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정유
예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평산(平山) 태백산성(太白山城)에 철상(鐵像) 4구(軀)가 있는데, 고로(故老)들의 말로는 고려 때의 태사(太師)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유금필(庾黔弼) 4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호(祠號)를 세속에서 삼태사(三太師) 사당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작년 치제(致祭)할 때에 다만 옛날 이름대로 삼태사사(三太師祠)라고 편액을 내렸었습니다. 조정의 본의는 원래 누구는 빼고 누구는 놔두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해당 읍에서 거행을 잘못함으로 인하여 봄가을 제사를 지낼 때에 배 태사(裵太師)의 철상은 빼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합니다. 이미 편액을 내렸고 보면 사체(事體)가 전과는 더욱 구별되니 철상 넷을 아울러 제사지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전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도 아뢰기를,
"신이 작년 예조 당상으로 있을 때에 전해 오는 말을 인하여 또한 삼태사의 사당으로 알았습니다. 지금 듣건대, 철상은 본래 4구이며 배현경이 그 중 하나를 차지한다 합니다. 비록 네 개의 철상이 정확하게 누구의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요컨대 수백 년 동안 똑같이 제향(祭享)해 오다가 세 개의 철상만 제사를 거행하고 하나를 빼버리는 것은 흠이 있는 전례(典禮)인 듯하니, 아울러 제향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명하여 사액(祠額)을 다만 ‘태사사(太師祠)’라 호칭하게 하고 다시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되 배 태사도 아울러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지난해 치제한 승지 신대현(申大顯)을 파면하였으니, 그 일을 즉시 제품(提稟)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8월 2일 무술
도총관(都摠管) 이가환(李家煥)이 누차 소명을 어기고 받들지 아니하니, 호남의 연해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가 곧 이어 용서해 주고 신칙하여 숙명(肅命)케 하였다.
하교하였다.
"탐라(耽羅)의 말로서 세공(歲貢)으로 진상된 것 가운데 어승(御乘)144) 이 된 것은 예로부터 드물었다. 지금 제주 목사(濟州牧使) 유사모(柳師模)가 교체되어 온 뒤로 진상한 말이 곧바로 어승이 되었으니, 이것은 목장을 설치한 뒤로 처음 있는 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격려하고 권장하는 도리로 볼 때 논상(論賞)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하겠다. 목사 유사모에게 내구마(內廐馬) 1필을 특별히 하사하라."
김문순(金文淳)을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김희(金爔)를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호서·호남·영남의 경시관(京試官)에게 명하여 좌도와 우도의 동당시(東堂試)145) 응시 유생들을 합하여 시험 보이도록 하였다. 이때 삼도(三道)에 가뭄이 들자 상이 도신(道臣)에게, 유의하여 관하를 살피고 한만(汗漫)한 시험 일에 마음을 쓰지 않도록 해 주기 위해 경시관에게 명하여 좌도와 우도를 합하여 시험보이게 한 것이었다.
8월 3일 기해
태묘(太廟)에 참배하였다. 이어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펴보고 재숙(齋宿)하였다.
8월 4일 경자
경모궁에 친히 제향(祭享)하였다.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서 고을 옮기는 일이 완성되었음을 알리자, 감독한 아전과 장교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8월 5일 신축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은 비가 오래도록 내리지 않아 이미 혈농(穴農)146) 으로 판정되었고, 호남의 10개 고을도 흉작으로 판정되었다 하니, 백성의 일을 생각함에 잠자고 먹는 것이 편치 않다. 호남은 부역(賦役)의 편중으로 백성들이 살아가지 못하니, 이것은 묘당(廟堂)에서 크게 변통하여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적정(糴政)으로 말하더라도 이름은 정퇴(停退)147) 하였다 하나 그 농사가 풍작이 되어 받아들일 때가 되면 무수히 더 받아들여 폐해가 이웃과 친족에게까지 미치니, 그렇다면 정퇴한 의도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정퇴는 일체 모두 탕감하느니만 못하다.’고 한 것이 참으로 격언(格言)이다."
하니,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근고에는 김석주(金錫胄)도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이 전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철운(李喆運)과 이우현(李禹鉉)의 일에 대해 마침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철운은 치적과 진정(賑政)으로 오늘날까지 제주 도민(島民)들이 사모하고 있습니다. 당초 죄를 받게 된 것이 이미 토착민인 양지온(梁之蘊)이 감정을 풀려고 얽어 무함한 데에서 나온 것으로, 어사(御史)가 장계로 논열(論列)한 것에도 진짜 장물(贓物)은 없었는데도 억울하게 거짓 비방을 받은 채 오래도록 죄적(罪籍)에 걸려 있습니다. 이우현은, 도민을 길바닥에 쓰러져 죽게 한 그 죄가 없지 않으나 성의를 다해 진제(賑濟)하였으므로 아직까지도 사모하고 있다 하니, 또한 공과(功過)가 서로 맞먹는다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8월 6일 임인
영릉(寧陵) 국내(局內)의 보토(補土)가 완료되었음을 고하자, 감독관인 지방관 채홍리(蔡弘履)를 특별히 지중추부사로 발탁하고, 능관(陵官)과 차사원(差使員) 등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대호군(大護軍) 송환기(宋煥箕)가 상소하여 녹봉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사양하는 바가 지나치다. 경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해당 도로 하여금 쌀과 고기를 대신 지급하게 하였는데 경이 어찌 다시 사양한단 말인가."
하였다.
