도록 하고는 이를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이라 명명하였다.
4월 22일 무인
정의현의 고 학생 오흥태(吳興泰)와 제주의 고 효자 박계곤(朴繼昆)을 특별히 정려(旌閭)하였다. 제주 어사 심낙수가 별단(別單)을 올려 아뢰기를,
"정의현의 고 학생 오흥태는 지난 무신년에 역적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자는 격문(檄文)을 손수 초(草)하여 세 고을에 돌려 수백 인의 의병을 모아가지고 장차 배를 타고 출발하려다가 난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이내 그만두었는데, 그의 글은 충성에서 우러나온 의분이 격렬하여 말이 엄격하고 의리가 정당하였으니, 비록 그 일은 성취하지 못했지만 그 마음은 민멸되지 않았습니다. 섬 백성들의 풍속을 의당 임금을 위하고 윗사람을 위해 죽는 의리를 알도록 해야 할 것인데, 오흥태의 일에 대해서 끝내 표창한 것이 없다면 실로 결함된 전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주 사람 박계곤은 효성이 뛰어났습니다. 일찍이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파선이 되어 표류하여 곧 죽게 되자 배의 널빤지에다 몇 구절의 글을 적어서 부모를 영결하고는 하늘에 빌면서 이를 밀물에 띄워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그 널빤지가 그의 아비 문전에 도착하였으므로, 그의 아비가 널빤지를 가지고 관청에 가서 알림으로써 날랜 배를 보내어 그의 시신을 싣고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섬 사람들이 지금도 계곤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박계곤에게는 홀로 된 딸이 있었는데, 그가 젊은 나이로 고통스럽게 절개 지키는 것을 가엾게 여겨 여자종 하나를 명하여 청소나 해주도록 하였습니다. 그 여자종의 이름은 고소락(高所樂)이라고 하였는데, 머리가 더부룩하여 여러 갈래로 따올렸습니다. 그 지방 속담에 머리를 따올린 것을 고소락이라고 합니다. 그 여자종은 밤낮으로 부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어 주인이 시집을 보내려고 하자, 여자종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몸을 지켜서 절개를 힘쓰는데, 내가 남자와 같이 살면서 그 불결한 몸으로 어떻게 감히 주인을 가까이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의 뜻을 가엾게 여겨 양민(良民)을 만들어 주었으나 그래도 시집을 가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주인을 섬김으로써 끝내 주인과 여종이 서로 의지하여 살다가 늙어 죽었습니다.
박계곤에게는 하늘을 감동시킨 효성이 있었고, 그의 딸은 열부(烈婦)였으며, 그 열부에게는 또 충비(忠婢)가 있었으니, 효와 열과 충이 서로 감응하여 한 집안에서 나온 것을 서로 전하여 기이한 일로 삼고 있습니다. 의당 그들을 정표해서 풍성(風聲)을 수립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오흥태의 나라를 위한 충의와 박계곤의 하늘을 감동시킨 효성이야말로 제주도 이북의 여러 도에서는 듣기 어려운 일인데, 흥태와 계곤을 지금까지 특별히 정표한 것이 없었으니 이는 실로 결함된 전례라 하겠다. 기이하도다! 계곤의 집안에는 또 그의 딸이 열부가 되었고 그 열부에게는 또 충성스런 여종이 있어 효와 열과 충이 한 집에 모였는데, 그의 손자 박중환(朴重煥)도 능히 할아버지의 훈계를 받아 가업을 계승하여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병학(兵學)을 깊이 연구한다고 하니, 이 또한 한 번 거두어 녹용하기에 합당하겠다. 암행 어사로 하여금 오흥태의 정문에는 의사(義士)라 기록하고, 박계곤의 정문에는 효자 열녀(孝子烈女)라 쓰고 한 줄을 낮추어 충비(忠婢)의 이름을 써넣어주도록 하라. 그리고 또 어사로 하여금 그들의 사적에 대한 글을 각각 지어 전파해서, 그 고을 사람들이 그 정려를 지나갈 때에는 말을 탄 자는 반드시 경례를 표하게 하고 걸어가는 자들은 손으로 가리키며 경의를 표하도록 하여, 백대 후에까지 풍성을 수립하는 데에 일조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5일 신사
경모궁을 참배하였다.
