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경인
초계 문신(抄啓文臣)에게 2월 초하루의 친시를 행하고 석채(釋菜) 때에 반열에 참가했던 유생들에게 제술 시험을 보였다.
돌아온 동지 정사 이조원(李祖源)과 부사 김면주(金勉柱)를 불러 보았다. 이조원이 아뢰기를,
"일행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역관의 수가 너무 많았으며, 사신을 따라가는 자들과 건량을 실은 마바리가 너무 많았습니다. 앞으로 지공하기 어려울 듯하니, 대신에게 하문하여 변통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이를 따랐다.
청나라 예부에서 자문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부에서 자문을 띄우는 일입니다. 사제사(祠祭司)의 안정(案呈)에 의하면, 삼가 올 1월 4일에 대행 태상 황제가 붕어하심으로 인하여 본 예부에서는 갖추어 아뢰어 태상 황제의 유조(遺詔)를 조선에 반포하기 위하여 정사와 부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문서 한 통을 보냈습니다. 이에 유지를 받으니, 정사는 장승훈(張承勳)을 파견하고 부사는 항걸(恒桀)을 파견해 보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본 예부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태상 황제의 유조를 조선에 반포할 때, 국왕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소복(素服) 차림으로 공경히 맞이할 것, 음악 연주를 금지할 것, 그리고 사신은 객사에서 연향을 받지 않을 것 등의 내용을 상주하여 비준을 받았습니다.
또 조사해 보건대, 옹정(雍正) 13년025) 12월 24일에 받은 조서에는 ‘조선이 우리 나라의 은혜에 감격하여 받들어 직공(職貢)을 경건히 닦으면서 매우 공경히 하고 있다. 모든 대신과 관원이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가는 경우에 종전까지는 의물(儀物)을 선물하는 전례가 있었다. 나는 후하게 가지고 가서 박하게 받아 올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만약 사신들에게 전례에 따라 받도록 한다면 그 나라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게 될 것이다. 또 만약 일률적으로 받지 않는다면 또한 그 나라로서는 먼 길을 온 사신에게 선물하는 예가 미비하다 하여 서운한 생각을 가질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 가는 조사부터는 제반 선물로 주는 백금(白金)과 의물 등을 모두 구례를 살펴서 절반 정도를 덜어놓는 것으로 영원히 정례를 삼을 것이다. 해부로 하여금 즉시 해당 나라 국왕에게 공문을 보내도록 하여 받들어 지키게 하라.’ 하였고, 또 건륭(乾隆) 원년026) 5월 25일에 받은 조서에는 ‘앞으로 사신으로 저 나라에 가는 모든 사람들은 의당 짐이 앞서 내린 지시를 준수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정례(正禮)로서 선물로 주어 보내는 은과 같은 따위의 물건은 절반 정도 덜어놓아야 하며, 총괄적으로 청하거나 별도로 청하는 등의 나쁜 관습은 일체 금지한다. 한가지 물건도 사사로이 줄 수 없으며, 공명을 바라는 것은 먼 나라의 백성들까지 안무해 주는 나의 은덕을 다시 저버리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상이 이와 관련된 판례(判例)들입니다. 이제 대행 태상 황제의 유고를 조선에 반포합니다. 현재 황제가 파견한 정사와 부사가 통역관을 데리고 당일로 역말을 타고 급히 달려갔으니, 앞서 받든 조서와 아울러 아뢸 것입니다. 비준 받은 이전의 문서도 아울러 함께 이자합니다."
하교하였다.
"여러 충신들의 집 가운데 우부승지의 집은 바로 혈손(血孫)이다. 요즈음 보건대, 출납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문벌을 따지지 않더라도 정사에서 의당 올려 써야 하는데 오히려 배옥(緋玉)에 있음에도, 오랫동안 뜻을 얻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우부승지 박기정(朴基正)을 병조 참판에 제수하라."
4월 3일 신묘
춘당대에 거둥하여 문신들의 제술 시험과 인일제(人日製)를 행하였다.
정승을 뽑았다. 【전에 김희(金憙)와 심환지(沈煥之)를 의망하고 이시수(李時秀)를 추가로 의망하였다.】 이시수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았다.
상이 정승을 가려 뽑을 것을 명하니,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입대하여 상이 선발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선묘조(宣廟朝) 때에, 정승의 일에 맞고, 정승의 명망이 있고, 정승의 재주가 있는 자를 뽑아들이라고 하교하였었는데, 돌아보면 지금은 인재들이 매우 적다. 이 몇 가지를 겸한 사람은 물론 얻기 쉽지 않겠지만 인재는 다른 시대에서 빌리지 못하며 구하는 방법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경은 인재를 천거하는 것으로 인군을 섬기는 직책에 있으니, 경의 의중에는 반드시 적임자가 있을 것이다."
하니,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은 하찮고 식견이 얕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성상께서 정승의 일, 정승의 명망, 정승의 재목에 맞는 인재를 찾으라고 하교하셨는데, 정승의 명망은 비록 정승의 후보자를 추천하기 전에 있는 것이지만 정승의 일과 정승의 재목감에 대한 것은 정승이 된 뒤의 일이니, 무엇으로 미리 헤아리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 어떻게 선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선정(先正)과 고 봉조하가 경연에서 아뢴 뒤에도 이미 이조 판서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정승으로 추천받는 디딤돌이 되었으니, 마땅히 이런 이력을 일일이 들어서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정민시(鄭民始)와 김재찬(金載瓚)은 인망이나 지위로 볼 때 합당하고, 송환기(宋煥箕)는 비록 공무를 보지는 않았지만 유현(儒賢)으로 특별합니다. 이시수(李時秀)는 정승 집안 사람이고 경력이 많습니다. 신의 소견은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판중추부사 심환지에게 이르기를,
"좌의정이 아뢴 것이 어떠한가?"
하니, 심환지가 아뢰기를,
"네 사람의 지위, 명망, 그리고 이력은 비할 사람이 드뭅니다. 신 또한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맨 처음 거론한 사람에게는 정승직을 주고 싶지 않다. 그 다음은 고 정승의 아들인데, 고 정승은 내가 정승에 임명했던 사람으로 항상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대를 이은 자식이 이미 높은 품계에 올라 이 벼슬에 의망되기까지 하였구나. 지금의 형세는 좌의정 혼자만이 수고한다는 탄식이 있다. 이 중신은 이따금 큰 병을 앓아 건강을 회복하려면 아직 멀었다. 유현은, 우리 나라의 고사에도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전후로 내려준 벼슬에 대해서 아직 명을 받지 않았으니 갑자기 이 벼슬을 주기는 어렵다.
이조 판서는 그 집안이 옛 정승이었고 그 또한 어진 대신이니, 대를 이어 등용하는 것은 매우 좋다. 이조 판서의 종숙(從叔)은 판의금부사로서 대간의 상소로 인하여 체직된 사람이니, 비록 이조 판서를 지내지 못하였으나 또한 좋다."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두 중신은 비록 이조 판서의 경력은 없지만 보잘것없는 신에 비하면 월등할 뿐만이 아닙니다."
하고, 심환지가 아뢰기를,
"만일 품계와 경력으로 논한다면 이미 이조 판서를 지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지만 사람이 정말 적합하다면 어찌 이런 것에 구애받겠습니까."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상께서 정승을 임명하신다면 오직 어떻게 특별히 선발할 것인가에 달렸습니다. 아래에서 거행한다면 대부분 이조 판서의 이력을 가진 사람을 취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조 판서를 정승에 임명하겠다. 나의 정승은 결정되었다."
하였다. 이에 이시수가 이조 판서로서 정승에 들어갔다.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조 참판 서용보와 강화 유수 홍명호(洪明浩)를 정2품으로 승진시키고, 동래 부사 김달순(金達淳)과 부호군 유한모(兪漢謨), 승지 김계락(金啓洛), 안악 군수 박재순(朴載淳), 의주 부윤 이기양(李基讓)을 종2품으로 승진시켰다.
