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병인
어용겸(魚用謙)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장령 이태현(李泰賢)을 사적(仕籍)에서 삭제하였다. 이태현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 여름에 망령되이 변변찮은 논설을 진달하고 악을 물리치는 의리를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박성태(朴聖泰)의 대장(對章)이 나오게 되어서는 그 도리어 꾸짖음이 오로지 비방하여 욕하는 것만을 일삼았습니다. 신이 비록 고단하고 못났으나 차마 도리어 그와 더불어 이러쿵저러쿵 지껄여서 거듭 청조(淸朝)에 부끄러움을 끼치겠습니까. 거간질하고 아첨해 빌붙는 것은 곧 저들의 요결(要訣)이니 그는 빌붙었다는 지목에 대해서 장차 머리를 흔들어 부정하려 해도 실로 그 자취를 가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교계(交契)니 정의니 하는 등의 표현으로 자기 말을 꾸미고 화려하게 하여 마치 일찍이 진신 대부(搢紳大夫)와 우도(右道)로 서로 참여한 자처럼 하였는데, 전에 신이 ‘이른바 치람(癡濫)’ 운운했던 것은 대개 이러한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세도(世道)가 일어나고 떨어지는 것과 조강(朝綱)이 낮아지고 융성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예의염치(禮義廉恥) 사유(四維)가 신장되느냐 신장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전일 병조 판서를 천망(薦望)할 적에 좌의정이 현재의 자기 처지를 감안하여 처음에는 범연히 병이 있다고 핑계대더니 나중에는 태연히 염치없이 담당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대신(大臣)은 지위가 높으므로 대간의 말은 개의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여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일찍이 문구(文具)라는 두 글자로 시정(時政)을 논급하였고 보면 일찍이 염방(廉防)216) 도 문구(文具)에 속한다고 여긴 나머지 실사(實事)로써 스스로 힘쓰는 것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까. 그리고 저 병조 판서를 보면 그대로 임명된 뒤에 염치없이 나와 숙배(肅拜)하였으니 또 어쩌면 그다지도 매우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단 말입니까. 여러 사람이 모두 우러러보는 정승의 자리와 덕있는 사람을 명하는 높은 반열에서 사유(四維)를 무너뜨림이 이처럼 극심함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대신은 격례(格例)에 구애되는 만큼 치죄하기를 청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병조 판서에 대해서는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속히 견책하여 파면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병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이 대간의 말로 인피(引避)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묘당에 명하여 그 대임을 주의(注擬)하여 천거하게 하였는데 좌의정 채제공이 처음에는 신병을 이유로 피하다가 마침내 다시 천거하였다. 이에 상이 명하여 전임 병조 판서를 잉임(仍任)케 하였는데 이조원이 또 빨리 나와서 명에 사은하였다. 이때에 와서 이태현이 채제공과 이조원을 아울러 논하니, 주상이 그 소를 물리치고 전교하기를,
"대신(臺臣) 이태현의 소를 보건대 조정의 체통이 있다고 하겠는가. 대신을 배척하여 저처럼 짓밟으면서 병조 판서가 출사(出仕)한 것과 뒤섞어 업신여기며 한 화살에 둘을 꿰뚫어 말함으로써 반드시 대신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태현 같은 자가 1백 인이 있다 한들 대신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이태현을 우선 사적에서 삭제하라."
11월 2일 정묘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동향(冬享)에 쓸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펴보고 이어 예행연습을 행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1월 3일 무진
김상집(金尙集)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가 곧 이어 체차하고 이조원을 대신 임명하였다. 이조원이 의리를 끌어대어 명을 받지 않으니 신칙(申飭)하여 숙사(肅謝)하게 하였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이 대궐 밖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돈화문(敦化門) 밖에 주필(駐蹕)하여 서둘러 입시하게 하니, 채제공이 마침내 명을 받들었다.
11월 4일 기사
경모궁을 참배하였다.
대신·각신(閣臣)·예조 당상을 불러 접견하였다. 제신(諸臣)이 원자궁(元子宮)의 책례(冊禮)를 거행하자고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내 뜻을 이미 다 말하였다. 대체로 원자(元子)의 명호를 정하는 날은 곧 국본(國本)217) 이 이미 정해지는 때이다. 원자의 명호가 매우 중대하므로 ‘천자의 원자’라 하였고, 비록 작은 원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세자의 명호만 못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미리 세우자는 청은 명호를 정하는 데에 있었지 책봉하는 데에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책봉은 의문(儀文) 사이의 일에 지나지 않으니, 종사(宗社)의 부탁과 억조 백성의 기대가 어찌 의문이 구비되기를 기다려 더하고 줄어드는 바가 있겠는가.
그리고 요(堯)·순(舜)을 본받으려면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 나라의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면 열성조(列聖朝)에서 저사(儲詞)를 책봉하는 예가 때에 따라 같지 않았고 몇 살에 책봉한다는 것을 상례(常例)로 정하여 드러낸 것도 원래 없다. 눈과 귀로 듣고 본 것을 말하더라도 숙묘(肅廟)의 책례(冊禮)는 7세 때에 있었고, 나의 책봉은 8세 때에 있었으니, 국조(國朝)에서 이미 행한 예는 늦을수록 더욱 좋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돌아보건대, 나는 부덕한 사람으로 정치는 기대에 차지 못하였으나 하늘로부터 아름다운 명을 받게 된 그 근본으로 말하면 실로 책봉의 늦음에서 기인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선대왕(先大王)의 자애로운 은혜이다. 그러니 지금 이 책례(冊禮)를 다시 1, 2년 기다리는 것이 어찌 계술(繼述)하는 하나의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전하의 이 하교는 실로 경사를 쌓고 복을 배양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오신 것이므로 신은 흠앙(欽仰)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책봉한 뒤에는 의장(衣章)이 환하게 새로워지고 요속(僚屬)들이 다 갖추어지게 되니 법도를 스스로 지켜나가고 학문을 성취함에 있어 또한 어찌 크게 보익(補益)됨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물론 좋기는 하나 만일 응당 행해야 할 예를 전례를 상고하여 행하기로 한다면, 입학(入學)·책봉·가례(嘉禮)를 장차 해마다 행해야 하니, 의문(儀文)이 너무 장대(張大)해질 듯하다. 해마다 경사를 거행하기보다는 1년에 합해서 거행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을묘년218) 경사 때에도 여섯 가지 경사를 합하여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반드시 시일을 미루면서 기다리려 하는 까닭이다.
