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신유
사학(四學) 유생 유춘주(兪春柱) 등이 상소하기를,
"《춘추(春秋)》라는 한 책은 성인께서 왕자(王者)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정신에 입각하여 만세(萬世)에 걸쳐 사람들이 법도로 삼도록 지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 신약추(申若樞)라는 자는 유독 무슨 마음을 가졌기에 이런 의리를 차마 잊어버린 채 입으로 이적의 풍습을 답습하고 손으로 이적의 말을 쓰며 기꺼이 《춘추》의 죄인이 되려한단 말입니까. 사람이 불량해도 어쩌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임어(臨御)하신 지 20여 년 동안에 이치를 밝히고 의리를 강론하여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뜻 둔 일을 계술(繼述)하시고 우리 소중화(小中華)의 문물을 빛내셨습니다. 그리고 절의를 높이 숭상하게 하고 삼강 오륜을 붙들어 일으킬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모두 다 쏟으시는 한편 또 이렇게 새로 《춘추》를 간행하시어 해와 별처럼 거듭 드러내 보여주셨으니 이제는 인심이 차분히 안정되고 세도(世道)가 바르게 돌아와야만 참으로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종의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얼굴을 바꿔 차례로 나오면서 흉악하고 패려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를 장주에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세간의 변괴치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대체로 그 전편의 내용이 거만하고 무례한 가운데 핍박하는듯 어긋난 표현을 쓰고 있는데, 마구 말하는 것도 부족하여 경(經)을 어그러뜨리고 경을 어그러뜨리는 것도 부족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있으니, 이 어찌 홍수나 맹수의 재해에만 비길 성질의 일이겠습니까. 산에 봉선(封禪)해야 한다는 설 같은 것은 더욱 황패(荒悖)스럽기 그지없는데, 어찌 일찍이 태산의 신령이 노중련(魯仲連)보다도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요즘 들어서는 사학(邪學)이 점점 기승을 부리면서 그 소굴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으니 서로를 끌어들여 같이 물에 빠져 죽을 염려가 실제로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통쾌하게 전형으로 바로잡아 의리를 더욱 밝히지 않는다면 장차 흉도를 조금이라도 단속할 길이 없게 되어 영원히 화란의 싹을 제거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결단을 내리시어 통쾌하게 해당되는 율을 적용하심으로써 무너진 기강이 진작되고 왕법이 행해지도록 하소서. 그러면 이 또한 《춘추》의 정신에 입각한 하나의 다스림이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신약추는 본디 꾸짖을 가치도 없는 자이다. 두려워할 줄도 모른 채 그런 짓을 하였으니 그 부끄러움은 조정에 있다 하겠다.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정최성(鄭最成)이 상소하기를,
"신이 전 헌납 임장원(任長源)의 소를 보고 처음에는 당황하였다가 곧바로 놀랍고 통분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인심(人心)과 습속(習俗)을 논한 곳을 보건대, 말에 줄거리가 없고 뜻에 요지가 없이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며 하나도 절실한 말을 한 것이 없었는데, 이런 것은 혹 그의 견식이 정밀하지 못하고 문장 실력이 노련하지 못한 탓으로 돌리고 구태여 심각하게 책망할 필요가 없다고도 하겠습니다만, 화성(華城)의 한 일은, 아, 도대체 그 무슨 말이란 말입니까.
상설(象設)을 둘러싸 호위하게 하면서 관방(關防)을 설치해 영구적으로 견고한 금성 탕지(金城湯池)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성상의 은미한 뜻인데 이것이 어찌 다만 성첩(城堞)과 누대의 승경만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백성을 귀찮게 하며 일을 시키지도 않았고 아랫사람들의 재물을 축내지도 않았다고 그 자신 역시 이미 말을 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가령 진언하는 신하가 공사를 처음 시작할 때 의아하게 여겼다면 그것은 혹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또 공사가 중단되지 않고 한창 건축 중이라고 한다면 이런 흉년을 당하여 우선 정지하기를 청하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공사를 완료한 지 3년이나 지났고 또 현재 공사를 벌이는 것도 없는데 옛날 일을 소급하여 거론하면서 장황하게 과례(過禮)했다고 제멋대로 공박을 가하였으니, 이것을 과연 잠규(箴規)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조롱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는 장차 신읍이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말하려고 하면서 먼저 연로의 분위기가 쓸쓸한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그의 의도를 보건대 암암리에 마치 ‘성의 공사가 처음 시작되면서부터 민간의 생활이 날이 갈수록 더욱 고달프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 같은데, 도대체 말의 맥락으로 볼 때 결론이 무엇인지 정말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창오(蒼梧)니 회계(會稽)니 하며 말한 몇 귀절을 보더라도 어떻게 신자(臣子)로서 감히 그런 식으로 배척하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공경하고 삼가는 자세가 크게 결여된 만큼 중률(重律)을 적용해야 마땅할 것이니 우선 변방으로 유배보내는 전형(典刑)을 시행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봉황이 오지 않으면 새 알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니, 일단 명색이 언관인 이상에는 가능한 한 아끼고 보호해 주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시정(時政) 가운데, 한 번 말해보라고 한 나의 뜻에 맞춰 말할 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지금 동료 대간이 숨김없이 말한 것을 문제삼아 장황하게 논척(論斥)하다니 그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대는 중하게 추고를 당해야만 하겠다."
하였다.
장령 정최성(鄭最成)을 삭직하고, 중비(中批)로 임장원(任長源)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정최성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선침(先寢)을 일단 잡아놓고 신읍의 공사를 벌인 것은 대체로 관방(關防)의 형세를 인하면서 아울러 사모하는 마음을 부치려고 한 것이니 대성인의 은미한 뜻을 모르는 자는 애당초 이 문제를 감히 경솔하게 거론하여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의 공사가 완료되고 궁실이 낙성된 뒤에 와서 홀연히 이의를 제기하여 ‘너무 과하지 않느냐.’고 하고 또 ‘해를 넘기며 나라를 지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의 소에서 이미 ‘일을 시키며 백성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보면 나라를 지치게 하였다고 한 것은 또 무슨 말이란 말입니까. 도로의 폐단을 논할 때면 처량하다느니 쓸쓸하다느니 하며 과장을 하고 신읍의 제도를 말할 때면 굉려(宏麗)하다느니 치대(侈大)하다느니 하며 극적인 표현을 구사하는 등, 위 아래 말의 맥락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있으니 그 뜻이 어찌 이상하지 않습니까. ‘코끼리가 밭을 갈고 새들이 김을 맨다.’고 한 아랫 귀절의 말들은 공경하고 삼가는 자세에서 내놓을 말이 결코 아닌 것으로서 크게 망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감히 문자로 드러내지는 못하면서도 더욱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그가 감히 열성의 선침(仙寢)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은 것입니다. 이 어찌 오늘날 신자(臣子)가 감히 말할 성질의 것이겠습니까. 변변치 않게 논핵한 것에 대해 윤허하여 따라주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질책까지 하시면서 중하게 추고하는 전형(典刑)을 베푸셨으니 어떻게 감히 대차(臺次)에 그대로 몸을 담고 있겠습니까. 체척(遞斥)을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습속을 바로잡기가 어쩌면 이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유도하여 말을 하게 한 이상 맞는 말이 아니더라도 허물할 수는 없는 일이고 꺼리지 않았다 해서 책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말을 따라 주면서 또 장려하고 상을 준다 하더라도 옛날 그대로 무기력하여 눈을 뜨게 해 줄 가망이 없을까 걱정인데, 그대와 같은 자는 구절마다 트집거리를 찾아내고 단락마다 샅샅이 뒤져 하자를 뽑아내 죄안(罪案)을 작성하고 허물을 찾아내 흔단을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그만 이와 같이 상도에 어긋난 주장을 하였으니 이는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씻기도 전에 새로운 폐단이 오히려 심해진 것으로서 듣는 이들마다 의욕을 잃게 된 만큼 해 되는 것이 적지 않다 하겠다. 따라서 그대 역시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 가운데 속하고 있으니 어찌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간관의 신분으로서 말하는 일을 허락받았고 보면 어찌 감히 말을 해야 할 것인지 감히 말해서는 안될 것인지 재량하고 취사한 뒤 할 말만 가려서 발언해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지금의 습기(習氣)로 볼 때 간언을 하는 소가 나올 수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도 곧이곧대로 하는 선비가 있는 것을 나 나름대로는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대가 이른바 죄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대가 피혐하며 마구잡이로 소를 올린 것도 어쩌면 그에게 상을 후하게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만약 다시 곡직을 가려 즉각적으로 분명히 보여주지 않을 경우 그 지향할 바를 정해 줄 길이 없게 될 것이니 그대는 삭직하고 사간 임장원은 동부승지에 제수해야 하겠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경상도 유학(幼學) 김완찬(金宛燦) 등이 상언(上言)하여, 고(故) 충신 증 이조 참판 유복립(柳復立)과 증 병조 판서 제말(諸沫)과 증 병조 참판 제홍록(諸弘祿)을 진주(晋州) 창렬사(彰烈祠)에 올려 제사지내기를 청하였는데, 사원(祠院)에 추후로 제향을 드리는 것은 원래 방금(邦禁)이 있기에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임진년 전역(戰役)에서 용맹스럽게 싸워 제사 음식을 받는 이들을 말할 때면 으레 진양(晉陽)의 충민묘(忠愍廟)와 상주(尙州)의 충의단(忠義壇)과 금산(錦山)의 종용사(從容祠)를 일컫곤 하는데 그 당시 함께 전사했던 사졸들도 모두 배식(配食)하고 있다. 그런데 증 참판 유복립과 제홍록이 유독 참여되지 못하고 있다니 이것이 과연 어떻게 된 곡절인가.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상고할 만한 문적(文蹟)을 널리 채집해서 보고하게 한 뒤에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처토록 하라.
충장공(忠壯公) 제말이 살신 성인(殺身成仁)한 곳이 일단 촉석(矗石)에 있지 않고 보면 창의사(倡義使)285) 의 사원(祀院)에 추후로 배향하는 것은 실로 의의가 없는데, 성산(星山)286) 의 죽림(竹林) 사이를 붉은 옷 차림으로 떠돌면서 그 충성스럽고 굳센 혼백이 아직도 답답하게 맺혀 흩어지지 않고 있으리라는 것을 여기에서 헤아려 알 수가 있다. 그처럼 남다르게 탁월한 인물에 대해 혹시라도 방금(邦禁)에 구애를 받은 나머지 그대로 둔 채 제사드리는 곳 하나 마련하지도 않는다면 어찌 흠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성주목(星州牧)에 증 목사(牧使) 이사룡(李士龍)의 사우(祠宇)가 있는데 연전에 충렬(忠烈)이라고 사액(賜額)했었다. 바로 같은 지역에 이런 사우가 있으니 이 사람도 함께 제사드리게 한다면 그 누가 안된다고 하겠는가. 특별히 도백으로 하여금 충렬사에 함께 제향을 드리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었다.