전교하였다.
"우유선 이성보(李城輔)를 실 유선으로 부르는 문제는 대신들이 경연에서 아뢰어 이미 허락하였는데, 근거할 만한 고례가 있고 가까운 예로도 박 유선의 전례가 있다. 단부(單付)로 하비하도록 하라. 겸 유선 두 자리는 다만 강서원의 겸 유선에 불과하니, 세자 시강원의 빈객의 예와 마찬가지로 규장각과 홍문관의 제학, 이조의 관리를 지냈던 사람이 자연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밖에 될 만한 사람에 대해서는 어찌 이력을 논하겠는가. 이것은 통청직(通淸職)에 관계된다. 이조 판서와 참판이 아직 임명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조 참의에게 이번 정사에는 대신에게 물어서 후보자를 추천해 올리도록 하라. 앞으로는 빈객의 예대로 이조에서 차출하도록 하라."
서용보(徐龍輔)를 좌유선으로, 이만수(李晩秀)를 우유선으로, 김재찬(金載瓚)을 이조 판서로, 박장설(朴長卨)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조원(李祖源)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홍명호(洪明浩)를 형조 판서로, 홍양호(洪良浩)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명호와 장설은 얼마 있다가 체직하고 서용보와 이정덕(李鼎德)을 대신 임명하였다. 중비(中批)로 이병정(李秉鼎)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인일제(人日製)의 시험 답안지의 등급을 매겨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 김이도(金履度)와 전(箋)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 정조영(鄭祖榮)에게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이조 참판으로, 이노춘(李魯春)을 이조 참의로, 김근순(金近淳)을 규장각 직각으로 삼았다.
4월 4일 임진
유선 이성보(李城輔)에게 돈유하였다.
"요즈음 날씨가 화창하기에 막 불러오려고 하였는데 마침 또 구례에 근거하여 경을 실 유선에 임명하였다. 그러니 경은 시강의 책임을 물리치고 나오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또한 실 유선의 직책은 바로 선정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이미 한 것이며, 근래에는 박 유선이 공무를 본 예가 있다. 내가 귀하게 여기고 있으니, 경도 또한 필시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경이 마음 편하게 길에 오르게 하기 위하여 대사헌의 벼슬도 이미 체직을 허락하였다. 더구나 다시 올라오겠다는 약속을 경이 이전에 하지 않았던가. 나는 참으로 굳게 믿고 있다. 경은 모름지기 약속을 실천하여 가까운 시일에 몸을 일으켜 오도록 하라."
4월 5일 계사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상재생(上齋生)에게 제술을 행하고 대궐로 돌아와 편전에서 일차 유생(日次儒生)에게 전강 시험을 보였다.
강경(講經)과 제술 시험을 치른 유생들에게 다시 시험보일 것을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도기 유생(到記儒生)들에게 다시 시험을 보이는 것은 선조(先朝) 때의 출석 일수를 계산하던 구례를 따르는 것이지만 강경하는 유생들에게까지 특별히 이 예를 적용하는 것은 특례로 인재를 선발하려는 데에 그 뜻이 있다. 강경에서 순통(純通)을 맞은 유생은 다시 시험을 보이고,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 신재명(申在明)은 곧바로 전시에 응시하게 하라."
하였다.
4월 6일 갑오
다시 이만수(李晩秀)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4월 7일 을미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새로 선발되었거나 전에 선발된 초계 문신들에게 3월 초하루 친시와 시사(試射)를 행하고, 내금위의 정월 시사와 서북 지역의 별부료(別付料) 시사를 행하였다.
초계 문신의 시사에서 수석을 차지한 엄기(嚴耆)의 자급을 올려 주었다.
황승원(黃昇源)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도당에서 한림 후보자를 선출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이존수(李存秀)·홍석주(洪奭周)·여동식(呂東植)·김매순(金邁淳) 등 네 사람이 권점 5점을 받았다.
송환기(宋煥箕)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4월 8일 병신
우의정 이시수가 상소하기를,
"신의 아비가 임인년 봄에 처음 정승이 되어 전후로 모두 세 번이나 정승이 되었는데, 시강원의 옛 정분으로 발탁하시고 유상(儒相)으로 높이 기리어 총애하셨습니다. 시종 관리들 가운데에서 남달리 예우해 주셨으니, 천년 뒤에도 임금과 신하가 극진하게 만났음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 5, 6년 사이에 신의 벼슬이 한정없이 뛰어올라 육관(六官)의 우두머리를 두루 다섯 자리나 차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은총을 저버린 죄는 날로 쌓이고 추하고 졸렬함은 날로 드러나고 있으니, 매양 한밤중까지 잠들지 못하고 벌벌 떨며 부끄럽고 두려워 저도 모르게 땀과 눈물이 뒤섞여 흘러내립니다.
지난번에 정승을 임명하는 일은 얼마나 큰 일이며 중대한 임무입니까. 연석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숙이고 눈을 닦으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득 전하께서 신의 이름을 부르셨고 후보 명단이 들어가자 신을 낙점하셨습니다. 이에 신은 정신이 아득하고 사지가 벌벌 떨려 창황히 물러나왔습니다. 바보가 된 듯하고 꿈을 꾸는 것 같아 청명한 조정에서 정승을 뽑는 일이 신 때문에 이렇게까지 터무니없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생각건대, 상께서는 신의 아비 때문에 신을 불초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옛날에 베풀었던 남다른 은혜를 미루어 이날의 잘못된 은총이 있게 된 것입니다. 금년은 임인년과는 20년도 채 되지 않았고 양대가 정승이 된 것은 옛날에도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은 아마 우리 전하께서 신의 아비를 생각하여 신을 인재로 양성하려고 하시는 지극한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바로 신축년 강제(講製)에서 선발된 문신으로 몸은 비록 외람되게도 재상에 올랐지만 마음은 아직 까마득한 후배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루 아침에 백관의 우두머리에 두시니, 장차 어떻게 얼굴을 들고 동료로서 함께 일을 주선하였던 관리들을 만나보겠습니까. 이에 감히 얼떨떨해진 정신을 거두어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삼가 의정의 벼슬과 품계를 거두시어 천지와 같으신 은택을 베풀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부친인 문정공(文靖公)은 맨 먼저 강관(講官)으로 선발되었는데, 지금은 무인년과의 간격이 42년이 된다. 경의 부친이 정승으로 11년 동안 있었고 또 8년 뒤에 경이 정승이 되었다. 내가 경에게서 취한 것은 경이 부친의 좋은 점인 온화하고 정직하며 자애롭고 성실한 마음을 닮아 이 시대를 편안히 하고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옛날 경의 부친이 정승에 임명된 뒤에 처음으로 올린 소장에 대해 내린 비답에서 특별히 ‘가만히 앉아서 고상한 사람과 속된 사람들을 진정시키도록 하라.’는 말로 한편의 주된 뜻을 세웠었다. 세속의 모양과 폐단은 결코 과거에 비할 수 없으니, 반드시 어루만지는 범위를 넓히고 기초를 굳게 다져 온갖 착한 것을 모아 자기 소유로 만들어 한 가지 기예와 한 가지 재능을 가진 사방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자신의 기예와 재능이 쓰여지기를 원하게 하도록 하여야 한다. 경이 끌어다 등용하기를 공평하게 한다면 조치가 마땅한 것은 저절로 되어 굽은 자와 곧은 자가 뒤섞이지 않고 교화로 다스려 태평하게 될 것이다.
내가 경에게 바라는 것은 진실로 이에 있으니, 경은 내가 맡기는 지극한 뜻을 몸받아 마음을 편안히 갖고서 사양하지 말고 나와 돕도록 하라. 더구나 경의 부친이 미처 이루지 못한 포부를 받들어 어느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경이 만약 생각이 여기에 미친다면 어찌 굳이 규례를 갖추어 다시 유시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마음을 바꿔 나올 필요가 있겠느냐. 나머지 말은 내일 다시 돈유할 것이다."
