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신미
차대(次對)를 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이르기를,
"고 우상(右相)과 같은 이를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며칠 전에 초계 친시(抄啓親試)에서 조참(曺參)의 일을 제목으로 게시하였는데, 내 뜻을 부쳐 둔 바가 없지 않았다. 경은 매사를 담당하여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고 우상과 같은 이는 정말 얻기가 어려운 사람이기는 하지만 정성스런 마음으로 구한다면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조정에서 구하여 얻지 못하면 당연히 초야에서 구하여야 하니, 이것이 바로 나라의 임금이 현명한 이를 진출시키고 불초한 자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을 정성으로 굳이 택한 것은 경을 도우려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노(魯)나라나 제(齊)나라 시대와는 달라 인재를 수용(需用)하는 길이 나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정(先正) 송시열(宋時烈)은 애당초 초사(初仕)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도 수령의 후보에 들었으며, 허목(許穆)은 첨추(僉樞)를 거친 사람이었지만 헌장(憲長)으로 추천하였으니, 이는 모두 파격적인 일이었다. 오늘날 그와 같이 하자고 논할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근래 제도(諸道)에 선소(宣召)한 사람이 있었는데 내 나름대로 의도한 바가 있다. 대체로 인재를 등용하는 길이 좁은데 그것을 넓히는 방법은 오직 바로잡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은(銀)과 삼(蔘)에 있어 충포(充包)를 통용하는 것은 명분도 바르고 일도 편리하므로 신도 찬성하지만, 회포(回包)에 이르러서는 결단코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국가의 체모가 구차스러워진 것, 변방의 금법이 없어진 것, 의주의 백성들이 원통하다고 일컫는 것, 간교한 폐단이 불어나는 것 등을 일일이 논할 수 없습니다. 역원(譯院)의 사람들도 회포는 시행할 수 없다는 것으로 말하는 자가 있으나, 그 무리들의 견해도 들쭉날쭉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널리 물어서 조처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이 무리들이 전적으로 충포(充包)를 하고자 한다면 변방의 법은 시행할 데가 없으며, 변방의 법을 거듭 엄격히 하려고 하면 비포(比包)의 뜻이 본래 이와 같은데 어찌 회포(回包)의 명목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유사 당상 이시수(李時秀)는 아뢰기를,
"연시(燕市)의 물화가 나오는 것과 우리 나라의 은화(銀貨)를 들여보내는 것은 모두 정한 숫자가 있어 법의 뜻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회포를 하고자 한다면 법을 시행할 데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 임률(任嵂)의 장계에 ‘봉성장(鳳城將)이 의주 부윤에게 통보하기를 「지난해 강물이 불어나 관군(官軍)이 환난을 당했으니 앞으로 6, 7, 8월의 장마가 잇따를 때에는 중강(中江)에 배치한 관병(官兵)을 잠시 호이산(虎爾山)으로 옮겨서 머물게 하겠다. 다만 귀국의 삭망(朔望)에 연회를 베푸는 의식에 있어 만약 왕래를 질질 끈다면 피차간에 이득이 없을 것이다.」고 했다. 낮은 지역에 위치하여 물에 빠지는 화를 당하므로 높은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교린(交隣)하는 의리상 어렵게 여기면서 미룰 필요는 없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분부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저들의 영토에 속해 있으며, 더구나 옮겨서 머무는 것이 수 개월에 불과하니 교린하는 의리상 어찌 사소한 폐단을 따지겠습니까. 시행하도록 허락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재가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명의록(明義錄)》은 바로 우리 동방의 《춘추(春秋)》인데, 이를 전후로 천양(闡揚)한 방법이 또한 극진하였습니다. 그래서 난역(亂逆)의 원류와 징토(懲討)하는 본말이 손바닥을 가리키듯 환하여 비록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더라도 거의 미혹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차츰 오래되고 법규가 점차 무너지자 일종의 틈을 엿보던 무리가 가만히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이려는 계책을 행하였습니다. 지난 겨울의 처분은 진실로 사람을 살리는 도로 사람을 죽이는[生道殺人] 깊은 우려와 원대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이명연(李明淵)의 상소가 느닷없이 또 나왔습니다. 그 전편에 담긴 내용은 모두 속이면서 감추는 것으로 은연중에 의리를 천명하며 세신(世臣)을 온전하게 보전해 주시려는 고심과 지극한 뜻을 한때의 잘못된 일로 돌려 버렸습니다. 신이 근심하는 것은 일개 이명연을 위해서가 아니고, 이명연을 구실삼아 미혹된 자들을 선동하는 무리들이 모두들 이명연은 실상 처벌할 만한 죄가 없기 때문에 성명(聖明)께서 처벌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스스로 가탁할까 하는 점입니다. 종기의 독이 이미 터졌다가도 다시 염증이 생기고 요원의 불길이 잠시 꺼졌다가도 도로 치열해지는 것은 그 형세가 본래 그러합니다. 그러니 빨리 처분을 내리시어 무릇 의리를 천발(闡發)하는 도리에 대해서 강구하고 밝히며, 전후의 교서와 연석(筵席)에서의 분부로서 의리를 강구하고 밝히는 일과 관련된 것들을 특별히 속편 한 책으로 엮도록 명하여, 영원토록 우리 나라 억만년의 보배로운 대훈(大訓)으로 만들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명연의 일을 어떻게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모호한 지경에다 둘 수 있겠는가. 다만 시끄러운 단서가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되도록 빨리 처리하여 그로 하여금 혐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처신할 수 있게 해야 되겠다."
하고, 이어 병모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찌 이명연에게 돌봐주는 바가 있어서 그러하겠는가. 이명연의 상소는 그 윗부분을 가지고 관찰하면 성덕우(成德雨)와 정호인(鄭好仁)을 배척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가하다. 이미 배척했다고 말하고서 이것을 가지고 죄를 성토한다면 어떻게 십분 온당하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유성한(柳星漢)의 일과 대략 서로 비슷하다. 정호인과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본래가 좋은 사람이었고 이미 나이와 지위가 있는데다 또 지체도 있었으니, 내가 돌아보며 생각하는 바가 어찌 이명연과 비교되겠는가. 그렇지만 범한 바가 있어 처단해야 하자 즉시 처단했는데, 지금 일개 이명연에 대해서 내가 하필이면 한결같이 서로 버티겠는가. 대저 종친(宗親)의 경우는 내쫓는 무리가 기화(奇貨)처럼 보지만 척리(戚里)에 이르러서는 옛날부터 이런 근심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척리는 도리어 옛날의 종친과 같으니, 이것이 지난 겨울에 전문(殿門)에 임어한 일이 있게 된 까닭이다."
하였다. 이병모가 또 아뢰기를,
"언로(言路)를 넓게 여는 것은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정치로서, 용서할 수 없는 간범(干犯)이 아니면 혹시라도 바른말을 한 것 때문에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근년에 오면서 말을 한 것 때문에 죄를 얻어 오래도록 풀려나지 못한 자가 많이 있습니다. 이안묵(李安默)의 상소 내용의 경우 신에 대한 공격이 있다고 했지만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고 정확히 가리킨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신이 그 당시에 논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견책을 받은 것이 신에게 연유된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 몇 해가 지난 뒤에 마침 신이 또 이 직임으로 등연(登筵)하였으니, 앞 시대 사람들의 전례를 따라 우러러 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타 서용되지 못한 다른 사람들도 아울러 거두어 서용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마음은 이해를 하겠으나 경의 말은 따르기 어렵다. 말을 한 것 때문에 죄를 얻은 자 가운데 이의필(李義弼)과 같은 자는 오히려 용서할 만하지만, 이안묵의 경우 내가 어찌 한 중신을 위해 이렇게 버티는 것이겠는가. 이는 대체로 세상의 도의를 위한 깊은 염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조진정(趙鎭井)의 경우는 반좌(反坐)의 형률을 면할 수 있었던 것만도 그에게는 다행이라고 할 것인데, 어찌 거두어 서용하는 것을 거론할 수 있겠는가. 경이 거듭 정승의 자리에 들어와서 먼저 이안묵을 말한 것은 경을 공격한 일 때문이라고 여겨 이처럼 아뢴 것이지만, 오히려 사사로운 편에 속한다. 나는 세상의 도의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재가할 수 없으니, 이는 바로 공(公)이다."
하자, 병모가 아뢰기를,
"신이 이안묵에게 무슨 덕을 갚을 일이 있다고 이와 같이 간절히 말했겠습니까. 이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고 바로 조정의 공의(公議)입니다.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고 빈청(賓廳)으로 물러간다면 신은 경재(卿宰)들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울 것입니다."
하였다.
개성부 유수 조진관(趙鎭寬)이 상소하여 어미의 병을 진달하면서 체임을 바라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임제원(林濟遠)이 상소하기를,
"신의 부모 무덤이 신의 감영과 30리 되는 지역에 있는데 음양술(陰陽術)에 꺼리는 바가 있어 시급하게 옮겨야 합니다. 그러나 본도(本道)로 옮기자니 금법을 무릅쓰기가 두려우며, 지경을 넘어 가자니 떠날 가망이 없습니다. 만일 지금 한 번 체임시켜 주시지 않는다면 큰 역사를 대강이나마 완수하여 조금이라도 지정(至情)을 펼 수 없을 것입니다. 견마(犬馬)처럼 미천한 신은 병이 들어 자력으로 해내지 못할 뿐만이 아니니, 불쌍히 여기고 살피시어 빨리 체임시켜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만약 근거할 만한 전례가 있으면 소원대로 가서 보살피라."
하였다.
신기(申耆)를 이조 참의로, 김재찬(金載瓚)을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이명연(李明淵)을 홍문관 수찬으로 삼았는데 이명연이 지방에 있음을 핑계대자, 하교하기를,
"조연(朝筵)에서 하교하여 임명한 것은 이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인데, 어찌 감히 지방에 있다고 하는가.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처지에 둘 수 없으니, 그가 속마음을 모두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체차한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여 공사(供辭)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옥당이 【응교 한용탁(韓用鐸), 부응교 박재순(朴載淳), 교리 윤제동(尹悌東), 수찬 이정운(李貞運), 부수찬 이익모(李翊模)이다.】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이명연을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실정을 캐낼 것을 청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일 임신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하향 서계(夏享誓戒)를 행하였다.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다. 이에 감선(減膳)하고 구언(求言)하였다. 그 하교에 이르기를,
"사특한 무지개가 태양을 범한 것이 작년과 금년에 두 차례 나타났으니, 경계하고 반성해 보건대 두려움이 배나 더하다. 천심(天心)을 즐겁게 하는 방법으로는 수양하고 반성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평상시의 반찬을 줄이고 곧은 말을 구하는 것이 비록 형식적으로 대응하는 데 관계되는 듯하지만, 진실로 성실한 마음에서 말미암는다면 그것이 바로 정말 수양하고 반성하는 것이니, 그것을 감히 형식적인 대응이라고 하여 소홀히 하겠는가. 오늘부터 3일 동안 감선하고 논사(論思)와 언책(言責)의 관원으로 하여금 좋은 말을 갖추어 진달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 이익운(李益運) 등이 진계(陳啓)하여 징계와 성토를 엄중히 하고 금지하는 법령을 거두라고 청하니, 유념하겠다고 비답하였다.
응교 한용탁(韓用鐸) 등이 차자를 올려, 의리를 천명하고 언로를 열며 사치하는 풍습을 없애고 기강을 진작시킬 것을 청하니, 유념하겠다고 비답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차자를 올려 면직을 구하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이병모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어제 연석(筵席)에서 감히 반응 없는 몇 마디 말을 우러러 진달하였지만 일체 윤허하지 않으셨으므로 마음에 황공하고 부끄러움이 가득하여 남을 대할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연석에서 물러난 지 오래되지 않아 또 이명연(李明淵)을 홍문관의 직임에다 특별히 임명하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의 옹졸한 말이 성심(聖心)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성인(大聖人)의 중화(中和)의 체용(體用)이 신의 한마디 말 때문에 도리어 이렇게 절도에 맞지 않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첫째도 신의 죄이며 둘째도 신의 죄입니다. 이명연이 죄인이 되는 까닭과 장래의 근심이 되는 까닭은 신이 벌써 모두 다 말하였으므로 다시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토를 당한 자가 은혜를 입어 임명되기까지 했다면 그를 성토한 자는 일찌감치 배척당하여 면직되는 것이 국가의 체모상 당연합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이해하셔서 신을 체직하고 그 자리에 현덕(賢德)한 이를 다시 제수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연석에서 두 건의 일을 일체 윤허하지 않은 것이 어찌 경의 말을 가볍게 들으려 한 것이겠는가. 이명연을 전망(前望)에서 점찍어 내린 것은 의도가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 데 있었다. 어찌 경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일을 하였겠는가. 더구나 임명한 뒤에 치대(置對)하여 그의 실정을 드러내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먼저 경에게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승지 김달순(金達淳)을 보내어 원자(元子) 사부 송환기(宋煥箕)를 돈독히 불렀다.
