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임진
제주(濟州) 백성 조필혁(趙必爀)·이원갑(李元甲) 등이 왜국(倭國)에서 돌아왔다.
지난해 10월 일본 비전도(肥前島) 안천평산(安川平山)의 북진포(北津浦)에 표류하자 그 섬의 관원이 장기도(長崎島)에 호송하였는데 뱃길로 대략 2천여 리(里)나 되었으며, 올해 1월에 장기에서 대마도(對馬島)로 호송되었는데 뱃길로 2천 6백 리였다고 하였다.
8월 4일 을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동지 사은 정사로 정1품을 의망(擬望)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였다.
"종묘와 사직궁의 대향(大享) 이외에 남단(南壇)218) 과 문선왕묘(文宣王廟)219) 의 제사에 쓸 향축(香祝)을 예조에서 친전(親傳)할 것인지에 대해 취품(取稟)하였다. 그런데 수향(受香)220) 하는 날이 마침 보사제(報謝祭)221) 의 수향하는 날과 똑같이 내일이니 어떻게 섭행(攝行)하라고 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경모궁(景慕宮) 가을 제사의 수향하는 날도 내일인데 그 향축도 직접 전하겠다.
삼각산(三角山)·백악산(白岳山)·목멱산(木覔山)·한강(漢江)의 절제(節祭) 때 보사제를 겸해서 행하고 용산강(龍山江)과 저자도(楮子島)에서는 보사제를 행하는데, 대저 봄에 기원하고 가을에 감사드리도록 법전에 명시되어 있는 만큼 아무리 흉년이 들었다 하더라도 감히 폐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난번 산천에 재차 제사를 올리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메아리처럼 응하여 기도한 그 다음날 낮에 비가 오면서 밤에도 조금씩 내렸으니, 신령이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뒤늦게 내려졌고 강우량이 적었던 것일 따름이다. 금년 추수 역시 크게 흉작이 될 것이 뻔한데 이는 모두가 나의 부덕 때문에 초래된 일이다. 지금 보사제를 거행하는 것이 비록 옛 관례를 따르고 신령들이 내려준 복을 드러낼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내 몸을 반성해보면 두려워 조심스럽기만 할 뿐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다. 그러니 스스로 편할 겨를이 없어야 할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감히 향축을 대신 전하게 하겠는가. 산천의 제사에 쓸 향축을 일체 친전함은 물론 용산강과 저자도 제사의 향축도 특별히 친전하겠다. 그리고 친전한 뒤에는 이어 섬돌 아래로 내려가서 지송(祗送)할 것이며 또 이문원(摛文院)에 가서 재계(齋戒)하며 밤을 지내겠다.
내일 아침은 바로 사단(社壇)의 추향(秋享)에 쓸 향축을 받는 날인데 이번 가을 태묘(太廟) 대향(大享) 때의 향축 지영소(祗迎所)에서 지영토록 해야 할 것이다. 태묘와 경모궁의 가을 전알(展謁)은 정해진 그 날 행하고 싶다마는 다시 날씨를 살펴 내일 하교하겠다. 만약 전알하는 예를 모레 행할 경우에는 환궁한 뒤에 바로 편전(便殿)에서 재계하고 밤을 지내다가 사단(社壇)의 제향이 완료되기를 기다렸다가 안으로 돌아올 것이니, 이 점을 잘 인지하고 이랑(吏郞)을 파견하여 내일 향축을 받을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들에게 몸가짐을 특별히 잘 단속하도록 하라."
하교하였다.
"근래 능관(陵官)이 산을 순찰하는 임무에 불성실하여 도벌(盜伐)을 아예 금지하지도 않고 있다. 이번에 앵봉(鶯峰)의 가을철 적간(摘奸)을 행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특별히 며칠 동안을 기한으로 두루 살펴보게 하였더니, 창릉(昌陵)의 경우 주봉(主峰)과 구역 안 가까운 곳의 한 줌 정도 되는 나무들이 새로 도벌된 흔적이 많았으며 각릉(各陵)에 당초 산을 순찰하는 수호군(守護軍)도 없었다고 하였다. 이 어찌 통분스럽고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일체 서계(書啓)한 대로 등급을 나누어 처분을 내려야 할 것이다.
창릉의 능관 등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공초(供招)를 받게 하고 수복(守僕) 및 두목군(頭目軍) 역시 기백(畿伯)으로 하여금 각별히 엄하게 다스린 뒤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명릉(明陵)의 능관은, 구역 안의 수목 가운데 새로 도벌된 숫자가 적다고는 하나 금지하고 단속하는 일을 불성실하게 한 것은 마찬가지이니 역시 나문하여 처치하라. 익릉(翼陵)·흥릉(弘陵)·순회묘(順懷墓)의 관원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다시 보고 싶으니 우선 중하게 추고토록 하라. 경릉(敬陵)의 능관은 우선 추고만 하라. 낙엽이 떨어지고나면 또 특별히 적간하는 관원을 파견하여 10여 일 동안 다시 주밀하게 살피는 등 성실도 여부를 조사토록 하겠다.
그런데 각 능원(陵園)의 구역 안에서 사태(沙汰)가 발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적간할 때 탈 잡힐 나무 뿌리를 숨기는 데 연유하는데 이 때문에 비가 한번 오기만 하면 띠가 뽑히면서 흙이 빠져나오곤 하는 것이다. 이 뒤로 적간할 때 찍어낸 흔적이 있을 경우에는 혹 관대히 용서해 줄 수도 있지만 뿌리를 숨긴 흔적이 있을 경우에는 특별히 두 배 정도 무겁게 율(律)을 적용할 것이니, 이 뜻을 각처의 재랑(齋郞)에게 엄히 신칙하여 선갑(先甲)222) 의 유시를 잘 따르도록 하라."
이조가 아뢰기를,
"새로 제수한 영릉 참봉(英陵參奉) 송치규(宋稚圭)와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 민기현(閔耆顯)이 임명된 뒤에도 기한이 넘도록 아직 출사(出仕)하지 않고 있으니 모두 관례에 따라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그들 대신 양호(兩湖)에서 추천한 그럴 듯한 사람을 골라 이번 정사(政事)에 의망(擬望)해 들이도록 하라. 그런데 지난해 대정(大政)을 행할 때 하교한 뒤로 지금 몇 달이 지났는데도 영남에서는 지금까지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이 없다. 그 전의 관찰사야 죽었으니 따질 것이 없다 하더라도 신임 방백이 또 혹시라도 추천하는 일을 지체한다면 그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니 이러한 내용으로 엄하게 신칙하라.
그리고 장계로 보고한 내용을 보건대, 고(故) 상(相) 정철(鄭澈)의 후손인 생원 정길(鄭桔)은 나이가 68세이고, 고 유신(儒臣) 임위(林瑋)의 현손인 유학 임병원(林炳遠)은 나이가 64세이고, 고 충신 김천일(金千鎰)의 봉사손(奉祀孫)인 유학 김득려(金得麗)는 나이가 63세라고 하였다. 이 세 사람을 만약 전조(銓曹)에서 관례에 따라 조용(調用)할 때까지 기다린다면 어느 때나 들어와 벼슬하게 될지 모를 일이고 또 들어와 벼슬한다 하더라도 이미 70이나 80이 넘을 것이니 어찌 너무도 의리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관(敎官)이나 감역 자리를 이번 정사에서 특별히 더 마련한 다음 단망(單望)으로 임명토록 하라. 그리고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그들을 올려 보낸 뒤에 장계를 올리도록 하고, 그들이 올라오면 궐직(闕職)이 생기는 대로 승진시켜 주도록 하라. 만약 그들 중에 근력이 달려 억지로 올려보낼 수 없는 자가 있거든 역시 도신으로 하여금 사유를 갖춰 보고하게 한 뒤에 초기(草記)를 올리도록 하라. 선정(先正) 문정(文正)223) 의 후손과 여양(驪陽)224) 국구(國舅)의 후손을 모두 병 때문에 바로 바꾸게 되었다마는 이는 원래 추천하고 의망했던 뜻이나 특별히 제수한 뜻이 못된다. 이 점을 본조는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승문원이 문신(文臣)225) 에 대한 분관(分館)을 시행하면서 관북(關北)의 문신 필성뢰(弼聖賚)를 교서관(校書館)에 소속시키자, 상이 ‘성뢰는 지벌(地閥)이 낮은 사람이 아니다.’고 하여 권점(圈點)을 담당한 박사(博士)에게 묻도록 하였는데, 성씨(姓氏)가 괴팍해서 권점을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니, 상이 하교하여 이를 꾸짖고 성뢰를 괴원(槐院)226) 에 소속시키라고 명하였다.
김화진(金華鎭)을 동지 겸 사은하는 행차의 상사(上使)로 삼았다가 곧바로 병 때문에 해면(解免)하였다. 이당(李溏)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가 곧바로 체차하고 황인영(黃仁煐)을 대신 임명하였다.
8월 5일 병신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경모궁(景慕宮)의 추향(秋享)과 남단(南壇)·문묘(文廟)·산천(山川)의 절향(節享) 및 보사제(報謝祭) 때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직접 전하고 이어 이문원에 가서 재계(齋戒)하며 밤을 보냈다.
8월 6일 정유
이문원에 거둥하여 사직 대제(社稷大祭)의 향축을 지송(祗送)하였다.
태묘(太廟)에 가서 전알(展謁)하였다.
하교하였다.
"증성(曾聖)은 말하기를227) ‘수목은 적절한 시기에 벌채해야 하고 금수(禽獸)는 적절한 시기에 잡아야 한다.’고 하면서 바로 공성(孔聖)의 훈계인 ‘나무 하나를 자르거나 짐승 하나를 잡을 때에도 그 시기가 아닌 때에 하면[不以其時] 효(孝)가 아니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그래서 옛날에도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 제사지낸 뒤에야 우인(虞人)이 못에 들어갔고228) 승냥이가 짐승을 잡아 제사지낸 뒤에야 사냥을 시작했고 비둘기가 매로 변한 뒤에야 새 그물을 설치했고 초목의 잎이 다 떨어진 뒤에야 산림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지난번 벌레 잡는 일로 처음 임시 규정을 만들어 시행할 때에도, 이는 그야말로 내가 노망해서 나온 말이 아니라 성인의 말씀에 입각한 것이니 속인들이 듣고 웃는다 해도 돌아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벌레 잡는 일도 오히려 그러할진대 나무 자르는 일이야 더더욱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오늘 식목(植木) 차원(差員)이 매보(枚報)한 것을 인하여 외사(外使)229) 가 전품(轉稟)하기를 ‘구역 안의 수목에 대한 가지치기를, 이번 농한기를 이용하여 장정을 모집해서 개시하려고 한다.’ 하였는데, 이 말을 갑자기 듣고는 아무 의심 없이 즉각 허락하며 인가하였다. 그러다가 밤에 재계(齋戒)하면서 잠이 오지 않아 조용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벌레를 잡아 물에 집어넣는 것과 관련하여 전에 전령(傳令)을 내린 것과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으므로 벌떡 일어나 촛불을 가져 오라 하여 다시 유시하게 되었다.
《맹자(孟子)》에 ‘때가 되면 도끼를 들고 산림에 들어간다’230) 고 하였는데, 이를 주자(朱子)는 해석하기를 ‘초목이 영락(零落)한 뒤이다.’고 하였고, 정강성(鄭康成)231) 은 또 말하기를 ‘《이아(爾雅)》에 「새 잡는 그물을 나(羅)라고 하고 초목이 영락하는 때를 10월의 시절이라고 한다.」 하였는데, 월령(月令)으로 보면 늦가을에 초목이 황락(黃落)하고 영락하는 것은 10월의 시절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모시(毛詩)》의 전(傳)에서도 말하기를 ‘초목이 부러지지 않으면 도끼를 잡지도 않고 산림에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하였으니, 대저 도끼를 들고 산림에 들어가는 때는 초목이 영락한 때가 분명하고 초목이 영락한 때는 바로 또 10월인 것이다.
지금 이때도 물론 농한기이긴 하다마는 10월 역시 농한기이다. 그렇다면 천시(天時)에 맞추어 인력(人力)을 활용하고 또 불이기시(不以其時)의 훈계에 어긋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획일적으로 기한을 정해두어야 할 것이니, 지금부터 가지를 치는 일은 반드시 10월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하도록 하라.
그런데 원침(園寢)에 나무를 심고 가꾸느라 10년 동안 무진 애를 쓰며 내 마음도 고달프게 하고 백성의 힘도 수고롭게 하였으니 나무가지 하나인들 어찌 꺾고 싶겠는가. 시(詩)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먼 가지만 치고 저 어린 뽕나무는 잎만 딴다.’232) 고 하였으니, 잎만 따고 가지는 남겨두어야만 뒤에 쑥쑥 뻗어나가는 효과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지치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시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니, 재랑(齋郞)과 차원(差員)은 이에 따라 준행토록 하라."
