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7권, 정조 21년 1797년 7월

싸라리리 2025. 8. 12.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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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무진

지평 이명부(李明孚)가 상소하기를,
"평양 벽지도(碧只島)는 곧 세조조(世祖朝)의 적개 공신(敵愾功臣)108)  인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이 하사받은 땅입니다. 절벽을 다듬어 그 이름을 새기고 비를 세워 그 땅을 표시하여 일도(一島)의 주위 40리가 예전 그대로 있는 상황은 모든 사람이 같이 본 바입니다. 그런데 장말손의 후손이 영락하자 도민(島民)들이 함부로 사유화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연전에 장말손의 후예가 위에서 특별히 내려준 문서를 관가에 바침으로 인하여 본도에 조사를 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세상이 많이 변하여 의거할 만한 말이 없다는 이유로 방자하게 거짓으로 속여 주달하는가 하면 또 다시 절벽을 깎아버리고 비석을 물에 침몰시켜 그 자취를 없애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해당 도신(道臣)에게 멀리 유배시키는 법전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풍문으로 전해진 것을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조정에서 이미 결정한 일일 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전토(田土)를 떼어받았다는 등의 말을 어찌 대간의 소장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대각(臺閣)에 부끄러움을 끼친 것이 크다."
하고, 이어 그 직책을 해임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승지에게 이르기를,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대각이기 때문에 죄가 직을 해임하는 데에 그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비단을 하사받는 부끄러움이 시장에서 종아리 맞는 것보다 심하다.’는 것이다."
하였다.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7월 2일 기사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임어하여 태묘(太廟)와 영녕전(永寧殿)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승지에게 이르기를,
"오늘처럼 극심한 더위에 대향(大享)과 관련, 헌관(獻官)과 모든 집사(執事)에게 신칙하여 목욕 재계하고 분주히 주선하게 하려 하면서 내가 어찌 편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내 마땅히 이문원(摛文院)에 나가 재계하다가 제례(祭禮)가 이루어진 뒤에 대내(大內)로 돌아오겠다."
하고, 드디어 이문원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7월 3일 경오

상호군(上護軍) 홍양호(洪良浩)가 상소하기를,
"신이 임자년109)  에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벽지도(碧只島)를 측량하는 일로 궁차(宮差)와 장가(張哥) 성을 가진 사람이 내려오고 또 조사를 시행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전후의 문안(文案)을 가져다 조사해 보았더니, 이는 정덕(正德)110)   연간에 있었던 일로서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이나 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강희(康熙)111)   연간으로부터 오늘날 6, 7년 전에 이르기까지 장씨(張氏) 집 후예가 이익을 탐내는 무리를 끼고 상언(上言)하거나 혹은 정장(呈狀)한 것이 전후 20여 차례였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성조(列聖朝)의 처분이 지극히 엄절(嚴截)하여 누차 형배(刑配)를 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사실에 의거하여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판부(判付)를 삼가 받들어 궁감(宮監)과 진고(陳告)한 사람을 충군(充軍)하거나 형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도민(島民)들이 안도하여 마치 다시 살아나게 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오늘날에 이 일을 다시 거론하고 있으니, 참으로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열성조의 처분이 엄정하고 전후의 문안에 분명하게 실려 있는데 누가 감히 사의(私意)로 낮추었다 높였다 조종한단 말입니까.
절벽을 깎아버리고 비석을 물에 침몰시켰다는 등의 말은, 수백 년에 걸쳐 소송하던 문안에는 애당초 한 마디 말도 비친 적이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대간의 소장에 거론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터무니없이 얽어 무함하여 반드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려 하고 있으니 신이 비록 노폐(老廢)하긴 하였으나 어떻게 참고 견디겠습니까. 바라건대, 중한 죄를 내려 사람들의 말에 답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람들의 말을 따져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이 아니다. 대체로 연전에 처분하면서 사리를 송변(訟辨)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선조(先朝)께서 고(故) 옥당(玉堂) 홍중일(洪重一)의 상소에 대해 허가해 주시기도 하였으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7월 4일 신미

황해도 수군 절도사 신대영(申大偀)을 불러 보았는데, 하직 인사를 드린 때문이었다.

 

7월 7일 갑술

반궁(泮宮)에서 칠석제(七夕製)를 거행하였다.

 

예문관 제학 정민시(鄭民始)가 상소하기를,
"신은 현재 내각 제학(內閣提學)의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무릇 과시(科試)에 내각 제학은 양관(兩館)의 제학과 동참하여 성적을 고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내각지(內閣誌)》에 ‘문형(文衡)과 제학이 모두 없을 경우에는 내각 제학이 과시를 주재한다.’ 하였으니, 그 소임이 양관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두 제학을 겸한 것은 옛날에도 그 사례가 없으니, 바라건대 교체하여 주소서."
하니, 예문관 제학을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이병정(李秉鼎)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정관채(鄭觀采)가 "재덕진(在德鎭)에 보루를 옮기는 일을 3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윤 6월에 마쳤다."고 치계(馳啓)하니, 해당 만호(萬戶) 최제운(崔齊雲)에게 상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7월 8일 을해

