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계해
규장각 문밖으로 거둥하여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의 추향(秋享)에 쓸 향축(香祝)을 지송(祗送)하였다.
7월 2일 갑자
김문순(金文淳)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전라도 관찰사 이득신(李得臣)이 비가 왔다고 치계(馳啓)하니, 전교하기를,
"이 장계 한 통이 화왕음(花王飮) 1백 첩보다 낫다. 그저께 밤에 싸서 보냈는데 오늘 밤에 들어 왔으니 날래다고 할 만하다. 가지고 온 사람에게 해조로 하여금 시상(施賞)케 하라."
하였다. 이때 상이 열후(熱候) 때문에 화왕음을 복용 중이었다.
이격(李格)을 황해도 병마 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로, 김혁(金爀)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7월 4일 병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원군(祥原郡)의 군청 소재지를 이전하였다.
이에 앞서 중신(重臣) 박종갑(朴宗甲)이 기백(箕伯)122) 에서 체차되어 돌아온 뒤 등대(登對)하여 아뢰기를,
"현재의 상원군 군청 소재지는 자연 환경이 좋지 못해 질병에 걸리는 백성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읍에서 서북쪽으로 30리를 가면 내로(內櫓)라는 곳이 나오는데 산수(山水)로 둘러 있고 마실 물이 맑고 깨끗하며, 게다가 큰 강에 임해 있어 상선(商船)이 모여들고 있으므로 여유있게 즐기며 생활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 대부분이 그곳으로 옮겼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하자, 묘당에 명하여 신임 감사에게 상세히 물은 뒤 품처(稟處)토록 하였는데, 묘당이 복주(覆奏)하니 따른 것이다.
충청도 관찰사 한용화(韓用和)가 소장을 진달하여 체차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서용보(徐龍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한용귀(韓用龜)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익운(李益運)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이태영(李泰永)을 충청도 관찰사로, 서매수(徐邁修)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7월 5일 정묘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가 차자를 올려 질병에 걸린 상황을 진달하고 전대(專對)123) 의 임무를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7월 6일 무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이익운(李益運)이 부절(符節)을 받은 지 3일이 지나도록 부임하지 않자, 하교하여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파직시키고 이면긍(李勉兢)을 발탁하여 대신 보냈다.
김희(金憙)를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삼았다.
7월 7일 기사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상우(鄭尙愚)가 등대(登對)한 기회에 아뢰기를,
"동래에서 진상하는 전복(全鰒)은 예전부터 토산물을 따서 바쳤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마침 감영(監營)에서 퇴짜를 놓는 바람에 다른 고을에서 사다가 바쳤었는데 그것이 그냥 관례로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왕래하며 무역하는 즈음에 발생하는 민폐가 적지 않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듣자니 매우 놀랍다. 이 고을이 이러하다면 다른 고을은 어떤지 알 만하다. 병신년에 공선(貢膳)에 관한 정례(定例)를 참작해서 정했고, 그 뒤로도 광어(廣魚)나 해의(海衣)124) 등 폐단을 야기시키는 제반 물건들을 듣는 대로 바로잡음으로써 가능한 한 백성을 편하게 함은 물론 기필코 조금이라도 실효가 있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요즘 듣건대 영남의 근해에서 공선(貢膳)하는 데 따른 폐단으로 일반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록 예(禮)는 폐할 수가 없고 또 전궁(殿宮)에 바치는 것까지 일괄적으로 중지시킬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영남의 근해에서 바친 해산물이 밥상에 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입에 대고 싶지가 않았는데, 하물며 다른 지역에서 무역해 오는 폐단이 이와 같다니 이 어찌 너무도 형편없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道臣)에게 엄히 신칙하여 먼저 동래부터 바로잡도록 하고 기타 이와 유사한 각 고을의 폐단도 모두 바로잡게 하라."
하였다.
심환지(沈煥之)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가 곧바로 체차시키고 김재찬(金載瓚)을 대신 임명하였다.
7월 8일 경오
칠석제(七夕製)125) 를 행하였다.
7월 9일 신미
홍양호(洪良浩)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승지 채홍원(蔡弘遠)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명을 받들고 동쪽과 서쪽의 능원(陵園)을 봉심(奉審)했더니 수목이 적어 성긴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옛날에 심은 것은 점차 소모되고 새로 이식한 것은 잘 배양되지 못해 보기에도 송구스럽고 안타깝기 짝이 없었으니 사체(事體)상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해조에게 신칙하여 나무를 얼마나 심고 얼마나 잘 가꾸었는지에 따라 겨울철과 여름철 근무 성적을 매기게 한다면 더 열심히 일하게 하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는 재랑(齋郞) 등이 성실히 근무하지 못해 빚어진 것으로서 매우 놀라운 일이다. 무릇 소나무를 심고 상수리나무를 씨뿌리는 법을 보건대 봄에는 파종해야 하고 가을에는 심어야 하는데, 구역 안의 여러 곳을 수시로 순찰하여 조금 성긴 곳에는 소나무를 심고 너무 공허한 곳에는 상수리나무를 씨뿌리면서 재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니, 이 방법대로만 해 나간다면 아무리 소모시키려 한들 그렇게 되겠는가. 그리고 설사 하인배가 난방용 장작으로 탐을 낸다 하더라도 도끼질한 흔적에 따라 잡아내면 될 것인데 이 숫자 역시 구우 일모(九牛一毛)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듣건대 씨뿌리고 심을 때 주위의 나뭇가지와 잎을 잘라주면 오히려 싹트고 자라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하인배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혜택을 받는 일이 될 것이니, 이 어찌 공사(公私) 양쪽 모두에 편리한 일이 아니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각릉(各陵)의 관원을 엄히 단속하여 올해 가을과 겨울부터 오로지 씨뿌리고 심는 데 뜻을 두게 하고 매년 3월과 10월에 그 숫자를 보고해 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해조에서 별단(別單)으로 초기(草記)해 오면 향축(香祝)을 받든 헌관(獻官)이나 봉심하는 승지 혹은 사관(史官)이나 선전관 중에서 추첨하여 과연 그 숫자대로 소나무를 심었는지 고찰케한 뒤에 그 근무의 성실도에 따라 상을 주고 징계를 내려야 할 것이며, 상수리나무를 얼마나 밀도있게 씨뿌렸는지에 대해서도 몇 년 간격으로 본보기를 뽑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러한 내용으로 분부하여 각각 재실(齋室) 벽에 써서 붙여놓도록 하라. 그리고 근무 성적을 평가할 때 이것을 가지고 등제(登第)를 기록한다면 필시 별도로 금품을 강요하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니 이 한 조목은 그냥 놔두어라."
하였다.
7월 11일 계유
이에 앞서 경기도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이 ‘장용영(壯勇營)의 승호군(陞戶軍)126) 은 지금 식년(式年)127) 을 맞았으니 당연히 뽑아 올려야 하겠습니다만 훈국(訓局)의 승호군은 뽑아 올리지 말게 하소서.’ 하고 경연에서 아뢰어 윤허를 받았었다. 이에 훈련 대장 이경무(李敬懋)가 상소하기를,
"승호군을 뽑아 올리도록 법으로 규정한 그 뜻이 매우 엄중한데 각도(各道)에 본래 그 숫자를 나누어 배정했었습니다. 삼가 신의 영(營)의 문서를 보건대 흉년이 들어 진휼(賑恤)을 행할 때 도신(道臣)이 뽑아 올리는 일을 정지하자고 청했어도 번번이 묘당에서 방계(防啓)하였고, 선조(先朝) 경오년128) 에는 ‘아무리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치성한 해를 만났다 하더라도 정지시키거나 숫자를 감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복계(覆啓)하여 정식(定式)을 삼았으니, 군제(軍制)의 중대함이 이와 같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경기의 도신이 청한 것을 보건대 정지하거나 감하자는 것도 아니고 곧장 뽑지 말자고 청한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그만한 수의 군사를 찾아낸단 말입니까. 그리고 도신의 입장에서 품처(稟處)하기를 청하지 않고 곧장 뽑지 말자고 청하였는데, 한 번 경연에서 품한 것으로 문득 시행하게 되었으니 이는 일찍이 유례가 없던 일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신이 올린 소장의 사연을 묘당에 내리시어 편리한 방도를 강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7월 12일 갑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승호군(陞戶軍) 숫자가 비록 적다고는 하나 법의 뜻이 매우 엄중한 만큼 결코 섣불리 그 숫자를 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세로 말하건대 다른 도에 더 배정할 방법이 이미 없고 보면, 도신(道臣)이 아뢴 대로 훈국의 승호군 4명을 우선 잠정적으로 감하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 한 번 길이 열리면 쉽게 흐지부지되곤 하니 앞으로 늘렸다 줄였다 하는 의논이 나오지 않도록 일체 엄금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훈국의 체모야말로 얼마나 엄중합니까. 그런데 도신이 품처(稟處)하기를 청하지도 않고 곧장 분부하기를 청한 것은 체통과 관계가 있으니, 경기도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을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병모가 또 아뢰기를,
"지난해에 크고 작은 과장(科場)을 영하(營下)129) 에 옮겨 실시했던 관계로 마련해야 할 잡비(雜費)를 각 감영(監營)에서 편의에 따라 조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관동(關東)의 경우는 감영에서 스스로 마련한 것 이외에 부족한 숫자는 각읍(各邑)에 나눠 배정해서 조금씩 보태어 돕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각읍을 성가시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에 어긋나는 점이 있는 듯하기는 합니다만 사실은 가장 폐단을 끼치지 않는 방법이 되는 것인 듯도 싶습니다. 그러니 모두 각자 청한 대로 시행케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재상(災傷)을 복심(覆審)하는 것은 바로 도사(都事)가 응당 행해야 할 직무인데, 선조(先朝) 을해년130) 이후부터는 도신(道臣)이 대신 행해 왔다. 그런데 매년 연분 사목(年分事目)131) 을 반급(頒給)해 줄 때면 호조에서 꼭 경차관(敬差官)을 차송(差送)하여 도신 대신 행하게 하라고 해마다 제품(提稟)하고 있는데, 도사가 시험을 관장하는 관계로 도신이 대신 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단 연분 경차관(年分敬差官)의 예(例)를 원용(援用)하기로 한다면, 식년(式年)마다 그 기일에 앞서 제품함으로써 존양(存羊)132) 하는 뜻을 부치고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모가 또 아뢰기를,
"황해 감영에서 채무를 탕감받을 때 을묘년에 청구해서 더 대출받은 조목까지 뒤섞어 포함시킨 곡절을 도백(道伯)에게 문의하였더니, 보고해 오기를 ‘을묘년에 청구해서 더 대출받은 4만 4백 석(石) 가운데 본영의 정퇴(停退)133) 된 각곡(各穀)을 가지고 차례로 수납한 것은 예전대로 도로 기록하였는데 이 내용은 이미 논보(論報)한 바 있다. 그런데 병진년에 채무 상환을 변통받은 뒤에 영하읍(營下邑)의 제반 폐해를 구제할 목적으로 더 대출받은 잉여곡(剩餘穀)을 채무 상환 절목에 부쳤는데, 이는 대체로 그렇게 변통해서 처리한 방법이 당초에 청구했던 뜻과는 모순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더 대출받은 것 가운데 3만 3백 석을 모두 유고(留庫) 조목에 부쳐야 마땅한데, 이번에 변통하는 것이 이미 계절이 끝나는 때를 만나 열읍(列邑)에 나누어 조적(糶糴)하는 일이 거의 마감되었기 때문에 더 대출받은 것 중에서 2만 2백 석만을 각읍(各邑)의 유고 조목에 도로 부쳤다.’고 하였습니다.
