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6권, 정조 21년 1797년 2월

싸라리리 2025. 8. 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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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임신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을 봉수당(奉壽堂)에서 불러 보았다. 제공이 아뢰기를,
"그저께는 성을 순시하고 어저께는 국내를 두루 살펴보시느라 수고를 많이 하셨는데 성상의 몸이 고단하지는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대왕께서 50년 동안 실천하신 검소한 덕이 어떠하였으며, 권태해질 보령(寶齡)에 이르러서도 정사에 부지런하심이 어떠하였던가? 내가 우러러보고 직접 들은 바이다. 이를 계술(繼述)하고자 한결같이 마음을 가다듬었다. 근년 이래로는 두려운 마음이 날로 더하여 자신에게 매우 각박하게 대접하고 감히 안일하게 지내지 못하였으며, 일상 생활과 의복에서도 혹시나 안일하고 사치스러워질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능원을 전알하는 행차나 산성을 돌아보는 일을 어찌 힘든다고 꺼릴 수 있겠는가. 옛날 효묘(孝廟) 때에 후원(後苑)에 척뇌당(滌惱堂)을 지어 놓고 내구마(內廐馬)를 타고 내시에게 고삐를 잡게 하고 이 당에 왕림하는 것을 거의 일과처럼 하셨다. 이는 밖으로 수수(蒐狩)하는 거둥은 없었지만 안으로는 실로 노고를 익히려는 생각에서 나왔던 것이다.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 말타기를 통하여 노동을 익히지 않은 분이 없었으며, 이를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내가 항상 이를 체득하려고 하였으나 미치지 못한 점이 많다. 금원에서 군무(軍務)로 전좌(殿座)할 때 반드시 말을 타는 것도 선조(先朝)의 고사를 따르고자 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하루 종일 말을 타도 고단한 줄을 모른 것이다."
하였다.

 

상이 화성 행궁을 떠나 장안문 안에 이르러 성 안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위로하였다. 영화역(迎華驛) 앞길에 이르러 찰방 이오진(李五鎭)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우관(郵館)이 완공되고 민호(民戶)가 즐비하니 너의 힘이다."
하고, 이어 수령으로 제수할 것을 명하였다. 지지대(遲遲臺)에 이르러 잠깐 머물렀다가 사근 행궁(肆覲行宮)과 안양 역참을 지나 시흥 행궁의 주정소(晝停所)에 들러 경기 관찰사 이면응(李冕膺)과 지방관 김사희(金思羲)를 불러 보았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 이르러 주교사(舟橋司) 당상 정민시(鄭民始)를 불러 보고 주교사에 소속된 장교와 이속(吏屬)·선인(船人) 등에게 상을 내렸다. 저녁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2월 3일 갑술

경모궁에 전배(展拜)하였다.

 

상언(上言)에 대한 판하(判下)가 39건이었다.

 

2월 4일 을해

김문순(金文淳)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함흥(咸興) 유생 이광룡(李光龍)이 흰 꿩을 올렸으므로 승지가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거북을 바친 일이 있었는데 그 거북은 살아 있었으므로 물에 놓아 주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흰 꿩은 죽은 것이라고 하니 산에 놓아 줄 수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대신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기이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시므로 비록 과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먼 곳의 사람이 이미 와서 바친 것이니, 한 번 보신 뒤에 위로 전궁(殿宮)에 보여드리고 조정에 반시(頒示)하고 나서 가져온 유생에게 도로 돌려주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아뢰기를,
"신이 어릴 때 증선지(曾先之)의 《사략(史略)》 첫 권을 배우면서 ‘흰 꿩[白雉]’이라는 두 글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실제로 흰 꿩을 보게 되니, 성인의 덕화(德化)가 우주간에 가득 차 넘쳐 이처럼 흔히 있기 어려운 생물이 저절로 이르게 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효경(孝經)》에 신계(神契)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임금이 제사에 대하여 법도를 어기지 않고 연식(宴食)과 의복이 절도가 있으면 흰 꿩이 찾아 온다.’고 했는데, 신이 이것으로 오늘에 꿩이 나타나게 된 증거로 삼는 것에 대하여 성상께서 스스로 자신을 점검하여 보시더라도 반드시 근거없는 말이라고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唐)나라 신하 이교(李嶠)의 시에 ‘흰 꿩 우는 소리 조정을 울리더니, 푸드득 날아와서 태평함을 알려주네.[白雉振朝聲 飛耒表太平]’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너무 겸손하시어 성왕(成王)이 다스리던 주(周)나라와 같은 성인의 세상임을 자처하려 하지 않으시지만 굳이 태평한 세상의 징표를 사양하고 받지 않으실 것이 있겠습니까.
하늘이 이미 태평한 징조(徵兆)를 내렸으니 이를 공경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필시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주나라 때에도 이미 이를 종묘에 올렸으니, 신의 생각에는 이를 참작하여 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은 아뢰기를,
"옛날에 월상씨(越裳氏)가 공물을 바쳤을 때, 그것이 흰 꿩이어서 귀중하게 여겼던 것이 아니라, 세 나라나 통역을 거쳐 와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공(周公)은 오히려 덕택이 입혀지지 못하고 정령(政令)이 베풀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그 예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람을 신하로 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나라 노인에게 명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비로소 임금에게 돌려드렸으니, 꿩을 가지고 상서롭게 여긴 것이 아님은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성조(聖朝)는 본래 먼 곳의 물건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연전에 있었던 동협(東峽)의 기린(麒麟)에 관한 일에서 성덕(盛德)의 만분에 일이나마 우러러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돌아갈 양식이나 주어서 보내고 꿩은 물리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시동의 의논에 따라 선혜청에서 식량을 넉넉히 주어서 보내라고 명하였다.

 