홍억(洪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4월 3일 계유
서용보(徐龍輔)를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서용보가 병을 이유로 명을 받지 않자, 앞서의 제직(諸職)을 그대로 띠도록 하고 황승원(黃昇源)으로 대신 임명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고 면직을 구하니, 비답하기를,
"화기(和氣)가 상서를 이루는데 이를 위반하면 요기(妖氣)가 된다. 마음도 화평하고 기운도 화평한 것이 사람마다 모두 그렇게 된 연후에야 천지의 화기가 감응하게 되니, 화평의 뜻이 크다. 오늘날 재이를 없애고 그치게 하는 방법은 실로 오미(五味)를 조제(調劑)하여 음양이 회합하는 충화(沖和)한 기운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여 각기 그 성명(性命)을 온전히 하도록 하는 데 달려 있지 않겠는가. 내가 이를 스스로 힘쓰겠으니 경들도 도와주기 바란다."
하였다.
4월 4일 갑술
상이 장차 수성(修省)하는 계책을 물으려고 빈대(賓對)를 앞당겨 정하라고 명하자, 좌의정 채제공과 우의정 이병모가 신병을 이유로 명을 받들지 않았다. 상이 병모에게 조정에 나아오도록 유시하고는 대청에 나와 기다렸는데, 병모가 차자를 올려 병이 났음을 진달하자, 차도가 있기를 기다렸다가 일을 보라고 비답하였다.
4월 5일 을해
정언 여준영(呂駿永)이 상소하기를,
"신이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하여 삼가 우려와 한탄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 빈대(賓對)하는 일의 체모는 막중하며 초청하여 묻는 성의는 애연(譪然)했으니, 이는 바로 군신 상하가 크게 각성하고 분발할 기회였습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옷을 입고 한나절이 지나도록 자리에 계셨고 여러 재신들은 거의 다 합문(閤門)에 나아왔는데, 마침내 대신이 조정에 나오지 않은 것 때문에 이미 모였다가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평상시에도 오히려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수양하고 반성하는 시기인 경우이며, 일반 관료들도 감히 이렇게는 못하는데 더구나 감독하고 통솔하는 지위에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국가의 체모를 무너뜨리고 손상시킴이 적지 않으므로 신은 실상 대신을 위하여 개탄하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의 차대(次對) 때에 모였다가 곧바로 되돌아간 것은 나도 대신을 위하여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 그대의 상소에서 개탄하면서 배척하였으니 대신이 어찌 그 말을 기꺼운 마음으로 듣지 않겠는가."
하였다.
4월 6일 병자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를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며칠 전 빈연(賓筵)에서의 이야기를 들었는가? 우의정이 이안묵(李安默)을 용서하여 돌아오도록 해 줄 것을 극력 청하였는데, 안묵을 지금까지 폐고(廢錮)시킨 것이 어찌 혹시라도 한 중신의 입장을 위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우순(虞舜) 같은 대성인으로서 용(龍)에게 명한 말에서 ‘나는 참소하는 말이 훌륭한 사람의 행위를 낭패시켜 나의 무리를 놀라게 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하였으니, 우순을 본받으려고 한다면 어찌 ‘참소하는 말을 미워한다.[堲讒]’는 두 글자에 대하여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의정이 윤허를 받지 못했다는 것으로 지나치게 자책하면서 심지어 여러 재신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고 하였는데, 필경 앞으로 어떻게 잘 대처해 나가야 될지 모르겠다."
하였다.
4월 7일 정축
인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태묘(太廟) 하향(夏享)의 향축(香祝)에 친압(親押)하였다.
4월 8일 무인
태묘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희생과 제기를 살핀 다음 재숙(齋宿)하였다.
하교하였다.
"《오례의(五禮儀)》의 재계(齋戒) 조항에 이르기를 ‘대사(大祀)의 경우 유문(壝門)을 지키는 자는 하룻밤 청재(淸齋)한다.’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이르기를, ‘문마다 호군(護軍) 두 사람, 모퉁이마다 대장(隊長) 한 사람이 한다. 섭사(攝事)할 경우에는 대장이 아울러 한다.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 문도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종묘와 사직의 친행 대향(親行大享) 및 섭향(攝享)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중사(中祀)의 경우 이르기를 ‘문묘문(文廟門) 및 모든 유문은 같다.’고 하였다. 예(禮)를 제작한 뜻이 본래 이와 같은데, 규정이 어느 때부터인지 준행되지 않고 있다. 요즈음 친향 때에는 종묘 사직의 신문(神門)에 임시로 병조나 도총부의 낭중(郞中)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있는데, 비록 다행스럽게도 예서(禮書)에 부합되기는 하지만, 섭사할 경우에는 하지 않으며 중사에서도 거론하지 않으니, 그것을 다듬어 밝히는 일을 진실로 늦출 수 없다. 《오례의》의 의식은 오위(五衛)의 제도가 있을 때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호군’이니 ‘대장’이니 하였는데, 지금의 호군은 문관·음관·무관의 경재(卿宰)로 종2품 이상이고 대장에 이르러서는 바로 여수(旅帥)의 대장이다. 고금의 체제가 다른 법이니 이것은 논하지 말고, 문을 지키는 호군은 무신 당상관을 쓰는 것이 가하겠다. 이 뒤로는 《오례의》에 기재된 것에 기준하여 제향(祭享) 때 문을 지키는 호군은 인원을 참작해서 청재한 뒤에 나아가도록 하고, 친향 때에는 가까운 사례에 의거하여 병조와 도총부의 낭중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4월 9일 기묘
태묘(太廟)에 친향(親享)하였다.
교리 김선(金銑)이 상소하여 빨리 우의정 이병모가 초연(初筵)에서 아뢴 대로 따르라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0일 경진
의금부가 아뢰기를,
"전 수찬 이명연(李明淵)의 공초에 ‘세전(歲前)의 두 죄수가 지은 죄는 바로 사람마다 모두 죽일 수 있는 것이었으며, 그때의 처분은 영원히 천하 만세토록 할 말이 있었고 보면, 신이 무슨 마음으로 감히 힘써 구제하려는 뜻을 품겠습니까. 단지 말이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아, 가슴이 아픕니다. 이 무리들의 죄범(罪犯)은 비록 지난 겨울에 발견되었지만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씨앗은 이미 뿌려져 있었으니, 항상 한번 상소를 올려 폭로해서 그들의 마음속에 축적된 것을 헤쳐놓고 싶었지만, 주장이 다른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죄를 한갓 두렵게 여겨 우선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경계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명예를 더럽히게 되었고 심사(心事)를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이니, 무엇을 돌아다보며 꺼리겠습니까.
옛날 신축년045) 과 임인년046) 의 일을 차마 말하겠습니까. 척당(戚黨)이나 내시와 좌우로 체결하여 서로 통하면서 세제(世弟)를 세울 적에 불평하는 논의를 제기하였으며, 세제가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던 때에는 간악함을 쌓아왔습니다. 그러나 흉측한 음모를 행할 수 없자 큰 변란을 여러 번 일으켰으니, 무신년047) 에는 군대를 동원한 반란으로 종묘 사직이 거의 위태롭게 되었고, 을해년048) 에는 요사한 말을 퍼뜨려 떳떳한 윤리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우리 선대왕의 신무불살(神武不殺)하시는 성덕(盛德)과 지인(至仁)의 은혜를 입어 추얼(醜孼)들이 지금까지 자라나고 있으니, 그들은 마음을 고치고 면목을 바꾸어 지난날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며 국가의 은혜를 감축(感祝)하면서 사사로운 분수나 온전하게 보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화변(禍變)을 낙으로 삼기를 그치지 않고 치우치게 좋아하기를 멈추지 않은 채, 마음을 기울이고 몸을 의탁하기를 물이 골짜기로 치닫는 것과 같이 하는 자가 또한 어느 집안이었습니까.
뜻이 서로 맞아떨어지기가 마치 아교를 옻에 탄 것과 같아 대대로 문생(門生)이 되고 대대로 의지할 곳을 만들어 단단하여 깨뜨릴 수 없게 되었는데, 누가 다시 이간질을 하겠습니까. 이 무리들이 이 집안에 모인 때로부터 그들이 경영하고 계획하는 바는, 작게는 사류(士類)를 해롭게 하는 것이었으며 크게는 군부(君父)를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정후겸(鄭厚謙)이 홍인한(洪麟漢)을 끼고서 역적 모의를 하였는데 을사년049) 과 병신년050) 의 세상에 가득했던 화변에서 종묘가 의뢰하여 다시 편안하게 되었던 것은 천명(天命)이었습니다.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민항렬(閔恒烈)·홍상간(洪相簡)은 세대는 다르지만 마음은 같으며, 홍계능(洪啓能)·홍술해(洪述海)·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은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았는데, 그들이 처음에는 권력을 잡아 사사로운 욕심을 성취하려는 데서 출발하였지만 마침내는 화변을 만들어 임금을 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니, 신축년·임인년과 을미년·병신년의 사건은 한 판(板)으로 찍어 낸 것과 같았습니다. 아, 누가 꾀어서 이와 같이 하였으며 누가 주장하여 그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멀리 염려하시어 이에 제신(諸臣)들에게 《명의록(明義錄)》 한 부(部)를 편찬하도록 명하셨으니, 도깨비와 같은 자들이 훌륭한 법에 굴복하고 해와 별이 하늘에 걸려 있는 격으로, 정밀한 의리와 큰 법은 참으로 《춘추(春秋)》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빠져들어갔던 자들은 스스로 반성하고 얽매였던 자들은 스스로 관계를 풀었으며, 용감한 자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겁쟁이는 외면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술년051) 2월의 옥사(獄事)를 당하여 그 온화한 모습으로 비호하고 아첨하면서 명을 받든 자는 과연 누구였습니까. 그리고 필경에는 그 사람이 국가를 흉흉하게 하고 집안에 화를 일으킨 것이 또한 어떠하였습니까. 이 무리들이 이 집안과 이익을 도모하여 합쳤다가 이익을 보지 못한 것이 또한 여러 번이었습니다. 이치로 보아서는 사이가 소원해져 마침내는 조금 태만해져야 하는데, 몰래 교통하면서 죽어도 풀지를 않았습니다. 두 죄수의 범죄가 있어 그들의 진면목이 모두 드러났는데도 제관(祭官)으로 차출할 때 충성을 다하기도 하고 책력(冊曆)을 반포하는 단자(單子)에 이름을 넣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회를 보아 시험하고 때를 틈타 점차로 이를 행하려고 하였으니, 그 일이 어찌 은혜를 품고 연연해하는 인정으로서 차마 서로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유래된 바가 있어서이니, 신축년·임인년의 의리는 이 무리들이 원수처럼 보는 바이며, 모년(某年)의 의리는 이 집안에서 말하기를 꺼려하는 바이고, 《명의록》에 이르러서는 이 무리들과 이 집안들이 다 함께 듣기 싫어하는 바입니다. 그 의리를 공동으로 듣기 싫어하는 상황에서 저절로 마음이 서로 연합하였기 때문에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공을 속여 차지하는 풍습을 비결로 전해받고 허풍을 치며 현혹시키는 계획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우면서, 심지어는 감히 의의(擬議)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할 근거 없는 말을 가지고 반드시 우리의 대중 지정(大中至精)하고 막엄 막중(莫嚴莫重)한 진정으로 큰 의리(義理)를 모두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류(異類)를 규합하여 어리석은 자들을 겁주고 미혹되게 하여, 두렵게도 조정의 판국이 바뀔 상황과 사류(士類)들이 어육(魚肉)처럼 죽임을 당할 화가 당장에 닥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성상의 뜻이 견고하게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1, 2년이 지나도 아득하게 움직일 술책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근년에 와서 간적(奸賊)이 이미 죽고 요사스러운 소굴이 일체 흩어져서 허둥지둥 마치 고기가 그물에서 빠져나온 듯 장님이 지팡이를 잃어버린 듯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평상시에는 아득하게 서로 잊고 있는 듯하여 외적으로는 고요히 알려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거짓말과 비밀이 번갈아 일어나는데도 그 그림자와 메아리를 찾을 수 없으며, 현혹시키는 것이 더욱 심해지는데도 그 단서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전 참의 신 한용귀(韓用龜)가 입장을 매우 견고하게 견지하여 수립한 것이 뛰어나 노여워서가 아니라 가르치고자 내리신 하교를 지나치게 받들고는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처벌을 받지 않았더라면, 이 무리들이 지렁이나 뱀처럼 얽히고 귀신이나 도깨비처럼 도모하는데 또한 어디를 말미암아 그들의 간교함을 적발하겠습니까. 탈 만한 조그만 틈을 보자마자 끔찍한 계책을 점차 시험하려고 하다가 진면목이 비로소 노출되어 속마음을 엄폐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신의 상소에서 이른바 염탐하는 기량과 인정에 배치되는 성벽(性癖)은 진실로 천하게 여기고 미워할 만하니 일찌감치 처벌하여 끊어야 마땅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등의 정상과 태도를 가리켜서 발설한 것이었습니다.