해영(該營)에서 정퇴된 곡물을 가지고 차례로 수납했다면 그 뒤에 즉시 그 숫자대로 차례차례 도로 기록했어야 마땅한데 여러 방면으로 폐해를 구제한 항목 속에 끌어넣었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기만 합니다. 전전(前前) 도신인 서매수(徐邁修)에게 파직시키는 전형(典刑)을 시행하소서. 그리고 소위 청구해서 더 대출받은 조목 가운데 도신이 이미 2만 2백 석을 각읍의 유고 조목에 도로 부쳤다고 하였으니, 이미 나누어 준 모곡(耗穀)은 추수 때에 원곡(元穀)에 도로 기록하도록 하고 내년부터는 으레 반절을 나누어 유고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함경도 관찰사 이집두(李集斗)가 ‘갑산부(甲山府)에 6월 18일 비가 쏟아져 동인사(同仁社)의 민가 1백 16호(戶)가 물에 잠기고 1백 38구(口)가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고 치계(馳啓)하니, 하교하기를,
"듣자니 매우 놀랍고 참혹하여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연전에 명천(明川)에서 발생한 물난리 때와 비교해 보면 크고 작은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한 사(社)만 혹독하게 피해를 입었으니 이 점에서는 명천보다 훨씬 심한 점이 있다 하겠다. 지방관에게 분부하여 익사한 곳에 특별히 제단(祭壇) 하나를 설치하게 하고, 제문(祭文)을 내려보내 명을 받든 제관(祭官)으로 하여금 죽은 자의 처자를 제단이 설치된 장소 밖에 불러 모으게 한 뒤 한편으로는 위로하는 유시를 내리고 한편으로는 제문을 읽어 마음이 풀어지도록 하게 하라. 그리고 죽은 자 및 완전히 물에 잠긴 집의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례(前例)를 뽑아 진휼(賑恤)하고, 재해를 당한 백성들은 산 자나 죽은 자 할 것 없이 신(新)·구(舊)의 환자곡[還上穀]과 신포(身布)와 잡역(雜役) 등을 일체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홍원 현감(洪原縣監) 이명연(李明淵)에게 임시로 겸춘추(兼春秋)의 직함을 띠게 하여 제관(祭官)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제도(諸道)의 가을 군사 훈련을 정지하였다.
유효원(柳孝源)을 경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7월 13일 을해
신대현(申大顯)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봉상시가 동교(東郊)의 적전(籍田)에 거둥하여 관예(觀刈)134) 할 것을 취품(取稟)하니, 하교하기를,
"자성(粢盛)135) 을 섭예(攝刈)136) 케 하는 것은 중대한 일로서 사체가 지극히 존엄한데, 성숙(成熟)된 사연을 초기(草記)로 아뢰기 때문에 매번 긴요치 않은 공사 축에 섞여 들어가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너무도 불경스러운 일이다. 지금부터는 예조에 공문을 보내고, 예조에서는 대·중(大中)의 사향(祀享) 때 직접 향축(香祝)을 전하는 일을 취품하는 예에 의거하여 품질 좋은 종이에 단자(單子)를 부착해 계문해서 판부(判付)받도록 하되 ‘교명(敎命)을 받들어 승선(承宣)한다.’는 서식(書式)을 사용하고 관등 성명을 모두 정식으로 쓰도록 하라. 친경(親耕)을 취품할 때에도 이 예를 적용하고 앞으로는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4일 병자
이조 판서 김재찬(金載瓚)이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사직하니, 체차를 허락하고 김문순(金文淳)에게 대행하게 하였으며, 심환지(沈煥之)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7월 17일 기묘
형조가 아뢰기를,
"방금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의 이문(移文)을 접수하였는데, 그 내용은 ‘서울에 거주하는 이씨(李氏) 성을 가진 양반이 노복들을 많이 이끌고 사근참(肆覲站)에 내려 와서는 본참(本站)의 감관(監官) 지흥린(池興麟)을 사사로이 결박해 서울로 돌아갔다. 그런데 데리고 온 하인들이 모두 형조의 사령(使令)이라고 일컬었으며 흥린을 전옥(典獄)에 가두었으니 일이 변괴스럽다. 소위 이씨 성을 가진 양반을 형조에서 엄히 조사해 법대로 시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부(西部)의 유학(幼學) 이규보(李圭輔)를 잡아 와 추문(推問)하는 한편 지흥린의 상처를 살펴보니 상흔이 낭자하였습니다. 규보가 법을 무시하고 포학한 짓을 자행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평문(平問)137) 에서 자복(自服)하였으니 법 규정대로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흥린의 상처를 보건대 죽을지 살지 아직 모르는 상태에 있는 만큼 규보를 고한(辜限)138) 기간 동안 엄히 수금(囚禁)하고 결말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율(律)대로 중하게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칭 형예(刑隷)라 하고 전옥에 잡아 가둔 한 조목에 대해서는 규보가 말하기를 ‘헌부에서 하례(下隷)를 빌려 잡아 가두었다.’고 하였으므로 헌부의 하례를 조사했더니, 감찰(監察) 이춘영(李春英)의 분부에 따라 그를 압송해 전옥에 넘겼다고 하였습니다. 법부(法府)의 하례는 공무를 집행하는 일이 아닌 한, 사람을 체포할 수 없게 한 법의 뜻이 매우 엄합니다. 그런데 향민(鄕民)을 마구 침해한 것만도 벌써 불법이라 할 것인데 전옥에 넘기기까지 하였으니 더욱 놀랍기만 합니다. 이춘영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 사건은 전에 듣지 못하던 것이다. 규보를 엄히 형신(刑訊)하여 공초(供招)를 받고, 헌부의 하례와 가칭 형예라고 한 자들도 형추(刑推)하여 공초를 받으라. 그리고 춘영은 해부로 하여금 엄히 신문하여 구두 진술을 받은 다음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감찰 이춘영이 구두 진술하기를 ‘아들이 이규보와 처남 매부 사이이기 때문에 안면을 봐 주느라 하례 한 사람을 빌려 주었다. 그 뒤에 과연 압송해 와 전옥에 넘겼으니 스스로 법을 무시한 죄에 떨어지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의 집안은 바로 3수(帥) 8곤(八閫) 가운데 하나에 속하고 있다. 그래서 옛날 일을 생각하여 후손을 찾아내 등용하였고 보면 그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봉직(奉職)하는 일을 의당 타인보다 배는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풍헌(風憲)의 직책을 수행하고 이행(裏行)139) 의 관직에 몸 담고 있으면서 이런 불법 행동을 자행하여 이름이 법조(法曹)의 초기(草記)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니 놀랍고 가슴아픈 것이 특별히 더 심한 점이 있다. 그런데 그가 진술한 내용을 보건대 외방 고을에 직접 보낸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그 하례가 분명히 경계를 넘었고 보면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죄를 어떻게 면할 수야 있겠는가. 파면시켜 방송(放送)하되 장가(將家)의 본색은 지키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니, 훈국으로 하여금 영을 전해 권무과(勸武科)140) 에 응시하게 하는 한편 병조와 내금위(內禁衛)로 하여금 구전(口傳)141) 으로 시행하게 함으로써 법도 펼쳐지고 복록의 은택도 받을 수 있도록 하라.
그런데 일에 서툰 감찰이 설혹 관례를 잘 몰라 규정을 어겼다 하더라도 장관이 된 자가 소관 업무를 미연에 잘 가다듬어 처리했다면 옛날에 볼 수 없던 놀라운 일이 어찌 어사 이행(御史裏行)의 반열에서 발생할 수 있었겠는가. 대사헌을 파직하라. 그리고 장관과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니 헌부의 대간들을 체차하라."
하였다.
7월 18일 경진
전부(典簿)142) 홍취영(洪就榮)143) 에게 조부의 제사를 섭행(攝行)하도록 명하면서 하교하였다.
"고(故) 목사(牧使) 홍수영(洪守榮)은 그 집안에서 증조를 계승한 종손(宗孫)인데 이제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들이 어려서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실 수가 없으니, 외가의 종사(宗事)를 생각하노라면 애통스럽고 꺼림칙한 마음이 들면서 어떻게 이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는데, 너그럽게 위로할 방도를 찾아내느라 죽은 이를 위하여 슬퍼할 틈도 없다.
