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5권, 영조 6년 1730년 1월

싸라리리 2025. 9. 9.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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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경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권농(勸農)하는 유시(諭示)를 내렸다.

 

1월 2일 신미

사헌부에서 【집의 유엄(柳儼)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제향(祭享)은 사체가 지극히 무겁습니다. 이번 친제(親祭)의 서계(誓戒) 때 나오지 않은 제관이 매우 많았음은 사체상 놀랍습니다. 청컨대 참여하지 않은 인원(人員)을 모두 나처(拿處)하게 하소서. 기곡제(祈穀祭)001)  의 축사(祝史) 예빈시 별제(禮賓寺別提) 이진(李榗)은 수향(受香)을 지영(祗迎)할 때에 끝내 와서 참여하지 않다가 뒤에야 향소(享所)로 왔고, 대축(大祝) 성균 박사(成均博士) 이일서(李日瑞)는 문묘(文廟)의 분향(焚香) 때문에 또한 뒤에야 왔습니다. 비록 무단히 참여하지 않은 것과 차이는 있으나 역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이진은 파직하고 이일서는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4일 계유

당초 헌납 허집(許集)의 상소에 이르기를,
"현관(賢關)002)  은 많은 선비들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이끗만 추구하고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귀중함을 알지 못하니, 근래에 역변(逆變)이 낭자했던 것도 반드시 이 때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이에 반궁(泮宮)의 제유(諸儒)들이 크게 노하여 부황(付黃)003)  의 벌을 베풀었다. 이에 이르러 허집이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니, 임금이 ‘잘못은 그들에게 있다.’고 비답하였다. 여러 선비들이 권당(捲堂)004)  하고 나와 소회(所懷)를 써서 바치니, 임금이 일체로 모두를 꺾어 누르고 이어 하교하기를,
"조관(朝官)에게는 감히 유벌(儒罰)을 베풀지 못함은 이미 선조(先朝) 때 법이 있다. 따로 본관(本館)에 신칙하여 즉시 부황을 제거하게 하라. 이 다음에 다시 이런 습관이 있으면 마땅히 사유(師儒)의 장(長)을 죄주겠다."
하였다.

 

1월 6일 을해

이때 정시(庭試) 무과(武科)의 초시(初試) 기일을 정했으나, 진병(疹病)이 바야흐로 퍼지고 있어 먼 외방(外方)의 거자(擧子)들이 모두 모이면 전염될 염려가 있다 하니, 대신들에게 서울과 외방을 나누어 시취(試取)하는 것의 합당 여부를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심수현(沈壽賢)이 아뢰기를,
"종전에 정시·알성(謁聖) 등의 무과 초시는 매번 날짜가 매우 급박하여 기일에 맞추기 어려울 경우에는 각도(各道)에서 시취했습니다. 때문에 일찍이 서울과 외방을 나누어 시행한 전례는 있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종(祖宗)의 전헌(典憲)을 변경할 수는 없다. 요행을 바라는 문이 한 번 열리면 과사(科事)가 반드시 더욱 엄격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고, 이어 그전의 예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1월 8일 정축

햇무리하였다. 양이(兩珥)가 있고 무리 위쪽에 관(冠)이 있었다.

 

송수형(宋秀衡)을 정언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수찬으로, 권경(權熲)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장령 이저(李著)가 상소하여 여덟 조목을 진달하였다. 첫째 성학(聖學)을 힘써 규모를 세울 것, 둘째는 성의(誠意)를 독실하게 하여 허위(虛僞)를 끊을 것, 셋째 편사(偏私)를 제거하고 대공(大公)을 세울 것, 넷째 함양(涵養) 공부를 힘써 치국(治國)하는 근본이 두터워지게 할 것, 다섯째 정직을 숭상하여 탕평(蕩平)을 보도(輔導)할 것, 여섯째 청납(聽納)하는 길을 넓혀 곧은 말을 오게 할 것, 일곱째 유술(儒術)을 장려하여 인재를 배양할 것, 여덟째 융정(戎政)을 잘 다스려 사변에 대비할 것이었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1월 9일 무인

햇무리하였다. 양이(兩珥)가 있고 무리 위쪽에 배(背)가 있었다.

