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정묘
반궁(泮宮)에서 구일제(九日製)를 설행(設行)하였다.
9월 3일 기사
식년 문과와 무과의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9월 4일 경오
송환기(宋煥箕)를 이조 판서로,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판으로, 김재찬(金載瓚)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조종현(趙宗鉉)을 한성부 판윤으로, 김문순(金文淳)을 판의금부사로, 권유(權𥙿)를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대사헌 송환기가 현(縣)과 도(道)를 통해 상소하여 음식을 하사하라는 명을 사양하니, 【봉장(封章)은 이조 판서로 옮겨 제수되기 전에 있었다.】 비답하기를,
"월름(月廩)을 사양하기에 음식을 대신 보냈는데, 음식까지 사양하다니 또 어찌 그다지도 지나침이 심한가. 이조 판서의 새로운 명이 어찌 억지로 하기 어려운데 억지로 시킨 것이겠는가. 대신은 인재를 추천하여 임금을 섬기는 법인데, 경의 이름을 거론하며 천거 단자(單子)에 써서 올린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경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사(私)이고 대신을 공경하는 것은 공(公)이다. 여기에서 공사 구분이 판명되니 경중(輕重)을 혹시라도 서로 혼동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외방에 있는 유신(儒臣)으로서 이 직임을 담당한 이로는 경의 집 두 선정(先正)이 가장 오래된 경우이고, 근세에 초빙한 신하 중에 간혹 담당한 이가 있었으나, 또한 어찌 억지로 하기 어려운 바를 억지로 하여 번연(幡然)히 마음을 고쳐 출사(出仕)하도록 권하는 시기에 베푼 것이겠는가.
전의 일로 말미암아 본다면 고사(故事)를 전술(傳述)할 만하고 뒤의 일로 보더라도 정례(政例)178) 가 곧 그러하니, 경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물며 전조(銓曹)를 관장하기 전에도 오히려 세도(世道)로 책임지워 그 멀리하는 마음을 힘써 돌리기를 바라려 했었는데, 이미 전조를 맡았으니 어찌 더욱 이것으로 기대하지 않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곧바로 길에 올라 간절히 바라는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교리 안책(安策)이 상소하기를,
"신이 갑진년179) 겨울에 올린 한 소(疏)는 대중을 따라 논의에 참여한 데에 지나지 않는데, 지금 세월이 오래된 뒤에 의심과 비방을 많이 초래하여 전조(銓曹)의 벌을 입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마음이 온통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신을 체직하여 나라의 법을 엄하게 하소서.
신이 좌유선(左諭善) 윤득부(尹得孚)와는 구생(舅甥)180) 의 친척이 됩니다. 그러나 외가에서 생장하고 또한 일찍이 수학(受學)하였으므로 명분은 구생 사이이나 정의는 부자와 같아 본말(本末)과 대소(大小)의 일을 참여해 알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의 외숙부가 벼슬길에 나선 이후로 세상과 고립하여 왕래하고 상종한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교제를 그만두고 놀이를 끊어버리고 문을 닫고 분수를 지키며 산 지가 곧 몇 년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신의 상소 안의 한 구절의 말을 가지고 외숙부를 핍박하였다 하여 벌을 베푸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매우 뜻밖입니다."
하니, 사임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박규순(朴奎淳)을 승정원 우부승지로 삼았다. 【전의 의망(擬望)에 비지(批旨)를 내린 것이었다.】 박규순이 상소하기를,
"신이 연전에 우연히 승정원의 동료와 한가로이 수답(酬答)한 것은 남의 문장의 잘잘못을 논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몰래 엿듣고는 마침내 모함과 중상을 하는 자가 있게 되어 우리 성상께서 수고스럽게 분석하라는 분부를 내리시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좋은 지방으로 잠시 유배(流配)되었다가 곧바로 은혜로운 보직(補職)을 받게 되었으니, 신은 종신토록 송축할 따름입니다. 분의(分義)로 볼 때 감히 무릅쓰고 나갈 수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신의 직을 삭제해 주소서."
하니, 사임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여러 승지들이 박규순과는 동료가 되고 싶지 않다 하여 소명을 어기니, 박규순을 공조 참의로 옮겨 제수하였다.
9월 5일 신미
조종현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9월 6일 임신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치계(馳啓)하기를,
"이국(異國)의 배 1척이 동래(東萊) 용당포(龍塘浦) 앞바다에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배 안의 50인이 모두 머리를 땋아 늘였는데, 어떤 사람은 뒤로 드리우고 머리에 백전립(白氈笠)을 썼으며, 어떤 사람은 등(籐)으로 전립을 묶어 매었는데 모양새가 우리 나라의 전립(戰笠)과 같았습니다. 몸에는 석새[三升] 흑전의(黑氈衣)를 입었는데 모양새가 우리 나라의 협수(挾袖)와 같았으며 속에는 홑바지를 입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랗습니다. 역학(譯學)을 시켜 그 국호(國號) 및 표류해 오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한어(漢語)·청어(淸語)·왜어(倭語)·몽고어(蒙古語)를 모두 알지 못하였습니다. 붓을 주어 쓰게 하였더니 모양새가 구름과 산과 같은 그림을 그려 알 수 없었습니다. 배의 길이는 18파(把)이고, 너비는 7파이며 좌우 아래에 삼목(杉木) 판대기를 대고 모두 동철(銅鐵) 조각을 깔아 튼튼하고 정밀하게 하였으므로 물방울 하나 스며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 윤득규(尹得逵)가 치계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상우(鄭尙愚)의 정문(呈文)에 ‘용당포에 달려가서 표류해 온 사람을 보았더니 코는 높고 눈은 푸른 것이 서양(西洋) 사람인 듯하였다. 또 그 배에 실은 물건을 보니 곧 유리병·천리경(千里鏡)·무공은전(無孔銀錢)으로 모두 서양 물산이었다. 언어와 말소리는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고, 오직 「낭가사기(浪加沙其)」라는 네 글자가 나왔는데 이는 바로 왜어(倭語)로 장기도(長崎島)이니, 아마도 상선(商船)이 장기도부터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한 것 같다. 우리 나라 사람을 대하여 손으로 대마도(對馬島) 근처를 가리키면서 입으로 바람을 내고 있는데, 이는 순풍을 기다리는 뜻인 듯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풍이 불면 떠나보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9월 9일 을해
한성부 판윤 조종현(趙宗鉉)과 전 판윤 김문순(金文淳)을 포천현(抱川縣)으로 찬배(竄配)하고, 한성부 아윤(亞尹) 윤홍렬(尹弘烈)과 윤필병(尹弼秉) 및 전임 아윤 정동신(鄭東愼)의 직을 삭제하였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내년 장적(帳籍)의 단자(單子) 수합을 이미 마친 후에 해당 아전이 사람을 대신 시켜 한성부 밖 여염집에서 정서(淨書)하다가 우연히 실화(失火)하여 단자(單子) 1천 장이 소실되었으니, 다시 단자를 수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호적청(戶籍廳)의 설치도 또한 하나의 도감(都監)이니, 사체의 존엄함과 거행의 긴요함이 과연 어떠한가. 처음에는 어려움 없이 인습을 따르고 다시 어려움 없이 번거롭게 청하니 법강(法綱)이 비록 땅을 쓴 듯 없어졌다고 하나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호적청을 설치한 뒤의 판당(判堂)181) 은 경기의 군으로 찬배(竄配)하고 그 나머지 당상은 삭직(削職)하고 낭관과 아전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법에 비추어 감정(勘定)해서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정민시(鄭民始)를 공조 판서로, 변득양(邊得讓)을 판의금부사로, 김재찬(金載瓚)을 홍문관 제학으로, 조심태(趙心泰)를 한성부 판윤으로, 이성보(李城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간 윤장렬(尹長烈)이 상소하기를,
"신이 두려워지면서 마음이 오싹해지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무오년의 한효순(韓孝純)의 일과 경신년의 역적 조성(趙䃏)의 일입니다. 하나는 극히 흉악하고 부도(不道)한 정상이 정청(庭請)에서 24번 아뢰면서 다 드러나 철안(鐵案)이 이루어지고 단서(丹書)가 제대로 되어 있으며, 하나는 지극히 요사하고 아주 패악(悖惡)한 죄로서 장폐(杖斃)되고 처자(妻子)를 노비로 삼았으며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 뒤로 고금의 공의(公議)에 다시 두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 흉얼(凶孼)의 유종(遺種)들이 곧 감히 호소하는 것은 이변에 관계되는 일이니 의리상 막아 끊어버리기를 급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승지된 자가 곧 도리어 오래된 일이라 핑계대고 감히 현혹시킬 계책을 내어 어려움 없이 초계(抄啓)하여 요행의 희망을 도와주었으니, 출납(出納)을 신실하게 하는 승지의 분의가 본디 이러한 것입니까. 신의 의견으로는, 그때의 해방 승지를 견책하여 삭직하는 벌을 시행하는 것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승지에 관한 일은, 상언(上言)하거나 격쟁(擊錚)182) 하는 일을 엄금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람되게 행한 것과 비슷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에는 법령과 관계되어 참으로 죄줄 만한 경우도 있고, 원통하게 억울한 일을 당하여 참으로 불쌍히 여겨야 할 경우도 있는데, 이들을 동일한 사례로 처리하여 외람되다고 한다면 도리어 교왕(矯枉)의 탄식이 있게 될 것이다. 금번에 이 문제를 가지고 각방(各房)에 유시했고 그 뒤 회계(回啓)한 데에 따라 엄히 조율(照律)하게 했고 보면 그대가 논열(論列)한 바는 아마도 사실을 잘 모르고 한 것인 듯하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장릉(章陵)을 배알(拜謁)하고 돌아올 적에 해미(海美) 사람 한석조(韓錫朝)가 그 7대조 한효순(韓孝純)을 위하여, 교하(交河) 사람 조섬(趙暹)이 그 고조부 조성(趙䃏)을 위하여, 모두 상언(上言)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면서 관직을 회복하고 신설(伸雪)해 주기를 청하였다. 계하(啓下)되자, 의금부가 복주(覆奏)하기를,
"한석조와 조섬을 모두 형조에 회부하여 법에 비추어서 엄히 다스리소서."
