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임인
편전(便殿)에서 재계하였다. 이는 명일이 황단(皇壇)의 춘향(春享)이기 때문이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향축(香祝)을 우회해서 올려서는 아니된다. 명례문(明禮門)은 단향(壇享)을 위하여 설치한 것인데 이 문을 놔두고 다시 돈화문(敦化門)으로 나가는 것은 필시 미처 상고하지 못하고 만든 의절일 것이다. 이 뒤로는 명례문을 통하여 올리되, 이를 황단의 의절에 기재하라."
하였다.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판으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이정운(李鼎運)을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3월 3일 계묘
황단의 제사에 참여하였던 조정 관원과 유생에게 제술 시험을 보이고 무사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나서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이재학(李在學)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3월 5일 을사
시임 및 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불러 보았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일전에 충량(忠良)의 자손이 응제(應製)할 부제(賦題)를 처음에 ‘저 장강을 바라보니 역시 동쪽으로 흘러가는구나.[瞻彼長江 亦流于東]’로 삼았는데, 이것은 고 충신 정온(鄭蘊)이 지은 것이다. 그 시를 보건대, 정말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신의 집에 정온이 손수 써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핏자국이 아롱아롱합니다."
하였다.
3월 6일 병오
성균관에서 삼일제(三日製)를 시행하였다.
3월 7일 정미
조종현(趙宗鉉)을 한성부 판윤으로, 이득신(李得臣)을 형조 판서로, 심환지(沈煥之)를 지경연사로 삼았다.
3월 9일 기유
승지 이조승(李祖承)이 원자 사부 송환기(宋煥箕)가 병으로 길을 떠날 수 없다고 치계하니, 돈유(敦諭)하기를,
"경은 경의 선조의 후손답게 산림에서 도를 지키고 있으니 그 근원이 있다. 몇 칸의 집에서 병에 시달리면서도 조행(操行)이 고상하니 시골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모범이 되고 나오면 조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경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찌 옛날의 선정(先正)인 경의 선조가 부담하였던 그런 기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세도(世道)에 관한 일로 번거롭게 하지 않고 관작으로 얽매지 않으면서 여러 차례 간절히 불러 다만 본임(本任)으로 오게 하려는 것은, 대체로 중점이 여기에 있어서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으므로 경의 선조의 마음으로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함이 더 성실한 도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경이 이런 취지를 생각한다면 어찌 많은 말을 한 뒤에야 나오겠는가. 함께 올라올 사람을 다시 내려보내겠으니, 경은 마음을 써서 잘 조섭하여 기다리는 나의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0일 경술
춘당대에 나아가 서북 별부료군(西北別付料軍)의 활쏘기 시험을 보였는데, 전 부장(前部將) 안필(安泌)이 세 번을 맞추었다. 상이 그가 고 충신 안극함(安克諴)의 후손이란 말을 듣고 특별히 훈련원 주부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3월 14일 갑인
사역원 도제조 김이소(金履素)를 불러 보았다. 이보다 앞서 사역원 관생(官生) 박민(朴珉) 등이 상언(上言)하여 관생들의 조잔(凋殘)한 폐단에 대하여 호소하였으므로, 제조에게 조처의 방안을 숙의하여 마련하라고 명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소가 아뢰기를,
"폐단의 구제는 다만 돌아올 때 가지고 오는 포대의 건에 달려 있습니다. 대체로 사행이 책문(柵門)에 들어갈 때에는 짐바리가 매우 초라하지만 돌아올 때에는 물화(物貨)가 몇 배 정도 뿐만이 아닌데 이는 전적으로 밀매하는 장사꾼들이 법을 어기고 농간을 부린 것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변금(邊禁)이 엄하지 못하여 역관들만 유독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만약 책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돌아올 때 가지고 올 포대에 대한 취지를 거듭 밝혀 효유하고 책문을 나간 뒤에는 즉시 포대의 숫자를 비교해 보되, 정밀하게 조사하여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운다면 몰래 법을 어기면서 가지고 오는 폐단이 저절로 막아질 것이고 한 자 한 치의 필목도 감출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팔포(八包)의 숫자도 맞추려고 하지 않아도 맞추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돌아올 때 가지고 오는 포대에 관한 이야기를 갑자기 들으니 무엇이 이롭고 해로운지 모르겠다. 그러나 책문에 들어가기 전에 효유만 하고 만다면 과연 간위(奸僞)를 막아서 역관의 무리를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 물러가 묘당의 신하들과 상의한 다음 지적하여 초기(草記)를 만들라."