장례를 치르기 전에야 제사를 본디 폐지할 수 있겠지만 장례를 치른 다음에는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가령 이천(伊川)144) 이 정앙(程昻)145) 을 놔두고 직접 태중(太中)146) 의 제사를 주관한 일을 상고하건대, 그 일은 감히 시비를 따질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끌어다 쓸 수 없는 점도 있다. 그러나 이계선(李繼善)의 집에서 종자(宗子)가 어리기 때문에 이계선이 대행하려고 하자 주자(朱子)가 대신 주관하도록 허락하면서 그 제사의 주인 이름만은 종자가 주관하는 것으로 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천고에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으로서 《예기(禮記)》에도 나와 있는 일인 것이다. 즉 ‘종자가 어리면 최마(衰麻)로 싸서 안고, 조객(吊客)에게 절을 할 때 종자 대신 그가 절을 한다.[子幼則以衰抱之人爲之拜]’147)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니, 이는 대체로 안은 자가 섭행(攝行)하는 것이지 직접 행하는 것은 아님을 말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순연(荀連)이 죽자 순집(荀輯)으로 하여금 순욱(荀勗)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어찌 크게 차이가 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내용을 중시하는 집안에서는 친친(親親) 위주로 하고 형식을 중시하는 집안에서는 존존(尊尊) 위주로 하는데 이것이 은(殷)과 주(周)의 예(禮)를 일괄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종자의 나이가 어릴 경우 존속(尊屬)이 대신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들어 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정자(程子)의 이른바 ‘방지(旁枝)도 직간(直幹)이 된다.’는 것이요, 주자의 이른바 ‘제사를 지내는 주인이 꼭 적장자(嫡長子)만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요, 《춘추전(春秋傳)》에서 ‘환공(桓公)이 어리자 은공(隱公)이 섭행(攝行)하였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예(例)에 공사(公私)의 차이는 있더라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통행되는 규범이고 보면 이 집의 제사를 주관하는 일과 관련하여 섭행하는 사람을 정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죽은 이의 동생에게 아들이 있다면 다시 더 의논할 것이 전혀 없을 것인데 그 아들이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봉조하(奉朝賀)148) 의 아들 가운데 중자(仲子)149) 의 아들이 섭행해야 마땅한데 현재 거상(居喪) 중으로서 아직 복을 벗지 못한 상태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봉조하의 아들 중 셋째와 넷째가 아직 생존해 있으니 그들에게 맡기면 될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친족 관계로 말하면 그들은 죽은 이의 아들에 대해서 종조부(從祖父)가 되는데, 종조부가 종손의 일을 섭행한 것은 예로부터 예가 없으니 새로 만들어 행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런데 ‘현재 여러 손자들이 있으면 한 손자를 택해 주인 대신 행하게 한다.’는 서막(徐邈)의 말이 《통전(通典)》150) 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은 즉 여러 손자 중에서 하나만 취하면 된다는 말로서 당초 백·중·숙·계의 차서를 분명히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체로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주자는 바로 주유보(朱惟甫)의 셋째 아들인 주진(朱振)의 손자였는데도 오히려 그 묘제(墓祭)를 주관했었다. 대저 장자의 손자가 어리고 중자(仲子)에게 소생이 없을 경우에는 그 셋째 아들의 손자를 데려다 섭행케 했다는 것을 이를 통해서도 충분히 상고할 수가 있다. 그리고 종자(宗子)의 나이가 어려도 주인의 이름을 갖게 하는 것은 만세(萬歲)의 종통(宗統)을 엄히 하기 위함이요, 지손(支孫)이 섭행하다가 종손이 장성하면 돌려주는 것은 한때 방편으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의리에 입각한 것이다.
‘임금이 명하여 종(宗)을 삼게한다.’는 글이 《의례(儀禮)》의 주소(註疏)에 분명히 실려 있다. 그런데 더구나 훈척(勳戚)과 대신의 집에서 제사와 관련된 일을 조정에 품명(稟命)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또한 바로 나라의 법이고 보면 내가 이에 어찌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전부 홍취영을 주 문공(朱文公) 집의 고사에 따라 봉조하 본집으로 들여보내 그 제사를 대신 받들게 하면서 장손이 장성하기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예의(禮義)에 비추어 봐도 진실로 타당하고 정문(情文)을 참작해 봐도 흠 될 것이 없으니 이 뜻을 지돈녕은 알도록 하라. 지돈령 형제가 비록 서행(序行)으로 보면 제일 높다고 하더라도 예에 맞춰 섭행할 수는 없는 일이니 주묘(朱廟)에서 야(埜)151) 가 옆에서 도와 주었던 규범을 대략 본받아 서로 보좌하고 매달 초하루에 문안드리는 일 역시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다. 모두 이 뜻을 잘 알도록 하라."
7월 19일 신사
판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소장을 올려 사적인 의리를 진달하면서 사신의 임무를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마지 못해 따랐다.
이경일(李敬一)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는데 곧 이어 그의 어미의 병 때문에 체차시키고, 서용보(徐龍輔)를 대신 임명하였다. 송환기(宋煥箕)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치중(李致中)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이만수(李晩秀)를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적소(謫所)에서 죽었는데, 죄명(罪名)을 깨끗이 씻어주고 직품(職品)에 따라 반장(返葬)토록 명하였다.
7월 20일 임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국 당상 가운데 병을 이유로 못 나오겠다고 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판이 전일 나에게 꾸중을 들었기 때문에 편치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내가 백성의 일을 밤낮으로 신경 쓰다 보니 신기(神氣)가 나른하기만 하다. 따라서 이와 같이 긴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마는 관계되는 바가 작은 듯 하면서도 크니 끝내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다.
대저 병신년152) 이후로 20여 년 동안 군신(君臣) 상하가 평소 강구해 온 것은 바로 이 의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릇 의리라고 하는 것은 정밀하게 살핀 뒤에야 한결같이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으로서, 잠사(蠶絲)나 추호(秋毫)처럼 미세한 것까지도 분석해서 미루어 밝혀야만 진정 큰 의리에 대해 스스로 분명하고 엄한 자세를 견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춘추(春秋)》를 지으실 때에 혐의를 분별하고 은미한 뜻을 밝히는 것을 첫째 목표로 삼으셨던 것이다. 내가 40년 동안 해 온 공부가 오로지 여기에 있는데 일상적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모든 일에 있어 아무리 시간적으로 급하거나 혹은 지극히 사소한 일을 대할 때라도 남들은 알지 못했어도 나만은 공력을 쏟으면서 감히 한시도 손을 놓지 않았으니 마음이 매우 고달팠다고 말할 만하다.
삼대(三代)153) 이전에는 총명과 예지를 소유한 성인들이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되었는데, 삼대 이후로는 사도(師道)가 땅에 떨어져 임금과 스승의 책임을 제대로 다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仁)을 행함에 있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154) 고 성인께서 가르쳐 주셨으니, 오늘날의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사도(師道)를 자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일단 사도를 펼치는 책무를 자기의 직분으로 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면 사도가 있는 곳이 바로 도(道)가 있는 곳인데 도의 밖에 이치가 없고 이치의 밖에 의리가 없다면 이치가 있는 곳이 바로 의리가 있는 곳이라 할 것이다. 내가 임금과 스승의 위치에 있으면서 이미 이 의리에 대해 분명히 가려 깊이 살피고 확고하게 지키며 독실하게 믿고 있는 만큼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의 입장으로서는 다만 가르침을 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한데 세상 풍조는 갈수록 투박해져 태반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거나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는 무리들 뿐이니 어찌 너무도 기괴한 일이 아니겠는가.
혹은 말하기를 ‘큰 의리의 차원에서 말하건대, 벗어나면 천하게 보고 들어가면 주인으로 섬긴다155) 해도 안 될 것이 없다.’고 하는데, 이에도 역시 허다한 분수가 있는 법이거늘 어떻게 사람마다 이럴 수가 있기에 막중한 의리를 가지고 그 자들이 까불며 희롱하는 자료로 삼게 할 수가 있겠는가. 만약 조정에 참으로 우리 당(黨)의 인사가 있다면 이런 무리들에 대해 북 치며 성토하는 일을 어찌 늦추겠는가. 이른바 의리라고 하는 것이 거꾸로 이런 자들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있는데, 이를 막지도 못하고 중지시키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 비유하자면 마치 성곽도 세우지 않은 채 땅에 거하는 것과 같고 배 타고 가면서 노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나 할 것이다. 시(詩)에 이르기를 ‘버들을 꺾어 만든 채마밭 울타리, 광부(狂夫)도 두려워 넘지 못하네.’156) 라고 하였는데, 광부도 두려워했다면 나부(懦夫)는 물론 두려워할 줄 알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들은 전혀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물결에 휩쓸려 따라가기만 하면서 안정을 찾지 못한 채 동요하고 있으니 이런 자들은 정말 꾸짖을 가치도 없다 하겠다.
이번의 일만 해도 그렇다. 만약 ‘홍수영(洪守榮)은 문과(文科) 출신의 관원이 아닌데다가 아무 연고 없는 사람과는 조금 다르니 꼭 과도하게 은전(恩典)을 베풀 것까지는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혹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생전에 이미 녹봉을 받기 위해 벼슬했었고 처지 또한 자별한데 그의 사후에 조정에서 은휼(恩恤)을 베푸는 일을 어떻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고(故) 참의 김내연(金乃衍)도 자계(資階)로 보면 하대부(下大夫)에 속하지만 척리(戚里)로서 음관(蔭官)을 지낸 것은 마찬가지이니 어떻게 그 예를 원용(援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물(賻物)을 만약 죽은 뒤에 논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면 이 사람 생전에 왜 사적(仕籍)에 놔두었는가.
전일 호판이 유사 당상과 입시하여 경연에서 내린 분부를 함께 들었었는데 제사를 섭행(攝行)시키는 일을 언급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도 다른 말이 없다가 경연 석상을 물러가고 나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청대(請對)하는 행동을 취하였다. 호판은 그가 외가쪽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런 거조를 취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인정으로 보나 천리로 보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이겠는가. 그리고 순식간에 태도가 딴판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는데 이 역시 어떻게 생각이나 한 일이었겠는가.
그 다음날에는 또 홀연히 집의 조덕윤(趙德潤)이 상소하였기에 내가 한 번 훑어 보았는데, 그 가운데 몇 글자는 눈에 거슬린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감히 말해서는 안될 혐문(嫌文)이었다. 의리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어떻게 이런 인사(人事)가 있단 말인가. 고(故) 중신(重臣)의 행장(行狀)을 홍낙임(洪樂任)에게서 부탁받았다고 하는데, 어제 행장을 지어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오늘 갑작스럽게 탄핵하는 글을 내놓다니 몸을 뒤집고 모양을 바꾸는 재주가 순식간에 이루어져 헤아릴 수가 없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마는 이것이 또한 어찌 그의 본심이기야 하겠는가. 그 사람됨이 유순한 관계로 쉽게 사람의 조종에 놀아나고 만 것인데 이번의 일을 어떤 사람이 사주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말은 하지 않더라도 어찌 혹 모르기야 하겠는가.
