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기미
서유대(徐有大)를 훈련 대장으로, 권유(權𥙿)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3월 1일 기미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이번 칙사의 행차 때에 만부(灣府)와 삼도(三道)의 각처에서 칙사를 맞이하는 의절(儀節)을 너무나도 자세히 살피지 않고 소홀하게 하였다. 이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 대신에게 물어 그 내용을 대략 적어 아뢰고 곧바로 이를 등서하여 칙사를 지대(支待)하는 여러 도에 공문을 보내 그들로 하여금 등록(謄錄)에 기록해 두게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좌의정 이병모는 아뢰기를 ‘칙서를 반포하기 전에 여러 도의 큰 고을에서 칙서를 맞이하는 예를 행함에 있어 과연 사사로이 자기들 마음대로 행한 잘못이 있는데, 잘못된 규례를 자꾸만 서로 답습하면서도 그것이 예가 아닌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들고 보니, 매우 정당하여 비로소 그 뜻을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신은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심환지는 아뢰기를 ‘칙서를 맞이하는 의절(儀節)을 이미 많이 바로잡아 놓았는데, 만부 이상의 여러 고을에서 행해서는 안 될 잘못된 규례를 행하였으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성상의 하교가 지극히 정당하고 신은 동료 정승의 의논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의 의논에 따라 법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일 경신
모화관(慕華館)에 행행하여 칙서를 맞이하고, 다시 경희궁(慶熙宮)으로 돌아와서 숭정전(崇政殿)에서 칙서를 반포하였다.
칙서는 다음과 같다.
"봉천 승운 태상 황제(奉天承運太上皇帝)는 고유한다.
짐이 생각건대, 제왕이 크게 천명에 응해서 장구한 복을 누리려면 반드시 조심하고 밝게 섬기는 정성이 하늘과 조금의 간격도 없이 일치되게 하여야 하니, 그런 다음에야 그 덕이 바르고 영원히 많은 복을 편안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삼가고 조심하며 게으르거나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아 하루를 제왕의 지위에 있으면 그 하루라도 하늘의 마음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태평한 시대를 보존하고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과 처음처럼 끝맺음을 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참으로 알아야 한다.
짐은 위로 하늘의 크나큰 도우심과 열성께서 법도를 물려주신 것을 힘입어 어릴 적부터 황조(皇祖)에게서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황고(皇考)께서는 태자로 삼아 이 나라를 맡겨주셨다. 그리하여 즉위한 이래로 날마다 더욱 삼가하였으며, 태평 세상이 계속 이어지는 때를 만났지만 감히 풍요하다는 생각이나 안락하게 여기는 마음을 지니지 않았다. 인군은 어떠한 덕을 지녀야 할까 생각하니, 오직 하늘을 공경하고 열조를 본받으며 정사에 부지런히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이 몇 가지 일들은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었다. 수십 년 이래로 근엄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더욱 정성을 쏟아 매번 교외의 단(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를 당하면 몸소 참석하여 정성을 다하였고 제사 물품을 준비하는 데에 있어서는 빠짐없이 매우 정갈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이가 많다고 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거나 조금이라도 한가하고 편안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중간에 네번 성경(盛京)에 가서 공손히 선조의 능묘를 참배하고 길이 창업의 어려움을 생각하니, 수성(守成)의 어려움이 더욱 절실하였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만기(萬機)를 몸소 잡고 처결함에 있어 피곤한 것도 잊었고, 신료들을 인대(引對)하고 주초(奏草)에 비답을 내리느라 한가한 날이 없었다. 그리고 각 성(省)이 비가 많이 왔는지 가뭄이 들었는지 풍년이 들었는지 흉년이 들었는지 걱정하는 생각이 늘 마음 속에 매여 있었다. 모두 여섯 번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을 순행하였고, 황하의 공사하는 곳과 바다의 제방을 쌓는 곳을 가서 보았다. 백성들의 식량에 대해서 어린아이 보살피듯이 염려하여 천하의 전량(錢粮)은 다섯 번, 조량(漕粮)은 세 번, 미납된 조세는 전 지역에 걸쳐 두 번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그 사이 홍수나 한재 그리고 특정한 지역의 재해를 만나면 세를 견감해 주고 진휼해 주기를 빈번하게 하였는데, 그 수량이 억만금에 밑돌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직 백성들이 부유하게 잘 살고 다스림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선조의 보살핌과 도움에 힘입어 사해 안이 태평하게 되었고 판도가 넓어지게 되었다. 이리(伊犂)017) 를 평정하니 회부(回部)018) 와 대금천(大金川)·소금천(小金川)·면전(緬甸)019) 이 손님으로 왔고, 안남(安南)이 신하로 복종하였다. 그리고 곽이객(郭爾喀)까지 평정하자 바다 건너의 지역까지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정성을 바쳤다. 또한 스스로 못된 짓을 한 자들은 모두 멸망을 시켜버렸다. 무릇 이렇게 크나큰 공을 계속 아뢸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할 수 없어서 군대를 쓴 것이지 일부러 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지위에 있은 지 오래되어 여러 가지 일을 많이 겪게 되자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인하여 날로 절실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감히 이제는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지만 차츰 자만심을 품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제위에 오르던 초기에는 상제에게 묵묵히 기도나 열심히 하면 하늘이 보살펴 명해 줄 것만 같이 여겼다. 이제 재위에 있은 지 60년이나 되었으니, 의당 사자(嗣子)에게 제위(帝位)를 전하여 감히 황조(皇祖)가 제위에 있은 연수를 넘지 않도록 해야 되었다. 그때 짐의 나이는 바야흐로 25세 였었다. 그 당시의 생각에 60년이란 세월은 아득하게 길어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수였다. 그런데 하늘의 자애롭고 도타운 복을 입어 건강이 좋아 나이가 90살이 되고 직접 5대를 보게 되었다. 맡손자가 환갑이 되고 제위에 오른 원년이 되었으니, 이는 마침내 애당초의 바람에 부합하게 된 것이다. 가슴을 어루만지며 두루 살펴보니 기쁜 감정이 교차되어 일어난다.
이에 병진년 정월 초하루 친히 옥새를 황제에게 주고 스스로는 태상황(太上皇)이라고 칭하여 마침내 정월 초하루 아침에 하늘에 고하는 본뜻을 이루었다. 이는 애당초 스스로 한가하고 편안하게 지내며 궁궐에 점잖게 의복이나 차려입고 있으면서 말년이나 잘 봉양하며 지내려는 계획 때문에 한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제위를 물려준 뒤에 날마다 친히 정사를 가르쳐 주었다. 대개 스스로 헤아려 보니, 스스로의 정력이 아직 게으름을 피울 정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니 만약 한가하게 지내기나 하면서 몸이나 잘 봉양하기만을 일삼는다면 이는 천조(天祖)의 깊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감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정사를 가르쳐 주기 시작한 이래로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 이제 어언 3년이 되었다. 근래에는 사천성(泗川省)의 교비(敎匪)를 잡는 일 때문에 부지런히 계획을 세우느라 날마다 매우 바빴다. 작전을 개시하자 역적의 두목과 거두들 그리고 각종 죄를 범한 자들이 줄줄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달아나 숨은 많은 무리들도 며칠 안 가 사로잡을 것이니, 조만간 공을 세우게 될 것이다. 또한 근래에 천하에 자주 풍년이 들고 상서롭고 좋은 일들이 생기니, 나의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다. 그러나 어려울 때를 생각하고 쉬울 때에 미리 대비하는 마음을 놓은 적은 실로 하루도 없었다. 오는 경신년은 짐의 나이 아흔 살이 되는 해이다. 지난 겨울에 황제가 왕과 공(公) 그리고 내외의 대신들을 거느리고 경축하는 의식을 거행할 것을 미리 청하였는데, 마음이나 글이 간절한 것이 실로 지성에서 나왔으므로 이미 윤허한다는 칙지(勅旨)를 내렸다. 대저 짐은 나이가 90이 되었고 여러 가지 복을 고루 받았다. 황제가 만국이 기뻐하는 것을 합치고 억조 백성들이 축원하는 것을 펴려 하는 것은 진실로 자식된 입장에서나 신하된 입장에서나 무궁한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짐의 본 마음은 법도에 넘게 사치스럽게 차리거나 지나치게 수고롭게 하고 허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매양 홍범(洪範)에서 고종명(考終命)020) 을 다섯가지 복 가운데 하나로 삼은 것을 생각하였다. 예로부터 제왕으로 장수를 누린 사람이 사책(史冊)에 여기저기 보이지만 끝내는 결국 다 죽었다. 그리고 인생이란 오래 살아야 백년이다. 지금 짐은 89살이 되었는데 1백 살을 채우는 것도 순식간의 일이다. 짐은 오직 장엄하고 공경하는 자세로 날로 힘쓰고 자신을 수양하면서 기다리려 할 뿐이다. 어찌 아직도 부족하게 여겨서 사치스럽게 바라기를 끝없이 하겠는가. 짐은 몸이 평소 강한 데다가 질병도 없다. 작년 겨울 납일(臘日)에 우연히 찬바람을 쐬여 감기에 걸렸었으나 조리하여 곧 나았다. 그러나 정력은 조금 전만 못하다. 그래도 새해 정월 초하루 아침에 건청궁(乾淸宮)에 임어하여 하례를 받았다. 요즈음에는 마시고 먹는 것이 점점 줄어들어 보고 듣는 것이 평상시와 같지 않고 늙은 티도 점점 많아졌다. 이에 황제는 효성을 다해 극진히 보살피면서 병이 낫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짐은 나이가 너무 많아 의약(醫藥)으로 효험을 보지 못하고 병세가 점점 더 심해질 것만 같다. 이에 특별히 수십 년에 걸친 짐의 재위기간 동안에 조심조심하여 천조(天祖)의 은혜와 복을 받은 연유를 들어 길이 후손에게 끼쳐주려 한다. 황제는 총명하고 어질고 효성스러우니 깊이 짐의 마음을 체득해서 반드시 짐과 같은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적임자를 제대로 얻어 천하를 맡기게 되었으니, 실로 매우 위로가 된다. 내외의 대소 신공(臣工)들은 각기 자기의 직책을 부지런히 힘쓰고 각자의 마음을 순수하게 가져 황제가 지치(至治)의 정치를 이룩하도록 도와 억조 창생들이 모두 태평 성대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바란다. 짐은 하늘에 계신 열조(列祖)의 영령을 뒤따라 가도 아무 유감이 없다. 상제(喪制)에 있어서는 모두 옛 법도를 따르고 27일만에 상복을 벗기 바란다. 천지 종묘 사직의 제사를 오랫동안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온갖 신들에게 지내는 각종 제사들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이에 특별히 고하는 것이니, 의당 각각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3월 2일 경신
상이 상칙사(上勅使)와 부칙사를 접견하였다.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칙서를 선포하는 날, 곧이어 성복례(成服禮)를 행하고 신들이 나아가 참여하겠다는 뜻을 차비 역관으로 하여금 들어가 양 칙사에게 말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양 칙사의 통관(通官)이 역관에게 묻기를 ‘오늘 성복을 하면 며칠만에 벗는가?’ 하기에, 역관이 3일 뒤에 벗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묻기를 ‘중국은 27일만에 벗는데, 어찌하여 3일만에 벗는가?’ 하기에, 역관이 답하기를 ‘하루를 일년으로 치는 것이 전례로 되어 있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태상황(太上皇)의 은혜와 보살핌이 자별하였는데, 3일만에 벗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기에, 역관이 답하기를 ‘이는 순치(順治) 때부터 이와 같이 행한 것이다.’ 하니, 칙사가 ‘전례가 각기 다르니 어쩔 수 없겠다.’ 하였습니다. 통관이 또 역관에게 묻기를 ‘3일만에 상복을 벗으면 바로 흉배(胸褙)와 길복(吉服)을 착용하는가?’ 하고 묻기에, 역관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예제(禮制)가 본시 이와 같다.’고 하니,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비단 숭덕(崇德) 이후의 전례가 이와 같았을 뿐만이 아니다. 한(漢)나라의 제도에 내복제후(內服諸侯)의 거림(擧臨)도 3일을 넘지 않았다. 예제(禮制)에 있는 것을 감히 변경할 수 없다는 뜻을 다시 역관을 시켜 말하는 계제에 전하게끔 하라."
하였다.
3월 3일 신유
태평관(太平館)에 행행하여 다례를 행하고 경희궁(慶熙宮)에 환어하였다.
김사목(金思穆)을 반송사(伴送使)로 삼았다.
3월 4일 임술
하교하였다.
"병신년 이후 24년 동안 이 대궐에 와서 이 날을 지날 때마다 어느 것을 보든지 부모님을 추모하는 생각이 솟구쳐 올라 어떻게 억누를 수가 없다. 병신년의 처분은 바로 선왕의 뜻을 밝힌 것이었고, 오늘 용서해 석방하려고 하는 것도 선왕의 뜻을 몸받아 하는 것이다. 만약 선조(先朝)의 성심(聖心)을 자기 마음으로 삼아 이때에 이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면 이 일에 대해 조정의 신하들도 반드시 알아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니, 어찌 혹 다른 말이 있겠는가. 서울 집에 둔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진위 여부가 애매 모호한데 죄안(罪案)은 아직도 있기 때문에 오늘 반드시 사유(赦宥)하려고 하는 것이다. 정치달 처(鄭致達妻)의 죄명을 없애고 특별히 완전히 용서하여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펴는 방도로 삼겠다."
좌의정 이병모(李秉模), 우의정 심환지(沈煥之)가 경(卿)과 재신들을 거느리고 면대하기를 요청하니, 하교하기를,
"정원이 아직도 정처를 용서하여 석방하라는 전교를 반포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정치달 처에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전에 받아들이지 말라는 칙교를 내렸는데, 어떻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경 등은 전교를 보았는가? 대의를 위한다면 선왕의 뜻을 밝히고, 사은(私恩)을 펴려 한다면 선왕의 뜻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때에는 부득불 그렇게 했던 것이고, 오늘에 있어서는 불가불 이렇게 해야 하니, 때에 따라 알맞게 하는 의리가 크다 하겠다. 전에는 그때의 상황 때문에 그렇게 하였고, 지금은 또 현재의 상황 때문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감히 내 자신의 사사로운 견해를 펴서 그 사이에서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겠는가. 한결같이 선왕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고, 또 반드시 국조(國朝)의 이미 시행한 고사에 항상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이다.
옛날 우리 효묘(孝廟)가 김세룡(金世龍)의 처를 처리할 때에 처음에는 절도(絶島)에 두었다가 한참 지난 뒤에는 반드시 불러다가 서울에 두었으며, 그 뒤에 곧바로 또 완전히 용서해 줄 것을 명하였다. 이것이 어찌 전후의 처분이 달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때에 따라 합당하게 한다는 것일 뿐이다. 오늘의 이 하교에 대해서 어느 누가 당연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경 등은 어서 속히 물러가도록 하라. 정처가 서울의 집에 있은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그렇다면 곧바로 이때에 이러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정처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시행하는 법이다. 경들도 또한 반드시 다시 하유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것이다."
