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경인
황해도 관찰사의 영(營)에 불이 났다. 가도사(假都事)가 치계하기를,
"이달 28일에 본도 감영의 선화당(宣化堂)에 불이 나서 내외의 관사가 일시에 연소되었습니다. 감사 이의준(李義駿)이 밀병부(密兵符)와 교유서(敎諭書)를 꺼내고자 화염을 무릅쓰고 도로 들어갔으나 그것은 꺼내오지 못하고 얼굴과 손발에 크게 화상만 입었습니다. 감사가 차고 있던 밀병부와 교유서 및 각 고을과 진(鎭)의 왼쪽 병부가 모두 불에 탔으니, 특별히 밀부(密符) 한 쪽과 절월(節鉞) 각 한 개씩을 선전관(宣傳官)을 파견하여 내려주소서."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해서 지방의 고을과 진의 병부를 승정원과 해조로 하여금 전지를 품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황해도 관찰사가 차는 발병부(發兵符) 오른쪽 패 1개, 수령과 변장이 차는 오른쪽 패 37개, 감영에 보관해 두는 수령과 변장의 병부 왼쪽패 37개, 병영과 수영에 보관해 두는 수령과 변장의 병부 왼쪽 패 37개를 새로 만들어서 감사와 병사에게 내려보냈다. 병영과 수영에 있던 예전의 병부와 수령과 변장들이 차던 오른쪽 패는 모두 거두어서 불태웠다.
집의 한치응(韓致應)이 논계하기를,
"선릉 참봉(宣陵參奉) 정상훈(鄭尙勳)은 이상로(李商輅)가 법에 의해 처단된 뒤에 그의 집안과 혼사를 맺어 역적은 모든 사람이 원수로 여겨야 하는 의리를 망각하였습니다. 속히 그를 벼슬에서 내쫓아 국가의 큰 예법을 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역적 집안의 자손은 장가들지 못한다는 것은 성인께서 내리신 명백한 가르침이 있는데, 시집가는 것은 장가드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역모가 드러나기 전에 혼사를 맺었다면 진실로 미리 파악하지 못했다고 책하기 어렵겠지만 역적질을 한 뒤에 혼사를 맺는 것은 패륜의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대간의 논계를 윤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그가 비록 미관 말직이기는 하나 분명히 밝히기 어려운 죄과에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다. 해조에서 그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라. 대간의 논계에 대해서는 윤허한다."
하였다. 이조가 정상훈에게 캐물으니, 정상훈이 말하기를
"저의 동생 정세훈(鄭世勳)이 동네 사람에게 속아 이기철(李起哲)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미 장가든 뒤에야 비로소 이기철이 바로 역적 이상로의 아들 이복일(李復一)이 변성명한 자라는 것을 알았다. 몹시 분통스럽기는 하였으나 실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고 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아뢰니, 전교하기를,
"일찍이 정상훈의 사람됨을 보건대 비록 서천 부원군(西川府院君)526) 의 후손이라고는 하나 시골에서 근근이 양반의 명색만 지니고 있는 꽉 막힌 자에 불과하였다. 역적의 자손에게 장가들지 말라고 가르치신 성인의 교훈을 제대로 지키기를 이런 사람에게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연좌법(緣坐法)에도 적용되지 않는 방계(傍係)로서 유배중에 있지도 않은 자에게 대해서까지 혼인을 맺지 못하게 한다면, 어찌 이와 같은 왕정(王政)이 있겠는가. 더구나 딸을 시집보내기에 급하여 이름을 바꾸고서 구혼하였은즉 저 밭을 일구며 농사지으면서 살아가는 상훈과 같은 자가 알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좌의정이 경연에서 아뢸 때 알고서도 고의적으로 혼인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에 대한 사실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그러니 죄인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의리에 있어서 의당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이 일로 인하여 그가 불행하게 된다면 지난번에 내가 서천 부원군 집에 대해 공훈을 기록한 일이 그의 집안에 해가 되고 누가 되기에 족할 것이다. 가령 서천 부원군의 영혼이 이 사실을 안다면 황천에서 억울해 하지 않겠는가. 특별히 사헌부의 논계에 대해서는 따라 주어 국가의 예법을 엄하게 하고, 이어 그것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융통성을 보이는 것은, 바로 공을 세운 집안을 생각해 주는 도리에서이다. 가령 정상훈이 직접 죄를 범하였다고 하더라도 대대로 용서해 주는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가벼운 죄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이토록 애매한 일에 대해서겠는가. 선무사(宣武祠)의 수직(守直) 관원을 더 늘리라고 이미 계하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선무사를 잘 지키게 하라. 그리고 선릉 참봉의 대임자는 구전(口傳)으로 뽑을 것이니 의망하여 들이라."
하였다.
집의 한치응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올린 임장원(任長源)의 상소는 전편의 내용이 더없이 황당하고도 간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주된 취지는 정신이나 의도가 전적으로 화성(華城)의 공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효자로서 항상 효성이 부족한 듯이 느끼는 심정을 미루어서, 일이 원침(園寢)에 관계될 경우에는 할 수 있는 일을 정성껏 다하였습니다. 이번에 화성에 성을 쌓는 것은 바로 성스러운 효성 가운데의 한 가지 일로서, 전하의 조정에 서있는 자치고 그 누가 성스러운 효성이 극도에 이른 것임을 모르겠습니까. 참으로 혹시라도 그 역사를 하는 데 대해 논의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전하의 신하가 아니며, 인륜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임장원은 유독 무슨 마음을 가졌기에 이에 대해 입을 놀려 떠들어대고 종이에 가득 늘어놓으면서 심지어는 ‘천하의 장관(壯觀)이다.’고까지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과연 그것을 찬미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기롱하는 뜻이 담긴 말입니까? 심지어는 ‘지나가는 길이 쓸쓸하다.’고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 전하께서 이 일을 계획하시면서 여러 차례 헤아려 보아 호조의 경상적인 비용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백성들의 힘을 수고롭히지 않았다는 것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올린 상소에서는 마치 백성들이 시달리는 것이 오로지 여기에서 연유한 것인 듯 은연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전하를 헐뜯는 일종의 말은, 모두가 이와 같은 논의가 속이고 과장하여 미혹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오산(蒼梧山)527) 이니 회계산(會稽山)이니 운운한 것은 더더욱 신하가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으로, 한(漢)나라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대불경(大不敬)의 죄를 그가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어떤 대간이 글을 올려 배척한 데서 공의(公議)가 모두 같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규례를 어기면서까지 승진, 발탁하여 외방 고을에 임명해, 마치 그 일을 격려하는 것인 양 하였습니다. 죄를 진 몸으로 태연스레 관직에 있게 한다는 것은 크게 형벌의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 숙천 부사 임장원을 우선 체차시키고 섬으로 유배보내는 형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임장원의 일로 해서 대각에 또다시 일개 정최성(鄭㝡成)이 나오게 생겼다. 조정에서 정최성을 몹시 미워하면서 통렬하게 배척하는 것은, 그 뜻이 잘못된 것을 고치고 물든 것을 씻어버림으로써 한 세대의 이목을 새롭게 하는 동시에, 좋아하고 싫어함[好惡]을 분명히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추향(趨向)을 일정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재소(齋所)에서 신하들을 접견하면서도 이미 간곡하게 타이르고 부탁하였으니, 귀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가 들었을 것이다. 그런즉 감히 알지 못하여서 이런 계(啓)를 올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하였다면, 이것은 정최성에 대한 처벌이 엄하지 못한 관계로 호오(好惡)와 추향에 대해 믿는 것이 돈독치 못하고 택한 것이 정밀하지 못한 것이다.
대개 임장원을 너그럽게 포용해 준 것은 임장원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조정의 분위기를 위해서이고 세상의 도리를 위해서인 것이다. 명색이 언관의 자리에 있는 이상 어찌 과감히 말할 수 있는 것과 감히 말해서는 안 되는 말이 따로 있겠는가. 과감히 말하는 풍조를 조성하고자 하면 먼저 감히 말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망령되이 말하는 자부터 그 말이 지나치건 미치지 못하건 간에 따질 것 없이 하나같이 마음을 터놓고 받아들임으로써 사람마다 모두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다 털어놓게 하여야만 한다. 그런 뒤에야 오늘날의 잘못된 풍조를 반이나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경연 석상에서 전교할 때에 원침에 석상(石象)을 설치하는 제도를 인용하면서 유시하기를 ‘병풍석(屛風石)은, 근래에는 세우지 않아왔지만 교하(交河)의 장릉(長陵)에 이미 쓴 전례를 참조하여 준용(遵用)해서 어버이의 장사는 검소하게 하지 않는다는 의리를 붙인 것이다. 가령 이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단지 하지 말라는 수교(受敎)가 있는 줄만 알고 교하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는 줄은 몰라서 혹시라도 이에 대해 쟁집하는 일이 있더라도 오히려 불문에 부쳤을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화성에 성을 수축하는 것이 비록 소중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석상을 설치하는 것에 비해서는 자연 차등이 있기 마련이다.’고까지 하였은즉 임장원이 한 말이 어찌 감히 말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 감히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네가 오늘 낸 계사가 마땅한가, 마땅치 않은가? 또 옳은가, 옳지 않은가? 정최성에 대해서는 이미 세초(歲抄)에서 낙점을 건너뛰었으니 너만이 어찌 중한 처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 너에 대해서는 삭직의 처벌을 내린다.
임장원에 대해서는 단지 임장원만을 용서하고 정최성에 대해서는 단지 정최성만을 배척할 뿐이다. 일이 화성에 속한 것인 만큼 관계됨이 어떠한가. 용서하든 배척하든 간에 이미 제기한 것을 또 제기하며 중언 부언하여 일상적인 일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아 넘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러한 도리에 대해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서 감히 잘 인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일부터는 이러한 계사를 올리지 말 것이며, 연계(連啓)를 비록 바치더라도 받아들이지 말 것을 해당 승지는 잘 알아두도록 하라."
하였다.
충청도 병마 절도사 이문혁(李文爀)을 파직시켰다.
이보다 앞서 정언 윤함(尹涵)이, 충주 영장(忠州營將) 최중교(崔重敎)가 관청의 녹봉을 미리 팔고, 부호(富戶)을 뽑아 군교로 임명하고 관가에서 쓰는 일용품을 대도록 책임지웠으며, 아객(衙客)들을 풀어 뇌물을 받아들인 사실에 대해 논핵하였는데, 상이 감사에게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충청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진영(鎭營)에 있는 군교와 아전들의 공초(供招)를 가지고 조사하여 아뢰었는데, 상이 전교하기를,
"진영을 설치한 것은 피해를 제거하고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기 위해서인데 이를 빙자하여 침탈을 자행함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으니 어찌 괘씸하지 않겠는가. 대간의 계사에서 논한 여러 가지 조항들은 비록 자질구레한 것이지만 역시 불법적인 일에 관계된다. 그러나 풍문으로 전해들은 것이라 그대로 믿기 어려워서 그로 하여금 조사해보게 한 것이다. 이번에 조사해 아뢴 것을 보건대, 죄수들의 공초가 모두 똑같으며 관찰사 역시 ‘더욱 드러났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진장(鎭將)을 관하에다 둔 채 모른 척 눈감아 주고 근무 평정을 하여 조정에서 번거롭게 수응하는 일이 일어나게 하였으니, 이러한 병사를 장차 어디에다 쓰겠는가. 해당 병사는 파직하라. 그리고 이어 진영의 장수들에게 신칙하여 이와 같이 탐오한 자들 및 진영의 관속들을 단속하지 못하여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엄명하게 근무 평정을 실시하게 하라. 사사로운 정으로 이런 사실을 덮어두는 자들에 대해서는 각각 시종신(侍從臣)을 지낸 수령으로서 현재 춘추관의 관직을 겸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보고 들은 대로 매달마다 기록하는 외사(外史)에다 상세히 기록하여 춘추관으로 올려보내게 하라. 만약 죄를 범한 자가 있는데도 병사가 덮어둘 경우에는 내사(內史)가 드러나는 즉시 논계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의금부에 명해서 최중교를 엄하게 신문한 다음 양양부(襄陽府)로 유배보내도록 하였다.