8월 7일 계묘
이달 15일에 상이 장릉(章陵)을 참배하려 하는 일과 관련, 병조에서 행행할 때의 척후와 복병을 표신(標信)과 병부(兵符)를 내어 징발하기를 청하는 일로 계품하니, 윤허하고, 하교하기를,
"진무사(鎭撫使)가 중군(中軍) 종사관(從事官)을 거느리고 장려(壯旅)와 의려(義旅) 각 1초(哨)씩을 뽑아내어 통진 부사(通津府使)와 함께 어가(御駕)가 가기 하루 전에 김포(金浦) 숙소에 주둔해 있다가 표신을 기다려 계엄을 풀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상차(上箚)하기를,
"병조의 계목(啓目)에 대해 판부(判付)하신 것을 보고는 밤새도록 지극히 방황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전후로 성상께서 하교하시어 정신(廷臣)을 준절히 책망하시면서 매양 망령되게 헤아리고 억측으로 요량하는 것은 큰 죄라고 하셨는데,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옳긴 합니다. 그러나 망령된 헤아림과 억측의 요량도 매양 혹 불행히도 맞는 적이 있으니, 오늘날 전하의 조정에 북향하여 섬기는 자가 깜짝 놀라며 움찔 두려워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설사 참으로 다른 일은 없고 다만 보장(保障)의 군용(軍容)을 보고자 하실 뿐이라 하더라도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전하의 지나친 거조가 이미 적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무릇 국가가 군민(軍民)과 굳게 결속하여 위급한 때에 의뢰함이 있는 것은 하나의 신(信)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제 막 섬 지방의 농사가 여물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조련을 정지시켜 뭇 민정(民情)이 기뻐하고 감격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홀연히 장려(壯旅)와 의려(義旅)를 뽑아내어 주둔시켜 하룻밤을 지내게 한다면 기뻐하던 자가 시름겨워하며 기가 죽고 감사하며 축원하던 자가 놀라 의심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대중을 따라 급히 서두르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는데, 정성이 조금도 미더움을 받지 못하여 죄만 더욱 쌓일 뿐입니다. 오늘날의 국가 형세를 논하건대, 반드시 정항(鄭沆)148) 처럼 불가(不可)한 도신(道臣)만을 얻은 뒤에야 유지할 수가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진무사(鎭撫使)가 나가 주둔하라는 명을 특별히 중지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선조(先朝)께서 행행하여 서교(西郊)에서 묵을 때의 호위도 진무영(鎭撫營)의 군병을 썼는데, 하물며 김포(金浦)의 숙소는 진무영과의 거리가 다만 근교(近郊) 사이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다면 해영(該營)의 군병을 조발(調發)하여 해군(該郡)의 숙소를 호위하는 것은 옛날의 전례에 비하면 크게 폐해를 제거했다고 할 만하고 또한 크게 비용을 줄였다고 할 만하다. 이에 앞서 조련을 정지하라는 명은 바로 이번에 뽑아내어 쓰기 위함이었다. 2만여 명을 휴식시키는 것을 2백여 명의 징발과 비교하면 그 많고 적음과 어려움과 쉬움이 또 과연 어떠하겠는가. 경이 차자로 진달한 것은 도리어 근래의 지레 헤아리는 속습(俗習)을 본받은 것임을 면하지 못하니, 저으기 경을 위해 취하지 않는 바이다. 의사로써 뜻을 지레 헤아리며 뜻으로써 일을 지레 헤아려 일마다 모두 지레 추측하는 공부를 쓰려 한다면 세상에 어찌 조처할 만한 일이 있겠는가. 또 진실로 이와 같다면 장릉(章陵)에 행행하는 것까지도 어찌 명령을 내리던 초기에 중지하기를 청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8월 8일 갑진
하교하였다.
"무릇 능에 행행하여 하룻밤을 묵고 올 적에는, 비록 하룻길이라도 호위하는 군병 및 담 밖에 배치하는 일을, 서남도(西南道)는 진무영(鎭撫營)과 총융청(摠戎廳)이 담당하고 동도(東道)는 수어청(守禦廳)이 담당하니, 이는 바로 옛날부터 행해 오던 예이다. 근래의 사례로 말하더라도 고양(高陽)·파주(坡州)에 갔을 때는 호위와 배치하는 일로 진무영과 총융청의 군병을 대부분 썼고, 광주(廣州)·이천(利川)은 또한 수어청 관하의 군사를 썼다.
그런데 근년에는 일마다 폐해를 줄임이 너무 지나쳐서 일체 모두 면제하였다. 만일 특별히 분부하여 면제함이 없으면 해조(該曹)에서는 전례에 따라 품지(稟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은 일마다 전례에 어둡기만 한데 이와 같이 하여 점차 오래되면 병조와 경외(京外)의 영문(營門)에서 마땅히 능에 행차할 때에 군병을 내어 호위하고 배치하는 사례를 모를 것이다. 병조로 하여금 등록(謄錄)에 기록되어 있는 전례를 뽑아내어 초기(草記)한 뒤에 서울의 군문(軍門)과 경기의 영문 및 개성(開城)·강화(江華)·광주(廣州)에 내어 주어 각각 베껴두게 해서 옛날 사례를 알게 하고, 또한 1건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등재하도록 하라."
8월 11일 정미
김달순(金達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안숙(安橚)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8월 13일 기유
사옹원 부제조 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
"무릇 행행하여 하룻밤을 묵을 때에는 그 지방에서 어공(御供)의 물선(物膳)을 올리므로 본원(本院)의 제조가 기일에 앞서 나아가니 이는 응당 행해야 하는 옛날 법입니다. 선조(先朝) 경오년149) 온천 행행 때에 폐해를 줄이려는 성상의 뜻으로 공상(供上)하는 물종(物種)을 본원에서 받아들이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근래에 행행할 때에도 매양 준행하였습니다. 다만 감면하는 것은 특은(特恩)에 관계되는 것인데, 외읍에서 알지 못하고 상례의 일로 보아넘기니 이것이 어찌 도리로 볼 때 감히 편안하게 여겨야 할 바이겠습니까. 이 뒤로 능원(陵園)에 행행할 때에는 늘 본원에서 초기(草記)하여 품정(稟定)해서 기영(畿營)에 알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것은 굳이 옛날 사례를 반드시 복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외읍으로 하여금 공상(供上)하는 정상적인 절차가 본래 이와 같음을 알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사체를 존중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 진배(進排)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기해서까지 어찌 꼭 금지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유진숙(柳鎭琡)을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8월 14일 경술
이문원(摛文院)에서 재숙(齋宿)하였다.
