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경자
부제학 윤혜교(尹惠敎) 등이 차자를 올려, 지금 홍진(紅疹)이 크게 번지고 겸하여 여기(癘氣)가 치열함을 들어 영릉(寧陵)의 행행(幸行)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빈궁(嬪宮)의 홍진 증세가 평복(平服)되었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조현명(趙顯命)과 의관(醫官) 이엽(李燁)·김응삼(金應三) 등에서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2월 2일 신축
이세근(李世瑾)을 대사간으로, 유엄(柳儼)을 교리로, 권혁(權爀)을 부교리로, 조적명(趙迪命)을 수찬으로, 김시형(金始炯)을 승지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우의정 이집(李㙫)·약방 제조 윤순(尹淳)·부제학 조현명(趙顯命) 등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 능(陵)의 행행을 정지할 것을 청하며 대궐 뜰에서 호소하겠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옛날 제왕(帝王)들처럼 지성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해 이런 일이 있게 하였으니, 부끄럽다. 그렇다면 내가 어찌 잘못한 것이 없겠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실언(失言)하셨습니다. 옛사람은 칼을 뽑아 고삐를 끊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임금은 오히려 지나친 거동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분부를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들은 기필코 나의 행행(幸行)을 정지시키려 하나, 나도 역시 고집이 있다. 더욱이 군신(君臣) 사이의 분의(分義)는 지극히 중요하니, 어제의 분부를 받은 뒤에 지금 또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는 것이 옳은가? 이번에 내가 꿈에 영릉(寧陵)에 갔으니, 이는 지성에서 발로된 것이다. 그런데도 경들은 막으려 하는가?"
하였다.
2월 3일 임인
영의정 홍치중 등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진계(陳啓)하여 영릉의 행행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할 때 또 대소 공사(公事)를 승정원에 보류해 두라는 명이 있으니, 여러 신하들이 서로 번갈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경들의 말은 혹은 여역(癘疫)을 혹은 적변(賊變)을 드는데, 이는 모두 공동(恐動)하려는 말이다. 경들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 판서 심택현(沈澤賢)과 지사(知事) 김시환(金始煥)이 함께 상소하여 영릉행행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그 소장(疏章)을 모두 도로 내주도록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광좌(李光佐)가 또한 상소하여 영릉 행행을 정지할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성상께서 무신년031) 가을에 기필코 전성(殿省)하려 하시다가 다만 군신(君臣)들의 지극한 간청을 살펴 받아들이고 황발(黃髮)의 충성스러운 말에 감동하시어 억지로 조금 물려 올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마는, 생각건대, 진려(疹癘)가 갈수록 치열해지고 민사(民事)가 한이 없어 무신년보다 십배나 더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들의 만구일담(萬口一談)으로 ‘무신년에는 오히려 할 수 있겠지만 올해는 결단코 멀리 행행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자(臣子)로서 이런 마음을 갖고도 혈성(血誠)으로 다투어 고집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의 두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리고 이윽고 하교하기를,
"오늘의 일은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니, ‘두 가지 마음을 가진다.’는 말은 극히 과중한 말이다. 마음에 미안한데도 유시(諭示)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가차(假借)하는 습관이 되겠기에 지금 나의 뜻을 유시한다."
하였다.
2월 4일 계묘
해에 좌이(左珥)가 있었다.
빈청(賓廳)에서 재차 아뢰고, 또 등대(登對)하여 행행(幸行)의 정지를 극력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성조(李聖肇)와 신무일(愼無逸)을 승지로, 조상경(趙尙絅)을 경기 관찰사로, 윤광운(尹光運)을 수찬으로, 한현모(韓顯謨)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2월 5일 갑진
묘시(卯時)에 간방(艮方)에서 곤방(坤方)까지 지진이 일어났다.
