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경신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윤음(綸音)을 내려 이르기를,
"권농(勸農)의 유시를 세전(歲前)에 먼저 반포하여 매우 일찍 풍년을 기원하는 뜻을 보였는지라, 부지런하거나 홀만함에 대해서는 추후에 의당 감별할 것이니, 어찌 꼭 다시 애써 사교(辭敎)를 내리겠는가. 그리고 지금 사람이 비록 옛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만일 농사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 어떻게 농관(農官)이 될 수 있겠는가. 옛날 우리 선조(先朝) 때에는 방백(方伯)과 거류신(居留臣) 및 수령(守令)들에게 명하여 각각 그 지방 풍속과 백성의 고통에 대해서 시(詩)나 문(文)을 지어 올리도록 했었으니, 지금 나 또한 그 농사에 밝은 소견들을 모두 진술하게 해서 감히 선조의 고사를 계승하려 하지 않겠는가. 아, 너희 각도 관찰사와 각도 유수들이 먼저 나의 뜻을 받들어 시행할 수 있는 경륜(經綸)을 진술하고, 인하여 수령들에게도 신칙하여 각각 의견을 진술하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세전에 윤음을 반하(頒下)한 이후로 방백이나 수령들 가운데 한 사람도 분부에 응한 자가 없었다. 지금 널리 자문하는 이 일은 곧 선조 때 백성의 고통에 대하여 널리 자문하던 고사를 우러러 계승하는 것이니, 방백과 수령은 모두 각각 마음을 다해서 받들어 행하되, 특히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 수령들은 경륜 책자(經綸冊子)를 작성해서 뜻에 따라 조목조목 진술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일 신유
전 지돈녕부사 홍응신(洪應辰)의 품계를 특별히 숭정(崇政)으로 올리고, 경조랑(京兆郞)으로 하여금 관교(官敎)를 가지고 가서 전하도록 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90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1월 6일 을축
판중추부사 이민보(李敏輔)가 죽었다. 이민보의 자는 백눌(伯訥)인데,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증손이다. 인품이 명랑하고 화락하며 고인의 사적을 많이 알았으므로 동료들의 칭찬을 받았고, 음관(蔭官)으로 목사에 이르렀다. 상이 그의 집이 명가(名家)라 하여 특별히 승지에 제수하였는데, 그와 더불어 얘기를 나눠보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마침내 누차 발탁되어 보국(輔國) 품계에 이르렀고, 상이 그에게 회심와(會心窩)라고 사호(賜號)까지 하였으므로, 한 시대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국조 이래 음관으로 보국 품계에 이른 사람은 황수신(黃守身) 이후 오직 이민보 한 사람 뿐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80세였다.
1월 7일 병인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가 죽었다. 김종수의 자는 정부(定夫)인데,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이다. 젊어서부터 인품이 뛰어나고 문학이 우수하였다. 영종(英宗)무자년001) 문과에 급제한 이후 간혹 실의(失意)를 겪었었다. 그러나 일찍이 상이 동궁에 있을 때 궁관(宮官)으로서 한마디 말로 서로 뜻이 통하였기 때문에 상이 즉위함에 미쳐 그에 대한 권우(眷遇)가 백관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상이 그를 명의(名義)로 허여하고 복심(腹心)으로 의탁하였다. 그리하여 내각(內閣)·문원(文苑)·전임(銓任)·융원(戎垣)의 직을 두루 역임하고, 기유년에 이르러서는 한 몸에 오영(五營)의 부절을 찼다가, 얼마 안 되어 재상이 되었으니, 그 조우(遭遇)의 융성함이 제신(諸臣) 중에 비할 자가 없었다. 매양 경연에서 아뢸 때나 상소문에서 이따금 다른 사람은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을 말하였다. 그래서 행동은 매양 급하게 한 때가 많았고 언론은 혹 한쪽으로 치우치는 점도 있었으나, 대체로 또한 명예를 좋아하고 의리를 사모하는 선비였다. 갑인년에 상소를 올린 뒤로 온 조정이 그를 성토하였으나, 상은 그가 다른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서 잠깐 유배시켰다가 이내 용서하였다. 을묘년에 치사(致仕)하였는데, 그후로도 은례(恩禮)가 변함없어 상의 친서(親書)와 좋은 약제(藥劑)가 늘 길에 연달았다.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고, 관직 생활은 매우 청렴하여 그가 살았던 시골집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뒤에 정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1월 8일 정묘
전교하였다.
"김 봉조하가 또 서거하였다. 이른바 저 사람을 아무리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옛날 30년 전 궁연(宮筵)에서의 한마디 말이 마침내 천재일회의 조우에 부합되어, 강개하게 의리로써 자부하여 죽는다 하여도 후회함이 없었다. 군신(君臣) 간에 어렵게 조우한 특수한 은총을 의지하여 당시의 숙망(宿望)을 일으켜서, 이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오영(五營)을 통관하고 나서 이에 재상이 되었다가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비록 중간에 온갖 풍상을 겪었어도 평탄할 때나 험난할 때나 끝까지 지절을 변치 않았으므로 뭇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집에서는 효도하고 벼슬할 때는 청렴하여 온 조정 안에서 가장 먼저 인정을 받았었는데,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조위(吊慰)하고 자손 주휼하는 일은 의당 내각(內閣)에서 관례에 의거해서 거행할 것이요, 제4일에는 각신(閣臣)을 보내 치제(致祭)하되, 그 제문(祭文)은 의당 내가 친히 지을 것이다. 녹봉은 앞으로 3년간 그대로 보낼 것이다. 인하여 본가(本家)로 하여금 속히 그의 시장(諡狀)을 지어 홍문관에 보내서 의시(議諡)하게 하도록 하라."
윤필병(尹弼秉)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1월 10일 기사
이조 판서 김화진(金華鎭)을 체직하고 김재찬(金載瓚)으로 대신하였다.
