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5권, 영조 6년 1730년 3월

싸라리리 2025. 9. 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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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기사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황흠(黃欽)이 졸(卒)하였다. 황흠은 조정에선 50년 동안에 팔좌(八座)048)  를 거쳤고 나이가 90이 넘었다. 사람들이 청렴하고 근신하며 소탈하고 검소함을 칭찬했다.

 

3월 2일 경오

임금이 민진원(閔鎭遠)을 인견(引見)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을사년049)                  에 전하께서 천신(賤臣)에게 신(臣)의 집에 반드시 경종(景宗)의 어제(御製)가 있을 것이니 찾아오도록 하여 바치라고 하교하셨는데, 그때 신이 적소(謫所)에서 막 돌아왔기에 가속(家屬)들이 채 모두 모이지 못하였고, 집안의 상협(箱篋)050)                   등속도 또한 서울과 시골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찾아내지 못하고 단지 절구(絶句) 한 수(首)만 구득하여 올렸습니다. 그뒤 정미년051)                   6월 무렵에 우연히 집안에 간직한 낡은 상자를 뒤적이다가 어제(御製)인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한 편을 찾았습니다. 대개 지난 경진년052)                  과 신사년053)                  에 인현 성모(仁顯聖母)께서 오랫동안 병석에 계실 때 신(臣) 형제는 숙종(肅宗)의 명을 받들어 대내(大內)에 드나들며 조석(朝夕)으로 승후(承候)하였는데, 그때 경종께서 늘 성모(聖母)의 곁에 입시(入侍)하셨습니다. 성모께서는 늘 경종으로 하여금 신들과 함께 그 앞에 문자(文字)를 토론하도록 하셨는데, 이 한 편(篇)은 곧 그때 구득하여 보장(寶藏)했던 것입니다. 이미 이 한 편을 찾아내고는 뒷날 등대(登對)할 때를 기다렸다가 올리려고 했는데, 미처 올리지 못하고 신이 죄를 지어 시골로 내려갔기에 지금까지 신의 패낭(佩囊) 속에 지니고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삼가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대개 이때의 경종의 춘추(春秋) 13세였는데 비단 문리(文理)가 넉넉하고 통창(通暢)할 뿐만이 아니라 명의(命意)054)                  하여 말을 만들어 갈 즈음에 의리(義理)가 정당하여, 임금으로서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예의와 선비로서 스스로를 지키는 의리를 도리에 충분하게 말씀하셨으니, 그때 성학(聖學)이 이미 고명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고, 후세의 임금과 후세의 신하가 마땅히 마음에 새기고 몸소 실행한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단지 추모(追慕)하고 감창(感愴)하시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유훈(遺訓)대로 받들어 준수하며 조금이라도 어기지 않기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을 보니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열성의 어제를 개간(開刊)할 때 마땅히 인출(印出)에 넣어야만 했을 것인데, 미처 하지 못했다. 경종께서 경(卿)의 가문에 내리신 뜻은 진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니, 이는 경이 받들고 돌아가 경의 가문의 보장(寶藏)으로 삼고, 한 통을 모사(模寫)하여 올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신이 이 어제를 올렸으니, 따라서 진달하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신(臣)이 경진년에 시질(侍疾)하고 있을 적에 인현 성모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세자(世子)는 천성(天性)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 저녁으로 곁을 떠나지 않으며 이 몸을 사친(私親)보다 더 사랑하고 공경한다. 사친을 보러 갈 적에도 또한 반드시 나에게 여쭙고 감히 제마음대로 하지 않았으며, 내가 병이 난 뒤부터 만일 더 심해지는 날이 있으면 또한 감히 나에게 사친을 보러 가겠다고 여쭙지 못하다가, 내가 그런 줄을 알아차리고 꼭 보러 가도록 한 다음에야 비로소 갔다. 듣건대, 그의 사친이 더러는 그의 귀에 대고 비밀스런 말을 한다는데, 비록 무슨 일을 말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세자가 그만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아 이 때문에 구타(歐打)를 당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기만 했으니, 더욱 사랑스럽고 안쓰럽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경종의 춘추(春秋) 겨우 10세를 넘었는데, 효행(孝行)이 이처럼 순독(純篤)했고 인륜(人倫)의 변(變)에 잘 처신하심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성모(聖母)께서 승하(昇遐)하실 적에는 예제(禮制)에 넘도록 애통하여, 영곡(迎哭)·반우(返虞) 때는 노상에서 곡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군신(群臣)들이 모두들 감동하였습니다. 비록 대순(大舜)의 효성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경종의 어린 나이의 성덕(盛德)을 신만큼 상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만일 뒷 사람들이 이와 같은 줄을 알지 못하고 곧장 신축년055)                   이후의 일을 뭇 간신들이 병환이 계심을 요행으로 여기며 멋대로 속이고 엄폐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가 예재(睿裁)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면, 누(累)를 끼치게 되고 모함을 받음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생각이 이에 미칠 적마다 간장(肝臟)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을사년056)                  에 수차(袖箚)에다 맨먼저 진달했던 것도 변함없는 혈성(血誠)이 오직 이 점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뒤 소장(疏章)들 중에 감히 경종의 덕(德)을 걸주(桀紂)와 유려(幽厲)057)                  처럼 타고난 성품으로 돌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비록 어릴 적의 성덕(聖德)을 잘 알지 못하는 소치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말은 지극히 미안합니다. 신은 늘 인현 성모의 성교(聖敎)를 전하의 탑전(榻前)에서 한 번 진달하고 싶었지만, 내간(內間)에 관계된 일이라 황송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이제는 늙고 병들어 장차 죽게 되었습니다. 신이 죽는다면 이 일을 전하께서 누구에게서 들으시겠습니까? 따라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앙달(仰達)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소장(疏章) 가운데 말한 바는 누가 한 것인가?"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임징하(任徵夏)의 상소가 나오고 나서는 그런 소장이 빈번했습니다. 그때 여러 사람의 소장 내용에 이런 말이 있었기 때문에 신이 매우 미안스럽게 생각하여 말을 하는 사이에 언급했습니다마는, 그 사람의 성명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어찌 선왕(先王)을 무핍(誣逼)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다만 말을 할 때 살펴 신중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이 미안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신이 선왕의 아름다운 덕이 혹시나 인멸될까 생각했기 때문에 이처럼 진달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일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경종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적에 효성이 지극하고 처사를 모두 잘하셨음은 궁중의 사람들이 지금도 칭송(稱頌)하고 있고, 나 또한 익히 들었었다마는, 인현 성모께서 이런 하교를 하셨음은 알지 못했다. 지금 경(卿)의 말을 들어 보건대, 경종을 추모하는 마음이 가슴속에 더욱 간절하다."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또 청컨대 시사(時事)를 앙달(仰達)하겠습니다. 인현 성모께서 대점(大漸)하셨을 때 일찍이 신 등에게 하교하시기를, ‘갑술년058)                  에 복위(復位)한지 얼마 안되어 조정에서 세자(世子)의 사친(私親)에 대한 공봉(供奉) 등의 일은 마땅히 여러 비빈(妃嬪)과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의논했는데, 이로부터는 궁중(宮中) 사람들의 마음이 거개 모두 모처(某處)로 기울어져 나인(內人)들이 늘 침전(寢殿)에 왔다갔다 하며 창구멍으로 엿보는 짓까지 하는데도 침전의 궁인(宮人)들이 감히 가금(呵禁)할 수 없어 일이 지극히 한심하였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병증(病症)으로 형색이 지극히 괴이하므로 사람들의 말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인(宮人) 시영(時英)이란 자에게 의심스러운 형적이 많고 또한 드러난 일이 없지도 않지만, 누가 감히 주상(主上)께 고하고 주상께서도 어떻게 아시겠는가? 다만 내가 갖은 고초를 받은 지 지금 여러 해가 되었기에 이미 회복될 가망이 없게 되었다. 지금 소원은 오직 빨리 세상을 떠나고 싶은 것인데, 오히려 더하다 덜하다 하며 이렇게 시간을 끄니 괴롭고 원통하다.’