정충달(鄭忠達)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2월 2일 신묘
차대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삼가 농정을 장려하고 농서를 구하는 교서를 읽어보건대, 크고 작은 신하들이 성심을 가지고 성상의 뜻을 잘 수행한다면 어찌 채용할 만한 말이 없겠습니까. 제방을 수축하여 물을 저축해두는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인바, 미리 대비하는 성상의 깊은 생각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 기미년은 바로 선왕께서 친히 적전(籍田)을 가신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니 변변치 못한 내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는 정성으로써 풍년이 들게 하고자 하신 선왕의 성대한 덕을 우러러 몸받는다면 심상하게 지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지금 축(丑)과 미(未)의 갑자(甲子)가 서로 대응되어 토(土)가 처음으로 용사(用事)하는 계절이니 다음해의 농정을 일으키는 것이 더욱 귀한 때이다. 이에 교서를 반포한 것인데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제언을 쌓고 물을 가두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소식(蘇軾)은 제언의 피해에 대해 혹 백성들의 전지를 파괴하기까지도 한다고 하였다. 이 역시 사정에 들어맞는 논의이기는 하다. 그러나 큰 제언을 쌓거나 수리(水利)가 큰 곳에 대해서야 어찌 사소한 폐단이 있다고 해서 수축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관동 지방의 바다와 관련된 폐단에 대해서는 절목(節目)을 규정하였는데, 폐단이 절목을 작성하기 전보다도 더 심하여 혹 거친 곡식 한 포(包)를 홍합(紅蛤) 한 포로 바꾸기도 한다고 하니, 해호(海戶)의 폐단이 그칠 날이 있겠는가. 우선은 조사한 장계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보고 만약 죄를 범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산골이나 바닷가로 귀양보낸 다음에야 나라가 나라다워질 것이다. 심진현(沈晋賢)·신기(申耆)·이면긍(李勉兢) 같은 자들은 나를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인데, 혹시라도 죄를 범하였다면 괘씸하기가 다른 사람의 경우보다 배나 심할 것이다. 그 나머지 잔약한 무반(武班)으로서 평해(平海)나 울진(蔚珍)의 수령으로 있는 자들이야 어찌 책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아뢰기를,
"충장공(忠壯公) 유림(柳琳)은 이미 중국 조정으로부터 총병(摠兵)의 직책을 제수받았고 그의 종손(從孫)인 충의공(忠毅公) 유병연(柳炳然)은 의리를 지켜 변치 않는 충성심이 있었으니, 추증하는 교지(敎旨)에다 마땅히 황조(皇朝)의 연호를 써넣는 것이 충절을 표창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금위 대장 신대현(申大顯)이 아뢰기를,
"이번에 시흥(始興) 등 다섯 고을에 있는 군보(軍保)를 화성(華城)에 합쳐 소속시킨 뒤에 경기의 정군(正軍) 14초(哨) 가운데에서 줄어든 수가 합하여 3백 19명이나 됩니다. 만약 각도의 정군을 매 초(哨)마다 각각 3명씩 줄여 이들을 모아 대신 채운다면, 경기 안의 정군을 감원하는 것이 실로 중난함은 물론 초(哨)를 만들어 번(番)을 배정할 즈음에 장애되는 점이 많이 있을 것이며, 매번 상번할 때마다 여섯 도에서 한꺼번에 군사를 내는 폐단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경기 고을에 있는 관보(官保)를 정군으로 바꾸어서 14초의 편제를 채워넣을 경우에는, 이들에게서 거두어들이던 포목이 자연 줄어들 것인데, 이것은 다른 도의 정군 가운데에서 줄어든 것과 아울러 자보(資保)528) 를 옮겨다가 보충해 넣는다면 일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그러니 올해에 번을 들어야 할 군사들과 내년 가을까지 번 드는 것을 중지한 군사들 외에는 올해의 신포(身布)를 일체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마도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우의정 심환지가 상차하여 스스로 인피하기를,
"신이 섬에 유배보낸 죄인 성덕우(成德雨)의 일을 가지고 대략 소견을 진달드렸는데, 상께서 엄하게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유시하고, 또 특별히 용서해 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궁궐문에 나아가 처분을 내리는 것은, 은미한 의리를 천명하고 충성과 반역의 구분을 밝혀서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깨닫게 하여 지향하고 버리는 즈음에서 미혹되지 않게 하며, 어두운 거리에서 빠져 나오게 하고 대대로 충성한 집안을 보전해 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한밤중에 우레소리가 울려 많은 사람들의 취한 꿈을 깨운 것으로 천지와 더불어 그 크기를 같이하는 대성인의 크나큰 역량이라 할 만합니다.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를 엿볼 수가 있겠습니까.
성덕우는 바로 일개 미욱하고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신이 오랫동안 이조에서 상사(上司)로 있었다고 여겨 그 일이 아직 드러나기 전에 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의 본심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에 신은 그가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한 행동일 수도 있겠다고 여겼습니다만 자취가 실로 충성과 역적, 의리와 도리에 관계된 것인 만큼 그를 용서해주자는 논의를 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단지 마음속에 무엇인가 걸려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며, 임금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에서 감히 우러러 진달드렸던 것입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용서해 주는 것이 참으로 하늘에 걸려있는 해와 별과 같이 밝은 대의(大義)에 손상될 것이 없고 일개 성덕우의 불능함을 불쌍하게 여겨주는 것 또한 성스러운 조정에서 대대로 충성한 신하를 보호해 주는 한 가지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서 그렇게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대간의 계사가 발함에 미쳐서 그 의리가 엄명하고 그 말이 준절하였으니 신은 비로소 깜짝 놀란 채 어찌할 바를 몰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등골에 땀이 배었습니다.
신이 평생토록 지켜온 것이 어찌 한때 이조에서 동료 관원으로 있었다는 안면 때문에 선뜻 흔들리기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창졸간에 그 일이 큰지 작은지, 중한지 가벼운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여서 끝내는 망발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옛날의 어진 이들은 남에게 잘못이 있을 경우 부지런히 바로잡아주는 것을 밝은 세상의 아름다운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공의(公議)가 일어날 경우에는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따지지 말아야 하는 법입니다. 대간으로 있으면서 법을 집행하는 관원들이 한갓 신이 별다른 생각없이 망발한 죄를 용서하기만 하고 마침내 그에 대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체모에 있어서 어떠하겠으며 세도(世道)에 있어서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오늘의 일에 대하여 감히 연영문(延英門) 밖에서 태평 만세(太平萬歲)의 축하를 바치지 않겠습니까마는, 신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의리상 엄하게 지켜야 할 예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스스로를 용서하고서 모든 관원의 윗자리에 태연스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견책하는 벌을 내려주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경이 차자를 올려 인피한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경과 같은 사람이 일전에 경연 석상에서 아뢴 바가 있었는데, 그것이 아무런 사심이 없이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이미 헤아리고 있으며, 공론도 반드시 그 공정한 마음에 감복하고 있을 것이다. 경의 차자 가운데서 ‘오늘날 용서해주는 것이 대의에 손상될 것이 없고 족히 대대로 충성해온 신하를 비호해 주는 한 가지 단서가 될 것이다.’고 한 것은, 경의 말이 간결하면서도 할 말을 다한 것이다. 대간의 계사와 홍문관의 상소에서 경을 지적한 것은 단지 관원들끼리 서로 바로잡아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며, 경 역시 아름다운 일로 여기고 있으니, 어찌 반드시 깊이 스스로 허물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4일 계사
이에 앞서 우의정 심환지가 아뢰기를,
"조정 관원이나 유생들 가운데 늙은 부모가 있는데 다른 형제가 없는 자로서 가벼운 죄를 짓고 유배를 간 지 이미 여러 해 되어 정리상 동정할 만한 자가 있을 경우 용서해 주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말에 따라서 의금부에 명하기를,
"부모가 이미 늙어 돌아가서 봉양해야 할 나이에 이르렀는데도 미처 정장(呈狀)하지 못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비록 기한이 차지 않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그 사실을 다 알고 아주 불쌍히 여길 만한 자에 대해서는 초기(草記)를 올리라."
하였다. 이에 의금부가 아뢰기를,
"진해현(鎭海縣)에 정배 중인 죄인 신재덕(申在德)은 어미의 나이가 80세이고, 흥양현(興陽縣) 여도(呂島)에 정배 중인 죄인 최상기(崔尙耆)는 어미의 나이가 70세이며, 용천부(龍川府)에 정배 중인 죄인 윤항검(尹恒儉)은 어미의 나이가 64세인데, 모두 형제가 없어서 정리상 매우 가련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풀어주라. 그리고 이 뒤로는 비록 특별 전교로 인하여 정배한 자라 하더라도 부모의 나이가 돌아가 봉양해야 할 범위 안에 들어있으면 금부와 형조에서는 반드시 그 즉시 사유를 갖추어 초기를 올려 품지할 일로 규례를 정하라.
그리고 특별 전교로 인해 유배하였거나 조율(照律)하여 정배하였거나를 막론하고, 또 양반이나 상인(常人)을 막론하고, 부모의 나이가 돌아가 봉양하여야 할 범위에 들기 전에 귀양지로 갔다가 귀양지에 도착한 뒤 봉양해야 할 범위 안에 들게 되었을 경우, 이러한 부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에 대해 현행의 규례를 상세히 조사해보고, 이어 시임과 원임의 대신들에게 물어본 다음 그들이 대답한 의견을 모두 적어서 초기를 올리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본부에 있는 등록에는 근거로 삼을 만한 규례가 없습니다. 대신들에게 물어보았더니, 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은 ‘특별히 내리는 은전을 적어서 규례로 만드는 것에 대해 신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됩니다. 특별 전교로 인하여 귀양가는 자들은 모두 죄가 가볍지 않은데, 법을 관장하는 관원이 어떻게 감히 부모의 나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명이 내려진 초기에 취소하라고 여쭐 수 있겠습니까. 세월이 조금 오래된 뒤에 대신이 혹 아무개의 귀양은 사정이 어떻다고 아뢴다면 어진 정사를 하도록 임금을 이끄는 도리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규정을 정하소서. 그리고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전인 자의 경우에는 끌어다 댈 만한 전례가 없고, 상놈의 경우에는 호적법이 엄하지 않아서 나이를 속이는 자가 많습니다. 더구나 규정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경우에는 도리에 어긋나는 못된 짓을 하면서도 늙은 부모가 있는 것만을 믿고서 이리저리 날뛰며 사대부를 모욕하고 남의 재물을 탈취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더라도, 사형에 처하는 데에 이르지 않는다면 다시는 조율하여 징계할 방도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일률적으로 규정을 정하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2월 5일 갑오
민태혁(閔台爀)을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승지로 있을 때의 일로 해서 파직하고 서매수(徐邁修)를 대신 임명하였다.
판의금부사를 가망(加望)할 것을 명하여 김재찬(金載瓚)과 조상진(趙尙鎭)을 더 의망하니, 김재찬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판으로, 남공철(南公轍)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7일 병신
비변사가 아뢰기를,
"월령(月令)의 약재(藥材)를 공물로 만드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내의원(內醫院)에 물어보았더니 ‘본도의 크고 작은 영(令)에 정비(情費)로 들어가는 것이 본디 몹시 자질구레하기 때문에 비록 경공(京貢)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의관(醫官) 이하에게 크게 손해나거나 이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공물로 만드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는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였습니다. 호서 한 도에 정비(情費)로 책정한 것이 겨우 4백여 냥 뿐인데 비인(庇仁) 한 고을에서만 2백 냥이 넘는다는 것은 반드시 영(營)에서 함부로 쓰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고을도 이를 미루어서 알 수 있으니 이처럼 보고하는 기회를 인해서 별도로 바로잡는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로 하여금 각 고을의 약재를 모아서 상납하게 하되 잡비는 본원에서 쓰는 잡비를 기준으로 책정해 주고, 영에서 쓰는 잡비는 분명하게 드러난 것들을 일일이 열거하여 보고하게 한 뒤 다시 헤아려서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8일 정유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와 과강(課講)을 실시하였다.