1월 13일 임신
이해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경외(京外)의 사망자가 모두 12만 8천여 인이었다. 전교하기를,
"성(城) 안팎의 가난하고 잔약한 백성으로서 자력으로 병을 치료하기 어려운 자나 죽어서 장사를 치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각부(各部)에 엄히 신칙하여 진휼청(賑恤廳)에 뽑아 보고해서 연교(筵敎)에 의거해 거행하도록 하라. 삼남(三南) 및 제도(諸道)에 대해서도 또한 엄히 신칙하여 막(幕)을 짓고 굶주림을 구하는 일과 기타 돌보아주는 일들을 일체 경청(京廳)의 예에 의거해서 거행하도록 하라. 또 고을 소재지와 거리가 조금 멀어서 미처 두루 살필 수 없는 곳에 대해서는 해당 동리(洞里)에서 힘을 모아 서로 돕도록 하라. 그리고 몇 사람을 구활하고 몇 사람을 거두어 장사지냈는지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사해서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5일 갑술
전교하였다.
"근래에 고사를 상고해보니, 비록 여기(厲氣)가 아닐지라도 모든 이름 없는 질병에 대해서도 모두 성황(城隍)과 산천(山川)에 특별히 여제(厲祭)를 베풀고, 교장(郊場)에 단(壇)을 쌓고서 사상자에게 위제(慰祭)를 지냈는데, 이 일은 성주(成周) 시대 벽책(疈磔)002) 의 유제(遺制)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뜻에 있어서는 예(禮)에 없는 일이라도 오히려 새로 만들어서 거행해야 할 입장인데, 더구나 주공(周公)이 《주례(周禮)》에 이 예를 기재하였고,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도 일찍이 거행하였던 일이고 보면, 지금 즉시 이 일을 다스려 거행하지 않는 것은 귀신과 사람을 조화시키는 도리가 아니다. 대신(大臣)에게 물어보았고 첨의(僉議)도 그러하니, 경중(京中)의 경우는 북교(北郊)에 경조 당상(京兆堂上)을 보내서 별려제(別厲祭)를 거행하고, 동·서·남 삼교(三郊)에는 경악(經幄)의 신하를 보내서 위제를 거행하며, 양서(兩西)의 경우는 여제와 위제를 아울러 베풀고, 그 밖의 제도(諸道)에는 모두 벽고(疈辜)의 예를 거행하도록 하라. 그 합행 조건(合行條件)에 대해서는 묘당과 예조 당상이 초기(草記)를 고거하여 시행할 것이며, 제문(祭文)은 문형(文衡)으로 하여금 찬진하도록 하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열성조에서 이미 거행한 예는 비록 해도(該道)의 중앙 지역에 설행(設行)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최근의 규례에는 혹 향축(香祝)을 나누어 보내서 질병이 이미 치성한 곳에는 즉시 날을 가려 설행하고, 아직 치성하지 않은 곳에는 서서히 형세를 보아서 설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전염병은 아직 제로(諸路)에 두루 미치지는 않았으니, 최근의 규례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겠습니다. 그러니 향축을 질병이 이미 치성한 곳에 미리 나누어 보내서 즉시 날을 가려 설행하고, 아직 치성하지 않은 곳에는 형세를 보아서 설행하도록 하되, 제도의 여제는 도내의 가장 치성한 곳에 설행하고, 양서의 위제는 그곳의 가장 중앙 지역에 설행하며,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의 경우는 모두 3일 전에 관례에 따라 설행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제관(祭官)은, 치성한 곳의 경우 그곳이 만일 감영이나 병영이 있는 곳이면 도신(道臣)이 직접 제사를 거행하고, 감영이나 병영이 있는 곳이 아니면 작질이 높은 문신 수령을 차정하도록 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초기에 의거해서 시행하되, 전례를 상고해 보면 꼭 모두 중앙 읍에서만 하지는 않았으니, 다만 치성한 고을 근처를 쫓아 설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서흥(瑞興) 한 읍과 제주(濟州) 한 부는 혹 이름 없는 질병이 유행함으로 인하여 특교(特敎)에 따라 단거 별설(單擧別設)한 적이 있었으니, 지금도 그 고사를 준행하라. 양서의 경우는 별려제와 위제를 아울러 설행하되, 치성한 부근 한 곳에는 도신이 제사를 설행하고, 각읍의 가장 심한 곳에는 각 해당 수령들로 하여금 제단을 쌓고 제문을 지어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향축은 도신이 제사를 설행할 곳에만 내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각사(各司)·각영(各營)에서 무오년의 회부(會簿)를 올렸다. 호조·양향청·선혜청·장용영·훈련 도감·금위영·어영청 등에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황금이 8백 26냥 남짓이고, 은자(銀子)가 42만 1천 6백 77냥 남짓이고, 전문(錢文)이 1백 57만 7천 7백 99냥 남짓이고, 면주(綿紬)가 1백 35동(同) 37필 남짓이고, 면포(綿布)가 6천 3백 42동 20필 남짓이고, 저포(苧布)가 57동 49필 남짓이고, 마포(麻布)가 1천 5백 30동 36필 남짓이고, 미(米)가 26만 4백 23석 남짓이고, 전미(田米)가 7천 5백 10석이고, 대두(大豆)가 3만 4천 6백 92석 남짓이고, 피잡곡(皮雜穀)이 9천 7백 60석 남짓이었다.
1월 16일 을해
제도(諸道)의 봄철 군사 훈련을 정지하였다.
