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51권, 정조 23년 1799년 2월

싸라리리 2025. 8. 1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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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기축

능(陵)에 배알하는 일을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다시 품(稟)하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구익의 품계를 숭정(崇政)으로 발탁하고, 조석중(曺錫中)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예조 참의 이익모(李翊模)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북사(北使)의 전부(傳訃)가 곧 당도할 것이므로 본조의 절목을 어제 이미 계하하였습니다. 조칙을 선포한 후 제4일에는 상하(上下)가 모두 옷을 갈아입는 절차가 있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의 4품 이상은 끈[纓]만 있고 각(角)이 없는 포과모(布裹帽)와 가선을 깁지 않은 포단령(布團領)과 생마대(生麻帶)를 착용하도록 하고 이를 참최(斬衰)라 이름하게 되었으니, 이는 대체로 옛 제도입니다. 아, 백여 년 동안 관구(冠屨)가 도치되어 천하의 변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비록 우리 조정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슬기로써 피폐(皮幣)와 주옥(珠玉)을 싸들고 연경(燕京)으로 치닫곤 하면서도, 원통함을 참고 어쩔 수 없이 억압당하는 그 심정은 일찍이 가슴속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형편상 면할 수 없는 일은 우선 꾹 참고 행할지라도, 시행하지 않아야 할 예를 무엇 때문에 시행한단 말입니까.
대저 참최라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위해서 입는 복(服)입니다. 그러므로 ‘대부(大夫)는 제후(諸侯)를 임금으로 삼고 제후는 천자(天子)를 임금으로 삼아, 각각 자기 임금을 위해서만 참최를 입는 것이요, 제후의 대부로서는 천자를 위해 참최를 입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곧 예에 두 참최가 없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걸핏하면 임인년·을묘년의 일을 끌어대고 있으나, 그 당시의 사세는 시대가 예[古]와 멀지 않은 데다 그들의 위광(威光)에 의한 제약(制約)이 극도로 쌓여 이런 예 아닌 복을 마련했었으므로, 식견 있는 이들의 논의가 지금까지 몹시 한탄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주부자(朱夫子)가 말한 ‘인통함원 박부득이(忍痛含怨迫不得已)’ 여덟 글자의 아픔을 참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대단히 해괴한 일이 있으니, 그것은 성복 절목(成服節目)을 으레 등사해서 저들에게 보여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무슨 예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 특별히 참최를 두 번 입지 않는 의리를 밝히시어 크게 잘못된 예를 혁파하시고, 신의 말에 따라 복을 없애는 것으로 결단하시어 《춘추(春秋)》의 변론을 더욱 엄히 준수하고 존왕 양이(尊王攘夷)의 실상을 능히 닦으신다면 장차 영원히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만일 복을 없앤 까닭을 가지고 시끄러이 여러 말을 할 경우에는 신에게 세 치의 혀가 있으니 통렬히 그들과 밝게 변론을 할 것이요, 그래도 되지 않을 경우에는 신이 한번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만만번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너희들이 연중(筵中)에 입시했던 22일에 먼저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형세에 얽매인 나머지, 의절(儀節)을 등사해서 저들에게 준다는 것이 도감(都監)의 등록에 실려 있는 것은 과연 너의 상소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것이 바로 옛날의 명인 석사(名人碩士)들이 뜻을 두고도 논의를 하지 못했던 까닭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의주 부윤 이기양(李基讓)이 치계하기를,
"청나라 건륭 황제(乾隆皇帝)의 전부 칙사(傳訃勅使)가 나오는데, 정사는 산질 대신(散秩大臣)인 후(侯) 장승훈(張承勳)이고 부사는 내각 학사(內閣學士) 항걸(恒傑)이며, 6품 통관(通官)은 왜극정액(倭克精額)·태평보(太平保)이고, 7품 통관은 왜승액(倭昇額)이며, 8품 통관은 계문(繼文)·보덕(保德)으로서 함께 금년 1월 13일에 출발했다고 합니다. 또 조패록문(照牌錄文)이라고 칭하였으니 이는 아마 등송(謄送)한 패문(牌文)인 듯한데, 예부에서 종이에 기록하여 부착(附着)한 목록과 원패문(原牌文)은 애당초 부쳐오지 않았으니, 전에 없는 일에 관계됩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변방의 정세는 예법을 준수하는 데에 더욱 엄격해야 한다. 그런데 이른바 봉성(鳳城)에서 등송한 패문이란 곧 사적으로 의주 부윤에게 알리는 치통(馳通)에 불과한 것이고 보면, 우리 나라가 어찌 봉성장(鳳城將)과 의주 부윤 사이에 사적으로 왕복한 문적(文蹟)을 믿고서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빈사(儐使)를 보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번신(藩臣)이나 변신(邊臣)의 도리에 있어서는 의당 사리에 의거해서 저쪽을 책망하고 타일러서 그 사통문(私通文)을 되돌려 보낸 다음 그 사실의 전말에 대해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면 될 뿐이다. 그런데 어찌 감히 그 사통문 한 장을 가지고 비변사로 상송(上送)한다는 등의 말로 관례에 따라 말을 만들어서 마치 순검직(巡檢職)에 있는 피인(彼人)을 매월 접대하는 것처럼 한단 말인가. 나라의 기강이 있는 곳에 해괴하기가 막심하다. 이미 어제의 장계(狀啓)부터 극히 방만(放慢)했는데, 묘당에서는 오히려 한마디 말도 없으니 그래서 되겠는가. 평안 감사 한용귀(韓用龜)와 의주 부윤 이기양 등은 의당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여 엄히 처벌하도록 할 일이나, 칙사가 곧 나올 것이므로 민읍(民邑)의 폐단을 생각하여 우선 먼저 봉급 10등을 감하는 법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비록 빈신(儐臣)으로 말하더라도 관찰사 이하의 관원들로 직무에 성실치 못한 자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단하여 논감(論勘)하도록 했었는데, 그들을 예사로 보아 넘기고서 파직하기를 청하지 않고 있다. 차후로는 잘 닦아 거행할 뜻을 거듭 밝혀서 영접 도감(迎接都監)에 회유(回諭)하여 오늘밤부터 임시 파하도록 하고, 인하여 또 의주 부윤에게 엄히 신칙하여 진짜 목패문(木牌文)을 찾아내서 올려보낸 다음에 다시 회동하여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일 경인

대신과 제신들을 소견하였다. 상이 좌의정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지금은 조정이 거의 텅 비어서 정주(政注)가 구차하고 간략하니, 잘 상량해서 승탁(陞擢)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선조(先朝) 기미년의 정망(政望)을 보면 육조의 판서가 정원에도 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 당상(堂上) 중에서는 조현명(趙顯命)·신사철(申思喆)·윤양래(尹陽來)·조상경(趙尙絅) 이 4, 5인에 불과했었다. 그리고 기미년에 선조의 수선(受禪)의 하교가 있었을 때는 온 조정 신하가 앞을 다투어 들어왔는데도 결국 정청(庭請)에 들어온 신하가 지금에 비하면 또한 반을 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조 판서의 망(望)이 13인이고, 병조 판서의 망이 16인이고 대사성의 망이 8인이고, 승지의 망이 백여 인이고, 장령의 망이 80인이고, 지평·정언의 망은 수백 인이나 되어서, 선조 때의 경재(卿宰)와 시종(侍從)에 비하면 그 수가 몇 갑절이나 된다. 그렇다면 수가 적은 것은 아닌데도 정주가 이와 같이 구차하고 간략한 것은 다만 타당한 도리로 쓰지 못함으로 인해서 그런 것인가, 정력(精力)이 옛날보다 너무 모자라서 그런 것인가? 앞으로는 의당 하나하나 엄선을 해야 할 것인데, 대체로 대신은 인재 천거하는 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니, 경은 곳에 따라 두루 잘 다스려서 인재를 가리는 방도로 삼으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내국(內局)의 소중한 물품에 대해서도 연전에 시전(市廛)에서 무역하는 것을 제급(除給)하고 호조에서 무역하여 납부했었는데, 칙사에게 쓰여질 물품들을 여전히 시전에서 무역한다는 것이 어찌 말이나 되는가. 도감에 엄히 신칙하여 절대로 잘못된 관례를 인습하지 말도록 하고, 만일 침탈하는 단서가 있으면 묘당에서 각별히 살펴 신칙하도록 하라. 이를 인하여 생각해 보면 공인(貢人)과 시인(市人)은 한가지이다. 이번 침탈의 폐단도 금단해야 하거니와, 각항의 물건 및 음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비록 등록에 있는 것일지라도 만일 값이 뛰어오르는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폐단이 없는 것으로 바꾸어 쓰도록 하라."

 

승지 이서구가 아뢰기를,
"조칙을 선포할 때에는 으레 황제의 안부를 묻는 절차가 있으나, 이번의 칙사 행차는 평상시와 다르니 신 황제(新皇帝)의 안부를 먼저 물을 수가 없습니다. 두 번 지나간 을묘년의 의주(儀註) 가운데도 이 한 절차는 제했었으니, 이번에도 여기에 의거해서 마련해야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번 칙사를 맞이할 적에 상께서 출궁(出宮)하실 때의 복색(服色)을 해조의 절목(節目)에서 백포(白袍)로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세 번 지나간 신축년 정월의 등록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출궁의 복색을 흑원령(黑圓領)으로 입으셨는데, 이는 곧 기해년 대상(大喪)의 3년 이내였으므로 흉례(凶禮)의 흑원령포는 바로 길례(吉禮)의 곤룡포(袞龍袍)인 것입니다. 그후 임인·을묘년에 백포로 바꿔 쓴 사실에 대해서는 비록 그 까닭을 모르겠으나, 이미 근거할 만한 신축년의 예가 있으니, 이 절목 중에서 출궁할 때에는 의당 곤룡포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의 예만을 끌어대서 백포를 쓰는 것은 일이 자세히 살피지 않은 데에 관계되니, 청컨대 해당 예조 당상을 추고하시고 복색은 곤룡포로 바꾸어 마련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2월 3일 신묘

예조 참판 김이익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이번 칙사가 이른 뒤의 복제에 대해서 감히 대폭 경장(更張)할 것을 우러러 청할 수는 없으나, 신의 구구한 소원은 오직 신료들의 복제만이라도 포(袍)의 가선을 깁도록 허락하고 마대(麻帶)를 포(布)로 바꾸어서 대략 배신(陪臣)이 세최(繐縗)를 입는 유제(遺制)를 따르게 한다면 오히려 참최를 두 번 입는 실책을 면할 수 있고, 또 일변(一變)의 기회가 되기에 해롭지 않겠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호칭은 매우 크니, 가선을 깁거나 깁지 않은 데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담색복(淡色服)이라도 호칭은 참최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 그렇게 말하는 제도일 뿐이다."
하였다.