이만수(李晩秀)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9일 무술
초계 문신의 친시와 과강 및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실시하였다.
이경일(李敬一)을 이조 참판으로,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채홍원은 얼마 뒤에 승지에 제수하고 임희존(任希存)을 대신 임명하였다.
12월 10일 기해
초계 문신의 친시와 응제 유생(應製儒生)의 비교 시험을 실시하였다. 이는 어제 성균관에서 상재생(上齋生)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험에서 1등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권유(權𥙿)를 공조 판서로, 조상진(趙尙鎭)을 형조 판서로, 김재찬(金載瓚)을 예조 판서로, 조종현(趙宗鉉)을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12월 12일 신축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초계 문신의 친시와 과강 및 상재생(上齋生)의 두 번째 비교 시험을 실시하였다.
구익(具㢞)을 형조 판서로, 김사목(金思穆)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2월 13일 임인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정(軍丁)의 폐단이 근래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우리 조정의 규정과 옛날의 규정은 모두 16세부터 61세까지 신포(身布)를 바치고 상번(上番)하는 자에 대해서는 징수하지 않는 것으로 은연중에 당(唐)나라의 조용조법(租庸調法)과 합치되었다. 그리고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한 이후에는 한 사람이 2필을 내던 것을 1필로 감하였으니, 조용조법에 비하여 부담을 줄여준 것이 어떠하였던가. 이에 백성들이 도탄에서 벗어나 편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필수를 줄여주었는데도 백성들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선조조(宣祖朝) 때의 오위 제도(五衛制度)에서는 기병과 보병은 바로 왕궁의 친위병이었고 사대부와 백성들이 모두 신포를 바쳤었다. 오위의 제도가 폐지되면서부터 훈련도감이 설치되었으며, 금위영과 어영청의 자보(資保)는 예전에는 없던 것이 지금 생겨난 것으로, 통틀어서 계산하면 거의 1백만 명에 가까웠는데 아무리 가난한 백성이라도 신포 1필은 해마다 으레 바쳤다. 그러나 예전에는 한 집에서 장정 1명만 내었으므로 한 집안에 비록 장정이 10명이 있더라도 단지 한 사람의 신포만 내었기 때문에 몇 호라고만 부르고 몇 명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한 호 안에서도 장정수에 따라 신포를 징수하는데, 어린이와 죽은 사람까지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조금이나마 이 폐단을 구제하고 백성을 소생시키기 위한 방도로는 정원수를 줄이는 것이 첫번째 계책인데, 우선 먼저 아전들이 거두어들이는 인정가(人情價)부터 일체 거두지 못하도록 막은 다음에야 앞으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사대부에 대해서도 사직(司直) 이하부터 호구에 따라 신포를 징수하였는데도 백성들이 오히려 고통을 면치 못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대동포(大同布)와 기병포(騎兵布)·보병포 및 그외 일일이 거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각종 명목의 포를 모두 백성들이 내야 하니,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현재 경사(京司) 가운데 폐단이 되고 있는 것으로는 병조에서 거두는 거친 군포(軍布)만한 것이 없다. 세속에서 이르기를 ‘보병포는 대동목(大同木)보다도 더 나쁘다.’고 하는데, 바로 이 포를 말하는 것이다. 병조에 바치는 각종 군포는 포의 품질과 잣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많이 퇴짜를 놓는데, 아전들이 이를 틈타 협잡질을 하고 낭청들 역시 뇌물을 받는다. 그 사이에도 품질이 좋은 포목이 없지는 않지만 이것은 각종의 삭하(朔下)529) 로는 전혀 나누어주지 않고 단지 서리들이 농간을 부리는 물품으로만 되어 삯을 받는 군사들이 삭하로 받는 포목은 전혀 입을 수가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40자 되는 육승포(六升布)는 죄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것은 낭관을 제대로 가려뽑지 못하여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비변사에서 혹 삭하를 나누어줄 때 적간하여 드러나는 대로 죄주기를 청하는 것이 옳다."
하니, 좌참찬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옛날에 면포를 쓸 때에는 단지 잣수의 많고 적음만 따지고 승수(升數)가 좋은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돈을 통용한 이후부터는 베의 품질에 따라 값의 많고 적음을 정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승수와 잣수를 줄일 경우에는 하읍(下邑)에서 상납하는 베가 반드시 꼴이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 있을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예전대로 그대로 두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좌의정 이병모 등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차대는 바로 1년 열두 달의 민사(民事)와 국사(國事)에 대해 모두 회계(會計)하는 날이다. 이른 새벽 옷을 갖춰 입을 때에 무엇인가 할 것 같았는데, 정오가 이미 지났는데도 한 가지 계책도 내놓는 것이 없으니, 조정에 기대를 걸고 있는 전국 3백 60고을 백성들의 마음에 무엇으로 조금이나마 부응할 수 있겠는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경들은 보필하는 재상 자리에 있는데, 옛날에 칭하던 상업(相業)의 ‘업(業)’ 자는 그 뜻이 중차대할 뿐만이 아니니 일마다 잘 조처해 나가는 것이 옳다."
하고, 또 형조와 한성부의 당상에게 이르기를,
"소의 도살을 금하는 규정은 새로 만들어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전부터 있어온 제도이다. 경외의 유사(有司)들은 비록 조정에서 지시를 내리지 않더라도 마땅히 법대로 금지시키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처사가 도리에 어그러졌다. 작년에는 이 문제로 소요를 일으켜서 경기 감사가 요로(要路)를 지켰고 장수는 군교를 파견하여 성문을 지켰는바, 몹시 해괴하였다. 문을 겹겹이 세우고 딱따기를 치면서 경계하여 포악한 자를 막는다는 뜻이 어찌 이것을 두고 한 말이겠는가. 경들은 유사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자연 금지할 방도가 있을 것이다. 어찌 반드시 민간에 소란을 피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평신 첨사(平薪僉使)를 장용영(壯勇營)에 소속시키고 장용영에서 자체적으로 뽑는 벼슬자리로 하도록 명하였다. 장용영 제조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평신 첨사의 임기가 만료되었는데 오랫동안 근무한 자로 차임해 보낸다고 합니다. 평신을 외영(外營)으로 옮겨 소속시킨 뒤 전민(田民)에 관한 정사를 모두 맡아 관할하는 책임이 몹시 중대하니, 오래 근무하기만 한 무능력자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니, 그 말에 따른 것이다.
선혜청 제조 정민시가 아뢰기를,
"금년에는 재결(災結)로 처리해 준 땅이 거의 10만 결이나 되어 조세 수입이 크게 줄어 경비가 넉넉치 못합니다. 전에 이와 같은 때에는 서울의 공물가(貢物價)는 10분의 1을, 삼남 지방과 경기 감영의 관수(官需)는 8분의 1을, 각종 대동(大同)을 회감(會減)한 것은 8분의 2를 줄여서 지출하는 것이 전부터의 규례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왕조 때 갑신년에는 재결이 9만 3천 3백여 결이었는데 을유년에 이 규례에 의거하여 감하였고, 지난 갑인년에는 재결이 11만여 결이 되었으나 을묘년이 바로 큰 경사가 있는 해여서 특별히 20분의 1을 감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규례에 속하는 만큼 이를 끌어다가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년에 감하는 숫자를 을유년의 규례에 의거해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좌의정 이병모 등이 아뢰기를,
"연전에 20분의 1을 감하도록 한 것은 특별한 은혜에 속하는 일입니다. 금년에 여러 도에서 재결로 처리해 준 숫자가 선조(先朝) 을유년 때와 서로 같으니, 을유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비록 4년 전의 특별한 규례를 끌어다가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현재 백성들의 생활이 옛날과 같지 않으니 서울의 공물가를 특별히 15분의 1을 감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아뢰기를,
"개성 유수 조종현(趙宗鉉)이 현재 판돈녕부사의 직책을 띠고 있는데, 자급이 정1품이니 유수에 제수된 뒤에도 판돈녕부사의 직책은 그대로 띠고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연전에 정1품과 정2품 이상의 감사로서 판돈녕부사나 지돈녕부사의 직책에 빈자리가 있을 경우 겸임시키도록 규례를 정하였으나, 유수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현재 판돈녕부사의 직책을 띠고 있으면서 육경을 겸임하는 것은, 관원 임명법이 바로 그러합니다. 유수의 직책은 더더욱 구애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심환지가 아뢰기를,
"연전에 신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1품 중신(重臣)의 본직인 판돈녕부사로서 경기 감사를 겸대하는 것에 대해 경연에서의 분부로 인하여 정사에 회부하였습니다. 유수와 감사는 조금 차이가 있으니, 마땅히 전례를 고찰하여 규정을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돈녕부사와 유수가 비록 다같이 내직(內職)이라고는 하지만 이조 판서의 중임을 어찌 유수에 비하겠는가. 보국숭록 대부가 이조 판서를 겸임하면서도 오히려 돈령부의 직함을 띠고 있었다. 이 뒤로는 이 전례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대신이 새로 인쇄한 《춘추(春秋)》를 문신과 유생의 전강(殿講)에서 쓰도록 진달하여 윤허받았으니, 경(經)과 전(傳)을 아울러 강론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춘추》에 전(傳)이 있는 것은 삼경(三經)에 전주(傳註)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춘추》의 경문(經文)이 간략하니 전까지 아울러 강론에 응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며, 전은 좌씨전(左氏傳)을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심환지는 아뢰기를,
"《춘추》의 경문을 강론하면서 전을 강론하지 않으면 공자께서 가필하고 삭제한 은미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여러 전 가운데 좌씨전이 가장 좋은데, 옛날과 시대가 멀지 않아서 기사가 자못 상세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강(講)을 나누어 절목을 세운 뜻과 규례는 바로 성조(聖祖)께서 남기신 뜻을 준용하는 것인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이번에 새로 인쇄한 《춘추》로 강론에 응하고 전은 좌씨전을 쓰되 역시 이번에 새로 정한 대문(大文)으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찬이 아뢰기를,
"유생들은 마땅히 배강(背講)해야겠지만 문신의 경우는 비록 명경과(明經科) 출신이더라도 능숙한 자가 없을 듯합니다. 면강(面講)할 것인지 배강할 것인지를 하나로 결정하여 분부해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문신 가운데 명경과 출신으로서 《춘추》를 강하기를 자원하는 자에 대해서는 형세상 제술(製述)에 합격한 다른 문신들과 함께 강에 임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김재찬이 아뢰기를,
"유생들의 일차 전강(日次殿講)에는 삼경의 책명을 써넣었다가 낙점을 받을 때 《춘추》 하나를 더 써넣어 들이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재찬이 또 응강(應講)을 시작할 시기를 정해 주기를 청하니, 내년 4월부터 시작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이, 금위영(禁衛營) 향군(鄕軍)들의 번을 중지한 것을 다시 한 기(期)를 더 연장하고 이들에게 줄 군량의 남은 것을 가지고 부족한 경비에 보태어 쓰기를 청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좌의정 이병모가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4일 계묘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자와 추위에 떨고 있는 자를 살펴보고서 옷과 솜을 나누어주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기강은 매번 거조와 서로 맞물려서 행해지는바, 거조가 제대로 되느냐 못 되느냐에 따라서 기강이 서고 무너진다. 작년에 전임 좌상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그럴 것이라고 여겼는데, 금년에 또 우상의 말을 들으니 과연 그러하였다. 조정에는 나름대로 체모가 있는 법이니, 법에 있어서 금지해야 할 절목에 관계되는 것은 이미 법사(法司)가 있는데, 무슨 법인들 시행할 수 없겠는가. 그런데 새해 초가 가까워져 도살을 금지하는 때에 당당한 법사가 경기 감사와 장신(將臣)의 힘을 빌려서 문을 지키고 길을 막으며 짐바리를 수색하는 거조가 있었다고 하니, 이것이 과연 무슨 규례이며, 또한 어느 법전에 그런 내용이 실려 있는가? 거조를 스스로 가볍게 하기를 이와 같이 하고서야 기강이 어찌 땅을 쓴듯이 허물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漢)나라의 법이 관대하였지만 토지가 개간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사(刺史)와 태수(太守)를 죽였다. 토지를 개간하는 것은 바로 밭가는 소이니, 소를 도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소를 도살한 데 대한 율을 살인한 죄에 비해 두 등급을 감하여서 곤장을 치고 유배보내는 까닭이다. 연전에 고(故) 정승이 거듭 금지시킬 것을 청했을 때 단지 고개만 끄덕이고 지금까지 특별한 전교를 내리지 않았던 것은,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옛법이 있으므로 단지 거행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보고자 해서였다. 그리고 또 해이해진 뒤끝에 다시 신명하고자 하면 어찌 지나치게 가혹하게 하는 일이 없겠는가. 그런데도 문을 지키고 길을 막는 등 법에도 없는 거조를 하였다는 것은 한갓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두려워하게 만든다는 뜻과 상반될 뿐이다. 잘못을 답습하지 말라는 뜻으로 접견하는 자리에서 담당하고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직접 유시하였는데도 경기 감사는 듣지 못한 듯하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이 분부하는 것이니 기강과 거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데도 영이 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사의 죄이니 어찌 벌을 면하겠는가."