사복시(司僕寺)가 아뢰기를,
"전곶(箭串)의 목장에 놓아먹인 말이 봄부터 여름까지는 잘 자랐는데, 며칠 전부터 홀연히 병들어 죽는 말이 많았습니다. 본사(本司)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혹 마질(馬疾)로 인하여 마조제(馬祖祭)112)  를 설행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예전의 사례에 의하여 설행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사복시 제조 이병모(李秉模)에게 하문하기를,
"동교(東郊)의 목장에 놓아 먹이는 말은 몇 필인가?"
하니, 병모가 대답하기를,
"4백여 필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박배(朴排)란 것이 점차 볼품없이 되어가고 있다. 【세속에서 목장에 나무를 심어 우리를 만들어서 말이 뛰쳐나가는 것을 막는 것을 일컬어 박배(朴排)라 한다.】  고 정승 상진(尙震)이 돌로 성을 쌓아 박배로 삼았는데 그 견고함이 도성(都城)과 같았다 하니, 옛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것은 굉원(宏遠)함이 이와 같았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그때 물의가 분분하였으나, 고 정승이 원대한 생각으로 그것을 단연코 실행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고금을 막론하고 일을 행하려 하면 어찌 갑론을박이 없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초(南草)113)  를 심은 전지에 모두 곡식을 심게 하면 몇 만 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병모가 아뢰기를,
"기름진 토지에 다 남초를 심었는데 서로(西路)가 더욱 심하니, 이것이 가장 애석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체 금지시킬 수는 없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남초를 금지하는 것은 술을 금지하는 것과는 다르니, 만일 금지하려 하면 어려울 바가 없을 듯합니다만, 신은 삼가 기수(氣數)와 상관이 있다고 여깁니다. 청(淸)나라 사람이 우리 나라에서 돌아갈 적에 군중(軍中)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처음에는 금지하였으나, 군사의 마음이 변함이 있음을 보고서는 드디어 그 명령을 철회하였다 합니다. 지금 천하에 통행하니, 어찌 기수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하다. 담배가 남방 해외의 나라에서 처음 나왔으나, 사실은 서양에서 온 것이다. 대체로 서방의 학문이 점차 중국에 행해지고 있으니, 어쩌면 서방의 풍기(風氣)가 늦게 열림으로 말미암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또 금지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일이 있다. 우리 나라의 서책에 기휘(忌諱)하는 문자가 없지 않은데, 연경(燕京)으로 가는 물건을 대부분 서책의 휴지로 싸므로 책을 인출(印出)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곧바로 휴지가 되어버리니, 이것은 오로지 휴지가 매매에 이롭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지금 만일 엄금하면 서책을 지키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이것은 통렬히 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비록 작은 일이긴 하나 또한 관계되는 바가 있으니 등한히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만 만일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 마지막에는 게을리 하며 이미 금하였다가 곧바로 중지하면 명령을 믿지 않는 탄식만 초래하게 될 것이다."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작고한 감사(監司) 윤탁연(尹卓然)을 지금 함흥(咸興) 창의사(彰義祠)에 추배(追配)114)  하려 합니다. 그런데 지금 도신(道臣)의 이문(移文)을 보건대, 누구를 주벽(主壁)으로 삼고 누구를 배식(配食)으로 삼아야 할지 확정하기가 어렵다 합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원래 제향(祭享)된 사람 중에도 병조 판서나 병조 참판에 증직(贈職)된 사람이 있으니 억지로 올리거나 내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마조제(馬祖祭)의 헌관(獻官)으로는 태복시(太僕寺)의 시임 당상(時任堂上)인 내승(內乘)이나 일찍이 당상(堂上) 내승을 지낸 사람을 실차(實差)하거나 예차(預差)하고, 전사관(典祀官)과 제집사(諸執事)도 본사(本司)의 관원으로 차정(差定)하는 것을 법식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민종현(閔鍾顯)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한풍(李漢豊)이 아뢰기를,
"응봉(鷹峰) 아래 후원(後苑)의 주맥(主脈)에 사태(沙汰)가 난 곳이 많이 있으니, 택일하여 보축(補築)토록 하소서."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고, 하교하기를,
"이 뒤로 궁성(宮城)·도성(都城)을 순심(巡審)하는 날에 호조·병조·공조의 당상과 형세를 간심(看審)하여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보현봉(普賢峰)을 보축하는 규식은 법의 뜻이 지극히 엄하다. 그런데 근래에 총융청(摠戎廳)에 소속시킨 뒤로는 도리어 경리청(經理廳)에서 관리하던 것만 못하다. 이 뒤로는 봄가을로 총융사(摠戎使)가 간심하여 초기하도록 하라. 가을철이 가까워 오니 사방의 산에 소나무를 심는 일을 묘당(廟堂)이 각영(各營)에 각별히 엄히 신칙하라. 동쪽으로 정릉(貞陵) 뒷봉우리, 서쪽으로 안현(鞍峴) 근처, 남쪽으로 부아현(負兒峴) 동쪽과 서쪽 지역은 대내(大內)가 굽어 보이는 곳이니 피를 심기도 하고 소나무를 심기도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이, 본도 순영(巡營)에 속한 아병(牙兵)의 군사훈련을 7년에 한 번씩 행할 일로 진달하자 품처(稟處)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아병을 창설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경기 백성들의 빈곤하고 쇠잔함이 더욱 심하며, 또 정병(正兵)과는 다름이 있으니, 금년부터 시작하여 7년에 한 번씩 조련하는 것으로 영구히 법식을 삼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10일 정축

검열(檢閱) 김이영(金履永)을 하양현(河陽縣)으로 귀양보냈다.
이때 가주서(假注書) 윤영의(尹永儀)에게 그대로 관청의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는데, 영의는 윤영희(尹永僖)의 형이었다. 그러자 김이영이 윤영의와 당후(堂后)115)  에서 같이 주선하고 싶지 않다 하여 소를 올리고 지레 나가버리니, 상이 전지를 내려 몹시 꾸짖고 호남(湖南) 연변에 유배(流配)하도록 명하였다가 곧바로 하양(河陽)으로 유배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윤영의와 윤영휘(尹永輝)는 영희와는 다르니 어찌 구애될 것이 있겠는가. 윤영희를 아직 그대로 버려두고 있는 것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다. 지금에 와서 이미 냉정을 되찾고 여론도 잠잠해졌으니, 먼저 그 아우를 임용하고 장차 그 형에게 미치게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윤영의와 윤영휘에게 특별히 이조 좌랑을 제수하고 윤영희는 전망(前望)으로 부교리를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중외(中外)에 금령을 거듭 내려 감히 상소하며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조 판서 김재찬(金載瓚)을 파면하였는데, 제도(諸道)의 포폄(褒貶)과 승강(陞降)을 무기력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정민시(鄭民始)를 이조 판서로,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11일 무인

희정당(熙政堂)에 거둥하여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 이조 판서 정민시, 참의 채홍원, 병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이다.】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심환지(沈煥之)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고, 중비(中批)로 이영(李𡎘)을 지평으로 삼았는데, 이영은 영남(嶺南) 사람이었다.

 

하교하였다.
"17년이 지난 뒤에 대정(大政)116)  을 하룻밤 앞두고 특별히 제수한 것은 더운 철을 당하여 수응(酬應)한 노고를 살펴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정도 이미 곡진히 이해했고 또 지금 군사에 대한 책임도 겸임하고 있어 또한 서로 구애되는 바가 있으니, 이조 판서 정민시의 체직을 허가한다."

 

7월 12일 기묘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교리 이희갑(李羲甲)이 아뢰기를,
"김이영(金履永)을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내리신 것부터가 이미 과중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윤영희(尹永僖)에게 관직(館職)을 특별히 제수하라고 하시다니 더욱 만만번 중도에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희에게 아직 죄를 적용하지 않은 것도 이미 크게 실형(失刑)하신 것입니다."
하였는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상이 자리에 앉도록 재촉하였다. 희갑이 결국 머뭇거리면서 다 아뢰지 못하고 물러났다.

 

강원도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장계를 올려, 흡곡(歙谷)·인제(麟蹄)·철원(鐵原)의 향교 및 서원의 위전(位田)에 대해 면세(免稅)를 청하니, 상이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에게 이르기를,
"궁방(宮房)과 향교 및 서원에서 걸핏하면 기준에 차지 못한 결전(結田)이 있다고 핑계대고 혹은 공한지(空閑地)라고 하면서 확인 증명을 받아내려고 하는가 하면 혹은 진황지(陳荒地)라고 하면서 새로 개간한 땅을 매입하곤 한다. 바야흐로 지금 백성들의 수효가 날로 번성해져서 전지가 모두 개간되었는데, 어찌 주인이 없는 토지가 있어 아직도 토지의 이익을 빠뜨림이 있겠는가. 그리고 대금을 지급했다고 하는 것도 어찌 다 믿겠는가. 지금 만일 일체 거짓으로 농간을 부려 간사한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제도(諸道)의 향교와 서원에서 떼달라고 청하지 않는 해가 없게 될 것이다. 호조의 원결(原結)117)  이 점차 줄어드는 것이 애당초 이러한 곳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하였다.

