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경자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하향(夏享)의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았으며 이어 의식 연습을 행하였다.
규장각 제학 심환지(沈煥之)가 원자(元子)의 개강일에 여러 각신(閣臣)들이 돌아가면서 강에 참석하도록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2일 신축
날씨가 가물기 때문에 준천사(濬川司)에 명하여 도랑을 치게 하였다.
5월 3일 임인
차대(次對)를 하였다. 내의원 제조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매년 단오에 각 전궁(殿宮)에 제호탕(醍醐湯)을 봉진하는데 중궁전(中宮殿)에는 봉진한 사례가 없기에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니 선조(先朝) 을미년083) 이전에는 봉진하였는데 병신년084) 이후로는 빠졌습니다. 금년부터는 구례대로 봉진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우포도 대장 유효원(柳孝源)을 파면하였다. 이는 서성(西城) 밖의 민가에 실화(失火)하였는데 포도청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보고하였기 때문이다.
충청도 관찰사 임제원(林濟遠)을 체임하였다. 임제원이 병이 들어 업무를 보지 못하자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주청하여 체임하게 한 것이다. 이병모가 또 아뢰기를,
"전라도 관찰사 서정수(徐鼎修)는 임기가 찼는데 외보(外補)에서 그대로 외직(外職)으로 옮겼기 때문에 해조(該曹)가 전례를 따라 차대(差代)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차대하도록 명하였다.
서유대(徐有大)를 우포도 대장으로, 서미수(徐美修)를 충청도 관찰사로, 조진관(趙鎭寬)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부사과(副司果) 이술원(李述源)을 통정 대부로 발탁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나간 정해년085) 사이에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계방(桂坊)086) 의 몇몇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그 장구(章句)를 정하고 의심스런 뜻을 해석하며 그 언독(諺讀)을 기록하게 하였는데, 총 수년만에야 공사를 마쳤다. 그 당시 이 사업에 참여한 이는 이관(李灌)·한용화(韓用和)·박사형(朴師亨)·이겸진(李謙鎭)·심정진(沈定鎭)·안정복(安鼎福)·임정주(任靖周) 등 여러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바로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뒤 갑오년087) 에 《주자절요서(朱子節要書)》를 정해년에 이미 정한 본(本)을 가지고 빈객 조명정(趙明鼎), 궁관(宮官) 이의준(李義駿)이 고교(考校)를 전적으로 관장하였으며, 근래에는 또 《어정주서백선(御定朱書百選)》을 인행(印行)한 본(本)이 있는데 30년 전에 편감(編勘)한 것을 가지고 거듭 증록(證錄)을 더하여 오늘에야 비로소 역사를 마치게 되었으니, 부사과 이술원은 3품(品) 내직(內職)으로 의망해 들이라. 그리고 이술원 외에 또 이런 사람이 있는데, 몇 해 전에 취사(取捨)하여 인행할 적에 역시 참여한 부호군 한용화를 좌이(佐貳)로 의망해 들여서 구료(舊僚)를 기념(記念)하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5월 5일 갑진
서부(西部) 반석방(盤石坊)에 불이 나서 가옥 46호를 잇따라 태웠는데, 상이 한성부 판윤 김문순(金文淳)을 보내어 백성들을 위유(慰諭)하고 진휼청으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도 초기(禁盜草記)를 즉시 올리지 않은 이유로 우포도 대장 서유대(徐有大)의 직임을 파면하고 이득제(李得濟)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영남·호남·관동·관북·해서·관서에 태복(太僕)의 말을 분양(分養)하는 규정을 혁파하였다. 이보다 앞서 윤대(輪對)에서 사복시(司僕寺) 판관 한대유(韓大裕)가 분양하는 법을 혁파할 것을 청하니, 상이 물러나서 제조(提調)에게 의논하여 의견 일치를 보아서 초기(草記)하라고 명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복시가 아뢰기를,