"지난번 경상도 진사 김완찬이 상언한 데 따라 ‘증 참판 유복립과 제홍록이 유독 진주 창렬사에 배향되지 못한 곡절에 대해 도신으로 하여금 널리 문적을 채집해서 보고하게 한 뒤에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처토록 하라.’고 판하(判下)하셨습니다. 그 뒤 경상 감사 이의강(李義綱)이 사실을 채집하여 치계하였기에 삼가 판부(判付)하신 대로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유복립이 영성하다 순절하고 제홍록이 그의 숙부287) 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실적(實蹟)이 근거할 만하기에 이미 포증(褒贈)을 베풀었다. 그 지역의 사우에서 함께 제향을 드리게 하는 일을 누가 안된다고 하겠는가마는 사원(祀院)에 추후로 배향하는 것은 원래 조정에서 금하고 있는 만큼 감히 멋대로 의논드리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형조가 영암(靈巖)의 박승복(朴昇福)이 격쟁(擊錚)한 원정(原情)을 가지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승복이 하소연한 것이 외람된 일인 듯하기는 하다. 그러나 명색이 황조(皇朝) 사람의 자손으로서 보살핌을 받는 것이 점점 예전과 같지 않게 되자 그들이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지 못한 채 마치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처럼 여기게 된 것이니 어찌 애처롭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더구나 진림(陳林) 등 여러 사람을 추가로 현충사(顯忠祠)에 배향하고 격일로 제사를 올리고 있는 이때에 이런 말을 듣고서 차마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각도의 바닷가 고을에서 이런 부류가 받는 감당할 수 없는 폐단들을 각각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한 다음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하소연한 내용 가운데 1인당 바치는 금액이 무려 20여 금(金)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더욱 놀랍기만 하다. 경중(京中)의 중국인 아병(牙兵)에 대해 연전에 그래도 좀 따로 부대를 편성해주고 중국군을 관할하는 관청을 장교급의 지위로 승격시키자 배[船]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이들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갖은 고초를 당하고 있다 하니, 향화촌(向化村)에서 발생하는 환자곡[還上穀]의 폐단과 아울러 먼저 호남에서부터 특별 조사를 실시한 뒤 장계로 보고하게 하고, 제도(諸道) 역시 이에 준하여 시행하라는 뜻으로 즉각 묘당으로 하여금 말을 잘 만들어 관문(關文)을 보내 단속토록 하라.
그런데 근래 명교(名敎)가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는 탓으로 《춘추(春秋)》의 대의와 관련이 있는 일인데도 관장(官長)이 된 자들이 부식(扶植)하는 방도를 알지 못한 나머지 그 피해가 의지할 곳 없는 향화촌으로 파급되고 있으니 어찌 너무도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에 흘러 들어와 우거하고 있는 황조 사람들을 향화인(向化人)으로 부르는 것도 지극히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서 모든 문서에 향화라는 두 글자를 답습해 쓰지 말도록 신칙하였는데 호남에서는 지금까지도 여태 그렇게 일컫고 있으니 제대로 사리를 모른다고 하겠다. 이 뒤로는 황조인 촌(皇朝人村)이라고 개칭하고 경외(京外)에 있는 장적(帳籍)이나 읍지(邑誌) 모두 이에 의거하여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정민시(鄭民始)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9월 2일 임술
승지 임장원(任長源)이 재차 소명(召命)을 어기니, 하교하기를,
"잘못된 습속을 바로잡고 곡직을 보여주려는 뜻에서 그를 승지로 특별히 제수했었다마는, 하대부의 관직에 있는 자의 염방(廉防)을 멋대로 전도되게 할 수가 없고 또 은대(銀臺)라는 청관(淸貫)도 한만(閑漫)한 관사(官司)가 아니니 한번 신명(伸明)토록 함이 마땅하겠다. 그를 숙천 부사(肅川府使)에 제수하라."
하였다.
도당록(都堂錄)에서 【좌의정 이병모(李秉模), 대제학 홍양호(洪良浩), 이조 판서 김문순(金文淳), 참판 이경일(李敬一)이 작성하였다.】 4점(點)을 얻은 자는, 민사선(閔師宣)·정만석(鄭晩錫)·한흥유(韓興裕)·장지면(張至冕)·이정병(李鼎秉)·조득영(趙得永)·이서(李垿)·홍낙안(洪樂安)·홍수호(洪受浩)·여준영(呂駿永)·박종경(朴宗京)·김이재(金履載)·김희화(金熙華)·신현(申絢)·조석중(曺錫中)·조만원(趙萬元)·이면승(李勉昇)·홍치영(洪致榮)·김희주(金熙周)·김이영(金履永)·민명혁(閔命爀)·윤명렬(尹命烈)이다.
하교하였다.
"모름지기 그 마음을 먼저 느긋하게 해 준 뒤에야 그 힘을 조금 펴게 할 수가 있는 법이다. 환곡(還穀)을 대봉(代俸)288) 케 하는 것이 흉년에는 으레 행하는 일이기도 하다마는 금년의 답도(畓稻)와 전속(田粟)의 작황이 판이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는 일인데 일단 그렇다는 것을 안 이상에는 대봉케 하는 일을 늦춰 시행할 수가 없다. 삼남(三南) 지방에서 대봉케 하는 한 조목을 대신에게 문의하였더니 역시 좋다고 하였다.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삼도(三道)의 도신에게 행회(行會)하여 우심한 곳은 다수 대봉케 하고 나머지는 분기별로 나누도록 하겠다고 민간에 효유(曉諭)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각기 이를 믿고서 마음을 느긋하게 갖고 힘을 펼 수 있도록 하라."
중비(中批)로 구득로(具得魯)를 부교리로 삼고, 하교하기를,
"네 조부가 궁연(宮筵)에서 후대받던 일을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문임289) 의 손자로서 영선(瀛選)290) 에서 누락된다면 진주를 빠뜨린 탄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초계(抄啓)한 강제(講製)를 보건대 고문(顧問)의 반열에 두는 것이 합당하겠기에 이렇게 명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구득로가 누차 소명을 어기자 외방의 군위 현감(軍威縣監)에 보임(補任)하였다.
9월 4일 갑자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재실(齋室)에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장용 대장(壯勇大將) 조심태(趙心泰)가 아뢰기를,
"화성부(華城府)를 외영(外營)으로 승격시킨 뒤에 군제(軍制)에 있어 아직 실마리가 잡히지 않고 사초(司哨)에 있어서도 끝내 일정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올 봄 원(園)에 행행(幸行)하셨을 때 묘당에서 의논하여 속읍(屬邑)을 배정함으로써 관할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만, 만약 과천(果川)·시흥(始興)·용인(龍仁)·안산(安山)·진위(振威)의 다섯 고을을 두 외영에 소속되게만 해 준다면 그런 이름을 빌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섯 고을에 있는 군정(軍丁)들은 서울의 각영(各營)이나 각사(各司)에 소속된 자들을 막론하고 일체 외영에 떼어 준 다음에야 절제(節制)할 방도가 생기고 호령도 전일하게 되어 쓸모있는 군사로 예비해 둘 수가 있을 것인데, 더구나 지금 한창 군정을 뽑고 있으니 떼어서 소속시켜 주는 일을 더더욱 조금이라도 완만하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섯 고을에 있는 군정 가운데 가령 훈국(訓局)의 포보(砲保)나 향보(餉保)는 그 비중이 남다르고 또 잔약한 관아나 그 밖의 모처(某處) 역시 관심을 가져주어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외사(外使)로 하여금 훈국 및 각 해사(該司)를 왕복하면서 편한 쪽으로 대체해 주도록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9월 6일 병인
하교하였다.
"지난번 영남 유생의 말에 따라 고려(高麗) 충신(忠臣) 황명(皇明) 예부 상서(禮部尙書) 김주(金澍)에게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렸었다. 그런데 지금 장차 관원을 시켜 제사드리게 하려는 차에 듣건대 ‘그의 형은 이름이 김제(金濟)이고 호는 백암(白巖)으로서 평해 지군(平海知郡)으로 있다가 벽에 시를 써놓고 바다로 갔는데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바꿔 제해(齊海)라고 했으니, 이는 대체로 노중련(魯仲連)이 바다에 빠져 죽겠다고 한 것처럼 하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고 하였다.
우리 동방은 풍속이 미개한 상태로 있다가 기사(箕師)291) 께서 오신 뒤로 인륜(人倫)에 관한 일을 얻어 듣게 되었었다. 그러다가 정 문충(鄭文忠)292) 등 제현(諸賢)에 이르러 제대로 그 뜻이 밝혀졌는데, 그들 모두 은(隱)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호를 삼았으니 이들이 이른바 9은(隱)으로 불리워지는 분들로서 바로 포은(圃隱)·목은(牧隱)·도은(陶隱)·야은(冶隱)이라고 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 밖에 72인이 산골짜기에 함께 들어가 그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또 전서(典書) 윤황(尹璜)같은 이는 스스로 후송(後松)이라고 호를 하였고, 장령(掌令) 서견(徐甄)은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감회 어린 시를 지었는데, 이렇듯 뇌락(磊落)한 기상을 보여주는 일들이 전후로 줄을 이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귀와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건대 백암은 충정을 아우로 두어 두 사람 모두 절의를 이루었으니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293) 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도 여태 자취 없이 사라져 일컬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바닷가 뱃사공이나 어부들만 그 유허(遺墟)를 가리키면서 가끔 눈물을 흘릴 따름인 것이다.
대저 일에는 밝게 드러나고 어두워 안 보이는 경우가 있으며 이치 역시 펴지고 막히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즉 모두가 그 시대와 명운(命運)에 관계된 일이라 하겠다. 내가 이렇게 늦게야 들어 알게 되다니 애석한 일이다. 홍문관으로 하여금 역명(易名)294) 의 의전(儀典)을 의논하게 하라.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동해(東海)의 물을 길어 오고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캐어서,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혼령을 불러들여야 마땅하니, 시호를 내리는 날 해상(海上)에 제단을 설치함으로써 세상에 유례가 없이 생각하는 조정의 감회를 부치도록 하라."
박종갑(朴宗甲)을 지경연사로, 김이영(金履永)을 의정부 검상으로 삼았다.
9월 7일 정묘
하교하였다.
"인성 대군(仁城大君)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되 창릉(昌陵)에 친제(親祭)를 행한 뒤에 거행하게 하라. 묘도(墓道)를 찾지 못했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지방관이 와서 아뢴 기회에 순회묘(順懷墓)의 구역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선조(先朝) 무오년에 수치(修治)하도록 특별히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 방치해 둔 나머지 해도에서 즉각 조사하여 아뢰지 못하는 결과를 빚게 된 것이니, 만약 따로 규정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또 찾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다. 한식 때에 지내는 제사는 수진궁(壽進宮)에서 관장하는 다른 분산(墳山)의 예에 의거하여 내시를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할 것이며, 제품(祭品)은 해관(該官)이 조치해 마련하고 묘도는 지방관이 매년 한 번씩 소제(掃除)토록 하라.