1월 18일 정축
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이 죽었다. 상이 친히 제문을 지어 사제(賜祭)하고 문숙(文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채제공은 고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의 방손(傍孫)이다. 영종(英宗) 계해년에 급제하여 특별히 발탁되어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벼슬이 숭질(崇秩)에 이르렀다. 상이 즉위했을 때 채제공의 이름이 환옥(宦獄)에 나왔으나 상은 차치하고 묻지 않았다. 경자년 이후에는 정신(廷臣)이 삼대 역안(三大逆案)을 가지고 공격하여 온 나라가 일제히 그를 성토하였으나, 상이 즉위한 지 이미 오래인지라 더욱 탕평의 정사에 힘써 무신년에는 어필(御筆)로 친히 그에게 정승을 제수하고 인하여 윤음(綸音)을 내려 제신들을 밝게 하유함으로써 감히 다시는 다투지 않았다. 이로부터 은우(恩遇)가 날로 융숭하여졌고, 그 사이에 또 독상(獨相)도 수년을 지냈으니, 대체로 백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글을 짓는 데는 소(疏)·차(箚)에 뛰어났고, 일을 만나서는 권모 술수 쓰기를 좋아하였다. 외모는 거칠게 보였으나 속마음은 실상 비밀스럽고 기만적이었다. 매양 연석(筵席)에 올라서는 웃고 말하고 누구를 헐뜯거나 찬양하는 데 있어 교묘하게 상의 뜻을 엿보았고, 물러가서는 상의 총권(寵眷)을 빙자하여 은밀히 자기의 사적인 일을 성취시키곤 하였다. 상은 매양 그를 능란하게 부리면서 위로하여 돌보아주고 누차 널리 포용해주었다. 그런데 사술(邪術)003) 이 널리 퍼짐에 미쳐서는, 상이 사교도들의 마음을 고쳐 귀화시킬 책임을 일체 그에게 위임했으나, 그는 사교에 연연하여 흐리멍덩한 태도로 은근히 사당(邪黨)을 비호하다가 끝내 하늘에 넘치는 큰 변이 있게 만들었으니, 《춘추》의 의리로 논한다면 먼저 치죄하는[先治] 율(律)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교하기를,
"저녁부터 새벽까지 백성을 걱정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채제공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진실로 그 사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 기상을 시(詩)로 표현할 경우 시가 비장하고 강개하여, 사람들이 연조 비가(燕趙悲歌)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 이때부터 영고(寧考)004) 께 인정을 받아 금전과 곡식을 총괄하고 세법(稅法)을 관장하였으며, 어서(御書)를 윤색(潤色)하고 내의원(內醫院)에 있으면서 선왕의 옥체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매양 주대(奏對)할 적마다 선왕의 웃음이 새로웠는데, 그때는 그의 수염이 아직 희어지지는 않았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참소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으나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가운데서 그를 발탁하여 재상 지위에 올려 놓았었다. 이어 내각(內閣)에서 기사(耆社)로 들어갔고, 나이가 80이 되어서는 구장(鳩杖)을 하사하려고 했었다. 그 지위가 높고 직임이 나와 친근하였으며, 권우가 두텁고 은총이 성만하여 한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입을 못 열고 기(氣)가 빠지게 하였으니, ‘저렇듯 신임을 독점했다.’005) 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옛날에도 들어보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50여 년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굳게 간직한 지절은 더욱 탄복되는 바인데, 이제는 다 그만이구나.
죽은 판부사 채제공 집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의당 관례에 의거해서 거행하되, 승지가 치조(致吊)하는 일은 홍 영부사(洪領府事)의 전례에 의거해서 하고, 내각의 속관을 보내어 상제(喪制)를 돌봐주는 일과 호상(護喪)하는 등의 절차에 대해서는 각신(閣臣)과 대신(大臣)의 전례에 의거해서 할 것이며, 성복일(成服日)의 치제(致祭)는 승지가 스스로 의당 거행할 것이나, 내각의 치제에 대해서는 또한 김 봉조하(金奉朝賀)의 전례에 의거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기를 기다려서 각신을 보내 거행하도록 하고, 녹봉은 3년 동안 그대로 보내주도록 하라. 그리고 장사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광 군수 박성태(朴聖泰)가 상소를 올려 읍폐(邑弊)를 진술하였으므로, 그 일을 본도(本道)에 내리니, 본도 관찰사 이득신(李得臣)이 장계를 올렸다. 그 장계에,
"영광(靈光)과 법성진(法聖鎭)을 분계(分界)한 뒤로는 본군의 전선(戰船)과 군기(軍器)를 고사(庫舍)에 저장해 둔 채 지금까지 해진(該鎭)에 그대로 두고 있는데, 포항(浦港)의 선직(先直)과 타공(舵工)을 모두 값을 주어 고립(雇立)시키는 것은 실로 융정(戎政)의 허술함에 관계되는 것이니, 진(鎭) 밑에 거주하는 30, 40의 민호(民戶)를 영광으로 구획하여 붙이면 도리어 분계하기 이전만도 못합니다. 본군의 구수포구(九水浦口)는 법성진과의 거리가 수백 보에 불과하고, 두 갈래 물이 한 군데로 모여 돌아 들어서 수세(水勢)가 평온하고 민간의 촌락들이 즐비하여 선박이 많이 모여들곤 하니, 천천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그곳으로 옮겨 설치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조복미(漕復米)의 일로 말하자면, 읍진(邑鎭)이 분계된 처음에 영광안(靈光案)에 붙였던 조군(漕軍) 5백 33명을 법성에 옮겨 붙이고 보니, 복호(復戶) 또한 의당 조군의 소재처에 숫자대로 다 해주어야 하는데, 해진의 결총수(結摠數)가 이미 적으므로, 조군 중 2백 83명에 대한 복호분 5백 66결을 무장(茂長)에 옮겨 붙였습니다. 