하였다. 이때에 와서 윤장렬이, 정원이 관례에 따라 계하하였다 하여 승지를 논핵한 것인데, 승지는 곧 이기양(李基讓)이었다.
9월 10일 병자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영남과 호남에 흉년이 든 것과 관련하여 감면하고 구휼하는 정사를 제신(諸臣)에게 물으니, 유사 당상(有司堂上)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일전에 신이 면리(面里)로 등급을 나누는 것[分等]과 민호(民戶)를 뽑는 것[抄戶] 중에 어느 것이 편리한가에 대해 사적인 서한으로 양남(兩南)의 도신과 왕복하였는데, 모두 ‘초호하는 것이 비록 정상(精詳)한 것 같으나 대체로는 분등하는 것이 편리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제신에게 물으니,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은 처음에는 초호하는 것이 간편하고 요약(要約)적이라고 여겼는데, 그 뒤에 사정을 자세히 들으니 초호하는 법도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이는 근심이 없지 않아 백성이 혹 한쪽 구석을 향하여 혼자 탄식하는 일이 있다 하니 도리어 분등하는 것이 대체를 잃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아뢰기를,
"신이 경기 감사로 있을 때에 일찍이 분등의 법을 시행했는데, 이는 참으로 허실이 서로 뒤섞이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대개 각 백성의 전지가 반드시 모두 거주하는 지역에 있지 않습니다. 혹 몸은 재해가 매우 심한 면리에 있으나 토지는 꽤 충실한 곳에 있는 자도 있으며, 혹 몸은 꽤 충실한 면리에 있으나 토지는 재해가 매우 심한 곳에 있는 자도 있어, 부정과 거짓이 더욱 나오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서로 혼동되니, 초호하는 것이 정상한 것만 못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시수(李時秀)는 아뢰기를,
"분등하는 것이나 초호하는 것을 막론하고 모두 수령의 능하고 능하지 않음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적합한 사람을 얻어서 분등의 법을 시행한다면 초호하는 것도 그 안에 있습니다."
하고, 행 호군(行護軍) 서용보(徐龍輔)는 아뢰기를,
"신이 경기 감사로 있을 때에 일찍이 초호의 법을 시행하였더니, 분등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대개 분등하는 법은 간사한 폐단이 없지 않으니 초호의 법만 못한 듯합니다."
하고, 이서구는 아뢰기를,
"초호의 법도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권한이 아전과 향임(鄕任)에게 있어 그대로 두고 빼어버리는 것을 마음대로 하니 도리어 분등의 간편함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초호(抄戶)는 종국에 자질구레한 데에 가깝다. 수령에 적합한 사람을 얻으면 비록 읍 단위로 분등하더라도 어찌 잘 조처하는 방도가 없겠는가. 대체로 조정의 거조는 먼저 대체를 살펴보아야 할 따름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김화진이 아뢰기를,
"본조(本曹)에서 한 해 주조(鑄造)하는 본전(本錢)이 10만 냥인데, 경비의 부족으로 인하여 해마다 가져다 써서 지금은 남은 것이 없으니, 당장의 수용(需用)이 또한 매우 구차합니다. 관서(關西)의 세로 받은 소미(小米)183) 3만 석을 진휼청(賑恤廳)에 떼어주어 관리하게 하되, 곡물은 해도(該道)에 그대로 놔두고 모곡(耗穀)만 받아서 가져다 쓰게 하는 한편 그 가전(價錢)을 진휼청으로부터 본조에 이송(移送)케 하면 곡부(穀簿)도 감손의 염려가 없고 본전도 도로 충당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묻자,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호조의 곡물이든 진휼청의 곡물이든 그것이 공곡(公穀)임은 매한가지이고 돈으로 곡물을 바꿔도 별로 줄거나 늘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관서의 곡부가 근년에 매우 넉넉하지 않으므로 고 정승 김익(金熤)이 소미(小米)로 구획(區劃)하여 일체 시행하지 말자는 일로 연석(筵席)에서 아뢴 바가 있고, 일찍이 도신(道臣)을 지낸 바 있는 중신(重臣) 이명식(李命植)도 또한 이 일로써 누차 말하였습니다. 지금 서로 바꾼 뒤에 진휼청이 만일 혹 가져다 쓰기를 청한다면 호조가 곧바로 내어 파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는 별도로 엄히 신칙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지평 박재덕(朴載德)이 상소하기를,
"가평 군수(加平郡守) 정은상(鄭殷祥)은 오로지 백성을 못살게 구는 것만을 일삼습니다. 지난 겨울에 마음에 맞는 아전의 포조(逋租)184) 3백여 석을 촌리에 나누어 징수하여 온 경내가 소란스럽습니다. 서울에 있을 적에 형구(刑具)를 적간(摘奸)한다는 것을 엿보아 알고 밤낮으로 밀통(密通)하여 가(枷)185) 를 쪼개고 태(笞)를 바꾸었습니다. 교자(轎子)를 타는 것은 법금(法禁)이 지극히 엄한데 마음대로 범합니다.
고을에 사는 전 광양 현감(光陽縣監) 한사진(韓師鎭)이 새로 남쪽 고을로 부터 임기가 차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든 것을 이용하여 쌀과 돈으로 남녀 50여 명을 사 와서 종으로 삼았으니, 듣는 이치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본관(本官)의 도리로 볼 때 마땅히 본 고장으로 돌아가도록 권해야 했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 예사로 보고 사서 자기의 물건으로 만들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정은상은 어서 도배(徒配)의 벌을 시행하고, 한사진은 중하게 다스리는 동시에 그 종들은 모두 본도로 하여금 사실 조사를 벌인 뒤 본 고장으로 방환(放還)하게 함으로써 남쪽 지방 백성을 위로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정은상은 먼저 나처(拿處)하게 하고, 도신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장계로 아뢰도록 하라. 한사진의 일은, 진실로 이런 일이 있다면 그 죄가 어찌 중하게 다스리는 정도에 그칠 뿐이겠는가. 평상시에 압량(壓良)186) 하여도 그 율형(律刑)이 지극히 엄하다. 그런데 차마 흉년을 만난 민구(民口)를 강제로 사들여 종으로 삼은 수효가 5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이는 반드시 곡절이 있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두 도의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사관(査官)을 별도로 정하고 친히 엄한 사핵(査覈)을 집행하여 장계로 아뢰도록 하라. 한사진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히 신문하여 구초(口招)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한사진의 공초(供招)에 ‘광양 현감으로 있을 때에 마침 임자·계축년의 잇따른 흉년을 만나 도내에 떠돌아다니는 거지로서 그 몸을 스스로 파는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대가를 주고 샀는데, 수령의 직에서 갈리어 돌아올 적에 따라오기를 자원하는 자가 39명이었다.’ 하였습니다."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흉년에 기민(饑民)이 설사 스스로 그 몸을 팔려고 하였다 하더라도 명색이 관장(官長)으로 어찌 감히 그 이권을 이롭게 여겨 파는 대로 사들일 수 있단 말인가. 심상한 압량(壓良)에 비교해 볼 때 그 죄가 백 배 이상이다. 하물며 그 입으로 자수한 자가 39명이나 된다면 그 밖에 숨겨놓고 빠뜨린 것이 또 몇 십 명이 될지 모를 일이다. 우선 한 차례 형문(刑門)한 뒤에 해도(該道)의 원지(遠地)에 무기한 정배(定配)하고 금고(禁固)의 벌을 시행하라. 광양이 이와 같으니 다른 도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다. 어찌 묘당이 엄히 더 살펴 신칙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한사진은 의금부가 의논드린 데 따라 흥양현(興陽縣)에 유배하여 3년 간 금고(禁錮)하고, 정은상은 조사 결과 뜬소문으로 밝혀져 직첩을 지닌 채 방환되었다.
9월 11일 정축
공조 판서 정민시(鄭民始)가 상소하여 장용영(壯勇營)의 직책을 사양하니, 그 직임의 체직을 허락하였다. 김지묵(金持默)을 장용 대장으로, 조심태(趙心泰)를 총융사(摠戎使)로, 이한풍(李漢豊)을 어영 대장으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장용영 제조(壯勇營提調) 이시수(李時秀)를 체직하고 정민시(鄭民始)를 대신 임명하였다.
9월 12일 무인
이문원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수원(水原) 등 10개 읍의 유생(儒生)이 응제한 시문을 상이 직접 살펴보고 점수를 매겨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상이 화성(華城)으로부터 돌아와서 시(詩)·부(賦)·논(論)·명(銘)·송(頌)·찬(贊)의 제목 30통을 내리고, 행차가 지나간 고을의 수령에게 명하여 그 제목을 가지고 가서 시취(試取)하게 하되, 한 고을마다 3통씩 제목을 내걸고서 시권(詩券)을 거두어 올리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친히 성적을 고사(考査)하여 등차를 매겼는데 각 문체(文體)에서 수석을 차지한 자 가운데 생원·진사는 대과(大科)의 회시(會試)에 응시하도록 허락하고 유학은 감시(監試)의 회시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으며, 나머지 사람에게는 《어정오륜행실(御定五倫行實)》·《사기영선(史記英選)》·《육주약선(陸奏約選)》·《규장전운(奎章全韻)》 등의 책을 하사하였다. 또 수원 유수·광주 유수(廣州留守) 및 남양(南陽) 등 8개 고을의 수령에게 명하여 장교와 군졸에게 활쏘기와 포쏘기를 시험보여 4발을 명중시킨 사람은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고 3발 이상 명중시킨 사람은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고 나머지는 미곡을 하사하게 하였다.