명숙 공주(明淑公主)의 분산(墳山)은 경릉(敬陵) 구역 안에 있는데 이것은 즉 배장(陪葬)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묘도가 형편없게 되고 비갈(碑碣)도 깨졌다 하는데 다시 쌓게 하고 비를 세우게 한다 하더라도 제사를 주관하는 자손이 영외(嶺外)에 있는 만큼 그가 기일에 맞춰 못 올라오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역시 해도(該道)로 하여금 즉각 양료(糧料)와 포마(餔馬)를 그에게 주어 출발시키도록 하고 함께 대동하여 검사하게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가 보고해 온 데 따라 인성 대군(仁城大君)의 묘소에 한식(寒食) 제사를 드릴 때의 제품(祭品) 기수(器數)를 마련하여 별단(別單)으로 들입니다. 그런데 수진궁(壽進宮)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보건대, 병신년295) 4월 전교하신 데 따라 본궁(本宮)에서 각 사판(祠版)에 대한 시향(時享)과 묘제(墓祭)를 행할 때의 찬품(饌品) 및 의절(儀節)을 고루 나누어 규정으로 만든 뒤 지금까지 준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판에 대한 시향은 2월과 8월 중순의 정일(丁日)에 행하고 묘제는 매년 한식에 행하는 등 모두가 예(禮)의 뜻에 맞았고, 제품의 기수를 정해놓은 것도 늘리거나 줄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명선 공주(明善公主)와 명혜 공주(明惠公主)의 경우 사판에 대해 시향을 드릴 때와 묘제를 올릴 때의 찬품에 약간 차이가 있는 만큼 한 가지 예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만, 이것이 어디까지나 전교하신 데 따라 준행해 온 것인 이상 아래에서 감히 바꾸자고 경솔하게 의논드릴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향(祀享)하는 의절(儀節)을 궁속(宮屬)에게 상세히 물어 보았더니,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의 사판에 시향을 드릴 때는 애당초 내시(內侍)가 제사 일을 맡는 예가 없이 본궁의 궁인(宮人) 스스로가 거행해 왔고, 대군·왕자·귀인(貴人)의 묘제를 행할 때는 내시가 그곳에 나아가 제사 일을 맡았다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사향인데 내시가 어떤 때는 맡고 어떤 때는 맡지 않는 것은 예제(禮制)에 흠이 되는 일인 듯싶고, 또 정해진 규정도 없으니, 이 뒤로는 사판에 대한 시향이든 아니면 묘소에서 지내는 절향(節享)이든 간에 모두 내시를 차정(差定)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수진궁에서 담당하는 궁내의 사판 및 산소(山所)의 제품(祭品)·제의(祭義)·제일(祭日)에 관한 별단은 다음과 같다. 1. 5묘(廟)에서 15위(位)의 사판을 봉안(奉安)하고 있는데, 평원 대군(平原大君)·강령 부부인(江寧府夫人)·제안 대군(齊安大君)·상산 부부인(商山府夫人)·영창 대군(永昌大君)·용성 대군(龍城大君) 이상 6위를 1묘에 봉안하고, 의창군(義昌君)·양천 군부인(陽川郡夫人)·평선군(平善君)·동원 군부인(東原郡夫人) 이상 4위를 1묘에 봉안하고, 숙신 공주(淑愼公主) 1위를 1묘에 봉안하고,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 이상 2위를 1묘에 봉안하고, 귀인(貴人) 김씨(金氏), 소의(昭儀) 유씨(劉氏) 이상 2위를 1묘에 봉안하고 있다. 이상은 모두 봄 가을의 가운데 달 가운데 정일에 시향을 거행한다. 2. 묘소에 20위를 봉안하고 있다. 평원 대군·강령 부부인·제안 대군·상산 부부인·영창 대군·명선 공주·명혜 공주 이상 7위의 묘소는 광주(廣州)에 있고, 용성 대군·의창군·양천 군부인 이상 3위의 묘소는 풍양(豊壤)에 있고, 낙선군(樂善君)·동원 군부인 이상 2위의 묘소는 청송(靑松)에 있고, 숙신 공주의 묘소는 서산(西山)에 있고, 귀인 김씨의 묘소는 망우리(忘憂里)에 있고, 소의 유씨의 묘소는 진관(津寬)에 있는데, 매년 한식에 묘소에서는 한 번만 제사를 지낸다. 대군 아지씨(大君阿只氏)의 묘소는 광주에 있고, 숙의(淑儀) 나씨(羅氏)의 묘소는 서산에 있고, 숙원(淑媛) 장씨(張氏)의 묘소는 연서(延曙)에 있고, 명빈(明嬪) 김씨(金氏)의 묘소는 아차산(峩嵯山)에 있고, 증 경빈(慶嬪) 이씨(李氏)의 묘소는 풍양에 있는데, 이상은 매년 한식에 제사를 설행한다.】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108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註 295] 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8일에 삼영(三營)의 권무과(勸武科) 시사(試射)를 훈련원에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김재찬(金載瓚)을 체차시키고 그 후임자를 의논해 천거하되 겸 유수(留守)가 순시를 다 끝내고 영(營)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교귀(交龜)296) 한 뒤 부임시키라고 명하였다.
김재찬이 청대(請對)하는 계사(啓辭)를 올리자, 하교하기를,
"더 없이 엄수해야 하는 것이 격례(格例)이다. 그런데 숨이 넘어갈 만큼 중대한 일이 뭐가 있기에 사소(辭疏)에 대한 비답도 아직 내리지 않았고 숙단(肅單)도 올라오지 않은 때에 홀연히 청대하는 계사를 들인단 말인가. 어쩌면 이렇게도 앞뒤가 뒤바뀌어 어긋날 수 있단 말인가. 먼저 그를 체차시키고 후임자를 의논해 천거하여 오늘 정사에서 비답을 받도록 하되 겸 유수가 순시를 다 끝내고 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교귀한 뒤 부임시키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각신(閣臣) 서호수(徐浩修) 등과 대사간 한용귀(韓用龜)가 청대(請對)하며 합문(閤門)을 지키니, 그들을 의금부 당직(當直)에게 내리라고 명하였다.
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이 상차(上箚)하기를,
"삼가 기읍(畿邑)에서 영문(營門)에 비보(飛報)를 뛰운 사실을 듣고서야 전하께서 천만 뜻밖에도 비상한 거조를 취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러한 때에 또 내일 훈련원(訓鍊院)에 거둥하시겠다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증거를 댈 만한 과거의 사실이 있는 만큼 어리석기 그지없는 자에게 말해보라 하더라도 어찌 분명하게 상의 의향을 우러러 헤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니 신의 한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엎어지고 넘어지더라도 대궐에 나아가 돌 층계에 머리를 짓찧으면서 상의 마음이 돌아서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병세가 점점 위급한 지경에 이르고 있기에 감히 고인(古人)이 행한 시간(尸諫)297) 의 의리에 입각하여 울면서 몇 말씀 진달드리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역수(逆竪)298) 가 혹시라도 도망쳐 나오게 하지 마시고 거둥하시는 일을 즉각 중지하도록 명하시어 국가의 형세를 공고히 하시고 국가의 법이 엄해지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경이 ‘기읍에서 비보를 뛰웠다 운운.’ 하였는데 그것은 내용을 잘못 전한 것이다. 오부(五部)의 관원에게 수색할 만한 곳을 수색하도록 해야 하겠다만, 지금 만약 몰래 들어온 자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경을 속이는 것이다. 아무리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하더라도 대신을 어찌 속이겠는가. 대저 억측에서 나온 이야기를 문자로 써서 번거롭게 하다니, 이는 국체(國體)와 관계된 일인 만큼 예우해야 할 늙은 정승이라고 해서 관대히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은 특별히 파직시켜야 하겠다."
하였다.
고(故)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에게 익헌(翼憲)이라는 시호를, 고려(高麗) 충신 김제(金濟)에게 충개(忠介)라는 시호를, 윤황(尹璜)에게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9월 8일 무진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청대(請對)하여 일단 연석(筵席)에 오른 뒤에 엄한 분부를 받고나서 궐문 밖에 자리를 깔고 대죄(待罪)하며 명소패(命召牌)를 바치니, 하교하기를,
"연석에서 분부한 것이 어찌 좋아서 한 것이겠는가. 채 판부(蔡判府)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에서 ‘기읍(畿邑)에서 비보(飛報)를 뛰운 것은 내용을 잘못 전한 것이다.’고 한 것은 가마가 나오는 것만 보고 착각해서 보고한 것을 말한 것이요, ‘수색하게 해야 하겠다’고 한 것은 차자가 들어올 당시에 그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출궁(出宮)하기 전에는 대신과 경재(卿宰)를 이미 병조로 하여금 궐문에 들이지 못하게 하였고, 대명(待命)하거나 수가(隨駕)하지 말도록 사관(史官)을 보내 전유(傳諭)하게 하였으며, 이어 명소패를 전해주도록 하였다.
정원·옥당·양사가 청대하니,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병조 판서 이시수(李時秀) 등이 청대하니, 하교하기를,
"경재(卿宰)는 들이지 말라고 이미 명했는데, 경들은 시위(侍衛)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분간(分揀)해 준다."
하였다.
수가(隨駕)하는 경재들이 청대를 요구하니,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훈련원에 거둥하여 3 영문(營門)의 권무과(勸武科)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좌의정 이병모(李秉模)와 2품 이상의 경재(卿宰) 및 옥당과 양사의 제대(諸臺), 그리고 화성부 유수(華城府留守) 서유린(徐有隣)과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을 훈련원에서 소견(召見)하였는데,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부호군(副護軍) 서영보(徐榮輔)가 상소하기를,
"오늘날 일이 급해졌습니다. 역수(逆竪)가 도망쳐 나와 멋대로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가 하면 난가(鑾駕)도 이미 위치를 이동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지나친 거조를 취하신 것이 도대체 모두 몇 번입니까. 어느 해를 막론하고 이런 일이 세과(歲課)처럼 되고 말았는데, 정신(廷臣)들이 바야흐로 쟁집(爭執)할 때에는 머리를 짓찧으며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하다가 그 일이 일단 지나고나면 도로 조용해지곤 하기 때문에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느끼는 점이 없으신 채 사의(私意)로 족히 공의(公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의란 아랫사람들의 말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바로 천리의 공(公)이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대소 신민 모두가 황급해서 어쩔 줄 모르며 분주하게 억눌러 막으려 하는 것이야말로 천리의 공으로서 양심을 가진 자라면 모두 똑같이 느끼는 바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깊이 생각하시어 문득 되돌이켜 보신다면 천리의 공은 끝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시고 그로 말미암아 사의를 굽히게 되실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난가를 되돌리시는 동시에 역수(逆竪)를 유사에게 내주시어 즉시 압송해 돌려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모두 잘 알았다."
하였다.
사죄신(死罪臣) 서호수(徐浩修)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머리에 진흙칠을 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대신이 명을 기다리다 받은 비지(批旨)를 삼가 보고서 도역(島逆)이 지금 또 도망쳐 나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어제 이후로 밤새 애를 태우면서도 입을 다문 채 한마디 말씀도 드리지 못했던 것은 그야말로 왕의 말씀을 감히 믿지 않을 수가 없었을 뿐더러 사체(事體) 또한 돌아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취하신 거조를 보건대 신들이 우러러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신들이 성실치 못하고 충성스럽지 못한 탓이긴 합니다만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이렇게까지 아랫사람들에게 믿음을 보여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훈련원에서 직접 시험하신 것도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 것입니다만, 여러 신하들을 합문(閤門)에서 저지시킨 것은 더욱 듣기에 놀랍습니다. 신들의 심정이 그지없이 절박하기만 하기에 옥중에서도 상서(上書)한 의리를 감히 본받게 되었는데 길게 말씀드릴 겨를조차 없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동가(動駕)의 명을 중지하시는 동시에 전후에 걸친 삼사의 요청을 들어 주소서."
하니,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백관을 이끌고 정청(庭請)하며 아뢰기를,
"전하께서 오늘날과 같은 거조를 취하신 것이 무릇 몇 번입니까. 안위(安危)가 호흡간에 박두했어도 개의하지 않으시고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질 걱정이 잠복해 있는데도 염려하지 않으시고 전궁(殿宮)께서 놀라 동요하시는데도 미처 우러러 몸받을 겨를이 없으시고 조야(朝野)가 술렁거리는데도 굽어 살필 여유가 없으시고 천지 귀신이 흔들어대며 진동하는데도 역시 거들떠 보지 않으십니다. 아, 이것이 도대체 무슨 거조이십니까.