 

응교 박길원(朴吉源)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어제 삼가 반하(頒下)된 예조의 초기(草記)를 보니, 임인·을묘년의 예만을 일체 따라서, 4품 이상의 백관들에게 가선을 깁지 않은 생포 단령을 입으라는 글이 있었으니, 이는 곧 참최입니다. 신은 비록 예를 모르나, 삼가 이는 주부자(朱夫子)의 참최를 두 번 입지 않는다는 정론(定論)에 위배됨이 있는 듯합니다. 이어서 삼가 예조 참의 이익모(李翊模)의 소본(疏本)을 보니, 그가 경의(經義)를 인거한 것이 대단히 예를 의논하는 체모를 얻었고, 실로 잘못된 관례를 고치는 의리에 꼭 맞았습니다. 그러니 신이 지금 꼭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저들에게 중히 여겨지는 까닭은 곧 예의가 있다는 것 때문인데, 우리가 도리어 그른 줄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다면 장차 저들에게 경시를 당하고 후세에도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니, 신이 여기에 대해서 삼가 걱정되고 개탄스러움을 감당치 못하여 눈물까지 흘리는 바입니다. 아, 관구(冠屨)가 도치되어 금과 비단을 해마다 공물로 바쳐온 것은 진실로 백 년 동안의 깊은 수치이거니와, 이 예(禮)에 이르러서는 우리에게 정당한 격언(格言)이 있는데, 무엇을 꺼려서 고치지 않는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예조 당상의 말을 받아들이시어, 참최를 두 번 입지 않는 고례(古禮)가 다시 지금 세상에 행해지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상소 내용은 예조 참의의 말과 같다. 그 말을 어찌 그르다고 하리오마는, 고쳐서 두찬(杜撰)에 가깝게 되기보다는 어찌 다시 예를 잘 알고 식견이 많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전교하였다.
"고 영부사 홍낙성(洪樂性) 집에서 그의 유언에 따라 시장(諡狀)을 청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바로 의시(議諡)하도록 하라. 김 봉조하(金奉朝賀)와 채 판부사(蔡判府事)의 집에서도 시호를 청하지 않으니, 함께 다 의시하도록 하라."

 

2월 4일 임진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이 칙사는 전부(傳訃)의 일로 나온 것이니, 입경(入京) 후의 각 잔치를 꼭 받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저쪽에서 혹 제기하는 일이 있으면 몹시 군색해질 걱정이 없지 않을 것이니, 도감으로 하여금 때에 임해서 사세를 봐가며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빈사로 하여금 함께 차를 마시면서 사리에 의거하여 효유하도록 하였으니, 꼭 등대(等待)할 것이 없다. 그리고 저들이 비록 청한다 할지라도 어찌 그 일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2월 5일 계사

심녕(沈鑏)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영중추부사 홍낙성에게는 효안(孝安)으로, 봉조하 김종수(金鍾秀)에게는 문충(文忠)으로, 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에게는 문숙(文肅)으로, 증 영의정 민진주(閔鎭周)에게는 정간(貞簡)으로, 좌참찬 윤봉오(尹鳳五)에게는 숙간(肅簡)으로, 공조 판서 유신동(柳辰仝)에게는 정민(貞敏)으로, 공조 판서 신응현(申應顯)에게는 충헌(忠憲)으로 각각 증시(贈諡)하였다.

 

교리 심규로(沈奎魯)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더없이 엄한 것은 시법(諡法)이요 더없이 중한 것은 공론(公論)입니다. 그런데 고 판부사 채제공은 평생 동안 간직한 것이 하나의 의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징토(懲討)를 엄히 할 적에는 맹렬하기가 상설(霜雪)같았고, 신하의 도리를 다한 것은 빛나기가 일성(日星)과 같았으며, 온갖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한결같이 이 의리만을 따랐으니, 그의 단성(丹誠)과 혈충(血忠)은 진정 신명께 질정할 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전하께서는 이미 그를 충간 의담(忠肝義膽)으로 허여하셨고, 여론도 모두 그를 일러 임금을 섬기는 데에 예절을 다했다고 하여, 국사(國史)에 이를 기록하였고 야사(野史)에도 이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첫째도 충(忠)이요 둘째도 충이었으니, 백세 천세가 앞뒤에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그런데 시호를 주관한 사람이 시법을 돌아보지 않고 공론도 따르지 않고서, 하나의 충(忠)자를 자기의 사물(私物)로 간주하여 권세가 있고 없는 사이에 오르내리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이에 주고 뺏고 하였으니, 의시의 공정치 못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이미 그 상황을 목격하고 처음에는 다투어 고집하다가 끝내 개좌(開坐)하기에 이르렀으나 신의 의견은 전혀 무시하고 강제로 입계(入啓)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남에게 경시를 당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논사(論思)의 반열에 낄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을 체직하시고, 고 재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도록 특별히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시호를 의정하는 것이 고의(古意)를 잃은 지는 비록 오래되었으나, 동료 관원이 다투어 고집하는 것을 무시하고 지레 먼저 입계한 것 또한 잘못되었다. 그러나 이미 시호를 의정한 뒤에 아무 글자를 지적하여 고치도록 하는 것은 또한 그런 예를 들어보지 못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이 칙사를 맞이하는 절목 가운데 제4일에 성복(成服)할 일과 대소 사신(使臣) 및 외관(外官)들은 문서가 도착한 후 제4일에 성복하고 3일 만에 벗을 일을 이제 겨우 계하하였습니다. 그런데 전례는 비록 이와 같으나, 다만 ‘칙령이 도착한 후로 3일 동안 나가 임곡한다.[令到後出臨三日]’는 유의(遺意)로 논한다면, 제4일에 성복하는 것은 이미 즉일로 거림(擧臨)하는 제도에 위배되고, 또 칠일 행례(七日行禮)의 규정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금의 공조(公朝)의 예를 다 헤아려보아도 진퇴간에 모두 근거할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칙령을 선포하는 날 칙사가 관소(館所)로 돌아간 뒤에 성복의 절차를 인하여 거행하고 3일 뒤에 벗는 것이 진실로 사의에 합당하겠으니, 원 절목(原節目) 가운데 이 한 조항을 고쳐 마련해서 넣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바로잡은 뒤에도 대소 사신 및 외관들이 다시 문서가 추후로 도착할 때를 기다려서 비로소 예를 행하는 것은 또한 미안한 데에 관계되니, 칙서 선포할 날짜를 알맞게 가려서 미리 제도(諸道)에 통지하여 제도에서 모두 칙서가 서울에 도착한 날 일제히 예를 거행하고 또한 3일 뒤에 벗을 뜻으로 행회(行會)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처음부터 《한서》와 《사기》의 글을 고거(考據)하여 3일 동안 나가 임곡하는 것을 조례(照例)로 삼으려고 한 것이 이미 의견이 있는 것이고, 구례의 7일을 기다리지 않은 것도 또한 저들의 물음에 대답할 만한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니, 초기에 의거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칙사 맞이할 처소를 이미 숭정전(崇政殿)으로 마련하였으니, 비록 3일 전에 환궁을 하실지라도 궐내(闕內)에서는 그대로 담색(淡色)을 입을 수 없으므로 의당 복(服)을 바꾸는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조(先朝)의 하교에 의해, 소중하기가 자별하다 하여 상께서 진현(進見)할 때의 복색은 남포(藍袍)를 쓰고 입직(入直)할 때에는 그대로 평상복을 입도록 한 일이 밝게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의 환궁이 만일 3일 전에 있으면 대가(大駕)는 돈화문(敦化門) 밖에 이르러 악차(幄次)에 들어가서 무양흑 원령포(無揚黑圓領袍)로 바꿔 입으시고, 모시고 따르는 여러 신하들 및 3일 안에 궐내 각처에 입직하는 관원들은 모두 흑단령을 입고 흉배(胸褙)와 흑각대(黑角帶)는 없앨 뜻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지 않겠는가. 초기에 의거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2월 7일 을미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2월 8일 병신

진휼청이 아뢰기를,
"기근이 들고 병든 나머지, 구제해 주지 않으면 자력으로 살아나갈 수 없는 자 1백 62인에게 쌀을 지급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한성부에 엄히 신칙하여, 만일 한 사람이라도 누락된 자가 있을 경우에는 해당 부관(部官)을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엄히 처단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번에 제급(題給)한 무리에 대해서 이달 그믐날 적간(摘奸)을 한 다음에 다시 더 지급할 것인지의 여부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사리에 입각해서 논하여 초기하도록 하라. 이것은 주구(賙救)하는 것도 아니요 발매(發賣)하는 것도 아니나, 저 궁핍한 백성 진휼하는 뜻에서 반드시 주구와 발매의 실효를 독책하려는 것이니, 유사가 된 신하들은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 뜻을 엄히 신칙하여 소임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 부관(部官)들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들은 대로 감죄(勘罪)해서 일을 신중히 거행할 뒷받침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지난번에 병들고 기근이 든 백성들의 형편에 대해서 삼남(三南)의 도신들을 특별히 신칙하여 특례로 구활하도록 했는데, 연석에서 말을 들어보니, 제도에서 그 일을 거행하는 것이 유명 무실하다고 한다. 대저 근래에 모든 일을 거행함에 있어 임시로 미봉하는 데 그치고 성실히 하는 뜻이 없는 것이 비록 경외(京外) 전체의 공통적인 걱정거리이지만, 어찌 감히 이번에 내가 특별히 하유한 일에 대해서까지 저토록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각 해당 도백들을 엄히 신칙하도록 하고, 또 모든 일은 가까운 데서부터 먼 곳에 미치는 것이니 한성부 또한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승지 이면긍(李勉兢)이 아뢰기를,
"문묘(文廟) 석전제(釋奠祭)의 아헌관(亞獻官)은 으레 대사성으로 임명하는데, 혹 종2품 관원이 대사성이 된 때를 만나면 당상 3품관으로 아헌관을 차출하고 종2품 대사성은 별도로 감제(監祭)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사성으로 아헌관을 삼는 것은 본디 의의가 있는 것이니, 굳이 품수(品數)에 구애될 것이 없이 앞으로는 2품·3품을 막론하고 다만 현임 대사성을 아헌관으로 삼되, 2품인 경우에는 초기로 차입(差入)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9일 정유