사간원에서 【사간 박필기(朴弼琦)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영릉에 행행하시려는 뜻을 또 결정하셨기에 군하(群下)들의 지나치게 염려하는 말이 날마다 탑전(榻前)에 올려지고 있습니다. 간절하고 지극한 충성과 친애(親愛)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없으니, 살펴 받아들이시고 계획을 바꿈을 진실로 그만 둘 수 없는데, 어찌하여 일체 승정원에 보류해 두어 만기(萬機)를 정지시키십니까? 청컨대 빨리 대소 공사(公事)를 승정원에 보류해 두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 등이 아뢰기를,
"청컨대 먼저 대소의 공사를 승정원에 보류해 두라신 명을 거두신 다음에 행행(幸行)하는 한 가지 일을 대신과 여러 신하들과 함께 가부를 서로 의논하여 따르든지 않든지를 결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판중추부사 이관명(李觀命)이 상소를 진달하고 곧장 돌아갔다. 그 상소의 대략에 이르기를,
"‘토복(討復)’ 두 글자는 오늘날 말하기를 꺼리는 바가 되었으니, 신(臣)의 상소에다 망령되게 제기한 것은 진실로 신의 죄입니다. 하지만 또한 신이 평소에 고집한 바를 대략 거론하여 거취(去就)의 도리를 밝힘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저번날의 연대(筵對) 때는 상하(上下)의 말이 일찍이 이 두 글자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전하께서 신을 책망하신 바는 마치 신이 교회(敎誨)하실 때는 성지(聖旨)를 우러러 순종하다가 처분이 내린 뒤에는 다시 편당하는 습관을 제멋대로 부려, 성상께서 제시(提撕)하여 면려(勉勵)하신 지극한 뜻을 저버리는 것같이 여기심이 있었습니다. 어쩌다 성의(聖意)에 혹시라도 토복(討復)에 관한 논의가 저번 날 성교(聖敎) 가운데 비호하신 사람을 애핍(礙逼)하는 바가 있다고 여기시어 이런 분부가 있었던 것이라면, 신이 진실로 그때에 감히 봉승(奉承)하지 못한다고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맨끝에 앙대(仰對)한 것은 진실로 창졸간에 군박(窘迫)한 소치였습니다. 또 신이 ‘토복(討復)’이라고 한 말은 의리를 범론(泛論)한 것이고 단지 그 사람 하나만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신은 실로, 어리석고 어두워 옛사람의 ‘면전에서는 순종하고 물러나서는 딴말 하는 데 대한 경계’를 불각 중에 범하여, 마침내 이 때문에 군부(君父)를 저버리는 죄에 스스로 빠졌습니다. 황송하고 정신이 없어 앞이 캄캄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군신의 사이는 천지처럼 절연(截然)하다. 비록 부형이 애매한 일로 죄를 입었다 하더라도 자제(子弟)가 된 사람이 어찌 감히 이 때문에 군부(君父)의 조정에 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하의 절조(節操)가 땅을 쓴 듯 없어졌다. 하물며 또 그 아우의 관작(官爵)을 회복한 다음에도 지난날 포장(褒奬)한 것을 체념(體念)하지 아니한 채 조정에 서지 않으려 드니, 지극히 미안하다. 또 종형(從兄)을 위한 인혐(引嫌) 또한 정도에 지나치다. 이는 평소 군부를 공경하지도 꺼리지도 않던 소치에 불과하니, 대관(大官)이라 하여 신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소관(小官)들을 칙려(飭勵)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교리 유엄(柳儼)이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오늘날 온 조정이 입이 쓰도록 극력 다툰 것이 사흘이 되었으나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은 또한 진실로 만부득이한 까닭이 있어서이니, 전하께서는 진실로 마땅히 그 혈성(血誠)을 살펴보시고 빨리 개납(開納)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혹시라도 효사(孝思)를 끝까지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옹용(甕容)하게 개유(開諭)하고 순순(諄諄)하게 깨우치고 책하셨어야 할 것인데, 그만 도리어 지나치게 격뇌(激惱)하시고 성기(聲氣)를 크게 드러내시어, 마치 신료(臣僚)들과 겨루느라 대립하고 서로 승부를 가리듯이 하고 계시니, 이는 자못 함양(涵養)이 부족한 데가 있고 지수(持守)가 굳건하지 못한 데가 있으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2월 6일 을사
밤에 화성(火星)이 평도성(平道星)을 범하였다.