8월 7일 무술
하교하였다.
"문묘(文廟)에서 제향을 드릴 때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주밀하게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헌관(獻官)이 본관(本館)233) 의 당랑(堂郞)234) 이었는데도 뒤에까지 머물러 살펴보지 않고 먼저 배종(配從)하는 반열로 나아갔다니 지극히 놀랍다. 영상이나 좌상이 친향(親享) 때 헌관이 되었을 때에도 오히려 끝까지 남아 감시하며 제기(祭器)를 치우게 하는데, 붉고 푸른 옷에 은빛 띠를 맨 대사성과 사성이 어찌 감히 스스로 편한 대로 한단 말인가. 당해(當該) 헌관인 대사성 남공철(南公轍)과 사성 이현묵(李顯默)에게 모두 서용(敍用)하지 않는 벌을 내리도록 하라. 그리고 이 뒤로는 일체 제향소(諸享所)의 예에 따라 끝까지 남아 감시하도록 본관에 엄히 신칙하는 동시에 법전에 기록하여 성문화(成文化)해서 준행토록 하라."
8월 8일 기해
부교리 심규로(沈奎魯)가 상소하기를,
"진휼(賑恤)하는 대책은 전적으로 방백과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당해(當該) 도신(道臣)은 흉년이 들 것은 걱정하지 않고 접제(接濟)할 마음도 먹지 않은 채 때 지난 비가 쟁기질할 정도만 오기라도 하면 문득 ‘비가 흠뻑 내려 골고루 적셔 주었다.’고 하고 기름진 땅에서 곡식이 잘 자라는 것을 보기라도 하면 원근(遠近)의 지역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인정해 버립니다.
지난번 장계(狀啓)를 보건대 ‘풍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고 하는가 하면 ‘백성의 일이 매우 다행스럽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그는 정말로 흉년이 든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만약 정말로 모르고 있다면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너무도 불성실하니 그런 도신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임시 변통으로 둘러대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습니다. 재해를 입은 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환곡(還穀)을 징수하고 정지시키는 모든 일이 그 해에 풍년이 드느냐 흉년이 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흉년이 들면 재해를 입은 전결이 많으니 환곡 징수를 정지해야 하고 풍년이 들면 재해를 입은 전결이 적으니 환곡을 상환케 하는 것이야말로 형세상으로 보나 이치상으로 볼 때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임시 변통으로 둘러대기만 한다면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입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신이 비록 어리석기는 하나 도신을 위해 또한 해명해 줄 수가 없습니다.
묘당에서 바람직한 계책을 강구하고 구제할 일을 대비해두는 것이야 물론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마는 책임지고 수행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도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도신을 엄히 더 신칙하여 마음을 바꿔먹고 부지런히 정성을 쏟도록 함으로써 재해를 입은 전결에 반드시 균등하게 분배하고 수확하지도 못한 땅에 세금을 징수하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며 반드시 정성을 다해 진휼함으로써 먹여주기를 바라는 백성의 기대에 부응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창곡(倉穀)의 납부를 정지시키는 일이나 신역(身役)을 일정 기간 보류시키는 일 역시 반드시 미리 고유(告諭)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억만 창생으로 하여금 조정의 은택을 받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게 하여 이리저리 서로들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함으로써 그 동안의 허물을 보충하고 잘못을 속죄받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이 백성들을 굶주려 죽게 한다면 그 동안의 죄까지 아울러 엄하게 다스림으로써 여러 도신들을 징계하는 하나의 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령이야말로 백성을 직접 대하는 자들이니 엄선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동 부사(安東府使) 유사모(柳師模)나 평양 서윤(平壤庶尹) 윤후동(尹厚東)의 경우는 제대로 고르지 못한 중에서도 더욱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안동은 유향(儒鄕)으로서 사부(士夫)가 집결해 있는 고장인 만큼 예로부터 이곳을 맡게 되면 그를 일컬어 외부학(外副學)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벌(地閥)이나 인망(人望)이 방백과 동등한 수준이고 또 그 이력(履歷)이 같은 조정의 사람들보다 우월한 자가 아니면 섣불리 의망(擬望)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모를 보면 자계(資階)나 경력이 이미 얕은데다가 인망이나 실력 또한 부족하기만 하니 명기(名器)를 더럽히고 정사(政事)의 체례(體例)를 무너뜨린 것이 극에 달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윤후동이 흐리멍덩하고 용렬한 인간이라는 것은 온 조정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가 만경(萬頃)에 부임하지 않은 지 이제 겨우 한 달을 넘겼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재해를 입어 재정이 형편없는 고을은 꾀를 내어 회피하고 폐해가 없는 넉넉한 지역은 좋다고 부임하고 있으니 그런 그야 꾸짖을 만한 가치도 없다 하겠습니다만, 전관(銓官)이 된 자는 이 사람에게서 무슨 장점을 취했기에 마치 이 자가 아니면 해낼 수가 없는 것처럼 숨이 넘어갈듯 가장 풍요로운 고을에 다시 선발했단 말입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유사모와 윤후동을 속히 체차해 바꾸도록 하고 의망한 전관에게도 아울러 견책을 내리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요즘 듣건대 호서(湖西)의 여러 고을에서 양학(洋學)이 점차 기세를 올리고 있다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뿌리를 뽑아버리지 않은 탓으로 가지와 잎이 점점 불어나는 데 연유합니다. 호서의 감옥에 수감된 이존창(李存昌)은 바로 사당(邪黨)의 소굴인 동시에 난민(亂民)의 두목 역할을 하고 있는 자인데 지금까지 목숨을 붙여둔 채 정법(正法)을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감히 두려움 없이 흉악하게 기세를 부리고 완악하게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서 그만 옥 안에서까지 사당(邪黨)을 영접하고 거칠 것 없이 먹고 마셔댄다 합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엇을 겁내어 점차 물들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이존창을 율(律)대로 정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영백(嶺伯)235) 의 일을 보건대 그대가 소에서 논한 것처럼 참으로 재해를 숨긴 죄가 있기는 하다만, 영백이 요량하기로는 우선 이와 같이 진중한 태도를 취했다가 다시 후속조처를 취하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칙하여 책망하는 것이 옳겠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말을 잘 만들어서 관문(關文)을 띄워 신칙토록 하라. 유사모·윤후동의 일과 전관(銓官)에 대한 일은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사학(邪學)에 대한 일은, 그 폐해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전에 단속하고 금지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간절하게 부탁했었는데, 가령 한 마을에서 장로(長老)가 미연에 제지하고,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 심한 경우 드러나는 대로 금지시켰다면 이런 이야기가 어찌 꼭 매번 장주(章奏)에 오르겠는가. 이존창에 대한 일은 전에 판하(判下)한 사연대로 하라고 도백(道伯)에게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정언 신약추(申若樞)를 대망(臺望)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방금 정언 신약추가 상소하기 위해 본원에 도착하였는데, 그 상소에 나오는 말을 보니, 명산(名山)에 친히 봉선(封禪)을 행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조(我朝)에서는 없었던 예(禮)인데, 이 어찌 청명한 조정에서 대각(臺閣)에 몸담고 있는 신하가 감히 의논드릴 성질의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제2조(條)에서는 저쪽236) 을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하는 등 인통(忍痛)237) 의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양심을 가진 자라면 그 누군들 존양(尊攘)238) 의 대의를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어긋난 주장이 언책(言責)을 담당한 자리에서 홀연히 나올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인심이 나쁘게 빠져든 것이 어쩌면 이렇게 극도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가 의관을 더럽히고 진신(搢紳)을 수치스럽게 한 것이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닌 만큼 상소를 물리치고 죄를 청하게 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마는, 불가불 한 번 보신 뒤에 엄히 처분을 내리셔야 하겠기에 봉입(捧入)하는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온통 망언(妄言)으로 가득 차 있어 입에 올릴 가치도 없으니 부끄러움을 끼친 것이 극에 달했다. 우선 언책의 자리에서 삭제해 버리고 원소(原疏)는 되돌려주어라."
하였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약추가 상소한 내용을 경은 들었는가?"
하니,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상소는 못보았습니다만 정원의 계사(啓辭)를 통해 대체적인 내용은 약간 들었습니다. 지난번 김약행(金若行)이 상소하면서 천자(天子)의 예악(禮樂)에 대한 주장을 늘어놓더니 이번에는 약추가 더욱 심하게 ‘친히 명산에 봉선(封禪)을 해야 한다.’고 떠벌였는데 대각의 반열에 있는 사람에게서 이처럼 허황된 주장이 나올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리고 하단(下段)에 있는 말은 더욱 해괴하고 패려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세월이 점점 멀어지면서 의리가 날로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만, 존양(尊攘)하는 대의만큼은 양심이 있는 자라면 똑같이 지니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모질게도 저쪽을 찬양하는 말을 장소(章疏) 사이에 쓰다니, 이 또한 세도(世道)의 일대 변괴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정말 너무도 경악할 일로서 조정에 수치를 끼쳤다고 말할 만하다. 그런데 그 상소의 말을 보건대 전혀 요점이 없이 지껄인 것이었으니 또한 깊이 책망할 가치도 없다 하겠다."
하였다.
정언 홍수호(洪受浩)가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정언 신약추(申若樞)가 올린 패려스러운 소의 내용을 듣건대, 원소(原疏)는 비록 보지 못했습니다만 대체로 그가 주장한 것이 양심을 가진 자로서는 감히 결코 내놓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 원통한 마음을 못내 품고 있는 것[含冤忍痛]이야 말로 《춘추(春秋)》에서 말하는 존양(尊攘)의 대의이고, 제사터를 설치하여 복을 구하는 것은 국조(國朝)의 의문(儀文)에 비추어 의논할 성질의 것이 아닌데, 그만 감히 저쪽을 칭송하는 말과 명산에 봉선(封禪)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상소문에 올렸으니, 의리가 어두워지고 인심이 몰락한 것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극도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변방으로 내쫓는 전형(典刑)을 시행하시어 같은 나라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을 보여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신약추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신약추를 벽동군(碧潼郡)으로 유배하라."
하였다.
정대용(鄭大容)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가 뒤이어 체차하고 이시원(李始源)을 대신 임명하였다. 공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을 발탁하여 1품으로 직질(職秩)을 올린 뒤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삼았다.
함경도 관찰사 이집두(李集斗)가, 북관(北關)의 유학(幼學) 이원배(李元培)가 삼경(三經)·《춘추(春秋)》·삼례(三禮)·사서(四書)의 내용과 관련하여 직접 조목별로 물어본 것에 대해 대답한 것을 올리니, 하교하기를,
"대답한 것을 보니 분석한 것이 정밀하고 의리에 어긋남이 없다. 지난번 공령문(功令文)239) 을 보니 가작(佳作)이 많았다마는 그래도 경학(經學)에 침잠한 선비가 바로 이렇듯 멀리 떨어진 변방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의 포부야말로 일부만 엿보아도 전체를 알 수 있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싶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를 군직(軍職)에 부치게 하고 관에서 식량과 말[馬]을 지급하여 길을 떠나보내게 하라."
하였다.
8월 9일 경자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8월 12일 계묘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다시 신약추(申若樞)의 상소를 보건대, 그중에 나오는 반사(班師)의 설은 더욱 해괴 망칙하였는데, 한 마디로 꾸짖을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다만 꾸짖을 가치도 없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완강하게 나오는 자가 한 것보다 심각한 점이 있으니 세도(世道)에 대한 걱정이 정말 보통이 아니다. 대체로 우리 나라는 본래부터 존양(尊攘)의 대의를 지켜 왔는데 지금은 의리가 점점 어두워지고 윤리가 날로 무너진 나머지 그만 신약추와 같은 주장이 나오게까지 되었으니 춥고 떨리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따라서 지금 세상에서는 의리를 붙들어 일으키는 작업을 가일층 진행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존주록(尊周錄)》을 편집하게 한 것도 본래 은미한 뜻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편집을 담당하고 있는 여러 신하들은 모쪼록 속히 일을 끝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각도(各道)에 유고(留庫)240) 토록 하는 법령이 모두 무시된 채 시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런 흉년을 당할 때마다 미리 대처하며 손쓸 방도가 없다. 어떤 이는 곡식을 다른 지역에서 운반해 오자고 청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곡식을 무역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이렇게 하다가 요청한 대로 되지 않을 경우 끝에 가서 뿔뿔이 흩어지면서 보전되지 못하는 것은 백성뿐이니 어찌 애달프지 아니한가.
