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병신
비변사가 아뢰기를,
"제도(諸道)의 곡부(穀簿) 중에 정퇴조(停退條)와 구환조(舊還條)가 흔히 구별되지 아니하여 오래 될수록 더욱 문란해지고 있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제도(諸道)가 거행하는 데 혼란이 일어나고 본사(本司)도 장부를 조사할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병진년203) 이전의 것에 대해서는 정퇴조(停退條)와 미봉조(未捧條)를 따질 것 없이 일체 아울러 구환(舊還)으로 소속시키고, 반드시 본사(本司)가 품정(稟定)하여 행회(行會)하기를 기다려서 받아들이도록 하소서. 그리고 금년부터는 별도로 규정을 만들어 모년(某年)에 정퇴한 것은 그 이듬해에 묘당(廟堂)의 통지를 기다릴 것 없이 새 환자곡과 똑같이 받아들이게 하소서. 또 만일 이듬해에도 그대로 정퇴시킬 경우에는 그 다음해부터 구환(舊還)에 소속시키되, 제도(諸道)에서 환곡을 다 받아들인 장계를 올릴 때에 정식에 의거하여 구환에 소속시킨다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 아뢰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여주 목사 이병정(李秉鼎)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취소하였다.
10월 3일 무술
각 능을 보토(補土)할 때에 큰 곳은 예조 및 경기 감영에 보고하고 작은 곳은 본능(本陵)에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10월 4일 기해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동래(東萊)에 표류해 온 배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아마도 아란타(阿蘭沱) 사람인 듯하다.’ 하였는데, 아란타는 어느 지방 오랑캐 이름인가?"
하니, 비변사 당상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효종조(孝宗朝)에도 일찍이 아란타의 배가 와서 정박한 일이 있었는데, 신이 어렴풋이 일찍이 동평위(東平尉)204) 의 문견록(聞見錄)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아란타는 곧 서남 지방 번이(蕃夷)의 무리로 중국의 판도(版圖)에 소속된 지가 또한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명사(明史)》에서는 하란(賀蘭)이라고 하였는데 요즘 이른바 대만(臺灣)이 바로 그곳입니다."
하자,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주달한 바가 두루 흡족하니 참으로 재상은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서구에게 이르기를,
"어제 환곡 분류안을 보건대, 영남의 곡부(穀簿)는 겨우 1백 54만 석뿐이었고 호남은 겨우 1백 37만 석뿐이었으니, 저축이 해마다 점차 줄어드는 것이 이와 같다. 영읍(營邑) 문부(文簿)가 착오되고 어지럽게 된 것도 근일보다 심한 적이 없으니 경은 모름지기 마음에 유념하고 조사해내어 기필코 바로잡도록 하라. 기벽(奇僻)한 책을 탐독하는 것에 비하면 어찌 실지 공부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사복시 제조 이병모가 전곶(箭串)의 목장에 나무를 심도록 신칙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전곶 목장의 목마(牧馬)로서 수명(修明)의 효과를 시험해보려 한 지 오래되었다. 자문한 것이 정중하였으나 오늘날까지 미루게 된 것은 다만 기강이 예전과 같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옛날 팔도의 인부를 동원하여 성의 담을 건축하되, 용마봉(龍馬峰)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전곶에 이르고 북쪽으로 영포(泠浦)에 이르렀는데, 전곶에서 그 바깥은 둑도(纛島) 일대를 한계로 삼았다. 영포의 내계(內界)는 곧 큰 시내의 직류(直流)로 남쪽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려 서쪽으로 돌아 배봉(拜峰)에 이르렀으며 배봉에 이르러 또 목책(木柵)을 세우고 문을 설치하였다. 그 주위가 이처럼 넓고 멀며 경영한 것이 저처럼 두루하고 컸다.
산의 바깥 담 밑에 들 1백 묘(畝)를 떼어서 백성들에게 경작해 먹게 하였고, 그것을 경작해 먹는 사람은 모두 관에 의해 먹고 사는 사람으로 모두 목장에 예속되었다. 산과 강이 그 형세를 도와주고 농민이 그 노력을 함께 하였다. 목장 안의 동서 남북 일대는 곧 천 마리 말을 방목하고 만 마리 말을 기를 수 있는 곳으로서 역정(驛亭)의 이름을 화양(華陽)이라 불렀는데 지방 또한 명구(名區)이니 명마(名馬)가 이로부터 산출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온갖 법도가 어지러워져 이른바 박배(朴排)의 법이 일어나면서 독도와 전곶의 사이의 말을 기르는 목장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말에 해가 되고 목장에 방해되는 일이 한둘이 아니어서 목장 주위의 안팎이 해독이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무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밭이랑 논두렁이 질서 정연하게 있으며, 심지어 빈 땅의 갈대는 모두 궁방(宮房)에서 떼어 받는 과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대체로 육지에서 사용하는 것으로는 말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 땅에서 말을 길러 동성(東城)의 가리개로 삼은 것이 어찌 단지 마정(馬政) 때문이겠는가. 또한 거리에도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장을 훼손하는 것도 부족해서 그지없이 소홀하게 관리하고 있다.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으로서는 누가 마정(馬政)의 수명(修明)에 유의하려 하지 않겠는가마는, 기강이 확립되지 않으면 다른 일은 모두 구차하게 될 뿐이다. 그래서 수습하지 못한 채 그냥 내맡겨두어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연전에 한 대신이 수명(修明)에 뜻을 집중하여 큰 말을 사들여 그 목장을 충실하게 하고 암말을 모아서 그 종자를 번식시키며 게다가 나무 심는 정사까지 지성껏 행하였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생각하기를 ‘가장 좋은 방법은 독도의 물을 능히 회복하여 박배(朴排)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박배 밖의 논과 밭 전체를 가지고 빙 둘러 호위하는 형상을 만들되, 마치 사전(私田) 8정(井)이 공전(公田) 1정(井)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이 장성(長城)처럼 굳게 하는 것이니, 그러면 마정(馬政)은 수명(修明)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수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시험해보도록 하였다.
한데, 가장 좋은 방법과 그 다음의 계책에 대해서는 그만두고라도, 그 뒤에 행한 바 망아지를 길들이는 대절(大節)과 세목(細目)에 있어서 과연 날로 계산하고 달로 계산하며 해로 계산할 만한 실효가 있는가. 다만 나무를 심는 한 가지 일에만 잗달게 얽매일 수는 없다. 경들 이하의 관원들은 정성을 다하여 힘써서 이 수명하는 일이 명실상부하게 되도록 하라. 지리(地利)와 마정(馬政)에 있어 옛날 창설한 성모(聖謨)와 굉규(宏規)를 생각한다면 경들만 영광스럽게 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수명(修明)이 당연한 도리임을 자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경들은 모두 각각 마음을 다하라."
하였다.
10월 5일 경자
어용겸(魚用謙)을 이조 참의로, 이태영(李泰永)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비변사가 전라도 관찰사 이득신(李得臣)의 재실 분등 장계(災實分等狀啓)에 대해 복주(覆奏)하기를,
"면리(面里)별로 등급을 나누면 매양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이는 일이 많으므로 의논하는 사람들이 흔히 불편하게 여깁니다만, 금년도 호남과 영남의 농사에 대해서는 이 법을 쓰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니 그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득신이 삼군문(三軍門) 및 악공(樂工)의 보미(保米)를 우심한 고을과 버금가는 고을은 돈으로 대신 받아들이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변사가 복계하기를,
"이미 면리별로 등급을 나누게 한 상황에서 버금가는 고을까지도 통틀어 동일하게 돈으로 수납하게 한다면 도리어 균등하지 못하다는 탄식이 있게 될 것이니, 우심한 고을 및 버금가는 고을 중 우심한 면리에서만 돈으로 대신 수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상이 비변사 당상 이서구(李書九) 등에게 이르기를,
"악원(樂院)의 보미(保米)가 호남의 하나의 큰 폐단이 되고 있다는데, 경들도 일찍이 들어 아는 바가 있는가?"