전하께서 자신 만만하시어 시종 흔들림이 없으시며 특히 권(權)이라는 한 글자를 늘 활용하는 밑천으로 간주하고 계시는데, 신들이 감히 알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예로부터 전해 오는 성인의 권(權)이라는 것이 또한 일찍이 전하께서 하시는 것처럼 하나의 일을 가지고 연례 행사처럼 활용된 적이 있기나 했습니까. 신들이 비록 형편없기는 하지만 아조(我朝)의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아도 그런 일은 없었고 지난 역사를 징험해 보아도 그런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이 비상한 거조는, 삼가 생각건대 지나친 거조가 아니라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미 지나친 거조라고 통촉하셨다면 어찌해서 이토록 빈번하게 답습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신들이 아까 전석(前席)에서 소리를 높여 일제히 호소하였는데도 분명한 분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아, 역수(逆竪)가 지척에 있다는 것을 환히 알면서도 날이 기우는 것만 앉아서 바라보다가 전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말 한 마디를 여태껏 지체시켰으니 오늘날 조신(朝臣)의 죄가 어떻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신들이 물러가 억누르려 해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기에 감히 서로들 이끌고 뜨락에서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즉시 도역(島逆)을 압송해 돌려 보내라는 분명한 분부를 내리심으로써 백관과 만백성으로 하여금 성상께서도 어떤 때는 뜻을 굽히시기도 하고 조정의 의논이 어떤 때는 혹 펴지기도 한다는 것을 조금 알게끔 해 주소서. 그리고 이와 함께 회가(回駕)하는 명을 내리소서. 그러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성인은 인륜의 극치이다. 내가 원하는 것도 성인을 배우는 것이다. 주공(周公)은 관숙(管叔)을 의심하지 않았고 우제(虞帝)299) 는 유비(有庳)300) 를 늘 만나 보았다. 만약 주공과 순임금이 성인이 아니라면 모르지만 성인라고 한다면 나의 오늘날의 거조가 어찌 ‘성인은 내가 감히 자처하지 못한다.’고 한 뜻이겠는가.
이런 거조는 읍청루(挹淸樓)에서 시작되었는데 거기에서 두 번 만났고, 또 남소영(南小營)에서 한 번, 북영(北營)에서 한 번, 태창(太倉)·기영(畿營)·돈령부 앞길·훈련원의 교외 관사·금릉(金陵)의 행재소(行在所)·오늘의 이 훈련원에서 각각 한 번에서 두 번 만났으니 모두 10여 차례쯤 되는 셈이다. 이는 참으로 보고 싶은 마음으로 꽉 막힌 나의 개인적인 정리를 펴지 않을 수 없었던 동시에 누차 분부하신 자전(慈殿)의 뜻을 또한 따르는 일이 컸기 때문이었는데, 멀리 전송할 경우에는 교외에까지 나갔었고 조금 가까이 보려고 했을 때는 성문 안에서 만나기도 하였었다.
그리하여 봄 경치 감상한다 핑계대기도 하고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을 시험하겠다는 명을 슬쩍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서리 내리고 눈 오는 밤이나 비바람 치는 새벽녘 이모저모로 궁리를 짜내느라 정신을 많이도 소모하였었다. 그런데 한 번 소란스러운 과정을 거칠 때마다 그만큼 괴로움이 더해져 기력이 쇠하기도 전에 머리칼이 희어지고 늙기도 전에 이가 빠지게끔 되었으니 요즘의 나의 몰골이 어떻다 하겠는가. 천 년 뒤에라도 나의 사정을 알고 나를 이해해 줄 자가 또한 있으리라 여겨진다.
내가 비록 혼미하기는 하나 어찌 그를 강화(江華)에서 꺼내어 서울 집에다 놔두고 아침 저녁으로 계속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겠는가. 내가 이 일을 서서히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장차 기다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강화를 떠나는 배의 돛대가 슬쩍 보이기라도 하면 그에 따라 풍파(風波)가 일어나 점점 수습할 수 없는 난처한 경계에 이르곤 하는데, 우리 조정 신하들을 장차 보전할 수 없게 되기 보다는 차라리 형제간에 불화한다는 비난[尺布斗粟之譏]을 스스로 받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것을 가지고 연과(年課)라고 명명하여 저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의 눈과 귀를 조금 익숙하게 해 준다면 이 지경에 이르러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편안치 못하겠는가, 괴롭겠는가, 괴롭지 않겠는가.
올해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줄곧 가뭄이 들었고, 서옥(庶獄)을 소결(疏決)하느라 하루도 여유가 없는 가운데 오늘까지 흘러 왔다. 그래서 오늘에야 다행히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어제 판부사에 대한 비답에서 뭐라고 운운했던 것은 그가 아직 성안에 들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문이 열리는 대로 그를 불러 와 막힌 회포를 풀어보려고 하였는데 지금 또 경들에게 말을 들었기 때문에 또한 믿음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돌아보건대 나의 이 외로운 마음은 그가 오는 것을 볼 때에는 다시 찾은 것처럼 충만해졌다가 그가 가는 것을 보노라면 마치 잃은 것처럼 허전해지곤 하는데, 조용히 만날 계책을 잠자코 생각하고 제대로 보전해 줄 방도를 멀리 도모하여 지금 또한 다시 돌려 보내려고 하니, 대신 이하는 다시 번거롭게 이 일을 거론치 말도록 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홍락성(洪樂性)이 상차하여, 도역(島逆)을 압송해 돌려보내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정청(庭請)에 내린 비답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정청을 파하고 재계(再啓)하기를,
"신들이 삼가 비답을 내리신 것을 읽어 보건대, 위아래로 거의 수백여 언(言)에 걸쳐 말씀하시면서 주공과 순임금이 처변(處變)한 도리를 부연 설명하시고 전후로 권도에 맞게 행동했다는 뜻을 펼쳐 보여 주셨는데, 신들이 죽을 죄를 졌습니다만, 성상의 비답 가운데 말씀하신 가르침에 대해 부월(斧鉞)을 무릅쓰고 대략 진달드릴까 합니다.
유비(有庳)301) 를 늘 보았다고 하셨습니다만 그 일은 도자기를 굽고 물고기를 잡을 때에나 있었던 일이지 그림 그린 옷을 입고 거문고를 타신 뒤의 일302) 과는 상관이 없는데, 추서(鄒書)에서 문답한 것303) 은 물어 오는 데에 따라 성인의 마음을 발현한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관숙(管叔)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도 증거가 분명치 않습니다만, 그로 하여금 은(殷)을 감독하게 하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면 이것이야말로 주공이 바로 주공이 될 수 있었던 소이연이라 할 것입니다. 아, 그러나 역수(逆竪)가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지른 흉악한 행동이야말로 상(象)이나 관숙에 비교할 바가 아닌데 전하께서 처치한 것을 보면, 주공이 관숙을 처치한 것보다 몇 등급이나 아래로 감해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대순(大舜)이 야인(野人)으로 있을 때의 일까지 인용하여 예로 삼으려 하셨으니, 신들이 참으로 의혹되기만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한(漢)나라 시대에 형제가 불화했던 고사304) 까지 인용하셨는데 이는 신민들이 감히 눈뜨고 볼 수 있는 일이 결코 못되니 속히 환수하라고 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시간이 벌써 오시(午時)를 지났으니 삼가 생각건대 전궁(殿宮)에서 걱정하며 기다리는 마음이 갈수록 더욱 절실해지기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압송해 돌려 보내라는 분부를 조금이라도 늦춰서는 안될 것인데 시험을 끝낸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아직도 지체하시며 대가(大駕)를 돌리지 않고 계십니다. 그래서 신들이 더욱 절박한 심정에서 어쩔 줄 모른 채 큰소리로 호소하며 그칠 줄을 몰라하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분명한 분부를 내리시는 동시에 즉시 대가를 돌리도록 하소서. 그러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유시를 펼쳐 보여 주었는데 아직도 물러가지 않다니, 이것이 과연 분의(分義)에서 나온 행동인가. 경은 파직시켜야 하겠다."
하였다.
삼사가 복합(伏閤)하여 소회(所懷)를 진달하니, 연석(筵席)에 올라와 비답을 받으라고 명하였다.
전 좌의정 이병모의 파직을 불서(不敍)305) 로 고쳐서 써 내도록 명하고, 이어 재신(宰臣)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죄를 진 신하 이병모가 청대를 요구한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이미 파직되었고 또 소명패(召命牌)까지 바친 뒤인데 아직도 반열 가운데에 있다니 이는 체모에 관계된 일이다. 좌상의 파직을 불서로 써서 내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또 수가(隨駕)하는 직책의 재신들이 청대를 요구한다고 세 차례에 걸쳐 계달하였는데, 모두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환궁하였다.
삼사가 청대를 요구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이미 일이 잘 마무리되었는데 어찌하여 또 합문(閤門) 밖에까지 따라와서 이처럼 귀찮게 하는 것인가. 그대들을 우선 추고해야 하겠다."
하였다. 삼사가 또 청대를 요구하니, 물러가라고 하교하였다.
삼사가 복합(伏閤)하여 소회를 올리기를,
"신들이 아까 훈련원에서 시험을 보일 때 전석(前席)에서 일제히 호소하였고 복합하며 누차 아뢰었는데, 단지 보내려고 한다는 하교만 받들었을 뿐 돌아가도록 출발시킨 거조는 뵙지를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臣子)된 도리로 볼 때, 어떻게 감히 한사코 쟁집(爭執)하며 요구가 받아들여진 뒤에야 그만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재차 청대를 요구하였는데도 접견의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의리가 막힌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고 종묘 사직에 근심되는 일이 점점 더 끝이 없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서로 이끌고 합문을 지키면서 피끓는 심정으로 잇따라 호소하게 되었으니,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도로 유배시키라는 분명한 분부를 내려 주소서.
그리고 정청(庭請)하며 재계(再啓)한 것이야말로 거국적인 공분(公憤)에서 나온 일인데, 전하께서는 유음(兪音)을 내려 주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만 거꾸로 대신을 배척하며 파직시키심으로써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국체가 손상되고 군정(群情)이 답답해하는 것이 더욱 어떻다 하겠습니까. 그 처분도 환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무슨 말을 해 준들 그대들의 마음이 풀리겠는가. 아직도 합문을 지키고 있다니 정말 안될 일이다. 그중 장령 이우제(李遇濟)는 아침에 연석(筵席)에서 보건대 매우 피곤한 듯하였으니 체차를 허락한다. 지금은 쟁집할 의리도 없는데 이렇듯 소란을 떨고 있으니 무슨 말이 되겠는가. 속히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과 좌의정 이병모(李秉模) 및 어제 합문을 지킨 신하들에게 내린 처분을 모두 환수하라고 명하였다.
사간원 대사간 한용귀(韓用龜)를 체차시키라고 한 전지(傳旨)를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9월 9일 기사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경재(卿宰)를 이끌고 청대(請對)를 요구하니, 하교하기를,
"그를 이틀 밤 서울 집에서 재우고 아침에 출발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들이 이미 알고 있기에 그를 보낼 때 행색을 비밀에 부치지 않고 저자거리를 지나게 하였으니 저자의 백성들이 보았을 것이고 나루를 건널 때 나루를 지키는 관장(官長)도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눈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보았을텐데 경들만 유독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무슨 도리인가. 속히 물러들 가라."
하였다. 시임(時任)·원임(原任) 각신(閣臣)과 승지들 그리고 삼사의 신하들이 청대를 요구하니, 모두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홍명호(洪明浩)를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이병정(李秉鼎)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구일제(九日製)를 반궁(泮宮)에서 설행(設行)하였는데, 어제(御題)는 ‘포촉불언 홍곡장장(抱蜀不言鴻鵠鏘鏘)’이었다. 제생(諸生)이 어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어서(御書)로 제생에게 유시하기를,
"그대들은 상사(上舍)306) 출신 유생들로서 독서를 많이 하였을 것이니 어찌 햇수가 얼마 안되는 사학(四學)의 유생들과 비교가 되겠는가. 그런데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백지(白紙) 답안을 내었다는 일을 그대들은 혹시라도 들은 적이 있는가. 더구나 내준 문제가 알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다사(多士)의 실력이 다듬어지지 않은 것은 바로 나의 수치이다. 그래서 이렇게 특별히 그대들에게 유시하는 것이다.