그런데 무장현에는 이미 원조복(原漕復) 2백 85결이 있는데다가 또 옮겨온 조복을 첨가하여 아울러 상납하도록 독책하게 되면 사세가 장차 전보다 더 거둬들여야 하기 때문에 상환(相換)한 조복을 무장현에 구획하여 붙이고 거기서 얻은 잉여분을 취하여 부족한 데에 보충하고, 수차에 걸쳐 흥덕(興德)에 나누어 구획해 오다가, 무장현에서 폐단을 말함으로 인하여 그대로 무장현에 영원히 정해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옮겨온 조복을 이미 무장현에 붙이고 보면 상환한 조복을 영광으로 환속시킬 수 없으니, 일체 경술년에 정한 법식에 의거해서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경술년의 분면 절목(分面節目)에 ‘영광군의 전선(戰船)·병선(兵船) 및 군기(軍器)의 창고가 법성진에 있고, 진량(陳良)·홍농(弘農) 두 면(面)의 환상고(還上庫)도 본진(本鎭)에 있는데, 이제 이미 분면(分面)한 뒤에는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의당 연내에 옮겨 설치하여 피차가 서로 간섭됨이 없게 해야겠습니다.’ 하였고 보면, 아직까지 이를 옮겨 설치하지 않은 것은 바로 영광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절목을 무시하고 거주민을 책하려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으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즉시 옮겨 설치하여 읍진이 서로 방해가 되는 폐단이 없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조복(漕復)의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읍·진이 분면된 뒤에 5백 60여 결(結)을 조복으로 지급하고는, 해진의 결총(結摠)이 부족한 때문에 이를 무장현에 옮겨 붙였는데, 무장현에는 이미 원조복이 있는 데다가 또 이 옮겨온 조복을 첨가하였으므로, 상환한 조복을 영원히 무장현에 붙여서 그 잉여분을 취하여 부족한 데에 보충하는 것으로 삼았으니, 이는 대체로 임시 방편에 따라 양쪽을 다 편리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만일 영광에 옮겨 붙인다면 무장현의 백성들이 끝내 반드시 폐단을 받게 될 것이니, 도신의 장계에 의거해서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9일 무인
정상우(鄭尙愚)를 이조 참의로, 김이익(金履翼)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21일 경진
신기(申耆)를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1월 22일 신사
동지사(冬至使) 이조원(李祖源), 부사(副使) 김면주(金勉柱)가 청(淸)나라 태상 황제(太上皇帝)가 붕어한 일 및 의주(儀注) 한 통을 동봉(同封)하여 치계하였다. 그 치계에,
"신들 일행이 작년 11월 30일에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세폐(歲幣)와 방물(方物)을 북경 예부(禮部)의 공문에 의거해서 심양의 각 창고에 정납(呈納)한 다음, 그 나머지 물종(物種)들은 전례에 따라 압거장경(押車章京)에게 교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들은 계속하여 길을 달려갔는데, 12월 6일 쌍양점(雙陽店)에 이르렀을 때 신 이조원의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서 혼자 떨어져 그곳에 머물며 병을 요양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신 김면주는 서장관 서유문(徐有聞)과 함께 표문(表文)·자문(咨文)을 받들고 먼저 출발하여 11일에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하였고, 17일에는 방균(邦均)에 이르러 수역(首譯) 김윤서(金倫瑞)로 하여금 기한 전에 달려가서 정사(正使)가 신병 때문에 뒤떨어졌다는 뜻을 예부에 정문(呈文)하도록 하였습니다.
19일에는 북경에 도착하여 바로 예부에 나아가서 표문·자문을 바치고 그대로 남소관(南小館)에 주접(住接)하였습니다. 28일에는 예부의 통지를 인하여 신들 일행이 홍려시(鴻臚寺)에 나아가서 원조(元朝)의 조참례(朝參禮)를 연습했는데, 이때 섬라국(暹羅國) 사신도 함께 조참례를 연습하였습니다. 29일에는 황제가 태묘(太廟)에 행행하게 되어 예부로부터 어가(御駕)를 알현하라는 통지가 있었기 때문에 당일 5고(鼓)에 신들이 오문(午門) 앞에 나아가 지영(祗迎)하였고, 섬라국 사신도 지영하였는데 그들은 신들의 아래 반열에 있었습니다. 예부 상서 기균(紀均)이 백관의 위차를 정돈하고 등대(等待)하였는데, 황제가 환궁할 때에도 신들은 그대로 지영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태상황의 분부에 따라 신들을 인도하여 중화궁(重華宮)으로 들어가자, 태상황이 수방재(漱芳齋)에 나와서 신들을 앞으로 나오게 한 다음 전유(傳諭)하기를 ‘국왕은 평안한가?’ 하므로 신들이 삼가 대답하기를 ‘평안합니다.’ 하니, 인하여 신들에게 반차(班次)로 물러가라고 명하였습니다. 섬라국 사신들도 반열에 참여했는데, 잔치를 베풀자 잡희(雜戱)를 구경하였습니다.
30일에는 보화전(保和殿)에서 연종연(年終宴)을 베풀었는데, 신들은 예부의 통지를 인하여 당일 이른 새벽에 보화전으로 들어가 동쪽 섬돌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날이 밝아 황제가 전내(殿內)로 나오자, 풍악을 울리고 잡희를 베풀고 음식을 올리고 축수를 드렸는데, 신들에게도 음식을 내려주어 두 사람이 한 식탁을 사용했습니다. 예부 상서 덕명(德明)이 신들을 인도하여 어탑(御榻) 앞에 나아가 꿇어앉으니, 황제가 손수 어탁(御卓) 위에 있는 술을 내려주므로 신들이 받아 마셨습니다. 조금 뒤에 황제는 내전으로 들어갔습니다.
본년(本年) 1월 1일 5경에는 신들이 건청문(乾淸門) 밖에 나아가 등대하고 있었는데, 날이 밝자 황제가 3품 이상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태상 황제께 하례를 행하였는바, 전정(殿庭)이 협착한 관계로 제왕(諸王)과 패륵(貝勒)들은 문안에서 예를 행하고, 3품 관원 및 외국 사신들은 문밖에서 예를 행하였습니다. 예가 끝난 뒤에 신들은 오른쪽 상문(上門)을 경유하여 태화전(太和殿) 마당에 이르렀습니다. 조금 뒤에 황제가 태화전으로 나와 하례를 받았는데, 3품 이상의 관원으로부터 외국 사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삼배 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되, 일체 앞서 태상 황제께 하례하던 의식과 같이 하였습니다.