"분양하는 법은 오로지 군마(軍馬)를 위해서이니 어찌 국가를 다스리는 커다란 행정이 아니겠습니까마는,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불어난 결과 이름만 있고 실제는 없습니다. 곳곳이 모두 병이 들어 피로한 말이며 관례(官隷)의 무리는 두 차례 내왕하는 데서 괜히 피곤하고 공물(公物)은 해마다 회감(會減)하는 데서 허비되니, 이는 바로 조금 변통을 하면 조금 보탬이 되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일시에 모두 혁파하는 것 또한 신중히 해야 마땅하니, 양남(兩南)과 양서(兩西) 그리고 관동과 관북에 우선 임시로 혁파하고 단지 경기와 호서 두 도에 분양한 것만 그대로 두게 하여 앞으로의 보존과 혁파를 다시 관찰하는 입지를 삼도록 하소서. 그리고 분양을 혁파한 뒤에는 오로지 고실 속포(故失贖布)에 의존하던 본시(本寺)의 마적색(馬籍色)·공방색(工房色)의 1년 수용(需用)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연례로 회감하던 쌀·콩·돈·면포 및 분양마가 오갈 때의 잡비로 고을에서 응당 내야 할 것은 대략 계산해 보니 남는 것이 있고 축나는 것은 없을 듯합니다. 이것은 오가는 여러 고을에서 소상하게 강정(講定)하여 전곶 목장(箭串牧場)의 방양(放養)하는 법과 합쳐서 절목(節目)을 만들어 영구히 준행하는 입지를 삼으소서. 그리고 내농포(內農圃)의 말 및 각영(各營)의 군마(軍馬)는 명년부터 실제 숫자를 참작하여 가본(價本)을 나누어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6일 을사
정언 홍치영(洪致榮)이 상소하여 금령(禁令)을 거두고 언로(言路)를 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요즈음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대의 말이 참으로 적중하였다. 말을 하도록 인도하고는 말을 하면 거절하며, 피혐(避嫌)하도록 하고는 와서 피혐하면 책망을 하니, 외면에서 언뜻 보면 정말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녕 어쩔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5월 8일 정미
원자(元子)가 《소학(小學)》의 강독을 마쳤다. 상이 호조에 명하여 기유년에 수상(受賞)한 물목(物目)을 가져다 상고하게 하여 종이·붓·먹·황밀(黃蜜)·면포(綿布)를 원자에게 주어 전후로 강독에 참여한 대신(大臣)과 각신(閣臣)에게 나누어주도록 명하였다. 상이 유선 윤득부(尹得孚)에게 유시하기를,
"지금은 원자의 뜻과 생각이 점점 자라고 있으니 사기(史記)를 강독하는 것이 적합하겠다. 나의 경우는 사기에서 힘을 얻은 것이 많았으니 《사략(史略)》은 제5권까지, 《통감강목(通鑑綱目)》은 76권까지 읽었는데 여러 번 윤독(輪讀)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용(需用)하는 데 여기서 도움을 얻는 것이 많다. 지금 원자에게 사기를 강독하게 하려면 《사략》을 강독하게 하는 것이 좋겠는데, 사부(師傅)에게 물어서 정하되 경이 모름지기 왕복하면서 아뢰라.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수명이나 운명은 그 시초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으니, 보도(輔導)하는 직책은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하다. 경은 평소 조야(朝野)의 명망을 짊어지고 있었으니 이번에 이를 위임한 것은 나의 뜻이 우연하지 않다. 경 또한 어찌 스스로 정성을 다하려는 바람이 없겠는가. 그러니 문장의 뜻이나 구두(句讀)뿐만이 아니고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도 반드시 일에 따라 잘 인도하도록 하라. 사도(師道)가 아무리 존엄(尊嚴)을 귀중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또한 모름지기 정의(情義)가 유통된 연후라야 서로 신임할 수 있는 것이다. 서자명(書字銘)에 이르기를 ‘점을 찍고 획을 긋는 데 전일한 마음이 그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주일(主一)의 공부’이다. 글씨 쓰는 법도 역시 가르치고 연습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대저 어느 것이나 교육이 아닌 것이 없다. 경은 모름지기 정성을 다하도록 하라."