고 하시어 이어 눈물을 주르르 흘리셨으니, 신이 지금 뒤좇아 생각하면 간장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승하하신 뒤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신이 사관(史官)으로 친국(親鞫)에 입시(入侍)했는데, 그때 판의금부사        이여(李畬)가 나아가 죄인 설향(雪香)의 문목(問目)을 청하자 숙종(肅宗)께서 설향의 죄상을 누누이 하교하셨는데, 침전(寢殿)에 드나들며 창구멍으로 엿본 한 조항이 과연 그 문목 내용에 들어 있었고, 죄인 시영(時英) 또한 자복(自服)하여 복법(伏法)되었습니다. 그 뒤 을유년059)                  에 신이 승지로서 승정원에 있을 적에 대사헌        이돈(李墩)이 향유(鄕儒)들이 상소하여 남구만(南九萬)을 논한 일 때문에 청대(請對)하여 향유들을 죄주기 청하자, 숙종께서 이돈을 귀양보내도록 명하셨습니다. 이어 특별히 신을 입시하라 명하시고 분부하시기를, ‘이돈이 감히 청대하여 남구만을 신구(伸救)했다. 이는 내가 제방(隄防)을 준엄하게 하지 않은 소치이다. 남구만은 파직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신이 주대(奏對)하기를, ‘이돈을 멀리 귀양보내는 것은 과중한 듯합니다. 또 남구만은 일찍이 명의(名義)에 죄를 지어 벌을 받았다가 이미 거두어 서용(敍用)했는데, 이번에 또 이돈의 말 때문에 파직한다면, 마치 갑(甲)에게 죄줄 것을 을(乙)에게 옮기는 것과 같을 것이니, 미안한 듯합니다.’ 하니, 숙종께서 하교하시기를, ‘이는 노여움을 옮기는 데 견줄 것이 아니다. 제방을 준엄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돈과 같은 무리가 감히 이런 말을 하여 장차 의리가 캄캄하게 막히게 되었으니, 다시 파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셨습니다. 이어 하교하시기를, ‘장차 경녕전(敬寧殿)에 친히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싶다.’고 하시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셨습니다. 지금 비록 다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만, ‘쌓인 아픔을 조금이나마 펴기는 했지만 아직도 의리가 어두워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개탄(慨歎)스럽지 않은가?’라고 하셨는데, 이 글은 어제책(御製冊) 속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전하께서 혹시라도 미처 상세히 다 알지 못하고 계시는가 하여 감히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앙달(仰達)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을 추모(追慕)하시어 이 의리가 조금이나마 혹시라도 어두워지지 않게 하신다면, 성고(聖考)·성모(聖母)의 하늘에 계신 영혼이 또한 반드시 저 하늘에서도 기뻐하실 것이고, 인륜과 의리가 무너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하기를,
"다시 진달한 말을 생각해 보건대 비통함과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새로워진다. 그러나 지금 의리가 캄캄하게 막힌 데 이르지는 않았는데, 알지 못하겠다만 경(卿)이 말한 바는 뜻이 있어 나온 것인가?"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신이 이제 늙고 병들어 장차 죽게 되었기 때문에 그때 보고 들은 것을 갖추 진달하여 의리를 다하는 바탕으로 삼고,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어 의리가 오랜 해가 지나도 어두워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는가? 이 의리는 끝내 캄캄하게 막힐 리 없다."
하고, 이어 조금 물러가 쉬도록 하였다. 한참 있다가 다시 입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진정(陳情)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일인가?"
하니, 민진원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온 것은 단지 한번 은명(恩命)에 사례하고 조용히 물러가고 싶어서였습니다. 갑진년060)                   대상(大喪) 때 중외(中外)에서 모두 선왕(先王)께서 병없이 갑자기 훙서(薨逝)하신 줄로 알았고, 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과 심유현(沈維賢)의 무리가 흉악한 말을 지어내어 경동(驚動)하고 현혹시키므로, 그때 난역(亂逆)들이 이를 빙자하여 성언(聲言)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인심이 안정되지 못함은 모두 이에 근본한 것인데, 당초에 증세의 시말을 아직도 분명하게 중외(中外)에 보여 주지 못했으니, 성상에 대한 모함을 이미 모두 변명하여 드러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종환(從宦)할 수 없는 첫째 이유입니다. 신이 그 동안 입은 죄명(罪名)은 지극히 무겁고 큰 것이었습니다. 혹은 ‘무상부도(誣上不道)’라 하고 혹은 ‘범분패의(犯分悖義)’라 하며 더러는 ‘세집국명(世執國命)’이라 하여 극악 대죄(極惡大罪)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인신으로서 이런 악명(惡名)을 지면 진실로 인간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감히 조정에서 낯을 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종환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신이 신축년 숭반(崇班)에 대죄(待罪)하고 있을 때 선왕(先王)께서 갑자기 대리(代理)의 명을 내리셨기에, 신은 여러 대신(大臣)들과 의논하기를, ‘성상의 증후(症候)가 아직 위예(違豫)한 중에 있는지라 조만간에 이런 거조(擧措)가 있어 마땅하나, 오늘날은 곧 즉위(卽位)하신 원년(元年)이니, 이런 때에 갑자기 대리하는 거조가 있다면 뭇사람들의 심정이 실망할 것이고 듣기에도 놀랍고 의혹스러울 것이니 극력 쟁집(爭執)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연일 호소했지만 소청대로 되지 못하고 마침내 비상한 하교(下敎)가 있었으므로 대신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차례차례 하문하셨는데, 신의 직질(職秩)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맨먼저 주대(奏對)하기를, ‘상교(上敎)가 이처럼 간절하고 절박하시니, 청컨대 정유년061)                  에 이미 거행했던 절목(節目)대로 하시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연차(聯箚)했을 때 신은 비록 미처 알지는 못했습니다만, 그 차자의 말을 보건대 대개 신이 한 말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네 대신이 이 때문에 모두 참혹한 화를 입었는데도, 신은 일을 같이 했던 사람으로서 단지 찬적(竄謫)만 당하여 홀로 화를 면했으니, 죽은 사람들이 안다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을사년062)                   조정에 나아간 뒤에는 망령되게 선왕(先王)에 대한 모함을 변명하고 선왕의 덕을 드러내는 것을 제일 시급한 임무로 삼아 수차(袖箚)를 만들어 올렸고, 장차 잇따라 여러 신하들의 억울함을 신설(伸雪)하기를 계청(啓請)하려고 했는데, 그 수차가 채납(採納)되기 전에 다른 정승이 차자에 진달한 말에 따라 전하께서 통쾌하게 신설(伸雪)해 주시고 또한 포양(褒揚)하는 은전(摠典)을 베푸셨기에, 신이 감히 다시 심정과 사세를 진달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대로 행공(行公)했습니다. 지금은 그때의 대신들이 또한 추삭(追削)의 벌을 받아 황천(黃泉)에서 원통해 하고 있는데, 신이 당초 일을 함께 한 사람으로서 홀로 의기양양하게 종사(從仕)한다면, 뒷날에 죽어서 지하(地下)에 들어갈 적에 반드시 신의 얼굴에 침을 뱉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종환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숙종실록(肅宗實錄)》은 실록청을 설치한 지 오래 되었는데도 한청(汗靑)063)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중간에 총재(摠裁) 임명을 받아 여러 해 역사를 감독했었는데, 신 등이 죄를 입고 멀리 물리쳐진 뒤에 들으니, 당시의 공론이 ‘찬수(纂修)한 바에 잘못된 것이 많다.’고 하고 심지어 품명(稟命)하여 수정하는 거조(擧措)가 있기까지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이 종환할 수 없는 점의 네 번째 이유입니다.
지나간 해에 임징하(任徵夏)가 유배되었을 적에 신이 연석(筵席)에서 진달하기를, ‘신이 임징하의 상소를 보건대, 그 주된 뜻이 신의 차자와 같았습니다. 임징하가 죄를 입었다면 신이 또한 어찌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이를 들어 인죄(引罪)했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반드시 지나치게 인혐(引嫌)할 것 있겠느냐?’고 하교하셨기에, 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러 났습니다. 이번에 임징하를 조정에서 역적으로 논단하여 장차 시급하게 국법(國法)대로 할 것을 계청(啓請)하려 합니다. 신이 더욱 어찌 감히 조정의 반열(班列)에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종환할 수 없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신이 을사년 이전에 시골에 있을 때 진재해(秦再奚)가 목호룡(睦虎龍)의 화상 그리기를 극력 사양한 것을 들고 마음속으로 자못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조정에 들어온 뒤 진재해가 신(臣)을 보러 왔기에 그 사실을 물었더니 과연 신이 들은 바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의 생각에 ‘미천한 사람으로 능히 이와 같이 했으니 조가(朝家)에서 마땅히 포양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하겠다.’고 여겨 이에 감히 연석에서 진달했던 것입니다. 