이때 경기 감사 조최수(趙最壽)가 여주(驪州)·이천(利川)에 여역(癘疫)이 특히 심하다고 치계(馳啓)하여 장문(狀聞)했는데, 임금이 딴 뜻이 있다고 의심하여 특별히 파직하고, 또 병조 참판 이진순(李眞淳)이 군호(軍號)를 핑계로 마치 지적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고, 체차(遞差)를 명했는데, 이에 이르러 판중추부사 이태좌(李台佐)가 상소하기를,
"여주·이천에 여역이 크게 번지고 있음은 신(臣)도 또한 들었습니다. 번신(藩臣)이 사실에 의거하여 장문하는 것은 실로 옛사람들이 수한(水旱)이나 도적(盜賊)을 주달하던 일입니다. 군호를 써서 올린 것은 일에 따라 규계(規戒)를 올리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지적했다.’고 하시니, 자못 뜻밖입니다. 이는 모두 한때의 실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대개 중화(中和)의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데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도신(道臣)의 장계(狀啓)는 진실로 딴 뜻이 있다. 재신(宰臣)의 경우 소회(所懷)가 있다면 면전에서 진달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 그런데 군호에 집어 넣어 위졸(衛卒)들이 외어대게 하였으니, 사체에 미안하다. 인주(人主)가 되어 방백(方伯) 한 사람 재신(宰臣) 한 사람을 파직하지 못한단 말이냐?"
하였다.
2월 7일 병오
묘시(卯時)에 햇무리했는데, 좌이(左珥)가 있고 무리 위쪽에 관(冠)이 있었다. 유시(酉時)에도 햇무리했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2월 8일 정미
중궁전(中宮殿)이 도로 시어소(時御所)032) 로 이어(移御)하였다.
엄경하(嚴慶遐)를 지평으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으로, 신치근(申致謹)을 수찬으로, 이현모(李顯謨)를 부수찬으로, 정호(鄭澔)를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2월 9일 무신
임금이 친히 영희전(永禧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그날로 환궁(還宮)하였다.
2월 10일 기유
윤휘정(尹彙貞)을 수찬으로, 조명익(趙明翼)을 부교리로, 이광도(李廣道)를 집의로, 윤취성(尹就成)을 지평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사직(司直)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종묘의 제관(祭官)으로 차출되었을 적에 각 실(室)의 축문(祝文)을 보건대, 더러는 ‘효증손(孝曾孫) 사왕신(嗣王臣)’ 이라 하고 더러는 ‘사왕신’ 이라 하였으며, 인조실(仁祖室)과 같은 경우는 ‘효증질손(孝曾姪孫)’ 이라 했는데, 유독 덕종실(德宗室)에 대해서는 ‘국왕신(國王臣)’ 이라 했습니다. 덕종 대왕께서는 선대(先代)의 직계(直係)인데 ‘국왕신’ 이라 하였음은 전연 계속(係屬)되는 뜻이 없어 미안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신이 본직(本職)의 임명을 받은 뒤에 혹자의 말이 ‘계묘년033) 봄에 정시(庭試)를 본 무인(武人)들을 전연 견별(甄別)하지 않음은 부당한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도 조가(朝家)에서 이미 과거를 보여 사람을 뽑았다면 무사들이 시험에 나아가 참여함은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또한 이제 이미 ‘토역(討逆)’ 두 글자를 없애고 이름을 별시(別試)라 고쳤으니, 더욱 구애될 의의가 없습니다. 때문에 처음 정사(政事) 때부터 계속해서 거의(擧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비로소 듣건대, 그 과거의 이름을 다시 ‘토역’이라 고쳤으나 애당초 조보(朝報)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臣)도 처음에는 또한 믿지 않았는데, 이에 관한 문적(文籍)을 보자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정미년034) 의 처분 때 ‘토역’이란 이름을 없애고 그 방(榜)을 도로 보존했음은 진실로 매우 합당한 것이었는데 중간에 다시 고쳐 심히 흔들림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18일의 처분 뒤에 의리가 다시 밝아졌으니, 결코 ‘토역’이란 이름을 그대로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번에 고치지 않는다면 과거의 이름이 올바르지 못하고, 조용(調用)하는 길도 편리하지 못한 바가 있을 것이니, 한결같이 정미년 초의 처분대로 다시 별과(別科)로 이름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문해 보시고 처리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판(兵判)은 처음 정사 때에 구애되는 의사가 없어야 옳은데, 남의 말로 인해 문적(文籍)을 고찰해 보았더니, 또한 흔들림을 면하지 못하였다. 감란록(勘亂錄) 서문에도 또한 말했거니와, 근본은 비록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서덕수(徐德修)·김성절(金盛節)·조흡(趙洽)·이천기(李天紀)·김용택(金龍澤)의 무리가 어찌 역적질을 하지 않았더란 말이냐? 을사년035) 에 삭과(削科)했던 것을 정미년에 복과(復科)했다가 이번에 또한 그 이름을 고친다면 심하게 흔들림에 가깝지 않겠는가? 지난해 가을에 비록 처분을 고쳐 내렸지만, 이들의 역적질은 그대로인데, 또 그 과거의 이름을 고친다면 을사년의 처분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이르기를,