하였다.
시임 및 원임 각신이 청대하니, 하교하기를,
"대신이 청대한 데 대해 내린 비답을 상세히 볼 것이다."
하였다. 여러 옥당의 신하들이 청대하니, 각신에게 내린 비답을 보라고 하교하였다. 대사간 송전(宋銓)이 청대하니, 옥당에 내린 비답을 보라고 하교하였다. 삼사와 여러 신하들이 청대하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써서 들이라고 하교하였다.
시임 및 원임 각신이 상차하기를,
"병신년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종사가 거의 위태롭게 되었다가 편안하게 되고, 윤리와 기강이 장차 실추될 지경에 이르렀다가 펴지게 되어 온 나라의 만 백성들이 금수가 되지 않은 것은 바로 한 부의 《명의록(明義錄)》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의록》 가운데 역적의 괴수이며 화의 수모자는 바로 정치달 처(鄭致達妻)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점점 멀어지자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예사로운 것이 되어져 대각에서 올린 소장들도 헌 종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갑자기 이렇게 매우 비상한 명이 내리고, 심지어는 ‘서울 집에 둔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는 하교까지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더욱 신들이 충성스럽지 못하고 정성스럽지 못해서 일어난 것이니, 만번 죽어도 부족한 죄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역적의 괴수이며 화의 주모자인 정치달 처(鄭致達妻) 같은 자에 대해서 용서한다는 말을 의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궁궐이기 때문에 분통스러움이 더욱 간절하고, 이 날이기 때문에 애통박절한 심정이 갑절이나 더합니다. 신 등이 알고 있는 것은 단지 《명의록》일 뿐입니다. 그래서 머뭇거릴 겨를도 없이 서로 연명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내리신 명을 거두고 전후로 삼사가 청한 것에 대해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궁궐에서 이 날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의거한 바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다시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승지 이서구(李書九)·이면긍(李勉兢)·김계락(金啓洛)·정상우(鄭尙愚) 등이 상소하기를,
"온갖 요사스럽고 못된 짓을 한 정치달 처(鄭致達妻)를 지금까지 용서해 천지 사이에 살게 하였는데, 오늘 또 이렇게 놀랍고 황망한 일이 있게 될 것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 등이 우리 전하를 섬기는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이 한 부의 《명의록》입니다. 지금 만약 이 하교를 받들어 반포한다면, 이는 사람 마음이 없는 것이고 신하로서의 분수를 망각한 행동이니,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차마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면대를 요청하는 계사가 도로 내려오고 대궐에서 엎드려 간곡하게 호소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해 저희들의 충정이 억눌리고 막혔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되돌려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시고 바로 삼사의 계청을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교로 대신들의 청대에 대해 내린 비답을 완전히 베껴서 내리게 하였는데, 이것이 돌려보내느냐 마느냐 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였다.
남소(南所)의 위장(衛將)을 가승지로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이병모, 우의정 심환지가 경과 재신들을 거느리고 빈청에서 모여 아뢰기를,
"한 부의 《명의록》이 아직 훼손되거나 없어지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온갖 죄를 짓고 악행을 한 정처는 결코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쉬고 살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조의 영령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임하고 계시고 귀신들이 주벌을 가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비록 용서해 주고자 하시나 장차 한 부의 《명의록》을 어느 곳에 두려 하십니까. 이 궁궐에 와서 이 때를 당하여 성상의 사모하는 마음을 펴고 성상의 뜻을 붙일 것은 진실로 더욱 의리를 드러내어 우리 선대왕이 종사를 위하여 난적(亂賊)을 징벌한 성스러운 덕과 지극한 뜻을 밝히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크나큰 악인을 완전히 용서해 주는 것으로 선왕의 뜻을 체념하는 도를 삼고자 하시니, 이것이 어찌 신들이 평소에 전하에게 우러러 바라던 것이겠습니까. 길이 잘했다는 좋은 명성을 남기는 것을 전하께서는 신들로 하여금 잊도록 하게 하려는 것입니까. 신하로서 이것을 잊는다면 신하가 될 수 없고, 인간으로서 이것을 잊는다면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차마 온 나라의 신민들을 의리도 잊고 원수도 잊는 지경에 내버려 두려 하십니까.
아, 저번에 비상한 처분이 있은 뒤, 아직까지도 신들이 머리를 부수고 피를 흘려 그 연고를 분명하게 청하지 못한 것은 죄가 하늘에 통했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 지금 완전히 용서하라는 명이 내린 뒤에 또 다시 서로 돌아보며 이 말이 새어나갈까 두려워할 뿐 성상의 마음을 빨리 돌릴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신 등은 실로 아무 것도 도와드리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 선대왕의 해와 달과 같은 밝음이 드러나지 않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만일 전하께서 이에까지 생각이 미치신다면 반드시 신 등이 말을 다하기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신 등이 계사를 만들어 올리려 할 즈음에 면대를 요청하는 계사에 대해 내리신 비지(批旨)를 보니, 하교하신 말씀이 구구절절 간곡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효묘조(孝廟朝) 때에 김세룡(金世龍)의 처를 처리한 고사를 인용하기까지 하였는데, 신들은 삼가 매우 의혹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세룡 처의 죄가 정치달 처(鄭致達妻)의 죄와 경중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김세룡 처의 죄는 자기 어머니에게서 근본했고, 정치달 처의 죄는 죄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 처지는 같은 것 같지만 그 죄는 실로 현격하게 다릅니다. 성조(聖祖)께서 이와 같이 처리하신 것은 진실로 만대가 지나도록 우러러 흠모할 일이지만 전하께서 이와 같이 처리하고자 하시는 것은 신들이 죽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삼가 신들은 이러한 전례를 오늘날에 끌어다 쓰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인의 때에 따라 알맞게 조처하는 의리는 귀한 점이 옛날에 빠지지 않고 오늘날에 행할 수 있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옛날에서 구해보아도 딱 들어맞지 않고 지금에 놓아보면 의리가 꽉 막히고 난적(亂賊)이 은밀하게 싹터 나오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내리신 명을 거두시고, 대간들이 청한 것을 특별히 윤허하여 한 부의 《명의록》으로 하여금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천하와 후세로 하여금 할 말이 있게끔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빈청이 다시 아뢰고, 세 번째 아뢰고, 네 번째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송전(宋銓), 응교 홍낙유(洪樂游), 장령 현중조(玄重祚)·정한(鄭澣), 지평 이동우(李東宇)·남혜관(南惠寬), 교리 윤우열(尹羽烈)·조윤수(曺允遂), 부교리 이정운(李貞運)·남이익(南履翼), 정언 윤함(尹涵)·이경삼(李敬參), 수찬 한용탁(韓用鐸), 부수찬 박윤수(朴崙壽)·윤익렬(尹益烈)이 품고 있던 생각을 아뢰어, 정치달 처를 완전히 석방하라고 한 명을 중지시킬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삼사가 다시 품고 있던 생각을 아뢰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기는 하나 이러한 때에 번거롭게 수응하게 하였으니, 어찌 뻔뻔스레 직임에 있을 수 있겠는가. 체차한다."
하였다.
원임 직제학 서정수(徐鼎修), 직제학 서용보(徐龍輔)·이만수(李晩秀), 원임 직각(原任直閣) 남공철(南公轍)·서영보(徐榮輔)·김조순(金祖淳), 검교 직각(檢校直閣) 심상규(沈象奎)가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정치달 처를 완전히 용서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 궁궐에서 이날 이러한 조처를 한 것은 근거할 바가 있는 일이라고 이를 만하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다시 차자를 올렸는데, 윤허하지 않고 하교하기를,
"합문에 있던 삼사의 관원들은 이미 체차하였다. 각신(閣臣)들도 모두 해임하라."
하였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거듭 아뢰니, 비답하기를,
"깊은 밤에 정청을 하는 것은 유독 나라의 체모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의 체모는 오히려 부수적인 일이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나로 하여금 이러한 수응을 하게 하는가. 경들은 도무지 신하의 분수를 알지 못하고 있다. 신하의 분수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나를 섬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또 시끄럽게 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전 승지 이서구(李書九) 등과 상호군(上護軍) 정민시(鄭民始),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 판의금 조상진(趙尙鎭) 등과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 사간 유운우(柳雲羽)가 교대로 소장을 올려 정치달 처를 완전히 용서해 주라는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부응교 김희순(金羲淳), 수찬 김이재(金履載)가 상소하기를,
"온갖 요사스럽고 못된 짓을 한 정치달 처가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는 것도 이미 실형(失刑)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완전히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삼가 전교를 보니, 한편으로는 선왕의 뜻을 밝힌다고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선왕의 뜻을 체념한다고 하여 은혜와 의리가 함께 행해지고 말뜻이 간절하였으니, 신들이 비록 매우 우매하지만 어찌 성상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우러러 인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점이 있습니다. 저 역적의 크나큰 죄는 종사와 신인(神人)들이 다 함께 분해하고 미워하는 바이니, 하늘에 계신 우리 선대왕의 영령도 반드시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끊어버리고 베어 없앨 것입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체념하고 선왕의 뜻을 밝히는 것은 오직 의대로만 하고 사사로운 은혜 때문에 그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는 데에 달려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밝히는 것이 바로 체념하는 것입니다. 체념하고 밝히는 것을 나누어 둘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뭇 사람들이 청하는 것을 윤허하여 특별히 용서하라는 명을 내린 것을 도로 중지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상이 의금부의 도류안(徒流案)을 가지고 들어가 정치달 처의 죄명을 빼내 둔 뒤에 용서하여 석방한다는 글을 내리고, 그 문서는 효주(爻周)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제는 전지(傳旨)를 받들어서도 안 되고 초기(草記)를 해서도 안 되니, 완전히 끝났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전 삼사의 여러 신하들과 각신들이 연명으로 상소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3월 5일 계해
상이 경희궁(慶熙宮)에 있었다. 약원(藥院)과 내각이 문안드릴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시임·원임 각신과 대호군 이치중(李致中) 등과 판중추부사 김화진(金華鎭) 등과 부호군 윤행원(尹行元) 등과 지돈녕부사 김재찬(金載瓚),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이 번갈아 가며 소장을 올려 정치달 처(鄭致達妻)를 용서하여 석방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이병모, 우의정 심환지가 의금부에서 명이 내리기를 기다렸는데, 하유하기를,
"오늘이 어찌 수응할 때이며, 경들도 어찌 이러한 때에 번거롭게 떠들어 대는가. 명을 기다리지 말라. 좌상은 약원에 사진(仕進)한 뒤에 성기(省記)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6일 갑자
상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서를 보내고 창덕궁(昌德宮)으로 환궁하였다.
3월 7일 을축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비지(批旨)에서 다 말하지 못한 뜻을 대략 경 등에게 말하겠다. 병신년의 처분은 대의까지 따지지 않더라도 세신(世臣)을 보호하려는 뜻에서 부득불 이렇게 한 것이다. 우리 선대왕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으로써도 미처 밝혀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미처 처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그의 흉악한 음모가 환하게 드러난 뒤였다면 반드시 의당 대의로 결단해서 공법(公法)에 따라 처리했을 것이다. 내가 오늘날 내린 처분은 바로 선왕의 마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저 사람이 비록 부녀자이기는 하지만 선왕께서 총애하였던 사람이다. 전에는 동기(同氣)였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손윗 사람에 속한다. 총애하였던 것은 비록 사사로운 것에 가깝지만 전에 동기였던 정을 생각하고 과인에게는 손윗 사람에 속하는 의리를 편다면 오늘날의 처분은 또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난번 비지 가운데에서 김세룡(金世龍)의 처를 가지고 비유해서 말하였는데,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김세룡의 처는 단지 연좌된 것으로 이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실제를 따져보면 또한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기축년 5월 인묘의 병세가 아주 위독하였을 때에, 조녀(趙女)가 장렬 대비(莊烈大妃)의 앞에서 필묵을 가지고 한 자 써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의 음모는 헤아리기 어려워 종사의 안위는 터럭끝만큼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한 때였다. 이 때문에 효묘께서 조녀를 대조전(大造殿) 월대(月臺) 아래로 밀어 내려뜨려서 그로 하여금 흉악한 계책을 부릴 수 없게 하였다. 그러니 조녀의 죄는 어떻다 하겠는가. 그런데 김세룡의 처는 실로 그 사이에 참여하여 관계된 점이 있으니, 단지 연좌될 정도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처분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세룡의 처와는 차이가 난다. 사리로 말한다면 어지러움의 싹이 아직 막아지지 않아 걱정되는 점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내가 어찌 사사로운 은혜 때문에 공법을 막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우려스럽다고 말할 만한 점이 없으니, 그는 바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있는 일개 늙은 부녀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지금 석방해 주더라도 안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을묘년 도안(徒案)을 효주(爻周)할 때에 경들이 과연 그를 도로 둘 것을 강력하게 청하였기 때문에 너무 견고하게 거부하고 싶지 않은 뜻에서 잠시 성 밖으로 수레에 태워 보내게 했다가 즉시 도로 서울집으로 들어오게 하였던 것이다. 만약 김세룡 처의 고사를 가지고 말한다면 용서하여 절도에서 돌아온 뒤로 사단(事端)이 조금 안정되고 조정이 공고하였으며 또한 조금도 염려스러운 점이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 조정의 신하들도 단지 공법(公法)에 따라 쟁론하였을 뿐 너무 심하게 논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갑자기 완전히 석방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효묘께서는 그를 경희궁의 비변사에 두게 하셨다. 그때 조정의 신하들도 어찌 이를 알지 못했을 리가 있었겠는가. 위에서는 반드시 곡진하게 보존하려고 하였고 아래에서는 너무 심하게 간쟁하지 않아 이렇게 융통성 있는 조처를 한 것이 구차한 데에 가까운 것 같지만 이것은 성실하지 못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의 눈과 귀에 익숙해지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은혜를 온전히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일은 바로 이것과 서로 비슷하다고 하겠다. 처음에는 앞으로 아무 문제가 없게 될 때를 기다려 이러한 처분을 내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선왕의 휘일(諱日)을 하루 앞두고 병신년 뒤로는 처음으로 선왕께서 승하하신 대궐에 와서 흥화문(興化門)에서부터 숭정전(崇政殿)까지 오는데 눈에 보이는 것마다 돌이켜 생각이 나서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창덕궁(昌德宮)의 영모당(永慕堂)은 바로 인원 성후(仁元聖后)께서 승하하신 곳으로 선조(先朝)께서 항상 이 당에 임어하시어 매우 간절하게 추모하시곤 하였다. 나도 이번 행차에서 집경당(集慶堂) 근처에 한번 가지 못했는데, 이것은 대개 지난날을 추모하여 솟아오르는 감회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고 정성을 펼래야 펼 곳이 없고 사모하는 마음을 붙일래야 붙일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것보다 만배나 더한 것이 있더라도 조금이나마 이 날을 표할 만한 것이 있다면 하겠다.