 

민종현(閔鍾顯)을 이조 판서로, 조종현(趙宗鉉)을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삼았다.

 

7월 13일 경진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판으로, 조종현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부교리 윤영희(尹永僖)의 직을 파면하였다. 영희가 소명(召命)을 어기자, 하교하기를,
"서유문(徐有聞)·심상규(沈象奎)와 대면하여 변론한 뒤에도 이미 장애됨이 없었고, 또 그 뒤에 별도로 사단이 있었으나, 이른바 사단이란 것도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으며 다만 털끝만한 어긋남이 나중에는 천 리 만큼 잘못된다는 지나친 염려로 세도(世道)를 위해 논의하지 말라는 과목으로 버려둔 지 오래되었다. 쾌히 안정된 뒤에 어찌 감히 소명이 있었는데도 문득 어긴단 말인가. 파직하라."
하였다.

 

7월 14일 신사

장령 박도상(朴道翔)이 상소하기를,
"신이 영남(嶺南)에 오래 있으면서 무릇 백성에게 관계되는 절실한 폐단과 관련하여 마음속으로 한두 가지 사적으로 근심하고 지나치게 헤아려 본 일이 없지 않은데, 신이 그것을 대강 진달하겠습니다.
첫째, 학술(學術)의 병통입니다. 조령(鳥嶺) 이남은 본디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이를테면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같은 이가 모두 성무(聖廡)118)  에 배향(配享)되었으니 울연(蔚然)히 성대하다고 할 만합니다. 근세 이래로 사숙(私淑)119)  하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언저리를 엿보는 사람조차도 드뭅니다. 간혹 이에 뜻을 두는 사람이 있어도 스스로 자신을 과대 평가하면서 한 세상을 낮추어 봅니다. 조령 이북은 비록 호걸의 인사가 있기는 하나, 독실히 행동하고 경서(經書)를 깊이 연구함에 이르러서는 그런 사람이 전혀 없으니 이는 한 세상을 속이는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 모든 도신(道臣)과 수령들은 반드시 사의(私意)가 없고 학식이 있는 자를 가려서 권면함에 뜻을 가하여 같이 화평한 지경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구제하고 바로잡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둘째는 서원(書院)의 폐단입니다. 국조(國朝)의 전례(典禮)에는 애당초 서원에 관한 정제(定制)가 없습니다. 대개 순흥(順興)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서원 창설의 시초인데 그 일은 《오례의(五禮儀)》가 이미 이루어진 뒤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례의》에는 본디 서원 향사(享祠)에 관한 예절이 언급되지 않았고, 《대전통편(大典通編)》 안에도 일정한 규정이 없습니다. 비록 조령 이남으로 말하더라도 한 고을 안에 혹 6, 7개의 서원을 설치하였으니 그것부터가 폐단이 없을 수가 없는데 제수(祭需) 역시 애초에 작정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희생(犧生)은 돼지[剛鬣]를 쓰고 밥은 2궤(簋)를 사용하여 대개 문묘(文廟) 무향(廡享)의 예절과 비등하게 하면서 봄과 가을에는 반드시 비폐(篚幣)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묘(文廟)의 석채(釋菜)로 말하더라도 다만 오성(五聖)120)  의 위패(位牌)에 폐백을 사용하고 십철(十哲)121)   이하에게는 폐백을 올리는 예절이 없습니다. 무릇 팔도의 서원에서 향사(享祀)하는 것을 보건대 8백 여 곳에서 봄과 가을로 올리는 포와 폐백을 계산하면 그 수효가 많습니다. 이러한 곳들은 조절하여 줄여야 할 것입니다. 예(禮)에 이르기를 ‘여러 제수(祭羞)를 마련할 때는 희생을 넘어서는 안 된다.’122)   하였습니다. 돼지를 쓸 경우에는 비록 우포(牛脯)를 쓰더라도 반드시 녹포(鹿脯)라고 해야 하는 것이니 이는 또한 희생을 넘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서원 제향의 희생에 돼지를 쓰면서도 문득 소 몇 마리를 잡아 선비들에게 공급하는 물자로 삼으니 경중(輕重)이 도치(倒置)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이 뒤로는 서원의 제향에 소를 잡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그리고 제향(祭享)에 필요한 포는 향교의 석채(釋菜) 때에 미리 준비하여 두었다가 제향에 임해 나누어 보내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또 한 서원의 노비의 수효가 혹 50, 60명에 이르기도 하고 혹 30, 40명에 이르기도 하는데, 간사한 백성이 역(役)을 피하여 간혹 투속(投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 또한 적당히 헤아려 수효를 정함으로써 바로잡아 구제하는 하나의 단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향교의 비중이 도리어 서원보다 못한 것입니다. 영남의 풍속은 서원을 중하게 여깁니다. 노사 숙유(老士宿儒)123)  가 원장(院長)으로 일컬어지면 본디 그러해야 할 것처럼 여기면서도 향교의 재임(齋任)은 가볍게 여겨 하지를 않습니다. 서원의 재사(齋舍)를 보면 크고 사치함이 혹 향교보다 두 배 또는 다섯 배나 됩니다. 매양 말하기를 ‘서원은 선비들이 힘을 보태주지만 향교는 조정에서 회감(會減)한다. 그리하여 향교를 수개(修改)하여 이안(移安)하고 환안(還安)할 때를 당할 적마다 만일 영문(營門)에서 장계로 청하여 향(香)과 축(祝)이 내려오는 일이 없으면 비록 새고 무너진 곳이 있어도 감히 마음대로 스스로 수개하지 못한다.’ 합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심한 경우에는 계단이 무너지고 울타리가 뽑히며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이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례(典禮)를 삼가 상고해 보건대, 문묘(文廟)의 석채(釋菜)에는 2품의 관원이 헌관(獻官)이 되고 이안(移安)·환안(還安)하는 사유(事由)를 고할 때에는 3품의 관원으로 헌관을 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열읍(列邑)의 석채에도 해당 고을 수령이 헌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수개하여 이안하고 환안할 때에도 번거롭게 향과 축을 청할 필요가 없이 각각 해당 고을로 하여금 매양 봄가을 석채 때에 고유(告由)를 겸해 행하게 하면서 무너지는 대로 보수하게 하면 회감(會減)의 비용도 줄일 수 있고 또한 무너지거나 비가 새는 근심도 없어질 듯 합니다.