신이 죄로 폐치(廢置)된 뒤에 이르러 삼가 듣건대 설서(說書)        한사선(韓師善)이 상소하여 그 아비의 일을 호소하였는데, 신이 주달한 뒤에 진재해가 와서 사실이 아님을 말하자 신이 성을 내어 김재해의 머리를 휘어잡고 끌어내어 내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이미 진재해의 말을 듣고 진달한 것이니, 진재해가 어찌 신(臣)이 사실이 아닌 말을 했다고 할 리가 있고, 신이 어찌 진재해의 머리를 휘어잡고 끌어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과연 그의 말과 같다면 이는 신이 근거가 없는 말을 공연히 지어내어 성총(聖聰)을 속인 것입니다. 일이 비록 하찮은 것이기는 하나, 임금을 속이는 죄는 지극히 크니, 이것이 신이 종환할 수 없는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신의 실정과 자취가 이러한데도 오히려 무턱대고 대신의 반열에 있으며 그 반열에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에 진달한 말에 대해서는 비지(批旨)에 이미 말했었다. 옛날 일로 보더라도 대점(大漸) 때 약원(藥院)에서 미처 문안(問安)하지 못하는 경우가 또한 많이 있었다. 경(卿)은 이것을 의리(義理)로 삼아 효유(曉諭)하고 싶은 것인가?"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그때 신(臣)은 조보(朝報)를 보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전하기를, ‘합문(閤門)밖에서의 구전(口傳)에 대한 계사(啓辭)가 더러는 조보에 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옹원(司饔院)으로 수직(守直)을 옮긴 것도 대점 때야 비로소 했기 때문에 수직을 옮긴 것에 관한 조보가 휘음(諱音)과 동시에 전해진 것입니다."
하고, 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스스로를 보호를 생각하도록 권면하는 뜻으로 앞서 이미 분부를 내렸다. 만일 성미가 편벽하여 극복(克服)하기 어려운 곳을 극복해 나가지 못하다가 마침내 죄를 얻게 된다면, 내가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추모(追慕)하는 마음으로 비록 용서하고 싶어도 국법(國法)이 있으니, 장차 어찌할 것인가? 지금 정승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내가 어찌 경(卿)을 제배(除拜)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경을 친애(親愛)하는 마음으로 서추(西樞)064)                  에서 한가로이 요양(療養)하며 자유스럽게 왔다갔다하여 경향(京鄕)에서 여유있게 지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경의 형제를 두고 가령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나라에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결단코 믿지 않는다. 경의 형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다가 자연히 원망을 가져오는 길이 되어버렸는데, 그 단단(斷斷)한 혈성(血誠)은 단지 나만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조(先朝)에서도 또한 알았기 때문에 시종 임용(任用)했던 것이다. 신축년 이후 비록 괴이한 귀신같은 무리들이 나왔지만, 내가 진실로 경들은 결코 그속에 참섭(參涉)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누누이 분부를 내리심이 마치 가정의 부자(父子) 사이와 같으니,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지만 어찌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라를 위해 건저(建儲)함은 나라의 큰 일이다. 진실로 사람의 도리가 있는 사람이면 어찌 그런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만일에 화복(禍福)과 이해를 계교(計較)하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순신(純臣)이 아니다. 그 당시의 일은 내가 비록 사제(私第)에 있었지만 오히려 묵묵히 생각하고 있던 것이 있었는데, 그 거조(擧措)를 추적해 보면 저러함을 면하지 못했다. 이 한 가지 절목을 내가 일찍이 개탄했다.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백발이 된 범진(范鎭)065)                  이나 영종(英宗)을 위하여 정책(定策)을 한기(韓琦)066)                  가 만일에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으로 협잡(狹雜)한 것이 있었다면 누가 순심(純心)이라고 하겠는가? 내가 이이명(李頤命)에 대해 매양 나랏일을 근심하느라 가정을 잊어버렸음을 칭찬했으니, 이것은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니지만, 만일 그 속에 있는 사생(死生)과 화복에 대한 마음이 시상(時象)에 참착(參錯)되었다면, 내가 비록 배우지 못했지만 반드시 나를 위해 준 것 때문에 용서해 줄 수는 없다. 그때의 일이 진실로 경종(景宗)께서 선왕(先王)의 골육(骨肉)임을 위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진실로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라고 하겠지만, 만일 사생과 화복에 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서덕수(徐德修)와 김성절(金盛節)의 공초(供招)는 자못 지극히 흉패(凶悖)한 것이었다. 형벌의 고통이 비록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건저(建儲)를 국가의 대계(大計)로 여겼다면 경(卿)들의 도리에 있어 당연히 내가 모함받은 것을 변명해야 할 것인데도 이를 하지 않았다. 이의천(李倚天)이란 자가 이천기(李天紀) 등을 깨끗이 벗겨 주려고 한 것이나 정호(鄭澔)가 상소하여 서덕수를 신구(伸救)하려고 한 짓에 있어서, 경들의 거조(擧措)를 어찌 쇄락(灑落)하고 광명(光明)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모두가 스스로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은 본시 효경(梟獍)067)                  과 같은 성질을 지닌 자이라 교문(敎文)을 지을 적에 흉악한 말이 이에 튀어나온 것이다. 또 ‘청천백일(靑天白日)’이란 말이 있어 무신년의 변이 생기게 된 것인데, 그 근원을 생각해 보면 모두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에 서덕수와 김성절의 공초가 없었다면 어찌 이런 일들이 있었겠는가? 심유현(沈維賢)은 본시 흉악한 짓을 하지 못할 자였다. 곧 부유하고 귀한 집안의 자제(子弟)였는데, 그가 어찌 능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남의 속임과 유혹에 빠져 그렇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깊고 어두운 곳의 일이라 외부 사람이 알 수가 없기는 하지만, 신(臣)이 옥안(獄案)을 보았더니, 서덕수와 김성절 등이 승복(承服)한 공초는 지극히 흉패한 것이었고, 사실을 고찰해 보건대 허망한 단서가 마디마디 탄로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은 비록 허망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만일에 서덕수와 김성절의 공초가 없었다면 그들이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했겠는가? 또 비록 속여서 자복한 것이라고 하지만, 말이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인데, 어찌 감히 그런 더없이 흉패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까닭으로 효경(梟獍)같은 무리가 흉악한 말을 지어낸 것이다. 비록 효유(曉諭)하지 않더라도 조정 사람들이 어찌 그 말의 흉악함을 알지 못하겠는가? 김일경과 목호룡(睦虎龍)의 혈당(血黨)들은 비록 효유하더라도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니, 나라의 처사(處事)가 한갓 구차하게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또 일이 이미 정정 당당했다면 비록 흉악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비록 백대(百代)의 뒤라 하더라도 공정한 사람이 본다면 마땅히 스스로 공론(公論)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신 또한 어찌 감히 흉악한 역적들이 그렇게 효유하는 것에 따라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만일 효유하는 일이 있다면 훗날 어리석은 백성들이 거의 속임수에 현혹될 염려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보건대, 경(卿)의 병통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다. 속여서 자복한 것인지 아닌지를 논할 것 없이 그 한 가지 대문은 내가 그 한계(限界)를 다하고 싶기 때문에 지난해 8월에 처분을 한 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대의(大義)를 밝혔고, 연차(聯箚)의 대리(代理)에 관한 일도 이미 광명(光明)하게 신설(伸雪)하여 벗겨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이 사직을 해야 할 까닭이 없다. 이이명과 김창집(金昌集)은 그대로 두었는데 그대로 둔 까닭은 다른 일 때문이었으니, 경이 그 두 사람과 거취(去就)를 같이 하려 하는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당초에 관계된 바는 같이 연차한 것이었으니, 두 사람이 신설(伸雪)되기 전에 신이 어찌 감히 자신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저 의심을 제거하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자기 자신이 의심하여 멀리함을 제거한 다음에야 남이 의심하여 멀리하는 짓을 제거할 수 있는 법이다. ‘설청(設廳)하지 않았다.’는 말에 있어서도 또한 의심하여 멀리함에서 나온 것이니, 경부터 모름지기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이다. 경이 한가로이 지내며 자적(自適)하는 것은 내가 마땅히 윤허하겠거니와, 마음이 편안해지기 어렵다는 일들에 있어서는 결단코 그대로 하게 할 수 없다."
하였다.