하였다.
4월 9일 정유
우의정 이시수에게 돈유하였다.
"어제 올린 소장에 대한 비답에서 먼저 대강을 언급하였던 것은 《송사(宋史)》에서 말한 ‘경은 왕 아무의 아들이다.’고 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경의 부친이 미처 이루지 못한 포부를 경이 이어 나갈 수 있고 나 또한 경에게 책임지울 수 있다. 악기나 가요로 나의 아름다운 법도를 밝힌 것은 선경(先卿)이 경에게 남겨준 것이고, 창이나 술로 나의 관원들을 보호하였던 것은 바로 선경이 경에게 고해준 것이다. 풍속을 바로잡을 생각과 백성들에 대한 생각을 이부자리 속에서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을 경의 아버지가 가슴 속에 생각하고 있었으면서도 미처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경의 부친이 미처 이뤄내지 못한 포부를 되새겨 오늘 특별히 선발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어찌 경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며, 또한 어찌 공사 간에 더불어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경에게 책임지우는 것은 곧 ‘조치를 알맞게 하라.[擧措得宜]’는 네 글자에 불과하다. 진실로 경이 온화하고 정직하기 때문에 캄캄한 방도 탁 트인 네거리와 같고 자애롭고 성실하기 때문에 두려운 보루도 큰 길이 되는 것이다. 오늘 말하는 것은 바로 어제 말한 것이니,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느냐. 경은 모름지기 나의 은근한 뜻을 몸받아 곧장 나와 사은 숙배하고 나랏일을 널리 구제하도록 하라."
4월 10일 무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한림 소시(翰林召試)와 전경 문신(專經文臣)의 전강(殿講)과 초계 문신의 친시 및 삼일제(三日製)를 행하였다. 한림 소시에서는 이존수(李存秀)와 홍석주(洪奭周) 두 사람을 뽑았다. 삼일제의 표(表)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 박겸진(朴謙進)과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 최한익(崔漢翼)에게 아울러 곧바로 전시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존수를 예문관 검열로 삼았다.
장용영 외사(外使) 서유린(徐有隣)에게 특별히 유시하였다.
"군사 제도와 토지 제도는 주(周)나라보다 더 자세히 갖추어진 나라가 없다. 그래서 정전(井田)과 목전(牧田), 오병(伍兵)과 양병(兩兵)이 있었고, 봇도랑에는 나무를 심어 견고히 하였으며, 교외에서는 사열하는 기한이 있었고, 순라가 경계하였으며, 곤탁씨(壼涿氏)의 지킴이 있었다. 그리고 부득이 백성의 일손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향(鄕)과 수(遂)의 3개 고을로부터 3등의 채지(采地)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불러다 썼다.
수원을 둘러싼 4, 5개 군과 현을 외영(外營)에 이관하여 마치 물고기 비늘 같고 머리빗 같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주나라의 훌륭한 제도이다. 그것을 설치하던 초기에 연석에 임하여 유시하고 윤음을 반포함에 있어서 토의한 것이 과연 어떠하였는가.
옛날에 군사를 쓸 적에 모집하는 초기에는 정밀하게 선발하였으니 마륭(馬隆)이 푯말을 세우고 선발 시험을 치룬 것이 바로 이 경우이고, 이미 모집한 뒤에는 규율이 있었으니 마수(馬燧)가 수자리 사는 병사들을 잘 훈련시킨 것이 바로 이 경우이다.
지금 들으니, 선발이 정밀하지 못하여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뇌물에 따라 그냥 두기도 하고 뽑아가기도 하는 악습이 생기고, 규율이 분명하지 않아 백성들 가운데 고통을 받아 뿔뿔이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탄식이 많다고 한다. 기장(旗長)과 대장(隊長)은 전에 탈이 있었는데도 나중에 계속 일하고 있으며, 면임(面任)과 이임(里任)이 옛날에는 편안했으나 지금은 고생을 한다고 한다. 장정 한 명을 올리기 위해서는 거의 온 마을을 두루 쫓아다니며 부르고 한 명이라도 결원이 생기면 온 경내를 침범하기까지 하여 소요를 일으킨다고 한다.
이른바 사위(四衛)의 군사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마을의 평범한 소년으로 있다가 분양후(汾陽侯)의 교만한 병사같이 되었다.’고 하여 들에서 물을 대며 일을 할 자는 물을 대려 하지 않고, 품팔이를 할 자는 품을 팔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허다한 폐단은 조목조목 들어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이다. 고을원에게 물어보면 데면데면하게 주워 들은 뜬소문을 앞을 다투어 말하고, 시골 백성들에게 물어보면 눈쌀을 찌푸리며 서로 고한다.
돌이켜 보면, 내가 수원을 위하여 일마다 모두 편리하고 알맞게 하려던 본뜻이 어찌 진실로 그러한 것이겠는가. 조정의 탕목읍(湯沐邑)이며 고향의 백성들이 사는 곳에 오래도록 이런 시끄러운 폐단이 있게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남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은 각 고을에 널리 유시하여 고을원으로 하여금 경계하고 두려워할 바를 알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안착할 수 있게 하도록 하라."
4월 11일 기해
윤대를 거행하였다.
정상우(鄭尙愚)를 이조 참의로, 조상진(趙尙鎭)을 형조 판서로, 이백연(李栢然)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4월 12일 경자
정언 윤함(尹涵)이 상소하기를,
"며칠 전 삼일제에서 수석을 차지한 자는 바로 관리에 낄 수 없는 박겸진(朴謙進)입니다. 이 사람은 약간의 재주와 기예가 있으나 좋지 못한 무리와 긴밀하게 사귀었습니다. 작년 가을 응시했을 때에는 터무니없는 말을 시험지 가득히 써서 냈는데, 헤아리기 어려운 말들이 있었습니다. 불경죄를 지었으면서도 사림이 성토하자 도리어 이루 말할 수 없는 독살을 부렸고, 절에 올라가 중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성명한 세상에 어찌 이런 무리들의 외람된 짓이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과거 급제자 명단이 발표된 뒤에 대신들은 응당 즉시 그가 선발된 것에 대해서 논박했어야 했는데 끝내 잠자코 물러나 있었으니, 개탄스럽습니다. 박겸진을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해 버리고, 먼 변방으로 내쫓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설사 상소 가운데 말한 것과 같다 하더라도, 그에게 스스로 새롭게 되도록 허락하였고 또한 그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사실 모든 만물을 이루어 주는 의리에 합하는 것이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박겸진의 일 때문에 차자를 올려 자기의 잘못으로 돌리니, 비답을 내리기를,
"그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자기도 모르게 날로 착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바로잡는 한 가지 방도이다. 어찌 사실도 아닌 죄를 새삼 꺼내어 다시 소생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막을 수 있겠는가. 경이 자기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매우 지나치니, 경은 안심하고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시수가 두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은 마땅히 도량을 앞세워야 하니, 도량이 있으면 식견이 있게 되고 식견이 진보하면 도량 또한 진보한다. 내가 들으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내가 중앙에 있으면 윗부분에 허다한 공간이 있고 아랫부분에도 허다한 공간이 있어 왼쪽, 오른쪽, 앞부분, 뒷부분이 모두 반듯하니, 이 말은 참으로 은미하다.’ 하였으니, 이는 그 공정함을 말한 것이다. 내가 경을 대하는 것과 경이 나를 돕는 것은 이 한 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정함이 인(仁)에 가까운 것은 두려워하는 것이 공경에 가까운 것과 같다. 모든 벼슬아치들이 공정하지 않으면 그 직을 맡을 수 없는데, 더구나 대신의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남과 나를 구별할 것 없이 치우치지 말아서 뭇 신하들로 하여금 다 함께 화목하게 하라는 것이 바로 전날 내린 비답에서 유시한 속뜻이었다. 경이 이 비답을 들으면 반드시 두려운 생각이 들고 선뜻 마음을 바꾸게 될 것이다. 빨리 소장 올리는 일을 그만두고 즉시 일어나 나와 맡음으로써 기다리는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5일 계묘
송전(宋銓)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용보(徐龍輔)를 예조 판서로, 이조원(李祖源)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비변사 당하관을 보내어 좌의정 이병모와 판중추부사 심환지에게 유시하였다.
