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정해
이조 판서 이치중(李致中)이 상소하기를,
"신은 이 관직에 있어서 참판을 지낸 경력도 없고 또 경연관의 과정도 거친 적이 없습니다. 애당초 묘당(廟堂)의 천거를 받았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여 수없이 비방과 조소를 받았고, 심지어 승정원의 계사에 올라 재변을 부르는 단서가 된다는 지목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신이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된 것은 이미 관직을 제수받기 이전의 일입니다. 은전의 제수가 내려진 이상 어떻게 거취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삼가 바라건대 새로 제수된 신의 관직을 개정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새로 제수한 것은 특별 제수나 다름없다.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5월 2일 무자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돈독히 타일렀다.
"경을 취하게 된 것은 지망(地望) 때문도 아니고 문장 때문도 아니며, 또한 경륜과 재주 때문도 아니다. 공도(公道)를 펼치고 백성의 불만을 풀어주며 국가의 법도를 바로잡고 정치를 깨끗이 하는 것 가운데 그 어느 것인들 정승의 책임이 아니겠는가마는, 모든 풍토를 쇄신하여 백관(百官)이 다같이 정직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므로, 모름지기 역량과 식견이 있는 자로 하여금 담당하도록 해야만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하기 어려운 말을 과감히 하는 것이 참다운 역량이 아니며, 깊이 뒤져서 숨은 사실을 잘 찾아내는 것이 참다운 식견이 아니다. 경은 나를 섬긴 지가 20여 년이지만 아직까지 소신을 굽혀 남을 따르는 것을 보지 못했고 절조를 꺾어 세속에 동화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며, 규모가 법도를 벗어나지 않고 매사를 경사(經史)에 의거하니, 이 점이 바로 내가 경을 취하게 된 이유이자 진실로 잊지 못한다고 하는 까닭이다. 문형(文衡)과 총재(冢宰)는 경의 집안에서 대대로 역임해 오던 관직인데도 경에게 아직 시험하여 보지 않은 것 역시 오래 두고 주의하여 보자는 의도였다. 경은 부디 나의 이 하유를 깊이 생각하여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인수 인계를 하는 즉시 올라와서 나의 모자라는 면을 보완하여, 왕명에 대응하여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는 공을 세우도록 하라."
5월 3일 기축
유강(柳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4일 경인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이치중(李致中)을 체직하고 이병정(李秉鼎)으로 대신하였다. 치중이 누차 불러도 나오지 않으므로 "관리를 예우하는 도리로 볼 때 한 번쯤 소신을 펴도록 하여야 된다."고 하교한 다음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충청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을 환곡을 다 받아들일 때까지 유임시키라고 명하였다.
5월 5일 신묘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저죽전 종양 절목(楮竹田種養節目)을 올렸다. 이에 앞서 내의원 제조 서유방(徐有防)이, 양남(兩南)에 신칙하여 닥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기르도록 할 것을 주청하니, 전교하기를,
"언젠가 호남의 수조안(收租案)에서 금양전(禁養田)에 대한 면세 규정이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으나, 이것이 유명 무실하여 그 폐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더구나 살대[箭竹]는 군기(軍器)의 물자이고 닥종이는 날마다 수없이 쓰이는 물건인 것이다. 무성하게 되는 실효를 거두려고 할 경우, 그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은 많이 심고 부지런히 씨를 뿌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도이다. 그런데 이른바 면세의 토지들은 모두 유명무실해졌으니, 이들 토지에다 세금을 매겼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는 상태를 보아서 즉시 면세전으로 환원하는 것도 하나의 방도가 되지 않겠는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별도로 의견을 갖추어 절목후록(節目後錄)을 작성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진택이 절목을 작성하여 올린 것이다.
5월 6일 임진
이면응(李冕膺)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통제사 신대현(申大顯)의 장계에 ‘본 통영의 비축은 이미 고갈되었고 세입은 점차 줄어들고 있어서 통영의 형편이 점점 피폐하여 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토지 없이 놀고 먹는 이곳 백성들은 생업에 재미를 붙여 생계를 꾸려갈 방법이 없어서 재물이나 곡식을 생산해 낼 방도를 경영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영에서 1백여 리 떨어진 곳에 욕지도(欲知島)라는 섬이 있는데, 그 둘레가 30여 리나 되고 토질이 비옥합니다. 그러나 금송(禁松) 지역이기 때문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없어 기르는 소나무들은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여 누차의 풍재(風災)를 겪는 가운데 지금 이미 다 없어지고 그나마 남은 어린 나무마저도 자라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오늘날 만약 이 섬의 개간을 허락한다면 백성들이 기꺼이 들어가서 안정된 삶을 영위할 것이니, 해마다 여기에서 나는 이윤을 거두어들여서 지출에 보태어 쓰고 산 중턱 위로는 많은 솔씨를 뿌려서 엄한 법규로 보호한다면 공사(公私)간에 다 편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분부하도록 하소서.’ 하였습니다.
본 섬은 바다 가운데 위치해 있어 솔밭에 대해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벌거숭이산으로 방치하여 둔 채 심어 가꾸지를 않았습니다. 마냥 내버려 두어서 쓸모없는 땅을 만들기보다는 백성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경작을 허가하는 한편 다시 보호할 방도를 신칙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송정(松政)에 관계되고 또 민간의 생산도 늘릴 수 있고 보면, 양쪽이 다 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계에서 청한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개간을 허락하면서 금송을 하라고 하니 어찌 두 가지를 병행할 방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통영의 사세는 검토하여야 될 일이나 명색이 봉산(封山)인 만큼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일찍이 경상도 관찰사 및 통제사를 지낸 사람들에게 물어보아서 다들 좋다고 하거든 시행하고 그렇지 않거든 초기(草記)하라."
하였다.
5월 9일 을미
이조 판서 이병정(李秉鼎)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누차에 걸쳐 소명을 어기자, 상이 승지 이우진(李羽晉)에게 전교하기를,
"이조 판서 이병정이 핑계대는 정세는 온 조정이 다 그러한데 어찌 혼자만 정세를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송경 유수(松京留守)와 비국 당상은 이미 행공하고 있는데 유독 전관(銓官)에 있어서만 스스로 단념해서야 되겠는가. 이조 판서를 계판(啓板) 앞으로 불러와 그 곡절을 물어 들이라."
