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계사
좌의정 채제공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요즘에 신을 탄핵하는 상주(上奏)가 앞뒤에서 서로 호응하여 나와서, 신을 지척하는 일이 아니면 하루의 책임을 메꿀 수 없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신은 매이지 않은 빈 배[虛舟]와 같은 몸으로 공공연히 세상 사람 출세길의 매개체가 되어 있으니, 인생의 피곤하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신은 한갓 조정을 선뜻 떠나버리는 것이 차마 못할 일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몸을 보전하는 것이 명철(明哲)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여,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한 채 시일을 보내고 있으니, 이는 곧 노망(老妄)으로 그런 것입니다. 또 처음에는 묘천(廟薦)의 일에 대해서 한사코 명을 어기려고 했다가 끝내 정중하신 은비(恩批)를 인하여 수치를 무릅쓰고 강행하였으니, 이 또한 노망으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천거함에 미쳐서는 한갓 신의 마음만 믿고 마치 맹인(盲人)이 지팡이로 땅을 더듬으면서 길을 찾듯 무턱대고 행하여, 남의 비난을 많이 받고 나라의 체모를 대단히 손상시킬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노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삼가 생가건대, 신은 전하의 특수한 은총을 입었으니, 비록 신의 자자 손손으로 하여금 사주(蛇珠)와 작환(雀環)113) 을 다 바치게 할지라도 오히려 그 은총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기에 부족한데, 더구나 신의 일신에 있어서도 몸과 마음을 다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마치 몸을 사리어 물러나려는 태도가 있다면 이는 인간의 도리상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유독 신명께 죽임을 받을 일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비록 엄중한 예의의 교훈으로도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을 또한 억지로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으로 말하자면 조복(朝服)을 몸에 덮고 큰 때를 끌어다 그 위에 얹은 예가 있고,114) 늙은 것으로 말하자면 팔십 세가 되면 임금이 부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으니, 이런 처지에 이르면 정상적인 도리로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이 조정에 벼슬한 지 5, 60년 동안에 몸이 세망(世網)에 걸리어 공포심이 끝내 병이 되어 서, 남들이 혹은 신을 일러 기혈(氣血)은 그리 쇠한 데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나 정신은 죽은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한창 성상께서 국사를 위해 근심 걱정하며 정신을 가다듬으시는 이때를 당하여, 보상(輔相)이란 명칭을 가진 신이 빈청(賓廳)의 모임이나 주사(籌司)의 자리에 한 해가 다가도록 나가지 못하고도 뻔뻔스레 마치 못 들은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는 대체로 노망이 빌미가 되어 일이 문득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신의 얼마 안 남은 여생 중에 대죄(大罪)를 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조정에서 물러나는 것 한가지 일뿐이니, 바라건대 속히 치사(致仕)를 윤허하시어 생성(生成)의 은택에 유종의 미를 거두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연령이 80에 가까운지라, 치사를 하려는 간절한 말이 이미 연초부터 나왔었으나, 내가 윤허하지 않았고 경도 마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은 곧 우리 두 사람이 법도를 변통해서 다같이 절로 헤아림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오직 경의 강마(講磨)한 것이 이미 익숙해 졌으므로 나는 경을 독실히 믿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경의 소장을 보건대 ‘걸해(乞骸)’ 두 글자를 꺼내서 늙었다는 이유로 치사(致仕)를 하려고 뜻을 굳힌 것이 마치 수레를 기다리지 않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리려는 듯한 기상이 있으니, 우리가 서로 면대해서 짐작하여 결정했던 뜻과 어찌 그리도 상반된단 말인가. 대신의 출처는 가볍지 않은 것이라, 한 때에 관함(官銜)을 사양하는 것도 오히려 혹 화를 발끈 내고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영원히 치사하기를 기약한단 말인가. 연석에서 질정하여 말했고 굳게 결정한 오래 전의 승락이 ‘식양(息壤)이 저기에 있다.115) 는 고사에 비할 바가 아니니, 경은 모름지기 주청한 것을 속히 단결하고 전유(傳諭)하는 승지를 따라 조정에 나와서, 이 글로 다 말하지 못한 하유를 들으라."
하였다.
6월 2일 갑오
좌의정 채제공을 해면하였다.
세초(歲抄)된 이극생(李克生)에게 감등(減等)할 것을 판하하였다. 부교리 엄기(嚴耆), 부수찬 박길원(朴吉源)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극생은 흉도(兇徒)에게 붙어서 악역(惡逆)을 옹호해주고, 요행히 사형의 율을 도피했다가 이내 장오죄에 걸렸으니, 형배(刑配)의 법전은 그에게는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삼가 이 명이 한번 내림으로써 국법의 준엄함이 따라서 해이해져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징계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정최성(鄭㝡成)이 아뢰기를,
"이극생은 역적 임(任)의 가까운 족속이며 큰 도적의 가까운 인척으로서 요행히 사형의 율을 도피하고 장오의 율만 입었으니, 이것이 이미 정형(正刑)을 잃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연전에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지금까지 사람들의 공분(公憤)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는데, 지금 또 그의 죄안(罪案)이 점점 더 가벼워지기만 하여, 형률을 감하는 것이 자못 관례를 따른 듯합니다. 그가 평소 흉도에게 붙은 행적과 처신의 간사하고 음흉한 정상은 전에 이미 밝게 드러났으므로 지금 거듭 논할 것도 없거니와, 더구나 그의 친동생인 이극전(李克全)은 범죄에 관련된 것이 지극히 중하여 아직도 유배 중에 있고 보면, 이극생을 어찌 평범하게 감죄(勘罪)된 사람들과 혼동하여 가벼운 쪽의 법전을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극생을 감등시키라는 명을 거두시어 국법을 엄히 하고 공론이 펴지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3일 을미
차대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곡종(穀種)으로 대신 파종하자는 본의는 다만 이앙(移秧)하지 못한 논에만 파종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니, 모든 천맥(阡陌)·구릉(丘陵) 등의 불모지에 두루 파종해서 각각 수확하는 것이 있게 되면 논농사를 비록 끝내 실패하더라도 거의 지리(地利)를 못 취하는 땅이 없게 하는 정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읍(畿邑)에서는 허다히 대신 파종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니, 경기 지방 백성들은 대체로 농사에 게으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나, 삼남(三南) 지방의 민심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이 종자(種子) 운반하는 방도가 가장 어려우니, 만일 백성들로 하여금 각자 실어가게 한다면 그들이 원치 않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 근래에 재황(災荒)이 잇달은 것은 대체로 수리(水利)를 강구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호남의 벽골제(碧骨堤)는 만일 더 깊게 파내기만 하면 이같은 한재(旱災)는 염려할 것이 못 되는데, 그곳이 지금은 다 막혀서 예전의 언저리를 거의 다시 알 수 없게 되었다 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이 벽골제는 길이가 12읍(邑)에 걸쳐 있으니, 호서와 호남이라 칭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방죽을 만드는 것은 곧 백성을 위해 이익을 조성하는 일이니, 백성들을 부려서 만드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근래에 민력이 과연 매우 어려우니, 만일 사창(社倉)의 제도를 만들어서 민간으로 하여금 각각 재력(財力)을 저축하여 방죽 파내는 비용에 대비하도록 한다면 편리한 정사가 될 듯하다. 내가 항상 이 일을 먼저 화성(華城)에서부터 시험해보고자 하나 또한 오래도록 폐단이 없을 것은 보장하기가 어렵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사창의 법은 고 상(相) 최홍원(崔興源)이 일찍이 영남에 시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의 선조도 지평(砥平)에 이를 시행했었는데 지금은 이미 폐해졌습니다. 그 이루어지고 폐해지는 것은 오직 인재를 얻고 못 얻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호조 판서 조진관에게 하교하기를,
"금화(金貨)를 몰래 들여온 숫자가 극히 많다고 하니, 기왕 이를 일체 금단할 수 없다면 차라리 세금을 조금 받고 그 길을 터주어서 이권(利權)이 귀속되는 곳이 있게 하는 것만 하겠는가. 백성들과 이끗을 다투는 일은 참으로 할 수 없으니, 고인도 말하기를 ‘기찰만 하고 세금은 받지 않는다.[譏而不征]’하였다. 그러니 산림(山林)이나 천택(川澤)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백성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만일 전혀 관리하지도 않고 살핀다는 기(譏) 자까지 아울러 사용하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 이런 정령(政命)이 있겠는가."