"의정부의 고사(故事)는, 무릇 임금이 친히 임하는 과거에서는 명관(命官)을 비준하여 내려보낸 뒤에 승정원에 보내어 부표(付標)를 고치게 하면 대신은 매양 반드시 어렵게 여기고 삼가하여 비록 대간이 따지고 드는 때가 있더라도 간혹 먼저 명을 받들고 나중에 연석(筵席)에서 사임한 전례가 있었다. 어찌 스스로 그 몸을 가벼이 하여 처신이 전도된다는 것을 유념치 않으려고 한단 말인가. 대신은 일반 관원들과는 다르니, 먼저 수고롭고 편안한 것에 대한 의리를 알아서 뭇 관원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중신이 명관이 된 전례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좌의정이 한번 머뭇거린 것은 일의 형세상 진실로 그럴 만하였다.
영부사는 지방에 있고 우의정은 출근하지 않고 있으니, 바로 지금 일이 없는 사람은 오직 심 판부사 한 사람뿐이다. 60, 70살이 넘는 대신이 시험관으로 수고한다는 것이 마음에는 편치않은 일이지만 마지못해 비준하였다. 판부사가 삼가는 것이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들어오려 하지 않으니, 정말 개탄스럽다.
또 좌의정에게 비점을 찍어 내려보냈으나 좌의정 또한 병을 핑계대었는데, 판부사가 병을 핑계대기 전에 병을 핑계대었으니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이미 다른 대신 가운데 명관을 삼을 만한 사람이 없으며 차자에 대한 비답도 이미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나오지 않고 있으니, 역시 개탄스럽다.
만약 계속해서 이렇게 한다면 친시에 중신이 명관이 되는 것은 용이한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나라의 체면에 관계된 일인 듯하기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뒤로는 삼가 의정부의 고사를 지켜 잃지 않도록 하라."
4월 16일 갑진
명정문(明政門)에 거둥하여 춘도기 유생(春到記儒生)의 제술을 행하였다.
편전에 나아가 한학 문신(漢學文臣)과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전강(殿講)을 행하고,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과강(課講)과 춘도기 유생의 전강을 행하였다.
4월 17일 을사
춘도기 유생의 전강을 다시 시험보였다.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정도채(鄭度采)와 다시 치룬 제술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 조진화(趙晉和)에게 아울러 곧바로 전시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부교리 이정운(李貞運)과 수찬 김이재(金履載)가 상소하기를,
"경연은 사체에 있어 더없이 중대하므로 매일 승정원에서 다음날 시사(視事)할 것에 대해서 아뢰어 정하니,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옛 규례입니다. 지난번에 마침 본 홍문관의 하번(下番)이 숙직을 빠뜨리고 서지 않자 승정원에서 정지할 것을 아뢰었는데, 이는 인원을 갖추어 입직하게 한 뒤에 마땅히 규례대로 다시 아뢰었어야 했습니다.
신들이 숙직소에서 있은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고, 그 사이에 연고 없는 날이 있었으나 승정원에서는 다시 진달하여 아뢰지 않았으니, 단지 잘못하였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해당 승지에게 견책의 법을 시행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승정원의 처사가 극히 놀랍다. 대체로 근래에 너희들은 한관(閑官)이 되었고, 승정원에서 거행하는 일도 아침마다 응당 들어와 아뢰어야 하는데도 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뒷날의 폐단에 적지 않게 관계된다. 해당 승지를 파직하라."
하였다.
4월 19일 정미
세자가 겸 좌유선, 겸 우유선과 집복헌(集福軒)에서 상견례를 행하고, 이어 강학을 행하였다.
겸 좌유선 서용보(徐龍輔)와 겸 우유선 이만수(李晩秀)가 상소하기를,
"상견례는 삼대 때에 시작되었는데, 선비들이 서로 만나는 경우도 있고 대부들이 서로 만나는 경우도 있고 선비가 대부를 만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존귀한 세자로서 몸을 낮추어 신하들과 대등한 예로 자리를 펴고 보며 손을 맞잡고 절을 하는 것은 참으로 성대한 일이고 일찍이 없었던 전례(典禮)입니다.
돌아보건대, 신들은 외람되이 훌륭한 직함을 받아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감히 당(堂)에 올라가 예를 거행하였고 이어 경(經)을 가지고 세자를 위해 강학하였습니다.
슬기로운 거동을 우러러보니, 움직임이 우(禹)임금의 법에 맞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삼가 받드니 순(舜)임금의 음악인 소(韶)를 듣는 듯하였습니다. 낭랑한 목소리로 경서에서 뜻이 어려운 곳을 질문함에 미쳐서는 더욱 계속해서 밝히시는 세자의 학문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신들은 이에 총애와 영광을 한 몸에 받아 부끄러워 땀이 옷을 흠뻑 적시게 되었습니다.
대저 한 권의 《논어》 책은 주연(胄筵)에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바탕이 아닌 것이 없지만 세 가지 유익함과 세 가지 해로움에 대한 가르침은 오늘날 더욱 절실한 것입니다. 여항의 선비들도 오히려 유익한 벗을 구하여 간곡하게 선을 권면하고 학문을 갈고 닦아 서로 선으로 보여주는데 더구나 시강원의 중대한 직임을 맡은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들과 같은 무리들로 구차히 숫자만 채웠으니, 장차 어떻게 드나들며 성의껏 인도하고 좌우에서 도와주고 이끌어 신하를 벗과 같이 대해 주는 특별한 은총에 대하여 선양하겠습니까.
지금 사부와 유선 두 유신(儒臣)은 일찍부터 산림에 숨은 학자로서 명망이 있었기에, 지난날 예로써 부르시어 한두 번 접견하시니,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왕위에 올랐는데 오히려 조정에 나오기를 지체하고 있으니, 더욱 돈독히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에 훌륭한 빈객이 이 따뜻한 봄에 훈도하여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우리 성상의 생각에 부응하고 작은 시간도 아끼는 우리 세자의 공부를 도움으로써 신들로 하여금 그들의 뒤를 쫓아 때로 세자궁의 끝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한다면 어찌 더불어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우리 숙종께서 세자로 있을 때 빈객 조복양(趙復陽)이 차자를 올려, 지방에 있는 여러 유현들을 불러 모아 보도하는 임무를 중하게 하라고 청하였으니, 조종조에서 선비들을 숭상했던 옛 규례와 예양(禮讓)하는 미풍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종묘와 사직의 무궁한 계책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삼가 살펴 받아들이소서.
지금 조정이나 시골에 있는 신하가 누구인들 목을 빼고 눈을 씻으며 자기 생각을 한번 올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세자 시강원의 관원이 단지 몇 사람뿐으로 날을 번갈아 들어가 뵙고 있는데, 인원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러니 또한 글을 많이 읽고 품행이 방정한 선비를 널리 선발하도록 명하시어 그 인원수를 늘림으로써 자문을 구하는 효과를 넓히시고 어진이가 연이어 나오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하소서. 이것이 신들의 바람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유신을 불러오자는 청은 경들의 말이 옳다. 마땅히 돈독하게 권유하는 유시를 다시 내리도록 하겠다. 세자 시강원에 출입하며 강론하는 사람이 단지 두 사람뿐이니, 역시 청한 대로 더 선발하겠다."
하였다.
행 대사헌 송환기(宋煥箕)와 행 호군 이성보(李城輔)에게 돈유하였다.
"겸 유선 서용보와 이만수 등이 전례에 따라 지방에 있는 유신 가운데 사부(師傅)가 될 만한 사람을 정중히 부를 것을 청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내가 경들에게 현직이나 외직의 일을 강요하지 않는 것은 경들로 하여금 편의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때때로 오고 가게 하려는 것이니, 지난번 자리에서 직접 유시한 것과 같다.