4월 27일 계미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라 감사 이서구(李書九)의 장계에 ‘세미를 운반하는 배 10척이 고군산(古羣山) 세 섬의 앞바다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침몰되었다. 쌀은 도합 1만 1천 1백 95석이고, 콩은 1천 8백 51석이며, 잡비조(雜費條)의 각종 쌀과 콩은 1천 4백 53석인데, 그중에 건져낸 쌀이 9천 2백 52석이고, 건져낸 콩이 8백 76석이며, 건져내지 못한 쌀이 6백 93석이고, 건져내지 못한 콩이 7백 69석이며, 돈이 3백 44냥이다. 그러므로 그 건져낸 것을 합쳐 실지로 상납할 원총수(元總數)를 계산해보면 쌀은 남고 콩은 모자란다. 조운선의 격군 1명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아직 건져내지 못하였다. 지금 배가 침몰된 곳은 비록 외양(外洋)이라고는 하나 이미 험난한 뱃길이 아니고 보면 일시에 침몰시킨 일 등 여러 가지 간악한 정상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리고 동시에 떠난 배들이 어떤 배는 앞서가고 어떤 배는 뒤쳐졌으니 그 배를 모는 태도가 만홀하였음을 충분히 알 수 있고, 또 수백 명의 뱃사람들이 차례로 하륙하고는 그 허다한 배들을 파도에 뒤집히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배 한 척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건져내지 못한 수량이 1백여 석씩을 넘었으니, 뱃사람들의 간악한 정상 또한 가릴 수 없다. 그중 남평(南平)의 세미선은 적재량을 훨씬 초과하게 싣고서 수십 일 동안을 지체하다가 갑자기 그날에야 길을 빨리 가기를 탐하여 수참(水站)도 들르지 않고 가다가 끝내 침몰되었는데, 사람들은 각자 다 살아났으나 건져내지 못한 수량이 무려 2백 90여 석에 이르렀다. 또 나주(羅州)의 세미선은 사람은 모두 살았으나 배들이 전부 파손되었으니, 이는 곡물(穀物)을 거의 다 건져냈다고 하여 용서해줄 수 없다. 법성 첨사(法聖僉使) 조계(趙𡹘)는 떠나는 날 늦게야 비로소 배를 출발시켜 바람이 잠잠해진 뒤에는 가까운 수참에도 정박하지 않았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을 보고도 가만히 앉아서 큰 파도가 일기를 기다린 것은 더욱 매우 놀라운 일이다. 남평 현감(南平縣監) 김인순(金麟淳)은 실지 상납할 수량 이외에 거의 5백 석 가까이 되는 수량을 더 실었으니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다.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기를 바란다. 고군산 첨사(古羣山僉使) 서명점(徐命漸)은 신영(臣營)에서 잡아다가 엄히 곤장을 쳐서 해당 진(鎭)으로 호송하였고, 감색(監色) 무리들에 대해서는 신영에서 법대로 처리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공과 격군을 엄히 신문하는 것은 오로지 고의로 배를 침몰시킨 한 가지 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납할 원총수로 말하자면 건져낸 것이 오히려 남고, 또 사람들이 빠져 죽고 부상을 당하여 그들이 사건의 내막을 스스로 밝히는 단서가 되었고 보면, 그들을 곧장 고의로 침몰시킨 율로 처단하는 것은 신중히 처리하는 정사가 아닐 듯합니다. 그리고 그 배들이 침몰된 까닭은 오로지 차원(差員)이 격군들을 잘 단속하지 않은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차원과 격군들을 특별히 엄격하게 처벌해야겠습니다. 서명점과 김인순은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신문하여 엄히 처벌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비록 도신(道臣)으로 말하더라도 일로(一路)의 큰 정사가 조운(漕運)의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1만여 석의 곡식을 물에 빠뜨려서 15개 고을에 폐해를 끼쳤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도신 이서구를 삭직시키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10척의 배에 만여 석의 곡식을 침몰시킨 것을 곧장 바람새 때문이라고만 핑계댈 수 없다. 적재량대로 싣지 않았고 제 때에 출발하지도 않았으며, 유리한 곳에는 머물러 쉴 줄을 몰랐고 파도가 험난한 곳에서는 두려워할 줄을 모름으로써 농민들이 하나하나 피땀흘려 거둔 곡식을 끝내 없애버리고 말았다. 또 그것을 찾아 건져내면서 열흘 이상 인력을 허비함으로 인하여 고을 백성들이 골머리를 앓게 되고 바다 고기들까지도 살 곳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풍속을 따라서 다스리는 데에 전혀 어두운 관계로 도리어 간악한 꾀를 부리게 하였으니, 첫째도 조운의 일을 맡은 진장(鎭將)의 죄요 둘째도 조운을 맡은 진장의 죄이다. 옛날 왕준(王濬)이 이른바 ‘바람새가 유리해서 정박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어찌 꼭 참으로 누선(樓船)을 잘 다루지 못해서 그랬겠는가. 다만 군사의 위세를 크게 떠벌려서 사기를 드높여서 용맹을 뽐내도록 하려는 것이었었다. 그런데 저들은 감히 형편을 알지도 못하고 마치 승승장구하는 자와 같이 하였으니, 마디마디가 다 놀랍기만 하다.
옛날 정해년에 호남에서도 이런 일이 있어 어사를 보내고 또 이내 성교(聖敎)를 내리어 간곡히 타이르고 처분도 엄명하였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에 의당 우러러 본받을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번에 어사를 우선 차송하지 않은 것은 사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정해년의 일과는 조금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징계를 하려면 진장을 징계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러니 법성 첨사 조계는 그가 조세를 바치는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도신으로 하여금 위의를 크게 펼쳐서 곤장 20대를 엄히 친 다음 조졸(漕卒)로 강직(降職)시키도록 하라. 분수를 모르는 그에게 무엇을 책망하겠는가마는, 읍교(邑校)를 이곳 진장으로 삼은 것은 수고를 표창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그가 술에 취해 감독을 하지 않았고 누워있기만 하고 가서 구원하지도 않았는데, 감사가 청한 법률은 어찌 그리도 가볍단 말인가. 고군산 첨사 서명점 또한 감사로 하여금 곤장을 엄히 쳐서 바로 그곳에 충군(充軍)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감사의 체모는 중할 뿐만 아니라 사건도 연전의 호서 지방의 일과는 다르니, 의당 지난 정해년의 불문에 부친 예를 따라야 할 것이다. 죄를 논하는 한 조항은 특별히 분간하라."