이 뒤로는 묘당에서 법 규정을 만들어 각도에 수만 석(石)씩 한정을 하여 유고토록 하고, 부득이 가분(加分)241) 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유고된 곡식은 감히 멋대로 범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며, 또 혹 장계를 올려 가분을 청하더라도 묘당이 굳건하게 법 규정을 지키며 난색을 표함으로써 유고시킨 본래의 법의 의도를 상기시켜야 할 것이니, 이런 식으로 절목(節目)을 작성하여 하나는 비국에 비치하고 하나는 각도에 보내어 바꿀 수 없는 법전을 만든다면 미리 대처하는 방도로서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리라 여겨지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요긴한 방책이 될 것입니다. 환곡(還穀)을 나누어 줄 때 인구를 계산해서 적절히 지급하는 옛 법이 본래 있는데 반절만 나누어 준다면 저절로 유고되는 곡식이 있을 것입니다. 성상의 분부가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최근 분류안(分留案)242) 을 보건대, 기유년 미곡을 무역한 조목에 이미 호조곡(戶曹穀)이라고 해놓고서 ‘모두 나누어 준 뒤 모곡(耗穀)을 받아들였다.’고 주(註)를 달아놓은 것이 크게 눈에 거슬렸다. 상평청(常平廳)이나 진휼청(賑恤廳)이라면 혹 곡식값이 싸고 비쌀 때 사고 팔 수도 있겠지만 호조에서 어떻게 곡식을 모조리 나누어 줄 수가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비국이 맡아 다스리는 곡식으로 주를 달도록 하라."
하였다.
금위영(禁衛營) 군사로 상번(上番)하는 일을 정지시켰다. 이에 앞서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
"금위영 군사로 상번하는 일을 정지시키는 것은 본조의 재정 형편 때문만이 아니고 흉년을 당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실로 백성을 위하는 길이 또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조의 형편으로 보나 외방 고을의 민정(民情)으로 보나 양쪽 모두 편하면 편했지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니 내년 가을까지 상번하는 일을 정지시키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교리 한치응(韓致應)이 상소하기를,
"신약추(申若樞)의 소가 나왔는데 그야말로 이른바 천하의 변괴스러운 요소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명산에 친히 봉선(封禪)을 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다니 이는 참으로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로서 너무나 사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하여 먹물을 찍어 논열(論列)하면서 심지어 저쪽을 찬양하는 말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 된 이야기입니까. 그와 같은 패륜아는 의관(衣冠)을 더럽히고 대각(臺閣)을 욕되게 함은 물론 말할 여지 없이 사람축에도 끼이지 못한다 할 것이니 대신(臺臣)이 그를 먼 변방에 내쳐야 한다고 청한 것은 실로 공의(公議)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배소(配所)인 벽동군(碧潼郡)은 본래 환경이 좋은 곳인 만큼 나라 안에서 함께 살지 못하게 한다는 뜻에 이미 어긋나고 있다 할 것입니다. 게다가 저쪽 지역과는 단지 허리띠 하나 정도의 강물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므로 상고(商賈)와 선박이 보통으로 오고 가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과 서로 말을 주고받는 폐단이 옛날부터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그가 비록 스스로 유배당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지한 변방 백성들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즈음에, 그가 무슨 죄로 이 지역에 유배당하게 되었는지 말이 미치게 되면 장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어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배소를 양남(兩南) 절해(絶海)의 지역으로 옮겨 정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먼 변방으로 내쫓는 것은 한가지인데 어찌 꼭 남쪽으로 보낸 뒤에야 엄하게 하는 것이겠는가. 서쪽으로 보내는 것은 엄한 조처가 아니란 말인가."
하였다.
8월 13일 갑진
박종갑(朴宗甲)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8월 14일 을사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태묘(太廟)·제릉(諸陵)·전궁(殿宮)·원묘(園墓)의 추석 향축(香祝)을 지송(祗送)하였다.
이문원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팔도(八道)와 사도(四都)243) 에 신칙, 그 지방의 토질에 맞는 대파곡(代播穀)을 각 고을마다 미리 조적(糶糴)해 둠으로써 장래의 수요에 대비토록 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의 의논에 따른 것이었다.
8월 15일 병오
선원전(璿源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8월 16일 정미
수찬 홍락유(洪樂游)가 상소하기를,
"매년 절사(節使)의 행차가 있을 때마다 쇄마(刷馬)244) 를 몰고 가는 사람의 숫자가 과다한데 모두 무질서하게 무뢰배들을 모아 구차하게 충원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폐단이 극심합니다. 그리고 갔다가 오는 동안의 노자가 족히 은자(銀子)로 9백 50여 냥이나 되는데 비상금에서 꾸어다 쓰고는 돌아 온 뒤에 꼭 친족에게서 징수하게끔 하니 어찌 크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모두 일체 혁파해버리고, 책문(柵門)245) 안에서 수레를 빌려서 싣고 가게 한다면 큰 수레 5, 6량(輛)을 빌리는 값이 많아야 3, 4백 량을 넘지 않는데, 말 대신 수레를 이용할 경우 멀리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말을 모는 사람들에 따르는 폐단도 자연히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명색은 말을 몬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상고(商賈)와 매매하기 위해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금법(禁法)을 범하면서 간사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또한 이들에게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욕심대로 인원 전체를 혁파해 버린다면 상고(商賈)가 들어갈 자리가 없을 것이니 이 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원의 반 정도를 감축하여 짐을 수레로 나르게 하고 그 반절 정도의 숫자만 허락해 장사하는 길을 열어주도록 한다면 이 또한 폐단을 없애고 간사한 행동을 막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세폐용(歲幣用) 방물(方物)을 의주(義州)에서 책문까지 실어나를 즈음에 모두 전세낸 말[馬]을 쓰기 때문에 그 수가 1백 80여 태(馱)나 되는데, 거기에 주방(廚房)의 복물(卜物)과 상고(商賈)의 복물까지 합치면 거의 1천여 태에 이르고 있으니, 변문(邊門)의 중지(重地)에서 혼잡스럽게 요란을 떠는 것으로 이보다 더 심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책문 밖의 길로 수레를 충분히 운행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강(中江)에 개시(開市)할 때 보면 저쪽 사람들 모두가 수레를 이용해 왕래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말을 전세내어 방물을 싣고 가는 돈으로 수레를 만들어 비치하고 해마다 이를 이용해 싣고 간다면 낭비도 없애고 혼잡스럽게 되는 폐단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일찍이 보건대,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온 뒤에 상소하여 사신 행차 때에는 수레를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극력 주장했었습니다. 만약 의주 부윤으로 하여금 저쪽의 수레를 사오게 한 뒤 그 제도와 모양을 본떠 수레를 다량 제조하고 그것을 이용해 싣고 가게끔 한다면 수레를 빌리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더러 싣고 가는 면에 있어서도 지극히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복계(覆啓)하기를,
"쇄마를 몰고 가는 사람들의 폐단에 대해서는 그 동안 사명(使命)을 받든 자들 모두가 말을 하였습니다. 이번에 또 주방(廚房)과 쇄마(刷馬)를 모두 일체 혁파하고 수레를 전세내어 싣고 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만, 사실은 실행이 불가능한 면이 있습니다. 대개 연전에 적당히 감축한 뒤에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수레를 빌린 적이 있었는데, 늦게 가고 빨리 가는 권한이 저쪽 사람들의 손에 있어 제때에 수요를 맞추려 해도 번번이 낭패를 보기 일쑤였고, 싣고 가는 물건이 분실되지 않으면 망가지는데도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으며, 수레 값을 점점 올려도 어떻게 저지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모조리 수레를 전세낸 뒤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비장(裨將)이나 역관(譯官)들의 복물(卜物)을 싣고 가는 쇄마나 개인 소지품을 싣고 가는 말을 이야기하더라도 가만히 사정을 살펴 보면 이해가 갑니다. 즉 어떤 때는 3, 4인이 한 동아리가 되고 어떤 때는 5, 6인이 한 동아리가 되는데, 숙참(宿站)에서 집을 찾아 취사(炊事)를 하고 길에서 메거나 이어야 할 보따리들을 모두 이 말들 덕분에 손쓸 수가 있으니, 상고(商賈)가 그 명색(名色)을 산다는 측면에서만 볼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반절로 감축한다면 필시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괴롭게 되는 일만 많아질 것입니다.
대저 사람과 말을 많이 이끌고 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먼 여행길에 간편한 방법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풍속이 각각 다른 만큼 우리가 이만한 인원을 대동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나 저쪽에서 이만한 인원을 접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니 강제로 감축시켜서는 안될 듯합니다. 그리고 의주에서 지급하는 노자나 저쪽 지역에서 지급하는 시초(柴草) 또한 감하든 감하지 않든 간에 그 수량은 본래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변방 백성들이 그것을 일상적인 업무로 간주하고 반 년 동안 입에 풀칠한다해서 또한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비상금을 빌려 쓴 나머지 인족(隣族)이 억울하게 보상해야 하는 폐단이 과연 없지 않습니다만, 만약 의주에서 점검하여 보낼 때에 각각 인족으로 하여금 그가 착실한지의 여부를 확인하게 한 뒤에 보낸다면 이 폐단은 저절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수레를 마련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말이 용도에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저쪽 사람들의 큰 수레를 보면 반드시 건장한 말 6, 7필을 쓰면서 한 사람이 부리고 있는데 우리 나라 말이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습니까. 또 수레를 모는 법을 보건대 말 한 마리를 한 사람이 부린다 해도 언제고 넘어질 걱정이 항상 따르는데 의주에서 책문까지 걸핏하면 4, 5일이 걸리곤 하는 상황에서 세폐용 방물이 물에 젖거나 훼손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또한 할 수가 없으니, 이 일은 쇄마(刷馬)를 이용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갑작스럽게 의논할 수가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8월 17일 무신
포도 대장 서유대(徐有大)를 파직시켰는데, 야금(夜禁)을 단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대현(申大顯)을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장신(將臣)을 어떤 직책에 의망(擬望)할 때는 일체 장신의 임명 순서에 따라 하여 옛 규정을 다시 밝히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을 양국(兩局)의 망(望)에 들이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결국 그 임무를 전일하게 수행하도록 하는 뜻이 못되는 것이다. 장수의 경우도 대체로 그렇다 할 것이나 일단 일정한 규정이 없는 상태이고 보면 그 경우는 서로들 의망한다 해도 원래 안될 것이 없다. 그러나 장신의 직책은 정승의 그것에 버금가는 것인 만큼 일체 장신의 임명 순서에 따라야 하는데, 아경(亞卿)을 정경(正卿)보다 먼저 의망하고 1품(品)은 종2품으로 낮추어 의망하는 것이 본래 예로부터 내려오는 바뀔 수 없는 규정이니, 이 뜻을 묘당에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8일 기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장신(將臣)의 의망(擬望)을 전도되게 하였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스스로 인구(引咎)하니, 비답하기를,
"오위(五衛)의 제도가 폐지되어 군영(軍營)이 임시로 설치된 아문이 되고 장신의 자리가 실직(實職)이 되지 못하면서 그 체모가 오히려 대장패(大將牌)와 전령패(傳令牌)를 찬 포장(捕將)이나 기록관(寄祿官)인 금군(禁軍) 별장(別將)보다도 가볍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의(注擬)할 때에는 삼국(三局)이 반드시 제배(除拜)하는 순서를 준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총수(摠帥)의 경우 혹 시임(時任) 훈장(訓將)을 발탁할 수도 있겠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어떤 때는 놔두고 어떤 때는 발탁하며 전도되게 바꾸는 잘못된 예가 문득 관례처럼 되어 버렸기에, 내가 어제 묘당에 칙유(飭諭)하여 옛날의 정상적인 규정을 따르도록 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8월 19일 경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배봉진(拜峰鎭)을 사복시에 속하게 하였다. 사복시가 아뢰기를,
"전곶(箭串) 목장에서 방목하는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데 본시(本寺)에 속한 초장(草場)이 매우 좁기 때문에 무더운 절기를 맞을 때마다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6 궁(宮)의 초장이 같은 구역 내에 있는데도 소속이 각기 달라 공동으로 방목해 기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본시의 판관(判官)이 가서 머물며 일을 살피게 한 것이 비록 한때의 임기응변에서 나온 정사(政事)라고는 하나 결코 오래 행할 방법이 못됩니다. 지형을 참작하거나 사세를 헤아려 보건대 배봉진의 진장(鎭將)이 겸관(兼管)케 하는 것보다는 못할 텐데, 그렇게 할 경우에도 자급(資級)이나 경력을 헤아려 엄선하지 않는다면 제압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장용영(壯勇營)의 당상 무신 중에서 자급이 높고 경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골라 차출하되, 관명(官名)은 배봉 별장의 칭호를 부여하고, 삼망(三望)을 갖춰 입계해서 낙점(落點)을 받게 한 뒤 다시 병조에서 겸내승(兼內乘)으로 입계하여 결재를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뒤에는 본시가 담당해 온 둔전(屯田)의 일은 별로 본시와는 관계가 없게 되니 그 토지를 구역 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동시에 고기비늘처럼 대오를 편성하여 본진(本鎭)의 아병(牙兵)으로 소속시키고 목자(牧子) 등의 일도 본진으로 하여금 겸관하여 거행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군제(軍制)나 마정(馬政) 모두 온당함을 얻게 됨은 물론 옛사람이 말한 ‘병(兵)을 농(農)에 붙인다.’는 뜻도 겸비하게 될 것입니다. 기타 거행해야 할 조건들은 겸내승이 차출된 뒤에 다시 잘 의논해서 하나하나 조목별로 나열해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지평 박효성(朴孝成)이 상소하기를,
"삼남(三南)에서 재해를 입은 것이 똑같은 만큼 구제책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도 차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호서(湖西)는 진휼곡(賑恤穀)을 약간 배정해 준 것이 있는 데 반하여 호남(湖南)의 경우는 대여해 달라고 요청한 돈이 혹 저지되기도 하고 영남(嶺南)의 경우는 아예 흉년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고 있는데, 방백이 태연히 재해를 입은 사실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묘당의 의논이 너무나 신중하기 때문입니까.