그리고 또 생각하니, 그 당시에 저와 같이 처분한 것과 오늘날 이와 같이 처분한 것은 때의 형편에 따라 알맞게 처리한 것일 뿐만이 아니다. 비록 은혜를 끊었던 선조(先朝)일지라도 마음에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비록 그러나 이것은 《명의록》 책을 펴면 처음에 나오는 의리이니, 경들이 반드시 이를 받들어 따르고 싶지 않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르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서울 집에 들어와 거처한 것이 이미 을묘년에 있었던 일이고, 의금부의 도류안(徒流案)도 전에 이미 효주(爻周)하였다. 그러니 완전히 석방하는 것의 여부에 대해서 다시 논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단지 글로 써서 조지(朝紙)에 반포한 것이 비로소 오늘에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쟁집하는 것이다. 지금 비록 완전히 석방하라는 하교를 도로 거두더라도 완전히 석방한 것은 그냥 그대로일 것이며, 지금 비록 도성 밖으로 도로 보내더라도 결국에는 의당 들어와 거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에 대해 쟁집하는 것이 어찌 도리어 정성스럽지 못한 데에 귀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와 같이 다 죽게 된 사람을 서울집에 데려다 두는 것이 또한 참으로 무엇이 방애될 것이 있는가.
김세룡 처의 경우에는 그 뒤에 그의 족속과 잔당들이 또 역안(逆案)에 관계된 자가 있었지만 오히려 한결같이 용서해 주었다. 곡진히 보살펴 주고 은혜를 온전히 하는 방도에 있어서 오늘날의 조정이 비록 옛날의 조정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어찌하여 잘 받들어 따를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예로부터 가까운 친족에 속한 자에 대해서는 의당 별도로 논했었다. 그 당시에는 매우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상황이어서 사세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죄안을 《명의록》 가운데에 밝게 기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감란록(勘亂錄)》과 《천의소감(闡義昭鑑)》의 예에 있어서는 추대한 역적들을 모두 다 책 가운데에서 빼냈으니, 이것이 또한 고사가 된다. 또한 극층(極層)의 의리로 말하면 빼어낸 것도 또한 하나의 의리이니, 반드시 이로 인해 인멸될 염려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하교에서 말한 것은 경들에게 있어서 또한 의리를 강명(講明)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지금에 있어서는 단서(丹書)는 그대로 있고 완전히 석방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빈청의 아룀과 정청(庭請)이 이와 같이 분분하니, 만일 옛날의 대신이 이와 같은 일을 당했더라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석년(昔年)021) 의 마음을 가지고 추측해 본다면 더욱 반드시 선조께서 은혜를 끊었을 때의 마음과는 달랐다. 하늘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며 임하여 살펴보시는 선조의 성의(聖意)는 혹 경들의 말을 옳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석년의 마음은 반드시 이와 같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우러러 몸받는 도에 있어서는 어찌 오늘날의 처분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의리로 말한다면 우러러 몸받을 것은 바로 석년의 마음이다. 실정(實情)이니 실리(實理)니 실의(實意)니 하는 것들은 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지금 다시는 버티지 말고 반드시 결말을 짓도록 하라."
하니,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학식이 없는데, 매번 성상의 하교를 받을 적마다 그 지극히 바르고 합당한 것에 대해 삼가 우러르곤 하였습니다. 의리의 관건은 오직 성인을 독실히 믿는 데 있으니, 비록 한마디 짧은 말일지라도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지 감히 훼손시키거나 팽개쳐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어리석고 미천한 사람들도 혹 한가지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반드시 나무꾼이나 꼴 베는 사람들의 말도 귀담아 들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이 날 이 대궐에 임어하여 전날 거처하시던 것과 웃고 말하던 것을 생각하심에 추모하는 효성스런 마음이 가슴 속에서 성하게 일어나 추모하는 마음을 부치고 은혜를 펼 방도를 생각한 것입니다. 전날 내리신 하교에 대해서도 신들이 또한 성상의 뜻을 조금이나마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 선왕께서 은혜를 끊으신 마음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성상의 하교에서 이른바 선왕의 마음을 몸받았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신은 삼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금 전에 이미 다 하유하였지만 그 당시 처분이 할수없이 그렇게 했던 것은 선왕의 마음을 밝히기 위해서였고, 오늘날의 처분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석년(昔年)의 마음을 몸받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선왕의 마음을 말할 때에는 ‘명(明)’ 자를 놓았고, 석년의 마음을 말할 때에는 ‘체(體)’ 자를 놓았다. 전날의 하교는 전날 이 대궐에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단지 ‘선왕의 마음을 밝히고 선왕의 마음을 몸받는다.’고 하교했던 것이다. 명 자와 체 자를 이와 같이 구분해서 보면 의리가 더욱 자별해진다."
하니, 이병모가 아뢰기를,
"석년의 마음이 바로 선왕의 마음이니, 명 자와 체 자를 둘로 나누어 보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대저 성인이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반드시 형상(刑賞)을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비록 삼대(三代) 이전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한두 번의 대처분이 있은 다음에 천하의 사람들이 다 복종하고 치도(治道)가 편안하고 조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역적들에 있어서는 병신년에 한번 처분이 있은 뒤로 팔도가 진동하고 위단(威斷)이 혁혁해서 수십 년 동안 말끔히 물리쳐 정돈해서 못된 무리들을 모두 변화시켜 전하의 적자(赤子)가 되게 한 것은 그 효험이 실로 여기에서 근본한 것입니다. 비록 요·순의 세상일지라도 어찌 난을 꾀할 것을 생각하는 무리들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감히 마음속에서 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입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한두 번의 대처분이 있어 능히 신민들을 진압하고 복종시켰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비록 소경이 조는 것과 같다고 하교하셨지만 이것은 《명의록》의 의리가 크게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완전히 석방시킨다면 몰래 숨어 있는 못된 무리들이 성상의 하교에 의거해서 의리를 망가뜨릴 계책을 하지나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들이 반드시 모두 역모를 꾀하려는 흉악한 속셈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리를 흐리게 하고 법도를 무너뜨려 버리려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 책을 없애버리려고 해서 한 부의 《명의록》은 장차 빈 말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홍인한(洪麟漢)을 비롯한 여러 역적 이하가 다 반드시 이러한 마음을 낼 것입니다. 이러한데 그냥 받들기만 한다면 오늘날의 조정에 신하다운 신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인의 기절(氣節)과 습상(習尙)은 오늘날과 비교해서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비록 대각(臺閣)의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된 자로서 오히려 한두 명의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 조금도 꺼려함이 없이 은혜를 온전히 하자는 의견을 주창하였다. 기절이 시들하고 습상이 흐릿한 지금에, 이러한 징벌하고 치자는 데에 말이 이르자 당(唐)나라의 위징(魏徵)과 한(漢)나라의 급암(汲黯)이 아닌 사람이 없으니, 그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옛날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났던 것은 여러 의논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가운데 홀로 다른 의견을 세웠기 때문이니, 그 말이 비록 위태로운 말 같지만 말하지 않는 가운데 인군의 덕을 보좌하는 것이 적지 않다. 이른바 지금 사람들이 모두 직언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온 세상을 왜곡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의 시태(時態)와 속습(俗習)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고 여기게 된 뒤에야 내가 기꺼이 곧이들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풍습과 시속을 통렬히 제거하고 빨리 고쳐서 풍속을 완전히 변혁시키는 실제 효험이 있게 한다면 억만년토록 이어 내려갈 기반이 진실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는 애당초 쟁론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경들이 청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인가?"
하니, 우의정 심환지가 아뢰기를,
"의리에는 본말이 있고, 역적에는 주모자와 추종자가 있습니다. 모년(某年)022) 의 의리는 을미년023) 의 의리가 되었고, 을미년의 의리는 병신년024) 의 의리가 되었는데, 을미년과 병신년의 역적들은 정치달 처(鄭致達妻)가 바로 그들의 근본 뿌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인겸(鄭麟謙)·항간(恒簡)·윤양후(尹養厚)·홍계능(洪啓能)과 같은 여러 역적들은 모두 정치달 처를 뒤에서 은밀히 후원하는 이로 삼았습니다. 지금 만약 갑자기 용서하여 석방해 주고 이러한 내용의 전교를 팔도에 반포하고 후세에까지도 전해지게 한다면 《명의록》은 장차 아무 쓸모없는 책이 될 것이고 나라는 나라꼴이 안될 것이며 사람들은 사람꼴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신이 인군을 믿고 섬기는 것은 오직 이 의리가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신들은 죽으면 죽었지 감히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너무 지나치다."
하니, 심환지가 아뢰기를,
"신들이 전날 강력하게 쟁론하지 못한 죄는 어떻게 속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서울 집에 들어와 거처하고 있는 것이 여전히 확실하지 않은 상태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분명하게 전교를 반포했고, 또 그 죄명을 완전히 용서하였습니다."
하였다. 검교 제학 정민시(鄭民始), 원임 직제학 서용보(徐龍輔)·정대용(鄭大容), 직제학 이만수(李晩秀), 원임 직각 남공철(南公轍)·김조순(金祖淳), 검교 직각 심상규(沈象奎), 승지 이서구(李書九)·이면긍(李勉兢)·김계락(金啓洛)·정상우(鄭尙愚)·유한녕(兪漢寧), 수원 유수 서유린(徐有隣), 상호군 홍양호(洪良浩), 대호군 이병정(李秉鼎)·서매수(徐邁修)가 번갈아가며 내린 명을 도로 거둘 것을 강력하게 청하였다. 그리고 이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정치달 처의 흉악한 음모가 바야흐로 극도에 달했을 때에 오직 우리 자성(慈聖)께서 간악한 기미를 밝게 살피시고 전하를 지성으로 보호하셨습니다. 지금 만약 정치달 처를 용서하여 석방한다면 자성께서 보호하신 공덕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였는데, 아뢰는 것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조 판서는 어찌하여 지중함을 빙자하여 아뢸 수 있는가. 이조 판서는 파직되었으니, 물러 나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시수가 물러나가니, 상이 이르기를,
"경(卿)과 재신들은 일일이 다 아뢰기 어려운 점이 있겠으니, 삼사가 앞으로 나아오라."
하였다. 대사간 송전(宋銓) 등이 또 《명의록》의 역적 괴수를 용서하여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쟁론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심환지가 아뢰기를,
"신이 무슨 면목으로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은덕을 두터이 입었는데 어찌 감히 물러가기를 구하는 마음을 먹겠습니까. 그러나 정성이 부족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의당 물러가서 처벌내리기만을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섬돌 아래에 엎드려 관을 벗었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행동은 너무나도 지나친 것이다. 관을 벗지 말고 즉시 전(殿)에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는데, 환지가 명에 따르지 않았다. 병모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처의(處義)는 신과 우상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상은 윤허를 받기 전에는 반드시 전에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위로하여 그의 염려를 풀어주고자 하신다면 즉시 전에 내렸던 처분을 도로 거둬야 하니, 이것이 신의 구구한 바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일은 지나치다."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가서 하교를 전하게 하였는데, 환지는 물러가서 명을 기다렸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일은 너무나도 지나친 것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지금에 있어서는 국사(國事)의 체면이 중하기 때문에 공경하는 예는 돌아볼 겨를이 없다. 더구나 오늘 하교한 것을 듣고 이런 행동을 하였으니, 이는 내가 이 대신에게 알고 있던 바가 아니다. 우의정 심환지를 파직하라."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동료 정승의 말은 바로 신의 말입니다. 그런데 동료 정승이 이미 견책을 받았으니, 신도 의당 명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臺臣)들이 이미 다 갖추어졌는데, 어찌하여 전계(傳啓)하지 않는가."
하였다. 송전 등이 아뢰기를,
"정처의 일이 합사하는 데에 있어서 맨 첫머리에 있으니, 지금 의당 먼저 완전히 용서하라는 명을 도로 환수하라고 청한 뒤에야 전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로 버틸 필요가 없다. 삼사의 여러 신하들은 속히 물러가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일전에 청대했을 때에 잘못한 일에 대해서 너그러이 용서해주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렇다면 억지로 임무를 살피게 할 수는 없다. 대사간 송전을 체직시키도록 하라."
하고는 곧 대내로 돌아와 하교하기를,
"삼사의 여러 신하들은 곧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응교 홍낙유(洪樂游), 부응교 김희순(金羲淳), 장령 현중조(玄重祚)·정한(鄭澣), 지평 이동우(李東宇)·남혜관(南惠寬), 교리 윤우열(尹羽烈)·조윤수(曺允遂), 부교리 남이익(南履翼)·이정운(李貞運), 정언 윤함(尹涵)·이경삼(李敬參), 수찬 한용탁(韓用鐸)·김이재(金履載), 부수찬 박윤수(朴崙壽)·윤익렬(尹益烈)이 복합(伏閤)하여 네 번이나 정치달 처를 용서하여 석방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어 달라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시임 및 원임 각신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정치달 처를 용서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고 대간의 계청을 윤허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봉조하 이명식(李命植)·홍수보(洪秀輔), 수원 유수 서유린(徐有隣) 등과 상호군 윤사국(尹師國), 이조 참의 이익모(李翊模), 안춘군(安春君) 이륭(李烿)이 진소하여 정치달 처를 용서하여 석방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어주고 대간의 청을 윤허하도록 하라고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3월 8일 병인
삼사의 여러 신하들이 복합하여 다섯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승정원이 의논하여 아뢴 것을 도로 내려 보냈다.
하교하였다.
"삼사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복합하는 통에 이에 수응하다 보니 가슴에서 기운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치밀어 올랐다. 이미 시급한 일도 아닌데 여러 신하들이 이러한 때에 시끄럽게 떠들어대어 조섭하고 있는 나로 하여금 자꾸 더 괴롭게 하고 있으니, 도리로 헤아려 볼 때 합당한 것인가, 합당하지 않은 것인가. 그리고 뜻을 편안히 하여 조용히 조섭한 뒤에야 봄철 참배를 할 수 있을 것이니, 그 전에는 대신과 제신들은 우선 물러가 기다리도록 하라. 봄철 참배가 지난 뒤에 의당 명백한 하유가 있을 것이니 또한 한결같이 굳게 거부만 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대신의 경우는 명을 기다리지 말게 하라. 경과 재신들로서 만약 궐문 밖에 와서 대신의 거취를 기다리고 있는 자가 있거든 모두 물러가게 하라. 한 번만 조금 기다리면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우선 물러가 기다리라고 한 것도 우선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하교를 듣고 더욱 감히 다시 문제삼아 떠들어대는가. 이번에 반드시 일마다 아랫사람의 뜻을 잘 헤아려 제신들로 하여금 넉넉히 용납할 곳이 있게 하려고 하니, 제신들도 어찌 나의 이러한 뜻에 보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관원들과 하리들이 다 고통을 당한 나머지여서 모든 것이 소생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칙서를 보낸 뒤에 편히 쉬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연히 별다른 일 때문에 바람이 아직도 찬 때에 밤낮으로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으니, 이 때문에 마음이 쓰여 가슴에서 기운이 자꾸 더 치밀어 오른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물러가서 기다리는 것이 합당하다 하겠다. 이러한 내용으로 분부하도록 하라. 그리고 삼사의 신하들도 즉시 물러가게 하도록 하라."