8월 15일 신해
선원전(璿源殿)에서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상이 장릉(章陵)으로 가던 도중에 어가(御駕)가 숭례문(崇禮門) 밖에 이르자 관왕묘(關王廟)에 들리고, 양천(陽川) 행궁(行宮)에서 주정(晝停)150) 하였다.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과 지방관 오태언(吳泰彦)과 각무 차사원(各務差使員) 오정원(吳鼎源) 등을 불러 보고 연로(沿路) 백성들의 고통을 물었다. 오태언이 아뢰기를,
"양천은 강가의 낮은 지방이라서 매양 물에 잠기는 근심이 많으니, 세월이 오래되자 떨어져 나간 토지가 29결(結)이나 되며, 정미년151) 이후로 점차 부치지 못하게 된 것이 49결(結)이나 되는데도 모두 재결(災結)에 포함되지 못하고 간혹 생판으로 징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니, 상이 세월이 오래되어 떨어져 나간 토지는 그 부세(賦稅)를 특별히 감면하고 정미년 이후에 떨어져 나간 것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부세를 감면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고(故) 상신(相臣) 김수동(金壽童)·김응남(金應南)·심수경(沈守慶)·김익(金熤)의 무덤이 어가가 지나가는 길가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하교하기를,
"고 영의정 김수동은 중흥 때를 당하여 위아래로 두루 다스렸으니 노성(老成)의 전형을 상상하여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그 무덤이 고을에서 7리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다. 고 우의정 김응남은 황제 앞에서 정책을 주달하여 칭찬을 받기에 이르렀고 중간에 군사에 관한 소임을 담당하면서 임기응변하였으니, 호종(扈從)한 공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고 우의정 심수경은 김응남과 동시의 명 재상으로 국가의 일에 근로하였는데 그들의 무덤이 또한 행차하는 길가에 있다고 한다. 세 대신의 무덤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고 영의정 김익의 무덤에도 그 아들인 중신(重臣) 김재찬(金載瓚)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제신(諸臣)이 물러갔을 때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신광리(申光履)가, 역적 인(䄄)이 위리(圍籬)를 뛰쳐나간 일로 치계(馳啓)하니, 상이 그 장계를 물리쳤다. 이에 대신·경재(卿宰)·각신·승지·삼사(三司)의 제신이 번갈아가며 면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오시(午時)가 지난 뒤에 상이 비로소 양천(陽川)의 행궁(行宮)으로부터 말을 타고 출발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말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 조정 신하의 죄가 하늘에 사무쳐서 또 섬의 역적이 위리를 뛰쳐 나간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사태가 너무도 위급하기만 합니다.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대신의 직에 있는 이상 일이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므로 의리상 일각도 지체할 수가 없어 곧장 환배(還配)하라는 뜻으로 방금 강화 유수에게 분부하였습니다만, 또한 감히 다급히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환배하라는 청을 어서 윤허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일단 환배를 청하였으니 나도 윤허한다. 비국(備局)에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비답을 받은 뒤에야 문적(文蹟)을 작성하고 문적이 있은 뒤에야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고,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아뢰기를,
"설사 문적이 있다 하더라도 죄인을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지 않으면 신들이 장차 어떻게 거행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고 마침내 출발하여 2, 3리(里)를 갔다. 이익운 등이 따라가면서 아뢰기를,
"대신이 주달한 말에 비답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는 내용으로 비지(批旨)를 써서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김달순(金達淳), 집의 이기양(李基讓), 부수찬 한치응(韓致應) 등이 소회를 진달하고, 배소(配所)로 잡아 돌려보내는 동시에 원계(原啓) 안에서 청한 바를 윤허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신의 청을 따랐다."
하였다. 천등현(天登峴)에 이르러 본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보고 고통을 물었다. 장릉(章陵)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한 다음 능에 나아가서 봉심(奉審)하고, 승지에게 이르기를,
"산의 형세가 비단을 펼친 듯하고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양쪽에서 호위하여 기세가 길게 멀리 뻗었으니 만년의 큰 복이 실로 여기서 기인하였다."
하였다. 재실(齋室)로 돌아와서 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의 후손 구규석(具圭錫) 등과 비변사 당상 이서구(李書九) 등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서구에게 하문하기를,
"선조(先朝) 갑인년152) 에 장릉에 행행하셨을 때에 연로(沿路)에 조세를 감면한 혜택이 어떠하였는가?"
하니, 이서구가 대답하기를,
"연로의 고을에는 대동미(大同米) 2두를 모두 감면하였고, 본 지방에는 정퇴(停退)한 그 해의 봄 대동미를 특명으로 탕감하였습니다. 대동미를 감면하는 것은 진실로 큰 혜택이기는 하나 전지가 없는 백성은 혜택을 고루 입지 못합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혹 요역(徭役)을 감면하기도 하고 혹은 예전 환곡(還穀)을 감면하기도 하는 것이 혜택을 널리 베푸는 방도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가을에 행행하여 장릉(章陵)을 배알(拜謁)하는 것은 우리 영고(寧考)153) 의 갑인년154) 의 성적(聖蹟)을 우러러 계술(繼述)하려는 것이다. 자리에 나아가 예를 행하니 이미 슬퍼져 감회가 일어난다.
삼가 생각건대, 매년 남전(南殿)을 참배할 적에 제3실(室)의 수용(睟容)155) 을 공손히 보면 마치 친히 말씀을 듣는 것만 같았다. 지금 와서 상설(象設) 앞에서 주선하니 혼령의 오르내림이 더욱 가까워서 지척에 임하신 것 같다. 간절한 소원을 조금 펴니 슬픔과 기쁨이 함께 이른다. 내가 여기에서 더욱 느껴지는 바가 있다. 배알하는 일을 봉행한 끝에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니, 큰 강의 남쪽에 높은 산이 천연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용이 오르고 봉황새가 날아 올라가는 듯하고, 강물이 빙 둘러서 빛나고 있다. 이미 이어지면서 멀리 뻗었으며 험준하지 않으면서 높으니, 아름다운 기운이 어린 바이고 길한 운세가 발원(發源)된 바로서 억만년토록 무궁한 복을 받게 될 형세라 하겠다.
우리 장릉(長陵)156) 의 지극한 효성이 위로 하늘에 사무쳐서 마침내 이 기막힌 명당 자리를 내려주셨다. 그리하여 먼저 부장(祔葬)하는 예를 경영하고 능을 옮김으로써 우리의 태산 반석과 같은 크나큰 터전을 열게끔 하셨다. 이날 이 땅에 마땅히 이 감회를 적고 이 뜻을 표시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본릉(本陵)의 국구(國舅)의 집은 공신의 집인 동시에 외척의 집이기도 하니, 대대로 우례(優禮)를 받는 것이 다른 외척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다. 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과 서원 부부인(西原府夫人) 신씨(申氏)의 묘소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집의 봉사손(奉祀孫)은 당연히 조용(調用)해야 하나 나이가 차지 않았으니 어느 때인들 할 수 없겠는가. 직계파(直系派)인 유학(幼學) 구규석(具圭錫)을 본릉 능관(陵官)에 단부(單付)하라. 그리고 본릉의 능관 홍석(洪)은 승서(陞敍)하고, 참봉 한백연(韓百衍)은 승륙(陞六)시키고, 수복(守僕)·수호군(守護軍) 등에게는 넉넉하게 시상하라. 본군의 지방관 홍대협(洪大協)에게는 대내에서 내리는 녹피(鹿皮) 1령(令)을 사급(賜給)하고, 도백(道伯) 이재학(李在學)에게는 표비(豹皮) 1령을 전례에 의하여 사급하도록 하라.