하고, 이어 경기 감사에게 유시하기를,
"연래에 길목을 지키고 짐바리를 수색하는 등 법에도 없는 거조를 함부로 하였는데 여러 고을들이 법을 범하여 거의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은 고을이 없었다. 그런데도 근무 평정에 하를 써넣거나 혹 장계를 올려 파직시켜 내쫓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가장 외람되고 더욱 무엄한 무리들에 대해 이와 같이 하고서야 기강이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이미 길을 막아 백성들을 소요시킨 데 관계된 자들 중에 관부(官府)의 시하(侍下)를 제외하고 함부로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우선 엄하게 금지시키고, 먼저 발각되는 자부터 계문하여 논죄하라. 전에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데 경이 아직까지도 아무 말없이 잠자코 있었으니, 경이 법을 봉행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선은 잘 몰라서 그랬다고 덮어두고 앞으로 어떻게 하나 보고자 하니, 이러한 뜻을 모두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5일 갑진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초계 문신(抄啓文臣)과 성균관 유생의 전문(箋文)을 받았다.
전교하였다.
"정원 외의 장용위 서춘보(徐春輔)가 오늘 장용위의 봄철 시사(試射)에서 철전(鐵箭)을 1백 50보나 떨어진 곳에서 쏘았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아가게 하라. 그는 서 문청공(徐文淸公)530) 의 손자인데, 서 문청공은 나의 스승이다. 내가 서 문청공을 보기를 남 문청공(南文淸公)531) 과 같이 하고 있으니 무과라고 해서 어찌 문과와 차이가 있겠는가. 문반에 있어서의 내각(內閣)은 바로 무반에 있어서는 별군직(別軍職)이다. 서 문청공의 손자 서영보(徐榮輔)와 남 문청공의 아들 남공철(南公轍)이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 즉시 직각(直閣)에 제수하였었다. 이미 문과 급제자에게 시행하였는데, 어찌 무과 출신에게 아끼겠는가. 서춘보를 별군직에 차하(差下)하고, 내일 승지를 보내어 문청공에게 제사를 지내라.
박 유선(朴諭善)의 집안에도 역시 무신이 있으니 훈융 첨사(訓戎僉使) 박종주(朴宗柱)를 별군직에 똑같이 차하하고,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그의 집에도 똑같이 제사를 지내어서, 옛 스승을 잊지 못하고 있는 뜻을 표하라."
의금부가 아뢰기를,
"이여절(李汝節)이 함부로 곤장을 쳐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해 엄하게 캐물었더니, 이여절이 공초하기를 ‘죽은 사람들이 받은 형장은 모두 법에 따라 형장을 친 것으로, 애당초 법에 벗어나서 더 때린 일이 없다. 공무를 인하여 사적인 감정을 풀었다는 한 가지 조항은, 모두 공적인 일을 인하여 각각 그 죄를 다스린 것이며, 더구나 감영에 보고하고 죄를 결정한 자가 그 가운데 많이 있는데 어찌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하여 인명을 많이 죽일 리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대개 지난해의 공초와 차이가 없으니, 형추하여 실정을 캐내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조사하고 또 조사해본 사안이니 참작하여 처결하는 외에 어찌 다시 추문할 단서가 있겠는가. 그러나 대간의 논계가 결말이 날 기약이 없었기 때문에 이처럼 잡아다가 추문하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하고, 이어 수의(收議)하라고 명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이여절의 처결 문제를 판부하신 내용에 의거하여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에게 물어보니, 판중추부사 채제공은 아뢰기를 ‘이여절의 일에 대하여 조정의 의논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대간의 논계에서는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인명을 중시하고 국법을 엄히 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다른 의견을 제시하겠습니까. 다만 이여절의 사건이 일어난 이래로 줄곧 괴이하게 여긴 것은, 그가 일찍이 북쪽 지방의 고을에 있었을 때에는 치적이 한 도에서 최고라는 소문이 서울에까지 들렸었는데, 갑자기 남쪽 고을을 맡으면서는 잔인하고 혹독한 사람으로 바뀌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여러 차례 영남 지방의 유생과 무관 및 창원(昌原) 근방의 수령으로 있다가 체직되어 돌아오는 자들을 만나보았더니, 모두들 말하기를 「혹 공적인 일로 인하여 죄를 다스린 자도 있고, 혹 사형죄에 해당되어서 순영(巡營)에 보고한 다음 법에 의거해 곤장을 친 자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금부에서 공초로 대답한 말을 보니 신이 전에 들었던 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자신에 대해 해명한 말을 어찌 다 그대로 밀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순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면서는 호종(怙終)에 대해서는 반드시 형으로 처벌하였는데, ‘호(怙)’란 바로 믿는 데가 있다는 뜻의 말입니다. 이여절은 바로 먼 시골에 사는 세력 없는 무반(武班)이니, 형벌로 다스리는 것은 혹 그 본정(本情)에 맞지 않은 듯합니다. 천지와 같은 임금의 덕에 있어서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정사를 펴도 안 될 것은 없겠습니다만, 대각의 논계가 엄준하니, 신이 어찌 감히 별도로 다른 의논을 제기하겠습니까.’ 하였고, 좌의정 이병모는 아뢰기를 ‘신이 전에 헌의하면서 감히 살려주자고 한 것은 공무로 인해 형장을 쳤다는 자취가 사실을 조사한 문안에 뚜렷이 드러나 있으므로 법에 있어서 마땅히 사형죄는 면해 주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숨으로 보상하게 한다면 그 법을 엄하게 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법이 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 상께서 물으시는 데 대해 비록 다시 새로운 의견을 올리고자 하더라도 끝내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대간의 논계는 체모가 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오로지 상께서 결정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여절이 형장을 함부로 쳐 인명을 죽인 것이 이처럼 많으니, 그의 죄를 논하면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에서 조사한 것과 그가 전후로 공초한 말을 참작해 보면, 그가 곤장을 치고 형벌을 시행한 것이 혹 공무로 인하였거나 순영의 지시로 인한 것이어서 이미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서 한 자취가 없으며, 이들은 모두가 병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목숨으로 보상케 하자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아마도 다시 의논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대신들의 헌의 역시 모두 살려주자고 하니 사형에 다음가는 형률로 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대간의 논계는 체모가 중하니, 바라건대 상께서 결단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이미 순영에 보고하였다고 하였으니 제멋대로 형장을 쳐 죽인 것은 아닌 듯하며, 형률을 감하는 것을 논의하고자 해도 이미 멀리 유배보내는 형벌을 받았다. 이에 알맞은 형률을 상고하여 적용시켜 보건대, 장 1백에 수속(收贖)하고 고신(告身)을 모두 삭탈하라."
하였다.
12월 16일 을사
영암 군수(靈巖郡守) 송문술(宋文述)이 구언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무릇 전지를 개간하는 정사는 백성들의 생명에 관계되는 일로서 기경(起耕)하는데 따라서 조세를 거두고 묵혀버리면 세금을 면합니다. 그러므로 십수 년이나 황폐하게 묵혀버린 전지일지라도 진전(陳田)에 대한 조사를 거치기 전에는 본디 면세해 줄 길이 없습니다. 그간에 일찍이 진전을 조사하여 면세해 주라는 조정의 명령이 있었기는 합니다. 그러나 호조의 신하는 반드시 진전과 기경전을 서로 비슷하게 맞춰놓으려고 하여 예전의 전결 총수보다 조금이라도 줄어들 경우에는 일체 기각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수령으로 있는 자는 감히 자세히 조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해마다 백징(白徵)을 하게 되는데, 이는 고을마다 모두 그러합니다.