일찍이 듣건대 촉(蜀)은 제사 그릇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임금이 공경하는 자세로 제기(祭器)를 지키면서 예(禮)로써 백관들을 통솔하면 아무 말없이 조용히 팔짱을 끼고 있어도 묘당의 정사가 모두 자연히 닦여지게 마련이요, 이렇게 해서 그 덕이 감응되고 교화가 행해져 밖으로 그 효과가 드러나는 것이 마치 큰 기러기가 날개를 활짝 펴고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연상케 하는데 백성들이 이를 노래로 부르며 찬미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으로 ‘제기를 안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묘당은 이미 잘 닦여지고 큰 기러기가 높이 날음에 백성이 노래부른다.[抱蜀不言廟堂旣修鴻鵠鏘鏘維民歌之]’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관자(管子)》에 나오는 말307) 이다.
내가 매번 이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며 음미하곤 하는데 마침 국제(菊製)를 맞아 기러기 울음소리를 듣다가 상념이 떠오르기에 붓 가는 대로 써서 내린 것이었다. 그대들이 그토록 고루한 자들인 줄을 내가 일찍 알았더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알기 쉬운 한 귀절의 말을 어찌 아껴 게시하지 않았겠는가. 율부(律賦)로 지어 내라고 하면 밤이 더욱 깊어지겠기에 과부(科賦)인 근체시(近體詩) 형태로 응시하게 했던 것인데 또 그대들의 하자를 덮어주기 위하여 이런 구차스러운 거조를 취하게끔 되었다. 3일 기한을 줄테니 제목 내린 것에 따라 지어 내어 조금이라도 오늘의 수치를 씻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2일 임신
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을 성전(聖殿)에 올려 배향(配享)하라는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문묘(文廟)는 예의(禮義)가 거기에서 나오고 사전(祀典)이 그로부터 말미암는 모범적인 곳이라 하겠다. 부자(夫子)를 중심으로 해서 유선(儒先)을 차례로 모셨으니, 덕을 본받고 공을 보답하는 것이 여기에 있고, 경모하며 실천에 옮기는 일이 여기에 있고, 학술을 바르게 하고 도법(道法)을 밝히는 일이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비록 오르내리고 읍(揖)하며 자신을 낮추는 등 의물(儀物)과 도수(度數) 가운데 미세한 표현이나 자질구레한 절차에 있어서도 오히려 옛 오류를 답습하면서 고식적으로 예(禮)를 삼는 일을 행해서는 안 될텐데, 더구나 위와 아래의 차례를 정하고 앞뒤로 향사(享祀)하는 일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구차한 점이 있게 해서야 되겠는가.
나는 평음후 유자(有子) 약(若)을 무(廡)에서 제사드리는 것과 관련하여 마음 속으로 계속 의아하게 여기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널리 자료를 상고해 보면서 늘 개탄해 왔다.
대체로 문묘의 철식(腏食)에는 무릇 세 단계의 등급이 있다. 정전(正殿)에 배향(配享)하는 것이 하나이니 안자·증자·자사·맹자 등 4성(聖)을 모시는 것이 그것이요, 동쪽과 서쪽의 서(序)에 종향(從享)하는 것이 하나이니 공문(孔門)의 10철(哲)과 송조(宋朝)의 6현(賢)을 모시는 것이 그것이요, 동쪽과 서쪽의 무(廡)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하나이니 공문의 제자(諸子)로부터 아래로 본조(本朝)의 유선(儒先)들을 모시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10철이라는 명목이 누구에 의해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논어(論語)》를 통해 분류한 4과(科)308) 라는 말에 따라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세어서 철(哲)이라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논어》의 이 이야기는 단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부자를 따른 사람들에 관한 감상을 말한 것일 뿐으로서, 이렇게 분류하여 4과에 소속시킨 것은 성문(聖門)의 인재가 성대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대저 증자는 도통을 전한 아성(亞聖)인데도 또한 거기에 참여되지 못하였고 보면, 그것을 가지고 성문의 현철을 총망라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고루한 일로서 너무도 좁은 생각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어찌되었든지 이때로부터 문묘의 사전(祀典)에 또 10철을 모시는 것으로 확정되었는데, 공문(孔門)의 고제(高弟) 가운데 안자를 한 등급 올려 정전에 배향하자 그 자리를 증자로 보충하였고, 또 증자가 한 등급 올라가자 이번에는 자장(子張)으로 보충하는 등, 마치 관직의 후임자를 충원하는 듯한 인상마저 주게 되었다.
이에 후유(後儒)들의 호되게 비난하는 주장이 분분하게 다투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4과에 지목된 사람들은 바로 부자를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따르던 자들일 뿐으로서 문인 가운데 훌륭한 이들이 진정 이 정도로 그치지는 않는다. 따라서 10철에 대한 이야기는 세속의 주장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고, 진정우(陳定宇)309) 는 말하기를 ‘유약 같이 어진 이도 그때 수행하지 않았었다는 이유로 10철의 대열에 끼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며, 김인산(金仁山)310) 은 말하기를 ‘유약이 성인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안자가 한 등급 위로 올라갔을 때 증자로 보충한 것은 괜찮지만, 유자(有子)를 놔둔 채 자장을 뽑은 것은 옳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설을 접해 보건대 본래 10철이라는 수에 꼭 구애받음이 없이 유자가 백세(百世)에 걸쳐 추중(推重)되어 왔다는 사실을 대개 알 수가 있다. 또 더구나 《논어》 첫째 편(篇)에 유자의 말을 기록한 것이 세 군데나 되는데 모두 증자와 함께 특별히 자(子)라고 칭했고 보면, 다른 문인들은 그에게 미칠 수 없었던 바라 하겠다. 그리고 《예기(禮記)》에 ‘애공(哀公)이 유약의 제문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는데311) 다른 제자들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 그렇다면 그가 노(魯)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존경을 받았었는지를 또 이에 의거하여 알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맹자는 ‘유약이 공자와 비슷했다.’고 말하지 않고 ‘성인과 비슷했다.’고 말하였다. 그러고 보면 그의 언행이나 기상을 감히 부자와 동등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인의 경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얼마나 환히 드러나고 있는가. 그런데도 그만 사마씨(司馬氏)312) 가 사리에 맞지 않는 설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모습이 공자와 비슷했다.’313) 고 억단함으로써 함순(咸淳)314) 연간에 한 제주(祭洒)로 하여금 자장(子張)을 올리고 유자는 물리치는 결과를 빚게 하였다. 또 한편으로 육상산(陸象山) 같은 자는 돈오(頓悟) 법문에 입각하여 유자가 효제(孝齊)를 중시한 것을 지리(支離)하다고 강력히 배척하였는데, 심지어는 육상산을 떠받드는 무리들이 천년이 지난 뒤에까지 왕왕 새삼스럽게 공격한 나머지 지금껏 번수(樊須)315) 나 무마시(巫馬施)316) 등의 무리와 함께 겨우 양무(兩廡) 사이에 배열되게 되었으니, 사전(祀典)이 잘못된 데 대한 사림의 탄식이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아조(我朝)의 문묘는 한결같이 중국 조정의 위차(位次)를 따르고 있는데, 우리 숙묘(肅廟) 갑오년에 이르러 송조(宋朝)의 6현(賢)과 10철(哲)까지 아울러 위차에 동참시켰고 보면, 이것은 또 중국 조정에서 미처 행하지 못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근래 중국 조정의 《회전(會典)》을 열람해 보건대, 유자와 주자를 대성전(大成殿)에 승배(陞配)하여 2철(哲)이라 한 뒤, 유자는 선현(先賢) 복자(卜子)317) 다음에 두고, 주자는 선현 전손자(顓孫子)318) 의 다음에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중국 조정에서도 미처 행하지 못했던 5현(賢)을 두루 거양(擧揚)한 우리 나라에서, 거꾸로 중국 조정에서 이미 행하고 있는 유자의 사전(祀典)만 유독 빠뜨리고 있으니, 이것을 도대체 무슨 말로 설명할 것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양서(兩序)에 종향(從享)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모두 공(公)의 봉작(封爵)을 받았고 양무(兩廡)에 종사(從祀)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모두 후(侯)나 백(伯)의 봉작을 받았다. 따라서 만약 유자를 서(序)로 올리려고 한다면 반드시 승격되어 공의 봉작을 받은 뒤에야 예에 합당하게 될 것이다.’고 하는데, 이는 또 그렇지가 않다. 전손자의 경우 여태 영천후(穎川侯)로 칭해지고 있는데도 서(序)에 올려졌다. 그렇다면 하필 유자의 경우에만 봉작이 바뀌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기(傳記)를 상고해 보더라도 믿을 만한 덕행의 증거가 이와 같고, 성문(聖門)에 참구(參究)해 보더라도 그를 추중(推重)하는 의논이 이와 같고, 뒷 사람들이 평론한 이야기나 중국 조정에서 바로잡은 사전(祀典)을 보더라도 어느 것 하나 승배(陞配)해야 할 확실한 증거가 아닌 것 없음이 또 이와 같다. 이러한데도 오히려 다시 고식적으로 한다면 예의상으로 어떻다 할 것이며 또한 이것이 어찌 사전을 중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고 하겠는가.
지금 문묘에 일이 있는 기회에 속히 의조(儀曹)로 하여금 평음후 유자 약을 성전에 승배시키는 예를 아울러 거행하게 하되, 승배하는 위차(位次)에 대해서는 그 기일에 앞서 고유(告由)토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서 시행해야 할 사항을 알려주는 절목(節目) 등에 대해서는 담당 관사에서 고사(故事)를 상고한 뒤 자세히 내용을 갖추어 보고토록 하라.
기억하건대 옛날 송조의 6현을 무(廡)에서 서(序)로 올릴 때 지금 종백(宗伯)의 증조(曾祖)가 되는 고(故)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종백으로 있으면서 실로 그 일을 담당했었다. 그런데 이렇듯 성대한 일을 당하여 지금의 종백이 마침 이 책임을 맡게 되었으니, 일이 우연치 않은 것만 같다. 아, 그대 종백으로 있는 신하여. 그대의 직무를 공경히 수행하여 의식(儀式)을 조리있게 함으로써 시대를 빛내는 헌장(憲章)을 크게 꾸미고 그대 선조의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라. 힘쓸지어다. 어찌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윤음이 반포되었어도 그 일은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가을철 도기(到記) 유생의 제술(製述) 시험 및 문신의 제술 시험을 행하였다. 그리고 이문원(摛文院)에서 재숙(齋宿)하였는데, 이는 다음날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의 두 본궁(本宮)에 의대(衣襨)와 향촉(香燭)을 친히 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도기 유생을 대상으로 한 제술 시험의 어제(御題)는 ‘본조의 태학생(太學生)이여, 유자(有子) 약(若)을 성전(聖殿)에 승배(陞配)하는 것에 대해 전문(箋文)의 형식으로 글을 작성하라.’ 였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제생(諸生)이 과연 이 어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겠는가. 대저 공문(孔門)의 10철(哲)이란 바로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 부자를 수행했던 자들을 말한다. 따라서 유자가 비록 사과(四科)의 대열에 끼지는 못했지만 만약 그 도덕을 논한다면 어찌 10철의 아래에 가겠는가. ‘유약은 성인과 비슷했다.’고 하였는데, 만약 모습 따위를 가지고 말했다면 ‘공자와 비슷했다.’고 말해야 옳지 어찌 ‘성인과 비슷했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대체로 그의 언행과 기상이 실제로 부자와 방불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성인과 비슷했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효(孝)와 제(悌)는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다.’고 한 교훈이야말로 전성(前聖)이 내놓지 못했던 것을 내놓은 것인데, 이 한 마디 말만 가지고도 그가 얼마나 독실하게 실천하고 조예가 깊었던가 하는 것을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안자와 증자 두 분 성인을 4성(聖)의 자리로 승배(陞配)했고 보면 유자를 10철의 반열에 올렸어야 마땅한데, 그 당시 육상산(陸象山)의 여파(餘派)가 감히 정도에 어긋난 주장을 창도하면서 거꾸로 ‘효와 제는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고 한 말을 함부로 헐뜯은 결과 결국에는 자장(子張)을 승배하고 유자는 그대로 무(廡)의 향사(享祀)를 받게 하였으니, 이 어찌 영원토록 사론(士論)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대목이 아니겠는가.