 

민응수(閔應洙)를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집의 유엄(柳儼)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평시서(平市署) 관원들은 무릇 공사(公私)의 수용(需用)에 있어 저자의 물화(物貨)를 가져다 쓰고는 즉시 값을 주지 않고, 풍력(風力)이 있는 각 관사(官司)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이러한 폐단이 있으니, 청컨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0일 기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독관 윤휘정(尹彙貞)이 청하기를,
"묘당(廟堂)에서 복계(覆啓)한 위원군(渭原郡) 소화(小禾)에 성 쌓는 의논을 정지하게 하소서. 그리고 고을 남쪽의 송현(松峴)에다 성을 쌓는다면, 군량(軍糧)과 군기(軍器)를 저장해 둘 수 있고 관방(關防)도 굳건하게 할 수 있는데, 주위가 그다지 넓고 크지 않아 공사도 또한 해 내기가 쉬우니, 진실로 두 가지가 다 편리합니다."
하였다. 대개 윤휘정이 일찍이 위원 군수를 맡았기 때문인데, 임금이 묘당과 도신(道臣)이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1월 11일 경진

이때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이 허집(許集)의 상소 때문에 매일같이 권당(捲堂)하고 있었으므로, 임금이 여러 차례 미안한 하교를 내렸다. 이에 이르러 제생들이 소회(所懷)를 진달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당초 부황(付黃)한 것은 분풀이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곧 요망한 사람을 배척하고 사론(士論)을 펴기 위한 방도였습니다. 그러나 부황을 떼는 한 가지 일은 신(臣)들이 비록 만번 죽더라도 봉행할 수 없습니다. 옛적에 이목(李穆)은 국무(國巫)를 쫓아내었고, 원종(元宗)께서 왕자(王子)로 계실 때 반유(泮儒)들은 또한 그 겸종(傔從)을 매질했지만, 당시 조정에서 일찍이 과격하다고 하여 그르게 여기지 않고 곧 아름답게 여기고 장려했기에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밖의 조사(朝士)로서 유벌(儒罰)받은 사람에 대하여 오늘날처럼 조정에서 먼저 처치(處置)하지 않고 유생(儒生)들을 견제하여 벌을 풀도록 한 것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 앞서의 비답 중에 몇 어구를 고쳐서 내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제생(諸生)들이 서로 이끌고 입재(入齋)하였다.

 

1월 12일 신사

해에 좌이(左珥)가 있었다. 밤에는 달무리하여 목성(木星)을 둘러쌌고, 5경(更)에는 뇌성이 진동하였다.

 