성상의 결단이 빛나고 처분이 엄정하여 한 세상의 이목(耳目)을 번쩍 뜨이게 하고 고통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을 건져내서 국론(國論)이 통쾌하다고 말하고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조금 씻겨지게 한 일에 대해서, 남을 미워할 수 있는 어짊과 살리는 도리로 사람을 죽이는 의리를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으며,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어는 추위가 닥침을 일찍이 분변하는 덕과 간교가 싹트는 것을 미리 찍어버리는 정치를 누군들 찬탄(讚歎)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숨겼던 실정과 계획이 이미 단서가 드러났고 올빼미같은 흉악한 마음으로 결탁되어 있다는 것이 명백한데도 더 끝까지 캐고 조사하지 않은 채 참작하여 조처하도록 곧바로 명하시어 도당(徒黨)들이 악초(惡草)처럼 쉽게 번식하게 하셨으니, 바야흐로 닥칠 화의 기미가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의 상소에서 ‘필경에는 의리를 밝히고 제방(隄防)을 엄격히 하는 데 도움이 있을 것이니, 당장의 효과가 조금이라도 있지 않을는지요.’라고 한 것은 바로 분통하고 근심스런 회포를 말의 단서로 인하여 억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 신이 비록 사리에 어둡고 미련하다 하더라도 임금을 섬기는 의리는 충신과 역적을 분간하는 것보다 더 엄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대강 아는데, 어찌 《명의록》이 오늘날의 인경(麟經)052) 이 되며 이 의리에 배치되는 자는 바로 천지에 용납될 수 없는 난신 적자(亂臣賊子)임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성격이 본래 어리석기 때문에 매번 여러 사람을 따라 부침하지 못했는데, 일찍이 들으니 국문하던 죄수를 처형할 무렵에 일률(一律)을 균등하게 시행해야 할 자라 하더라도 대각(臺閣)이 간혹 율의 적용을 다르게 했다는 논의가 있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단지 우리 임금에 대한 일단의 우직한 충성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의도가 없음을 스스로 믿고서 더러는 처분이 중도(中道)를 잃을까 염려되어 감히 너무 갑작스러워 지처(地處)와 관작에 해가 있다는 등의 말을 함부로 글에다 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의(公議)에 죄를 얻고 세상의 큰 치욕거리가 되었으니, 하늘을 쳐다보거나 땅을 내려다 봄에 부끄럽고 가슴이 아파 즉시 스스로 도끼를 가지고 목을 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더욱 몹시 분하고 극도로 원통한 바가 있으니, 듣건대 저쪽편의 사람들이 신의 상소를 가지고 명소(名疏)라고 하면서 서로들 돌려가며 일컫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저 신축년과 임인년 역적의 무리는 바로 저에게는 대대의 원수인데 그 지류(支流)와 여파(餘派)를 무엇 때문에 돌보고 아끼겠습니까. 그리고 두 죄수 중 한 사람은 또한 신의 개인적인 원수인데 그 원수에게 명예를 구하려고 아첨하다니, 신이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여기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씌워 불결한 것을 쓰고 있는 것 같으니, 이번에 낱낱이 근원을 거슬러 진달하면서 외람됨을 회피하지 않는 것은, 한갓 공의(公議)에 사례할 뿐만이 아니라 바로 사사로운 원한을 스스로 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기슬(蟣蝨)같은 천박한 견해로 항상 여기기를 ‘성궁(聖躬)께서 화락한 것을 어기게 되는 까닭은 매번 정치와 교화가 경색되기 때문이며, 정치와 교화가 경색되는 것은 매번 세상의 도의가 안정되지 않기 때문이다.’고 여겼습니다. 세상의 도의가 안정되면 성스러운 교화가 어떻게 경색됨이 있겠으며 천화(天和)가 어디를 연유하여 어긋남이 있겠습니까. 외람되게 성지(聖志)를 소통시켜 성우(聖憂)를 풀어드리고 성의(聖意)를 맞추어 성충(聖衷)을 위로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한 편(篇)의 구성이 오로지 화락한 것을 어기게 된 연유를 주장으로 삼아 상세히 엎치락뒤치락하며 단락단락마다 성의를 다하였습니다. 상소의 끝부분에 진달한 바 계발해 주고 소통시켜 주는 일은 약석과 같이 소중하다는 등의 말을 보면, 그 정신이 집중하는 바와 명맥(命脈)이 관통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신의 성격은 이미 지나치게 경솔하며 식견은 미련하고 용렬한데 한없는 은혜를 받았으며 알아줌을 만난 것도 더욱 실하였기에, 감격하는 심정에 군신간의 분수가 있다는 것을 몰랐고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항상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사려가 큰 꾸지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연감(淵鑑)이 너무 밝으면 의롭지 못한 데 부합될까 두렵다고 한 죽은 아비의 유계(遺戒)가 정말 그러하였습니다. 이번의 상소에서도 기필코 주벌해야 할 죄를 여러 번 범하였으니 한마디로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명연이 범한 바가 어떠한데 그가 공사(供辭)를 바치면서 종이 가득히 난잡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엄하게 여기고 두려워함은 전혀 없는 것입니까. 그가 한 짓을 따져보건대 너무나 놀랍고 가슴이 아픕니다. 이 자는 심상한 죄수와는 차이가 있으니 일찍이 시종(侍從)을 거쳤다는 것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형추(刑推)하여 실정을 알아내소서."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공초한 바가 과연 예상한 것과 같다. 물어보지 않아도 이명연이 그과 같이 억울하고 들끓는 번민을 품고서 일생을 불우하게 위험을 느끼는 존재가 되어 덮어진 항아리에 광명이 비치지 않고 깊은 골짜기에 봄이 오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날짐승과 길짐승 같은 미물에 있어서도 오히려 각기 그 천성을 다 이루려고 하는 법이다. 더구나 이명연은 간관(諫官)의 자리에 있던 자인데, 한마디 말로 화를 불러들여 굽히지도 못하고 펴지도 못하며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가운데에 둔 채 울리고 폭로할 길도 없게 방임하여 나로 하여금 조화(造化)를 시행할 수 없도록 한다면, 초야(草野)에서 조정을 보고 후인(後人)들이 오늘날을 보고 어떤 세상이라고 말하겠는가. 이명연의 상소가 들어오던 날에 이미 고 정승에게 말한 것이 있었는데, 결말짓기를 지금까지 미루었던 것은 대체로 격동하여 울려지기를 기다렸던 것이며, 풍파를 잠재우려 하면 도리어 다른 풍파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가 무함을 당하고 멸시를 받은 단서를 지금 아뢸 만한 기회를 인해서 낱낱이 정직하게 말했는데 정성스럽고 진실된 심정에서 나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 읽고 한 번 눈물을 흘리도록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니 비록 참소하며 과장하는 수십의 무리가 옛날의 흔적을 씻고 숨겨져 있는 흠을 찾는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신임을 받지 못하는 입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가상하다, 이명연이여! 춘추 시대에 강시(絳市)에서 죽었던 진(秦)의 첩자가 6일 만에 다시 살아난 격인데053) , 죄 없는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그 은혜가 중하고 한 세가(世家)를 보전하게 하는 것은 그 일이 크기는 하지만, 직언(直言)을 한 자가 옥(獄)에 갇힘을 모면한 일과 비교하면 후자가 어찌 참으로 더욱 중대하여 영원토록 할 말이 있지 않겠는가. 이명연을 특별히 석방하여 응교로 임명하고 패초(牌招)하여 입직하게 하라."
하였다. 애초에 이명연이 구속되어 처음 공초에 단지 감히 서울에 편히 있을 수 없으니 시골의 집에서 엎드려 있겠다는 연유를 말하였다. 이에 상이 다시 공초를 받도록 명하였는데, 또 죽을 죄를 지었다고만 말하고 다른 말은 없었다. 그러자 다시 취초(取招)하도록 명하고 또 근신(近臣)을 시켜 뜻을 유시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세 번째 공초였다.
승지 이유경(李儒慶)·성정진(成鼎鎭)이 상소하여 이명연을 임명하도록 한 명을 거두도록 청원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기각하고 이어 유경·정진 등을 체임하였다.
교리 윤제동(尹悌東)·부수찬 홍수만(洪秀晩)이 상차하여 이명연을 임명하도록 한 명을 거두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명연의 공초를 보니 그가 견지한 바는 그대들이 감히 왈가왈부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이미 결백이 드러났으니, 그를 거두어다 기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곡직(曲直)을 따지지도 않은 채 마무리 하기 이전의 차자 내용을 그대로 베껴 올렸으니, 그대들의 행위는 옥당을 욕되게 한 것이다. 옛날에 대관(臺官)을 욕되게 한 데 대한 처벌이 있었으니 마치 그대들을 위해서 마련한 듯하다. 등영록(登瀛錄)에 있는 그대들의 이름에다 부표(付標)함으로써 뽑아준 사람을 욕보이는 자들의 경계로 삼겠다."
하였다.