하니, 이서구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었으므로 이 폐단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본도에서 거두어 바칠 때에 일단 기준에 맞게 받아들여도 해원(該院)에 상납할 적에는 지나치게 거두어들이는 것이 본도보다 배나 되니 감색(監色)이 포흠(逋欠)하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에 속합니다. 해도(該道) 민읍의 폐해가 되는 것을 심상하게만 말할 수 없으니, 이는 빨리 바로잡아 개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10월 6일 신축
관서 안사 어사(關西按査御史) 여준영(呂駿永)이 장계를 올리기를,
"신이 개천군(价川郡)에 달려가서 현재묵(玄在默) 등이 관장(官長)을 무함(誣陷)한 일을 여러 방법으로 조사해 캐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본군의 수교(首校) 김회항(金晦恒)이 향임(鄕任) 등과 어떤 일로 인하여 다투었습니다. 그러자 현재묵이 고을 사람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연초의 향음(鄕飮)·향악(鄕約)의 윤음(綸音)을 가지고서 객사(客舍)에 모여 장차 김회항을 때려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에 그 고을 수령이, 윤음은 사체가 지극히 중하다고 하면서 호통을 쳐 동헌(東軒)으로 옮겨 모시게 하였는데, 향인들이 관정(官庭)에 뛰어들어 크게 날뛰고 소리치고 꾸짖으며 여러 사람을 내어 장교 한공우(韓公羽)를 구타하려 하였습니다. 한공우의 아들이 칼을 휘두르며 가로막으니, 현재묵 등이 마침내 ‘마음대로 병기를 내었다.’고 말하면서 고을에 통문을 보내고 순영(巡營)에 소장(訴狀)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통문의 말을 보면 고을 수령을 공갈 협박하려는 계획에 지나지 않았고, 감영에 보낸 소장에 비록 효경(梟獍)으로 지목한 대목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비방하여 욕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이 가하고 곧바로 무함(誣陷)의 죄과(罪科)로 돌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다만 형리(刑吏)에게 보낸 글에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하였는데 살기가 등등하고 유혈(流血)이 낭자했으니 무신년 이후에 처음 보는 일이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장교 한가(韓哥) 등을 가리킨 듯하고, 그 아래에 ‘역적을 옹호한다.’는 등의 말은 곧장 고을 수령을 몰아붙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데도 해당하는 형률을 쓰지 않으면 잘못된 습관을 장차 징계할 수가 없을 것이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의논드리기를,
"사람을 무고한 형률로 반좌(反坐)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우의정 이병모는 의논드리기를,
"사람을 무고한 사람에게 반좌(反坐)하게 하는 것은 정해진 법전이 있습니다. 통문(通文)과 의송(議送)에서의 어구 구성을 보면 모두가 망칙하니, 그가 운운한 바의 죄로 반좌한다면 그도 또한 무슨 말로 변명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무고와 무욕(誣辱)은 단락이 아주 다른데, 사형으로 곧바로 의논하는 것은 아마도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형배(刑配)하게 하는 것이 아마도 실형(失刑)에 이르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형조가 아뢰기를,
"죄가 중률(重律)에 관계되면 문무관의 관찰사가 계문(啓聞)하여 고신하도록 법전에 실려 있는데, 하물며 이 안사 어사(按査御史)는 사체(事體)가 더욱 특별하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현재묵은 어사로 하여금 곧바로 죄상을 심리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판하하기를,
"이 어사의 장계를 보면 본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다. 어사의 장계에 이른바 ‘통문의 어구 구성은 공갈하는 계획이 지나지 않고, 의송(議送)의 구어(句語) 역시 비방하여 욕하는 것으로 단정하는 것이 가하고 무함의 죄과에 바로 돌리는 것은 불가하다.’ 한 것이 간략하면서도 극진하다. 또 그의 공초(供招)에서도, 저쪽 편 한 사람이 칼을 뽑은 것에 대해 무신년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라고 하였고 보면 ‘군사를 일으켰다…….’ 한 것은 관장을 지척한 것이 아닌 듯하다. 따라서 곧장 사람을 난역을 모의한다고 무고한 형률로 시행한다면 사뭇 제목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먼 지방의 풍속이 지극히 완악하여 명분이 날로 허물어지고 있으니 만일 촉(蜀)을 다스리는 법205) 을 적용하여 한 갑절 더 가하는 율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후일을 징계하고 다른 사람을 경계하겠는가. 죄인 현재묵은 어사의 장계에서 논한 대로 감단(勘斷)하되, 율명(律名)은 우상의 의논대로 시행하라. 그리고 그밖의 일은 어사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추치(推治)하게 하라."
하였다.
이문회(李文會)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심환지(沈煥之)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 위백규(魏伯珪)가 기한이 지나도 출사(出仕)하지 않으니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위백규의 저술을 살펴보건대 문식(文識)은 우선 그만두고라도 만약 그 가정에서 행실이 아무것도 없다면 필시 이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위백규가 선소(宣召)할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다. 먼 데 사람이 위백규를 보고 거울로 삼을텐데 스스로 뻐기는 자들이 모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 버릴까 염려되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조정에서 위백규에게 단연코 관직을 주려 하는 것이 어찌 위백규에게 혹 사정을 두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결코 부질없이 벼슬을 떨어뜨릴 수는 없다. 오늘 정사에서 본도의 묘령(廟令)이나 전령(殿令) 가운데 하나로 바꾸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7일 임인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상이 경모궁을 참배할 적마다 월근문(月覲門)을 경유하여 가고 시위(侍衛)도 다만 입직(入直)하는 군병을 사용하였었다. 그런데 이날은 법가(法駕)를 갖추어 관현(館峴)을 경유하였는데, 법가 뒤에 별초(別抄)로 이른 자는 겨우 수삼 명뿐이었으며, 오직 금군 별장(禁軍別將) 유효원(柳孝源)이 금군을 거느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이 유효원에게 상현궁(上鉉弓) 1장(張)을 하사하고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한풍(李漢豊)은 추고하였다.
재실(齋室)에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에 이르기를,
"개천(价川)의 현재묵(玄在默)의 일에 대해서 어제 이미 판하하였다. 그런데 현재묵은 이름이 조적(朝籍)에 올라 있는만큼 해당 고을에서 추치(推治)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 나머지 각 사람에 대해서까지 추치(推治)하지 못하여 번거롭게 안사(按査)의 일이 있게 하였으니, 이와 같은 수령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해당 수령 신응선(申應善)을 전조로 하여금 다시는 의망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우참찬 심환지가 아뢰기를,
"정리(整理)의 명칭은 능행(陵幸) 때에 호조 판서를 정리사(整理使)로 삼은 전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어버이를 사랑하는 성효(聖孝)로 지난번 천만 년에 한 번 만나는 경사를 당하여 자궁(慈宮)의 법가(法駕)를 받들고 화성(華城)에 나아가서 만세를 축수하는 성전(盛典)을 거행하셨습니다. 그때 위로는 내부(內府) 공억(供億)의 비용에서부터 아래로 종관(從官) 군마(軍馬)의 노자와 양식의 자본에 이르기까지 대농(大農)206) 의 경용(經用)과 영읍(營邑)의 공급을 번거롭게 쓰지 않고 성지(聖智)를 묵묵히 운용하여 별도로 구획(區劃)하셨으니, 이것이 정리 제신(整理諸臣)이 받들어 거행하게 된 까닭입니다. 성상께서 하교하시기를 ‘이해 이날을 당하여 이 땅에서 이 예를 행하였다. 백성은 내 적자인데 이미 집집마다 소고기와 술을 주어 사람들이 모두 취하고 배불리 먹게 하지 못하였으니 내 마음에 어찌 서운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정리소에서 쓰고 남은 돈을 제도(諸道)에 나누어주어 한 냥의 돈으로 피곡(皮穀) 한 포(包)를 바꾸어 만들어 그 명년부터 봄에 흩어주고 가을에 거두어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혹 종자의 밑천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농사철의 양식으로 삼게 하기도 함으로써 우리에게 아름다운 종자를 끼쳐주어 유구히 전하게 하였는데, 이는 자궁의 은혜를 널리 베풀려는 성상의 효심에서 나온 것으로서 계속 여유가 있게 하는 은력을 남겨둠으로써 서민을 잘 살게 하는 근본으로 삼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비록 어리석고 미천한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그 한알 한알의 곡식이 모두 은혜에서 나온 것으로서 사람마다 같이 경하(慶賀)하게 하려는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을 알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을묘년 정리곡(整理穀)을 설치하게 된 까닭입니다.