하니, 조진관이 말하기를,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많이 그것을 원하고는 있으나, 이것이 전에 없던 일이기 때문에 어렵게 여기는 논의가 많습니다."
하였다.
6월 5일 정유
비가 내리자 특별히 화성부(華城府)에 하유하기를,
"농사란 천시(天時)를 준수하고 토의(土宜)를 관찰하고 인력(人力)을 다해야 하는 것이니,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어긋남이 없어야만 풍년을 얻게 되는 것이다. 곡식 중에는 네 철[四節]을 지나서 먹는 것이 있고, 세 철을 지나서 먹는 것도 있고, 두 철을 지나서 먹는 것도 있으며, 또는 평야 지대에 알맞고 산간 지대에는 알맞지 않은 것이 있고, 산간 지대에 알맞고 비습한 지대에는 알맞지 않은 것도 있다. 그래서 시기의 조만과 토질의 건조하고 비습함에 따라 서로 알맞은 곡식이 한두 종자가 아니니, 종자를 잘 불리어 싹틔우고 잘 가꾸어 여물게 하는 것이나 땅을 묵히어 잡초만 무성하게 하는 것이 모두 사람이 힘을 다하고 안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나는 비록 《농정전서(農政全書)》를 읽지 않았으나, 모든 일은 분수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메밀[木麥]이 대신 파종하기에 가장 알맞으니, 그것은 맨 나중에 심고 맨 먼저 익기 때문이다. 또 맨 뒤에 심고 맨 먼저 익는 것을 올벼라 하는데, 이것은 빈풍(豳風)의 시(詩)에서 읊었으니, 주공(周公)이 어찌 나를 속였겠는가. 대체로 이른바 대신 파종한다는 것은 곧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로 인하여 절서가 이미 지났는데 들에는 심지 못한 모가 많으나 밭에는 뿌릴 만한 종자가 없을 경우에 오만 곡식 중에서 반드시 뒤에 심고 먼저 익는 것을 가져다가 대신 파종하여 백성들의 식량을 유족하게 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그런데 결실 때까지의 전후 기간이 충분히 서리를 면할 수 있는 것으로서 국수[不托]도 만들 수 있고 조호(雕胡)116) 의 맛과 영양을 당할 만도 하여, 흉년의 기근을 구제하는 공이 서쪽 지방의 토란이나 남쪽 지방의 고구마보다 월등히 나은 것은 오직 메밀이므로, 내가 이 때문에 혹 모를 심지 못하고 철을 넘긴 때를 만나면 반드시 이 메밀을 대신 파종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어제 묘당의 초기(草記)를 보니, 메밀 외에도 파종하기에 알맞은 곡식이 많이 있다는 것으로 말하였다. 그런데 콩을 심으면 가꾸기 쉬운 것이 메밀에 다음 가기는 하나, 토질(土質)과 농삿일이 삼남(三南)·경기(京畿)·호서(湖西) 지역이 서로 같지 않고, 절후(節候) 또한 비슷하면서도 각기 달라서 이모작(二毛作)의 시기를 놓치면 모내기를 제때에 못하는 것과 일반이다. 그러니 그루갈이에 쓰이는 곡종을 대용갈이에 사용해서 제도(諸道)가 모두 그 곡식을 먹게 한다는 것은 진실로 기필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기장은 비록 비습한 땅에서 잘되기는 하나, 파종에서 수확 때까지가 1백일 안팎이 드는데 한로절(寒露節)이 80여 일 밖에 남지 않았고 보면, 미처 익지 못하여 마치 채권(債券)만 보류하고서 거둬들이지 못하는 격이 될 것이다. 그리고 늦기장 종자의 경우는 귀하기가 마치 황금 같아서 창고에도 매매되는 것이 없고 민간에도 간수해둔 것이 없으니, 장차 어디에서 이를 구해다가 전국에 보급시킬 수 있겠는가.
지금 메밀을 대신 파종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경기 지방의 수령과 백성들로서 불편함을 말하는 자들은 매양 ‘수전(水田)은 비습하여 비가 많이 오면 종자가 녹아버릴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조정에서 파종하라고 권장하는 것은 이런 땅을 말한 것이 아니라, 높고 건조하여 모내기를 못한 곳을 말하였고, 또는 구롱(邱隴)·천맥(阡陌) 등 세금도 안 내는 불모지에다 호미와 쟁기로 갈아 일구는 법을 쓰도록 하였던 것이니, 땅이 비습하여 종자가 녹아버리는 걱정은 애당초 논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메밀 종자를 산간 고을로부터 연안의 군읍으로 이송하는데 있어서는, 동풍만 순조로이 불어주면 다리가 없이도 절로 이송될 것이니, 참으로 하늘만이 아는 일이 발설되었다고 이를 만하다. 더구나 또 고을에서 종자를 지급하고 세금을 견면해주며 모든 간편하고 편의한 계책을 힘이 닿는데까지 다 베풀어주고도, 수확의 많고 적고 남고 부족함을 막론하고 일체 백성들에게 맡겨서 한알한알을 모두 백성들이 자신의 배채우는 데에만 마음을 쓰도록 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울음을 웃음으로 돌리고 흉년을 풍년으로 돌리어 인공(人功)으로 천지조화를 빼앗는 일대 관건이 되고, 또한 백성이 부유해지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가난하겠느냐고 이르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이 밖에도 미처 말로 열거하지 않은 여러 가지 이로움이 이루 다 꼽을 수도 없건만, 백성들은 워낙 어리석어서 함께 일의 시작을 꾀할 수가 없다. 경기 지방의 풍속은 또 농삿일에 게을러서, 한때의 논을 깊이 가는 일을 기피하여 장래에 반드시 거두게 될 그만한 수확을 내버리곤 한다. 그리하여 해마다 당연히 해야 할 농공업(農工業)도 오히려 부지런히 할 뜻이 없는 실정이니, 지금 대신 파종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뒤로 물러서며 눈을 흘기고 앞으로 나가려다가도 머뭇거리곤 하는 것은 다만 그 형세가 그런 것일 뿐이다. 그러나 농관(農官)이 된 자로서는 계책을 내서 그들의 게으름을 채찍질하여 일깨우는 것이 바로 그 직무인데, 도리어 백성들에게 부화 뇌동하여 시끄러이 떠들어대면서, 백성들을 농사에 부지런히 힘쓰도록 하는 방도에 전혀 어두워 이를 따르기 어려운 일로만 알고 있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명령이 나갔으면 그대로 행할 뿐이요 도로 취소할 수는 없는 것인데, 조정의 명령이 반하된 지 이미 오래이니, 묘당에서는 의당 동책(董責)하는 일을 굳게 지켜 수시로 고찰을 가해서, 만일 명령대로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먼저 방백으로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수령과 백성들이 절로 의당 분주히 농사에 임하여, 들에는 개간 안된 땅이 없고 땅에는 노는 밭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경》 대고(大誥)에 이르기를 ‘내 어찌 나의 밭일을 끝맺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이미 시작만 해놓고 끝맺기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농부가 밭을 갈기만 하고 씨를 뿌리지 않거나 씨를 뿌리기만 하고 김매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시기로 보아도 적절하고 곡식으로 보아도 알맞은데, 무엇이 어려워서 권장하지 않고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인가. 왕기(王畿) 지역은 전국의 표준이니, 먼저 기읍(畿邑) 중에서 의논이 엇갈린 곳에서부터 정력을 오로지 들여 명령을 독실히 믿고 받들어 준행하여야만 호남·영남 지방까지도 보고 느끼어 그림자처럼 따라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내기를 하지 않고도 곡식이 있게 되고, 가을에는 곡식을 수확하여도 세금이 없는데다, 도량(稻粱)의 좋은 맛을 섞어 전죽(饘粥)의 재료로 대신 쓰게 한다면, 그 광박한 이익이 만세의 법식도 될 수 있으리니, 어찌 1년 동안의 기근 구제하는 재료에만 그칠 뿐이겠는가.