전교하였다.
"석채(釋菜)하는 날 밤에 추위가 풀리고 바람도 잔잔하니 제상(祭床) 주위에서 분주하는 유생들에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사(執事) 외에 참반(參班)한 학생의 숫자가 전보다 매우 적으니, 사세가 혹 그럴 때도 있겠으나, 성균관에 들어온 자들이 촉범(觸犯)됨을 혐의하지 않으니 그 성의가 훌륭하다. 성균관 장으로 하여금 안(案)을 받들어오게 한 것은 내 뜻이 그들의 성실함과 태만함을 살피려는 데에 있으니, 가상하게 여기는 뜻을 보임에 있어 의당 전보다 특별한 은전이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초계 문신(抄啓文臣) 친시(親試) 때에, 성균관 장은 이 유생들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하여 초계 문신의 시관에 의해서 유생들을 시취(試取)하고 시상하라."

 

조상진(趙尙鎭)을 형조 판서로, 구익(具㢞)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칙사 행차가 들어올 때 문로(門路)에 결채(結綵)하는 일 및 정향분(頂香盆)을 모두 제감하도록 명하였다.

 

원접사 이시수(李時秀)와 평안도 관찰사 한용귀(韓用龜)가 치계하기를,
"지금 온 인본(印本)의 패문(牌文)이 전에 온 등본(騰本)과 별로 다름이 없고, 이른바 공문(公文)을 한꺼번에 내보내는 것도 격례에 어긋납니다. 그리하여 의주부에서 치통(馳通)을 작성해 보내어 그 회보(回報)가 오기를 기다려서 등문(登聞)할 계획이며, 또 역관들을 금방 봉성(鳳城)에 들여보냄으로써 칙사 행차가 내도하기를 기다려서 영접의 일을 정당하게 거행할 뒷받침으로 삼았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당초의 등본 패문은 저 나라의 공문을 아래에서 등사하여 보낸 것이니, 이는 봉성장(鳳城將)의 후의에서 나온 것이고, 지금 이 인본 패문과 공문도 반드시 봉성으로 보낸 노문(路文)일 것인데 이 또한 먼저 등사해서 보여준 것이다. 고사를 상고해 보건대, 비록 멀지 않은 예로 말하더라도 칙사 행차의 패문은 번번이 그 예가 달랐다. 그래서 혹은 예부의 서찰(書札)이나 주객사(主客司)의 공문으로 내보내기도 하고, 혹은 봉성장의 사신(私信)으로 통지하기도 하며, 또 혹은 구전(口傳)으로 역참에 부쳐오기도 하고, 또 혹은 우리 나라 사신이 먼저 오는 편에 부쳐오기도 하며, 또 혹은 지패(紙牌)와 목패(木牌)가 앞뒤로 나오기도 하고, 또 혹은 지패만 거듭 전해오기도 하며, 또 혹은 기서 패문(旗書牌文) 및 마두 패문(摩頭牌文)과 직함·성명을 쓰지 않은 패문도 있는데, 실상은 이 가운데 별도로 일정한 등록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의궤(儀軌)와 등록에 모두 자세히 기록해 두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매양 거행하는 데에 혼란을 가져오니, 이것이 어찌 부끄러움을 남기는 한 가지 단서가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도감의 의궤 및 비변사와 사역원(司譯院)의 등록에 각년(各年)의 예를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가, 모든 사행(使行)이 있을 때에는 전례를 상고해서 환히 알 수 있게 하는 뒷받침으로 삼도록 하라. 그리고 근래에 의절(儀節) 중에서 특교(特敎)를 인하여 그 번쇄한 것을 제거한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잡아서 내려보낸 의주(儀注)에 일체 의거해서 시행할 것이요 감히 이를 어기지 말도록 할 일로 빈신(儐臣)에게 회유(回諭)하여 문례관(問禮官)으로 하여금 잘 알아서 거행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0일 무술

총융사 김지묵(金持默)을 파직하였다. 김지묵이 칙사를 호행(護行)할 군위군(軍衛軍)을 기송(起送)하라는 뜻으로 경솔하게 먼저 광주부(廣州府)에 관문을 발송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응교 김희순(金羲淳)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아, 저 신주(神州)를 바라보니 이 어떤 시절입니까. 관구(冠屨)가 도치된 지 지금 2백 년이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효묘(孝廟)의 뜻과 일을 따라 이으시고, 선정(先正)의 큰 계책을 강명(講明)하신 것에 대하여 뭇 신하들이 다 함께 흠탄(欽歎)해 온 바입니다. 그리고 비록 요즘의 일로 말하더라도, 의논하는 자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잘못된 구례(舊例)를 환히 아시고서 이미 연신(筵臣)에게 먼저 하유하신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패문(牌文)이 온 뒤에 임곡(臨哭)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것과 출궁(出宮) 때의 복색(服色)은 근거가 없다는 것과 복(服)을 바꿔 입는 날수가 많다는 것과 접견(接見)할 때에 상복(常服)을 입지 않는다는 것 등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일들은 점차로 바로잡아 가시면서도 유독 군신 상하가 모두 행해서는 안 될 큰 의절(儀節)에 대해서는 일체 예조의 안례(按例)에만 맡겨 우선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는다.[存而勿論]’는 데에 차치해 버리시니, 이는 모두 원통함을 참고 압박되어 마지 못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만 그 운운하는 호칭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하니, 만일 의주를 저 사람들에게 등사해서 보여주는 것이 구애되는 바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할 예를 우리가 스스로 행할 뿐입니다. 어찌 꼭 저들에게 관유(關由)를 내어 그 사실을 공언(公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난 병자·정축년의 호란(胡亂) 초기에 저들이 우리를 의심하고 공갈 협박하기를 못할 짓이 없이 하였으므로, 우리는 저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극도로 쌓인 나머지 자신을 너무 비하시키는 혐의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 수치스러운 일 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이 괴로워 그런 일을 하며, 또 무엇을 꺼려서 그것을 고치지 않는단 말입니까. 진실로 지금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잘못된 관습이 계속 유전해서 일마다 얽매여 끝내는 일을 그르치는 데에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예조 참의의 상소와는 비록 간격이 있으나 한번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고 인하여 예관(禮官)의 의견을 갖추어서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5일 계묘

예조 판서 황승원(黃昇源)이 아뢰기를,
"황단(皇壇)의 제향을 매년 3월 상순 안에 날을 가려 거행하도록 정해진 법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금년에는 구애되는 단서가 없지 않은데, 선조(先朝) 병진년 3월의 경우는 비록 지금같은 형편을 만났으나 6일의 단향은 그대로 거행한 예가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병진년의 전례가 있을지라도 이번에는 그때와 다르다. 더구나 단향 하루 전에 재숙(齋宿)을 한 다음에 희생과 제기를 살피고 혹 봉실(奉室)도 봉심하는 것을 근년에 관례로 삼았으니, 어찌 서계(誓戒)를 한 다음에 다른 일을 응접할 수 있겠는가. 택일관(擇日官)에게 물어서 1일에 제향을 거행하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즉시 초기(草記)해 올리고, 여러 집사(執事)는 모두 충성스럽고 선량한 가문의 자손으로 임명하여 서로 섞이는 폐단이 없도록 해서 그대로 법식을 삼도록 하라. 그리고 차라리 혹 날짜를 조금 앞당기거나 뒤로 미룰지언정, 서계한 이후에는 절대로 상치되도록 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6일 갑진

이조 판서 김재찬이 병이 있어 해면시키고, 이시수로 대신하였다.

 

병조 판서 구익을 파직시켰는데, 경희궁(慶熙宮) 담장 밖의 각영(各營)이 다 무너졌는데도 전혀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문순으로 대신하였다.

 

2월 17일 을사

이조 참판  서용보(徐龍輔), 참의 정상우(鄭尙愚)를 체직하고, 이조승(李祖承)·이익모(李翊模)로 대신하였다.