하였는데, 병정이 대답하기를,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관복을 찢어버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신의 경우는 성상의 융숭한 은혜를 입어서 차마 편의대로 떠나갈 수가 없습니다. 만약 한가로운 관사의 대수롭지 않은 직책이라면 혹 잠시 행공하다가 곧 또 체직되어도 되겠으나, 총재는 바로 삼사(三司)를 차출하는 자리입니다. 오늘날 비록 이 삼사를 차출하더라도 금령(禁令)이 하도 엄격하여 모두 입을 다물고 있으니, 저 삼사를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미 삼사를 차출하고 싶어하지 않으시니, 전관의 자리에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조 판서가 행공하기 이전에는 삼사를 임시로 줄이는 자리로 만들어 두고 차출하지 말았다가 그가 행공하기를 기다려서 차출하라."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상소하기를,
"한 나라의 정치에 있어서는 조운(漕運)의 일이 가장 엄한 것인데도 신이 이를 제대로 신칙하지 못하였고 봉상하는 정성에 있어서는 공헌(貢獻)이 가장 공경히 하여야 할 일인데도 신이 이를 삼가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근일에 와서는 도내의 사정이 갈수록 더 한심해져서 가슴이 답답하고 정신이 멍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걱정이 가슴속에 쌓여도 상달할 길이 없고 위험이 많아도 조치할 줄을 모르며 때로 혼미해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서도 어떻게 한 도를 다스리는 중책을 담당하여 구중궁궐에서 밤낮으로 걱정하시는 것을 덜어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지난날 죄수의 공초 중에 나온 갖가지의 외람된 말 역시 신이 조정에 수치를 끼친 일단입니다. 신이 비록 못나기는 하였으나 어찌 이러한 잗다란 일을 따져 밝힐 것까지 있겠습니까. 다만 이른바 연명(延命)047) 때 주고받았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헛말이요, 편비(褊裨)들이 간사하게 가려주었다는 지목은 수모를 면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면직을 바라는 것은 참으로 다른 일에 있고 보면 이러한 일들은 거론할 것도 못 됩니다. 삼가 신의 관직을 속히 체차하여 공사(公私)간에 편리하도록 하고 이어 신의 앞뒤 죄과를 다스려서 국법의 기강을 세우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전라도 관찰사의 유원(留院) 상소를 보건대 그 요어(要語)는 ‘도내의 사정으로 걱정이 가슴에 쌓여도 상달할 길이 없다.’는 등의 몇 구절인데, 과연 넌지시 비추는 뜻이 없다는 말인가. 이른바 걱정이 가슴에 쌓인다는 일은 무슨 일이며, 상달할 길이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비록 완연히 금지령048) 을 범하지는 않았다 치더라도 과연 병사(兵使)의 일이 아니겠는가. 전말을 분명히 밝히지 아니하고 찧고 까부는 데에만 뜻을 두고 있으니 그 죄가 오십보 백보이다. 그때의 처분은 잘못 정실을 따른 데에 가깝다. 그 상소를 금호문(金虎門) 밖에 던진 것은 좌부승지의 죄가 아닐 수 없다. 대문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승정원 안으로 날아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어찌 감히 성명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금지령을 범한 것과는 다르다고 핑계를 댈 수 있단 말인가. 좌부승지 홍의호(洪義浩), 병조 당상 박성태(朴聖泰)를 전라 병사의 우후(虞候)로 체부(遞付)하되, 성문 개폐 시각에 관계 없이 한밤에라도 내보내어 하루에 이틀 길을 달려 부임하도록 할 것이며, 만에 하나 지체할 때는 병사로 하여금 운주헌(運籌軒) 앞에다 크게 위의를 벌이고서 잡아들여 엄히 신문하여 그 초사를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시임 우후는 경관직으로 체부할 것이며, 수문장은 문책할 것이 없고 병조에 입직한 낭청은 강진현(康津縣)에 충군(充軍)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정창순(鄭昌順)의 관직을 체차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홍성연(洪聖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구상(具庠)을 병조 판서로, 윤사국(尹師國)을 한성부 판윤으로, 민종현(閔鍾顯)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5월 10일 병신
황단(皇壇)에 나아가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망배례에 참석한 음유(蔭儒)를 시험보였다. 이어 병조 판서와 훈련 대장에게 명하여 유엽전(柳葉箭)으로 한 차례 무사들을 시험보여 뽑은 다음, 모두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5월 11일 정유
함경도 관찰사 김화진(金華鎭)이 덕원부(德源府)의 민가 3백 채가 불타버렸다고 치계하니, 요역을 면제하고 환곡 환수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5월 12일 무술
유몽인(柳夢寅)의 관작을 복원시키니, 의금부가 아뢰기를,
"서부(西部) 유학 유화(柳𤤤)의 상언(上言)에 ‘신의 7대조 몽표(夢彪)의 아우 몽인이 지난 계해년049) 에 문회(文晦)와 이우(李佑)의 무고를 입고 이름이 역안(逆案)에 들어가서 여태 신원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역적의 역명을 쾌히 씻어 주소서.’ 하였습니다만, 그의 호소에서 비록 몽인이 진하(陳賀)에 불참하였다가 그처럼 도륙을 당한 것으로 신원을 호소하는 핵심을 삼고 있으나, 산사(山寺)에서 시를 짓고 죽기로 작정하였다는 말이 단안(斷案)에 함께 들어 있고, 또 의금부 등록에 ‘포도청에서 몽인을 망명한 지 여러 날 만에 체포하였다.’라는 계사가 있고 보면, 그의 범죄가 크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그런데도 근 2백 년 뒤인 오늘날에 와서 방손(旁孫)이라는 구실로 장황한 말을 늘어 놓아서 성상의 귀를 번거롭히기까지 하면서 감히 신원할 궁리를 낸다는 것은 그 정상을 캐어 볼 때 너무도 무엄한 행위입니다. 복직을 시행하지 말고 해조로 하여금 법률을 적용하여 엄히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의금부가 또 아뢰기를,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의 상언에 ‘신이 언젠가 야사(野史) 속에서 유몽인의 사적을 보고 반복 강구한 바, 마침내 그 행적을 가엾게 여기고 그 정상을 용서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책을 덮은 채 탄식을 하곤 했습니다. 대저 몽인은 섬기던 임금에게 충성을 하느라 나라의 존망과 임금의 명암으로써 그 지조를 바꾸지 않고, 자취를 감추고 서산(西山)으로 들어가서 시를 지어 과부에 비견하며 끝까지 돌아서지 않고 죽기를 작정한 것으로 볼 때, 시종 한결같이 절개를 지켰다고 보아도 됩니다. 그리고 공사(供辭)로 보더라도 천명(天命)이 한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서 애당초 꼬집을 만한 패설(悖說)을 하지 않았고 보면, 어찌 신하에게 내리는 극죄를 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옛사람들의 행적을 논평하는 선비들 가운데는 지금까지도 애처로워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기자헌(奇自獻)과 김원량(金元亮)은 같은 때에 형벌을 받았어도 자헌은 흉도들과 이론(異論)을 폈다는 이유로 마침내 신원되었고 원량은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비문을 지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몽인이 옛 임금을 위하여 절의를 다하다가 몸은 도륙을 당하고 이름은 죄적(罪籍)에 오른 것에 대해 억울하다고 하는 일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몽인은 혼조(昏朝) 초년에 이조 참판을 지냈는데도 흉도들과 의논을 달리하다가 십여 년 동안 산수(山水)를 방랑하였고 보면, 조정에 있을 적의 전말도 역시 취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기자헌의 사례에 의하여 특별히 신원하여 주어서 풍속을 세우고 세상을 권려하는 정치의 표본을 삼으소서. 그러나 일의 체모가 가볍지 않은 만큼, 조정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서 시행하는 것이 지당할 듯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김희(金憙)는 ‘유몽인이 비록 흉도들과 다르기는 하나 반정(反正) 이후에도 감히 백이(伯夷)·숙제(叔齊)를 자처하며, 이미 무너진 이륜(彝倫)을 다시 바로잡겠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논한다면 당시의 극형을 어찌 감히 억울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의 두 조카가 처음에 귀양을 가기는 하였으나 마침내 사면되었고 보면, 조정의 처분이 더더욱 어찌 십분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평생 이력을 되돌아 볼 때 혼조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2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그의 7대 방손이 외람되고 잗다란 말로 갑자기 신원을 거론한다는 것은 이륜을 북돋우는 도리에 흠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란 오직 그 처지에서 목숨을 바칠 뿐 임금의 명암으로써 절의를 달리하지 않는 것이 떳떳한 도(道)입니다. 이번에 유몽인이 벌을 받은 것은 그 죄가 진하(陳賀)의 반열에 참석하지 않고 시를 읊어 올린 데 있는데, 그 시의 인용어가 비록 불륜(不倫)하기는 하나 자신의 결심을 드러낸 것일 뿐 애당초 분의(分義)를 벗어난 말이 없고 보면, 당시에 극형에 처한 것은 대개 인심을 진정시키고 후환을 방지하자는 뜻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또 조정에 있을 적의 전말을 상고하여 보아도 혼조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벼슬을 한 적이 없었으며 끝내 흉도들과 의논을 달리하여 외진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반정한 뒤에도 기꺼이 폐칩(廢蟄)하여 나름대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를 자처하였으므로, 당시 노성(老成)들의 말에서도 이미 살려주자는 논의가 있었고 후세 유식자들 중에서도 아직까지 그를 안타깝게 여기는 논의가 많습니다. 더구나 문회(文晦) 등이 고발한 사람들은 벌써 다 신원되었고 보면, 오늘날 그의 방손의 호소는 외람되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된 중대한 사안이고 대신의 헌의도 서로 다르므로 본부에서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주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판부(判付)하기를,