대체로 태상 황제는 지난 겨울부터 수시로 현기증이 나서 전과 같이 임조(臨朝)하지 못한다고 했었는데, 마침내 3일 묘시에 태상 황제가 건청궁에서 붕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일 술시에 의주(儀注)가 내도하였는데, 주객사(主客司)에서 이부(移付)하여 이르기를 ‘조선과 섬라국 사신들에게 각각 대포(大布) 1필씩을 반사하여 때에 맞춰 성복(成服)을 하게 하노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4일 저녁에는 예부에서 조선과 섬라국 사신들에게 매일 진·오·신시에는 각각 시간 전에 경운각(景運閣)으로 나가 반열을 따라서 거애(擧哀)하라고 통지해 왔습니다. 그래서 5일 새벽에는 신들이 경운문(景運門) 밖에 나아가서 진시의 곡반(哭班)에 참여하고 오시까지 거기에 머물러 기다렸습니다. 이때 예부에서 황제의 분부에 따라 신들 및 정관(正官) 1인을 인도하여 건청궁 혼전(魂殿) 문밖까지 들어갔는데, 섬라국 사신도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오시에는 내곡반(內哭班)에 참여하고 인하여 경운문 밖으로 물러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신시에 또 내곡반에 참여하고 물러나왔습니다. 6일 새벽에도 신들이 또 건청궁에 들어가 세 차례 곡반에 참여하였는데, 진시가 되기 전에 황제의 분부에 따라 신들에게 녹육(鹿肉) 3근을 반사하였으니, 이는 아마 소식(素食)을 중지하는 뜻인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세폐와 방물은 산해관 안팎이 눈으로 길이 막힌 때문에 4일에야 비로소 내도하였는데, 예부 및 각 고관(庫官)들이 한창 비통하고 황급한 터라 미처 정납(呈納)하지 못했습니다. 신들은 이 변례(變禮)를 만나서 바로 급속히 장문(狀聞)하고자 하였으나, 예부의 당상과 낭관이 모두 자리에 없어 서로 접할 길이 없었으므로, 임역배(任譯輩)들을 시켜 여러 가지로 주선하여 예부에 정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7일 이른 아침에야 겨우 공문을 얻어보고는 장계를 작성하여 성화같이 발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부 칙사(傳訃勅使)는 당일에야 비로소 차출하였는데, 상칙사(上勅使)는 산질 대신(散秩大臣) 후한군(候漢軍) 장승훈(張承勳)이고, 부칙사는 내각 학사(內閣學士) 만인(滿人) 항걸(恒傑)이며, 통관(通官)은 일대(一大) 왜극정액(倭克精額), 이대(二大) 태평보(太平保), 별대(別大) 왜승액(倭昇額)과 일차(一次) 계문(繼文), 이차(二次) 보덕(保德)입니다. 이들을 예부에서 가려 정하였는데, 출발할 날짜는 아직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주 1통을 동봉하여 치계합니다."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예조 판서로, 서춘군(西春君) 이엽(李燁)을 진위 정사(陳慰正使)로, 임시철(林蓍喆)을 부사로, 신현(申絢)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대신 및 예조 당상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병조 판서 이시수(李時秀)를 원접사로 삼고서 본직을 체직하고, 정민시(鄭民始)를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좌승지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예조의 등록(謄錄)을 보니, 옹정(雍正)을묘년006) 에는, 생포 단령(生布團領)은 가선을 깁지 않고, 생마대(生麻帶)는 흰 헝겊으로 쌌으며, 사모(紗帽)는 각(角)은 없고 끈만 있게 하는 등의 제도로 복제(服制)를 마련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렇던가? 우리 나라의 예제(禮制)는 선조(先朝) 때 《상례보편(喪禮補編)》을 간행한 뒤에야 비로소 바로잡혔는데, 을묘년의 전례는 이 책이 간행되기 전에 있었기 때문에 이 포모(布帽)와 포포(布袍)의 제도가 있었던 것이니, 이 또한 하나의 의리인 것이다. 기왕 의리라고 한다면 어찌 두 가지 뜻이 있겠는가. 그 호칭은 대단히 크니, 지금 만일 《상례보편》에서 바로잡은 뒤의 의절(儀節)에 일체 의거해서 제복(祭服)을 사용한다면 어떻겠는가?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소견이 대부분 고루하니, 혹 도리어 이 제복을 중하게 여기는 혐의가 없을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러자 관반(館伴)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복제(服制) 한 조항에 대해서는 저쪽에도 기왕의 등록(謄錄)이 있을 것이므로 우리 나라에서 갑자기 고치기를 의논하기가 어려운데, 지금 만일 제복을 쓴다면 이를 도리어 중하게 여기는 혐의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비국에 모여 자세히 상고하고 잘 의논해서 다시 품정(稟定)하라."
하였다.