9월 13일 기묘
선원전(璿源殿)에서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이정운(李鼎運)이, 9월 22일 탄일(誕日)의 진하 전문(進賀箋文)을 올려보내는 일로 치계(馳啓)하니, 회유하기를,
"즉위한 뒤로 탄일의 하례를 받은 적이 없으니, 제도(諸道)의 하전(賀箋)을 진하 전문(進賀箋文)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예라 할 것이다. 이는 곧 바로잡아야 하니, 이 뒤로는 ‘탄일 하전 상송(誕日賀箋上送)’으로 말을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5일 신사
선원전에 참배하고 발[簾]과 장막의 수개(修改)를 친히 살폈다. 상이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에게 이르기를,
"궐내의 공해(公廨)를 3년 간격으로 수리하는 것이 예전 관례인데, 지금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수리하지 않고 있다. 탁지(度支)의 저축에 혹 여유가 생겼는가?"
하니, 김화진이 아뢰기를,
"이밖에도 경비가 매우 많아서 남아 있는 저축은 없습니다만, 대체로 근래의 지용(支用)은 대부분 여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문원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상이 규장각 제학 정민시에게 이르기를,
"금년 양남(兩南)의 표재(俵災)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읍으로 분등(分等)하는 것이 편리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면리(面里)로 분등하는 것이 편리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초호(抄戶)하는 것이 편리하다.’ 하는데, 경은 어떻게 여기는가?"
하니, 정민시가 아뢰기를,
"초호(抄戶)와 분등(分等)을 막론하고 조정에서 급재(給災)하는 것은 원래 옛날 제도가 아닙니다. 지난 숙묘조(肅廟朝) 때 흉년에 은혜를 베푼 것은 대동미 1, 2두를 감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조(先朝) 때부터 비로소 급재(給災)의 이름이 있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점차 넓어져서 곧 상례(常例)가 되었습니다. 백성이 이미 비상한 은혜로 감사할 줄을 알지 못하고 또 아전이 따라서 뇌물을 받고 간사한 짓을 하여 국용(國用)만 소모하고 은혜는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것을 행한 지 이미 오래되어 파하려 해도 그렇게 안 되는데, 면리(面里)로 분등하는 것과 초호(抄戶)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조정에서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못됩니다.
비록 영남의 대동 면포(大同綿布) 중 절반을 돈으로 내게 하는 일로 말하더라도 1필의 면포를 반절로 자르기도 어려울 뿐더러 반으로 징수하는 돈에도 후전(後錢)이 붙고 있으니, 백성은 이미 두 가지 비용을 내고 아전은 두 가지 이익을 얻고 있는 형편입니다. 백성이 정밀한 면포를 바쳐도 반드시 퇴짜를 놓는데 아전이 대신 납입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거칠고 나쁜 것뿐입니다. 지금 각사(各司)에 저축한 면포는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또한 이른바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헛되이 국가의 비용만 소모한다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생각해 보건대 일도(一道)를 통틀어 돈과 면포를 각각 반씩 징수하는 것보다 차라리 좌·우도를 나누어 하나는 돈으로 하나는 면포로 하여 연차(年次)로 돌려가며 징수하도록 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정하면, 소민(小民)은 두 가지 비용이 없고 국가에 있어서도 손해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9월 16일 임오
이문원에 거둥하여 함흥(咸興)·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의 옷·폐백·향촉을 봉해 싸서 의식대로 친히 전하였다.
9월 17일 계미
이성보(李城輔)를 승정원 도승지로,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판으로, 이병정(李秉鼎)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전 대사헌 이성보가 현(縣)과 도(道)를 통하여 소를 올려 소명(召命)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도타이 부르는 것을 바로 서늘한 가을이 될 때까지 기다렸는데 지금은 서늘한 가을이 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때에 길을 나서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하다. 대사헌과 도승지에 차례로 제수하였던 것은 반드시 초치하고자 해서이니, 경은 모름지기 마음을 바꾸어 도승지의 소임에 숙배(肅拜)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8일 갑신
황해도의 재해를 입은 9개 읍에 보낸 위유 어사(慰諭御史) 여준영(呂駿永)이 장계를 올리기를,
"신이 장연(長淵)·송화(松禾)·풍천(豊川)·은율(殷栗)·장련(長連)·안악(安岳)·문화(文化)·신천(信川)·재령(載寧) 등의 고을에 두루 당도하여 백성을 위유(慰諭)하였더니, 가는 곳마다 호소하는 것 모두가 군포(軍布)를 돈으로만 받고, 환곡(還穀)은 기한을 물려주고, 재결(災結)의 숫자를 넉넉하게 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앙청(仰請)하는 자가 있으면 도신(道臣)이 스스로 허실(虛實)을 구별하여 논열(論列)해서 장계로 아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엄사(渰死)·압사(壓死)한 사람 및 표류하고 무너진 민호(民戶)의 환곡과 군포에 대해서는 이미 감면하거나 정지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는 재민(災民)에게 막대한 성은(聖恩)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위유(慰諭)할 즈음에 그 상태를 살피고 그 형세를 탐지하여 분등(分等)해서 거행할 소지로 삼았습니다. 엄사(渰死)·압사(壓死)한 민호로 말하면, 혹 면포는 있고 환곡(還穀)은 없는 경우도 있고, 혹 면포는 없고 환곡은 있는 경우도 있으며, 또 환곡과 면포가 함께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는 있는 대로 일체 모두 탕감해야 할 것입니다.
집이 표류되거나 무너진 민호와 자녀가 물에 빠져 죽거나 사태에 깔려 죽었으나 주호(主戶)가 생존한 경우에도 죽은 자의 많고 적음을 상고하고 그 집안 재력의 쇠잔함과 충실함을 살펴서 혹 전수(全數)를 감면하거나 혹은 반수를 감면해야 할 것입니다. 표류한 민호와 가옥이 무너진 민호 9백 23호를 초실(稍實)·지차(之次)·빈잔(貧殘)·우심(尤甚)의 4등으로 나누어 초실호(稍實戶)는 환곡의 5분의 1을 정퇴(停退)하고, 지차호(之次戶)는 환곡의 4분의 1을 정퇴하되, 환곡은 없고 신포(身布)만 있는 자는 내년 가을까지 정퇴하고, 빈잔호(貧殘戶)는 환곡의 3분의 1을 정퇴하고 신포는 감면하며, 우심호(尤甚戶)는 환곡의 절반을 정퇴하고 신포도 감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대체로 장연(長淵)은 산골의 물이 갑자기 불어 넘치고 암석이 무너져서 이따금 온 들판이 침몰되는 일이 있었으므로 밭과 논 할 것 없이 각 곡식이 다 녹아 없어졌습니다. 풍천(豊川)의 경우, 읍내의 조산평(造山坪)은 곧 한 고을의 옥토인데, 화장산(華藏山)·약산(藥山) 등의 산골 물에 침몰된 채 곧바로 수십 리를 내달았습니다. 은율현(殷栗縣)은 구월산(九月山) 아래에 있어 물이 매우 거세고 급한데, 은율현 남쪽의 두 방리(坊里)는 바로 그 물살의 기세를 당하여 30, 40리 사이에 모래와 돌이 무더기로 쌓였습니다. 장련(長連)은 구월산 아래에 있어 물살의 기세가 거세고 급하여 냇가 전지 중에 영원히 침몰된 곳이 10에 5, 6은 됩니다.
지금 재해를 입은 9개 읍에 그 재해의 우열(優劣)을 논하면, 장연·풍천·은율·장련 등 4개 읍이 심하며, 4개 읍 중에서도 은율과 장련이 더욱 심합니다. 대개 장연과 풍천은 우심한 지역에 속하기는 하나 지형이 꽤 넓어서 오히려 동쪽을 쪼개 서쪽을 때우는 방도가 있는 반면, 은율과 장련 두 고을은 백성의 일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안집(安集)시킬 방도를 강구하여 조목조목 열거해 아뢰게 하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명하여 빈대(賓對)를 앞당겨 정하게 하여 재해를 입은 고을의 부세를 견감(蠲減)하고 이재민을 구휼하는 은전(恩典)에 대해 물었다. 우의정 이병모가 복계(復啓)하기를,
"엄사(渰死)·압사(壓死)하거나 표류되고 무너진 민호(民戶)에 대해 등급을 나누어 부세를 감면하고 정퇴(停退)하는 것을 어사의 장청(狀請)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두 고을의 경우 만일 별도로 바로잡아 구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모양을 이룰 수 있겠는가.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의견과 논리를 갖추어 장계로 아뢰게 하라. 그런데 장계에 대한 회답을 내려보낸 뒤에 다시 혹 포기한 채 놔둔다면 어찌 진장(鎭長)이 힘을 써서 참으로 복구할 이치가 있겠는가. 영읍(營邑)의 신하가 만일 뜻을 다하려고만 한다면 수 년이 못되어 저절로 재해를 입기 전보다 나아지게 될 것이다. 민호를 안정시키고 토지를 도로 개간하는 일에 대해 관동(關東) 간성(杆城)의 사례에 의하여 겨울마다 한 책으로 수정(修正)해서 장계를 갖추어 아뢰도록 하라. 만일 삼가 이행하지 아니하여 어사에게 적발되면 당해 도신은 금고(禁錮)하고 수령은 잡아와서 장형(杖刑)을 가한 뒤 변방 먼 곳에 정배(定配)토록 하라."