"억울한 원한을 품은 지가 1백 년이 넘도록 신원을 언급한 사람이 없었으니 잘못된 일이며 궐전(闕典)이라 하겠다. 대저 유몽인의 사적은 하인배와 아녀자들까지도 일컫는 사실이므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노성한 장자(長者)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속일 수 없은 공론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남의 신하가 되어 몸을 버리거나 목숨을 끊은다는 것은 큰 절의를 지키자는 의도는 마찬가지이지만, 어느 한쪽을 택함에 있어서 그 난이도는 각기 다르다. 이러므로 조용히 의리를 지키는 것이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끊는 쪽보다 나은 듯도 하다. 유몽인으로서야 어찌 어렵고도 어려운 입장이 아니었겠는가. 《시경(詩經)》 백주편(栢舟篇)을 상스럽고 비속한 말이라고 하지 말라. 그의 남록시(南麓詩)는 참으로 천고의 절조(絶調)로서, 그 음조는 원망을 하는 듯도 하고 애원을 하는 듯도 하며, 그 뜻은 흥(興)인 듯도 하고 비(比)인 듯도 하여 읽던 자가 책을 덮어버리고 듣던 자가 눈물을 흘리게 하니, 이것 또한 몽인의 생사(生死)간의 단말마적 절규이다. 그가 혼조 때에는 정도(正道)를 지키느라 자취를 감추어 기꺼이 폐칩(廢蟄)하였고 반정 뒤에 와서는 일월이 빛을 뿜으며 천지가 다시 밝아졌어도 절의를 굽히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으니, 떳떳한 분수에 있어서 조금의 하자도 없다. 기자헌은 같은 때에 무고를 당하고서도 용서를 받아 죄를 입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죄를 입었다가 곧바로 복관이 되었으나, 유독 몽인만은 그같은 조행(操行)으로도 마침내 그에 대한 논의가 금지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길재(吉再)·김시습(金時習) 등을 관용하던 성조(聖祖)의 뜻이 아니라 하겠다.
또 듣자니 몽인의 친조카 숙(潚)과 혁(㴒)이 귀양지에서 풀려나 한 사람은 병조 당상이 되고 한 사람은 승지가 되었고 보면, 또한 성조의 뜻을 우러러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죄안이 아직 의금부에 남아 있으니, 널리 자문을 구하고 있는 오늘날인 만큼, 비록 서로간에 의견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참으로 당연히 시행하여야 될 일이고 또 성조의 뜻을 잘 계승하는 데 빛이 나는 것이라면 어찌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해지길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유몽인의 신원은 원하는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경기도 교동(喬桐)과 해서(海西)의 일곱 고을에 진휼을 설행하였는데, 1월에 시작하여 이때에 와서 끝냈다. 【교동은 기민이 1만 9천 3백 33명에 진휼곡이 1천 2백 24석이다. ○ 해서의 해주(海州)·안악(安岳)·연안(延安)·평산(平山)·옹진(甕津)·배천(白川)·강령(康翎)은 기민이 총 13만 5천 6백 89명에 진휼곡이 1만 1천 7백 42석이다.】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473면
【분류】구휼(救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신하들이 노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라는 말을 들었는가. 밤낮으로 부지런히 정무에 힘써도 온갖 법도가 번잡해지기만 하여 기강은 해이해지고 헤쳐나갈 대책은 없으니, 형세가 장차 처음부터 각별히 문제를 찾아내어 하나하나 책임을 지고 정돈하여야 경을 초빙해온 노력이 그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경의 선조 문헌(文獻)050) ·문충(文忠)051) 및 문경(文敬)052) 은 모두가 사방에서 노력을 다하고서 드디어 윤비(綸扉)053) 에 올라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경도 경의 집안 사람이면서 어찌 행여라도 노고를 말하여 선조들의 미덕에 뒤지는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재계를 하루 앞두고 있어 주의(注意)의 대략을 간략히 전달하는 바이니, 경은 부디 생각을 바꾸어서 신하로서 노고를 아끼지 않는 큰 업적을 세우라."
하였다.
한만유(韓晩裕)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승지 이노술(李魯述)을 불러 보고서, 상이 노술에게 이르기를,
"지난날 당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가?"
하니, 노술이 아뢰기를,
"신의 아비가 정해년054) 에 서명응(徐命膺)의 정사(政事)로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나갔다가, 그 뒤 심환지(沈煥之)의 탄핵을 받고 갑산(甲山)으로 유배된 일이 있은바, 그 당시 ‘세월이 오래되어 잊혀진 일을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전교가 내려졌고, 임인년055) 에 와서 특별히 사면의 은전을 받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숙질(叔姪)간에 문형(文衡) 자리를 다투느라 주권(主圈)하는 자의 기관을 공격하려는 데서 발단된 것으로, 대개 환지는 그 숙부의 환지가 아니다."
하니, 노술이 대답하기를,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역적 홍국영(洪國榮)이 사주를 하는데 어찌 시킬 사람이 없겠습니까마는, 그럼에도 환지가 앞에 나서서 담당을 한 것은 역시 감정을 품고 있어서였습니다. 신이 병신년056) 에 홍문관에 재직하면서 상소로 김귀주(金龜柱)를 논죄하면서 그의 삼촌도 언급하였는데, 그때 귀주의 일은 대간이 이미 발론하였고 김한기(金漢耆)의 일은 신이 먼저 발론하였습니다. 환지가 기어코 신의 집안에 분풀이를 하려고 한 것은 진정 이 때문일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승지의 아버지가 역적 홍계능(洪啓能)과는 어떻게 서로 알게 되었으며, 승지 역시 글을 배운 적이 있는가?"
하니, 노술이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는 갑자년057) 이전에는 사귀었으나 신묘년058) 이후로는 시골에 물러나 있어서 서로 만나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신은 하도 용렬하여서 유학을 할 자격이 못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의 선조께서 자손들에게 경계하시기를 ‘사문(師門)을 따라 다니며 배운 것을 가지고 세상에 내세워서는 안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과연 글을 배운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 다시는 서로 어긋나 스스로 좌절하지 말라."
하였다.
5월 13일 기해
상이 재계를 하느라 정사를 보지 않았다.
5월 20일 병오
재계하는 날의 윤음(綸音)을 중외에 반포하였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이달의 이날에다 또 이해를 만났구나. 이 해가 어떤 해인가. 모진 목숨이 아직도 살이 있으니 아득한 저 푸른 하늘이여, 이 어떤 사람인가. 울부짖다 목숨이 끊어질 듯한 중에서도 끊임없이 갈구하는 생각만은 남아 있다. 그렇다고 어찌 차마 문자로써 윤음을 내려 여러 신민(臣民)에게 포고하고 중외에 전파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감정을 억제하고 억울함을 인내하며 차마 말을 안 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제왕의 효도란 보통 사람의 효도와 달라서 반드시 훌륭한 점을 천양하는 것으로써 부모에게 보답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대절(大節)을 삼기 때문이다. 금니(金泥)로 쓴 옥첩(玉牒)이 훌륭한 점을 드러내는 데 어찌 보탬이 되겠는가. 빛나고 빛나는 큰 계획이야말로 바로 급히 천양해야할 바이다. 탕(湯)임금은 신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미덕이 있고 순(舜)임금은 신하의 뜻을 가로막지 않는 아량이 있지 않았던가. 천고를 훑어보아도 이 두 성인이 있었을 뿐이니 그처럼 자신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기란 어려운 일이다.