대사헌은 요즘 건강이 많이 좋아졌으니 길을 떠날 수 있겠는데, 유선은 그간 모든 일이 또한 어떠한지 모르겠다. 다만 지금 날씨가 아주 무덥지 않으니, 이러한 때에 출발한다면 필시 피곤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들은 즉시 마음을 바꾸어 기다리는 나의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임재수(林栽洙)가 장계를 올리기를,
"고군산(古群山)의 7개 조목의 폐단 가운데에 3개 조목의 일은 이미 본도에서 사실을 조사하여 바로잡았고, 4개 조목의 일은 바야흐로 감사와 잘 처리할 계책을 연구하고 있는데, 고을과 진영이 서로 간섭하지 못하게 한 뒤에야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가 될 듯합니다."
하였는데,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였다. 비변사가 복주(覆奏)하기를,
"해당 진영을 단독 진영으로 승격시키고 영장(營將)을 겸하도록 한 것은 대체로 군산 이북의 수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여 그 체모를 조금 중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0년도 채 못되어 오래 근무하는 자리로 도로 소속시키면서 단독 진영이란 칭호와 나누어 다스리는 규정은 예전 그대로이니, 이름과 실제가 부합되지 않아 폐단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 7개 조목의 민폐는 감사와 수사가 바야흐로 차례대로 바로잡고 있다고 하니 논할 것이 없겠으나, 고을과 진영은 사세에 있어 이미 주객의 구별이 있으니, 이른바 바로잡는다는 것이 진영에 있어서는 길이 폐단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경자년 절목에 의거하여 다시 경력으로 쳐주는 자리로 만드는 것이 서로서로 견제하여 영원히 유지하는 방도로 되는 데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해조에 분부하시되, 비록 경력으로 쳐주는 자리로 만든다 해도 이미 경계를 갈라서 나누어 소속시키지 않았으니, 법성(法聖)과 평신(平薪)의 예와 같이 한다면 호적을 작성하는 즈음에 아전들이 형세상 반드시 가렴 주구할 것입니다. 이후로는 본 진영에서 직접 단자(單子)를 거두어 호적을 작성하여 지방관에게 이송시키라는 내용도 아울러 해도에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답을 내리기를,
"경력으로 쳐주는 자리로 도로 만들라. 수군과 관계되는 것으로 말하면 가덕진(加德鎭)이 어찌 이보다 못하겠는가. 더군다나 안흥(安興)은 성을 지키고 군량을 지키고 있으며, 아이진(阿耳鎭)은 변방의 중요한 진영이 아닌가. 체모와 관계되는 것으로 말하면 조금도 헐하지 않고 도리어 더 심하다. 몇해 전에 있었던 아이진의 일은 또한 고을 아전이 진영의 백성에게 불법으로 징수하는 것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3개 진영을 우선 경력으로 쳐주는 자리로 도로 만들지 않는다면 군산에만 실시하는 데 대하여 공평하지 않다는 한탄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만일 파견할 때에 특별히 적임자를 택하되, 혹 매우 합당한 사람이 없는데 무관으로 적합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혹 융통해서 번갈아 의망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만경(萬頃)의 수령으로 하여금 군산의 지휘를 받도록 하고 해당 고을의 군교나 아전이 해당 진영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진영의 장수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여 추고하여 다스리게 하라.
그리고 지휘하는 방법은 비변사가 병조 판서, 그리고 일찍이 감사나 무장(武將)을 거친 사람과 상의한 뒤에 일일이 초기하도록 하라. 이어 절목을 완성하여 내려 보내고, 호적 작성은 평신(平薪)의 예대로 하게 하라. 아이진은 비중이 조금 무거우니, 체례(體例) 한 사항에 관해서 관서의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조리에 맞게 논하여 장계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창원 부사(昌原府使) 이상도(李尙度)가 상소하여, 공납하는 토산물을 전무(轉貿)하는 폐단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관찰사에게 명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신기(申耆)가 장계를 올리기를,
"진헌하는 물품은 가격이 비싸고 싼 차이가 있고 양도 많고 적은 것이 정해져 있습니다. 지금 만약 토산이라는 것을 빙자하여 더 보내기만 하고 덜어주지 않는다면 실로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탄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바닷가의 고을부터 토산물과 전무해야 할 것을 분별하여 두번 세번 전무하여 차차로 서로 바꾸어 적절하게 바로잡도록 할 것입니다. 접경 지역에서 사오거나 이웃 고을에 가서 캐오는 경우에 서로의 거리가 1백 리 내외일 경우에는 마련하기가 토산물에 비하여 큰 어려움이 없으니, 아울러 전례대로 봉진하도록 했습니다.
육지 고을은 봉진하는 물품들이 대부분 과일이므로 거의 다 토산물이지만 더러 3, 4개 고을에서 서로 사 가는 일이 있기 때문에 또한 바로잡았습니다. 전복(全鰒) 한 종류에 있어서는 도내에서 봉진하는 것이 대부분 제주의 장사치에게서 사 와서 사천(泗川)에서 파는 것입니다. 근자에 울산과 동래는 감사 정대용(鄭大容)의 장계로 인하여 모두 토산물을 바쳤다고 하는데, 경주에서 캐는 것은 울산의 전복과 차이가 없습니다. 기장(機張)·장기(長鬐)·연일(延日)은 동래·울산·경주 세 고을과 더불어 바다와 서로 접해 있으니, 필시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제(巨濟)·진주(晉州)·사천(泗川)은 본래 전복이 나는 곳으로 일컬어졌으니, 마땅히 토산물로 봉진하여야 합니다. 창원(昌原)·김해(金海)·하동(河東)·고성(固城)·남해(南海)·웅천(熊川)·진해(鎭海)·칠원(漆原)은 원래 나는 것이 없는데, 지금 만약 8개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다른 고을로 옮겨 보낸다면 3개 고을은 원래 바치던 것도 오히려 충분히 마련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러니 수량 외에 더 정하는 것은 애당초 논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부득이 전처럼 사다가 봉진하여야 합니다. 대체로 값을 더 보태는 것은 이미 전에 계획했던 것이니, 이 때문에 폐단이 생길 염려는 없습니다.
유자(柚子)는 병진년에 큰 바람이 분 뒤에, 응당 바쳐야 하는 거제·고성·남해 등 3개 고을의 유자나무는 모두 얼어 죽었고, 진주 경내의 창선도(昌善島)·적량진(赤梁鎭)에만 10여 그루가 살아 있습니다. 위의 세 고을은 모두 여기서 사 가기 때문에 세 고을에서 봉진하던 유자를 전적으로 진주에 붙여놓은 뒤에 해당 주에 옮겨 채취케 하는 물종을 적당히 3개 고을에 바꾸어 보내 주어야 합니다. 세 고을의 유자나무 중에 간혹 무더기져 자라는 곳이 있으니,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려 각각 본 고을로 되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진주의 유자나무는 이미 수효가 보잘 것 없고 풍작이 들 때와 흉작이 들 때가 있으니, 만일 원래 바치는 수량이 부족한 경우에는 그때를 당해서 대신 바치게 하겠다는 뜻으로 장계로 보고할 생각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진상하는 물품을 옮겨 오고 옮겨 가는 것을 합하면 23개 고을인데, 진실로 전혀 폐단이 없는 것은 아니니, 각 고을에서 기꺼이 따르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감사가 이렇게 바꾸어 정한 것은 반드시 틀림없이 알고 충분히 헤아렸을 것이니, 모두 우선 아뢴 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이를 따랐다.
전교하였다.
"경재(卿宰) 아래의 대부를 선조(先朝) 때에는 특별히 이조 참판으로 임명하였고, 혹은 이미 부제학을 지낸 사람에게 지난번에는 종1품의 품계를 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생각하고 또 관안(官案)을 가져다가 살펴보니, 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경연에서 시종하던 반열에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아직까지 낮은 벼슬에 침잠해 있는 경우가 또한 많았다.