넷째, 과장(科場)의 폐단입니다. 향시(鄕試)의 문란함이 서울보다 배나 더 심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동아리를 지어 여러 겹 에워싸고 시관(試官)을 구타하는가 하면 온갖 방법으로 엿보고 각 방면으로 청탁하여 문필의 재주가 없는 무리들이 과장 안으로 넘어 들어와서 오로지 소요를 일으키고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능사로 삼습니다. 만일 이 폐단을 금지하려면 미리 단속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삼가 우리 나라의 과거 제도를 상고해 보건대, 이 제도는 고려 광종(光宗) 때부터 창설되었는데, 그 뒤 규정을 정하여 5백 호마다 1인을 취하여 응시를 허락하였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1천 호의 고을에는 20인을 취해야 합니다. 주자(朱子)의 공거사의법(貢擧私議法)을 대략 모방하여 식년(式年)124)  마다 본 읍에서 대과(大科)는 삼경(三經) 중 하나를 배강(背講)하고 소과(小科)는 사서(四書) 중 하나를 배강하되, 자년(子年)에는 《주역(周易)》·《논어(論語)》를 강(講)하고 묘년(卯年)에는 《서전(書傳)》·《맹자(孟子)》를 강하고 오년(午年)에는 《시전(詩傳)》·《소학(小學)》을 강하게 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돌려가면서 하면 10년 사이에 선비된 사람이 모두 칠서(七書)를 배송(背誦)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과에는 부(賦)·표(表)·책(策)·논(論)을 시험보이고 소과에는 시(詩)·부(賦)·의의(義疑)를 시험보여 우등으로 입격(入格)한 사람을 가려 뽑아 1천 호마다 2인씩을 얻어 각 해당 고을의 예리(禮吏)로 하여금 거느리고 가서 시험보이는 고을에 부치게 하면, 불법으로 시험장에 들어가는 폐단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또한 인재를 얻는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환향(還餉)의 폐단입니다. 오늘날의 이른바 환향은 옛날의 이른바 조적(糶糴)125)  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납입을 독촉할 때에 만일 흉년을 만나면 10호의 민가에서 9호가 텅 비어 징수할 곳이 없으므로 이웃과 친족들을 침해하는 일이 어지럽게 아울러 일어납니다. 신이 영양 현감(英陽縣監)으로 있을 때에 곡부(穀簿) 안에 이른바 신유화전속(辛酉火田粟)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대개 신유년126)  에 어사가 마침 본읍을 지나갈 적에 귀속시킬 데가 없는 화전속(火田粟) 10섬을 환곡 장부에 부쳐둔 것인데 해마다 모곡(耗穀)을 받아온 것이 지금 50여 년에 이르러 7천 석이라는 많은 수량에 달했습니다. 모곡을 백성에게 받는 것이 이처럼 절제가 없으니, 이것을 크게 경장(更張)하지 않으면 백성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환향(還餉)을 상평창(常平倉)에서 조적하는 법으로 바꾸는 것은 단지 한 번 옮기는 사이에 있을 뿐이니, 지금 만일 변통하는 계책을 강구한다면 백성은 힘입는 바가 있고 국가는 재용이 넉넉해질 것입니다.
여섯째, 양역(良役)의 폐단입니다. 국초 오위(五衛)의 제도에는 애초에 포목을 징수하는 법이 없었고, 간혹 성을 축조하거나 변경에 수자리사는 역(役)과 관련하여 조정에서 그 양식을 싸가지고 먼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포목을 납입하고 대신 고용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포목을 징수하는 법이 생기게 된 까닭입니다. 그러나 실은 백성의 소원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위가 혁파되고 훈국(訓局)이 설치되자 양병(養兵)하는 수용(需用)을 전적으로 양포(良布)127)  에 의뢰하게 되었고, 5 군문(軍門)을 차례로 설치하면서 포목을 징수하는 것이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이른바 향군(鄕軍)은 자신이 앉고 일어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차를 모르고, 집에는 한 섬의 곡식이나 한 병의 장도 저축한 것이 없으니 어찌 곤궁하지 않겠으며 또한 도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모두 일체 혁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두 농사지으러 돌아가게 하고, 봄과 가을로 각도(各道)의 영진(營鎭)에서 널리 조련을 실시하여 그 상전(賞典)을 넉넉하게 하면, 10년이 못 되어 몇 만 명의 정병(精兵)을 얻을 것입니다.
일곱째, 호적의 폐단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호적에서 빠지는 습관은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나 영남이 더욱 심합니다. 금년이 지난해만 못하고 지금 법식이 지난 법식보다 못합니다. 신이 영양 현감으로 있을 적에 마침 흉년을 당했으므로 구획(區劃)하여 진정(賑政)을 베풀었습니다. 호적이 있는 사람은 환곡(還穀)을 나누어 먹을 수 있게 해 주고 호적이 없는 자는 바야흐로 진휼 대상에 속하게 하였는데, 기민(飢民)의 수효가 8백 명이나 되었으니 이 모두가 호적에 빠진 부류들이었습니다. 갑인년128)   가을에 이르러 또 을묘식(乙卯式)의 호적을 거두었더니 계축년129)  에 진휼해 준 백성 가운데 한 사람도 새로 입적(入籍)한 자가 없었습니다. 영양현 한 고을을 보면 다른 고을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식년(式年)의 호적을 거둘 때에 각읍에 신칙(申飭)하여 호적에서 빠지는 폐단이 없도록 하면, 호구를 늘리고 장정(壯丁)을 불리는 하나의 방도가 될 것입니다.
여덟째, 문교(文敎)가 떨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남은 가장 문헌의 고장으로 일컬어져서 글을 읽는 사람은 반드시 만 번을 표준으로 삼고 글을 짓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키와 같기를 목표로 하였습니다만, 근년 이래로는 독서하는 사람이 거의 드뭅니다. 국초에는 명현과 석학 대부분이 영남에서 나왔었습니다. 인재의 출생이 어찌 고금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도야(陶冶)하여 장려하고 발탁하는 방법상 지금이 옛날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조의 고사(故事)를 보면 통읍(通邑)과 대도(大都)에는 모두 교수(敎授)를 두었습니다. 지금 비록 옛날의 예를 갑자기 회복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각읍의 문관이나 음관 수령에게 반드시 교양(敎養)의 효과를 책임지워 문서를 처리하는 여가에 혹 경서(經書)의 뜻을 강론 확정하고 정문(程文)130)  을 가르치게 하면 문풍(文風)이 크게 떨치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관장(官長)이 면려하는 방도도 될 것입니다.
아홉째, 무예에 힘쓰지 않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영남의 무예는 서북(西北) 지방만 못하다.’ 합니다만, 하늘이 인재를 내는 데에 어찌 남북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다만 습상(習尙)과 풍기(風氣)가 같지 않은 바가 있을 뿐이니, 모두 수령된 자가 장려하여 권면하고 가르쳐 독려하지 못한 죄입니다. 지금 이후로 고을의 과시(課試)와 영문(營門)의 시험을 해마다 설행하고 수상(水上)의 조련과 육지의 조련을 때를 헤아려 행하게 하면 무위(武衛)를 떨칠 수 있어 남쪽 지방의 적의 침입을 영원히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째, 수령을 가려 임명하는 일입니다. 이상의 9개 조목은 어느 것이나 백성과 고을의 급선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만, 진실로 그 요체를 찾는다면 수령을 가려 임명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안으로는 경재(卿宰), 밖으로는 방백(方伯)이 각각 청렴하고 근신하며 신중하고 간약(簡約)한 사람으로 수령에 합당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궐원(闕員)이 생기는 대로 차임해 보내면 위의 항목 아홉 가지 일은 차례로 다 거행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는 모두 실정과 실사(實事)에 속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한 조목마다 사리를 논하여 품처(稟處)해서 실용에 있어서 하나의 도움으로 삼도록 하겠다."
하였다.