부로(父老)들에게는, 고을에 가면 고통을 물어보겠지만 우선 1년 동안 급복(給復)해 주되 근례(近例)에 따라 환향(還餉)의 모곡(耗穀)을 대신 감면하도록 하라. 이 고을의 오래된 환곡이 소민들의 뼈에 사무치는 폐해가 된다는 것을 익히 들었다. 향곡(餉穀)·환곡(還穀)을 막론하고 오래된 환곡으로 이름 지어진 것은 호방 승지(戶房承旨)가 읍민을 모아서 그 문서를 가져다가 불에 태움으로써 일분의 폐해라도 제거하도록 하라. 그리고 갑인년 행행 때의 의장(儀仗)의 아름다움을 보고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나이 70, 80 이상인 조관(朝官)·사인(士人)·서인은 각각 한 자급(資級)씩 올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재실(齋室)에서 출발하여 장차 김포군(金浦郡)으로 나가려 하였다. 이때 외정(外廷)에서는 역적 인(䄄)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우의정 이병모가 어가 앞에 나아와 아뢰기를,
"조금 전에 아뢴 것에 대해 이미 비답을 받기는 하였으나, 신들이 추환(推還)하지 못하는 것을 강화 유수가 또한 어떻게 찾아내어 잡아가겠습니까. 신들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승지 조진관 등이 번갈아가며 속히 유사(有司)에게 회부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엄숙하고 공경해야 할 자리에서 이렇게 번거롭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은행교(銀杏橋)에 이르러 경기 관찰사 이재학과 지방관 홍대협을 불러 보고 길가의 부로(父老)에게 고통을 물어보도록 명하였는데, 모두 오래된 환곡이라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하교한 바가 있다."
하였다. 어가가 김포 궁문 밖에 이르러 진무영(鎭撫營)의 호위 군사를 점열(點閱)하고 진무사 신광리(申光履)에게 호피 1령(令)을 하사하였다. 저녁에 김포 행궁에서 묵었다.
대신·경재(卿宰)·승지·각신(閣臣)·삼사(三司)의 제신(諸臣)이 면대(面對)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기 관찰사 이재학이 면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시임(時任)·원임(原任) 각신이 재차 상차(上箚)하여 속히 압송(押送)을 명하라고 청하고, 여러 승지가 아뢰어 속히 대신(大臣)·대신(臺臣)의 청을 윤허하라고 청하고, 삼사의 제신이 아뢰어 속히 아침에 하교한 대로 섬의 배소(配所)로 압송해 보내는 동시에 삼사의 원계(原啓)의 청을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보지 않았다. 우의정 이병모가 경재를 거느리고 합문(閤門)에 엎드려서 아뢰기를,
"신들이 강화의 보고를 잇달아 접하건대 섬에 유배된 역적이 뛰쳐나간 자취가 김포에 이르러 끊어지고 말았다 합니다. 이는 신들이 모두 알 뿐만 아니라 실로 군민(軍民)이 모두 함께 본 사실입니다. 도로 유배보내라는 청을 윤허하셨으니 받들어 주선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만, 강화부에서는 형세상 어떻게 할 수가 없고 묘당에서도 어떻게 지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외면상으로는 신들의 소청을 윤허하였으나 실은 윤허하지 않으신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습속이 참되지 못함을 민망히 여겨 일찍이 성(誠)이라는 한 글자에 간절히 마음을 쓰지 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강화의 역적 한 가지 일에 있어 지나친 거조가 없었던 바는 아니었으나 또한 일찍이 왔으면 왔다고 말하고 돌아갔으면 돌아갔다고 말하지 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환하게 밝히셨기 때문에 그가 돌아감에 미쳐서는 백관과 만백성이 금석(金石)처럼 봉행하였습니다. 그 근심은 지나친 거조가 정말 비상함에서 나온 것에 있을 뿐이었지 흉인의 종적이 향한 곳을 알지 못함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강화 유수의 보고를 보니, 어리둥절하여 그 단서를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비록 배소로 돌려보내려 해도 사세가 미치지 못하고 지휘도 할 수 없는 것은 앞서 진달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니 신들이 어찌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행궁(行宮)의 합문(閤門)에서 이런 거조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밝은 명을 내리시어 섬의 배소로 돌려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침에 경들의 말을 윤허한 것은 분란을 그치게 하려 함이었지 윤허한 뒤에 아끼거나 막으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조가(朝家)에서 상관할 바가 아닌데, 경들이 복합(伏閤)하니 이 무슨 거조인가. 이미 백일(白日)에 날아서 올라간 것이 아닌 바에는 참으로 이른바 ‘다만 이 산속에 있을 뿐이다.[只在此山中]’라는 것인데, 도리어 어리둥절하다는 등의 말을 계사(啓辭) 안에 어려움 없이 쓰는 것은 정말 어떻다 하겠는가."
하였다. 이병모 등이 재차 진계(陳啓)하니, 비답하기를,
"금방 돌려보냈다. 이미 보낸 뒤에 만 사람이 모두 보았으니 경들은 물러가도록 하라."
하자, 이에 제신이 물러갔다. 승지를 보내어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의 우저 서원(牛渚書院)과 정헌공(貞獻公) 윤우신(尹又新)·문열공(文烈公) 윤섬(尹暹)·충강공(忠康公) 윤형갑(尹衡甲)·충간공(忠簡公) 윤계(尹棨)의 무덤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문열공 조헌의 도덕과 절의는 해와 달처럼 밝게 빛나므로 그 유집(遺集)을 열람할 적마다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일어나곤 한다. 지난해 김 문정공(金文正公)157) 을 문묘(文廟)에 올려 제향할 적에 어찌 혹시라도 그 사이에 취하고 버리며 높이고 낮춤이 있어서 그렇게 했겠는가. 다만 아울러 거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아직까지 마음속에 걸려 잊혀지지 않는다. 듣건대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여기에서 바라다 보이는 거리에 있다 하니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정헌공 윤우신·문열공 윤섬·충강공 윤형갑·충간공 윤계의 일문(一門)의 충절은 항상 개연(愾然)히 흠모하던 바이다. 지금 그 묘소를 지나가면서 어찌 뜻을 보이는 거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선조(先朝) 갑인년의 고사에 의거하여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6일 임자
김포 군수(金浦郡守) 홍대협(洪大協)과 과천 현감(果川縣監) 김이유(金履裕)를 불러 보고 고을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을 물어보았다. 홍대협이 아뢰기를,
"본군의 민호(民戶)는 1천여 호에 지나지 않는데 군액(軍額)은 1천 7백여 명이니, 속히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도신(道臣)과 상의하여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김이유가 아뢰기를,
"개울이 되어버린 옛날 재결(災結) 13결(結)이 영재(永災)158) 에 들어가지 않아서 해마다 생판으로 징수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화성(華城)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김포 행궁에서 출발하였다. 수찬 한치응(韓致應)이 도중에 차자를 올리기를,