좌의정 이병모가 의금부에서 명을 기다렸는데,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곧 이어 궐문 밖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경과 재신들 및 복합하고 있는 삼사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모두 우선 물러가도록 하였다.
3월 10일 무진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판으로, 이익모(李翊模)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사학 유생 이성중(李性中) 등이 상소하여 정치달 처를 용서하여 석방하라고 한 명을 거두어주고 정신(廷臣)들의 청을 빨리 따르라고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이나 닦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1일 기사
좌의정 이병모에게 명하여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하였다.
전 우의정 심환지(沈煥之)를 서용하고, 이조 판서 이시수(李時秀)를 파직시키라고 한 명을 철회하였다.
3월 12일 경오
생원 박주원(朴周源) 등이 상소하여 정치달 처를 용서하여 석방하라고 한 명을 거두고 삼사의 청을 빨리 윤허하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이나 닦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5일 계유
판중추부사 심환지에게 하유하였다.
"봄철 참배를 아직까지도 하지 못하고 있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 한가지 생각 때문에 송구스럽고 민망하다. 그래서 사전(祀典)이나 민사(民事)에 관계된 일이 아니면 감히 응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대관(大官)에 대한 공경하는 예는 자별한 것인데, 서용한 지 여러 날 되었는데도 즉시 나오려고 하지 않으니, 나라의 체모에 관계된 것이 어떻겠는가. 오늘 입시한 사관을 특별히 보내어 이러한 뜻을 먼저 하유하였는데, 경은 이미 이 문제를 도로 철회하지 않는다고 하여 거취를 결정하여 버렸다. 갈 때에 확고하게 주장하는 바가 있다고 하였으니, 도성에 들어옴에 있어서도 반드시 한갓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봄철 참배를 한 뒤에 한번 하유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사리에 합당한 것으로, 금저울로 꼭 맞게 달아낸듯이 조금을 더할 수도 덜 수도 없는 의리인 것이다. 그러니 도로 철회하건 하지 않건 논할 것 없이 하유하는 말이 내려가면 즉시 나와야 할 것이다.
먼저 경과 같이 거취를 결정한 자가 서둘러 나와서 명에 응한 뒤에야 대의가 더욱 밝아지고 사람들의 뜻이 더욱 정해질 것이다. 이 때문에 경이 객지에서 왔다갔다 하며 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좌상에게 들으니, 민폐를 염려하여 거칠고 누추한 폐사(廢舍)에서 거처하고 있다고 하는데, 노인이 거처하기에는 반드시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모름지기 안온한 곳을 찾아 거처하도록 하고 다시 부르거든 조정에 나아오도록 하라."
이보다 먼저 이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상소하기를,
"신이 일전에 경연에서 아뢴 것은 감히 위를 범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마음 속의 생각을 숨김없이 토로한 것입니다. 고인이 ‘고묘(高廟)와 태후(太后)에게는 어떻게 하겠느냐. ’고 했다는 것은 대개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인주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전의 덕을 드러내는 것은 성상의 효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성상의 효성을 드러내는 것은 선왕의 뜻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신의 말이 조금이라도 인군을 높이고 역적을 치는 의리에 도움이 되는 점이 있다면 비록 바로 사형의 처벌을 받게 되더라도 조금도 여한(餘恨)이 없습니다.
아, 을미년과 병신년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하께서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노희(魯禧)의 잔당들은 나라와 원수 관계에 있는데, 거실(巨室)과 근척(近戚)들은 뱀이 또아리를 튼 것이나 솔개가 날개를 편 것과 같았습니다. 이에 궁지에 몰린 도적들은 되받아칠 계책을 세웠는데, 그 세력이 너무 성해서 도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심지어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물려준 것처럼 대를 이어 내려온 종묘 사직의 큰 계책을 방해하고 희롱하기까지 하여 결국에는 세 갈래로 역모를 도모하다가 하나로 연결되었는데, 재앙이 점점 커져 거의 하늘을 삼킬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은밀하게 구원해준 근본이며 난리를 일으킨 싹으로 말하면 바로 정치달 처(鄭致達妻)입니다. 대개 그는 왕실에 적을 두고 있고 궁궐에 몸을 두고 있으면서 흉악한 음모를 계속 쌓아왔기 때문에 위태로운 기틀이 아주 가까운 곳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성상으로 하여금 영선(永善)의 방울소리를 듣게까지 하여 옥같은 안색이 이 때문에 편안하지 않았고 늘 조심하며 근심했던 것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선대왕의 천지와 같은 넓은 도량과 일월과 같이 밝은 덕으로 왕위를 광명 정대하게 전수하고 처분을 엄정하게 하지 않았다면 어느 곳에서 멍에를 벗고 쉬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에 우리 동방의 온 나라에 사는 혈기를 가진 자들은 지금까지 전왕(前王)을 사모하는 마음에 간절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는 덕이 천지와 합했고 교화는 태사(太姒)와 같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성궁(聖躬)의 편안함을 자신의 편안함으로 삼아 기미의 즈음에도 상세하게 살폈으며 조그마한 움직임도 꿰뚫어 보아, 수렴 청정하는 대왕 대비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은밀히 성상의 뜻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인군의 권한이 위태롭게 될 것을 깊이 염려하여 간악한 자들의 음모를 도리어 꺾어버렸습니다.
아, 역적 홍인한(洪麟漢)이 패악스런 주달을 한 뒤 역적 심상운(沈翔雲)이 소장을 올렸을 때에 흉악한 무리들이 경영하고 포치(布置)한 것은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 우러러 믿으며 근심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우리 성명한 선왕과 자성(慈聖)의 공덕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漢)나라의 명종(明宗)과 덕종(德宗), 송(宋)나라의 선종(宣宗)과 인종(仁宗)은 여기에 비겨 의논하기에 부족합니다. 오직 아조(我朝)의 인원 성모(仁元聖母)만이 우리 영고(寧考)를 도와 50년이나 되는 긴 기간을 반석처럼 튼튼하게 태평을 누리게 하였으니,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의 헤아림은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이것은 실로 신들은 미처 다 알지 못했던 것으로 전하께서 일찍이 신들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니, 이것은 바로 《명의록》 책을 펼치면 바로 있는 첫째 가는 의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또 옥관(玉管)과 금전(金篆)으로 매우 아름답게 묘사하였으며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현악기와 관악기에 담아 매년 섣달이 되면 여러 군신들을 불러 선왕의 큰 덕을 추모하고 자성의 큰 공을 기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뭇 흉악한 자들의 정상과 악인들의 본말을 따져볼 때, 정치달 처(鄭致達妻)를 화의 근본이며 역적의 괴수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성심(聖心)의 괴로워하심과 나라 형세의 위태로움이 전날과 매우 같아 상하의 사람들이 서로 힘쓰면서 전에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말자고 거듭 당부하고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경연의 신하를 인해서 성상의 하교를 대략 전해 듣고는 감격해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스러웠던 점은 이 역적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24년이나 지내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혀 뜻밖에 이 역적을 서울 집으로 불러오게 하고는 죄명을 완전히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에 전교가 마침내 팔도에 전해져 지나친 조처가 취해진 지 이미 6일이 지났는데, 크고 작은 관원들과 아낙네, 아이들 그리고 종들까지 모든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분주하게 왔다갔다하여 마치 밀물이 용솟음치고 파도가 출렁거리는 듯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아득히 들은 체하지 않으시어 뭇 사람들의 마음이 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올린 글에 대해서는 모두 의례적인 비답만을 내리고 경연에서의 답변을 할 때에는 한번도 마음을 씻어준 적이 없었습니다. 이에 지금 여러 신하들은 가슴이 막히고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는 상태라 죽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팔짱을 높이 끼고 담소하면서 응하고 계시니, 신들이 참으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주자(朱子)가 이른바 ‘유도(柔道)로 충의(忠義)의 병사들을 굴복시킨다.’는 말과 불행하게도 가깝게 되었습니다.
지금 전하의 조정에서 신하로 북면(北面)하고 있으면서 인군이 주는 옷을 입고 인군이 주는 음식을 먹는 자가 이 역적이 용서받아 석방된 것을 차마 보고만 있으면서 위엄에 겁을 먹고 오직 상의 명에만 따른다면 지난 20년 동안 강론한 것은 어떤 일이며 밝힌 것은 무슨 의리입니까. 전하께서는 장차 신들로 하여금 윤리 기강의 중요함을 알지 못하고 인(人)·귀(鬼)의 구분도 생각하지 못한 채 녹이나 타먹고 자리나 지키면서 태연히 부끄러움도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까. 신들에 대해서야 비록 말할 것도 없지만 오르락 내리락하는 선왕의 영령은 아래를 환히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니, 국법을 잘못 적용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걱정하실 것입니다. 우리 자성(慈聖)의 나라를 위하는 일념은 갈수록 더욱 근실한데 미리 선왕의 뜻을 헤아려 따른 전하의 효성으로써 장차 무슨 말로 기분좋게 있는 삼조(三朝)에게 우러러 진달하겠습니까.
신은 지난번에 엄한 하교를 받고 두렵고 떨리는 나머지 죽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망발을 하였으니, 구구한 신의 충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이른바 ‘자전의 덕을 드러내는 것은 성상의 효성을 드날리기 위해서이고, 성상의 효성을 드날리는 것은 선왕의 뜻을 밝히기 위해서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어 삼가 생각하건대, 의리를 밝히자는 차자와 정치달 처를 논죄하자는 글을 올린 것은 작고한 신의 아비의 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대개 양궁의 자효(慈孝)를 드날리고 여러 역적들의 근본을 거슬러 논죄하기 위한 것으로 이를 위해 뜻을 매우 극진하게 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자성(慈聖)에 대한 악장(樂章)도 작고한 신의 아비가 지어 올린 것입니다. 그 글에 ‘우리 영고(寧考)를 도왔고 우리 성궁(聖躬)을 보살폈다. 기미를 밝게 알아 싹이 틀 때에 잘라버려 요사스런 무리들을 없애버렸다.’라고 하였는데, 이 네 구절을 가지고 보면 우리 나라 조정에 있어서 대비가 전후로 보호하고 도와준 공덕을 천억년이 되도록 환히 게시한 것입니다. 이에 작고한 신의 아비가 붓을 잡고 초안을 잡을 때에 우러러 칭송하기도 하고 몸을 굽혀 개탄하면서 매양 한 글자를 쓸 때마다 한 번씩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신은 아직 죽지 않은 몸으로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직접 비상한 거조를 보게 되어 왕실에 대한 깊은 염려로 인해 쌓두었던 옛날 초고를 꺼내 어루만지니, 공적으로 분한 마음과 사적인 애통함에 차라리 죽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내린 하교를 보니 ‘이것은 시급한 일이 아니니, 여러 신하들은 물러가서 봄철 참배를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아, 천하 만사 가운데에 역적을 치는 것이 시급하지 않다면 어떤 일이 급하단 말입니까. 바로 깨달아서 시원스레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일식과 월식이 사라짐에 하민들이 다 우러르는 것과 같이 허물을 고치는 것은 바로 한번 옮겨갈 사이의 일이니, 또 어찌 봄철 참배 때까지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없애 버릴 수 없는 것은 대의이고, 막을 수 없는 것은 여론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바르지 못한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제왕의 성대한 절조입니다. 현재의 사세는 오직 전하의 윤허한다는 한마디 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조금이라도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답하기를,
"찬양하거나 천명하는 도는 어찌 경의 말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무릇 의리는 모두 은미한 것과 드러난 것이 있다. 경의 상소는 은미한 부분에 대해서 아직 깨우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6일 갑술
친히 제문을 지어 고 봉조하 김종수(金鍾秀)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록 경이 수백 리 길을 가더라도 그때마다 내가 글을 지어주었는데, 금강산(金剛山)과 철원(鐵圓)에 갔을 때 지어준 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경이 지금 아주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갔으니, 내 어찌 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내가 뜻밖에 몸이 불편해서 미처 글을 지어 주지 못했다. 이에 먼저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제를 지내는 것인데, 경은 아는가, 모르는가? 봄물이 넘실넘실한데 뗏목을 타고 건널 수도 없구나. 아, 슬프다."
3월 17일 을해
하교하였다.
"지난 겨울 전강(殿講)한 것을 이미 궐방(闕榜)하였으니, 상재생(上齋生)들과 아울러 다시 시험을 보이도록 하라."
3월 18일 병자
강원 감사 윤필병(尹弼秉)이 비변사에 공문을 보내기를,
"금년에 울릉도(鬱陵島)를 수색하는 것은 월송 만호(越松萬戶)가 할 차례인데, 채삼 절목(採蔘節目) 가운데에는 단지 ‘영장(營將)이 갈 때에 채삼군(採蔘軍)을 들여 보낸다.’는 말만 있고, 만호가 갈 경우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편리하게만 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강릉 등 다섯 고을의 첩보에 의하면 ‘채삼군을 정해 보내는 것은 을묘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반드시 산골에서 생장하여 삼에 대해서 잘 아는 자들을 강릉은 5명, 양양은 8명, 삼척은 10명, 평해는 4명, 울진은 3명씩 나누어 정해 보내는데, 이들은 모두 풍파에 익숙하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간간이 빠지려고 하는 자가 많다. 그러므로 채삼군을 가려 뽑는 담당관이 중간에서 조종하며 뇌물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진두(津頭)에서 바람을 기다릴 때에는 양식값이라고 하면서 민간에서 거두어들인다. 삼을 캔 것이 을묘년에는 2냥 8전이고, 정사년에는 5냥 6전인데, 이것은 캐는 사람이 솜씨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어서 미리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금년의 수색은 월송 만호가 원래의 차례이기는 하나 요즈음에 삼을 캐어 바친 전례에 따라 삼척 영장으로 바꾸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지금의 삼정(蔘政)은 실로 구차하고 어렵습니다. 만일 이 삼의 품질이 좋고 많이 캐기만 한다면 과연 그만 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삼의 품질이 육지의 삼에 비하여 매우 형편없고, 집에서 재배한 삼보다 나은 점도 거의 없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캘지 미리 알 수는 없지만 두 번 가서 캔 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충분히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수색하는 것은 전과 같이 영장과 만호를 차례대로 보내 거행하게 하고, 채삼군을 들여보내는 것은 지금 우선 그냥 놔두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따랐다.
3월 19일 정축
명나라 사람의 후손과 충신 자손으로 반열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온 자가 내려갈 때에는 양료(糧料)를 주라고 명하였다.
선혜청 제조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균역청에서 보태준 환곡의 원래 수량은 천여 석을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년 기한을 물려주면서도 모조(耗條)는 전례대로 가져다 써서 원곡(元穀)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호남에 있는 상진미(常賑米) 2만 석을 옮겨 등록하여 환곡에 보태도록 하고, 그 대신으로는 물려준 도내 선저미(船儲米) 2만 석을 상진미에 소속시킨 다음 환곡을 받아서 보충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재찬(金載瓚)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이병정(李秉鼎)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가 곧 체직시키고, 이치중(李致中)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정민시(鄭民始)를 공조 판서로, 송환기(宋煥箕)를 지돈녕부사로 삼았다.