그들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에 대하여 우리 왕조의 고사(故事)와 지난날의 첩지를 살펴보니, 모두 근거할 만한 것이 있었다. 선조 때에 홍문관과 사헌부·사간원의 관리로서 지금까지 당하관으로 있는 사람은 모두 한 자급을 더해 주도록 하라. 나이 70살 안팎인 사람으로 내직으로는 참판과 참의, 그리고 그 외에 외직의 수령으로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조에서 차례대로 추천하되, 첨지 자리를 더 마련하여 의망해 들여서 그들로 하여금 사은 숙배하게 하도록 하라."
4월 20일 무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장용영(壯勇營)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전 군수 송시연(宋時淵), 사복시 주부 박종우(朴宗羽), 전 목사 유한준(兪漢雋)을 원자궁의 요속으로 삼았다.
전 이조 참판 민태혁(閔台爀)을 잉임시켰다.
김관주(金觀柱)·민양현(閔養顯)·조덕윤(趙德潤)·심능필(沈能弼)·유악주(兪岳柱)·윤재순(尹在醇)·유운우(柳雲羽)·홍낙연(洪樂淵)·김복연(金復淵)·김기상(金箕象)·김양근(金養根)을 첨지로 삼았는데, 품계가 갓 오른 자들이었다.
정범조(丁範祖)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유선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나라의 근본이 중대함을 깊이 생각하여 세자를 보좌하고 가르치는 방도를 크게 천명하셨습니다. 이에 두 선정(先正)의 전례에 의거하여 특별히 실 유선(實諭善)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만드셨으니, 의당 당세에 중한 명망을 받고 있는 사람을 잘 골라 뽑아야 할 것인데 신 같이 하찮은 자에게 맡기셨습니다. 두루 헤아려 보아도 예로부터 신과 같이 남다른 총애를 받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병이 중하여 급히 달려갈 길이 없으니, 삼가 옛 사람이 말로써 몸을 대신하던 일에 부치어 대대로 벼슬하는 신하로서 의리를 다하고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뜻을 조금이나마 본받고자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백왕(百王) 중에 우뚝 뛰어난 자질로 위로 천성(千聖)의 학문을 이어서 지니시고 자나깨나 밝히고 밝히며 밤낮으로 힘쓰고 근심하셨으나, 왕위에 오르신 20년 이래로 온갖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게 되니, 다만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탄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른바 명철한 임금이 일어남은 천년에 한번뿐인데 세도(世道)는 물처럼 자꾸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뜻이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는다면 황극(皇極)이 서고 온갖 법도가 다 올바르게 되어 공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나라가 안정되어 바로 지금부터 요·순 시대가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농정(農政)에 관한 윤음을 삼가 받았으나 신은 본래 농사짓는 방법에 어두워 미천한 나무꾼의 소견조차 바칠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작년 여름에 가뭄으로 삼남 지방에 흉년이 들자 구중 궁궐에서 눈코 뜰 새 없이 걱정하면서 있는 힘을 다하셨으나, 돌아보건대 지금 중외의 창고가 텅 비어 있습니다. 병영에서 둔전을 넓게 차지하여 백성들이 곤란을 받고 있고 쓸데없는 관리들이 많아져 녹봉을 계속 대기 어려우니, 재물을 늘릴 길이 없고 대중을 구제할 대책이 없습니다. 수년 사이에 만약 연이어 흉년이 들게 되면 온 지역의 백성들은 장차 다 죽게 될 것입니다.
대저 환란을 생각하여 미리 방비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經)에 밝은 교훈이 있으니, 편안할수록 위급한 때를 잊지 않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깊은 계책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엄숙하고 공손하며 삼가고 두려워하여 백성들을 다친 사람 돌보듯이 돌보고 계시니 진실로 옛날의 성인을 잇고 태평시대를 여는 기반이 됩니다. 만약 다시 계속 이어 밝힌 공경이 하늘과 하나가 되고 그침없는 정성이 신명을 감동시킨다면 장차 상제가 거듭 명하고 도와주어 큰 복이 끊임없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어찌 재해에 대하여 근심하며 기근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감히 이것으로 태평 성세를 축원하는 말로 삼겠습니다.
옛날의 성군은 삼무사(三無私)027) 를 받들어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큰 법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천지가 그 덕과 합치하고 일월이 그 밝음과 합치되는 이유인 것으로 천지가 제 자리를 잡고 만물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도 이에 지나지 않으니, 힘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의 의복과 거마 등 일상용품이 변변찮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신하들이 칭송하고 있으나 아랫사람들에게는 사치스러운 풍속이 있어 식자들이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밝으신 전지를 내려 군사와 백성들의 사치한 습관을 일체 엄히 신칙한다면 재물을 모으고 기근을 구제하는 방도에 도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미루어 나가 하찮은 것일지라도 모두 절약하고 줄이되 일정하게 바치는 것은 줄이고 쓸데없는 비용은 없애도록 하소서. 규장각에서 책을 간행하는 일은 우선 중지하고, 특별히 관찰사와 수령을 가려 백성들을 구휼하는 계책을 극진히 하도록 하여 은택이 아래에까지 미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돈독히 부르는 유시를 내렸는데 오늘 사직하는 소장을 보니, 부르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경이 비록 산림에 물러나 살고 있으나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의 대대로 녹을 받는 신하이니, 조정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수고하는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의리상 생각을 바꾸지 않고 산림에 은둔하려는 생각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현재 가지고 있는 직임에 대해서야 더더욱 이미 나온 뒤에 망설여서야 되겠는가.
또한 오래 전에 정중하게 승낙하였으니, 내가 깊이 믿고 속으로 바라는 것은 조금만 기다리면 필시 곧바로 올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비록 부덕하나 원하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것이며, 경 또한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첫째 가는 뜻으로 삼았다.
그리고 또 농정에 대한 윤음을 받든 연유와 백성들을 소생시키는 것에 대한 간절한 생각과 기후가 때에 맞기를 바라는 정성스러운 염원을 부연하였고, 절약해서 쓰고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는 방도에 대해서 피력했으니, 더욱 가상하고 감탄스럽다. 다시 바라건대, 가까운 시일 안에 힘써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1일 기유
유한모(兪漢謨)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2일 경술
유생의 전강(殿講) 및 제술을 행하였다.
4월 23일 신해
부교리 이정운(李貞運)과 수찬 윤익렬(尹益烈)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명의록(明義錄)》은 바로 우리 나라의 《춘추(春秋)》입니다. 일전에 선조(先朝)에 시종신으로 있던 자들의 품계를 올려주었는데, 홍인한(洪麟漢)과 민홍섭(閔弘燮)은 바로 《명의록》에 올라 있는 자 가운데 가장 큰 역적입니다. 그러니 두 역적에 관계된 자들은 마땅히 서둘러 엄하게 주벌하고 철저하게 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자식과 사위, 친척들을 어떻게 수록(收錄)하는 데에 넣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번에 심능필(沈能弼)과 민양현(閔養顯)이 은자(恩資)를 받는 속에 들어갔으니, 신들은 이로부터 법이 장차 무너지고 의리가 차츰 어두워져 역적의 잔당들이 모두 바라서는 안될 것을 바라는 뜻을 품게 될까 삼가 염려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심능필과 민양현에게 품계를 올려주라는 명령을 빨리 거두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조 참판 민태혁(閔台爀)을 체직하고 이조 참의 정상우(鄭尙愚)는 파직시키고서 이익운(李益運)과 이노춘(李魯春)으로 대신하였다. 이윽고 민태혁과 정상우를 잉임시키도록 하였다.