이명연(李明淵)을 특별히 도원 찰방(桃源察訪)으로 보임하였다. 이명연이 정세(情勢)를 끌어대며 입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4월 11일 신사
승지 조진관(趙鎭寬)·이익운(李益運)이 상소하기를,
"인신의 진언에 숨김이 없다는 것과 예의가 없다는 것은 말은 비록 가깝다 하더라도 마음은 서로 멉니다. 천고를 거쳐 오면서 말이 군주를 범한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밖으로 숨김이 없다는 명목을 빌리면서 안으로 예의가 없는 짓을 행하기를 어찌 이명연과 같이 한 자가 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의리에 대하여 엄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간혹 대수롭지 않은 무리들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하시어 일이 성궁(聖躬)에 관계되는데도 한결같이 용서하셨고 보면, 이명연이란 자는 바로 맹자(孟子)가 이른바 말로 꾀어낸 것입니다. 이런데도 주벌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사람이 사람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국가가 국가의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며 지정 지미(至精至微)한 의리도 마침내는 문드러져서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터이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옥당에서 연명으로 차자를 올린 데 대하여 대각(臺閣)을 욕되게 했다는 벌을 내리기까지 하셨고, 승정원에 입직한 승지가 올린 상소에 대해서는 아울러 체차(遞差)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일개 죄수를 위하여 뭇 신하들의 입을 막기를 어찌 이와 같이 하게 하십니까. 이명연에 대한 전후의 임명하라는 명을 한결같이 도로 거두어 쾌히 여론을 따르고 법도를 엄중히 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상이 그 상소를 기각하고 하교하기를,
"근래의 풍속은 자취가 같든 다르든 모든 사람에 대해 먼저 병이 들었다가도 나중에 나으면 그대로 인정을 해주는데, 한대(漢代)의 돈후한 풍속이라도 어떻게 이보다 나았겠는가. 이는 진실로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유독 이명연 한 사람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의심하지 않아야 할 일을 의심하고 끝에는 또 그대로 방치해버리는 술책을 쓰다가, 그가 이미 분명히 폭로하고 변명한 뒤에도 한결같이 주먹질과 발길질을 번갈아 하니, 어찌 매우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대저 이명연은 그 마음이 간사하지 않고 그 사람됨이 취할 만하기 때문에 뭇사람들이 지껄이고 떠들 때부터 그의 본정은 그와 정반대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어제 그의 공사(供辭)는 바로 《명의록》의 서문(序文)과 발문(跋文) 격이고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을 처음으로 드러낸 그의 본마음이었으니, 또한 앞서 병을 앓았다가 나중에 나은 자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데도 공격하며 배척하니 이는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이 두 승선(承宣)은 근밀(近密)에 출입한 지가 몇 년째인데 이명연이 어제 공사 가운데서 진술한 삼엄한 구법(口法)을 언제 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도 오히려 무슨 낯으로 대항하는 연명의 상소를 올리는가. 매번 이런 풍조와 기상을 보면 갑자기 태양증(太陽症)이 도진다. 두 승선은 모두 고신(告身)을 바치고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김이익(金履翼), 부응교 박재순(朴載淳), 정언 여준영(呂駿永)이 인의(引義)하고 지의금부사 홍억(洪檍) 등이 상소하여 이명연을 관직에 임명한 명을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나, 그 소를 아울러 기각하였다.
교리 심규로(沈奎魯), 부교리 이기양(李基讓)·박윤수(朴崙壽)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이명연을 관직에 임명하도록 한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규로 등을 체차하여 강외(江外)로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4월 12일 임오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경(松京)에서 민가를 불태운 일로 문겸 선전관(文兼宣傳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는데, 풍덕(豊德)에서도 민가를 태웠다는 보고가 또 이르렀다. 백성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침식이 편치가 않다. 경은 모름지기 특별히 해부(該府)에 경계하여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이명연의 공사(供辭)를 경은 보았는가? 처음과 두 번째의 공사에서 판하(判下)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그로 하여금 스스로 변명하게 하여 살길을 찾아주려고 해서였다. 그리고 그의 세 번째 공사에서 말한 바 ‘이 무리들’이라는 등의 내용은 세상 사람의 반을 무함해 뒤집어씌우는 것이니, 그렇다면 이 문충(李文忠)054) 서 충헌(徐忠憲)055) 이 탁연히 수립한 절의도 이 무리의 안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하였다.
4월 13일 계미
김상집(金尙集)을 공조 판서로, 홍양호(洪良浩)를 판의금부사로, 조대(趙岱)를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승지를 보내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도원 찰방 이명연(李明淵)을 파직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명연을 이미 온전하게 하여 평인(平人)이 되게 하였는데, 평인이 된 뒤에는 역시 평인의 일반적인 일을 가지고 책임을 지우되 그 옳은 것은 옳게 여기고 그 잘못은 죄를 주어야 한다. 대저 지난 겨울 처분할 때에 전교(傳敎)와 연교(筵敎)는 신하들을 거의 감격시켰다. 그가 비록 스스로 변명하는 데 급하였다고 하더라도 공사 가운데서 ‘이 집안’ 운운한 것은 전혀 도리가 없다. 병신년 이후의 상소에 대한 비답과 계문에 대한 답에서 나의 뜻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몇 해 전 상참 때에 고 정승의 거조(擧條)에 대해서 역시 하교가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가 피차의 색목(色目)이라는 등의 말을 어려움 없이 공초에 등재하여 온 세상을 두텁게 속이면서 누(累)가 충직(忠直)한 자에게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말을 가려서 발설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사리와 체면이 있겠는가. 이번 사태가 수습된 뒤에는 의당 뒷날의 폐단을 막는 도가 있어야 하니, 도원 찰방 이명연을 파직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본 사건은 이미 끝이 났으니 승지와 옥당에 대한 처분은 아울러 용서하도록 하라."
4월 14일 갑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유시하기를,
"10일의 차대(次對)에는 와서 모일 것으로 여겼는데 끝내 오지 않았고, 추후에 들으니 모든 문안 반열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근래 묘당(廟堂)의 일에도 참여하여 의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연석에서 아뢰었던 차어(箚語)의 남은 뜻을 가지고 이렇게 인입(引入)하는 거조를 두게 된 것인가. 경이 진달한 바 두 사람에 대한 일은, 이명연(李明淵)의 경우는 이미 마무리 되었으니 지금 논의할 것이 없고, 이안묵(李安默)의 경우는 용서를 아끼고 있는데 어찌 근거한 바가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일개 중신(重臣)을 논한 일은 그 죄가 오래도록 벼슬길을 막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의 상소 첫머리의 수법은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본의와 고심을 위배하였으며, 그 중간의 내용도 임금에게 누(累)가 되는 것을 소홀히 한 점이 또한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처음 경연에서 아뢰었을 적에 어찌 즉시 허락하지 않았겠는가. 이와 같이 나의 뜻을 펴서 보인 뒤에야 무엇을 다시 제기할 단서가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즉시 일어나 일을 보도록 하라."
하니, 병모가 부주(附奏)하기를,
"신의 구구한 심정은 대략 자인(自引)하는 차자에서 이미 진달하였습니다. 이안묵에 대한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만일 내용 중에 임금에게 누가 되는 것을 소홀히 하였다면 신이 곧장 논죄(論罪)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당초에 어찌 분변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뒤에 어찌 용서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상소 가운데의 일단(一段)은 반드시 착각하였거나 오해한 것이 동쪽을 서쪽이라고 한 것과 거의 같다고 여겼습니다. 신이 연석에서 아뢰면서 살피지 못한 법으로 단안했던 것은 전적으로 신 자신이 부닥친 혐의를 회피하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또한 직언한 자의 본정을 얻어서 이 일단의 일을 마무리짓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 동안이나 오래도록 끌어왔으니 아마도 관대하게 포용하는 정치에 손상이 있을 듯합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제기해 아뢰었으나 채택되지 못하였는데 지금 유시를 받들고 보니 더욱 부끄럽습니다."
하였는데, 회유(回諭)하기를,
"글로써 뜻을 이해하건대 경도 이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경은 직언한 사람의 본정을 해부하여 내 말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혔는데 여기에서 나의 의혹은 더욱 깊어만 간다. 모든 것은 대면하여 해명하는 데 달려 있으니 경은 모름지기 며칠 있다가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5일 을유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조상진(趙尙鎭)을 공조 판서로, 이엽(李燁)을 삼도 수군 통어사로 삼았다.
4월 16일 병술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와 전경 문무신(專經文武臣)과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차대(次對)를 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경이 심하게 인의하는 것은 단지 이안묵(李安默)의 사건으로 인해서인데, 안묵의 본정은 나도 상세히 알지 못하니 경 또한 어떻게 상세히 알겠는가. 안묵이 만약 일개 중신(重臣)을 탄핵하는 데 불과하였다면 내가 하필 고집하겠는가. 그의 상소 가운데 상단(上段)에서 운운한 것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중신이 임자년056) 에 올린 한 차례의 상소는 관계되는 바가 막중한데 이것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 봄 궁의 향일(享日)에 내린 지시는 경도 의당 모두 들었을 것이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은 중신이 대응해 올린 소에도 불가한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만약 안묵에게 하문하여 경이 헤아리고 있는 바와 서로 틀린다면 경은 어떻게 조처하겠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만약 그렇다면 신도 성토를 청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안묵에게는 한번 하문하겠지만 조진정(趙鎭井)은 그가 어찌 감히 모자를 쓰고 세상에 다니겠는가."
하고, 상이 이르기를,
"이안묵의 죄명을 우선 용서하라. 그리고 조사할 일이 있으니 그를 정원(政院)에 불러다 대답하게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안묵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하니, 상이 계판(啓板) 앞으로 초치(招致)하여 그의 상소 가운데의 구절을 가지고 물어보도록 명하였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이안묵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중신 서유린(徐有隣) 형제는 을미년057) 과 병신년058) 무렵에 이미 수립한 것이 없고 또한 지극히 정밀하고 막중한 일에도 천양(闡揚)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론(異論)에 섞여들어간 것은 화를 피하기 위한 방책에서 나왔는데 자신을 온전하게 하는 계책이 배치되었다고 운운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임자년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이미 수립한 것이 있고 또한 천양한 것이 있는데 신이 어떻게 들쭉날쭉한 논의를 가지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이미 중신의 임자년 상소에는 수립한 것이 있고 천양한 것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그에게 이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를 물러가게 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이 아뢰기를,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을 지금 이미 간행하였으니, 율학(律學) 및 취재(取才) 때에는 이것으로 고강(考講)하게 하소서."
하니, 재가하였다.
4월 17일 정해
원자(元子)의 사부 송환기(宋煥箕)가 길에서 상소하기를,
"미천한 신이 오늘 떠나면서 비난과 비웃음을 염려하지 않고 넘어짐을 돌보지 않고서 무릅쓰고 일어나 출발하는 것은 진실로 마음을 편 은혜로운 하교를 감히 어기지 못하고 목을 빼고 기다린 미미한 정성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어서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사부의 직임이 어떤 책임입니까. 신과 같이 용렬하고 비루한 자질로 이렇게 무릅쓰고 받게 되니, 길을 떠남에 비웃으며 손가락질을 하는데 어떻게 얼굴을 들겠습니까. 그리고 또 삼가 들으니 좨주(祭洒)의 겸대(兼帶)는 그전대로 하게 하면서 제거(提擧)를 새로이 제수하는 명이 거듭 내렸으니, 더욱더 불안합니다. 면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온 승선(承宣) 또한 소환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행차가 편안하게 서울 가까운 지역에 도착하였으니 매우 기쁘다. 함께 오는 승선은 의당 경과 같이 도성에 들어와야 하고, 겸임 건에 대해서는 바라는 대로 허락하여 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하였다.
4월 18일 무자
원자 사부 송환기가 도성 밖에 도착하였다. 원자가 사부를 상견하는 예의 습의(習儀)를 행하였다. 상이 집복헌(集福軒) 외헌(外軒)에 나아가 시임·원임 각신(閣臣)과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을 불러다 이르기를,
"사부가 도성에 들어온 뒤에는 개강(開講) 날짜를 즉시 길일을 가려 정해야 하며, 주선(周旋)하고 배읍(拜揖)하는 절차도 습의해야 한다. 오늘 날씨가 청명하기에 특별히 경들을 불러 함께 보려 한다."
하고, 인해서 민종현에게 하교하기를,
"사부와 상견례를 할 적에 사부가 문밖에 도착하면 원자가 곧바로 뜰에서 내려가 맞으며, 물러날 때에도 역시 뜰에서 내려가 전송하는 것이 예이다. 이것이 정말로 《오례의(五禮儀)》의 의주(儀注) 가운데 기재되어 있는가?"
하니, 민종현이 그렇다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사부와의 상견례가 책봉(冊封)된 뒤에 있게 될 경우 모든 의절(儀節)은 찬의(贊儀)가 하는 것과 같이 장의(掌議)가 거행하는데, 사부와 빈객(賓客)의 상견례인 경우는 책봉되기 전이나 뒤나 으레 모두 인의(引儀) 1원(員)이 마루에 올라 여창(臚唱)한다."
하니, 민종현이 그렇다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습의할 때에는 찬의가 인의의 일을 겸해서 행하도록 하되 개강하는 정일(正日)에는 참하관(參下官)인 인의 가운데서 근무한 날짜가 가장 오래된 사람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만수(李晩秀)가 진강(進講)할 책자를 미리 품정(稟定)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숙묘조(肅廟朝)에는 선정(先正) 송준길(宋浚吉)이 《효경(孝經)》을 진강하도록 계청(啓請)하였는데, 이번에는 《소학(小學)》을 진강하게 하려고 한다. 대저 개강 책자를 품정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기 때문에 으레 사부·빈객 및 찬선(贊善)·진선(進善)·자의(諮議)·서연관(書筵官)에게 수의한 연후에 아무 책을 진강한다는 것을 초기(草記)하여 품지하였는데, 이번에는 내각(內閣)에서 수의하여 계청하면 하교하겠다."