 

3월 3일 신미

사헌부에서 【지평 윤취성(尹就成)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당진 현감(唐津縣監) 이만혁(李萬爀)은 요망한 점장이의 말을 믿고 저주(咀呪)한다고 하면서 비(婢) 두 사람과 노(奴) 한 사람을 동시에 타살(打殺)하여 입에다 쇠를 물리고 시체에다 가시나무를 끼워 포구의 다리 어귀에다 거꾸로 묻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되 이만혁처럼 지극히 참혹하게 하는 경우는 그전에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수단을 정사(政事)에 적용시키므로 인심이 놀라 두려워하여 원성이 길거리에 넘쳐나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최치중(崔致重)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번에 과거를 설행(設行)한 것은 나라의 큰 경사였습니다. 어제(御題)로 선비들을 시험보임은 진실로 우연한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 방(榜)이 나온 다음에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합니다. 요사이에 비로소 입격(入格)한 여러 글을 구해 보았더니, 그 중에는 과연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비가 고관(考官)의 반열에 있는데, 그의 아들이 바친 과제(科製)에 그 아비가 올린 전문(箋文)의 문구(文句)를 많이 사용하였고 과표(科表)의 첫 항목 구절에 있어서는 더욱 범연히 보아 넘기는 데가 아닌데, 전문의 문구를 답습(踏襲)하여 쓰되 대강 두어 글자만 산개(刪改)했으며, 하단(下段)에서는 짧은 구절을 전부 사용하면서 글자를 더 넣어 긴 구절로 만들었으니, 이는 진실로 의심스러운 단서입니다. 요사이 과장(科場)이 비록 엄격하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대궐 뜰에서 선비를 뽑으면서 이러한 일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과법(科法)을 엄격히 하고 뒷날의 폐단을 막는 도리에 있어서 그냥 덮어둘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그 글을 가져다가 살펴보시고 사핵(査覈)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이덕수(李德壽)가 정시(庭試)의 고관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 이산배(李山培)가 참방(參榜)했기 때문에 대관(臺官)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대사헌 송진명(宋眞明)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그윽이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동가(動駕)하시던 날에 궁인(宮人)들이 감히 요망한 무당을 시켜 귀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북을 둥둥 치고 너울너울 난잡한 춤을 추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릇 들었던 사람들이 놀라 눈을 부릅뜨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는 도열(桃茢)068)  로 상서롭지 못한 것을 제거하는 방법과는 또한 크게 다릅니다. 아! 당당(堂堂)한 천승(千乘)의 임금이 원릉(園陵)을 지알(祗謁)함은 지극한 효성이요 정당한 예(禮)입니다. 황천(皇天)이 자연히 작정하여 돕고 온갖 신명이 가금(呵禁)하며 보호해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도리어 무엇하러 무격(巫覡)들의 사리에 맞지 않는 부정한 축원(祝願)을 빌릴 것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군하(群下)들이 평소에 우리 전하께 기대하는 바가 일찍이 삼대(三代) 이상에 있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어찌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의 중등 임금들에게도 있지 않던 바의 일을 오늘날에 볼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일은 진실로 반드시 전하께서 들어 아시는 바가 아닐 것이고, 궁액(宮掖)의 소속들이 감히 이런 부정하고 더러운 짓을 한 것일 것이니, 그 고려하고 기탄함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길거리에서 전문(傳聞)한 것을 가지고 곧장 가히 총청(聰聽)에 진달합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전하께서 따로 사실을 조사하시되 사실이었다면 급히 유사(有司)에게 회부하며 통렬하게 징치하도록 명하시고, 혹시라도 이미 끝난 일이라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그리고 더욱 궁금(宮禁)을 엄숙히 하고 음사(淫邪)를 물리치는 도리에 유의하소서."
하니, 임금이 궁액의 소속들을 사핵(査覈)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3월 4일 임신

하교하기를,
"저번날의 상소도 이미 지극히 이상한 것이었는데, 어제의 상소는 더욱 지극히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부류들은 결단코 이목(耳目)의 관원으로 두어 조정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없으니, 장령 최치중(崔致重)을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고, 영구히 청망(淸望)에 의망(擬望)하지 말라."
하였다.

 

3월 4일 임신

호조 판서 서명균(徐命均)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은 장령 최치중(崔致重)의 상소에 대해 너무나도 위구(危懼)한 바 있습니다. 정시(庭試)의 알성과(謁聖科) 등은 원래 상피(相避) 규정이 없습니다. 자제(子弟)로서 참방(參榜)한 사람이 전후로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헌신(獻臣)이 취모 멱자(吹毛覔疵)069)  의 뜻을 가지고 지극히 흠흉하고 위험한 말을 했습니다. 뽑아낸 시권(試券)은 명관(命官)이 뽑아낸 두루마리이고, 이덕수(李德壽)는 애당초 참섭하지 않았음은 대중들이 똑똑히 본 일이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올린 전문(箋文)의 문자(文字)는 이미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전파된 것이니, 어찌 반드시 제진(製進)했던 사람의 아들만 유독 답습(踏襲)했겠습니까? 하물며 또한 당초부터 현저하게 옮겨다 쓸 것이 없었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이미 통촉(洞燭)했다. 경(卿)에게 무슨 피혐(避嫌)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3월 5일 계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따. 판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도 함께 입시(入侍)했다. 무일편(無逸篇)을 진강(進講)했는데, 강이 끝나자, 시독관(侍讀官) 조명익(趙明翼)이 아뢰기를,
"영릉(寧陵) 행행(幸行) 때 대가(大駕)가 막 동구(洞口)를 나서자 한 노부(老婦)가 거가(車駕) 앞에서 상언(上言)하기에, 물어보았더니 곧 홍치상(洪致祥)의 아내였습니다. 듣건대, 두 눈이 모두 멀어 누구의 부축을 받아 길에 나와 애통하게 눈물을 흘리며 정문(呈文)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배종(陪從)한 모든 사람들이 상황을 목격하고 몹시 불쌍하고 가엾게 여겼습니다."
하고,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본사(本事)를 논하지 않고 단지 이것만 가지고 말한다면 또한 하나의 의리가 될 수 있습니다. 40여 년 뒤 다시 영릉을 전알(展謁)하는 거조가 있었습니다만, 영릉의 혈속(血屬)들을 체념(體念)하여 돌보아 주신다면 어찌 성덕(聖德)에 빛이 나지 않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이 ‘10대가 되면 용서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린(臣隣) 중에서 현명한 사람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하물며 영릉의 혈속을 어찌 관대하게 용서해 주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던 바를 또한 사랑한다.’는 의리로 논한다면, 주부(主簿)의 관함(官銜) 하나를 특별히 도로 주도록 윤허하시는 것이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신(臣)이 감히 함부로 앙청(仰請)할 수 없으니,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고 명하자, 여러 신하들이 혹은 가하다 하고 혹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민진원이 나아가 아뢰기를,
"세상 일은 공(公)이 사(私) 같기도 하고 사가 공 같기도 하며 의(義)가 이(利) 같기도 하고 이가의 같기도 한 경우가 또한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이 밝지 않으면 천리(天理)와 사욕(私慾)의 한계를 구별할 수가 없으니, 그 공부가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 겉을 방정(方正)하게 하되, 소상(昭詳)하게 삼가 지키며 반복해서 연구한 다음에야 힘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을 취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관직(官職)을 가볍게 여기고 임금의 뜻을 거스르되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임용(任用)한다면 나라에 이익이 있지만, 관직을 귀중히 여기고 남이 말을 기피하고 임금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비록 한때의 임사(壬使)에는 적합하겠지만 나라에는 이익이 없을 것이니,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시고 밝게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면계(勉戒)한 말이 절실하니, 마땅히 각별히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3월 6일 갑술

송성명(宋成明)을 예문관 제학으로, 정우량(鄭羽良)을 부응교로, 홍상인(洪尙寅)을 집의로, 남태량(南泰良)을 지평으로, 김성발(金聲發)을 장령으로, 이덕부(李德孚)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3월 7일 을해

김상성(金尙星)과 조적명(趙迪命)을 교리로, 조명익(趙明翼)과 유엄(柳儼)을 부교리로, 이진망(李眞望)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성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일전에 대궐 뜰에서 선비들을 시험 보일 적에 신(臣)의 자식 이산배(李山培)가 또 다시 으뜸으로 합격했기에 마음속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영광(榮光)이 아니라 두렵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관연 대관(臺官)의 소장(疏章)이 나와 지극히 심각하게 나열(羅列)하였습니다. 그날 과차(科次)를 정한 곡절과 문구(文句)의 이동(異同)은 모든 고관(考官)들이 본 바이니, 신이 어찌 감히 변명해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오직 생각하건대, 만일 신 자신이 신의 자식을 뽑았다면 방사(放肆)한 짓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이 되고, 만일 여러 고관들이 억지로 신의 뜻을 따른 것이라면, 이는 신이 고관들을 견제하는 권력이 있는 것이 됩니다. 전자(前者)이거나 후자이거나 사람들이 죄 주기를 바란 것은 모두 신 자신에 관한 것이니, 신이 과장(科場)에서 사정(私情)을 쓴 죄를 다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최치중(崔致重)의 상소의 뜻은 경알(傾軋)하려다가 저절로 그의 작태(作態)를 드러낸 것이니, 또한 풍헌(風憲)의 수치라 할 만하다."
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최치중(崔致重)의 상소 때문에 또한 차자(箚子)를 올려 스스로 인책(引責)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3월 9일 정축

밤 1경(更)에 달이 목성(木星)을 빙둘러 범하였다.