하였다.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사당을 수리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경순왕의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입춘일과 입추일을 쓰고 있으므로 숭덕전(崇德殿)046) 에서 2월과 8월의 상순(上旬) 가운데 좋은 날을 받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숭덕전에는 팔변(八籩)·팔두(八豆)를 쓰고 있고 이 사당에는 칠변(七籩)·칠두(七豆)를 쓰고 있으며, 숭덕전에는 복호(復戶)한 것이 22결(結)이고 이 사당에는 5결뿐이며, 참봉(參奉)을 임명하는 첩문(帖文)도 이조를 거치지 않고 예조에서 만들어 보내고 있으니, 이는 대체로 사면(事面)의 존중되는 정도가 신라 시조의 사당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당초부터 등급을 낮추었던 것이므로 지금 갑자기 등급을 격상시키는 일을 논의할 수 없으니, 모두 그전대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先朝) 때에 조경묘(肇慶廟)를 창건하고 완경과(完慶科)를 베풀었었다. 그후로는 사면의 존중되는 정도가 자별해졌으니, 참봉의 직첩은 이조에서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이철운(李喆運)의 일에 대하여 대신에게 의논한 결과, 영의정 홍낙성이 말하기를 ‘이철운이 여러 가지 명목의 곡식 중에서 여분을 사취하고는 굶주린 백성을 추가로 등록한 일, 유고곡(留庫穀)을 또한 나누어 주고 새 곡식으로 바꾸어 들여서 유용한 일, 진휼 정사의 전후로 사망한 자에 대해서 일체 장문(狀聞)하지 않은 일 등과 이밖에도 어사가 조사하여 아뢴 데에 기재되어 있는 허다한 탐오 행위와 불법 행동 등에 대해서 해부로 하여금 조목조목 신문 항목을 만들어서 엄격하게 캐묻도록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판결하기를,
"대신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또 아뢰기를,
"청컨대 이철운에게 형장으로 신문하여 자복을 받으소서."
하니, 판결하기를,
"이 공초를 보건대, 백성들이 죽는 것이 전염병이나 기근으로 인한 것을 막론하고 분명히 그런 사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백여 명이다, 3백여 명이다 하는 것을 가지고 사실과 어긋나는 단서로 삼아 고집하면서도 역시 감히 이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발명하지는 못하고 있으니, 그의 죄범이 과연 어떠한가. 설령 사람마다 전염병이 걸렸다 하더라도 만일 기근을 구제하고 전염병을 치료해 주었다면 그 숫자가 어찌 저렇게까지 많았겠는가. 특별히 어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조사하게 한 결과 어사가 조목조목 열거한 것이 이와 같이 명백하다. 고생고생해가며 쌀을 실어나르고 밤낮으로 백성들을 위해 고심을 하였건만 끝내 은혜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고 이를 만하다.
이밖에 진휼하고 남은 곡식을 침몰한 쌀에 옮겨다 충당시킨 것과 스스로 마련한 것 등 각종 불법적인 범행은 오히려 사소한 일에 속한다. 그리고 복(鰒)을 바치는 것을 특별히 견감해준 은혜에 대해서 모르는 일이라고 말한 데에 이르러서는 대단히 가증스럽다. 한 차례만 신문하고 그만둔다면 훗날의 다른 사람을 어떻게 징계하겠는가. 더구나 한편으로는 기근과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한편으로는 이철운으로 하여금 옥문을 나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의기양양하게 한다면 그러고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형장 신문의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다시 각별히 엄한 형벌을 가하고 그 몸에 한하여 사형에서 한 등급 낮추어 외딴 섬에 귀양을 보내서 호소할 데 없는 제주도 백성들에게 사례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철운을 고금도(古今島)에 귀양보냈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강봉서(姜鳳瑞)의 일로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의정 홍낙성이 말하기를 ‘강봉서는 비록 대간이기는 하나 성주(城主)를 논핵한 것은 풍속과 교화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말이 혹은 사실과 어긋난 것도 있어 허위로 날조한 죄명을 면하기 어려운 입장이고 보면 그가 대간의 직에 있다고 해서 용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이미 언관(言官)이고 보면 또 곧장 일반 백성으로 간주하여 죄를 적용할 수도 없으니, 의당 잘 참작해서 돈후한 풍화를 먼 바다 밖에까지 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실로 어리석은 소견으로 억측하여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영중추부사 채제공은 말하기를 ‘강봉서는 자신이 대관(臺官)인 만큼 백성들의 정상을 상소로 진술한 것은 사실 그의 직분상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의 글 내용을 살펴보건대 의도가 오로지 성주의 죄를 탄핵하는 데에 있었고, 이른바 패설(悖說)이라는 것은 날짜가 이미 서로 맞지 않다. 또 여러 가지 불법 행위에 이르러서는 어사가 조사하여 아뢴 사실과 간혹 틀리는 것도 있어 역시 전혀 날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철운의 죄범은 워낙 많아서 이미 중벌을 입었고 보면 강봉서를 곧장 허위 날조의 죄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다만 관장과 백성 사이는 명분이 자별하고 외딴 섬의 풍화는 더욱 중요한 것이라 후일의 폐단에 관계가 되므로 대간의 말이 사실과 어긋난 것을 용서해줄 수는 없으니, 강봉서를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정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강봉서를 인천부(仁川府)에 귀양보냈다가 이윽고 석방하였다.