입학하는 일로 말하면 도감(都監)을 설치할 일이 아니다. 또 천자의 원자(元子)와 적자(適子)가 8세에 입학하는 것은 곧 삼대(三代)219) 의 고례(古禮)로서 본래 관례(冠禮)나 책봉의 선후에 관계되지 않는다. 작년에 경들이 진청(陳請)하기에 이미 명하여 먼저 강학청(講學廳)을 설치하고 사부(師傅)와 유선(諭善) 등의 벼슬을 두게 하였는데, 오늘 경들이 또 청한 대로 되지 못한 것을 답답하게 여기고 있고 보면 내년에 먼저 입학하는 예를 거행하는 것이 참으로 좋겠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대체로 선성(先聖)220) 에게 배례(拜禮)드리는 것이 큰 예이지만 종묘에 배례 드리는 것도 큰 예이니, 선성을 배알하는 것을 종묘의 알현(謁見)보다 먼저하는 것이 예의 뜻에 어떠할지 모르겠다. 주(周)나라의 제도를 보면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하면서 후직(后稷)을 배향(配享)하고, 명당(明堂)에서 상제(上帝)에게 제사하면서 문왕(文王)을 배향하였으니, 이는 높은 이를 높이고 친족을 친근히 하려고 한 것이다. 하늘을 섬김은 매한가지였으나 후직과 문왕에 있어서는 그 높이는 바가 본래 선후의 다름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는 교사(郊祀)가 없지만 나는 태묘(太廟)에는 남교(南郊)의 예와 같이 하고 경모궁(景慕宮)에는 명당(明堂)의 예와 같이 하였다. 그렇다면 입학하는 것이 비록 선성(先聖)을 높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늘을 높인 뒤에 할아버지를 높이고 할아버지를 높인 뒤에 선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가의(賈誼)의 《보부전(保傅傳)》에도 ‘태자(太子)가 태어나 3세가 되면 남교(南郊)에서 하늘을 알현한다.’ 하였고 ‘궐문을 지나갈 때에는 수레에서 내리고, 종묘를 지나갈 때에는 종종걸음으로 간다.’고 하였으니, 이것도 모두 삼선(三善)221) 으로 가르치는 것의 앞에 있었다. 가의가 비록 도를 전한 유자(儒者)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漢)나라가 일어나던 초기의 고례(古禮)를 징험할 수가 있다. 이것으로 논한다면, 종묘를 알현하기 이전에 선성을 알현하는 것은 아마도 가벼이 의논할 수 없을 듯하다.
또 종묘의 알현을 먼저 행하려면 마땅히 종묘를 배알(拜謁)하는 복장을 착용해야 하는데, 책봉 전에는 칠장(七章)의 의식을 갖출 수 없으니 이것 또한 전장(典章)에 큰 관계가 있다. 옛날에 무슨 의거할 만한 예가 있는가? 세손(世孫)의 복색은 곤포(袞袍)를 쓰고 용문(龍文)은 구룡(矩龍)인데, 원자(元子)의 복색은 원래 준용(遵用)할 말한 법복(法服)과 제도가 없다. 의장(儀章)과 품식(品式)에는 각각 정미(精微)로운 뜻이 깃들어 있으니 억견(臆見)으로 재정(裁定)할 수는 없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 입학하는 예를 반드시 먼저 거행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구경(九經)의 의리를 보면 어진이를 높이는 것이 친족을 친애하는 것보다 먼저 나와 있습니다. 선성(先聖)을 알현하는 것은 스승을 높이는 것이니, 스승을 높이는 것은 곧 어진이를 높이는 것입니다. 어진이를 높인 뒤에야 할아버지를 높이고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를 배울 수 있으니, 이것이 삼대(三代)의 예에서 입학을 가장 중하게 여긴 까닭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상이 주달한바 ‘요속(僚屬)이 구비된다’는 말이 가장 좋다. 보도(輔導)의 책임은 오로지 사부(師傅)와 유선(諭善)에 있는데, 사부 및 우유선(右諭善)은 올라오지 아니하고 좌유선(左諭善)은 연로하여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 지금 만일 문관과 음관(蔭官)에 구애하지 말고 학식과 문장·덕행이 있는 사람을 엄선하여 요속(僚屬)을 더 둔다면 반드시 많은 도움이 있을 것이다. 또 원손(元孫)에 사부(師傅)를 두는 것도 나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관직에 일정한 제도는 없고 오직 적합한 사람만 구하면 될 뿐이다.
옛날에 태자(太子)가 동궁(東宮)의 요속(僚屬)을 벗한다는 일컬음이 있었다. 지금 인원수에 구애받지 말고 세자 시강원의 사례를 대강 본뜰 경우 이 직책을 하는 것은 위사(衛司)를 가려 주의(注擬)하는 것과 같은 데 지나지 않아, 임하(林下)에 있는 이를 초빙하는 것과는 다름이 있으니, 반드시 나아오기 어려운 의리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관명을 어떻게 호칭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경들은 물러가서 널리 고증하여 품정(稟定)하라."
하였다.
11월 5일 경오
김재찬(金載瓚)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인동 부사(仁同府使) 최헌중(崔獻重)이 지방의 공식 경로를 통하여 상소하면서 군적(軍籍)·전결(田結)·적곡(糴穀)의 세 가지 폐단을 진달하였다. 비변사가 복주(覆奏)하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을 잘 의논하게 하고 사리를 논하여 장계로 아뢴 뒤에 품처(稟處)하게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고, 하교하기를,
"적법(籍法)이 비록 엉망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빈 호수(戶數)가 4분의 1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이미 들은 이상 어찌 그대로 놔둘 수 있겠는가. 전의 식년(式年)의 장적(帳籍)을 마감한 수령의 이름을 물어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결역(結役)을 더 징수하는 폐단은 영남이 호남보다 수월하다고 여겼는데, 수령의 소장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영남의 백성을 생각하면 어찌 몹시 불쌍하지 아니한가. 이 고을이 이와 같다면 다른 고을을 알 만하다. 먼저 해당 고을부터 바로 잡고 나서 다른 고을도 그렇게 하도록 하라.