하니, 윤득부가 아뢰기를,
"신이 노둔하고 허술하기는 하지만 감히 그 아는 바를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5월 9일 무신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양주 목사 신헌조(申獻朝)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의장고 낭청(儀仗庫郞廳) 구득로(具得魯)가 선산(先山)에 계장(繼葬)하는 일로 그의 종인(宗人)인 구제흠(具緹欽)과 서로 미워하게 되었는데, 제흠이 몰래 득로의 할아버지 무덤을 훼손시켰다. 득로가 북을 쳐서 원통함을 호소하자, 판하하기를,
"본송(本訟)에 대해서는 옛날 선조(先朝) 을유년088) 에 있었던 처분이 지극히 엄절했으니, 지식이 없는 일반 백성도 오히려 그렇게는 못 할 것인데 명색이 사족(士族)으로서 이렇게 사리에 어긋나고 법을 멸시하는 짓을 하였다. 고을에는 수령이 있으니 즉시 감영(監營)에 보고하여 법으로 판결하였더라면 어찌 그 집안 사람이 북을 울리는 일이 있었겠는가. 그 집안의 두 중신(重臣)이 잇달아 갑자기 죽어 민망하고 측은하게 여겨 왔다. 중신 구상(具庠)이 살았을 때의 대우가 어떠하였던가. 그런데 그 집안의 망측한 변고를 들으니 더욱 가엾게 여겨진다. 진실로 송사(訟事)의 단서가 어느 한편은 굽고 어느 한편은 곧다면, 대우는 대우고 법은 법이니 어찌 혹시라도 이쪽에 구애되어 저쪽을 소홀히 하겠는가. 법을 범한 자가 한 짓에 대해서는 응당 시행해야 할 해당 형률이 있는 것이니, 즉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직접 끝까지 캐내어 맨 먼저 모의한 자를 조사해서 법대로 처결한 뒤에 장문(狀聞)하게 하고, 해당 산(山)이 있는 고을의 수령은 현장 보고를 받은 뒤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편전(便殿)에서 재숙(齋宿)하였다.
5월 10일 기유
춘당대(春塘臺)에서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였다.
차대(次對)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오늘 북원(北苑)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셨는데, 우러러 생각건대 망한 명(明)나라에 대한 감회가 성충(聖衷)에 갑절 간절하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신년089) 이후로 억지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면 이날이 올 때마다 반드시 몸소 의식을 행했는데, 이는 명나라에 대한 감회가 마음속에 간절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선조(先朝)에서 주(周)나라를 높인 성의(聖意)를 체득해서이다. 또한 선왕의 사업을 계승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며,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날에 당연히 행하여야 할 의식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대열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 가운데 윤황(尹煌)의 자손이 가장 번성하니, 참으로 후손이 창성하다고 말할 만하며 천도(天道)는 착한 이에게 복을 주는 이치가 분명하여 엄폐할 수 없다. 그리고 선정(先正)의 형 송시희(宋時熙)가 적을 만나 굴하지 않다가 마침내 순절(殉節)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절의(節義)가 우뚝하다고 말할 만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정문을 세워주는 은전이 없었으니 어찌 조정의 흠전이 아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옛날 현묘(顯廟) 정미년에 복건(福建) 사람 임인관(林寅觀) 등 90여 인이 영력(永曆)090) 21년의 책력을 가지고 우리 국경에 이르러 스스로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주나라를 높이는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받아들여 살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모두 묶어서 저들의 땅에 압송하였으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 당시 대신들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유언비어를 퍼뜨린 죄인 노염(盧琰)이 처형되었다. 노염은 철산(鐵山) 사람으로 종가(鍾街)에 글을 붙여 난언으로 뭇사람을 미혹시켰는데, 훈련 대장 이경무(李敬懋)가 체포하여 포도청에 회부해서 이리저리 캐묻자 공초(供招)하기를,
"몇 년 이래로 도로에서 전하는 말을 들으니 왜선(倭船) 한 척이 동래(東萊)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무기를 가득 실었다고 하였으며, 또 들으니 중국에서 바야흐로 군사를 요청하는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공로를 바라는 망령된 생각에 항상 상언(上言)하려고 하였지만 길이 없어 이렇게 방을 걸었습니다. 방의 내용 가운데 ‘망녕(妄侫)’이라고 한 것은 바로 제가 스스로 겸양하는 말이었고, ‘산인(山人)’은 바로 철산에서 태어나 자란 것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본래 완력이 있어 발신하려고 이런 난언을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포도청에서 형률대로 처단하도록 청하니, 상이 적용할 형률을 신하들에게 물었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 훈련 대장 이경무가 모두 사형을 시행하도록 청하니, 효시하여 뭇사람을 경계하라고 명하였다.