4월 28일 갑신
차대하였다. 상이 영의정 홍낙성 등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경들에게 내린 처분은 오로지 경들을 위한 것이었다. 어찌 다른 일이 있었겠는가. 지금 다행히 두 원로 대신이 연석에 나왔으니 앞으로는 화락한 낯으로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하니, 홍낙성이 말하기를,
"전후로 지나친 처사와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리신 것은 실로 성상께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이라도 뉘우치는 뜻을 쾌히 보이시고 금령을 환수하여 언로(言路)를 여신다면 이것이 곧 신의 구구한 소망입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어찌 언로를 막기 위해서 그랬겠는가. 이번 일은 내가 하기 좋아서 한 것이 아니라 내 입장으로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경들은 원로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는 한 마디 할 수도 있는 처지이므로 내 또한 한 마디로 대답하는 것이니, 오늘 만일 그 말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한다면 이는 실로 내가 경들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홍낙성이 말하기를,
"신이 대궐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던 때에 승지가 전달하는 유시를 삼가 들으니, 신이 만일 집으로 돌아간다면 전후로 내린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들을 깨끗이 씻어 없애버리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하교야말로 환수한다는 하교보다 더 훌륭한 것이었고 또한 전하께서 뉘우치시는 단서를 우러러 엿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이 하교를 들은 즉시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도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갔었습니다. 대저 의리는 끝내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전하께서 어찌 자신의 사사로운 정을 가지고 온 나라의 공론을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 일에 대해서는 미처 의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감히 스스로 성인에게다 빗대는 것은 아니지만 맹자의 ‘주공(周公)의 과실은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한 말이 바로 오늘의 내 입장을 두고 한 말이다. 경들이 이미 지나친 처사라고 하였으므로 내 또한 지나친 처사로 받아들일 것이니, 경들은 다시 말하지 말고 앞으로는 삼사(三司)에 맡겨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홍낙성이 말하기를,
"요즘 삼사의 일에 대하여 개탄하는 바입니다. 연일 소명을 어기고 있으니 과연 무슨 의리란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진실로 옳다. 근래에 사헌부·사간원에 날마다 패초(牌招)를 내보내는 것은 나에게 과연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들의 행위를 보면 꼭 장난하는 것 같다. 옥당의 관원들이 지레 나가버린 것은 더욱 해괴한 일인데, 오늘 갑자기 들어온 것은 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런 자들은 결코 삼사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경은 그들에게 죄주기를 청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홍낙성에게 말하기를,
"삼사의 관원들이 지금 막 연석에 나온 터에 이렇게 말을 해서는 안 되오."
하니, 홍낙성이 말하기를,
"신은 오늘 입시한 삼사의 관원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닙니다. 대체로 전일에 소명을 어긴 자들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 들어온 사람이 바로 전에 소명을 어긴 자들이다. 그런데 영중추부사는 저 삼사가 연석에 나온 것만도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 이런 말을 하는가. 이러한 삼사 관원은 유(流)·방(放)·찬(竄)·극(殛) 중에 어느 벌을 쓰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오늘 이전까지는 전하께서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로 여러 신하들의 입을 틀어막았으므로 삼사의 관원된 자들이 나와서도 감히 선뜻 말씀을 올리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니, 소명을 어긴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에야 어찌 안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삼사의 일에 대해서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나, 신은 삼가 이 일은 모두 전하께서 스스로 반성하실 것이요 신하들에게만 전적으로 책임지워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요즘에 내리신 하교에 대해서 명령을 전달하는 승지나 사관들까지도 모두 차마 들을 수 없고 감히 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하교가 진정 천만 번 지나치고 참으로 차마 들을 수 없는 단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전하를 섬겨온 지가 이제 몇 년이 되었습니다마는, 매양 전하의 말씀이 온화하고 절박하지 않으니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우러러 뵈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하교를 살펴보면 거의가 폭발적인 언사에 가깝습니다. 증자(曾子)가 군자의 도에 귀히 여기는 것 세 가지를 말한 가운데 끝으로 ‘사기(辭氣)를 내는 데는 비배(鄙倍)함을 멀리해야 한다.’고 하여 오로지 사기를 주의시킨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대성인께서 말씀을 신중히 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삼사가 연일 패초를 어긴 데 대해 신도 처음에는 속으로 그들을 의아하게 생각했었으나, 이에 신 자신을 그들의 입장과 바꾸어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들로서는 패초를 어기는 이외에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려 진언(進言)의 길을 미리 막았고 또 수계(受啓)하는 승지와 등계(謄啓)하는 주서에 대해서도 모두 그런 하교가 있었으니, 그렇다면 저 삼사는 또한 장차 어찌 달리 방도가 있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들어와서 정계(停啓)하는 것이야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더구나 계초(啓草)들을 이미 불태워 버렸음에랴."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정지한다[停]는 이 말씀이 무슨 하교입니까. 오늘날 임금을 섬기며 본성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치고서 어찌 그 계(啓)를 정지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금령에 관계되는 말은 신이 진실로 감히 하지 못하나, 임금의 잘못에 대해서야 신이 어찌 감히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는 좋은 말을 나누고자 하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러는가."