 

2월 18일 병오

장령 정한(鄭澣)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국가의 전세(田稅)와 대동(大同)은 똑같이 해마다 의례로 바치는 공물로, 지극히 중하고도 엄격하여 조정에서도 넓히거나 좁히지 못하는 것이요 유사는 감히 제도를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흉년이 든 해일 경우 도신(道臣)과 대신(臺臣)이 간혹 가을을 기다려서 대동미를 수납하자는 뜻을 버젓이 서장(書狀)에 기록하여 우러러 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뜻을 요약해 보면 비록 백성들의 힘드는 것을 조금 가볍게 하고 성상의 마음에 부응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는 양법(良法)을 무너뜨린다는 비난을 받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신은, 지금부터는 대동을 정퇴(停退)시키는 일을 감히 아랫사람이 의논하지 못하게 하여, 대각(臺閣)의 신하나 각 감영(監營)에서 혹 이 일을 우러러 청해 올 경우에는 묘당에서 이를 일체 엄히 막고 중벌로 논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환향(還餉)으로 말하자면 농민의 내년 양식이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고, 국가의 양곡에 대한 장래의 대비도 여기에 달려 있으니, 그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합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정퇴의 명령이 거의 세과(歲課)와 같이 되었는바, 막 정퇴를 해놓으면 아전들이 이를 인연하여 작간을 부림으로써 실지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것을 보장하기가 어렵거니와, 더구나 한번 정퇴한 것은 문득 구환(舊還)이 되어 준봉(準捧)할 기약도 없게 됩니다. 그러니 신의 생각에는 혹 불행하여 흉년이 든 때가 있더라도 환향을 정퇴하는 일은 절대로 가벼이 허락하지 말도록 특별히 수령들을 신칙해야 하고, 또 맹목적으로 법에만 의존하는 것은 사람을 잘 얻은 것만 못하니, 오늘날의 급선무는 수령을 잘 가리는 일보다 더 중할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오직 전하께서 잘 생각하소서.
그리고 승보시(陞補試)와 상제(庠製)의 폐단은 그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체로 승보시를 십이초(十二抄)로 정한 것과 상제를 사등(四等)으로 나눈 것은 이 또한 월과(月課)의 뜻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반장(泮長)이나 사학(四學)의 교수(敎授)들이 이 일을 스스로 담당하지 않고 각각 서로 미루다가, 매양 한 해가 거의 저물어 눈이 쌓이고 얼음이 꽁꽁 어는 때를 당하면 반드시 칙교(勅敎)를 기다려서 마지못해 시장(試場)을 베풀어 급급히 시험을 끝내곤 합니다. 이 때문에 먼 시골의 재자(才子)들이 우산을 메고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1년 내내 발돋음하며 기다리다가, 추위의 고통이 점점 닥치고 나그네의 시름이 점점 깊어짐에 미쳐서는 일찍이 한 걸음도 괴정(槐庭)을 엿보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리고 비록 도하(都下)의 제생(諸生)들이라도 겨울에 들어서 분주하여 삼여(三餘)008)  의 공부를 전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이를 개탄하는 바입니다.
본디 6월·7월·11월·12월에는 시험을 베풀지 않고 10월 이전에 시험을 끝마친다는 것은 바로 바꿀 수 없는 성전(成典)에 관계된 일인데도, 이를 폐하고 준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금년부터 계춘(季春)·맹하(孟夏)·계추(季秋)·맹동(孟冬)의 달마다 삼초(三抄)를 베풀어 십이초의 수를 끝내고, 상제(庠製)에 이르러서도 계춘·맹하의 달에는 춘하등(春夏等)을 베풀고, 계추·맹동의 달에는 추동등(秋冬等)을 베풀어서 사등(四等)의 제술 시험을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국자(國子)의 직임에 있는 사람은 은대(銀臺)의 직임을 겸하지 말고, 교수(敎授)의 직함을 띤 사람은 관직(館職)을 겸하지 말아서 시험 보이는 일에만 전심하도록 하여 이를 영원히 일정한 법식으로 만들고, 만일 혹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단호히 무겁게 감죄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계춘이 얼마 남지 않아서 법을 만들 시기가 바로 지금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널리 자문하여 재량해 처리하소서.
그리고 연전에 북관(北關)에 후주진(厚州鎭)을 창설할 적에 공관을 건축하고 민호를 모집해 들인 것은 실로 국토를 개척하고 변방을 충실히 하려는 우리 성상의 원대한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새로 들어와 살림을 붙인 백성들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집을 짓고 한 노고에 대해서 비록 사람마다 상을 줄 수는 없으나, 그 가운데 가장 힘을 많이 쓰고 가장 일을 많이 주관한 사람에 대해서는 진실로 보답의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소망은 다만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다 마침에 미쳐서는, 심지어 애당초 감동(監董)의 공도 없는 병사(兵使)의 비장(裨將) 따위가 외람되이 상 받는 데 참여함으로써 변방 백성들이 크게 실망을 하게 되었으니, 조정에서 상 주는 것을 신중히 하여 먼 데 사람들에게 신망을 보이는 정사에 이미 결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당 병영(兵營)에서는 아무 관계도 없는 비장을 함부로 천거하여 외람되이 조정의 은상을 받게 하였으니, 그 분의(分義)에 있어 방자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니 신의 생각에는, 해당 비장에게는 특별히 시상을 하지 말고, 해당 수신(帥臣)에게는 견파(譴罷)의 법전을 시행하여, 임금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자의 경계로 삼는 일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臺臣)과 도신(道臣)으로서 대동(大同)을 정퇴(停退)하자는 뜻으로 혹 우러러 청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 이를 엄히 막고 중죄로 논하라는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러하다. 대간은 도백(道伯)과는 달라서 참으로 민정(民情)이 절급함을 알고 말을 하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중죄를 가할 수는 없으나, 고사(故事)에도 특은(特恩)이나 수계(繡啓)가 아니면 감히 함부로 진청(陳請)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의당 새로 언관이 된 사람들에게 그 격식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도백이 서장으로 청하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국가의 체모에 관계됨이 있으니, 네 말이 과연 옳다. 그대로 시행하겠다. 그러나 암행 어사가 가지 못한 곳이거나 조정에서 미처 살피지 못한 곳으로서 백성들의 형편이 추호를 다투는 그런 곳에 대해서는 집예(執藝)009)  로써 소통시키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환향(還餉)을 정퇴시키는 것은 절대로 가벼이 허락하지 말라는 일에 대해서는, 백성들은 실지 혜택을 입지 못하고 아전들이 이것을 가지고 작간을 부린다는 네 말이 옳다. 더구나 옛 대신(大臣)의 주의(奏議) 가운데에도 ‘차라리 혹 탕척(蕩滌)은 해줄지언정 정퇴를 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으므로, 항상 이를 격언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지금 만일 일체 이 법대로만 한다면 이는 또한 마치 섶나무를 제거해서 끓이는 것을 중지시키고, 목이 메다 하여 밥먹기를 폐하는 일과 비슷한 것이다. 끓이지 않으면 국이 될 수 없거니와, 밥을 먹지 않으면 어떻게 배를 채우겠는가. 그러니 이 한 조항에 대해서는 형편상 예전대로 시행할 것이다.
그리고 승보시(陞補試)와 상제(庠製)의 일에 대해서는 십이초와 사등의 법식을 준행하지 않은 것은 그 죄가 반장(泮長)과 교수(敎授)에게 있는데, 하필 새로운 법제를 특별히 세울 것이 있겠는가. 다만 《대전(大典)》의 법제를 어긴 자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수시로 혹 집론(執論)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해당 수신을 견파하고 해당 비장에게 시상을 하지 말라는 일에 대해서는 전해들은 풍문과 전혀 다르니, 어찌 매우 해괴하지 않겠는가. 후주진을 창설하고 공해를 새로 건축할 때 감독했던 사람은 의당 토착인으로서 힘을 많이 쓴 사람에게 노고를 보답해야 할 것인데, 병사(兵使)라는 자가 이런 무상한 일을 하였으니, 즉시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히 신문하여 공초를 받아서 보고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상전(賞典)에 대한 관교(官敎)는 도신으로 하여금 올려보내게 한 다음 이를 없애버리고 다시 실적을 가지고 조사 신문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할 것이고, 상 줄 것을 청하는 일에 대해서는 새로 임명된 수신에게 하유할 것이다. 비록 도신으로 말하더라도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즉시 바로잡지 않았으니, 우선 그를 무거운 쪽으로 추고할 것이다. 너는 대각에서 아무런 말이 없는 요즘 같은 때에 능히 품은 생각을 숨김없이 말하였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하였다.

 

조상진(趙尙鎭)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2월 19일 정미

전교하였다.
"사람들은 충무공(忠武公)이 무오년010)  에 요동(遼東)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문적(文蹟)을 상고해 보니, 충무공이 선천 군수(宣川郡守)로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중군(中軍)인 영유 현령(永柔縣令) 이유길(李有吉)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간 것은 바로 기미년 2월 19일이었고 3월 4일에 순절하였는데, 이때 이유길 및 운산 군수(雲山郡守) 이계종(李繼宗)과 천총(千摠) 김요경(金堯卿)·오직(吳稷)·김좌룡(金佐龍)이 함께 죽었다. 무오년이 세 번째 다시 돌아온 작년에 내가 느낌이 있어 특별히 그의 봉사손(奉祀孫)에게 무직(武職)을 제수하고 이내 또 무예를 시험하여 사제(賜第)했었다. 그런데 요동으로 건너가는 데에 대한 논의는 무오년에 시작되었고 순절한 행적은 실로 기미년에 있었으니, 마침 이해, 이달, 이날이 거듭 돌아온 때를 당해서 어찌 차마 작년에 이미 뜻을 보인 것이 있다 하여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이 바로 19일인데 문적을 상고한 것도 공교롭게 오늘에 있었으니, 우연이 아닌 듯하다. 증 영의정 충무공 김응하(金應河)의 묘에 승지를 보내서 그가 순절한 날에 치제(致祭)하고, 그의 봉사손인 선전관 김택기(金宅基)를 우선 사과(司果)에 부쳐주어 특례로 수용(收用)하는 계제로 삼도록 하라. 그리고 중군 이유길의 절의에 대해서는 고 재상 이문충(李文忠)의 유집(遺集)의 애사(哀辭)를 보면 명증(明證)이 되기에 충분하고, 군수 이계종 등의&nb2월 19일 정미

상이 고 영중추부사 홍낙성(洪樂性)의 장례날이 다가왔다는 말을 듣고 친히 제문을 지어 사제(賜祭)하였다.

 

2월 20일 무신

다시 김지묵(金持默)에게 총융사를 제수하였다.

 

전교하였다.
"금년이 어떤 해인가 하면 바로 온릉 성후(溫陵聖后)011)  께서 복위(復位)되신 해이다. 온릉을 배알할 때에 그 사실을 제기하여 하유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두 신하가 충절을 수립한 것이 과연 어떠한가. 그런데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의 후손인 박효덕(朴孝德)은 요즘에 비록 등용하였으나, 문간공 김정(金淨)의 후손은 아직도 수용하지 못했는데, 마침 재랑(齋郞) 자리가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구전(口傳)으로 의망하여 들이도록 하라."