2월 5일 병자

봉조하 김종수(金鍾秀)가 상소하기를,
"미천한 신의 나이가 이미 70세가 되었고 몸 속 깊이 병이 들어 겨우 한 오라기의 목숨만 이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죽을 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깊이 마음속으로 애달퍼하는 것은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인심을 일치시킬 날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신이 죽어서 세도가 안정되고 인심이 일치될 수만 있다면 참으로 빨리 죽어서 성은의 만분에 일이라도 갚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신이 죽은 뒤에도 세도와 인심이 끝내 안정될 날이 없을까 염려되니, 이게 바로 미천한 신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점입니다. 전하를 위하여 통곡하면서 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근년 이래로 세도와 인심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전하의 밥을 먹고 전하의 옷을 입는 자치고 어느 누가 전하의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익을 쫓기에 급급하여 의리를 기꺼이 등집니다. 의리를 등지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임금을 망각하고 나라를 저버리면서도 조금도 꺼려하거나 두려워함도 없으며, 파당을 만들어 사리를 도모하는 것을 신통한 비결인 양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혹시라도 성상의 덕이 드러나고 의리가 신장될까봐 흉도(凶徒)의 소굴로 모여들어 성세(聲勢)를 펼치고 있으니, 세도를 좀먹고 인심을 현혹시키는 수법이 전적으로 ‘위를 믿지 않는다.[不信上]’는 세 글자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말씀을 꺼내면 갖가지 방법으로 틈을 엿보고, 한 번 처분을 내리면 백방으로 헤아려서 없는 일을 있다고 하여 흉한 말을 퍼뜨리고, 사심을 끼고 공심을 가리어 정론(正論)을 억눌러서 기어코 반대하여 이겨서 모조리 이적(夷狄)이나 금수(禽獸)가 되고 말려고 합니다. 도도히 흐르는 물결이 겉은 올바른 척하지만 속마음은 옳지 못합니다. 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도적의 음모이며 끝이 없는 것이 세상의 변란입니다. 성상의 덕이 이 때문에 더욱 드러나지 못하고 의리가 이 때문에 더욱 밝혀지기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상께서 세도를 바로잡고 민심을 일치시키려는 큰 규모 큰 포부와 미천한 신들이 성덕을 높이고 의리를 밝히려는 고심과 혈성(血誠)으로 하여금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 신장시킬 길이 없게 하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죽어버려서 아무것도 몰랐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 《명의(明義)》라는 한 권의 책은 곧 우리 나라의 《춘추》입니다. 신이 이 책에 집착하는 의리는 성덕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는 전하를 섬기는 자가 의당 심간(心肝)에 새겨서 나라의 명맥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종의 망측한 음모가 이명연의 소를 통하여 나왔으니, 이미 그 술수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의 걱정이겠습니까. 번득이고 어지러움이 마치 귀신 같고 물여우 같으니, 앞으로 기회를 노리는 야윈 돼지 같은 자들이 또 몇이나 나올지 모를 일입니다. 만약 유식자로 하여금 오늘의 나라 형편을 살펴보게 한다면 무어라고 말하겠습니까? 저 명연 같은 자는 단지 하나의 도깨비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신이 비록 무략(武略)이 없으나 이런 무리들쯤이야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진실로 두려운 것은 신이 늙어서 죽게 되었는데 《명의(明義)》 한 권의 뜻이 날로 멀어져가고 잊혀져가서 우리 전하께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기(人紀)를 바로잡으며 전례(典禮)를 숭상하고 난적(亂賊)을 토벌하는 성대한 덕업(德業)까지 홀대받고 무함당하여, 안정되어 가는 인심이 현혹되고 더없이 엄중한 대의(大義)가 지금보다도 더 심하게 어지러워지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신하가 되어 대의를 어지럽히고 성덕을 무함하는 자는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두 죄수를 처분한 지 수순(數旬)이 채 못 되어서 패려한 상소가 이어서 나오니, 이대로 커져 그치지 않는다면 을미년026)  과 병신년027)  의 역적들이 머지않아 눈을 흘기면서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로 신이 걱정되고 통분하여 죽고만 싶은 것입니다.
신은 새앙과 계피 같은 성질이 늙을수록 더욱 맵고 매 같은 기질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벼슬하기 전부터 군신과 부자의 윤리는 대강 알았으며 또한 군자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처음 주연(胄筵)에 올랐을 때 진심을 헤쳐 보인 한 말씀에 깊이 계오(契悟)를 얻어 마치 화씨(和氏)의 구슬처럼 껴안고 사철이 운행되는 진리처럼 믿어왔습니다. 그리하여 험하고 어려운 일들을 맛보고 어지럽고 근심스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다행히 천지 대덕(大德)의 돌봄을 입어서 지금까지 남은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신이 비록 병들고 용렬하지만 창으로 베개를 삼고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맹세코 인륜과 의리를 모르는 자와 같이 조정에 있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30년을 하루같이 지내왔습니다. 신이 접때 경연에 나아갔을 때 정신이 흐리고 숨이 차서 쌓인 속마음을 제대로 다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규례 밖의 특별한 대우를 받아서 한 고을의 봉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멀리 떠나는 때를 당하여 임금을 그리는 정성이 더욱 간절합니다. 하물며 신의 이 길이 돌아올 기약을 점칠 수 없으니, 신이 떠난 뒤에 이 일을 말하는 자가 다시는 없을 것이 새삼 두렵습니다. 이에 앞으로의 끝없는 걱정거리에 대해 조만간에 죽을 목숨이 외람되이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성명께서는 다소라도 살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멀리 떠나는 때를 당하여 이같은 고별의 글을 올리면서 혹시라도 대의가 흐려질까 걱정하고 은미한 말뜻이 드러나지 못할까 친절하게 되풀이하였다. 계오(契悟)된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30년을 하루같이 지켜온 소신을 피력하였으니, 경의 말은 들을 만하고 경의 마음 또한 감격스럽다. 다만 이명연의 거조에 대해서는 경은 그 흔적만 가지고 허물을 논하면서 그것이 호랑이 가죽인지 양의 가죽인지는 구별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명연의 사람됨을 특히 알고 있기 때문에 접때 면대(面對)에서 대략 말한 것이 있다. 이제 어찌 또 다른 말을 하겠는가. 그 자세한 내용이 빈연(賓筵)의 기주(記注)에 실려 있으니, 경이 취하여 보면 될 것이다."
하였다.

 

2월 6일 정축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과 경기 관찰사 이면응(李冕膺)을 불러 보았다. 상이 종현에게 묻기를,
"각능을 수개(修改)하는 절차와 준상(樽床)이나 면지(面紙)를 개비하는 것까지도 모두 고유(告由)하는가?"
하니, 종현이 전례가 그렇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번잡스럽지 않겠는가? 호조에서 물력(物力)을 각능에 나누어주고 수개할 때마다 들어간 대로 계산하여 처리하면 될 것이다. 창문을 바르고 기왓장 고치는 소소한 일들은 능관(陵官)이 해조(該曹)에 바로 알려 편의에 따라 수개한다면 일이 매우 간편할 것이다. 경은 호조 판서와 회의하여 정식을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각 능·원·묘의 봉심(奉審)한 곳에 대해 빨리 수개할 것을 아뢰자, 비답하기를,
"능상(陵上)의 소중함은 정자각(丁字閣)이나 비각(碑閣)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수교(受敎)를 내려 능의 잔디 파종을 정식으로 해서 능관이 편의에 따라 거행하도록 했는데 더구나 정자각과 비각에 관한 것이겠는가. 이 뒤로는 일체 파종에 관한 예에 따라 수교하여 정식을 만들어서 편의에 따라 수개할 곳은 편의에 따라 보수하되, 능관이 거행하는 것이 한 가지라도 신중하지 않음이 있으면 봄 가을로 봉심하는 행사 때 경기 감사가 그 근만(勤慢) 상태를 고과하여 계문토록 하라."
하였다.

 

2월 8일 기묘

사관을 보내어 원자(元子) 사부 송환기를 정중히 불렀다.

 

원자의 우유선 이성보(李城輔)를 올라오도록 하유하였다.

 

2월 9일 경진

고 판중추부사 심이지(沈頤之)를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상이, 국경을 나가서 죽은 자에 대하여 추증하는 관례가 있다며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계문하라고 명하니, 이조가 아뢰기를,
"법전에 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가서 죽은 자에 대하여는 품계를 올려 관작을 추증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 참판 김용경(金龍慶)이 부사(副使)로 나갔다가 국경 밖에서 죽었는데 정경(正卿)을 추증했고, 고 정승 정석오(鄭錫五)와 고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은 모두 정사(正使)로 국경을 나가서 죽었으나, 대신(大臣) 또는 자궁(資窮)한 종신(宗臣)이었기 때문에 추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심이지를 김용경의 예에 따라 품계를 올려 증직한다면 곧 정1품에 해당되는바, 의정(議政)과 영돈녕 및 영중추는 사체가 자별한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대신에게 이 문제를 내려 의논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은 의논드리기를,
"만약 영중추나 영돈녕이 정1품이라 하여 올려서 추증한다면 그가 생전에 지낸 벼슬이 판중추이므로 판중추와 영중추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나라에서 몸이 외국에 나가 죽었다고 하여 특별히 빛나는 추증을 하겠다면 굳이 의정이란 직함을 아낄 이유가 있겠습니까. 우의정을 추증함이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윤시동은 의논드리기를,
"인조조 때 고 동지(同知) 이흘(李忔)이 연관(燕館)에서 죽었는데, 장사 때에 재차 추증하여 찬성에까지 이르렀으니 죽음을 슬퍼하여 생애를 마치는 즈음에서 높인 전례를 여기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심이지에게 대광보국을 추증하는 것에 대해서 의심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대광보국을 추증하고 나면 의당 의정의 직함을 더 추증하여야 할 것입니다만, 특교(特敎)와 순례(循例) 이외에 수상(首相)과 좌상·우상을 추증한 예가 일정하지 않으니, 어느 것을 근거로 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수의한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여 우의정을 추증하였던 것이다.

 

2월 10일 신사

초계 문신(抄啓文臣)에게 친히 시험을 보였다.

 