 

임금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元任大臣) 및 금오(金吾)의 당상(堂上)·포도 대장(捕盜大將)을 명초(命招)하여 3경(三更)에 매흉(埋凶)070)  한 궁인(宮人) 순정(順正)과 세정(世貞) 등을 인정문(仁政門)에서 친국(親鞫)하였다. 그 이튿날 임금이 장전(帳殿)에 나아가자, 홍치중(洪致中)·이태좌(李台佐)·이집(李㙫)이 나아가 부복(俯伏)하였다. 임금이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기를,
"말을 하고 싶으나 마음속이 먼저 나빠지니 마땅히 진정시키고 말하겠다. 이는 외간(外間)의 일과 다른 것이니, 사관(史官)은 상세히 듣고서 상세히 기록하도록 하라.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순정(順正)이란 이름의 한 궁인(宮人)이 있었는데, 성미가 불량하여 늘 세자(世子) 및 세자의 사친(私親)에게 불순(不順)한 짓을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내쳐 버렸다. 신축년071)  에 건저(建儲)한 뒤 궁인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도로 들어오도록 했는데, 혹은 마음을 고쳤으리라고 생각했다. 갑진년072)  에 사복(嗣服)한 뒤에는 세자 및 두 옹주(翁主)를 보양(保養)하게 하다가 세자 책봉(冊封) 뒤에 그를 옹주(翁主房)에 소속시켰으므로 동궁(東宮)의 나인(內人)이 되지 못한 것 때문에 항시 마음속으로 앙앙불락하였으니, 이른바 기심(忮心)073)  이 있는 자였던 것이다. 대개 신축년 겨울의 일이 한밤중에 일어났는데, 궐녀(厥女)에게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지는 않았지만, 나는 의심스러운 것을 가지고 남을 죄주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그냥 두고 묻지 않았다. 그 뒤 행약(行藥)한 한 가지 일이 나온 뒤로 궐녀가 매번 이 일에 관해 들을 적마다 안색이 바뀌는 일이 없지 않았으니, 마치 춘치자명(春稚自鳴)074)  과 같은 격이었다.
재작년 원량(元良)의 병이 증세가 자못 이상하게 되었을 적에 도승지(都承旨) 또한 ‘의원도 증세를 잡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진실로 의심했지만 일찍이 입에 꺼내지 않았고, 지난 번 화순 옹주(和順翁主)가 홍진(紅疹)을 겪은 뒤에 하혈(下血)하는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매우 마음에 괴이하게 여기며 의아해 하다가, 이제 와서야 비로소 독약(毒藥)을 넣어 그렇게 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미 세자(世子)의 사친(私親)에게 독기(毒氣)를 부렸기 때문에 세자가 점점 장성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아니하여 또 다시 흉악한 짓을 하였고, 강보(襁褓)에 있는 아이인 4왕녀(王女)에게도 또한 모두 독약을 썼다. 나의 혈속(血屬)을 반드시 남김없이 모두 제거하려 했으니, 어찌 흉악하고 참혹하지 아니한가? 정명(正命)으로 죽어도 오히려 애통하기 짝이 없거늘, 하물며 비명(非命)에 죽는다면 부모가 된 사람의 마음이 또한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신축년의 일은 내가 제기해 말하고 싶지 않으나, 무신년부터 흉악한 짓을 하기 시작하여 이미 원량(元良)을 해쳤으니, 그가 아무리 지극히 흉악한 사람이라 해도 또한 그만두어야 할 것인데, 반드시 4왕녀를 모두 독살(毒殺)하고야 말려 했으니, 그의 마음의 소재가 어찌 너무나도 음흉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만일 원량에게 독약을 쓴 일이 없었다면 금내(禁內)에서 다만 마땅히 장살(杖殺)하고 말았을 뿐이겠지만, 동궁에게 흉악한 짓을 한 정상이 이번에 이미 탄로났고 금내에서 구문(究問)하자 그가 또한 지만(遲晩)으로 납초(納招)하였으니, 만일 이런 일이 명백하여 의심없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일이 있기까지 하겠는가? 접때 거동했을 때 금내에서 파수(把守)하는 일이 있어 비로소 수상한 흔적이 있음을 알게 되어 내가 빈궁(嬪宮)으로 가는 길에 잡게 되었는데, 대저 창경궁 근처는 한 조각도 말끔하고 깨끗한 땅이 없었다. 그로 하여금 매흉(埋凶)한 곳을 가리키도록 하여 파 보았더니, 뼛가루와 뼛조각 그리고 쇠기름 같은 것이 곳곳마다 있었고, 빈궁 및 옹주방(翁主房)의 담장 밖에도 모두 묻은 데가 있었으니, 이 얼마나 흉악한 뱃속이란 말인가?
궐녀는 성질이 본래 흉악하여 다른 궁인(宮人)을 사주하여 동류들을 욕하게 하였고, 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어 세자 및 세자의 사친(私親)을 욕하기까지 하였다. 한문제(漢文帝)가 ‘나는 고황제(高皇帝)의 측실(側室) 아들이다.’라고 했거니와, 궐녀가 침욕(侵辱)한 뜻은 대개 항시 능모(凌侮)하는 마음을 가졌던 데서 나온 것이다. 그가 세자를 보양(保養)한 것은 2세에서 7세까지였다. 그러므로 결코 이런 흉악한 일은 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어찌 그가 이처럼 낭자하게 흉악한 짓을 할 줄 생각이나 했으랴? 죄인 순정(順正) 및 함께 음모한 복랑(福娘)·구월(九月)·김덕이(金德伊) 네 사람을 내수사(內需司)에 가두고, 세정(世貞)·거어지(去於之)·박경유(朴景裕) 세 사람을 단봉문(丹鳳門) 밖에 대령하도록 하고 도사(都事)를 보내어 잡아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니, 홍치중(洪致中)·이태좌(李台佐)·이집(李㙫)·조현명(趙顯命) 등이 모두들 끝까지 다스려 실정을 알아내고 법대로 정형(正刑)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순정을 국문(鞫問)하니 흉악한 짓을 한 정절(情節)을 낱낱이 직초(直招)하였으므로, 결안(結案)을 만들어 무기고(武器庫) 앞에서 처참(處斬)하였다. 그 결안에 이르기를,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감히 궁내(宮內)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제멋대로 악한 짓을 했고 집에 있으면서도 죄를 저질렀습니다. 신축년 저위(儲位)를 이어받으신 뒤에는 구악(舊惡)을 씻어주시고 다시 입궐(入闕)을 허락하셨으니 은혜가 지극히 두터웠습니다. 그런데도 그전의 버릇을 고치지 않고서 감히 매흉(埋凶)하였고, 동궁께도 흉악한 짓을 하여 흉악한 마음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또 빈궁(嬪宮)과 강보(襁褓)에 있는 모든 옹주(翁主)에게까지 흉악한 짓을 하여, 국가의 혈속(血屬)을 반드시 남겨놓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신명(神明)은 흉악한 짓을 돕지 않는 법이라 흉악한 흔적이 성감(聖鑑)에 잡혀 낱낱이 실토(實吐)하였던 것이니, 아무리 은휘(隱諱)하려 한들 할 수 있었겠습니까? 친하게 지내는 과부(寡婦) 세정(世貞)이 들여보낸 흉하고 더러운 물건으로 대궐 안에서 흉악한 짓을 해 모해(謀害)하려 한 것이 적실합니다."
하였다. 죄인 세정을 국문하였다. 세정은 곧 여항(閭巷)의 과부로 순정과 친밀했는데, 뼛가루를 구하면 편지 봉투에 싼 뒤 거어지(去於之)란 이름의 사람을 시켜 매번 순정에게 전해 준 자이다. 처음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발명(發明)하다가 복랑(福娘)과 대질(對質)시키자 말문이 막혔다. 낙형(烙刑)을 가하자, 비로소 고하기를,
"뼛가루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순정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르,
"이른바 뼛가루란 무슨 뼛가루이고 어디서 구한 것이냐?"
하니, 말하기를,
"세교(細橋)에서 거름을 지는 사람인 김중청(金重淸)에게서 구했습니다."
하였다. 또 국문하기를,
"복랑의 말에 ‘흰 가루와 검은 가루가 있다.’고 하였다. 흰 가루는 사람뼈일 것이나 검은 가루는 과연 무슨 뼈이냐?"
하니, 말하기를,
"검은 가루는 곧 여우 뼈인데 이도 또한 김중청에게서 구했습니다."
하였다. 순정(純正)과 결탁하여 궁중(宮中)에 흉악한 짓을 하여 동궁(東宮)을 모해(謀害)한 것으로 결안(結案)을 받은 다음 법대로 처참(處斬)하였다.

 

3월 10일 무인

이광부(李光溥)를 헌납으로, 한현모(韓顯謨)를 교리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1일 기묘