옛날에 아 대부(阿大夫)를 삶아 죽인 것은 그가 탐오해서만이 아니라, 즉 전야(田野)를 개간하지 않은 것117) 때문이었으니, 지금 조정의 명령이 내려갔는 데에도 감히 전야를 개간하는 데에 노력하지 않고 일체 묵은 대로 내버려두고 다스리지 않은 자의 경우는, 그 죄가 아 대부에게 시행했던 형벌을 피하고자 한들 되겠는가. 옛날에 주 부자(朱夫子)가 남강(南康)을 다스릴 적에는 날마다 산간 지역에 농사일을 경영하느라 거마와 보졸(步卒)이 성자현(星子縣) 같은 궁벽한 작은 고을까지 들어갔었다. 그런데 지금의 수령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감히 관아에 가만히 드러누워서 임금과 근심을 나누는 의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화성은 탕목읍(湯沐邑)이요 또 왕기(王畿)에서 표준이 되는 곳이니, 먼저 본부에서부터 마음을 다하여 이 명령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서, 비록 손바닥 발바닥만한 땅이라도 제때에 다 파종을 해서 기읍(畿邑)의 선도(先導)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6일 무술
차대가 있었다. 상이 일렀다.
"대간의 직임은 언책(言責)에 있으므로 임금의 잘못을 숨김없이 다 말하는 것이지만, 그 관계(官階)는 6품이기 때문에 원래 패초(牌招)해서 오지 않은 예가 없었다. 옛날 숙묘조 50년 동안에도 대간이 패초해서 오지 않은 예가 매우 드물었고, 선조(先朝) 초년에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합계(合啓)가 없을 때에는 매양 5일 만에 간원이 너무 오래도록 계(啓)를 궐행한다는 뜻에서 대간을 패초하기를 청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매일 성상소(城上所)의 대간과 양사(兩司)의 하위 관원 각각 한 사람씩만 스스로 사진(仕進)하던 것이 옛 관례인데, 근래에는 합계와 패초내는 것이 이미 잘못된 관례가 되었다. 또 합계라는 것은 본디 신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간하는 뜻이니 어찌 위에서 불러들이기를 기다려서 할 일이겠는가. 의의 없기가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없는데도 전해온 관습이 이미 굳어져서 이를 당연한 일로 알고 심지어는 인대(引對)·차대(次對) 때에도 번번이 패초를 냈는 데 번번이 패초를 어기곤 하였다. 그러나 대각(對閣)의 신진들은 진실로 책망할 것도 없으니, 이는 또한 선진들이 고사를 전송(傳誦)하여 그들로 하여금 체면이 본래 이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병조 판서 이시수가 아뢰기를,
"영남에서 무과로 출신한 구시창(仇始昌)이란 자가 와서 신에게 하소연하기를 ‘다행히 특별한 은전을 입어 성을 구(具)로 바꾸었는데, 구성(仇姓)을 가진 자들이 모두 영화롭고 감격스럽게 여기니, 방목(榜目)과 천안(薦案)에 모두 부표(付標)를 해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창은 이미 특별한 은전으로 성자(姓字)를 고쳤으니, 시창과 성이 같은 자들을 모두 일체 시창의 예에 의거해서 구(具) 자로 고쳐주어, 앞으로는 구성(仇姓)을 가진 사람들의 장적(帳籍) 및 공사 문자(公私文字)까지도 모두 구(具) 자로 시행할 일로 분부하시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경일(李敬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황승원(黃昇源)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6월 12일 갑진
충청도 관찰사 한용화가 장계하기를,
"홍산 현감(鴻山縣監) 신순(申純)이 비밀히 보고하기를 ‘본현의 족친위(族親衛) 이한복(李漢福)이 「신원하지 못한 원죄(冤罪)가 있어 이를 관아에 진고(陳告)하고자 한다.」고 하므로, 그를 불러다가 신문해보니, 그의 말이 대단히 흉패했다.’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대단히 놀란 나머지, 죄인 이한복에게 즉시 형구(刑具)를 채워 신의 영(營)으로 잡아오게 하고서 몸소 직집 신문해보니, 그의 공초가 갈수록 더욱 교활하고 악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공초에서 신광주(申光周)·김이원(金履源) 등과도 서로 관련된 정상이 또한 탄로났으므로, 그들을 한꺼번에 체포해내다가 차례로 추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 십수년 이래로 인심이 험해지고 의리가 어두워져서 이런 흉악한 마음을 가진 무리들이 불측하고 부도한 말을 마구 지껄이는지라, 뼈가 떨리고 쓸개가 뒤틀려서 도무지 살고 싶지 않은 심정입니다. 이 일은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대하여 감히 신의 영에서 마음대로 결단할 수가 없어 감히 이렇게 등문된 바가 지극히 중대하여 감히 신의 영에서 마음대로 결단할 수가 없어 감히 이렇게 등문(登聞)합니다마는, 이것은 보통 장계와 달라서 의당 밀봉(密封)하여 아뢰어야 하나 밀봉은 일찍이 조금(朝禁)이 있었기 때문에 다만 죄인의 공초를 별도로 봉하여 아룁니다. 그리고 죄인들은 모두 형구를 채워서 감영의 옥에 엄히 가두었습니다. 별도로 봉한 죄인들의 공초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한복의 공초에는 ‘나는 본디 농상(農桑)으로 생활을 하는 백성으로서 지난달 보름경에 밭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대고 있던 중, 이웃에 사는 김득이(金得伊)가 와서 말하기를 「날이 혹독하게 가문 것은 반드시 원기(冤氣)가 응결됨으로 인해서 그런 것이다. 지금 강화(江華)의 죄인은 섬 안에 찬배된 채 아직까지 사유(賜宥)를 입지 못했고 또한 자주 상경(上京)도 하지 못하니, 이것이 실로 가엾고 원통한 일이다. 또 매양 오년(午年)을 만날 때마다 가뭄이 매우 심한데도 국가에서 아직도 전례를 거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들이 상의해서 위에 알려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므로, 나는 이를 관(官)에 고하고자 하는 뜻으로 본면(本面)의 면장 신광주(申光周)에게 말하여 서장(書狀)을 만들어서 관에 보고했더니, 본관(本官)에서 나를 붙잡아다가 신문하므로, 과연 김득이에게서 들은 말을 본관에 고하였다.’ 하였습니다.