황해도 수군 절도사 서영보(徐英輔)가 장계하기를,
"해주목(海州牧)에 소속된 교정(交井)·가천(茄川)·마산(馬山) 등 세 방(坊)은 옹진(瓮津)과 소강(所江) 사이에 끼어 있는데, 수영(水營)과의 거리는 수십 리가 되고 해주와의 거리는 간혹 1백 60리가 됩니다. 그 가운데 교정방(交井坊)은 행영(行營) 소강의 서쪽에 쑥 들어가 있어 매번 당선(唐船)이 와서 정박할 적에는 본방(本坊) 흑두포(黑頭浦) 별장(別將)이 곧바로 1백 60리나 되는 해주에다 보고하고 신의 군영(軍營)에다 전보(轉報)하는데, 그 사이의 정도(程道)가 거의 3백 리나 됩니다. 그래서 영(營)으로 승격시킬 초기에 그 당시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세 방(坊)을 떼어 옹진에 소속시킬 것을 장계로 청하였는데, 묘당(廟堂)이 단지 교정 한 방만 소속시키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 뒤 도신이 해주의 벼와 어염(魚鹽)이 모두 이곳에서 생산된다는 이유로 방계(防啓)하여 도로 중지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토지와 민정(民情)을 가지고 말하건대, 해주는 35방이고 신의 영은 5방뿐입니다. 그리고 또 세 방에 살고 있는 주민이 무릇 정소(呈訴)나 부역 및 각항의 부세를 본목(本牧)에 수레나 말로 수송하는데 그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주민들이 모두 수영에 소속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그대로 두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11일 경술
안동(安東)의 열녀 금씨(琴氏)를 정려(旌閭)하고, 그 고을 부사 이집두(李集斗)를 파직하였다. 금씨가 황씨(黃氏)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 일찍이 과부가 되었는데 어느날 밤에 사나운 괴한이 침입하여 금씨가 도망하여 숨었다. 그 뒤 이웃에 사는 족인(族人)인 이석(李碩)이 부추긴 짓이었음을 알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血書)를 써서 관아에다 호소하였는데, 이집두가 끝까지 조사하여 다스리지 않았다. 이에 금씨가 세 차례나 목을 찌르고 물에 몸을 던졌지만 모두 죽지 않자, 마침내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그 사실을 장계로 아뢰었는데, 상이 밤에 장본(狀本)을 열람하고는 대신(大臣)과 형조 당상을 불러 의논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금씨는 절개를 지킨 열녀이니 그 마을에다 정포(旌褒)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금씨의 뛰어난 절개는 《삼강행실(三綱行實)》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바이다. 계획을 꾸민 흉신(凶身)이 아직도 해당 형률을 모면하고 있으니 요즈음의 가뭄이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안동 열녀 금씨에게 정려하는 전례(典禮)를 시행하도록 하라."
하고, 인해서 이석(李碩)은 도신(道臣)이 엄중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5월 12일 신해
충청도 관찰사 서미수(徐美修)를 소견하였는데, 하직 인사였다.