군포(軍布)와 결전(結錢)에 관한 일은 해당 고을이 더욱 심한 경우에 속해 있으니, 그 가운데 거두어들이기 어려운 것들은 특별히 기한을 물려주도록 하라. 이것이 비록 한쪽만 신경쓴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겠으나 또한 그다지 따르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도신과 고을 수령에게 분부하여 서로 의논해서 조정한 뒤 그 폐단을 바로잡은 상황을 아뢰도록 하라. 소민을 위하여 밤새도록 수응하고 촛불을 들리고 비답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아니하는데, 도신이 된 자가 또한 어찌 감히 즐기고 편안히 지내면서 임금의 뜻을 선양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11월 6일 신미
육상궁(毓祥宮)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하고 봉안각(奉安閣)을 참배하였다. 이어서 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장보각(藏譜閣)을 참배하고 의소묘(懿昭廟)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상이 연호궁(延祜宮)에서 선희궁(宣禧宮)으로 나아갈 적에 본동(本洞)의 조사(朝士)를 길 옆에서 불러 접견하고, 하교하기를,
"연로(輦路)가 이 마을을 지날 때마다 마을 안의 자제를 불러 접견하는 것은, 선왕께서 이곳을 고향처럼 여기셨다는 말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섭심대(躡心臺)의 옛터에 올라갔다가 돌아오곤 하는데 이것도 곧 옛날 사옥(祠屋)이 즐비했던 효성스러운 생각을 몸받으려 함이다.
마을 자제 중에 작고한 판서 권혁(權爀)의 손자 아이가 있다. 중신(重臣) 권상유(權尙游)와 권혁이 두 대에 걸쳐 이조 판서를 지내면서 신임을 받은 것이 어떠하였던가. 그런데도 그 집안이 근래에는 벼슬하는 사람이 없다. 나이 찬 사람이 있거든 오늘 안으로 구전(口傳)하여 녹용(錄用)하라. 그리고 연추문계(延秋門契)의 부로(父老) 가운데 일찍이 선조(先祖) 때 미곡을 하사한 것을 받은 사람이 지금도 혹 생존한 자가 있는가? 또한 한성부로 하여금 자세히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한성부에서 두루 알아본 뒤 아뢰니, 쌀을 차등있게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승지 유의(柳誼)가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다가 체직되어 돌아와서 아뢰기를,
"순영(巡營)에서 복정(卜定)222) 하는 것은 본래 봄과 가을에 하도록 항례(恒例)가 정해져 있는데, 근래에 혹 등(等)223) 을 앞당겨 거듭 징수하기도 하고 혹 별도로 복정을 늘리기도 하여 폐단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묘당에 명하여 해당 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묻게 하였다. 이에 관찰사 한용화(韓用和)가 사실을 조사해서 아뢰니, 하교하기를,
"순영에서 봄과 가을에 복정(卜定)하는 것을 비록 영곡(營穀)으로 회감(會減)케 한다 하더라도 귀할 때 징수하고 헐할 때 징수하는 데 따라 허다하게 부족한 수량이 나오게 마련인데, 이것을 혹 전결(田結)에서 내오기도 하고 혹 아전에게서 내오기도 한다. 전결(田結)은 본디 백성의 일이지만, 아전도 백성이다. 따라서 도신(道臣)이 된 사람으로서는 연례(年例)적으로 복정할 때에도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정중히 하고 신중히 해야 할 텐데, 어찌 차마 등(等)을 앞당겨 거듭 징수함으로써 다시 한 가지 폐단을 첨가한단 말인가.
그리고 조정에서 통렬히 바로잡을 목적으로 조사하게 하였는데, 도신의 장계는 어찌 이다지도 소략한가. 근래 백성의 근심과 국가의 계책을 메어다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도백은 그 도를 안찰(按察)하니 그래도 백성과 가깝다고 할 만한데, 도백이 되어서 이런 장계를 올리다니 그 뜻이 과연 거행하려는 데에 있는 것인가, 자신의 봉양을 위하는 데에 있는가, 백성을 위하는 데에 있는가?
대체로 홍주가 이와 같다면 충청도 52주(州)의 일도 이를 통해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오직 이미 나타난 홍주 한 고을만을 들어 초초(草草)하게 책임이나 때우고 있으니, 모르겠다만 홍주 이외에는 이른바 순영에서 복정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인가? 단연코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번신(藩臣)이 조정의 명령을 몸받지 않고 강 건너 불보듯 한 것은 그 죄가 어디에 해당하는가. 우선 함사(緘辭)224) 를 받고 중하게 추고(推考)하고, 다시 묘당에서 관문(關文)으로 물어서 고을마다 상세히 조사하여 그 폐단이 되는 단서나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를 일일이 장계로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등(等)을 앞당겨 징수하는 것과 따로 복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조(科條)를 엄히 세워 법령으로 정하고, 범하는 자에게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적용하라."
하였다.
11월 8일 계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일에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바르지 않은 것은 대체로 소품(小品)의 글에서 말미암았으니, 이른바 소품의 글이란 곧 명(明)·청(淸) 문체(文體)의 지류(支流)이다. 오늘날에 와서 바로잡는 방도는 그 도(道)를 한 번 변화시킴에 달려 있으니 또한 지나치게 사교(辭敎)를 허비할 필요도 없다. 다만 마땅히 그 사람을 평상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그 글을 불태우기만 하면 될 뿐이다. 가정에서는 부형이 조정에서는 담당 관원이 효박(淆博)함을 돌이켜 순박함으로 돌아오게 하는 방도를 생각하여 능히 이 도에서 나가면 노예로 삼고 이 도(道)로 들어오면 주인으로 삼는 정사를 쓰면 그 풍속이 변화하지 않고 선비가 바르게 되지 않음을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의강(李義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조심태(趙心泰)를 형조 판서로, 이병정(李秉鼎)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1월 11일 병자
의주 부윤 이기양(李基讓)이 하직 인사할 적에 불러 접견하였다.
윤대(輪對)하였다.
형조에 명하여 진사(進士) 강이천(姜彛天) 등을 추문(推問)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전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김정국(金鼎國)이 종제(從第) 김신국(金信國)에게서 들은 말을 우의정 이병모에게 와서 고하기를,
"강이천이 바야흐로 천안(天安)에 있으면서 해랑(海浪)의 적들의 소설(騷屑)스러운 말로 시골 사람을 속여 의혹시키고 있습니다."
하니, 이병모가 접견을 청하려 하였다. 상이 연신(筵臣)을 통하여 그 말을 듣고서 그 탄망(誕妄)한 정상을 통촉하고는 승지에게 이르기를,
"일이 매우 가소롭다. 대신이 접견을 청하는 것은 크게 판을 벌이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유시를 내려 그만두도록 하였다. 얼마 뒤에 강이천이 김정국의 상경 소식을 듣고는 그가 자기를 고발한 것으로 의심하고서 스스로 벗어나려는 계책에 급한 나머지 말을 달려 서울로 들어와서 대호군(大護軍) 이병정(李秉鼎)을 보고 김신국·김이백(金履白)·김려(金鑢)·김건순(金健淳) 등을 고발하였다. 이병정이 청하니, 상이 명하여 대체적인 내용을 기록해 들이게 하고 유시를 내려 물러가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형조에 명하여 강이천·김이백·김려 등을 잡아들여 정황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상이 형조 판서 조심태와 참의 이태영(李泰永)에게 이르기를,
"이 일은 진실로 한 번 웃음거리도 되지 못한다. 강이천은 내가 일찍이 여러 차례 보았는데, 경박하고 행검이 없는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재예(才藝)가 조금 있어 때로 반시(泮試)에 참여하였는데, 그 문체를 보니 슬프고 갸날프며 들뜨고 경박한 것이 전적으로 소품(小品)이었다. 그래서 연전에 중신(重臣) 이병정에게 위임하여 상사(庠舍)에 두고 6, 7명의 유생과 경전(經傳)의 문자를 교습(敎習)하게 하였는데, 그 뒤 응제(應製)에 한 번도 참방(參榜)된 적이 없었다.