죄인 김득이의 관명(冠名)은 이원(履源)인데 그의 공초에는 ‘지난달 보름경에 마침 밭에 물을 대고 있던 이한복을 만났는데, 이한복이 갑자기 말하기를 「강화의 죄인이 오래도록 사유를 입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가엾다. 또 매양 오년을 만나면 한재가 매우 심한데도 국가에서 아직도 전례를 봉행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이 일을 위에 알리고 싶은데 우리 서로 의논해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므로, 나는 농담으로 대답하기를 「너의 말이 좋다. 네가 만일 이 일을 해내면 벼슬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곧 이한복이 먼저 스스로 꺼냈던 것이고 나는 고작 지나는 말로 농담 한 마디를 한 데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이한복의 재차 공초에는 ‘김이원이 흉한 말을 먼저 스스로 꺼냈기 때문에 내가 「촌민(村民)으로서는 관에 정장(呈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장차 어떻게 위에 알린단 말인가.」라고만 수작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5, 6일이 지난 뒤에 본면의 면장 신광주가 손수 본관의 전령(傳令)을 가지고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곳에 와서 그 전령의 말뜻을 여러 사람에게 말하고,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강화의 죄인이 오래도록 섬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실로 국가의 지극히 원통한 일이다. 또 오년을 만날 적마다 한재가 매우 심한데도 국가에서 아직도 전례를 봉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 일을 의당 위에 알려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시골 빈궁한 백성들이 한 목소리로 원통함을 호소하면 장차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여 그들의 말을 공공(公共)의 여론으로 여길 것이니, 성사를 시키는 방도가 관작이 있고 글을 아는 사람이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면장이라 촌민들과는 다르므로, 절대로 내가 이 일을 간섭한 흔적이 드러나서는 안되니, 내가 유도한 말을 행여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 부탁을 하였으므로, 과연 처음 공초에서는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죄인 신광주의 공초에는 ‘지난달 초열흘 전에 마침 마을 앞 냇가를 갔었는데, 이때 김이원과 이한복이 먼저 이미 와서 앉아 있었다. 그런데 김이원이 갑자기 말하기를 「오년을 만날 적마다 반드시 한재가 있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겠는가. 국가에서 지금 전례를 봉행하고 강화의 죄인을 서울로 들여보내면 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비록 격쟁(擊錚)의 일까지도 못할 것이 없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이렇게 중대한 말은 조정에서도 오히려 하기 어렵게 여기는 것인데, 먼 시골 백성들이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김이원이 말하기를 「만일 이 일을 위에 알리면, 크게는 벼슬을 얻을 수 있고, 적어도 특별상으로 대동미(大同米) 30석은 쾌히 받을 것이다.」 하였고, 이때 이한복은 별로 말을 하지 않고 곧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이한복이 나에게 그의 이름으로 관가에 보고하기를 요하자 나는 그 어리석고 망령됨을 책망하고 들어주지 않았더니, 재삼 간청하면서 「장차 상경(上京)해서 격쟁까지라도 할 것이다.」고 하여 그의 말이 갈수록 더욱 불측하였다. 그래서 혹 보고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될까 두려워서 과연 관에 보고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한복·김이원·신광주를 대질시켰더니, 김이원이 말하기를 ‘도시 이한복이 처음 말을 꺼냈는데, 오년마다 매양 가문한다는 한 마디는 과연 내가 말한 것이다. 그러나 관에 보고한 이를 너희 두 놈들이 서로 합심해서 한 것인데, 내가 어찌 알겠느냐.’ 하였고, 이한복은 다시 공초하기를 ‘신광주의 유도에 따라서 망령되이 스스로 관에 보고했을 뿐이요, 본디 격고(擊鼓)가 무슨 일인지조차도 모르는데 어찌 상경한다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천만 허무맹랑한 말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버릇없고 잗달기가 막심하구나. 장계를 도로 내려보내고 해당 도신을 추고할 것이며, 해당 수령 또한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라."
하고, 이어서 명하여 별도로 봉해온 공초문을 불태워버리고, 이한복·신광주·김이원을 선전관에게 내주라는 뜻으로 유지(有旨)를 작성해 주어 이를 선전관에게 부쳐서 선전관으로 하여금 도신(道臣)에게 급히 가서 이를 전하게 하고, 인하여 즉시 그들을 압송해오다가 중도에 이르러서 그들이 무식한 소치로 그런 짓을 했다는 뜻으로 그들을 효유한 다음에 놓아 보내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내각에서 차자를 올려 이한복 등을 국문하여 실정을 얻어내기를 청하니, 명하여 내각의 차자를 불태워버리게 하였는데, 내각에서 재차 차자를 올리자, 이를 명하여 없애버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정원에서 올린 의계(議啓)와 옥당에서 올린 차자는 명하여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우의정 이병모가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생각건대, 지금 인륜 도덕이 날로 무너지고 의리가 달로 어두워져서 이같은 변괴가 연달아 나타나는데도 전하께서 대응하시는 태도가 이와 같으니, 장차 날로 무너지고 달로 어두워지는 상황에서 인륜 도덕과 의리를 어떻게 유지하고 천명하겠습니까. 아, 강화도에 갇혀 있는 역적들이 실제로 범한 죄상이 단서(丹書)118) 에 낭자하여 천지 귀신이 밝게 살피고 있는 바인데, 그들은 시골 구석의 어리석고 천한 무리들로서 선동 유혹하는 짓을 할 수 없을 듯하나, 오직 그 어리석고 천하기 때문에 더욱 그 선동 유혹하는 데에 반드시 뿌리가 있다는 것을 증험할 수 있습니다. 이 밖의 여러 가지 공초도 모두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대하다고 하니, 지금 당장 끝까지 조사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원임 대신이 두 번째 차자를 올리자, 상이 명하여 그 차본(箚本)을 불태워 그 재를 봉(封)해서 전면(前面)에다 ‘경들의 두 번째 차자를 태워서 재를 봉한 것이다[卿等再箚灰封]’고 쓰고, 후면(後面)에는 ‘처음 올린 차자를 봉해서 돌려보내어 이미 경례(敬禮)를 표시하였고 두 번째 차자는 소각하여 태워 없앤다는 뜻을 보였으니, 이 후에는 ‘1백 번, 1천 번 소차를 올려도 당연히 이 예를 쓸 것이다. 또 조정으로 오려고 해도 이 일로 들어오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대관(大官)이 주대(奏對)를 청하더라도 결코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써서, 주서(洼書)를 시켜 전달하게 하였다. 영돈녕 김이소와 우의정 이병모가 주대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가도사(假都事)를 시켜 잡아오게 하였으니, 경들은 물러가라."