하였다. 상이 이소에게 이르기를,
"묘당에서 만든 연행 절목(燕行節目) 중에 은과 삼을 팔포(八包)에 통용하도록 한 것은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대체로 물건이 귀하다는 것은 천해질 징조이며 천하다는 것은 귀해질 징조이다. 삼이 귀하면 은으로 대신 포대를 채우고 삼이 천하면 구규(舊規)대로 삼을 쓰도록 하며, 또 은화(銀貨)도 같이 포대를 채우도록 허락한다면 간사한 짓을 하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고 역관들도 힘입게 될 것이다. 경의 생각은 어떤가?"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역관들이 팔포에 삼을 쓰는 것은 고례(古例)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번 삼이 귀해진 뒤로 은으로 대신하였는데 이는 한때의 편의에 따라 나온 정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근래에는 집에서 재배한 삼(蔘)이 다소 여유가 있고 은을 구할 길은 차츰 어려워져서 역관들은 포대를 채울 길이 없고 밀상들이 숨겨 가지고 가는 삼은 해마다 몇 백 근에 밑돌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삼으로 포대를 채우도록 허락하고 몰래 가지고 가는 것을 일체 엄단한다면 새로 실시하는 일이 아니면서 변통성을 갖는 정사가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원래 자문(咨文)을 보내어 금지한 사항이 아니므로 허락하는 것이나 금지하는 일을 굳이 문서를 왕복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 은과 삼을 다같이 포대에 채우도록 하되, 묘당으로 하여금 근수(斤數)를 정하여 초기(草記)를 작성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5일 을묘
이문원에서 재계(齋戒)하였다.
3월 16일 병진
이문원에 나아가 함흥과 영흥 두 본궁(本宮)의 의대(衣帶)와 향촉(香燭)을 싸서 의식에 따라 직접 전달하였다.
정승을 간택하여 【전의 간택에 들어간 김종수(金鍾秀)·김이소(金履素)·김희(金憙)·이병모(李秉模)이다.】 이병모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았다.
예조가 영의정 홍낙성에게 궤장을 내릴 날짜를 택하여 아뢰었다. 상이 경연 신하에게 이르기를,
"대신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가법(家法)이다. 더구나 사후의 체모는 더욱더 다른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요상(僚相)이 초빈에 있는 때에 다른 요상이 잔치를 베푸는 것은 실로 미안하니, 날짜를 연기토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우의정 윤시동이 죽어 아직 장사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온 정사(正使) 김사목(金思穆)과 부사(副使) 유강(柳焵)을 불러 보았다.
3월 17일 정사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춘당대에 나아가 내승 별군직(內乘別軍職)과 선전관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함경도 관찰사 이정운(李鼎運)을 불러 보았다. 임지로 떠나려 하면서 하직 인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전 경상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항상 한번 경에게 말하고자 하면서도 못하였다. 임자년에 남학(南學)의 유생들이 올린 상소는 경의 가문으로 볼 때 한 번 겁운(劫運)을 겪었다고 하겠으나 또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도 하겠다. 아무 해에 있었던 병조의 일043) 은 천만 부당한 말이었다. 이는 나만 잘 알고 있는 일이 아니라 그때 내린 영에서 남김없이 통촉하였고 보면, 세도가 아무리 험하다 하더라도 이 일의 전말을 모르고 공사(公事)로 경의 가문을 물어뜯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국정(鞫庭)의 흉서(凶書)와 조정(曹庭)의 의도가 각기 단락(段落)이 다르다는 것을 아무 해의 일을 겪은 오늘의 조정 신하 중에서 그 누가 모르겠는가. 이런 까닭에 내가 기유년에 원지(園誌)를 다시 편찬할 때 역적 나경언의 일을 구별하여 썼는데 경도 아마 들어서 알 것이다. 한번 분명히 하유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인 데다가 또 별다른 사단(事端)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지내온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유생의 상소에서 남김없이 얽어서 무함하였으니, 인심과 세도가 어찌 이처럼 무섭단 말인가. 그러나 이로 인해서 훤히 밝혀졌으니, 또한 경의 가문의 큰 다행이라고 하겠다."
하니, 태영이 아뢰기를,
"신의 아저씨가 오랫동안 안고 있던 원한이 이처럼 밝혀졌으니, 감읍(感泣)의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임자년 박하원(朴夏源)의 상소 중에 ‘이해중(李海重)이 역적 나경언과 짜고 하였다.’는 한 구절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은 것이다.