"그 당시 김일경과 목호룡의 무리가 부도(不道)한 말을 빚어내고 꾸며내어 위로 성상의 몸에 미쳤기 때문에 훈적(勳籍)에 기록하고 또 경과(慶科)도 보였던 것입니다마는, 이제 와 흉악한 역적들이 복법(伏法)되고 의리가 펴인 뒤에야 어찌하여 ‘토역’이란 이름을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이천기·김용택의 무리를 비록 지금 역률(逆律)로 논단(論斷)했지만, 당초 ‘토역’이란 명칭은 본시 이 무리들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천기·김용택의 무리가 어찌 역적이 아니란 말인가? 지난해 가을의 처분 뒤 나의 뜻은 굳게 정해졌다."
하였다. 김재로가 이르기를,
"‘토역’ 두 글자는 지극히 포괄적입니다. 어찌 이천기·김용택의 무리만 가리켜 말한 것이겠습니까? 이천기·김용택의 무리가 비록 역률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어찌 칭병(稱兵)한 데 비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신년036) 에는 칭병한 일이 없었지만 또한 ‘토역과(討逆科)’라고 했고 그 뒤에 번안(飜案)한 때도 또한 과거 이름을 고치지 않았다. 경(卿)은 정시(庭試)·별시(別試)를 논할 것 없이 단지 그 무인(武人)을 잘 보고서 임용(任用)하면 된다. 오늘날은 처분이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변동하여 고칠 수 없다."
하였다. 김재로가 이르기를,
"만일에 ‘토역과’라 하고 그 사람을 임용한다면 이름이 끝내 올바르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지금 어찌하여 ‘별시(別試)’ 두 글자를 가지고 주차(周遮)하고 있는가? ‘토역’이 아니었다면 애초 어찌 과거를 보였겠는가? 설혹 이 두 글자를 없앤다 하더라도 그 과거의 이름이 어디로 가겠는가? 이름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또 이것이 만약 특교(特敎)에서 나온 것이라면 옳겠지마는, 아래 있는 사람이 감히 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제 ‘토역’이라 고치고 이제 또 ‘별시’라고 일컫는다면 이는 위에 있는 사람이 또한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이는 경신년의 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사년037) 번안(飜案)할 때 역적의 괴수 허견(許堅)과 남(柟)이 그대로 있었으므로, ‘토역과’를 그대로 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을사년 파방(罷榜)할 때 신(臣)이 옥관(獄官)으로서 논의(論議)에 참섭(參涉)했습니다마는, 정미년 복과(復科)한 다음에 ‘토역’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별시’라고 했으니, 처분이 참으로 좋았던 것입니다. 어느 때 무슨 연유로 또 고쳤는지를 알 수 없으나, 이름이 올바르지 않다는 말은 진실로 병판이 진달한 바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에 다시 흔들린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정미년 7월에 신이 예조에 대죄(待罪)하고 있을 때 방목 단자(榜目單子)를 보았더니, ‘토역’ 두 글자를 황첨(黃籤)으로 덮고 작은 계(啓)자를 찍어 두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처분이 합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황첨을 없앤 것은 그해 10월 처분 이후의 일인 듯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10월의 처분 이전에 이미 ‘토역’ 두 글자를 없애었은즉, 지금 이에 의거하여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을사년과 정미년의 처분을 나는 모두 잘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지난해의 8월 18일 처분은 곧 나의 최초의 행정으로 진실로 범연한 것이 아니었으니, 지금 변동하여 고칠 수 없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정미년 초의 처분은 진실로 잘된 처분인데 중간에 변동하여 고친 것은 도리어 흔들리게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 만약 처음대로 도로 고친다면, 이는 곧 성의(聖意)를 견지(堅持)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경(卿)은 그렇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경의 소견이 이러하니, 이는 또한 속투(俗套)를 면하지 못한 것이다."