그런데 만일 감영이나 군읍의 신하가 한결같이 법을 농락하는 간인(奸人)에게 내맡겨둔 채 성상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입니다. 더구나 재작년 호서에서의 거행이 소란해짐으로써 비변사의 계(啓)가 올라가서 신칙하는 하교가 계시기에 이르렀고 보면 듣고 보는 바에 여러 사람이 모두 경동(警動)하여 두려워할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남쪽 지방의 여러 읍에서는 오히려 혹 돈으로 나누어 주고 정미(正米)를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곳이 있는데 돈 수십 문(文)을 나누어주고 쌀 7, 8두를 거두어들이고서 그것을 정리곡(整理穀)이라 한다 합니다. 그밖에 제도(諸道)에서도 봄에 수십 닢을 흩어주고 가을에 3, 4배를 거두어 들이는데, 돈을 돌려주는 것이 습속이 되어 이익을 꾀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하니, 민간에서 전하는 말이 듣는 이로 하여금 놀라고 의혹스럽게 합니다.
성상께서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을 균일하게 보아 자전의 은덕을 널리 베풀려 하는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마음을 막아서 행해지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하다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묘당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해서 적발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정리곡(整理穀)의 설시(設施)는 을묘년에 자궁의 축수를 올린 뒤 자궁의 은혜를 넓히고 오래도록 뻗치게 하려는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반드시 피곡으로 나누어주게 한 것은 봄에 한 말을 심고 가을에 만 알을 거두어 들여 끊임없이 낳고 낳아 천년 만년토록 영구히 전하는 의미를 겸해 붙인 것이었다. 그러니 설사 불량하고 염치없는 아전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이익을 도모하는 계획을 낸단 말인가. 돈으로 나누어주고 쌀로 받아들이는 것의 놀랍고 밉살스러움은 우선 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히 여기에서 긁어모으고 감히 여기에서 거두어들이다니 그런 죄는 장오죄(贓汚罪)로만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이 이미 발각되었는데도 만일 엄한 법으로 중히 다스리지 않으면 어떻게 소민(小民)에게 사죄하겠는가. 그리고 어찌 이 덕을 펴는 일로 하여금 한결같이 서로 반대되게 하도록 내버려두어서야 되겠는가.
오늘 여기에 와서 이 일을 듣는 자는 건도(乾道)가 더욱 밝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찰사가 칙려(飭勵)하지 못한 죄는 마땅히 나타나는 대로 등급을 나누어 감안하여 처분할 것이다. 먼저 각각 그 관하 열읍(列邑)에서 죄를 범한 사람을 일일이 적발하여 장계로 아뢰도록 하라. 그런데 하나라도 삼가 봉행하지 아니하여 혹 어사가 순행할 때 나타남이 있으면 그 도백은 우선 의금부에 잡아다가 금부의 문에 임해 친히 국문하여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보여줄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먼저 엄히 밝혀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정리곡(整理穀)의 설치는 정리소의 수용(需用)을 위한 것도 아니며 곡부(穀簿)를 불리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자궁의 은혜를 넓히고 한편으로는 자궁의 경사를 고르게 하여 장차 대소의 백성들로 하여금 은덕을 가득 누리고 그 기쁨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이해의 경축을 억만년토록 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령이 된 사람이 진실로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다른 모든 일은 비록 혹 만홀히 할지라도 이 정리곡에 있어서만은 그 누군들 감히 받아들이는 것을 정밀히 하고 그 지급을 일정한 기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중신(重臣)이 주달한 바를 들으면 정밀히 받아들이고 기준대로 지급하는 것은 우선 놔두고라도 돈 몇 푼을 나누어주고 미곡 8두를 거두어 들인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다른 곡식이라도 이러한 불법의 일은 일찍이 듣지 못한 바인데 하물며 이 정리곡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감히 소중한 정리곡 명목을 가지고 도리어 빙자하는 수단으로 삼아 마침내 골수에 사무치는 깊은 은혜로 하여금 마음대로 박탈(剝奪)하는 수단으로 삼도록 내맡겨 두었으니 일반적인 장오(贓汚)에 비하여 몇 만 배 이상의 죄입니다. 이를 적발하여 전형(典刑)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국가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적발하는 방법은 곡부(穀簿)에 농간을 부린 것과는 다르게 해야 합니다. 돈을 나누어 주었으면 본래 받아간 백성이 있을 것이고, 쌀을 바치게 했으면 또한 반드시 정해진 수량이 있을 것이니, 비록 은폐하려 해도 안 될 것입니다. 어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성화처럼 조사하여 먼저 금년에 범한 자를 지명(指名)해서 아뢰게 하여 법을 시행하는 소지로 삼고, 살피지 아니한 도신도 엄히 율을 적용해 처리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정리곡을 당초에 설치한 것은 또한 다 함께 기쁨을 나누려는 의의에서 나온 것이다. 주 부자(朱夫子)의 사창법(社倉法)의 의의를 취하여 봄에 흩어주고 가을에 거두어들이되 면리(面里)별로 돌아가게 하면 우리 백성이 자애로운 은혜를 입을 수 있게 될 것이므로 정리곡의 명칭을 두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시행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간사한 폐단이 이와 같으니 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중신의 아뢴 바가 매우 체통을 얻었으니, 알아주는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고, 드디어 심환지에게 표피(豹皮) 1령을 하사하였다.
조심태(趙心泰)를 우포도 대장으로, 정대용(鄭大容)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정대용이 일찍이 이조 참의를 지냈다 하여 상소하여 바꾸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10월 8일 계묘
이에 앞서 상이 원자(元子) 유선(諭善) 윤득부(尹得孚)에게 명하여 원자가 계속하여 강(講)할 책자를 밖에 있는 사부(師傅)와 유선에게 글로 물어보게 하였는데, 이때 와서 강학청(講學廳)이 아뢰기를,
"계속해서 강할 책자를 사부 및 유선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두 《대학(大學)》과 《사략(史略)》을 겸해 읽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서(經書)를 주로 하고 《사기(史記)》를 겸해 읽되, 《대학》은 내년부터 강을 시작하고 금년은 《소학(小學)》을 익히 읽고 《사략》도 겸해 읽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9일 갑진
장령 문약연(文躍淵)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선비의 풍습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근심하고 인재를 얻기 어려움을 탄식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건대, 옛날에 학교를 설치한 것은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고 인재를 만드는 근본을 삼으려는 것이었는데, 오늘날의 과제(課製)와 승시(陞試)는 다만 달마다 경쟁하게 하는 데 안성마춤일 뿐이고 경전(經傳)을 토론하고 의리를 강구함에 이르러서는 책을 시렁 위에 묶어 놓고 전혀 읽지 않는다고 말하여도 좋습니다.
전하께서는 먼저 대사성부터 반드시 엄선하고 오래도록 있게 해야 할 것이며, 또 모름지기 경서에 밝고 덕행을 닦은 선비와 산림에서 덕을 수양한 어진 사람을 구하여 좨주(祭酒)와 사업(司業)의 직임에 보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고금(古今)을 참작하고 절목(節目)을 자세히 정하여 선비를 선발하는 법을 모방하고 매달 세 번씩 강하는 제도를 복구하여 스승과 생도가 한 당에 같이 모여 경전(經傳)을 토론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외읍(外邑)은 또 교수(敎授)·훈도(訓導)·제독(提督)의 소임을 가려 두기를 일체 태학(太學)에서 하는 것처럼 하되, 사람을 취하기를 반드시 충현(忠賢)한 사람으로 하고 사람을 쓰기를 반드시 경술(經術)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 좋아하고 미워함을 밝혀 붕당(朋黨)을 깨뜨리고 들뜨고 조급함을 눌러서 추향(趨向)을 바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10년이 지나기 전에 세도(世道)는 변화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변화될 것이고, 선비의 풍습은 바르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바르게 될 것이며, 인재는 성취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성취될 것입니다.
신은 더욱 의혹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겨울 일차 전강(日次殿講) 때에 아홉 글자로 급제된 사람이 있었으니, 신은 과제(科制)가 무슨 명목인지 모르겠습니다. 경서 하나로써 급제시키는 것도 이미 바른 과제(科制)가 아닌데, 한층 더하여 주석을 제외하고 다시 한층 더해 전장(全章)을 읽히지 않는 것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은, 이 일은 다만 요행의 길을 열어주게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전일 급제를 하사한 명을 또한 도로 거두어들이게 하여 과제(科製)를 엄히 하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해야 하리라고 여깁니다.