하자, 제학 정민시(鄭民始)가 이에 수의를 계청하니, 《소학》으로 정하도록 명하고 마침내 《소학》 1부(部)를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춘저(春邸)에 있을 때에 강독하던 책이니 원자가 강독하는 책은 이것을 사용하게 하고, 사부와 유선이 강독하는 책은 홍문관에 선조(先朝)의 경연(經筵)에서 사용하던 책이 있으니 가져다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인해서 상견례(相見禮)의 습의(習儀)를 행하고, 다음에 개강하는 습의를 행하였는데, 《소학》 제사(題辭)를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부터 ‘성인의 계책이다.[惟聖之謨]’고 한 데까지 읽었다. 각신들이 일제히 나아가 아뢰기를,
"원자궁(元子宮)은 배읍(拜揖)과 주선(周旋)이 근엄하여 매우 자연스러우며 구두(句讀)와 성음(聲音)도 음률에 맞습니다. 지혜가 일찍 성취되고 학문이 날마다 진보해 가니, 실로 우리 동방의 한없는 복입니다."
하였다.
4월 19일 기축
시임·원임 각신과 예조 판서 민종현을 소견하였다. 상이 민종현에게 이르기를,
"경은 사부를 보았는가? 어느 날에 숙사(肅謝)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는가?"
하니, 민종현이 아뢰기를,
"개강하는 날에 하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연(講筵)에는 사부 한 사람만 들어가게 되어 있으므로 사부가 읽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번에는 유선(諭善)도 함께 들어가니 누가 읽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서연(書筵)의 경우는 빈객이 입참(入參)하여 궁관(宮官)에게 읽도록 하는데, 이것도 미리 강구해 정하는 것이 좋겠다. 경은 이 뜻을 사부에게 묻도록 하라."
하였다.
원자 사부 송환기(宋煥箕)에게 유시하여 내일 아침에 조정에 나아오도록 하고, 또 유시하기를,
"내일 경연에 나아가겠다. 산림(山林)에서 올라온 사람도 함께 연석(筵席)에 오를 터이니 경은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김재찬(金載瓚)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억(洪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4월 20일 경인
주강(晝講)을 하였다. 《중용(中庸)》 제30장(章)을 강독하였는데, 상이 원자 사부 송환기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강연은 경을 기다려 마련한 것이니 모름지기 글 뜻을 진달하라."
하니, 송환기가 사양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과 같이 임하(林下)에서 독서한 선비가 처음으로 경서(經書)를 펼쳐놓고 강독하는 자리에 올랐는데 어찌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송환기가 아뢰기를,
"《중용》 한 책은 네 개의 큰 절목으로 나누어 지는데, 맨 앞의 첫째 절목은 중용을 말하였고, 둘째 절목은 비은(費隱)을 말하였으며, 셋째 절목은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말하였고, 넷째 절목은 전편의 요점을 들어 간략하게 말하였습니다. 모두 부자(夫子)의 말을 가지고 종결하였는데 이 한 절목은 또한 부자의 덕(德)을 극도로 말하였습니다. 대체로 인간이 태어난 이래로 성인으로서 부자보다 더 훌륭한 성인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할 적이면 반드시 부자를 일컬었으며, 도(道)는 반드시 부자를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기에서 더 나아가 들을 만한 것이 있겠는가?"
하니, 송환기가 아뢰기를,
"순문(詢問)하기를 여러 번 하시기 때문에 외람되게 훈고(訓詁)간에 늘 하는 말을 아뢰었던 것이니 황공하고 부끄러움이 지극합니다. 달리 진달할 만한 글 뜻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은 덕(德)은 시냇물이 흐르는 것과 같고 큰 덕은 돈후하게 교화한다 하였는데,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면 그 ‘덕을 유일하게 지닌다.’는 뜻은 어디에 있겠는가? 옥당이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검토관 김근순(金近淳)이 아뢰기를,
"큰 덕은 큰 근본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요 작은 덕은 널리 통행하는 도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니, 비록 본체와 작용의 나뉨은 있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두 가지 사물은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덕이 두 가지가 아님은 진실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지만, 이른바 큰 근본이란 과연 무슨 뜻인가. 천하에는 근본이 없는 물건이 없으니 술을 빚거나 물감을 들이는 데 이르러서도 역시 모두 근본이 있다. 일단 근본이 있다고 말하면 형체를 지닌 사물 아닌 게 없으니 조미를 받아들이는 단맛, 채색을 받아들이는 흰색, 나무의 종자와 물의 근원 같은 것이 이것이다. 이 큰 근본은 있다[有]고 말하더라도 지적하여 말할 만한 형체가 없고 없다[無]고 말하더라도 천지의 조화가 여기에 근본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떻게 말을 해야 있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병폐가 없고 없다고 말하면서도 고고적멸(枯槁寂滅)의 탄식이 없겠는가?"
하니, 근순이 아뢰기를,
"이것은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는 것과 같아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극이 태극이라는 것은 원래 터득하기가 매우 쉽지 않다. 송사(宋史)의 실록(實錄)에 ‘무극에서 태극이 되었다.[自無極而爲太極]’고 하여 ‘자(自)’ 자와 ‘위(爲)’ 자를 보태어 본래의 뜻과는 아주 멀어져 태극 밖에 다시 무극이 있으며 무극 아래 다시 태극이 있다는 것처럼 되었는데, 이 두 구절을 분명하게 터득한 뒤라야 큰 근본이란 뜻을 밝힐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있으면서도 방체(方體)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없으면서도 공적(空寂)에 빠지지 않아서 무극과 태극이 둘이 되는 병통이 없겠는가?"
하니, 김근순이 아뢰기를,
"태극 두 글자는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 조금의 흠결도 없습니다. 그런데 염계(濂溪)059) 의 생각으로는 혹시라도 후세의 사람들이 태극을 형상이 있고 방소(方所)가 있는 물체로 여길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무극이란 두 글자를 집어내었습니다. 그 문장이 비록 나누어 말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애당초 두 개의 본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용감하게 곧장 앞으로 나가 이전의 성인이 말하지 않은 뜻을 발명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유강의(寬裕剛毅) 등 네 가지를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 덕(德)으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첫 단락의 총명예지(聰明睿智) 네 글자는 네 가지 덕의 조목에 끼이지 않았다. 언해(諺解)를 가지고 관찰하면 그것을 네 가지 밖에다 별도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총명예지는 어느 지위에 소속되어야 하는가?"
하니, 김근순이 아뢰기를,
"총명예지는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용납함이 있으며 잡음이 있고 공경함이 있으며 분별함이 있는 것이 비록 네 가지 덕의 작용에 속하지만 관유(寬裕)와 강의(剛毅)와 제장(齊莊)과 문리(文理)는 일찍이 자질 아님이 없다. 그렇다면 총명예지를 어떻게 전적으로 자질에다 속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김근순이 이해하지 못하자, 상이 이르기를,
"하늘에 있어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되며, 봄에 나서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결실을 맺고 겨울에 갈무리하는 데서부터 일월(日月)이 밝혀 주고 상로(霜露)가 적셔 주는 데에 이르기까지 하늘에서 하는 바가 아님이 없으며 태화 원기(太和元氣)가 유행하고 발육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은 하늘과 같고 총명예지는 태화 원기와 같고 관유(寬裕) 강의(剛毅) 제장(齊莊) 문리(文理)는 나서 자라고 맺고 갈무리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취하여다 비유하고 이와 같이 나누어 소속시킨다면 이 장에서 이른바 다섯 가지 덕이 거의 각각 단락(段落)과 경계(境界)가 있게 된다. ‘발강(發强)’이란 ‘발’ 자에 대하여 장구(章句)에 분명한 해석이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지 못하자, 상이 송환기(宋煥箕)에 물었는데, 송환기가 ‘발양(發揚)한다.’는 ‘발’ 자로 해석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악기(樂記)》에도 발양(發揚)하여 도려(蹈厲)060) 한다는 글이 있다. 경은 지나치게 겸손하지 말고 소견이 있으면 모두 진달하라."
하였다. 환기가 사례의 말을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전에 논한 바 총명예지에 대한 해설은 과연 어떠한가?"
하니, 환기가 아뢰기를,
"총명예지는 그 기품(氣稟)을 말한 것으로 네 가지 덕의 강령(綱領)이 되어야 합니다. 수장(首章)의 장구에 이른바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며 이치 또한 부여한다는 뜻과 서로 가까운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매우 훌륭하다. 바로 이 한마디 말로 경이 지닌 학문을 알 만하다. 총명은 기(氣)에 속하고 네 가지 덕은 이(理)에 속하며 기가 주장이 되고 이가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으니, 태극도(太極圖)에서 이른바 ‘무극(無極)은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이 미묘하게 합쳐져서 엉긴 것이다.’고 한 것 또한 이 뜻이다. 그런데 총명예지 앞에 과연 말할 만한 한 층의 경계(境界)가 있겠는가?"
하니, 환기가 아뢰기를,
"총명예지가 비록 기에 속한다 하더라도 총명예지가 되게 하는 것은 이이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필경에는 이가 우선이 됩니다. 그리고 유행(流行)으로부터 말한다면 이와 기가 선후가 없으며, 근원으로부터 말한다면 이와 기가 선후가 있습니다. 대체로 이와 기는 서로 떠나지 못하며 또한 서로 섞이지 못하니, 이를테면 수장(首章)의 ‘하늘이 명한 것이 성품이다.’고 할 때의 하늘은 바로 이이며 명한다는 것은 바로 이가 기를 타고 유행하는 것입니다. 성(性) 자는 심(心) 자와 생(生) 자를 따랐으니 또한 기에 나아가 지목한 것으로, 여기에서도 이와 기가 간격이 없는 미묘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정(先正) 이 문순(李文純)061) 과 이 문성(李文成)062) 의 방심(放心)을 구하는 학설이 같지 않은데 경은 평소에 어느 학설을 따랐는가?"
하니, 환기가 아뢰기를,
"신이 어찌 주장하는 견해가 있겠습니까마는 이이(李珥)의 말에 더욱 일치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문성의 이 학설은 무오년063) 에 있었으니 초년(初年)의 학설이 아닌가?"
하니, 환기가 아뢰기를,
"초년의 학설이었는지 만년의 학설이었는지는 확실하게 분변하지 못합니다만 그 말은 바로 정론(正論)인 듯합니다."