임정(任珽)을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죄인 김이건(金二建)을 친국(親鞫)하였다. 김이건은 곧 일명 중청(重淸)으로서 포도청(捕盜廳)에서 캐물어 사실을 알아내고, 국청(鞫廳)으로 이송(移送)한 자이다. 공술하기를,
"정미년075)   10월 갈두리(乫頭里)에서 거어지(去於之)를 만났는데, 거어지가 ‘약을 구하려 한다.’ 하기에, ‘무슨 약이냐?’고 물었더니, 거어지가 귀에다 대고 ‘사람뼈를 구하려 한다. 우리집 여주인(女主人)이 장차 쓸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함께 연희궁(延禧宮) 산봉우리 위로 가서 죽은 사람의 팔뼈와 손바닥만한 어린애의 두골(頭骨)을 파내어 거어지의 수건을 싸고 함께 그의 집에 가서 유숙(留宿)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디다 쓸 것이냐?’고 물었더니, ‘자네가 알아 무엇하느냐?’고 대답하고는 면포(綿布) 22척(尺)과 돈 1냥 5전(錢)과 쌀 2말과 장(醬) 2주발을 주었습니다. 재작년 8월에는 거어지의 집 딸과 새로 상투 튼 젊은 종이 거어지와 함께 와서 또 뼛가루를 찾으면서 ‘쓸 곳은 묻지 말고 다만 구해만 준다면 자네의 의식(衣食)을 걱정없이 해 주겠다.’고 하기에, 또 다시 함께 봉우리 위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무덤을 파서 사람의 팔뚝 마디뼈와 갈비뼈를 각각 하나씩을 구하여 수건으로 싸고 광주리에 담았는데, 여비(女婢)가 이고 갔습니다. 함께 따라 가서 헌 옷가지 한 벌을 얻었습니다. 열흘이 못되어 얼굴이 붉은 여인이 또 와서 뼈를 구하므로, 또 대현(大峴)의 길가에 있는 시체의 정강이뼈를 가져다가 주었는데, 그뒤에 들어와 또 쌀과 장을 얻었습니다. 그 이듬해 시월 얼굴이 희고 나이가 서른 남짓한 여자를 금성(錦城)의 신당(神堂)을 왕래하는 길에 들러 ‘요사이는 왜 다시 사람뼈를 찾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이제 이미 썼기 때문에 다시 구해도 쓸 곳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 거어지의 집에 갔을 적에 나인(內人)이라 칭하는 쪽을 찌지 않고 비녀를 꽂은 여인이 ‘이 뼈는 동궁(東宮)에다 쓰려는 것이다.’고 하고, 또 ‘내가 원한과 유감의 마음이 있어 이것으로 저주(咀呪)하려 한다.’고 하였으며, 또 ‘당신의 의식(衣食)은 내가 마땅히 대어 주겠으니 혹시라도 이 말을 누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므로, 순정(純正)·세정(世貞)과 부동(符同)하여 무덤을 파고 뼈를 가져다가 궁중에서 흉악한 짓을 하여 동궁(東宮)을 모해(謀害)한 것으로 결안을 받은 뒤 법대로 처참(處斬)하였다. 죄인 거어지를 국문하니, 공술하기를,
"세정이 늘 ‘뼛가루를 대궐안에서 쓰려 하니, 자네가 박랑(朴娘)에게 주라.’고 했기 때문에 과연 전해 주었습니다."
하고, 또 고하기를,
"임팔동(林八同)이란 사람이 우리집 앞에서 살고 있으므로, 흉악한 물건을 구하여 쓰겠다고 청했습니다."
하고, 또 고하기를,
"세정이 그의 비녀(婢女) 돌화(乭化)·윤금(允今)과 뼛가루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또 고하기를,
"이하방(李夏芳)과 세정의 서형(庶兄)은 다같이 통모(通謀)한 사이입니다. 이하방이 세정의 집에 와서 서로 이야기 할 때 세정이 ‘흉악한 물건을 대궐 안에서 쓰고 싶다.’고 하자, 이하방이 ‘내가 마땅히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3월 12일 경진

정우량(鄭羽良)을 집의로, 윤광익(尹光益)을 사간으로, 권지(權贄)를 장령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죄인 박경유(朴景裕)를 친국(親鞫)하였다. 박경유는 곧 순정(順正)의 양손(養孫)으로 혼궁 별감(魂宮別監)을 따라 다니다가, 거어지(去於之)의 공초(供招)에 나온 사람인데, 거어지와 면질(面質)시킨 뒤 두 차례 형신(刑訊)하였다. 윤금(允今)을 국문하자, 공술하기를,
"그때 세정의 집에 태자(太子) 무녀(巫女)가 왕래했습니다."
하고, 또 공술하기를,
"뼛가루는 세정의 오라비가 구해 세정에게 보낸 것인데, 그의 이름은 이하방(李夏芳)입니다."
하고, 또 공술하기를,
"박도창(朴道昌)은 세정의 족속으로 빚을 받는다고 자주 왕래했고, 또한 그의 종을 시켜 세정에서 글발을 보내 누설하지 말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순정(順正)의 비녀(婢女)에 또한 이름이 덕이(德伊)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돌화(乭化)를 국문하자, 공술하기를,
"왕십리에서 거름을 지는 사람이 사람뼈 두 개를 가지고 왔는데, 그는 얼굴이 길고 수염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채소를 파는 여인이 뼈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였다. 또 박도창을 국문하며 돌화(乭化)와 면질시키도록 했는데, 박도창이 말이 많이 막혔다. 또 무녀(巫女) 논업(論業)을 국문하니, 공술하기를,
"동궁(東宮)의 김상궁(金尙宮) 외에는 본래부터 서로 아는 나인(內人)이 없습니다."
하였다. 다시 국문하자, 그제야 공술하기를,
"순정(順正)이 아기(阿只)들을 죽이려 한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흉악하도다. 왕녀(王女)를 모조리 죽이려 했다니. 이미 ‘나라의 아기들을 모두 제거하려 했다’고 하였으니, 세자(世子)는 자연히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 말이 너무나도 더욱 흉악하다."
하였다. 이하방에게 낙형(烙刑)을 가하자, 흉악한 물건을 구해 보내 준 사실을 직초(直招)하였다. 이에 거어지(去於之)·이하방·논업(論業)을 모두 부동(符同)하여 흉악한 짓을 한 것으로 결안(結案)을 받은 뒤 법대로 처참(處斬)하였다.

 

임금이 제문(祭文)을 친제(親製)하여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혼궁(魂宮)에 제사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무당은 요술(妖術)을 부리는 부류로 비록 도성(都城) 사대부(士大夫)들 집에서 더러 친근히 믿다가 망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대궐 안이 엄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전부터 무어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논업(論業)의 공초(供招)를 신(臣)이 삼가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비록 사대부들의 집으로 말하더라도 가장(家長)이 어찌 모두 알 수 있겠는가? 여염(閭閻)은 작은데도 오혀려 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깊은 구중 궁궐에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세미한 일들을 분명하게 살필 수 있겠는가? 옛적부터 그런 일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대궐 안에도 또한 신당(神堂)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엄하게 신칙하기 때문에 없어졌다. 논업이 더러는 말루하(抹樓下)라 일컫고 더러는 ‘공(功)이 있다.’고 일컬어 마치 내가 참여하여 들은 것처럼 했기에, 내가 또한 경을 대하기가 부끄럽다. 하지만 어찌 내가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본부(本府)에서 추국(推鞫)하도록 명하였다.

 

3월 13일 신사

남일명(南一明)을 집의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응교로, 신겸제(申兼濟)를 장령으로, 조명택(趙明澤)을 교리로, 심태현(沈泰賢)을 수찬으로 삼았다.

 

3월 14일 임오

김상규(金尙奎)를 대사간으로, 정형복(鄭亨復)과 이귀휴(李龜休)를 지평으로 삼았다.

 

3월 15일 계미

이흡(李潝)을 부교리로, 신치근(申致謹)을 부수찬으로, 송필항(宋必恒)을 사간으로, 정우량(鄭羽良)을 부응교로 삼았다.

 

임금이 사묘(私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3월 17일 을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죄인 복랑(福娘)을 친국(親鞫)하였다. 공술하기를,
"석례(石禮)가 매양 흉악한 물건을 순정(順正)에게 전달했는데, 하루는 동궁(東宮)의 김상궁(金尙宮)과 순정이 술을 마시며 저를 부르기에, 마음속으로 ‘이것은 반드시 흉악한 짓을 하려고 모의(謀議)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순정의 뼛가루를 가지고 온돌방 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서 하는 말이 ‘그것을 내가 이렇게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죄인 순혜(順惠)를 먼 지역으로 발배(發配)하라고 명하였다. 순혜는 동조(東朝)를 공봉(供奉)하던 김상궁(金尙宮)이라고 일컫던 사람으로,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다. 집의 홍상인(洪尙寅)·사간 허옥(許沃)이 아뢰기를,
"화변(禍變)을 빚은 지 이미 오래 되어, 지난 신축년076)  에는 독약을 쓴 일이 있었고 이번에는 동궁(東宮)께 해가 미쳤으니, 그 더없이 흉악한 정절(情節)에는 반드시 서로 관련된 자가 있을 것입니다. 접때의 성교(聖敎)에 ‘순정(順正)이 매번 신축년의 일을 들을 적마다 곧 얼굴빛이 바뀜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본다면 한 번 끝까지 핵실(覈實)하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신축년에 서덕수(徐德修)가 공초(供招)한 말은 너무나도 통탄스럽고 악독한 것이었다마는, 이 여인이 사용한 바의 것은 반드시 그의 말에 ‘그 물건은 매우 적은 것이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의 문목(問目)에도 그의 말을 끼어 넣지 않아 안온(安穩)하게 될 수 있도록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홍상인이 아뢰기를,
"죄인이 공술한 초사(招辭)는 이번에 매흉(埋凶)하고 약을 쓴 일에 불과합니다. 그 흉악한 짓을 한 정절이 반드시 이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지난해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사건이 생긴 뒤에 통탄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끝내 죄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듣건대, 성이 김가인 궁인이 역적의 공초에 나왔으니, 만약 지금 이에 따라 끝까지 사핵(査覈)한다면 반드시 알 만한 단서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런 말을 제기(提起)하여 동조(東朝)께 근심을 끼치지 말라. 이번의 나의 처분에 서덕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또한 뜻이 있는 것이다. 순혜를 국문하니 그의 발명(發明)하는 말이 근거가 있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묻기를,
"순혜가 본사(本事)에 있어 범죄(犯罪)하지 않았음은 마치 풍마우 불상급(風馬牛不相及)077)  과 같은 일이니, 어찌 의심스럽다 하여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지난 날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이 있자,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무리가 동조(東朝)의 나인(內人)이라 했고, 그때 의금부 도사 이시발(李時發)이 차비문(差備門)에서 소란을 피웠음은 지금까지도 절통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김상궁(金尙宮)을 들먹이는 말을 들으니, 더욱 통탄스럽다."
하니, 대신 홍치중(洪致中)·이태좌(李台佐)가 같이 아뢰기를,
"의심스럽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아야 상천(上天)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장령 신겸제(申兼濟)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고, 또 아뢰기를,
"순혜(順惠)가 이미 원악(元惡)인 세정(世貞)의 공초(供招)에 나왔는데도 정실(情實)을 채 구핵(究覈)하지 않고 갑자기 작처(酌處)하는 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옥사(獄事)의 체례(體例)를 크게 손상시켜 여정(輿情)이 의혹스러워 하고 있으니, 청컨대, 정배(定配)한 죄인 순혜를 잡아다가 국문하여 엄하게 핵실(覈實)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8일 병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죄인 덕이(德伊)를 친국하였다. 복랑(福娘)과 면질시킨 뒤 복랑은 부동(符同)하여 흉악한 짓을 한 것으로 결안(結案)을 받아 법대로 처참(處斬)하였고, 석례(石禮)에게는 낙형(烙刑)을 가하였다. 박도창(朴道昌)은 16차례 형신(刑訊)하여 막사(幕舍)로 내렸는데, 조금 있다 물고(物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일부터는 본부(本府)에서 추국(推鞫)하라."
하였다.