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우(禹)임금은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고 고요(皐陶)는 감탄을 하였으며 우임금은 받아들였다고 하여 군신 사이에 서로 왈가왈부하며 논의한 것들이 모두가 좋은 말이었으므로, 신 또한 의당 좋은 말로 우러러 아뢰야겠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일찍이 신들에게 하교하기를 ‘삼사의 공론이 정계하거나 계속하는 데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임금이 결코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었습니다. 신은 지금까지도 그 말씀을 삼가 외우며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다 경이 언변을 잘한 데서 나온 것이다. 내가 즉위하던 처음에 참으로 그 말을 하기는 했으나 그때는 외정(外廷)의 일을 가지고 말한 것이었다. 오늘은 내 입장이 그때와는 다른데 경은 어찌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내 마음이 목석과는 다르기에 이제 삼사에다 맡겼는데, 만일 참으로 성의가 있다면 내가 어찌 감동하여 마음을 돌리지 않겠는가. 오늘 경들에게 말을 하면서 영상에게는 삼사에 맡기겠다고 하교하였고, 영부사에게는 내 과실로 받아들이겠다고 하교하였는데, 이는 모두 경들과 좋은 말을 나누기 위한 본의에서 나온 것이니, 경들도 주공의 과실과 과실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등의 의리를 가지고 내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옳다."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과실을 알고도 고치지 않거나 좋은 말인 줄 알면서도 따르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이미 내 과실로 받아들이겠다고 하교하시었고 또 신들의 말을 옳지 않게 여기지도 않으셨는데, 단지 과실로 받아들인다고만 하고 신들의 말을 좋다고만 하고 만다면 이것이 바로 과실인 줄 알고서도 고치지 않고 좋은 말인 줄 알면서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옛사람이 이른바 어찌할 수가 없다는 훈계에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중훼(仲虺)가 임금의 덕을 찬양하는 말에 반드시 ‘과실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홍낙성이 말하기를,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위로 자전과 자궁을 받들어 모시면서 억만 년 무궁한 복을 길이 누리심으로써 상하가 모두 기뻐하며 다함께 태평 성대를 즐기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뭇신하들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그런데 비록 사소한 일일지라도 만일 자전과 자궁께 걱정을 끼쳐드리게 된다면 성상의 마음이 의당 어떠하겠습니까. 앞으로 다시는 지나친 처사를 하지 말기를 천만 번 간절히 빕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와 같기 때문에 내가 이미 이 일을 삼사에 맡길 것을 허락했으니, 경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홍낙성이 말하기를,
"신이 늙고 병든 몸으로 오랫동안 외람되이 정승 자리에 있음으로써 조정의 기상이 이와 같이 되었고, 부서 기회(簿書期會)의 일에 이르러서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으니, 특별히 신을 면직시키고 유능한 정승을 다시 가려 뽑아서 국사가 잘 되도록 해주시는 것이 바로 오늘날 신의 큰 소망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조정의 복성(福星)으로 당(唐)나라 때 곽자의(郭子儀)가 매우 오랫동안 중서령(中書令)으로 있으면서 선비들에게 24회의 고시(考試)를 주관한 데에 비길 만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사양하는가. 그리고 원로 대신은 자연 응당 상부(相府)에 누워서 도를 논하는 것이요 또한 복잡한 사무를 책임지워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 그렇다면 오늘 정승을 가리는 것이 좋겠다. 경은 우선 빈청에 물러가서 정승 후보자를 가려서 들이라."
하였다. 채제공이 말하기를,
"신이 청할 것은 곧 두 가지 일입니다. 삼사가 합계(合啓)하는 것은 비록 높으신 임금으로도 결코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이니 우선 금령을 환수하여 공의가 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한 번씩 만나보겠다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비록 조지(朝紙)에 나온 사실은 아니지만, 이는 더욱 크게 지나친 처사입니다. 성명하신 전하로서 어찌 참으로 이런 처사가 있겠습니까마는 임금의 말이 한 번 나가자 뭇사람의 마음이 놀라 의혹하고 있으니, 속히 환수하시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마다 한 번씩 만나보겠다는 말은 아직 시행하지 않은 일이니 굳이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금령을 환수하라고 청한 데에 이르러서는 경의 말이 이미 이러하니 대신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 더이상 거절하기 어렵다. 경의 얼굴을 보아 특별히 한 가닥의 길을 열어주겠다. 오늘 삼사가 만일 금령을 환수하라는 계를 올린다면 내가 의당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하면 경들의 말을 내가 모두 따르는 것인데, 경은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자, 채제공이 말하기를,
"오늘 만일 금령을 환수하라는 계만 올리도록 허락하고 원계(原啓)를 다시 올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아뢴 말을 따르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계를 올리지 않는다면 천지의 법도가 장차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지난번 전교로 선유(宣諭)할 때에 승지가 왜 자세히 전하지 않아서 영부사가 다시 이런 말을 하게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외어서 구두로 전교하겠다."
하였다. 채제공이 말하기를,
"이는 그렇게 하교하실 일이 아닙니다. 소장(疏章)을 불태우는 일은 옛날에도 혹 있었으나, 여러 관서가 합계(合啓)한 것을 불태운 일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전하의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는 장차 자손들의 본보기가 될 것인데, 후세에 혹 이 일을 근거로 삼아 사사로운 호오(好惡)를 가지고 공론을 좌우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이것이 어찌 우리 성상께서 억만 년 뒤까지 후손들에게 훌륭한 법을 내려주는 도리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나의 이 처사를 일러 전고에 없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나의 정리도 또한 전고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근래에 이른바 대계(臺啓)라는 것이 모두 얼굴을 쳐다보며 기회나 엿보는 것이고 참으로 성의가 담긴 것은 볼 수가 없다. 더구나 그 불태웠던 것은 계사(啓辭)가 아니라 바로 계초(啓草)였는데, 경은 어째서 꼭 이렇게 말을 하는가."