하였다. 환기가 아뢰기를,
"신이 도성에 들어온 뒤로 호조에서 날마다 쌀과 고기 그리고 땔나무와 숯을 지급하는데, 신이 감히 받지 못하겠으니 더욱 황공하고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포인(庖人)은 고기를 계속 대고 늠인(廩人)은 곡식을 계속 댄다.’고 하였으니, 이는 원래 상례(常例)이며, 나는 옛날의 법을 따른 데 불과할 뿐이다. 어찌 사양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리고 또 주어도 되고 안 주어도 되는데 주면 은혜를 손상하게 되고, 가져도 되고 안 가져도 되는데 가지면 청렴함을 손상하게 되는데, 내가 어찌 안 주어도 되는데 주겠으며 또한 어찌 안 가져도 되는 것을 가지라고 권하겠는가. 경은 산림(山林)의 숙덕(宿德)으로 예를 갖춘 부름을 받고 나왔으니, 내가 도움을 구하는 것은 오로지 사부(師傅)의 직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 경은 올해 나이가 이미 70이니 그 황발(黃髮)064) 에게 묻는 의리상 마땅히 양로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경은 바로 재상 집안의 사람으로 집안에 전해오는 구문(舊聞)이 있어서 반드시 개발하고 도와줄 길이 많을 것이다. 경의 한 몸에 이 세 가지를 겸하였으니 내가 훌륭한 말을 들으려고 하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말할 만한 것이 있거든 내일 의식을 행한 뒤에 마음에 쌓인 바를 모두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1일 신묘
원자(元子)가 사부(師傅)·유선(諭善)과의 상견례를 집복헌(集福軒)의 외헌(外軒)에서 행하고 이어 《소학(小學)》을 강독하였다. 기일에 앞서 원자의 배위(拜位)를 동벽(東壁)에서 서쪽을 향하게 마련하고, 사부의 배위는 서벽(西壁)에서 동쪽을 향하게 마련하고, 유선의 배위는 사부 배위의 남쪽에서 조금 물려서 동쪽을 향하여 설치하였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 영접하는 자리를 동쪽 계단 아래에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였다. 시간이 되자 사부 송환기(宋煥箕)와 유선 윤득부(尹得孚)가 흑단령(黑團領)을 갖추고 합문 밖에 나아가고, 원자는 동계(童髻)·옥잠(玉簪)·남도포(藍道袍)·흑화(黑靴)를 갖추고 동쪽 계단으로 내려와 영접위(迎接位)로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사알(司謁)이 먼저 사부를 인도하여 들어가 서쪽 계단 아래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섰는데, 원자가 읍을 하니 사부가 답례로 읍을 하였다. 계단에 이르러 원자가 세 번 읍을 하면서 사양하자 사부는 답례로 읍을 하고 먼저 올랐고 원자가 뒤에 올랐다. 사부는 서벽의 배위로 나아가고 원자는 동벽의 배위로 나아갔다. 인의(引儀)가 여창(臚唱)하자 원자가 재배했고 사부는 답으로 재배하고는 인해서 서쪽 계단을 따라 내려왔고 원자는 동쪽 계단을 경유하여 내려왔다. 사알이 사부를 인도하여 나가자 원자는 도로 올라갔다. 사알이 유선을 인도하여 들어가 서쪽 계단으로부터 올라가 배위에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섰다. 인의가 여창하자 유선이 재배했고 원자는 답으로 재배했다. 사알이 유선을 인도하여 나갔다. 조금 있다가 사부와 유선이 모두 시복(時服)으로 합문 밖에 나아가는데, 원자는 동쪽 계단으로부터 내려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사알이 사부 및 유선을 인도하여 들어가 서쪽 계단 아래로 나갔다. 원자가 읍을 하자 사부가 답으로 읍을 하였다. 계단에 이르러 원자가 세 번 읍하고 사양하자, 사부가 답으로 읍을 하고 먼저 올랐고 원자는 뒤에 올랐다. 사부가 자리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서자, 원자는 자리로 나아가 서쪽을 향해 섰고 유선은 서쪽 계단으로 올라와 동쪽을 향해 섰다. 원자가 재배하자 사부가 답으로 재배했다. 유선이 절을 하자 원자가 답으로 절을 했다. 사부가 먼저 자리에 앉자 원자도 자리에 나아가 앉았고 유선도 역시 앉았다. 내시가 서안(書案)을 원자가 앉아 있는 앞에다 받들어 올렸고, 사알은 서안을 사부 및 유선이 앉아 있는 앞에다 받들어 놓았다. 사부가 《소학》의 서제(書題)를 읽자 원자는 새로 배운 음(音)을 읽었다. 사부가 훈고(訓詁)의 문의(文義)를 두루 진달했고, 유선도 잇따라 진달했다. 강독이 끝나자 사부와 유선은 서쪽 계단을 경유하여 내려왔고 원자는 동쪽 계단을 경유하여 내려왔다. 사알이 사부 및 유선을 인도하여 합문 밖으로 나오자, 원자는 안으로 되돌아갔다.
원자 사부 송환기와 유선 윤득부를 소견하였다. 상이 송환기에게 유시하기를,
"경은 경상(卿相) 집안의 사람으로서 선정(先正)의 아름다움을 이어 선정의 사업을 행하니, 어찌 신하와 임금이 함께 할 영광이 아니겠는가. 내가 경에게 기대하는 것이 세상의 도의에 대한 책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경례(慶禮)를 치른 뒤니 대신(大臣)을 인견하지 않을 수 없다. 모름지기 대신과 같이 다시 연석에 나아와 훌륭한 계책을 두루 올리도록 하라."
하니, 환기가 아뢰기를,
"신은 산야(山野)에 살아 자질이 거친 사람으로 외람되게 감히 감당하지 못할 임무를 받들었는데, 우리 원자궁(元子宮)을 보니 영명하고 슬기로운 거동이 법도에 맞으며 소리도 음악을 듣는 것 같으니 신이 뜻한 바에 만족스럽습니다. 지금 도움을 구하고 직언을 바라는 하교는 미천한 신이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지나치게 겸손하지 말라."
하였다. 인해서 득부에게 하교하기를,
"명망과 실제가 모두 드러나 진실로 여론(輿論)에 부합된다고 일찍이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특별히 선발하였다. 오늘 의식을 이루었으니 기쁘고 다행스러움을 무엇에 비유하겠는가. 내가 박 유선(朴諭善)에게서 도움 받았던 것을 유선에게 기대하니, 그 덕의(德義)를 가르치고 그 신체(身體)를 보필할 뿐만이 아니고 음식과 기거(起居)에 이르기까지 곳곳마다 교도(敎導)하는 것 또한 모두 유선의 직임이다."
하니, 윤득부가 아뢰기를,
"신이 의당 노둔한 자질을 다하여 예학(睿學)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필하여야 하는데, 참으로 감당할 가망이 없습니다."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을 소견하였다. 상이 원자에게 명하여 《소학》의 서제(書題)를 읽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글의 뜻을 물어보도록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감히 묻겠습니다. 인군(人君)은 지극히 높은데 어찌 벗이 있어 친할 수 있습니까?"
하니, 원자가 이르기를,
"임금은 신하를 벗으로 삼는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 아뢰기를,
"신하를 벗으로 삼으니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하는 때가 많을 것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실로 종묘 사직이 만년토록 지속할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원자의 강학 일차(日次)를 3일 간격으로 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하교하였다.
"오늘 행례(行禮)가 순조롭게 이루었으니 나의 기쁨을 표시하는 마음에 있어 경사를 기념하는 거사가 있어야겠다. 사부 송환기(宋煥箕)에게는 표피(豹皮) 1령(令)을 내리고, 유선 윤득부(尹得孚)에게는 녹피(鹿皮) 1령을 내려주라. 개강(開講)은 내각(內閣)에서 주관하였으니 일제학(一提學) 정민시(鄭民始)에게는 호피(虎皮) 1령을 내려주고, 의절(儀節)은 해조(該曹)와 해방(該房)에서 관장하였으니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에게는 숙마(熟馬) 한 필을 내려주고 예방 승지 신기(申耆)는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원자 사부 송환기가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송환기가 임금 앞에서 물러나와 그대로 고향으로 떠날 채비를 하여 내려준 모자·신·쌀·고기의 숫자를 기록하여 호조에 되돌려주고 떠났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 승지 서매수(徐邁修), 응교 박재순(朴載淳) 등이 번갈아가며 차자를 올려 머물게 하도록 계청하니, 상이 매수를 보내어 돈유하게 하였다. 서매수가 뒤따라가 과천(果川)에 도착하니, 송환기가 부주(附奏)하기를,
"신이 외람되게 은명(恩命)을 받든 것은 오로지 개강(開講)의 대례(大禮)가 혹시라도 신 때문에 지연될까 두려워서였습니다. 이렇게 예를 이룬 뒤가 바로 신이 돌아가기를 고하는 날이라고 구구한 마음에 본래부터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오늘 고향을 찾는 것이 어찌 성상의 하교를 감히 감당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궐을 바라보건대 단지 잊지 못하는 마음만 더합니다."
하였다.
4월 22일 임진
원자 사부 송환기에게 유시하였다.
"지신(知申)065) 의 장계 내용을 보고 경의 행차가 곧장 전진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으니, 이것이 어찌 여러 번 부지런히 돈소(敦召)하여 조정으로 불러들인 뜻이겠는가. 경이 만약 경의 선조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는가. 바야흐로 과천(果川)에 머물러 있다 하니 지금도 오히려 다시 돌이킬 수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유시를 다시 내리니, 모름지기 즉시 길을 되돌리도록 하라."
우유선 이성보(李城輔)에게 유시하였다.
"좨주(祭洒)가 왔을 때에 믿을 만한 기별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에 함께 오라는 명을 미처 그대에게 아울러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좨주가 또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어 애써 불러들인 뜻이 없게 되었다. 그대는 직책이 권강(勸講)이고 또 좌유선도 매우 연로하였으니, 그대가 만약 이러한 모든 사정을 안다면 떠날 채비를 하는 데 어찌 많은 유시가 필요하겠는가. 이에 사관을 보내어 앞서의 뜻을 거듭 반복한다."
권유(權裕)를 이조 참판으로, 한용귀(韓用龜)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관학 유생 김종화(金鍾和) 등 1백 42인이 상소하여 원자 사부 송환기(宋煥箕)를 머물게 하도록 청하였다.
4월 23일 계사
원자 사부 송환기가 길에서 상소하기를,
"신이 강석(講席)에서 물러났으나 삼가 마음에 잊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성학(聖學)이 고명하여 백왕(百王) 중에서 뛰어나시니 경연에서의 도움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옛날부터 치법(治法)과 정모(政謨)는 토론하는 데서 도움을 얻는 것이 넓고도 많았습니다. 아,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 날마다 세 차례 강독하게 한 아름다운 규정이 어찌 진실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생각건대 원자의 총명이 날마다 계발되고 있으니 전학(典學)에 있어서 의당 몸소 가르치는 방도에 힘쓰셔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지금 신이 사부의 직책과 주자(胄子)를 가르치는 임무를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습니까. 면직시켜 주소서. 그리고 지신(知申)이 신을 돌봐주고 있는데 더욱 황공하고 민망합니다. 빨리 소환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되돌리지 못해 떠나는 수레가 날마다 멀어지니, 기다리던 나머지에 섭섭함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이 노정을 계산해 보니 아직도 경기의 경계를 넘지 못하였을 터인데 지금이라도 부른다면 오히려 미칠 수 있다. 또 더구나 선정(先正)의 사판(祠版)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에 경이 마침 올라왔으니, 경이 인정으로나 예법으로나 사제(賜祭)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이 만약 이 일을 생각한다면 길을 되돌리는 데에 간절한 지시가 필요 없을 것이다. 경은 즉시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관학 유생 어용우(魚用羽) 등 2백 23인이 상소하여 원자 사부 송환기를 머물도록 권할 것을 청하였다.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이의준(李義駿)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사도시 첨정 홍수영(洪守榮)의 신병이 갑자기 위중해졌으니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나의 일념은 그의 집안을 보전하는 데 있었다. 지난해 겨울의 전교를 진실로 지각이 있는 자라면 누군들 깨닫고 느끼지 않았겠는가. 이번 죄수의 공초는 대체로 스스로 변명하는 데서 나왔으므로 그 구절들을 지우고 조지(朝紙)에 냈는데, 【이명연(李明淵)의 공초 가운데 홍가(洪家)에 관계되는 모든 구절을 지우고 내렸다.】 이는 그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려는 본의(本意)와 그 집만을 온전하게 보전하려는 고심(苦心)이 아울러 행해지게 하려던 것이다. 나의 그 집안을 위한 마음이 어찌 그 집안만을 위해서이겠는가.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이 항상 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 짐작해 결정하는 권도(權度)가 저절로 있게 된다. 그가 태연하게 운운한 것은 낱낱이 따질 것도 없으니 일체를 자연에 맡겨둔다면 흔들어대든 가지고 놀든 나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의 집안은 국가의 척완(戚畹)이니 엄중히 타일러 직임에 이바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4일 갑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이보다 먼저 궤장을 하사할 때의 절은 일좌 재지(一坐再至)하는 예(禮)를 쓰고 음악을 내려 대궐 문 밖에서부터 인도하며, 연회에 참석한 제빈(諸賓)은 교서를 경건히 영접하고서 에워싼 채로 그의 집에 이르도록 명하였는데, 홍낙성이 상소하여 사양하니, 상이 단지 영접하는 절차만 없애도록 명하였다. 이날 상이 집복헌(集福軒)에 나아갔는데 원자(元子)가 시좌(侍坐)하였다. 홍낙성 및 참석해야 하는 여러 신하들이 뜰에 들어와서, 여러 신하들은 네 번 절을 하고, 【시임 대신·의정부 동벽(東壁)과 서벽(西壁)·이조 판서·예조의 세 당상관·한성부 판윤은 동쪽에 있고, 병조 판서·형조 판서·공조 판서는 서쪽에 있었다.】 홍낙성은 일좌 재지하였다. 선교관(宣敎官)이 교서를 읽었는데, 그 교서에 이르기를,
"추서(鄒書)066) 에 삼달존(三達尊)을 드러내어 일컬으면서 나이 많은 이를 높이게 한 것은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는 까닭이며, 사전(思傳)067) 에 구경(九經)의 뜻을 게재하면서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것을 친한 이를 친애한 다음에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왕도 정치에서 당연히 우선해야 할 바이며 국가의 전례(典禮)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상(虞庠)068) 에서는 은혜로 양성하는 행정에 힘써 국빈(國賓)에게 곡궤(曲几)를 주었으며, 한정(漢廷)에서는 우례(優禮)하는 규정을 중하게 여겨 대질(大耋)에게 옥장(玉杖)을 내려 주었는데, 그 영광은 실로 연모(燕毛)069) 와 이선(貳膳)070) 보다 뛰어났으니, 어찌 세상에 드문 특이한 은혜뿐이겠는가. 예우(禮遇)는 사마(駟馬)의 안거(安車)와 같게 하니 그것도 훌륭한 세대의 아름다운 일이로다.