그리고 경사(京師)야말로 팔로(八路)의 근본이 되는 곳으로서 공가(公家)의 조부(租賦)나 사실(私室)의 의식(衣食)을 모두 전적으로 외방에서 수송해 오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금 각도(各道)가 모두 흉년이 들었으니 우리 애달픈 백성들을 장차 어떻게 구해낸단 말입니까. 이들을 어여삐 여겨 보살피는 일 역시 삼남보다 뒤에 두면 안될 것인데 아직도 낭묘(廊廟)의 신하가 방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어 생각건대 곡식을 허비하는 것으로는 술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한 동이의 술을 담그는 곡식으로 열 집의 며칠 간 양식을 충분히 댈 수가 있고 잔칫집에서 취하게 마시고 보면 중인(中人)의 한 해 소득은 후딱 날아가버리게 마련입니다. 권세가에서 흥청 망청 놀고 노름꾼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마셔대는 양이 밑빠진 독에 물 붓듯하다고 할 것인데 진정 집집마다 술을 빚지 못하게 하고 사람마다 술 마시는 일을 끊게 한다면 팔로(八路)에서 1년 안에 얻을 수 있는 곡식이 수만 석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의 행불행은 실로 수령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강명(剛明)한 자세를 갖추고 어진 정사를 행할 수 있는 재질의 소유자가 아니면 아전들의 간사한 행동을 막기 어려워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지 못하게 될 것이니 아무리 위에서 인정(仁政)을 베푼다 하더라도 아래에서는 실제로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전일의 모내기를 예로 들어 말한다 하더라도 정말 백성을 여지없이 함정에 빠뜨린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모내기를 할 만한 비가 너무 늦게 와 장차 중복(中伏)이 되려고 하였으므로 입 가진 자는 모두 한 목소리로 모내기 할 시기가 지났다고 말했는데도 그 고을 수령들이 그저 권농(勸農)했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안달한 나머지 백성을 윽박질러 강제로 모를 심게 하면서 매를 때리기까지 하는 등 인력과 재물을 허비함은 물론 민간이 소요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대신 파종(播種)한 다른 곡식의 싹이 거의 나왔는데도 오히려 갈아 엎고 물을 대게 한 뒤 일제히 모를 심게 하였는데 가을철이 반이나 지난 지금 아직도 이삭이 패지 않고 있습니다. 대저 전토(田土)가 모두 자기들의 것인 만큼 진정 조금이라도 결실을 맺을 희망이 있었다면 스스로 알아서 힘을 썼지 어찌 매를 때릴 때까지 기다렸겠습니까. 그래서 혹은 ‘지금 강제로 모를 심게 한 것은 뒷날 세금을 징수할 구실을 삼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민정(民情)이 야박하다고 말할지도 모르나 그것은 관장(官長)이 된 자가 자초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초 다른 곡식으로 대신 파종하라고 하면서 세금을 면제해 주기로 허락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조정에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령이 거행한 것을 보면 이처럼 상반되기만 하니 성상의 뜻을 드러내 밝혔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날 재해를 나누어 준 수령은 바로 저번에 억지로 모를 심게 한 수령이라 할 것이니, 그들이 허실(虛實)을 속속들이 밝혀 균형감각을 가지고 정밀하게 처리했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각도의 도신(道臣)에게 엄히 신칙하여 만약 대중이 공통적으로 아는 바 탐욕스럽고 일을 혼란스럽게 처리한 수령이 있거든 갑인년에 이미 행했던 전례에 따라 근무 성적을 고과(考課)할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계문(啓聞)하여 논죄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영남에서 근무 성적을 고과한 것을 보면 하(下)에 속한 자가 하나도 없으니 고과를 엄하게 해야 하는 뜻이 전혀 없다고 할 것인데, 전조(銓曹)에서 오르고 내린 것을 보면 또 관례적으로 파직을 청한 자까지 잉임(仍任)시키고 있습니다. 성적을 고과하는 법이 없다면 모르지만 있는 이상에는 결코 이렇게 해서는 안될 것이니, 속히 관례대로 개차(改差)하게 함으로써 출척(黜陟)하는 법이 엄해지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성균관에서 공부만 하던 유생 출신인데도 백성의 일을 가지고 장황하게 말을 하며 조언을 구하려는 나의 뜻에 그런 대로 부응하였으니 자못 가상하다. 흉년이 든 해를 어찌 다 셀 수 있겠는가마는 올해의 경우는 몇 달 동안 가뭄이 들고 열흘이 넘게 바람이 부는 등 재해가 잇따라 발생하고 겹쳐 일어나 자못 처음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기아선상의 막다른 길목에 처한 백성들을 구제할 계책이 쉽게 마련되지 않아 밤낮으로 걱정하고 애태우느라 편안히 쉴 여가가 없다.
다만 더욱 관심을 표명하고 싶은 것은 그대가 덧붙여 진달한 바 주금(洒禁)에 관한 한 조목이다. 술은 제사 때에나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힘껏 농사를 지어 서직(黍稷)을 풍성하게 가꾸고, 여가가 있으면 또 민첩하게 우마차를 끌고 멀리 나가 장사를 해서 부모를 봉양하고, 그렇게 해서 부모가 행복해지게 되면 정결하고 풍성하게 음식을 장만하면서 술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 보건대 지금 농부들은 불민한 탓으로 농사마저도 잘못 짓고 있는데 공력을 들이지 않아 농사를 망치는 것이 철따라 발생하는 재해보다도 더욱 심하니 제사 때 쓰는 술 이외에는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술까지도 모두 일정한 기간 동안 쓰지 못하게 하는 일을 진정 그만둘 수가 없다.
그러나 일단 명령을 하면 행해져야 하는데 만에 하나라도 유사(攸司)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나머지 형식만 남고 내용이 없게 되면 백성을 동요시킬 따름이다. 흉년의 큰 폐단은 첫째도 백성을 동요시키는 일이요 둘째도 백성을 동요시키는 일로서 동요시키는 것보다 큰 폐단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생각건대 지금 기강이 확립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기강의 확립 여부를 살펴보고나서 주금(洒禁)을 실시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만약 현재의 기강으로 볼 때 그래도 명령이 행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 편의(便宜) 여부에 대해 한 번 더 상소하여 진달하도록 하라.
다른 곡식을 대신 파종하라고 명을 내릴 때 세금을 견감(蠲減)해 주도록 동시에 허락한 것은 고심(苦心)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대의 소를 보건대, 이미 파종했는데도 도로 갈아 엎고 강제로 다시 모를 심도록 하는가 하면 또 매질하며 일을 하게 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정말 무슨 심보란 말인가. 어느 도의 어느 고을이 이처럼 형편없이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오늘날 재해를 나누어 준 수령은 바로 전에 억지로 모를 심게 한 수령이니 균형감각을 갖고 정밀하게 일을 추진하도록 그들에게 요구하기는 어렵다.’고 한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다. ‘갑인년에 이미 행한 예에 따라 대중이 공통적으로 아는 바 탐욕스럽고 어수선하게 일을 처리한 수령에 대해서는 고과를 기다릴 것 없이 계문하여 논죄케 하라.’고 청한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리고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특별히 삼남(三南)의 방백에게 엄히 신칙하여 대리(大吏)를 두려워하거나 혐의에 구애받지 말고서 즉각 장계로 보고하게 하고, 주저하며 구습(舊習)을 버리지 못하는 자가 있거든 묘당이 규찰하여 논죄토록 하라.
그리고 ‘영남에서 고과를 하면서 「전조가 올리고 내릴 때 파직시키라.」고 청한 자는 잉임(仍任)시키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이 일은 단지 제목(題目)246) 을 가지고 종류별로 모아 살펴 보더라도 취사(取捨)한 것마저 타당하지 못하니, 요행히 누락되어 더욱 두려워할줄 모르게 되도록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같이 죄를 준 뒤 스스로 새롭게 되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한성부에 신칙하여, 주인이 없어 장사를 못지낸 시체들을 거두어 매장하게 하였다.
8월 20일 신해
지평 박효성(朴孝成)이 상소하여 또 주금(洒禁)을 행하는 것이 타당하겠다고 아뢰니, 비답하기를,
"기강이 확립되지 못했다고 내가 알고 있는데 그대 역시 딱 잘라서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확립되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도 주금의 명령이 행해지리라고 믿는다면 연(燕)나라 수레를 타고 월(越)나라 땅으로 건너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빈대(賓對)하는 일을 내일 열어 와서 모이도록 하였으니 그대도 따라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1일 임자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선릉(宣陵)의 향축(香祝)을 지송(祗送)하였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금(洒禁)에 관한 일로 대간이 소를 올려 진달하였다. 빈대하는 날을 오늘로 앞당겨 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영이 행해져서 금지될지 그리고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을 방도가 있을지에 대해서 경들은 충분히 강구해 보았는가?"
하니, 우의정 이병모(李秉模) 등이 아뢰기를,
"주금은 본래 법 조문에 실려 있는데 혹 흉년이 들면 별도로 단속해 금지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이는 국조(國朝)에서 이미 통상적으로 행해 본 법이기도 한데 몇 해 전에 경조(京兆)247) 의 당상관이 법 정신을 살려 금지시켰을 때에도 제대로 효과를 거두었었습니다. 신은 영이 행해지지 않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하는데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을 방법도 어찌 없기야 하겠습니까."
하고, 여러 재신(宰臣) 및 대간·옥당도 모두 금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아뢰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우(禹)임금은 대성인이시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단지 의적(儀狄)248) 을 멀리 하시기만 하여 천고(千古)에 술을 마시며 곡식을 허비하는 폐해를 끼치셨겠는가.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으려고 조금 빚어서 마시는 것만 약간 금하기로 한다면 강명(剛明)한 법관(法官)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큰 일에 있어서까지 술을 못쓰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소로운 일로서 조금 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할 일이 못된다 하겠다."
하였다.
김지묵(金持默)을 총융사(摠戎使)로, 조상진(趙尙鎭)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병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대가(大駕)를 수행하는 신하들의 복장을 보건대, 원(園)에 행차하실 경우 위내(衛內)의 인사는 군복(軍服)을 착용하고 동반(東班)·서반(西班)은 융복(戎服)을 착용하며, 능(陵)에 행차하실 경우에는 위내와 위외(衛外) 인사 모두 융복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대가를 수행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복장 착용에 여태 일정한 법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이번부터 시작해서 정식(定式)을 삼도록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대신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동·서반은 위내의 사람들과는 다른 만큼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융복을 착용케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8월 22일 계축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전경 문신(專經文臣)·전경 무신·일차 유생(日次儒生)·도기 유생(到記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고, 서총대(瑞蔥臺)에 거둥하여 금군(禁軍)의 추등(秋等)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유학(幼學) 안이정(安以鼎)이 도기 유생 중에서 수석을 차지하자 직부전시(直赴殿試)를 허락하였다.
권유(權裕)를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8월 23일 갑인
하교하였다.
