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경오
명정문(明政門)에 거둥하여 관북(關北)의 공령 유생(功令儒生)의 응제(應製)를 직접 시험하였다. 이에 앞서 병진년093) 에 하교하기를,
"옛날에는 북도(北道)에 융성한 예로써 불러야 할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 지역이 천리나 되어 이미 열 가구 정도 사는 조그마한 취락이 아니고 보면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인사가 단지 소문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요즈음 그 지역에서 인재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고 있으니 분교(分敎)가 그 적합한 방법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몇 해 전에 관동(關東)에서 경의(經義)로 선발된 자를 분교관(分敎官)으로 삼았는데, 이 전례를 이 도에다 적용시켜야 한다. 그리고 또 이 도에 과거를 보인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관북의 수령에게 엄중히 경계하여 이사(里社)에서 뛰어난 자를 선발하고 한 고을에서 몇 사람의 능통한 자를 뽑아 도신(道臣)에게 보고하도록 하며, 도신은 다시 그들이 능통한가 않은가를 물어서 장계로 아뢰게 하라. 그리고 경전(經傳)에 통달한 인사에 대해서는 도백(道伯)이 성심으로 찾아내서 또한 장계로 아뢰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해 3월에 도신 조상진(趙尙鎭)이 경공생(經工生) 1인, 공령생(功令生) 1백 9인을 가려 뽑아서 아뢰니, 상이 삼경(三經)과 사서(四書)의 의의 조문(疑義條問) 53조를 내리고 또 시(詩)·부(賦)·표(表)·책(策)의 제목 다섯 가지를 내리면서 전 승지 이익운(李益運)에게 가지고 가도록 명하여, 경의(經義)는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묻게 하고 공령생은 도신과 이정운이 날짜를 나누어 시취(試取)해서 시권(試券)을 봉하여 올리도록 했다. 그 뒤 임금이 고찰하여 삼하(三下) 이상 80인을 뽑아 도신으로 하여금 양식과 말을 지급하게 해서 반궁(泮宮)의 식당에 오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이르렀다. 이에 상이 직접 임어하여 다시 시험을 보여 부(賦)에 우등한 생원 이섭(李燮) 등 9인을 뽑아 모두 전시(殿試)에 응시할 것을 허락하였다.
고 판서 윤탁연(尹卓然)을 창의사(彰義祠)에 합향(合享)하도록 명하였다. 전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아뢰기를,
"함흥(咸興)의 창의사는 바로 임진년에 창의(倡義)한 12인을 제사하는 곳인데, 그 당시의 도백(道伯)은 바로 윤탁연이었습니다. 12인 가운데 윤탁연의 휘하 비장이 절반을 넘으며, 또 함흥 사람 문덕교(文德敎)의 《임진록(壬辰錄)》을 고찰하면 윤탁연이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의병 부대를 편성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우(祠宇)를 건립할 때에 당연히 그를 아울러 모셨어야 했는데 장군과 비장이라는 체모 때문에 거론하지 않았으니, 큰 흠전(欠典)입니다. 일체로 합쳐 제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흥(永興)에 있던 교제창(交濟倉)을 고원(高原)의 옛날 창고 터에다 도로 설치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익운(李益運)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이경일(李敬一)을 이조 참판으로, 김화진(金華鎭)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6월 2일 신미
《향례합편(鄕禮合編)》이 완성되었다. 이보다 앞서 을묘년094) 혜경궁(惠慶宮)의 환갑 경사 때에 윤음을 내려 서울과 지방으로 하여금 향음(鄕飮)하는 예(禮)를 바로 세우게 하고, 또 각신(閣臣)들에게 명하여 역대의 향음하는 의식을 책으로 만들어 장차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려고 하였다. 마침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향약(鄕約)은 한 쪽도 폐지할 수 없다고 말하자, 상이 향약은 단지 한 고을에 시행할 만한데 만약 조정에서 법을 만들어 반행(頒行)하게 한다면 효과는 없고 폐단만 있다는 이유로 어렵게 여겼다. 시동이 시행하기를 극력 청하자 마침내 각신인 서유구(徐有榘)와 예조 당상 민종현(閔鍾顯) 등에게 편집하도록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향음의주(鄕飮儀注) 및 향약(鄕約)을 신의 부서에서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여 각각 준행하도록 할 일에 대하여 이미 성명(成命)을 받들었습니다. 신들이 삼가 향음하는 예를 상고하니 《의례(儀禮)》의 경문(經文)에 빠짐없이 기재되어 있어 그대로 행하면 의식은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역대의 사지(史志)를 고찰하면 덜고 뺀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진실로 시대에 맞게 변통하는 뜻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된 의주(儀注)는 고금의 전장(典章)에 비교해 보건대 참으로 잘 다스려진 세대에서 이룩된 법이니, 진실로 별도의 찬정(撰定)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 반행하는 책은 이미 역대의 의절(儀節)을 갖추어 기재하였으니, 진실로 학식이 넓고 성품이 우아하며 옛것을 좋아하는 선비가 있으면 스스로 여기에 나아가 절충하고 변통할 것입니다. 오직 중앙이나 지방의 유사(有司)인 신하가 받들어 시행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향약의 법은 송(宋)나라의 유학자인 여대균(呂大勻)에서 시작되었는데, 주자(朱子)가 그 글을 가져다 보태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였으니, 참으로 만세에 통행하는 훌륭한 법입니다. 여씨의 전문은 오늘날에 전해지지 않지만 주자가 보태거나 줄인 본(本)은 문집 《주자대전》에 실려 있으니, 중묘(中廟) 14년과 선묘(宣廟) 6년에 반행한 향약은 이 본으로 만들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조종조의 고사를 준행하여 주자가 보태거나 줄인 여씨향약을 4도(都)와 8도(道)에 반포하되 그것이 간혹 풍속과 맞지 않아 미루어 시행하는 데 구애됨이 있으면, 단지 향음 행례(鄕飮行禮)하는 날에 삼대(三代)에 독법(讀法)하던 의식을 대략 모방하여 사정(司正)이 치사(致詞)한 뒤에 별도로 문사(文詞)가 있는 사람을 정하여 향약의 내용을 한 번 읽도록 해서 각기 엄숙하게 듣고서 물러나게 하소서. 그러면 그것도 한 가지를 들어 두 가지를 얻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여러 도신(道臣)과 수령으로 하여금 시무(時務)의 적절함을 참작하고 시행해야 할 방법을 강구하여 예(禮)와 교화로 인도하려는 조정의 본의를 저버리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서울에는 법을 마련하여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은 중묘조(中廟朝)의 성훈(聖訓)이 분명하게 《국조보감(國朝寶鑑)》에 게재되어 있으며,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 또한 서울에서는 향약이라는 제목이 걸맞지 않다는 말을 하였으나, 진실로 진신(搢紳)과 장보(章甫)로 하여금 서로 예로써 돕고 선으로 관찰하게 하여 이에 서민에게 파급시켜 본받게 한다면, 향약이라는 명칭은 없다 하더라도 향약의 실상은 있게 될 것입니다.