각신(閣臣)을 보내어 고 좌의정 유언호(兪彦鎬)에게 제사를 지냈다. 상이 상기(祥期)가 가깝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3월 18일 무오
편전에서 재계하였다.
3월 19일 기미
봉실(奉室)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중국인의 자손과 충량(忠良)의 후예로서 참반(參班)한 자를 불러 보았다.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효승(李孝承)을 내직으로 옮겨 놓고 곤수의 빈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의망해 들이라고 명하였다. 효승은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의 후예이다.
또 전 상서(田尙書) 후손, 문정공 윤황(尹煌) 및 문간공 정온(鄭蘊)의 봉사손(奉祀孫)과 충정공(忠貞公) 윤집(尹集)의 후손을 모두 전조에서 수용(收用)하라고 명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북도 사람 초옥(楚鈺)은 중국인 초해창(楚海昌)의 손자인데 접때 상언하여 황단(皇壇)의 제사에 참여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초해창이 우리 나라에 언제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신의 부서에서 아직 복주(覆奏)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집에 상고할 만한 가승(家乘)이 있는가?"
하자, 종현이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다만 호적을 상고하여 보니, 그가 해창의 후손임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선조(先朝) 갑술년에 초해창·전시태(田時泰)·반자봉(潘自逢)의 3성(三姓)에 대하여 대대로 역(役)을 면제해 주어 영구히 베를 받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고, 또 정밀하게 뽑아 문안을 작성하여 ‘화인록(華人錄)’으로 이름을 붙이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선조(先朝)의 수교가 있었으면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이성보(李城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3월 20일 경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하유하였다.
"거듭 경을 정승으로 택한 것이 어찌 괜한 일이겠는가. 더구나 고 정승이 뜻을 가다듬어 정사를 도운 끝이라 묘당의 기획을 위해서나 조정의 기상을 위해서나 어디서 그를 대신할 만한 자를 얻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때에 경이 이 임무를 맡았으니 이에 부응하는 방도를 힘써 다하여 경에게 의지하는 이 마음을 저버리지 말라."
3월 21일 신유
우의정 이병모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사람을 얻는 데 달렸고 사람을 얻는 비결은 정승을 고르는 일에 달렸다고 합니다. 정승의 자질의 첫째는 명덕(名德)이고, 다음은 사공(事功)이고, 마지막이 시대를 구제하는 재능입니다. 태산(泰山)과 교악(喬嶽)처럼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없으면서도 공리(功利)가 만물에 미치는 것을 명덕이라 하고, 국가의 전장(典章)을 밝히고 민물(民物)의 진위를 통찰하여 말보다 실천을 더 잘하고 일이 생기자마자 처리하는 것을 사공이라 하며, 영민하고 숙달하여 형편에 따라 운용해서 근본 강령(綱領)을 세우는 지혜는 모자라지만 이모저모로 맞추어 허점을 보완해 나가는 쓰임이 있는 자는 시대를 구제하는 재능에 손색이 없다 하겠습니다.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없으면 정승다운 정승이 아니므로 구차하게 자리나 채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리를 비워두고 적임자를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적임자는 얻지 못하고서 나라가 제대로 되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많은 성인(聖人)의 전통을 집합하고 만물의 정리에 순응하시므로 구구한 보조자의 공로에 기대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하늘도 혼자서 운행하는 이치가 없고 성인도 사람을 잘 써야 한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천리의 큰 지역안에 어찌 세 가지 자질 중에 한 가지라도 가진 사람을 못 얻어서 기대에 부응하는 정치를 못한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어진 덕이 있는 사람을 구하여 여망에 부응토록 하고 신을 정승 의망의 명단에서 삭제하여 거듭 은명(恩命)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저께 사람을 보내어 돈면(敦勉)할 때 대략 기대하는 생각을 언급하였는데, 그 요지는 직책에 부응하라는 것에 불과하다. 나의 마음이 조정의 형편이 안정되기를 바라면 경은 어떻게 하여야 나의 마음에 부응할 수 있으며, 나의 뜻이 사대부들로 하여금 순수하여지게 하고 싶다면 경은 어떻게 하여야 나의 바람에 부응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된다. 백성을 구제하고 탐욕을 억누르고 생활을 넉넉하게 해 주는 등의 일들이 모두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일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 일마다 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면 공사간에 큰 다행이겠다. 상소 중에 잘못을 들어 면직해 달라는 말은 지나친 것이다. 미연에 제압하지 못하여 연전에 간사한 것들이 꿈틀거리도록 놔둔 것이 어찌 보필하는 정승의 책임이겠는가. 이는 나의 허물이었다. 더구나 발각된 뒤에 썩은 나무나 마른 나무를 꺾듯이 나쁜 세력을 말끔히 씻어내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간단히 처리했는데, 이제 와서 무엇 때문에 그 말을 다시 끄집어내어 입을 더럽힐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홍성연(洪聖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3월 22일 임술
윤대(輪對)가 있었다.