승상(陞庠)207) 을 설시(設施)한 것은 진실로 선비에게 과업을 권장하려는 방도에서 나온 것인데, 요즘 와서는 사유(師儒)의 자리가 혹 가벼워지고 조급하게 다투는 풍습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눈앞의 일로 말하면, 이미 설치한 상제(庠製)를 특별히 대사성으로 하여금 성균관에서 합설(合設)하여 날마다 과장(科場)을 열어 출방(出榜)을 재촉하게 한 것이야말로 우리 성상의 지공무사(至公無私)하신 뜻에서 나온 것인데, 방안(榜眼)이 나오기도 전에 물의(物議)가 먼저 정해지고 방안이 이미 나온 뒤에도 일체 그 말처럼 되었으니, 이것은 성명만 고사(考査)한 것이고 그 시권(試券)은 고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의 소견으로 살펴보면, 다만 선비의 풍습을 저속한 데로 빠뜨리게 할 뿐이고 그 과업을 권장하여 선비를 양성하는 도리는 보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이른바 고금을 참작하여 절목을 자세히 정하자고 하는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간절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천지 변역(變易)의 의의를 체득하여 어서 한 번 변환하여 도에 이르는[一 變至道]208) 공을 도모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좋다. ‘지난 겨울 아홉 글자로 급제를 하사하였다.’고 한 것은 또한 옳은 말이다. 옛날에 제술(製述) 시험에서 몇 귀절로 급제를 하사한 사례도 있으니, 이것 역시 조화(造化) 중의 한 가지 일이다. 상제(庠製)에 관한 일은, 필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찌 풍문으로 전하는 것을 가지고 경솔히 절목을 고치기를 청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10월 10일 을사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행하였다.
10월 11일 병오
문신 전강(文臣殿講)을 행하고, 겸하여 차대(次對)와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선혜청 당상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본청(本廳)의 수용(需用)이 장차 넉넉하지 못할 염려가 있습니다. 균역청(均役廳)에서 꾸어간 곡물을 경청(京廳)에서는 실로 추환(推還)할 방도가 없으므로 균역청에서 구관(句管)하는 영남의 별균미(別均米)로 외방에 주는 것과 바꾸어 쓰려 하였는데, 공인(貢人)들이 모두 쌀을 원하지 않고 콩을 받기를 원합니다. 만일 별균미 2만 석을 상진(常賑)의 콩으로 바꾸어 공인에게 내어주어 공미(貢米)를 바꾸어 납부하게 하면 본청에 있어서는 보용(補用)의 방도가 있고 진휼청에 있어서도 도움은 있고 해는 없으니, 양쪽이 편리한 방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니, 따랐다.
조종현(趙宗鉉)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천둥이 쳤다.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3일 동안 어선(御膳)을 줄이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은은하고 미미하게 울리는 소리를 관상감에서 보고하였는데 나는 막연히 그것을 듣지 못하였다. 내가 과연 성실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하늘을 대하기를 생각했다면 관상감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을 내가 어찌 듣지 못했겠는가. 마음이 주재가 되면 허명(虛明)하고 맑아서 만상(萬象)이 삼연(森然)하고, 한 가지라도 물욕이 가리우게 되면 천 리 만큼이나 어긋나게 된다. 일에 나아가 징험해 보면 더욱 그 조존(操存)하여 다잡지 못하고 그대로 버려두어 마음의 출입을 알지 못하였음을 스스로 깨닫겠으니, 돌이켜 돌아보고 점검해 봄에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이었던가. 내 마음의 두려움은 듣지 못한 것이 들은 것보다 배나 되니, 심지(心地)의 용렬함이 이와 같다. 만기(萬機)의 결점과 백도(百度)의 좀스러움이 특별히 행사(行事)에 나타나서 시행하고 조처하는 사이에 외면이 거칠어지니 현재 취해야 할 의리는 오직 자신을 책망하는[責躬] 두 글자만 알아야 할 뿐이다. 오늘부터 3일 동안 어선(御膳)을 줄이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신기(申耆) 등이 연명으로 아뢰어 힘쓰기를 진달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10월 12일 정미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근년에 겨울 천둥의 재변이 없는 해가 없었고 성상께서 두려워하고 수성(修省)하는 분부도 따라서 없는 해가 없었습니다. 이 분부대로 되었다면 학문에 항상 종사하는 공부와 정치를 하는 법도가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서 능히 대도(大道)의 세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유독 조정의 온갖 일은 작년이 재작년보다 못하고 금년이 작년보다 못하여 현저히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듯한 조짐이 있으니, 결과가 이와 같다면 두려워하고 수성한 보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자(箕子)가 《홍범(洪範)》에서 세운 표준과 우리 선왕(先王)께서 50년간 고심한 지극한 덕을 성상께서 임어하신 20년 동안 잘 계승하고 잘 전술(傳述)하여 조금도 소홀히 하는 마음이 없고자 하신 것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년 이래로 당색(黨色) 가운데 기기괴괴한 호칭이 첨가되어 나왔는데 이것이 비록 스스로 일어났다 스스로 사라질 일인 것도 같으나, 그 해는 마침내 국가에 돌아오고 말 것입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귀가 밝으신 성상께서 혹 들은 바가 있어도 우선 그대로 버려둔 채 일체 조정의 기상이 편안하지 못하고 사의(私意)가 마구 통하도록 내버려두신 결과 점차 정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대부의 지취(志趣)가 날로 낮은 데로 내려가서 탐욕하고 비루한 자가 서로 잇따르고 청렴하고 삼가는 자가 알려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연석(筵席)의 분부와 윤음(綸音)의 뜻을 보면 매양 탐욕을 징계하고 청렴을 장려하는 것으로써 백성을 보전하는 요점으로 삼고 있으니 아첨하는 탐관오리를 아침 저녁 사이에 다시 삶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으나, 세도가 성대하고 권력이 대단한 사람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오직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를 오래지 않아 승진시키고 또 돌보아주어 다른 데로 보내면서 마치 공로를 보상하는 것처럼 해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도신(道臣)의 치적 고과에서의 전(殿)을 매긴 것이나 수의 어사(繡衣御史)의 계(啓)에서 적발된 것을 보면 쇠잔한 음관(蔭官)이나 한랭한 무직(武職) 가운데 가장 배경이 없는 자만을 가려내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사람의 마음이 두려워서 복종하고 탐욕스럽고 교활한 자가 징계되어 두려워하기를 바란다면 또한 세정에 어둡고 엉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의 일에 이와 같은 따위를 어찌 낱낱이 들 수 있겠습니까.
정승을 임명하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신처럼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을 들어 맡기셨으니, 애당초 잘못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달마다 많은 녹을 받아 먹고 이부자리 위에 누워 있으면서 성상께서 차가운 전각(殿閣)에서 인접(引接)하며 근심 노고하시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하니, 상국(相國)의 벼슬을 맡아 이름만 있고 그 실효가 없는 경우로서 신과 같은 경우는 없습니다.