제도(諸道)의 살인 사건을 심리하였는데, 금화(金化)의 죄수 김보동(金保同)을 석방하였다. 보동이 누이의 아들 이수남(李戍男)과 술김에 다투다가 수남을 때렸는데, 수남이 밤에 죽고 말았다.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치계하기를,
"외삼촌과 생질 사이에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변고가 생겼으니 풍속과 교화에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목숨으로 갚도록 판결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만 보동은 나이 80세입니다. 삼가 《대명률(大明律)》의 예를 상고하건대 ‘80세 이상이 되어 살인을 범한 경우 의의(擬議)해 주문(奏聞)해서 상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감히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판하(判下)하기를,
"도신(道臣)이 《대명률》을 인용한 것은 매우 옳다. 보동은 외삼촌이고 수남은 생질이다. 80세 된 늙은 외삼촌이 60세 된 병든 생질을 때렸으니 한마디로 말하면 죽은 것이지 죽인 것은 아니다. 늙은 사람은 다행스럽게 살았고 병든 사람은 지레 죽은 것인데 어찌 손 힘이 이쪽은 세고 저쪽은 약함을 논할 수 있겠는가. 만일 마음씀이 아주 사리에 어긋남이 없으면 또한 법에 융통성을 보여야 한다. 성옥(成獄)할 필요가 없으니 보동을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매수(徐邁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한용귀(韓用龜)를 이조 참의로, 조윤정(曺允精)을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전라도 관찰사 조진관(趙鎭寬)이 상소하여 어미의 병을 진달하니, 체임하도록 허락하고 김한동(金翰東)을 대임자로 삼았다. 한동이 당시 성천(成川) 임소에 있었으므로 그대로 직임을 보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을 전라도 관찰사로 전보하였다. 사건 판결에 있어 시일을 끌었기 때문이다.
이조원(李祖源)을 형조 판서로, 이성보(李城輔)를 공조 판서로, 조명집(曺命楫)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삼았다.
교리 박길원(朴吉源), 사간 정내백(鄭來百) 등이 상소하여, 방을 붙인 죄인 노염(盧琰)을 효시하라는 명을 중지하고 다시 더 엄중히 조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수찬 이기양(李基讓)이 상소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죄수를 심리하여 단비가 내리도록 기도한 다음 널리 여러 고을에 경계하여 보리를 조처해 두도록 하라고 청하니, 관대한 비답을 내려 받아들였다. 인해서 형조의 당상들에게 해조에 제회(齊會)하여 우선 서울 죄수들부터 의심스런 단서를 정밀하게 조사한 뒤에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고, 경기 도신(京畿道臣)은 옥안(獄案)을 살펴 녹계(錄啓)한 것을 대략 뽑아 가지고 와서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양호(兩湖)의 유생 조내계(趙來啓) 등이 상소하여 선정(先正) 김인후(金麟厚)를 죽림서원(竹林書院)에 아울러 모실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성묘(聖廟)에 올려서 배향하는 것은 예전에 없었던 성전(盛典)을 거행한 것이니, 향원(鄕院)에다 부식(祔食)하는 것은 시급하지 않은 일이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이나 닦도록 하라."
하였다.
전 강화 유수 임시철(林蓍喆)을 문수산성(文殊山城)에 귀양보냈다.
5월 13일 임자
상이 재거(齋居)하면서 가뭄을 민망하게 여겨 형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가뭄을 민망하게 여겨 죄수들을 처결하는 것은 뜻이 화기(和氣)를 인도하는 데 있다. 그러나 만일 한갓 가볍게 해 주고 살려주려는 데만 얽매여 하소연할 데가 없이 죽은 자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하에서 원한으로 눈을 흘길 것이니 도리어 화기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경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8일 정사
형조 참판 서용보(徐龍輔)와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을 소견하여, 서울의 죄수 이분금(李分金) 남매를 참작하여 석방하였다. 이분금은 그의 누이와 함께 부전(富全)을 구타하여 죽게 하였는데, 분금이 정범(正犯)으로서 감옥에 갇힌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신문을 하자 남매가 서로 대신해서 목숨으로 갚겠다고 하므로 형조가 의견을 갖추어 아뢰니, 판하하기를,
"법률은 풍속을 교화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이고, 형정(刑政)은 예악(禮樂)과 비교한다면 끝부분이다. 남매가 서로 죽겠다고 하여 정범을 결정하기 어려운데, 지금처럼 풍속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러한 도리를 알다니 진실로 기이하다. 더구나 하호(下戶)의 천인으로서 윤리와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죽고 사는 것을 가볍게 여겨 슬프게 부르짖으며 자신이 대신할 것을 소원하기를 두 사람이 한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같은 말을 하였다. 풍속을 돈독히 하려고 하면 살인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고, 법을 적용하려고 하면 정리(情理)가 너무나도 불쌍하다. 이렇게 처결하기 어려운 옥안(獄案)은 널리 물어보는 조처가 있어야 마땅할 듯하니, 이를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부전이 죽은 것은 이미 분금 남매에게 연유하였으니 목숨으로 갚아야 할 책임은 이 두 사람에게 있습니다. 남매가 죽기를 다툰다는 이유로 처벌을 낮추거나 올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심(聖心)이 측은하게 여기고 풍속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특별히 은혜를 베푸는 것 또한 사책(史冊)에 빛나기에 충분합니다."