4월 24일 임자
신헌조(申獻朝)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12명의 시종신들은 품계를 올려 주었는데 2명의 시종신은 아직도 첨지로 있으니, 품계를 올려주는 뜻이 어디 있는가. 대체로 고을원을 임명함에 있어서 특별히 임명하는 경우에는 외직에 보임하지만 경관직(京官職)을 제수하는 규례를 쓰는 것도 근거가 있다.
병사 이보한(李普漢)은 계림의 직계 손자로서 무관을 겸하고 있을 때 특별 하교로 현령 벼슬에 제수하였다. 민문충(閔文忠)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에게는 어찌 계림(鷄林)의 직계 손자의 전례를 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전 교리 첨지중추부사 민양현(閔養顯)은 창성 부사의 자리가 나면 제수하라. 비록 계림이나 문충의 자손은 아니지만 어째서 하나는 되고 하나는 안 되는가. 전 정언 첨지중추부사 심능필(沈能弼)을 김해 부사에 제수하라."
교리 이정운(李貞運)과 수찬 윤익렬(尹益烈)이 민양현과 심능필의 일로 차자를 올리고 지례 물러나가니, 이들을 의금부에 내리고 전교하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습속을 바로잡는 데 있어서, 그 요점은 먼저 차자와 계사가 번갈아 나오는 잘못된 예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한 가지 일을 거듭 끄집어내기까지 하는 것은 더구나 의의가 없다. 말한 것이 매우 중대한 관계가 되는 것이어서 중언 부언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두 죄수가 갑자기 두 사람에 대해서 소장을 올렸으면서도 또 차자를 올려 굳세게 고집하면서 그치지 않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모든 일에는 각기 등급과 단계가 있으니, 자급을 올려주는 것과 외직으로 내려보내는 것은 경중이 저절로 다르다. 어제의 행동은 매우 놀랍다.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5일 계축
윤사국(尹師國)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4월 26일 갑인
대사간 신헌조(申獻朝)를 잉임시켰다.
수찬 박길원(朴吉源)이 상소하기를,
"신이 봄에 시호를 의논한 일 때문에 크게 심규로(沈奎魯)의 배척을 받았는데, 지금까지도 생각하면 매우 부끄럽습니다.
그날 의논한 시호는 모두 7개의 시망(諡望)이었습니다. 고 정승 김종수(金鍾秀)가 평생토록 지조를 지킨 것에 대해서는 모두들 의리의 주인이라고 추대하였습니다. 고 중신 신응현(申應顯)은 전후에 걸쳐 올린 소장에서 충신과 역적의 구분을 철저히 분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두 시호에서 ‘충(忠)’ 자는 한 세상의 공론이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사이에서 딴 의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고 정승 채제공(蔡濟恭)에 이르러서는 유독 심규로만이 ‘충성’이라고 하였는데, 시간을 넘겨가며 논쟁하는 즈음에 그 자리에 참여했던 여러 관원들 가운데 한 사람도 더이상 그의 충성을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규로 한 사람만의 말을 대번에 공론이라고 여겨 경솔하게 충 자를 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시종 망설였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규로는 상소하는 글 가운데에서 신에게 충 자를 개인의 물건처럼 간주하여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이에서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신에게 드러나게 주거나 빼앗으려는 뜻이 있었다면 어째서 그 자리에서 아무개는 충 자를 붙일 수 없고 아무개는 충 자를 붙여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서 시호에 대한 의논이 끝난 뒤에서야 소장을 올려 그치지 않고 말하며 채 정승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신은 이 상소가 과연 자기의 견해에서 나왔으며 그 말이 또한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 니다.
대사간에 이르러서는 책임이 더욱 각별하니, 만일 적임자를 선발하지 않고 그 임무를 오래 맡긴다면 어떻게 언관들을 잘 인도하여 그 직책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겠습니까. 대사간이 요즘처럼 자주 바뀐 때가 없었으니, 이와 같은데 또한 어떻게 말을 내고 일을 논하여 그날의 맡은 책임을 다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앞으로 대사간이 된 사람들이 모두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품고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이 없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책임지워 완성하도록 하는 방도를 깊이 생각하고 와서 간하는 길을 넓히도록 힘쓰소서. 그리고 대사간의 직책은 오래 맡기도록 하시고 그밖의 언관 또한 자주 바꾸지 말아야 언로를 여는 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바꾼 5명의 대사간 가운데에 출사하지 않아서 교체된 대사간에 대해서도 구임시켜야 한다고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잉임시켜 패초를 어겨도 파직시키지 말며 인피해도 받아들이지 말아 진정 오래 맡기는 자리로 삼아야겠다.
그런데 이 대사간은 바로 중신의 아들로서 온종일 합계할 때에 마땅히 힘을 다해 앞장서야 했는데도 오랫동안 대청의 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니, 너의 말이 효과가 없는 부질없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아래에는 마땅히 사임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써야만 한다.
지난번 관사에서 모인 일에 대하여 네가 필시 부끄럽게 여기는 듯하나, 대낮에 대궐문 밖을 병도 없이 부인의 교자를 타고 왕래한 것은 관중(館中)의 고사를 살펴보아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규례대로 비답을 내리기는 진실로 어려우니, 네가 헤아려서 하도록 맡기겠다."
하였다. 이어 또 전교하기를,
"비록 사임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일을 논해야 할 뿐이다. 더구나 이미 지나간 일을 이유없이 끄집어내어 침범하여 핍박한 것은 사체를 손상시킨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그에게 스스로 하도록 맡길 수 있겠는가. 수찬 박길원을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7일 을묘
우의정 이시수가 세 번 소장을 올려 사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글이 모두 세 번 올라왔고, 나 또한 비답이나 유시를 세 번 내렸다. 깊은 산 속에 숨어 사는 선비도 오히려 뜻을 바꾸어 나오는데 정승이 정승 집안에서 나왔는데 이처럼 겸손하게 사양하니, 원양(袁楊)의 고사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도의와 조정의 기상을 두루 다스리고 백성들의 근심을 없애주고 나라의 살림을 잘 꾸려가는 것은 바로 학식이 높고 참으로 성실한 신하를 쓰는 데에 달려 있다. 며칠 전에 좌의정에게 말하여 힘써 나오도록 하라는 뜻을 전하도록 하였다. 경은 또 어찌하여 번거롭게 편지를 하여 정승으로서 형식적으로 사직하는 글을 올리는 것인가. 바로 조정에 나와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나의 뜻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기를,
"신은 근래 전관(銓官)의 일에 대하여 삼가 개탄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대저 정망(停望)과 발망(拔望)은 전관의 일일 뿐입니다. 만일 중지시키거나 빼버릴 만한 자가 있다면 정사하는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하여 명백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한 것이며 진실로 안될 것이 없는 일입니다.