"어제의 일에 대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바로 환송(還送)한 것은 만 사람이 눈으로 본 바라고 확답하셨으므로 신들이 감히 믿지 않을 수 없어 모두 즉시 물러갔었습니다. 그런데 물러나서 들으니 분위기가 전혀 바뀌지 않았으며 밤부터 새벽까지 또한 한 사람도 돌려보낸 일에 대해 들어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교외의 황벽(荒僻)한 처소에서 홀로 역적 놈과 안온히 밤을 지냈는데, 대신·각신(閣臣)·삼사·시위(侍衛)의 신하는 태연히 사처(私處)에 물러가 거처하고 있었으니, 오늘날 신하의 분의(分義)가 쓸어낸 듯 다 없어졌습니다. 신들의 죄는 죽어도 남음이 있으니, 처분을 내려 신들의 불충(不忠)한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만 사람이 눈으로 확인하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여러 신하들이 대면을 청하며 합문(閤門)에 엎드려 있지 않는 날이 없을 것이니, 어서 삼사의 소청대로 전형(典刑)을 분명히 바루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어가가 능곡리(能谷里)에 이르러 머물러서 조금 쉬었다. 승지가 아뢰기를,
"대신이 옥당(玉堂)의 차자의 말과 관련하여 감히 반차(班次)에 태연히 있지 못하겠다 하여 산반(散班)으로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가를 수행하는 대신은 오직 한 사람뿐인데, 이처럼 의리를 내세워 피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였다. 낮에 부평(富平) 행궁에서 쉴 때 지방관 윤광석(尹光碩)을 불러 보고 조금 뒤에 출발하여 안산(安山)의 행궁으로 향하려 하면서 하교하기를,
"숙원(淑媛) 조씨(趙氏)의 묘소가 화유귀주(和柔貴主)의 무덤과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예전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어찌 슬픈 감회를 견딜 수 있겠는가. 어가가 지나갈 때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은 선릉(宣陵)159) 의 의빈(儀賓)으로서 그 묘소가 어가(御駕)가 지나는 길 옆에 있고, 영신군(永新君)과 함원군(咸原君)은 모두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후예로 그 묘소가 바라다 보이니, 또한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고 영의정 문간공(文簡公) 이천보(李天輔)가 수립한 우뚝한 공로를 내가 어찌 차마 잊겠는가. 지금 그 묘소가 있는 고을을 지나가니, 헌걸차게 조정에 출사하던 의용(儀容)을 마치 엄숙하게 앞에서 보는 것만 같다. 어가를 멈춰 출발을 늦추고 치유(致侑)의 제문(祭文)을 부르는 대로 쓰게 하여 그 손자인 대교(待敎) 이존수(李存秀)를 보내 유제(侑祭)하도록 하라. 고(故) 중신(重臣) 이문원(李文源)은 바로 훌륭한 그 아버지의 아들이다. 조정에서 벼슬할 적에 시속을 따르지 않았고 지위가 정경(正卿)에 이르렀는데도 아직까지 시호(諡號)가 내려지지 않았으니, 곧 본가로 하여금 속히 시장(諡狀)을 지어 홍문관으로 이송(移送)하도록 하라."
본부(本府)160) 의 부로(父老)를 길가에서 불러 보고 고통을 물어 보았다.
민회빈(愍懷嬪)161) 의 묘소에 이르러 헌작례(獻酌禮)를 행하고, 승지를 보내어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의 묘소에 치제(致祭)하게 하는 한편 전조(銓曹)에 명하여 그 사손(祀孫)을 녹용(錄用)하도록 하였다. 어가가 인천(仁川) 경내를 지나갈 때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로 세상에서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추대하는데, 소하(蕭何)의 약속(約束)162) 을 준행한 조참(曹參)처럼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준 이로는 고(故) 정승 하연(河演)을 또한 그 중의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그 묘도(墓道)가 행차가 지나는 길의 근처에 있다 하니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다년간 정승의 직책을 맡아 선대왕(先大王)의 건극(建極)163) 의 정치를 선양(宣揚)하고, 염담(恬淡)한 지조와 단아(端雅)한 도량으로 성대하게 현량한 보좌가 되어 양세(兩世)의 영의정으로 있었으니 더욱 드물고 특이한 일이라 할 만하다. 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유(致侑)하도록 하라.
고 상신(相臣) 김치인(金致仁)은 아직도 시호가 내려지지 않았다 하니, 평소에 예우하던 마음으로 볼 때 어찌 섭섭하지 않겠는가. 홍문관으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고 똑같이 치제하도록 하라. 신하가 성군(聖君)을 만나 마음이 맞은 경우가 예로부터 어찌 한이 있겠는가마는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것은 고 참찬(參贊) 구종직(丘從直)보다 성대한 일이 없다. 현명한 사람을 임용한 성덕(聖德)을 아직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지금 듣건대 그 묘소가 이곳에서 멀지 않다 하니,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가가 안산(安山) 행궁에 이르니 때는 이미 밤이었다. 우의정 이병모가 길가에서 지영(祗迎)하고, 앞에 나아가 말을 막고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울면서 아뢰기를,
"어제 저녁에 돌려보냈다는 성상의 하교를 신이 받기는 하였습니다마는, 경기 감영의 보고와 강화 유수의 장계가 하나도 도착하지 않고 있으니, 이 어찌 정말 몸둘 바를 모를 일이 아니겠습니까. 종묘 사직의 안위(安危)가 호흡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정녕히 말하였다. 어찌 혹시라도 경을 속이겠는가. 그런데 경이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인가."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차라리 왕의 말을 믿지 않는 죄를 받을지언정 신은 죽어도 감히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하여 지나친 거조를 취하는가. 국가의 체통과 신하의 분의에 크게 관계된다."
하고, 마침내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병모가 물러난 뒤에 다시 차자를 올려 섬에 정배한 역적을 배소로 도로 보내는 명을 분명히 내리라고 청하였으나, 회답하지 않았다.
8월 17일 계축
하교하기를,
"정안 옹주(貞安翁主)와 정정 옹주(貞正翁主)는 모두 장릉(章陵)164) 의 동기(同氣)인데, 정안 옹주는 금양위(錦陽尉)와, 정정 옹주는 진안위(晋安尉)와 합장하였다. 본릉(本陵)을 참배하고 또 이곳을 지나가는 일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내시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는 인조 대왕을 옹립한 공과 경국제세(經國濟世)의 계책으로 성대히 중흥의 명신이 되었다. 듣건대 그 묘소가 이 고을에 있다 하니,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자신이 폐부(肺腑)와 같은 지친(至親)의 처지에 있으면서 성조(聖祖)165) 의 즉위 초 청명(淸明)한 치화(治化)를 주밀히 도와 걸출하게 국가의 주석(柱石)이 되었으니,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과 회산 부부인(檜山府夫人) 황씨(黃氏)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우리 나라에 본디 현명한 국구(國舅)가 많으나, 문장과 공업(功業)의 성대함으로는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만한 이가 없다. 숭릉(崇陵)166) 어필(御筆) 신도비(神道碑)의 성대한 유적을 추모하니 배나 슬픈 생각이 든다. 고 부원군 장유(張維)와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 김씨(金氏)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그리고 고 판서 장선징(張善澂)에게도 똑같이 치유(致侑)하도록 하라."