 

통제사 임률(任嵂)이 장계하기를,
"이무(移貿)하는 데에 폐단이 있어, 돈을 나누어 줄 때면 백성들이 준수(準受)하지 않아서 이미 없어진 것이 많고,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면 아전들이 이를 인연하여 작간을 부려서 또한 무역을 더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본전(本錢)을 나누어 주는 날에 비장(裨將)을 보내어 수령들과 현장에 입회해서 가호(家戶)마다 직접 대면하여 주면서 통무(統貿)의 수효를 분명히 말해줌으로써 감히 돈을 나누어줄 때 감하여 지급하거나 곡식 한 되 한 홉이라도 더 무역하지 못하도록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조(耗條)·색락(色落)과 정채(情債) 등의 잘못된 규례를 일체 혁파하여, 영읍(營邑)을 막론하고 혹시라도 죄과를 범한 자가 있으면 엄벌로 징계해서 단연히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한 가지 조항에 이르러서는, 해마다 획부(劃付)하는 것을 당초에 1천 석으로 기준을 삼았는바, 혹 흉년을 인해서 정감(停減)하거나 혹은 다른 아문(衙門)에 획부함으로 인하여 원향(元餉) 6만 석이 지금은 그 절반이 감축되기에 이르렀는데, 가분(加分)의 수량이 적음으로써 획부하는 것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토지를 매입하는 데 있어 오직 넓은 토지를 취하기만 힘쓰고 비옥함과 척박함은 가리지 않았으니, 육리청산(六里靑山)012)                  에 불행히도 가깝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매입한 토지가 비록 3백 75석의 종자를 부릴 만큼 광활하지만, 가을에 수확한 실수(實數)는 2천 포(包)도 차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둔곡(屯穀)을 지방(支放)에 획부하고 향모(餉耗)만을 취하여 토지를 사자고 하면 둔전(屯田)이 어느 해에나 성취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둔조(屯租) 거둔 것은 우선 다른 데에 쓰지 말고 저 향모와 합해서 오로지 둔전 만드는 데에 전심하여, 둔곡이 1만 곡(斛)을 충분히 웃도는 때를 기다려서 비로소 첨향(添餉)을 허락하고 영원히 이무(移貿)를 혁파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러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도록 분부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이무하는 것이 만일 폐단이 없다면 어찌 금방(禁防)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읍보(邑報)와 수계(繡啓)에서 모두 통무(統貿)를 지탱하기 어려운 단서로 삼았고 보면, 지금 이른바 ‘잘못된 규례를 혁파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후의 통수(統帥) 또한 일찍이 이와 같이 말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끝내 폐단이 되기는 매양 도로 전과 같으니,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또 둔전 설치하는 한 가지 일은 10년 정도면 충분히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도 전후의 통수들이 여기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음으로써 1만 곡(斛)의 수량에 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설치된 둔전까지 아울러 육리청산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도신으로 하여금 엄격히 조사하여 그 중에 더욱 무상한 자에 대해서는 이름을 지적, 현고(現告)하게 해서 중죄를 적용할 뒷받침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중간에 이무(移貿)를 혁파한 것도 또한 여러 해였으나, 그때에는 해곤(該閫)에서 오히려 능히 지탱해 냈는데, 지금에 와서 어찌 이미 혁파한 뒤에 다시 그 길을 열어서 소생하길 바라는 연읍 백성들의 뜻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장계의 내용은 차치해 버리고 별도로 규모를 세워, 둔곡(屯穀)이 1만 곡이 찰 때를 기다려서 즉시 장문(狀聞)할 일로 분부하소서.
그 폐단의 근원을 추구해 보면 곡부(穀簿)가 크게 감축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대체로 영(營)·곤(閫)의 곡식을 혹은 군량의 여분에서 모으기도 하고, 혹은 수시로 운용하는 데서 힘써 마련하여 1영의 수용에 충당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도 영·곤에 있는 자들이 만일 부득이 정감(停減)할 때를 만나면 모두 이렇게 마련해서 보충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영·곤의 곡식을 드물게 정퇴해서 수백 년 동안 감영의 모양을 보존해 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겉으로는 법리(法理)에 어긋난 듯하나, 실상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수용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조정에 걱정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영·곤에서 심원한 뜻을 알지 못하여, 정퇴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없고, 보충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들을 수가 없으니, 이렇게 계속해 나가다가는 몇 해 안 가서 조정에 우러러 청하는 일이 서로 이어질 것인데,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때에 가서 무슨 곡식으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무슨 꾀로 이리저리 배치를 하겠습니까. 이것은 지나치게 따지는 것이 아니라, 곧 반드시 닥쳐올 형세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먼저 해당 곤영에서부터 임무를 인수 인계하는 모든 자들이 서로서로 경계하여 수습하여 잘 해 나갈 방도를 특별히 생각하라는 뜻으로 일체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그런데 수개월 뒤에 임률이 다시 치계하기를,
"신의 영이 이렇게 조채(凋瘵)해진 근원은 바로 모곡이 점점 줄어들어 지출을 감당해 내기 어려운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비록 이무를 허락했던 때에도 혹 환곡이 감축되는 해를 만나면 전무미(轉貿米)와 군작미(軍作米)를 전후로 조정에 주청하여 얻어낸 것이 모두 여섯 차례나 되는데, 갑인년에 이르러서는 유미(留米) 1만 4천 석 가운데서 5천 석을 획급(劃給)하고 그 나머지 수량을 모조리 나누어주어 모곡을 취해서 연한을 정하여 보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비국이 입계(入啓)하여 행회(行會)하고부터는 차차 더 불어나서 지금은 1만 2천여 석에 이르렀으니, 지금 이 곡식을 한 4천 석 정도를 획부(劃付)하고 그 나머지 원수(元數) 8천 석에 대해서는 연한을 물려 정하여 모조리 나누어 주고 모곡을 취해 보충하기를 또한 기왕의 규례와 같이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갑술년에 호남 지방 연해의 통운(通運)을 정폐한 것은 해도(該道) 이정사(釐正使)의 서계(書啓)에 따른 것인데, 그후 정미년에 통제사        조심태(趙心泰) 이하 여러 사람들이 전과 같이 통운시킬 일로 사유를 갖추어 장청(狀請)함으로 인해, 묘당에서 복계하여 다시 시행하기를 허락했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4백 리로 한정을 하여 해남(海南) 등 6읍은 도로 정폐시킨 가운데에 들어갔고, 통운 된 곳은 광양(光陽) 등 5읍에 그쳤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호남 지방 연해로서 특별히 평탄하거나 험난함의 차이도 없는데, 영창(營倉)까지 바로 수송하도록 하지 않고 섬진강까지만 운송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호남 지방 연해의 첩경인데, 오직 이 해남만 4백 리로 한정을 하여 그 안과 밖이 혹은 행해지고 혹은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이는 자못 아무 의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해남 등 6읍 및 여기에 소속된 각진(各鎭)에 아울러 통운하도록 하는 것이 실로 편의에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영남·호남을 막론하고 연읍의 곡부(穀簿)는 텅 비었습니다. 그리하여 임자년에 수신(帥臣) 이윤경(李潤慶)의 장청을 인하여, 산군(山郡)에 있는 것들을 일체 아울러 연읍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감영에서 명칭을 바꾸어 기록함[換錄]으로 인하여 산읍의 곡식이 또 9천여 석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호남의 경우는 1도의 곡총수(穀摠數) 9만여 석 가운데 산읍에 저장된 것이 8만여 석에 이르니, 이는 자못 당초에 설치한 본의가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 이후로는 근래의 규례를 모방해서, 영남의 곡식은 모조리 연변에 환치(換置)하고, 호남 산군의 곡식은 한 4만 석 정도를 통운되는 각읍에 환치시킨다면, 이것은 곧 아문의 호명만 서로 바꾼 것일 뿐이요, 곡총수의 손익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게 되니, 매년의 수용에 대해서는 원곡을 손대지 말고 모조만 취해 쓰는 것으로 정식을 만드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도록 분부하소서."
하였는데, 좌의정        이병모가 복주하기를,
"전무미와 군작미를 획급하는 일은, 결코 일찍이 전례가 있었다 하여 선뜻 시행하기를 허락해서 계속하기 어려운 걱정을 불러들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해남 등 6읍을 아울러 통운시키도록 하라는 일로 말하자면, 당초에 이미 허락을 했다가 이내 중지시켰던 것은 실로 본도의 사정이 불편함에서 연유된 것이니, 지금 다시 허락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영남의 곡식을 모조리 연변에 환치하고, 호남 지방 산군의 곡식 4만 석 정도를 통운되는 각읍에 환치하라는 일로 말하자면, 비록 일체 방색(防塞)할 수는 없으나, 그 수량을 다 환치하는 것은 형세가 또한 어렵습니다. 그런데 양도(兩道)의 도신들에게 분부하시어 만일 환획(換劃)을 참작할 방도가 있다면 그 환획한 실제 수량을 등문(登聞)하도록 해야겠으나, 이것은 지출에 대한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가 되지 못합니다.
대체로 이무의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잘만 하면 백성을 그리 괴롭히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신이 유사로 있을 때에 그 허락해 주지 않을 수 없는 단서를 갖추 진술하여 이를 시행한 지 8, 9년이 되었는데, 이제 또 그에 대해서 민폐를 가지고 보고해 옴으로써 신의 말은 이미 실효가 없게 되었으니, 감히 다시 이 일을 가지고 우러러 진술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한 조항을 제외하고는, 둔전 만들기를 신칙하는 일 이외에 다시 다른 도리가 없으니, 청컨대 전번의 복계에 의거해서 분부하소서."
하고, 우의정        이시수는 말하기를,
"최초 이무하기 이전에는 통영(統營)의 지출이 모자라는 걱정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요조(料條)가 점차 증가함으로 인하여 이무를 해서 그 수를 충당하기에 이른 것이니, 이는 전후 수신들의 과실입니다. 그러나 이미 증가된 요조를 조정에서 갑자기 삭감시킬 수 없고 또 별도로 구획해서 그 잇기 어려운 것을 이을 수도 없는 형편이 이와 같으니, 우선 이전대로 이무를 하도록 허락하고, 이무하는 사이에 다소 병폐가 되는 단서에 대해서만 엄히 신칙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다가, 뒤에 둔전의 수입이 이 수량을 충분히 당할 만한 때를 기다려서 이무의 한 가지 일을 영원히 혁파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21일 기유

예조 판서 황승원(黃昇源)이 아뢰기를,
"지금 이 진향사(進香使)가 북경에 도착하여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바칠 때와 진향(進香)할 때에는 의당 천담복(淺淡服)을 입어야 하고, 성(城)에 들어간 뒤에 노상을 왕래할 때에는 흑단령(黑團領)을 흉배(胸褙)와 흑각대(黑角帶)가 없이 입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만일 1백 일이 지났다 하여 저들이 모두 길복(吉服)을 입을 경우에는 의당 평상시에 입는 흑단령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23일 신해

이조 참판  이조승(李祖承)과 참의 이익모(李翊模)를 체직하고, 이익운(李益運)과 윤행원(尹行元)으로 대신하였다.