오늘날 상천(上天)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모두 성실로 하는 데 달려 있고, 그 성실로 하는 요점은 또 신을 물리쳐버리고 어질고 덕있는 사람을 다시 임명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자신의 몸을 책망한 유시에서 내 마음의 용렬함을 거듭 말한 것은 마음이야말로 몸에 비하여 근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이 또 몸소 실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는 공부로써 나를 권면하니, 세신(世臣)의 충간(衷懇)을 감히 거듭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 차자에서 책면(策免)의 고사(故事)를 인용한 것은 잘못되었다. 안심하고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차자를 올려 책면(策免)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교리 박길원(朴吉源)이 상소하기를,
"먼 시골의 곤궁한 선비가 부지런히 공부하고 애써 독서하는 것은 그 지극한 소원이 낮은 관직에라도 임명되어 조그마한 녹을 받으려는 계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적(仕籍)에 오르기는 쉬우나 벼슬살이하기는 매우 어려워서 사적에 오른 지 10년이 되어서야 겨우 6품에 오르고 반평생 경영해도 우역(郵驛) 한 자리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전하께서 특별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베풀어서 10개 자리의 능령(陵令)을 문관의 자리로 만들어 답답함을 풀 길을 열어 주셨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덕을 베푸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행한 지 1, 2년 만에 그대로 또 폐지된 채 현재 문과에 급제하여 능관이 된 사람이 거의 없으니, 당초 설치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재해가 든 해에 진휼하는 정사를 베푸는 것은 진실로 큰 은혜이기는 하나 만일 혹 잘못되기라도 하면 도리어 백성을 들볶는 단서가 됩니다. 이것은 도신(道臣)과 수령이 어떻게 시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라도 탐관오리가 있어 혹 진휼할 밑천을 마련한다고 핑계대고 부유한 백성에게 강제로 빼앗거나 기민의 수효를 헛되이 떠벌려 스스로 마련한 것을 늘려서 보고하여 요행스런 상을 받기를 도모한다면, 조정의 덕의(德意)가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됩니다.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고을 수령을 특별히 살펴 앞에 열거한 바와 같은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문관의 적체(積滯)에 관한 일은, 곧 항상 간절히 힘쓰며 잊지 못하던 것이다. 그 중에 10개 자리를 곧바로 폐지한 곡절에 대해서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탐욕스럽고 비루한 수령이 진휼 밑천을 빙자하여 부유한 백성의 가산을 강제로 빼앗는가 하면 허위로 늘려 더 보고하여 그 요행스런 상을 도모한다고 한 그대의 말은 참으로 옳다. 마땅히 앞으로 아뢰는 것을 보아 한 사람을 징계하여 백 사람을 격려하는 법을 시행할 것이다."
하였다.
집의 신우상(申禹相)이 상소하기를,
"금년에 바닷가 여러 고을의 경우 반수 이상이 풀 한 포기 없는 벌거숭이 땅이어서 부자(鳧茨) 부리나 오매(烏昧)의 풀도 먹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굶주려서 얼굴빛이 누렇게 뜨고 들판에 떠돌아다니면서 빌어먹는 자가 득실거립니다. 새해를 맞기 전에 구제해주는 정사야말로 눈앞의 급무이니, 수령에게 신칙하여 마음을 다해 구제하고 다방면으로 조처 계획하게 해야 합니다.
과장(科場)이 난잡한 것은 오로지 농부나 무사의 아들과 남의 종으로 면천(免賤)된 무리가 유학(幼學)이라 일컬으며 과장에 과감하게 나아가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만일 향시(鄕試)에서 과거마다 방(榜)을 발표한 뒤에 각읍에서 참방(參榜)한 무리를 영문(營門)에 모두 모아 일일이 면대해 시험보여 글을 못하면서 요행히 합격한 자를 나타나는 대로 적발해서 강등하여 군정(軍丁)에 충당하면 남잡(濫雜)한 무리가 당초에 감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면대해 시험보이는 설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또한 많습니다. 혹 도량이 좁은 일이라고 염려하여 매양 큰 아량을 보여주었으나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만일 법령을 거듭 엄히 하여 단연코 용서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두 죄를 두려워하여 치지 않아도 저절로 그만둘 것이니, 이른바 도량이 좁은 거조는 없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바닷가 고을의 민정(民情)에 대해 지금 그대의 상소를 보고서 알지 못하던 바를 더욱 알게 되었다. 부자와 오매조차도 캐거나 딸 수 없다고 한다면 쌀독에 식량이 없는 상태에서 장차 어떻게 겨울을 지내며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겠는가. 새해 전후로 구제하는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엄히 당부하게 하라.
면대해 시험보이는 일은, 도량이 좁은 거조를 염려해서도 아니고 큰 아량을 보이려고 허락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시험의 체례(體例)가 만일 엄하기만 하다면 한 번 면대해 시험보이는 것이 편리하다. 옛날 선조(先朝) 때에 일찍이 한번 시험해 보았으나 과장(科場) 안에 또한 간사한 폐단이 있어 다시 시험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기강이 옛날에 비해 또 훨씬 못 미치니, 예전 규식을 따라 수명(修明)하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이상황(李相璜)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만수(李晩秀)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0월 13일 무신
대사간 이상황이 상소하여 진계(陳戒)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10월 14일 기유
지평 조수민(趙秀民)이 상소하여 면려하기를 진술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대사헌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도타이 불렀다.
10월 15일 경술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 김문순(金文淳), 부사(副使) 신기(申耆), 서장관 홍낙유(洪樂遊)를 불러 보았는데, 하직 인사를 올린 때문이었다.
10월 16일 신해
이경일(李敬一)을 이조 참판으로,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관원을 보내어 고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치제(致祭)하였다. 상이 그 집에서 면례(緬禮)를 행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재해가 가장 심한 청하(淸河) 등 6개 고을의 우심한 민호(民戶) 및 지극히 쇠잔한 사찰에 대해서는 노공(奴貢) 및 승전(僧錢)을 정퇴(停退)하자는 뜻으로 치계(馳啓)하니, 하교하기를,
"노공과 승전은 군포(軍布)·보포(保布)에 비해 그 경중과 요긴함이 자별할 뿐만이 아니다. 우심한 곳에 살고 우심한 백성이 된 것으로 말하면 종과 중이라고 해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옛날 정퇴하고 탕감할 때는 신공미포(身貢米布)라고 칭했으니, 군민(軍民)이나 종들로 모두 평등하게 사랑하는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보(保)라는 한 글자만을 단적으로 말하니 순일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다. 설혹 신포(身布)와 공미(貢米)를 아울러 말하는 경우에도 그 은혜를 베풂에 미쳐서 종은 은혜를 같이 입지 못한다면 고루함이 막심하다 하겠다.
보군(保軍)은 새로 창설한 지 2백 년밖에 안 되지만 공노(貢奴)는 곧 기자(箕子) 때부터 있어 온 옛날 제도이다. 이것으로써 연전에 별도로 말을 만들어 하교하였는데, 지금 장계의 말로 살펴보면, 노공(奴貢)과 승전(僧錢)의 정퇴 및 감면과 관련하여 가장 우심한 고을의 우심한 곳만을 들었을 뿐이니, 더욱이 어찌 특별히 하교한 본의이겠는가. 승전을 그렇게 처리한 것은 혹 설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저 공노(貢奴)를 식구를 계산하여 각각 납입하게 하는 따위는 도리어 보민(保民)·보군(保軍)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것이 과연 무슨 법도인가. 장계를 도로 해당 도신에게 내려보내고 봉급 10등을 감하여 다 구휼함을 알지 못하고 하늘에 호소해도 호소할 길이 없는 저 영(嶺) 밖의 공천(公賤)에게 사죄토록 하라.
연전에 노공(奴貢)의 일로 제도(諸道)에 두루 물은 뒤에 아직도 하나로 지정하여 도로 내려보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시작하자마자 곧 그만두어 그런 것이겠는가. 제도에서 아뢴 것과 여러 사람이 의논해 올린 것을 모두 봉하여 어탑(御榻) 가에 걸어두고서 마음속의 헤아림이 환하게 관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도를 안찰(按察)하는 신하의 입장에서 이 의의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소홀하게 거행하였으니, 어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 관련하여 또 언급할 일이 있다. 노공의 폐단은 북관(北關)이 심하다. 그런데 북관 중에도 본궁(本宮)에 내사노(內寺奴)의 1구(口)가 납입하는 것이 거의 수십 금(金)이 넘는다 한다. 일이 막중한 향수(享需)209) 에 관계되어도 오히려 양조(兩朝)에서 공물의 필수(匹數)를 감한 덕의(德意)를 따라 일일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징수하는 바가 반드시 막중한 것도 아니고 쓰는 바도 궁(宮)에 소속된 관리에게 지출하는 자본도 아닌데, 경사(京司)의 긴요치 않은 명색(名色)으로 납입한다 하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인 의리로 볼 때 도신이 어찌 품지(稟旨)하여 바로잡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내려간 별차(別差)와 함께 초출(抄出)하여 별도로 하나의 책을 만들어 장문(狀聞)할 일로 함경도 관찰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10월 17일 임자
김재찬(金載瓚)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남공철(南公轍)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전 이조 당상 홍양호(洪良浩) 등 24인을 중하게 추고하였다. 능관(陵官) 10개 자리를 문직(文職)으로 더 만든 뒤에 정식(定式)을 준수하지 않고 음관(蔭官)으로 차의(差擬)했기 때문이었다.