관례(冠禮)와 혼례(婚禮) 두 예에 이르러서는 처음을 시작하는 의식으로 성왕(聖王)이 소중하게 여겼던 바인데, 요즈음에 와서는 고을에서 예를 갖추는 자가 드무니, 그것이 비록 속습이 점차로 낮아진 데 연유하기는 하지만 역시 문견(聞見)이 고루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삼가 상의 재가를 따라 《사마씨서의(司馬氏書儀)》·《주자가례(朱子家禮)》·《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編) 아래에다 덧붙여 실어 먼 고을과 궁벽한 마을에서도 모두 얻어다 강독하여 밝히게 하였으니, 이에 향례(鄕禮)의 규모가 모두 갖추어지고 절문(節文)이 모두 질서가 잡힐 것입니다. 그리하여 효제(孝悌)가 일어나고 예양(禮讓)이 일어나 크게 풍속이 바뀔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니, 주자소(鑄字所)로 하여금 즉시 인쇄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6월 3일 임신
비변사 당상관 김지묵(金持默)·김문순(金文淳)·민종현(閔鍾顯)·권엄(權𧟓)·이병정(李秉鼎)·이서구(李書九)·남공철(南公轍)의 직임을 파면하였다. 정언 홍치영(洪致榮)이 상소하기를,
"정사의 득실과 생민의 휴척은 오로지 공경 대부(公卿大夫)가 각기 그의 직분을 다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으니, 주사(籌司)의 좌정과 공당(公堂)의 모임에서 백성들의 염려와 국가의 계책은 강 건너 일로 보면서 주색(洒色)을 평론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고 조소와 농지거리로 사대부(士大夫)로서의 체모가 전혀 없으며, 비루하고 속된 말을 가항(街巷)의 말투로 해댄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안에 있을 때에는 벗을 불러놓고 심지어 조례(皁隷)와 천기(賤技)들이 낭자하게 수중에 있다고 합니다. 그의 관직을 물어보면 경대부(卿大夫)의 관직이지만 그 일을 말하면 돼지 기르는 종의 장난이니, 깨끗한 조정에 부끄러움을 끼치고 사방에 비웃음을 전하는 것이 과연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그리고 전형(銓衡)하는 곳은 선악을 분변하지 못하여 충사(忠邪)가 서로 뒤섞이고 있으니, 진실로 세상의 도의를 깊이 우려하게 됩니다. 요즈음의 정주(政注)에 간혹 보기에 놀랍고 생각에 의혹되는 것이 있는데, 신이 낱낱이 세면서 모두를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진두(李鎭斗)는 명백하지 않은 부정한 경로를 통하여 출세한 것이 신기현(申驥顯)·송익로(宋翼魯)와 동일한 무리로 세상의 버림을 받은 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주의(注擬)하는 즈음에 거론이 된 것은 또한 어떠한 의도입니까? 신은 해당 전관(銓官)에 대해 견삭(譴削)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근래에 주사(籌司)의 좌정을 자주 행하도록 한 것은, 고생을 해야 나중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그런 것이었는데 효과는 없고 해로움만 있구나. 주색(洒色)을 평론(評論)하며 비속한 말로 농지거리한다는 말이 그대의 소(疏)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러한 소문이 주위에 나게 된 것은 모두 외밭에서 신발을 고쳐 맨 것과 같은 혐의가 있으니, 근일에 부좌(赴坐)한 당상관으로 무장(武將) 외에는 모두 파직하도록 하라. 그리고 전관(銓官)에 대한 일은 예전부터 주의(注擬)에 지장이 없던 자를 그대는 어찌 이렇게 고집을 하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진두는 먼 선원계파(璿源系派)이다. 일찍이 역종(逆宗)095) 을 인하여 충의(忠義)에 임명되었지만 여러 해 동안 막힘을 당하였는데, 이병정(李秉鼎)이 전권(銓權)을 잡음에 이르러 정주(政注)에 재차 의망(擬望)되자,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인사 행정을 담당한 아전을 가두고 책망하였다. 이병정이 상소하여 인책하고 사직하였지만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치영이 또 논한 것이었다.