 

전교하였다.
"오늘 밤이 어떤 밤인가. 단향(壇享)을 장차 거행하려고 하니, 서계(誓戒)하며 옛일을 생각하는 이외에 훌륭한 인물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참으로 간절하다. 요동 백(遼東伯)의 봉사손 김택기(金宅基)에 대해서 어찌 계제(階梯)에 얽매일 것이 있겠는가. 오늘 정사에서 훈련원 정(訓鍊院正)으로 의망해 들이라. 그리고김 충무(金忠武)013)  ·이 충무(李忠武)014)  ·이 제독(李提督) 이외에도 이상의 세 집과 같은 충신 집 자손들에 대해서는 비록 무관일지라도 단향의 집사(執事)로 차임하는 것을 지금부터 법식으로 정하라."

 

김익휴(金翊休)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2월 24일 임자

창원 부사(昌原府使) 이상도(李尙度)가 상소하여 읍폐(邑弊)를 진술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비변사가 복계하기를,
"창원 부사의 상소에 의하면 ‘본읍(本邑)은 40, 50년 이래로 누차 큰 흉년을 겪은 탓으로 손실된 결총(結摠)의 수가 아주 많아서 세금을 징수할 곳이 없는데도 이미 세밀한 조사를 거치지 못했고, 양안(量案)에서 이미 묵혀버린 구재전(舊災田) 또한 1천 결(結)에 가까왔는데, 이를 바로잡는 방도는 오직 은루(隱漏)된 전지들을 다시 찾아내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전지들을 직접 답사하여 새로 조사해서 얻어낸 것이 2백 11결이었고, 영원히 면제되지 못한 구재전이 4백 74결이었는데, 그 가운데 이미 수택(水澤)이 되어 버린 전지를 새로 조사해서 얻은 2백 11결로 보충하여 면제해 버리면 그 나머지가 2백 63결이 됩니다. 그런데 재해의 명칭이 이미 다른 이상, 이것을 선뜻 영원히 면제할 것으로 의논할 수는 없으니, 금년부터 연한을 정해 놓고 세금을 감해 준다면 이 토지들이 차례로 개간될 것이므로, 그 전수(全數)를 영원히 버리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소의 내용으로 본다면 영원히 면제되지 못한 구재전 2백 63결은 이미 수택이 되어버린 것과는 서로 다르니, 여기에 대해서 세금을 감해 주고 경작하기를 권면한다면 차례로 개간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자세히 알면서도 변통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농사를 권면하는 지극한 뜻을 받드는 도리이겠습니까. 특별히 그의 소청에 의거하여 금년부터 그 전지를 개간하는 대로 3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 주고, 개간한 것과 개간하지 않은 결수를 해마다 감영에 보고하고 감영에서는 다시 이를 호조와 비변사에 보고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연전의 관동과 해서 지방 등 고을의 경우와 같이 총수에 준하기를 목표로 삼는다면, 한편으로는 일을 자문하고 말을 참고하는 도리가 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유명 무실의 폐단을 막게 될 것입니다.
또 창원 부사의 상소에 ‘근래에 산골에 사는 백성들은 공세(公稅)를 면하기 위하여 반드시 깊고 외진 곳을 찾아가서 화전(火田) 농사를 지음으로써 산꼭대기까지 농기구가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산중의 수목을 한 번 기르려면 자칫 백 년이 걸리는 관계로 곳곳마다 벌거숭이가 되어 사석(沙石)이 쓸려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일 산에 대한 금령을 엄히 신칙하여 산골 백성들로 하여금 높고 깊은 산에는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다면,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백성들이 반드시 의당 조정에서 금하지 않은 빈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수해(水害)를 방지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산에는 나무를 심고 들에는 곡식을 생산함으로써 실제로 토질에 맞게 하는 것이 됩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법전에 실려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재 당면한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백성을 한번 소요시키는 것으로 그친다면 아무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피해가 많을 것입니다. 지난번 공주(公州)의 생원 유진목(柳鎭穆)이 올린 책자 가운데 산금(山禁)을 펴서 나무를 기르는 데 대한 조항이 매우 절실하였으니, 이제 곧 하교에 의거하여 제도의 수령들에게 반시(頒示)해서 수령들이 진실로 성심껏 받아들이도록 한다면 별로 소란시키지 않고도 수년 뒤에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뜻으로 분부하소서.
또 창원 부사의 상소에 ‘정퇴(停退)를 하는 뜻은 본디 흉년에 세금을 제대로 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저 곤궁한 백성들은 방금 햇곡식을 실어간 상황에서 옛 환곡까지 다 바치기가 힘이 모자라므로, 이미 옛 환곡이라 칭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치 규정 이외의 것처럼 여김으로써, 그것을 제대로 다 받아들이기가 새 환곡 받아들이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해가 또 흉년이 들어 차차로 계속 정퇴해 주다 보면, 이것이 먼 옛것이 되어 버려서 자주 탕감을 해 주게 되니, 외방 고을의 저축이 이로 인하여 매우 모자라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 대신 받아들일 경우에는 이런 폐단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민간의 사정으로 말하자면 비록 흉년이 든 때일지라도 반드시 조금은 잘된 곡식이 있을 것이니, 일시적으로 정퇴시켜 다시 후일의 빚을 남겨두기보다는 차라리 편리할 대로 대신 바쳐서 빚을 완전히 청산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큰 흉년만 아니면 그 정퇴시키는 수량을 대신 바치는 규정에 옮겨 시행해야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퇴를 허락하지 않고 대신 바치기를 허락하는 것이 어찌 공사(公私) 간에 양쪽이 다 편리한 방도가 되지 않겠습니까마는, 근래에는 사람들이 정퇴해주는 일을 듣고 본 것이 이미 익숙해져서 조금만 흉년이 들면 모두가 정퇴해 주기를 바라고 있고, 감영이나 고을에서도 따라서 민심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비록 대신 바치는 법을 정한다 하더라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폐단이 영원히 없기를 보장하기 어렵고, 또 만일 이와 같다면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니, 우선 근래의 규례대로 묘당에서 그때그때 품지를 받들어 거행하는 것이 오래갈 수 있는 방도에 합당할 듯합니다.
또 창원 부사의 상소에 ‘팔도의 여러 고을에 백성들의 창고가 없는 데가 없으나, 이미 호조에 회감(會減)하지 않고 또 감영에도 관문을 보내지 않은 채, 다만 각 고을에서 스스로 마련하여 스스로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폐단의 근원은 매양 각 고을에서 잘 살피지 못함으로써 아전들이 이를 인연하여 작간을 부려 절제없이 곡식을 축내고서 이것이 쌓여 포흠이 생기면 백성들에게서 더 거둬들여 채워서 보고하는 것이 문득 정해진 규례가 되어버린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일 관서의 전례에 의거하여 이것도 아울러 도신에게 마감하도록 한다면 조사하는 것이 이미 윗 감영에 매이게 됨으로써 아랫 고을들의 작간 부리는 것이 절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성의 창고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먼저 호남과 영남에서 조정의 칙령을 받들어 현재 개정 작업을 하고 있으나 그 일을 잘 해낼지의 여부와 그 일이 유익할지의 여부를 알 수 없고, 또 감영에서 마감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 장래의 이해 관계에 대해서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록 관서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감영에서 관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마감할 무렵에 온갖 폐단이 함께 생겨 심지어는 관청에 소속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체로 관리들이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비록 감영에서 마감을 하지 않더라도 절로 항상 여유가 있게 될 것이지만, 만일 이 마음은 없이 헛되이 마감만 떠벌린다면 오히려 모람(冒濫)하는 폐단을 조장하기에 알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목은 법으로 규정된 대동(大同)과는 다르니, 바로잡은 뒤로 4, 5년 동안 시행해 보아서 민간에 편리한지의 여부를 자세히 안 다음에 마감의 방도를 다시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또 창원 부사의 상소에 ‘근래에 팔도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에 대하여 그 조세 대장을 상고해보니, 모두가 하등급의 상이 몇 결, 하등급의 중이 몇 결, 하등급의 하가 몇 결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만일 매년 그해에 입은 재해를 실지 답사한 데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라면 오히려 괜찮겠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아무 등급이 몇 결이라고 하는 것은 곧 해당 고을마다 각각 일정 불변의 철안(鐵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하등급의 중이니, 하등급의 하니 한 것은 곧 6등급으로 된 전분(田分)을 말한 것이 아니라 바로 9등급으로 된 연분(年分)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연분이라고 한다면 해마다 한 가지 투식만 적용하고 다시 증가되는 일이 없는 것은 이 무슨 말입니까. 이른바 하등급의 중이나 하등급의 하라는 것은 바로 칠분재(七分災)·팔분재(八分災)의 명칭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풍년과 흉년을 막론하고 먼저 몇십 만 결을 영원히 재감(災減)의 대상에다 얽매어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밖에 매년 입은 재해까지 여기에 덧붙여 면제해 주고 있으므로, 국가에서 해마다 정세(正稅)를 손실본 것이 몇십 만 섬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런데 지금 매결당 거두는 전세(田稅)·대동(大同) 및 다른 명색으로 전결에 붙여 받는 것들이 통틀어 대략 20여 말[斗]이 되는바, 이것이 얼핏 보면 국전(國典)에서 규정하고 있는 20말에 꼭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수확량이 10분일 경우 20말을 받는다는 것은 《원전(原典)》에 실려 있는 전세법이고, 대동 등의 명색은 모두 그 뒤에 나온 것인데, 만일 전세조 20말 안에서 대동의 몫을 떼낸다면 그 토산물 공납을 대신하여 대동을 새로 만든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원전》이 반포된 이후로 전세미(田稅米)를 몇 말 낮춘다는 법조문은 이미 없었고, 또 연분(年分)의 등급은 분명히 해에 따라 서로 같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다만 팔도 각 고을의 조세 대장 가운데서 엉터리로 등급을 매긴 잘못된 규례는 빼 버리고, 반드시 해당 연도에 완전히 재해를 입었거나 일부만 재해를 입은 실제의 결수(結數)를 가지고 본래의 규정에 의거하여 등록해서 감면해 준다면 정세의 수입이 선왕 때의 옛 수준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렇게만 된다면 경비가 넉넉해져서 저 양보(良保)의 가장 곤궁한 몇 만의 생명을 비로소 차례로 도탄에서 구제할 수 있을 것이고, 사노비(寺奴婢) 같은 무리들이 외방 고을의 잡다한 신역을 전결에 덧붙여 놓고 농민들을 침해하는 일도 모두 알맞게 변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농사 작황을 9등급으로 나누는 제도가 폐지되고 1결당 4말씩 거두는 법이 시행되었는바, 《속전(續典)》 전세조(田稅條)에 ‘무릇 1결당 전세 4말을 거둔다.’ 하였고, 그 주석에는 ‘하등급의 중 이상에서 거두는 전세는 이 범위 안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본다면 양안(量案)을 작성할 때에 연분의 문적(文跡)을 인용하여 이것을 그대로 토지의 등수를 만들어 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삼남 지방의 전세 거두는 대장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상등급의 중에서부터 하등급의 중에 이르기까지가 10만여 결이나 되었고, 그 나머지는 경기·해서와 함께 모두 하등급의 하에 속하였습니다. 그 상소문 가운데 이른바 ‘이미 하등급의 중이니 하등급의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6등급의 전분(田分)이 아니라 바로 9등급의 연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왕 연분을 말한 것이라면, 해마다 한 가지 투식만 적용하고 다시 증가되는 것이 없는 것은 이 무슨 말입니까.’라고 한 데에 대해서는, 그가 의심을 일으킨 것이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속전》에 실려 있는 ‘하등급의 중 이상’이라는 법조문도 역시 연분의 등급을 토지의 등급으로 삼은 것인데 또 무엇을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만일 이것을 인하여 《원전》의 세 법이 지금까지 그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문득 수확량이 10분일 경우 매결당 20두의 전세를 받아내려고 한다면,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의 양식과 대동미(大同米)·결전(結錢) 등의 조항을 총 계산할 경우 1결당 내는 것이 장차 40말에 가까울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기왕 여기에서 의논할 수가 없다면 이전대로 내버려두는 일 이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으니, 이런 뜻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창원 부사가 올린 상소의 내용은 종래의 투식을 답습하지 않고 능히 자기의 주장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또 그의 말에는 주서(朱書)의 어법(語法)이 많이 들어 있으니, 그가 사물의 실정에 익숙하기가 말이나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겠다.
그 상소 가운데 대신 바치는 일로 말하자면, 이 법이 《속전》에만 나타나 있고 《원전》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 이는 대체로 먼 옛날에 제정된 법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기한을 정퇴해 주어 도리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것을 대신 바쳐서 국가에 빚을 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이 일은 전적으로 감사와 수령들이 때에 따라 타당하게 조절하고 실상을 쫓아서 넓히고 좁히기를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고(民庫)의 일로 말하자면, 고 재상 윤 문익(尹文翼)015)  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에 응당 바쳐야 한다는 것으로 항식을 정하였다. 그러나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폐단이 빈번히 일어나므로, 앞서는 환곡을 취해서 이를 보충하였고 끝에 가서는 또 백성들에게 나누어 징수하여 이를 보충하였다. 그러니 공사(公私) 간에 과연 보람이 있었다고 봐야겠는가, 피해가 있었다고 봐야겠는가? 오직 폐단이 없이 시행할 만한 방도를 다시 잘 헤아려서 좋게 처리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전세(田稅)의 일로 말하자면,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실려 있는 내용이 《원전》과 《속전》이 각기 다른데, 어째서 유독 여기에만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대정(大靜)과 정의(旌義) 두 현(縣)을 설치한 것은 《원전》이 나온 뒤에 있은 일인데, 《원전》의 주석에서 제주(濟州)를 삼읍(三邑)이라고 하였으니, 이런 문세는 역시 좋다고 이르겠다.
대체로 이 상소문 전편에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일들이 많이 열거되었다. 그러니 만일 제도(諸道)의 문관 수령들의 소장을 한데 모아 놓고 과거 시험 보이는 법을 적용하여 등급을 정하여 갑을의 차례를 매기자면, 이 상소가 사실에 잘 근거하는 정만석(鄭晩錫)의 글이나 정밀하고 자상한 한흥유(韓興裕)의 글보다 낫겠고, 적용의 범위가 넓은 면에 있어서도 김굉(金㙆)의 식견에 그다지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애써 자문하는 일은 바로 일을 꾀하고 말을 고찰하던 옛 규례이니, 상전(賞典)을 어찌 이런 사람들에게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창원 부사 이상도에 대하여 해조로 하여금 현직은 그대로 두고 가선 대부(嘉善大夫) 품계를 내려서 모든 고을 수령들을 권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6일 갑인