돌아보건대 지금은 성학(聖學)이 날로 위축되고 사설(邪說)이 마구 유포(流布)되는 때인 만큼 이러한 의리를 강론하기에 참으로 좋다고 하겠는데 말로만 하기 보다는 행사에 적용시키는 것이 바람직하겠기에 이 제목을 내어 선비들을 시험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진사 김후(金𨩿)가 도기 유생 가운데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대사성 이시원(李始源)이 아뢰기를,
"태학(太學)에 장의(掌議)를 설치한 목적은 감독하고 거느리며 잘못을 시정케 함으로써 선비들의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유벌(儒罰)이고간에 장의가 발론하고 주장해야 마땅한데 근래 사풍(士風)이 무너진 탓으로 재유(齋儒)가 멋대로 장의에게 벌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옛날에 있지 않았던 잘못된 예이기에 사유(師儒)의 우두머리가 강력히 금하였는데도 듣지 않고 있으니 체모가 어긋나버렸을 뿐만 아니라 듣기에도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장의라는 직책을 사람들 모두가 피하고 있는 실정인데 여러 차례나 번거로울 정도로 견책을 내리고 충고해도 병폐는 여전하기만 합니다. 지금 이후로 장의에게 잘못이 있을 때에는 대사성이 경중에 따라 벌을 논하게 하고 재유가 멋대로 벌을 가하는 습관을 엄히 단속해 금단하는 것으로 태학의 성전(成典)에 기재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9월 13일 계유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의 두 본궁에 의폐(衣幣)와 향촉(香燭)을 친히 전하였다.
9월 14일 갑술
능주 목사(綾州牧使) 이종섭(李宗燮)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지금 구제할 방도가 없이 갈수록 고질화되고 있는 폐단은 대나무에 관한 것인데, 진상하는 죽순(竹筍)과 청대죽(靑大竹) 및 연례적으로 복정(卜定)되는 부채용 대나무[扁竹]를 형세상 어찌할 수 없기에 민고(民庫)319) 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능주는 인구가 많지 않은 잔약한 고을인데도 대나무 때문에 백성에게 거두어 들이는 것이 1년에 천금(千金)을 넘고 있고 보면 다른 고을은 어떨지 자연히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호남의 민고(民庫)의 폐단에 대해서 말하자니 통곡하고 싶은 심정일 뿐입니다. 결전(結田)에서 거두어 들이는 것도 부족해서 호구세(戶口稅)를 물리고야 마는데 기호(畿湖)320) 와 비교해 보면 한두 배 정도만 많을 뿐이 아닙니다. 그런데 죽전(竹錢)은 4, 5년 전에 처음으로 있게 된 것으로서 올해의 가격이 지난 해의 배나 뛰었는데 내년에는 가격이 또 얼마나 될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걱정하면서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또한 두려움이 앞섭니다.
신이 남쪽 지방으로 내려 온 뒤에 먼저 죽전(竹田)에서 당시 생산된 것을 재료로 하여 마디를 따라서 부채를 만들어 보았는데, 끄트머리를 편편하게 하니 손에도 편할 뿐더러 공역(工役)이 절약되었고, 변두리를 넓게 하니 기름칠을 하지 않아도 내구성(耐久性)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대나무 가격도 저렴해지고 부채의 제도도 완비될 것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먼저 내년부터 진상하는 부채는 모두 중화척(中和尺)321) 으로 7촌(寸)을 넘지 못하도록 제도를 마련토록 하소서. 그리하여 양남(兩南)에서 부채를 만드는 고을들로 하여금 감히 이를 뛰어넘지 못하게 해 주시면 실로 남쪽 백성들의 혜택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청대죽(靑大竹)의 경우 1간(幹)의 값이 거의 2천 전(錢)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서울 공인(貢人)들이 바치게 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하속(下屬)들이 이익을 잃기 때문에 결국에는 조가(朝家)의 덕의(德意)가 막혀서 통하지 못하게끔 만들고 말았으므로 남쪽 백성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본가(本價) 및 연로(沿路)의 태가(馱價)를 회감(會減)322) 해서 당초에 마련했던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니 이것을 가지고 공물로 바치게 하더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인데 가외로 값을 약간 더 쳐주는 것은 또 해당 군에서 각각 알아서 액수를 정하면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늘 쓰는 복령(茯苓)이나 창출(蒼朮) 같은 약재와는 다르니 비록 달마다 정해진 수량을 내지 않고 수시로 진배(進排)한다 하더라도 안될 것이 없을 것이고, 또 조각을 내어 죽력(竹瀝)323) 을 받는 자료로 삼는 데에 불과하고 보면 몸통이 크지 않아도 될 테니 대나무를 양 등분하여 수납케 할 경우 또한 힘을 줄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 묘당에 자문하시어 처리케 하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경각사(京各司)의 노비로서 호남 고을에 산재되어 있는 자들이야말로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어 정말 불쌍한 정상이 사노(寺奴)와 똑같습니다. 대저 어리석은 백성이 한번 천적(賤籍)에 들어가게 되면 평민들 모두 자신이 더럽혀질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혼인하는 길마저 끊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모두들 그 천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처럼 자리를 옮기고 들짐승처럼 숨기 때문에 현재 장부에 기록된 것을 보건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명단이 아니면 임시로 지어낸 명목(名目)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당사자가 공포(貢布)를 바치는 경우는 열에 한둘도 안 되는데 그 족속을 찾아내 분담시켜 징수하는 일이 거의 전 지역에 걸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비나 양정(良丁)이나 똑같은 백성이고 공포나 신포(身布)나 부과된 역(役)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각사에 있는 원래의 노비의 명색(名色)을 개칭하되, 일체 ‘악공(樂工)의 보인(保人)과 선상(選上)되는 봉족(奉足)의 예(例)’처럼 하여 ‘모사(某司) 노(奴)의 보인’이라고 칭한 뒤 양정(良丁)에 뒤섞일 수 있게 해 준다면, 백성으로서는 연루(連累)되는 걱정이 없게 되고 공포 또한 총량이 감소되는 우려가 없어질 것이니, 이 점에 대해서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악(經幄) 출신으로 백성의 고통을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그것도 호남에서 남보다 먼저 제대로 하였으니 자못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초기(草記)로 품처하게 해야 하겠다.
부채에 관한 일은, 듣자니 매우 놀랍고 가슴이 아프다. 연전에 묘당에서 그토록 귀찮을 정도로 관문(關文)을 보내 단속을 하였는데도 그 효과가 하나도 없다니 어쩌면 기강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죽전(竹錢)으로 더 거두어 들이는 것은 더욱 형편없다 할 것이니 이것부터 먼저 혁파하고 이미 받아들인 것은 도로 내줄 것이며 다시 범할 경우에는 영읍의 신하를 중하게 죄 주도록 해야 하겠다. 그 밖에 부채 명목으로 열읍(列邑)에 복정(卜定)하는 일을 혁파해야 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묘당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지적하여 회계(回啓)토록 할 것이다.
청대죽(靑大竹)에 대한 일의 경우, 1간(幹)에 들어가는 비용이 거의 수천 전(錢) 가까이 된다 하니, 이를 듣고서 견제(蠲除)해 주고 싶은 생각이 어찌 없겠는가. 다만 죽력(竹瀝)을 받아 약에 섞어서 쓰면 실로 막힌 것을 뚫는 기막힌 효험을 발휘해 다방면으로 파급되고 있으므로 완전히 감해 주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어찌 방편적으로 처치할 길이 없기야 하겠는가. 이 일에 대해서도 잘 의논해 품처하게 해야겠다.
호남의 민고(民庫)에 대한 일은 조정에서도 알지 못하는 일이고 대사농(大司農)도 관계하지 않는 일인데 중간에서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폐단 때문에 백성이 장차 죽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듣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여러 차례나 소장(疏章)에 오른 이상, 만약 진정으로 괄목할 만한 효과가 없게 된다면 어떻게 남쪽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겠는가.
옛적에 고(故) 정승 이종성(李宗城)이 관서(關西)에 있으면서 민고에 대한 절목을 엄히 세웠는데, 그때에 열읍(列邑)에서 공사(公事)를 핑계대고 이익을 취하며 절목대로 준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수향(首鄕)324) 을 먼저 목벤 뒤에 아뢰는 것으로 규정을 세웠었다. 관서에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더구나 남중(南中)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연전에 우선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먼저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각각 바로잡도록 했었는데, 모르겠다만 그 동안 이미 바로잡았는데 능주 한 고을만 유독 위급한 상황을 구제받는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남도의 두 방백이 으레 내리는 단속행위라고 간주한 나머지 애당초 관심을 두어 손을 쓰지 않았고, 고을 수령들 역시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일체 그 동안의 잘못을 답습만 하고 놔두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관서의 방백 한 사람이 위엄을 세우고 법대로 집행할 수 있었던 일을 묘당에서 금지시키고 단속하는 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묘당이 아무리 세월만 보내고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는 기강이란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가르쳐 준 대로 따르지 않는 도백과 수령을 왕부(王府)에 잡아들여 해당되는 율을 적용하지도 않은 채 백성의 고통을 그냥 서서 바라다 보기만 하고, 그저 백성의 재물 약탈하는 것을 일삼는 수령에 대해 단지 장오율(贓汚律)만 적용하여 남간(南間)325) 에 엄히 가둔 채 달마다 세 번씩 형(刑)을 가하며 실정을 알아내려고만 할 경우, 그런 조정을 조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어떻게 행해 왔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조사해 알아보려면 묘당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방법이 없겠는가. 관서 역시 고 정승이 세운 절목을 다시 더 닦아 밝혀 규정을 어기는 일이 혹시라도 없게 하라고 도백에게 알려 주는 것이 좋겠다.