하였다.
명하여 영남·호남·해서의 묵은 환곡은 모두 정봉(停捧)하게 하고, 경기의 강화·광주와 호서·관서·관북의 묵은 환곡은 근년의 조목만 거두어들이게 하였으니, 우의정 이병모의 말을 따른 것이다. 수원의 묵은 환곡은 논하지 말고, 북관의 묵은 환곡은 무술년 조목의 6천 석을 감면케 하였으니, 특지(特旨)였다.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이병모가 아뢰기를,
"경기·호서 이외의 분양마(分養馬)를 임시로 없앴습니다. 각 고을에서 말에게 먹이는 각 곡식을 매년 회감(會減)하는 것에 대해서는, 각 고을에서 앞서 경사(京司)에 보고하며 회감한 대로 하게 하되 본 사복시에서 편리한 대로 처리하게 한 뒤에야 뒷날 장애되는 일이 없을 수 있으며 또 지금 급히 쓸 밑천이 되겠습니다. 이를 각도에 알리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선혜청 당상 정민시가 아뢰기를,
"봉조하 이명식(李命植)이 본청의 당상으로 있을 때에 각 아문이 상진곡(常賑穀)을 가져다 쓰지 못하도록 소를 올린 뒤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여 시행을 허락하였으나 장애되는 사단이 없지 않습니다. 영남 대동미에서 관에서 지출할 것을 덜어내고 나면 남아 있는 저치미(儲置米)는 많아야 6천, 7천 석에 지나지 않는데 1년에 지출해야 할 저치미는 매양 1만 5천, 6천 석이나 되므로 해마다 상진모곡(常賑耗穀) 1만 석을 가져다 쓰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그런 규정을 정한 뒤로는 달리 변통할 방도가 없으므로 해도(該道)에 있는 균청미(均廳米) 및 군작미(軍作米)를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균청에서 관리하고 있는 곡식은 진곡(賑穀)에 비하여 사체가 더 중할 뿐만 아니라 원곡식의 수량도 이미 많지 않아 모곡(耗穀) 조도 1만 석이 되지 않으므로 원곡식과 함께 아울러 가져다 씁니다. 이대로 4, 5년을 지내고 나면 두 곡식 모두다 쓰고 남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니, 변통하는 방도를 세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아문은 가져다 쓰는 것을 엄히 막더라도 영남 저치미의 부족한 수량만은 상진모곡(常賑耗穀)을 가져다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우의정 이병모가 시행을 허락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한성부 판윤 조심태(趙心泰)가 아뢰기를,
"식년(式年)마다 백성의 숫자를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큰 정사입니다. 앞으로는 5부(部)·8로(路)의 장책(帳冊)을 다 마감한 뒤에 당상(堂上)들이 함께 모여 입고(入庫)하고, 인구조사 장부를 수정할 때에는 장책 입고 도록(帳冊入庫都錄)도 똑같이 입계(入啓)토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를 일정한 법식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판적(版籍)을 보관해 두는 일은 사체의 중대함이 식년(式年)마다 행하는 호적법(戶籍法)보다 더 중대한데, 전수(典守)하는 방도에 있어 전에는 그 소홀함이 극심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가 후미진 지역에 치우쳐 있어 고루함이 막심한데다가 습속의 고질적인 폐단으로 관리가 직무를 거행하지 않은 채 다만 하속(下屬)에게 맡겨버렸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이 뒤로는 경의 한성부와 탁지(度支)가 판적(版籍)을 보관해 둘 적에 엄중한 체모를 조금이라도 보존하여 이웃 나라의 비웃는 바가 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포천현(抱川縣)에 찬배(竄配)한 죄인 조종현(趙宗鉉)과 김문순(金文淳)을 석방하였다.
성정진(成鼎鎭)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헌납 정지원(丁志元)이 상소하기를,
"신이 북도의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에 오랜 세월 동안 보고 들은 바가 꽤 상세하여 일로(一路) 관방(關防)의 허실 및 도리(道里)의 형편을 대략 헤아린 바가 있으므로 감히 이것을 덧붙여 아룁니다.
우리 나라의 군사는 북도를 강함으로 삼고, 우리 나라의 관방(關防)은 북도를 튼튼함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북도 중에서도 육진(六鎭)과 삼수(三水)·갑산(甲山)은 가는 강줄기 하나만을 경계로 삼고 있어 가장 요충의 첫 지역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로 말하면 한 사람의 군졸도 장구히 있으면서 방어하는 자가 없고, 관방으로 말하면 공지(空地)에 사잇길의 첩경(捷徑)이 있으니, 국가에서 후일을 위해 염려하는 방법이 어찌 이처럼 소략하단 말입니까.
북도의 10개 고을에서 가장 믿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곧 친기위(親騎衛) 1천 인인데, 큰 고을은 1백여 명, 작은 고을은 50명씩 남북으로 서로 천 리나 떨어져 있는 지역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성화처럼 바람처럼 달려가서 일제히 기일 안에 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른바 친기위도 그 불시의 소용에 힘이 된다고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군오(軍伍)의 퇴폐함은 삼남(三南)보다 심하고 무학(武學)의 잔열(殘劣)함은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10개 주와 삼수·갑산을 막론하고 아침저녁으로 관부(官府)를 지키고 있는 자는 약간의 이례(吏隷)와 수삼 명의 장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만일 홀온(忽溫)이 멧돼지처럼 돌격해오고 탕개(湯介)가 벌떼처럼 이르러 대낮에 빈 성을 횡행하며 짓밟을 경우 성첩(城堞)을 지키며 막을 자가 누구이겠으며 대오를 벌여놓고 대적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백산(白山) 아래에 천평(天坪)이라는 곳이 있는데, 곧 옛날에 이른바 대막(大漠)이라는 곳이라 합니다. 동쪽으로는 갑산(甲山)의 허항(虛項)과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무산(茂山)의 장파(長坡)와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보다(寶多)의 완항(緩項)과 통하는데, 완항령(緩項嶺) 아래는 곧 감평(甘坪)이 되고 감평의 동남쪽은 곧 배성포(排星浦)입니다. 그런데 장파와 무산은 공지(空地)이고 완항과 감평은 곧 길주(吉州)·갑산(甲山) 사이의 공지이고 배성포는 곧 북청(北靑)·함흥(咸興) 사이의 공지입니다.
장파에서 감평까지는 겨우 1백여 리에 불과합니다. 대체로 천평(天坪)에서 영탑(寧塔)·오랄(烏喇)까지의 거리는 모두 4, 5일 길도 되지 않으며, 선성(船城)·애원(艾源)과는 닭소리·개소리가 서로 들리는 인가가 이어졌고, 장파·천평도 지척 사이에 서로 이어진 곳입니다. 배성포에서부터 이따금 인가가 나타나는데 가닥 사잇길이 곧바로 안변(安邊)으로 뻗치어 지름길도 매우 가까울 뿐더러 험준한 요새도 아니니, 저들이 만약 영탑(寧塔)에서 출발하여 천평에서 쉬고 사람마다 두서너 되의 마른 양식을 싸가지고 3일 정도 말을 달리면 안변으로 곧장 쳐들어 올 수가 있습니다. 안변 이북에 용감한 군사가 있고 금성탕지(金城湯池)처럼 견고한 성지(城池)가 있다 하더라도 승패의 운수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 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북관(北關)의 10개 주(州)와 삼수·갑산·장진(長津)에 각각 부기위(附騎衛) 10개 번(番)을 설치하되, 각번에 장수 하나를 두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또 별장(別將) 1인이 10개 번을 모두 통솔하고 날을 배정하여 돌려가며 당직을 서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봄가을 도시(都試)의 사방(射放)187) 출신들을 겨울과 여름의 대정(大政)에서 장기 근무자로 녹용(錄用)하면 벼슬이 아주 귀한 지방에서 공명(功名)을 매우 부러워하는 무리가 반드시 아래옷을 찢어 바지를 동여매고 흔연히 행장을 서둘러 꾸려 민첩하게 영을 따를 것이니, 열흘이나 달포 사이에 1만 3천 명의 정예로운 병졸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뒷날 뜻하지 않은 경보가 있다 하더라도 성에 오르면 침범하는 적을 막을 수 있고 진을 대치하면 위세를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잇길을 막아 끊는 요체로 볼 때 장파에 관방(關防)을 설치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번 장파를 지나고 나서는 감평을 경유하지 않으면 달리 지름길이 없고, 또 감평을 지나면 곧바로 배성포로 달려가서 안변에 도달하니, 감평과 배성포에도 관방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 곳에 모두 진보(鎭堡)를 설치하되, 수 년의 공력을 조금 들여 견고한 성을 쌓고, 부근의 각읍에 이속(移屬)된 공천(公賤)을 토병(土兵)으로 바꾸어 정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농사짓게 하여 10년 동안 부세(賦稅)를 감면하면, 토지가 없는 백성이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모여들어 3, 4년이 지나지 않아 어엿한 큰 진영(鎭營)이 이룩될 것입 니다.
어떤 사람은, ‘폐사군(廢四郡)에 백성을 모집하여 정착시키라는 영이 금방 내려졌는데, 만일 또 장파(長坡)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면 일시에 아울러 거행하는 것이 되니 장애되는 사단이 없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다릅니다. 후주(厚州) 등 4군(郡)은 본디 토지의 비요(肥饒)함과 삼과 초피(貂皮)의 이로움이 있습니다. 만일 그 일로(一路)의 관방을 만들어 사잇길로 엿보는 근심을 막아버린다면, 이 장파 등 몇 곳이야말로 가장 긴요한 곳이 되는 동시에 4개 군의 이익을 점거하여 거듭 일로(一路)의 관방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을 등한히 버려서 후일의 염려를 끼치게 하면 더욱 안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묘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는데, 묘당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은 관계로 중지되었다.