하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는 아뢰기를,
"형벌이라는 것은 교화를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으로는 용서할 수 없지만 사안이 풍속을 돈독히 하는 데 관계되면 더러는 경법(經法)을 지키기도 하고 더러는 세교(世敎)를 돕기도 하는 것이 바로 옥사(獄事)를 결단하는 권형(權衡)입니다. 신은 풍속과 교화를 대양(對揚)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니 살리는 방향으로 의논하여 무너진 풍속을 격려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뭇사람의 의견이 동일하구나. 오품(五品)에 일부분이라도 보탬이 있다면 어찌 오형(五刑)의 일부분이 다듬어지지 않음을 논하겠는가. 분금 남매를 참작하여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풍덕(豊德)에 살던 김씨 여인을 정려(旌閭)하였다. 풍덕 사람인 김택신(金擇信)의 딸이 일찍 과부가 되어 절개를 지키며 살았는데, 이웃 사람으로 김유봉(金有奉)이란 자가 길에서 기다렸다가 강제로 겁탈하려고 하자, 김씨 여인이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도망쳐서 10여 일 동안 음식을 끊다가 죽었다.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이 그 상황을 아뢰니, 판하하기를,
"요즈음 가뭄을 염려하는 것으로 인하여 서울과 지방의 옥안(獄案)을 밤낮으로 심리한 지가 7일이 되었지만 이렇게 너무나도 분하고 너무나도 사리에 어긋나는 것은 처음 본다고 말해야 할 듯하다. 황폐해진 강가의 조그마한 비석에 대해서는 역사에서 효녀 조아(曹娥)를 드러내었고, 긴 대나무 숲에 대해서는 시(詩)에서 한희(漢姬)를 칭찬했다. 열열(烈烈)하도다, 김씨 여인이여! 일찍이 부끄러워 하는 빛이 없이 청춘(靑春)에 절개를 지키어 죽기를 맹세코 다른 뜻이 없더니, 대낮에 강도를 만나자 삶을 버리고 거절하여 10일 동안 음식을 끊다가 조용히 절의(節義)를 성취하였다. 그의 정절(貞節)이 추상(秋霜) 같이 늠름하니, 빨리 지방관에게 영을 내려 그가 살던 마을에 정포(旌褒)하도록 하고, 흉신(兇身) 김유봉은 다시 신문하여 해당 형률을 흔쾌히 시행하여 열부의 혼을 위로하게 하라."
하였다.
제도의 옥안(獄案) 52건을 형조에 판하하면서 하교하기를,
"조정의 거조는 각기 체계가 있다. 소결하는 것과 심리하는 것이 녹수(錄囚)하고 심형(審刑)하는 일은 같지만, 소결은 법복(法服)으로 편전(便殿)에 나아가 대신·법관·삼사가 각각 사죄(死罪) 및 도류(徒流)의 안(案)을 가지고 등연(登筵)하여 매번 한 가지 안에 대하여 읽기를 마치면 두루 여러 사람의 의논을 묻기를 한결같이 계복(啓覆)하는 예와 같이 하며, 심리는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녹계(錄啓)한 안에 나아가 그대로 둘 자와 가볍게 해 줄 자를 형관이 본사에 모여 논계하면 조목에 따라 판하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가뭄이 심하기 때문에 답답함을 소통시키고 억울함을 살피는 행정을 집행하려고 하는데 마침 당소(堂疏)까지 있어 마음이 확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의 항목의 소결과 심리는 너무 지나친 것 같으므로 우선 추관(秋官)에게 명하여 서울의 죄수로 살려주어야 할 자들을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계문(啓聞)하도록 하라. 좌재(坐齋)가 내일 있을 것인데, 지방의 죄수에 대한 여러 안은 형세로 보아 미처 하지 못할 것이니, 번열(反閱)하던 때에 일찍이 헤아렸던 것으로 써서 내리게 하라. 이것을 제도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0일 기미
의주 부윤 심진현(沈晋賢)이 사사로이 승정원에 보고하였다.