내 생각에 그가 혹 징계되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모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감히 서울과 지방에 출몰하면서 못된 무리와 결탁하여 사설(邪說)을 만들어내고 암암리에 서로 호칭하고 있다. 그 자취로 보면 ‘요망한 말로 대중을 의혹시켰다’고 할 만하나, 사실은 사람을 속여 물건을 취한 데 지나지 않으니, 이는 대개 또한 궁한 나머지 못할 짓이 없게 된 소치일 것이다.
이러한 일에 대해 한 번 크게 판을 벌이게 되면 국가의 체통이 도리어 가벼워질 뿐만 아니라 혹 죄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걸릴 염려도 있다. 그래서 처음 생각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수습해서 무사히 끝나게 하려고 하였는데 강이천이 어디로부터 정보를 입수했기에 스스로 벗어나려는 계책에 급한 나머지 도리어 와서 고변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참으로 이른바 봄 꿩이 스스로 운다[春雉自鳴]고 한 격이다.
이쯤 되어서는 사체(事體)를 또한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깊이 조사하도록 명하기는 했지만 어찌 왕부(王府)를 더립힐 수야 있겠는가. 이에 형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말한 김려 형제 역시 평소에 소품(小品) 중의 사람으로 일컬어졌던 자들이고 듣건대 김이백은 허황하고 패려스러우며 성찰도 지각도 없는 무리라 한다.
그 가운데 김건순(金健淳)은 문정(文正) 김상헌(金尙憲)의 봉사손(奉祀孫)으로서 작고한 참판 김양행(金亮行)의 손자라고 한다. 이러한 말을 듣게 된 것은 곧 그의 죄이다. 그러나 김정국이 써서 바친 종이를 보면 김건순은 진짜 증거물은 없는 듯한데 다만 나이가 젊고 정해진 뜻이 없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집이 가난하지 않은데도 강이천 무리의 유혹과 빙자에 떨어져 스스로 한 동아리에 빠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애달퍼 죄줄 것이 못된다. 하물며 내가 작고한 참판에게는 잊지 못할 일이 있으니, 어찌 손자를 하나 보살펴 주지 못하겠 는가.
김건순은 당초에 이름이 여러 죄수의 초사(招辭)에 나오지 않게 하려 하였으며, 강이천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가벼운 죄과(罪科)에 두려 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굽혀서는 안 될 형장(刑章)을 고의로 굽히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등불에 날아드는 불나비와 같은 무리들을 번번이 역적을 다스리는 형률로 다스린다면 지난번에 이른바 국가의 체통이 도리어 가벼워진다고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11월 12일 정축
대신, 비변사 당상, 형조 당상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인심이 착하지 못하고 선비의 취향이 단정하지 못한 나머지 성인이 아닌 자의 글을 보기 때문에 바르지 못한 일을 행하게 되고, 그 결과 폐단이 마침내는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하고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능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점차 군부(君父)를 대수롭지 않게까지 보게 되어 스스로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죄에 빠지기에 이르러 이번 일이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지금 이 죄수들의 죄는 비록 헐하게 매긴다 하더라도 대중을 의혹시킨 형률과 말을 어지럽게 한 주벌(誅罰)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돌아보면 지금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못하고 거짓말이 그치지 않고 있는데 이런 때를 당하여서는 이런 무리를 더욱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이천은 내가 일찍이 한두 번 보고서 이미 경박하고 행검이 없다는 것을 요량하였다. 조금 재화(才華)가 있으나 전혀 글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소품(小品)에 잘못 빠져 들어 이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도 세록(世祿)의 집안인데 어찌 굳이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야 있겠는가.
대체로 선비가 성경현전(聖經賢傳)에 잠심(潛心)하면 못되고 편벽된 마음이 어디로부터 생기겠는가. 내가 매양 좌상 쪽에 속하는 사람들은 먼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읽기 때문에 병패(病敗)가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좌상에게 말하였다. 오늘부터 경연(經筵)에 오르는 신하들은 아비로서 아들을 가르치고 형으로서 아우를 면려(勉勵)하여 경전에 잠심(潛心)하고 소품의 문자를 보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기필코 경박함을 돌이켜 순박함으로 돌아오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부형의 책임일 뿐만이 아니라 담당한 관원 역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승보시(陞補試)는 곧 과문(科文)의 첫 관문이다. 대사성이 된 사람은 고시(考試)할 즈음에 혹 문체와 필획(筆劃)이 서툴고 갸날프며 경박하고 비뚤어졌을 경우에는 일체 축출함으로써 유생이 된 자로 하여금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의 소재를 환히 알게 해야 할 것이니, 그러면 어찌 크게 새로워지고 다시 볼 만해지는 효과가 없겠는가."
하였다.
형조의 죄인 강이천을 제주목(濟州牧)에, 김이백을 흑산도(黑山島)에, 김려를 경원부(慶源府)에 유배(流配)하였다. 강이천을 문초(問招)하기를,
"네가 중신에게 고발한 조목을 보면 요망하고 어지러운 말 아닌 것이 없다. 진실로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었다면 일단 들은 뒤에 나아와 고하는 것을 어찌 일각이라도 지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10일 간이나 지체하기에 이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시종 참여하여 한덩어리로 동화한 정상이 일마다 구절마다 탄로되자 감히 벗어나려는 마음을 내어 도리어 미루어 핑계하는 계책을 내었으니 지극히 교묘하고 지극히 사특하다. 전후의 정황을 일일이 바로 고하라."