3월 22일 경진
이문원에 임어하여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에 있는 두 본궁에 보내는 옷과 폐백과 향축을 친히 전하였다. 그리고 태묘와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참배하였다.
하교하였다.
"지금 내가 밤낮으로 한결같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선조를 받들고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다. 봄철 참배를 오늘에서야 비로소 예를 행하였는데, 제반 준비를 하고 나가 참배하여 조금이나마 나의 정성을 표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네거리에 이르러 공인(貢人)과 시장 사람들을 불러 폐단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당초 생각에는 밤에 내린 비가 비록 기쁜 비이지만 밤새도록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도로가 진흙탕이라 폐단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며칠 뒤에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비오고 개이는 것이 바라던 대로 되어 수레를 멈추고 그들을 만나 보았다. 이미 만나고 났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실제적인 혜택이 그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의당 내 마음이 부끄럽겠는가, 그렇지 않겠는가.
왕위에 오른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백성들이 살기에 편리하고 풍족하게 하였다고 할 만한 것이 조금도 없으니, 매번 도성 백성들을 만날 때마다 등에 땀이 나 옷을 적시곤 하였다. 지금 비록 불러 만나보더라도 만약 단지 전례대로 외형적인 형식만 갖춘다면 어찌 더욱 얼굴이 뜨겁지 않겠는가. 그래도 다행스럽게 여기는 점은 길가에서 구경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활기 있는 모습을 띠고 있어서 가장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지만 베풀어 줄 만한 혜택이 없다. 밤에 재소(齋所)에서 있다가 마침 생각이 조세를 감해 주는 문제에 미쳤다. 거두어들이는 조세가 8, 9만 석 내외가 되면 으레 조세를 감해 줄 것으로 초기(草記)를 올리는데, 이는 선조(先朝) 각해의 이미 해 온 전례가 그러하다.
그리고 겨울과 봄철의 곡식 가격이 그래도 지나치게 치솟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생각해서 단지 15분의 1만 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하지 않은 것만도 못해 이 때문에 마음에 항상 잊혀지지 않았다. 조세를 감해 주는 것은 올해까지만 하고 반드시 바로 공납을 회복해야겠다는 뜻을 이미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러니 묘당으로 하여금 선혜청에 분부하게 하라."
문 밖에서 싸전 백성들이 폐단에 대해서 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내수사 명례궁(明禮宮)에서 꾸어 쓴 것과 각 군문에서 사온 쌀값을 마련해 주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하교하기를,
"내수사 명례궁에서 빌어 쓴 돈은 일체 탕감하도록 하고, 내수사 발매미(發賣米)를 햇수를 한정하여 나누어 바치게 하라. 수어청과 어영청에서 사온 쌀에 대해서는 일체 탕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3일 신사
이면긍(李勉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승지를 보내어 판중추부사 심환지(沈煥之)를 돈유하였다.
"지난번에 간곡하게 불러 먼저 나의 뜻이 정한 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대개 기다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계(朝啓)가 끝난 다음에 궁중 뜰에서 경건하게 전배(展拜)하고 이어 경들에게 설득하는 하유를 할 것이다. 반대하든 반대하지 않든, 따르든 어기든 하는 것은 모두 설득하는 하유를 한 뒤에 하도록 하라. 경은 모름지기 오늘 바로 도성에 들어와 곧바로 재소(齋所)로 와서 명에 따르도록 하라."
3월 24일 임오
경모궁에 참배하였다.
하교하였다.
"대신(大臣)·경(卿)·재(宰)·삼사의 제신들로 하여금 재전(齋殿) 문 밖에 와서 기다리게 한 뒤 이번에 내린 통유(洞諭)하는 윤음을 읽어 주도록 하라."
하였는데, 하교한 내용에,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들치고 어느 누가 《명의록》의 의리가 부월(斧鉞)보다 엄하고 해와 별같이 밝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그 근원이 어느 해에서 유래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그것은 모년(某年)의 의리가 조금도 《명의록》 가운데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서 모년의 의리와 《명의록》의 의리를 서로 다른 것으로 보게 되었다. 지난번 경연에서 하교할 때에 그것들이 앞뒤로 하나로 꿰었다는 것을 대략 제시하기는 하였다. 다만 아직 문자로 나타내어 환히 알 수 있도록 하지 않은 것은 다만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지금까지 어언 24년이 되었다. 이번에 정치달 처의 일로 인해서 이러한 선유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전년에 서로간의 다정했던 마음을 체득하여 성덕(聖德)을 드날림으로써 전년에 아름다움을 돌리기 위함이고, 또 한편으로는 《명의록》의 의리가 모년의 의리와 연결됨을 밝히기 위함이다.
대신 이하는 이 하교를 듣고 옳다고 할 것인가, 옳지 않다고 할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깊은 밤에 관원을 불러 촛불을 밝히게 하고 이곳에 와서 선포하니, 그대들 중에서도 의당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승지는 이 경연석상에서 한 전교를 전한 뒤에 굳이 강요할 필요도 없고, 또한 여러 말 할 것도 없다. 따르든 따르지 않든 간에 어느 한쪽으로 몰아지면 돌아와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내각 직제학 이만수(李晩秀)가 명을 받고 받들고 나가 윤음을 펴 읽었는데, 그 내용에,
"옛날에 우리 공부자(孔夫子)께서는 후세에 모범을 드리우고 교훈을 세우기 위해 전(典)과 모(謨)라고 편명을 달아 우리 후인들에게 남겨 주셨다. 이에 후인들이 그 뜻을 잘 계승하여 분명하게 증거하며 결정하고 보존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성법(成法)을 두게 되었는데, 《춘추》의 의리가 바로 이것이다. 의(義)라는 것은 마땅하다는 뜻이고 이(理)라고 하는 것은 공평하다는 뜻이니, 이는 천하의 지극히 공평한 이치로 천하의 지극히 합당한 의리를 행한다는 것이다. 그 큰 것을 말하면 천지도 능히 용납할 수 없고, 그 작은 것을 말하면 터럭끝으로도 능히 깨뜨릴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상(象)을 드리운 것과 같이 큰데, 쉽게 볼 수 있고 알기 어렵지 않은 것으로는 인군을 높이 받들고 난적(亂賊)을 처벌하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다. 그리하여 《춘추》가 지어진 뒤에 인군은 인군 노릇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하며, 아비는 아비 노릇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하는 큰 인륜과 기강이 바로 서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주정(周鼎)과 한사(漢絲)가 우뚝하니 감히 어느 누구도 뽑을 수 없는 형세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부자의 공이다. 그런데 이른바 큰 의리라고 하는 것은 수십 가지의 은미한 말과 뜻으로 이루어져 있고 상황에 따라 합당하게 되어 있으며 정밀한 뜻이 신묘할 정도여서 포괄적으로 두루 감싸면서도 세부적으로도 합당하다. 비유하자면 마치 걸음을 옮기면 그림자의 형태가 바뀌는 것과 같아서 하나로 포괄해서 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리하여 공이 있는 자를 누르기도 하고 죄가 있는 자를 풀어놓아 주기도 하며, 자취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그 마음을 처벌하여 빼앗기도 하고 뜻이 아직 성취되지 못했으나 그 실정을 헤아려 인정해 주기도 하며,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간혹 물리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이적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잘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춘추》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드러내서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 깨달아 안 뒤에야 능히 그 은미한 경지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에 구애가 되는 사람은 일에 대해서 말하기에 부족하고, 법에 제재를 받는 사람은 다스림에 대해서 논하기에 부족한 것이다.
난적을 주벌하는 것은 군부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가까운 친족에 대해서는 온전히 보호해 주어 난적을 주벌하는 것보다 비중을 더 두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는 각각의 상황이 서로 달라 어떤 경우에는 가볍게 하고 어떤 경우에는 중하게 하는 것이다. 《춘추》의 필법에 있어서 정백(鄭伯)이 단(段)을 이긴 것을 특별히 앞에 썼는데, 성인이 일을 판단하는 잣대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순(舜)임금과 주공(周公)이 상(象)과 관숙(管叔)·채숙(蔡叔)을 처리한 것을 보면 또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만일 관숙과 채숙이 못된 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서 주나라 왕실의 운명이 경각에 달리는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주공과 같은 성인이 순임금이 상을 살려주어 은혜를 온전히 한 것처럼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비록 당(唐)나라 예종(睿宗)·현종(玄宗) 연간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안락 공주(安樂公主)를 단지 폐위하여 서인으로 만들었고, 태평 공주(太平公主)는 처음에는 조사하여 안치시키기만 하였으니, 이는 그때에도 상고 시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아 그래도 볼 만한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나 소자는 슬프고 애통한 심정이 가슴에 가득하여 임금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즐겁지 않다. 음악 소리를 들으면 처량한 생각이 들고, 곤복을 입고 면류관을 쓰면 눈물이 난다. 그리고 머리털도 희끗희끗해졌다.
봄 이슬이 듬뿍 젖었는데 침궁(寢宮)에 와서 참배하게 되어,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할 것이 있다. 내가 이미 이 자리에 올랐으니, 모년(某年)의 의리에 관계된 것을 어찌 감히 엄하게 지키고 강론하여 밝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내 개인의 사적인 마음을 가지고 용서해 주는 일도 감히 하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참으로 석년(昔年)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아름다움을 석년에 돌리고 석년에 은미했던 것을 밝힐 것이니, 임자년 재계하면서 내렸던 윤음 같은 것이 그러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 일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정치달 처(鄭致達妻)의 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엄숙하고 충만하게 오르락 내리락하며 밝으면서도 아주 가깝게 임하여 있는 신령 앞에 이미 공손하게 고하였으니, 마음이 목석이 아닌 이상 의당 어떤 마음가짐이 되겠는가.
무릇 《명의록》 한 책은 모년의 의리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 책이 비록 병신년과 정유년 사이에 이루어졌지만 그 근원은 대개 모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문에 나 소자는 창을 베게로 삼는 의지로 분발하고 도끼를 가는 분노를 드날리며 일이 내 자신에게 속한다고 하여 혹시라도 복수하는 큰 의리에 소홀하게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지금 이 뜰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치고 어느 누가 이러한 것을 모르겠는가. 저 정치달 처는 비록 석년(昔年)의 동기(同氣)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그만둘 수 있으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다. 나도 또한 군자의 큰 도리에 대해서는 대략 들어 알고 있다. 어찌 굳이 이것저것 끌어다가 전혀 말해서는 안 될 데에다가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병신년 초기에는 할수없이 저와 같이 해서 우리 선왕의 성대한 덕을 밝히고 우리 자전의 음공(陰功)을 밝힌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첫 번째도 그렇고 두 번째도 그렇고 석년(昔年)의 마음을 몸받아서 한 것이다. 돌아보건대, 소자의 마음은 바로 석년의 마음이다. 심법(心法)이 서로 전하여 천고의 세월 동안 한 마음과 같았다.
아, 석년의 친애하는 마음은 백왕에 우뚝 뛰어나서 차마 자세하게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리고 병자년 간에 덕성합(德成閤)에서 《통감(通鑑)》을 강론할 때에 효문기(孝文紀)의 회남왕(淮南王)에 대한 일에 이르러 구구절절 자세하게 분석해 주자 경연에 있던 신하들 중에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는 자도 있었다. 후생(後生) 만학(晩學)이 이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모년 이전에 이르러서도 감히 상세하게 말할 수 없고 차마 분명하게 하유하지 못할 것이 있다. 이를 직접 듣고 본 자로서 지금 다행스럽게 정치달의 처가 죽지 않고 있는데 이미 늙고 병들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석년(昔年)에 한 것과 모년 이전에 정치달의 처에 대해 처리했던 지극한 정과 의리를 가지고 거슬러서 묵묵히 따져보건대, 초기에는 비록 사람들의 공의(公議)에 따랐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러한 조치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를 불만족스럽게 여겨 계속 전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만약 오늘날 명을 받들어 따르지 않는다면 감히 석년(昔年)의 정신을 잘 이어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후로 성인들의 세대와 멀어져 도가 어두워지게 되자 도도한 강물처럼 모두 한 길로 흘러 골육 간에 서로 해치는 짓을 하였다. 그래서 주자(朱子)가 ‘병들어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곡하는가.’라고 하여 후세의 인군이 된 자들을 경책했던 것이다.
대저 난리를 일으킨 역적을 처벌하는 의리는 인군이 잘 들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사람이든지 다 말할 수 있는 것이어서 참으로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용맹스럽거나 겁이 많거나 간의 구분이 없다. 그러나 단지 ‘가까운 친족은 온전히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 꺼리는 말이 되어 지사(志士)들도 입을 다물고 있다. 이번에는 대순(大舜)이 상(象)을 처리했던 전례에 따라 지난날의 매우 다정했던 마음을 몸받고자 하여 정치달 처의 연좌된 죄에 대하여 오늘날 석방하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이에 대해 국사(國史)나 야사(野史)에 쓰기를 ‘참으로 용서해 주기 곤란한 죄인데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편 것은 석년에 아름다움을 돌리고 그것을 드러내 밝히기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의리가 깊고 정미해서 마치 해가 중천에 떠서 온 세상을 훤히 비추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의리를 밝히는 중요한 전언(傳言)이 되어 우리 나라 억만년의 복이 장차 지금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합당한 것이 의리가 되는 점에 있어서는 공정한 것과 합당한 것과는 차이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어버이의 마음을 몸받는 것은 한 개인의 사적인 것이고, 큰 법을 세우는 것은 만세토록 공정한 것이다. 내가 어찌 혹시라도 사적인 것 때문에 공적인 것을 해치겠는가. 돌아보건대, 나는 이미 우리 효묘(孝廟)께서 세룡의 처를 처리했던 고사를 따라서 했다. 그리하여 섬에 두었다가 경기로 옮겼고, 경기에서는 다시 교외로 옮겼으며, 교외에 있다가는 서울로 옮겼는데, 그리하여 서울집에 머무른 지도 어언 한 해가 지났다. 그리고 아울러 도류안(徒流案)에서도 지워 그 이름을 없애버렸다. 이제 와서 그를 석방하라고 명하든 명하지 않든 이것은 붙어 있을 가죽이 없는 터럭이나 다름이 없다. 현재 성실하지 않은 폐단이 아주 많은 상황에서 한결같이 종을 훔치듯이 몰래 하는 것보다는 한번 결판을 지어버리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리고 섬에 옮긴 것이나 경기에 옮긴 것이나 간에 본 의리를 훼손시켰냐 시키지 않았냐 하는 여부와는 관계가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도 매우 많이 생각하고 따져보았는데, 이렇게 하고 나니 내 마음에 비로소 시원하였다. 비단 내 마음에 시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으면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조종의 영혼들도 기뻐하실 것이니, 내가 이제서야 비로소 찾아가 참배할 면목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하교는 많은 말을 고하는 데에 달려 있지 않다. 그리고 이른바 처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대의(大義)에 덜 것도 보탤 것도 없는 것이며 연전(年前)과도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석년에 아름다움을 돌리고 천명함에 있어서는 하나의 바꿀 수 없는 의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치고 어느 누가 감히 정신없이 받들어 따르려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히려 계속 떠들어대며 쟁론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석년의 아름다움이 도리어 막혀서 드러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비록 나 소자의 성신(誠信)이 여러 신하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이것이 어찌 하늘과 땅의 널리 펴서 베풀어 주는 뜻과 하늘에 있으면서 오르락 내리락하며 보살펴 주는 조종의 뜻을 이어받는 것이겠는가. 옳다 그르다 하며 억지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지내며 백일 천일이 되더라도 그대로 재계하는 전각에 머무르면서 위와 아래가 서로 믿게 되는 것을 보게 된 뒤에야 의당 환궁하겠다.