3월 24일 갑자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영(壯勇營)의 중일 시사(中日試射)와 신구선(新舊選) 초계 문신의 친시 시사(親試試射)를 거행하였다.
돌아온 서장관 이익모(李翊模)를 불러 보았다. 상이 익모에게 이르기를,
"옛날 사람이 외국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그 나라를 관찰하는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본 바가 어떤가?"
하니, 익모가 아뢰기를,
"소문을 모두 믿을 것은 못 되나 근래에 병란의 걱정이 있었습니다. 호남(湖南)을 묘(苗)라 부르고 호북(湖北)은 비(匪)라 부르는데, 묘는 이미 평정되었으나 비는 때없이 흩어졌다 모였다 합니다. 그리고 황성(皇城)에 있는 몽고인은 만주인과 서로 혼인하기 때문에 심히 사납지는 않으나 변방에 있는 자들은 사납고 교활하여 제압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이것이 장래의 걱정거리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새 황제가 즉위한 뒤로 인심의 향배가 어떻던가?"
하니, 익모가 아뢰기를,
"인심은 모두 흡족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태상 황제가 늙어 기휘(忌諱)하는 것이 많아서, 반포된 역서엔 가경(嘉慶)이라고 쓰고 궁중에서는 건륭(乾隆)이라고 썼으며 통보(通寶)044) 를 인출(印出)할 때 건륭이 7할을 차지하였습니다."
하였다.
3월 25일 을축
우의정 이병모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처음의 비답에서 ‘직책에 부응하라.’는 말을 게시하였다. 지금도 다른 말로 바꾸고 싶지 않으니, 경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6일 병인
이태영(李泰永)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윤숙(尹塾)이 죽었다.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이 중신(重臣)에게 별도의 예우를 한 것이 어찌 중신을 위해서였겠는가. 그 사람은 수립한 공로 이외에 그 굳건한 점이 쓸 만하였는데 아깝게도 저승에서 다시 살아올 수 없구나. 죽은 판중추부사 윤숙에게 특별히 의정의 직함을 추증하고 그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을 조용(調用)하라. 그리고 시호는 정문을 내리기 전에 내려야 할 것이니 홍문관으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그의 시호에 대해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서매수(徐邁修)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강(柳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기양(李基讓)을 의정부 검상으로 삼았다.
고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을 문익(文翼)으로, 판중추부사 윤숙을 충숙(忠肅)으로 증시(贈諡)하였다.
3월 27일 정묘
이경일(李敬一)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봉조하 구윤명(具允明)이 죽었다. 하교하기를,
"훈척 구가(勳戚舊家)를 조정에서 특별히 대우해 왔다. 그런데 더구나 능은군(綾恩君)은 나이와 지위, 재능과 계책이 모두 우대와 장려를 받았는데 이제 죽었다고 하는구나. 조문과 제사 등의 일을 전례를 살펴 거행하고 그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은 상복을 벗기를 기다렸다가 임용하여 조정이 기념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8일 무진
우의정 이병모가 상소하여 면직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9일 기사
우의정 이병모를 돈유(敦諭)하였다.
3월 30일 경오
편전에서 재계하였다. 내일이 우향(雩享)이기 때문이다. 승지를 보내어 태상시에서 우사단(雩祀壇)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단소(壇所)에 가게 하고 여러 집사들에게 깨끗이 잘 청소하라고 신칙하였다. 그리고 승지에게 하교하기를,
"창룡수(蒼龍宿)의 별이 보이면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비를 내려 달라고 갈구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나라는 사전(祀典)을 가장 중히 여기지만, 농사에 힘쓰고 풍년을 비는 일에 더욱 마음을 쓰고 있다. 우단(雩壇)에 대한 제향 의식을 밝게 닦는 것은 선조(先朝) 때부터 시작한 것이니 이를 계승하여 실천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방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해서에서 수군 조련을 행하고 관서에서 순회의 조련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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