하였다. 채제공이 말하기를,
"뭇신하들의 정성스럽지 못한 태도는 혹 성상의 하교와 근사한 점이 있다고 치더라도, 이 계사에 이르러서는 오늘날 신하된 사람치고 그 누군들 머리를 부숴가면서까지 힘껏 간쟁하려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이 계사를 올리지 못하게 되면 장차 나라가 나라 꼴이 안 되고 사람이 사람 꼴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용(中庸)》 구경장(九經章)에 이르지 않았던가. 친한 이를 친하는 것이 첫째이고 대신을 공경하는 것이 셋째로 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그 차례를 알 수가 있다. 친한 이를 친하는 의리가 있은 다음에야 대신을 공경하는 예가 있는 것이니, 오늘의 일에 대해서 나는 스스로 크게 잘못된 지경에는 이르지 않은 것이라고 여긴다."
하자, 채제공이 말하기를,
"친한 이를 친한다[親親]는 두 글자를 어찌 이런 곳에다 쓸 수 있겠습니까. 만일 성상의 하교대로라면 주공(周公)이 어찌 구경(九經)의 뜻을 몰라서 그토록 변(變)에 대처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개성부 유수 이병정(李秉鼎)이 말하기를,
"오늘날 나라의 위급한 형세에 대해서 신은 전일보다 덜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려 뭇신하들을 억누르심으로 인하여 조신이나 사서인이 모두 감히 계사 한 장, 말 한 마디를 올리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애통하게 생각합니다. 친한 이를 친한다는 두 글자를 어떻게 오늘에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일전의 차대에서 명령을 내린 후로 대신(臺臣)들이 패초를 어긴다는 것이야말로 어찌 말이나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잊어버렸다. 그날 일제히 패초를 어긴 대신들을 모두 파직하라."
하자, 승지 임제원(林濟遠)이 말하기를,
"대신들이 일전에 패초를 어긴 데 대해서 신은 무슨 까닭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이미 대신들이 연석에 참여하였는데 지레 파직의 명을 내리는 것은 실로 대각의 신하들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채제공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금령을 환수하기를 요청하는 계사를 올리도록 허락하고서 지금 어찌 입시한 삼사의 관원들을 선뜻 꺾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삼사를 고의로 내쫓으려는 것이 아니다. 의당 오늘 연석에 모인 여러 신하들 가운데서 지난번의 망단(望單) 아래 권점을 찍어 인원수를 채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사간 이경일(李敬一)이 말하기를,
"청컨대 금령을 속히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 일을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삼사의 신하들은 지난번 연석에서 내린 전교를 아직도 듣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경일 등이 처벌해주기를 다시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지난번의 하교가 있었는데도 이런 말을 하였으니, 만일 그 죄를 제대로 성토하자고 보면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의 삼사는 책망할 것조차도 없으니 모두 체차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체차하는 일은 오히려 급하지 않으니 모두 체직을 허락하고, 오늘 정사를 열어 차출하라."
하였다. 승지 이면긍(李勉兢)이 말하기를,
"오늘 삼사가 설혹 잘못 주선한 처사가 있다 할지라도, 전하께서 이미 여러 대간들이 패초를 어긴 사실을 가지고 불성실하다는 것으로 책망하고서 또 가까이 입시한 연석에서 그들을 이렇게 체직하여 배척하시니, 오늘 정사에서 차출된 대간들에게도 또한 어찌 처벌된 죄인의 명단을 대청(臺廳)에 상주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금령을 환수하기를 요청하는 계사를 올리도록 허락하고 한편으로는 승정원을 신칙하는 전교를 내리시어 전하께서 전후로 내린 전교가 서로 다른 점이 없지 않으니, 여러 신하들이 장차 어느 쪽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요즘 대관으로부터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하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던 가운데 누차 죽을 죄를 범하였는데,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받고부터 대간으로 있는 사람들은 죄인 명단을 상주하고 안하고를 막론하고 모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조금 전에 개성 유수가 대간을 배척하는 말을 하였는데, 비록 개성 유수 자신이 대간의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어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삼사를 체차하라는 명을 속히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처지로 말하자면 참으로 난처한 단서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 삼사의 거조에 대해서는 개성 유수의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교리 최헌중(崔獻重)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금령을 환수하기를 요청하는 계사를 올리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계사를 어찌 잠시 늦출 수 있는 일이라고 갑자기 또 견책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신들은 천지와 같으신 성상께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환수하라는 계사에 대하여 아직 비답을 내리지 않았는데, 체차된 옥당이 또 어찌 번거롭게 아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채제공이 말하기를,
"이 계사가 이미 나왔으면 또 어찌 결정을 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에도 이런 예가 있었으니 장차 비답이 없었다는 것으로 써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계사가 어떤 계사인가. 그렇게 한다면 또 장차 날마다 계초(啓草)를 가져다가 불태워버릴 것이다. 전일에 하교한 것은 장차 무슨 모양이 되겠는가. 속히 자리로 가라."
하자, 채제공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 이르시니 신은 천만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죽으려 해도 죽을 수도 없습니다. 이미 삼사에 맡기겠다고 하시고서 이제 또 이렇게 하교하시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입을 열지 못하게 하시니, 전(傳)에 이르기를 ‘성인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였는데, 전하께서 오늘 내리신 하교는 참으로 성인이 나를 속인다는 것을 면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 일에 대해서 과연 한 규정을 준수하지 못하고 좌우로 응수하는 모양이 마치 동서로 흐르는 물을 터지는 족족 막아내는 것처럼 되었으니, 이에 대해서는 나를 책망하지 말라. 더구나 오늘 이른 아침에 전각을 나오느라 조반을 들지 못했고 또 가슴이 치밀어오르는 증세가 일어날 염려도 있으니, 경은 자리로 나아가라."