아, 선대의 공렬을 드러내 밝혀 무궁한 후세에 고하는 것이 나 소자에게 있어서는 천년에 한번 있는 기회가 되니,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격스럽기도 하며 술에 취하고 꿈을 꾸는 듯하다. 그리고 부모님에 대해 맺힌 한이 이로 인해 조금 풀리고 금 칠한 첩장이 만약 이로 인해 더욱 드러나게 된다면 천년이 지난 뒤에도 의당 나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의 말에 감복할 자가 있게 될 것이다. 오늘 여러 신하들이 만약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즉시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20년 동안 한 세상을 교화했다고 여긴 것이 과연 무슨 일인가. 내가 모년의 의리를 부식(扶植)한 것이 조정 신하들이 《명의록》의 의리를 부식한 것보다 백배나 되는데, 이 하교를 듣는 자가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고 ‘혹시라도 《명의록》의 의리에 손상되는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다면, 이것은 내가 모년의 의리를 닦아 밝히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내 자신부터 흐릿한 것이다. 신하로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도 신하답지 못하다고 하는 것인데, 더구나 자식으로서 자식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조는 의당 천하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이니, 이것은 한 걸음 나아갈 수도 없고 한 걸음 물러갈 수도 없으며, 한 층을 더할 수도 없고 한 층을 감할 수도 없으며, 조금을 펼 수도 없고 조금을 줄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이른바 의리란 것은 공평하고 합당한 것이다. 주자는 두 정자(程子)를 스승처럼 대했으면서도 마음 속에 있는 호문정(胡文定)으로 문하에 온 제자들을 일깨워 가르쳐 주었다. 지금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개 정치달 처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문제는 놔둬버리고 오늘날 환히 유시한 것을 몸받고 모년의 큰 의리를 밝히며, 오직 아름다움을 돌리고 드러내 밝히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좀더 위를 향하여 토대를 잡는다면 사람들이 모두 부자를 외우며 익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소 신하들은 모름지기 모두 이러한 뜻을 잘 알아 듣도록 하라."
하였다. 읽기를 마치니,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삼가 수천만 자나 되는 윤음을 듣고, 신은 참으로 감격하여 목이 메이는 것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단지 약간의 틈을 내주신다면 우러러 아뢸 말이 있습니다."
하고, 판부사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윤음 가운데의 의리가 지극히 정미하여 신과 같이 글을 읽지 않은 자는 감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물러가서 글을 읽은 뒤에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유지를 내주게 하면서 이르기를,
"면대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은 바로 맞장구를 치지 않은 일을 이른다. 한번 붓을 적셔 쓴 것은 바로 부득이해서 한 일이다. 방금 전 하교한 뒤에 남면하고 북면하여 인군이니 신하니 하면서 어찌 차마 이 일을 다시 제기할 수가 있는가. 윤음이 일단 나가게 되니, 전일에 두 가지로 보았던 의리가 이제 비로소 그 근원이 환히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와 대등한 사람 이하에 대해서는 만약 친족을 위해서 아름다움을 돌린다고 한다면 타인이 된 자들도 또한 다시는 이와 같다느니 저와 같다느니 하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제기할 수 없는 일이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신이 만나줄 것을 요구한 것은 어떤 일 때문인지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차마 이 말을 다시 꺼낼 수가 없다. 방금 전에 하교한 것은 정녕할 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니, 그렇다면 신하가 되어 신하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비록 대신일지라도 공경하는 예를 돌아볼 수 없는 점이 있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이 만나줄 것을 요구한 것은 이 일 때문이 아니었는데 엄한 하교를 이와 같이 계속 내리니, 신은 감히 이를 받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환지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정치달 처의 일 때문에 전교를 내렸는데 만약 환수한다면 응당 하교를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삼사의 신하들이 만나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시임·원임 대신 및 각신(閣臣)을 재전(齋殿)에서 불러 만나보았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방금 전에 내리신 윤음을 보고 비로소 《명의록》의 의리가 연유한 근원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윤음이 일단 발표되자 정치달 처의 죄가 더욱 드러나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신은 감히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조용히 조섭하시던 뒤에 재전(齋殿)에 임어하셨으면서도 ‘비록 백일 천일이 지나더라도 앉아서 제신들이 받들어 따른 뒤에야 의당 환궁하겠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신은 이것 때문에 만나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도리어 엄한 하교를 받게까지 되었으니, 황공한 심정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임어한 지 24년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모년의 의리를 말하지 않았다. 연전에 한번 경연에서 제기하여 말하기는 했지만 전교는 이번에 처음 내린 것이다. 이는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신하로 있으면 신하의 도를 극진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정처의 일에 대해 경들이 어찌 쟁집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나 또한 어찌 아름다움을 밝히고 아름다움을 돌릴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이와 같이 해서 신하가 되었으면 신하의 도리를 극진히 하고 자식이 되었으면 자식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이다.
대저 《명의록》만이 따로 돌아다니는 것은 그 속에 모년의 의리를 붙여 넣는 것만 못하다. 그렇게 한 뒤에야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환히 그 유래한 근원에 대해 알게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의 윤음은 한결같이 석년(昔年)에 아름다움을 돌리고 성덕(聖德)을 드러내 밝히는 것으로 위주를 삼았다. 얼핏 보면 알기가 어려운 것 같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그 정미한 것을 분변하기가 어렵지 않다. 지금 이 조정에서 신하로 있는 자가 만약 《명의록》의 의리를 모년의 의리와 연결시켜 보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차마 나로 하여금 이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다시 제기하게 하는 것인가. 선조(先朝)께서 선인문(宣仁門)에서 전좌(殿座)하셨을 때에 엄한 처분을 내리셨다. 이에 고상(故相) 김재로(金在魯) 이하도 감히 성교를 받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속마음은 따로 있으면서 겉으로의 행동만 같게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석년의 여러 신하들은 오히려 받들어 따랐다. 항차 지금 의리가 환히 드러났는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지금은 모든 일을 매양 고식적으로 잘못을 떠넘기기만 하여 눈앞의 사태를 넘기려는 계책만 하니, 너무나도 성실치 못한 것이다. 정처가 서울집에 와서 거처한 것을 경들이 과연 모르고 그러는 것인가. 이 일을 한번 마무리짓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봄철 참배를 지낸 뒤에 통유(洞諭)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번에 재소(齋所)에서 하유한 것이다. 그러니 경들로서는 받들어 따르는 것이 십분 도리에 맞는 행동이다.
판부사가 얼마 전에 요청한 지난 번 전교를 환수하라는 것은, 이번 윤음이 내린 뒤에는 전날의 전교가 있고 없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이 조목을 들어 진달했으니, 내 의당 비답을 내려 환수하겠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는 물러났다가 이번에는 무릅쓰고 나왔는데, 진퇴가 모두 합당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가 구구하게 논집하는 것은 반드시 대방(大防)을 엄히 하고 대의(大義)를 밝히려고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날의 전교는 실로 감히 받들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윤음은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석년의 아름다움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드러났고, 《춘추》의 아름다운 뜻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에 정치달 처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가 천지의 사이에서 도망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명의록》 한 책도 세월이 더욱 오래 흐를수록 더욱 공고해지는 것을 볼 수 있고, 천하와 만세에도 길이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생각건대, 전날에 내리신 전교 가운데에 죄명(罪名)을 완전히 용서해 준다는 구절과 ‘애매하다.[䵝昧]’라는 두 글자에 대해서는 성상의 생각이 미처 자세하게 점검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일 이를 얼핏 본 사방의 사람들이 혹 그 죄를 완전히 용서해 준 것으로 잘못 안다면 못된 무리들이 머뭇거리면서 틈을 엿보는 것이 의당 어떠하겠습니까. 윤음이 한번 반포된 뒤에 처분하는 사이에서 재량한 것에 대해서도 이미 해와 별처럼 밝게 게시하였으니, 그렇다면 이전에 내린 전교를 환수하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 끝까지 윤허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일의 경중에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날의 우려에 관계되는 것은 이미 저와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다시 정지할 것을 명하시어 대방(大防)을 더욱 엄하게 하고, 대의(大義)를 더욱 밝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윤음이 족히 믿을 만하니, 전교는 쓸데없는 글이라고 할 만하다. 이전의 전교 가운데에 ‘애매하다.’고 한 것은 비록 용서한 것 같은데 석방하지 않아서 상황이 구차하다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지만 잘못 보기 쉽게 되었으니, 경의 말이 옳다. 그리고 ‘완전히 석방한다.’고 말한 것에 이르러서도 죄명에서 빼내어 용서해 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전교를 환수하려고 한다면 또한 어찌 인색하게 굴며 버틸 것이 있겠는가. 특별히 청한 것에 대해서는 허락한다. 그리고 이번에 내린 윤음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환지가 또 아뢰기를,
"오늘 윤음에 있는 한편의 의리는 실로 《춘추》의 필법에서 나온 것이니, 신들이 어찌 감히 한마디 말이라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완전히 용서하고 완전히 석방한다.’는 구절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헤아려야만 할 점이 있는 것 같기 때문에 감히 우러러 아뢰는 것입니다. 아울러 거듭 깊이 생각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완전히 용서하고 완전히 석방했다는 말의 본뜻에 대해서 이미 상세하게 말해 주었는데에도 오히려 어떠한 것이냐고 하니, 그렇다면 사단(事端)이 좀 편안해지고 의리가 환히 밝아지게 된 뒤인 지금 어찌 굳이 심히 관계될 것도 없는 구절을 가지고 서로 버틸 필요가 있는가. 윤음 가운데에 ’완전히 용서하고 완전히 석방한다.’는 구절은 ‘석방할 것을 명한다.’고 고쳐 써서 내려 보내라. 이것은 곧 아름다움을 드러내 밝히고 아름다움을 옛날로 돌리려는 것 외에 한결같이 애써 굽히고 따라 대신을 공경하고 예우함으로써 경들로 하여금 거취를 정함에 있어서 여유있게 근거할 곳이 있게 하려고 해서 한 것이다."하였다.
상이 환궁하다가 관기교(觀旂橋)에 이르러 성균관의 유생들이 맞이하러 나온 것을 보고, 하교하기를,
"어가를 맞이하러 나온 유생들을 설이 지난 뒤에 처음 본다. 거안(擧案)을 올리고, 내일 그들로 하여금 성균관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어제(御題)가 내리거든 나아가 제술에 응시하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5일 계미
이방일(李邦一)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3월 26일 갑신
민태혁(閔台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27일 을유
시임 및 원임 대신들과 예조 판서가 만나줄 것을 요청하여 입시하였다. 좌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자궁의 건강이 회복된 것은 국가의 큰 경사입니다. 그런데 탕제를 전하께서 반드시 대내에서 맛보고 올렸기 때문에 외간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날 애타셨을 마음을 우러러 헤아려보건대, 지금에 이르러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외간에서 이미 알지 못했으므로 비록 직숙(直宿)할 것을 청하지는 못했지만 상께서 여러 달 동안 시약(侍藥)하셨으니, 이는 단지 열흘 동안 직숙한 것 정도로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의당 경사를 칭송해야 합니다. 더구나 성후(聖候)의 건강이 회복되신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경사로 상하의 사람들이 서로 똑같이 춤을 추며 발을 구르니, 그렇다면 경사를 하례하는 의식을 행하는 것은 아랫사람의 심정이나 도리에 있어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예조 판서를 데리고 와서 우러러 청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궁의 병환은 지난해 섣달부터 올해 2월까지 40여 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때의 애타는 마음은 무어라고 형언하여 말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2월 열흘 뒤로부터 다행히 조금씩 차도가 있더니 이제는 아픈 것이 다 나아서 잠 자고 음식을 드는 것이 오히려 지난 겨울 이전보다 더 낫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사스럽고 다행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내가 반드시 경사를 축하하고픈 심정이 어찌 경들보다 못하겠는가. 그렇지만 약원(藥院)이 직숙한 뒤에야 하례를 한다는 것에 대해 이미 선조(先朝)에 하교를 받은 것이 있다.
그리고 자궁의 겸손해 하는 덕으로 볼 때 크게 벌리려고 하지 않으니, 받들어 따르는 도리에 있어서도 억지로 청할 수 없다."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직숙을 서는 것은 별다른 일이 아닙니다. 문안해 온 지가 이미 40여 일이 되었으니, 열흘 동안 직숙한 것에 비교하면 훨씬 더한 것입니다. 경하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실로 신민들의 바람에 부합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 애타던 마음을 가지고 미루어보면 진하하는 것으로도 오히려 그 경사를 축하하기에 부족하다. 그렇지만 경사를 축하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하교를 받은 것이 있으니, 하례하는 의식은 형세상 청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니 별도로 전교를 내려 약원에 상전을 베풂으로써 한편으로는 경사를 축하하는 것으로 삼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외의 사람들이 모두 자궁의 병환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심환지가 아뢰기를,
"직숙한다는 것은 절목 사이의 일에 불과합니다. 이번의 경우에는 직숙한다는 칭호는 없었지만 그 사이 성상의 노심 초사하시던 심정은 직숙하는 것보다 배나 더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늘날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청하는 것을 윤허하여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황승원(黃昇源), 참판 남공철(南公轍), 참의 김조순(金祖淳)이 차례로 진달하여 청하고, 각신 정민시(鄭民始) 등도 이어서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오늘 청한 것을 중외에서 듣고 자궁의 병환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경들이 청한 말만 가지고도 기쁜 경사를 꾸미는 방도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하교하였다.