차대가 있었다. 예조가 효열(孝烈)로 증직하여야 할 자 30여 명을 뽑아서 아뢰었다. 이조 판서 이병정(李秉鼎)이 아뢰기를,
"효자에게 남대(南臺)를 증직하는 것은 문벌이 있지 않으면 허가하지 않았는데, 갑인년에 이치중(李致中)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비로소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지금은 증직되는 자의 자손들이 남대가 아니면 증직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니, 증직이 살아 있을 때의 관작(官爵)과 다르기는 하지만 역시 신중하고 어렵게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증직할 사람이 많아서 30여 명이나 되니, 뒤섞이는 폐단을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윤시동은 아뢰기를,
"사대부의 가문에서 남대의 증직을 원하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만 이를 취사(取捨)하는 문제는 전조(銓曹)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대왕의 효성은 뭇 왕들의 으뜸이었지만, 승지가 효열(孝烈)을 초계한 것을 읽어드릴 때마다 만약 얼음을 깨서 잉어를 잡았다는 이야기나 겨울에 죽순(竹筍)이 돋아났다는 이야기가 있으면 모두 제외시켜 버렸으니, 여기에서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효도란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이다. 정려(旌閭)나 증직을 막론하고 당사자가 어떻게 자처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번의 증직은 너무 지나친 것 같으니 모두 시행하지 말고, 내년에 초계할 때에 참작하여 정려를 내리거나 복호(復戶)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효열을 뽑아 보고하는 일은 원래 정원수가 없기 때문에 예조가 그 가운데서 정밀하게 가려 뽑기는 하지만 자연히 많아집니다. 이 뒤로는 한성부는 몇 사람 이내, 각도는 몇 사람 이내로 한다는 것을 정식으로 삼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해에는 모두 복호하되 시행하지는 말고 명년 1월이 되거든 다시 뽑도록 하라."
하였다. 병정이 아뢰기를,
"효자를 증직할 때에 추증하는 예에 따라 전후 3대에 대하여 이조(吏曹)와 옥당(玉堂)으로 제한한다면 시끄러움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종현에게 물었다. 종현이 아뢰기를,
"이 뒤로는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실린 바에 따라 식년(式年)의 첫 달마다 본조의 세 당상이 일제히 모여 자세히 심사하여 의정부에 보낸 다음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도록 해야겠습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거행하는 것도 해마다 초계하지 말고 식년을 기다려서 특이한 자만 뽑아 보고하여 포상을 청하게 함으로써 옛 법전을 다시 밝히는 바탕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초계하는 숫자는, 양남(兩南)028)  은 10명, 기호(畿湖)는 6,7명, 양서(兩西)029)  와 동북(東北)030)  은 4, 5명, 4도(四都)031)  는 1, 2명이 넘지 않게 하여 지나치게 남잡한 폐단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보고한 내용 가운데 효성에 감응한 기적으로서 옛날 얼음 속에서 잉어가 나오고 겨울에 죽순이 돋았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허탄에 가까워 도리어 풍속을 독실히 하고 실질을 숭상하는 도리에 해로운 것이니, 이런 말은 일체 엄금하는 것을 정식으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외방(外方)은 그대로 더러 도신(道臣)이 선별을 하지만, 한성부는 숫자가 많든 적든 따지지 않고 명단이 올라오는 대로 모조리 본조에 보내고 있으니, 이는 잘못된 관례인 것 같습니다. 이것도 이 뒤로는 식년에 한성부의 세 당상이 일제히 모여 보고할 만한 자를 가려서 기록해 본조에 보내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시동에게 물었다. 시동이 아뢰기를,
"효열을 초계하는 일은 본래 식년에 하는 것인데 근래에 와서 수교(受敎)에 따라 매년 새해 첫머리에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됐든 안 됐든 간에 모두 예조에 계하하고, 예조는 또 선별을 못하여 정려·증직·복호의 세 가지로 나누어 시행하고 있습니다. 정려와 증직은 참으로 더없이 우대하는 포상이거니와 하등의 복호도 어찌 함부로 마구 시행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효도에 감응한 이상한 일은 천 년에 한 번이나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요즈음에는 계속 이어지니, 도리어 사람들의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다른 말들도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곧장 빼어버린다고 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열부(烈婦)의 경우에는 남편의 삼년상 내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으레 정문을 세워 포상하는 일이 많은데 이것도 살펴서 신중히 하여야겠습니다. 대체로 이런 것들이 요즘처럼 남잡한 적이 없었습니다. 성조(聖朝)에서 포장하는 전례(典禮)를 중히 하고 명(名)과 실(實)을 따지는 도리에 있어서 다시 해조로 하여금 정식(定式)을 마련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에 따라 구례를 복구하겠다. 식년이 되어 초계할 때 예조가 뽑아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는 예조 당상과 함께 자세히 조사하여 선발한 뒤, 다시 의정부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계목(啓目)을 덧붙여서 사체를 중히 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송전(宋銓)이 아뢰기를,
"아, 이명연의 패려한 상소가 한 번 나오자, 의리를 밝힌 한 권의 책이 장차 읽힐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겨울에 문(門)에 임하여 내린 처분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대의(大義)와 대방(大防)032)  을 범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하여, 엇나가는 버릇을 다시 부리지 못하고 넘보는 행위를 두려워하도록 하였는데, 대성인(大聖人)께서 만 년의 미래를 걱정한 원대한 생각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도 저 명연은 유독 무슨 심사로 앞장서서 소를 올려 두 죄수를 편든단 말입니까? 종이 가득히 떠들어댄 것이 마음 아파하는 생각은 전혀 없고 번득이며 헐뜯어 업신여기는 버릇만 드러내었습니다. 처분이 차분하였는데도 도리어 너무 다급하다고 하였으며 시행이 참으로 정사의 체통에 합당하였는데도 감히 해로움이 있다고 하는 등, 지극히 공정한 형정(刑政)을 은근히 한 때의 격뇌(激惱)로 돌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 지처(地處)니 관작이니 하는 등의 말로 드러내놓고 비호하다가 그 수단이 노출되자 기필코 이미 밝혀진 의리를 흐려지게 하고 투철한 임금의 결단을 가려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엄중히 징계하여 권면하지 않는다면 대의를 밝힐 수 없고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전 집의 이명연을 속히 의금부에 내려 국청을 열고 엄히 문초하여 시원스럽게 처벌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대하는 날에 연석(筵席)에서 한 말을 사간원의 장관이 미처 보지 못했는가? 그 자의 상소 중에 앞 부분은 두 죄수를 공격 배척하였다. 이미 공격 배척하였는데 어떻게 말로 나타내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지나치게 심사를 벌할 수 있단 말인가. 정호인(鄭好仁)의 일은 성덕우(成德雨)의 사건 뒤에 나온 것인데 두 사람은 국문하고, 이명연의 소는 또 두 죄수를 처벌한 뒤에 나왔는데 그냥 두고 묻지 않았는데, 이는 봐주는 것이 아니라 따로 권도(權度)가 있는 것이다. 율(律)의 명칭을 바꾼다면 비답을 내리겠다."
하였다. 송전이 아뢰기를,
"앞 부분이 공격 배척한 것 같지만 사실 겉으로는 억누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비호하는 실상은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두 죄수를 이미 처분하였는데 어찌 명연 한 사람을 아끼겠는가. 설령 명연이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흔적이지 실정이 아니다. 흔적을 가지고 마음을 죄준다면 지나치지 않겠는가. 박재순(朴載淳)의 소에 대하여 이미 비답을 내리지 않았으니, 지금 사간원 장관이 소회를 말한 것에 대해서도 달리 할 수 없다. 이미 비답을 받지 않았으니, 의리상 처신이 어려울 것이므로 체직을 윤허한다."
하였다.

 

남공철(南公轍)을 비변사 부제조로 삼았다.

 

해서(海西) 수군 절도영의 양미(粮米) 4백 석을 통어영(統禦營)에 떼어주어 전선(戰船)을 수리하는 일을 윤허하였다. 이는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의 말을 따른 것이다.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접때 전 군자감 판관 남명학(南溟學)이, 본감(本監)의 곡물 장부 중에, 다른 창고에서 옮겨온 것으로 회감(會減)하지 않아 헛되이 기록되어 있는 각종 곡물이 도합 5천 6백 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사실대로 수량을 줄여서 다시는 지난 잘못을 답습하여 회계책(會計冊)에 거짓으로 기록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품처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호조에서 매년 본감에 나누어 보내는 곡물이 늘 부족하기에 본조에서 선혜청이나 다른 군문(軍門)의 곡물을 얻어서 소요량을 계산하여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문에서 보낸 곡물과 해감(該監)이 받아들인 세곡(稅穀) 사이에 차이가 있어서 항상 모자라는 폐단이 생기기 때문에 본감에서 줄여서 본조에 보고합니다. 그러면 본조는 그 양의 많고 적음을 감안하여 숫자를 줄여서 회감(會減)하여 주기 때문에 회감되지 않은 숫자가 점차로 증가하여 무려 수천 석이나 됩니다. 일찍이 신사년033)  에, 본감의 회감하지 않은 수량이 너무 많아서 무진년034)  부터 경진년035)  까지 13년 동안의 회감하지 않은 7천여 석을 연석에서 아뢰어 탕감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사년부터 병진년036)  까지 36년 동안에 회감되지 않은 수량이 또 무려 5천 6백여 석이나 됩니다. 이는 대체로 해감(該監)에서 줄여 보고하는 숫자를 항상 늘려서 하는 폐단이 있기 때문에 본조가 회감할 때에 대부분 지나치게 많은 것을 억제하여 줄이고 있으나 적은 숫자가 쌓여서 많아지다 보니 이렇게까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계축년037)   이후부터 각 아문의 곡물을 옮겨서 방료(放料)할 때마다 별도로 계사(計士)를 차정(差定)하여 해감의 관원과 함께 사실대로 축난 숫자를 파악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계축년 이후의 회감되지 않은 각종 곡물 2백 80여 석이란 것은 실제로 축난 것과는 관계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해감의 원역(員役)에게 일일이 징수하여 들이고 있습니다. 이 뒤로는 엄격히 과조(科條)를 세워서 본조에서 사실대로 축난 숫자를 매긴 다음에는 비록 마되[升斗]의 작은 양이라도 혼록(混錄)된 것이 남아 있으면 곧장 해당 관원을 중률(重律)로 논하고 원역(員役)은 법사로 이송하여 엄히 처벌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하여 시행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계축년 이전의 5천 3백여 석에 있어서는 이미 사실에 따라서 축난 숫자를 매긴 것이 아니고 보면 그 허실(虛實)을 따지기 어렵고 세월이 오래된 일이라 실제를 조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처럼 많은 양을 곧장 탕감하자고 청할 수도 없으니 대신에게 물어서 조처하소서."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서울이나 지방을 막론하고 요즈음 탕감의 폐단이 많아 신은 깊이 민망하게 여기고 있으므로 군자감의 일도 감히 탕감하자고 청할 수 없습니다. 전에 축난 것 외에 계축년 이후에 축난 것으로 회감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해감의 원역에게 징출(徵出)하는 일과 호조에서 축난 숫자를 매긴 뒤에 다시 혼록(混錄)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은 호조 판서가 아뢴 것이 참으로 옳습니다. 이 뒤로는 엄격히 정식으로 하소서."
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이미 정식이 있으니, 이 뒤로 누가 감히 함부로 범하겠는가. 곡물은 탕감하여 주라."
하였다.