9월 19일 을유
원자(元子)가 《소학(小學)》의 강을 마치자, 유선(諭善) 윤득부(尹得孚)에게 표피(豹皮) 1령을 하사하고, 규장각 직제학 이만수(李晩秀)와 원임 규장각 직각 남공철(南公轍)에게 녹비(鹿皮) 1령을 하사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영중추부사 홍낙성(洪樂性)에게 유시하기를,
"영의정으로서 나이 여든이 된 이가 옛날엔들 어찌 있었겠는가. 오늘이 바로 경의 생일이므로 사관을 보내어 기거(起居)를 존문(存問)하는 바이다."
하고, 이어서 호조에 명하여 쌀·고기·명주·솜을 하사하니, 홍낙성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9월 21일 정해
이조 판서 송환기(宋煥箕)가 현(縣)과 도(道)를 통하여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선비가 장대(壯大)한 뒤의 행실을 어려서의 배움에 근본하는 것은 성의(誠意)·정심(正心)을 한 뒤에 수신(修身)·제가(齊家)하는 것과 같아서, 그 조리(條理)는 문란시킬 수 없으나 그 실제에는 두 가지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세도(世道)의 책임이 아직도 경연의 자리에 있는데, 하물며 경처럼 임하(林下)에서 독서한 선비이겠는가. 경이 출사(出仕)하는 것과 출사하지 않는 것은 오직 그 적의하고 가합한 의리를 구할 뿐이니, 어찌 반드시 경연(經筵)의 직함에는 마음을 바꾸어 나서고 세도(世道)의 책임은 돌아보지 않고 떠나간 뒤에야 비로소 의리의 당연한 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경이 만일 이러한 사리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 내가 부르는 것과 경이 명을 받는 것에 근거할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이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곧 올라와서 공무를 집행하라."
하였다.
도승지 이성보(李城輔)를 간곡히 불렀다.
9월 22일 무자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불러 보았다.
9월 23일 기축
호서·호남·해서의 호적 작성과 군안(軍案) 개정하는 일을 모두 내년 겨울로 연기하였다. 재황(災荒)이 들었기 때문이다.
9월 24일 경인
시흥(始興)과 과천(果川)을 수원부(水原府)에 예속시켰다. 수원부 유수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수원은 안산(安山)·용인(龍仁)·진위(振威)·시흥·과천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니, 사면으로 감싸 호위하는 방도로 볼 때 오직 안산·용인·진위만 소속시키고 시흥·과천을 소속시키지 않는 것은 이미 빙 둘러싸서 협수(協守)하는 뜻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총융청(摠戎廳)에 소속된 시흥·과천을 수원을 건너뛰어 남양(南陽)에 예속시키는 것도 불편한 일입니다. 시흥·과천을 수원에 소속시켜 하나는 북성 협수장(北城協守將)으로 삼고 하나는 통구 유병장(通衢遊兵將)으로 삼으소서. 그 군총(軍摠)으로 말하면, 남양은 그대로 총융청에 소속시키되, 본읍(本邑)의 속오군(束伍軍) 10초(哨)와 양천(陽川)의 속오군 1초(哨)을 합하여 11초로 만들고, 또 남양의 장초군(壯抄軍) 1초를 보충하여 파주(坡州)·장단(長湍)과 동일하게 12초를 만들며, 수어청(守禦廳)의 친아병(親牙兵)은 곧 대장이 친히 거느리고 성첩(城堞)에 배치하는 대열에 소속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니, 그러면 그 숫자에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는만큼 비록 5초를 감하더라도 아직 8초는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기내(畿內)의 군정(軍丁)으로 5초(哨)를 더 배정하면 납미군(納米軍)이 또한 불편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곧장 수효를 감한 이후로 좌우부(左右部)에 소속된 아병(牙兵)이 3초이고 파하(把下)가 20여 명인데, 이들은 5영(五營)의 호위군에 입속(入屬)된 자들이어서 형세상 대오(隊伍)를 비워두기가 어려우니, 삼전도진(三田渡鎭)의 군관(軍官) 2백 50인과 진(鎭)의 아병(牙兵) 2초 중 성첩(城堞)의 배치 군사로 포함되지 않고 신미(身米)만 납입하는 자들을 아병(牙兵)과 파하군(把下軍)으로 나누어 만들어서 좌우부에 소속시키고 미곡 수납은 그대로 본진(本鎭)에 소속시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용인과 과천의 친아병(親牙兵)을 일단 감한 상태에서 그 둔전(屯田)만을 둘 수는 없으니 둔전도 옮겨 소속시켜야 할 것입니다. 각 둔전에서 수납하는 각 곡식과 8초 아병(牙兵)에게서 수납하는 미곡은, 모두 수어청(守禦廳)에서 매년 본영(本營)에 옮겨 납입하는 돈 중에 이 수량만큼 떼주어 미곡을 돈으로 바꾸는 조목에 의거하여 본영에 납입하게 하면, 대신 지급하는 불편한 사단이 별로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총융청에 소속된 안산·시흥의 장초군(壯抄軍) 2초를 옮겨와 세 영장(營將)의 각색(各色) 표하군(標下軍)이나 치중군(輜重軍)의 임무를 대신하고 있는 자들의 숫자도 일정치 않은데, 경영문(京營門)의 예에 의하여 적당히 조절하면 2백 54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인원을 옮겨 장초(壯抄) 2초를 만들고 그대로 미곡 3두씩을 거두게 한다면 대신 지급하는 일을 없앨 수 있습니다.
좌부(左部) 장초(壯抄) 13초 중에 1초는 남양(南陽)으로 옮겨 붙이고 2초는 수원으로 옮겨 붙이되, 3영(營)의 표하(標下)에서 덜어내는 것이 2초가 되어야 한다면 좌부가 우부(右部)에 비해 1초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만일 각 초 중에서 혹 약간 수효를 줄이거나 혹 군수보(軍需保) 중에서 옮겨 기록하여 13초를 갖추게 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이를 수어청과 총융청 두 영(營)에 분부토록 하소서.
수원이 전에는 용인 등 3개 고을의 협수군(協守軍)을 소속시켜 12초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시흥·과천의 속오군(束伍軍) 5초와 안산·시흥의 장초(壯抄) 2초와 용인 등 3개 고을의 수어청 아병(牙兵) 8초를 소속시켜 합계 27초가 되니, 이는 1영(營) 5사(司)의 군영(軍營)이 되기에 족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외영(外營)에서 단속하고 마련하여 제도를 정해서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시흥과 과천을 일단 외영(外營)으로 옮겨 소속시킨 이상, 총융청에 있는 병부(兵符)의 왼쪽 패를 정원으로 하여금 거두어들여 외영에 내려주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병조에 명하여 매달 실시하는 당하관(堂下官) 무신의 활쏘기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사람에 대한 논상(論賞)의 사례를 고찰하여 품하게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두 번 지난 갑자년188) 에 대신이 진달한 데 따라 25발의 화살을 적중시킨 사람에게는 말[馬]을 하사하고 26발 이상의 화살을 적중시킨 사람은 변장(邊將)에 제수하고, 3차에 걸쳐 연달아 수석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별도로 논상(論賞)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옛날 사례에 의하여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3차례 연달아 수석을 차지했을 경우에도 꼭 절차를 별도로 만들 것이 아니라 그 때 가서 초기(草記)로 품지하여 시상하는 소지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성정진(成鼎鎭)이 상소하기를,
"과장(科場)에서 시권(試券)을 일찍 올리는 폐단은 시험을 관장하는 사람이 일찍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전하께서 그 폐단을 깊이 생각하시어 특별히 시각을 한정하고 호명하여 올리도록 하셨는데, 금년 가을 감시(監試)의 이소(二所)에서 뽑힌 글을 보면 3백 장 안에서 거의 다 나왔으니, 조정에서 명령을 신실하게 행하는 뜻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신의 의견으로는 시험을 관장한 신하에게 견책하고 삭직하는 벌을 시행해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승호군(陞戶軍)은 그 액수는 가장 적으면서 그 폐단은 가장 많아서 매양 한 번 조사해 낼 적마다 온 경내가 소란스러워집니다. 장정의 나이에 번(番) 들러 나아가서 백발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오니, 종종 도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만약 경영(京營)에서 뽑아내어 인원을 충당하되 자장(資裝)의 비용은 시골에 있는 원군(原軍) 및 보인(保人) 등에게서 징수하여 지급해서 마치 번을 서는 대신 돈을 내는 규례처럼 한다면 외읍(外邑)의 고질적인 폐단이 또한 조금 감소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감시의 시관에 관한 일은, 이미 조정의 명령이 있었는데 어찌 감히 어길 수 있단 말인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승호군에 관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강구하여 여쭈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복주(覆奏)하기를,
"승호군은 수효가 비록 적기는 하나 재력(才力)이 있고 솜씨 좋은 군사는 대부분 그 중에서 나오니 해당 병영에서 가장 믿을 만한 군사라고 할 것입니다. 또 시정(市井)의 무능력자들은 병가(兵家)에서 취하지 않는 바이니 오직 향군(鄕軍)이 많지 않은 것만을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뽑아 올리는 좋은 법을 갑자기 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두소서."
하니, 따랐다. 이어서 명하여 삼남(三南)·해서(海西) 중에 폐해가 우심한 고을은 특별히 기한을 물리도록 하였는데, 뒤이어 훈련 대장 이경무(李敬懋)의 상소로 인하여 기한을 물리라는 명을 다시 취소하였다.