전 참의 나학천(羅學川)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오늘날의 소위 당론(黨論)이란 것에 셋이 있으니, ‘노론(老論)’ ‘소론(少論)’ ‘남인(南人)’입니다. 삼론(三論)이 각립(角立)하여 마음가짐이 같지 않습니다만, 그 속에 또한 어찌 말할 만한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없겠습니까? 지난날에 다투던 바는 오로지 사론(士論)이 갈라진 데서 나온 것이기에 신(臣)은 어느 것이 그르고 옳은지 어느 것이 정(正)이고 사(邪)인지 알지 못합니다만, 오늘날 다투는 바는 하나의 ‘의(義)’자에 불과하여 선악(善惡)의 구별이 마치 검은 색과 흰 색이 쉽게 드러남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비록 어리석고 무지한 필부 필부(匹夫匹婦)라도 모두 시비의 소재를 알고 택하여 따를 바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명(高明)·예철(睿哲)하신 전하께서 어찌 그런 것은 선(善)이고 이런 것은 악(惡)인 줄을 알지 못하시어 그 사이에 흔들리는 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옛적에 노애공(魯哀公)이 공자에게 백성 복종시키는 도리를 물었을 적에 성인(聖人)은 마땅히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는 도리를 들어 임금에게 고해야 했을 것입니다마는, 이에 주대(奏對)하기를, ‘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굽은 사람을 놓아 두면 백성이 복종하게 되지만, 굽은 사람을 들어 쓰고 곧은 사람을 놓아 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거나 버릴 적에 비록 굽은 사람과 곧은 사람을 잘못 구분해도 민심의 향배(向背)에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성인은 굽은 사람과 곧은 사람을 들어 쓰거나 버려둠에 따라 민심이 복종하고 복종하지 않는 것을 결단하였으니,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대개 선(善)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함은 사람들의 타고난 성품으로서 선은 사람들의 마음이 같이 좋아하는 바이고, 악은 사람들의 마음이 같이 싫어하는 바이기에, 임금이 싫어하는 바와 좋아하는 바가 사람들의 마음에 맞으면 민심(民心)이 복종하기를 기하지 않아도 절로 복종하고, 임금의 사람을 쓰거나 버림이 민정(民情)에 거슬리면 민정은 기뻐하지 않기를 기필하지 않아도 절로 기뻐하지 않게 되는 법이니, 이는 천리(天理)에 당연한 것이고, 인사(人事)에 있어 필연적입니다. 그러므로 《대학(大學)》에 ‘백성들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해야 하니, 이 백성의 부모라 한다.’고 하였다. 《서경(書經)》에 ‘하늘은 우리 백성들이 보는 것에 의해 보고 하늘은 우리 백성들이 듣는 것에 의해 듣는다.’고 한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의 마음이 같은 바에서 하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기뻐하면 하늘도 또한 기뻐하고 백성들의 마음에 거슬리면 하늘도 또한 노하는 것이니, 아래에서 백성들에게 거슬리고 위에서 하늘이 노하면, 재이(災異)의 발생이 또한 어찌 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전(傳)에 ‘사람에게 순응하고 하늘에 호응한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순응하고 하늘에 호응하는 것이 또한 어찌 재변을 방지하여 복을 맞이하는 하나의 큰 관건(關鍵)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에게 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날 연차(聯箚) 때문에 역률(逆律)에 걸려 죽은 대신(大臣)이 네 사람이었는데, 그윽이 듣건대, 전하께서 두 신하는 관작(官爵)을 복구하도록 명하고, 두 신하는 용서만 하고 복구는 아니한 채 그대로 죄적(罪籍)에 두었다고 합니다. 아! 이 네 신하는 그 마음과 일이 같았으니, 만일 죄가 있다 한다면 다 같이 죄가 있는 것이고 만일 죄가 없다고 한다면 다 같이 죄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구분하여 둘로 나누셨으니, 신은 감히 성의(聖意)의 소재처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네 신하를 한편에서는 충신(忠臣)이라 하고 한편에서는 역신(逆臣)이라 하기 때문에 만일 전부 놓아 준다면 한편의 주장에 어긋나게 되고 전부를 죄준다면 한편이 고집하고 있는 바에 어긋나게 되므로, 절반을 놓아 주고 한편을 허여해 주고 절반은 죄주어 한편을 허여해 줌으로써 이를 가지고 탕평(蕩平)해 가는 칼자루로 삼으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물쭈물 미루어 가게 될 것이고, 절반은 옳고 절반은 그르게 될 것이니 장차 어디를 확실하게 따라 올바른 의리를 얻게 되겠습니까? 의리가 명백하지 않고 시비(是非)가 서로 뒤섞이면, 황극(皇極)에 이른바 ‘탕탕(蕩蕩)’·‘평평(平平)’·‘정직(正直)’이니 하는 말들이 마침내 쓸데없는 헛된 말이 되고, 전하께서 탕평하려 하시는 바는 그윽이 생각하건대, 왕자(王者)가 황극을 세우는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따라서 신(臣)이 명주(明主)를 위해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만, 전하께서 먼저 붕당(朋黨) 제거를 주로 여기시어 눈앞의 우선 편한 계책만 세우시고, 시비를 구별하고 사정(邪正)을 가리는 것에 있어서는 돌아볼 겨를이 없게 된 것인지요?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피차(彼此)를 논할 것 없이 오직 의리의 올바름과 시비의 명백함을 구하되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리며 정직한 자는 들어 쓰고 굽은 자는 버려 음붕(淫朋)005)  과 비덕(比德)006)  이 그 사이에 뒤섞이지 않게 한다면, 임금의 마음이 올바르게 되어 백관(百官)이 올바르게 되고 백관이 올바르게 되어 조정이 올바르게 될 것이며, 따라서 치우침도 기울어짐도 없이 임금의 의리를 준수(遵守)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짓을 함이 없이 임금의 법을 준수하게 되어, 절로 왕도(王道)는 탕탕(蕩蕩)하여 황극(皇極)으로 모여들고 황극으로 돌아오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대저 그런 뒤에야 바야흐로 탕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다만 상소로 진달한 시사(時事)는 내 뜻과 상반된다. 시상(時象)이 갈래가 난 뒤부터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어느 것이 사(邪)이고 어느 것이 정(正)인지를 알 수 없는데, 이처럼 치우친 말을 하는가?"
하였다. 나학천은 영남(嶺南) 사람으로 대대로 남론(南論)을 지켜 왔다. 이때에 와서 응지하여 상소하고 극력 탕평을 공격했는데, 대개 신축년007)  과 임인년008)  의 무옥(誣獄)을 겪은 이후부터 구론(舊論)을 버리고 새로운 소견을 세운 사람이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심단(沈檀)이 치사(致仕)를 바라 전후에 무릇 일곱 차례나 상소했는데, 이에 이르러 임금이 윤허했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고려사》를 보건대, 감개(感慨)가 생긴다.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孝宗)과 성고(聖考)께서 존주(尊周)하신 의리는 해와 별처럼 환히 게시(揭示)되어 있다. 한 모퉁이 청구(靑丘)가 홀로 대명(大明)의 일월(日月)을 보존하고 있음은 진실로 두 선조(先朝)의 덕이다. 오늘날 유의(儒衣)에 유관(儒冠)을 쓴 사람들이 누가 대의(大義)의 소재를 알지 못하겠는가마는, 시들해짐이 날로 심해져 쉽게 잊어 버리고 소홀히 여기고 있다. 하나의 강자(腔子)009)  속에 마땅히 ‘존주’ 두 글자를 보존해야 할 것이니,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은 또한 마땅히 더욱 힘써야 하리라."
하였다.