 

이만수(李晩秀)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11일 임오

영희전(永禧殿)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봉조하 김종수(金鍾秀)를 불러 보았다. 상이, 그가 토산(兎山)으로 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입시하도록 하유하였던 것이다. 종수가 아뢰기를,
"원자궁(元子宮)의 개강(開講)이 가까워 온다고 하니, 기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봉전(封典)이 아직 지체되고 있어 신민들이 몹시 바라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자꾸만 늦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마치 인가(人家)의 자손들이 늦게 과거에 오르는 것을 미사(美事)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경은 새로 간택한 사부의 사람됨을 아는가?"
하니, 종수가 대답하기를,
"신이 일찍이 만동묘(萬東廟)에서 한 번 보았는데, 신이 본 바로는 이 직임(職任)에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유선(李諭善)은 어떠냐고 묻자, 종수가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김양행(金亮行)의 제자인데, 신도 일찍이 그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란 것을 들었으나 추향(趨向)과 언론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윤득부(尹得孚)는 비록 과거 출신이기는 하나 그의 경학(經學)과 행의(行誼)는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묘년 조참(朝參) 때에 이명식(李命植)을 논한 일로 보건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근간에 흉한 무리가 역적의 편을 들어서 의리를 배반하고 있으니, 장차 문제를 일으킬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이명연(李明淵) 같은 자는 더욱 통분합니다. 신은 그들이 서로 맥락을 통하는 곳을 압니다."
하니, 상이 누구와 맥락이 연결되어 있느냐고 묻자, 종수가 대답하기를,
"명연은 이의술(李義述)과 아주 가까운 친척이고 의술은 심낙수(沈樂洙)와 사돈 간이니, 그들의 관계는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술의 초명(初名)은 이상몽(李商夢)이었다. 그가 병신년 초에 교관으로 입시하였다가 도태되었는데, 글을 못했기 때문이다. 명연의 일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의 상소에 성(成)·정(鄭) 두 사람을 성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만 법 적용이 정도를 지나쳤다고 말한 것뿐이니, 이것을 가지고 죄줄 수는 없다. 대체로 의리를 밝혀 신장하고 투철한 신념을 갖는다면 이것이 곧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는 방법인데, 이 한 사람이 그물에서 빠져나갔다고 해서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조정에서 하는 처사가 올바르면 그도 필시 뉘우쳐 죽고 싶어할 것이다. 만약 그들의 무리 중에 명연으로 하여금 자기 잘못을 스스로 깨달아 자신이 분발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한 나쁘지 않겠으나 다만 그런 사람이 없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그가 만약 흉도(凶徒)들의 말을 잘못 들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자복한다면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그가 범한 죄가 저처럼 흉패(凶悖)한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지금 멀리 떠나게 되므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 여름 장서(長書)의 변괴가 있은 뒤로 아직껏 그 부리를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틀림없이 호남에 있을 터인데, 전주 감영에서 추적하여 체포하지 못하니 매우 괴이쩍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이 어찌 꼭 호남에 있겠는가."
하자, 종수가 아뢰기를,
"신을 꼭 해치려는 자는 아직도 이것으로 신의 큰 죄를 삼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는 경이 사기(事機)가 긴급하여 간사한 것들의 싹을 미리 꺾으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러 경이 스스로 말을 만들어 그렇게 한 것이어서 걷잡을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이 위험하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이안묵(李安默)·조진정(趙鎭井)·박장설(朴長卨)이 죄명을 입을 지 벌써 3년이 되었으니, 씻어주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안묵은 사람을 논할 때 소인이라고 지목하였고 조진정은 곧장 사나운 역적이라고 몰아붙였다. 남을 역률(逆律)로 무함했을 경우 반좌(反坐)의 율이 있으나, 그 말이 조리가 없어서 죄가 여기에 그쳤던 것이다. 두 제학 역시 경연의 자리에서 아뢰었지만 내가 윤허하지 않았다. 박장설에 있어서는 훨씬 차이가 있다."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대신이 떠나기에 앞서 아뢰는 말이 이처럼 간절하나 세 사람 사이에는 본래 거리가 있다. 그리고 효도로 다스리는 정사에 관해 이미 들었으니,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를 고향으로 방면시켜야겠다. 죄인 박장설을 돌아오게 하여 그의 노모를 만나게끔 하라."
하였다.

 

2월 13일 갑신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경상도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자, 의금부에 내려 추고하고 나서 곧 석방하여 사은 숙배할 것을 신칙하였다. 그러나 서구가 여전히 응하지 않으므로 파직하고 조진관(趙鎭寬)으로 대임시켰다.

 

원자의 우유선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여 소명을 사양하니, 즉시 올라오라고 하유하였다.

 

전 지평 김광우(金光遇)가 상소하기를,
"옛날에 선천(宣川)의 지인(知印) 김철현(金鐵賢)이 충무공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심하(深河)에 이르렀다가 군사가 무너지고 화살이 다했습니다. 그러자 응하가 철현에게 ‘너는 떠나거라.’ 하니, 철현이 말하기를 ‘소인이 어찌 떠나겠습니까. 칼을 물고 자결하여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겠습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응하와 함께 동시에 순절하였습니다. 그 뒤 응하의 사당을 의주(義州)에 세웠을 때 철현을 무하(廡下)에 배향하였으나 병자년의 난리에 사당마저 불타고 말았습니다.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은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尙州)의 화산(華山)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하다가 혁명한 소식을 듣고는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지금까지 임천석대(林千石臺)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성취하고 수립한 것이 우주간에 빛났으나, 명성과 지위가 없어 포양(褒揚)할 수 없으니,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그 충렬을 드러내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2월 14일 을유

공조 판서 송환기(宋煥箕)가 사관(史官) 편에 아뢰기를,
"원자궁(元子宮)의 개강할 길일을 이미 정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의 해묵은 병이 점점 깊어가고 새로운 증세까지 겹쳐서 실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기일 전에 올라갈 수 없기에 견책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봄날씨가 아직도 쌀쌀하니, 이런 때에 길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깊이 헤아린 일이 아니다. 날씨가 화창해진 뒤에 길일을 가리려고 하니 경은 그렇게 알고 올라오라."
하였다.

 

정언 윤지범(尹持範)을 특별히 임천 군수(林川郡守)에 보임하였다. 소명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2월 16일 정해

하교하였다.
"피폐한 고을을 회복시키고 겸하여 혜양(惠養)하는 정사를 생각하여 특별히 낙점(落點)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년이 채 못 되어 체차하니 민망스럽다. 개성 유수 조진관(趙鎭寬)을 유임토록 하라."

 

윤동만(尹東晩)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형원(李亨元)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각 영문의 관할 구역 안에 나무를 심을 것과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시키는 정사에 대해 주의시켰다.