"이번에 행행(行幸)할 때 태묘(太廟)의 동구(洞口)를 거침으로써 밖에 나갈 때는 보고드리는 뜻을 부치고 싶다. 이는 연전에 환조(桓祖)의 탄강(誕降) 구갑(舊甲)을 맞아 본궁(本宮)에서 제사드릴 때 향축(香祝)을 수행(隨行)해 태묘 동구에 이르렀었던 뜻과 같은 것이다. 그날 태묘의 문에 자물쇠를 걸기 전에 도승지가 먼저 가서 봉심(奉審)한 뒤 자물쇠를 잠그지 말고 복명(復命)했다가 동구를 지나고나면 자물쇠를 걸도록 하라."
승지 홍의호(洪義浩)가 아뢰기를,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삭제(朔祭) 때 쓸 향축(香祝)을 전하는 일이 출궁(出宮)하신 뒤에 있을 예정이니, 궁을 지키는 가승지(假承旨) 두 사람을 차출하여 향축을 전하고 봉심한 뒤 행재소(行在所)에 계문(啓聞)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24일 을묘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가 죽었다.
김이소의 자(字)는 백안(伯安)이고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이다. 영종(英宗) 갑신년에 충량과(忠良科)로 등제(登第)하였는데 상의 총애가 극진하였으며 관직을 두루 거쳐 호조와 양전(兩銓)249) 의 판서에 이르렀고 임자년에 정승이 되었다. 질박 정직하고 확고 부동하여 옳은 것을 보면 굳게 지키면서 흔들림이 없었으므로 재유(才猷)와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없었어도 위에서 의지하며 늘 중하게 여겼다. 그의 동생이 홍락순(洪樂純)의 사위가 되었는데, 홍락순이 죄로 쫓겨날 적에 온 조정이 성토(聲討)하였으나 그만은 도헌(都憲)250) 으로 있으면서 의리상 인피(引避)하며 사직하니 상이 늘 그의 돈독한 우애심을 칭찬하였다.
김이소의 병이 위독해지자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자, 하교하기를,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갑자기 듣고 보니 참말이 아닌 것처럼 의심되기만 한다. 놀랍고 가슴 아픈 심정을 어떻게 말로 하랴. 확고 부동하게 지키는 바가 있어 모습만 보아도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를 따르고 의지한 것이 과연 어떠했던가. 연전에 한번 겪어보고는 바로 경탄하였는데, 더구나 고가(古家) 교목(喬木)의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지니 더욱 심회를 금할 수가 없다."
하고, 이어 조문·제사·장례·시호(諡號)와 녹봉을 지급하고 고자(孤子)를 녹차(錄差)하는 등의 일을 모두 관례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8월 26일 정사
헌납 임장원(任長源)이 상소하기를,
"신이 어리석으나마 나름대로 생각건대, 흉년도 걱정할 것이 못되고 재이(災異)도 신경쓸 일이 못되며 오직 사람의 마음이 무너져 타락한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가장 큰 걱정거리라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본원(本原)이 일단 없어지고나면 나머지 일들이야 알만하기 때문입니다.
대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보편적 정서라 할 것인데 이 시대의 사람들은 선악을 분별 못한 채 혼동하고 있고, 음(陰)을 억누르고 양(陽)을 북돋우는 것이 군자가 행해야 할 정론이라 할 것인데 이 시대의 선비들은 음양을 구별하지 못한 채 뒤섞어놓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절의(節義)라는 한 조목이 세상으로부터 기피 대상이 되어 있고 풍천(風泉)251) 이라는 두 글자를 어디에서고 들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간혹 하나나 반 개쯤 이러한 경계에 어렴풋이 방물한 것이 나오기라도 하면 번번이 무리를 지어 배척하고 떼거지로 떠들면서 광망(狂妄)하고 기괴한 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세(大勢)에 압도당하여 모두들 바람에 쓸리듯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시골에 있을 때는 교언 영색(巧言令色)으로 의표(儀表)를 삼고 조정에 서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을 규구(規矩)로 삼고 있는데도 온 세상이 모두 그러하여 어떻게 구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아는 것이라곤 이욕(利慾)이요 바라는 것은 요행뿐으로서 평소 역린(逆鱗)을 건드리며 용안(龍顔)을 범하는 신하가 이미 없게 되었으니, 뒷날 절의에 몸바쳐 죽는 인사가 어떻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5년 동안 집에 있으면서 터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초봄에 역마(驛馬)를 타고 출발하였는데 그때 길에서 본 소감을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치고 어느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역부(驛夫)는 피곤하고 고달픈 기색이 역력하였고 관예(官隷)에게서는 간악한 모습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가도 드물어 아주 적었고 10에 7, 8은 도망가거나 이사를 하였는데 천 마리의 메추라기와 백 마리의 고니떼들이 이동하듯 그 나그네 행색이 처량하기만 하였습니다. 이 모두는 성대(聖代)의 온화한 기상이 못되는 것으로서 반쯤은 쇠세(衰世)의 쓸쓸한 기색이 엿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화성(華城)에 접어들면서는 황홀하게도 천하의 위대한 경관(景觀)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산천이 빛을 다투고 초목이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었으며 으리으리한 누대(樓臺)와 장엄한 성곽(城郭)도 귀신이 역사(役事)를 하지 않았으면 하늘이 만들어 준 것만 같았는데, 민력(民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아랫사람의 재물을 축내지도 않고서 천고(千古)에 뛰어나게 웅대한 규모를 과시하는 이 모든 것이 영원히 사모하는 우리 성상의 인충(仁衷)한 덕성에서 우러나와 만들어진 것이고 보면, 온갖 꽃 만발한 봄 동산이 모두 화공(化工)의 원유(園囿)요 일만 강에 비친 달도 태극(太極)의 권점(圈點) 아닌 것이 없다 할 것입니다. 이는 비단 ‘천하를 위하여 그 일을 검박(儉朴)하게 하지 않는다.’252) 는 말로만 그칠 성격의 것이 아니니, 성민의 효심이 훌륭하다 하겠는데, 그래서 효를 행하는 의리에 대해서는 도(道)를 아는 자와만 비로소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귀신들이 꽉 차게 늘어 서 있는데 어찌 감히 아첨을 하겠으며 어찌 감히 과장되게 찬사를 늘어놓겠습니까.
신이 그날 아침에 본성(本城)에 들어갔다가 낮에 장안문(長安門)을 나와서는 세 걸음 걷다가 뒤돌아 보고 다섯 걸음에 고삐를 돌리면서 꿈틀꿈틀 기어가듯 차마 떠나지를 못하다가 밤에 지지대(遲遲臺) 아래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사방 벽을 빙빙 돌며 배회하면서 한편으로는 흠앙하고 한편으로는 탄식을 하는 동안 잇따라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으니, 슬프게 한 일도 없는데 괜히 슬퍼진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날의 일을 두고 말한 것인 듯싶습니다.
무릇 천하에 지극히 드문 일을 보게 되면 의리(義理)의 소이연(所以然)을 따져보게 마련인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신이 그날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홀연히 두려운 생각이 저절로 들어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이것이 매우 성대한 일이긴 하나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 순(舜)임금을 창오(蒼梧)에 장사지냄에 코끼리가 밭을 갈고 농부는 하던 일을 바꾸지 않았으며, 우(禹)임금을 회계(會稽)에 장사지냄에 새들이 김을 매고 시장에서는 계속 장사가 진행되었다. 지금 이 화성에 장사지낸 것을 보건대 장사지낸 자도 성인이요 그 대상이 된 자도 성인인데 성인의 장사는 귀신이 옹호해 주는 법이다. 따라서 도성의 영역밖에 있다 하더라도 그냥 초목이 무성한 대로 놔두면 될 뿐이니 열성(列聖)의 선침(仙寢)도 이를 헤아려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생각건대 이 20리 밖 본주(本州)의 행정 소재지에 제도를 웅장하게 하여 공사를 벌인 것이 도대체 상징물을 설치하여 융슝하게 하는 인정(人情)과 예문(禮文) 상에 또한 무슨 보탬이 된다 하겠는가. 일단 영왕(寧王)253) 의 유지(遺志)에도 있는 것이 아니고 보면 주 성왕(周成王)의 낙읍(洛邑)254) 에 견줄 수도 없는 일이고 또 태상(太上)이 어떤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보면 한 고조(漢高祖)의 신풍(新豊)255) 의 예를 원용(援用)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렇듯 백성이 궁하고 재정이 고갈된 때를 당하여 이처럼 해를 넘기며 나라를 동요시키는 일을 하다니 이것은 어쩌면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효심은 늘 하늘에 가득하고 땅에 서리어 앞에 참여되고 멍에에 기대듯256) 하게 된 나머지 오직 효도할 일만 보일 따름이지 그밖의 일은 보이지 않는다 할 것이니, 아, 백 세대 천 세대 뒤에 분명히 인인(仁人) 군자가 나와 우리 성상의 마음을 알고 우리 성상의 일을 슬퍼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先) 세자저하(世子邸下)께서는 학문이 깊고 계책이 광대하셨음은 물론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을 갖추셨는데 성상을 탄생시키시어 뒷날의 복록이 무궁하게 되셨으므로 백성들이 하늘과 땅처럼 흠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지(天地)에 대한 예(禮)는 작게 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천지를 섬김에 있어서는 오직 내심(內心)으로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저 천지가 덕을 베풀어 내놓는 것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넓은 만큼 완전히 이에 걸맞게 보답하려면 천하의 물건을 다 동원하고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극진히 한다 하더라도 그 성대한 덕에 맞게 보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차라리 요약해서 간단히 하고 축약해서 작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壇)을 쌓지 않고 맨 땅에 하며 옥 그릇을 쓰지 않고 흙 그릇으로 하며 태뢰(太牢)로 하지 않고 특생(特牲)으로만 하여, 지극히 사랑스러운 것은 형용할 수 없고 지극히 공경스러운 것은 수식할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작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예의 소이연인 것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헤아려 보건대 지금 이렇듯 규모를 장대하게 한 것이 혹 예에 지나치지는 않겠습니까. 신이 성의 공사를 일으킨 뒤에 지금 처음으로 와서 보게 되었는데 일단 보고 느낀 바가 있는 이상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성상께서는 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그 충정을 살펴 주소서.
아, 오늘날 조정을 보건대 충(忠)과 역(逆)이 구분되지 않고 의리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추악한 무리들이 근절될 기약이 없고 엄한 법을 펼쳐 행할 수 있는 날이 없게 되었기 때문에 공의(公議)가 답답해하고 여정(輿情)이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요즘의 소위 사학(邪學)이라는 것을 보더라도 이 역시 천지의 대역(大逆)이요 고금의 대악(大惡)이라 할 것입니다. 그 죄악을 말할 것 같으면 사(邪)라는 글자 하나로 대변할 수가 없고 학(學)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도 근사하지가 않으니 사학이라고 이름한다면 결코 지언자(知言者)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무리들은 오로지 재물을 불리며 음란한 지경에 빠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니 단지 도적일 뿐이며 금수일 뿐입니다. 그러니 도적에게 무슨 사(邪)라는 글자를 붙여줄 것이며 금수에게 무슨 학(學)이라는 글자를 해당시키겠습니까.
그런데 이 무리들이 세상에 가득차고 그 도당이 마구 불어나고 있고 보면, 어찌 이 양류(洋流)를 하찮은 하루살이나 얕은 도랑물처럼 여겨 소홀히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강대한 외적이 국경에 진출하여 진(陣)을 범해 온 것처럼 여겨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고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다스려야 할 것인데, 오히려 그만 윤지충(尹持忠)의 무리가 법에 복주(伏誅)된 뒤로는 모두 치지 도외한 채 스스로 깨달아 바른 길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 속에 들어가면 금수가 되어버리고마니 사람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이치상으로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는 이존창(李存昌) 같은 자에게도 정형(正刑)을 시행하지 않자 신약추(申若樞)라는 자가 그 뒤를 바로 이어 일어났는데, 산에 봉선(封禪)을 행하고 하늘에 제사드리라고 청한 것이 과연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임금을 한(漢)나라 당(唐)나라 때의 임금처럼 되도록 유도하여 봉선하는 잘못된 예(禮)를 행하게끔 길을 열어 놓으려 한단 말입니까. 이것만으로도 그지없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이미 범했다고 할 것인데, 은덕을 추켜 올려 칭송하면서 그 말을 꾸미고 함원 인통(含冤忍痛)의 의리는 하나도 없게 하였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천하를 유도해 오랑캐로 만들려고 하는 심산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미(氣味)와 맥락(脈絡)을 보면 완연히 양류(洋流)에서 나온 것인데, 이렇게 외람되게 한번 시험해 보려고 획책한 것 또한 사주를 받고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존창을 속히 방형(邦刑)으로 바로잡고 신약추를 잡아다가 국문하여 사실을 알아내도록 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두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집니다.