대저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이 천자로부터 나온 뒤에 공경과 대부로부터 말단의 관원에 이르기까지 각자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의 규모를 보면 이것과는 서로 배치되는 결과를 면치 못해 기강이 날로 문란해지고 조정이 날로 낮아지고 있는데, 해마다 다르고 달마다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들고 있다. 《중용(中庸)》의 ‘수도(修道)를 교(敎)라 한다.’는 대목을 주자가 예악과 형정으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예악으로 유도하는데도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형정을 써서라도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자들은 말로는 의리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해 관계를 돌아보고 따지는 나머지 거꾸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리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빚어내고 있다. 근신(近臣)을 말하더라도 그렇다. 근신이 소중한 것은 상의 분부를 널리 알리고 상의 뜻을 밝혀 가까운 데에서부터 먼 곳까지 친한 이들로부터 소원한 이에 이르기까지 겉과 속이 훤히 밝혀지고 안과 밖이 서로 통하게 하여 모습이 바르면 그림자도 곧게 되는 효과를 자연히 거둘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인데, 근신이 된 자들이 상의 분부를 알리고 상의 뜻을 제대로 밝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연전에 막는 자를 밀치고 문을 부수는 일까지도 있었으니 이것이 어떻게 된 신하의 직분인가.
이번의 호판의 일과 같은 것은 내가 꼭 심각하게 따지고 싶지도 않다. 본래 얌전하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인 만큼 뜬 의논에 이끌려 행동했다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번에 인의(引義)157) 한 것이 마침 대간의 소장이 올라온 뒤에 있었는데 아직 아래에 내리지도 않은 소를 호판이 무슨 수로 얻어 듣고 인혐(引嫌)했단 말인가. 옛날 선조(先朝) 때에 이와 같은 일로 지엄한 분부를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의 호판의 일에 대해서도 내가 ‘대간의 소장 때문에 인의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저 ‘엄한 분부를 받았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한 것은 참으로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 뒤로는 아직 내리지도 않은 소 때문에 인의하는 경우에는 특별히 더 엄히 단속하여 옛 규정을 신명(申明)토록 하라.
옛날 선조(先朝) 때에 신임(辛壬)158) 의 의리는 특별히 성궁(聖躬)과 관계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에게 부쳤던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과 같은 경우는 관계된 바가 엄중하기 그지없는데 내가 이 의리에 대해서 어떻게 혹시라도 엄히 하지 않고 느슨하게 할 수 있겠는가. 재작년 이전에 틈을 엿보며 기회를 노리는 무리들이 그치지 않을 염려가 사실 있기 때문에 성(成)·정(鄭)의 일을 엄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성·정의 처분 결과가 나왔는데도 조덕윤 같은 자가 감히 ‘어떤 말을 하더라도 죄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고 인식한 나머지 이렇게 상소하는 행동을 취했으므로 내가 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교하게 된 것이다. 이 경연에서 이렇게 하교를 한 번하였다마는 어떤 틈을 엿보는 무리들이 또 장차 잽싸게 성·정의 상투적인 수법을 답습할지 모를 일이다. 내가 전년에 처분한 것을 보고도 한층 더 못할 말없이 입을 놀린 사람이나 오늘 내가 이렇게 하교하는데도 의리면에서 약간 누그러졌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나 이 자나 똑같이 의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내가 이 점에 있어서는 굳게 마음을 잡고서 그지없이 정밀하고 상세히 살펴 은미(隱微)한 것을 환히 드러나게 하면서 천리(天理)에 근본을 두고 인정(人情)을 참작하고 있는 만큼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니 진정 양심이 있는 자라면 그 누가 존경하고 믿으며 성실히 따르지 않겠는가.
요즘 들어 조사(朝士)의 이름을 가진 자들을 보건대, 집안에서는 어버이에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지도 못하며 나와서는 또 어른을 공경하고 윗사람을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 채 그저 가르침이라면 일체 따르지 않으면서 그 일을 능사로 알고 있다. 부자(父子)의 관계가 있은 다음에 군신(君臣)의 관계가 형성되는 법인데 이미 자제로서의 도리를 극진하게 행할 수 없다면 어떻게 군신의 의리를 알기나 하겠는가. 명령한 것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가 되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 법이니, 지금 내가 명령하는 것이 만약 좋아하는 것과 반대가 된다면 따르지 않아도 좋다. 그런데 지금 좋아할 일을 명령하고 있는데도 아래에서 위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이 그 도리에 어긋나고만 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잘 양육된 자들도 그 자취를 보면 현저하게 배치되고, 보잘것없는 출신으로 은혜를 유독 많이 받은 자들도 이랬다저랬다 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세도(世道)가 이러하고 조정의 기상이 이러하니 어찌 한심하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가령 정이환(鄭履煥)이 병신년 초두에 상소한 것을 보면 말하기 어려운 것까지 거론하긴 하였으나 그 마음만은 화복(禍福) 따위는 치지 도외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죄를 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리들의 경우는 겉으로는 의리를 가탁하면서도 속으로는 틈을 엿보고 기회를 노리면서 정이환이나 한유(韓鍮)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까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고상한 행동으로 삼으려 하고 있는데, 이들이 과연 평소 마음속으로 궁리하고 있는 것이 그 전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야말로 말은 유자(儒者)처럼 하면서 행동은 묵가(墨家)처럼 하는 자들이라 하겠다. 내가 얼마간 짐작하고 있는데 조덕윤은 정사(政事)할 때 의주(擬注)에 영원히 거론치 말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홍수영이 죽었을 때 호조에 명하여 부물(賻物)을 넉넉히 지급하라고 하였다. 이에 진관이 성명(成命)의 중지를 청하려고 청대(請對)하였는데 상이 하교하여 준절하게 꾸짖자 진관이 물러갔다. 덕윤이 상소하여 그 일을 말했는데 역시 반급(頒給)치 말도록 명하였고, 이에 이르러 또 이렇게 하교한 것이었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제주(濟州)에 곡식을 비축하자는 의논이야말로 육지나 섬 모두에 막대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즘 듣건대 섬에 계속 풍년이 들고 있다 하니 이런 때에 거두어 모아 관고(官庫)에 비축해 둠으로써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케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목사에게 엄히 신칙하여 즉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무역해 두게 하고 몇 석(石)이나 되는지 장계로 보고토록 하라."
하였다.
7월 21일 계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다.
하교하였다.
"삼가 우리 목릉조(穆陵朝)159) 때 다시 일으킨 사업을 상고하건대, 처음 평양(平壤)의 승첩에서 기반을 닦고 마지막에 남해(南海)의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때에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서천 부원군(西川府院君) 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가 대국에 호소하여 우리 나라 사방을 안정시키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그 사실이 금석(金石)에 새겨져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눈과 귀를 비추고 있다. 오늘 이른 아침에 신종 현황제(神宗顯皇帝)의 기신을 맞아 요배(遙拜)하노라니 바람은 거세게 불고 물줄기 역시 동쪽으로 흘러160) 슬프게도 나의 탄식을 자아내면서 진령(榛苓)의 감회161) 가 더욱 새롭기만 하였다.
옛일을 떠올리건대 당시 서천 부원군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떠날 때에 성조(聖祖)께서 유시하시기를 ‘나라의 존망이 경의 이번 걸음에 달려 있다.’고 하였는데, 급기야 혼자 수레를 몰고서 북경(北京)에 들어가 사마문(司馬門) 아래에서 통곡하니, 석 상서(石尙書)162) 가 ‘진(秦)나라 조정에서 통곡한 것163) 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고는 천문(天門)에 나아가 주달하자 황제께서 크게 노하시면서 새서(璽書)를 먼저 내리고 행인(行人)이 울며 호소한 정성을 표창하고 들어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왕사(王師)를 속속 출동시켜 섬 오랑캐들의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고 마침내 우리 나라의 양경(兩京)164) 과 팔로(八路)를 수복하게 함으로써 억만년토록 편안한 반석 위에 놓이게 하였으니, 이 모두가 우리 현황제께서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고 어린 자를 돌보아 준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善) 덕분인 것으로서 영원히 잊지 못할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황제께서 위엄을 떨치도록 한 공을 말한다면 당시 여러 공신(功臣)들 중에서도 서천 부원군이 단연 으뜸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선조(先朝) 때의 일을 삼가 보건대, 3월 19일에 대궐 뜰에서 망배(望拜)를 행할 적에 고(故) 상(相) 문정공(文貞公) 김육(金堉)이 관소(館所)에서 구원을 요청했던 옛 일에 대한 감회가 일어나 특명으로 그 손자인 장신(將臣) 김성응(金聖應)을 반열에 참여시키게 하고 이어 품급(品級)을 올려 주도록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더구나 오늘 이런 예를 행하면서 그 뜻을 전해 보여주는 일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관원을 서천 부원군의 사판(祠版)165) 이 있는 곳에 파견해서 제사를 올리도록 하라. 제문은 내가 직접 짓겠다. 그리고 생각건대 숙묘(肅廟) 갑신년에 종백(宗伯)166) 인 신하가 건의한 결과 특별히 군직(軍職) 한 자리를 마련해서 그 사손(祀孫)을 대우하게 했었는데 그 뒤로 유사(有司)가 준수하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서천 부원군의 사판이 어디에 있고 사손은 누구인지 이조와 예조로 하여금 찾아서 보고하게 하라.
일찍이 듣건대 영원백(寧遠伯)167) 의 초상화가 강도(江都)에 붙어 있는데 용맹스럽게 전투를 독려하는 그 모습이 아직도 사람의 마음을 엄숙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 사당에 액호(額號)가 있는지 수신(守臣)에게 하유하여 사실을 취집해서 계문(啓聞)토록 하라. 그리고 영원백 집안의 총관(摠管) 이원(李源)의 아들 효승(孝承)이 상을 당했는데, 마침 겸대(兼帶)하고 있는 별군직(別軍職)에 따라 군자감의 산료(散料)를 지급해야 한다 하더라도 산료와 녹봉(祿俸)은 그 체단(體段)이 각각 다르니 받는 산료를 군직의 녹봉으로 바꿔서 복을 벗을 기간 동안 임시로 지급토록 하라. 전 부사 이종윤(李宗胤)은 바로 총병(摠兵)의 7대손으로서 영당(影堂)을 받드는 곳에 거처하고 있는데 즉시 어장(御將) 이한풍(李漢豊)으로 하여금 영중(營中)의 군직에 자리를 하나 마련한 뒤 종윤을 후보자로 선정해 들이도록 하라.