삼남 지방의 고질적인 폐단은 오로지 부역(賦役)에 있는데, 이 두 가지 세를 마구 받아들이는 데에는 더더욱 절도가 없습니다. 경창(京倉)의 곡(斛)은 용량이 평두(平斗)로 12, 13두에 지나지 않는데 외방 고을의 곡은 경창의 것과 비교해 볼때 1두는 족히 더 됩니다. 그리고 여러 고을에 있는 조창(漕倉)의 곡은, 큰 것은 17, 18두가 들어가고 적은 것도 15, 16두는 들어가며, 더구나 뱃사람들이 받아들일 즈음에는 또 곡 위에다 더 올려놓는 규정이 있어서 높은 경우에는 거의 1두나 되고 낮은 경우에는 반 두가 넘습니다. 그리하여 곡의 용량의 제도가 다르며 받아들이는 절차 역시 다르니, 이는 비단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것이 지나칠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도량형을 통일시키는 뜻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폐단을 말한 여러 조항에 대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방안을 첨부하여 아뢰어서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복계하기를,
"진전(陳田)을 조사하는 일은, 얼마 전에 여러 수령들의 상소에 대해 회계하면서 이미 논열(論列)하였습니다. 진전과 기경전의 숫자를 맞추어서 원결(元結)을 줄어들지 않게 하는 것은, 비단 법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진전은 있는데 기경전이 없다는 것은 사리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령 새로 일군 밭이 전부 다 비옥한 땅이 되고 다른 밭은 하나도 황폐된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이미 전야(田野)가 개간되었다고 할 수 없는데, 더구나 이 뒤로 묵혀버린 땅이 도로 개간한 숫자보다 더 많을 경우에는 얻은 것이 잃은 숫자를 충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다가 또 토지의 경계가 이미 문란하여 아전들의 농간이 마구 생겨나 진전이니 기경전이니 하는 것은 한갓 문서에만 의존하고 진위와 허실을 다 알 수가 없게 되었으니, 전결 숫자는 새로 불어난 것이 없고 백성들에게는 마구 징수한다는 원성이 있게 될 것은 형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수령의 직책을 맡은 자들이 개간해야 할 땅은 온 마음을 다해 기경하도록 권장하고 부쳐먹지 못하는 땅은 사실대로 조세를 면제해 주며, 몰래 차지한 토지와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엄하게 막는다면, 진전과 기경전이 서로 맞지 않고 전결의 총 숫자를 채우기 어려운 것에 대해 어찌 걱정하겠습니까. 실효가 있느냐의 여부는 오로지 각 해당 고을의 수령들이 얼마나 부지런하게 시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조창(漕倉)에 있는 곡(斛)의 용량에 대한 일은, 세곡(稅穀)을 함부로 받아들이는 폐단에 대해서 연전에 암행 어사가 아뢴 것과 관련하여 이미 신칙한 바가 있는데, 이번에 폐단을 진달한 것이 또다시 여전하니 이는 오로지 창고의 관속들과 뱃사람들이 빙자하여 농간을 부린 탓에 그러한 것으로, 참으로 몹시 놀랍습니다. 곡의 크기에 대해서는 각도의 감영에 이미 견본으로 만들어 놓은 유곡(鍮斛)이 있으니, 조창과 여러 읍에 있는 도량 용기를 반드시 고쳐서 바로잡아 쓰는 것이 마땅하며, 지금 별도로 규정을 정하여 반포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곡 위에다 많이는 7승(升)까지 더 얹어 주는 등의 제반 위법 사실에 대해서는 다시금 여러 도에 엄하게 신칙하여 각별히 금지시키며, 제대로 검칙하지 못하는 차사원과 수령에 대해서는 드러나는 대로 논핵하여 죄를 주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12월 17일 병오
군위 현감(軍威縣監) 구득로(具得魯)가 전지에 응해 소를 올려 고을의 폐단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비답을 내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복계하기를,
"1. ‘본현에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축난 곡식이 8천 9백여 석인데, 이를 5년 동안에 나누어 바치게 하여 기미년부터 계해년까지 매년 1천 7백 80석씩 납부하게 한다면, 현재 백성들의 형편으로 보아 유산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한 일에 대해서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고을에서 환곡을 포흠한 것이 거의 1만 석에 가까우니 각 연도별로 거짓으로 마감한 수령들에 대해 본도로 하여금 석수를 구별해 이름을 지적하여 보고하게 해서 법에 비추어 엄하게 처결할 바탕으로 삼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연한을 정해 나누어 받아들이는 것은 비록 한두 고을에서 괜찮은지 시험해 본 일이 있지만, 기한에 맞추어 받아들여 형편이 조금 펴졌다고는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혹 조금이라도 흉년을 만나면 또다시 정지시켜 줄 것을 청하여 한갓 국가의 체모만 손상될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한해 두해 점점 늦추어지면 장부가 복잡하게 되어 분명하게 지적하여 징수할 근거가 없어지게 되니, 거두어들이기가 용이한 지금 당장 마감짓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에게 분부하여 해당 수령에게 엄하게 신칙해서 가을이 되거든 독촉해 받아들여 전의 잘못된 규례를 모두 없애게 하소서. 그리고 만약 다시 전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할 것 같으면 죄주기를 마땅히 배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뜻으로 한결같이 분부하소서.
1. ‘본현의 각종 군사의 총숫자가 3천 6백 45명인데 어린이와 늙은이 및 유망한 자들을 대신 채울 길이 없다. 삼가 도내의 군적(軍籍)을 살펴보니, 창원(昌原)·청송(靑松)·청도(淸道)·신녕(新寧)·영덕(盈德)·영양(英陽)·안의(安義) 등 고을은 백성은 많은데 군사는 적어 1호당 1명씩 계산하더라도 오히려 2천 호가 남거나 혹 1천여 호가 남으며, 상주(尙州)와 같은 경우에는 원호(元戶)가 1만 8천 6백 79호인데 군사의 총수가 1만 3천 4백 53명이며, 의령(宜寧)의 경우에는 원호가 8천 4백 20호인데 군사의 총수가 6천 97명이다. 그러니 균평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쪽을 감하여 저쪽에 더하는 것이 마땅하다. 본현의 군정 4백 명을 여유가 있는 고을에다 참작해서 나누어 배정하라. 그리고 의승(義僧)의 번전(番錢)532) 과 가산 군관(架山軍官)에 이르러서도 이것 역시 절실한 폐단인데, 군정의 숫자가 조금 넉넉하다면 저절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고 한 데 대해서입니다.
여러 고을의 사정을 먼 곳에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관문(關文)을 보내어 편리한가의 여부를 물어보아 그들로 하여금 자세히 장계를 올리게 한 뒤 다시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1. ‘군위읍(軍威邑)에는 원래 한 꾸러미의 돈도 없으니, 순영(巡營) 관할의 각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돈 가운데서 6천 냥을 5년 기한으로 이자 없이 빌려준다면 매년마다 1천 2백 냥씩 갚도록 하겠다. 이렇게 하여 5년이 지나면 꾸어준 본전 6천 냥을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며, 10년이 지나지 않아 곡식이 1만 석 가까이 되어 이자돈과 이자 곡식이 해마다 1천 냥과 1천 석이 넘을 것이다. 이를 절반은 일반 경비로 쓰고 절반은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데 써서 해마다 불려가고 또 불려나갈 경우, 끝에 가서 본전과 늘어난 토지를 합치면 모든 폐단이 한꺼번에 없어질 것이다.’ 한 데 대해서입니다.
돈을 여기저기 꾸어주어 이자를 받는 것은 본디 좋은 법이 아닙니다. 여러 도의 감영과 고을에 있는 채안(債案)은, 처음에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끝내는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상소에서 청한 것이 무슨 요량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그마한 고을에 또 빚을 더 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일대 폐단이니, 내버려두소서."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환곡에 대한 일은, 호구수를 환곡수와 비교해보면 전혀 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전부터 전해내려오는 환곡이 폐단으로 되고 있는 고을에 대하여 연전에 징계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다시 예전과 같다고 하는가. 이와 같은 내용이 이미 아뢰어진 뒤에도 이런 수령들을 가중 처벌법으로 처벌하지 않는다면 고을이 어떻게 고을 모양을 갖출 수 있으며 백성들이 어떻게 편안히 살 수 있겠는가. 해당 수령들의 이름을 지적해서 보고해 오기를 기다려서 해당 부에서는 본율(本律)보다 두 배 더 심한 율을 적용하여 처벌하라. 연도를 정하여 나누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좌상은 항상 어렵게 여기고 있으나, 한꺼번에 받아들일 길이 없는 여건에서는 양을 정하여 참작해서 받아들여 백성들의 힘이 펴지게 하느니만 못하다. 감사로 하여금 다시 연한을 정하여서 계문한 뒤에 시행하여 잔폐된 것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제거할 방도로 삼게 하라.
군정(軍丁)에 대한 일은, 아무리 감사라고 하더라도 어찌 별다른 견해가 있겠는가. 우선 먼저 특별히 엄하게 감사에게 신칙해서 해당 수령을 불러다가 직접 물어보고 조사해서 바로잡게 하라. 그리하여 현재 4천 명에 가까운 군사의 총수가 호구의 총수인 2천 명에 상당하게 된다면 폐단에 대해 물어보고 조처한 실제 효과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감히 태만하게 하지 말고 즉시 계문하라고 감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사복시가 각도의 목장에서 기르고 있는 말의 실제 숫자를 아뢰었는데, 모두 7천 3백 67필이었다.
12월 18일 정미
도목정을 친히 행하였다. 【 이조 판서 김문순(金文淳), 참판 이경일(李敬一), 참의 임희존(任希存), 병조 판서 이시수(李時秀)이다.】 전교하기를,
"한(漢)나라에서 관리의 선발을 중시한 것은 바로 근본을 도타이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에는 지방의 영장(令長)에서 태수(太守)에 이르기까지 공경(公卿)으로 승진하였는데, 그간에 3, 4번을 옮겨가는데 불과하였으며, 청관(淸官)이나 미함(美啣)을 두어 적절히 안배하여 진로를 터주거나 막는 계단으로 삼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관리나 장(長)의 자손들이 청렴하고 법을 두려워하였으며 풍속이 돈독하고 순후하여서, 백성들이 기쁘게 살아 성대하게 삼대(三代) 시대의 남은 기풍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서 모든 관원들은 3개의 반열로 나뉘어져 있고 3개의 반열 가운데서도 또 허다한 갈래길이 있다.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이미 과거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나, 대성(臺省)이나 관서(館署)나 법종(法從)의 반열에 있는 자들이 도리어 음관(蔭官)이나 무관(武官)만도 못하여, 안으로는 부세를 관장하는 관원이 되지 못하고 밖으로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 또 간혹 낮은 직위에서 끌어올려 그로 하여금 묘당의 논의에 참여하게 해도, 본디 경력이 미천하고 내세울 만한 소견도 없어서, 전곡(錢穀)이나 군병(軍兵)에 관해 마치 소경이 산가지를 놓는 것과 같이 깜깜하기만 하다. 이보다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호호백발이 되도록 유생으로만 지내 왕왕 궁핍한 처지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는 참으로 ‘등용하는 사람이 구하는 사람이 아니다.’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옛 규례가 그러한 것이겠는가. 대개 잘못된 옛 규례를 답습하다 보니 점점 심해져서 그런 것이다. 만약 신진의 문관을 아랫 고을과 역참 등에서 시험삼아 써보아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잘 알게 하였다가 그들을 불러 올린 다음 조정에 나와서는 말로 하고 물러가서는 글을 올려 폐단을 제거하고 고통을 없앨 계책을 역력히 진달하게 한다면, 구중 궁궐이 비록 깊다 하더라도 사방이 모두 가까이 있을 것이니, 나라와 백성에게 도움되는 것이 한번 암행 어사를 파견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점이 있을 것이다. 순임금의 조정에서 아뢰고 시험해 보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같이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주자(朱子)가 남강 태수(南康太守)로 있다가 연화궁(延和宮)에 입대하면서 가장 먼저 총 경비에 필요한 돈과 형벌에 대한 일을 말하였었다. 요즈음 문관 출신 수령들로 하여금 전지에 응하여 글을 올리도록 한 것이나 외방의 역사를 맡은 관원들에게 잘 살펴보도록 신칙한 것이 어찌 아무런 생각없이 한 일이겠는가.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대신과 여러 재상들에게 충분히 토론을 거친 뒤 품의해 재가받도록 하였으나 귀기울여 들어도 들리는 말이 없으니, 나름대로 답답한 생각이 든다. 지금 도목 정사를 당하여 또다시 이렇게 신칙하니,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나의 뜻을 잘 알아서 각별히 궁구하여 명을 받들게 하라.
또 일찍이 고 상신이 아뢴 것을 몹시 옳게 여겨 여러 차례 문관과 음관·무관을 교대로 차임하는 일에 대해 제기하고 경연 석상에서 말하였는데, 아직까지 이에 대한 분명한 규정을 정하지 않고 있다. 근래에 혹 특별 전교로 자리를 바꾼 것은 바로 쓸만한가의 여부를 시험해본 것이니, 이번의 도목 정사에서도 빈 자리가 나타나면 역시 반드시 계품하라. 서로 바꾸어 의망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올해의 이 달은 바로 우리 인선 성모(仁宣聖母)께서 탄생하신 구갑(舊甲)이 되는 해로, 그날이 빨리 돌아와서 며칠밖에 남지 않았는바, 슬프고도 사모하는 마음이 가을에 양릉(兩陵)을 배알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다. 근래에 신풍 본방(新豊本房)의 직계 자손 가운데 관직에 있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궐전(闕典)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왕후께서 세상에 태어나신 무오년이 세 번째 돌아온 때를 당했으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부원군(府院君)의 후손을 해조로 하여금 이름을 물어 본릉의 참봉으로 조용하게 하고, 이어 당일로 사은하여 성후(聖后)에 들어가 숙직하게 하라."
전교하였다.
"연전에 이정모(李靖模)를 초사(初仕)인데도 곧바로 호남 지방의 수령으로 의망한 것은 그의 선조들 때문이었다. 충렬공(忠烈公) 임위(任瑋)의 아들이 처음 벼슬하는 해에 나이의 한계에 찼다고 하니, 만약 그의 근무 일수가 차기를 기다려서 6품으로 승진시키려 하다가는 70세가 될 것이다. 관직을 누리는 것이야 논할 바가 아니지만 이런 집안의 이런 사람에 대해서 어찌 일반적인 규례에 구애될 수 있겠는가. 참봉 임희구(任希耉)를 오늘 정사에서 수령으로 차임하여 보내라."