하자, 채제공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러하시니 대단히 우려가 되는데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고인도 의리에 크게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거취(去就)를 가지고 쟁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이 이 성명한 세상에 어찌 조정을 떠나려고 하겠습니까마는, 옛 글에도 ‘말이 시행되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고 이르지 않았습니까.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또한 염우(廉隅)는 있으므로 결코 태연하게 대관으로 자처할 수는 없으니, 신은 장차 이 길로 떠나겠습니다."
하고, 인하여 물러갔다. 상이 홍낙성에게 이르기를,
"오늘 정승을 가려 뽑아야 하는데 경의 생각에도 반드시 헤아린 바가 있을 것이니, 누가 좋겠는가?"
하니, 홍낙성이 말하기를,
"신은 정신이 혼미합니다. 정승을 가려 뽑는 일이 그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신이 어찌 감히 추천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만 말을 해보라."
하니, 홍낙성이 말하기를,
"가려 뽑는 일은 성상께 달려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재 지방 관찰사로 나가 있는 사람이 나이도 젊고 기력도 강하며, 문학으로 말하자면 관각(館閣)의 직책을 두루 지냈으니 이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겠다."
하니, 홍낙성이 말하기를,
"신이 어찌 성상의 하교를 헤아리지 못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의 정승은 정해진 것이다."
하였다.
돈을 새로 주조하였다.
삼사(三司)가 【대사간 이경일(李敬一), 지평 최수로(崔守魯), 헌납 이정운(李貞運), 부교리 최헌중(崔獻重), 수찬 한광식(韓光植)이었다.】 합계하여 말하기를,
"언로가 열리거나 막히는 것은 실로 나라의 흥망 성쇠에 관계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금령을 베풀고 누차에 걸쳐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리시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더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하셨으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뭇사람들의 마음이 대단히 억눌려 있습니다. 그런데 삼사가 합계한 말단의 일에 대하여 이를 불태워버리라는 명을 내린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 대단히 비상한 처사로서 국조 4백 년이래 없었던 일입니다. 신들이 힘을 빌어 임금을 섬길 수 있는 것은 곧 역적을 징토하는 큰 의리 때문이니, 그 의리가 끊어진다면 장차 나라가 나라 꼴이 안 되고 사람이 사람 꼴이 안 되어 모두가 오랑캐나 금수의 지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비록 몹시 변변치 못하기도 하나 직책으로 말하자면 법을 집행하는 처지입니다. 그러니 지금 만일 위엄을 두려워하여 금령에 저촉되는 것을 경계로 삼아, 머리를 부숴가면서까지 극력 간쟁하여 성상의 마음을 되돌릴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성조에서 설치한 대각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금령을 속히 환수하시어 언로를 열어서 의리가 끊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고, 전교하기를,
"아무리 이 계사가 나왔다고 해도 어찌 이 말을 입 밖에 내도록 할 수 있겠는가. 오늘 연석에서 두 원로 대신이 나와서 극력 진달하므로 내가 대신을 공경하고 예우하는 방도라고 생각하여, 금령을 환수하라고 요청하는 한 조항은 삼사에 맡기겠다고 두 정승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좌우에서 번갈아 차자와 상소를 올리게 될 경우, 그 말은 결국 금령을 환수하라는 데에 불과하지만 그 고심되는 것은 전계(前啓)보다 더 심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 이 연석의 이 계사만을 베껴 전하는 이외에는 절대로 문자를 서로 번갈아 올려서 나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해방(該房)이 이 연석의 하교를 준수하여 삼사에 분부하라."
하였다.
정승을 뽑았다. 【그전에 추천된 사람은 정존겸(鄭存謙)·유언호(兪彦鎬)·채제공(蔡濟恭)·박종악(朴宗岳)·김희(金憙)이고, 새로 추천된 사람은 이병모(李秉模)이다.】 이병모(李秉模)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았다.
김사목(金思穆)을 평안도 관찰사로, 이치중(李致中)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예조 판서 홍양호(洪良浩)를 체직시키고 전 판서 민종현(閔鍾顯)을 유임시켰다.
권유(權𥙿)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연석으로부터 바로 성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상이 하유하기를,
"경은 어찌하여 이러는가. 금령을 환수하라[收禁]는 두 글자를 오늘 연석에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경들을 예로 대우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내가 대신을 공경한 뜻이 여기에서 극진하였다. 그리고 강석(講席)을 방금 열었는데 곧장 성 밖으로 나간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경에 대하여 의혹을 갖게 된다. 경은 즉시 들어오라."
하였다.
이경일·이정운·최수로를 제주목(濟州牧)으로 귀양보내고, 임제원(林濟遠)·유한녕(兪漢寧)·이유경(李儒慶)을 호서의 바닷가에 귀양보냈다. 전교하기를,
"오늘 삼사의 일에 대하여 이를 성언(聲言)하려고 들면 또 장차 한바탕 풍파가 일어날 것이다. 또 대사간 등의 하는 짓을 보니 족히 책망할 것도 없기에 다만 체직을 허락하여 아무 흔적 없이 미봉해 버리려고 했었다. 그러던 나머지 이제 갑자기 애당초 분명치 못한 일을 가지고 저들이 스스로 말을 꺼내어 그것이 참으로 나에게까지 보고가 되었다. 그런데 그 한 장의 거조(擧條)에는 ‘조어(措語)를 고친 계사에 대하여 비답이 없었다.’고 기록하였고, 또 한 장에는 ‘금령을 환수할 일에 대하여 소회를 올렸으나 비답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을 승지가 미처 승정원에 돌아가기 전에 틈을 엿보아 몰래 사선각(四仙閣)에다 그것을 바쳤으니, 이는 대간의 계사가 아니라 바로 투서(投書)인 것이다. 고금을 통틀어 보아도 어찌 이러한 격례가 있겠는가. 진실로 금령에 구애하지 않고 연석의 하교도 돌아보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찌 하지 못할 일이나 발설하지 못할 계사가 있겠는가.