아, 올해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는데 그 일을 말하려니 참혹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공사(公私)간에 비축한 것이 없어 구제할 대책이 전혀 없으니 이 일에 생각이 미치면 차라리 통곡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다친 사람 보살피듯 인자하신 성상께서 우리 백성이 병든 사람처럼 된 때를 당하여 날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으시고 해 진 후 늦게야 저녁을 드시는 등 한때도 편안히 계시지 않으시며 금같은 바탕에 옥 같은 음성으로 진정 가엾게 여기면서 슬퍼하시니 가히 신명(神明)을 감동시킬 만하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臣子)로서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누가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그러한 뜻을 선양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보건대 묘당에서 계책을 날마다 강구하고 있으니, 무(無)에서 유(有)를 내놓는 것이 형세상 어렵기야 하겠지만 이치상으로 보면 궁한 끝에 살 길이 생길 수도 있는 법입니다.
무릇 천하의 일이란 어떤 것을 막론하고 근면과 성실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니, 오늘날 신하들이 모두 전하의 마음으로 각자의 마음을 삼는다면 곡식이 부족할 걱정을 할 것이 뭐가 있으며 백성이 굶어 죽을 걱정을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이 오활하여 일을 잘 알지 못하나 망령되게 한 말씀을 올릴까 합니다. 대개 오늘날의 구황책(救荒策)으로는 특별히 기이한 방법을 쓸 것이 없이 그저 백우(伯禹)가 물을 다스렸던 것처럼 그 형세에 맞추어 순리적으로 유도하기만 하면 될 것인데,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백성을 기르는 것은 물고기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동요시키면 흩어지고 안정시키면 모여드는 법인데, 대저 새로운 규정을 만들고 새로운 명령을 내놓는 것이 이른바 동요시킨다는 것이요 그 때에 맞추고 그 속성에 순응하는 것이 이른바 안정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재해를 십분 입었을 경우에는 견감해 주는 것도 십분 해주고 그 흠결(欠缺)된 것이 1분(分)일 경우에는 감면해 주는 것도 1분을 해 주며 부역이나 징수하는 일이 없이 그 지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대략 가지고 있는 곡식을 가지고 급한 상황을 구해 나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백성들이 ‘천운(天運)이 어렵게 된 것을 어찌하랴.’ 하고 성상의 지극히 우악(優渥)한 은택에 감격한 나머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참고 또 참으면서 예전의 하루 양식을 지금은 이틀 양식으로 삼고 예전의 한 달 살 돈을 지금은 몇 달치 생계 비용으로 삼아 죽이나 혹은 지게미를 먹기도 하고 혹은 막걸리 한 잔이나 반 잔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고 혹은 산나물을 뜯어 먹기도 하고 혹은 물고기를 잡아 먹기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총동원해 목숨을 이어 나갈 것이니, 이것이 바로 안정시켜 주면 모여든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반대로 혹 소문을 크게 내고 특별한 거조를 취하며 마치 만병 통치약인 환원단(還元丹)이라도 서울에서 내려보내는 것처럼 시끄럽게 한다면 주린 배를 안고 별별 욕심을 다 내면서 침을 흘리며 기다리고 배 터지게 먹으리라 기대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가령 소문대로 그들의 욕구를 채워준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이미 동요되고 삿된 생각이 이에 편승하여 마구 일어나 살릴 길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금(洒禁)에 대한 논의도 그렇습니다. 술을 금하는 것이 본시 우리 나라에 원래 있던 법이고 또 흉년에 으레 실시하던 규정이고 보면 신도 물론 그것이 온당치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요컨대는 또한 그것을 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이긴 합니다만, 그저 너무 심한 것만 제거하면 될 뿐이니 술주정하는 것을 엄하게 단속하고 팔지 못하도록 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만약 일체 금지하여 하나도 없게 하려 할 경우에는 온갖 폐단이 다 생기면서 관리가 이익을 독점하고 백성은 피해만 보게 될 것인데 왼쪽 거리에 술 취한 사람의 머리를 베어 걸어놓는다 하더라도 오른쪽 점포에서 술 마시는 자의 입을 막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옛날 기강이 서 있던 때도 이 주금만은 끝내 제대로 시행하지를 못했는데 하물며 지금의 기강으로 볼 때 금지시키지 못할 정도만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배고파서 죽지 않고 술 먹다 죽게 되는 사람이 필시 많을 것이니, 그렇다면 국가의 체면만 손상시키고 백성의 목숨만 상하게 할 따름인 것입니다.
더구나 시골에서 올라온 자의 말을 듣건대, 모두들 삼남(三南)에서는 이 영을 바야흐로 엄하게 시행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분부하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아래에서 이미 행하고 있는 것이니, 또한 어찌 꼭 성상께서 염려하시고 번거롭게 분부를 내리시며 금하고 금하지 않는 것이 어떠한가에 대해 논란을 벌이실 성격의 일이겠습니까. 성상의 입장에서 스스로 힘쓰셔야 할 도리는 인자한 하늘이 위에서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처럼 하면서 백성이 원하는 것은 따라주고 싫어하는 것은 제거해 주며 급하지 않은 일들은 일체 정지시키시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흉년에 궁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대 강령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염려하는 것 중에는 이것보다 훨씬 큰 것이 또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을 돌아보건대 풍년이 든 때에도 변고가 일어나지 않는 때가 없어 거의 인륜이 없어질 정도에 이르고 있고 보면 더구나 이런 흉년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백성들이 죽을 수밖에는 없다고 하면서 못할 짓 없이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어 장차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상태로 전락해버리고 말텐데 이렇게 바른 도리를 모르고 살아가기 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기강이 없어지지만 않는다면 망한 주(周)나라의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을 가지고도 중흥(中興)을 이룰 수가 있지만 의리가 일단 없어져 버리고 나면 진(秦)나라나 수(隋)나라처럼 부강한 나라도 순식간에 망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오늘날 백성의 목숨이 끊어지게 된 것만 걱정할 일이 아니고 인륜이 잘못된 것을 가장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도해 이끄는 도리상 그야말로 목숨을 구제하는 방법을 강구함과 동시에 명교(名敎)와 풍화(風化)의 근본을 다시 밝힐 줄 알아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사람들이 비로소 사람의 도리에 입각하여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하여 실시해야 하는 뜻으로 비변사를 엄히 신칙하여 중외에 크게 퍼뜨리게 하소서.
아, 밖으로 백성의 근심이 이미 이와 같고 안으로 조정의 근심이 또 이와 같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성상의 마음은 성상께서 초년(初年)에 지니셨던 마음과 같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그것은 어떻게 아는 것이겠습니까. 토벌하여 복수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큰 일인데 주선하며 조종하는 것이 오직 성상의 분부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고, 형(刑)을 가하고 상(賞)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큰 정사인데 관대하고 참혹하게 하며 주고 뺏는 모든 일이 오직 성상의 뜻이 어떻게 발로되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뭇 관료들이 엎어지고 넘어지느라 겨를이 없고 모든 일이 혹 잗달게 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선정(善政)이 행해지면 그것은 오직 전하의 선정이고 잘못된 일이 있게 되면 그것 역시 전하의 잘못된 일이며 모든 조치가 또한 오직 전하께서 조치하신 것이 되는데, 우리 임금이 임금 노릇 하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도 수고로우며 우리 신하들이 신하 노릇 하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도 편하기만 하단 말입니까. 그래서 겸양하는 말만 앞으로 나오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이 때문에 뒤로 물러서고 있는 형편입니다. 신은 이로써 전하의 오늘날의 정치가 우선은 무기력하게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동안의 일을 경계하셔야 되리라고 느끼고 있고, 전하께서 오늘날 나라를 통치하시는 것이 무사 안일에 빠졌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앞으로의 일을 두려워해야 하시리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용안(龍顔)이 남다르게 빼어나시고 품성이 후덕하심은 물론 총명과 예지를 갖추신 위에 신무(神武)하고 영예(英銳)로운 기상을 겸하셨으며 넓고 깊은 도량에 심원한 학식까지 구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고(千古)의 인물이 성상의 저울대 위에서 오르내리고 구주(九州) 산하(山河)가 성상의 거울 위에 역력히 드러나는데 청구(靑邱) 한 지역에 대해서는 그저 일 없는 바를 행하고 계시면서 조정을 내려다 보실 때 쾌하지 못한 답답한 느낌을 토해내시고 천하를 뒤돌아 보면서는 자세를 바로하며 부끄러움을 느끼고 계십니다. 이렇게 해서 가슴속 깊은 곳에는 실의에 빠져 한탄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고 밖으로 나타나는 언행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대충대충 해버리는 결과를 면치 못하고 계시는데, 이는 대체로 천품이 지극히 높은 데 반해 화락하게 어울리려는 노력이 아직 그만큼 따라가지 못하고 섭렵하신 것이 매우 넓은 데 반하여 함양(涵養)하는 공부에 있어 아직 그 방법을 극진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이것이 실로 병근(病根)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하는 것이 병임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약이라고 할 것인데, 약석(藥石)의 묘방(妙方)은, 돌아보건대 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을 말미암는 데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학문의 길이란 다른 데에 있지 않고 오직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그 가능성을 온전히 발휘하는 것이니 격물(格物) 치지(致知)로부터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그저 이렇게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것일 뿐이라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는 학문이 고명하시어 이미 극진하게 이치를 밝히셨을 것이니 지금 어찌 감히 다시 의논드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백 척(尺)의 간두(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식으로 이에 관심을 두시고 늘 생각하소서.
신이 삼가 갑인년 11월 13일의 전교 내용을 보건대 ‘독서를 하지 않더라도 궤안(几案) 사이의 서책을 매만져보곤 하는데 이것도 학문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셨습니다. 위대하십니다 왕의 말씀이여,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으시는 뜻이 언외(言外)에 넘쳐 흐르고 있는데, 우리 임금께서 이토록 학문을 좋아하시고 보면 우리 나라도 가능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신처럼 졸렬한 자야 애시당초 어떻게 학문에 관한 일을 알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요행히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말은 들은 적은 있습니다. 이에 감히 여덟 글자를 가지고 천추 금감(千秋金鑑)257) 으로 바친 고사를 본뜰까 하는데, 그 강령은 여덟이나 그 조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겠습니다.
아, 지금 우리 충인(沖人)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원자(元子)로서 옷 길이가 점점 길어져 강독(講讀)을 이미 시작했는데, 아직 입학(入學)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강독 역시 학문은 학문입니다. 생각건대 원자가 지금 시작하고 있는 학문은 성부(聖父)가 좋아하는 학문이 아닙니까. 《소학(小學)》이나 《대학(大學)》이나 그 도(道)는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깊이 유념하시어 위로는 황천(皇天)이 부여한 명에 답하시고 아래로는 충자(沖子)를 옳게 인도하는 가르침을 밝게 보여주심으로써 영원한 성대(聖代)의 기반이 구축되도록 하소서. 이것이 바로 못내 그만두지 못하고 축원하여 마지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첫째는 중(中)입니다. 중이라는 것은 어느 쪽에 치우치거나 의지함이 없고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늘이 이것을 사람에게 주었고 사람이 이것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이는 대체로 만선(萬善)이 회통(會通)되고 천성(千聖)의 도통(道統)이 되는 것이라 하겠는데, 그 설은 처음 당(唐)·우(虞)258) 에서 시작되었고 그 내용은 수사(洙泗)259) 에 이르러 비로소 갖추어졌다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동방에서도 성인들이 서로 뒤를 이어 오늘에 이르렀으니, 아, 위대하다 하겠습니다. 전하가 오늘날 소유하고 있는 나라는 4백여 년에 걸친 조종(祖宗)의 나라로서 나라가 전해져 옴과 동시에 그 도(道) 역시 함께 전해졌고, 전하가 오늘날 소유하고 있는 백성은 4백여 년에 걸친 조종의 백성으로서 백성이 있는 것을 따라 그 도도 함께 있어 왔습니다.
이 도는 어떤 도이겠습니까. 바로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가 잡고서 세운 무형(無形) 무극(無極)의 일대 물건으로서 지금까지도 하늘 아래 땅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작게는 동(動)과 정(靜) 하나하나가 모두 이것을 기준으로 이루어지고 크게는 전(典)과 칙(則) 하나하나가 모두 이를 법삼아 성립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게 되면 곧바로 중이 되지 못하는 만큼 반드시 마음속의 생각과 밖으로 표출되는 행동이 순일하여 한 개나 반 개라도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점이 없게 된 뒤에야 비로소 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때에 가서는 하늘을 우러러 질정해 보아도 하늘이 따르고 아래로 백성에게 보여주어도 백성이 따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에 엄연히 나 한 사람의 독립된 위격(位格)이 확보될 것인데 이 역시 오늘날 세상의 요·순·우·탕·문·무가 되는 길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더 부지런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원자의 모범이 되도록 하소서.