 

2월 17일 무자

동지 정사 김사목(金思穆)과 부사 유강(柳焵)이 연경(燕京)에서 치계하기를,
"신 사목은 지난해 12월 27일에 연경(燕京)의 교보(郊堡)038)  에 이르러 부사 유강, 서장관 이익모(李翊模)와 모여 사신의 임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황제가 연회를 열 때마다 참석하였는데, 태상황(太上皇)이 탑전(榻前)에 불러서 친히 술을 따라서 세 번이나 주었습니다. 또 자주 음식물을 내리고 관등시(觀燈詩)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므로 신들이 각각 칠언(七言) 율시 한 수씩을 지어서 올렸더니, 비단과 필묵(筆墨)을 내렸습니다. 원명원(圓明園)의 잔치 때에는 태상황이 화신(和珅)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그대들은 돌아가서 평안히 지낸다고 국왕(國王)에게 전하라.’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세자의 나이가 얼마인가?’ 하므로 신들이 여덟 살이라고 대답하자, 다시 묻기를 ‘마마는 하였는가?’ 하므로 신들이 아직 안 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2월 18일 기축

판돈녕부사 이명식(李命植)이 상소하여 치사하기를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치사의 청을 특별히 들어주고자 하니 해조에서 근거가 될 만한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니, 이조가 아뢰기를,
"국조의 고사를 상고하여 보니, 서너 건의 전례가 있는데, 치사란 두 글자를 본 관함의 위에 썼습니다. 이에 따라 계하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죽었다. 시동의 자는 백상(伯祥)인데 고 판서 윤급(尹汲)의 종손(從孫)이다. 영조 갑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삼사에 출입하며 언론을 주장하다가 남북으로 귀양 가는 등 관계에서 여러 번 미끄러졌다가 기용되었다. 지금 주상 병오년에 비로소 죄명을 깨끗이 씻어주었고 을묘년 이후로 더욱 발탁되어 쓰였다. 젊어서부터 나라의 고실(故實)에 대하여 많이 알고 군국의 기무에 통달하였다. 김종수(金鍾秀)·심환지(沈煥之)의 한 무리와 함께 진출하였는데, 김씨와 홍씨의 두 외척이 전(田)·두(竇)의 다툼을 벌일 때039)   항상 조정(調停)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을묘년에 정승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았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하교하기를,
"우상이 서거하였으니 나랏일을 볼 때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다. 이 대신은 본래 조정과 재야의 명망을 지녔는데, 정승이 된 뒤에 여론을 들어보니 본말(本末)이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대강 알 수 있었다. 전적으로 위임시켜 효과를 기대하는 터였으므로 두루 잘 다스리리라 묘당을 믿었더니 이제 그만이로구나. 어찌 그리도 급히 가버렸단 말인가. 비록 그의 집을 찾아가 조문하고 교상(橋上)에서 거애(擧哀)하지는 못하지만, 전례를 살펴서 죽음을 슬퍼하는 예를 갖추어 시행하라. 내각(內閣)의 치제(致祭)는 성복(成服) 전에 시행하고 대신의 시호는 으레 장사 전에 의논하였으니, 홍문관으로 하여금 제때에 맞추어 회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0일 신묘

장용 대장(壯勇大將)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진청(賑廳)의 월과미(月課米)는 한 해의 간격으로 수어청과 총융청의 양청에서 올려받고 내려주고 하였는데, 수어청이 출진(出鎭)한 뒤로는 월과미가 귀속될 곳이 없습니다. 본영의 군기색(軍器色)에 이속시켜 수어청의 예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22일 계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연초에 현륭원에 행차하였을 때 화성의 성안을 부실(富實)하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는데, 간곡하고 자세하였습니다. 명을 받들어 이행하여 주상의 뜻을 선양하는 일은 낭묘(廊廟)의 책임인데, 지금 시행할 만한 한두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모혈(帽穴)에 관한 일이며 또 하나는 가삼(家蔘)에 관한 일입니다. 모자(帽子)는 공물(公物)이기는 하나 이미 개인 장사꾼에게 주어서 그들이 마음대로 산매(散賣)하게끔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적으로 화성에 그 권한을 주어 연경(燕京)의 시장에서 사오거나 의주(義州)의 점포에서 사들여 화성의 시가에 따라 산매한다면 각처의 장사꾼들이 저절로 모여들 것입니다.
가삼은 사사로운 물화이기는 하나 본래부터 부호(富戶)들이 전적으로 상권을 가지고 있는데, 만약 이것도 화성에 예속시켜 화성 시장에 모이지 않고는 매매할 수 없도록 할 경우 이윤이 생기는 곳이므로 물주(物主)와 부호들이 틀림없이 앞다투어 모여들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을 거리가 저절로 들어차게 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자연 그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절목(節目)을 만들어 준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유사 당상 정민시(鄭民始) 등을 불러 그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물었다. 상이 이르기를,
"모자와 가삼의 두 가지 건에 대하여 곧 시행하라고 허락하려 한다. 연경에 갈 때 가져가는 은화(銀貨)를 삼으로 대신 충당하도록 허락한다면 역관들의 폐단을 구제하는 하나의 방편도 될 듯하다.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하니, 민시가 아뢰기를,
"연경에 갈 때 가져가는 물건은 원래 인삼을 썼는데, 이 일이 《통문관지(通門館志)》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은으로 바꾼 것은 삼은 귀하고 은은 넉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은화가 품귀해져 역관들이 그들의 포대를 채울 수 없어서 빈손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삼은 집에서 심기 때문에 숨겨 가지고 가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데, 금법을 무릅쓰고 숨겨 가지고 가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옛날의 예에 따라 가져가도록 허락하는 것이 양쪽 다 편리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은이 귀하면 삼을 가져가고 삼이 귀하면 다시 은을 가져가게 하여 무역의 권한이 우리 나라에 있게 하는 것이 실로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획책하는 좋은 계책이다. 그리고 약조(約條) 중의 금제(禁制)와도 무관하니, 올해부터 사행(使行)이 갈 때 다시 삼포(蔘包)를 쓰더라도 불가한 줄을 모르겠다. 대신과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와 같이 제도를 정한다면 반드시 부호를 화성에 옮겨서 무역의 권한을 주관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대체로 성을 쌓은 것도 백성을 보살펴 주기 위한 방도이고 보면, 이미 쌓았으니 이를 알차게 할 방법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이 이미 행하였던 예로 말하더라도 한(漢) 무제(武帝)는 10만의 부호(富戶)를 무릉(茂陵)에 옮겼었다. 진실로 이익을 일으키고 생업을 안정시켜 성안을 부실(富實)하게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을 아끼겠는가. 이미 모집해 들였으면 격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의당 발탁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니, 그 중에 지위나 이력이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 근실한지의 여부를 보아 별도로 수용(收用)하여야 할 것이다. 경들은 이로써 효유하여 각자 즐거이 모여들게 하라."
하고, 드디어 비변사의 초기(草記)를 윤허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참으로 시험하여 보고자 한다면 먼저 중신(重臣)의 말대로 구례(舊例)를 다시 살려 팔포삼(八包蔘)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화성에 성을 쌓은 것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한나라 때 무릉에 부호가(富豪家)를 이주시켰는데 더구나 이 성의 소중함은 선침(仙寢)040)  을 호위하고 행궁(行宮)을 옹호하는 데에 있으니, 그 체모(體貌)의 존엄하기가 무릉에 비하여 더욱 다른 바가 있는 것이다. 경외(京外) 사방의 부호(富戶)로 하여금 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모여들게끔 하되, 마치 물이 아래로 내리흘러 밤낮으로 쉴 틈이 없는 것처럼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고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모여들어 서로 앞다투어 직업을 권면하고 자기 일을 즐기며 사는 곳을 편안히 여기고 이득을 이롭게 여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소중함으로 인해 이 성을 쌓은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성실하고 근실하게 하였는가를 살펴서 차례로 발탁하여 임금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다는 의리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니, 경들은 잘 알아서 분부하라."
하니, 민시가 아뢰기를,
"화성에 새로 모집하는 부호는 먼저 그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생활을 풍족히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미삼계(尾蔘契)를 만든 뒤에 종없이 이속(移屬)된 바람에 별로 긴하게 여기는 곳이 없으니, 이를 화성에 예속시키되, 새로 모집하는 부호는 20인으로 계를 만들어 항업(恒業)을 삼게 하고 혹 옮겨가는 자가 있으면 계 중에서 빼어버리고 다른 축실(築實)한 자로 대충하게 하소서. 그리고 약간의 공화(公貨)를 빌려주어야만 재물의 밑천을 늘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경상 감영의 소관인 남창(南倉)의 돈 5만 냥과 평안 병영에 있는 비국의 관리하는 것과 해영(該營) 소관의 돈 중에 5만 냥을 한도로 모두 화성에 이속(移屬)시켜 편의에 따라 변통하여 쓰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사행(使行)이 삼포(蔘包)를 이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대신에게 의논해 보았습니다. 좌의정 채제공,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는 모두 ‘삼을 쓰는 것이나 은을 쓰는 것이나 모두 구규(舊規)이니, 때에 따라 통용한다면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금년의 사행부터 통용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비변사가 화성의 부호(富戶)에 대한 모삼절목(帽蔘節目)을 올렸다.
【1. 모집해 들인 자들이 비록 부실(富實)하다고는 하지만 새로 옮길 때 많이 팔아서 쓸 것이니, 먼저 가산을 제재하여야 한다. 미삼(尾蔘)의 무역이 아직 영구히 예속된 곳이 없으니, 부실한 자 20인을 선발하여 계를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화성에 이주하여 집을 짓고 살면서 사업을 하도록 한다. 1. 관모(官帽)는 산매(散賣)하게 된 뒤로 별달리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니, 지금 화성에 이거(移居)할 부실한 가호에게 주관하도록 하여 연경(燕京)의 시장에서 무역하거나 의주의 저자에서 사오게 하되, 청포전(靑布廛)의 면세분(免稅分) 1백 척(隻)은 전인(廛人)에게 내주고 그 나머지는 물주가 주관하여 각처에서 매매하도록 한다. 1. 양남(兩南) 지방의 집에서 심는 삼은 근래에 점차 풍성해져서 교역과 매매가 하나의 생업이 되고 있다. 이번에 이거하는 자들은 대부분 전에 물주(物主) 노릇을 하던 자들인데, 관모(官帽)와 가삼을 막론하고 화성의 물주와 차인(差人)이 아니면 본지(本地)에서 직접 사지 못하도록 하고 각처의 장사꾼들도 모두 화성에서 교역하도록 한다. 1. 연경에 가는 자들이 가지고 가는 팔포(八包)는 원래 인삼으로 채워 주었는데, 그 사이 삼이 귀하게 되자 은포(銀包)로 대신하였다. 그런데 이제 가삼으로 옛 제도를 복구하여 원포(元包)로 정하였으니, 들여보내는 삼은 집에서 심은 것이므로 사모아 채워 넣는 절차를 가삼의 물주가 저절로 주관하게 된다. 이 역시 화성의 미삼계인(尾蔘契人)이 맡아서 거행하게 한다. 1. 집을 짓고 들어와서 살 계인들을 구차스럽게 초가에 살게 할 수는 없으므로, 대로(大路)의 남북쪽에다 각각 기와집을 연달아 지어서 성취(成聚)의 효과를 거두도록 한다. 1. 삼과 모자를 무역하는 일은 물주 한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반드시 차인(差人)과 수종(隨從)의 협조를 받도록 한다. 한 물주의 차인이나 수종은 많으면 5,6인, 적어도 2,3인 이상으로 하되, 각처에 있는 자들을 마음대로 차출하여 고용하게 한다면 20인 이외에는 달리 가호(家戶)를 늘릴 방도가 없으므로, 20인의 계인(契人)이 각자 차인과 수종을 데리고 가서 물주가 물력(物力)을 도와 주어서 각각 집을 짓게 하여 호구를 늘리는 방편으로 삼는다. 1. 삼과 모자가 비록 원래 정한 주된 물화(物貨)이지만, 오가는 사이에 참으로 무역하여 판매할 물건이 있으면 마음대로 매매하는 것을 허가한다. 1. 계인이 처음 옮겨서 시작할 때 물화를 크게 무역하려면 개인의 힘으로는 반드시 자본이 부족할 것이므로, 영남 감영 소관의 남창(南倉)에 있는 돈 5만 냥과 평안 병영의 창고에 유치해 둔 돈 5만 냥을 기한을 정하여 빌려주어서 밑천을 삼도록 하고 그 이자를 받아서 성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쓰도록 한다. 1. 집을 지을 때 재목을 갑자기 구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경기의 선재(船材)로 지정되지 않은 송전(松田)과 사적으로 나무를 길러 놓고 팔기를 원하는 자는 벌채를 허가하여 마련할 수 있도록 한다. 1. 응모하는 자가 모두 대대로 서울에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갑자기 살던 집을 버리고 가족이 모두 이사하게 된다면 불편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그 아들이나 아우들 중에서 원하는 자가 있으면 대신 보낸다. 1. 계인(契人)이 매매할 때에 공문(公文)이 없으면 외도(外道)의 여러 고을이 마음을 써서 돌보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사상(私商)이나 잡살뱅이들이 쉽게 그 사이에 파고 들게 될 것이니, 화성부에서 공문을 만들어 준다. 1. 응모하는 자들 중에서 의원(醫員)이나 역관을 업으로 하는 자, 또는 공물(貢物)을 바치는 일로 먹고 사는 자들은 옮겨서 본업을 폐지해서는 안 되므로, 의원이나 역관은 전과 같이 업을 수행하고 공물을 바치는 자들은 그 자제들이 이를 맡아서 점검하도록 한다. 1. 가호를 옮겨 살도록 하는 것은 성 안의 민호(民戶)가 많도록 하기 위한 것인바, 그들도 덕의(德意)를 받들 줄 알아서 이익만 추구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 권계(勸誡)하며 성실하고 각근(恪勤)한 자는 특별히 뽑아서 등용하겠다고 이미 초기(草記)의 비답에 말하였다. 만약 부랑(浮浪)하고 어긋난 습관이나 사람을 속이고 이익만 독점하는 폐단이 있을 경우, 계중에서 적발하여 관에 알리도록 하고, 관에서는 이를 조사하여 엄히 다스린다. 1. 응모인을 이미 20호로 정원을 정하였으나, 후일 만약 숫자가 점차 늘어날 경우 반드시 잡다한 폐단이 생길 것이므로 20인 이외에는 1인도 더 정하지 못하게 한다. 혹시 탈이 생기든가 죄를 짓든가 하여 명단에서 삭제되었을 경우 그들로 하여금 합당한 자를 가려서 유부(留府)에 고하게 함으로써 본사(本司)에 보고하여 문안에 기록하도록 한다. 1. 부호를 모집해 들여 삼과 모자의 업을 경영하게 하는 것은 사실 성안에 사람이 많이 살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러나 성안에 원래 살던 사람들도 같이 혜택을 받아야만 백성들을 골고루 잘 살게 하는 좋은 정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모자나 삼을 막론하고 그 이익을 매년 1천 냥씩 본부(本府)의 교리청(校吏廳)에 떼어주어서 혜택이 고루 미치도록 하는 바탕을 삼는다.】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10면
【분류】호구-이동(移動) / 농업(農業) / 의생활(衣生活) / 상업(商業)