 

7월 15일 임오

하교하였다.
"식년(式年)의 향시(鄕試)를 경시관(京試官)과 도사(都事)가 나누어 시험 보이는 것은 과거 체재를 엄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도백(道伯)도 곧 사명을 봉행(奉行)하는 사람으로 한 지방의 사무를 들어 맡기지 아니한 것이 없는데, 3년에 한 차례 모이는 과거에만 유독 참여시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일 도백이 도사의 일을 행할 수 없다고 한다면, 국가의 큰 정사로 경계(經界)131)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데 재상(災傷)의 복심(覆審)이야말로 도사와 경차관의 일이건만 도백이 대행(代行)하는 것이 근래에 항례(恒例)가 되었다. 그리고 시험 보이는 일은 도를 안찰(按察)하는 신하에게 책임지울 수 없다면, 공도회(公都會)도 하나의 국가 시험인데, 감사가 또 도사의 일을 행하고 있다.
또 국가의 법전으로 말하면 식년의 문과와 무과 및 소과(小科) 초시(初試)는, 각도의 관찰사 및 절도사가 차원(差員)을 정하여 이름을 기록해서 시취(試取)한다고 운운하였으나, 경시관과 도사가 분장(分掌)하는 법은 《대전(大典)》 원편(原編)에 실려 있지도 않다. 하물며 시관이 내려갈 때와 시읍(試邑)을 윤번으로 정할 적에 갖가지 폐단이 소민(小民)에게 미치는 것이 하나뿐이 아님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먼저 도사가 시험을 관장하는 근래의 관례일 뿐인 일을 따라 반도(半道)의 유생을 감영(監營) 아래에 다 모아 도백이 시험을 주관하게 하면, 폐단이 저처럼 심한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고, 법을 봉행하는 것도 반드시 객관(客官)보다 나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양쪽이 모두 편리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식년 향시 때에 도사를 차임해 보내지 말고 도백과 경시관이 좌도·우도를 나누어 시취(試取)하고, 이렇게 시험하여 효과가 있으면 한 도 전체를 도백에게 위임하여도 안 될 것이 없다. 이것 역시 옛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옛 법을 따르는 한 가지 일이니 이렇게 분부하라.
또 북도(北道) 시소(試所)에서 평사(評事)는 남쪽 지방을 주관하고 도사는 북쪽 지방을 주관하는 것도 매우 융통성이 없는 일이라 할 만하다. 옛날에는 평사가 늘 북막(北幕)에 있었으므로 바꾸어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오늘날 객관(客官)이 되는 것이야 도사나 평사(評事)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뒤로는 평사는 북관(北關)의 시험을 관장하고 그대로 머물러 관시(關市)를 감독할 일로 규식(規式)을 삼도록 하라.
관동(關東)과 해서(海西)는 도백이 직접 시험에 관한 일을 담당해야 마땅한데, 충청 감사 역시 음관(蔭官)이라고 해서 구애받으면 안 될 것이다. 옛날에 대과(大科)의 고관(考官)을 임명할 때에 음관도 명을 받들어 시권(試券)을 고사(考査)한 격례(格例)가 있으니 아울러 이런 내용을 예조로 하여금 행회(行會)하도록 하라."

 

7월 16일 계미

예조 판서 조종현(趙宗鉉)의 직을 파면하였으니, 영릉(寧陵)132)   보토(補土)의 택일을 잘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시수(李時秀)를 대신 임명하였다.

 

제도(諸道)의 가을철 군사훈련을 정지하였다.

 

7월 17일 갑신

성균관이 아뢰기를,
"조흘강(照訖講)133)  을 최근 수삼 식년(式年) 이래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거하여 시관과 사관(史官)을 가려 차임한 뒤 기일에 앞서 실시한 것은 진실로 옛 법전을 따르고 선비들의 취향을 바르게 하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과거 규정을 보면 여전히 자세하지 못한 흠이 있습니다. 강을 열 때마다 시골의 유생은 미처 올라오지 못하고 서울의 유생은 서로 관망하기 때문에 강에 응하는 사람이 처음에는 아주 드물다가 임박해서야 이름을 등록하느라 법석을 떱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강석(講席)에 분잡하게 나아가고, 마침내는 과장 안으로 마구 들어가니 과장이 엄숙하지 못함이 참으로 이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달 20일 개강(開講) 때부터 이달 그믐까지는 먼저 서울에 있는 유생으로 하여금 강에 응하게 하고 이 기한이 지나면 절대로 강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소서. 그리고 시골 유생은 매번 그때를 당해서야 올라오는 일이 많은만큼 필시 이 기한에 대어 강에 응하기 어려울 것이니, 서울 유생이 강을 마친 뒤에 명을 받든 사관(史官)이 품지(稟旨)하여 우선 강을 철수하고, 8월 9일부터 다시 개강하되 또한 열흘 동안만 강에 응하도록 하소서. 이 밖에 서울 유생 가운데 혹 연고가 있어 시골에 내려갔다가 그믐날 이전에 미처 올라오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사유를 갖추어 본관(本館)에 단자(單子)를 올리면 빙고(憑考)하여 강을 허락하게 하소서. 이런 내용으로 과조(科條)를 엄히 세워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8일 을유