하였는데, 김이소가 그대로 물러가지 않자, 또 전교하기를,
"이미 하교를 듣고도 어째서 물러가지 않는가. 이렇게 한다면 이미 잡아오게 한 일을 도리어 중지시키고 싶다."
하였다. 그러자 대신이 비로소 물러가고, 승지·삼사·각신들도 따라서 물러갔다. 봉조하 김종수(金鍾秀)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호서에 흉역의 변이 있었는데, 그 자취는 비록 어리석은 듯하나 그 계획은 허풍으로 사람을 기만하는 데에 교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관부(官府)의 마당에서 그 큰 역적을 공공연히 부호하여 말이 지엄한 중전(重典)을 받을 데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일조 일석에 빚어진 일이겠습니까. 신이 그 일의 가장 핵심적인 것에 대해 통렬히 논하겠습니다.
지난번에 1부(部)의 《명의록(明義錄)》이 만들어짐으로부터 대안(大案)이 밝게 게시되어, 난적(亂賊)의 무리들이 마치 우정(禹鼎)에 나열된 백물(百物) 가운데 든 것과 같아서119) 저들의 형체를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하가 지키는 의리가 지극히 정미하여 귀신에게 질정할 만해지자 혹은 사설(邪說)을 일으켜 전하를 요동시키려는 자가 있었고, 우리 전하가 가지신 덕이 문(文)하고도 성(聖)하시어 천지에 참여할 만해지자 혹은 와언(訛言)을 만들어내서 전하를 속이는 자도 있었으니, 무릇 대의를 위배하여 뭇사람의 뜻을 어지럽히고 의혹케 하는 자가 어디엔들 있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양호(兩湖) 사이에서 거짓된 흉언(兇言) 5조(條)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 한 조항의 말은 어찌 이놈들의 앞잡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릇된 속임수를 그대로 전해 받는데는 절로 본래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니, 날뛰며 사람 현혹시키는 것이 어찌 멋대로 흐르는 물결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앞에서 부르고 뒤에서 화답하여 서로 연해서 일어나는 것이 마치 도깨비와 물여우가 번쩍번쩍 정체를 드러내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니, 정히 음험한 요기를 일소하고 역적 무리의 소굴을 통쾌히 부수어서 먼저 호서(湖西) 수십 주(州)의 어리석은 남녀들에게 일성(日星)처럼 밝은 의리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륜 강상이 이를 힘입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면 이것이 오히려 전환의 일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즉시 호서의 세 죄수를 잡아다가 국청을 설치하고 엄히 신문하여, 속히 재앙의 싹을 절단해서 영원히 난역의 근본을 제거하소서."
하니, 검서관(檢書官)을 명하여 보내서 전교하기를,
"다른 대신의 차자도 이미 모두 봉환(封還)하였기 때문에 이 또한 봉한한다."
하였다. 선전관 심풍조(沈豊祖)가 세 죄인을 압송해 오다가 중로에 이르러 그들을 효유한 뒤에 놓아 보내주고 치계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한용화가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죄인을 압송해가던 선전관이 중로에서 죄인을 놓아보냈는데, 죄인을 데리고 갔던 교리(校吏)가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놓아보낸 대로 내버려두었으니, 해당 직산 현감(稷山縣監)을 파출하소서."
하였는데, 환급(還給)하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서로 버티어가지고 언제 결말이 나겠는가. 중로에서 특별히 석방된 무리들을 정배(定配)로 결말지었으니, 백령진(白翎鎭)에 같이 유배시킬 일로 도신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한용화가 죄인 신광주·김이원·이한복 등을 황해도 백령진에게 정배하였다는 일로 치계하니, 명하여 백령진에 세 죄인을 유배시킨 일에 대해서 금령을 만들어 정원·옥당·대청(臺廳)에 써붙이고 다시는 말하지 말도록 하였다.
6월 14일 병오
이문회(李文會)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조원(李祖源)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이형원(李享元)을 가산군(嘉山郡)에 유배시켰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전 경상 감사 이형원의 공초에 ‘환곡을 제 값으로 받아들이고 헐값으로 지급한 일로 말하지면 이러합니다. 영하(營下)의 수성창(修城倉)과 진휼고(賑恤庫)의 곡식은 으레 전(錢)과 곡(穀)을 반반으로 받아들이는데, 작년에는 재황으로 인하여 형편이 조금 나은 이민(吏民)들에게는 전과 곡을 막론하고 관례대로 준납(準納)하게 하고, 봉납하기 어려운 빈민들에게는 상정례(詳定例)에 따라 비납(備納)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10월 이후로 매월의 지방(支放)을 초봉(初捧)으로 준대(準代)하다 보니, 준봉(準捧)한 미두(米豆)가 남은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누어 주는 즈음에 많고 적은 것이 서로 뒤섞여 혹 작간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봄 순찰 때에 이를 본관(本官)에 붙여 준대와 상정을 구별하여 고르게 나누어서, 상정례로 받아들일 것은 춘분(春分) 뒤에 마련하고, 초봉의 준가(準價)는 종량(種粮)을 나누어주는 데서 마련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암행 어사의 계단(啓單)에서 논한 것이 마침 곡식을 다 나누어주기 전이었으므로, 값을 감하여 내주는 것처럼 알게 된 것은 사세가 반드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외수미(外受米)를 공인(貢人)에게서 사사로이 사들여 다른 곳에 전매(轉賣)했다는 일로 말하자면 이러합니다. 작년 7월경에 50일 동안이나 대단히 가물어 장래의 농작(農作)에 대해서 오만 가지로 사려를 하던 중, 마침 호조의 공인이 관문(關文)을 가지고 내려와서 거두어 놓은 곡식을 팔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열읍에서 말들을 하기를 「이때에 곡식을 내는 것은 극히 중난한 일이니, 만일 영읍(營邑)에서 진휼에 보조할 돈을 덜어 내어 원하는 것에 따라 무치(貿置)해두었다가 봄에 이를 흩어서 나누어준다면 백성들에게 힘입은 바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본곡(本穀) 1천 석을 돈 4천 7백 냥을 주고 사서 본창(本倉)에 그대로 유치했었습니다. 그런데 열읍의 진휼을 보조할 때에 미쳐서는, 거리의 원근이 서로 달라서 부득불 돈으로 만들어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봄 이후로 곡식값이 일변 뛰어올랐고 또 왜량(倭粮)을 추가로 획정하는 일을 만났는 바, 민간에서는 곡식을 만들 길이 없었으므로, 해당 고을에 관문을 보내 신칙하여 즉시 곡식을 발매해서 민력(民力)을 조금이나마 펴이게 하도록 했었습니다. 