이희갑(李羲甲)을 문례관(問禮官)으로, 구익(具㢞)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1월 23일 임오
승지 이서구가 아뢰기를,
"평상시에 칙사(勅使)가 왔을 때는 어첩(御帖)을 붉은 보자기로 싸는데, 또 이번 같은 칙사의 행차 때는 전례에 혹 남색 보자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칙(宣勅)하기 이전 및 회환(回還)할 때는 또 붉은 보자기를 쓸 것이고 보면 남색 보자기를 쓰는 것은 한갓 번거로운 형식에 관계될 듯하니, 일체 평상시의 예에 의거해서 아울러 붉은 보자기만을 쓰는 것이 편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접사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종전에는 칙사를 지대(支待)할 때에 폐단의 유무가 오로지 역관(譯官) 및 소통사(小通事) 무리들에게 있었으니, 사소한 불근죄(不謹罪)에 대해서는 신이 의당 드러나는 대로 엄히 다스리겠습니다마는, 가장 완악하고 교활하여 명령을 듣지 않고 죄과를 범한 자에 대해서는 바로 경상(境上)에서 중률(重律)을 써서 후인을 징계하는 방도로 삼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찰방 이하는 스스로 단죄해서 처치하고 수령 이하는 스스로 단죄해서 곤형(棍刑)을 집행한다는 내용이 재거 사목(賚去事目)에 실려 있는데, 더구나 역관(譯官) 및 통사배(通事輩)들이겠는가. 아뢴 말에 따라 편의할 대로 처리해서 칙사의 일행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기강이 있음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송전(宋銓)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매수(徐邁修)를 형조 판서로, 권유(權𥙿)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좌의정 이병모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를 이제 겨우 차출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만 정사(正使)의 이름 글자가 저쪽의 기휘(忌諱)에 저촉이 되는데, 이미 이름이 둘이 아닌 이상 임시로 편의하게 조처할 방도가 없고, 또 부사(副使) 임시철(林蓍喆)은 지금 영변(寧邊) 임소에 있는데, 이때에 관서 지방의 수령을 교체하는 것은 또한 민망하기도 하니, 아울러 우선 체차하고 무고(無故)한 다른 사람으로 차견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차자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라. 부사는 이미 체임되었으니, 전임(前任)을 그대로 유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승지 이서구에게 이르기를,
"복제에 관한 일은 어제 이미 발단이 되었는데, 여러 의논이 어떠하던가? 대체로 《보편》을 간행한 이후로 천고의 고루함을 씻고 일왕(一王)의 제도를 정립하였으니, 지금 꼭 잘못된 규례를 그대로 따를 것이 아니라, 의당 《보편》에서 바로잡은 제도를 준행해야 한다. 그 제도를 보면 모(帽)는 굴관(屈冠)으로 변했고, 모영(帽纓)은 수질(首絰)로 변했으며, 단령(團領)은 제복(祭服)으로 변했고, 마대(麻帶)는 요질(腰絰)로 변했으며, 원래는 장(杖)이 없었다가 장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고루한 소견으로 갑자기 그 외면(外面)을 보면 반드시 도리어 더 중해지는 혐의가 있다 하여 단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의리는 이와 같으니, 기왕 의리라고 한다면 그 의리에 어찌 두 가지 뜻이 있겠는가."
하니, 이서구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은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아서 흠송(欽誦)됨을 이루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또 제신(諸臣)들의 복제를 모두 가를 꿰매지 않은 것[不緝邊]과 생마대(生麻帶)로 마련한 것은 실례 중에 또 실례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참최(斬衰)를 두 번 입지 않는 의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는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데, 예경(禮經)에 실려 있는 ‘제후와 대부는 천자를 위해 세최(繐衰)007) 를 입는다.’는 글에서 분명하게 근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저쪽에서는 비록 관(冠)·구(屨)·질(絰)·대(帶)는 하지 않으나 참최라는 호칭이 있고, 이쪽에서는 비록 관·구·질·대는 하더라도 세최의 복제로 한다면 경중이 판이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만난 시기와 쓰는 장소에 대해서는 참으로 매우 가슴아픈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중한 쪽을 버리고 경한 쪽을 취하여 당연히 만들 복을 만들어 조금이나마 그 바름을 얻어야지, 어찌 세속의 견해에 얽매여 잘못된 규례를 그대로 답습해서 이 참최를 두 번 입는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상 수준이 이미 강등됨에 따라 인심은 거기에 익숙해서,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대의를 강명할 곳이 없고, 비분 강개하는 공언(空言)마저도 적막하여 들을 수가 없다. 그리고 심지어는 청나라 칙사가 서울에 들어올 때면 사대부 집 자제들 또한 모두 달려나와 구경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리가 날로 어두워져서 세속의 숭상하는 것이 옛스럽지 못하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이때에 비록 갑자기 옛 제도를 고쳐서 시끄러운 사설들을 불러일으키기는 어려우나, 의리만큼은 이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어제 연석에서 발언을 했던 것인데, 그때 한 제학(提學)의 말은 또한 생각 없는 말이라고 이를 수 없었다. 나는 여러 의견을 모아서 쓰려고 한다. 그래서 옛 제도를 그대로 써도 의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대로 따를 것이고, 강구해서 특별한 좋은 방도가 나오면 또 그대로 따를 것이니, 경들은 물러가서 널리 의논하도록 하라."
하니, 이서구가 아뢰기를,
"가선을 꿰매지 않으면 그 복제가 지극히 중하고 마대(麻帶)는 더욱 고례(古禮)가 아니니, 이는 결코 옛것을 그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는 복색(服色)이 어떻든 간에 가죽신[靴]은 의당 흑색을 쓸 것이니 이 뜻을 다 알도록 하라."