하고, 이어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당초에 집의 박사정(朴師正)과 지평 엄경하(嚴慶遐)가 계속해서 소패(召牌)를 어겼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박사정은 경산 현감(慶山縣監)으로, 엄경하는 남해 현감(南海縣監)으로 보임(補任)했는데, 이윽고 박사정에게 상피(相避)해야 할 데가 있었으므로 바꾸어 남해에 차임했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박사정을 바꾸어 차임함은 아마도 편중(偏重)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박사정은 형제간에 거취(去就)가 달랐다. 엄경하에 비하면 조금 무겁기는 하지만 서로 바꿈이 그의 벌에 맞다. 하늘의 우로(雨露)가 어찌 땅을 가리던가? 유독 피폐하고 잔약한 사람을 먼 지역에 차임하여 보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1일 경술
헌납 권지(權贄)가 상소하기를,
"권구(權榘)는 불가불 잡아다가 사실을 사핵(査覈)하여, 암담(黯黮)한 속에다 한없이 놓아 두고서 풍속이 선량한 온 고을이 영구히 의구(疑懼)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고, 또 이진유(李眞儒)를 용서한 것이 잘못임을 말하고 겸하여 김은(金溵)을 준엄하게 국문(鞫門)해야 한다는 청을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3일 임자
도목정(都目政)038) 을 행하여 김상성(金尙星)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수찬으로, 송필항(宋必恒)을 사간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응교로, 정내주(鄭來周)를 승지로, 장태소(張泰紹)를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구성익(具聖益)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최명주(崔命柱)를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과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의 정사(政事)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4일 계축
주강(晝講)를 행하였다.
2월 16일 을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2월 17일 병진
정시(庭試)를 보이고 시사(試士)하여 이시희(李時熙) 등 20인을 뽑았다.
2월 18일 정사
햇무리하였다. 무리 위에는 이(履)가 있었고 좌우에는 극(戟)이 있었으며, 빛깔은 모두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푸르렀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2월 19일 무오
우박이 쏟아졌는데, 개암 열매만 하였다.
임금이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것을 이유로 자신을 책망하는 분부를 내렸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 등이 곤내(閫內)를 화합하게 하고 제사(祭祀)에 공경을 다하고 청납(聽納)하는 길을 넓히고 전화(錢貨)를 주조(鑄造)하고 행행(幸行)를 정지하는 다섯 가지 조목을 들어 권면과 경계를 진달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차자를 올려 면직을 바라고, 또 논하기를,
"원릉(園陵)에 동가(動駕)하실 길기(吉期)가 이미 박두했는데 하늘의 견고(譴告)가 이번에 또 이에 이르렀으니, 뭇 신료(臣僚)들의 근심과 당황스러움이 또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옛적에 당 현종(唐玄宗)이 장차 동도(東都)에 행행하려 하였으나, 마침 천재가 있음으로 인해 저무량(褚無量)이 그의 임금에게 시급히 행행을 정지할 것을 간했습니다. 대개 임금의 수성(修省)하는 도리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니, 바라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물려 정하도록 윤허하시어 신중한 도리를 다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권면하고 경계한 말을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인용한 당 현종의 일이 오늘날 예로 들 수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2월 20일 기미
김응복(金應福)을 승지로, 남태온(南泰溫)을 지평으로 삼았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무지개의 변괴 때문에 차자를 올려 면직을 바라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정언 이광부(李光溥)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능(陵)으로의 행행이 이미 박두했는데, 흰 무지개의 변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지금은 바로 전하께서 공구(恐懼)하고 수성(修省)하셔야 할 때입니다. 여러 날이 걸리는 길에 동가(動駕)하심은 진실로 십분(十分) 두려워하고 신중히 하는 도리가 아니니, 지금의 급무(急務)는 행행을 정지하시는 것보다 더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2월 21일 경신
임금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태좌(李台佐)를 인견(引見)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적에 신이 일찍이 관저장(關雎章)039) 의 글뜻을 들어 부연(敷演)해 진달하고 우러러 권면하자 전하께서 ‘신의 말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분부를 하셨습니다. 신이 지금까지 감격해 간직하고 있으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원(祈願)하는 것은 오직 국가에 종사(螽斯)040) 의 경사가 있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신의 말을 깊이 살피시고 노망한 말이라고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경(卿)의 미의(微意)를 알지 못하겠는가? 마땅히 따로 더욱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이태좌가 또 아뢰기를,
"요사이 전하의 처분에 실망하는 것이 많습니다. 능(陵)에 행행(幸行)하는 일로 말하더라도 성심(聖心)에 작정하신 것이라면 반드시 거행하실 것을 기약하시어 신하들이 감히 교구(矯救)하지 못합니다. 기필코 거행하려고 하시는 것이 과연 십분(十分) 모두 잘하시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민망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스스로 기약하시는 바는 보통 임금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인데, 지금은 도리어 군하(群下)들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시며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분부를 잇따라 내려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시니, 어찌 성덕(聖德)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겠는가? 지난해 이후로는 마음이 더욱 상하였고, 전에는 참는 것이 두세 가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능히 한 가지도 참지 못한다."