 

병조 판서 이득신(李得臣)과 강화부 유수 김이익(金履翼)을 파직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이 화성에서 돌아오다가 주교(舟橋)에 이르러 감관(監官) 김진욱(金鎭郁)으로 월곶 첨사(月串僉使)를 삼았다가 곧바로 독성 첨사(禿城僉使)와 서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이익이 치계하여 아뢰기를,
"월곶은 곧 조세선(漕稅船)을 호송하는 도차원(都差員)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첨사 박종수(朴宗秀)가 섬의 표식을 잘 관리하고 물길을 잘 아니, 그대로 두소서."
하였다. 병조가 종수를 그대로 유임하고 진욱은 다른 진(鎭)에 옮겨 제수하기를 계청하니, 하교하기를,
"박종수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섬의 표식을 잘 관리하고 물길을 잘 알기로는 필시 오랫동안 강가에 살면서 물에 익숙한 사람보다는 못할 것이다. 더구나 주교를 주관하는 일이 어찌 세선(稅船)의 길을 인도하는 일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잘하면서 저 일은 어떻게 못한단 말인가. 수신(守臣)이 갑자기 유임을 청하는 것도 참으로 매우 놀라운 일인데 경이 도리어 이런 잘못을 본받고 있으니, 이것이 요즘의 사(私)가 승(勝)한 하나의 사례가 아니겠는가. 정말 나라의 체통은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해당 수신과 판서를 파직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발탁하여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그리고 권엄(權𧟓)을 병조 판서로, 이경일(李敬一)을 이조 참판으로,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23일 갑오

사학(邪學) 죄인 이존창(李存昌)을 다시 도신(道臣)을 시켜 문초했다. 존창은 신창(新昌) 사람이다. 사학의 교주로 자처하였는데, 병오년에 일이 발각되자 도신에게 명하여 끌어다가 문초하였다. 존창이 마음을 고치고 새로운 길로 나가겠다고 공초하니, 풀어주었다. 그런데 을묘년에 또 다시 염찰(廉察)에 걸려들어 감영의 옥에 가두었는데, 그의 공초가 전과 서로 달랐다. 대간의 상소가 일어나자 형조에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 등이 모두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륙(刑戮)은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말단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으로 대하고 그 책만 불사르면 묘족(苗族)처럼 완고한 자들도 감동하는데 미천한 일개 존창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만에 하나라도 겉만 고친 척하고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경우 연전의 최필공(崔必恭)의 예에 따라 도신이 직접 가르치고 경계하여 개과천선한 효과가 있으면 방면하고 그렇지 않으면 법을 적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고치게 하라."
하였다.

 

2월 24일 을미

이조 참의 윤행임을 파직하였다. 이는 황단(皇壇)의 대향 헌관을 의빈(儀賓)으로 차출하였기 때문이다.

 

임시철(林蓍喆)을 강화부 유수로 삼았다.