 

조명익(趙明翼)을 헌납으로, 남태온(南泰溫)을 정언으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사헌부에서도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계(狀啓)에 ‘적도(賊徒)들이 불을 지르고 호각(號角)을 불면서 백주(白晝)에 양덕(陽德) 지경을 횡행하고 관교(官校)들을 구타했다고 합니다. 이 적도들은 북도(北道)에서 흘러들어 왔다가 다시 곡산(谷山)으로 향했는데, 대개 무신년078)  의 적당(賊黨) 중에서 법망(法網)을 벗어난 자들이 고토(故土)에 안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모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엄중하게 여러 도(道)에 신칙하여 토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3월 19일 정해

햇무리하였다. 우이(右珥)가 있고 무리 위쪽에 배(背)가 있었으며 빛깔은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석례(石禮)가 지만(遲晩)하였으니, 청컨대 결안(結案)하여 법대로 정형(正刑)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2일 경인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4일 임진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이번의 요악(妖惡)한 옥사(獄事)는 하찮은 일개 궁인(宮人)이 혼자 꾸민 바가 아니고, 반드시 지휘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박도창(朴道昌)은 그 자신이 이미 의식(衣食)이 넉넉한 사람이니, 결단코 순정(順正)에게 부림을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또 그는 국가에 대해 원망할 만한 일이 없었으니, 반드시 이런 흉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용히 생각해 본다면 반드시 박도창을 지사(指使)한 사람이 있을 것인데, 흉악하고 완강하게 끝까지 버티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하룻밤 사이에 나왔으니,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과연 박도창이 괴수(魁首)였다면 그의 당류(黨類)들이 법망(法網)에서 빠져나갔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제조(提調)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인심과 세도(世道)가 날이 갈수록 점차 무너지고, 이제 막 변란을 겪었기에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때 종사(螽斯)의 경사가 있다면 위로는 성상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고 아래로는 온 세상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니, 황천(皇天)과 조종(祖宗)들께서 반드시 말없이 도우시고 신민(臣民)들의 기축(祈祝)함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윤순이 이미 발단(發端)하였습니다마는, 규곤(閨閫)의 내정(內政)으로 외간(外間)에 들리는 것이 자못 많이 있습니다. 신자(臣子)의 심정에 부모가 편치 못하다면 아들이 어찌 편할 수 있겠습니까? 《역경(易經)》에 ‘여인은 안에서 정위(正位)하고 남자는 밖에서 정위한다.’고 했으니, 남녀가 정위를 함은 천지(天地)의 대의(大義)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역경》의 큰 도리대로 하시지 않기 때문에 규곤의 안을 주관(主管)하여 단속하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여비(女婢)와 천얼(賤孼)들이 감히 흉역(凶逆)을 자행해도 살피어 알아차리지 못한 나머지 이런 흉악한 변을 초래한 것이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제가(齊家)·치국(治國)의 도리를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요사이 궁중이 엄숙하지 못하여 떠도는 말과 근거없는 말이 외간(外間)에 전파되는 것이다."
하였다.

 