하였다. 이태좌가 또 성심(誠心)을 열고 공도(公道)를 펼 것으로, 재변(災變)을 그치게 할 방도를 갖추 진달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답하였다.
2월 22일 신유
최치중(崔致重)을 장령으로, 이종백(李宗白)을 헌납으로, 정도은(鄭道殷)을 정언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4일 계해
허옥(許沃)을 헌납으로, 채응만(蔡應萬)을 정언으로, 한현모(韓顯謨)를 교리로 삼았다.
2월 25일 갑자
임금이 여주(驪州) 영릉(寧陵)에 행행하였다. 광나루에 이르렀을 적에 도감(都監)이 순찰하다가 깃대가 부러진 것을 발견하고는 단지 초관(哨官)만 잡아오니, 하교(下敎)하여 죄주지 말게 하였다. 호위(護衛)하는 수원(水原) 군사들의 군용(軍容)이 피폐한 것을 보고는 한탄하기를,
"선조(先朝)에는 일찍이 수원 군사를 훈련원(訓鍊院) 군사와 다름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 도리어 이러하니, 무슨 까닭인가? 수원이 이러하니 여타의 고을도 알만하다. 전후의 부사(府使)들을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저녁에 거가(車駕)가 광주(廣州) 행궁(行宮)에 들었다.
2월 26일 을축
임금이 말을 타고 쌍령(雙嶺)에 이르러 병자년041) 에 전망(戰亡)한 유허(遺墟)를 바라보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한참 동안 말을 멈추고 있다가 출발하였다. 신시(申時)에 이천(利川) 행궁에 들었다.
2월 27일 병인
임금이 이천을 출발하여 여주에 이르러 영릉(寧陵)을 배알(拜謁)하였다. 의식(儀式)대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이어 영릉(英陵)을 배알하고 나서 시종(侍從)한 신하로 하여금 여주와 안성(安城)의 민생들을 효유(曉諭)하여, 윗사람을 친근히 하고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며 본고장에서 안정하여 생업(生業)에 힘쓸 것을 권면하게 하였다.
임금이 회란(回鑾)하는 길에 이천(利川)의 행궁(行宮)에 이르러, 여주(驪州)·광주(廣州)·양근(楊根)·이천 네 고을에는 특별히 민역(民役)을 감해 주고, 여주의 사서(士庶) 중에 70세 이상은 음식물을 내리고, 80세 이상으로 두 번 행행(幸行)을 겪은 사람에게는 사서인(士庶人)을 막론하고 특별히 한 자급(資級)씩을 가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호(鄭澔)를 존문(存門)하게 하였는데, 이때 정호의 나이 90에 가까웠다.
2월 28일 정묘
임금이 이천을 출발하여 남한산성의 동문 밖에 이르러 말을 타고 고취(鼓吹)하는 가운데 서장대(西將臺)에 올랐다. 싸움터를 가리키며 임금이 말하기를,
"한봉(汗峰)이 어디 있는가?"