하니, 강이천이 공초(供招)하기를,
"처음에는 길거리에 퍼져 돌아다니는 말을 듣고서 망령되이 향리의 어리석고 미욱한 무리와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김이백이 허망한 것을 가지고 사실로 만든 뒤로 한 번 전해지고 두 번 전파되어서는 제가 장차 인륜을 멸시하고 세상을 미혹시키는 무리가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므로 상변(上變)의 일이 있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전의 죄를 벗어나려는 계책에서 나왔으나 실로 스스로 남을 망측한 데에 빠지게 한 죄과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고발을 지체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말의 출처를 상세히 탐문하려 하다가 지체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상경한 뒤에 김려에게 찾아가서 만나보고 상의하였더니, 김려가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하기에 과연 중신 이병정을 통해 상변(上變)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문초하기를,
"너의 왕복한 서찰(書札) 가운데 은어(隱語)가 많이 있는데 ‘도(都)도 좋고 교(郊)도 좋다.’고 한 말은 가리키는 뜻이 무엇이냐? 서해 섬 안의 사람을 누가 보고 누가 들었느냐?
남산(南山) 석상(石上)이란 말은 누가 말하고 누가 응답했느냐? 전후 숨긴 정황을 사실대로 바로 고하라."
하니, 강이천이 공초하기를,
"금년 8월 과시(科試) 때에 김건순·김예(金䥧)와 함께 김려의 집에 모였는데, 김려 형제와는 원래부터 서로 친하였고, 김건순은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저의 집에서 두 번째 모여 삼교(三敎)225) 를 품평(品評)하고 양학(洋學)에 대해 범연히 언급하였는데 그래도 남은 소회가 있기에 그 이튿날 또 김건순을 그의 우거(寓居)에 가서 만나 보았습니다. 만나 본 것은 전후 모두 세 번이었습니다.
천안(天安)에 내려간 뒤로 김건순에게 보내는 편지에 ‘도(都)에서 할 만하면 도에서 하고 교(郊)에서 할 만하면 교에서 하자.’고 하였는데, 도(都)는 저자를 가리키고 교(郊)는 시골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서울과 시골을 막론하고 편의에 따라 회합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시운(時運)·시사(時事)·신술(神術)·성정(星精) 등의 말은 모두가 길거리에 퍼져 돌아다니는 허황한 말들입니다. ‘남산 석상(石上)’이란 말은 당초에 김건순과 수작한 일이 없습니다. 전화(錢貨)를 꾸어주기를 청한 것은 과연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제가 서울과 시골을 들락거리면서 부랑(浮浪)한 습관이 몸에 배어 부유한 사람과 교결(交結)한 뒤 혹 공갈로 동요시키기도 하고 혹 유인하기도 하여 화재(貨財)를 취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궁하면 넘친다.[窮斯濫]’고 한 격이라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염치없이 한 짓이 마침내 자신을 죄에 빠뜨리는 징검다리가 되었으니 죽음이 있을 따름으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다. 김이백에게 문초하기를,
"네가 낮고 미천한 무리로 서울과 지방을 출몰하면서 행적(行迹)이 부랑(浮浪)하여 간사한 무리와 체결해서 허황한 말을 지어내었으니, 전후 정황을 일일이 바로 공초하라."
하였다. 한 차례 형신(刑訊)하니, 김이백이 공초하기를,
"평소에 강이천에게 시부(詩賦)를 배웠습니다. 금년 8월에 강이천과 김예의 집에 같이 갔더니 김건순이 먼저 자리에 와 있었습니다. 김건순의 사람됨이 허한(虛閒)하여 남의 한 가지 능함과 한 가지 재예(才藝)를 보면 마치 그것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반드시 자기 몸을 낮추어 대우하였습니다. 그래서 강이천의 재능을 사랑하여 밤새도록 담론하였습니다. 제가 옆에 앉아 있다가 억지로 큰소리치기를 ‘좌상(坐上)의 사람됨이 모두 왕을 도와 보필할 재능의 소유자들인데, 어찌하여 말이 「편안하면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安不忘危]」는 데에 이르지 않고 귀결처가 없는 말로 밤을 새우는가.’ 하였더니, 강이천과 김예 두 사람은 무릎을 치며 칭찬해 마지않았으나 김건순만은 홀로 한 마디 말도 없다가 얼마 뒤에 ‘태서(太西)의 말은 가벼운 것이 곧 병통이다.’ 하였습니다. 태서는 곧 저의 자(字)입니다.
저는 나이가 젊고 천성이 어리석어 혹 들뜨고 허황한 말을 들으면 가리지 않고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과연 길거리에서 들은 것 중에 서해(西海) 섬 안에 어떤 사람이 있다는 말을 강이천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에 강이천이 말하기를 ‘이 말을 김정학(金正學)이 들었느냐.’ 하기에, 답하기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정학(正學)은 김건순의 자(字)입니다.
강이천은 매양 인재를 맞아 들이는 데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괴산(槐山)의 김종억(金宗億)과 신창(新昌)의 이주황(李周璜)이 그 심복이 되었고, 전의(全義)의 김정신(金廷信)과 덕평(德坪)의 최우문(崔遇文)이 항상 강이천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강이천은 또 남의 호를 잘 지었습니다. 저를 일컬어 중암(重菴)이라 하고, 김예를 일컬어 연소(衍繅)라 하고, 김건순을 일컬어 가귤(嘉橘)이라 하고, 김종억을 일컬어 동천주인(洞天主人)이라 하고, 김신국(金信國)을 일컬어 중인(中人)이라 하고, 서진일(徐鎭一)을 일컬어 수남장인(水南丈人)이라 하고, 해미(海美)의 이언길(李彦吉)을 해상인(海上人)이라 일컬었습니다."
하였다. 형조가 형벌을 엄히 하여 실정을 얻기를 청하니, 판결하기를,
"강이천은 형신을 엄히 하여 섬에 유배(流配)해서 스스로 새로워지고 다시 살아나는 방도를 도모하게 하고, 김이백은 형신을 엄히 하고 사형을 감면하여 정배(定配)하고, 김려는 정배하고, 김예·김신국 등은 방면하여 내보내라."
하였다.