하였다. 이서구가 아뢰기를,
"칙사를 맞이하는 데에 관한 등록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패문(牌文)이 들어오는 날 및 조칙을 선포하는 날에 모두 거애(擧哀)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칙사가 서울에 당도하면 이때가 곧 부음을 처음 듣는 날이므로, 이때부터 제4일에 이르러서 성복(成服)을 해야 할 것이나, 패문의 경우는 이것이 칙사가 출발할 때의 노인(路引)에 불과한 것인데, 이것을 보고 문득 거애를 하는 것은 매우 의의가 없는 일입니다. 선조(先朝) 때에도 반상 낙하(半上落下)로 하교하였으니, 이번에는 조칙을 선포한 뒤에 비로소 거애를 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일이 구례(舊例)와 다르니, 대신과 예조 당상에게 하문하셔서 처리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서구가 아뢰기를,
"을묘년에는 전부(傳訃)의 칙사가 당년 10월 1일에 입경(入京)하였는데, 종묘의 동향 대제(冬享大祭)의 택일(擇日) 전에 있었기 때문에, 임인년에 대신에게 의논해서 거행했던 예에 의거하여, 다만 음악을 정지하고 예를 행할[停樂行禮] 일로 본조에서 계품하여 윤허를 받고, 판당(判堂)이 입시했을 때 음악을 정지하고 예를 행할 일로 전교를 받들어 거행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칙사 행차는 아마 2월 중에 서울로 들어올 듯한데, 만일 그때에 음악을 써야 하는 제향을 만난다면 구례대로 음악을 써서 예를 행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을묘년의 전례가 있으니, 의당 여기에 의거해서 거행해야 할 것이다. 이 뜻을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1월 24일 계미
예조 판서 황승원(黃昇源)이 아뢰기를,
"낭청을 보내어 대신에게 문의한 결과,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승지가 아뢴 말이 실로 예의(禮意)에 합당합니다. 더구나 선조 때의 성교까지 일기에 분명하게 실려 있고 보면, 구례에 속한 일이라 하여 고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고, 우의정 심환지(沈煥之)는 아뢰기를 ‘선조 때의 성교가 이렇게 불변의 법칙으로 남아 있으니, 승지가 아뢴 말이 옳습니다.’ 하였고, 참판 김이익(金履翼)과 참의 이익모(李翊模)도 모두 지금에 바로잡는 것이 진실로 사의에 합당하겠다고 칭하였습니다. 그리고 신 승원의 생각에도 패문이 들어오는 날에 거애하는 것은 불필요한 절차에 관계될 듯합니다. 선조 때의 성교가 일성(日星)처럼 밝게 실려 있고, 대신들의 수의(收議)도 서로 꼭 맞게 귀일되었으니, 지금에 바로잡는 것이 진실로 사의에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의논에 의거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칙사가 서울에 들어와 조칙을 선포한 후 제4일에 성복을 하고, 그후 3일 만에는 제복을 하되, 상께서는 내전에서 예를 거행하시고 백관은 전정(殿庭)에서 예를 거행할 것을 전례에 의거해서 마련하였습니다."
하고, 영접 도감(迎接都監)이 아뢰기를,
"전부(傳訃)의 칙사 행차가 와 있을 때에는 전례에 의거해서 나례(儺禮)를 설행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구민화(具敏和)를 진위 겸 진향 정사(陳慰兼進香正使)로, 김이익(金履翼)을 부사로 삼았다.
1월 25일 갑신
좌의정 이병모 및 품사 비당(稟事備堂)을 소견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고 관찰사 이의준(李義駿)의 처(妻) 정경 부인(貞敬夫人) 조씨(趙氏)는 자기 남편의 상(喪)을 당한 날에 자기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나이 60을 넘었고 자녀들도 성취하였으니, 지금 만일 죽어서 한 구덩이로 들어간다면 곧 웃음을 머금고 편안히 죽을 것이다. 내가 의리에 대처하는 것은 지조나 고집스레 지키는 부녀자와는 크게 다르다.’ 하고는, 마침내 손수 자[尺]를 가지고 상복을 재단하고 가선을 두르며, 장례 도구 일체를 모두 실정에 맞게 하였고, 성복(成服)하던 날에는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으며, 죽기 하루 전까지 모든 일을 다 친히 지휘하고 몸과 수족을 깨끗이 씻은 다음, 전후 7일 만에 아무 병 없이 죽었는데, 그 방에는 맑은 향기가 가득하여 늦은 밤까지 가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리에 처하는 그 안온한 태도가 사람을 감탄케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렇게 우뚝한 정절(貞節)은 옛 역사에 있다고 하여도 오히려 슬퍼하고 공경하여 감탄할 만한데, 더구나 재신(宰臣)의 처인 정 부인이겠는가. 참으로 열(烈)하도다. 정려(旌閭)의 특전을 그런 집에 시행하지 않고 어디에 하겠는가. 즉시 해사(該司)로 하여금 그 고을에 정표(旌表)하게 하고, 고 황해도 관찰사 이의준의 제문(祭文)에는 ‘정렬(旌烈)’이라는 한 조항을 넣어서 말을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
"연경의 물품 가운데 광직(廣織)과 노주(潞紬) 두 가지는 혹은 품질이 좋지 않고 혹은 무늬가 있고 해서 선조 때에 하교하여 대단히 엄하게 금방(禁防)한 것인데, 근년 이래로 그 금방이 해이하기가 막심하니, 참으로 극히 해괴합니다. 청컨대 다시 더 엄히 신칙하시어 어상건(御床巾)까지도 노주를 쓰지 말고 화주(禾紬)로 대신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칙사의 일행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그들에게 지공하는 요(褥)·금(衾) 등속이 전에 배포했던 것은 모두 광직이었으나, 지금은 사체가 이미 달라졌으니, 상칙사·부칙사·통역관에게는 백주(白紬)로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백세 목면(白細木綿)으로 써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뒤의 칙사 행차 때에도 전에 배포한 것의 잘못된 폐단을 고쳐서 광직을 쓰지 말고 화주와 면주(綿紬)를 분등하여 쓸 일로 법식을 정해서 시행해야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명하여 칙사를 영접할 때의 시위 장사(侍衛將士) 및 수가 대장(隨駕大將)의 복색(服色)은 청천익(靑天翼)과 흑립(黑笠)을 착용하도록 하고, 백관은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오각대(烏角帶)를 착용하되, 백의는 전례대로 천담복(淺淡服)을 쓰도록 하였다.
양서(兩西) 지방에 관문(官門)과 진문(鎭門)의 취점(聚點)을 정지하도록 했는데, 이는 전염병이 수그러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1월 26일 을유
호조가 아뢰기를,
"죽은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의 집에서는 유언(遺言)에 따라 예장(禮葬)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전에도 대신 집에서 받지 않는 경우에는 혹 베풀도록 윤허하기도 하고 혹은 별례(別例)로 특별히 지급하기도 했었다. 봉조하가 생전에 한 말이 비록 이러하더라도 어찌 전례대로 그의 뜻에 따라 그만둘 수 있겠는가. 돈 5백 냥과 목면 5동(同)을 실어 보내라."