이번에 삼남(三南)의 시종(侍從) 출신 고을 수령들이 상소함에 있어, 먼저 이 한 조목과 관련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들을 위주로 하여 혹 널리 탐지하기도 하고 혹 자세히 묻기도 한 뒤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진달하도록 해야 하겠다. 만일 안면을 돌아보고 사실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배반하는 행위라고 하겠는가. 정원으로 하여금 각도의 직질(職秩)이 높은 수령에게 하유하게 한 뒤 그 수령으로 하여금 도내의 여러 시종 출신 수령들에게 두루 보여주게 함으로써, 흉년이나 풍년을 막론하고 소민(小民)에 대해서는 동요되지 않도록 힘쓰게 하고 장리(長吏)에 대해서는 더욱 탐욕을 징계하게 하도록 해야 하겠다. 근래의 모양이 과연 이러한지 어떤지 모르겠다만 탐람한 관리 하나를 복주(伏誅)시키는 것이 배고픈 백성 1만 명을 진휼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니 이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사노비(寺奴婢)에 대한 일은 내가 꼭 고쳐 보려고 지금 고심하고 있는 중이다. 노비를 보인으로 바꿔주는 것이 어찌 온당치 않겠는가. 그런데 신해년에 특별히 자문을 구한 뒤로 잠정적으로나마 옛날 하던 방식대로 끌고 가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그러나 인순고식적으로 하려 한 것이 아니라 뜻은 어디까지나 한번 대대적으로 바로잡아 보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금방 영남의 노비에 대해서 엄하게 신칙했었는데, 그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호남 고을의 수령으로서 또 이렇게 폐단을 말해 왔다. 그러고 보면 노비가 가장 많은 서북 지방에서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 폐단이 많을지는 더욱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대저 오늘날 변통하자는 주장에 대해서 주저하고 있는 자들은 ‘기성(箕聖)326) 이 남기신 제도 가운데 노비에 대한 일도 포함되니 이를 훼손하는 일을 섣불리 의논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결행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승역(僧役)과 관련하여 징수하는 번전(番錢)에 있어서도 고을마다 거두는 예를 각기 달리하는데 오히려 속인(俗人)으로 바꿔서 대우해주는 곳조차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약간 조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뜻을 알게끔 하는 일 역시 영읍(營邑)의 신하들이 세상에 맞추어 얼마나 법을 잘 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모르겠다만 그대의 고을에서도 보인의 이름으로 대신 받아들인 예가 있는가? 그런 예가 만약 있다면 그대로 하는 것도 좋겠다.
즉위 초에 영(令)을 반포하여 즉각 쇄관(刷官)을 없애도록 했었다마는 쇄관은 없어졌다 하더라도 간리(奸吏)들이 거꾸로 불어난 나머지 호소할 수 없는 피해를 받고 온갖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일단 듣고 난 뒤에 어떻게 관례적으로만 비답을 내릴 수 있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먼저 엄히 삼남(三南)의 도신들을 신칙하여 특별히 두루 살피게 하되,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 수령에 대해서는 드러나는 대로 장계로 보고하게 하는 한편, 이와 함께 이 일을 도신이 성실하게 거행하고 있는지 안렴(按廉)토록 해야 하겠다. 그런데 내노(內奴)나 역노(驛奴)나 노비인 것은 마찬가지이니 그들에 대한 폐단을 똑같이 각별하게 구제하여 대 개혁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조금이나마 실효를 거둘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진상하는 부채와 관련해서는 원래 예로부터 내려오는 제도가 있으니, 중화척(中和尺) 운운한 것은 실언했다고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영의 절선(節扇)327) 에 따른 폐단은 한 마디로 말해서 복정(卜定) 때문이라고 할 것인데 이는 대나무 한 종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부채를 만들 때 소요되는 물건 일체에 대해 복정이라는 명분을 부치고 있는데, 이 모두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기 위한 단계적 조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만약 면목이 일신되는 효과를 거두려면 발본 색원하는 정사를 펼치는 방법 이외에는 없는데, 그러면 어떤 도신이 여전히 예전대로 답습하는 일을 감히 하겠습니까. 복정에 대한 한 조목도 아마 묘당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자연히 모두 혁파되는 결과에 이를 것인데 감히 말을 늘어 놓으며 복주(覆奏)드리지 못할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청대죽(靑大竹)에 대한 일은 어공(御供)과 관련되어 있는 만큼 그 사체(事體)가 지극히 엄중합니다. 그리고 약의 효과가 얼마나 나느냐 하는 것 역시 대나무의 크기와 길이에 달려 있는 만큼 그것을 자른다는 것은 애초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서울의 공인이 바치게 하자는 것도 온당하지 못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모로 불필요한 비용이 많이 드는 중에서도 영문(營門)에서 품질 검사를 받을 때 가장 많은 폐단이 발생하고 있으니, 만약 각 해당 고을에서 직접 봉진(封進)케 한다면 중간에서 주구(誅求)하는 폐단을 거의 모두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민고(民庫)에 대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저 대동법(大同法)이 일단 확립되어 결전(結田)에서 거두는 부세의 액수가 크게 정해졌으니 이외에 더 거둔다면 모두 법의 본뜻이 못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잡역조(雜役條)의 경계를 분명히 설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수요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갖가지로 나오고 있습니다. 예컨대 서울 관아로부터의 각종 요구라든가 영문에서 수시로 복정하는 것이라든가 서울 영저리(營邸吏)의 역가(役價)를 덧붙여주는 것이라든가 공곡(公穀)을 회감(會減)할 때 부족분을 보충해주는 것이라든가 하는 것이 그것으로서 각종 명색(名色)을 이루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관청에서는 피부에 와 닿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관리들은 그런 기회에 이익을 챙기려고 한 나머지 결전에 부과하는 것으로부터 호구세로 거두는 것에 이르기까지 별별 수단을 동원하여 거듭거듭 폐단을 일으키면서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으레 그렇게 해 온 것처럼 간주하고 있으니, 반드시 한 번 대대적으로 정돈을 한 다음에야 비로소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령 사실을 참작하여 어떤 조목을 놔두고 어떤 조목을 뺄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반드시 도신이 꽤 상세하게 논열(論列)해 온 뒤에야 상호간에 가부를 결정하여 가능한 한 정당하게 귀결시킬 수가 있을 것이니, 먼저 다시 더 다그치며 신칙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기일을 약정해서 그 일을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지난번 북관(北關)의 노비 공포(貢布)에 대한 일과 관련, 아주 중대하게 취급해야 할 공포에 대해 어려워하는 점들이 없기에 다방면으로 폐단을 없애도록 한 일이 있었다. 그 뒤에 열읍(列邑)이 거행하면서 과연 일일이 준수하여 관외(關外) 남북(南北) 바닷가 노비들로 하여금 찌푸리고 신음하다가 다시 환호하며 웃게끔 해 주었는가. 북관에서 어사(御史)를 보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먼저 묘당으로 하여금 몇 사람을 뽑아 아뢰게 하는 한편, 우선 이러한 뜻을 도백에게 알려 주어 두루 열읍을 단속하게 하라. 그리하여 과오를 범한 자는 허물을 보완하고 태만한 자는 각성시킴으로써 혹시라도 부월(斧鉞)을 지니고 가는 행차에 걸려드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5일 을해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삼남(三南)을 구관(句管)하는 비변사 당상을 재실(齋室)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능주 목사(綾州牧使)가 상소하여 조목별로 진달한 폐단 중에서도 민고(民庫)에 대한 일은 더욱 놀랍기만 하였다. 조가(朝家)에서 전후에 걸쳐 얼마나 엄절(嚴截)하게 신칙했던가. 그런데도 도신(道臣)과 수령이 아직도 단속할 줄을 알지 못하여 법에 규정된 것 이외에 더 거두어들인다는 설이 소장에 또 올라 왔으니 이는 국가의 기강과 관련된 것으로서 정말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대저 근래에 결역(結役)이 번다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하니, 이서구(李書九) 등이 아뢰기를,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고 단지 잡역조(雜役條)의 명색(名色)에 한계를 정해 두지 않은 탓으로 요구해 오는 각종 물품을 모두 민고에서 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리들의 간악한 행위가 이러한 사정에 편승하여 점차 불어난 나머지 심지어는 결전(結田)에서 거두고 가구별로 거두어들여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채와 관련된 폐단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불필요하게 명령을 남발할 것 없이 묘당이 어떻게 깨우쳐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청대죽(靑大竹)에 대해서는 그 수령이 서울 공인으로 하여금 바치게 하면 좋겠다고 말하였는데, 그 이야기가 어떠한가?"
하니, 이서구가 아뢰기를,
"서울의 공인이 바치게 하자는 일은, 외면만 얼핏 논할 때는 사람들이 모두 편하다고 하겠지만 조금 따지고 들어가면 또한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개 대나무를 생산하는 고을의 입장에서 볼 때 다른 데에서 번거롭게 무역할 필요가 없이 그냥 진배(進排)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 지역에서 나오는 것을 놔둔 채 값을 쳐서 내라고 요구한다면 그 역시 거꾸로 폐단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리고 본가(本價) 외에 조금만 더 값을 쳐주어서 때울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공인들이 요구하는 값이 점점 비싸지고 쓸데없이 들어가는 비용이 불어날텐데, 그럴 경우 필경 백성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폐단이 지금의 폐단보다 더 심하지 않으리라고 또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그리고 가령 죽계(竹契)의 공인들이 내려가서 대나무를 베는 것을 보면 대나무 밭 전체를 베어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들이 바치게 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까닭도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전에 청죽(靑竹)의 밑동 세 마디는 남겨두고 자르지 않는 것으로 규정을 만들었는데 지금 실제로 준행하고 있는가? 내가 그때 우연히 고(故) 정승 김육(金堉)의 문집을 보건대 청죽과 관련된 폐단을 빠짐없이 설명하면서 대나무 뿌리는 취하지 말도록 청했었는데, 그 말에 과연 일리가 있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탄복하였다. 그리고 고(故) 중신 서유방(徐有防)이 내국(內局)328) 의 제거(提擧)로 있을 때 거조(擧條)를 낸 것이 있으니 경들은 그때의 거조를 참고해 보라."
하였다.
9월 17일 정축
영남·호남의 차원(差員) 및 상경한 수령들을 소견(召見)하고 농사 작황 및 민심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9월 19일 기묘
병조가 모화관(慕華館)에서 금군(禁軍)과 융기(戎器)를 점고(點考)할 일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옛날 금려(禁旅)를 설치할 때 용호(龍虎) 양 대장을 두었었는데 내금위(內禁衛) 이하에서 무예를 단련하고 진법(陣法)을 익힐 적에는 꼭 훈련원과 모화관에서 하곤 하였다. 그런데 군영을 나눈 뒤로는 이 규정이 완전히 폐지된 채 옛날에 볼 수 없던 장소에서 조련하는 일이 나오면서 훈련원과 모화관의 합동 및 개별 훈련도 따라서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이 때문에 융기를 점고하는 일도 교관(郊館)에서만 행해지게 되었으니 훈련원을 만들어 둔 본래의 뜻이 자못 아니라고 하겠다. 이후로는 옛날의 제도를 복구하여 융기의 점고 및 합동·개별 훈련을 훈련원과 모화관에서 교대로 실시토록 하라."
하였다.
9월 20일 경진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 및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9월 21일 신사
승지 신기(申耆)가 일찍이 명을 받들고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묘소에 가서 치제(致祭)하였는데, 묘소가 호서(湖西)에 있었으므로 상이 신기로 하여금 4로(路)에서 도백(道伯)을 만나 진휼책(賑恤策)을 물어보고 민정(民情)이 어떠한지 살펴보고 오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복명하면서 본도(本道)의 흉년든 상황을 말하고, 도신(道臣)에게 들은 말을 가지고 조목별로 아뢰면서 ‘호서에 곡식을 옮겨주려면 해서(海西)가 가장 가깝고 또 제일 편리한데, 해서에 비축된 곡식도 풍부하지 못할 뿐더러 흉년까지 약간 들었다. 지금 곡식 1만 석을 갈라서 나눠주도록 허락한다 하더라도 진휼 조곡(糶穀)의 자본으로 삼게 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였다. 비국 당상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금백(錦伯)329) 이 서울 관아에서 돈을 빌려 곡물을 사들인 뒤 장차 이문을 남겨 진휼하는데 보태 쓰려고 하였는데 갚아야 할 기한이 촉박한 관계로 일단 사들인 것을 도로 팔아야 할 입장이라고 하니, 그럴 경우 반드시 민폐를 끼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돈을 빌려 준 아문에서 우선 기한을 물렸다가 모곡(耗穀)의 물량이 그만큼 찰 때까지 기다려 준 다음에 갚도록 한다면 온당하게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이 참으로 좋으니 그런 내용으로 행회(行會)하고, 해서의 곡식 2만 석 역시 특별히 허락토록 하라. 그런데 이는 계미년에 북쪽의 곡식을 나누어 옮겨 준 뒤로 처음 행하는 일인 만큼 일의 성격으로 볼 때 마땅히 영운(領運)하고 독운(督運)하는 어사(御史)를 차견(差遣)해야 하겠으나 거꾸로 민읍(民邑)에 폐를 끼칠까 우려되니, 도신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수송해 옮기도록 하라. 이렇게 되면 6만 냥(兩)으로 무역해서 환곡(還穀)을 삼고 따로 떼어 준 2만 석으로 진휼곡을 삼게 해 준 셈인데, 그러고도 호서 백성들을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게 한다면 이는 도신의 책임이다."