"본부의 통사(通事)가 봉성(鳳城)에 들어가 예부(禮部)의 공문을 보니, 가경(嘉慶) 2년 2월에 황후(皇后)가 훙서하였는데 자문(咨文)도 없고 부음을 전하는 조칙도 없었던 것은 대체로 태상황(太上皇)을 받들고 있는 상황이므로 행하여야 할 전례(典禮)를 모두 정지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5월 22일 신유
차대(次對)를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간절히 진달하여 해임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팔순의 나이로 5년 동안 수상의 직위에 있었던 것은 중서(中書)091) 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다. 오늘 등연(登筵)하여 간절히 진달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억지로 하기가 어려운데 억지로 하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깊이 생각하여 주는 도리이겠는가. 영의정 홍낙성에 대하여 특별히 청한 대로 들어주는 바이다."
하였다.
이전에 관서(關西)의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인현서원(仁賢書院)을 기성영전(箕聖影殿)으로 개칭하도록 청하고, 또 말하기를,
"희생은 태뢰(太牢)를 쓰며 날짜는 중정(中丁)092) 을 쓰는데, 태뢰는 반궁(泮宮)의 예를 쓴 것이며 중정은 향현(鄕賢)을 대우하는 예이니 빨리 개정해야 합니다. 기자(箕子)의 묘를 지키는 절차도 신라나 고려 시조의 능에 대한 예에 의거하여 군졸을 배치하여 지켜야 합니다."
하였는데,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주청하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편의 여부를 참작하여 아뢰도록 하니, 상이 재가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관찰사 박종갑(朴宗甲)이 장계하기를,
"오늘날 성인 기자(箕子)를 높이고 은덕을 갚는 것은 사도(師道)로써 해야 하니 서원(書院)이라고 일컫는 것도 불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府) 안에 이미 숭인전(崇仁殿)이 있어 위판(位版)을 받들고 있으니, 어찌 한 성 안에 또 두 전(殿)을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날짜를 중정(中丁)으로 쓰는 것에 있어서는 즉시 개정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채제공이 복주하기를,
"도신이 한 전 안에다 겹으로 두 전을 설치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니, 인현학궁(仁賢學宮)으로 고쳐서 일컫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이 일에 대하여 구구한 소견이 있으니, 기자의 묘는 사람들이 간혹 진위를 의심하는 의논이 있습니다만, 중국 사신이 ‘기자묘(箕子墓)’란 세 글자를 비면(碑面)에다 썼고 보면 중국 사람들 역시 기자의 무덤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대저 우리 조정에서는 일반적인 사전(祀典)에 대해서 전대의 능묘에 속한다 하더라도 모두 거행하지 않음이 없는데, 유독 성인의 묘에만 한식(寒食)에 한 번 문(門)을 여는 의식조차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수직(守直)을 정하여 해마다 한 번 제사지내는 예(禮)를 의리로 일으키는 것을 아마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제신에게 물었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서원은 도(道)를 익히는 곳이며 성인 기자가 전한 것은 도이니 서원이라는 칭호를 고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묘사(墓祀)에 이르러서는 묘향(廟饗)과는 다르니, 높이 받드는 도리가 애당초 새로운 예(禮)을 창설하고 새로운 법을 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한성부 판윤 김문순(金文淳), 상호군 김지묵(金持默), 개성부 유수 황승원(黃昇源)은 채제공의 의논을 옳게 여기고, 형조 참판 서용보(徐龍輔), 원임 규장각 직각 김조순(金祖淳), 승정원 우승지 홍인호(洪仁浩)는 이병모의 의논을 옳게 여기니, 비변사 당상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중국에도 기자의 묘가 있으니 평양(平壤)에 있는 것은 어찌 의심스러운 사실을 의심스러운 그대로 전하는 데서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향사(享祀)를 거행하지 않는 것은 높이고 은덕을 갚는 데 흠결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법을 창설하여 시행하는 것은 아마도 갑자기 의논하기 어려운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컫는데, 삼한(三韓) 이전에는 순수함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의문(儀文)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 많아서 지금까지 당연히 행하여야 할 전례(典禮)를 겨를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서원(書院) 명칭에 대한 한 건과 더불어 다시 예조 판서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의견 일치를 보아 초기(草記)를 올리게 하라."