9월 25일 신묘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재전(齋殿)에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일전에 후반(候班)189) 에 영돈녕(領敦寧)이 들어왔다고 하는데 나는 듣지 못하여 끝내 불러서 접견하지 못하였다. 경들은 어찌하여 제기하여 여쭙지 않았는가?"
하니,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전하께서 자전과 자궁을 모시느라 한가히 접견할 겨를이 없으시리라 생각하고 어물어물하다가 여쭙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보통 관료와 달라서 구경(九經)에서 공경하는 바이고 백관이 우러러보는 바이다. 경들은 연석(筵席)에 나왔는데 이 대신만 홀로 빠졌으므로 내가 뒤늦게 듣고서 여러 날 동안 석연치 않았다."
하였다.
상이 화성(華城)에서 돌아왔다. 직산(稷山) 사람 박기복(朴基復)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의 6대조인 신(臣) 박승종(朴承宗)이 의리를 지킨 바름과 절조를 온전히 한 아름다움은 모두 근거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폐모(廢母)를 주장할 적에 신의 할아버지가 보호하는 일을 당신의 소임으로 삼자 이첨이 뭇 흉인들을 사주하여 온갖 방법으로 헐뜯고 없는 일을 꾸며내었습니다. 윤유겸(尹惟謙)·박시준(朴時俊) 두 사람의 소에서 살펴보면, 신의 할아버지가 무옥(誣獄)에 참여하지 않고 폐모의 논의에도 참여하지 않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초상 때에는 부고(訃告)할 것을 주장하였고,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귀양살이 할 적에 속전(贖錢)을 납입하기를 원하였으며, 이식(李植)과 조직(趙溭)이 국문을 받을 적에 의금부의 직을 맡아 온전히 살려준 바가 많았으며 이귀(李貴)와 이서(李曙)가 무함(誣陷)을 받을 적에 힘을 다해 문서를 마감 정리하였고, 백대형(白大珩)이 경운궁(慶運宮)에 함부로 뛰어들었을 적에 달려가서 몰아냄으로써 다행히도 예측할 수 없는 화를 제거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훈신(勳臣) 김류(金瑬)·이귀(李貴) 등 여러 사람이 말한 것이 모두 공사(公私)의 실기(實紀)에 있습니다.
흉도가 폐모론(廢母論)을 주창하자 폐주(廢主)가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갈 적에 신의 할아버지는 나아가자니 간언(諫言)이 들어가지 않고 물러나려니 마음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변치 않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흉악한 논의를 힘껏 배척하였고, 당의 편액을 읍백(挹白)으로 걸어서 서궁(西宮)을 향하는 뜻을 부쳤습니다. 경신년190) 에 와서 정승에 임명되자, 항상 독약을 차고 다니면서 말하기를 ‘대신의 몸이 되어 위태로운 상황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오직 한번 죽어 스스로 속죄함이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반정(反正)이 일어나던 날 밤에 아들인 경기 관찰사 박자흥(朴自興)과 동시에 목숨을 끊었는데 유서(遺書)에 이르기를 ‘노신(老臣)이 변변치 못하여 임금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부자가 같이 죽어 천지 신명에게 사죄한다.’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특별히 신의 6대조 승종 및 그 아들 자흥의 관직을 회복토록 해 주소서."
하니, 그 일을 이조에 내렸다. 이조에서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명하여 일찍이 이조 판서를 지낸 사람에게도 아울러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헌의(獻議)하기를,
"박승종이 서궁(西宮)191) 의 변을 당하였을 적에 힘을 내어 호위한 사실은 조야(朝野)의 역사서에 두루 나오니, 이는 족히 믿을 만하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또 반정(反正) 초기를 당하여 그 아들 자흥과 동시에 자결하였으니, 이 또한 애초에 섬기던 바의 임금에게 마음을 다한 것입니다. 가령 그 자신이 수상이 되어 부귀(富貴)에 빠지고 권세를 받아들여 혼주(昏主)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채 종묘 사직을 경복(傾覆)하는 지경에 이르게 할 뻔하여 바른 논의를 주장하는 선비에게 죄를 얻은 것으로 말하면, 이는 진실로 변명할 만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비하기를 책망하는 것은 어진 사람에게 하는 것이니, 어찌 사람마다 이로써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단서(丹書)의 죄명을 씻어주지 않고 관직을 회복시켜주지 않은 것은 곧 역신(逆臣)으로 감정(勘定)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역신과 다른 것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살아서 위태로운 상황을 구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역률(逆律)로 감정(勘定)을 한 것은 사리로 헤아려 볼 때 부당할 듯합니다."
하고,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는 의논드리기를,
"박승종은 폐조(廢朝) 때의 수상으로 부귀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삼창(三昌)192) 으로 병칭(幷稱)되었습니다. 폐모하던 때에 흉도가 악법을 처음 만듦에 옥사를 교묘하게 꾸며내어 도리어 조성한 단서가 있었으니, 마지막에 자결한 것을 가지고 용서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는 의논드리기를,
"박기복(朴基復)이 신의 할아버지 이식(李植)이 국문을 받을 적에 승종의 덕택으로 살아났다고 하면서 사류(士類)를 보호한 증명으로 삼았으나 그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대개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의 옥사가 일어났을 적에 심우영의 문서 안에 신의 할아버지의 서찰(書札) 3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서책을 서로 빌린 것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그 서찰이 국청(鞫廳)에 내려지자, 의금부 당상 박이서(朴彛叙)가 판부사 박승종에게 말하기를 ‘저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끼리 편지를 왕복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또 듣건대 그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장사를 지내지 못하였다 하니 장사지낸 뒤에 회계(回啓)해도 늦지 않다.’ 하였는데, 승종이 평소에 박이서의 말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마지못해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홍호(洪鎬)가 간언(諫言)한 일로 장차 중죄(重罪)에 빠지게 되자 신의 할아버지가 옥당(玉堂)으로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여 홍호가 다른 뜻이 없음을 힘껏 진달하였으므로 상의 뜻이 풀리어 홍호에 관한 논의가 마침내 정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할아버지의 뜻은, 특별히 홍호의 마음이 다른 뜻이 없으므로 깊이 죄줄 것이 없음을 밝혔을 뿐이지 홍호의 말이 옳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의 할아버지의 사실을 부득불 대략 진달하였습니다만, 수백 년의 단안(斷案)이 이미 정해졌으니, 용서하자는 한두 사람의 논의 때문에 이를 조정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상호군(上護軍) 정민시(鄭民始)는 의논드리기를,
"삼창(三昌)이 권세를 탐하여 화의 징검다리를 조성한 것은 그 죄가 똑같습니다. 다만 박승종이 노하여 이이첨을 꾸짖고, 역적 백대형을 달려가 쫓아버린 것으로 말하면 흉악한 모의를 앞질러 꺾은 공이 적지 않습니다. 또 유서(遺書)에서 죄를 자인하고 부자가 같이 자결하였으니, 또한 그 본심을 볼 수 있습니다. 공을 가지고 허물을 보완하고 실정을 따져 죄를 정함에 있어서는 참작하여 용서하는 단서가 있어야 합당합니다."
하고, 대호군(大護軍) 김재찬(金載瓚)은 의논드리기를,
"박승종의 죄범은 공사(公私)의 문서에 분명하게 실려 있어 각각 고거(考據)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계해년193) 반정한 뒤에 특교(特敎)와 비지(批旨)가 해와 별처럼 게재되어 있으니 백세(百世)토록 증명할 수 있습니다.
대개 을묘년194) 정월에 추대(推戴) 및 저주(咀呪)195) 사건으로 옥사의 상황이 날로 다급해져 자궁(慈宮) 본궁(本宮)의 종 오윤남(吳允男)의 부처(夫妻)가 고문을 혹독히 입고는 승복하지 않은 채 죽었습니다. 그때 그 아들의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율관(律官)이 나이가 차지 않아서 형벌을 가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박승종이 그때 판부사로 국청(鞫廳)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을 내어 큰소리로 말하기를 ‘본궁(本宮)의 노예로는 다만 이 아이가 남았을 뿐이다. 이 아이를 형신(刑訊)하지 않는다면 캐낼 길이 없게 된다. 형을 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압사(壓沙)마저 할 수 없겠는가.’ 하고 드디어 압사(壓沙)하여 거짓 초사(招辭)를 받아내었는데 이렇게 하여 옥사가 비로소 이루어지면서 서궁(西宮)의 화가 더욱 급박해졌습니다.
같은 달 3일에 광해(光海)가 자전(慈殿)을 받들고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하여 분사(分司)를 설치하고 수위(守衛)를 구비하였는데, 박승종이 또 궁궐문을 굳게 잠그고 금병(禁兵)을 별도로 두어 방수(防守)를 더욱 엄하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계해년 거의(擧義)하던 밤에 미쳐 박승종이 수상으로 비변사에 있으면서 일이 급하다는 말을 듣고 그 집으로 도망쳐 돌아온 뒤 아들 자흥과 수구문성(水口門城)을 넘어 곧바로 그 일족인 양주 목사(楊州牧使) 박안례(朴安禮)의 임소로 달아났는데, 체포장(逮捕將)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면할 수 없음을 알고는 송산(松山)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는 박승종의 종적이 문자에 나타난 것으로서 환하여 가리울 수가 없습니다.