 

1월 13일 임오

오광운(吳光運)을 승지로, 신겸제(申兼濟)를 장령으로 삼았다.

 

당초 판중추부사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하자, 임금이 특별히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사간 서명빈(徐命彬)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얼마 전 밖에 있는 대신의 상소에 말이 비록 더러 성심(聖心)에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기는 했지만 조용하게 개석(開釋)해도 불가하지 않을 것인데, 비답하신 분부 내용에 사기(辭氣)가 너무 드러나 자못 대신을 존경하는 의리가 부족하였습니다. 신은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미관(微官)이나 서료(庶僚)라고 하더라도 감히 다시는 구습(舊習)이 싹트지 않아야 할 것인데, 하물며 대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겠는가? 만일 호오(好惡)를 명백히 보이지 않는다면 장차 그대로 구투(舊套)대로 돌아갈 것이니, 어찌 대신이라 하여 고자(顧藉)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1월 14일 계미

해에 양이(兩珥)가 있고 윗쪽에 관(冠)이 있었다. 무지개와 같은 한 가닥의 흰 기운이 비스듬히 관 위쪽에 있다가 한참 뒤에 사라졌다.

 

박필기(朴弼琦)를 사간으로, 서명형(徐命珩)·이광부(李光溥)를 정언으로, 유운(柳運)·김권(金權)을 지평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5일 갑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사재감(司宰監) 소목(燒木)의 원공(元貢)으로 남아 있는 것이 죄다 바닥이 났다 하여 병자년010)  의 전례대로 임시 변통하여 10만 근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호조 판서 서명균(徐命均)의 말을 따른 것이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6일 을유

해에 겹무리가 졌다. 안쪽 무리에 양이(兩珥)가 있었고 무리 위쪽에 배(背)가 있었다. 오시(午時)에는 한 가닥의 흰 운기(雲氣)와 같은 것이 곤방(坤方)에서 일어나 손방(巽方)을 가리키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사라졌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17일 병술

신치운(申致雲)을 승지로, 유숭(兪崇)을 대사간으로, 남태경(南泰慶)을 헌납으로, 윤지원(尹志遠)을 정언으로, 이종성(李宗城)을 교리로, 유만중(柳萬重)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수찬 조명택(趙明澤)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붕당(朋黨)의 습관은 실로 백년 이래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깊이 싫어하고 통렬하게 징계하시며 해소하고 융합시켜 탕평(蕩平)함으로써 한 시대의 정치를 새롭게 하려고 생각하시게 된 까닭입니다. 그러나 옛부터 태평의 도리를 논함은 홍범(洪範) 한 편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이른바 황극(皇極)이란 것은 곧 사리의 지극한 대문입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만약 참으로 태평의 아름다움을 이루려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황극을 세우는 도리를 체득하여, 사의(私意)를 능히 제거하고 먼저 의리를 밝히시되, 사람을 임용(任用)함에 있어서는 색목(色目)이 어떠한가를 묻지 말고 오직 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높여 주고 장려해 주어야 하고, 혹시라도 현저하게 당역(黨逆)의 죄가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마땅히 분명하게 가려 통렬하게 배척하셔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다스림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아니하여 오직 피차(彼此)를 참작해서 임용하는 것을 지금의 제일의 의리로 삼기 때문에, 연차(筵箚)를 올린 의리를 오늘날 마땅히 반드시 신원(伸冤)해 주어야 할 것인데도 오히려 광명(光明)한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있고,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의 혈당(血黨)은 오늘날 마땅히 반드시 가려야 할 바인데도 또한 조용(調用)하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대론(大論)에 이견(異見)을 내세운 임집(任)과 역적 김일경을 신구(伸救)한 유시모(柳時模)에 이르러서도 또한 다시 대각(臺閣)의 천망(薦望)에 드나들어 경위(涇渭)011)  의 구분이 없게 되고 치리(治理)가 더욱 흐려지게 되었습니다. 