하니, 수어사(守禦使)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산성 동쪽에 있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성하지맹(城下之盟)042) 은 옛부터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므로, 뜻있는 선비로서 이땅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들 팔을 걷어붙이며 상심(傷心)합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어제 영릉(寧陵)을 배알하고 오늘 이 장단(將壇)에 오르셨으니, 지난날의 일을 뒤좇아 생각해 보신다면 성심(聖心)이 또한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孝宗)께서는 산림(山林)의 선비를 초빙하시고 와신 상담(臥薪嘗膽)의 뜻을 가다듬으며 복수(復讐)·설치(雪恥)의 계책을 강구하여, 장차 천하 후세에 대의(大義)를 신장(伸長)하려 하시다가 대업(大業)의 절반을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 붕조(鵬殂)하셨으니, 이것이 충신과 지사(志士)들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까닭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효종의 뜻과 사업을 뒤좇아 이으려 하신다면 더욱 이 일에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몇 해와 몇 달로는 기약할 수 없지만, 언제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해이해지지 않으며 군사를 양성하고 재물을 비축하고 인재(人材)들을 수습하고 국정을 닦고 국법을 밝히고, 도덕(道德)이 이미 이루어진다면, 비록 군사를 일으켜 가서 처지는 못하더라도 오히려 관문(關門)을 닫고 약조(約條)를 거절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고, 교리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는 오랑캐의 마당에서 참혹하게 죽어 시체가 이국(異國) 땅에 버려졌습니다. 홍씨와 윤씨 두 가문에서는 모두 남은 의복(衣服)을 가지고 허장(虛葬)을 했기에 조가(朝家)에서 특별히 복호(復戶)043) 해 주도록 했습니다만, 오달제의 가문에서는 허장은 예법이 아니라 하여 단지 의낭(衣囊)을 가져다 불태우고 그의 아내의 무덤 뒤에 묻어 애당초 분묘가 없었기 때문에 복호해 주라는 명이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의 아내의 무덤이 있고 또 묻은 의낭이 있으니, 일체 복호해 주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다른 것과 자별하니, 특별히 복호해 주어야 한다."
하였다.
2월 29일 무진
임금이 남한 산성의 행궁(行宮)에서 출발하였다. 부교리 조명익(趙明翼)이 아뢰기를,
"성종조(成宗朝)경술년044) 에는 거가(車駕)가 지나가는 곳마다 문묘(文廟)에 치제(致祭)하고 향교(鄕校)의 유생(儒生)들에게 쌀을 내렸습니다. 이번에도 마땅히 그대로 본받았으면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뒤좇아 그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뒤좇아 거행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무진년045) 에도 그런 예가 없었으니 그냥 두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여기서 관무재(觀武才)046) 를 행하고 싶지만 날짜가 더뎌질까 염려스러워 실행하지 못하니, 무진년의 전례대로 따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시행함이 마땅하다."
하고, 수어사 윤순에게 명하여 이 사실을 장사(將士)들에게 효유(曉諭)하게 하고, 이어 유엄(柳儼)을 어사로 삼았다. 저녁 때에 환궁(還宮)하였다. 당초 임금이 영릉(寧陵)을 전알(展謁)하려 했을 때는 막 무신년047) 의 변란을 겪은데다가 여주와 이천의 백성들 중에 역적들을 따른 자가 많아 인심이 채 안정되지 않았고, 또한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은 사람이 즐비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이런 때에 여러 날이 걸리는 곳으로 동가(動駕)하는 것은 위험과 의구(疑懼)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과 중재(重宰)들이 피차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이 일을 들어 큰 의리(義理)로 삼았던 것이다. 소장(疏章)이 공거(公車)에 가득 차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극력 쟁집(爭執)하는 사람까지 있었으나, 임금은 마침내 듣지 않았다. 대저 여주와 이천의 백성들이 반드시 모두 역적을 따른 것도 아니었고, 촌락의 전염병의 기운이 반드시 장전(帳殿) 가까이 침범하는 것도 아니었다. 임금이 성조(聖祖)를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 한 번 전알(展謁)하고 소분(掃墳)하려 한 것은 곧 천리에 당연한 일인데, 조정의 신하들이 다른 계책 없이 단지 행행(幸行)을 정지하기만 일삼았으니, 그 또한 당시의 풍조가 미열(媚悅)에 가까웠던 것이다. 마침내 난여(鑾輿)가 평온하게 돌아왔고 먼 외방(外方)의 민생들이 기뻐하였으니, 당시 다투며 고집했던 사람들이 또한 할 말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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