아, 말을 하자니 천지가 아득하고 말하지 않자니 덕의를 알아볼 자가 누구이겠는가. 아, 간곡하던 그 당부가 아직도 기억이 나서 마치 어제의 일과 같다. 이르시기를 ‘나에게 잘못이 있고 없음은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다. 나의 잘못을 들추어낸다해도 내가 용납하여야 하고 고자질하는 말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고 특별히 전벽(殿壁)에다 써 붙여서 거리끼지 않는 문을 활짝 열어 놓았으니, 그 도량의 광대함은 천지로도 헤아릴 수 없다. 조정 신하들이 나삼(羅蔘)059) 에 관한 한 일을 직함으로 용납하여 준 일을 가지고 끝없이 넓으신 도량을 찬양하고자 하는 것은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측량하는 것 같을 뿐이다.
아, 경진060) ·신사년061) 즈음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랴. 진신(搢紳)·장보(章甫)들이 수많은 장주(章奏)를 올렸어도 죄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사람에게도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떤 이가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신하의 의리로서는 마땅히 서지수(徐志修)처럼 입대를 청하여 직접 진술하는 것을 정도로 삼아야 한다.’고 하니, 이에 ‘송(宋)나라의 전석(田錫)처럼 상소문을 모두 불태우게 하는 것도 잘못이고, 한(漢)나라 주창(周昌) 같이 항변을 하도록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최후의 한 마디는 매우 망녕되고 심한 말이지만 나 역시 죄를 주지 않겠다.’고 책유(責諭)하였다. 연신(筵臣)들은 황공한 나머지 땀을 흘리며 물러나 이것을 가승(家乘)에다 기록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곧바로 구언(求言)의 교지를 내려 모두 할 말을 다 하도록 허락하였다. 아, 거룩하도다. 나 소자 어찌 감히 가슴에 새겨 두고서 어버이의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작년 22일날 통유(洞諭)를 할 적에 이른바 올리지 못한 상소가 있다고 들었으나, 아직 그 원본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가 발휘하여 추술(追述)하는 의도를 대략 언급하면서도 오히려 그 상세한 내용을 볼 겨를이 없었는데, 연래(年來)의 정사 주의(政事注擬)를 보고서 역시 그 대략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대로 맡겨둔 것은 이해의 이날을 기다려서 조정의 모든 신하들에게 한 번 파헤쳐 보이자는 의도였다. 이른바 올리지 못한 상소란 공적인 상소인가, 사적인 상소인가? 공적으로 울분을 품어서인가, 사적으로 원한을 갚자는 것인가? 백세(百世)의 논정(論定)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대장부라면 그 누가 이것이 공적인 울분을 구실로 사적인 원한을 갚자는 의도로서 그 저의가 공분(公憤)이 아닌 사감(私憾)에서였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이러한 일에 하나의 ‘사(私)’ 자를 관련시켜 놓았으니 이러한 일도 차마 한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하겠는가. 그럼에도 감히 해맑은 하늘을 무지개로 가리고야 말겠다는 것인가. 대저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거론하지 못할 지극히 정미한 의리와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거론하지 못할 더없이 엄중한 일을 가지고서 번갈아가며 저들이 협잡의 도구를 삼아 궁벽한 곳에서 거침없이 이리저리 발로시키고 있으니, 이러한 정태(情態)는 아무리 남들이 다 알아볼 수 있다고 치더라도 나처럼 뼈저린 마음으로 분명히 분석하여 환히 들여다보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이날의 이 유지(諭旨)가 어찌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겠는가.
아, 재계의 마지막 날이 밝아오매 제향의 시각이 지나가기를 앉아서 기다리다 못하여 촛불을 켜고 눈물을 섞어 이 혈성(血誠)을 쏟아내는 바이니, 행여라도 이 유지로 인하여 만에 하나라도 미덕을 천양하는 데 보탬이 된다면, 나 소자는 아마 저승에 돌아가 뵈올 면목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내년 봄에 가서 존호를 올리는 의식에 비교가 되겠는가. 조정 신하들에게 거듭 포고하노니, 이 유지를 조용히 귀담아들으라."
5월 22일 무신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상이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에게 이르기를,
"이달 이날에 또 이해를 만나 9일 간 재계한 나머지 신기(神氣)를 차리기는 어려우나, 경들이 안부를 물어왔기 때문에 잠시 불러들인 것이다."
하였는데, 낙성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삼가 윤음(綸音)을 받들고 나서 흠앙하는 마음을 참으로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이륜(彝倫)이 이로부터 바로잡힐 수 있고 재앙의 뿌리가 이로부터 근절될 수 있을 것이므로 실로 세도(世道)를 위하여 큰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그때의 일을 어찌 차마 거론하겠습니까마는 그 뒤 혹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한 바, 보이는 곳마다 ‘아무개는 이런 일이 있었고 아무개는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의리로서 마땅한 바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로서는 어찌 차마 그것을 다 파헤쳐서 말할 수 있겠는가. 대개 선왕조에서 이 일에 대하여 금령을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다투어 소장(疏章)을 올렸지만, 죄를 씌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때마다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으니, 이는 참으로 천지와 같은 큰 아량이라 하겠다. 나의 재작년의 통유(洞諭)와 어제의 특지(特旨)도 선왕의 거룩한 덕을 발휘하자는 것이었다. 김상로(金尙魯)의 죄는 선왕조에서 이미 하교가 있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홍계희(洪啓禧)가 김상로보다 더 심하다. 이 두 역적은 내가 벌써 징토(懲討)를 하였다. 그러나 이들 이외의 경우를 어찌 사혐(私嫌)으로 보고 그냥둘 수 있겠는가. 이른바 재작년의 유소(儒疏)라는 것도 이것이 어찌 말이나 되는가. 또 아직 올리지 못한 상소가 있다고 하는데, 아직 그것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 내용은 대강 들었다. 그 속에는 사감(私憾)을 품은 내용도 있고 수치를 씻으려는 내용도 있다 하는데 그 가운데 어느 것을 빼버리고 어느 것을 더 넣었다는 말인가. 매우 엄중한 의리를 가지고 저들의 협잡 도구를 삼고 알듯 말듯한 말을 가지고 횡설수설하여 되지못한 못난 무리들이 모두 몰려들게 하였는가 하면, 명색을 소청(疏廳)이라고 하면서 술과 고기로 흥청망청하였으니, 세상에 어찌 이런 괴변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어찌 그때 당장 엄한 주벌을 가할 줄 몰랐겠는가. 그럼에도 지금까지 침묵을 지켜 온 것은 의도가 있어서였고, 어제의 윤음에서 ‘궁벽한 곳[涯角]’이란 두 글자를 쓴 것은 지리상의 멀고 가까움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라는 뜻이다. 경들은 과연 이해를 했는가?"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애각’이라는 말을 읽고서도 성상께서 무엇을 가리키신 것인지 몰랐으나 이제 하교를 받들고 나니 비로소 이해가 갑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부사가 여러 낭설에 휘말려서 스스로 혐의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애각’의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영부사의 작년 상소를 내가 그르다고 하지 않은 것은 경으로서는 본래의 사정을 잘 알고서 이런 소를 올린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윤음 내용에 이른바 최후의 한마디를 운운한 자를 경들은 서지수로 보지 않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이 한마디의 말을 신이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조원(李祖源)이 일찍이 승지로서 연석에 올라왔을 적에 ‘전하께서는 큰 길을 버려두고서 꼬부랑길을 택하십니다.’고 아뢰었으나 특별히 다 살려주려는 뜻으로 지금까지 목숨을 보존하여 주었다. 그가 이른바 꼬부랑길이라고 한 것은 과연 무엇을 가리킨 것이겠는가. 유성한(柳星漢)에게 아직까지도 죄를 씌우지 않은 것 역시 생각이 있어서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유몽인(柳夢寅)을 신원시키는 일에 대하여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 역시 이 일에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대저 몽인이 인묘(仁廟) 때에 이미 분수를 벗어났다는 말이 없었고, 또 서궁(西宮)062) 에 충성을 다하였고 보면, 그의 죽음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일 뿐이다. 나로서는 몽인의 일을 육신(六臣)만 못한 것이 없다고 여긴다. 듣자니 몽인의 아들도 처벌을 받았다고 하는데, 경들은 아는가? 몽인에게는 증직을 내리고 그의 아들 역시 복관(復官)시키고자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였는데,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이 아뢰기를,