그런데 가을에 곡식을 사들일 때에 비해서 값이 조금 오른 관계로 8백 냥의 잉여액이 생겼으나, 이 또한 즉시 잔읍(殘邑)의 진수(賑需)에 더 보태주었습니다. 어사의 계사에서 다른 곳에 전매했다는 말이 혹 이것을 가지고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매양 정퇴(停退)할 때를 당해서는 영곡(營穀)은 거론조차도 못하는 것이 문득 나쁜 관례가 되었는데, 작년의 칙교가 극히 엄절하였으므로, 당초 열읍에 통지할 때에 어느 곡식을 막론하고 똑같이 정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도내 회부(會簿)의 당연히 봉납할 각 곡식 1백 18만 7천 3백여 석 안에 정퇴한 것이 15만 8백 70여 석이 들어 있으므로, 원총수(元總數)에 비교하면 차잉액(差剩額)이 십분의 일이 되고, 별회부(別會簿)의 각 곡식 32만 1천 1백 석 안에는 정퇴한 것이 2만 1백 50여 석이 들어 있으므로, 이는 원통수에 비교하면 차감액이 십분의 일이 되는데, 이를 관례대로 매월(每月)에 분배(分排)하고 보니 부족한 숫자가 2천여 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공용(公用)에 관계되는 문제에 있어서는 비록 한결같이 회부와 똑같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일러 「공곡(公穀)에 대해서는 경비도 생각하지 않고 모조리 정퇴시키고, 영곡(營穀)은 사용(私用)에 관계됨으로 인하여 정감(停減)을 했다.」고 한 것은 혹 조검(照檢)에 미진함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모조(耗條)를 전매(轉賣)한 일로 말하자면 이러합니다. 작년에는 어느 고을 어느 곡식을 막론하고 발매할 때에 일체 곡부(穀簿)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고루 분배하여 발매하도록 했었던 바, 청도(淸道)·의성(義城) 두 고을의 경우는 모두가 산간 고을로 환곡이 가장 많아서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저 연안 고을의 모조 가운데에서 경외(京外)의 당연히 작전(作錢)해야 할 숫자를 이 두 고을에 옮겨 시행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연안 고을에 대해서는 모조를 그래도 유치하여 작전하도록 하고, 이 두 고을에 대해서는 작전을 하여 곡식의 수량을 감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실로 곡식을 고루 배정하여 폐해를 제거하는 방도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이를 변통하는 사이에 절로 명령되고 경솔함을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성의 환곡 처리에 대해서 제사(題辭)로 허락하고 대면해서도 허락했다는 일로 말하자면 이러합니다. 해당 수령이 막 도임하여 신을 면대해서 본읍의 절급한 사정을 진술하였는데, 구급(救急)의 대상에 있는 고을에 대해서 공곡을 적당히 획급(劃給)하는 것은 원래부터 써오던 본도의 관례이므로, 우선 공곡 3백 석을 허락하고, 그 진휼을 마친 다음에는 이리저리 들어간 것들을 통계하여 과연 공곡 2백여 석을 획급한 것으로 수계(修啓) 가운데 넣었던 것입니다. 또 정퇴(停退)를 추가로 획급한 일로 말하건대, 작년에 본읍의 정퇴곡이 당초 분획(分劃)한 수량이 있는데, 해당 수령이 정퇴의 수량을 늘려달라고 하므로, 신이 수차 퇴송(退送)시켰다가 끝내는 마지못해 제사로 허락을 하였으니, 이는 실로 사분(私分)의 이노(吏奴)가 포흠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혹은 상정례(詳定例)로 봉납하고 혹은 영작례(營作例)로 봉납한 일로 말하자면 이러합니다. 해당 수령이 말하기를 「해마다 재황이 들어 포조(逋租)를 징수하기가 마른 나무에서 물을 짜내기와 같으니, 상정례를 써서 모조리 거둬들이도록 해달라.」고 하므로, 신 또한 그것이 위법인 줄은 알면서도 곡부(穀簿)의 빈 기록[虛錄]이 매우 민망하여 부득이 그렇게 시행하도록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사의 계사에서는 제멋대로 처리한 것으로 말하였으나 어찌 감히 스스로 변명하겠습니까. 그리고 정리곡(整理穀)은 사체가 존엄하고 법의(法意)가 근엄하니, 오늘날의 신민들이 그 누가 성상의 마음을 몸받지 않겠으며, 명을 받들어 조사를 하는 데 있어서도 어찌 감히 만홀히 하겠습니까. 그러나 너르나 너른 일도(一道)의 수많은 열읍 가운데서 탐오하게 농간을 부린 자취에 대하여 끝내 그 확실한 장범(贓犯)을 잡아내지 못하고, 전수(典守)들의 근만(勤慢)만 가지고 초솔하게 논계한 것은 실로 마치 구차하게 책임을 미봉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으니, 정상은 비록 우매한 데서 나온 것이나, 자취는 실로 방자한 데에 관계됩니다.
그리고 막속(幕屬)들이 열읍을 침학했다는 일로 말하자면 이러합니다. 당초 문부(文簿)를 수색해 올 때와 곡품(穀品)을 자세히 살필 적에 십분 엄히 신칙하고 각별히 조절(操切)함으로 인하여 절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고, 끝내는 낮은 곳을 다 살피시는 성상께 알려지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모두 하늘이 신의 넋을 빼앗아감으로써 죽을 날이 임박한 소치입니다.’ 하였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이 공초한 것을 보건대 모두 자복한 것이니, 이것이 과연 은혜를 저버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사의 계사 가운데 ‘수년 동안 관찰사를 지냈으나 별로 실적이 없고, 재해당한 해에 진휼의 정사도 베푼 것이 없다.’고 한 말에 대해서 스스로 변명할 무슨 단서가 있겠는가. 곡부를 조사해서 아뢴 일의 해괴함에 이르러서는 더욱 죄가 무겁다. 그가 전라도로부터 경상도로 전임할 적에는 마치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될 것처럼 여겼었다. 대신의 천거를 막론하고 누차 막중한 관직을 역임하게 된 것은 평상적인 격례를 초월한 일이었는데도, 곳에 따라 힘을 다하지 못하고 도리어 죄과를 범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사람들을 면려하고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 이런 때라고 해서 용서할 수는 없다. 영해(嶺海)로 추방하는 법전을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유배의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6월 17일 기유
병조 판서 이시수가 아뢰기를,
"금년 식년과 출신들이 이미 모두 부방(赴防)하였는데, 6개월이 찬 뒤에 만일 또 내금위에서 6개월 동안 근무하는 예를 적용하면 일이 겹치고 노고가 편중됩니다. 그러니 부방 출신이 내금위에 입속된 후로는 근무 월수에 구애하지 말고 초사(初仕)에 주의(洼擬)할 수 있도록 허락할 일로 법식을 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18일 경술
성균관에서 유생들의 제술시(製述試)를 거행하였다.