장령 정최성(鄭㝡成)이 상소하기를,
"청양 현감(靑陽縣監) 황도원(黃道源)은 살펴 깨닫는 바가 전혀 없고 간사한 아전 2인이 마음대로 농간을 부리고 있으므로 고을에 현감 셋이 있다는 말까지 돌고 있습니다. 부여 현감(扶餘縣監) 한백원(韓百源)은 옛날의 환자곡(還子穀)을 거두어들일 때에 해당 아전에게 속임을 당하여 구환(舊還)134)   장부를 잃어버렸다고 일컫고는 납입하지 아니한 것과 이미 납입한 것을 구분하지 않고 호구를 계산하여 두루 징수하여 아전의 개인 주머니에 다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흥해 군수(興海郡守) 윤홍심(尹弘心)은 일찍이 형조의 낭관을 지냈는데 그때 본군의 백성이 와서 소송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때에 이미 송사하는 사람이 재산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부임하자마자 다시 소송하도록 권하여 마침내 그의 재산을 속공(屬公)135)  한다고 핑계하고 자기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금년 봄에 격쟁(擊錚)136)  하는 일이 있게 되어 본군을 사찰하게 되어서는 흐지부지 미봉하고 그대로 덮어버렸습니다. 또 한 토반(土班) 중에 재산이 조금 있는 자에 대해서 오래된 일을 제기하면서 옥사를 일으킨다는 말로 위협하고는 몰래 관리를 시켜 중간에서 조종하게 한 뒤 마침내 천금의 뇌물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황도원·한백원은 모두 먼저 파면한 뒤에 잡아들이고, 윤홍심은 장오(贓汚)의 율(律)로 논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외읍(外邑)에서 상납할 때에 경사(京司)의 아전과 하인들이 조종하여 마구 침해하는 것은 본디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그런데 금년 어영청(御營廳)의 보미(保米)를 수납할 때에 해당 향랑(餉郞)137)  이 일체 아전의 말을 따라 마음대로 때리고 마구 거두어들이게 하면서 섬의 양(量)을 과다하게 받아들였으므로 원망과 비방이 많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해당 담당 낭관은 조사해 내어 중죄로 처분하고, 단속하지 못한 해당 대장은 또한 추고(推考)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일전에 올린 헌대(憲臺) 이명부(李明孚)의 소는 참으로 놀랍고 망령됩니다. 그가 논한 벽지도(碧只島)의 일은 훈신(勳臣)의 후예를 구제한다고 빙자하여 공공연히 백성의 전지를 빼앗을 계획을 멋대로 한 것이었으므로 사방에 웃음거리로 전파되고 대각(臺閣)에 부끄러움을 끼쳤습니다. 체직이나 해임하는 가벼운 처분으로는 경계의 뜻을 보일 수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전 지평 이명부에게 속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는 법전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오랫동안 여러 관원이 서로 잘못을 규계(規戒)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그대가 상소하여 논하였으니 지극히 가상하다. 황도원·한백원의 일은 도신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장계로 아뢰도록 하라. 윤홍심의 일은, 뇌물을 거두어들이고 마음대로 법을 농락한 정상이 진실로 풍문에 전하는 바와 같다면, 그 죄가 어느 죄에 해당하겠는가. 전에 고을 백성이 징을 울려 호소한 일이 있었으니, 그러한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대로 시행하되 또한 도신으로 하여금 엄히 사실을 조사하여 장계로 아뢰도록 하라.
어영청의 향색 낭관(餉色郞官)의 일은, 연전에 신칙한 전교는 어리석은 지아비도 아는 바인데, 차마 조관(朝官)으로서 오늘날에 매를 치며 마구 거두어들이다니 그지없이 형편없는 일이다. 그대로 시행하되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히 가두어 놓고 구초(口招)를 받도록 하라. 그리고 같이 악한 짓을 한 아전이나 하인들은 해조(該曹)에 회부하여 끝까지 심문해서 보고하도록 하라. 해당 대장은 추고(推考)하는 것만으로는 가벼우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사문(査問)하여 살피지 못한 곡절을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이명부의 일은, 시골에 살아 생소한 소치이기는 하나, 그 자취를 논하면 책비(責備)138)  의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파직하라."
하였다.

 

7월 19일 병술

강계 부사(江界府使) 유의(柳誼)가 하직 인사를 하였다. 유의가 홍주 목사(洪州牧使)에서 옮겨 제수되었으므로 주상이 불러 보고 남쪽 지방 고을의 민정(民情)을 하문하였다. 유의가 아뢰기를,
"경군문(京軍門)이 보미(保米)를, 만일 풍작이 들지 않은 해에도 한결같이 수납을 독촉한다면 춘궁기에 백성들의 형편이 불쌍하기만 합니다. 이 뒤로 이러한 해에는 가을 곡식이 익기를 기다려 납입하도록 하면 백성의 힘이 거의 펴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보미군(保米軍)이 불쌍한 것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금년에 특별히 조절하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이 뒤로는 본도에서 흉작의 해를 만나면 등급을 나누어 장계하되, 반드시 재난이 심한 곳의 보미군에 대해 정퇴(停退)하거나 혹은 대신 납입하게 하거나 간에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호남도 호서(湖西)의 예에 의하여 하라. 그러나 이 정책은 속담에 말하는 ‘새 발의 피[鳥足血]’라는 것과 ‘언 발에 오줌누기[凍足溺]’라는 것이니, 어찌 그 근본을 구제하는 정책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영청의 보미(保米) 납부를 혁파하지 않으면 그 밖의 것은 모두 구차한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양도(兩道)의 도신으로 하여금 각별히 수납할 때에 신칙하고 상납한 뒤에 살피도록 하여 근신하지 않는 수령과 해당 군영은 사유를 갖추어 장계로 아뢰도록 하라. 이 분부 내용을 벽에 써서 주첩(柱帖)을 대신한 고사(故事)139)  를 우러러 계술(繼述)하여 서울과 지방의 근태(勤怠) 상황을 고사(考査)하려 한다."
하였다. 유의가 또 아뢰기를,
"군정(軍丁)이 책을 출간하는 이외에 혹 비국 및 감영에서 새로 창안한 보군(保軍) 등 각종 명색이 있으니 마땅히 한 번 바로잡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역(良役)의 실제 총수야말로 선조(先朝)에서 반포한 금석 같은 엄중한 법령이고 보면, 근래에 잡된 명색을 꺼림 없이 증가하여 소민(小民)을 날로 곤궁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어찌 몹시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먼저 경기 지방부터 시험삼아 유념해 도태시켜 보고 싶다. 그 뒤에 나왔으나 그대로 두지 않을 수 없는 것과 전에 있었으나 도태해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과외(科外)로 마구 설치한 곳에 관심을 갖고 헤아리게 하라. 그러나 아직은 거행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는데, 이 밖의 제도(諸道)는 아직 아울러 거행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도리어 백성의 소요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령 아래에서 방편으로 면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야 또 어찌 반드시 금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묘당으로 하여금 알려서 각자 조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한풍(李漢豊)은 충주목(忠州牧)으로 유배하고, 향색랑(餉色郞) 조제민(趙濟民)은 엄히 곤장을 쳐서 강진현(康津縣)에 충군(充軍)하고, 도제조 김이소(金履素)는 파직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어영청의 군보미(軍保米)와 군보포(軍保布)를 지나치게 거둔 곡절에 대해 조사해 물었더니, 지나치게 거둔 것이 확실하고 매를 때린 것이 낭자합니다. 해당 대장 이한풍에게 삭직(削職)하는 법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군영의 보미와 보포의 법을 혁파하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는가. 매양 밤중에 이것을 생각하면 날씨가 덥지 않아도 열이 난다. 못내 잊혀지지 않는 한 생각은 오직 폐단을 바로잡는[矯弊] 두 글자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백성이란 함께 성공을 즐길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같이 의논할 수는 없으니, 마음속으로 계획하고 있는 것이 아직은 한가한 생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데도 끝내 폐단을 조금이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면 군민(軍民)을 위해 포목의 필수(疋數)를 줄이고 역(役)을 면제한 선조(先朝)의 성스러운 뜻을 우러러 체득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혹 먼저 심한 것을 도태하는 방도로서 너무 형편없는 습속을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그런데 연전에 대신이 조목별로 거론했을 때 조사(措辭)한 비지(批旨)의 먹물도 채 마르기 전에 또 이번과 같이 범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마땅히 어영청을 혁파하여 훈국(訓局)에 소속시켜야 할지 혹은 병조에 소속시켜야 할지 우선 참작해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이 장신(將臣)은 약간 재물에 청렴하고 법을 지키는 것으로 이름을 얻은 자인데도 금지하지 못하였으니,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이 이미 드러난 상황에서 만일 중한 법으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 백성에게 사죄하겠는가. 해당 장신 이한풍을 충주 지역에 찬배(竄配)하여 한편으로는 왕의 말을 신용 있게 하고 한편으로는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그리고 어영청에 소속된 사람들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형추(刑推)하여 조율(照律)하도록 하라. 이와 함께 본사(本司)에서 이 비답을 낱낱이 들어 보미(保米)·보포(保布)를 납입해야 할 제도(諸道)에 알리도록 하라. 그리고 이 뒤로는 병조 이하 각 아문과 각 영문(營門)에서 과목(科目) 이외에 강제로 징수하거나 법으로 정한 이외에 지나치게 형벌하는 자도 본사에서 그 간사함을 적발하여 발각되는 대로 즉시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어영청 향색랑 조제민(趙濟民)의 공초(供招)를 가지고 아뢰니, 병조 판서에게 회부하여 엄한 곤장 30대를 쳐서 삼남(三南)의 가장 먼 지방에 충군(充軍)하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경영(京營)에 도제조를 설치하여 대체(大體)를 관장하게 한 것은 곧 옛날 정승에게 일을 시켰던 뜻에서 나온 것이다. 명분을 따져 묻고 실적을 책임지우는 것은 일반 관원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대신에게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대간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해당 영의 과목 이외로 징수한 것과 법으로 정한 이외로 형벌을 행한 것이 묘당(廟堂)의 사주(査奏)에 오르기에 이르러 장신이 변방에 찬배되고 낭관이 곤장을 맞고 찬배되었으니, 도제조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과 관련된 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어영청 도제조 김이소(金履素)를 파직하라."
하였다.