10월 18일 계축
지평 조수민(趙秀民)이 상소하기를,
"근래 명기(名器)가 중하지 않게 된 것은 오로지 대간의 선발을 난잡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대간의 선발 중에서도 정언(正言)은 단통(單通)인만큼 더욱 가려서 해야 하는데, 전에 한시유(韓始𥙿)가 갑자기 외람되게 임명되었으므로 물정(物情)이 시끄럽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한시유를 대간의 망(望)에서 지워버리고 통망(通望)을 주관한 전신(銓臣)도 견책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근일 기강이 허물어지는 것은 오로지 조정의 명을 준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옥당의 소로써 살펴보더라도 문직(文職) 10개 자리에 1개 자리만 남겨두고 정식(定式)을 폐지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개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서전(西銓)의 능마랑(能麼郞)의 경우 강(講)을 시험보여 취재(取才)하도록 특별히 분부하여 규정으로 만든 것이 본래 있는데도 마음대로 조정하여 사뭇 원망과 비방을 초래하였고, 능마아청(能麼兒廳)의 두 당상에게 성을 내어 파좌(罷坐)한 지 며칠이 지나서 혼자서 개좌(開坐)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며, 그밖에 정사의 주의하는 사이에도 모욕을 초래하여 눈쌀을 찌푸리게 한 일이 없지 않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병조 판서에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근일 세도(世道)가 허물어지는 것은 오로지 거짓말이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받들고 도와 보필하는 정승의 처지에서는 오직 다른 의견들을 조화시키고 충돌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좌의정이 분부에 응하여 차자를 올린 것을 신이 보건대 놀라운 바가 있었습니다. 당색(黨色)이란 두 글자는 결코 장주(章奏) 사이에서 용이하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기기괴괴한 호칭이 더 나왔다고 운운하기까지 한 것은 더욱 임금에게 고하는 체례로 볼 때 잘못된 것입니다.
아, 재작년 봄 이후로부터 조정이 청명(淸明)해질 기틀이 마련되고 성덕(聖德)이 천명(闡明)될 희망이 생겼는데, 어찌하여 점차 처음과 같지 아니하고 언로(言路)가 막히어 의리가 더욱 어두워지며, 제방(隄防)이 느슨해져 넘보는 마음이 생기고 있단 말입니까. 전후로 진언(進言)한 신하들이 거의 모두 진퇴소장(進退消長)의 즈음에 마음을 다해 간절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신이 만일 이것으로써 말한다면 치세(治世)에 대해 근심하는 노 정승의 뜻을 누가 옳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런데 곧 수 년 이래라는 말로 운을 떼고는 ‘해독이 국가에 돌아오고 있는데 그냥 버려두고 일임한다.’는 등의 말로 결론을 삼았으니 어찌 실언(失言)이 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매우 개탄해 마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한시유(韓始𥙿)의 일은, 시끄럽게 일어나는 물정(物情)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해당 전관(銓官)을 견책하는 일도 사실이 자세하지 못하니,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병조 판서의 일은 사실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정원으로 하여금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덧붙여 아뢴 일도 그렇다. 어찌 개탄하면서 배척하는 일을 곧 내가 돌아보고 의지하는 좌상에게 가할 수 있단 말인가. 차자의 말이 설사 그대의 말과 같다 하더라도 이는 곧 또한 이 대신의 본래의 기상이다. 그대는 신진(新進)으로서 어찌 노 재상이 나라를 근심하는 간절한 충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비평할 수 있겠는가. 그대를 위해 오히려 개탄하는 바이다."
하였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병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에게 물었더니 ‘처음에는 파장(罷場)했고 두 번째는 독자적으로 설행(設行)하였으니 과연 대신(臺臣)의 말과 같다. 마음대로 행한 죄는 실로 면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하니, 봉급 10등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9일 갑인
황해도 관찰사 이의준(李義駿)이 장계를 올려 청하기를,
"은율(殷栗)·장련(長連) 두 고을의 환곡을 적당히 다른 것으로 대신 징수하고, 모래와 돌이 쌓여서 갑자기 경작하기 어려운 곳 이외에 개간에 합당한 진전(陳田)은 내년 봄을 기다려 개간하도록 하고, 재민(災民) 중에 노약자는 새해를 맞기 전에 위급함을 구제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서 복계(覆啓)하여 그대로 시행하기를 청하니, 따르고, 두 고을의 수령을 구임(久任)시켜 성공을 책임지우라고 명하였다.
지평 조수민(趙秀民)이 피혐하기를,
"좌상의 차자 안의 몇 귀절의 말은 그 문맥(文脈)을 구명해 보면 다만 말의 병통으로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재작년 봄 이래로 청명(淸明)한 기운이 싹터 바야흐로 눈을 닦고 바라보는 희망이 생겼는데, 근래에는 처음과 같지 아니하여 식자들이 근심하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좌상은 도리어 수년 이래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뜻밖이었습니다. 또 ‘당색의 호칭이 첨가되었다.’는 귀절은 이미 임금에게 고하는 체례에 어긋났고, ‘아직도 버려둔 채 일임하고 있다.’는 말은 삼가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 있습니다. 만일 신으로 하여금 마음 내키는 대로 한껏 논척(論斥)하게 하였다면 무슨 말을 다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 단지 ‘실언(失言)한 것에 대해 개탄한다.’는 등의 말로 간략하게 말한 것은 직절(直截)한 대각(臺閣)의 기풍을 이지러뜨린 것이라서 신이 바야흐로 스스로를 책하기에도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교(聖敎)를 보건대 ‘가벼이 개탄한다는 말을 가하였다.’고 이르시고, ‘어찌 노 재상의 충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비평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 전하처럼 성학(聖學)이 고명하신 분께서 유독 대각(臺閣)과 묘당(廟堂)은 득실(得失)을 다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신을 체차하여 물리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다른 일은 우선 놔두자. 노 재상이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는 성의로써 설사 마음 내키는 대로 쓴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기상이 초탈하여 구속되지 않음을 더욱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대 같은 자가, 임금과 신하가 서로 협력하는 즈음을 엿보고자 하여 감히 정외(情外)의 배척을 발설하였으니, 이것이 옳고 그른 것을 비평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개탄한다’는 하교는 오히려 대각을 대우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인데, 또 이것으로써 불만스러운 꼬투리를 만들어 장황하게 와서 사피한단 말인가. 사피하지도 말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지도 말라."
하였다.
장령 정최성(鄭㝡成)이 상소하기를,
"일전에 대신의 차자에 ‘수년 이래로 기대한 대로 정치가 행해지지 않고 있다.’ 하고, 또 ‘당색 중에 기괴한 호칭이 더 나왔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대개 2, 3년 이래로 화리(化理)가 더욱 맑아져 권간(權奸)에게 빌붙던 자리를 물리쳐 벌을 주고 명의(名義)에 배치되는 자를 통렬히 억제하여 중외(中外)가 눈을 닦고서 일초(一初)에 쇄신하여 힘쓰는 정치로 여겼는데, 지금 치효(治效)가 더욱 아득함을 논하면서 도리어 수년 전부터의 일을 제기하고 있으니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당색(黨色)이라는 두 글자는 본디 어전에 주달하는 문자에 드러내놓고 말할 성격의 것이 아닌데, 어떠한 것이 기기(奇奇)하며 어떠한 것이 괴괴(怪怪)하단 말입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지고 의리가 점차 밝아지니, 인도하고 바로잡고 위엄을 세우는 것은 오직 조화를 말없이 운용하는 데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혹 들쭉날쭉하여 가지런하지 않다가도 마침내는 한데 어울려서 한 몸이 될 것이니, 어찌 참으로 각각 표방(標榜)을 세워 마치 음양(陰陽)과 흑백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판연히 구별되겠습니까. 가령 상신(相臣)이 근심하는 바와 같이 조정의 현상이 장차 결렬되게 되었다면 감독하고 통솔하는 지위에 있는만큼 진실로 진퇴소장(進退消長)의 의리에 입각하여 조정에 들어와서는 의견을 진술하여 올리고 나와서는 주선하면서 조정의 사대부(士大夫)로 하여금 순연(純然)히 의리의 바름으로 같이 돌아가서 이의(異議)가 없이 그 사이에 참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세도(世道)가 편치 못함을 어찌 근심하겠으며, 사의(私意)가 마구 유행(流行)함을 어찌 염려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것을 하지 않고 지금 우물쭈물 말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옛날 선조(宣祖)의 성대한 때에 작고한 상신 이준경(李浚慶)이 차자로 붕당(朋黨)을 깨뜨려야 한다는 설을 올리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상소하여 극렬히 논하기를 ‘시비를 구분하지 않고 은어(隱語)로 뒤섞어 말하여 성상으로 하여금 모든 신하들을 의심하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만일 선정(先正)으로 하여금 오늘날을 살펴보게 한다면 또한 장차 어떠하다고 하겠습니까.