황제의 은혜를 이야기하려니 말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시간이 갈수록 그 은혜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가 하면 대의(大義)가 날이 갈수록 어두워져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주 부자(朱夫子)가 훈계한 여덟 글자168) 마저도 까마득히 망각하고 있고 보면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이른바 천지의 떳떳한 의리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존주록(尊周錄)》을 편집하도록 한 것인데, 시일만 끌고 지체하여 책으로 만들어질 기약이 없으니, 내각(內閣)169) 으로 하여금 이를 모두 잘 알아서 교정(校正)하는 신하들에게 알리도록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즉시 이 일에 전념하여 책이 완성되도록 하라.
장수들에게 명하여 동쪽을 구원하게 한 것은 곧 우리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 은혜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한 편 보전(寶典)을 반포해 내려준 것은 일시에 2백 년 동안 받아온 무함을 씻어준 것170) 이니, 군대로 구원해 준 하늘과 같은 그 망극한 은혜보다 만 배는 더 크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을 보건대, 고(故) 상(相) 이여(李畬)가 기록한 말 중에 ‘성조(聖祖)께서 지성으로 황조(皇朝)를 섬겼고 황조에서도 부모처럼 우리 나라를 돌보아 준 것 역시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렇듯 성조께서 황조의 마음을 얻었으므로 광국(光國)171) 에 그치지 않고 다시 임진 왜란 때 재건해 주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이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다. 광국의 원훈(元勳)은 곧 고 상 충목공(忠穆公) 유홍(兪泓), 증 영상 문정공(文貞公) 황정욱(黃廷彧), 증 영상 문열공(文烈公) 윤섬(尹暹) 등인데 충목이 상사(上使)로서 보전을 받들고 우리 나라에 왔었다. 지금 그의 적장손(嫡長孫) 한장(漢章)이 노직(老職)으로 기령군(杞寧君)의 봉호(封號)를 이어받았는데, 그 역시 이조로 하여금 거주지를 탐문한 뒤 돈령(敦寧) 자리가 있으면 동돈령(同敦寧)에 의망해 들이고 없으면 동추(同樞)의 실직(實職)으로 이번 정사(政事)에서 임명하여 이 날을 기념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삼게 하라."
이조가 아뢰기를,
"정곤수(鄭崑壽)의 사판(祠版)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사손(祀孫)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더니, 6대손 정덕빈(鄭德彬)이 올해 나이 73세로 장단(長湍) 땅에 우거(寓居)하고 있고 사판은 그의 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기읍(畿邑)에 거주하는 서천 부원군의 사손이 있다고 하나 나이가 70이 넘었으니 늙은 것이 애석하다. 어떻게 벼슬길에 나설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일단 들은 이상 구전 차출(口傳差出)하는 형식으로 첨지 자리를 하나 만들어서 의망해 들이고 역마(驛馬)를 주어 출발시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후주(厚州)를 신설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 읍(邑)으로 보나 진(鎭)으로 보나 여태 정해진 절목이 없으니 이제 와서는 어떻게든 조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전에 결정했던 대로 독진 방수장(獨鎭防守將)으로 명호(名號)를 정하고, 첨사(僉使)의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는 정원을 시켜 해조에서 만들어 보내게 하소서. 그리고 그 지방의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절목을 강구해 정한 뒤 계문하게 함으로써 이를 참작해 복주(覆奏)해서 시행할 수 있는 자료로 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22일 갑신
《두육분운(杜陸分韻)》이 완성되었으므로 신하들에게 반사(頒賜)하였다.
상이 일찍이 생각하기를 ‘시교(詩敎)172) 가 느슨해진 뒤로 《시경(詩經)》의 남긴 뜻을 잃지 않은 것을 찾아 본다면 오직 두보(杜甫)가 거기에 가까운데 율(律)은 특히 성(聖)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송(宋)나라의 육유(陸游) 역시 그 체(體)가 순수하고 음(音)이 우아하여 낮게 깔리며 애조를 띠는 것과는 같지 않다.’고 하여 특별히 드러내어 밝혔었다. 그리고는 여러 문신(文臣)들에게 명하여 이문원(摛文院)173) 과 고문관(考文館)174) 에 모여서 교정하는 일을 분담케 한 뒤 운서류(韻書類)의 체재로 편집하고 정리자(整理字)175) 로 간행케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당시의 풍조에 침을 가해서 교정하기 위함이었다.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이 아뢰기를,
"총융청(摠戎廳)의 보군(保軍)을 보충해서 세울 즈음에 원군(元軍)으로 하여금 해청(該廳)에 보고하게 하고 그런 다음에 해청에서 본읍(本邑)에 알려서 그에 따라 즉시 원안(原案)에 찌를 붙이게 하면 역시 중간에 누락되는 장정이 없게 될 것이니 이렇게 준행하는 것이 온당할 듯 싶습니다. 그리고 해청이 이문(移文)하여 부족한 보군 69명을 각읍(各邑)에 더 배정하도록 하였습니다만 이는 이미 감축한 정원 이외의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듯 군정(軍丁)을 얻기가 지극히 어려운 때를 당하여 가외로 분담시킬 수는 없으니 이 조목은 그냥 내버려두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총융청이 아뢰기를,
"경외(京外)에 산재하고 있는 본청의 표하군(標下軍)은 8백 52명인데, 1인당 1명씩 보군을 지급하는 것으로 경연 석상에서 품달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궐원이 생기는 대로 보충해서 세우지 않기 때문에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이고 간교한 속임수가 점점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 총융사(摠戎使) 조심태(趙心泰)가 재임하고 있을 때 각읍별로 샅샅이 조사하여 사실대로 바로잡은 뒤에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서 기영(畿營)에 보내 주었는데, 이때 보군의 정원에서 부족한 숫자는 69명이었으며, 앞으로 궐원이 생기는 대로 보충하고 보전(保錢)176) 을 거두어들이는 등의 절목(節目)은 군사가 있는 각읍에서 주관하여 거행해야 한다는 뜻을 알렸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경기 감사 이재학의 거조(擧條)를 보건대 ‘고을 원들의 말을 다시 들어보건대, 보군을 보충해서 세우고 보전을 수납하다 보면 오히려 고을에 폐를 끼치게 된다고 하니 차라리 예전대로 하는 것이 편하겠다. 그리고 보군 69명을 가외로 분담시킬 수는 없으니 그냥 놔두었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군보(軍保)177) 를 두게 한 법의 뜻이 원래 엄중한데, 예전부터 군졸들로 하여금 스스로 추천하여 보충하게 하고 스스로 번전(番錢)178) 을 거두게 하다 보니 지극히 소홀하게 됨은 물론 문란하기 짝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이렇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지금 바로잡는 때를 당하여 각자 지방 고을에서 일체 관장하며 단속해야 할 것이니 그런 다음에야 간교한 속임수를 막고 군적(軍籍)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보충되지 않은 69명에 대해서 도신(道臣)이 비록 감축된 정원 외에 더 배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건대 본청의 표하군이 1천 65명이었던 것이 재차 갑인년에 가서 경연 석상에서 품달하여 감축한 결과 8백 52명으로 정원이 정해지면서 1인당 단지 보군 1명씩만 지급토록 하였고 보면, 보충되지 않은 69명은 원래 8백 52명이라는 숫자안에 포함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 보건대 지금 양정(良丁)을 얻기가 지극히 어려운 때에 무턱대고 옛날처럼 하자고 의논하기도 어려우니, 이 일은 본청의 향(鄕) 표하군 중 잔열(殘劣)한 자들을 뽑아 내어 보군으로 강등시키고 그 대리로는 경(京) 표하군의 대년군(待年軍)179) 중에서 자원을 받아 보충토록 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할 경우 이는 서울과 지방간에 명색(名色)을 서로 바꾸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는 만큼 본청의 입장에서는 정원의 손실이 없게 되고 외방 고을의 입장에서도 더 인원을 배정받지 않게 되니,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경기 관찰사 이재학이 상소하기를,
"총융청 군보의 일과 관련하여 신이 지난번 아뢰었던 것은 오로지 군정(軍丁)이 누락되는 폐단 때문이었는데, 사실을 조사하여 바로잡으라는 분부를 삼가 받들고는 즉시 해청(該廳)과 문서를 주고받으면서 안책(案冊)을 작성한 뒤 각읍(各邑)에 나누어 주어 그것을 근거 자료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해청이 모자라는 인원을 보충하고 보전(保錢)을 받는 등의 일을 모두 본읍(本邑)에 맡기자는 내용으로 초기(草記)를 올렸습니다만, 열읍(列邑)의 사정상 그렇게 하기에는 크게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누락된 군보를 조사해놓은 안책(案冊)이 이미 있는 만큼 원군(元軍)이 고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즉시 궐액(闕額)에 찌를 붙여놓는다면 중간에 빠질 걱정이 저절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장정을 뽑아내기가 지극히 어려운 때를 당하여 만약 본읍으로 하여금 보충시키도록 한다면 군정(軍政) 하나가 더 첨가되어 관(官)과 민(民)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묘당에게 명하여 품처(稟處)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총융청의 군보는 애당초 영읍(營邑)에서 맡아 다스리지 못하게끔 되어 있었으니 이는 대체로 군보를 스스로 얻어서 충정(充定)시키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스스로 얻는다고 하는 것은 장정을 찾아내는 대로 보충하는 것으로서 형편을 보아가며 그 숫자를 메우는 것이기 때문에 멋대로 증감하여 허실을 분간하기 어렵게 된 관계로 한정(閑丁)들이 도망쳐 숨는 소굴이 되고 말았으니 도신(道臣)이 경연에서 품달하여 바로잡도록 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빠진 인원을 보충시키고 보전(保錢)을 받아들이는 절목을 마련할 때 처음에 그만 각읍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웠었는데 이를 해청(該廳)에 이관하자고 의논한다면 이것이 비록 민읍(民邑)의 사정을 그때 자세히 살피지 못한 탓에 이루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해청의 입장에서는 이를 근거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장정을 뽑기가 지극히 어려운 때를 당하여 빠진 인원을 보충시키고 보전을 받아들이는 일을 만약 각읍으로 하여금 거행케 한다면 그 조사하는 것이 세초(歲抄)180) 와 다름없게 되어 사사로이 받는 것이 문득 상납으로 변하면서 관과 민 모두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니, 이는 참으로 도신이 논한 바와 같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보군을 얻고 스스로 보전을 거두는 일은 모두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시행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해청의 군보가 비록 금위영(禁衛營)이나 어영청(御營廳)과 다른 점이 있다 할지라도 군대에 소속되기는 마찬가지인데 영읍에 성안(成案)을 비치하지 않아 근거할 바가 없게 함으로써 함부로 칭하며 군보로 들어오는 폐단이 있게끔 한다면 일의 체면으로 헤아려 볼 때 참으로 소루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보군을 보충하고 보전을 거두는 일을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하며 그냥 놔둔다고 하여 안책(案冊)을 비치해야 하는 중요한 방책마저 치지도외한 채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영읍(營邑)에 각각 안책을 하나씩 비치해 두었다가 혹 빠진 인원이 있을 경우에는 원군(元軍)이 스스로 얻기를 기다리고, 그런 다음 해영(該營)에서 기영(畿營)으로 이문(移文)하여 알려 오면 여기에 찌를 붙임으로써 예전처럼 문란하게 되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양쪽에 똑같이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손(祀孫)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7월 23일 을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 상(相) 이여(李畬)가 저술한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의 발문(跋文)을 보면서 은미한 뜻을 담은 그 문장 표현에 나도 모르게 감탄하였다. 숙묘조(肅廟朝) 때 예우한 것은 남구만(南九萬) 이후로는 바로 고 상 한 사람 뿐이었다. 숙묘께서 은례(恩禮)를 성대히 베푼 것은 과거 역사를 돌아보아도 드문 일이었는데 성조(聖祖)로부터 이런 예우를 받았으니 그 사람의 인격을 알 만하다."