6월 4일 계유
조운 차사원(漕運差使員)인 법성 첨사(法聖僉使) 이동헌(李東憲)을 소견하였다. 본진(本鎭)의 병폐를 묻자, 동헌이 아뢰기를,
"장성(長城)과 고창(高敞)의 대동미(大同米)를 법성(法聖)에 납입하지 않고 사포(沙浦)에 납입하는데, 웅연(熊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포장하여 싣게 되므로 매번 조창(漕倉)으로 발선(發船)하는 기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법성에서 고군산(古羣山)까지는 남풍이 편하고 웅연에서 고군산까지는 동풍이 편하므로 동풍과 남풍을 기다리는 즈음에 피차의 선박이 들쭉날쭉 뒤떨어짐을 모면하지 못하니, 이것이 폐단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는 바로 무신년096) 에 유광천(柳匡天)이 상소하여 진달한 일이다. 주사(籌司)로 하여금 초기(草記)하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두 고을의 대동미를 명년부터 법성창(法聖倉)에 바치도록 청하니, 윤허하였다.
정언 홍치영(洪致榮)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상차하기를,
"십수 명의 비국 당상관을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뒤섞어서 똑같은 죄과(罪科)에 빠지게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명백히 조사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차자는 대신의 체모를 깊이 터득한 것이니,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도 상차하여 승정원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조사하여 현장 고발을 다시 받도록 청하니, 홍치영이 피혐하기를,
"신이 좌상의 차자에 대하여 개연히 여기는 바가 있으니, 옛날부터 대각이 풍문으로 어떤 일을 논핵하는 것은 관례가 바로 그런 것으로, 이번에 논한 바는 바로 경계하는 뜻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무슨 큰 사건이라고 조사까지 한단 말입니까. 자신이 대료(大僚)로 있으면 당연히 잘 단속하지 못한 것을 통렬하게 인책하며 각기 스스로 힘써야 할 터인데, 지금 도리어 서둘러 상차하여 종이에 가득히 늘어놓은 내용이 엄폐하고 숨기는 말이 아닌 게 없으며, 끝 부분에는 심지어 조사하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른바 조사하라는 것은 장차 어디를 조사하라는 것입니까. 여러 재신(宰臣)들을 신문하려고 한다면 재신으로서 누가 기꺼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으며, 대신(臺臣)을 신문하려고 한다면 대신은 전해 듣고 논한 사건인 만큼 확실히 지목할 수 없을 것이고 보면, 대각을 대우함이 또한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도록 가볍습니까. 그리고 우상이 조사하기를 청한 것은 또한 동료 정승의 꼬임에 빠져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설령 신이 혹시 비국 당상관의 성명(姓名)을 들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대각의 옛날 기풍을 신 때문에 무너뜨리게 할 수는 없으니, 체임시킬 것을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종이에 가득 늘어놓은 말은 대신(大臣)을 침해하고 비국의 지고한 직위를 짓밟는 것들인데, 직임이 풍헌(風憲)의 지위에 있는 자가 조정의 체모를 이와 같이 모르는가. 대각을 높이는 것과 대신을 공경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대는 파직하겠다. 여러 재신들을 애매한 죄과에다 둘 수 없으니 현장 고발하게 한 전지(傳旨)를 빨리 봉입하게 하라."
하였다.
6월 5일 갑술
상이 내의원 제조 심환지(沈煥之)에게 이르기를,
"어제 대신(臺臣)이 대신(大臣)을 능멸하고 짓밟기를 끝없이 했는데, 이것이 어찌 대신을 공경하고 조정의 체모를 높이는 도리이겠는가. 여러 재신들에 대한 현장 보고건에 있어서 만약 재신들에게 자수하게 한다면 아마도 예우하는 데 흠이 될 듯하고, 대신(臺臣)으로 하여금 확실히 지적하게 한다면 또한 핍박하는 데 가까우니, 이것이 실로 두 가지 모두 어려운 것이다."
하니, 환지가 아뢰기를,
"대론(臺論)이 이미 발론되었는데 재신들에게 묻는다면 누가 기꺼이 나는 하지 않았다고 말을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현장 보고를 뒤섞어서 받도록 하는 것이 또한 포용하는 성덕(聖德)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
"대체로 대간(臺諫)의 언사(言事)는 풍문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고 사실을 지적하여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대계(臺啓)에서 이미 풍문을 인한 것이라 고하였으니 불문에 부쳐야지 명백히 드러내어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비국 당상의 체모는 다른 부서와는 전연 다르니, 지금 만약 이 사건을 써서 지방에 반포한다면 도리어 조정을 가볍게 여길 염려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이렇게 하고 그치더라도 오히려 뒷날을 징계할 수 있겠는가?"