둘째는 성(誠)입니다. 성이라는 것은 참되어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하늘이 심원하여 마지않는 것[於穆不已]이나 성인이 또한 순수하여 마지않는 것.[純亦不已]260) 이 모두 이 물건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은 즉 전에 이야기한 바 쉬지 않는다[不息]고 하는 것인데 하늘과 사람이 이로써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誠)이면 이(理)요 불성(不誠)이면 욕(欲)이며, 성이면 왕(王)이요 불성이면 패(覇)며, 성이면 감응하고 불성이면 감응함이 없으며, 성이면 이루어지고 불성이면 이루어짐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러한데 하물며 대업(大業)이겠습니까. 보통 사람의 경우도 모두 그러한데 하물며 제왕(帝王)의 경우이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천하의 만물을 이루어주고 이것을 가지고 천하의 구경(九經)261) 을 행하게 되니 그 쓰임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늘을 섬기면 어찌 번거롭게 의문(儀文)이나 도수(度數)를 성대히 할 필요가 있겠으며, 그것을 가지고 백성에 임하면 어찌 중복되게 서고(誓誥)를 발하고 회동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른 아침 대정(大庭)에 임하시어 백관들이 위의(威儀)를 갖추고 있는 그런 때에야 물론 그러하시겠습니다마는 사람이 안 보이는 곳에서도 순일(純一)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까. 매일 법연(法筵)에 납시어 여러 사람들이 분명히 보고 있는 그런 즈음에는 물론 가능하시겠습니다마는 친한 이와 한가히 즐기실 때에도 전일(專一)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더 부지런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시어 원자의 법칙이 되도록 하소서.
셋째는 경(敬)입니다. 경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을 집중하고 외물(外物)에 마음을 두지 않는 성공(聖功)으로서 그것을 가지고 안을 바르게 하고 밖을 엄하게 하며 다섯 가지 일262) 을 써서 1백 가지 삿된 것들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흠(欽)이니 공(恭)이니 하는 것은 안에 축적된 것이 밖에 드러나는 것으로서, 그것을 가지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기본을 삼고, 그것을 가지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기초를 삼고 있고 보면, 도에 뜻을 두고 학문을 지향하려는 자가 있을진댄 그 누구라서 이것을 버리고 처음과 끝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임금은 드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천둥과 같은 위엄을 갖추고 있어 그 뜻이 교만해지기 쉽고 그 기상을 제어하기 어려운 만큼 이 점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것이 또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빨리 덕을 공경히 하라.’고 하고 ‘능히 공경하는 이를 친하도록 하라.’고 하고, 혹은 ‘공경하는 마음이 태만해지는 마음을 이기면 흥한다.’고 하고, 혹은 ‘공경하는 것을 행할 가치가 없다고 하면 망한다.’고 한 것이니, 이로써 천하 국가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은 그 덕을 공경히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은 일찍이 《주역(周易)》을 읽으면서 성(誠)과 경(敬)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건(乾)의 획(劃)은 실(實)하니 실하게 되면 성이 되고 곤(坤)의 획은 허(虛)하니 허하게 되면 경이 나오는데, 이 때문에 건괘(乾卦)의 구이(九二)263) 에서 비로소 성을 말하고 곤괘(坤卦)의 육이(六二)에서 비로소 경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경과 성이야말로 포희(庖犧)264) 의 심획(心劃)에서 나온 것으로서 천지 자연에 근본한 원리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더욱 부지런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시어 원자의 법도가 되도록 하소서.
넷째는 명(明)입니다. 명이라는 것은 해와 달이 밝게 비추고 고요히 정지해 있는 물이 맑게 비춰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아무리 먼 곳도 비춰주지 않음이 없고 아무리 미세한 부분이라도 밝혀주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바로 대인(大人)이 명덕(明德)을 천하에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임금된 도리로 볼 때 반드시 이를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하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흐릿하여 현사(賢邪)를 잘 구별해 살피지 못하고 어두워서 용사(用舍)265) 를 제대로 분간해 살피지 못하면 임금이 임금답지 않게 되어 나라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밝음이라는 것이 어찌 자기 혼자만의 밝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래의 밝음을 밝히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밝음이어야 할 것인데, 혹시라도 스스로 밝다고 하여 세세하게 살피는 것만을 일삼는다면 전장(典章)에는 옛것을 어지럽히는 걱정이 있게 될 것이고 제도(制度)에는 뭇사람을 포용하는 아름다움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귀막이 옥을 매달고 면류관 줄을 내려뜨린 것이 너무 세세하게 듣지 말고 너무 세세하게 보지 말라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어찌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더 부지런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시어 원자의 귀감이 되도록 하소서.
다섯째는 관(寬)입니다. 관대함이란 그릇이 크고 넓어 빠듯하지 않고 아주 넓은 것을 말하는데, 하늘이 덮어주듯 땅이 실어주듯 자기 울타리 안에 들어온 자는 모두 포용해 주는 이것이 바로 제왕의 관대함이라 할 것입니다. 관대하면 무리를 얻고 무리를 얻으면 나라를 얻게 되니, 나라가 나라되는 그 기초는 관대함에 있는 것입니다. 대개 덕량(德量)이 넉넉하면 사람들이 다투어 따라오고 성격이 좁으면 백성들이 모두 배반하기 때문에 경(經)에서 거친 것을 포용하는 상(象)을 드러내고266) 전(傳)에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는 의리를 드리운 것입니다.267) 삼가 원하옵건대 더욱 부지런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원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여섯째는 정(靜)입니다. 고요함이란 적연 부동(寂然不動)하여 문연(脗然)히 아직 발동되기 전의 시절을 말하는데 천하 만물이 모두 이 고요함에서 나오고 보면 고요함이야말로 움직임[動]의 모체라 할 것입니다. 건도(乾道)는 고요할 때 전일(專一)하기 때문에 움직일 때 곧바르고, 곤도(坤道)는 고요할 때 화합하기 때문에 움직일 때 열리는 것입니다.
태극(太極)은 본래 무극(無極)인데 무극이란 것이야말로 고요함의 체(體)가 아니겠습니까. 대연(大衍)은 태일(太一)을 귀하게 여기는데 태일이란 것이야말로 고요함의 상(象)이 아니겠습니까. 물이 썩지 않으려면 움직이긴 움직여야 하는데 만약 그 근원이 깊이 잠겨 있지 않다면 무엇을 힘입어 활기있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문 지도리에 좀이 슬지 않으려면 움직이긴 움직여야 하는데 만약 그 뿌리가 단단하게 붙어 있지 않다면 무엇을 믿고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염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도 ‘성인께서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로써 안정시키시되 정(靜)을 위주로 하신다.’고 하였고, 제갈량(諸葛亮)이 아들을 훈계한 글에도 ‘정(靜)이 아니면 학문을 이룰 길이 없다.’고 한 것이니, 이처럼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정(靜)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더욱 부지런히 힘쓸 것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원자의 모범이 되도록 하소서.
일곱째는 검(儉)입니다. 검소함이란 절약하여 수수하게 하고 화려하거나 사치스럽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하니, 가령 훈(勳)·화(華)268) 의 거처가 여인숙과 같고 문지기와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였으며 우(禹)임금과 문왕(文王)의 음식과 옷이 형편없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로부터 사치를 숭상하는 임금치고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래 백성들이야 무엇을 알겠습니까. 오직 윗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만 보고 따를 뿐인데, 위에서 무엇을 좋아하면 아래에서 그보다 더 좋아하는 점이 꼭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검소한 덕을 밝혀 앞장을 서고 자기 몸부터 절약하여 교화를 시키지 않는 한 풍속이 점점 휩쓸려 내려가 완전히 타락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게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더욱 부지런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원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여덟째는 겸(謙)입니다. 겸손함이란 자랑하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으며 자신을 깎아내리고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보다 높은 것이 없는데도 하늘은 아래로 땅에서 일을 이루고 바다보다 깊은 것이 없는데도 바다는 옆으로 물방울까지 포용하나니, 이것이 바로 옛적의 성인과 철인들께서 더욱 덕이 높아지고 도가 융성해질수록 그 당시 세상에 복을 내려 줌은 물론 후대에까지 은택을 입게 한 이유인 것입니다. 일찍이 《주역》의 괘(卦)를 보건대 육효(六爻) 모두 길(吉)한 것은 오직 지산 겸괘(地山謙卦)밖에는 없었습니다. 대저 귀신이 해치려고 하는 대상이 찬 것이고 보면 도와주려 하는 대상은 무엇이겠습니까. 인도(人道)로 볼 때 미움의 대상이 찬 것[滿]이고 보면 좋아함의 대상은 무엇이겠습니까. 본래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만약 이런 마음을 견지하지 않는다면 그 찬 것이 날로 더욱 차게 될 것이니 끝에 가서 어떻게 될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어찌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더욱 부지런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시어 원자의 배움이 되도록 하소서.
아, 이 여덟 가지 항목은 원래가 한 꿰미의 몸통이니 각 간살을 얽어 합하면 수미(首尾)를 만들 수 있을 것인데 이 모두가 옛사람의 말이지 신의 말은 아닙니다. 오직 성상께서 살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시정 속폐를 빠짐없이 말하며 만언소를 올렸는데, 그대가 말을 우회적으로 하여 알아 듣지도 못할 소리만 하는 고질적인 폐습에 그래도 오염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시골에 거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진달한 8개 조목 또한 어느 것 하나 진언하는 격식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가상하고 가상하다. 그대가 소 가운데에서 ‘효(孝)에 대한 의리는 도(道)를 아는 자와 이야기할 수 있다…….’ 하였는데, 그대처럼 자취가 소원한 사람이 이처럼 이치에 맞는 말을 할줄이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8일 기미
복상(卜相)하였다. 【구복(舊卜)은 홍락성(洪樂性)·채제공(蔡濟恭)·김종수(金鍾秀)·김희(金憙)이고, 신복(新卜)은 심환지(沈煥之)였다.】 심환지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를 승진시켜 의정부 좌의정으로 삼았다.
서용보(徐龍輔)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구익(具㢞)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우의정 심환지에게 돈유(敦諭)하기를,
"경은 가까운 신하이니 그래도 역시 나의 고심(苦心)을 알 것이다. 내가 굳세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개연히 삼고(三古)에 뜻을 둔 적이 있건마는 언행이 서로 부합되지 못하고 상하가 서로 부응하지 못한 탓으로 세월만 보내며 구태(舊態)를 벗지 못하는 사이에 임금으로서의 법도가 해이해지고 조정의 기상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암퇘지가 날뛸 생각을 갖고269) 뭇 용들은 이렇다 저렇다 의사를 표현하지도 않고 있는 가운데 명의(名義)는 날로 어두워지고 투박한 행태만 다달이 불어나고 있다. 그런데 근년에 이르러서는 물난리와 가뭄으로 인해 기근이 계속 겹쳐 일어나 저 백성들을 구제할 방책이 없으므로 늘 한밤중에 여러 차례 일어나서 탑전(榻前)을 서성이다 보면 새벽이 밝아오곤 하는데, 세교(世敎)를 돌릴 수 없음을 탄식하고 인재는 빌려올 수 없음을 애석하게 여길 따름이었다. 이에 중서(中書)의 자리를 구비하여 서로 바로잡는 의리를 책임지우려 하였으나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아도 조심스럽고 어렵게 여겨지기에 먼저 뜻을 결단하고 나서 원귀(元龜)를 명하는 일270) 을 해 오지 못한 지가 또한 오래되었다. 대저 나라에서 정승을 두는 일을 어찌 일괄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혹 백성이 칭송하는 이 가운데에서 뽑기도 하고, 혹 선비들이 누구를 기대하는지 들어보기도 하고, 혹 부류를 따지지 않고 현인을 구하기도 하고, 혹 즐거워하는 바를 살피기도 하고, 혹 스스로 갖고 있는 소양을 가지고 하기도 하고, 혹 평소 견지하고 있는 의리를 가지고 하기도 하고, 혹 학식을 취할 때도 있고, 혹 세운 공로를 참작하여 할 때도 있는데, 예로부터 복상(卜相)한 일을 보면 대체로 살펴 알 수가 있다.