하였다. 안산 행궁에서 출발하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우의정 이병모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비록 국가의 체통으로 처분하였으나, 경의 본정은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기에 전지(傳旨)를 특령으로 환수(還收)한다. 이제 바야흐로 원소(園所)167) 로 나아가니, 경은 들어와서 반열에 참여하라."
하였다. 어가가 수원(水原) 관문 밖 5리 지점에 이르러 길가의 부로(父老)를 불러 고통을 물어보니, 모두 묵은 환곡이 폐해가 된다고 말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위유(慰諭)하게 하기를,
"조정에서 알아서 선처할 것이니 각각 믿고서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라."
하였다. 낮에 수원 구포(鷗浦)에서 쉬면서 친히 지은 제문(祭文)을 내리며 이르기를,
"용백사(龍柏祠)는 곧 제갈 무후(諸葛武侯)168) 와 호 문정(胡文定)169) 을 주향(主享)하여 배식(配食)하는 곳인데, 충간공(忠簡公) 윤계(尹棨)가 이곳에서 살신성인(殺身成仁)했기 때문에 종향(從享)하고 있다. 시대는 달라도 의리는 똑같아 사람으로 하여금 감회를 자아내게 한다. 지방관은 【용백사는 남양(南陽) 지방에 있는데 구포(鷗浦)와 접경하고 있다.】 이미 승지를 지냈으니, 이 제문을 가지고 가서 읽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고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은 본디 사류(士類)로서 한 세상의 명신이 되었고, 그 아들 영의정 홍섬(洪暹)은 정직한 도와 아담한 인망으로 또 정승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그 대부인(大夫人)이 건강한 몸으로 장수하였으므로 ‘공손히 정경 대부인의 복록을 생각하니, 천상은 알기 어렵거니와 인간 세상에선 듣지 못했네. 순일(純一)한 덕으로 삼종지도(三從之道) 행했는데 그 모두 영상 자리 올랐고, 94살 향수하니 수성(壽星) 또한 높도다.’라는 시구가 시인의 가영(歌詠)에 들어가기까지 하여 오늘날까지 전송(傳誦)되고 있다. 두 대신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아담한 지조는 오늘날 흔히 얻기가 쉽지 않다. 고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의 묘소에 그 아들 내각 직제학(內閣直提學) 이만수(李晩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내시를 보내어 신빈(愼嬪)170) 의 묘소에 치제하도록 하였다. 어가가 수원 신음천(新音川)에 이르러 잠시 쉬고 화소(火巢)의 경계를 경유하여 옛 서문로(西門路)를 따라 현륭원(顯隆園)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도승지 조진관(趙鎭寬)이 향로를 받들어야 하는데 오지 않자 집례(執禮) 이기양(李基讓)을 동부승지로 특별히 제수하여 향로를 받들게 하고 원상(園上)에 나아가서 봉심(奉審)하였다. 소차(小次)171) 에 나아가서 각신(閣臣)·승지·사관(史官)에게 밥을 내렸다. 저녁에 수원 행궁에 머물렀다.
부교리 홍낙유(洪樂游), 부수찬 한치응(韓致應)이 연명(聯名)하여 상차하기를,
"행행하는 일이 있을 적마다 민폐를 줄이고 민력을 견감(蠲減)하는 데에 관계되는 방도에 마음을 극진하게 쓰지 않음이 없었으니, 도신과 수령이 된 사람은 진실로 성상의 생각을 우러러 체득하여 백성의 고통을 살펴서 조금이라도 폐해를 끼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연로에서 본 바로 징험해 보면 혹 바라다보이는 가까운 지점을 늘여 30리 길로 만들기도 하였고, 혹 지름길을 광막한 들판으로 돌아나가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도로의 원근이 아주 다르고 연로(輦路) 역참의 배정이 너무 길게 되어 어제 여위(輿衛)172) 의 행차가 밤이 되도록 우회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정말 송구하고 민망한 일이라 할 것인데 소민이 도로를 수리할 즈음에 삽질하는 노고와 여러 날의 비용이 또 어떠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작년 겨울 도로를 수리할 때의 도신과 수령을 모두 견책하여 삭직(削職)하는 벌을 시행하는 것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부평참(富平站)이 안산(安山)까지 명색은 40리이나 실은 거의 배나 되었다. 당해 도신과 지방관을 치죄하는 일을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8월 18일 갑인
낙남헌(洛南軒)에 나아가서 본부(本府)의 무사에게 활쏘기를 시험보여 차등 있게 시상하고, 각무 차사원(各務差使員)을 불러 보았다.
득중정(得中亭)에 나아가 작은 표적을 설치하고 왕이 다섯 차례 쏘았는데 화살 8발이 맞았다. 여러 장신(將臣)에게 편을 갈라서 활을 쏘도록 명하였다. 상이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에게 이르기를,
"행차가 지나온 고을 가운데 김포는 구환(舊還)173) 을 탕감하였고, 안산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인천과 부평의 제읍(諸邑)은 어떻게 혜택을 베풀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아뢰기를,
"남양 부사의 말을 들으니, 민정(民情)이 모두 구환의 감면을 원하나, 외람되이 감히 아뢰지 못한다 합니다."
하고, 장용 내사(壯勇內使)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근래 외읍의 환곡은 분부를 받들어 정퇴(停退)한 것도 있고 그대로 수납하지 못한 것도 있는데, 혼동하여 구환이라 일컫고 있는 등 너무도 뒤죽박죽입니다. 감면하는 절차를 차라리 간략하게 할지언정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환곡에서 모곡(耗穀)을 받는 것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온다. 백성에게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너무 많은데, 어찌 구환의 감면을 아끼겠는가."
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에 장릉(章陵) 참배를 인하여 다행히 한 해 안에 재차 원침(園寢)을 배알(拜謁)하게 되었는데, 경유한 길이 과천·시흥·김포·부평·인천·안산·광주·남양·수원 등 모두 10개 고을이다. 우리 백성의 혜택을 바라는 마음을 생각하건대 어찌 한갓 의장(儀仗)의 성대함만을 바라보게 할 수야 있겠는가.