하자, 진관이 아뢰기를,
"앞으로는 틀림없이 분발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저 근래에 작은 일이나 큰 일을 논할 것 없이 소관(小官)이 대료(大僚)를 침해하기를 거리낌없이 하는데, 기강이 해이해지고 조정을 높게 여기지 않는 것이 실로 여기에서 연유하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각별히 금지시키고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6일 을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상차하기를,
"주사(籌司)는 국사를 계획하는 곳인데 십수 명의 경재(卿宰)가 일시에 파직을 당하고 육부(六部)의 여러 부서가 거의 모두 텅 비었으니, 이는 대신(大臣)이 된 자가 솔선하지 못해 초래된 결과입니다. 신이 아무리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다 하더라도 어찌 먼저 스스로 인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재차 정승이 된 이후로 무릇 주좌(籌坐)와 빈대(賓對)에 더러는 성심(聖心)이 늙은이를 염려함으로 인하여, 혹은 신의 병이 억지로 하기 어려움을 인하여 소홀히 하며 추창해서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지금 갑자기 재신들이 죄를 입은 날을 당하여 태연히 인책하는 단서로 삼는다면 어찌 매우 가소롭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스스로 헤아리고서 분명히 조사하도록 청했으니, 이는 대체로 성조(聖朝)의 명실을 종합하는 행정에 조금도 흠결이 없도록 하며 낭묘(廊廟)에서 밤낮으로 애쓰는 신하들로 하여금 애매함을 모면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 것일 따름입니다. 일자 반구(一字半句)도 대신(臺臣)을 사문(査問)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대신이 무슨 까닭으로 이토록 신에게 화를 내는 것입니까. 신이 떠나는 것이 적합한데 떠나지 않다가 머리털이 모두 세었습니다. 오직 몸을 받들어 물러나겠다는 것이 바로 신이 준비한 말이니, 신의 정승 직임을 삭탈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차자 수백 마디의 내용 가운데 어찌 일찍이 조사하라는 내용이 있었겠는가. 명한 자는 나이고 청한 자는 우상인데 경이 갑자기 대신 능멸을 당하였으니, 조정의 체모가 한심스러워 나로서는 두렵다. 내가 경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은 연후에 버릴 것이고, 경이 나를 저버리려는 자취가 있은 연후에 물리칠 것이다. 비록 이우규(李羽逵)·홍치영(洪致榮)이 전후 좌우에서 번갈아가며 다투어 탄핵한다 하더라도 경에게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삼공(三公)은 왕 한 사람의 다음이니, 삼공이 높아지면 한 사람 또한 높아지는 법이다. 경이 아무리 스스로 가볍게 하려고 하더라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상차하기를,
"대신(臺臣)이 피혐한 내용에 신이 동료 정승에게 꾀임을 당했다고 말하였는데, 사람의 견해는 진실로 우연히 같은 것도 있고 또한 우연히 같지 않은 것도 있으니 신과 동료 정승이 조사하도록 청하면서 논한 것은 바로 우연히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료 정승이 무엇 때문에 신을 꾀었겠으며, 신이 무엇 때문에 동료 정승에게 꾀임을 당했겠습니까.
풍문(風聞)으로 일을 논하는 것은 대체로 권의(權宜)에서 나온 법으로, 풍문이면서 사실을 얻게 되면 그 당사자를 처벌하고 풍문이어서 비록 그 사실을 얻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일찍이 이 때문에 말한 사람을 처벌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언로(言路)를 넓게 여는 뜻과 명분을 따라 실질적으로 책임지우는 행정 두 가지가 함께 시행되면서 어그러짐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마다 모두 물을 필요는 없으나 간혹 묻지 않을 수 없는 말이 있는데, 묻지 않는 잘못은 대각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이 되고 묻는 잘못은 대각을 경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비국 당상의 일은 삼가 생각건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조정에서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경대부(卿大夫)입니다. 충신(忠信)으로 권면하게 하고 헌면(軒冕)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며, 이렇게 한 연후에야 조정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각의 상소 가운데 한두 구절의 내용은 재신들에게 있어서는 막대한 수치가 되니, 맑은 조정의 충후한 기풍으로는 비록 스스로 나는 이런 일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사방에서 전해 듣고 거론하여 장차 모두 같은 결과로 돌아가버릴 것인만큼 그 손상당하는 바의 경중이 당장 어떻겠습니까. 신은 이를 염려하여 망령되게 청한 바가 있었는데, 대간의 배척을 당함에 부끄러움이 마음에 가득합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말은 구차스럽게 같아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각각 자신의 견해를 지키는 것이 가부를 논하는 의리에 무엇이 손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며칠을 지내면서 몸을 둘 수 없는 것은, 근일의 주좌(籌坐)에 신이 번번이 혼자 달려 갔었으니 진실로 백성과 나라의 일에 마음을 다하여 강구하고 방치하지 않았다면 농지거리가 어찌 일어났겠으며 다른 사람의 말이 어찌 이르렀겠습니까. 빨리 배척하여 물러나도록 해주시어 중앙과 지방에서 새롭게 보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당초 조사를 청한 사실을 이번의 차자를 보고서 더욱 알게 되었다. 경이 ‘그런 연후에야 조정이 높아질 수 있다.’고 하는데, 나도 역시 ‘이와 같기 때문에 처분을 처음에는 두리뭉실하게 했다가 나중에 구별하였다.’고 말하였다. 대저 근래의 습속은 몸가짐의 단속이 허술하여 쉽게 이를 바로잡을 수 없는만큼 설령 공좌(公座)에서 농지거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경이 어떻게 저지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결단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실상과 어긋나게 소문이 난 경우이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정사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6월 7일 병자
하교하였다.
"당초에 두리뭉실하게 처결했다가 도로 조사하도록 허락한 것은 장차 짐작하여 헤아릴 일이 있어서였는데, 이번의 사건은 결단코 소문이 잘못 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다면 말하는 자와 당하는 자가 모두 혐의스럽게 여길 만한 단서가 없다. 그러니 견파(譴罷)된 비국 당상들을 아울러 서용하여 이전의 직책을 그대로 띠도록 하라."
비변사 제조 이병정(李秉鼎)·민종현(閔鍾顯)·이서구(李書九)·남공철(南公轍) 등이 함께 상소하여 인의(引義)하고 견책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8일 정축
강화부 유수 이의필(李義弼)이 장계하기를,
"이달 7일 본부의 남산(南山) 봉대(烽臺)에서 봉화를 올리지 않았는데 조사해 보니 봉직(烽直)이 술에 취하여 실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제대로 단속하고 경계하지 못한 잘못이니 황공하여 처벌을 기다립니다."
하였다. 비변사가 해당 유수를 파직하도록 계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6월 10일 기묘
병조 정랑 여준영(呂駿永)을 개천 안사 어사(价川按査御史)로 임명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박종갑(朴宗甲)이 치계하기를,
"개천군(价川郡)의 전 도사(都事) 현재묵(玄在默)은 한 고을의 거활(巨猾)로 예전 직함을 빙자하여 관아 뜰에서 소란을 피웠으며, 사사로이 민가를 헐었습니다. 토주(土主)를 무함하고 무리를 모아 못된 짓을 하며 분수를 무시하는 조짐을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여준영을 특별히 어사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가서 조사하게 하였다.