 

조심태(趙心泰)를 어영 대장으로, 서유린(徐有隣)을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로, 서정수(徐鼎修)를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근래 아첨하는 세태 속에서 능히 백성의 고통으로써 상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간언(諫言)을 하게 하고 후일을 장려하는 도리로 볼 때 마땅히 격려하는 뜻을 보여야 한다. 장령 정최성(鄭㝡成)에게 표피(豹皮) 1벌을 하사하라. 경군문(京軍門)이 죄를 범함이 이와 같은데도 이제와서야 겨우 한 마디 간언이 있었으니 외읍 수령의 탐학(貪虐)을 징치하는 정사를 누가 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 책임이 돌아보건대 이목(耳目)과 같은 간관(諫官)에게 있지 않겠는가. 드러나는 대로 탄핵하여 진작시키는 데에 일조가 되게 할 일로 양사(兩司)에 알려주도록 하라. 도내에 탐욕스러운 수령이 있는데도 논열(論列)하지 못한다면 도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에 이 전교를 베껴 반포하여 거듭 훈계하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권엄(權𧟓)의 관직을 삭제하였는데, 살옥(殺獄)을 잘못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조상진(趙尙鎭)을 대신 임명하였다.

 

7월 20일 정해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예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여덟 군데 교외의 제단(祭壇)을 4계절 첫 달마다 본조(本曹)의 낭관을 보내어 간심(看審)하는 것이 곧 정식(定式)인데, 마조단(馬祖壇)에 대해서도 똑같이 간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황승원(黃昇源)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와 금천(金川)의 경계가 접한 곳에 수룡산(秀龍山)이 있는데 길이와 너비 그리고 그 둘레가 극히 요원(遼遠)하고 위에는 열 곳의 험한 고개가 있으니 대개 근기(近畿)의 큰 요새지라고 할 것입니다. 영(嶺) 이남은 백치 첨사(白峙僉使)로 하여금 산림 보호를 관장하게 하되 신의 부(府)에서 근만(勤慢)을 고찰하고, 영 이북은 금천 군수(金川郡守)로 하여금 산림 보호를 관장하게 하되 해도(該道)의 병영(兵營)에서 구관(句管)하여 검칙(檢飭)하게 하면 그런대로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 서정수(徐鼎修)가 병을 핑계대고 명을 받들지 않자 파직하고 홍억(洪檍)을 대신 임명하였다. 남공철(南公轍)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주자소(鑄字所)에서 《오륜행실(五倫行實)》을 인쇄하여 올렸다.
세종(世宗) 때에 집현전(集賢殿)의 제신(諸臣)에게 명하여 고금의 전기(傳記)를 수집 열람하여 효자·충신·열녀로서 행실이 특출한 자 1백여 인을 뽑은 뒤 앞에 그림을 그리고 뒤에 사실을 기록하게 하고 이를 간인(刊印)해서 중외에 반포하여 풍교(風敎)를 돕게 하였으니, 오늘날 전하는 《삼강행실》이 이것이다. 중종(中宗) 때에 김안국(金安國)이 다시 역대 제현(諸賢) 중에 장유(長幼)간에 처신한 것과 붕우간에 교제한 것이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 47인을 취하여 사실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리고 찬(讚)을 지어 《삼강행실》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였으니, 오늘날 전하는 《이륜행실(二倫行實)》이 이것이다.
상이 이미 《향례합편(鄕禮合編)》을 반포하고 나서 또 각신(閣臣) 심상규(沈象奎) 등에게 명하여 《삼강행실》과 《이륜행실》 두 서적을 가져다가 합하여 바로잡고 증정(證訂)하고 언해(諺解)하여 이름하기를 《오륜행실》이라 하였다. 그리고 주자소에 명하여 활자로 인쇄해서 널리 반포하게 함으로써 《향례(鄕禮)》의 우익(羽翼)이 되게 하였다. 그런데 효자류(孝子類)에서 곽거(郭巨)140)   한 조목을 특명으로 삭제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주자(朱子)가 문인에게 경계하여 등유(鄧攸)141)  의 일을 《소학(小學)》에 상세히 기록하지 못하게 한 유의(遺意)를 본받은 것이라고 한다.