"그의 아들의 일은 몽인과 차이가 있습니다. 몽인 부자가 동시에 처벌을 받았다면 똑같이 신원시켜도 안될 것이 없으나, 일이 이미 각기 다른 이상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몽인 부자의 일은 의금부 문안을 다시 상고하여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후 이달을 맞을 적마다 너무 마음 아파하시기 때문에 기무(機務)에 관련된 일을 품재할 수 없어서 군국(軍國)의 일이 적체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 뒤로는 비록 청재(淸齋) 중이더라도 신하들을 불러들여 서무를 결재하시는 것이 신들의 바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때에 있어서의 나에 관해서는 상례로 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지난날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을 제주(濟州)로 유배보낸 것은 지나친 처분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대신(臺臣)이 한 일은 너무도 놀라웠다. 승지가 없는 때를 엿보아서 당후(堂后)에게 계초(啓草)를 보낸다는 것이 어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설혹 잘못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제주에까지 유배한다는 것은 어찌 과중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날 차대(次對)에서 이병정(李秉鼎)이 아뢴 말은 참으로 옳다. 연일 부름을 어기던 대간들이 그때야 비로소 들어온 것은 과연 무슨 의도였겠는가. 그 사람으로 볼 때는 너무 책할 것이 못 된다 하더라도 그 직책으로 본다면 대간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제주보다 더 먼 곳이라 하더라도 과중한 것이 아니다. 경의 말이 비록 이러하지만 함부로 석방시킬 수 없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지난날 합계 때에는 삼사(三司)에게 맡기겠다는 전교를 내리시고서 어찌하여 다시 삼사로 하여금 발계(發啓)하지 못하도록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삼사에게 맡기겠다는 말은 곧 금령을 거둬들이는 데에 관한 계사만을 허락한 것이다."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원 계사를 장차 정계(停啓)하려는 것입니까? 오늘날 조정이 어찌 이 계사를 정지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일이라면 다시는 입밖에 내지 말라. 나는 이미 뜻을 굳혔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아뢰기를,
"국가에 큰 역사(役事)가 있을 경우 백성을 부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통용되어 온 관례입니다. 공자(孔子)도 역시 ‘백성을 시기 적절하게 부린다.’고 하였지 언제 백성을 부리지 말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이번 화성(華城)의 성역(城役)은 국가의 대사이므로, 일의 체모로 말한다면 나라가 백성들에게 역사를 맡기지 않을 수 없고 도리로 말한다면 백성이 나라를 위하여 부역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너무 아낀 나머지, 한 사람이라도 노역에 지치는 폐단이 있을까 싶어서 아직까지 백성을 적절히 부리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계시니, 이는 벌써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시키려 해야 한다.’는 의리를 저버리고 있다 하겠습니다. 승군(僧軍)의 경우 더더욱 이런 일에 쓰기에 합당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백성과 승군을 묘당으로 하여금 그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감안하고 그 수효의 많고 적음을 균등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며칠동안 성역에 부역하도록 조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찌 사세가 이러함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본부의 성역에 기어코 한 명의 백성도 노역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내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김화진(金華鎭)이 《함흥영흥양본궁의식(咸興永興兩本宮儀式)》을 간인(刊印)하여 올리니, 비부 사고(秘府史庫)에 보관하였다.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판으로, 윤확(尹㬦)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강화(江華)에 충군(充軍)한 죄인 서유대(徐有大)를 석방하여 다시 훈련 대장을 제수하였다.
병조 참의 박종갑(朴宗甲)을 의흥(義興)에, 병조 좌랑 홍수호(洪受浩)를 강동(江東)에 유배하고 승지 정대용(鄭大容)의 관직을 삭탈하였는데, 군호(軍號)를 잘못 썼기 때문이었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상소하기를,
"아, 이때가 어떤 때입니까. 위로는 비상한 잘못이 있고 아래로는 소란하던 뒤끝의 근심이 남아 있어, 극도로 위태로운 국세(國勢)에 신과 사람이 다 같이 놀라고 지엄한 대금지령으로 온 세상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신이 비록 불초하기는 하나 늘 육경(六卿)의 반열에 있어 온 이상, 나라에 대사가 있으면 당연히 참여해서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이 대론(大論)은 하인배와 아녀자들까지도 같은 심정이고 보면, 성상 앞의 조그마한 자리라도 빌려 미어지는 심정을 후련히 진술하는 일은 하루가 더 급합니다. 그럼에도 부당한 이 직함을 차지하고 앉아서 헛되이 며칠을 보내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신이 갈수록 피가 더 끊어서 안주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직함을 쾌히 해임하시어 상의 앞에 나아가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그러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돈유(敦諭)에서 벌써 할 말은 다 하였고, 또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도 자세히 말하였다. 경이 그날로 생각을 바꾸기만을 기다렸는데, 때마침 경의 두 번째 상소를 보니 예나 다름없이 고사하며 조정에 나올 생각이 없다고 하니, 나의 성의가 모자라는 것이 부끄럽다. 그러나 재계 중이라 수응하기가 매우 괴로우니, 모든 일들은 모두 연석에 올라왔을 때에 직접 효유하겠다. 경은 부디 당장 일어나 나와 숙배(肅拜)하여 나의 기다리는 마음에 부응하라."
하였다.
5월 24일 경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상소하기를,
"오늘날의 여론이 모두 먼저 금령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눈앞의 제일 의리로 삼은 나머지 길거리에서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갈수록 들끊고, 와글거리며 분개하는 정상은 지난 일이라는 이유로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으니, 신이 직접 들은 것만도 가슴이 뛰고 뼈가 저립니다. 신을 아끼는 이는 신으로 하여금 할 말을 끝까지 다하여 몸이 나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까지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부추기고, 신을 책하는 이는 거취에 구애받아서 이럭저럭 시일만 보내고 있다고 나무라므로, 두 말을 신이 다 같이 신의 죄로 받아 들이고는 있으나, 전자의 말을 따르자니 대론(大論)이 지엄하여 결코 그것을 사본(辭本)에 덧붙여 진술할 수 없고, 후자의 말을 따르자니 거취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경재(卿宰) 이하의 관직으로서 경우에 따라 잠시 응하였다가 곧바로 해임되는 것을 말하는데, 신이 차지한 직함은 한 번 다시 벼슬길에 나아오면 곧 그 직함으로 자처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심정은 성상 앞의 조그마한 자리라도 빌리고 싶으나 의리상 이로써 대법을 먼저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의 피가 갈수록 더 끓고 면직의 청이 갈수록 더 급해지는 이유입니다. 삼가 특별히 면직을 윤허하시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정성을 이루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바람을 이룰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펼쳐 보고 있는데 마침 처마 끝의 빗물 소리가 세차니 바라고 바라던 끝에 농삿일이 아주 다행스럽게 되었다. 옛날 상왕(商王)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가뭄 끝의 단비에 비유한 고사가 경을 위하여 비유된 것인 듯하다. 더구나 지금은 의정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서무가 적체되어 있어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갈증보다도 더 심하다. 경은 부디 너무 인혐(引嫌)하지 말고 당장 일어나 조정에 나오라."