6월 11일 경진
이조 판서 이병정(李秉鼎)을 체임하였는데, 대간의 논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6월 12일 신사
하교하였다.
"기억하기로는 옛날 선조(先朝)에서는 오직 농사를 소중히 여겨 경작하고 김매는 절기에는 일찍 행차하여 직접 살펴보며 매번 성남(城南)의 들판에 계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부로(父老)들이 성적(聖蹟)을 더듬으면서 성덕(聖德)을 칭송하여 그곳에다 대(臺)를 만들고 이름을 ‘성경(省耕)’이라고 하였다. 내가 여러 번 수레를 모셨는데 지금까지 기억이 난다.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좌상에게 말하여 다시 대(臺) 이름 세 글자를 써서 새기게 하라. 그리고 이것을 인해서 생각하니 동·서 두 교외에도 역시 성경(省耕)하는 곳이 있어야 마땅한데 아직 겨를하지 못하였다. 《시경(詩經)》에 ‘때를 맞춘 반가운 비가 이미 내렸거늘 수레를 담당한 자에게 명하였네, 별이 보이는 이른 새벽에 행차해서 상전(桑田)에 머물겠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대체로 봄이 한창인 때에 때맞은 비가 처음으로 내려 농상(農桑)이 시작되면 반드시 직접 가서 위로하고 권면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 조정의 가법(家法)은 농사를 소중히 여기는 데 있으니, 이번의 유시는 선조(先朝)를 추모하고 계승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니 해조로 하여금 동·서 교외에 각각 하나의 대를 쌓되 남쪽 교외에 수축한 것과 비교해서 옛것보다 사치스러움이 없게 하라."
원자(元子) 우유선(右諭善) 이성보(李城輔)가 현도(縣道)를 통해 상소하여 새로 내린 자급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경과 회덕(懷德)의 유신(儒臣)은 함께 초래(招徠)를 받은 사람들이기에 돈유(敦諭)와 별유(別諭)로 반드시 초치하려고 하였다. 회덕의 유신이 이름에 미쳐서 강례(講禮)를 거행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그의 직임이 바로 사부였기 때문으로, 어찌 혹시라도 경과 회덕 유신의 은례(恩禮)에 경중을 두어서 그렇겠는가. 지금 유신은 회덕으로 돌아갔고 좌유선은 늙은 몸으로 홀로 고생하고 있으니, 이런 때에 경을 기다리는 것이 어찌 맑은 바람에 씻기우기를 생각하는 그런 정도 뿐이겠는가. 그러나 아직 강요하고 싶지 않은 것은 더운 철에 등정(登程)하게 하면 건강에 손상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해서이다. 상소가 이르렀는데 오래도록 머물려 둔 것은 바로 실질로 대우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연신(筵臣)은 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비답을 내리는 것이 너무나 지연되었다고 말하니, 심하도다, 근대 풍속의 고루함이여! 옛날에는 산림(山林)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상소가 도착하는 대로 내린 적이 없었으니, 이는 이미 한 번의 비답으로 즉시 일어나게 못한다면 그 형세가 여유있고 느슨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옛날의 실상을 가까이 있는 경의 집안 종질(從姪)에게 대략 말하여 경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는데, 경은 아마도 이보다 앞서 살펴 받들었을 것이다. 마음에 남아 있는 쌓인 회포는 그대로 간직한 채 가을이 온 뒤를 기다리겠다."
하였다.
병조 판서 권엄(權𧟓)을 체임하고, 중비(中批)로 이조원(李祖源)을 병조 판서로, 김조순(金祖淳)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13일 임오
이조 참의 김조순이 여러 번 소명(召命)을 어기자 파직시키고 이면긍(李勉兢)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조상진(趙尙鎭)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6월 15일 갑신
신광리(申光履)를 강화부 유수로, 김화진(金華鎭)을 공조 판서로, 민종현(閔鍾顯)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6월 17일 병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관서(關西)·관북(關北)·영남(嶺南) 무사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3도의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활을 잘 쏘는 무사를 뽑아서 올리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친히 임어하여 시취(試取)해서 급제를 내리고 관직에 임명하였으며 차등있게 상을 베풀었다.
문수산성(文殊山城)에 유배되었던 죄인 임시철(林蓍喆)을 석방하였다.
어용겸(魚用謙)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18일 정해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안악군(安岳郡)의 직환(稷還)으로서 상평창의 회계에 든 것과 창고에 남아 있는 1만 8천 석 남짓, 영남(嶺南)의 화산(華山)에 성을 쌓기 위해 내준 쌀 5천여 석, 남창(南倉)의 돈[錢] 2만 냥, 전 도신(道臣) 이태영(李泰永)이 스스로 준비한 돈 1만 냥, 조창(漕倉)의 돈 2만 냥, 평안 감영이 별도로 준비한 돈 1만 냥,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의 회계 외의 돈 5천 냥을 화성(華城)에 떼어주어 성을 수축하는 경비로 삼으라고 허락하였는데,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성균관 유생의 제술(製述)을 성균관에서 시험하여, 진사 윤효식(尹孝植)에게 전시(殿試)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다.
6월 20일 기축
차대를 하였다. 한용귀(韓用龜)와 한만유(韓晩裕)를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품계에 사람이 모자란다고 아뢰어 발탁하도록 청한 때문이었다.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를 체임하고 김화진(金華鎭)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6월 21일 경인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승지 정약용(丁若鏞)이 상소하기를,
"신이 이른바 서양의 사설(邪說)에 대하여 일찍이 그 글을 보고 기뻐하면서 사모하였고 거론하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였으니, 그 본원인 심술(心術)의 바탕에 있어서는 대체로 기름이 퍼짐에 물이 오염되고 부리가 견고함에 가지가 얽히는 것과 같은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이미 한번 이와 같이 되었으니 이는 바로 맹자(孟子) 문하에 묵자(墨者)인 격이며 정자(程子) 문하에 선파(禪派)인 격으로 큰 바탕이 이지러졌으며 본령이 그릇된 것으로, 그 빠졌던 정도의 천심이나 변했던 정도의 지속은 논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내가 올바른 것을 얻고서 죽겠다.’고 하였으니, 신 또한 올바른 것을 얻고서 죽으려 합니다.