관상감 제조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명과학(命課學)의 식년(式年) 시취(試取) 때에 액수(額數)가 너무 적습니다. 그러므로 선발이 넓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도 흥기(興起)하여 시험에 응시를 원하는 마음이 적습니다. 초시(初試)의 액수 4인을 8인으로 늘리고 복시(覆試) 2인을 4인으로 늘리소서. 시강(試講)의 책자 중에 《서자평(徐子平)》과 《범위수(範圍數)》는 모두 추명방서(推命方書)이고 원래 길일(吉日)을 가리는 일에 관계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원천강(袁天綱)》 및 신간(新刊) 《협길통의(協吉通義)》를 시강(試講)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13일 무인
형조 당상이 【판서 조심태(趙心泰), 참판 윤필병(尹弼秉), 참의 이태영(李泰永).】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강이천을 참작해 처리하라는 명을 정지하고 다시 끝까지 깊이 신문하여 국옥(鞫獄)의 체통을 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소를 물리쳤다. 옥당과 【응교(應敎) 이익모(李翊模), 부응교 윤서동(尹序東), 교리 박길원(朴吉源)·이정운(李貞運), 부교리 박윤수(朴崙壽)·정내백(鄭來百), 수찬 이희갑(李羲甲)·임한호(林漢浩), 부수찬 윤익열(尹益烈)·한치응(韓致應).】 양사가 【대사간 이의강(李義綱), 사간 송익효(宋翼孝), 정언 이동만(李東萬), 장령 오한원(吳翰源)·김이교(金履喬), 지평 홍병신(洪秉臣)·심달한(沈達漢).】 교대로 차자를 올려 쟁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6일 신사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불러 접견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이번 형조의 옥정(獄情)은 요탄(妖誕)하고 환망(幻妄)합니다. 비록 천지처럼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으로 그 일을 크게 확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만 이것은 살려주는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정사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크게 확대시킬 일이 아니다. 죄수가 이미 ‘길거리에 퍼져 돌아다니는 뜬 소문이다.’느니 ‘남을 속여 물건을 취하였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공초하였으니, 이와 같이 참작해서 처리해도 무슨 안 될 것이 있겠는가. 근래의 문체는 소품(小品)을 보기를 탐하고 기이하고 변환하게 하는 것을 힘쓰고 있다. 그래서 한 번 변하여 사학(邪學)이 되고, 또 한 번 변하여 이번의 일이 된 것이다. 이번 일은 모두 선비의 취향이 바르지 않음에서 연유하였으니, 실로 세도(世道)가 근심스럽다."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경원(慶源) 땅이 비록 서울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 선비들의 언어와 시문(詩文)은 모두 서울의 모양을 본받고 있으니, 이것은 귀양온 자들을 인연하여 보고 들으며 젖어듦이 많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번 옥사(獄事)에 간여한 사람은 이미 극히 요망하고 변환(變幻)합니다. 따라서 이 지방에 유배한다면 속이고 미혹시키면서 점차 물들일 염려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규장각 제학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경원이 비록 북쪽 끝에 있다 하나 개간된 들판이 평원(平遠)하고 인사(人士)의 현명함이 북관(北關)의 으뜸이 되니, 진실로 점차 물들 염려가 없지 않음은 과연 좌상의 아뢴 바와 같습니다."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형조 죄인 강이천의 죄상에 대한 전말을 신이 문안(文案)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 이면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듣건대 강이천이 못된 무리와 체결하여 서울과 외방을 출입하면서 요망한 말을 만들어내어 향곡(鄕曲)의 무지한 무리를 속여 꾀어낸 것이 이미 몇 해가 되었다 합니다. 그 마음은 사람을 속여 물건을 취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나 그 자취는 요망한 말로 대중을 미혹시킨 것이니, 그야말로 해당 형률을 적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거리에서 한 사람을 징치하여 백 사람을 면려(勉勵)시킨다 한들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천지처럼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으로 형신(刑訊)하여 섬으로 유배하는 데에 그치셨으니, 신이 어찌 꼭 극력 쟁집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강이천은 천성이 이미 요사스럽고 문장의 재주를 약간 겸하였으니, 만일 탐라(耽羅)의 먼 지방에서 어리석고 미련한 무리를 불러 모아 인심을 속여 미혹시키기를 전날 했던 것처럼 한다면, 국법이 있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족히 애석할 것이 없으나, 죄없는 어리석은 백성이 만일 그로 인하여 죄에 빠지게 되면 너무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의견으로는 탐라의 수신(守臣)에게 신칙하여 엄히 사찰해서 양반이나 상놈을 막론하고 감히 강이천이 묵고 있는 주인에게 출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적악(積惡)을 많이 하는 자를 끊어버리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이번 여러 죄인은 강이천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니, 각각 그 유배된 지방관에게 신칙하여 방지하여 사찰하기를 일체 탐라의 예규에 의하여 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알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다른 사람이 미혹을 당하는 것은 아직 논할 것이 없고, 그들이 살기를 도모하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방도는 바로 문을 닫아 걸고 책을 읽는 데에 있다. 허물을 뉘우치어 스스로 새로워져서 단정한 선비가 된다면 어찌 곧바로 참작해 석방하지 않겠는가. 이런 뜻으로 각 해당 도신 및 지방관에게 엄히 신칙하여 한편으로는 효유(曉諭)하고 한편으로는 엄히 경계하여 사람이 되게 하는 데에 목표를 두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7일 임오
편전(便殿)에 나아가 함흥(咸興) 독서당(讀書堂)과 치마대(馳馬臺) 옛 터에 세울 사적비(事績碑)의 비문을 친히 전하였다. 독서당 치마대는 곧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했던 옛 터이다. 상이 돌에 새겨 공적을 기록하려 하면서 친히 짓고 친히 써서 승지 이익운(李益運)에게 전하여 그로 하여금 받들고 가서 새겨넣게 하였다.
11월 18일 계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작은 표적을 설치하고 상이 활 7순(巡)을 쏘아서 15발을 맞혔다. 각신(閣臣)·승지·사관·장신(將臣)에게 명하여 짝을 지어 활쏘게 하고 장막에 나아가 고기를 삶고 꿩을 구워 제신(諸臣)들에게 나누어 먹였다.
이상황(李相璜)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20일 을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동지성균관사(冬至成均館事) 이병정(李秉鼎)에게 이르기를,
"경이 내일 대사성과 같이 성균관에 가서 승보시(陞補試)를 베풀되, 제생(諸生)에게 효유하여 문체를 가볍고 곱고 들뜨고 교묘하게 짓는 자와 필법이 뾰족하고 비뚤고 기울어지고 나부끼게 쓰는 자를 일체 엄금하라. 문체는 진실로 졸지에 크게 변화시키기 어렵다 하더라도 필법은 한 번 보아도 그 전중(典重)하거나 의경(欹輕)226) 한 것을 알 수 있으니,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곧바로 낙과(落科)시키도록 하라. 이와 같이 하였는데도 또다시 전처럼 하고 고치지 않는 자는 선비로 대우할 수 없다. 오직 담당관원이 다스리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옛날대로 일대(一代)의 문체가 있었으니, 이를테면 김창흡(金昌翕)·이사명(李師命)이 국가가 융성할 때에 크게 울리니 따라서 추상(趨尙) 하는 선비들이 많았으며, 아래로 김이안(金履安)·윤상동(尹尙東)·채득순(蔡得淳) 같은 자도 모두 스스로 일가(一家)의 문체를 이루어 선비들을 인도해 권함에 그 효과가 없지 않았습니다. 근일에는 간혹 저 사람이 이 사람보다 나은 경우는 있으나 작자(作者)의 문체로 이름이 난 경우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비된 자가 체재를 알지 못하고 나오면 나올수록 더욱 기이한 지경에 들어가면서도 그칠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크게 근심되고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이천의 무리가 이렇게 된 까닭도 소품(小品)의 해독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소품을 하여 마지 않으면 장차 사학(邪學)이 될 것이니, 어찌 크게 근심하고 염려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 다스리는 과(科)에 부쳐주어 이미 살 길을 보여 스스로 새로워지는 방도를 도모하게 하였으니 비록 그들과 같은 무리라 하더라도 반드시 감사할 줄 알 것이다. 조정의 관원이나 선비를 막론하고, 간혹 경전(經傳)을 메어다 버리고 패서(稗書)에 빠진 자가 있어 기이함을 찾고 교묘함을 끌어내어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부형이 있는 자는 부형의 책임이니 진실로 따라서 통렬히 금하겠거니와, 만일 부형이 없는 자는 누가 그를 위해 금지시키겠는가. 가장 관심을 갖고 맹렬히 살펴야 할 자는 오직 세상에서 부형이 없는 자일 뿐이다."