하였다.
중국 사람이 표류하여 와서 정주(定州)의 신도(薪島)에 정박하여 있는 것을, 정주 목사 이의강(李義綱)이 사정을 물어보는 과정에서 실수가 많았다 하여, 평안도 병마 절도사 신응주(申應周)가 그 죄를 논계하는데, 병마 절도사로서는 수령을 바로 파면할 수 없는 법례를 들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할 것만을 계청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변정(邊情)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는 병사가 수령을 파면하는 것은 법례상 곧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니, 병사로서 묘당의 품처만을 계청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변정에 있어서만 어찌 유독 그렇겠는가. 군정(軍政)이란 더더욱 기율(紀律)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문관 수령이건 음관 수령이건 꺼리지 말고 범죄 사실이 있을 경우에는 혹시라도 용서해 줌으로써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5일 신해
차대(次對)를 하였는데, 우의정 이병모가 사은 숙배하고 연석(筵席)에 올라와 상에게 아뢰기를,
"신이 이미 대관(大官)으로 연석에 올라온 이상 침묵만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정령(政令)이나 조처가 모두 어떤 근거가 있었습니다만, 이번의 일에 있어서는 무슨 근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신이 한 마디의 말씀으로 우러러 아뢸까 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이 옳다고 여기신다면 《주역(周易)》에 보인 ‘멀지 않아서 회복된다.[不遠而復]’는 것이 바로 이때일 것입니다.
대간의 논계가 비록 이전처럼 등사·전달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껍데기 중에 껍데기일 뿐입니다. 지난번에 ‘나 또한……’이라고 하신 말씀을 전하께서 어찌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오늘 연석에 올라온 여러 재신(宰臣)들도 필시 그 본말을 아직 자세히는 알지 못하겠지만, 신 같은 자가 어찌 행여라도 모를 수 있겠습니까. 그때의 문적(文蹟)들을 팔방에 반포하여 보여서 중외로 하여금 분명히 알도록 하소서.
신이 듣자니 내탕(內帑)의 재물을 일용(日用)에 넉넉하게 주고 액정(掖庭)의 하인들이 도로에 끊이지 않는가 하면, 거처의 편안함이 강촌의 별장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에는 하나도 금령을 설정하지 않고 또 의금부의 국안(鞫案)에도 써넣지 말도록 하면서 신민(臣民)들이 징벌할 것을 청하는 데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완강히 거부하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렇게 지나친 거조를 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2품관의 입시 때에 고 재상 최명길(崔鳴吉)이 이른바 ‘인신(人臣)은 왕릉(王陵)을 제일의 의리로 삼아야 한다.’고 한 뜻을 인용하여 하유하였다. 고 재상이 어찌 삼학사(三學士)만 못하여서 즐겨 그런 일을 하였겠는가. 사람들 가운데에는 항상된 법도를 지키는 자도 있고 권도(權道)를 따르는 자도 있는데, 나는 나름대로 달권(達權)을 한 데가 있기 때문에 뭇 신하들을 겸제(鉗制)하고 싶지는 않다. 오늘날 만약 국가의 영원한 복을 빌고 싶다면 마땅히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때에도 못한 일을 하여야 되는데, 후세에 가서라도 한나라와 당나라 때도 못한 일을 내가 기어코 해내었다고 말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경들은 매번 주공(周公)을 끌어대어서 말하지만 나와 주공은 처지가 각기 다르다. 만약 주공을 성왕(成王)의 자리에 앉혀 놓았다면 필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다만 모두를 보존하여 주고 싶은 것만이 아니니, 이것은 실로 국가의 영원한 복을 비는 방법이다. 나의 소신은 어디에서나 엿볼 수 있고 언책(言責)은 이미 삼사(三司)에게 일임하였으므로, 경이 나라와 한 몸이 되어 담당한다면 오늘날의 조정은 아마 다스려질 수 있을 것이고 나는 당연히 온화한 얼굴로 받아들이지 강경하게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이 만약 나라와 한 몸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각기 제 자리를 지키는 길뿐이다."
하자, 병모가 아뢰기를,
"외간의 여론이 다들 말하기를, 새 정승이 등대(登對)하면 반드시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려 놓는 한마디 말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이 이미 여러 재신들과 함께 연석에 올라 온 이상, 오늘날의 조정이 안위(安危)가 구별되지 않고 의리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을 보고서 어찌 한마디의 바른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의리와 징토(懲討)는 본래 두 가지의 일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금령을 거두어들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이것이 초연(初筵)이기 때문에 할 말을 다 하도록 한 것이나 지금으로서는 답변할 만한 것이 없다. 경이 온종이 말하더라도 나로서는 대답할 것이 없을 뿐이다."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대계(臺啓)를 다 물리칠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조정해서 행할 만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대계란 비록 촌지(寸紙)라 하더라도 만세의 준엄한 징벌의 증거가 되기에 족합니다. 그럼에도 중대하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비록 시정배나 백도(白徒)들에게 물어보더라도 모두 금령이 쾌히 거두어들여지기를 원한다고 할 것이니, 뭇사람들의 말은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대초(臺草)를 다 물리치려고 하는 것은 삼대(三代)의 미덕을 본받자는 간절한 생각에서이다."
하자, 병모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삼대의 미덕을 본받는다고 말씀하시니, 주공의 대의(大義)를 취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주공의 일만이 아니다. 대순(大舜)도 아우 상(象)을 유비(有庳)에 봉한 일이 있지 않은가. 그가 비록 경향(京鄕)을 왕래하였다 하더라도 상을 유비에 봉한 경우와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른 아침에 대궐에 나와 여태 아무 것도 먹지 않아서 격기(膈氣)가 이따금씩 오고 있으니 수응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경은 다시는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
하자, 병모가 아뢰기를,
"신도 참으로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금령만 쾌히 거두어들이신다면 상하간의 거조가 저절로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년을 두고 끝없이 복을 받을 것이라 했으니, 이는 국가의 영원한 복조를 비는 길일 뿐만 아니라 세신(世臣)에게 있어서도 역시 태평성대를 같이 누리게 될 것이다. 경들도 한 번 생각하여 보라. 대저 우리 나라의 종친이 목릉(穆陵)의 후손 이외에 다시 누가 있다는 말인가. 나의 뒤에 사왕(嗣王)이 만약 ‘아무 시대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면 이 어찌 빛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맹자(孟子)의 말에 ‘왕자가 일어난다면 반드시 와서 본받을 것이다.[有王者作必來取法]’ 하였거니와, 우리 나라는 바로 하나의 편방(偏邦)이다. 만이(蠻夷)들이 만약 복종을 한다면 이것 또한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 나라가 비록 작기는 하나, 개국 이후로 훌륭히 성장하여 온 왕업이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 때에 이미 기반이 다져졌으므로, 중화(中華)를 숭배하고 만이를 배척하는 의리는 영원히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이 일에 있어서도 앞으로 천하로 하여금 나를 의식(儀式)으로 삼게 한다면 나도 반드시 ‘나에게 훌륭한 후손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자, 병모가 아뢰기를,
"먼저 금령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제 2의 의리로 보신다면 이러한 하교 역시 하나의 단견에 불과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시급한 일이 아니다."