하였다.
함경도 병마 절도사 조윤정(曺允精)과 제주 목사 조명집(曺命楫)을 소견하였는데, 하직 인사 때문이었다.
오재휘(吳載徽)를 경기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전 포도 대장 서유대(徐有大)를 서용하여 금위 대장(禁衛大將)을 그대로 맡게 하였다.
사간 정내백(鄭來百)이 상소하여, 성지(聖志)를 세워 실질적인 정사에 힘쓰며 여러 사람의 말을 채택하여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고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실질적인 혜택을 추구하도록 청하니,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좋게 받아들였다.
용인(龍仁)의 박씨(朴氏) 여인을 정려하였다. 박씨 여인은 일찍 과부가 되어 홀로 살았는데 이웃에 사는 박삼봉(朴三奉)이란 자가 밤중에 침입하여 결박하고 겁탈하려고 했다. 박씨가 몸을 빼어 도망하였다가 간수를 마시고 죽었다.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이 장계로 아뢰니, 풍덕(豊德) 박씨 여인의 예대로 정려하도록 명하고, 박삼봉은 추관(推官)으로 하여금 신문하여 해당 형률을 시행하게 하였다.
5월 25일 갑자
유효원(柳孝源)을 우포도 대장으로, 윤사국(尹師國)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5월 26일 을축
집의 심규로(沈奎魯)가 상소하여 피지(陂池)를 파고 길가의 띠로 덮은 임시 가옥을 금단(禁斷)하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둑을 파서 못으로 만드는 것과 거리 앞에 집 짓는 것을 금지하는 일은 모두 구례(舊例)이다. 한꺼번에 아울러 거행한다면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는 데 가깝지 않겠는가."
하였다.
함흥(咸興) 본궁(本宮)의 풍패루(豊沛樓)를 중수하였다. 북청 부사 신대윤(申大尹)이 공사를 감독한 공로로 통정 대부에 승진되었다.
5월 27일 병인
차대(次對)를 하였다. 상이 가뭄을 염려하여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타당한가의 여부를 우의정 이병모에게 하문하자, 병모가 아뢰기를,
"무릇 사람은 질병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부모를 부르게 되는데, 하늘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는 번거롭게 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믐 전까지도 비가 내리지 않는가 다시 보아서 행하는 것이 아마도 적합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기고, 비변사에 명하여 제도에 비가 내린 상황을 공문을 보내 묻게 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송환기(宋煥箕)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5월 28일 정묘
비가 내렸다.
영중추부사 홍낙성(洪樂性)이 상차하여, 담화(痰火)를 오래 앓고 있는데 의원의 말이 강물이 병에 맞는 약재라고 하니 편의(便宜)대로 강사(江榭)에 왕래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밤낮으로 우러르던 나머지 단비가 흡족히 내려 측우기의 물 깊이 또한 반 자에 가까우니 삼농(三農)의 경사이고 다행이다. 중서(中書)의 중한 직함에서 경은 이미 해임되었으니 수레에다 기름을 치고 말에게 꼴을 먹여 거울같은 호수가와 푸른 들판 사이를 노닐며 어디로 간들 불가하겠는가. 경은 편리한 대로 노닐기를 차자에서 청한 대로 하라."
하였다.
5월 30일 기사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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