하니,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고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가 일찍이 말하기를 ‘군상(君上)이 아랫사람들을 얕잡아 낮추어 보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들 스스로 존경받지 못할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촌(睡村)181) 상국(相國)과 같은 이는 잠필(簪筆)182) 로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정승의 지위에 오를 때까지 평소 은례를 받은 것이 시종 일관 변함이 없었으니, 이는 대체로 성(誠)과 신(信) 두 글자에 대한 공부가 깊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계(狀啓)한 문자를 보면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 마치 말 잘하는 앵무새와 같으니 실제 내용과는 모두 어긋날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것들을 고적법(考績法)183) 으로 논한다면 하고(下考)를 매겨야 마땅할 것이다. 강우량(降雨量)은 1미리라도 감히 제멋대로 바꿔서는 안되는데, 근래 도신(道臣)들이 하는 짓을 보면 비가 부족한 곳을 혹 너무 많이 왔다고 말하기조차 하니, 이로써 보건대 비가 과다하게 온 곳은 또 필시 감축해서 말했으리라는 것을 추측해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재해가 든 해에 도백(道伯)이 생소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제도(諸道)의 도신치고 어느 한 사람 숙련된 자가 없는데 재주로 볼 때 감당하기 어려우니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방면(方面)184) 의 소임을 조용히 수행해 나간 자로는 봉조하 이명식(李命植)만한 이가 없고, 지식과 국량(局量)이 있는 자로는 또 고 우상(右相)만한 이가 없다."
하였는데, 고 우상은 윤시동(尹蓍東)을 지칭한 말이었다.
삼남(三南)의 시종(侍從) 출신 수령들에게 명하여 각각 백성의 고통을 진달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영남 어사(嶺南御史) 여준영(呂駿永)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감영(監營)의 각고(各庫)에서 환곡(還穀)을 처리하는 것은 폐단이 있으니, 전적으로 부창(府倉)에 소속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관문(關文)을 보내 해도(該道)에 물어보니, 경상도 관찰사 이의강(李義綱)이 말하기를,
"감영에 소속된 사람들이 애오라지 의지하는 것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니 일체 혁파시키는 것을 무턱대고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이에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도신(道臣)의 의논대로 그냥 놔둘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민폐를 방관하는 것과 비슷하게 되는 것인 듯도 하다마는 혹시 다른 폐단이 나올지도 모르겠으니 우선은 경의 말을 따르도록 하겠다. 이런 내용으로 엄히 도백(道伯)에게 신칙하여 무슨 방법을 쓰든 간에 바로잡고 단속하여 기필코 고질적인 폐단을 제거토록 하라.
그런데 올해 본도(本道)의 농사 작황과 백성의 형편 탓으로 봄부터 여름까지 조가(朝家)에서는 감히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마시지 못했고 감히 몸에 편한 의복을 입고 벗지 못했으며 또 감히 한 시각도 스스로 안일하게 보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의 성의(誠意)를 방백과 수령들로 하여금 보고서 느끼게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야말로 날마다 민원을 접하고 백성의 고통을 듣게 되는 자들인 만큼 자연히 측은하게 여기는 본심이 우러나 이를 감추려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니 만약 자기만 살찌울 욕심에서 백성을 학대한다면 양심에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먼저 도백부터 눈에 뛰는 대로 절손(節損)하여 열읍에 모범을 보이도록 하라. 그리고 도내의 시종 문관 출신 수령들은 각각 자신의 고을 및 음관(蔭官) 무관(武官) 출신 수령들의 고을에서 발생한 민원을 듣는 대로 그 내용을 갖추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장을 올려 진달하게 하되 겨울이나 봄까지를 기한으로 잡아 감히 한 사람이라도 말하지 않는 자가 없도록 하라. 만약 재차 상소하고 싶어하는 자가 있을 때는 봄이 지난 뒤에 다시 진달하도록 하고, 끝내 침묵만을 지킬 경우에는 명령 위반죄를 적용해 다스릴 것이라고 양호(兩湖)에 똑같이 분부하라."
하였다.
황명 의사(皇明義士) 백대호(白大豪) 등과 유민(遺民) 임인관(林寅觀) 등을 봄과 가을에 똑같이 현충사(顯忠祠)에서 제사지내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승지 심진현(沈晉賢)이 아뢰기를,
"옛날 신사년185) 에 관서(關西) 칠의사(七義士)가 절개를 세웠을 당시에 남관(南館)에서 화를 당한 자가 11인이었고 용만(龍灣)에서 화를 당한 자가 15인이었는데 을미년186) 에 증직(贈職)할 때에는 단지 7인의 이름만 거론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최효일(崔孝一)과 차예량(車禮亮)은 또 26인 속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러고 보면 26인 중에서 포증(褒贈)을 받은 사람은 5인 밖에 되지 않는 셈입니다.
그 나머지 21인 중에서 백대호·황후성(黃後晟)·최은(崔訔)·장초(張招) 등 4인은 그 이름이 공사(公私)의 문서 속에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고, 한사웅(韓士雄)·백원인(白元仁)·황대중(黃大中) 3인은 다행히 자손의 전기(傳記)가 있는 덕택에 행적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이밖의 14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성명조차도 끝내 확인할 길이 없으니 지극히 애석한 일입니다.
이 21인은 모두 동시에 화를 당했는데 칠의사의 경우는 전원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어 있습니다. 지금 만약 현충사 옆에 별도로 제단(祭壇) 하나를 설치한 뒤 목패(木牌) 하나를 세운 다음 ‘신사 의사(辛巳義士) 백대호 등 21인’이라고 써넣고 현충사에서 제사를 지낼 때마다 똑같이 제사지내게 한다면 어둡지 않은 영혼들이 여기에 영원히 귀의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예조에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토록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의논 드리기를,
"별도로 제단 하나를 설치하자는 의논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연전에 예조 당상들이 어렵게 여긴 것 또한 소견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상신(相臣) 역시 예조 당상들의 말을 옳다고 한 이상 신으로서는 감히 의리상 행해야 할 예(禮)에 대해 독단적으로 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황조(皇朝) 숭정(崇禎)187) 병자년188) 이후로 산하(山河)가 부끄러움을 머금고 초목에 비린내가 풍기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뜻있는 인사가 팔을 걷어붙이고 눈초리가 찢어지며 통분해하는 것은 신사년에 일어난 최효일·차예량의 일189) 과 정미년에 일어난 임인관(林寅觀)·진득(陳得)의 일190) 에 대해서이다. 최효일이 배를 구입해서 바다로 나갈 때 관서(關西)의 허다한 장사(壯士)들이 술에 대취한 채 슬피 노래를 부르며 항구에서 서로들 전송하였는데 계획이 누설되자 다투어 죽음의 길로 나아가 한 사람도 빠진 사람이 없었다. 그 용력(勇力)은 솥을 들 만하였고 그 기예는 춤추듯 칼을 썼으며 그 충의심은 구름을 헤치고 빛나는 해와 같았는데 필경 성사를 못보고 죽게 된 것은 운명이었다.
동시에 화를 당한 사람들 가운데 이미 정포(旌褒)된 사람을 빼고 또 21인이 있었는데 성명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겨우 7인뿐이다. 그런데 원숭이와 학 울음소리 들리는 곳에서 아직도 번민하고 있고 까마득히 모래바람 날리는 곳에서 물 빠진 강에 돌 튀어 나오듯하고 있으리니, 서쪽을 바라볼 때마다 한숨이 나오면서 미상불 다리를 치며 탄식을 하곤 한다. 송(宋)나라 위민공(威愍公) 정양(鄭驤)은 의관(衣冠) 차림으로 장례를 치뤄주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191) , 당(唐)나라 위사(衛士)는 금(金)나라 오랑캐를 주먹으로 치다가 죽었는데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어도 주자(朱子)가 오히려 표장(表章)하였다. 최·차 등 여러 사람의 제사가 또한 위민공의 고사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면 성명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 위사의 충절보다 못하게 대접해서야 되겠는가. 목패(木牌)와 지방(紙牓)으로 널리 불러들여 흠향케 하라.
대개 숭절사(崇節祠)에서 최근에 행한 예가 있기는 하다마는 부(府) 안에 일단 현충사가 있는 이상 그 위패를 본 사당에 보관해두었다가 봄과 가을 제삿날이 돌아오면 이들도 함께 제단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그리고 이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사당에 나아가서 위패의 앞면에 ‘황명 의사 백대호 등 21인’이라고 쓰게 하고 제수(祭需)로는 돼지와 말술을 쓰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게 하라.