옛 성왕(聖王)의 탕평(蕩平)의 도(道)는 이와 같지 않은 듯하니, 전하께서는 반드시 의리를 밝히고 숙특(淑慝)을 가리는 것을 오늘날 탕평의 요법(要法)으로 삼으시기 원합니다. 아!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누가 김일경과 박필몽·박필현을 대역(大逆)으로 여기지 않고 삼적(三賊)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옳으나 하는 행동을 보면 거개 서로 반대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연계(連啓)를 규피(規避)하고 율(律)을 감하기에 마음을 써서 애석하게 여겨 비호(庇護)하기를 오히려 또한 그전처럼 하고 있으니, 앞서의 연중(筵中)에서 능히 ‘잘라내 버리지 못한다.’는 분부는 이런 상황을 통촉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김상성(金尙星)이 조진희(趙鎭禧)를 공격한 일로만 보더라도 삼적(三賊)의 일이 오늘날 일대 관건이 되고 있음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무릇 조진희가 신축년·임인년 무렵에 공격한 수단이 가증스러웠음은 진실로 성상께서 분부하신 말씀과 같습니다만, 그가 계속해서 삼적(三賊)에 관하여 아뢰었음과 이종성(李宗城)을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일은 이미 토적(討賊)하는 의리에 의거한 것이니, 쳐서 공격한 것으로 돌려 죄줄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또한 김상성이 이미 조진희의 죄상이 이처럼 낭자했음을 알았다면, 조진희가 다시 그전의 벼슬길을 밟게 된 지 무릇 몇 날이 되도록 끝내 한 마디 말도 지척(指斥)함이 없다가, 이번에 삼적(三賊)의 일로 이종성을 논급(論及)한 다음에야 비로소 차례차례 평생 동안의 일을 들어 남김없이 추잡하게 욕했으니, 그의 ‘늘 탄핵하려 했다.’는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이종성이 춘방(春坊)에서 수작했다는 말이 비록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 그가 평소에 삼적(三賊)을 비호하는 말을 한 것은 이번의 중신(重臣)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말로 보건대, 또한 미루어 알 만합니다. 그러나 치대(置對)할 때에 한 말은 감히 사실을 전부 빼버리고 멋대로 속이고 은휘(隱諱)한 것인데, 전하께서 그래도 알아차리지 않으셔서 너무 치우치게 붙들어 주었기에 신(臣)이 그윽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이번의 서명빈(徐命彬)의 상소는 단문(袒免)의 친족012)  을 위하느라 토역(討逆)의 의리를 소홀히 여긴 것이고, 엄정(嚴正)한 공론을 무시하고 법외(法外)의 인혐(引嫌)을 한 것으로서, ‘적(賊)’이란 한 글자를 차마 쓰지 못해 감히 ‘소하(疏下)의 죄인(罪人)’이라고 간신히 말을 만들었으니, 마땅히 책벌(責罰)을 가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신칙(申飭)한 뒤에도 감히 구습(舊習)대로 하니, 지극히 미안(未安)하다. 유시모의 일은 말은 비록 옳지만 이미 견복(甄復)을 명하였으니, 검의(檢擬)한 것을 비난하고 지척(指斥)한 것이 마땅한지 알지 못하겠다. 임집의 일은 더욱 정도에 지나침을 면하지 못한다. 김상성이 조진희를 배척한 것은 비록 더러 정도에 지나치기는 했지만, 그의 말은 진실로 정직한 것이었다. 이종성의 사람됨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어찌 감히 위를 기만했겠느냐? 중신(重臣)이 한때 한 말을 핑계로 이처럼 심각하게 배척하였으니, 이는 모두 그전 날에 의심하며 멀리한 소치이다. ‘붙들어 준다.’고 한 말도 또한 잘 알지 못하는 것인 듯하다. 서명빈의 일에 있어서는 네가 한 말이 옳으니 특별히 파직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수찬 이종백(李宗白)이 상소하여 영릉(寧陵)의 봄 행행(幸行)을 정지하기를 청하고, 또 옥당(玉堂) 조적명(趙迪命)에게 외방(外方) 소임을 제수하였음은 잘못임을 말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조적명의 외방 소임은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1월 18일 정해