하였다. 신기가 아뢰기를,
"호서에서 대파(代播)한 지역이 거의 1만 결(結)에 이릅니다. 그런데 대파했을 경우에는 세금을 면제하라고 이미 조정에서 명령을 내렸습니다만 수확량이 많기 때문에 세금을 바치겠다고 자원하는 자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늦게 모내기를 해 수확이 없는 땅은 조세 징수를 면치 못하고 대파해서 알차게 수확을 한 지역은 전연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면 균형이 맞지 않으니, 대파한 전지(田地)에 대해 면세례(免稅例)를 적용하되 결전(結錢)만은 징수하게 하는 것이 공사(公私)간에 모두 편하게 되는 도리일까 합니다."
하였는데, 조진관(趙鎭寬) 등이 아뢰기를,
"대파한 전지에 대해 명이 내려진 뒤에도 성상께서는 늘 그 혜택을 두루 받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셨습니다. 지금 결전을 거두자고 하는 것은 차라리 손해를 보겠다는 조가(朝家)의 본래의 뜻이 결코 못된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극구 옳다고 하였다. 하교하기를,
"호서의 농삿일에 대하여 봄부터 여름 그리고 늦가을에 이르기까지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이 침식(寢食)을 폐해 오면서 몰두하였는데, 이번에 특별히 승선(承宣)에게 명해 길을 우회해 가서 백성의 고통을 알아 오게 하였다. 이러한 이상 헌어(獻御)하는 물품부터 절손(節損)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니 해도(該道)의 방물(方物)·물선(物膳)·삭선(朔膳)에 대한 것은 모두 정지시켜 면제해 주고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깨끗이 씻어준 뒤 나머지는 진휼하는 수요에 보태 쓰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4일 갑신
우의정 심환지(沈煥之)가 현(縣)과 도(道)를 경유하여 상소하기를,
"아, 입고 먹는 것을 검소하게 하고 궁실을 치장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 전하께서 노력하지 않고도 행하시는 일인데 분수에 넘게 사치하는 습속이 여항 사이에서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고, 성부(城府)를 설치하고 농토를 간척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전하께서 무위(無爲)의 자세로 행하시는 일인데 형세를 엿보며 기대려는 풍조가 지금 조정 위에서 점점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설에 나아가 뭇 의혹들을 깨 부수고 뭇 걱정들을 해부해 보여준 다음에야 임금이 임금답게 되고 신하가 신하답게 되는 큰 강령과 윤기(倫紀)를 조금이라도 붙들어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신이 한밤중에 배회하면서 그 이유를 자세히 탐구해 보다가 홀연히 깨닫고는 문득 또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을 인심에 합당하게 하지 못하고 거조를 성인의 가르침에 맞게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치를 온당하게[處置得宜] 하기만 하면 검고 푸른 옷 입은 사나운 군사들도 무기를 버리고 춤을 출텐데, 더구나 청명한 조정의 숙흥 야매(夙興夜寐)330) 하는 현재(賢才)들이나 대대로 녹(祿)을 받는 자손의 집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구복(甌卜)331) 하는 중전(重典)이 갑자기 천한 신의 이름에 가해진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신은 본래 우활하고 졸렬한 서생(書生)으로서 시사(時事)를 전혀 모르는데다 재능이나 식견도 소루하고 보잘것이 없어 하나도 근사한 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만 지극히 중대하고 어려운 책무를 결코 감당하지 못할 몸에 졸지에 가하셨으니, 어떻게 일월의 밝은 빛을 이어받고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와 성상의 뜻에 부응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정승에 임명된 뒤에 처음 사본(辭本)을 올리면서 첫머리에 ‘처치 득의(處置得宜)’라는 네 글자를 말했는데 그것이야말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한 것이다. 지금 세상의 폐단을 한두 가지로 말하기가 어렵지만 사람마다 각자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자기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린 나머지 마음과 마음이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떨어져 있기 때문에 큰 길거리에서 만나도 수레를 양보하지 않고 방안에서도 제 잘난 행세만 하고 있으니, 화기로운 분위기 속에서 서로 공경하며 협력해 나간다는 것은 애당초 거론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전(殿)을 내려갈 때나 올라올 때나 태도에 변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의리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분명해질 듯하면서도 분명해지지 않고 규모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바로잡힐 듯하면서도 바로잡히지 않으니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법도에 따라 처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에 나름대로 자신의 목표로 세웠던 바를 물러나서 헤아려 보노라면 더욱 오뇌에 쌓이며 후회스럽기만 할 뿐 정신이 멍해지며 가을철 분수(汾水) 가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332) 이 들곤 하는데 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아 한가로이 있을 때면 탄식이 일어나니 나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겠다. 그런데 내가 듣건대 물가에 데려가 각자 마실 만큼 마시게 하는 것이 정문(程門)333) 의 교육 방식이요 사람마다 자기를 써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하는 것이 곽씨(郭氏)334) 의 용병(用兵)이었다고 한다. 이는 대체로 그 거조가 참으로 물정(物情)에 맞으면 한 마디 말이 혹 구정(九鼎)335) 보다도 무겁고 방여(方輿)336) 가 깃털 하나보다도 가벼울 수 있기 때문인데, 군사에 있어서나 학자에 있어서나 그 귀결점은 미상불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이것을 버리고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경을 고른 것은 경력 때문도 아니고 재유(才猷)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야말로 교화시키는 자리에서 보좌하며 화합 정신으로 두루 다스려 시간적으로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이나 공간적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걸쳐 만물이 함께 길러지고 조화되게 함으로써, 한 세상 조충(鳥蟲)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만족스러운 분위기에서 스스로 즐길 수 있게 만들어 주려 함이다. 그리하여 알고서는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하면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게끔 되면, 내가 이에 기꺼이 수렴하여 넉넉하게 포용하고 관대히 용서하며 참작해서 절충하되 조금이라도 사의(私意)가 그 사이에 혹 끼이지 못하게 하며 순수하게 대중 지공(大中至公)의 정신에 입각하여 거조를 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蕩蕩平平] 복과 몸 건강하고 마음 편안하며 오래 사는 아름다움이 세상에 흘러 넘친 나머지 사방이 감화를 받고 사람마다 춤을 출 것이니, 백성이 무슨 고통을 받을 것이며 조정의 분위기에 대해서 말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이 강가에 머무른 뒤로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푸른 갈대 흰 서리에 거슬러 오름337) 이 참으로 많다.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나와서 도를 논함으로써 자리를 비워두고 마냥 기다리는 나의 그리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화성(華城)은 바로 탕목읍(湯沐邑)이자 고굉(股肱)처럼 믿고 중하게 여기는 고을이니 군대와 식량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인화(人和)를 먼저 이루어야 할 것이다. 올해 논의 수확량이 밭 곡식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양상이 곳곳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데 더구나 바닷가에 위치해 갯펄이 많은 본부(本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민간에 비축된 곡식이 많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외영(外營)의 속읍(屬邑)에서 바치는 미곡의 명색(名色)에 대해서는 군교(軍校)에게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아울러 허락하라."
9월 27일 정해
차대(次對)을 행하고 이어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9월 28일 무자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이 아뢰기를,
"신이 숭의전(崇義殿)338) 을 봉심했을 때 전관(殿官)이 하나도 나와서 대기하지 않고 있기에 물어 보았더니, 전령(殿令) 왕세빈(王世賓)이 나이 80이 넘어 거동을 못하는 탓으로 제향이나 봉심할 때, 모두 나와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방관 역시 봉심하는 예가 없기 때문에 본전(本殿)의 일을 검사하는 사람이 없어 건물 지붕에서 물이 새고 무너진 곳이 있어도 대부분 개수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보기에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전관은 왕씨(王氏)를 세습시키는 것이 바로 정해진 규정인데 왕세빈은 이미 가자(加資)되었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의 장자(長子)에게 관례에 따라 직책을 주게 한 뒤 초하루와 보름에 예(禮)에 맞게 봉심케 하소서. 그리고 지방관 역시 봄과 가을에 그곳에 나아가 전관과 함께 동행하여 봉심토록 하고, 수선할 곳이 생길 때마다 즉시 분담 처리하는 제읍(諸邑)에 이문(移文)하여 개수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하교하였다.
"근래 옥당에서 외방 고을을 원하는데도 전조(銓曹)에서 즉시 임용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결코 예우하는 뜻이 되지 못할 뿐더러 효(孝)에 바탕을 두고 다스리는 뜻에도 흠이 된다 할 것이니 이 점을 신칙하도록 하라."
강원도 관찰사 김이익(金履翼)을 파직하였다. 김이익이 재해(災害)를 입은 전지(田地)의 정도를 등급으로 나누어 장계를 올렸는데, 비국이 이에 대해 복계(覆啓)하기를,
"장계 안에서 ‘사목재(事目災)339) 는 2백 결(結)로서 단지 대파(代播)한 것을 면세해 주는 숫자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올해 대파한 지역의 세금을 면제해 주도록 한 명은 특별히 기전(畿甸)과 삼남(三南)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즉 4도(道)에 한해서만 혜택을 곡진히 내려준 것이고 보면, 지금 대파한 지역에 면세해 주는 것이 본도에도 똑같이 적용되도록 명령이 반포된 것처럼 장계를 올린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연례적으로 대파한 지역이 없지 않았음에도 각도에서 면세받은 적이 일찍이 없었던 것은, 어찌 상법은 지켜야만 하고 특례(特例)는 감히 범할 수 없었던 이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수백 결을 재해로 처리해 면세해 주는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법 규정이 애석하기 때문입니다. 해당 도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이에 따르고, 하교하기를,
"대파한 곳에 면세해 주기로 한 것을 4도의 예와 혼동해서 적용하다니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2백 결을 떼어내 일단 면세 조목에 포함시키자고 말한 이상, 풍년에도 오히려 3백여 결을 더 허락해주곤 하였으니 사목(事目) 외에 3백 결을 더 획급(劃給)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9일 기축
승지를 보내 양정재(養正齋)에 가서 선조(先朝)의 어필(御筆) 현판을 봉심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선조의 대가(大駕)가 양정재에 임하시어 사모하는 마음을 푸신 날이다. 이 재(齋)는 성후(聖后)께서 탄생하신 곳이니 각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개수할 모든 일에 대해서 탁지(度支)가 살펴 행하라고 일찍이 하교했었는데 요즘도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경은(慶恩)의 집에서 벼슬하는 것이 요즘 달성(達城)의 집에도 오히려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전 현감 김사석(金思䄷)을 해조로 하여금 발탁해서 임용토록 하라."
하였다.
정창순(鄭昌順)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9월 30일 경인
홍인호(洪仁浩)를 강원도 관찰사로,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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