이에 앞서 어제(御題)한 시(詩)·부(賦)·전(箋)·의(義)·책(策)·오체(五體)를 내리면서 광주 목사(光州牧使) 서형수(徐瀅修)에게 명하여 광주로 가지고 가서 유생들을 시험보이게 하고, 겸하여 《어정대학연의(御定大學衍義)》·《연의보(衍義補)》 및 《주자대전절약(朱子大全節約)》 등의 책을 내려보내 유생들을 시켜 고정(校正)하여 정서(淨書)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유생들이 모두 광주 관아로 와서 응시한 다음, 그 시권(詩券)을 수합하여 올려보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친히 그 시권들을 검토하고 전교하기를,
"어정서(御定書) 양본(兩本)을 교정하고 정서한 데 대한 노고는 이미 기념할 만하거니와, 고정(考訂)한 곳에 쪽지를 붙여 의견을 기록한 것에서는 또한 각각 지니고 있는 식견을 징험할 만하다. 그리고 도백이 추가로 선발한 사람들은 또 모두 고가(故家)의 후손들로서 특히 시·부·전·의·책 다섯 가지를 가지고 날짜를 나누어서 제술을 시험하였는데, 올려보낸 여러 시권들을 보니 걸구(傑句)와 가작(佳作)이 많았다. 생각건대 지금 이 재능을 살피고 장점을 비교하는 일은 곧 호남의 재능 품은 선비들의 명성을 천양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함이다. 그동안 가뭄 걱정으로 인하여 한가로이 수응할 겨를이 없었는데, 근래에 단비[甘澍]를 얻었고 또 오늘같은 경사스러운 날120) 을 만났기에 비로소 등제(等第)를 나누노라."
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여 내리었는데, 그 내용은 1등을 차지한 고정봉(高廷鳳)·임홍원(任興源)에게는 사제(賜第)하고, 그 다음인 박종민(朴宗民)·정주환(鄭冑煥)은 초사(初仕)로 등용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차등 있게 시상하라는 것이었다.
6월 20일 임자
자궁(慈宮)에게 진찬(進饌)하였는데, 자궁의 탄신은 18일이었으나 자궁에게 사사로운 복(服)이 있었기 때문에 진찬을 이날에 추후해서 행한 것이다.
6월 21일 계축
차대가 있었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비국 당상이 호서의 죄수에 관한 일로 진달하고, 우의정 이병모 또한 금령에 대해서 아뢰었는데, 그 아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그만두어라. 금령 두 글자는 다시 듣고 싶지 않다. 다시 이것을 거론하면 대관(大官)이라도 결코 용서받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내가 비록 부덕하나 감히 자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진실로 4백 년 종사(宗社)의 기탁(寄托)이 내 한 몸에 있으므로 반드시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게 한 다음에야 먼 데 있는 자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오늘 연석에 참여한 사람으로 말하더라도 마음과 말이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일체로 법을 시행한 다음에야 국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대저 근래에 기절(氣節)이 저하된 탓으로 한 번만 엄한 하교를 받으면 모두가 목을 움츠리기에 여념이 없으니, 신은 늘 ‘세 죄수를 정배(定配)한 것은 관촌(官村)이 다 무사하게 하기 위함이다.’고 하신 하교가 도리어 각 관원이 자기 직임대로 하도록 맡겨두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가 처리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한다. 대체로 옛사람들은 다만 의리와 의리가 아닌 것만을 알아서, 임금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도 의리에 합당하기만 하면 그대로 순종할 뿐이고, 임금이 하지 않고자 하는 일이라도 의리에 합당치 않으면 죽기로써 굽히지 않았었다. 그런에 이번 죄수를 영해에 정배한 일은 오직 의리가 있는 곳이므로, 옛 시대로 논하자면 상하가 서로 막혔다고 말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렇지 않아서 이른바 쟁집(爭執)이라는 것이 옛날의 쟁집이 아니고, 기회를 엿보는 교묘한 잔재주로 겉으로만 쟁집한다는 명칭을 사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담소하며 이리저리 구분하여 처리하는 것은 곧 그들을 굽힐 수 없음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일전의 당차(堂箚)로 말하더라도 이러한 거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여기에 수응한 것이 마치 희극(戱劇)과도 같았는데, 자연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역적을 토벌하는 것도 또한 특별한 일이 아니다. 대체로 이 또한 《춘추》의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는 의리인데, 임금이 높지 않으면 백성이 어떻게 보호를 받으며, 백성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역적 토벌을 어디에 쓰겠는가. 당(唐)·우(虞)로부터 그 이상의 시대에는 천하를 소유하는 것을 관(官)으로 삼았으니, 이 때문에 ‘대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 자리를 얻는다.[大德者必得其位]’고 한 것인데, 삼대(三代)로부터 그 이후로는 천하를 가(家)로 삼았으니, 임금을 높이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신하의 의리는 오직 그 경(經)만을 알아서 의당 왕릉(王陵)의 일121) 을 바름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권(權)으로 대처하는 방도에 이르러서는, 삼대와 한(漢)·당(唐)이 모두 권도를 썼으나, 삼대 이상의 경우는 성신(聖神)한 임금이 서로 계승하였으므로 설혹 진미(盡美)하기만 하고 진선(盡善)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모두가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서 나온 것으로 다 권을 써서 경에 부합시키는 권이었고, 한·당 이후의 권은 비록 은연중 도에 부합한 것이 없지는 않으나, 절로 그 패도(覇道)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나같은 과매(寡昧)한 사람이야 삼대의 권은 진실로 감히 바랄 수 없거니와, 한 고조(漢高祖)·당 태종(唐太宗)의 권인들 또한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권을 써서 경에 부합시킨다는 것은 아니나, 만나는 일 가운데 혹 권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나의 신하가 된 사람이 만일 ‘위에서 혹 때로는 권을 쓰니, 아래서도 때로 권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면 왕릉의 의리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권이 어찌 아랫사람이 의논할 바이겠는가. 내가 이번에 하마터면 죄 없는 사람을 죽일 뻔했는데, 다만 생각하건대, 안자(顔子)는 아성(亞聖)으로서 과실을 두 번 짓지 않는 것[不貳過]을 귀중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노염을 옮기지 않는 것[不遷怒]을 제일의 성공(聖工)으로 삼았으니,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이 하교에서 비록 깊은 이면(裏面)을 말하여 색사(色辭)에 드러내고자 하지는 않으나, 그 관계된 바로 말하자면 곧 지극히 정미한 큰 의리이며,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는 큰 강령인 것이다. 대신은 곧 임금의 고굉(股肱)인데, 내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실로 성의가 없는 것이니, 이상의 말을 경은 알아들었는가?"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워낙 깊으시어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감히 만분의 하나도 우러러 엿볼 수가 없으나, 또한 어찌 어렴풋이나마 알아들은 것이 없겠습니까. 대저 분의(分義)를 다할 곳엔 분의를 다하고, 당연히 행해야 할 곳엔 당연히 행하는 것이 거의 신도(臣道)의 대경(大經)이 될 수 있으나, 지금 사람들의 견식으로는 아마 일마다 의리에 부합하기는 보장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내각 제학(內閣提學)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신이 삼가 성상의 하교를 듣고 보니, 우러러 사뢸 말씀이 있습니다. 삼가 생가건대, 전하의 심법(心法)은 요(堯)·순(舜)의 정일(精一)을 이으시었고 학업은 탕(湯)·무(武)의 전긍(戰兢)을 이으셨으니, 어찌 조금이나마 한 고조·당 태종 같은 사이비(似而非)한 심적(心跡)이 용납되겠습니까. 또 하교하시기를 ‘임금은 이변(異變)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 비록 권을 써서 경에 부합시키는 일이 있을지라도,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는 의당 경만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는데 ‘신하의 의리는 의당 왕릉의 일을 바름으로 삼아야 한다.’고 논하신 것이 바로 그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신들이 쟁집하는 논의가 어찌 왕릉이 바름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학(聖學)은 이미 넓고 깊으시니, 경과 권을 섞어 쓰시는 즈음에 있어 신은 진실로 감히 조금도 엿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어리석은 생각에 미안한 바가 있을 경우에는 장차 의심을 품은 채 억지로 따라야겠습니까, 아니면 반복 논단하여 질정을 해야겠습니까.