애당초 책망할 것도 못 되어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연석에서 무사히 나가게 된 것만도 이미 요행으로 죄를 면했다고 이를 만하다. 그렇다면 추후의 거조에 대해서도 역시 책망할 것이 없다는 이유로 그 초안을 몰래 투납한 죄마저 또 처벌하지 않을 수는 없다. 서로 서면(書面)을 통하여 논의하지 않은 거조의 초안을 남몰래 사선각에 투납한 양사의 여러 대간들에 대해서는 연한을 정하지 말고 제주목으로 귀양보내되 사면령이 내려도 사면하지 말라. 오늘의 일에 대하여 그동안의 사세를 놓고 보면 승지는 과연 애매하기는 하지만 일을 미연에 미리 방지하지 못한 죄야 어찌 감히 면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자신이 시골에서 올라오는 도중이라 연석의 하교를 듣지 못했다해도 법을 굽혀 용서할 수는 없으니, 우선 말감(末勘)하는 쪽을 따라 해방의 승지를 호서의 바닷가에 귀양보내라. 그리고 승정원에 있던 승지들은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니, 만일 잘 검칙하지 못한 죄를 논한다면 해방의 승지보다 죄가 더 크다. 그들 역시 호서의 바닷가에 귀양보내라."
하였다.
4월 29일 을유
영의정 홍낙성이 사직하는 글을 올리자, 봉하여 되돌려 보냈다.
4월 30일 병술
영의정 홍낙성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엊그제 병을 무릅쓰고 연석에 나갔었으나 성상의 위엄 앞에 워낙 두려워서 가슴속에 가득찬 간절한 충정을 백분의 일도 말씀드리지 못하고, 겨우 두어 마디 졸렬한 말로 대략 바로잡는 의리를 폈을 뿐인데, 도량이 하늘 같은 전하께서 즉시 윤허를 해주셨습니다.
첫 번째 상주는 곧 전하의 지나친 처사와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에 대해서 모두 회오(悔悟)를 보여달라는 것이었는데, 성상의 하교에서 ‘이미 깨끗이 씻어버리겠다고 경에게 말해주었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회오의 뜻을 보인 정도만 되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의 상주는 곧 금령을 환수하여 언로가 열리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성상의 하교에서 ‘공의(公議)를 삼사에 맡기겠다.’고 하셨으니 훌륭합니다. 왕의 말씀이여! 왕의 말씀은 실처럼 가늘어도 나간 뒤에는 밧줄처럼 굵어지는 것입니다. 신은 그 하교를 마치 해와 달처럼 우러르고 금석 같이 믿으면서 마음속으로 이제부터는 성상께서 지나친 처사와 비상한 하교를 내리지 않으심으로써 삼사와 공공의 논의와 징토의 의리를 펴게 되었으니 종묘 사직과 신민들의 행복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겠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전하의 하교를 흠송하고 두 손 모아 축원하면서 크나큰 기쁨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이 연석에서 물러나온 뒤에도 언로가 열리지 못하여 그전대로 금령이 선포된 이후의 거조를 그대로 하시니, 신은 진실로 천지 같으신 전하께 유감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언로를 열어서 공의에 맡기겠다던 성상의 하교는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공의를 삼사에 맡기지 않음으로써 언로가 따라서 막혀버린다면 지금 당장의 안위와 우려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또한 어찌 만세 뒤에까지 법훈(法訓)을 내리는 도리가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역대 선왕들께서 물려주신 어렵고 큰 사업과 온 나라 신명과 백성들의 소망을 생각하시어 법언(法言)을 믿으시고 성덕(聖德)을 빛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첫 번째 상주에 대해서는 경이 자신의 몸보다도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정성에 감동되어, 깨끗이 씻어버리겠다는 말까지 하였으니 이 말을 한 까닭에 대해서는 어제 연석에서 경에게 거듭 말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상주에 대해서는 특별히 대신을 공경히 예우하는 의리를 미루어 한 가닥의 길을 열어준 것이니, 이 때문에 또 금령을 환수하라고 요청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던 것이니 한편으로는 평범한 말을 삼가서 한 것이요 한편으로는 대신을 공경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경이 먼저 물러간 뒤에 저 이경일 등의 무례하고 불성실한 패려궂은 행위가 있게 될줄 알았겠는가. 이 때문에 영부사는 시골로 내려가버렸고, 승지들은 모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날 한 자리에 화락하게 가진 모임이 이내 바람없는 파도로 바뀌어버린 것이 모두 놀랍고 개탄스러운 일이다. 경은 그 광경을 목격하지 못한 사람이라 의당 하교와 처분이 전도되지 않았나 의혹하겠기에 대략 그 사실을 이상과 같이 언급하였다. 경은 모름지기 안심하고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서 정사를 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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