신이 이 책을 얻어다 본 것은 대체로 약관의 초기였습니다. 이때에는 원래 일종의 풍기(風氣)가 있었는데, 천문(天文)·역상(曆象) 분야, 농정(農政)·수리(水利)에 관한 기구, 측량하고 실험하는 방법 등에 대하여 잘 말하는 자가 있었으며, 유속(流俗)에서 서로 전하면서 해박하다고 했으므로 신이 어린 나이에 마음속으로 이를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질이 조급하고 경솔하여 무릇 어렵고 교묘한 데 속하는 글들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탐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찌꺼기나 비슷한 것마저 얻은 바가 없이, 도리어 생사(生死)에 관한 설에 얽히고 남을 이기려 하거나 자랑하지 말라는 경계에 쏠리고 지리·기이·달변·해박한 글에 미혹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유문(儒門)의 별파(別派)나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문원(文垣)의 기이한 구경거리나 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과 담론하면서 꺼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비난이나 배격을 당하면 그의 문견(聞見)이 적고 비루한가 의심하였으니, 그 근본 뜻을 캐어보면 대체로 이문(異聞)을 넓히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본래 지업(志業)으로 삼은 것은 단지 영달하는 데 있었습니다. 상상(上庠)에 오르면서부터 오로지 정밀하게 한결같이 뜻을 두었던 것은 바로 공령(功令)의 학문이었으니, 더욱 어떻게 방외(方外)에다 마음을 놀릴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뜻이 확립되었음을 표방하여 경위를 구별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벗어나지 않겠습니까. 그 글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설은 신이 옛날에 보았던 책에서는 못 본 것이니, 이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갈백(葛伯)이 다시 태어난 것으로 조상을 알아차리는 승냥이와 수달도 놀랍게 여길 것인데 진실로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약간이라도 있는 자라면 어찌 마음이 무너지고 뼛골이 떨려 그 어지러운 싹을 끊어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신해년097) 의 변고가 발생했으니, 신은 이때부터 화가 나고 서글퍼 마음속으로 맹서하여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였으며 성토하기를 흉악한 역적같이 하였습니다. 양심이 이미 회복되자 이치를 보는 것이 스스로 분명해져 지난날에 일찍이 좋아하고 사모했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허황되고 괴이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지리·기이·달변·해박한 글도 패가 소품(稗家小品)의 지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밖의 것들은 하늘을 거스르고 귀신을 업신여겨서 그 죄가 죽어도 용납되지 않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문인인 전겸익(錢謙益)·담원춘(譚元春)·고염무(顧炎武)·장정옥(張廷玉)과 같은 무리들은 일찍이 벌써 그 거짓됨을 환하게 알고 그 핵심을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신은 멍청하게도 미혹되었으니, 이는 유년기에 고루하고 식견이 적어서 그렇게 되었던 것으로 몸을 어루만지며 부끄러워하고 후회한들 어찌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애당초 그것에 물이 들었던 것은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일이었으며 지식이 조금 성장해서는 문득 적이나 원수로 여겨, 알기를 이미 분명하게 하고 분변하기를 더욱 엄중히 하여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실로 남은 찌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는 군부(君父)에게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당세에 나무람을 당하여 입신한 것이 한번 무너짐에 모든 일이 기와장처럼 깨졌으니, 살아서 무엇을 하겠으며 죽어서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고 이어서 내쫓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선(善)의 싹이 봄바람에 만물이 싹트듯하고 종이에 가득 열거한 말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6월 22일 신묘
김문순(金文淳)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6월 23일 임진
하교하였다.
"생신날에 여러 신하들로서 처분받은 사람들을 분간해 주라는 지시를 내렸었는데, 대원(臺垣)에 주의하지 못하도록 한 박기정(朴基正), 관직에 주의하지 말도록 한 정약용(丁若鏞), 대선(臺選)에서 이름을 빼버리도록 한 오한원(吳翰源)은 죄명에 대한 특별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용서해 주는 대상 가운데 특별히 넣지 않았다고 근래에 비로소 들었다. 즉시 용서해 주고 의망(擬望)에 구애받지 말도록 하라."