"대신과 예조 판서가 자궁의 병환이 회복되었으니 하례하는 의식을 거행하자고 하며 만나줄 것을 요청하였다. 내가 설이 지난 뒤로 40여 일 동안 애타는 심정으로 지냈었는데 이렇게 시원스럽게 회복되는 경사를 만났으니, 그 기쁜 심정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전례(典禮)에 있는 바이니, 기쁨을 꾸미고 정성을 펴는 방도를 어찌 반드시 더디게 여러 사람들이 청하는 것을 기다리겠는가. 다만 열흘 동안 직숙을 한 뒤에야 하례할 것을 청하고 상 줄 것을 논하는 것에 대해서는 선조(先朝)에 정식(定式)이 있고 하교를 받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미 직숙하지 않았으니, 하례하는 의식을 거행할 수 없다. 제조와 대령 의관(待令醫官)에 대해서 전례와 같이 논상하지 않았으니, 그들에게도 어찌 참작해서 공로를 보답하는 은전을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약원의 여러 신하들과 의관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시행하도록 하라."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원자에게 강학하는 것이 근래 유선(諭善)이 갖추어지지 않아 하다 말다 하곤 하였습니다. 봄이 되어 날씨가 점차 따뜻해져 일각도 아껴야 합니다. 그런데 우유선 이성보(李城輔)가 아직도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비록 쇠약하고 병이 들어 올라오지 못한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전후로 돈독히 나오기를 권면하는 하교를 허례(虛禮)로 베푼 적은 일찍이 없습니다. 그에게 봄이 되거든 출발하기를 바란다고 하였으니, 그의 우러러 받드는 마음으로 보아 의당 가까운 시일 안에 도성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돌아보건대, 지금 개강하는 것을 하루라도 헛되이 보내며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강연에 나오라는 하교를 다시 내리시어 그로 하여금 기꺼이 마음을 고쳐서 올라오게 하는 것이 실로 지금에 있어서의 급선무라 하겠습니다."
하니, 이를 따랐다. 이병모가 또 아뢰기를,
"우유선이 비록 올라온 뒤일지라도 그 혼자서 매일 진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삼가 강서원(講書院)의 이전 규례에 따라 산림(山林)의 선비인 경우에는 실 유선(實諭善)을 삼고 정경(正卿)과 아경(亞卿) 중에서 좌우 겸 유선을 차출하되 그대로 빈객(賓客)의 제도를 모방하여 서로 바꾸어 진강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간혹 유선이 무슨 일이 있게 되면 요속 2원이 입대하여 개강하기를 마치 빈객이 참석하지 않았을 때에 춘방(春坊)이나 계방(桂坊)에서 모시고 강론하는 규례와 같이 한다면 관제(官制)도 이미 의거할 것이 있게 되어 강규(講規)가 있었다 없었다 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유선을 실직으로 하는 것과 겸직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국조(國朝)의 고사를 참고해 보니, 이미 의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강규가 이와 같이 된 뒤에야 원자의 학문이 빛나게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를 따랐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전 응교 이노춘(李魯春)과 김희순(金羲淳)은 당하관으로 오래 있었는데, 근래 통정 대부도 매우 사람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이 두 사람의 문벌이나 문학이 모두 올려 쓰기에 합당합니다."
하니, 이를 따랐다.
3월 28일 병술
성균관과 사학 유생들의 응제 시권(應製試券)을 점수를 매긴 뒤에 내려 보냈다. 수석을 차지한 자들에게 새로 찍어낸 《춘추》를 하사하고, 차석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금년도 매달 실시하는 일차 전강(日次殿講)과 도기 절제(到記節製)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고, 유학인 경우에는 도기절제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교하였다.
"국조(國朝)의 고사를 상고해 보니, 문신 참하관(參下官)이 부족하면 으레 춘당대(春塘臺) 시험을 치뤄 선발하였고, 무신 선전관이 부족해도 춘당대에서 시험을 보였는데, 이때에는 유생 대거(儒生對擧)로써 하였다. 근일에 문신의 수효가 부족하기 때문에 장차 품계를 올려 다른 관직으로 옮기려 하는데, 과거를 시행하여 사람을 뽑는 것은 따라야 할 고례(古例)이다. 그런데 때가 마침 농사철을 당했고 가을에도 알성시를 행해야 하니, 우선 응당 치뤄야 하는 과거만 설행하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정사를 해야만 한다. 그러니 선조(先朝)의 원점 유생을 시취하던 때의 먼저 제술 시험을 치르고 그 다음에 강을 한 전례에 따라 도기 제술의 경우는 먼저 몇 사람을 뽑은 뒤 다시 시험을 보여 출방(出榜)하고, 일차 전강의 경우는 원하는 것에 따라 제술이든 강경이든 하여 우선 몇 사람을 뽑은 뒤 다시 시험을 치뤄 출방하며, 삼제(三製)의 경우는 지방까지 포함하여 인군이 임한 자리에서 일곱 시관이 구비된 상태에서 시험을 치뤄 뽑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제생들로 하여금 잘 알아듣도록 일러 주라."
삼사가 【대사간 민태혁(閔台爀), 사간 조윤수(曺允遂), 정언 윤함(尹涵)·이경삼(李敬參), 장령 현중조(玄重祚)·정한(鄭澣), 지평 이동우(李東宇)·남혜관(南惠寬), 응교 홍낙유(洪樂游), 부응교 윤서동(尹序東), 교리 윤우열(尹羽烈)·민명혁(閔命爀), 부교리 이정운(李貞運)·남이익(南履翼), 수찬 한용탁(韓用鐸)·김이재(金履載), 부수찬 박윤수(朴崙壽)·윤익렬(尹益烈)이다.】 합계하기를,
"정치달(鄭致達)의 처에 대해서는 연전에 도성 밖으로 내보내 두라는 명을 내렸었는데, 편리한 대로 성문에서 가까운 곳에 거주하고 있었으니, 이것도 이미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하교를 받고서야 비로소 서울집에 들여다 둔 것과 또한 죄명을 빼버리고 석방할 것을 명하는 조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 윤음을 반포한 뒤에 이 적들이 저질러온 죄악이 더욱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뜻밖의 처분은 도리어 관대하게 용서하였으니, 이는 대단히 형정(刑政)을 잘못한 것입니다. 신인(神人)의 분하고 답답해 하는 것이 더욱 격렬하고 종사의 근심이 더욱 깊으니, 죄인 정치달의 처에 대해서 죄명을 빼버리고 석방하라고 한 명을 빨리 중지하고, 전에 한 대로 유배지로 도로 보내소서. 그리고 의금부에 명하여 속히 전형(典刑)을 바로잡게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해서 올린 《은배시집(恩杯詩集)》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이에 앞서 일차 유생(日次儒生)들이 강경과 제술 시험을 치를 때에 특별히 은배(恩杯)를 하사하여 태학에 보관해 두도록 하고, 대제학 홍양호(洪良浩)와 대사성 이만수(李晩秀)에게 명(銘)을 짓게 하고는 어제 서문(御製序文)을 내려 주어 현판을 만들어 명륜당(明倫堂)에 걸어두게 하였다. 그리고 또 내각(內閣)의 여러 신하들과 초계 문신, 그리고 제술 시험에 응시했던 여러 유생들에게 명하여 각기 시가(詩歌)를 지어 그 일을 읊게 하였다.
이에 이것들을 모아 편집하고, 그 첫머리에다는 이제까지 응제하게 된 사실을 모두 기록하여 주자소에 넘겨 인쇄하게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비변사가 공상지(供上紙) 공인(貢人)들이 품고 있는 생각을 가지고 아뢰기를,
"호조에서 제련하는 예를 상고하고 공인들이 진술한 말을 가지고 참고해 보니, 정은(丁銀)은 8성(星)으로 논하고 천은(天銀)은 10성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은 10냥을 천은 8냥으로 대납하게 한다면 성수가 이미 더하거나 줄어드는 것이 없어 뒷날의 폐단은 막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막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분부하되 만일 혹시 정은으로 마련하여 준비할 때인 경우에는 의당 전과 같이 정은으로 거행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3월 30일 무자
경상도 관찰사 신기(申耆)가, 영양현(英陽縣)의 민가 59호와 창고 48칸이 불에 타버렸다고 치계하니, 하교하기를,
"쇠잔한 고을의 민정(民情)이 매우 불쌍하다. 의당 베풀어 주어야 할 규정 이외에 각별히 진휼해 주고 재목도 베어 주어 속히 자리를 잡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어라."
하였다.
서장관 서유문(徐有聞)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렸다.
"1. 사신 일행이 산해관에 들어간 뒤에 바로 연경의 장사꾼들이 서로 전하는 말을 통해 태상황(太上皇)이 이미 붕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으레 백일 안에는 비밀에 붙이고 초상이 났다는 것을 발표하지 않기 때문에 바깥 사람들은 아직 상세히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병을 앓고 있는데 지금은 조금 차도가 있다. 그렇지만 어떤 때에는 아침에는 매우 고통스러워하다가 저녁이 되어서는 조금 차도가 있고 밤에 또 신음을 하다가 낮에 다시 화평해지곤 하는데, 날마다 이와 같지만 점점 전과 같지 않다.’ 하는데, 전하는 말이 같지 않고 자꾸자꾸 와전되고 있습니다.
19일 북경에 도착하던 날 저녁에 통관(通官)이 태상황의 지시를 가지고 와서 전달하기를 ‘조선 사신을 내일 만나보아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비록 인견하지는 못했지만 정월 초하룻날에 전각을 나누어 하례를 받았으므로 도성 사람들도 말하기를 ‘태상황의 병환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월 3일 오시에 아문(衙門)에 있는 통관이 모자 위에 있는 붉은 끈을 떼었고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태상황이 그날 묘시에 붕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황성(皇城) 안은 평일같이 안온하였고 조금도 놀라거나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근 백세가 된 노인에게 있는 예사로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 새로 즉위한 황제가 효성스럽고 인자하니, 태상황은 참으로 옛적에도 드문 복받은 태평 천자이다.’ 하였습니다.
1. 저 중국의 옛 제도는 황제가 붕어하면 백일 동안 비밀에 붙이고 초상이 난 것을 발표하지 않다가 새 황제가 즉위한 뒤에야 비로소 발표합니다. 그런데 이번의 신 황제는 즉위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고 인심이 귀의하여 쏠리고 있기 때문에 옛날의 제도에 구애되지 않고 이미 초상이 난 것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상제(喪制)는 원래 며칠 동안 상복을 입는다는 절차가 없고, 황제 이하로 왕(王)·공(公), 그리고 서관(庶官)에 이르기까지 일체 상복을 입어야 할 자들은 단지 모자 위에 있는 붉은 끈만을 떼어 버리고 양가죽으로 만든 털가죽 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털가죽 옷 안에는 모두 대포(大布)로 만든 옷을 입었는데, 그 제도는 우리 나라의 두루마기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푸른색 옷을 입기도 하고 검은색 옷을 입기도 하여 일반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맨 처음 대포로 만든 옷을 입으면 반차(班次)에 들어가 곡을 하는데, 이것을 성복(成服)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애당초 천자는 7일 동안 있다가 하는 제한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만주족과 한족은 상례에 관한 제도가 같지 않았는데, 만주족은 모두 흰옷을 입었고 한인들은 단지 백일 동안 머리를 깎지 않았으며, 이들 모두 대궐에서 모여서 곡하는 규례는 없었습니다.
1. 순치 황제(順治皇帝)는 계주(薊州)에 장사지냈고 강희 황제(康熙皇帝)는 이주(易州)에 장사지냈으며 옹정 황제(雍正皇帝)는 이어서 계주에 장사를 지냈으니, 태상황은 의당 이어서 이주에 장사를 지낼 것입니다. 이것은 순치 황제의 유조(遺詔)로 소(昭)에 해당되는 경우는 소에 붙이고 목(穆)에 해당되는 경우는 목에 붙이는 제도로 삼은 것이라고 합니다.
1. 태상황의 장례는 의당 7월에 치뤄야 하는데 장마가 질까 염려가 됩니다. 그리고 산의 방향이 이롭지 못하여 9월에 치루기로 정하였습니다. 한편 붕어한 날로부터 계산하여 만 백일이 지난 뒤에 발인하여 능이 있는 곳에 가서 인산(因山)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이미 9월 15일로 날짜를 잡았다고 합니다.
1. 묘호(廟號)는 이미 의논하여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로 정하였습니다. 원래는 의당 조(祖)라고 해야 하는데 종(宗)이라고 한 것은 태상황의 유지(遺旨)에 따라 그렇게 한 것입니다. 고종 두 글자도 유의(遺意)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묘는 의당 장례를 다 지낸 뒤에 할 것입니다.
1. 경산(景山)으로 빈소를 옮기던 날 신들 일행은 길가에서 맞이하며 곡을 하였는데, 황제는 몸을 돌려 돌아보고는 그대로 통곡하면서 조문을 받는 것처럼 머리를 숙였습니다. 대개 저들의 예는 조문을 받을 때에 으레 머리를 숙이는데, 이것은 바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존귀한 사람과 낮은 사람 사이에는 일찍이 이런 예를 쓴 일이 없습니다. 이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의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우대한 것이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외국 사신이 소리내어 우는 것을 본 데다가 태상황이 계실 때 우대하던 것을 생각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1. 지난 해 초겨울에는 그곳에 돌림병이 매우 성하여 병을 앓는 자가 계속 이었습니다. 사망한 자들의 수효를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연로(沿路)를 갔다가 올 때에 마을 사람들을 보니, 상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지금은 태상황의 말년 운에 해당되어 이러한 일이 있게 된 것이다.’고 하기도 하고, 또한 곧 깨끗해질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1. 황제는 3년복을 입으려고 하였는데, 종실인 영은(永恩) 등이 아뢰기를 ‘천자의 효도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니, 하루를 한달로 치는 제도를 따라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에 황제가 유시하기를 ‘돌아가신 황제께서 길러주신 깊은 은혜는 하늘처럼 끝이 없어 비록 피눈물을 흘리고 애통해 하며 종신토록 슬퍼하고 사모한다 하더라도 그 은혜를 갚기가 어렵다. 황후에 대해서도 하루를 한달로 치는 제도를 차마 시행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삼년상에 대해서는 예경(禮經)에 실려 있으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바라건대 여러 왕들과 대신들은 다시 청하지 말라. 그리고 삼년상을 거행하는 절차에 대해서 전례(典禮)를 자세하게 상고해서 의논한 뒤에 갖추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는데, 결국 심상(心喪) 3년으로 스스로 결정지어 마련했다고 합니다.
1. 황제는 올해 40세이고 황제의 친형제는 세 사람인데, 바로 여덟 번째인 의친왕(義親王) 영선(永璿), 열한 번째인 성친왕(成親王) 영리(永理), 열일곱 번째인 석친왕(碩親王) 영성(永瑆)입니다. 황제의 아들은 한 명뿐인데, 지금 14세로 이번에 전에 각로(閣老)였던 만인(滿人) 아리곤(阿理袞)의 손녀와 혼인할 것을 정하였습니다. 태상황의 손자는 모두 12명이고 증손은 4명이며 원손(元孫)은 1명이라고 합니다.