 

2월 25일 병신

비국 당상을 불러 보았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의 역사를 지난 가을 이후로 송영(松營)에서 전담하여 거행하도록 이미 정식(定式)을 삼았으나 봉심에 관한 건은 아직 품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광주의 유수가 이미 부내(府內)의 각능을 봉심하였으니, 개성부의 유수가 봄가을로 제릉과 후릉을 봉심하는 일을 똑같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동지경연사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거둥할 때 동서반에 설치할 초상(軺床)이 품수(品數)의 구별이 있는데, 문반은 참의 이상, 무반은 아장(亞將) 이상이라야 상에 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신이 이조에 있을 때 첨중추 이창욱(李昌郁)이 반상(班上)의 경대부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헌리(憲吏)를 불러 치워버리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근래에 원(園)에 거둥하실 때 전 오위 장 박제가(朴齊家)가 반열 속 호상(胡床)에 앉아 있기에 신이 각예(閣隷)를 시켜 가서 물어보게 하였더니, 벌컥 화를 내면서 ‘상은 본래 우리 집 것으로 하인을 시켜 가져온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처신이 불공하고 말이 매우 패려하니, 작은 일이라 하여 놔둘 수 없습니다. 박제가를 파직하소서. 그리고 또 압반(押班)하는 법관을 엄히 주의시켜 만약 법을 어기고 상에 앉는 자가 있으면 즉시 정과(呈課)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제가의 대답한 말이 공손치 못한 것은 원래 사람이 경솔하여 격례를 모르는 소치이다. 뭐 나무랄 것이 있겠는가. 이 뒤로는 구규(舊規)를 거듭 밝혀서 이러한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이병정(李秉鼎)이 아뢰기를,
"《대전통편》에 당상관은 호상에 앉으면 안롱(鞍籠)을 든 자가 앞에서 인도하고, 당하관 정3품은 다만 안롱만 가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잡기 당상(雜歧堂上)이 비록 첨지나 오위 장을 지냈더라도 어찌 호상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이 뒤로는 문관과 음관으로 도정(都正)을 지낸 자와 무관으로 승지와 총관(摠管)을 지낸 자에 한하고, 이 이외에는 호상에 앉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정식을 만드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가 차자를 올리기를,
"화성부는 첫째로는 원릉(園陵)을 옹호하고, 다음으로 경기의 요새지이고, 끝으로 배와 수레가 모여드는 곳입니다. 공사를 시작한 지 3, 4년 만에 대농(大農)의 경비를 쓰지 않고 어느덧 성곽이 완성되었으니, 신기(神機)와 묘운(妙運)이 마치 귀신이 도운 듯합니다. 이것은 정말 만세토록 끄떡없는 기반입니다. 지금 우선 할 일은 백성들이 많이 들어와 잘살게 하는 것이므로 묘당에 명하여 훌륭한 계책을 강구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신이 그 절목(節目)을 취하여 나라의 체통에 관계되고 원대한 계획에 지장이 있는 것을 뽑아 보니, 잘못된 것이 여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서울은 사방의 근본이고 부호(富戶)는 빈민의 바탕입니다. 지난 역사를 상고하여 보면 무릉(茂陵)에 부호를 옮겼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삼대(三代)와 같은 시대를 만회하려는 전하의 포부로써 어찌 이런 방편적인 구차한 정치를 본받는단 말입니까. 그들 가운데 간혹 거기에 가 살기를 자원하는 가호(家戶)들이 있다면 굳이 법을 만들어 금할 필요는 없겠지만, 결단코 조정에서 모집하는 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그 첫번째 불편한 것입니다.
전(傳)041)  에 말하기를 ‘땅이 있으면 거기에 재물이 나고, 재물이 나면 그것을 쓸 수 있다.’고 하였으니, 민호(民戶)를 모집하고 백성들을 풍족하게 하는 길은 땅을 널리 개간하고 재물을 유통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 북쪽에 새로 개간한 토지가 이미 그 요점을 얻었으니, 여기에 널리 무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서 서도·북도·호서·호남·영남·영동의 물산이 모여들게 해야만 비로소 부실(富實)의 효과를 책임지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모자와 삼 두 가지만으로 통화(通貨)의 근원을 삼고 있으니, 모자와 삼의 효과만으로는 한 부(府)의 생활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하다는 것은 식자가 아니더라도 판단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두 번째 불편한 것입니다.
천하의 모든 일은 각각 주객(主客)이 있는데, 주객이 뒤바뀌고 성취된 일은 없습니다. 화성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주인이고 서울의 부호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가 도리어 주인이 되어 재산의 실권을 잡아 부내에 사는 백성들을 부린다면 그 백성들이 뒷전에서 구경만 하고 서로 헤매며 떠들기를 ‘우리가 원침(園寢)을 옹호하고 경기의 방어를 해 온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데 지금 수십 호의 부호에게 점거당하여 주인이 나그네의 말을 듣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삼켜버렸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서로 전파하며 모두들 흩어져버리고 말 것이 필연적인 사세입니다. 이것이 그 세 번째 불편한 것입니다.
전부터 삼을 판매하는 유는 본래 그 철에 사두는 것도 아니고 수시로 사고 파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사기 전에 돈을 풀었다가 때가 되면 삼을 거두어들이고 있는데, 올 가을에 쓸 것은 벌써 지난해 가을에 마련하여 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20호를 위해 이익을 독점하게 한다면 시기 전에 돈을 풀어놓은 저들은 제때에 삼을 거두어들이는 이득을 그냥 앉아서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득을 잃어버린 자도 우리 백성이고 그 이익을 독점하는 자도 우리 백성이라 다같은 백성으로서 득실이 맞먹는다 하더라도 선후와 다소에 따른 효과와 지장이 판이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 네 번째 불편한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부호들이 앞다투어 입주를 원하면서 행여나 뒤질세라 걱정하는 것은 예외로 뽑아서 등용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변장 실직(邊將實職) 등의 벼슬은 본래 의관(醫官)이나 역관들이 통상적으로 갖는 직책이므로 그들에게는 반드시 영광스러운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보다 과하게 하려고 한다면 사치와 범람한 습속이 되어 더구나 키울 수 없으므로 마침내는 은혜가 다함에 실망하여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다섯 번째 불편한 일입니다.
지금 이 절목이 유리한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결론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부호가 이익을 독점하게 만들어 준 행위입니다. 이는 왕도정치에서 통렬히 금하여야 할 일인데 이처럼 방편적으로 허락하면서 이익을 독점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것이 어찌 처음에 계획을 잘 짜서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기본 방침을 소중히 하는 도리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그 여섯 번째 불편한 점입니다.
신은 원래 재능이 없고 세상의 모든 일에 까마득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말은 쉽고 실행은 어렵다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예로부터 폐단을 말하는 자가 반드시 그 폐단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역시 조정에서 그 말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살피고 나서 담당관에게 명하여 잘 생각해서 조처하게 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런 점에 대해 가부를 논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경이 이미 그 불편한 여섯 가지 단서를 말하였으니, 어찌 억지로 시행할 수 있겠는가. 좌상이 이 일에 참여하였으니, 그와 함께 다시 좋은 방법을 강구하여 조처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예문관이 이명식(李命植)의 치사에 대하여 교서를 내린 일로 아뢰자, 하교하기를,
"중신(重臣)이 상소하였으므로 그 청을 허락하기는 하였으나, 해조에서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아뢰었는데 고금의 사리가 다르다. 그리고 자급이 보국(報國)에 오른 중신이 병사로 치사한 것이나 정언으로 치사한 것과 같지 않고 보면 하례드리는 후반(後班)에 나오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차라리 근례(近例)를 따르는 것이 더 편리하겠다. 삼자함(三字啣)을 더하여 ‘치사 봉조하(致仕奉朝賀)’를 원함(原啣)의 밑에다 내려 쓰도록 하라."
하였다.