하였다. 동지성균관 이병정이 아뢰기를,
"태학(泰學)에서 매월 세 차례 강(講)하는 것은 준걸을 만들고 학문을 권장하는 아름다운 제도인데, 근년 이래로 전연 포기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세 차례 강하는 것은 비록 혹 계속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만일 대사성이 매월 재임(齋任) 및 학업에 부지런한 연소한 유생과 더불어 재(齋) 안이나 외방이나 구애받지 않고 한 번 강회(講會)를 베풀되, 책자는 사서(四書) 및 《성리대전(性理大全)》·《근사록(近思錄)》을 돌려가며 통독(通讀)하여 본원을 탐색하고 부화(浮華)한 것을 금지시키면 아마도 문화(文化)를 대양(對揚)하는 데에 일조가 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대사간 이상황(李相璜)과 사간 조덕윤(趙德潤) 등이 아뢰기를,
"강이천은 본래 요사한 성품으로 시문(詩文)의 기예가 조금 있어 패관(稗官)의 들뜨고 음탕한 말을 표절하고 시장 무리의 경박한 태도를 지어 내어 원근의 사람을 불러 유혹하여 혹 술법과 기예로 서로 자랑하고 당여(黨與)를 규합하여 문득 별호로 서로 불러주었습니다. 재물을 속여 빼앗고 뜻이 섬홀(閃忽)하여 황탄 괴이한 일을 가설(假說)하고 요망 허탄한 말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감히 사실이 드러난 뒤에는 도리어 발을 빼려는 계책을 하였으니, 전후의 정상은 일마다 교활하고 간사합니다.
게다가 탄망(誕妄)하고 음사(陰邪)한 김이백(金履白) 같은 무리가 또 따라서 빌붙어 사령노릇을 하여 사제(師弟) 사이를 칭탁하여 간사한 말을 전파하고 도당을 유인하여 간악한 계책을 종용(慫慂)하였습니다. 서울과 지방으로 출몰하면서 악역(惡役)을 기꺼이 담당하고 밤낮으로 규합 결탁하여 그 사주(使嗾)를 들었습니다. 그밖에 지극히 요망하고 지극히 간사한 정상은 강이천보다 더 심함이 있습니다.
김려(金鑢)에 이르러서는 본래 간사한 무리로 요망하고 음사(陰邪)한 소굴로 뛰어들어 갔습니다. 그들을 불러다 기거시키면서 온통 한덩어리가 되고, 오가며 주관없이 남의 말만 듣고 따라서 동기간처럼 보며, 오가며 서로 화답하고 호응하여 서로 간담을 털어 놓았습니다. 고발하는 일을 같이 의논함에 미쳐서는 가리울 수 없는 정적(情迹)이 더욱 드러났으니 강이천과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밝은 해가 중천에 있어 모든 물체가 형체를 숨길 수 없는데, 특별히 함께 살게 하려는 덕화를 미루어 모두 새로워지는 영역에 오르게 하고자 하여 이와 같이 참작해서 처리하는 명이 계셨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저들 무리가 비록 급제도 못한 하찮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또한 고관의 후예들입니다. 그 간사하고 음탕함의 물든 바와 심술(心術)의 빠진 바가 처음에는 사람을 꾀어서 재물을 취한 것 같으나 점차 요망한 말을 날조하여 거짓말을 선동하였습니다. 한결같이 이렇게 하고 그치지 않으면 실로 앞으로 말하기 어려운 걱정이 생길 것입니다. 벌하여 벌을 그치게 하는 성인의 정사에 있어서 결코 그 조짐을 엄히 막아 ‘살려주는 방도로 사람을 죽이는 의리’를 보여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왕부(王府)를 거치게 하지 않고 지레 형조에 회부하였으니, 이것만도 형벌을 크게 잘못 시행한 것입니다. 게다가 끝까지 핵실하지 아니하고 갑자기 배소(配所)로 보내었으니 요사한 패거리들이 어떻게 두려워할 줄 알겠으며 백성의 뜻이 어떻게 정해지게 되겠습니까.
제주목(濟州牧)에 정배(定配)한 죄인 강이천과 흑산도에 정배한 죄인 김이백과 경원부(慶源府)에 정배한 죄인 김려를 어서 왕부로 하여금 잡아와서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히 심문하여 전형(典刑)을 통쾌하게 바로잡고 그 나머지 도당들도 엄히 국문하여 처단해서 간사한 싹을 꺾어버리게 하소서."
경외(京外)의 유생 유익주(兪益柱) 등이 상소하기를,
"고려의 시중(侍中) 성송국(成松國)은 창녕(昌寧)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중윤(中尹)이 되어 송경(松京)에서 벼슬하다가 경저(京邸)에서 죽었습니다. 송국이 달려가서 장차 영구(靈柩)를 싣고 돌아올 적에 울면서 말하기를 ‘자식이 되어 아버지가 병들었는데도 알지 못하였고 아버지가 죽어도 보지 못하였으니, 내가 차라리 아버지의 시체를 몸소 짊어지고 감으로써 지극히 원통함을 조금 풀겠다.’ 하고는 드디어 상여(喪輿)를 물리치고 짊어지고 가서 십여 일이 지나 창녕 경계에 이르렀는데, 마침 큰 눈이 와서 청산원(靑山院)에 정지하고 묵었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범의 발자국이 영구(靈柩) 옆에 두루 있는데 온 발자국은 없고 간 발자국만 있었습니다. 이상히 여겨 그 발자국을 따라서 가 보았더니 서쪽으로 맥산(麥山)의 아주 높은 곳에 자리 하나 정도의 땅에 눈이 녹아 마치 광혈(壙穴)을 파놓은 듯한 곳이 있었으므로 드디어 그 땅에 장사지냈습니다. 오늘날까지 효행이 감동시킨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송국은 얼마 되지 않아 사적(仕籍)에 올라서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습니다.