성덕조(成德朝)를 한성부 판윤으로, 이성보(李城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황인영(黃仁煐)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이윤춘(李潤春)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관서의 자성(慈城)과 관북의 후주(厚州)를 다시 개간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아직도 그곳에 고을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확실히 모르겠다. 두 도 근처의 방어를 담당하는 곳에는 반드시 훈련원 정(訓鍊院正)과 부정, 또는 선전관 가운데서 차임해 보냈다가, 임기가 찰 때까지 아무런 죄없이 체차되어 돌아오는 자를 곧바로 그 도의 수령으로 임명함으로써, 방어가 허술해지지 않고 풍토에 대해 익숙해지게 하며 공사간(公私間)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러니 이들에게 있어서도 어찌 소득이 없었겠는가. 다만 정해 놓은 규례가 유독 분명치 않았기 때문에 점차 당초의 본뜻과 더불어 해이해지게 되었다. 그러니 이 뒤로 훈련원 정과 부정으로써 서북 지방의 특별히 정한 자리의 변장(邊將)을 지내지 않은 자는 애당초 수령에 거론하지 말라."
12월 19일 무신
친히 도목 정사를 행하였다. 전교하였다.
"전 지중추부사 이응거(李膺擧)는 관서 지방의 영변(寧邊) 사람인데 한 번은 고 상신이 감사로 추천하였고 한 번은 역시 고 상신이 고을 수령으로 알맞다고 추천하였으니, 그의 사람됨을 대개 알 만하다. 더구나 또 한 집안에서 세 충신이 나왔으며 그의 나이 또한 80이 넘었다.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제수한 뒤에 지금까지 세상에 살아있다고 하는데, 아깝게도 이미 늙어버렸다. 그가 특별하게 자신의 몸가짐을 조심하고 있으나 다시 등용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마침 감사가 올린 계문의 명단을 보니, 그 안에 세 충신 가운데 고 학생(學生) 이명건(李命建)은 무오년에 공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었다. 충신의 집안을 생각해 주고 그 사람을 등용하는 도리로 보아 돌보아주는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그를 총관(摠管)으로 제수하여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라."
전교하였다.
"근래에 듣건대 북도 지방의 음관(蔭官) 출신들이 사일(仕日) 수가 다 차 임기가 만료되면 까닭없이 작산(作散)되어 내려간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어찌 모두 수령이 되기에 부족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먼 지방의 사람을 회유하고 공도를 넓히는 도리에 있어서 이들이 원망을 품도록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다. 이번 정사에서는 북도 지방의 음관들을 우열을 살펴서 반드시 수령으로 임명하여 시험해 보라."
전교하였다.
"매번 정사를 할 때마다 특별히 유시하여 충신의 자손을 등용하라고 했었는데도 종이장 위의 빈말이 됨을 면치 못했었다. 이번 정사에서는 두 전조에서 이 뜻을 잘 받들어서 조 문충공(曺文忠公)533) 의 집안에서는 감사를 내고, 임 충민공(林忠愍公)534) 의 집안에서는 곤수를 내고, 황 충민공(黃忠愍公)의 집안에서는 도정(都正)을 내고, 윤 충헌공(尹忠憲公)의 후손은 전례대로 목사로 올려 제수하고, 남 충장공(南忠壯公)535) 의 후손은 특별히 발탁하여 수령에 제수하고, 포은(圃隱)536) 의 후손은 곧바로 당상관 자리인 부사(府使)에 제수하였다. 3대의 효자이며 8개의 정려문을 세운 집안의 사람인 이중온(李重溫)에게는 처음으로 벼슬자리를 주었으며, 직급이 낮은 이한두(李漢斗)에 이르러서도 충무공(忠武公)537) 의 서손(庶孫)이라는 이유로 충무공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섰던 발포진 장(鉢浦鎭將)으로 삼았으니, 말이 족히 들을 만하고 명분 역시 실질에 부합된다. 이를 인하여 생각해 보건대, 증 참판 정운(鄭運)은 충무공과 엇비슷한 공을 세웠는데, 그의 후손인 정혁(鄭爀)이 근래에 비로소 발탁되어 변방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세 병영 가운데서 별장(別將)의 자리를 만들어서 그를 특별히 의망하되 경력은 방어사(防禦使)와 똑같이 쳐주도록 하라고 분부하라. 그리고 포은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 당상관으로 올라 가까운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니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부임하는 날 숭양 서원(崧陽書院)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라."
황해도 가도사(假都事)가 황해도 관찰사 이의준(李義駿)이 죽었다고 치계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황해도 관찰사로, 정범조(丁範祖)를 홍문관 제학으로, 김재찬(金載瓚)을 예문관 제학으로, 서매수(徐邁修)를 공조 판서로, 임재수(林載洙)를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2월 20일 기유
친히 도목 정사를 행하였다.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김문순(金文淳)을 한성부 판윤으로, 김화진(金華鎭)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차대하였다. 사은 숙배하는 감사·병사·수사·수령·변장 및 초입사자(初入仕者)와 각사의 오래 근무한 낭청을 불러 보았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호서 지방의 유생들이 올린 상소 가운데에서 제언에 관한 한 가지 일은 즉시 회계하여야만 합니다. 다만 근래에 본사에 와서 글을 바치는 자 가운데는 간혹 성실치 못한 자가 있으니, 이것 역시 폐단이 되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 역시 학문 공부와 같은 것으로, 비록 오활하여 실행하기 어려운 듯하지만 그러나 한 치를 얻는 것도 얻는 것이고, 한 자를 얻은 것도 역시 얻는 것이다.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와 제언을 쌓는 일은 지금에 처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열성조들의 성헌(成憲)인 것이다. 군신 상하가 이에 대해 한가지 생각으로 힘쓰면서 이것을 첫번째 목표로 삼아 각별히 신칙하여 거행해 나간다면 놀고 먹는 무리들을 저절로 농토로 돌아오게 하고 말단의 이끗만좇는 풍토가 점차 없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교서를 반포한 날부터 기어이 한 고랑 한 뙈기라도 개간하도록 관문을 보내어 거듭 신칙하여 실제적인 성과가 있도록 한다면 한 장의 헛말로 그치고 말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곽외(郭隈)로부터 시작한다는 뜻에서 호서 지방 유생들의 상소에 대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린 것이다."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농정은 반드시 일찌감치 하는 것으로 미리 대비하는 방도를 삼는데, 제언을 쌓아 물을 가두는 것에 있어서는 더더욱 미리 도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豫)라는 글자에 있어서 시의(時義)는 대단히 중대한 것이다. 대개 그 시작은 한가하고 여유있게 하면서 서두르지 않는다. 《주역》의 이치로서 살펴보건대 겸괘(謙卦)의 아래에다 예괘(豫卦)의 순서를 정해놓았는데, 역시 《중용》과 서로 표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중용》의 지극히 성실하여 그침이 없는 공부라는 것은 바로 ‘예(豫)’라는 한 자이다. 그러므로 《시경》의 빈풍(豳風) 칠월편(七月篇)의 뜻을 한마디로 단정하자면 예(豫) 자의 뜻이 되니, 옛날에 농사를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다.
대개 아래에서 사람이 성심껏 공력을 다하면 위에서 하늘이 기뻐하여 거듭 풍년이 드는 경사를 해마다 반드시 내리는 법이니, 힘이 미치는 곳이라면 어찌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내년부터 일단 성심을 다하여 실제적인 일을 하여, 해마다 이와 같이 해 나간다면 그 후에는 마땅히 들판이 날로 개간되어 백성들에게 크게 이로울 것이다. 이것으로 1년 동안의 근무 평정을 한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그러니 경들은 각별히 여러 도에 관문으로 신칙하여 농사에 힘쓰는 실효가 있게 하라.
백성을 위하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수령을 적임자로 임명하는 데 달려 있고, 적임자를 임명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묘당에서 책임지고 잘 해나가는 데 달려 있는데, 수령을 융통성있게 바꾸어 임명하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도일 것이다. 예전에 각도의 병영과 병영 관할의 관원을 모두 문관으로 차임해 보낸 것은 법을 만든 뜻이 있는 것이다. 변방 지방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두가 문신이었고 무관을 간혹 차임해 보내었는데, 근래에 문관들은 반드시 승지나 당상관만 되고자 하여 변방 지방으로는 갈 생각을 않는다. 그러므로 문관을 한번 차임해 보내기만 하면 무관들은 모두 의아하게 여기면서 마치 자기들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를 빼앗긴 듯이 여기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이번의 도목 정사에서 선천(宣川)·갑산(甲山) 등의 고을에 문관을 차출한 것은 경장(更張)하려는 뜻이 있는 것 이다.
내직(內職)이건 외직이건 간에 이름에 따라 실속있게 해나가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 나라의 일은 혹 알지 못할 것이 있다. 지난날에는 방어하는 관원으로 있는 자를 ‘경’이라고 부르다가, 오늘날에 수사(水使)가 되면 ‘너’라고 부르니,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고 정승이 규정을 정한 것은 전적으로 방어를 중시하고 조급히 승진하려는 것을 경계한 뜻에서 나온 것으로, 좋기는 좋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건대, 이 역시 어떠한가? 그리고 음관(蔭官)은 초사(初仕)서부터 사송(詞訟)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고생을 다 겪고나서야 현감 자리 하나를 얻는데, 소위 무관들은 훈련원 주부로 있다가 대부분 곧바로 수령에 제수되기도 하니, 이와 같고서야 어떻게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 수 있겠는가. 나는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가려뽑는다는 뜻을 가지고 매번 의망 단자가 올라올 때마다 여러 차례 신중히 고려하여 조금이나마 감당할 만한 사람을 뽑아서 이름에 따라 실제적인 성과가 있기를 기하고 있다. 그러나 수령으로 차임하여 보낸 자들이 백성들을 구제하기를 한결같이 나의 마음과 같이 하여 일마다 나의 뜻을 우러러 받들어서 정성과 노력을 다하는지는 보장하지 못하겠다.
근래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여전히 몇년 전의 모양대로 되어가고 있으니, 세도(世道)에 대하여 걱정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 중에서도 가장 걱정되는 것은 사학(邪學)이 마구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사학을 깨끗이 물리치는 방법은 참으로 바른 도리를 부식시키는 정사에 유의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이번 정사에서 관직을 제수하면서는 한결같이 충성스러운 자를 포상하고 청렴한 자를 장려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리고 음관 출신으로 군수와 부사가 된 자들은 백성들의 일에 대해 유의하는 것이 현감으로 있을 때에 비해 크게 못하다. 부사로 있다가 목사로 승진되면 방심하는 것이 또 부사로 있을 때보다 더 심한데, 이미 올라갈 데까지 다 올라가서 달리 바라는 바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대개 한(漢)나라의 정치에 있어서는 현량(賢良)을 효렴(孝廉)의 근본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상고 시대로부터 시대가 멀지 않은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과거 급제자 중에서 등용하는데, 과거 급제자가 오히려 여러 차례 주나 군을 맡아 관리의 일을 익숙히 아는 음관들보다도 못하다. 오늘 입시한 구임관(久任官)들 가운데에는 등용할 만한 뛰어난 음관들이 몹시 많은데, 그들이 만약 과거에 급제하여 한번 승진해 당상관이 된다면 동래 부사나 의주 부윤, 감사로 되는 것은 한 차례만 옮기면 되는 일이며, 쓰기에도 반드시 본래부터의 과거 출신자들보다 더 나을 것이다.