6월 24일 계사
차대를 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인재가 점점 옛날만 못해지고 있다. 명(明)나라 초기에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가 우리 나라에 와서 유람하면서 산천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단천(端川)의 현덕산(懸德山)에 이르러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다고 여겨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고 떠났었으니 북관(北關)에 인재가 없는 것은 실로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서울에 내려온 맥(脈)은 삼각산(三角山)이 주장이 되는데, 들으니 수십 년 전에 북한산성(北漢山城) 아래에다 소금을 쌓고 그 위를 덮어서 태워 마침내 염산(鹽山)이 되어 내려온 맥을 진주(鎭住)시켰으니 현재 서울에 인재가 없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이 비록 상도(常道)에는 어긋난 듯하지만 이치로 보아 더러 있음직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에 이르러 헐어버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이것 또한 천지의 도를 도와주는 하나의 단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일찍이 총융사(摠戎使)를 거친 조심태(趙心泰) 등에게 묻기를,
"염산(鹽山)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심태 등이 모두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으므로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정약용(丁若鏞)이 스스로 변명한 상소에 인용한 비유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많으니, 맹자(孟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배격하고 주자(朱子)가 소동파(蘇東坡)와 육상산(陸象山)을 배격했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은 그것이 비록 문장을 잘라다 뜻을 취한 데서 나왔다 하더라도 사학(邪學)은 본래 이단(異端)으로만 논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단지 우서(虞書)에서 이른바 ‘구적(寇賊)과 간구(奸究)의 부류는 사사(士師)가 베어 없애 남김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양주와 묵적에 비교하여 그들과 같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문자(文字)를 이유로 사람을 죄주는 것은 후덕한 풍습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은 규경(規警)에 속하는 사안인만큼 착한 데로 옮겨가게 하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기에 충분하니, 파직하는 법을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는 바야흐로 움추려 있던 벌레가 우레 소리를 듣고 절명한 듯하다가 다시 소생한 것과 같으니, 그 한창 자라는 가지를 꺾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에 있어서 하필이면 이와 같이 해야 하겠는가. 사학의 폐단은 일찍이 좌상(左相)을 대했을 때 이미 말하고 바로잡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는 형법(刑法)으로 그것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긴다. 태양이 떠오르면 반딧불과 횃불은 저절로 빛을 잃게 되며 원기(元氣)가 충실하면 외기(外氣)는 침범하지 못하니, 만약 내수(內修)와 외양(外攘)을 잘하여 먼저 근본을 다스려 시례 가문(詩禮家門)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고가(故家)의 유풍(遺風)을 지키고 예교(禮敎)의 모범을 잃지 않게 한다면 저들 역시 앞으로 없어지기를 기약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를 도살하는 것은 본래 금지 조항에 관계된다. 근년에 거듭 엄격히 한 뒤로 감영과 고을의 수신(守臣)이 진실로 성실한 마음으로 잘 봉행한다면 어찌 아주 심한 자들을 제거할 수 없겠는가. 가까운 옛날에는 공좌(公坐)의 회반(會飯)에서 쇠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국기(國忌)로 재계할 적에도 조관(朝官)은 모두 이틀 동안 소식(蔬食)을 하였는데, 선조(先朝) 초년에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향(大享)의 태뢰(太牢)와 진연(進宴)의 대선(大膳)에 쇠고기를 사용하니, 그것은 바로 옛날 사람들이 까닭 없이 소를 도살하지 않았던 뜻이다. 지금은 이 법이 아주 없어져 각 궁방(宮房)같은 데도 모두 소속된 우사(牛肆)가 있으며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로 보는데, 만일 법을 집행하는 유사(有司)인 신하가 먼저 궁방 소속의 우사부터 엄중히 조절(操切)을 가한다면 어떻게 모람(冒濫)된 폐단이 있겠는가."
하였다.
6월 25일 갑오
비변사가 삼포 절목(蔘包節目)을 올렸다. 【1. 역관이 8포(包)를 삼(蔘)으로 충입(充入)하는데 고례(古例)는 그러하였지만 가끔 삼이 귀하게 됨을 인하여 은(銀)으로 대신 하게 하였으니, 이는 바로 시기에 따라 적합하게 제도화한 행정이다. 그러나 근년에 오면서 은화(銀貨)가 아주 귀하여 한 번 행차에서의 포(包)가 10에 8, 9는 비게 되어 역관의 조폐(凋弊)함이 다시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은과 삼을 공통으로 포를 채우도록 한 명령은 바로 염려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니, 받들어 시행하는 도리에 있어서 책임을 지우고 조사하는 방법을 강구하여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는 근심을 모면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물정(物情)을 캐고 탐지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내어 영구히 준행하는 터전을 삼게 한다. 1. 포삼(包蔘)의 근수(斤數)는 매년 1백 20근(斤)을 작정(酌定)하여 절사(節使) 및 역행(曆行)에 분배(分排)하되 절사는 90근을 정하고 역행은 30근을 정한다. 만약 별사(別使)와 별자관(別咨官)의 행차가 있게 되면 별사는 30근을 초과하지 말도록 하며 별자행은 10근을 초과하지 말도록 하여 원정수(元定數) 밖에 마련하게 한다. 그리고 삼으로 물건을 사는 데는 저절로 일정한 시기가 있는데, 별행(別行)과 자관(咨官)의 행차는 모두 일정한 시기가 없으니, 만일 그 시기에 미칠 수 있으면 원정(元定) 1백 20근 외에 더 가지고 가도록 허락하고, 만약 혹시라도 후시(後時)인 경우는 거론하지 말게 한다. 1. 포삼(包蔘)의 절은(折銀)은 물정을 참고하고 헤아려 절충하여 작정하되 차라리 적게 하고 많이 하지 말도록 한 연후라야 폐단이 없을 수 있고 역시 충분한 효과가 있게 된다. 그리고 한근 마다 절은은 천은(天銀) 1백 냥(兩)으로 정한다. 1. 절행(節行)에 지정한 수 90근은 역관·외사(外司)와 비장(裨將)을 논할 것 없이 한결같이 포수(包數)를 따르되 3천 냥의 포과(包窠)는 3근으로 정하고 2천 냥의 포과는 2근으로 정한다. 이와 같이 분배한 뒤에 가끔 행차 중의 원액(員額)에 가감(加減)이 있을 적에는 그 수량을 따라서 원래 정하였던 숫자에다 적합하도록 가감하되, 만상(灣上)의 군관(軍官) 두 사람에 이르러서는 일행(一行)의 8포를 채웠거나 채우지 못한 것을 계산하지 않으며, 그 무리들의 포과는 해마다 채워주되 삼포(蔘包) 한 가지 문제는 다시 거론하지 말게 한다. 1. 포삼은 숫자를 정한 뒤에 간교하게 무역하는 것을 방지하고 몰래 월경(越境)하는 것을 금지하는 방법을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별도로 강구하도록 해서 엄중히 과조(科條)를 세워 비국에 보고하고 시행하게 한다.】 처음의 절목에 홍삼(紅蔘)이니 조삼(造蔘)이니 하는 등의 말이 있었고, 또 방외(方外)의 15인(人)으로 계(契)를 만들게 하였는데, 상이 그것을 보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이르기를,