임인관 등 95인의 일은 그야말로 그만둘 수 없는 절박한 심정[迫不得已]에서 나온 것으로서 고(故)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시나 고 세마(洗馬) 윤이건(尹以健)의 소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가히 천추(千秋)에 부끄러움이 없는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95인이나 되는 그들이 한꺼번에 모두 죽임을 당하다니 처참하고 경악스러워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그들이 와서 정박한 곳은 탐라(耽羅)라 할지라도 돌아갈 때에는 필시 의주(義州)를 거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1백 32년이 지나도록 그들의 답답하고 원통한 마음을 풀어주는 일을 행하지 않았으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서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마침 21의사를 함께 제향(祭享)하는 때를 만났으니 95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위패를 만들어 같이 제사를 올리되 위패에는 ‘황조 유민 임인관 등 95인’이라고 써넣게 하라. 이와 같이 하면 예(禮)에도 의거하는 바가 있게 될 듯하고 의리상으로도 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다. 모두 이런 뜻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황조 의사 백대호 등 21인과 황조 유민 임인관 등 95인에 대해서 의주(義州) 현충사 옆에 제단을 설치하고 위패를 만들어 제사를 올리되, 제단은 사당의 좌측 신문(神門) 안쪽에 설치하고 좌향(坐向)은 사우(祠宇)와 똑같이 하며, 위패는 일체 배향(配享)된 위판(位版)의 예에 따라 만들고 전교하신 대로 그 앞면에 써넣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봄과 가을 제향 때에는 제단 위에 배열하고 평상시에는 사당 안에 좌우로 나누어 봉안하되 교의(交猗)를 설치하는 대신 빈 상(床) 하나를 놓고 그 위에 안치함으로써 배향의 혐의를 피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배열 순서는 마땅히 전교하신 대로 차례를 매겨야 하겠습니다만, 사당 안에 봉안할 때에는 백 의사 등을 동쪽 배향 위판 아래에 임 유민 등을 서쪽 배향 위판 아래에 안치하고, 제단 위로 신주를 내놓을 때 역시 백동 임서(白東林西)로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사지낼 때의 제품(祭品)은 일체 배향된 위판의 예에 따라 갖추어 진설하되, 일단 여러 사람을 합동으로 제사지내는 것인 만큼 백 의사 1위(位)와 임 유민 등 1위에 각각 밥 세 그릇·국 세 그릇·술 세 대접씩 놓고 돼지 머리를 통째로 써야 하겠습니다. 제단을 설치한 뒤에 제사지낼 때에는 기유년에 치제(致祭)하던 때의 예에 의거하여 기치(旗幟)와 징·북 등을 설치하되 향축(香祝)은 서울에서 내려보내고 헌관(獻官)은 본부의 부윤이 맡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 거행해야 할 조목들을 본도에 분부토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귀신의 생리도 인간과 그다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저승이라는 곳이 거리가 먼 정도 뿐만이 아니요 더구나 1백여 년이 지난 뒤에야 처음으로 합동 위령제를 올리는 것인 만큼, 그토록 세월이 오래 흐르고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특별한 예를 취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대략 성황(城隍) 발고식(發告式) 때의 절목(節目)을 본따 제사를 올리기에 앞서 먼저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성사(城祠)에 고하게 하고 제삿날에 예를 갖추어 행사를 치르게 하되 고문(告文)은 도신(道臣)이 지어 보내게 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기백(箕伯)192) 과 만윤(灣尹)193) 에게 똑같이 분부하라."
하였다. 그런데 뒤에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21인 가운데 하나인 한사웅(韓士雄)의 종형(從兄) 한득인(韓得仁)이 최효일(崔孝一)을 따라 바다를 건너갔다가 순의(殉義)하였는데 그 절개를 지킨 공적이 탁월하고 문적(文跡)도 징험할 수 있다.’고 아룀에 따라 득인도 똑같이 제사지내 주도록 명하고, 위패의 앞면과 제문(祭文)에도 22인으로 쓰게 하였다.
7월 23일 을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지난번 영남 어사(嶺南御史) 여준영(呂駿永)이 올린 별단(別單)을 인하여, 이무미(移貿米)194) 를 실어 와 바칠 때 발생하는 보축(補縮)195) 과 정채(情債)196) 문제를 가지고 통영(統營)에 관문(關文)을 보내 조사해서 보고토록 하였는데, 방금 통제사(統制使) 윤득규(尹得逵)의 보고문을 보니 ‘기유년에 이무미에 대한 규정을 정할 때 6천 석으로만 한정을 하고 미곡(米穀)과 피곡(皮穀)은 애당초 구별을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준절법(準折法)197) 을 원용(援用)하면서 참작해 그 수량을 조절하다 보니 많은 경우 1만 석(石)에 이르기도 한다. 그리고 실어다 바칠 때에는 규정상 각읍(各邑)에서 배를 구해 운송하는데 선가(船價)는 영곡(營穀)으로 계산해서 지급해주고 있다. 보축에 관한 문제는 오직 적정(糴政)198) 을 얼마나 정밀하게 행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보축이 있게 되면 군영만 원망을 듣고 백성만 피해를 보게 된다. 정채에 관해서는, 군영의 창고에 수납할 때 1백 포(包)마다 6석의 곡식을 주는 것이 관례화되었는데, 일체 바로잡아 없애기는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1백 포당 3석으로 참작해서 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기유년에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한풍(李漢豊)이 이전해 옮기는 데 따른 폐단을 교정하기 위해 별도의 군량으로 가분미(加分米)199) 를 1년에 1천 석씩 10년 동안 대출받은 뒤 점점 둔전(屯田)을 지어나가 스스로 군량을 마련하고 지출함으로써 영원히 이무(移貿)하는 데 따른 폐단을 없애겠다고 요청하여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유년으로부터 꼭 10년째 되는데 상정가(詳定價)200) 로 계산한다 하더라도 해마다 3천 냥(兩)씩 둔전을 짓는 데 투입된 셈이니 지금쯤은 아마도 들어오는 것이 상당히 많아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군영의 모곡(耗穀)을 이전(移轉)하는 일을 모조리 혁파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무(移貿)하는 한 조목만은 충분히 혁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어떤 일이든 반드시 자기에게 절실한 고통이 있게 된 다음에야 자기 일을 살피며 관심을 집중하여 공력을 들이는 법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우선 이무하는 일을 영원히 폐지하고 앞으로 둔전(屯田)의 세미(稅米)가 점점 불어나 풍족하게 되면 이전하는 일까지도 아울러 폐지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실로 연해(沿海)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분부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일찍이 수신(帥臣)을 역임한 이한풍(李漢豊)에게 하문하니, 이한풍이 아뢰기를,
"당초 둔전을 설치할 때는 기한을 10년쯤 잡을 경우 거기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한 쪽 지방은 충당할 수 있으리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토지를 매입하고 전세(田稅)를 거두는 절목을 시행하다 보니 처음 생각과는 어긋나는 점이 있었습니다. 작년에 보고해 온 것을 보건대 거두어들인 겉벼가 1천 4백여 석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일부만 떼어주면서 거의 1만 석 가까이 이매(移買)하는 일을 폐지해 버린다면 통영의 형편이 지극히 곤란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중간에 둔전을 시행한 일이 혹 처음 생각과 다르게 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 뒤에 담당한 수신(帥臣)이 제대로 마음을 다 쓰지 않은 결과이니 해영(該營)으로 하여금 현장보고서를 바치게 해서 앞으로 논해 다스릴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게 하소서. 그리고 이무하는 일을 일단 폐지하고 나면 둔전을 행하는 일을 아무리 소홀히 하려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그런 다음에야 실효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7월 27일 기축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남(三南)을 진휼(賑恤)할 대책을 앞으로 어떻게 의논해 정하려 하는가?"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의 천박한 견해로는 북쪽 지방의 곡식을 영남(嶺南)으로 옮겨 주었으면 합니다만, 설사 옮겨준다 하더라도 곡식 수량이 고작 4만 석밖에 안되니, 이것을 가지고 영남에 다 나누어 주다 보면 큰 창고 속의 돌피 하나와 같은 격이 되고 말 것이고, 또 그 곡식을 실어나르다 보면 내년 4, 5월까지 끌어 필시 보릿고개를 넘기고 말 것입니다. 듣건대 호남(湖南)은 영남에 비해 조금 낫다 하니 변통하지 못할 걱정이 없겠습니다마는, 호서(湖西) 일로(一路)에 대해서는 곡식을 이전해주는 등 조처할 방도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단 해서(海西)의 무곡(貿穀)을 본도에 유치한다고 할 때 어떻게 실어 오느냐가 문제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민생을 걱정해 주어야 할 조정의 도리로 볼 때 그 점에 의논이 미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나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겨 가노라면 그 길이 너무도 멀어 언제나 도착할지 모를 일인데 그렇게 되면 제때에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첫째로 안타깝다. 이런 문제가 있는 만큼 곡식을 이전하는 한 조목에 대해서는 빨리 희망을 버리게 하고 미리 각도(各道)에서 좋은 방향으로 조처케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다만 호서의 경우는 현재의 상황이 양남(兩南)보다 훨씬 심각할 뿐만이 아니라 본래 곡식의 총량(總量)도 많지 않으니, 해서에서 무역한 곡식을 본도(本道)에 옮겨 떼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본도로 하여금 직접 운반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는 아쉬운 사람이 와서 가져가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본도에 맡겨 전심 전력 그 일을 이루어내게 할 경우 폐단을 없애고 힘을 덜 수 있는 잇점이 또한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조정의 힘을 빌려야 할 일이 꼭 없지는 않을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미리부터 구별하여 공사(公私)간에 역할 분담을 함으로써 잘 실어나를 방법을 강구해두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성은 전적으로 삼남의 곡식에 의존하고 있는데 삼남의 곡식이 전혀 올라오지 않을 경우 내년 봄에 도성 백성들이 무엇을 먹고 살겠는가. 참으로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장계를 올리기를,
"본도 유생의 도회(都會)201) ·복시(覆試)202) 및 지방에서 선발된 마병(馬兵)의 도시(都試)203) 를 으레 매년 가을이면 정기적으로 실시해 왔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혹심하게 재해를 입어 농사를 망친 탓으로 가을철을 당하여 민심이 곳곳마다 몹시 황급해하고 있는데, 재해를 입은 고을에 과거 시험장을 설치하는 비용도 적지 않고 궁한 백성들이 식량을 싸들고 오는 데 따른 폐해도 염려가 됩니다. 그리고 이번의 복시는 대비(大比)204) 와 비교해 볼 때 조금 경중의 차이가 있어 한 해쯤 잠정적으로 폐지한다 해도 그다지 중요한 관계는 없는데, 심지어 병정(兵政) 중 가장 크다고 할 무사(武士)의 도시(都試)와 수륙(水陸)의 군사 훈련까지도 정지하였고 보면 일관되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의당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장계에서 요청한 대로 시행하라고 묘당으로 하여금 행회(行會)하게 하라. 그런데 노비도 백성이다. 제도(諸道) 중에서도 영남의 사노(寺奴)에 대한 폐단이 가장 심하기에 밤낮으로 관심을 갖고 별도로 편의책(便宜策)을 강구하면서 오랜 기간 논의하였으나 여태 한 번도 고질적인 폐단을 변혁시키지 못해 오다가 초원(初元)205) 에 특별히 추쇄(推刷)206) 하는 법을 혁파했었다. 그런데 그 뒤에 거행하는 것을 보면 구태의연하게 침해하며 학대하고 있다 하니, 영읍(營邑)의 신하가 어떻게 감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드러나는 대로 엄히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개정된 선두안(宣頭案)207) 이 또한 분명히 감사 앞으로 제출되었을텐데 적안례(籍案例)에 따라 수정하지 않은 곳이 있거든 일체 기한을 정해 도로 물리라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분부하고, 양호(兩湖)도 이에 준하여 시행하게 하라.