지난번 동벽(東壁)에 두 명의 후보자를 의망하여 들였을 때, 자기들 멋대로 슬그머니 놔두기도 하고 빼버리기도 하여 공적인 규례를 은근히 무너뜨려 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또 품계를 올릴 사람들을 써서 들임에 있어서는 의당 그 많고 적은 것에 따라 성상이 하교한 대로 받들어 행한 다음 만일 전체 인원에 대해 재가한다는 명이 있을 경우에는 그 가운데 의리에 관계되거나 제방(堤防)을 보존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끄집어 내어 논란해도 좋고 쟁집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처음에는 오직 선발하거나 빼버리는 데에만 뜻이 있어 흐린지 맑은지조차 생각하지 않다가 끝내는 뒤섞어 재가하여 스스로 흐리멍덩하게 한 죄과에 귀착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앞에서는 성상의 슬기를 막고 뒤에서는 의리를 무너뜨렸으니, 이와 같은데 어떻게 전하의 뜻을 받들어 드날릴 방도를 책임지우겠습니까. 해당 전관에게 벼슬을 삭탈하는 규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추증하는 법은 가볍지 않고 중요한 것입니다. 이가환(李家煥)의 부친과 조부를 처음 증직할 때에 호조로 계하한 것은 반드시 근거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가환을 정경(正卿)으로 지나치게 올려 놓은 지가 또한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전후의 전관들이 일찍이 증직을 고치자는 논의를 한 적이 없으니, 공론이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저 이조 참판이란 자가 자신이 홀로 정사하는 때를 틈타, 이조의 관직을 추증하도록 멋대로 아뢰어 어려움없이 계하받았습니다. 그가 아무리 개인의 이익만을 꾀하는 데 급하였다고 하더라도 어찌 공의(公議)의 중대함을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신은 해당 전관에게 삭직시키는 법을 시행하고 증직한 벼슬도 시행하지 말도록 명하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동형(李東馨)이 틈을 엿보다가 도리에 어긋나는 소를 함부로 올려 세상에 버림을 받은 지가 지금 수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뒤로 전관이 된 자들은 한결같이 감히 그를 후보자로 추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난번에 병조에서는 위장(衛將)으로 추천하였고 이조에서는 고을 원의 후보자로 삼아 마치 예사롭고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인 것 같이 하였습니다. 두 전관에 대해서는 현고(現告)를 받아 엄히 감죄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는 것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 두 유신이 한 가지 일로 소장을 올리기도 하고 차자를 올리기도 한 것은 그 자취를 논한다면 무례한 듯하지만 그 본심은 기율을 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처음에는 아전과 면대하게 하라는 명을 내리셨고 계속해서 서용하지 말라는 처분을 내리시어 단번에 꺾어버리시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으니, 신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두 유신을 서용하지 말라는 명을 빨리 거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관을 삭직시키는 일은, 처음에는 비록 잘 주선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아울러 논하여 섞어서 함께 하비할 수가 있겠는가. 해당 전관을 삭직시키는 것과 벼슬을 추증하는 일은, 중신의 선대를 처음에 호조로 추증한 것은 사적인 데에 치우쳐서 나온 것이니, 그것을 바로잡은 것은 때늦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초에 살피지 못한 전관을 중하게 추고하라. 이와같이 별로 중요치도 않은 일로 거리낌없이 남의 선조를 능멸하였으니, 자못 공평하게 하는 의리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추고하겠다.
해당 두 전관의 일은, 위장이나 고을 원으로 보내는 것이 그의 처지로 보면 좌천된 것일 뿐만이 아니다. 네가 이른바 도리에 어긋난 상소란 과연 어떤 상소를 말하는 것인가. 너는 어째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반드시 그 보응을 받는다는 경계를 생각하지 않느냐.
두 유신을 서용하지 말라는 명을 도로 거두는 일은, 입직한 홍문관 관원이 만일 말할 것이 있으면 다만 차자를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홍문관의 고사에도 없는 연명의 상소를 갑자기 올렸으니, 매우 전례에 어두운 것이다. 이튿날 또 차자 한 통을 올려 폐습을 바로잡는 일에 대하여 재차 번거롭게 하였으니, 신칙하는 지시를 할 때에 아전과 면대하게 하라고 한 것은 가벼운 처벌이었으며 서용하지 말라고 한 것은 관대하게 처리한 것이다. 너를 잉임시킨 것은 바로 홍문관의 상소를 따른 것인데, 어찌하여 감히 사임하는가. 이런 글을 받아들인 승지를 먼저 추고하라."
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우의정 이시수(李時秀)에게 유시를 전하게 하고, 이어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그와 더불어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충청도 유생 김노성(金魯性) 등이 상소하였다.
"성균관에서 공자를 숭배하여 제사지내는 것은 만세에 스승이 되기 때문이며, 현인들을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배향하는 것은 우리 도에 우익(羽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도의 큰 본원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인(仁)과 의(義)가 되고 타고난 본성이 쓰여지면 효제(孝悌)와 떳떳한 인륜이 됩니다.
요·순·우·탕·문·무·주공으로부터 그 이후로 성인과 성인이 서로 이어 전후로 도가 같으셨으니, 정치와 교화가 밝아지고 풍속이 두터워진 것은 모두 이 인·의·효·제의 근본이 서고 도가 행해진 결과입니다. 하늘이 낸 성인인 공자에 이르러서는 선왕의 법도를 이어받아 뭇 성인들을 잇고 후학을 가르치셨으니, 덕이 더할나위 없이 높고 도가 더할나위 없이 큽니다. 그러나 그 요점은 마음 속에 인과 의를 간직하고 생활하는 데에 있어서 효와 제를 쓰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당시 제자가 된 선비들도 이 도의 체와 용 사이에 종사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직접 가르침을 받아 의논을 세워 드러난 사람은 유자(有子)가 그런 분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군자는 근본에 힘쓰나니 근본이 서야 도가 생겨난다. 효와 제는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 하였으니, 훌륭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잘한다.’는 것과 ‘군자의 학문은 먼저 그 큰 것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유자는 아마 중후하고 온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가 중후하였기 때문에 본성의 체를 깊이 터득하였고, 온화하기 때문에 큰 도의 용을 밝게 분변하여 초연히 이 도의 근본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공자의 제자들이 오히려 공자를 섬기던 예로써 그를 섬기려 하였던 것이며, 《논어》 여러 편에서 유자에게만 그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다.
자유(子游)는 말하기를 ‘유자는 너무도 공자와 비슷하구나.’ 하였습니다. 그 덕행과 조예로 볼 때 어찌 십철(十哲)의 반열에 참여할 수 없었겠습니까. 오직 저 불교를 숭상하던 강서 학파(江西學派)의 무리들이 효와 제가 인을 행하는 근본이 된다는 말을 비난하면서 그를 강등시켜 번지(樊遲)와 무마기(巫馬期)의 반열에 있게 함으로써 마침내는 당에 올라간 여러 제자들과 함께 제사를 받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 어찌 사문(斯文)의 결함이 아니며, 우리 도의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천년 뒤에 성인이 나셔서 요·순의 덕으로 인군과 스승의 지위에 있게 되었는데, 학문은 천고에 탁월하십니다. 그리하여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해서 말 없는 가운데 오묘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개 그가 터득한 것이 깊기 때문에 그가 세운 것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가 행한 것이 도탑기 때문에 그 말의 근본이 무겁다는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특히 유생들이 과거 시험에 응시할 때에 제목으로 명하여 그 단서를 여시니, 백세토록 민멸되어 있던 법이 마치 오늘을 기다린 듯합니다. 그러니 아, 훌륭한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성전(大成殿) 위에 올라 우리 팔도 사람들로 하여금 도를 보존하고 인륜을 밝힌 대성인의 지극한 뜻을 분명히 알도록 하소서. 그러면 이 도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기강을 유지하는 것이 자연 빛나게 되어 볼 만한 것이 있게 될 것이니, 진실로 하루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청한 것은 비록 바른 도를 지키고 성인의 학문을 높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 조치는 신중히 해야 한다. 너희들은 우선 물러가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8일 병진
차대를 거행하였다. 이어 유생들에게 일차 전강(日次殿講)과 제술 시험을 행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진사 조종영(趙鐘永)에게 곧바로 전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우의정 이시수가 조정에 나와 상을 뵙고서 벼슬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부친을 내가 정승으로 삼았는데, 20년도 안 되어 경이 이어서 등용되었으니, 이는 우리 나라에 드물게 있는 일이다. 경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니, 왜 안 그렇겠는가. 그런데 경을 정승에 임명하자 사람들이 흡족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정승이 될 만한 명망이다. 이로부터 해나가면 정승의 재목이나 정승의 일도 여기에 달려 있게 된다. 현재에 있어서 가장 합당한 방도는 오직 온 백성들을 다 잘살게 해 주어 모두 함께 대도(大道)의 세상에 이르러 모든 일들이 올바르게 되도록 하는 데 있다. 내가 경에게 바라는 것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이조 참의 정상우(鄭尙愚)를 체직시켰다. 이서구(李書九)를 이조 참판으로, 윤행원(尹行元)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4월 29일 정사
이조 참의 윤행원을 파직시키고 이노춘(李魯春)으로 대신하였다.
김재찬(金載瓚)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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