 

전 장령 오붕남(吳鵬南)이 상소하기를,
"사창(社倉)은 주 부자(朱夫子)042)  의 유제(遺制)인데,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이 좋다고 하였고 고 정승 민정중(閔鼎重)이 국중(國中)에 반포하여 시행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북관(北關)의 민속에 있어서는 자연 산물이 귀한 줄을 몰라서 풍년이 들어 곡물이 흔하면 흙처럼 보아 처음부터 아낄 줄을 모르므로 한번 흉년이 들면 곧장 남쪽에서 실어가야 하는 폐단이 생깁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마을의 부로(父老)들과 사창을 세울 것을 논의하였더니, 모두들 좋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조정의 명령이 있다면 그 누가 기꺼이 하지 않겠습니까. 많이 저축하여 두었다가 흉년을 구제한다면 남쪽에서 실어오는 폐단을 없앨 수 있고 백성들의 이로움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북도의 행영(行營)은 곧 병사가 이주(移駐)하는 곳인데 6진(六鎭) 가운데 있으므로 사면으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대체로 대장이란 중앙에서 통제를 하는 자인데 무엇 때문에 적이 쳐들어 오는 첫머리에 앉아서 먼저 적의 선봉을 맞아야 한단 말입니까. 처음에 군영을 설치한 것은 번호(蕃胡)가 도발해 오는 환란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지만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남쪽 북쪽으로 괜히 번잡하게 왔다갔다하게만 되니, 실로 통제하는 데에 알맞은 계책이 아닙니다.
경성(鏡城)의 본영은 성지(城池)가 튼튼하고 인민(人民)이 많으며, 북쪽에는 가로막은 무령(茂嶺)이 있고 남쪽은 험한 귀문(鬼門)이 있습니다. 그리고 큰 바다가 동쪽을 감싸고 장백산(長白山)이 서쪽에 깎아지른 듯이 서 있으니, 참으로 사방이 막힌 요새입니다. 지금 남병영처럼 행영을 폐하고 본영만 남겨둘 경우 충분히 한 방면을 통제할 수 있는 훌륭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만, 행영도 완전히 폐지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후를 중군으로 삼아서 스스로 진압하도록 한다면 남북의 성세(聲勢)가 서로 호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소서.
종성부(鍾城府)는 강가에 치우쳐 있어서 큰 재가 첩첩이 가로막고 있는데 지금의 행영은 바로 옛날의 종성 고을입니다. 길이 사방으로 고르게 나 있고 성지가 완비되어 있으니, 본읍(本邑)을 행영으로 옮기고 종성에다 독진(獨鎭)을 설치한다면 읍이나 진으로서는 옛자리에 모두 그대로 있게 되는 편리함이 있고 변지에는 무장을 더욱 튼튼히 하는 좋은 점이 있습니다.
경성에서 6진으로 통하는 길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산 고갯길이고 하나는 갈파(葛坡) 고갯길입니다. 경원(慶源)에서 강을 따라 무산 고갯길을 거쳐 경성에 이르면 5일의 일정이 됩니다. 또 경원에서 종성의 경계를 넘어 갈파 고갯길을 거쳐서 경성에 이르면 3일 일정이 되는데, 모두 큰 길입니다. 그 수비하는 방법에는 서로간에 차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무산령(茂山嶺)은 남쪽에는 부령부(富寧府)가 있고 북쪽에는 회령부(會寧府)가 있으며 재 아래에는 또 풍산진(豊山鎭)이 있으니, 처음부터 설치한 방어가 아주 잘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갈파령(葛坡嶺)에 있어서는 남쪽으로 수성(輸城)까지가 70리이고 북쪽으로 경원 지경까지가 1백여 리로서 근 2백 리의 땅에 방어할 진이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온당한 계책이 아닙니다.
고 정승 이종성(李宗城)과 고 참판 이이장(李彛章)이 본도의 안찰사가 되었을 때 두루 그 형편을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곳은 참으로 적이 들어올 요충이다. 방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미처 설치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금까지 미루어온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경성의 다섯 군데의 보(堡)를 장백산 밑에 설치한 것은 장백산 뒤에 있는 야인을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지금은 야인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산에 읍을 설치한 뒤에 강을 따라 방어하면 다섯 보(堡)가 내지(內地)가 되어서 모두 쓸데없는 진이 되고 맙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이 중에 한두 개의 보를 갈령 밑 옛 성에 옮겨서 진을 설치한다면 반 정도의 일로 갑절의 효과를 얻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산 남쪽에 있는 이른바 장파(長坡)란 곳은 백두산 밑에 있는데, 북쪽으로 무산부까지가 이틀 거리이고 서쪽으로 운룡보(雲龍堡)까지가 사흘 거리입니다. 그러므로 백두산 일대가 가장 요충 지대인데 강 연안 1백 리에 단 하나의 진이나 보의 방수도 없으므로 식자들이 염려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백성들이 차츰 모여들어 토지를 더 개간하여 호구가 2백여 호나 되고 토지도 한두 곳의 보를 설치할 만하게 되었습니다. 강 연안 중요한 곳에 이처럼 백성들이 모여 사는데도 고을까지의 거리가 저처럼 머니, 변방에 대한 정사가 어찌 소홀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경성의 한두 개의 보를 이곳에 옮겨 설치한다면 병기 등의 물자가 미비할까 걱정할 것이 없고 처음에 설시할 것은 성이나 하나 쌓는 데에 불과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창의 제도는 주 부자에게서 비롯되었는데, 그대의 소에 인용한 송 선정(宋先正)과 민 고상(閔故相)이 반포하여 시행할 것을 청한 것은 그 또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편리의 여부를 문의하도록 하고 기타의 여러 조목에 대하여도 도신으로 하여금 지적하여 진달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6일 정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금군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한만유(韓晩裕)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27일 무술

원자의 사부 송환기(宋煥箕)가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은 선경(先卿)의 손자이다. 선경이 맡았던 책임을 경에게 맡겼으니 경의 도리상 어찌 한 마디라도 사양하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직명(職名)을 몸에 지니는 것이 나오기 어려운 단서가 된다면 어찌 서로 버텨서야 되겠는가. 경이 띠고 있는 공조 판서의 본직을 체차하겠다."
하였다. 이어 승지를 보내어 하유하기를,
"지금 부르는 것은 개강하기 위해서이지, 직무로 매어 놓으려는 것도 아니고 세도(世道)를 책임지우려는 것도 아니고 또한 경연관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내달 초순 후에는 날씨도 화창해질 것이므로 경이 힘써 길을 떠나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지난번 유시에서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 것은 경이 명을 듣고 곧장 올라오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지나치게 사양하니 이 어찌 경의 가문에 대해 알고 있던 바라고 하겠는가. 이에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유시를 전하고 함께 올라오라고 하였으니,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이어받도록 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공조 판서로,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판으로, 조상진(趙尙鎭)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2월 28일 기해

춘당대에 나아가 성균관 유생의 도기 강제(到記講製)와 초계 문신의 친시(親試)와 문신의 제술(製述)과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도기강의 수석은 유학 정익방(鄭翼邦)이 차지하고 제술의 수석은 생원 김계하(金啓河)가 차지했는데, 모두 전시에 직부(直赴)하도록 했다.

 

2월 29일 경자

차대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화성의 실호 절목(實戶節目)에 대하여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성지(城池)의 역사가 끝나면 민호(民戶)를 채우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부호를 뽑아 보내고 아울러 모자와 삼 두 가지로 이익을 얻을 바탕을 삼아준 것입니다. 신이 처음 그에 관한 말을 듣고 마음속에 곤란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판부(李判府)의 차자가 올라온 다음 신이 민간에서 일을 잘 아는 자들에게 여러 번 물어본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절목에 문제점이 있다고도 하고, 그렇게 시행하더라도 지장이 없다고도 하였는데, 대체로 편리하다거나 불편하다는 의논이 서로 엇갈리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조정이 화성의 큰 역사(役事)에 대해 조금이라도 구차히 한 정사가 없다고 여깁니다. 1만여 냥을 관에 바치고 역사를 돕겠다고 자원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모두 물리쳤으니, 나라의 본뜻이 정정당당하다는 것을 어느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모자와 삼에 관한 일로 후일의 말썽거리를 불러온다면 전공(前功)이 아깝게 되지나 않을까 싶습니다. 더구나 대신이 차자에서 이(利) 자 한 글자로 대체(大體)를 들어 말한 것은 매우 좋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새로 만든 화성의 절목을 도로 취소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상이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절목은 이미 취소하였지만, 삼포(蔘包)에 관한 일은 역관들이 원한 것이므로 굳이 싸잡아 중지할 것이 없다. 대체로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 옛날에도 우형(虞衡)의 관리가 있었고 보면 산림과 천택에서 나는 것은 응당 나라에서 관리할 것이다. 삼화(蔘貨)로 말하더라도 처음부터 철저히 막았다면 모르거니와, 지금 이미 밀매가 낭자하니 이를 금하지 못하고 그들이 하는 대로 놔둘 바에야 차라리 이로 인하여 삼포를 채우도록 해서 재화의 권한을 조정으로 귀속시키는 것이 도리어 국가의 체통을 보존하는 도리일 것이다."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을 불러 보았다. 이는 그가 임지로 떠나면서 하직 인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상이 형원에게 이르기를,
"들으니, 영남 사람들은 가묘(家廟)를 향사(鄕祠)로 만들고 향사를 서원(書院)으로 만드는 등 서로 모방하여 거의 없는 고을이 없다고 하는데, 참으로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어진 정치란 반드시 경계(經界)를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된다고 했는데, 이는 경계가 분명치 않으면 힘센 자는 이득을 보고 약한 백성은 손해를 입기 때문이다. 임자년의 수재 이후로 영남의 전정(田政)이 다시 더욱 문란해져서 힘센 자는 연줄을 통해 탈세를 하고 가난한 백성은 항상 억울한 세금을 문다고 하니, 이것 또한 정말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은 모든 힘을 다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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