또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20년 동안 근심하고 수고하여 고심(苦心)한 것은 진실로 인재를 양성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강제(講製)를 창설하여 한 시대의 문학을 일으키고, 수령을 독려하고 경계하여 덕택과 은혜가 아래에 전달되게 하려고 힘쓰셨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인재가 예전과 같지 못하고 탐욕의 풍습이 중지되지 않는 것은 실로 아래에 있는 사람이 잘 받들어 거행하지 못함에서 연유하였을 뿐이지, 이것이 어찌 유도하고 권장하며 경계하는 것이 혹 성실하지 못해서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 차자에서 한 말은 일체 형식으로만 돌려버리고 있습니다. 뜻은 비록 잠규(箴規)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말은 혹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에 관계되니 아마도 우리 성상의 지극한 성의와 덕스런 의사를 널리 드날리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신은 본디 형세가 외롭고 처세하는 방법에 어둡습니다. 그래서 전후 소로 진달할 적에 관잠(官箴)의 의리를 망령되이 덧붙였는데, 이제 또 말이 대관(大官)에게 미치어 외람되이 그릇을 깨뜨릴까 염려하는 경계[忌器之戒]를 범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그 광망(狂亡)함을 용서하시고 간곡한 성심을 살펴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10월 20일 을묘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평 조수민의 소본(疎本)을 삼가 보니, 신이 일전에 재난을 만나 면직을 청한 차자를 가지고 크게 비방하며 배척을 가하였습니다. 신의 차자가 응지(應旨)의 명목으로 하는 것인만큼 차마 형체도 없고 모나지도 않는 것으로써 하루를 보내는 책임이나 때우려는 짓은 하지 못하겠기에 마음 내키는 대로 손가는 대로 몇 마디 말을 써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올리고 나서 생각하건대 모두가 노망을 부린 것이었으니, 대간의 말이 나오게 된 것은 신이 실로 자초한 것입니다. 어찌 남을 원망하겠습니까.
더구나 그 소에서 근래 거짓말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운을 떼며 말을 시작했는데, 신의 차자에서 운운한 바가 과연 거짓말이라면 이것은 세도(世道)의 다행일 뿐입니다. 신은 마땅히 기쁘게 듣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찌 서로 따지는 일을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의정(議政)의 직함을 삭제하고 신의 망발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무릇 오늘날 세상의 모든 병통은 어느 것이나 경이 전에 이른바 문구(文具)라는 것과 지금 이른바 색책(塞責)이라는 것에서 재앙이 되고 빌미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증류(症類)는 음취(陰脆)에 속하고 맥결(脈訣)은 허부(虛浮)에 관계되니, 악하기는 오훼(烏喙)210) 와 같고 독하기는 사공(沙工)과 같아 그 화가 홍수와 맹수보다도 심함이 있다. 사람들이 오훼는 먹을 수 없고 사공은 가까이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며, 대지를 삼키는 큰물도 산을 따라 흘러가게 할 수가 있고 사룡(蛇龍)도 늪으로 내치게 할 수 있음을 안다. 그런데 유독 어찌하여 색책(塞責)과 문구(文具)의 병근(病根)만은 병을 감싸고 의원을 꺼린단 말인가. 그리하여 진흙을 섞어 가루를 바르는 짓을 서로 답습하고 낫으로 눈 가리고 방울을 훔치는 짓을 모두 따라서 하니, 임금을 그처럼 섬기면 나라를 망치고 어버이를 그처럼 섬기면 집을 해친다. 집이 집 구실을 하지 못하고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도 오히려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귀신이라고 하겠는가. 중국이라고 하겠는가, 이적(夷狄)이라고 하겠는가.
아, 성실히 하는 것[誠者]은 하늘이고 성실하게 하려는 것[誠之者]은 사람이다. 성실에 반대되면 이를 거짓이라 하고, 거짓의 지간(枝幹)과 근락(筋絡)을 문구(文具)라 하며 색책(塞責)이라 한다. 이 두 가지를 바로잡아 고치는 방법을 마땅히 어디에서 구해야 하겠는가. 곧 내 마음의 본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 역시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 이미 여러 사람의 떠드는 말을 듣고 또 소인들의 말에 빠졌다. 사물을 대함에 실지를 힘쓰는 데에 공부하지 않는 적이 없으나 아침에 한 마디 말을 하고 저녁에 사적인 일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만족하고 확실한 듯하던 것도 도리어 두렵고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 세도(世道)와 조정의 기상이 날로 떨어지고 날마다 낮아지는 것에 대해 누가 그 책임을 지고 그 비방을 담당해야 하겠는가.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진다[風草]는 비유는 성인이 반드시 나를 속이는 말로 베풀어서 훈계한 것이 아닐진대, 정치를 해도 날로 기대처럼 되지 않고 교화 역시 뜻한 대로 되지 않아 어제가 그제만 못하고 오늘이 어제만 못하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지는 효과와 징험이 막연하여 세월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처럼 추심(推尋)하기 어려운 탄식이 있다. 이때 도움을 구함은 마치 목마른 자가 마실 것을 구하는 것과 같다.
전에 경이 차자를 한 번 올리면서 병의 근원을 통렬히 말하였으니 7년 묵은 쑥을 축적하여 3년 묵은 병을 낫게 하는 정도뿐이 아니었다. 경은 나에게 설거주(薛居州)211) 와 같은데, 어찌 법문(法文)을 심각히 하는 세속의 풍습이 경으로 하여금 마음을 불안하게 할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이 또한 기대처럼 되지 않고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대로 되지 않는 것 중의 한 가지 일이니, 경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경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런데 경이 어찌하여 망발하였다고 자인(自引)하여 면직하기를 청하는 말을 하기에 이른단 말인가. 경에게 기대하던 바가 전혀 아니다.
내가 듣건대 대신은 나아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고 하였다. 다한다고 하는 말은 아는 것은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이른다. 경이 만일 피폐된 풍속과 괴이한 습관에 징계되어 어물어물하고 주저하 며 뒤로 물러나 돌아보고 뒷걸음을 친다면 이것이 임금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얼마간 거듭 당부하는 것은 경 한 사람의 처지만을 위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사람마다 저 모든 병통을 없애버리고 그 나이를 연장하고 수명을 더 늘리는 낙을 함께 누리게 하려는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으며 또한 옳지 않겠는가. 사직은 윤허하지 않는다. 안심하고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1일 병진
윤대(輪對)하였다.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행하였다.
10월 23일 무오
김달순(金達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장령 정최성·조수민을 파직하였다. 정최성 등이 바야흐로 좌의정 채제공을 논하였는데, 주상이 소명을 어긴 것을 이유로 파직하여 채제공을 위로한 것이었다.