하자, 병모가 아뢰기를,
"이것이 어찌 시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오늘 말씀은 오로지 성궁(聖躬)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성궁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도 이처럼 지루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수응하기 어려운 나의 고충은 어찌 생각하지 않는가. 경을 파직시키니 물러가라."
하자, 병모가 아뢰기를,
"신이 파직되어도 백의 등연(白衣登筵)의 사례도 있는 만큼 못다 한 말을 다 하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파직된 대신이 어떻게 연석(筵席)에 무릅쓰고 있겠다는 말인가. 당장 물러가라."
하였다. 비변사 당상 정민시(鄭民始) 등이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혈성을 다하여 성심(聖心)을 돌이켜 볼까 하는데도 윤허하여 따르시기는 커녕 도리어 파직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이처럼 성명(聖明)한 세상에 어찌 이런 지나친 처분이 있단 말입니까."
하고, 교리 장지현(張至顯)이 아뢰기를,
"대신의 말은 곧 삼사의 말이고 삼사의 말은 곧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 대신이 반나절 동안 등연하여 금령 환수를 계청하는데도 윤허는 내리지 않고 마침내 파직의 명까지 내릴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하니, 지현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천하의 만사가 그 어느 하나도 임금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예로부터 임금에게 충고를 할 때는 마음을 제일의 의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발하는 것이 정(情)이므로 정이 혹시라도 바름을 잃게 되면 마음이 바르지 못하여 천하의 일이 그 어느 하나도 정도를 따를 수 없게 되니,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입니다. 신이 연전에 삼가 전교를 보니 ‘칠정(七情)이 바름을 얻지 못하였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의도하는 바가 있어서 말한 것으로, 한 번씩 생각할 적마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년을 두고 사람을 감읍(感泣)시킬 말로는 이 전교만한 것이 없고, 한마디의 말이 나라를 잃을 수도 부흥시킬 수도 있다는 공자(孔子)의 말도 이 전교 만한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이는 참으로 위태롭고 은미한 인심과 도심을 갈음하는 기미(幾微)로, 그 사이에 털끝도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대저 이른바 천년을 두고 사람을 감읍시킬 수 있다는 것은, 전하께서 잘못을 덮어버리지 않고 충정을 다 말씀하시는 것이 일식·월식과 같아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마침내 큰 잘못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은, 전하의 성명(聖明)으로서도 잘못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한두 번 감정대로 나가서, 위태롭고 은미한 그 사이에서 다시 벗어나지 못한 채, 위태로운 인심은 갈수록 더 위태로워지고 은미한 도심은 갈수록 더 은미해지는 것을 말하는데, 근래에 내리신 차마 듣지 못할 하교에 이르러 전하의 과실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위로 전궁(殿宮)을 받들고 계시는데, 단 하나의 정령(政令)과 하나의 동작에까지도 선왕의 혼령이 날마다 지켜보시고 자식을 걱정하는 전궁의 마음이 잠시도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으므로, 전하께서 아무리 자신을 가볍게 여기려고 하더라도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이면 반드시 송연(悚然)히 놀라고 척연(惕然)히 깨닫는 데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시 이것을 가지고 신하를 억제하는 도구로 삼아서 외정(外廷)이 전도되고 혼란하기만을 바라시니, 모르기는 하나 전하께서 선왕의 마음으로써 전하의 마음을 삼고 전궁의 생각으로써 전하의 생각을 삼으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대저 이러하시다면 신으로서 감히 알 바가 아니나, 그렇지 않으실 것 같으면 전하께서 설혹 아주 절박한 생각이 있으시더라도 마땅히 마음속에 묻어 두어야 되지, 감히 표정에 드러내고 말로 발하여 진실되고 공경스러운 위의(威儀)에 손상을 입혀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역정을 내고 하교를 쏘아 붙이듯이 하여 한결같이 뭇 신하들을 억제하기를 일삼으며, 나를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대저 비상한 하교를 내려서 그것으로써 뭇 신하를 억제하는 행위는 한나라나 당나라의 중등 군주도 오히려 부끄러워 하였으니, 일찍이 전하께서 이런 행위를 하시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감정이 한 번 바름을 잃게 되면 그 말류의 폐해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니, 신은 실로 통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대소 정신(廷臣) 그 누구가 금령(禁令)을 먼저 거두어들이는 일을 눈앞의 제일의 의리로 삼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신만이 하는 지나친 우려는 만약 병통의 뿌리를 먼저 고치지 않는다면 오늘에 비록 금령을 거두어들이더라도 한 번만 촉발하면 억제하는 방도를 또 내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때문에 신이 감히 하교를 신중히 내리는 것으로써 금령을 거두어들이는 근본으로 삼고 위태하고 은미한 기미를 살피는 것으로써 하교를 신중히 내리는 근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왕업을 맡기신 선대의 뜻을 생각하고 정치의 근원을 밝히시어, 한편으로는 선왕의 혼령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전궁의 걱정을 풀어 드리며, 또 한편으로는 온 나라 신민의 바람에 부응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情)의 항목이 일곱 가지로 되어 있으나 모두가 마음에 근원을 두었는데 마음은 하나뿐이므로 이 하나가 격분하게 되면 나머지 칠정(七情)이 모두 발동되어 절도를 잃게 된다. 지난번 하유(下諭)에서 말한 것이 어찌 실제의 진경(眞境)이 아니겠는가. 치우치지도 기울지도 않고 지나침도 어긋남도 없음을 일러 중(中)이라고 하는데, 중이란 일정한 위치가 없으니 시중(時中)의 의미는 참으로 크다. 비유하자면 사관(史官)들이 비답을 받아 쓴 사초(史草) 책자에 있어서 책장을 펼쳤을 적의 중은 두 쪽의 한복판에 가 있고 책장을 접었을 적의 중은 한 쪽의 한복판에 가 있으니, 《맹자(孟子)》에 보인 자막(子莫)의 교착된 중을 면하려면 마땅히 성인의 활법(活法)을 찾아야 한다. 이러므로 상경(常經)을 벗어난 경우를 왕왕 시기에 맞춘 달권(達權)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공자는 ‘잘못을 보면 어짊을 알 수 있다.[觀過知仁]’ 하였고, 맹자 역시 주공(周公)의 잘못을 말하였다. 근래 나의 거조(擧措)는 나름대로 떳떳한 기준에 맞는 것이니, 경은 부디 깊이 이해하라."