전교하였다.
"요동 백(遼東伯)의 묘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는 것은 지난 기미년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 뜻이다. 그런데 철원(鐵原)의 포충사(褒忠祠)에는 연전에 사제(賜祭)하였거니와, 창성(昌城)의 충렬사(忠烈祠)와 선천(宣川)의 의열사(義烈祠)에는 다음달 안에 날을 가려서 똑같이 치제할 것이다. 충무공(忠武公)이 순절한 때로부터 2년 뒤에 훈련 도감으로 하여금 《충렬록(忠烈錄)》을 간행하도록 하였는데, 거기에는 명(明)나라에서 조서로 요동 백을 증봉한 사실이 있다. 또 중조(中朝)의 《충의록(忠義錄)》에는 이문(移文)하여 증휼(贈恤)을 후히 하도록 했다는 말이 있고, 《종신록(從信錄)》에는 격식을 초월하여 증록(贈錄)한다는 말이 있으며, 《승정원일기》에는 ‘조서를 내려 포증하였다.’ 하였고, 《비변사등록》에는 ‘포증하는 조서가 나왔을 때 전례대로 등황조(謄黃詔)를 모셔오는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때 차사원을 가려 정해서 모셔오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문적들을 가지고 본다면 어찌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다만 문체(文體)가 고명(誥命)과 같지 않은 것 때문에, 뒤에 혹 ‘잘못 전달된 것’이라는 말이 있어 결국 요동 백을 증봉한 일까지 아울러 의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로 믿을 만한 책에서 고거(考據)한 것이 한두 조항만이 아니었으므로, 이제는 그 의심이 깨끗이 풀리고 이구 동성으로 그 공렬을 기리니, 충무공이 이런 사실을 안다면 또한 반드시 기쁘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증수(增修)한 기록을 가져다 보니 아직도 빠진 것이 있는 듯하다. 임 장군(林將軍)016)  의 충렬에 대해서는 그 자료를 모아 책을 만들고 이를 《충민실기(忠愍實記)》라 명명하여 간행 반포하였었다. 그러니 지금 충무공에 대해서도 의당 똑같은 예를 적용하여 편찬 간행하도록 하되, 서문(序文)은 내가 직접 써서 내려보낼 것이다. 그런데 옛 기록 가운데는 세보(世譜)가 있으나, 이번에 새로 간행하는 책에는 성과 관향을 요동 김씨(遼東金氏)로 쓸 것이다."

 

함경도 관찰사 이집두(李集斗)를 파직하였다. 이집두가 내의원(內醫院)에 원래 정해진 공납 외에 별도로 삼(蔘)을 무역해서 바쳤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2월 27일 을묘

조상진(趙尙鎭)을 공조 판서로 삼고, 조관진(趙觀鎭)을 특별히 발탁하여 공조 참의로 삼았다.

 

2월 28일 병진

전교하였다.
"이번 칙사가 나올 때 의주부 및 삼도의 각처에서 칙사를 맞이하는 의절에 대하여 대단히 세심하지 못함을 면치 못했다. 전에는 패문(牌文)이 먼저 나왔기 때문에 조정에서 이미 으레하는 일로 하였으니, 의주부 이하도 의당 규례에 따라 거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행차에는 이미 패문이 없었으니 논의할 바가 아니요, 설사 패문이 전례대로 나온다 하더라도 칙서를 반포하기 전에 지레 해서는 안된다 하여 그만둔다는 뜻으로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 규례나 지금의 규례가 이미 이러한데, 어찌 전례에 없는 일과 끌어대서는 안 될 규례를 가지고 지레 거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관서(關西) 지방에서는 이미 행하였으니, 해서(海西)나 송도(松都)의 경우도 규례를 달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홍제원(弘濟院)의 경우는 칙서의 반포가 이튿날에 있으니, 경기 감사가 입시했을 때의 연교(筵敎)에 따라 거행하라는 뜻으로 그곳을 나가는 대신이 이 경기 감사에게 분부하도록 하라. 비록 평상시에 칙사가 오는 경우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각도의 큰 고을에서 칙서를 맞이하여 의식을 행하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이니, 앞으로는 그에 대한 규례를 없애도록 하라. 이 일은 비록 칙사가 들어 알더라도 반드시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이 한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영접 도감이 대신에게 문의한 다음 초기(草記)하여 이를 그대로 등사해서 칙사를 접대하는 여러 도에 내려보내어 등록에 기재하도록 하라."