오직 경은 충(忠)·정(貞)의 세업(世業)에다 정혜(靖惠)의 가성071) 을 지녀 지체와 명망은 아름다운 영화를 계승하였는데, 그것은 장 공주(長公主)072) 의 빛나는 음덕에서 시작되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마음이 통하여 유밀(宥密)073) 한 의탁을 만났는데, 더구나 우리 자궁(慈宮)과는 의친(懿親)인 관계임에랴. 진퇴하면서 몸가짐이 단정하고 엄중하기는 송(宋)나라 이항(李沆)의 풍범(風範)과 같고, 순경(順境)이나 역경(逆境)에 대처하여 조심하고 근신하기는 한(漢)나라의 장안세(張安世)의 규모와 같았다. 그래서 선조(先朝)에서 오래 전부터 지닌 명망으로 이미 팔좌(八座)를 두루 거쳤고, 어진 영안위(永安尉)074) 의 남은 기대로 마침내 삼공(三公)의 지위에서 두 번이나 돕게 되었다. 이에 한 사람의 신하가 머리가 희도록 변함이 없는 마음으로 20년 동안 황비(黃扉)·적석(赤舃)에다 생용(笙鏞)·보불(黼黻)로 국가와 집안을 태평하게 하였으며, 종명정식(鍾鳴鼎食)하는 원림(園林)에서는 본래부터 부귀하여 부귀를 누리니, 당(唐)나라 중서(中書) 24고(考)에서 곽분양(郭汾陽)075) 이 영화와 복록을 온전하게 겸하고 송(宋)나라 기영(耆英) 13인에서 부정공(富鄭公)076) 이 명망과 지위가 최고를 차지한 듯하도다. 괴당(槐堂)의 남은 경사는 집안에 과거 급제한 손자가 있고, 행원(杏園)의 높은 명망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던 해가 돌아왔으니, 그 길하고 상서로운 일들이 모두 모인 것은 어진 이가 오래 사는 지역에서 아름다움을 함께 하는 것 아님이 없다. 때는 을묘년077) 의 산호(山呼)하던 봄을 만났으며, 뛰어나게 만갑자(萬甲子) 인서(人瑞)의 으뜸이 되었도다. 연희당(延禧堂) 위의 서대(犀帶)는 내외의 반열에서 우뚝하고, 낙남헌(洛南軒) 가운데의 시굉(兕觥)은 조야의 차례에서 높도다. 신조(宸藻)078) 로 음향을 전파하여 교목(喬木)의 1천 장(章)을 읊고 화고(華誥)가 빛이 나서 첩(帖)을 써서 1만 가호에다 걸었도다. 나라의 경사가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에 열렸고 또한 경의 향수(享壽)가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 나이에 가득 찼도다. 진루(秦樓)에서의 수연(晬筵)을 미루어 생각하니 마침 이갑(二甲)이 돌아온 격이고 강현(絳縣)에서의 하령(遐齡)을 낱낱이 세어보니 다시 칠주(七籌)하고도 덧붙은 나이를 헤아려 보게 한다. 보통 사람의 칠순도 오히려 옛날부터 드물다고 일컫는데 영의정의 80나이가 어찌 국가의 영광이 되지 않겠는가. 4백 년 동안의 역사를 낱낱이 상고하여 보아도 두세 명의 신하만 아름다움을 짝할 정도로 드물다. 지위는 비록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하더라도 남극성(南極星)과 함께 빛나기는 진실로 어렵고, 나이는 간혹 1백 세가 넘었으나 거의 서추(西樞)에서 인퇴(引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오직 우리 경은 융성한 복록을 함께 누리니 그것 또한 자궁의 음덕으로 나온 복이 미친 것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자덕(慈德)을 드날려 자은(慈恩)을 넓히려면 매번 효자가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더구나 이렇게 영의정으로서 원로(元老)를 겸하였으니, 가례(加禮)하는 방법이 있어야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등연(登筵)하고 추반(簉班)할 때 이미 두 자식의 부액(扶腋)을 허락하고 연회를 베풀어 주었으니, 어찌 온 조정이 축하하려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래도 또한 안석과 지팡이가 있어야 늙은 사람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당(耆堂)은 영수(靈壽)의 호(號)를 쳐다보고 이를 믿고 의지하며, 법연(法筵)에서는 행위(行葦)의 시(詩)를 읊으며 저에게 명하여 계속 모시게 하였다. 이는 성조(聖祖)의 구전(舊典)을 계승한 것으로 우리 가례(家禮)에도 적합하다. 그래서 특별한 규례를 명신(名臣)에게 인용하니 경의 몸에 함께 영광이 있으리라. 이에 곧바로 그대에게 이것을 주노니 가는 곳마다 의지할지어다. 남곽(南郭)의 오동나무를 기다리지 않고 땅 위에서 신선(神仙)이 되었으니, 서공(西邛)의 대나무보다 아주 나아서 조정에서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내부(內府)에 진귀한 음식이 차려져 밤새도록 마시다 취해 돌아가니, 이원(梨園)의 우아한 풍악소리는 맑은 바람을 몰아오네. 이에 윤음(綸音)을 크게 펴려하는데 어찌 뜻이 없겠는가. 세 글자의 직함(職啣)을 내려주지 않은 일에 이르러서는 또한 기다리도록 하라. 옥현(玉鉉)079) 에 위임하고 기탁함이 가볍지 않아 지금까지 감독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힘입었고, 동위(銅闈)080) 의 개강(開講)이 여러 날 되었으니 더욱 보도(輔導)하는 방법에 합당하도다.
아, 영광을 장식하는 것은 한(漢)나라 조줄(曹窋)이 고서(誥書)를 펴는 것과 같고, 선고(先故)를 생각하는 것은 주(周)나라 태희(太姬)081) 가 은유(恩侑)를 이룬 것과 같도다. 정월 초하룻날 늙은이에게 휴식하도록 반포한 하교는 바로 좋은 계책을 남기게 하기 위한 것으로, 길일(吉日)에 가빈(嘉賓)에게 잔치를 마련하고 주행(周行) 시편(詩篇)을 외워서 보인다."
하였다. 【지제교(知製敎) 김근순(金近淳)이 지었다.】 전교관(傳敎官)이 교서를 낙성에게 주니, 낙성이 자리에서 나와 꿇어앉아 받아서 녹사(錄事)에게 주고 일좌 재지(一坐再至)하였다. 공조 낭관이 궤장을 받들고 서서 낙성에게 전하여 주니 낙성이 자리에서 나와 꿇어앉아 받아서 녹사에게 주고, 인해서 전문(箋文)을 올리고 사례하였다. 낙성 및 반열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이 네 번 절하였다. 상이 낙성과 반열에 참석한 대신(大臣)에게 전(殿)에 오르도록 명하였다. 상이 낙성에게 이르기를,
"경의 지위가 상상(上相)에 올랐고 나이는 80세에 이르렀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바 상서와 좋은 일이 모두 모여 결함이 없는 것이다. 오늘의 의식에 이르러서는 또한 국조(國朝) 이래로 대신에게는 드물게 있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경의 한 집안이나 한 사람만의 큰 복이며 공로이겠는가. 나는 생각하기를 아름다운 기상을 장식하고 화기를 인도하는 것이 오늘 이 거사에 의뢰함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하니, 낙성이 아뢰기를,
"신이 태평 성대에 태어나 늙어가다가 오늘에 이르러 이와 같이 세상에 드문 은혜와 영광을 입게 되었으니, 고맙고 황송한 심정을 말로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고사(故事)에, 대신에게 궤장을 내린 뒤에는 으레 조례(皁隷) 한 사람을 배정하였다. 호조에서는 쌀과 베를 적당하게 주고, 무릇 조회가 있으면 지팡이를 받들고 따르게 하여 입시할 때라 하더라도 역시 합문 밖에 이르도록 하라. 이는 바로 옛날에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게 하는 뜻인데 이번에도 모방하여 행하였는가?"
하니, 승지 이태영(李泰永)이 아뢰기를,
"옛날의 전례는 이와 같았지만 이번에는 미처 모방하여 행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낙성에게 빨리 물러나 연회를 받도록 명하고, 내주(內廚)에 명하여 선온(宣醞)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자 좌유선 윤득부(尹得孚)와 우유선 이성보(李城輔)를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발탁하였다. 이는 영의정 홍낙성이 ‘유선(諭善)의 직임은 전적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책임은 중대하고 직질은 가벼우니 함께 자급을 올려 강석(講席)의 체모를 높이도록 하소서.’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다.
4월 25일 을미
상이 선정(先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판(祠版)이 회덕(懷德)에서부터 사손(祀孫)인 송흠서(宋欽書)의 재령(載寧) 임소(任所)로 향하는데 길이 도성(都城) 아래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대사성에게 명하여 제생(諸生)을 거느리고 강가에서 영접하게 하고,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상이 승지 이조원(李肇源)에게 이르기를,
"선정(先正)의 사판(祠版)이 오늘 도성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기사년082)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선정이 효묘(孝廟)의 사부가 되어 일찍이 은우(恩遇)를 받았으며, 60세가 되기 전에 이미 대로(大老)라는 칭호를 받았고 세 조정을 두루 섬기면서 예우(禮遇)가 세상에 드물 정도였다. 대체로 선정의 병의(秉義)가 뛰어난 것과 출처(出處)가 올바른 데 대해서는 내가 감동한 바가 깊다. 1백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사상(祠像)이 서울에 들어온다고 하니, 내가 실로 서글픈 감회에 젖게 된다. 진신(搢紳)과 장보(章甫)로서 나가서 영접한 이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조원이 아뢰기를,
"가야 할 사람은 모두 갔습니다만, 호중(湖中)의 다사(多士)들은 상소문을 다듬어 복합(伏閤)하느라 나아가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상소는 무슨 일 때문인가 하문하자, 이조원이 아뢰기를,
"몇 해 전에 봉조하 김종수(金鍾秀)가 내각(內閣)에 보낸 글 가운데 ‘호서에 두루하였다.[遍于湖西]’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호서는 사대부(士大夫)가 많이 나는 곳인데 사대부가 된 자들이 이미 이런 내용을 들었으니, 한 번 분변하여 폭로하려는 것은 사리와 의분(義分)상 당연한 것인데, 한 달이 지나도록 복합하였지만 전달할 방법이 없는 상황입니다. 정원에서도 금지하는 것을 무릅쓰고 받들어 올릴 수도 없고 유생들 역시 상소문을 가지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억울해 하고 선비들의 기상은 꺾이고 있습니다. 본 사안이 금령(禁令)이기는 합니다만 이것은 많은 선비들이 스스로 변명하고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니 융통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경연에서 물러난 뒤에 봉장(封章)한 유생을 불러다 나의 뜻으로 대면하여 유시하기를 ‘그대들이 한 지방의 치욕을 씻으려고 이렇게 봉장하는 거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대들에게 어찌 치욕이 있겠는가. 시끄럽게 떠드는 자의 계산은 대신(大臣)을 흔들려는 데 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제풀에 일어났다가 제풀에 그치게 하고자 소장(疏章)에 대해서 금지하도록 했으니, 이는 바로 대신을 위해서이다. 내가 호서(湖西)를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보는데 그대들에게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누(累)가 되는 단서가 있다면 그대들의 봉장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즉시 본도의 인사들에게 환히 유시하였을 것이다. 이제 와서 이 소장을 바치도록 허락한다면 대신을 위하여 금령(禁令)을 마련한 본래의 의도가 아니니, 그대들은 물러가도록 하라.’고 하라."