하였다.
1월 29일 무자
전교하였다.
"각부(各部)에서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서 병든 백성을 찾아내는 일 및 진청(賑廳)에서 막(幕)을 짓고 병든 백성을 접제(接濟)하는 일들을 이미 이달까지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명일 이후로는 의당 철거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백성들이 굶주리는 데다가 질병까지 번져 있어서, 가장 곤궁한 집과 의뢰할 곳 없는 무리들은 그 생활의 어려움이 반드시 평년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이다. 그러니 경조(京兆)로 하여금 각부의 관원들에게 엄히 계칙하여, 굶주리거나 병이 들어 구제가 아니면 자력으로 살아날 수 없는 자들에 대해서는 우선 다음달까지로 기한을 늘려주고, 매 5일마다 한 번씩 경조에 보고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경조에서는, 한편으로는 진청에 공문을 내서 백성을 제활(濟活)할 물자를 양급하고, 한편으로는 별단(別單)으로 계문하도록 하라. 다음달 이후에는 다시 하교를 기다려서 거행하되, 각부 관원들의 근만(勤慢)에 대해서는 수시로 사람을 보내서 적간하도록 하라.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혹은 비변사의 문무 낭관들을 시켜 민간의 질고를 탐지하고 정부와 각부가 잘하고 있는지를 겸해서 살피도록 하라.
그리고 양서 지방에 대한 장문(狀聞)을 보니, 그 사상자의 숫자가 참으로 놀랍고 참담했다. 저 외로이 떠돌다가 굶주리고 병들어 죽었는데도 신역(身役)이 있는 자에 대해서, 만일 즉시 대신 충당하지 않았거나 또는 충당하는 즈음에 혹 간위(奸僞)를 부린 것이 이 다음 암행 어사에게 현발(現發)된 것이 있을 경우에는, 수령 이외에 도백까지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요, 결코 자주 체직하는 것으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 이 밖의 여러 가지 조항은 비록 천심과 긴박하고 수월함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나의 두려워하는 마음은 실로 피차가 없으니, 일체 하나하나 들어 엄히 계칙하라.
그리고 이토록 질고를 입은 나머지에 이 농사철을 만났으니, 어떻게 농삿일에 힘을 다할 수가 있겠는가. 이 한 조항이 더욱더 잊혀지지 않고 항상 염려가 되어, 잠자리에 들면 등에 열이 나고 밥을 대하면 입맛이 쓰기만 하다. 오늘날 나의 걱정을 나누어 줄 지방관들이 진실로 내 마음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삼는다면 전야(田野)가 어찌 묵는 데에야 이르겠는가. 하등(夏等)의 고적(考績)은 먼저 농정(農政)으로 과(課)를 삼아 전최(殿最)의 등제를 매길 일로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엄히 신칙하라."
예조가 아뢰었다.
"칙사를 맞이한 뒤로부터 성복(成服) 때까지의 절목을 강희(康熙) 임인년과 옹정(雍正) 을묘년의 전례에 의거해서 마련하였습니다."
절목은 아래와 같다.
【"1. 성복일에 전하의 최복(衰服)은 생포(生布)로 싼 익선관(翼善冠), 가선을 깁지 않은 생포 원령포(生布圓領袍), 생마대(生麻帶), 화(靴)를 착용하셨다가 3일 만에 벗어야 합니다. 성복 후 제복(除服) 전까지의 기간 동안 시사(視事)하실 때의 옷은 백포(白袍)·익선관·오서대(烏犀帶)·화를 착용해야 하며, 예는 내전에서 거행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으로 4품 이상의 최복은 생포로 싼 사모(紗帽), 가선을 깁지 않은 생포 단령, 생마대, 화를 착용했다가 3일 만에 벗되, 성복을 벗기 전의 공복(公服)은 그대로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화를 착용하고, 5품 이하는 그대로 백의·오사모·흑각대·화를 착용하되, 예는 숭정전(崇政殿)에서 의식대로 거행해야 합니다1. 성복시(成服時)에는 전하의 최복을 집사(執事)가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진배(進排)하도록 할 것입니다. 성복시에 궐정(闕庭)의 황의장(黃儀仗) 등의 일에 관해서는 액정서(掖庭署) 및 각 해사(該司)에서 전례에 비춰 거행해야 합니다. 거애의(擧哀儀)에 있어서는, 각도의 대소 사신(使臣) 및 외관(外官)들은 문서가 도착하는 날, 정청(正廳)에 향안(香案)을 설치하고, 천담복·오사모·흑각대 차림으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15번 곡성(哭聲)을 낸 다음 또 사배례를 행하며, 부음을 들은 지 제4일 성복 때의 최복은 생포로 싼 사모, 가선을 깁지 않은 생포 단령, 생마대, 화를 착용하고, 3일 만에 벗을 것이며, 성복 후 제복 전까지의 공복은 그대로 천담복·오사모·흑각대·화를 착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5품 이하의 관원들은 그대로 천담복·오사모·흑각대를 착용하고, 연변(沿邊)의 장수 및 군관들에게는 이 예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158면
【분류】외교(外交) / 의생활(衣生活)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두 영에서 성(城) 밖의 민전(民田)을 매입하여 곤궁한 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에 장사지내게 허락하도록 명하였다.
진휼청이, 굶주리고 병들어 자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 및 가난하여 장사를 치르지 못하는 자들에게 휼전(恤典)을 제급(題給)할 일로 아뢰었다. 【굶주리고 병들어 자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무리 4백 83인에 대한 휼전으로는 쌀 66석이었고, 가난하고 의탁할 곳 없어 장사를 치르지 못한 무리 1백 49명에 대한 휼전으로는 돈 7백 28냥과 포(布) 7동(同) 38필이었다.】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158면
【분류】구휼(救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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