계해년 3월에 양사(兩司)가 발론하기를 ‘박승종의 죄는 이이첨·유희분과 같습니다. 임금의 지친(至親)임을 의거하여 국옥(鞫獄)을 담당하고는 13세의 어린 아이를 압사(壓沙)하여 저주의 화를 얽어 만들었으며, 군사로 하여금 자궁(慈宮)을 지키게 하여 외부 인사의 왕래를 끊게 함으로써 모후(母后)를 유폐(幽廢)하는 단서를 열어놓았으니, 그 종용(慫慂)하고 조성한 죄로 볼 때 이이첨이나 유희분과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설사 박승종이 난에 임하여 제몸을 잊고 군부를 호위하다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 죄를 청산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몸을 빼어 달아나 숨었다가 형세가 궁하고 힘이 쭈그러들자 면할 수 없음을 알고서 자결한 자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악을 스스로 덮어버리고 그 임금에게 허물을 돌렸으니, 교활하게 사람을 속인 것을 더욱 환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박승종의 죄악에 대하여 대신(臺臣)이 징토(懲討)하며 논한 것입니다.
이해 3월 19일에 하교하기를 ‘삼창(三昌)의 죄악은 다를 것이 없는 듯하다.’ 하고, 4월 30일에 특지(特旨)를 내려 이르기를 ‘박승종 부자를 추삭(追削)하고 적몰(籍沒)하라.’ 하였습니다. 또 5월에는 정언 홍호(洪鎬)가 상소하여 박승종을 구원하다가 엄한 견책을 받았습니다. 그때 부제학 조익(趙翼)이 차자를 올리기를 ‘홍호의 말이 망녕되기는 하나 그런 말 때문에 언관(言官)을 죄줄 것까지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비답을 내려 준엄하게 꾸짖기를 ‘박승종이 비록 폐모론을 극력 주장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몰래 사주하여 옥사를 일으킨 것은 이이첨과 다를 것이 없다. 그대들이 자세히 알지 못하고서 이런 말을 하는가.’ 하고, 이어서 조익을 체직시켰습니다. 이것은 전후로 상이 분부한 것을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갖추 기재해 놓은 내용입니다. 지금 박승종을 두고 범한 바가 없다 하여 죄를 깨끗이 씻어주는 조목을 적용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우참찬 심환지(沈煥之)는 의논드리기를,
"박승종은 지벌(地閥)로 보면 지친(至親)이고 관직으로 보면 정승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논하면 이이첨과 유희분이 국권을 잡고 있을 때였으니, 흉악한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서 이와 같이 출세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삼창(三昌)으로 이름이 나란히 일컬어졌으니, 당시의 공의(公議)를 또한 볼 수가 있습니다. 계해년 반정(反正) 초에 대각(臺閣)이 죄를 성토한 계사에서 논열(論列)한 바가 매우 엄했으니, 이는 관석(關石)과 같이 믿을 만한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또 우리 인조께서 하교하여 ‘삼창(三昌)의 죄는 다름이 없는 듯하다.’ 하셨고 특명으로 박승종 부자를 추삭(追削)하고 재산을 적몰케 하였으니, 그 의리 또한 이미 영원토록 해와 별처럼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고(故) 정승 조익(趙翼)과 대신 홍호(洪鎬)로부터 근세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더러 용서하고자 논의하는 자들이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진실로 박승종 부자가 스스로 그 죄를 알고서 일시에 같이 죽은 것을 가지고 섬기던 임금에게 절의를 다하였다고 말하면서 마침내 생전에 지고 있던 바의 죄를 덮어버린다면 양웅(揚雄)이나 순욱(荀彧)196) 의 무리에 대해서도 모두 한(漢)나라에 절의를 세운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근년에 법망이 너무 넓고 은전(恩典)이 두루 베풀어진 탓으로 이름이 단서(丹書)에 실려 있고 죄가 철안(鐵案)에 관계된 자까지 모두 깨끗이 씻겨지고 관대히 사면하는 은전을 받는데도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이리저리 눈치만 보고 우물쭈물하면서 감히 다투어 논할 계책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분수 밖의 일을 넘보는 무리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외람된 호소가 어가(御駕) 앞을 범하여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조장시키면 국법이 쉽게 동요되어 죄있는 자를 징계할 길이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무오년197) 에 대비를 유폐시켰던 일이야말로 천하 만고에 없던 큰 변고입니다. 이 일이 빚어지고 행해지게 된 것은 실로 을묘년의 무옥(誣獄)198) 에서 기인한 것인데, 그 무옥을 성립시킨 수범(首犯)이 바로 박승종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수백 년에 걸쳐 철안(鐵案)이 이미 정해진 뒤에 와서 비록 한두 사람이 용서하자는 논의를 내놓는다 하더라도 어찌 그 애매한 자취를 가지고 그 사이에서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다년간 권세를 잡아 이미 삼창(三昌)으로 이름이 나란히 일컬어졌고, 밤중에 달아나면서 스스로 자기 죄를 벗기 어려움을 알았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살아서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고 죽어서는 정적(情跡)이 다 드러남을 더욱 볼 수 있으니, 반복하여 참작해 보아도 용서할 만한 단서가 하나도 없습니다. 박승종을 복관(復官)시키는 일은 그만두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6일 임진
춘당대에 나아가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 및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이에 앞서 승지 이기양(李基讓)이 한석조(韓錫朝)의 상언을 봉입한 것 때문에 윤장렬(尹長烈)에게 탄핵을 받았는데, 이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정사(政事)에 임하여 이기양을 승지망(承旨望)에서 뽑아버렸다. 이때 와서 상이 승지의 전망(前望)에 넣게 하자, 이기양이 상소하여 인구(引咎)하니, 비답하기를,
"명분과 의리는 지극히 엄한 것으로서 부월(斧鉞)처럼 엄하게 된 뒤에야 인륜이 펴지게 된다. 나처럼 세속을 따라 정치를 베풀면서 일마다 방편으로 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도 오히려 명분과 의리를 늘 생각하고 생각하여 20년을 하루같이 해 오면서 감히 저쪽에만 전력하고 이쪽을 소홀히 하지 못하였으니, 한효순(韓孝純)의 일에 소홀히 하여 제방(隄防)과 위단(威斷)을 어찌 혹 굳게 정한 명분과 의리에 미치지 못하게 하겠는가. 회계(回啓)하게 한 것은 바로 형률(刑律)을 감정(勘定)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일곱 번 엄히 처결한 것은 모두 회계에 따른 것이고 그동안에 십여 차례 논의하지 말라고 한 것은 곧 외람되이 뽑아버림에 연유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쪽 저쪽을 다 따지면서 회계하게 한 것이 제방을 엄하게 하기 위함이었겠는가, 곧장 외람되이 뽑아버린 것이 명분과 의리를 높이는 일이겠는가. 내 마음속의 기준은 곧 한 부(部)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이다. 그런데 전조(銓曹)의 당상이 어떠한 자이기에 감히 아주 맑은 하늘에 무지개처럼 현란시키고 아름다운 곡식 싹에 가라지처럼 나와서 사람의 뜻을 더욱 의혹하게 하고 세도(世道)를 더욱 어긋나게 하니, 요즘 운운한 바 발휘(發揮)하여 바로잡는 규모와 어찌 그리도 상반되게 한단 말인가.
임금의 뜻을 펴지 못하는 것도 옛사람은 오히려 유사(有司)의 허물이라고 비평하였는데, 하물며 막아서 숨겨버리고 비밀로 하여 나타내지 않으며 이치에 가까운 듯하면서 진리를 더욱 어지럽혀서 마치 지척(指斥)해 말하는 듯하면서도 승지에게 죄를 돌리는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와 같은 전조의 당상은 마땅히 규정(規正)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마침 다른 죄로 인하여 파직하였으므로 다시 그 일을 끄집어내어 처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다시 부르는 명은 그대를 위해서가 아닌데 또 어찌 감히 머뭇거린단 말인가. 염방(廉防)을 펴기 위해서라도 그대를 체차해야 하겠다."
하였다.
9월 27일 계사
대사헌 이병정(李秉鼎)을 특별히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보임하였다. 이병정이 상소하기를,
"국가에서 언관을 설치한 것이 어찌 갓끈을 휘날리고 인수(印綬)를 차고서 천패(天牌)를 받들어 대청(臺廳)에 나아가게 하는 것뿐이겠습니까. 역적이 있으면 토죄(討罪)하고 일이 있으면 말을 한 뒤에야 언책(言責)의 실무에 부응한다고 할 만합니다. 지금은 금령(禁令)의 조항이 많아 곧은 말이 저절로 막히므로 언관(言官)이 된 사람은 머뭇거리고 입을 다물며 그럭저럭 날만 보내고 있습니다. 혹 임금이 중도에 지나친 거조를 취하거나 국가 안위의 기틀에 관계되어도 그대로 보기만 하고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니, 저 언관이 직무를 폐기하고 수치를 끼치는 것은 본디 논할 것조차 없거니와, 맑은 조정에서 명분을 따르고 실효를 책임지우는 정치에는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의지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은 다만 의리를 밝히고 제방을 엄히 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말할 만한 지위에 있으면서 도리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으니, 비록 얼굴을 쳐들고 무릅쓰고 나간다 하더라도 처음 먹은 마음에 부끄럽고 평소 지키던 지조를 잃음에야 어찌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직을 개차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만일 따를 만한데 따르지 않은 것이 있어 이로 인하여 의리로 처신하려 한다면, 경 이외의 다른 사람으로서 스스로 임금의 마음을 돌릴 역량이 있다고 여겨 앞장서서 나올 자가 과연 누구이겠는가. 경이 말하는 것은 진실로 용이할 것 같으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처지를 바꾸어 모두 경이 하는 바를 본받게 한다면 대사헌의 한 자리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대사헌이 이와 같이 하면 대사간이 이와 같이 하고, 대사간이 이와 같이 하면 여러 대간이 마땅히 이와 같이 할 것이다. 계속 이런 식이 된다면 양사(兩司)에 장차 행공(行公)할 사람이 있겠는가. 일의 체모상 이와 같이 할 수는 없다. 경을 여주 목사에 제수한다."