김포는 처음 역참에서 묵을 때 선조(先朝) 갑인년174) 이후로 처음인 점을 감안하여 이미 특별히 혜택을 베풀었고, 양천도 감면하는 조처가 있어서 구환(舊還) 중 가장 오래된 연조(年條)의 것을 탕감하였다. 부평·안산의 구환은 가장 오래된 1년 조를 탕감하고, 당년의 환곡(還穀)에 대한 모곡을 특별히 면제하라. 인천·남양은 비록 행차가 지나가기만 한 고을이나 처음으로 의장을 본 곳이다. 지나간 곳의 백성들이 지고 있는 구환으로서 문서에 실려 있는 것은, 원근을 논하지 말고 지방관이 백성을 모아 놓고 효유한 뒤에 문권(文券)을 불태우라. 시흥·과천·광주만 유독 누락시킬 수는 없다. 하물며 처음 지나간 곳인데 또한 어찌 달리하겠는가. 출궁(出宮)과 환궁(還宮) 때 행차가 지나간 곳의 백성이 지고 있는 구환은 또한 그 문권을 불태우도록 하라. 구포(鷗浦) 역시 처음 지나간 곳인데 기유년175) 이후로 백성들의 편중된 노고가 많았다. 구환은 문권을 불태우고 환모(還耗)는 탕척하여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뜻을 보이도록 하라. 행차가 지나간 지방의 벼가 혹 짓밟힌 곳이 있으면 해당 도로 하여금 곡식 소출(所出)의 수량만을 환산해 주도록 하라.
그리고 유생은 제술(製述)에 응시하고 장교와 군졸은 활 쏘기를 시험 보게 하되 지난해 하교한 대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사관(史官) 김이영(金履永)을 보내어 행차가 지나간 고을의 민정(民情)을 염찰(廉察)하게 하였는데, 이때 와서 복명하여 아뢰기를,
"양천은 지형상으로 충분히 관개(灌漑)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해마다 빈번히 수몰되어 진황(陳荒)176) 이 서로 바라보이는 형편인데 부세(賦稅)는 여전합니다. 수령이 이따금 생판으로 징수하는 것이 민망할 경우 혹 3분의 1을 나누어 징수하기도 하고 혹 절반을 나누어 징수하기도 합니다. 비록 일구어 경작할 수 있는 묵밭이 있더라도 한 조각 땅을 일구자마자 전세(全稅)가 이록(移錄)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꺼려서 손을 대는 것을 이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번 묵은 땅이 되면 다시 개간될 희망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전지를 다시 측량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정(仁政)은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아 주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하물며 백성의 소원이 이와 같으니 어찌 서서히 할 수 있겠는가. 고을 수령에게 엄히 신칙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부평은 문서를 허위로 작성하고 생판으로 징수하는 폐단이 양천(陽川)과 대체로 같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전지를 다시 측량할 때에 예전의 묵밭에 대해서는 부세를 감면하는 것이 많았으나 현재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서는 늘려서 책정하는 폐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책정된 숫자가 너무 중하여 백성이 감당하지 못하므로 전지를 버리고 경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묵밭에 대한 부세를 징수할 곳이 없게 되자 민간에 나누어 징수하여 그 부세를 충당한다 합니다. 백성의 큰 고통치고 이것보다 더 큰 것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전에 다시 측량하던 때에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한 해당 수령에 대해서는 도백으로 하여금 이름을 지적하여 장문(狀聞)하게 하고, 현재의 수령으로 하여금 미루지 말고 속히 다시 측량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부옥(府獄)에서 대죄(待罪)하니, 사관을 보내어 돈유(敦諭)하기를,
"그때의 처분은 곡진하게 경을 위하여 짐짓 조정해 줌으로써 고집하는 바가 펴지게 하는 동시에 나라의 기강도 펴지게 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다가 곧바로 명을 환수(還收)했고 보면 경의 입장에서도 넉넉하게 의거할 바가 있게 되었고 공사(公事)에 있어서도 매우 원만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머뭇거리고 있다니 이는 경에게 바라던 바가 결코 아니다. 안심하고서 대죄하지 말고 곧 반열에 참여하라."
하였다.
8월 19일 을묘
어가를 수행한 장신(將臣)에게 명하여 군병을 위로하게 하였다. 화성 행궁을 출발하여 지지대(遲遲臺)에 이르러서 조금 쉬고, 다시 출발하여 시흥 행궁에서 주정(晝停)하였다. 도중에 용양(龍驤) 봉저정(鳳翥亭)에 들러 하교하기를,
"연로(輦路)가 지나가게 되는 길을 손꼽아 보니 슬픔과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육신사(六臣祠)·사충사(四忠祠)·노강서원(鷺江書院)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교(舟橋)에 이르러 주교 당상(舟橋堂上)에게 이르기를,
"선부(船夫)가 1년에 두 차례나 부역을 당하니 노고가 매우 심하다. 오늘 즉시 풀어 보내어 생업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환궁(還宮)하여 84건의 상언(上言)에 판하(判下)하였다.
용인(龍仁)의 유학(幼學) 안석광(安錫光)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의 6대조 안홍국(安弘國)은 힘껏 싸우다가 만력(萬曆)정유년177) 6월 19일 안골포(安骨浦) 앞 나루에서 한 몸을 바쳤는데,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는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과 7월 15일 한산도(閑山島)의 군진(軍陣)이 무너질 때에 같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죽은 것은 같으나 싸우다가 죽은 것과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은 아주 다릅니다. 뜻을 두었던 일이 이로 인하여 묻혀버리고 공적이 이로 말미암아 없어졌으니, 삼가 바라건대 특명으로 《충무공전서》에 고쳐 기록하게 해 주소서."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힘껏 싸우다가 죽은 것이나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이나 죽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용맹함과 비겁함은 판이합니다. 지명과 날짜가 이처럼 서로 틀리니, 당초 책을 편집한 신하로 하여금 사적을 다시 상고해서 사실대로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공사(公私)의 문적을 다시 고증하게 한 뒤 바로잡아야 하거든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0일 병진
관서 안핵 어사(關西按覈御史) 여준영(呂駿永)을 불러 보았는데, 하직 인사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수재를 입은 해서(海西) 9개 고을에 바로 수의 어사(繡衣御史)를 차임해 보내어 위유(慰諭)해야 했으나 해당 도에서 장계를 올려 구별해서 보고해 오기를 기다리려고 하였다. 이제 해당 도의 장본(狀本)이 당도하였으니 관서 어사 여준영으로 하여금 해서의 재해 입은 여러 고을을 겸해 살펴보게 하라. 그 가운데 곤궁한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자는 환곡(還穀)이든 군포(軍布)든 감면하거나 혹은 정지시켜 주도록 하라. 이와 함께 또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위로하게 하고 미처 집을 짓지 못한 경우에는 도백과 수령을 엄히 신칙하여 기필코 춥기 전에 몸을 가릴 수 있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1일 정사
식년 감시(式年監試)의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상소하기를,
"신이 불충하고 형편없어 이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 되돌리지 못하고 또 일에 임해서도 신하의 분의를 다하지 못하여 마침내 강루(江樓)의 일이 곧 금릉(金陵)의 저녁에 있게 하였으니, 첫째도 신의 사죄(死罪)이고 둘째도 신의 사죄입니다.