 

 

 

선전관 윤민동(尹敏東)이 아뢰었다.
"신이 지난달 12일에 표류(漂流)해 온 사람을 심양(瀋陽)에 넘겨준 사유에 대하여 이미 장계를 작성하여 올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16일에 표류해 온 사람 양재명(楊才明)이 요양주(遼陽州) 대고령(大高嶺)에서 죽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의주(義州)에 관문을 보내고 한편으로는 요양주에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19일에 요양주의 지주(知州)인 극성액(克成額)이 직접 와서 검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그를 영성(榮城)으로 돌려보내어 우리 나라에서 나이 많은 사람을 우대함과 동시에 황제의 은혜를 높이 받드는 우리 성상의 뜻을 펴고자 한다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내가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니, 심양에 보고하여 명백하게 회답을 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대고령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회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27일에 요양의 지주가 해당 지방의 향약(鄕約)인 장영(張英)에게 전령(傳令)한 문건에 ‘본주(本州)에서 풍랑을 만나 곤경에 처한 백성 양재명이 병으로 죽은 한 가지 안건에 대하여 현재 부윤(部尹)의 헌시(憲示)를 받든 결과, 조선국의 차관(差官)이 휴대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으니, 너희들이 직접 그 시신을 깊이 파묻고 표시를 해 두어서 그의 친척들이 알고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영송관(迎送官) 오성악(五成鄂)에게 신칙하기를 ‘조선국의 차관과 협동하여 풍랑을 만나 곤경에 처한 백성 왕육례(王六禮) 등 14명을 심양까지 호송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마지못해 직접 참견하여 관(棺)과 염습(斂襲)을 후하게 한 다음 깊이 파묻고 표시를 해 두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당일로 표류해 온 사람 왕육례 등 14명을 데리고 그곳을 출발하여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예부에 자문(咨文)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예부에서 말하기를 ‘귀국(貴國)이 비록 대국(大國)을 성심으로 존경하기 때문에 이런 처사가 있기까지 하였으나, 다만 전례에 의하면 표류된 사람을 봉성(鳳城)까지만 넘겨주었는데, 이번에는 본성(本省)까지 왔으니, 참으로 감복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니, 본성에 그대로 넘겨주고 자문만 가지고 서울로 가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역학(譯學) 고사신(高師信)을 시켜 예부 원외랑 부성(傅成)에게 말하기를 ‘상국(上國)의 백성이 우리 나라에 표류해 온 경우에 대해서는 으레 봉성으로 넘겨주었는데, 이번에는 표류된 이 사람들이 나이가 많을 뿐만이 아니라, 실은 대국을 섬기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다. 불행히도 양재명은 중도에서 죽었으나, 그래도 왕육례와 석진공(石進功) 등이 있으니, 나이 많은 사람을 우대하는 도리에 있어 전례에 따라서 그대로 넘겨버릴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차관(差官)으로서 직접 황성(皇城)까지 영부(領赴)할 일로 도경(都京)의 예부에 자문을 이미 올렸고 보면, 이대로 귀성(貴城)에 넘겨주는 것은 사리에 온당치 못하다는 뜻으로 사유를 간곡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부성(傅成)이 말하기를 ‘이 일은 혼자서 단정하기 어려우니, 장군 아문(將軍衙門)에 보고하여 의결(議決)해야겠다.’고 하였는데, 그 후 각 아문의 당상관과 낭관들이 여러 날 모여 의논한 결과, 올 1월 4일에 판시(辦示)하기를, ‘대국을 섬기는 귀국의 성의가 비록 여기에까지 이르렀지만, 우리들로서는 전례에 따라서 할 수밖에 없다. 또 양재명은 이미 죽었으니, 그 나머지 사람들 중에 비록 나이가 60, 70에 이른 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황제의 은혜를 입을 자가 아니니, 서상원(徐上元)의 예에 따라 본성에 그대로 넘겨주고, 차관만 도경으로 가도록 허락한다. 또 이 뜻으로 도경의 예부에 자문을 보냈으니, 귀국에 회자(回咨)하는 공문은 또한 심양에서 발부하여 내보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더이상 대항하기 어려운 형편이기에 표류해 온 사람 14명을 장군 아문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비변사의 관문에 따라 표류된 사람들의 여비(旅費)를 노정(路程)에 따라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심양에서 산동성(山東省) 등주부(登州府) 영성현(榮城縣)까지가 3천 3백 리인데, 이들 가운데는 60, 70세 노인들이 아직도 있어 길을 빨리 걷기가 어려울 듯하였으므로, 하루에 50리씩 가는 것으로 평균을 잡아서 60일 동안의 여비를 마련하자고 보니, 한 사람 앞에 은(銀) 9냥 3전씩이면 부족할 염려는 없을 듯하나, 혹 중도에서 지체되는 일이 있을까봐 은 7전씩을 각각 더 주어 뜻밖의 비용에 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비변사의 관문에는 또 사신과 자리를 함께 해서 내주라고 하였으나, 사신은 이미 도경으로 갔기 때문에 그 일을 함께 거행할 수가 없어서 신이 혼자서 결정하여 처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직접 표류된 사람들이 거처하고 있는 곳에 가서 여비로 주는 은과 환약 따위를 아주 친절하게 전해 주면서 ‘고향으로 잘 돌아가라.’는 성상의 뜻으로 말해 주었더니, 그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동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두 손을 마주하여 비비면서 축원하기를 ‘조선 국왕의 성스러운 덕과 높은 은혜는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워서 뼈에 새겨도 갚기 어렵습니다. 다만 고향에 돌아가서 날마다 향을 피우고 하늘에 축수할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17일 신시에 황성에 도착하여 즉시 예부에 자문을 올리고 인하여 남북관(南北館)에 주접(住接)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2월 7일에는 예부에 가서 상사(賞賜)를 받고 회자문(回咨文) 6통도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8일에는 동지사(冬至使)의 일행과 동시에 북경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심양 장군이 도경의 예부에 보고한 자문은 베껴써서 정원에 올려보냈습니다. 또 삼가 내각(內閣)의 관문에 따라 《주자대전(朱子大全)》 한 질과 《후한서(後漢書)》 두 질을 동지 부사 김면주(金勉柱)에게서 받아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동지사 일행 가운데 수역(首譯) 김윤서(金倫瑞)는 비변사의 관문에 따라 잡아갔으므로, 장계를 작성하여 동지사의 선래 역관(先來譯官) 조진규(趙鎭奎)에게 봉해 주어서 올려보냅니다."
2월 29일 정사

북원(北苑)에서 재숙하였다.


 

2월 30일 무오

황단(皇壇)에서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날에 예를 거행하니 감개 무량하기가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명나라를 높이는 일로써 전교한 것과 어제(御製)한 글에 관계된 모든 것들을 각신과 승지가 함께 상고해 내어 간행도 하고 게시판에 걸기도 해서 《춘추》의 대의를 밝히고자 하는 나의 고심을 표명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총병(摠兵) 이여매(李如梅)의 후손이 옛날 기미년 심하(深河)의 전쟁 때에 그곳을 탈출하여 우리 나라에 왔었다. 그런데 마침 옛 기미년을 거듭 만나니 감탄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그의 후손은 모두가 시골에 있는데, 그의 봉사손인 전 총관(摠管) 이종윤(李宗胤)은 아장(亞將)이 되어 비록 서울에 있으나 이미 늙고 병들었다. 그 밖의 자손들은 오래도록 등용되지 못하였으니, 벼슬을 시킬 만하거나 혹은 군문(軍門)에 부쳐서 무예를 익혀 과거를 보일 만한 사람을 이조·병조로 하여금 찾아내서 초기(草記)하여 올리도록 하라. 어영 대장도 또한 그들을 찾아내서 보고하라. 총병의 사당에는 유수(留守)를 보내서 치제하되, 제문은 의당 내가 직접 지을 것이니, 4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향축(香祝)은 오늘 내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영원 백(寧遠伯)의 영당(影堂)에도 똑같이 치제하도록 하라. 이 뜻을 유수에게 하유하라. 그 충렬(忠烈)을 생각하니 시호가 그 사람과 같았는지라, 이때에 느껴지는 감회가 더욱 남다르다. 옛날 선조(先朝) 때에 《숙묘보감(肅廟寶鑑)》 가운데 실린 성교(聖敎)를 인용하여 또한 하교하신 말씀이 있다. 그런데 충렬공 황일호(黃一皓)의 집안에 벼슬하는 사람이 근래에는 매우 미약해졌으므로, 내가 일찍이 또한 승전(承傳)을 통하여 이조에 분부하도록 하였으니, 속히 등용하도록 하라."

 

윤사국(尹師國)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서매수(徐邁修)를 우참찬으로, 구익을 함경도 관찰사로, 김사목(金思穆)을 형조 판서로, 이익모(李翊模)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부원수 겸 평안도 절도사 원임 포도 대장으로 우의정에 증직되고 시호가 양의공(襄毅公)인 용강현(龍岡縣) 사람 김경서(金景瑞)가 요동 백(遼東伯)과 함께 요동으로 건너간 이후의 사적 가운데는 그냥 묻혀지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한(漢)나라 이릉(李陵)처럼 적에게 투항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나중에는 송(宋)나라 왕륜(王倫)이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들에게 굴하지 않고 죽은 것처럼 절의를 지켰음을 알게 되었다. 6, 7년 동안이나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가, 이 밝은 천지에 그의 지극한 충성이 결국 드러나게 된 것은 실로 이확(李廓)·나덕헌(羅德憲) 등의 일과 같은데, 그 죽음을 각오한 자취를 상고해 보면 종용한데다 비분 강개함을 겸하였던바, 원통하고 억울함을 격렬하고도 절실하게 표현한 그의 유서(遺書)와 밀소(密疏)는 사람으로 하여금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한다. 고 재상 민진원(閔鎭遠)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그의 유사(遺事)를 엮은 것이 지금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이제 다시 기미년을 만나서 또 북원에 배례를 하고 나니, 거록(鉅鹿)의 일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넓적다리를 치면서 길이 탄식을 하게 된다. 한성부로 하여금 그의 후손을 찾아내서 보고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곳도 똑같이 날짜를 가려서 치제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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