하였다.
도승지 이성보(李城輔)가 지방의 관아를 통해서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니, 너그럽게 비답하며 도타이 불렀다.
비변사에서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의 재실분등(災實分等)199) 에 관해 장계로 복주(覆奏)하니, 하교하기를,
"계축년200) 의 도로 경작한 토지에서 강제로 거두어 들이는 것과 다름없이 한다는 말을 들은 뒤로부터 생각이 영남의 백성에게 미치면 밥을 대해도 목에서 내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일찍이 사고 원인을 조사하라는 유시(諭示)를 내리고 구임(舊任) 도백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각읍의 토지가 묵은 곳은 강속전(降續田)으로 처리하게 하였다. 이 두 건이 모두 실효가 있어야 목이 메이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풍속에 차를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근년에 와서 약원(藥院)에서 날마다 공급하는 달인 차를 특별히 물리친 것은 영남 백성을 위하여 자봉(自奉)을 박하게 하려는 나의 변변찮은 고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무릇 감사나 수령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내 마음을 명심한다면 어찌 무턱대고 생판으로 거두어들이는 일이 있겠는가. 또 더욱이 강속전(降續田)으로 처리하게 한 거조(擧措)는 백성을 풍족하게 하고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는데, 만일 혹 전지가 모두 웅덩이와 쑥밭이 되게 하고 날로 백묘(百畝)의 농토를 개간하는 일도 없게 된다면 감영과 군읍을 둔 목적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조정 명령이 곧 백성을 속이는 것이 될 것이니, 또한 몹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선 다시 도백에게 관문(關文)으로 신칙하여 이 비지(批旨)를 벽에 써서 착실히 이행하고 늘 생각하여 다반공부(茶飯工夫)로 삼고 감히 소홀히 하지 말되 항상 구중궁궐에서 비추어 보고 있는 것처럼 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영남의 흉작을 염려하여 부세(賦稅)를 감면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정책을 대신에게 물었다. 좌의정 채제공은 아뢰기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민정을 참작하여 환곡(還穀)과 향곡(餉穀)을 정퇴(停退)하게 하소서."
하고, 우의정 이병모는 아뢰기를,
"더욱 심한 고을과 면리(面里)의 환곡과 향곡만을 대상으로 3분의 1을 환정하여 정퇴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상이 명하여 새 환곡을 납입해야 할 대상 중에 재황(災荒)이 가장 심한 곳은 3분의 1을 정퇴하고, 그 나머지 조금 충실한 제읍(諸邑)은 도신에게 회부하여 민정을 따라 적당히 정퇴하도록 하였다.
9월 28일 갑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어제 승지의 소에 비답하신 것을 삼가 보건대 ‘감히 지척(指斥)해 말하지 못하고 승지에게 죄를 돌린다.’는 하교는 혹 분부가 중도에 지나친 듯합니다. 전 이조 판서가 또한 어찌 매우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저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각 한 세상의 규범이 있는데, 의리라는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천지의 경위(經緯)이고 일월의 밝음이다. 그것을 밝히는 방도는 오직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고 또한 각각 그 때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포의(布衣)로서 권세가 중하면 한 선비의 말이 흥망에 관계됨이 있고, 재상으로서 권세가 중하면 삼공의 책무는 일신에 안위(安危)가 달려 있으며, 또한 임금의 기강이 위에 있어 권기(權機)를 모두 잡고 있으면 오직 한결같이 하늘의 명을 들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위복(威福)의 권한이 임금에게 있어 사람들이 감히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데, 이 또한 내가 만난 바의 때가 그러한 것이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평생 학문을 쌓는 목적은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는 데에 있다.’ 하였다. 한 부(部)의 《춘추(春秋)》를 언제나 마음속에 잊지 않고 새겨 두어 일이 명의(名義)에 관계되는 것이면 오직 제방(隄防)이 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이번에 이기양(李基讓)을 망(望)에서 빼어버린 것은 관계되는 바가 과연 어떠한가. 한효순이 명의에 죄를 얻었는데, 그 후손이 곧 감히 임금의 행차 앞에서 호소하였다. 그렇다면 그저 외람되이 빼버리고 불문에 부쳐버리는 것이 옳겠는가,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중한 율로 다스리는 것이 옳겠는가. 전후로 이렇게 호소한 것이 십여 차례뿐이 아닌데, 이번에 특별히 계하(啓下)하게 한 것은 의도한 바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 민종현이 그만 도리어 당해 승지를 승지의 망에서 빼버렸으니 어찌 매우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진실로 그 사람이 본래부터 유약하여 이보다 한 단계 낮은 일이라도 감히 하지 못할 줄을 알고 있는데, 지금 갑자기 이런 행동을 취했으니 누가 주장한 것인가.
예로부터 국가에서는 본래 일시적으로 위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므로 척리(戚里)가 한때 용사(用事)하는 경우도 있었고, 현사가 한때 치리(治理)를 조성(助成)한 적도 있었다. 외척을 우대하고 현사(賢士)를 무시하기 보다는 현사를 우대하고 외척을 무시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즉위한 이래로 한 사람의 척리(戚里)도 정사에 간여하게 한 바가 없고 함께 정치한 사람은 오직 경들뿐이었다.
그런데 이조 판서의 직책은 육경(六卿) 중에서 으뜸이니, 무릇 일이 있으면 대신과 상의하여 그 가부를 정한 뒤에야 이를 공의(公議)라 할 수 있다. 지금 이기양의 일에 대해서 경이 이미 그것을 알지 못하였고 또 사람들이 참여해 들은 자가 없고 보면 홀로 민종현이 자진하여 한 것인가. 그가 이조 판서가 된 것이 또한 여러 번이었는데, 언제 한 번이라도 나쁜 사람을 배척하고 착한 사람을 드러내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은 적이 있었던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는 곧 외척이므로 특히 이 의리에 엄하다.’고 하는데, 내가 애석히 여기는 것도 그가 바로 외척이라는 점이다.
옛날 곽공(郭公)이 망하게 된 까닭도 오직 선(善)을 선하게 여기면서도 쓰지는 못했으며 악을 미워하면서도 버리지 못한 데 있었으니, 이러한 곳에는 못을 자르고 쇠를 끊는 듯한 엄한 법을 쓴 뒤에야 위권(威權)이 아랫사람에게 옮겨지지 않고 큰 기강이 먼저 확립될 것이다. 부자(夫子)가 노(魯)나라 사구(司寇)가 되어 정치를 어지럽힌 소정묘(少正卯)를 죽이셨는데 정사에 종사한 지 7일 만에 느닷없이 양관(兩觀)201) 의 주벌(誅罰)을 가한 것은 그가 정치의 권한을 감히 흔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귀를 막고서 종을 훔치는 것은 그 죄가 크다.’고 하였다. 종을 훔치는 것도 본디 죄가 되지만 귀를 막고 종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 죄는 더욱 큰 것이니, 이는 대개 알고서 고의로 범한 것은 반드시 관대히 사면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시경(詩經)》에 ‘힘쓰고 힘쓰는 우리 임금님 사방의 기강이 된다.[勉勉我王 綱紀四方]’ 하였다. 한 세상의 유지는 오직 기강에 의뢰하고 있을 뿐인데, 오늘날 조정은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기강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의리를 장려하는 것을 내가 어찌 혹시라도 느슨히 하겠는가. 다만 전 이조 판서가 오늘날의 규모가 어떠한지 모르는 것이 애석할 뿐이다."
하였다.
상이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에게 이르기를,
"근래 저축은 점차 고갈되는데 국가의 비용은 한이 없다. 호조에 만일 옛날에는 없던 비용이 오늘날에는 있는 경우가 있으면, 경은 모름지기 적의함을 헤아려 개혁하라."
하니, 김화진이 아뢰기를,
"빠져나가는 곳은 매우 많은데 보충할 길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일은 먼저 일의 체면을 보고 나서 이해(利害)를 논해야 한다. 대개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서생(書生)의 안목으로 목전의 이익만 알 뿐이고 애당초 원대함을 경영하는 계책이 없다. 이를테면 곡식이 많은 고을에 대해 돈으로 내게 하는 따위가 그것인데 10년이 못 되어 묵은 저축이 일체 텅 비고 말 것이다. 나는 환모(還耗)를 경사(京司)에서 가져다 쓰는 것은 지극히 구차하다고 여긴다. 수령에게 맡겨 청렴을 기르는 방도를 삼는다면 어찌 참으로 아름답지 않겠는가. 근년에 관서 변진(邊鎭)의 급대(給代)가 한 해에 6천 석이나 되고 또한 혹 이름만 있고 실속은 없으니 호렴(戶斂)202) 의 폐단이 다 없어졌다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하니,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강가 여러 고을의 곡부(穀簿)가 갈수록 더욱 텅 비게 되는 것은 오로지 강계(江界) 진보(鎭堡)의 급대(給代)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부(財賦)가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수령을 가려 임용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수령을 가려 임용하지 못하는 것은 벼슬에 나아가는 길이 혼잡하기 때문이다. 병비(兵批)의 정사로 말하더라도 장기 근무자로 진영(鎭營)에 내보내고 취재(取才)해서 관직에 내보내는데, 이렇게 하고서야 어찌 그 인재를 얻는 것을 책임지울 수 있겠는가. 당(唐)나라 이전부터 이미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사람을 취하였었다. 지금 비록 옛 규례를 다 회복할 수는 없으나 장기 근무와 취재(取才)의 규례에다 신언서판의 법을 붙이는 방법이야 또한 어찌 강구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김재찬(金載瓚)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성보(李城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익운(李益運)을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9월 29일 을미
영남·호남·호서에 기근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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