1. 1월 4일에 화신(和珅), 군기 대신(軍機大臣), 그리고 구문 제독(九門提督) 등을 체직시켰고, 이어 복장안(福長安)과 함께 밤낮으로 빈전에서 수직을 서서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게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태학사 유용(劉墉)과 이부 상서 주규(朱珪)를 불러들였는데, 주규는 화신에게 모함을 당해 그 당시 강남을 순무(巡撫)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8일에 화신을 형부의 옥에 가두고 그의 20가지 큰 죄를 조목조목 열거하여 중외에 포고하였습니다. 그 유시에는 ‘짐은 건륭 60년 9월 3일 돌아가신 황제께서 황태자로 책봉해 주셨으나 아직까지 유지(諭旨)를 선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화신은 초이튿날 바로 짐의 앞에서 먼저 여의(如意)를 체직시키고 기밀을 누설하는 한편 태연하게 추대한 것을 자신의 공으로 삼았으니, 그 첫 번째 큰 죄이다. 돌아가신 황제가 원명원(圓明園)에 계실 때 화신을 불러 보았는데, 그는 마침내 말을 타고 곧바로 좌문(左門)으로 나아갔으며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을 지나 수산구(壽山口)까지 갔으니, 그의 군부를 무시한 죄가 더할 나위 없이 심하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큰 죄이다. 또 넓적다리가 아픈 것을 인하여 의교(椅轎)를 타고 대내에 들어왔고 견여(肩輿)를 타고 신무문(神武門)를 출입하면서도 조금도 거리끼는 것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 세 번째 큰 죄이다. 그리고 궁에서 나온 여자를 자신의 두 번째 처로 삼으면서 염치라고는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 네 번째 큰 죄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황제께서 군수(軍需)를 염려하여 밤낮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도 화신은 각로의 군영에서 번갈아가며 보고해온 것을 속이고 은폐하려는 속셈으로 자기 멋대로 그대로 놔두고 질질끌어 군영의 일이 날짜가 오래 지났어도 끝마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다섯 번째 큰 죄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황제께서 몸이 편찮으실 때에 화신은 조금도 걱정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며, 매번 알현한 뒤에는 바깥뜰에 나와서 평상시처럼 담소하였으니, 이것이 그 여섯 번째 큰 죄이다. 그리고 지난 겨울 돌아가신 황제께서 아픈 몸을 무릅쓰고 문서를 펼쳐 보시고는 비답을 내리셨는데, 자획이 더러 잘못된 곳이 있었다. 그러자 화신은 감히 차라리 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하고는 결국 별도로 의지(擬旨)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그 일곱 번째 큰 죄이다. 전에 돌아가신 황제의 칙지를 받들어 그로 하여금 이부와 형부의 사무를 관리하게 하였고, 이어 군수(軍需)가 줄어드는데 그가 이에 대해서 익숙하기 때문에 또 유지를 내려 그로 하여금 호부의 수지 결산을 보고하는 문서를 겸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결국 그는 호부의 사무를 자기 혼자 틀어쥐고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전례를 변경시켜 놓았으니, 이것이 그 여덟 번째 큰 죄이다. 지난해 12월 내규서(內奎舒)가 보고하기를 「순화청(循化廳)과 귀덕청(貴德廳)에 도적들이 천여 명이나 되는 대중을 모이게 해서 달뢰랄마(達賴喇嘛) 상인들의 소를 빼앗았고 사람 두 명을 살해하였으며, 청해(靑海)에서는 멋대로 문서 하나를 겁탈해 갔다.」고 하였다. 그런데 화신은 결국 그것들의 본말을 따지지 않은 채 기각해 버리고 은닉하였으니, 이것이 그 아홉 번째 큰 죄이다. 먼저 황제가 승하한 뒤에 짐이 몽고의 왕과 공들에게 유시하여 아직 마마를 앓지 않은 자들은 굳이 서울에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화신은 짐의 유지를 따르지 않은 채 이미 마마를 앓은 자들도 모두 올 필요가 없다고 명하였다. 이렇게 그는 국가에서 외번(外藩)을 위무해 주려는 뜻을 전연 돌아다 보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 열 번째 큰 죄이다. 태학사 소릉아(蘇凌阿)는 두 귀 모두 잘 들리지 않고 노쇠하여 직무를 감당하기 어려운데도 그의 아우인 화림(和琳)의 인척이 되는 것 때문에 끝내 숨기고 아뢰지 않았다. 그리고 시랑 오성란(吳省蘭)과 이황(李潢), 태복시 경(卿) 이광운(李光雲)은 전에 그의 집에서 글을 가르쳤다고 해서 모두 보열경(保列卿)의 품계를 주고 겸하여 학문에 관한 정사를 맡아 보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열한 번째 큰 죄이다. 그리고 군기처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을 화신이 자기 마음대로 철거시켰으니, 이것이 그 열두 번째 큰 죄이다. 어제 화신의 집을 조사해 보니, 남목(楠木)으로 꾸민 집의 참람되고 사치스러운 것이 법제를 넘었다. 또한 다보각(多寶閣)과 격단(隔段)의 양식은 모두 영수궁(寧壽宮)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고, 동산을 꾸며 놓은 것은 결국 원명원(圓明園)이나 봉도(蓬島)의 요대(瑤臺)와 다름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 열세 번째 큰 죄이다. 계주의 분묘에는 제사지내는 전각을 버젓이 세워놓고 수도(隧道)까지 만들어 두었으므로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화릉(和陵)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그 열네 번째 큰 죄이다. 그리고 집안에 가지고 있던 구슬과 보물 중에 진주 팔찌가 2백여 개나 되었으니, 이것은 대궐 안에 있는 것보다도 몇 배나 많은 것이다. 그리고 큰 구슬이 있었는데 이것은 황제의 관(冠) 위에 다는 것보다도 더욱 컸으니, 이것이 그 열다섯 번째 큰 죄이다. 또한 보석정(寶石頂)은 그의 머리 위에 얹을 물건이 아님에도 그가 가지고 있었던 진짜 보석정은 수십여 개가 되었다. 그리고 덩이 채로 있는 큰 보석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니, 이것이 그 열여섯 번째 큰 죄이다. 집안에 있는 은냥과 옷가지 따위의 숫자가 천만 개를 넘었으니, 이것이 그 열일곱 번째 큰 죄이다. 그리고 협장(夾墻)에 쌓아 놓은 금이 2만 6천여 냥이나 되었고, 땅굴 속에 묻어 놓은 은냥도 백만여 냥이 되었으니, 이것이 그 열여덟 번째 큰 죄이다. 서울 부근의 통주(通州)와 계주 지방에 모두 당전점(當錢店)이 있는데 그곳의 자본을 조사하여 계산해 보니, 십여만 냥을 밑돌지 않았다. 이것이 그 열아홉 번째 큰 죄이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유금(劉金)이라는 자는 미천한 가노(家奴)에 불과한데도 그의 자산을 조사해 보니, 이십여만 냥이나 되었다. 그리고 아울러 큰 구슬과 진주 팔찌가 있었으니, 만약 명하여 거두어들이게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스무 번째 큰 죄이다. 그밖에 탐욕스럽고 망령된 그의 행동은 이루 다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이러한 자는 이제까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자이다. 복장안(福長安)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저씨, 조카, 그리고 형제가 대대로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더욱 다른 사람과 비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는 군기처에 있었을 때에 화신과 아침저녁으로 서로 모여 있었으니, 화신의 제반 탐욕스럽고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여러 가지 불법적인 죄목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돌아가신 황제에게 두터운 은혜를 입어 항상 독대하는 기회를 가졌었는데 만약 그가 사실에 의거해서 곧게 진달했다면 다른 사람이 논핵하는 것에 비교해볼 때 더욱 확실하고 근거가 있어 돌아가신 황제께서는 반드시 화신을 중하게 치죄하고 법을 바로잡기를 마치 전에 조친(調親)의 안(案)을 처리했던 것과 같이 처리하셨을 것이다. 어찌 조금이라도 너그럽게 풀어주어 그로 하여금 멋대로 잘못을 저지르게 해서 군국(軍國)의 중한 사무를 한결같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겠는가. 그의 한 패거리가 되어 숨겨준 정상이 환하게 드러났다. 만일 복장안이 짐의 앞에 있으면서 한 글자라도 언급한다면 짐은 단연코 수긍하지 않고 그까지 함께 파직시키고 잡아다가 신문했을 것이다. 지금 그의 집을 조사한 것에 의하면, 재물이 화신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금은과 구슬 및 보물의 수효가 천만 개가 넘었다. 이것들은 그의 집에 응당 있어서는 안될 물건일 뿐만이 아니다. 그 탐욕스럽고 아둔하기가 화신에게 다음가니, 아울러 죄를 의논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주에게 장가든 그의 아들과 군왕(郡王)이 된 그의 사위 및 비첩(婢妾)과 노복들은 모두 동시에 잡아다 가두었으며 그의 집 문을 봉하고 노적(孥籍)한 뒤에 제8왕으로 하여금 그 일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화신의 별장은 또한 서산(西山)의 바닷가에 있었는데 그것 또한 한 명의 황손(皇孫)으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고 몰수하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화신의 집에는 보물이 산처럼 쌓여서 왕부(王府)보다 많았습니다.
황제가 처음에는 그의 살을 도려내어 죽이려고 하였는데 화신의 자부가 된 황제의 누이동생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지체(支體)만은 온전히 해줄 것을 여러 차례 간청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신인 동고(董誥)와 유용(劉墉)도 틈을 타서 아뢰기를 ‘화신의 죄는 비록 만 번 도려내어 죽이더라도 오히려 가벼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조(先朝) 때에 대신을 역임했으니, 그 다음의 율을 적용하기 바랍니다.’ 하니, 황상께서 한참 동안 있다가 그렇게 하도록 하라고 윤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정월 18일에 비단을 내려보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습니다. 화신은 목숨을 끊기에 앞서 시를 지었는데,
진짜인지 환상인지 꿈속같은 오십 년의 삶이여
오늘에야 손을 떼고 티끌 세상 떠나노라
뒷날 조수물이 용을 삼킬 제
향 연기가 피어오르면 그것이 바로 나의 후신이리
하고, 마침내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하여금 예를 차리고 빈소를 마련하게 하였습니다. 화신의 아들은 며칠 동안 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즉시 놓아주고는 대궐 안에 불러다 두었는데, 이날 비로소 가서 영결하도록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쓰는 것과 띠도 주고 집에 가서 한가로이 지내며 있게 하였습니다. 복장안도 화신과 같이 옥에 가두고 그의 집 재산을 몰수하였습니다. 그도 함께 죄를 논하여 화신의 다음가는 율을 적용했다고 하는데,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습니다.
1. 새 황제는 병진년 즉위한 이래로 정사를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화신이 간혹 정령(政令)에 관한 사항을 아뢰어 황지(皇旨)를 내릴 것을 청하면, 매번 살펴보지도 않고 이르기를 ‘오직 태상황만이 처분하실 수 있는 것이니, 짐이 어떻게 감히 간여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화신도 또한 자기 생각대로 행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명쾌하게 처결하자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감복하였습니다.
또 한 통의 유지(諭旨)를 내렸는데, 그 내용에 ‘짐이 화신의 죄를 중히 다스린 것은 그가 군국의 중요한 사무를 그르쳤기 때문이고, 각종 탐욕스럽고 사적인 이익을 도모한 것은 오히려 그의 죄 가운데 작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 때문에 용서하지 않고 즉시 다스린 것이다. 그리고 애당초부터 관련자들을 처벌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직 앞으로 잘하도록 경계시키기만 할뿐 다시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겠다. 그러니 대소 신료들은 의구(疑懼)하는 마음을 두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 조서를 내린 뒤부터는 화신을 붙좇던 자들이 비로소 의구하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1. 화신이 권세를 독점했던 수십 년 동안 안팎의 여러 신하들치고 그를 붙좇지 않은 자들이 없었는데, 오직 왕걸(王杰)·유용(劉墉)·동고(董誥)·주규(朱珪)·기균(紀均)·철보(鐵保)·왕보(王保) 등 몇 사람만은 끝까지 그에게 빌붙지 않았습니다. 화신이 패한 다음 그와 한 패거리였던 자들을 조사하여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국사에 대해 의지할 만한 사람은 오로지 왕걸 등이었습니다. 왕걸과 유용과 동고는 바로 상황(上皇) 때의 각로였으며, 경계(慶桂)와 늑보(勒保)는 새로 입각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상황 둘째 아들의 큰 아들인 면이(綿二)가 새로 군기 대신에 임명되었습니다. 주규는 남방의 순무소(巡撫所)에서 명을 받고 서울로 돌아오고 있는데, 각로와 군기 대신 중에서는 장차 오래지 않아 유지를 내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 묘교비(苗敎匪)들은, 화림과 복장안이 싸우다가 죽은 뒤부터 적세 또한 점차 쇠퇴해졌고 괴수는 이미 체포되었으며 남은 자들은 얼마 되지 않는데 흩어졌다 모였다 합니다. 그런데 황제가 특별히 귀화시키려고 하여 아직까지는 그들의 소굴까지 쳐들어가서 소탕하지는 않았습니다.
1. 칙서를 반포할 때에 예부에서는 사신이 가는 편에 보내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시랑 다영무(多英武)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을 사신이 가는 편에 보낼 수는 없다. 그리고 조선은 예의의 나라이다. 국왕이 반드시 사신이 가는 편에 보내는 것을 서운하게 여길 것이다.’고 하여, 마침내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1. 칙사가 출발할 때에 임박해서 황제가 두 번이나 상칙(上勅)을 인견해서 이르기를 ‘대신이 외국에 조서를 반포하는 것은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제반 폐단을 끼치는 일을 모두 없애고 줄이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돌아올 시기를 물으니, 3월 안에 의당 돌아올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그렇게 하면 기한이 너무 촉박하니, 의당 4월 열흘 사이에 돌아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태상황의 재궁(梓宮)이 백일이 지난 뒤에 능이 있는 곳으로 옮겨 빈소를 차리기 때문에 빈소를 옮기기 전에 돌아오고자 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구례에는 칙사 행차가 갈 때는 역참의 말을 타고 돌아올 때는 개인 말을 타도록 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갈 때나 돌아올 때나 모두 역말을 타도록 하였습니다. 칙사의 행차가 중강을 건널 때에 어사(御史)가 출두하여 인마(人馬)와 잡복(雜卜)을 모두 뒤에 떨어져서 오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외국에 폐단을 끼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상칙을 한인으로 임명하여 보낸 것도 근래에 드문 예로써 이는 모두 조선을 우대하는 뜻입니다.
1. 이번에 칙사의 행차가 오는 시기는 마침 태상황이 붕어한 시기와 겹쳐져서 통관배들이 걸핏하면 말하기를 ‘새 황제 때는 태상황 때와는 다르니, 너희 나라가 거행함에 있어서도 의당 십분 조심해야 한다.’고 하면서 매양 이것으로 징색(徵索)하는 단서를 삼았습니다. 섣달 그믐날 인견할 때에는 황제께서 친히 술잔을 주었고, 5일 반열에 참가했을 때에는 즉시 건청궁(乾淸宮) 안의 반열에 들어와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슬프고 정신없는 가운데에도 번번이 황제의 지시로 장막에 제사지내고 남은 음식과 먹을 것을 하사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특례로 베풀어준 것으로써 왕공(王公)과 대인들도 받아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통관들이 우리 일행을 접대하는 것은 처음에 비해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곰·사슴·노루·돼지·꿩·물고기 등의 허다한 물품을 하사한 날에는 앞뒤로 사람들이 꽉 메워져 마치 담을 두른 듯하였습니다. 자광각(紫光閣)에서 상을 하사한 것도 역시 특례였습니다. 그 뒤로는 통관배들도 말하기를 ‘이러한 일은 태상황 때에도 없었던 일이다.’고 하였고, 다시는 징색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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