대개 남행(南行)을 천거하는 것은 바로 우리 조정의 옛법이니, 지금부터 이 한 가지 조항에 유의하여 혹 품계를 제한하거나 나이를 제한하여 추천을 받아 등용한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나은 점이 있을 것이다. 또 간혹 과거를 베풀어서 그 가운데에서 뛰어난 자를 취하여 등용한다면 인재를 얻는 방도에 있어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이병모가 아뢰기를,
"음관들에게 과거를 베풀어서 인재를 뽑는 것은 그 전의 규례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추천을 받아 등용하는 한 가지 조항에 이르러서는 아주 중요한 방법으로, 조정에서 인재를 얻는 면에 있어서 과거 급제자 중에서 일상적으로 뽑아쓰는 것보다 반드시 나을 것입니다. 다만 나이를 제한하고 품계를 한정하는 것은 갑자기 의논하여 정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하고, 우의정 심환지는 아뢰기를,
"과거를 베풀어서 음관들을 시험보이는 것은 선조 때 특별히 한 차례 시행했었으나, 아마도 일정하게 시행하는 법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추천하는 법에 이르러서는 삼대 때부터 있었던 법입니다. 한나라가 융성하였던 것은 오로지 이치(吏治)만을 숭상하여 고을을 다스리다가 재상으로 들어가는 법을 행해서이니, 인재를 등용시키는 방법에 있어서는 반드시 과거 출신자로 기준을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송나라 조정의 어진 재상들도 역시 대부분 음관들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오늘날의 음관이라고 해서 어찌 유독 학식과 재주가 옛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천거법을 다시 밝혀 등용하는 바탕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한나라가 융성하던 때를 세상에서는 삼대 시대 후 한번 제대로 다스려진 시대라고 하니, 한나라 이전은 바로 삼대 시대이다. 그때 천공(天工)을 돕고 백공(百工)을 바로잡은 것도 단지 사람에게 맡겨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것이 비록 노력해서 미치기 어려운 것 같지만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는 자는 역시 이와 같이 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일전의 경연 석상에서 한 나라의 어진 수령들로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근본으로 삼으라고 유시하였는바, 신은 실로 이에 대해 흠앙하였습니다. 이번의 도목 정사에서 문관 출신의 수령을 많이 내었는데, 이들을 만약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게 해서 치적을 세우도록 한다면, 이재(吏才)가 성대하게 일어남이 어찌 옛날만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잘 다스리는 수령이 있을 경우 자주 체차하지 말고 교서를 내려 직급을 올려주는 것도 역시 한 나라의 법에 의거해서 관원과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편안하게 하며, 치적이 더욱 쌓인 다음에 다시 두루 시험해 본다면 아마도 실제에 힘쓰고 치적을 쌓도록 하는 정사에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의 말이 과연 좋다. 나가서 거행할 사항을 써들여서 항상 볼 수 있는 곳에다 기록해 두게 하라."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남행(南行)의 부장(部將)으로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채 출륙(出六)한 자를 무남(武南)이라고 하는데, 병조의 관직으로는 애당초 거론하지도 않고 전적으로 이조에만 소속시키고 있으니, 관제가 어지러워지는 것 역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남행의 선전관을 도총부 도사에 의망하는 것이 대개 예전 규례이다. 선전관이나 부장이나 선천(宣薦)이기는 마찬가지이니 이에 대해서 한번 규정을 정해야 하겠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남행 선전관을 도총부 도사에 의망하는 것에 대해 이미 옛 규례가 있으니, 남행 부장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심환지가 아뢰기를,
"무사로서 남행의 선천을 받은 자라야 비로소 남행 부장이 되니, 마땅히 남행 선전관과 같게 해야 합니다. 어찌 음관 출신을 바로 이조에 소속시켜 병조의 무반(武班)에 나가지 못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해조로 하여금 이 전교를 받들게 하고 이어 규정을 정하게 해 예전 규례를 준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이조 참판 이경일(李敬一)을 내쫓아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삼았다. 정사의 의망 단자를 지체시켰기 때문이다.
12월 21일 경술
상이 전 황해도 관찰사 이의준(李義駿)을 반장(返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교하기를, "이 재신(宰臣)은 바로 옛 요속(僚屬)으로서 옛 고사를 상고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간에 온갖 고생을 겪다가 등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슬픔과 아쉬움이 어찌 백성을 잘 다스리는 감사 한 사람을 잃은 정도에만 그치겠는가. 치제할 때 특별히 글을 짓겠다."
하였다.
승지 한만유(韓晩裕)가 아뢰기를,
"외방의 공해(公廨)에 화재가 난 적은 간혹 있었으나 이번 해주(海州) 감영의 화재처럼 심히 경악스러운 경우는 없었습니다. 소문으로 전해들은 것이라 비록 상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심상한 일이 아닙니다. 감사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감영의 관리 가운데는 머리가 타고 이마가 그을린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심이 이와 같아서야 참으로 위급한 경우를 당하였을 때 어찌 윗사람을 위하고 어른을 위하는 도리로 책할 수 있겠습니까. 해서의 풍속이 본디 사나운 만큼 의당 크게 징계하는 거조가 있어서 다른 여러 도를 경계시켜야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날 밤에 대령하였던 감영의 관속들을 먼저 조사해서 해당 법조문을 시행하고, 아울러 실화한 사유를 조사하는 것이 아마도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대신과 법관들에게 물어서 각별히 엄하게 조처할 바탕을 마련하소서."
하니, 따랐다.
12월 23일 임자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판으로, 임희존(任希存)을 참의로 삼았다. 이조승은 얼마 뒤 병으로 체차되었다.
12월 24일 계축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오늘 옥사를 처결한 것으로 보건대, 영장(營將)이 적임자가 아닌 탓으로 관하의 군교와 병사들이 평민들을 침학해왔으나, 갑인년에 놓쳤던 도적을 끝내 체포한 것으로 보면 역시 영장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할 만하다. 그러니 다그치고 늦추어주는 것을 아울러 시행하면서 어긋나지 않게 하는 데는 또한 적임자를 제대로 택하는 것만한 방법이 없다. 이번 정사에서 새로 제수된 영장 가운데 변경으로 나갈 경력이 되었는데도 다시 영장으로 있게 된 자들에 대해서는 병조 판서로 하여금 초기(草記)를 작성해 뽑아내도록 하고, 앞으로 근무 평정을 할 때에는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별도로 치적을 뒤에다가 기록하여 계문하고 그대로 변방의 경력으로 쓰게 하라. 그리고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는 말을 죽이거나 잃어버린 규례에 의거하여 자급을 강등시키게 하며, 그 이외의 영장들에 대해서도 별도로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를 장계로 보고하게 해서 권장하고 징계하는 거조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앞으로 암행 어사가 나갈 때 수령의 예에 의거하여 각별히 조사해서 그들로 하여금 각자 명심하게 하라는 뜻으로 엄하게 신칙하라."
승지 민창혁(閔昌爀)이 이주혁(李周爀)의 일로 상소를 올리고는 지례 나가버렸다. 그 상소에 아뢰기를,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자를 비록 손으로 찢고 입으로 씹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목숨이 붙어있게 버려두고 있는 것이 신이 길게 한숨쉬고 깊이 개탄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어제는 또 유시하는 글에 도장을 찍으라는 명이 있었기에 충정이 격동되어 외람되이 한번 아뢴 결과 끝내는 옥쇄를 도로 들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에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비상한 하교인 만큼 생각을 돌려 명을 취소하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또 여섯 승선(承宣)으로 하여금 청에 앉게 하고는 일의 체모를 가지고 깨우치시고 의리와 분수를 가지고 책하시면서 신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장하여 성사시키게 하였습니다. 신은 여기에서 갑자기 당한 일이라서 입장을 고수하지 못하고서 사양하지 않은 채 명을 받들었는바,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신의 직을 체차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어제 거조와 오늘 한 행동 및 지레 나가버린 일은 기개있고 의젓하며, 굽히고 펴는 것이 각각 근거한 바가 있었다. 요즈음의 조정에 이와 같이 직분을 다하며 사리를 아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다. 가상함을 금치 못하겠는데 무슨 사직할 일이 있겠는가. 즉시 들어와서 입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한만유(韓晩裕)·이조원(李肇源)·심상규(沈象奎)가 상소하고는 지례 나가버렸는데, 그 상소에,
"우부승지 민창혁이 유시하는 글에 도장을 찍는 일로 인해 상소를 올리고는 지례 나가버렸습니다. 어젯밤에 한번 아뢰어서 성상께서 명을 거두도록 한 것은, 참으로 금법을 엄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승지로서의 체모를 깊이 얻은 것입니다. 지금 비록 엄한 명령에 몰려서 부득불 거행하기는 하였습니다만 신들은 이미 특별히 내리신 전교로 인하여 함께 청에 앉아 있었으니 거행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그가 스스로 인혐하고 나간 데 대해서 신들 역시 어찌 감히 태연스레 자리에 있으면서 함께 나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신들의 직을 체차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이 어찌 인혐할 일이겠는가. 허다한 문서를 다 받아들이고 유지(有旨) 역시 승정원에서 작성하여 보내면서 유독 도장을 찍어야 하는 유서에 대해서만은 여러 날 동안을 내버려둔 채 서로 미루기만 하였다. 유서가 없이 부(符)만을 받아 도임한다면 국가의 체모는 그만두고라도 뒷폐단이 어떠하겠는가. 현재의 의리로 보아 어찌 다른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역시 시폐를 바로잡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한 가지 방도이다. 경들은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보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성실치 못하다.[不誠]’는 두 자는 바로 현재의 폐단 가운데 첫번째로 꼽을 폐단이다. 일전에 승정원의 각방(各房)에 머물려두고 있는 공사(公事)를 기록해서 들여온 것을 보다 보니 경기 수사의 장계가 있었는데, ‘이번 달 22일에 부임하는 일은’이라고 운운한 조항을 얼핏 보고는 새 수사가 도임한 것으로 여겼다가, 다시 생각하여보니 이것은 영종도(永宗島)가 경기 수사의 관할하에 속해서 새로 제수된 첨사 이주혁(李周爀)이 도임하고서 올린 장계였다. 직서(直書)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겨 이렇게 직책과 성명을 빼버리고 써서 들인 것이었다. 승정원에 있는 문서는 원리(院吏)가 으레 모두 써서 들이기에 책할 것이 못 된다고 여겨 엄하게 치죄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이 조정다운 것은 거조(擧措)에 달려 있는데, 거조라고 하는 것은 바로 올바른 자를 등용하고 잘못된 자를 버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미 승선(承宣)에게 가상하게 여기는 뜻을 보였으니, 지난번에 차자를 올린 옥당(玉堂)의 행위는 바로 원리를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로 용서해 줄 수 있겠는가. 당초에는 은혜를 베푸는 데에만 급급하여 단지 구두로 전교하여 홍문록(弘文錄)에 있는 그들의 이름에 찌를 붙여두게만 하였었다. 그러나 사대부의 행동이 이와 같으므로 아전들 역시 이를 본받고 있으니 어찌 두렵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가. 명색이 옥당의 차자라고 하는데 장황하게 성토만 하고 여러 차례 찾아보아도 논열(論列)한 사람의 이름 석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만약 금법(禁法)에 관계되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다만 먼저 금법을 거두기를 청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게 아니라면 말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고금 이래로 이와 같은 옥당 관원을 논사(論思)하는 반열에 놓아두고서 그들로 하여금 아무 탈없는 학사(學士)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전혀 홍문관을 설치한 본뜻이 아니다. 찌지를 붙인 다섯 옥당 관원은 【응교 엄기(嚴耆), 교리 홍수만(洪秀晩), 부교리 박종경(朴宗京), 수찬 홍낙안(洪樂安)·신현(申絢)이다.】 다시는 시종관이나 삼사의 직에 거론하지 말 것이며, 또한 다섯 사람의 이름을 의망 단자에 올리지도 말아 이로써 먼 곳으로 유배보내는 형벌을 대신 하라."
12월 25일 갑인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기곡 대제(祈穀大祭)의 서계(誓戒)를 받았다.