10월 26일 신유
지평 최이형(崔履亨)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아, 대각(臺閣)이 대신과 서로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본래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일전에 좌의정이 대간의 말로 인하여 스스로 변명할 적에 전혀 부끄러워하며 승복하는 기색이 없이 드러내놓고 능멸하고 짓누르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만 감히 노망(老妄)이라는 두 글자를 장주(章奏)에 올려 마치 임금 앞에서 희롱하는 것과 같이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떳떳한 분의에서 감히 내놓을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또 그 차자 중에서 운운한 것에 대해 신이 꼭 말꼬리를 잡아내어 일의 체면을 손상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신(臺臣)이 소에서 말한 거짓말이란 두 글자를 인용하여 그 말을 확인시킴으로써 허물을 문식(文飾)하며 흐지부지 넘길 계획으로 삼고는 ‘세도(世道)의 다행이다.’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였으니, 대신이 임금에게 고하는 말로 볼 때 이와 같이 성의가 결여되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이 점을 신은 적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은 또 전 지평 박재덕(朴載德)의 일에서 놀랍고 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디 무식하고 비루한 무리로 외람되게 대간의 직에 통망(通望)되어 달포 전에 지평에 제수되었습니다. 그런데 허무하고 기괴한 일로 죄목을 얽어 만들어 전민(廛民)에게 패(牌)를 내어 밤중에 잡아가두고는 암암리에 사적으로 화해하여 마침내 무죄 석방하였으므로 시장 사람이 전해가며 비웃고 원망과 비방이 길에 들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는 법을 집행하는 반열에 두어서는 안 되니, 신의 의견으로는 전 지평 박재덕에게 어서 관직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를 보고 잘 알았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에 앞서 이러한 폐해에 대해 나타나는 대로 엄히 다스린 것이 과연 어떠하였던가. 그렇다면 비록 시골 사람이 경사(京司)의 간사한 아전 무리에게 속임을 당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살피지 않았으면 그 견책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파직하라."
하였다. 뒤에 응교 이익모(李翊模)의 진계(陳啓)로 인하여 영원히 대간의 망(望)에서 삭제하고 안변부(安邊府)에 귀양보냈다.
10월 28일 계해
관서 안사 어사(關西按査御史) 여준영(呂駿永)을 불러 보았는데, 복명(復命)한 때문이었다. 춘당대에 나아가 별군직(別軍職)·무예청(武藝廳)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작고한 충신 정운(鄭運)의 사손(祀孫)을 호남에서 찾아내어 특별히 내승(內乘)의 직에 붙인 뒤 그로 하여금 활쏘기를 익히게 한 것이 이미 몇 년이 되었는데, 오늘 시사에서 4발을 맞추었다. 그 할아버지의 충의를 추념(追念)하면 비록 1발을 맞추었다 하더라도 한 번 급제시키는 것이 무슨 아까울 것이 있겠는가. 이 충무(李忠武)212) 가 충무(忠武)가 된 것은 곧 그 사람의 공로 때문이라고 대답한 그 말이야말로 얼마나 강렬한가. 검에 새긴 말보다도 늠름하였다. 지금 그 후손이 입격한 것을 보니 배나 감격스럽다. 내승 정계주(鄭繼周)를 전시에 직부(直赴)하게 하라. 그리고 어장(御將)으로 하여금 양식과 자금을 넉넉히 주어 내려보내게 하고 도신으로 하여금 유가(遊街)의 비용을 주어 그가 향리에 돌아가 자랑하게 함으로써 먼 지방 사람으로 하여금 충의를 숭상하는 정치를 알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의사(義士) 증 참의(贈參議) 장후건(張厚健)은 의주(義州) 사람이다. 끝까지 지조를 지켜 후세에 공적을 끼친 것은 최의사(崔義士)와 나란히 일컬어졌다. 장후건의 후손 장윤조(張胤祚)·장상열(張商說)을 금위영과 어영청에 나누어 소속시켜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는데, 오늘 불러 치른 활쏘기 시험에서 모두 2발씩 맞추었으니 모두 전시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라. 그리고 금위영과 어영청의 두 대장으로 하여금 양식을 주어 고향에 내려보내게 하는 동시에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유가(遊街)의 비용을 주게 하되 내승(內乘) 정계주(鄭繼周)의 사례에 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9일 갑자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이때 해서 관찰사 이의준(李義駿)이 상소하여 재결(災結)을 더 획급(劃給)해 주기를 청하였다. 우의정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해서의 표재(俵災)가 2천 결(結)이나 되니 당초 구획 조처해 준 것이 적지 않은데 도신이 지금 또 소로 청하다니 요량이 너무 부족하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조정에서 매양 백성 한 사람에게라도 생판으로 거두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과다함을 구애하지 않고 청하기만 하면 허락해 주었다. 그러므로 도신과 수령으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상례(常例)로 보아 이 숫자를 채울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 만일 청한 바의 수량에서 2천 결을 감하면 민정(民情)이 억울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또 어찌 다시 번거롭게 아뢰지 않을 줄을 알겠는가. 잗달게 굴어 한갓 일의 체면만 손상시키기보다는 어찌 특별히 넉넉히 떼주어 아랫사람에게 더 보태주는 정치를 베푸는 것만 같겠는가."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백성을 걱정하는 생각으로 차가운 아침에 전(殿)에 임하여 누누이 분부를 내리시니, 신이 부득불 5백 결을 더 획급하는 뜻으로 성상의 덕의(德意)를 우러러 받들어 거행합니다. 그러나 전에는 각도에 연분 사목(年分事目)이 내려가면 족하거나 부족하거나를 막론하고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도에 획급한 바가 많아도 4, 5백 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그 수량이 몇 배나 늘어나서 적은 경우에도 1천 결이 넘고 혹 4천, 5천 결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해마다 증가하여 끌어대어 총계(摠計)로 삼습니다. 그리고 혹 청한 수량대로 차지 않으면 장계와 소로 청하면서 일의 체면이 어떠한가는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연전에 해서에 4천 결을 획급한 뒤에 도신이 매양 이 사례를 들어 해마다 번거롭게 호소하여 수량에 찬 뒤에야 그만두니 국가의 사체에 손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용(經用)이 점차 줄어듦이 주로 이에서 말미암습니다." 하였다.
정언 채지영(蔡祉永)이 상소하기를,
"어제의 처분을 삼가 보건대, 외방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이조 판서를 특별히 제수하여 선정(先正)의 고사(故事)로 권면하고 세도(世道)의 유지로 책임지우셨으니, 초야에 있는 유신의 정성도 감응(感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벼슬로 초빙하는 것은 마치 강박(强迫)하는 것과 같음이 있으니, 전임(銓任)213) 의 명이 도리어 신하를 예로 부리는 도리에 흠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서 성명(成命)을 거두어들이고 빈사(賓師)의 예로 다시 도타이 부르소서."
하니, 상이 그 소를 우의정 이병모에게 보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이조 판서가 명을 받아들이기를 온 조정이 바라고 있는데, 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어들이라고 청하다니 이는 망발한 것으로만 논할 수가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따르고, 하교하기를,
"대신(臺臣)의 의사는 필시 도타이 부르도록 함에 있었으므로 이렇게 성명을 거두어들이라는 청을 한 것일게다. 그러나 산림(山林)에서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보면 이 말을 들은 뒤에 한 가지 나아오기 어려운 조건이 더해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헛되이 얽매어 문구(文具)에 가깝게 하는 것이 어찌 체임(遞任)을 허락하여 겸직(兼職)으로 도타이 부르느니만 하겠는가. 이조 판서 송환기(宋煥箕)의 체임(遞任)을 허락하라."
하였다.
응교 이익모(李翊模)가 아뢰기를,
"대각(臺閣)의 망(望)에 추천하는 것을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합니까. 그런데 근래에 전혀 가려서 의망(擬望)하지 않은 결과 박재덕(朴載德)이나 채지영(蔡祉永)같은 자들이 부끄러움을 그지없이 끼치기까지 하였습니다. 당해 전관(銓官)에게 견책의 법을 베푸소서."
하니,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10월 30일 을축
전교하였다.
"현륭원(顯隆園)의 제향(祭享)에 제관(祭官)을 차정(差定)하는 일은 일찍이 정식(定式)이 있는데 전조(銓曹)가 아직도 알리지 않고 있다. 이 뒤로 헌관(獻官)은 차정(差定)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 유수(留守)를 임명하고, 대축(大祝)은 판관(判官)으로 임명하되 판관에게 일이 있으면 부(府) 안의 문관이나 음관 가운데에서 임명하도록 하라. 그리고 제수(祭需)는 제릉(齊陵)214) 과 후릉(厚陵)215) 두 능의 사례에 의하여 본부(本府)에서 올리도록 하라."
이때에 대사성의 자리가 비었다. 이에 하교하기를,
"대사성은 요즘 부제학(副提學)의 계제(階梯)가 되었으니, 일찍이 부제학을 지낸 사람을 곧바로 대사성에 주의(注擬)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전조에 분부 하라."
하였다.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판서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민태혁(閔台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의필(李義弼)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민종현(閔鍾顯)을 판의금부사로, 이치중(李致中)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이기양(李基讓)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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