 

편전(便殿)에서 재숙(齋宿)하였다.

 

7월 21일 무자

황단(皇壇)에 대한 망배례(望拜禮)를 춘당대(春塘臺)에서 거행하고, 승지와 예조 당상을 보내어 선무사(宣武祠)를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이때 선무사 구관 당상(句管堂上) 자리가 비었으므로 상이 대신에게 하문하기를,
"누가 합당한가?"
하니,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어영 대장(御營大將) 조심태(趙心泰)는 곧 고(故) 충신 조정익(趙廷翼)의 후손이니 구관 당상에 합당합니다."
하자, 마침내 조심태를 임명하였다. 이어 명하기를,
"앞으로 구관 당상은 황조(皇朝)142)   사람의 자손과 충량(忠良)한 사람의 자손으로서 문관·음관·무관의 종2품 이상 중에서 자리가 비는 대로 임명하되 묘당(廟堂)이 그것을 주관함으로써 그 소임이 높아지게 하라. 낭관은 병조의 일군 색낭청(一軍色郞廳)으로 예겸(例兼)하도록 하라."
하였다.

 

‘재조번방(再造藩邦)’이란 부제(賦題)로 황단 망배례에 참여한 유생(儒生)에게 제술(製述) 시험을 보여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7월 23일 경인

하교하였다.
"직분이 통할하는 것이었으므로 완전하게 하기를 요구하는 뜻에서 처벌했던 것이었다. 전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를 서용하고 본겸(本兼)하는 제사(諸司)의 직도 그대로 맡도록 하라."

 

이경일(李敬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25일 임진

이날은 곧 선희궁(宣禧宮)의 기일(忌日)이었다. 그래서 비변사가 일차빈대(日次賓對)에 모일 수 없게 되었다고 품하니, 하교하기를,
"경들이 재일(齋日)을 알아 관례에 따라 와서 모이지 아니하니 참으로 체례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정식(定式)이 없는 상태이고 보면 이 뒤에 대신 가운데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하겠지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관례대로 와서 모일 것이니 어찌 들쭉날쭉해지지 않겠는가. 선희궁 기신(忌辰) 재일의 정일(正日)은 3월 3일과 11월 12일에 좌재(坐齋)할 때의 관례에 따라 차대(次對)에 와서 모이지 말도록 하고, 이 비지(批旨)의 내용을 본사(本司)의 장고(掌故)로 마련하라.
주원(廚院)에서 소선(素膳)을 봉진(封進)하는 것은 국기(國忌)와 사기(私忌)의 구별이 있다. 국기에는 소선단자(素膳單子)를 정원(政院)에 올리는데, 이 뒤로는 선희궁 기신의 소선단자도 정원에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고(故)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의 모친 조씨(趙氏)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하교하였다.
"지금 듣건대 고 우상의 대부인(大夫人)이 죽었다고 한다. 만일 대신이 생존하였다면 은례(恩禮)를 어찌 소홀히 했겠는가. 정경 부인(貞敬夫人) 조씨의 집에 해조(該曹)로 하여금 부의(賻儀)를 넉넉하게 보내도록 하라. 또 고(故) 정승 윤시동은 일찍이 내각 제학(內閣提學)을 지냈으니 내각으로 하여금 생시에 상을 당한 예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대사성 남공철(南公轍)의 직을 파면하였다. 조흘강소(照訖講所)에 잡인이 마구 들어간 것에 대한 초기(草記)에, 주장관(主掌官)이 시관(試官)의 의사로 아뢴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무릇 품주(稟奏)해야 할 일이 있으면 사관(史官)이 서계(書啓)해야 한다. 시관 등의 경우는 곧 《통편(通編)》에 이른바 삼관(三館) 출신이라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어찌 감히 초기한단 말인가. 또 이미 응판관(應辦官)이 없으니, 어찌 주장관이 있겠는가. 일단 주장관이 있게 되면 또한 내공방(內工房)의 명색(名色)이 있어 공인(貢人)에게 요구하고 침탈하는 것이 마치 대과와 소과의 시소(試所)의 예와 같지 않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초기하도록 하라. 시소가 만일 엄하면 이처럼 마구 들어오는 일이 있겠는가. 당해 대사성을 파직하라."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조흘강소에 대해서 사문(査問)하였더니, 예전부터 조흘강을 할 때에는 사학(四學)에서 주관하고, 소용되는 물건은 사학의 훈도(訓導)가 주장관(主掌官)이라고 일컫고 예조에 첩정(牒呈)하여 각사(各司)에서 가져다가 썼으므로 초기에 주장관이라고 써넣었다 합니다. 내공방의 명색은 과연 없는데, 각사(各司)에 공문을 발송하는 것이 합하여 27개 처나 되고 혹 돈으로 해당 아전에게 방납(防納)143)  하게 하는 예도 있다 합니다.
대개 조흘 고강(照訖考講) 때에는 삼관(三館)이 주장하고 사관(史官)이 감시(監試)하는 것이 원래의 법전입니다. 따라서 혹 품주(稟奏)할 일이 있으면 사관이 서계(書啓)해야 하는데, 주장관의 잘못된 칭호를 답습하여 감히 시관의 뜻으로 초기를 써서 올린 것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당해 조흘강 삼소(三所)에 나아간 사관·시관 및 사학의 훈도를 아울러 잡아다 문초하여 엄히 처치하게 하소서. 해당 아전 등이 각사(各司)에 방납하고도 감히 잘못된 관례를 핑계하여 이처럼 공인(貢人)에게 넘겨 얼버무린 것은 더욱 지극히 놀랍습니다. 유사(攸司)로 하여금 치죄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6일 계사

어용겸(魚用謙)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하양현(河陽縣)에 정배된 죄인 김이영(金履永)을 방면하였다.

 

7월 27일 갑오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가 상소하여 인구(引咎)하며 견책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충주목(忠州牧)에 정배된 죄인 이한풍(李漢豊)을 방면하였다.

 

7월 29일 병신

박재순(朴載淳)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았는데, 자급을 올려준 것이었다. 조진관(趙鎭寬)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심환지(沈煥之)를 지경연사로 삼았다.

 

충청도 관찰사 한용화(韓用和)가 장계를 올리기를,
"솔밭이 가뭄 끝에 땅이 말라서 진공(進供)하는 송이(松茸)를 기한까지 봉진(封進)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금년은 비가 자주 내리지 않았으니 송이를 반드시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전에 이미 봉진한 것 이외에는 모두 봉진하지 말아 백성의 폐해를 덜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황해도 연해의 제읍(諸邑)에 큰비가 내려 벼가 상하고 표류되거나 깔린 민가가 9백 20여 호이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70여 인이었다. 도신(道臣)에게 유시(諭示)하여 물에 빠져 죽은 이가 있는 집에 대해서 휼전(恤典)을 별도로 시행하고 표류된 집에 대해서도 특별히 정착하도록 도와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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