12월 26일 을묘
후주(厚州)에 사는 유학 우만훈(禹萬勳)이 상소하기를,
"후주(厚州)·무창(茂昌)·여연(閭延)·우예(虞芮)·자성(慈城) 등 7백 리 땅은 바로 우리 나라의 기름진 땅인데도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지난 갑인년에 서쪽에 자성을 설치하고 북쪽에 후주를 설치하자 동서 남북의 백성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짐을 싸들고 모여들어 서쪽으로 자성에 들어간 자가 1천여 호이고 북쪽으로 후주에 들어간 자 역시 1천여 호입니다. 자성은 자성강(慈城江)을 경계로 삼고 후주는 박철구비(朴喆仇非)와 입암(立巖)을 경계로 삼고 있는데, 이른바 입암이란 곳은 후주진으로부터 10여 리쯤 되는 곳에 있습니다. 지역이 이와 같이 좁고 백성들이 이처럼 모여들었는데도 강을 경계로 한 금법에 구애되어 날마다 모여드는 백성들로 하여금 개간하여 농사짓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농사를 권장하고 근본에 힘쓰는 정사이겠습니까.
대개 후주란 땅은 연지평(蓮池坪)과 상패평(祥覇坪) 두 평원이 북쪽으로 압록강을 베고 있어 지형이 아주 낮고 기후도 자못 따스하며 또 서리가 늦게 내리는 관계로 오곡이 잘 익고 삼과 목화가 잘 자라니, 이곳이야말로 사람이 살 만한 좋은 땅입니다. 그외에 고을 남쪽에 있는 금신(金申)·대호지(大好地)·소호지(小好地) 등의 지역은 압록강으로부터 1백여 리 떨어져 있는데, 긴 골짜기와 깊은 산으로 이루어져 한가닥 고갯길이 하늘까지 닿아 있으며, 토질과 기후가 연지평이나 상패평만 못합니다. 이 때문에 흘러들어와 농사짓는 백성들이 연지·상패 두 곳으로만 들어가려고 하고 그 나머지 다른 곳에는 들어가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에 먼저 들어온 자라도 매호마다 농사짓는 전지가 많아야 3, 4식경을 넘지 못하고 적을 경우에는 1, 2식경에도 차지 않습니다. 산과 들이 온통 벌거숭이가 되어 다시 개간할 수 있는 땅은 송곳 꽂을 만한 곳도 없는데도 온 가족을 이끌고 오는 자들이 하루하루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취락을 이루어 살기를 바라면서 경계를 한정하는 것은 들어오게 하고자 하면서 문을 닫아 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모여들어 살면서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고자 하더라도 될 리가 있겠습니까.
신은 북쪽 변경에서 성장하여 이곳의 산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후주에서 서쪽으로 80리쯤 되는 곳에 무창(茂昌) 두지동(斗之洞)의 죽전령(竹田嶺)이 있습니다. 이 고개를 경계로 해서 서도와 북도로 나누어 고개 서쪽은 평안도에서 관할하고, 고개 동쪽은 본도에서 관할하여 농사를 권장하는 하나의 큰 지역으로 삼은 다음, 쟁기를 지고 모여드는 백성들로 하여금 토질의 마땅함을 살피고 수리를 잘 이용하도록 합니다. 그럴 경우 수차(水車)를 이용하지 않고서도 물길이 순조롭게 흐르고, 제언을 쌓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물이 새거나 허물어지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석을 보니, 여연(閭延)은 본디 함길도(咸吉道) 갑산군(甲山郡) 여연촌(閭延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여연 역시 본도의 지역인데 더구나 무창은 또 여연의 동쪽에 있으니 그곳이 본도의 지역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말하기를 ‘무창은 바로 강계(江界)의 삼을 공납하는 지역이니 경솔하게 미리 농사꾼이 들어가도록 허락해서 후주에 속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신이 후주에 살고 있으면서 강계의 삼 캐는 사람들을 직접 보니, 대부분 험한 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후주 경내의 금신·호지(好地) 등처까지 오는데, 후주에서는 애당초 금지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창의 개간할 만한 땅인 강 연안의 평야 지대에는 삼을 캐는 강계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는데도 개간하고자 하는 후주 백성들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강계에서 엄하게 금지하고 있습 니다.
무릇 삼캐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냐 들어가지 않는 곳이냐를 놓고 본다면, 평야 지대의 경우는 반드시 삼이 적게 나고 산골짜기는 반드시 많이 날 것인데도 고집을 부리면서 엄하게 금지시키는 것은, 장차 후주에다 삼의 공납을 떠넘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땅이 만약 개간되어 백성들이 부유하게 된다면 누가 감히 땅에서 나는 토산물을 바치는 것에 온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설사 평야 지대에 삼이 많다고 하더라도 국가에서 보배로 삼는 것은 토지와 백성과 오곡에 있지 삼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또 삼의 이익 때문에 농사의 이익을 금지시켜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평야 지대에는 삼의 이익이 전혀 없는 데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무창·여연·우예의 오랫동안 버려진 땅을 개간하도록 허락하여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로 하여금 이곳에 들어가서 농사짓게 하소서. 그러면 이 역시 농사를 권장하는 하나의 큰 정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는 칠사(七事)를 담당하는 수령이 아니면 시행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관부(官府)를 설치하여 토지를 넓히고 농사를 권장하게 하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서북 지방의 백성들 중 그 누가 기뻐 춤추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멀리 떨어진 후주에 사는 백성이 천리 먼길을 달려와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짓게 하는 방도를 진달하였다. 너의 상소를 정원으로 하여금 뒤에 기록해 서북 지방의 감사에게 하유하여 각자 수령에게 물어보게 하겠다."
하였다.
12월 28일 정사
기곡 대제(祈穀大祭)를 친히 지내겠다는 명을 도로 중지시켰다. 이때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자, 영중추부사 홍낙성(洪樂性)이 차자를 올려 중지하기를 청하니, 이에 따른 것이다.
12월 29일 무오
평안 가도사(平安假都事)가 본도 관찰사 민종현(閔鐘顯)이 졸하였다고 치계하였다. 전교하기를,
"직위가 숭품(崇品)에 이르렀는데도 선비와 같은 생활을 하였는바, 조정에서 돌보아 주어야 할 자는 바로 이러한 사람이다. 지금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상심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한용귀(韓用龜)를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12월 30일 기미
상이 감기 기운이 있었다. 약원(藥院)이 진찰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사직 제향을 섭행(攝行)하라고 명하고 진전(眞殿)의 다례(茶禮)를 친히 행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즉위한 뒤 처음 있는 일이다. 선조들을 받들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조금이나마 통하고 뜻이 기(氣)를 제어할 수 있다면 병이 어찌 나겠는가. 들어와서 진찰하지 말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홍낙성이 졸하였다. 홍낙성의 자는 자안(子安)이고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현손이다. 성품이 온화하여 남을 해치지 않았으며, 부유한 명문 대가에서 성장하였으나 포의의 선비와 같이 검박하게 지냈다. 영종(英宗) 갑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위가 육경에 이르렀고 이조와 병조 판서를 모두 역임하였으나 일찍이 비방이나 모함에 빠진 적이 없었다. 금상 임인년에 정승에 제수되었는데, 상이 일찍이 전교하기를, ‘세파를 두루 겪었으나 끝까지 명예를 지켰다.’고 하였다. 영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지 60년째 되는 해에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향년 81세였고 자손이 모두 번성하였으니 오복(五福)이 모두 갖추어짐이 근세에 드문 바였으나, 재상으로서 칭할 만한 업적은 없었다. 전교하기를,
"병이 났다는 말을 이제 막 듣고는 쾌차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어찌 오늘 영원히 가버렸다는 부음을 들을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몹시 애통하고 슬퍼서 눈물을 금치 못하겠다. 부귀한 집에서 태어나 벼슬길에서 장성하였고 대부로서 늙었으니 공신이 되어 조정에 선 것이 55년 간이었다. 장수를 누렸고 지위는 영의정에 올랐는바, 온갖 복이 온전히 갖추어져서 한 가지 일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세파를 두루 다 겪었으나 초연하기가 원우(元祐)538) 때의 어진 사대부와 같았으며, 평생 동안 실천한 것은 삼가고 두려워한다는 ‘근외(謹畏)’ 두 자였을 뿐이다. 마음가짐은 화평하였고 사람을 접대함에는 독실하고 후하게 하였다. 복록을 누릴수록 더욱 겸손하였고 총애를 받을수록 걱정스러운 듯하니, 사람들은 한(漢)나라의 석분(石奮)이나 당(唐)나라의 분양(汾陽)539) 도 그와 짝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미 죽었으니 애석해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행해야 될 모든 절차는 규례를 살펴 하되 동원 비기(東園秘器)540) 를 훈척의 집안에 내려주는 것은 바로 특별한 은전이니, 장생전(長生殿)에 있는 퇴짜놓은 관재(棺材) 한 부(部)를 즉시 실어다 주라. 그리고 당일로 즉시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고, 3일째 되는 날에는 사관(史官)을 보내어 상주(喪主)를 위문하며, 4일째 되는 날에는 정경(正卿)을 보내어 치제하라. 제문은 내가 친히 짓겠다."
하고, 이어 홍문관으로 하여금 장사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논하게 하고, 녹봉은 3년 동안 계속 실어다 주게 하였다.
우의정 심환지를 호위 대장으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호위 대장의 자리가 비어있는데, 대신과 장신(將臣)들 가운데서 훈척(勳戚)에 속하는 자로 임명한다는 것이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현재 대신들 가운데에는 훈척에 속하는 사람이 없고, 장신(將臣) 중에는 호위 대장이 있으나, 근래 장용영 도제조를 겸임하고 있는 관계로, 관제로 보아 서로 겸임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중한 직책 역시 잠시도 비워두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우의정을 호위 대장으로 삼으라."
하였다.
한성부에서 백성들의 호구수를 바쳤다.
서울은 민호(民戶)가 4만 4천 9백 45호이고 인구가 19만 3천 7백 83명인데, 남자가 9만 8천 6백 93명이고 여자가 9만 5천 90명이었다.
경기는 민호가 16만 1천 7백 72호이고 인구가 66만 2천 9백 92명인데, 남자가 33만 9천 1백 45명이고 여자가 32만 3천 8백 47명이었다.
강원도는 민호가 8만 7백 40호이고 인구가 32만 9천 4백 55명인데, 남자가 16만 6천 6백 93명이고 여자가 16만 2천 7백 62명이었다.
황해도는 민호가 13만 6천 1백 99호이고 인구가 57만 9천 8백 45명인데, 남자가 31만 1천 4백 13명이고 여자가 26만 8천 4백 32명이었다.
충청도는 민호가 22만 6백 93호이고 인구가 87만 1천 57명인데, 남자가 43만 2천 2백 57명이고 여자가 43만 8천 8백명이었다.
전라도는 민호가 31만 6천 7백 32호이고 인구가 1백 22만 6천 2백 47명인데, 남자가 58만 4천 8백 7명이고 여자가 64만 1천 4백 40명이었다.
경상도는 민호가 35만 8천 8백 93호이고 인구가 1백 58만 2천 1백 2명인데, 남자가 72만 5천 7백 43명이고 여자가 85만 6천 3백 59명이었다.
평안도는 민호가 29만 9천 4백 41호이고 인구가 1백 28만 3천 2백 39명인데, 남자가 63만 9천 6백 22명이고 여자가 64만 3천 6백 17명이었다.
함경도는 민호가 12만 1천 7백 69호이고 인구가 68만 3천 9백 66명인데, 남자가 33만 8천 2백 81명이고 여자가 34만 5천 6백 85명이었다.
서울과 지방의 민호는 총 1백 74만 1천 1백 84호이고 인구는 모두 7백 41만 2천 6백 86명인데, 남자가 3백 63만 6천 6백 54명이고 여자가 3백 77만 6천 3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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