3월 25일 계사

심공(沈珙)을 대사성으로, 이종백(李宗白)을 헌납으로, 임정(任珽)을 부수찬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부교리로, 윤광익(尹光益)을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죄인 박도창(朴道昌)을 윤금(允今)과 면질(面質)시키자 능히 스스로 발명(發明)하지 못하였고 정절(情節)에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경폐(徑斃)하였고, 죽을 참에는 입과 코로 물을 토했기 때문에 물의(物議)가 모두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나졸(羅卒)과 구료관(救療官)을 엄중하게 국문(鞫問)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추조(秋曹)에 회부하여 사핵(査覈)하게 하라."
하였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윤양래(尹陽來)가 영남(嶺南)에서 진제(賑濟)할 곡식을 구해 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조가(朝家)에서 되도록 빨리 수송하도록 했는데, 영백(嶺伯) 박문수(朴文秀)가 봉행(奉行)하려 들지 않았으므로 홍치중(洪致中)이 임금에게 아뢰어 파직시켰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충신(忠信)하고 녹을 많이 줌은 신하를 부리는 도리입니다. 그러나 지난 정미년079)  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건백(建白)하여, 조신(朝臣)들의 구가(丘價)080)  를 진휼청(賑恤廳)에 옮겨 보내 국용(國用)에 만분의 일이나마 돕도록 했습니다. 일이 자질구레한 데 가까우니, 이제 복고(復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자질구레하고 구차한 일이니, 다시는 진휼청에 보내지 말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6일 갑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북로 감진 어사(北路監賑御史) 이종성(李宗城)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북로의 일은 진실로 딱하기만 하다. 전후에 걸쳐 누차 하교하였거니와 이번의 일로 말하더라도 영남(嶺南)의 곡식을 아직도 들여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독운 어사(督運御史)를 내려 보냈다. 다른 일은 신칙(申飭)을 기다리지 않고 반드시 잘하겠지만, 진달할 만한 일이 있는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삼남(三南)에 진청(賑廳)을 설치하는 규정에는 으레 4월에 진휼(賑恤)을 마치도록 되어 있고 상례로 말하더라도 이제는 단지 두 달만 남았습니다. 감사(監司)가 반드시 곡식을 헤아리고 민생(民生)을 계산하여 이미 하나의 맞추어 놓은 성규(成規)가 있기에, 신(臣)이 비록 내려가기는 했지만 별달리 바꾸어 변통하는 일은 없고,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을 조검(照檢)하는 일과 정곡(精穀)·조곡(粗穀)을 가리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외에 딴 도리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가장 딱한 일은 이번에는 비록 진휼하여 살리지만 이미 경작(耕作)할 땅이 없으니 장차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함흥(咸興)·북청(北靑)의 큰 들이 입은 재해를 직접 보았는데, 큰 돌 무더기만 널려 있어, 수십 년 이내로는 개간할 가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도련포(都連浦)를 민간에서 갈아 먹도록 허락하자는 의논을 진달했지만, 소중한 땅을 하루아침에 모두 개간함은 미안한 일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어떻게 땅을 잃은 민생들을 상세하게 헤아려 들을 갈라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북로의 민생들을 비록 이번에 진구(賑救)하더라도 뒷날 만약 농사지을 땅이 없다면, 온 나라의 힘을 다하더라도 구제하여 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들 또한 살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이번에 당(黨)을 모아 도적이 되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민생들의 풍습이 비록 그르기는 하지만 책임은 윗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어제 반성하는 뜻으로 하교한 바 있었다. 도련포 목장(牧場)의 말은 벌써 다른 곳으로 옮겨 보냈으니, 내 생각에는 민생들의 경작(耕作)을 시원하게 허락하고 싶다. 일곱 고을이 개간한다면 입는 혜택이 얼마이겠는가? 종자 곡식을 또한 어떻게 마련해 주어야 능히 실지의 혜택이 있고, 유의 유식(遊衣遊食)하는 무리가 광점(廣占)하는 염려가 없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도련포는 함흥(咸興)과 정평(定平) 사이에 있으니, 함흥과 정평의 민생들이 개간해야 마땅하나 그 타당성 여부는 적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곧 북로(北路) 민생들이 크게 바라고 있는 바이니, 특별히 윤음(淪音)을 내려 진념(軫念)하는 뜻을 보이시되 개간을 윤허하신다면 반드시 실지의 혜택이 있을 것입니다. 토호(土豪)들이 과람하게 점유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오직 책임을 맡은 사람에게 달렸으니, 신이 마땅히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에게 신칙하여 우선 경작을 허락하는 명령을 반포하지 말고, 먼저 영구히 밭의 형체가 없어져버린 경우를 뽑아 내고 그 많고 적음에 따라 합당하게 헤아려 갈라 준다면 어찌 중간에서 간사한 짓을 하는 폐단이 있겠습니까? 종자는 자연히 마련해 주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구전(口傳)으로 전교(傳敎)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비록 금성 탕지(金城湯地)가 있다 해도 만약 백성이 없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하물며 북도(北道)는 곧 옛날 풍패(豐沛)이다. 열성조(列聖朝)부터 권고(眷顧)한 것이 여느 곳보다 천만 배나 더하였는데, 내가 사복(嗣服)하고부터 덕이 부족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성의가 얕아 소민(小民)들을 감복시키지 못하는지라,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로 전련(顚連)하는 참사(慘事)가 없는 해가 없었다. 지난번의 수해는 고금(古今)에 없는 것이기에 특별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위유(慰諭)해 안집(安集)시키도록 하고, 영남(嶺南)에 분부하여 곡식을 운반하여 기근을 진제(賑濟)하도록 했는데, 배의 운행이 순조롭지 못한 곳이 많고 싣는 곳도 또한 더러는 시기를 넘겼다.
요사이 영동(嶺東)과 관서(關西)의 방백(方伯)이 장계(狀啓)한 것을 보건대, 기민(飢民)이 더러는 다른 지경으로 떠돌며 흩어지고 더러는 서로 모여 도둑이 된다고 한다. 이는 모두 내가 민생을 상해(傷害)를 입은 사람처럼 보지 못하고 때 맞추어 민생들을 구제하지 못한 소치니, 옥식(玉食)이 어찌 편하랴? 즉각 전날의 안집 어사(安集御史)를 보내 도신(道臣)과 함께 안동(眼同)하여 진제(賑濟)를 감독하게 하고, 따로 독운 어사(督運御史)를 영남에 보내 실어서 배를 띄울 것을 재촉하게 했는데, 전후의 장계를 보고 어사의 진달을 들으니, 재해를 더욱 혹심하게 입은 곳들은 비록 10년이 되어도 다시 개간하기 어렵다고 한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비록 오늘 진제하더라도 땅도 밭도 없는 민생들이 장차 어떻게 뒷날 살 수 있겠는가? 현재 민생으로 유랑해 흩어져 도둑이 된 북도의 백성들은, 생각하건대, 반드시 이 때문일 것이다.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요순(堯舜)도 오히려 어렵게 여겼다. 일곱 고을의 재해를 입은 민생들에게 일일이 땅을 줄 수야 없지만 이미 그런 까닭을 알았다면 어찌 차마 좌시(坐視)할 수 있겠는가? 도련포(都連浦)를 전후에 걸쳐 사복시(司僕寺)의 고집에 따라 국가에서 여러 차례 복구하였음은 대개 소중히 여기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생령(生靈)들은 곧 조종조(祖宗朝)의 적자(赤子)들이다. 한갓 하나의 목장(牧場)을 중히 여겨 우리 조종들의 적자를 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용구(龍駒)에 관한 한 가지 일은 크게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설령 오늘에 대완(大宛)081)  의 종자와 천리구(千里駒)가 있다 해도 만일 백성이 없다면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어사에게 면유(面諭)하여 특별히 재해를 입은 민생들에게 경작을 허락해 주도록 하고, 여타 신칙(申飭)할 일은 어사가 이미 하교(下敎)를 받들었다. 아! 도신(道臣)은 오늘날 국가에서 중히 여기는 바는 백성을 우선으로 한다는 나의 뜻을 체득(體得)하고 여타 재해 입은 민생들을 어사와 함께 마음을 다해 강구(講究)하라. 그리하여 불쌍한 우리 적자들이 조금이나마 동토(東土)에 안정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성 이덕수(李德壽)가 찬집(纂輯)에 관한 일로 입시(入侍)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근대 약원(藥院)에 내리신 비답을 보았더니, ‘지극한 애통으로 심장이 후끈거리고 화기(火氣)가 치받으며 해수(咳嗽)가 나오므로 깊은 밤에도 문을 열어 화기가 내린 뒤에야 비로서 취침(就寢)한다.’는 등의 분부가 있었기에, 대소(大小) 신료(臣僚)가 모두 근심하고 민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원컨대, 입시할 때 한 말씀을 올리고 물러나고자 합니다. 송(宋)나라 때 조형(晁逈)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호(諡號)는 문원공(文元公)인데, 그 이름이 비록 《속강목(續綱目)》에는 보이지만 《명신록(名臣錄)》에는 실려 있지 않으므로 성명(聖明)께서 혹 기억하지 못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일생 동안 섭심(攝心)을 일삼아 나이가 아흔이 넘도록 병없이 살다 죽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마음을 모름지기 공중에 두고 무엇하나 집착하지 않도록 해야 운용(運用)이 원전(圓轉)하게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언뜻 보면 그다지 특이한 것이 없는 듯하나 실제로 정묘(精妙)함이 비할 데 없습니다. 대개 마음이란 것은 비유하건대, 탄환(彈丸)과 같은 것입니다. 탄환을 소반 가운데에 놓으면 그 굴러 움직임이 지극히 원할하지만 만일 소반 가운데 우묵하게 패인 데가 있으면 탄환이 그 속으로 들어가 한 곳에 박히게 되어 그만 원활이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마음도 또한 이와 같아 그 본체(本體)야 얼마나 원활하고 밝겠습니까? 그러나 미색(美色)을 보면 곧 미색에 얽매이게 되고 좋은 음식을 보면 곧 좋은 음식에 얽매입니다. 유독 음식과 여색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분노(忿怒)가 너무 지나치면 그 분노에 얽매이고 비애(悲哀)가 너무 지나치면 그 비애에 얽매이는데, 칠정(七情)에 끌림이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어, 이에 마음의 본체가 유동(流動)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조형의 말은 자못 백정자(伯程子)의 《정성서(定性書)》에서 얻은 것인데, 이는 비단 병을 물리치고 수(壽)를 더할 뿐만이 아니라 학문 공부에도 또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대저 ‘병(病)’이란 글자는 ‘疒’ 밑에 ‘丙’이 있는데, ‘丙’은 불로서 온갖 병이 모두 화(火)에서 생김을 말한 것입니다. 의가(醫家)에서 오행(五行)을 오장(五臟)에다 분배(分配)해 놓았는데, ‘화’는 마음에 배속했습니다. 마음이 능히 원활하게 얽매이는 곳이 없으면 ‘화’가 낮아져 기혈(氣血)이 고르게 되니, 조형이 수(壽)를 이룬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지극히 황송한 일인 줄 압니다마는 청컨대 신이 몸으로 겪을 바를 진달하겠습니다. 신이 젊었을 때 우연히 당(唐)나라 때의 방외(方外)의 선비가 저술한 글을 구해 보았는데, 치병(治病)을 논한 곳에 이르기를, ‘마음을 양쪽 발에 쏟고 있으며 화(火)가 낮아져 병이 제거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나이 스물 일곱에 아비의 상사를 당해 애통해 하다가 병이 났는데, 매번 기(氣)가 오르면 얼굴과 이마가 불처럼 뜨거워지며 약을 먹어도 또한 효과가 없었습니다. 신이 시험삼아 그 방법대로 해 보았더니 마음은 하나인데 발은 둘이어서 한 마음을 두 발에다 나누어 붙일 수 없었습니다. 이에 마음을 하나의 발에다 쏟아 보아도 또한 아득하여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남을 시켜 왼쪽 발을 누르게 했더니 그 사람이 문지르고 혹은 손톱으로 후벼서인지 마음이 비로소 집중되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오른쪽 발로 옮겨 여러 날 동안 이렇게 하자 크게 효과를 보았습니다. 매번 열이 오를 때 곧 이 방법을 쓰면서 한 식경쯤 있다가 손으로 얼굴과 이마를 만져 보면 찬 것이 물과 같았는데, 대개 열이 모두 내려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여러 날을 하지 않고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조형의 말과는 다른 것이고 완전히 방술(方術)에 관계된 것이지만, 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기에 다시 이처럼 끝에 진달하는 것입니다. 한가로이 계실 때 혹시라도 시험해 보신다면, 열을 내리게 하는 공력이 마땅히 약을 드시는 것보다도 배나 나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면계(勉戒)한 말이 간략하고 극직하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발은 둘이고 마음은 하나라는 말은 진실로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이처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니, 마음 공부를 안다고 하겠다."
하였다.

 

3월 28일 병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29일 정유

오광운(吳光運)을 승지로, 윤취함(尹就咸)을 지평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정언으로, 유엄(柳儼)을 부교리로, 심태현(沈泰賢)을 부수찬으로, 오명신(吳命新)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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