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대호군 송환기(宋煥箕)의 기거를 묻고 서늘한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올라오도록 유시하고, 인해서 함께 오도록 했던 승지 서매수(徐邁修)는 되돌아오도록 명하였다.
원자(元子)의 우유선 이성보(李城輔)를 돈소(敦召)하였다.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 이수붕(李壽鵬)이 장계하기를,
"삼수부(三水府)와 후주진(厚州鎭)의 유방(留防)은 매년 5월에 어면(魚面)·신방(神方)·자작(自作)·강구(江口) 네 진보(鎭堡)의 변장(邊將)이 서로 번갈아가며 입방(入防)하며, 또 신갈파지(新波知)·구갈파지(舊波知) 두 진보의 사졸(士卒)이 돌아가면서 파수(把守)하는데, 그것은 대체로 후주를 오래도록 폐기한 데서 연유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사람을 모집하여 개간하도록 허락해 진(鎭)을 설치하고 관아를 건립하였으니, 유방과 파수 등의 절차는 해진(該鎭)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아마도 적합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서 복계(覆啓)하기를,
"금년부터 진장(鎭將)의 입방과 사졸의 파수는 아울러 혁파하고, 해진의 장(將)으로 하여금 오로지 관리하게 하여 소홀히 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영남(嶺南) 후조창(後漕倉)의 조선(漕船) 6척을 침몰하게 한 영운 도차사원(領運都差使員)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의강(李義綱) 등을 차등 있게 감죄(勘罪)하였다.
특별히 이가환(李家煥)을 도총부 도총관으로 임명하였다. 가환이 명을 받들지 않자 승정원에 명하여 문계(問啓)하게 하였는데, 이가환이 말하기를,
"신이 천고(千古)에 없었던 지우(知遇)로 천고에 없었던 제목(題目)을 만났으니 이는 바로 서로 상쇄되는 일반적인 이치인데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오직 영광스러운 길을 영원히 사절하여 남은 생애를 마치려 하였으니, 섶을 물리쳐 버리면 불은 저절로 꺼지는 법입니다. 이미 마음에 맹세하였고 또 묘소에서 맹세하였는데 재촉하는 하교가 내리니, 미혹되어 변통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무겁게 추고하도록 명하자 이가환이 마침내 숙명(肅命)하였다.
4월 26일 병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강화부 유수 임시철(林蓍喆)을 잡아다 추문하게 하였다. 상이 사알(司謁)에게 명하여 비변사의 서리를 합문 밖으로 불러 그를 시켜 사적인 편지로 강화부의 서리에게 알리게 하기를,
"전임 유수가 재임할 때에 내고 기부(內庫記簿)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게 했는데 전임 유수가 이미 체임되었으니, 신임 유수가 기부를 가지고 내일 와서 기다리도록 하라."
하니, 시철이 문수산성(文殊山城)에 이르러 치계하기를,
"사적인 통보는 행회(行會)와 다르며 또 인문(印文)이 없습니다. 이렇게 방수(防守)가 지극히 엄격한 때를 당하여 감히 갑자기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해당 수신(帥臣)에게 명하여 우선 관직 이름을 없애게 하고 선전관을 보내 그의 비밀 병부(兵符)를 빼앗고 잡아오게 하는 한편 문서는 경력(經歷)을 시켜 가지고 와서 대기하도록 하였다.
이의필(李義弼)을 강화부 유수로, 한용귀(韓用龜)를 이조 참의로, 조종현(趙宗鉉)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무예청(武藝廳)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4월 27일 정유
강화부 유수 이의필(李義弼)을 소견하였는데, 하직 인사 때문이었다.
응교 박재순(朴載淳), 수찬 김이교(金履喬)가 상소하여 임시철을 두둔하니, 상이 그 상소를 물리치고 하교하기를,
"그대들은 혼란스럽게 할 생각을 하는 무리들이라고 말할 만하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봉화 연기도 올리지 않고 개가 짖는 경보도 없는데, 평상시에도 명을 어겨 오던 임시철이 처음에는 겁이 나서 나는 듯이 건너갔다가 곧바로 의심을 일으켜 전진하지 않은 것이 세류(細柳)에서 군사를 정지시킨 주아부(周亞夫)와 어찌 절반이라도 비슷한 점이 있겠는가. 수신(守臣)이 오가는 데는 으레 인관(印關)이 없는 법이니, 그가 운운한 것은 단지 책임을 회피하려고 억지로 꾸며댄 말이나 어지럽히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요즈음 강화부 유수의 일에 관하여 관촌(官村)에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것으로 주장(周章)에 해당한다는 증표로 삼으니, 지금 또한 다스리지 않는 방법으로 다스려야 하겠지만, 두렵게 여기는 것은 기강(紀綱)과 군대의 규율이다. 국가에 이것이 없으면 호령을 시행할 수 없고 군대에 이것이 없으면 위엄을 수립할 수 없다. 그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고 사리에 어두움을 불쌍하게 여기는 생각으로 혹시라도 은미할 때에 방지하고 조짐이 일어날 때 두절한다는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으니, 빨리 그가 패용하고 있는 비밀 병부(兵符)를 빼앗고 잡아다 경기 감영으로 송치하도록 명하여 재계(齋戒)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라. 그대들 같이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있는 자들이 그를 베도록 청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의 결점을 엄폐하면서 제목 밖의 말로 꾸미고 임금을 속이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다니, 원소(原疏)는 되돌려주고 소를 받들어 올린 승지 이경명(李景溟)은 그의 직임을 체임하고 대궐 밖으로 쫓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박재순 등이 인의(引義)하여 곧장 나가니, 그들의 관직을 체임하도록 하였다.
4월 28일 무술
지경연사 이병정(李秉鼎)이 상소하기를,
"지금 삼가 옥당의 소에 대해 내린 비지(批旨)를 보고 충성하기를 바라는 구구한 견해가 있습니다. 아, 유신(儒臣)의 소가 아무리 인용한 비유가 타당함을 잃었고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캐보면 실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개납(開納)하는 은혜를 내려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지럽힐 것을 생각하는 무리[思亂之徒]’라는 네 글자를 평소에 예우하던 신하에게 가하셨으니, 이것이 어떻게 대성인의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으며 사물이 이르면 순응하는 도리에 결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취소하는 명을 특별히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오늘의 세상에서 이렇게 잘못을 바로잡아 구제하는 말은 보지 못했는데 경이 바로 그것을 하였다. 말은 간략하면서 뜻은 진지하여 경연(經筵)의 체모를 깊이 얻었으니, 아는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이미 아름답게 여겼으면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어제 소장에 대한 비답 가운데 ‘어지럽힐 것을 생각하는 무리[思亂之徒]’라고 한 말은 비록 감정이 격해서 발설하기는 하였지만 과연 보니 놀랍다. 승정원으로 하여금 지워버리도록 하라. 경에게는 안에서 내린 녹피(鹿皮) 1령(令)을 특별히 하사한다."
하였다.
대사헌 김재찬(金載瓚), 대사간 유강(柳焵) 등이 상소하여 임시철을 두둔하니, 상이 그 소를 물리치고 하교하기를,
"습속은 바로잡기가 어렵고 기강은 느슨해지다 보니, 무릇 어떤 사건에 관계됨이 있으면 동서 남북과 대소경중을 따질 것 없이 단락(段落)과 체모(體貌)를 울타리 밑에 팽개치고 사면(事面)을 쓸모없는 물건으로 여긴 채 취한 듯 꿈속인 듯 사리에 문란하면서도 하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신하는 신하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리를 모르고 있으니, 식견 있는 사람의 논의나 긴 탄식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누군들 그렇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어제 두 옥당 관원의 상소 내용에서 비유한 것은 이미 제목에 걸맞지 않았는데, 아침에 들여온 양사의 연차(聯箚)는 더욱 당소(堂疏)와는 달랐다. 금법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금법을 범한 것과 다름이 없으며 억탁(臆度)이 아니라 바로 망탁(妄度)인 것이다. 만일 불러다 보려고 하였다면 하필 수신(守臣)을 유인하여 올라오게 하기를 마치 피하여 우거한 모양을 하도록 한 연후에야 불러올 수 있겠는가. 이보다 앞서도 수신이 이렇게 왕래했는데 그때에는 한 가지 일도 갈등이 없었다. 조정의 신하들 또한 두루 거치고 여러 번 당했을 터인데 갑자기 이번에는 공공연하게 저와 같이 소란을 일으키니 이는 진실로 무슨 마음에서인가. 한번 웃어 넘기기에도 부족하다. 그렇지만 이미 관촌(官村)에 아무런 일이 없다는 속담을 제기하여 조서에다 말하고 단지 차본(箚本)만 돌려준 것은 대신(臺臣)으로 대우한 것이 아니니, 이 뜻을 연차한 양사로 하여금 알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9일 기해
차대(次對)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삼가 이조 판서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고 신은 공경하며 칭송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당의 소에서 주아부(周亞夫)의 일을 인용하였는데 말의 뜻이 전혀 닿지 않았다. 주아부는 곤외(閫外)의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명령도 받아들이지 않은 바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태평시대에 수신(守臣)이 심상하게 왕래하는 것이 어찌 이것과 비슷하겠는가. 논사(論思)하는 신하는 처벌하도록 주청하는 것이 가할 터인데 도리어 변명하며 비호하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네 글자에 대한 비답은 대체로 속습(俗習)을 바로잡으려고 발언하였는데, 당당한 옥서(玉署)의 신하를 두고 어지럽힐 것을 생각한다[思亂]고 하였으니 진실로 눈에 거슬릴 만하였다. 그래서 이조 판서의 한마디 말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대저 근래에 국가의 기강이 점차로 풀어지고 세속의 풍습이 점차로 어긋난 결과 무릇 이런 등류에 속하는 일에 대하여 체모를 돌아보지 않고 도리도 알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몇 해 전에는 대궐 문에다 머리를 부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리는 등의 놀랍고 사리에 어긋나는 거조가 있었는데, 한 번 처분하였지만 징창(懲創)되지 않았다. 그 뒤로 일이 있으면 번번이 다시 소란을 피워 조정에서의 규모는 하나도 표준이 없게 된 결과 오늘날 임시철(林蓍喆)의 사건이 있게 된 것이니, 만약 또 그대로 방치한다면 앞으로 닥칠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송선정(宋先正)과 같이 군신간에 잘 만난 처지에도 김홍욱(金弘郁)의 사건에 대하여 여러 해 동안 정성을 쏟은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는데, 오늘날에 선정도 갑자기 하지 않았던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만약 선정신(先正臣)이 성명의 세대에 태어났다면 그의 협찬(協贊)하고 광구(匡救)하는 효과에 어찌 시대를 바로잡고 습속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정이야 말할 것도 없고 만일 선정의 10분의 1만 되는 사람을 얻더라도 오히려 순박한 세상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며, 조정에서는 의뢰하여 공경하고 두려워할 것이고 사림(士林)은 그를 눈으로 보고 감동할 것이다. 그 사람을 사모하면서 볼 수 없기 때문에 며칠 전에 선정의 사판(祠版)이 도성으로 들어올 때에 내가 그의 유집(遺集)과 연보(年譜)를 가져다 해가 지도록 보면서 그 사람을 보고픈 생각을 대신하였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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