밝은 분부를 받든 뒤에 크고 작은 관원을 막론하고 머리를 모아 서로 고하면서 목을 늘이고 애타게 기다린 것은 오직 환배(還配)되었다는 강화 유수의 보고뿐이었는데, 해가 저문 노차(路次)에 전혀 동정이 없었을 뿐더러 한두 가지 들리는 소문은 갈수록 의심스러운 것뿐이었습니다. 신이 이때에 취한 듯 미친 듯하여 호소할 데가 없었으므로 1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어가 앞에서 호소하면서 그 죄가 죽음에 이르는 것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신은 듣건대, 근심이 깊은 자는 생각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고 정황이 급한 자는 소리가 빠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생각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게 되면 명신(名臣)도 오히려 지나친 계책을 세우게 되고 목소리가 빠르지 않을 수 없게 되면 장엄한 선비도 오히려 혹 의용(儀容)을 잃는 법인데, 하물며 신처럼 학문은 정정(靜定)의 방도가 없고 성품은 조급하고 경솔한 병통이 있는 자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저 심정을 어떻게 가눌 수가 없기에 스스로 지엄한 법을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신하의 죄가 이 중에서 한 가지만 있어도 부월(斧鉞)도 가벼운데 이 세 가지의 큰 죄를 졌으니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어서 유사(攸司)로 하여금 신에게 해당하는 율을 의논하게 하여 법과 기강을 밝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날 밤 창졸간에 설사 잘못된 거조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지나간 일이니 말할 필요가 없다. 구비하기를 바라는 견책과 전지를 환수한 일에 이르러서는 어느 것이나 곡진하게 경을 위한 것이 아님이 없고 겸하여 사체가 구차함에 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경이 어찌 다시 거론하며 사양한단 말인가."
하였다.
8월 22일 무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도기유생(到記儒生)의 강(講)과 제술(製述)을 시행하였다. 강에서 수석을 한 유학(幼學) 이유채(李惟采)와 전(箋)에서 수석을 한 생원(生員) 이석호(李錫祜)는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춘당대에 나아가 서총대(瑞蔥臺)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상이 어가를 수행했던 군병이 여러 날 호종(扈從)한 노고를 생각하여 다시 활쏘기와 포쏘기를 시험 보여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8월 25일 신유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이 아뢰기를,
"이번 연로(輦路)의 고을로서 김포·부평·안산 등의 고을 백성들은 모두 당년의 환곡의 모곡을 감면받는 혜택을 입었으나 양천만은 홀로 동일하게 대우받는 혜택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똑같이 모곡을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8월 26일 임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무예청(武藝廳)의 활쏘기 시험을 행하였다.
8월 27일 계해
춘당대에 나아가 내금위(內禁衛)의 활쏘기 시험과 마병(馬兵)의 무예 시험을 행하고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영남의 군포(軍布)를 분기(分期)로 나누어 돈으로 대신 납입하게 하고, 해서의 군포는 내년 9월까지 돈으로 대신 납입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영남과 해서의 두 도에 목화가 흉작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8월 28일 갑자
충청도 수군 절도사 유진숙(柳鎭琡)이 하직 인사를 하자 불러 보았다. 상이 그가 쇠한 것을 민망히 여겨 특별히 파직하고 이문혁(李文爀)을 대신 임명하였다.
8월 29일 을축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과 전경 문신(專經文臣)의 강과 제술(製述)을 거행하였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이에 앞서 광주부 유수 홍억(洪檍)이, 본부(本府)의 공도회(公都會)를 설행(設行)해야 할 텐데 판관(判官)이 음관(蔭官)이어서 시험에 참여할 수 없다고 품지(稟旨)하니, 상이 예조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예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본부에 이미 소속된 문관이 없으니, 매번 도회시(都會試)의 날짜를 정한 뒤에 본부에서 경기 감영에 공문을 보내도록 하고, 경기 감영에서 도내의 문관 출신 수령이나 찰방(察訪) 중에서 차정(差定)케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을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권유(權𥙿)를 이조 참판으로, 윤장렬(尹長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남포현(藍浦縣)의 신안면(新安面) 무이봉(武夷峰)에, 유생(儒生)들이 남양사(南陽祠)에서 제갈량(諸葛亮)을 제사 지내는 의리를 모방하여 주자(朱子)의 영당(影堂)을 창건하고 얼마 뒤에 또 고려의 명현(名賢)인 백이정(白頤正)의 사당을 그 옆에 지었다. 관찰사 한용화(韓用和)가 서원을 창건하는 것은 금령이 있다 하여 본현(本縣)에 관문(關文)으로 알려, 주자의 영정(影幀)은 전일 봉안(奉安)하던 곳에 도로 봉안하고 백이정의 사당은 헐어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해당 현감의 죄를 계청(啓請)하여 전임 현감 권손(權襈)과 시임 현감 윤기(尹愭) 모두를 나문(拿問)하여 죄를 감정(勘定)하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사성 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
"주자의 화상을 모신 서원도 장차 헐어버리려 한다 하는데, 이미 만든 뒤에 곧바로 또 헐어버린다면 매우 불경스럽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조정에서 알 바가 아니니 경이 해당 도신과 좋은 쪽으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한용화가 마침내 헐어버렸다.
8월 30일 병인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장릉(章陵)은 계양산(桂陽山)을 안산(案山)으로 하고 비단 병풍처럼 둘러싸여 지세가 매우 좋다. 이번 행차에 사실을 기록함이 없을 수 없으니, 숙종(肅宗) 어제운(御製韻)을 삼가 차운(次韻)하여 현판에 걸어놓도록 하라. 그리고 선조(先朝)께서 늘 ‘더디고 더디어라 지는 해 한 해를 보내는 듯하구나[遲遲入日度如年]’이라는 구절을 읊으시던 것을 삼가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슬픈 감회가 일어 난다. 옛날에 듣건대 김안로(金安老)는 조수(潮水)를 40리까지 통하게 하여 원통현(圓通峴)에 이르러 그쳤다 하는데, 이곳은 만년토록 감싸 호위하는 땅이니 어찌 인력으로 파고 깨뜨릴 여지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원자(元子)가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상이 원자에게 분부하여 일과(日課)로 지은 시문(詩文)을 가져다가 채제공에게 보이도록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어가는 맑은 새벽에 출발하고 깃발은 1백 리에 붉게 빛난다[鑾駕淸晨發 旌旗百里紅]’라고 한 이하의 여러 구절을 보건대, 애연(譪然)히 천성에 근본하여 발로된 것임을 알겠으니 더욱 감탄하게 됩니다. 또 ‘태평스런 풍경의 큰 거리 위에 격양가 소리 곳곳에서 들린다[煙月康衢上 處處擊壤歌]’라는 구절도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태평시대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왕(聖王)이 일어나서 치화(治化)가 사람에게 흡족하면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 이런 점을 그야말로 깊이 생각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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