하였다. 병모가 또 아뢰기를,
"신이 이미 정치의 근원을 밝히고 하교를 신중히 하는 것이 금지령을 거두어들이는 근본이 된다고 하였으므로 금지령을 거두어들이는 일만을 가지고 전하를 위하여 다시 진술하겠습니다. 지난날의 일을 이제 와서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신이 멀리 지방관으로 나가 있어서 한두 가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조보(朝報)로 전해진 것과 퍼진 것만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 놀라움은 연전의 일에 몇 갑절이나 됩니다. 우리 나라가 오늘날이 있을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차마 이러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전하께서도 한 번 생각하여 보소서. 전하께서 이 일에 있어 일찍이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은혜를 다하지 못한 곳이 있었다고 보십니까. 그에 대한 의금부의 허다한 국안(鞫案)을 모두 사관의 기록에 적지 못하도록 하였는가 하면, 내탕(內帑)의 비축물이 일용의 과다한 공급으로 해서 벌써 탕갈이 되고, 액정(掖庭)의 하인들이 오랜 기간 의약을 찾아다니느라 지쳐 있고, 거처의 편안함이 정자나 누관(樓觀)보다도 더 화려하고, 심부름하는 하인의 수가 관부에 비길 만큼 넉넉합니다 전하의 사사로운 은혜가 어찌 털끝만치라도 못다 한 것이 있다고, 이처럼 천고에 듣지고 못하고 있지도 않았던 잘못을 범하십니까. 아울러 한 가닥 역사 기록의 촌지(寸紙)에까지도 금지령을 설정하여 기록하지 못하도록 하시므로, 이로 인하여 대신(大臣)이 직책을 잃고 삼사(三司)가 관직을 잃어서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고 사람이 사람 노릇을 못하고 있으니, 어느 때에나 편안해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법전에서 찾아보거나, 의리에서 찾아보거나 또한 전대 성인들의 행적에서 찾아보거나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이며, 어디에 본을 받을 것입니까. 조정이란 전하의 조정이 아니라 바로 조종(祖宗)의 조정이요, 조종의 조정이 아니라 바로 하늘이 성신(聖神)에게 내려주어서 억만년의 무궁한 안녕을 누릴 터전으로 제공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처럼 중한 왕법(王法)이 하루아침에 흐트러지고 엄한 제도가 단번에 무너져서 대소를 가릴 것 없이 갈팡질팡 급급하기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때보다도 더 심하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삼가 전하께서도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모르신 적이 없는데도 처음부터 거듭될 때까지 회개할 줄 모르시는 것은 아마 ‘관과지인(觀過知仁)’ 네 글자로 그 잘못을 미화하고자 하여, 이처럼 자신하고 이처럼 단정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아, 글을 읽고 사리를 깊이 연구하신 전하께서 이다지 착각과 오해를 하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른바 ‘허물을 본다.’는 것은 신이 종전에 진술한 사사로운 은혜를 잘못 베푼 데 대한 5, 6조목에서 끝까지 다 말하였거니와, 잘못에다 또 잘못을 더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다시 한 푼만 더 벗어난다면 이는 결코 성인이 말한 ‘관과지인’의 뜻이 아닙니다. 바로 이른바 일개 자신의 사정만을 따르고 천리의 공도는 전폐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국사에 쓰고 야사에 적는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어떠한 군주가 되겠습니까. 일이란 옛것을 본받지 않고서는 성취하는 예가 적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을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증거가 될 만한 고사를 가지고 하나하나 신에게 물어 보소서. 신이 마땅히 조목조목 예를 들어서 성심(聖心)의 의혹을 풀어 드릴 것입니다. 만일 한 말이 털끝만치라도 예전 성인 말씀의 본지에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신은 죽음을 청하여 전하께 사죄할 것이요, 만약 한 말이 모두 다 의리에 들어맞아서 우레 같은 전하의 위엄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데가 있다면, 이것이 ‘머지 않아 회복될 것[不遠而復]’의 기미라 하겠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오늘날 국가를 정돈하는 책임은 오직 금지령을 먼저 거두어들여서 국론을 신장시키는 데 있습니다. 자책하는 뜻을 환히 내보여서 이것으로써 미래의 경계를 삼는다면, 아마도 선왕의 혼령이 기뻐하시고 하늘과 사람이 화평하여, 민생의 대책과 국가의 계획에 대해 비로소 차근차근 손을 쓸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구차스레 자리에 나아오기를 바란다면 안위(安危)의 판가름은 아마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분명한 전지(傳旨)를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치를 함에 있어 삼대(三代)의 정치를 마음먹지 않는 자는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더구나 군주가 당(唐)·우(虞)의 군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신하된 자의 떳떳한 도리가 아닌가. 당·우와 삼대의 정치가 어찌 두 번 다시 있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참으로 이른바 ‘우리 임금은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를 적(賊)이라 한다.’는 경우이다. 대저 한나라와 당나라 이래로 골육(骨肉)을 보존시킨 예가 드문데, 세대가 내려올수록 그 폐단은 더욱 심하였다. 우리 나라에 와서는 2백 년 동안이나 당쟁으로 사람과 집안과 나라를 해쳐서, 충신과 역적의 뒤바뀜이 한 번 벌어지면 동서 남북도 모르고 집에 들어앉아 있는 무죄한 종친 한 사람을 찍어내어 그로 하여금 난을 막고 변에 대응하게 하기 일쑤이니, 어찌 한탄스럽고 통분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풍속으로써 오늘날의 폐단을 바로잡는 데 있어 요도(要道)이자 선무(先務)인 것은 처음 비답에서 말한 ‘달권(達權)’ 두 글자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경들이 이른바 놀라운 거조라 하는 것도 스스로 놀랍게 여기지 않고, 더욱 잘못되고 더욱 놀랍다고 여기는 것은 더 큰 효과를 보아서 먼 옛날의 순수함을 되찾고 혼란 속에서 서로 흩어지는 상황을 일소할 수 있기를 바라니, 이것이 바로 마음을 더한층 가다듬고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쉬지 않고 애써 노력하면서 오직 날을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다. 진실로 나의 마음을 평온하게만 한다면 우리 나라의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화풍 감우(和風甘雨)에 서일 상운(瑞日祥雲)의 상서와 좋은 일뿐이어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응하는 효과를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연석(筵席)의 천언 만어 중에서 이런 단서를 찾아내어 거조(擧條)에 내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대신을 공경하는 의리도 고려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우의정 이병모를 파직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차자를 올려, 우의정 이병모를 파직하라는 명령을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고, 이어 똑같이 준엄한 벌을 받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서무는 번잡하고 삼공(三公)의 자리는 비어 있어서 간신히 뽑아서 애써 불러다가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길을 서둘러 열어놓고 훌륭한 정책을 펼 입대를 흔쾌히 마련해 준만큼, 오늘날 듣고자 하는 것은 바로 좋은 계책이고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노고를 나누자는 것인데, 처음 들은 첫번째의 주장(奏章)에서는 경전의 뜻을 많이 인용하여 군주를 바로잡아 구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이기에 정당하고 부정당함을 막론하고 일일이 좋은 표정으로 받아들였으나, 갈수록 말이 많아져서 그 말이 꺼려야 할 바를 범하는 데 그치지 않았으니, 이것이 금지령을 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근래에 법을 설정하여 금지하는 것이 나름대로 만반의 가늠질을 한 것이었고 보면, 내가 참으로 부덕하기는 하나 어찌 오늘 내일 말마다 식언하여 식견이 높은 이들의 비웃음을 사려 하겠는가. 대신을 공경하는 의리를 《중용(中庸)》 구경(九經)에서 듣기는 하였으나, 친친(親親)을 맨 앞에서 게시한 것을 볼 때 그 단계의 선후를 어찌 꼭 그 차례대로 밟아서 주시하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있게 된 조연(朝筵)의 처분이지, 어찌 좋아서 내린 처분이겠는가. 어쩔 수 없어서였다. 차자의 내용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비변사 당상 정민시(鄭民始) 등이 소를 올려 우의정 이병모를 파직하라는 명을 철회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을 존대하는 것을 어찌 지위 낮은 삼사(三司)에 비기겠는가. 승상을 새로 임명하여 처음 연 연대(筵對)인만큼 여느 연대와는 아주 다른데도 오늘의 처분이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어서였다. 대저 금지령을 시행하려면 이렇게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시행할 수 있겠는가. 경들도 다 함께 감죄(勘罪)하여 달라는 주청은 잘못이다. 사직하지 말고 행공하라."
하였다.
5월 26일 임자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김희(金憙)가 차자를 올려 우의정 이병모를 파직하라는 명을 철회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우상의 연주(筵奏)가 조보(朝報)에 나올 것이니 그것을 보면 나의 처분의 본뜻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홍인호(洪仁浩)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봉조하 정존겸(鄭存謙)이 질병을 앓고 있었는데, 어의에게 약물을 주어 보내어 질병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5월 29일 을묘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을 입성하도록 하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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