그 뒤 수백 년 동안에 걸쳐 효자·충신·재상·순유(醇儒)가 서로 잇따라 배출되어 성조(聖朝)의 명가가 되었습니다. 숙종 임진년에 많은 선비들이 의논을 주창하여 맥산의 북쪽 물계(勿溪)의 위에 사당을 세워 송국을 제향(祭享)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조 기유년에는 사당을 서원(書院)으로 만들고 이어서 7대손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과 참봉 성담수(成聃壽), 9대손 문정공(文貞公) 성수침(成守琛)과 사섬시 정(司贍寺正) 성운(成運)과 현감 성제원(成悌元), 10세손 현감 성윤해(成允諧)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배향(配享)하여 제향하였으며, 또 송국의 현손인 고려 직제학(直提學) 성사제(成思齊)와 6세손인 도총관 성승(成勝)도 추향(追享)하였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속히 편액을 하사하여 사림(士林)을 빛나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의 소청에서 선비의 논의가 같음을 볼 수 있으나 선액(宣額)은 수교(受敎)한 금령이 장고(掌故)에 실려 있으니, 사적(事蹟)이 계술(繼述)에 합치하는 한 두 사원(祠院)과 같은 경우가 아닌 한 감히 가벼이 거행할 수 없다.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11월 21일 병술
수원 판관(水原判官)이 관성장(管城將)을 예겸(例兼)토록 하였는데, 유수 서유린(徐有隣)의 계청을 따른 것이었다.
11월 25일 경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11월 27일 임진
하교하였다.
"요즘 듣건대, 나루에 얼음 얼고 얼음 풀린 물이 서로 섞이어 사람과 짐승들이 발이 미끄러지는 근심이 없지 않다고 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각 영문(營門)에 엄히 신칙하여 특별히 검찰하도록 하라."
함흥부(咸興府)에 불이 나서 민가 4백여 호를 연소(延燒)하였다. 관찰사 이정운(李鼎運)이 치계(馳啓)하니, 하교하기를,
"이 추운 절후를 당하여 화재를 입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살 곳을 잃은 정상을 생각함에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 같다. 회부미(會付米) 각 1석으로 휼전(恤典)을 특별히 시행하고, 1 년 기한으로 신역(身役)을 감면할 것이며, 잔독호(殘獨戶)로서 수납하지 못한 환곡(還穀)이 있거든 정퇴(停退)토록 하라. 그 부(府)가 실화(失火)가 가장 잦은데 이는 금화(禁火)를 방법대로 하지 못하여 매양 연소(延燒)가 많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도백에게 엄히 신칙하여 이 뒤로는 금화하는 실효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9일 갑오
삭주부(朔州府)에 정배된 죄인 구담(具紞)을 석방하였다. 상이, 그가 모친상을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명하여 방송(放送)하도록 하고 이어 5년간 금고(禁錮)의 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영남의 진자(賑資)로 상진미(常賑米) 5천 석과 조모(租麰)227) 5만 석의 획급(劃給)을 허락하였으니,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의 계청을 따른 것이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영남의 후조창(後漕倉)의 배가 출발하는 날짜를 3월 3일로 정하고, 영운 차사원(領運差使員)은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로 옮겨 정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금년 조운(漕運)에 대해 사리를 논하여 장문(狀聞)한 일을 보고서 전 도신 이태영(李泰永)이 보고한 바에 따라 복계(覆啓)하여 행회(行會)하였는데, 방금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의 장계를 받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장계에서 말하기를 ‘배 출발 시기를 앞당기고 물리는 것은 마땅히 바람의 기운이 어떠한가를 보아야 하고 영운 차원(領運差員)의 잘하고 잘하지 못함은 오직 검속(檢束)이 능하고 능하지 못함에 있다. 제포 만호(薺浦萬戶)가 차임(差任)된 지 이미 30년이 지났고 매년 바다에 나가기 때문에 진의 군사가 모두 바람을 살피는 데에 익숙하다. 안골포로 옮겨 정한 것은 새로 창건한 것에 관계되므로 배를 타는 장수와 아전이 물길에 익숙하지 못하고, 조창(漕倉)의 길도 멀고 가까움이 별로 다름이 없다. 그리고 13일에 배에 물건을 싣고 제포진(薺浦鎭)을 특별히 차임하는 것으로 이미 《통편(通編)》에 실려 있고 보면 당초 정한 제도가 참으로 상량(商量)한 바가 있다. 예전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일체 예전 제도대로 13일에 배에 싣고 제포진이 영운(領運)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30일 을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이르기를,
"정리곡(整理穀)의 사계(査啓)가 지금 일제히 당도하였는데, 혹은 너무 자잘하게 한 잘못이 있고 혹은 너무 소홀하게 한 잘못이 있다. 전일에 예조 판서의 말을 들으니 ‘정리곡의 명색(名色)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한 가지로 성을 보수하는 향곡(餉穀)도 정리곡이라 이름한다.’ 하였다. 그래서 절목(節目)을 가져다 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런데 성을 보수하는 향곡 안에 들어 있었고 보면 원래 미곡 조목이 혼동하기 쉽게 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니 열읍(列邑)의 수령을 어찌 다 파면해서야 되겠는가."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지금 이미 논열(論列)하여 장문(狀聞)하였는데, 일체 아울러 버려두면 징계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게 되고 또 해이해질 염려가 없지 않으며, 만일 일체 아울러 징치(懲治)하면 또한 크게 일을 벌이는 데에 관계되니, 신은 어떻게 해야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의 도백이 올린 장계의 사연이 더욱 무엄하기 그지없다. 영남 70여 주에 어찌 참으로 법을 범한 자가 없겠는가. 그런데도 그만 허술하게 두어 마디 말로 얼버무리며 책임이나 때우려 한단 말인가. 엄하게 처단하지 않을 수 없으나, 내년 봄의 진정(賑政)을 미숙한 사람에게 맡기기도 어렵다."
하고, 마침내 유사 당상(有司堂上) 이시수(李時秀)에게 명하여 각도의 장계를 가져다가 비변사에 봉해둔 다음 내년 맥추(麥秋)228) 를 기다린 뒤에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성냄을 문득 잊어버리고 이치의 옳고 그른 것을 살펴 본다.’ 하였으니, 나도 이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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