흉년에 백성을 돌보는 일로는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귀찮게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백성을 귀찮게 할 것 같은 일은 일체 하지를 말라. 그런 뒤에야 ‘끓는 물을 퍼냈다 다시 부어 끊는 것을 막는다.[揚湯止沸]’는 조롱을 면할 수 있을 것인데, 이렇게 하는 것이 부역(賦役)을 면제해 주는 것보다 나을 듯하다. 이와 같은 여러 조목 중에서 마음대로 제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각각 3도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사리에 입각해 장계를 올려 보고토록 하라."
하였다.
조상진(趙尙鎭)을 형조 판서로, 이경일(李敬一)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중주(中州)에 난리가 일어날 때마다 선비들이 많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왔는데, 대체로 볼 때 관유안(管幼安)208) 이 그 시초이고 당(唐)나라의 남민(南敏)과 송(宋)나라의 정신보(鄭臣保) 등 여러 사람이 바로 그 다음이었다.
그러다가 황조(皇朝)의 천계(天啓)209) 와 숭정(崇禎)210) 연간에 이르러서는 산길을 걷고 배에서 자면서 잇따라 동쪽으로 건너 왔는데 그중에서도 전당(錢塘) 출신 황공(黃功)이 가장 두드러진 자였다. 나라를 떠나게 된 울분을 가끔 노래로 읊었는데 절강(浙江) 남쪽의 음조(音調)가 다분히 담겨 있었으며 대장의 깃발을 높이 날리고 부절(符節)을 품에 안은 채 변경에서 공을 세운 그 자취를 또한 시를 통해 알 수가 있다. 더구나 임(林)·진(陳)과 문답할 때 목이 메어 울부짖었던 것은 옛날 경경(慶卿)이 노래 부르고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을 치자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뻣뻣하게 치솟아 관을 찔렀던 것211) 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서 그 사람의 호걸스러움을 여기에서 또 알 수가 있다.
가령 그 사람이 아무 일 없이 편안한 날을 당하여 조칙(詔勅)을 받들고 왔다면 동쪽의 사녀(士女)들이 흙먼지 이는 그의 수레 옆으로 달려 가면서 중국 사신의 위의(威儀)를 쳐다보려고 해도 안되었을 것이다. 또 만약 그의 자제가 따라 왔다면 귀족으로 우러러 보면서 윗자리에 앉히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영락(零落)한 지 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습속(習俗)이 더욱 심하게 천박해져 아름다운 문장은 전혀 들어볼 길이 없이 이름은 항오(行伍)에 편입되고 죽도록 일해도 사후에 무덤 하나 변변치 않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회수(淮水) 이남에서는 귤이던 것이 북쪽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고 하는 격이라 하겠다. 이 어찌 측은하고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후손 황세중(黃世中)이 토포사(討捕使)의 직함을 갖고 있기는 하다마는 사손(嗣孫)이 시골에 박혀 있으면서 녹봉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흠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황공(黃功)의 제사를 받드는 현손(玄孫)인 회양(淮陽)의 유학(幼學) 성재(聖才)를 우선 어영 대장으로 하여금 해영(該營)의 권무 군관(勸武軍官)에 부치게 하고 그를 불러다 신수(身手)를 본 다음 계문하도록 하되, 길을 떠나보낼 때에는 도백(道伯)이 역마와 식량을 지급하게 하라. 그리고 세중의 아들인 출신(出身) 황윤(黃胤)은 금려(禁旅)에 부쳐 녹봉을 주도록 하라."
하교하기를,
"오늘 서천 부원군(西川府院君)의 봉사손(奉祀孫)인 첨지(僉知) 정덕빈(鄭德彬) 및 혈손(血孫)인 유학(幼學) 정상훈(鄭尙勳)을 불러서 보았다. 정덕빈은 자손이 있긴 해도 아직 벼슬할 나이가 안되었다. 그런데 상훈의 경우는 그의 오대조(五代祖)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직책을 제수하라는 승전(承傳)을 받기까지 하였고 그의 조부는 3읍의 수령을 지냈으며 그의 부친은 승전만 받고 미처 임용되지 못했는데, 상훈의 나이가 50을 넘었고 서천의 혈손으로는 오직 그 집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먼저 나이가 찬 사람부터 직책을 제수해야 할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빈 자리가 나오는 대로 즉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그런데 덕빈을 첨지중추부사에 부친다 하더라도 70이 넘은 나이라서 노쇠 현상을 보이고 있는 만큼 직무를 수행케 하기가 어려우니 자못 애석한 일이다. 그리고 일찍이 듣건대,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서천의 사우(祠宇)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 집안이 영락(零落)하여 제대로 집을 간수하지 못한 채 책판(冊版)을 보관해 둔 사우마저 타인의 손에 넘어갔다고 하니 이 또한 측은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즉시 해조로 하여금 배상하고 돌려받게끔 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경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서천 부원군의 사손(祀孫)인 유학 정덕빈을 특별히 첨지에 제수하였는데, 다시 듣건대 서천의 적장손(嫡長孫)이 지금까지 녹봉을 받고 있다하니, 훈신(勳臣)을 표장(表章)하신 열성조(列聖朝)의 훌륭한 덕을 우러러 볼 수 있다 하겠다."
하였다.
7월 28일 경인
하교하였다.
"국조(國朝)의 22공신(功臣) 가운데 개국 공신(開國功臣) 다음은 바로 광국 공신(光國功臣)212) 이다. 옛날 선조(先朝) 신묘년213) 에 처음으로 조경묘(肇慶廟)를 건립하고 그 재랑(齋郞)을 차출할 때 개국 공신인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의 후손 조무(趙懋)와 광국 공신인 기성 부원군(杞城府院君) 충목공(忠穆公) 유홍(兪泓)의 후손 유한장(兪漢章)이 제2망(望)과 제3망에 들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특별히 1망으로 올려 낙점(落點)하셨으니 그 성스러운 뜻을 짐작할 수 있겠다.
오늘 기성의 적장손(嫡長孫)인 유 기령(兪杞寧)을 만나 보고 그의 경력을 물었더니 음관(蔭官)으로 수령을 역임했다 한다. 옛날 생각이 나서 관직을 제수하려고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만나 보았는데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팔십 가까운 노인에게 ‘무엇을 보고 가느냐’고 묻는 것214) 과 같다고나 해야 할 것이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광국(光國)의 공훈이야말로 양무(揚武)215) 에 비해 더욱 비중이 있는 것이고 또 거쳐 온 경력도 피차 차이가 없고 보면, 금은군(錦恩君)을 유사(有司)로 임명하라고 이미 특별한 하교가 있었던 만큼 기령군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 후임자의 자리 하나가 비어 있으니 기령군 유한장을 충훈부의 유사 당상으로 임명하여 한편으로는 훈명(勳名)을 높이고 한편으로는 성조(聖朝)의 뜻을 준수토록 하라."
임희존(任希存)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29일 신묘
《오경백편(五經百篇)》이 완성되었다.
상이 5경 가운데 늘 사색의 실마리가 될 만하다고 여겨 읽고 읊던 것들을 뽑은 뒤 5권(卷)으로 편집하여 편질(篇帙)을 간략하게 하고 글자 모양을 확대하여 돌려가며 읽기에 편리하게 하였는데, 《주역(周易)》에서 5괘(卦)와 2전(傳)을 뽑고, 《서경(書經)》에서 우서(虞書) 5편·하서(夏書) 1편·상서(商書) 3편·주서(周書) 3편을 뽑고, 《시경(詩經)》에서 국풍(國風) 21편·소아(小雅) 19편·대아(大雅) 17편·송(頌) 10편을 뽑고, 《춘추(春秋)》에서 10편을 뽑고, 《예기(禮記)》에서 악기(樂記)·대학(大學)·중용(中庸)의 3편을 뽑는 등 모두 99편을 뽑았다.
그런데 상이 ‘주자(朱子)의 글은 그 의리가 깊고 표현이 정대하여 4자(四子)216) 의 계통을 직접 이어받을 만한데 성현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후대에 가르쳐 전한 공은 그중에서도 《중용장구(中庸章句)》와 《대학장구(大學章句)》에 있다.’고 여겨, 마침내 그 장구서(章句序)를 《대학》과 《중용》 아래에 나누어 붙였는데, 이는 《맹자집주(孟子集註)》에서 특별히 명도(明道)의 묘표(墓表)에 나오는 은미한 뜻을 부친 것217) 을 모방한 것이었다.
갑인년에 계획을 착수하여 을묘년에 교정 작업을 벌이고 이때에 이르러 영남(嶺南)의 도신(道臣)에게 명해 관하(管下)의 아전 중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내각(內閣)에 올려 보내게 한 뒤 다시 고쳐 베껴 써서 간행케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그 필체가 질박한 점을 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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