"삼포(蔘包)의 절목에 대한 일을 일전에 빈대(賓對)에서 하문하려고 하였다가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다. 대저 삼이 귀해지면 은을 사용하고 은이 귀해지면 삼을 사용하는 것이 명분도 올바르고 일도 편리하니 진실로 행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그리고 또 몰래 월경하는 폐단은 이미 통렬하게 금지하기 어려우니 그 이권(利權)을 아래로 일임하여 기강이 엄격해지지 않는 것보다는, 진실로 그 무역하는 길을 열어 재화를 통제하는 권한이 조정에서부터 나오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는 또 변금(邊禁)을 거듭 엄격히 하는 데 일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역설배(譯舌輩)의 이해는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한다. 생각건대, 그 절목 가운데 홍삼·조삼 및 방외의 15인에게 계(契)를 만들게 한다는 등의 말은 체면상 구애됨이 있다. 화성(華城)에서 차자로 중지하도록 청한 뜻과는 서로 반대가 될 뿐만이 아니다. 화성은 새로 설치한 아문(衙門)이며 겸하여 소중한 행궁(行宮)이 있다. 1백 리나 되는 넓은 들판에 단지 하나의 큰 성첩(城堞)만 쌓고서 그 가운데를 텅 비게 한다면 어찌 후세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한때 임시 편의의 계책을 쓰는 것은 이 성에 있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러나 여러 도의 조세(租稅)를 옮겨다 쌓고 군현의 호걸들을 옮겨다 살게 하며 사방의 장용(壯勇)을 선발하여 채운다면 바로 내상(內相) 육지(陸贄)가 이른바 ‘지금의 관중(關中)이 바로 옛날의 방기 천리(邦畿千里)이다.’고 한 것과 같이 될 것이다. 관중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이 성이겠는가. 그런데 저쪽에 대해서는 경이 상도(常道)를 지키도록 논하고 이쪽에 대해서는 경이 곧 말을 뒤집으니, 이것이 그 말을 이해해 보려고 하였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까닭이다. 화성의 편의를 위한 임시 방편도 오히려 그것이 권리(權利)에 가까울까 염려해서 계(契)를 만드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익을 오로지하지 말도록 하였는데, 더구나 당당하게 교린(交隣)하며 통화(通貨)하는 행정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저들에게 성신(誠信)을 보이고 변상(邊上)에 기강(紀綱)을 세우는 것이니, 삼(蔘)이 천하면 삼을 사용하고 은(銀)이 천하면 은을 사용할 따름이다.
요즈음에는 은이 귀하고 삼이 천하다 해서 은과 삼을 서로 통용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물정(物情)을 따른 것에 불과하다. 묘당(廟堂)이 만들어 낸 절목은 응당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다시 삼포(蔘包)를 사용하되, 은 또한 지난날 징색(徵索)하던 시기와는 다른만큼 삼포만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하교(下敎)대로 은과 삼을 아울러 충포(充包)하도록 허락한다.’고 했어야 하는데, 지금 갑자기 홍삼(紅蔘)이라는 명색(名色) 및 방외(方外) 15인에게 계를 만들게 한다는 등의 말을 주어(奏御)하는 문자에다 올렸으니, 이 절목은 은과 삼을 통용하게 하는 절목이 아니고 바로 가삼(假蔘)을 조작하여 저 나라에 속여서 파는 절목이다. 체면으로 헤아려 보면 어찌 형편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삼의 빛깔은 누르고 흰데 지금 붉다고 하는 것은 가짜로 만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캔 것을 직접 충포하게 한다면 또한 무엇 때문에 별도로 하나의 계를 설치해야 하는가. 더구나 ‘방외(方外)의 사람 운운(云云)’ 한 것은 틀림없이 근래에 가삼(假蔘)을 조작한 무뢰배(無賴輩)와 간세배(奸細輩)일 터인데, 연못 속의 물고기 뜻은 알 수 없다고 하여 조정에서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고 있다. 설령 법을 만들어 금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도리어 그 이익을 함께하며 그 형세를 조장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율명(律名)을 만들어내서 저와 같으면 형벌하고 이와 같으면 귀양보낸다 하여 금석지전(金石之典)으로 만들어 재가를 받아 반포한다면 앞으로 이 새로운 영(令)을 법관(法官)이 《대전통편(大典通編)》에다 첨가해 기록하겠는가.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으니, 이것이 오래도록 궁중에 머물려 두고 계하하지 아니한 까닭이다. 그것을 다시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6일 을미
승지 김달순(金達淳)이 아뢰기를,
"근래 유신(儒臣)의 상소가 거의 외람되고 지나친 것이 많습니다. 시호(諡號)와 증직(贈職)을 청원하는 것은 이미 법률 밖에 속한 것입니다. 심지어 복호(復戶)를 청하기까지 하여 극도로 설만(褻漫)합니다. 거듭 구규(舊規)를 밝히고 서울과 지방에 별도로 경계하여 감히 그전처럼 모람(冒濫)된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판으로, 김조순(金祖淳)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27일 병신
민태혁(閔台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6월 29일 무술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어용겸(魚用謙)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지평 김수조(金壽祖)·정종로(鄭宗魯)가 소명(召命)을 받들지 않았는데,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 처지의 사람은 먼저 이사(吏事)를 시험했으니, 이는 옛날에도 그렇게 하였다. 하물며 남대(南臺)는 초선(初選)과 다른 만큼 명을 받들지 않으면 또한 고을에 보임(補任)하는 것이 적합하다. 지평 김수조와 정종로를 임기가 찬 수령으로 차송(差送)하도록 해서, 한편으로는 이사를 시험하고 한편으로는 옛날의 규정을 보존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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