신이 내각으로 가던 길에 정원에 들렀다가, 호서의 세 죄수의 일로 특별히 금령을 만들어 이를 세 장의 종이 쪽지에다 나누어 써서 승정원·홍문관·대청(臺廳)의 벽에 각각 붙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는 장차 뭇사람의 마음을 억누르고 뭇사람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아서 한 번 처분을 거친 뒤에는 감히 쟁난(爭難)을 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니, 신은 여기에 대해서 또 황혹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이 금령을 일러 천리와 인심에 부합하여 천하에 공공한 달권(達權)이 될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비록 금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절로 범하지 않을 것인데, 무엇하러 종이 한 장, 글자 한 자나마 벽에 붙이는 데에 허비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위에서 비록 금령을 붙이더라도 아래서는 당연히 금령을 논의하여 왈가왈부해서 천지가 조화되는 뜻을 통하게 하는 것이 또한 성인이 자신의 의사를 버리고 남의 좋은 점을 따르는 성덕(盛德)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꼭 국시(國是)를 굳게 정하여 사람들이 입을 열고 의논을 하지 못하게 해서, 한갓 국가의 체모가 구차해지고 공론이 답답하게 여기도록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명하여 세 곳의 금조(禁條)를 뜯어버리도록 하시어 천토(天討)가 행해지고 공론이 펴지도록 하소서."
하였다.
전교하였다.
"과목(科目)으로 사람을 취한 경우에는 그에게 관직을 의망하는 데에 있어 의당 과목 출신이 아닌 사람과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통청(通淸)이 안된 자는 비록 이미 통청이 된 사람과 같지는 않을지라도 까닭없이 산관(散官)으로 만든 지 20년 안팎의 오랜 기간에 이른자에 대해서는 의당 소체(疏滯)의 거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유년에 낙직(落職)된 사람은 태천(泰川)의 전 직강 백종주(白鳳周)이고, 기해년에 낙직된 사람은 안주(安州)의 전 찰방 김응린(金應麟), 정주(定州)의 전 전적 김양순(金養純)과 전 찰방 백종련(白宗鍊)이고, 또 영남에서는 경주(慶州)의 전 현감 임옥(任玉)과 송도(松都)의 전 좌랑 박성현(朴聖鉉)이 그중에 낙직된 지 가장 오래되었으니, 모두 오늘 정사에서 복직(復職)으로 의입(擬入)하도록하되, 만일 현과(見窠)가 없으면 병조 좌랑 가운데 초계 문신 및 시종인을 개차하여 다른 현과와 융통해서 즉시 구별 처리하여 의망하도록 하라."
도정(都政)을 행하여 【 이조 판서 김재찬(金載瓚), 이조 참판 이조승(李祖承), 이조 참의 어용겸(魚用謙), 병조 판서 이시수(李時秀)였다.】 서욱수(徐郁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이윽고 체직하고, 윤필병(尹弼秉)을 그 대신으로 삼았다가 또 체직하고, 이은모(李殷模)를 그 대신으로 삼았다. 김이소(金履素)를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김면주(金勉柱)를 부사로, 윤익렬(尹益烈)을 서장관으로, 정민시(鄭民始)를 홍문관 제학으로, 서영보(徐英輔)를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6월 22일 갑인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였다.
6월 26일 무오
평안도 관찰사 민종현(閔鍾顯)이 장계하기를,
"안주(安州)·가산(嘉山)·정주(定州) 3읍의 민호가 떠내려가고 무너진 것이 3백 70호나 되는데, 이같은 수재(水災)에도 침몰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 참으로 천만 다행입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그중에도 안주의 민호가 떠내려가고 무너진 숫자가 3백 호에 이른다 하니, 백성들이 집을 잃고 유랑하는 정상을 생각하건대, 내 몸이 대단히 아픈 것처럼 여긴다는 것으로만 말할 수는 없다.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간혹 특별히 힘을 써서 즉시 집들을 얽어주었는가? 지금 곧 특별히 선전관을 보내 달려 내려가서 영읍(營邑)의 일 거행하는 태도의 성실함과 완만함을 고찰하도록 하되, 먼저 본사(本司)에 성화 같이 관문을 보내 계칙하여 기어코 선전관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우선 비바람 가려주는 일을 일제히 꾀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7일 기미
평안도 관찰사 민종현이 장계하기를,
"개천(价川)의 민가가 떠내려가고 무너진 것이 61호인데, 다행히 침몰되어 죽은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군의 보고가 매우 늦었으므로, 신영(臣營)에서 각별히 논책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민사(民事)는 늦출 수가 없는 법이거니와, 더구나 민호가 무너지고 떠내려간 상황은 바로 등문(登聞)해야 할 일에 관계된 것인데, 수재(守宰)라는 사람이 어디를 갔기에 이제야 감영에 보고를 하여 도리어 길이 먼 다른 고을들보다 늦었단 말인가. 그 삼가지 못한 정상이 극히 해괴하다. 의당 그를 파직하고 잡아다가 엄히 감죄해야 할 일이나, 가옥을 짓는 등의 일을 생무지에게 맡기기 어려우므로 우선 말감(末勘)에 따랐다가 해읍의 표호(漂戶)들이 안주되기를 기다려서 도신으로 하여금 결장(決杖)하도록 하라. 그리고 완전히 무너졌거나 떠내려간 민호에 대해서는 박천(博川)의 예에 의거해서 시행하라. 또 해서(海西)에도 만일 떠내려가고 무너진 민호가 있는데 보고를 지체하거나 가옥을 짓는 등의 절차에 마음을 쓰지 않는자에 대해서는 모두 의당 개천 수령의 예에 의거해서 처리할 것이니, 죄과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는 뜻으로 엄히 계칙하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가 또 장계하기를,
"희천에는 집이 완전히 떠내려갔거나 산사태로 무너진 것이 1백 호이고, 산사태로 압사한 사람이 23명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개천과 안주의 예에 의거해서 행회(行會)하라. 그리고 봉명 선전관(奉命宣傳官)은 그대로 희천으로 달려가서 침몰되어 죽은 사람의 처자(妻子)들을 위로하고 돌보아줄 것이며, 기타의 일에 대해서는 모두 선전관이 내려갈 때의 전교에 의거해서 거행할 일로 또한 선전관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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