경이 가까운 신하이기 때문에 내가 경을 꽤나 잘 알고 있는데 이 몇 가지 중에서 경에게 해당되는 것이 혹 한두 개만 있어도 나의 정승 뽑는 일은 정해졌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경의 탁 트인 풍도(風度)야말로 아첨 잘하고 오그라들기만 하는 습속(習俗)을 바로잡을 수 있는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벼슬길이 늘 통하고 막히고 하는 가운데 10년 동안이나 불우하게 지냈는데도 굳게 참으며 궁색한 생활을 견뎌내었고, 요직(要職)에 올랐을 때에도 포의(布衣) 때의 옛 자세를 바꾸지 않았으니, 정신(廷臣)들을 두루 헤아려 보건대 경처럼 훌륭한 자가 누가 있겠는가. 또 내가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다만 경은 경연(經筵)에서 조용히 마주하면서 절대로 꾸미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경을 깊이 인정하고 먼저 내각(內閣)의 직함으로 빛내 준 뒤에 이어 삼사(三事)271) 의 중책을 부여하게 된 것이다.
지난번 경이 동쪽으로 유력(遊歷)하려 할 적에 내가 시(詩)를 지어 주면서 옛사람의 시중대(侍中臺) 고사(故事)272) 를 인용했었는데 이것은 바로 뜻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경은 지금 어디를 여행하고 있는가. 산 높고 물 맑은 곳에서 조서(詔書)를 받았던 예전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는데 경이 지금 그 뒤를 밟고 있으니 마침 그런 일이 있게 된다 하더라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경은 모쪼록 빨리 동산(東山)에서 발걸음을 돌려 즉시 길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명에 숙배(肅拜)함으로써 학수 고대하는 나의 뜻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전교하기를,
"이 돈유문을 사관(史官)에게 주어 보내되 금강산(金剛山) 속의 우의정이 있는 곳에 급히 달려가게 해서 전유(傳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문형(文衡)273) 의 권점(圈點)을 명하였다. 빈청(賓廳)이 아뢰기를,
"예전부터 문형을 권점할 때 대신 한 사람이 혼자서 권점한 예는 일찍이 없었고, 혹 혼자서 권점했다 하더라도 문형을 역임한 사람이 아닐 경우에 곧바로 수상(首相)으로서 거행하였고 보면, 사례(事例)가 지금과는 같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좌·우상 중에 어떤 사람도 권점에 참여한 예가 없지 않을텐데 그렇다면 결국 사체(事體)를 중하게 해 주는 도리가 못될 테니 우선 다른 대신들이 행공(行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안심하고 거행하라고 답하였다.
상호군(上護軍) 홍양호(洪良浩)가 상소하기를,
"문임(文任)274) 이 아무리 신이 거쳤던 자리라고 하더라도 지난번 홍문관 제학을 의망(擬望)할 때에 두 사람만 의망하고 신은 제외 대상에 자연스럽게 들어 있었으니 물의(物議)가 문임으로 신을 대우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삼관(三館)의 중임이야말로 사체가 더욱 특별한데 어찌 뻔뻔스럽게 나아가 권점하는 일을 감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권점하는 예로 말하더라도 일단 전임 대제학이 있는 이상 신이 전전임(前前任)으로서 그 대신 권점을 감당하다니 이것은 더더욱 나아가기 어려운 하나의 이유가 된다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양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즉시 회권(會圈)토록 하라."
하였다.
빈청이 또 아뢰기를,
"대제학을 권점(圈點)하여 들입니다. 그런데 전전 대제학 홍양호(洪良浩)는 혐의 때문에 자기 이름을 써넣는 대신 전례(前例)에 따라 첨가해 쓴 다음 권점하였습니다."
하였다. 【4점(點)을 얻은 사람은 홍양호·김재찬(金載瓚)이었으며 서정수(徐鼎修)가 3점을 얻었다.】 홍양호를 홍문관 대제학으로 삼았다.
홍문록(弘文錄)에 【부제학 서용보(徐龍輔), 응교 한용탁(韓用鐸), 교리 김근순(金近淳), 부교리 조윤수(曺允遂)·박길원(朴吉源)이 작성하였다.】 4점(點)을 얻은 민사선(閔師宣)·한흥유(韓興裕)·장지면(張至冕)·이정병(李鼎秉)·조득영(趙得永)·이서(李垿)·홍락안(洪樂安)·박종경(朴宗京)·김이재(金履載)·김희화(金熙華)·신현(申絢)·조석중(曺錫中)·조만원(趙萬元)·이면승(李勉昇)·홍치영(洪致榮)·김희주(金熙周)·김이영(金履永)·민명혁(閔命爀)을 뽑아 기록하였다.
8월 29일 경신
경릉(敬陵)과 창릉(昌陵)을 참배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으며 명릉(明陵)·익릉(翼陵)·홍릉(弘陵)·순회묘(順懷墓)를 차례로 참배하였다. 하교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덕종 대왕(德宗大王)께서는 훌륭한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을 많이 두시어 만년의 반석을 구축하셨고 우리 예종 대왕(睿宗大王)께서는 높고 빛나는 왕업(王業)을 이룩하시어 백세의 법도를 드리우셨다. 그리하여 덕을 구가(謳歌)하는 자들과 옥사(獄事)를 송사하는 자들이 모두 모여들고275) 청묘(淸廟)와 생민(生民)이 이에 지어졌으니276) 그 공적은 천지(天地)와 짝할 만하고 그 성명(聲明)은 금석(金石)의 모범이 된다 하겠다. 그 뒤로 경사가 쌓이고 상서(祥瑞)가 모여들며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제왕이 서로 계승하여 이제 와서는 태평 성대를 이루게 됨은 물론 앞으로도 무궁한 복록을 보장받게 됨으로써 은 물결 옥 연못처럼 근원이 심원해 흐름이 길고 붉은 방패와 옥 도끼 춤처럼 예가 구비되면서 즐거움 또한 갖추어지기에 이르렀다. 이에 동방 수천 리를 통틀어 조금이라도 혈기(血氣)를 가진 자라면 왕업이 이루어지게 된 소이연(所以然)을 미루어 헤아리고 우리 나라의 명운(命運)이 더욱 새로워지게 된 것을 음미하면서 전왕(前王)을 잊지 못하는 절실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돌아보건대 소자(小子)가 마침 올해 구갑(舊甲)이 되는 해를 맞았기에 마침내 길일(吉日)을 택해 경릉을 참배하게 되었는데 향불이 타올라가며 정신이 송연(悚然)해지는 순간 혼령이 오르내리면서 뜰에 가득 임재하시는듯 초연(愀然)히 다시 뵙는 것만 같았다. 이어 창릉으로 가서 예를 행함에 더욱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더구나 우리 성묘(成廟)의 출천지효(出天之孝)는 간책(簡策)에 빛나고 있는 만큼 1천 년이 지난 뒤에도 이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 자가 있을 것인데 어찌 감히 성묘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용릉(舂陵)의 성대한 자취를 거슬러 알아보고 관진(觀津)의 옛 벌열(閥閱)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릉의 국구(國舅)인 좌의정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 양절(襄節)277) 한공 확(韓公確)은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세상을 뒤덮는 훈업(勳業)을 이룩하였다. 19세에 유지(有旨)를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자 천자가 그의 풍의(風儀)를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봉의 대부(奉議大夫)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을 제수하였는데 그 첫머리 내용을 보면 ‘돈후한 자질을 타고 났으며 성실한 뜻을 품고 있다.’ 하였다. 그러다가 영릉(英陵)278) 이 즉위하자 고명(誥命)을 받들고 황화(皇華)의 상개(上价)로 귀국하여 다섯 조정을 차례로 섬기고 마침내 정승의 직위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동기(同氣)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의 여비(麗妃)가 되고 하나는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의 공신 부인(恭愼夫人)이 되어 강타(江沱)와 규목(樛木)의 노래279) 가 풍요(風謠)로 나타났는데 본조(本朝)에서 탁룡(濯龍)280) 의 현숙함을 보여주다가 황조(皇朝)에 들어가서는 관어(貫魚)281) 의 아름다움을 두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공신 부인이 선발되어 들어간 해를 간지(干支)로 따질 때 또 올해에 해당되니 이것 역시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닌데, 한공의 제사를 주관하는 자가 오래도록 녹봉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큰 궐전(闕典)이며 흠사(欠事)이다. 해조로 하여금 즉시 조용(調用)토록 하라. 그리고 듣건대 그의 묘소가 두미강(斗尾江) 위에 있는데 뒷 사람들이 그의 시호를 따서 그 지역을 이름지었고 남양 부부인(南陽府夫人) 홍씨(洪氏)의 묘는 양주(楊州)에 있다고 한다.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창릉의 국구인 영의정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충성(忠成) 한공 명회(韓公明澮)와 황려 부부인(黃驪府夫人) 민씨(閔氏), 그리고 우의정 청천 부원군(淸川府院君) 양혜(襄惠) 한공 백륜(韓公伯倫)과 서하 부부인(西河府夫人) 임씨(任氏)의 묘에도 똑같이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그런데 안순 성후(安順聖后)282) 가 예척(禮陟)하신 구갑(舊甲)이 또 이르고 있는 만큼 별도로 은택을 베푸는 전례(典禮)를 시행해야 마땅하니, 청천의 봉사손(奉祀孫)인 직장(直長) 한계중(韓啓重)을 6품직으로 천전(遷轉)하고 본릉(本陵)의 영(令)으로 의차(擬差)하도록 하라.
월산 대군(月山大君)은 지위가 태백(泰伯)이나 중옹(仲雍)보다도 존귀했고 연릉 계자(延陵季子)나 사어(史魚)보다도 고귀한 뜻을 지녔는데 성묘(成廟)로부터 형제간의 보살핌을 듬뿍 받았었다. 그리고 시문(詩文)을 보면 강호(江湖) 풍월(風月)을 읊는 사이에 고상한 운치가 애연히 넘쳐 흘렀는데, 아조(我朝)에 물론 훌륭한 종친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월산이 으뜸이었다고 할 것이다. 인성(仁城)·제안(齊安) 양 대군 및 현숙 귀주(顯肅貴主)의 묘와 함께 친히 유사(侑辭)를 지어 줄테니 제사를 올려주고 나서 보고하라. 명숙 귀주(明淑貴主)는 성묘의 명에 따라 경릉 구역 안에 배장(陪葬)했었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다 보니 영역(瑩域)이 무너지고 향화(香火)도 빠뜨리고 있다 한다. 사릉(思陵)의 예에 따라 즉시 길일을 택해 수축하게 하는 한편 그 후손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하되 제문(祭文)을 지어 주어 오늘 제사를 올리도록 하라.
양릉(兩陵)에 친제(親祭)를 올린 날 은상(恩賞)을 베풀어 일의 체면을 높이는 일은 마땅히 정릉(定陵)에서 섭향(攝享)케 했을 때의 예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아헌관(亞獻官)인 좌의정 이병모(李秉模)와 종헌관(終獻官)인 광사 부위(光思副尉) 김기성(金箕性)에게 숙마(熟馬) 1필(匹)을 면급(面給)하라. 집례(執禮)인 집의(執義) 이익모(李翊模)와 대축(大祝)인 부사과(副司果) 정동관(鄭東觀) 및 예방 승지 남공철(南公轍)은 모두 가자(加資)하고, 전사관(典祀官)은 승서(陞敍)하라. 재랑(齋郞)·축사(祝史)·감찰(監察)에게는 각각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내려 주고, 인의(引儀)는 각각 한 자급(資級)씩 더해 주어라. 경릉과 창릉의 능관(陵官)은 모두 승육(陞六)시켜주되 이미 승육이 된 자는 승서(陞敍)토록 하라. 본도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은 가자하고, 지방관인 고양 군수(高陽郡守) 서유기(徐有沂)는 준직(準職)을 제수하라. 월산 대군의 봉사손(奉祀孫)인 전(前) 영(令) 이헌규(李憲圭)는 능관(陵官)으로 승서시켜주는 대신 복직(復職)하는 형식을 갖춰 의입(擬入)토록 하라. 올해 이런 거조를 취하는 것은 대체로 우리 성묘(成廟)의 효심을 우러러 계술(繼述)하기 위함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능침을 참배하고 제사를 올리고 하는 사이에 광성(光城)283) 의 집 사손(祀孫)이 아직도 녹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는데, 이것이 아무리 사은(私恩)을 끊으려는 성후(聖后)의 성덕(聖德)에서 나온 일이라 하더라도 필시 서운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여양(驪陽)284) 의 집은 수용(收用)이 되었는데 어찌 그 집만 빠뜨려서야 되겠는가. 하물며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을 들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해조는 조용(調用)토록 하라."
하였다.
환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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