조상경(趙尙絅)을 대사헌으로, 한사득(韓師得)을 집의로, 김정윤(金廷潤)을 장령으로, 최명상(崔命相)을 지평으로 삼았다.

 

사은사(謝恩使)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 등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구입해 온 새 역법(曆法)을 들여오도록 명하였다.

 

1월 19일 무자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태묘(太廟)를 전알(展謁)하였다.

 

1월 20일 기축

송수형(宋秀衡)을 지평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수찬으로, 이덕부(李德孚)를 부수찬으로, 조한위(趙漢緯)를 교리로 삼았다.

 

1월 21일 경인

송진명(宋眞明)을 대사헌으로, 박사정(朴師正)을 집의로, 김상성(金尙星)을 헌납으로 삼았다.

 

1월 21일 경인

전라도 유생(儒生) 유조(柳組) 등이 상소하여 신축년013)  과 임인년014)  의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우리 경종(景宗)께서 처음부터 본시 편치 못하신 증세가 있으셨기 때문에 융성(隆盛)한 날인데도 이미 건저(建儲)하는 계책을 정했던 것입니다. 질병이 찾아오는 것은 성인(聖人)도 면할 수 없는 것인데, 그 당시 대점(大漸)015)  하신 날에도 시약청(侍藥廳)을 차리지 않아 바깥 사람들이 알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흉서(凶書)가 낭자하고 와언(訛言)이 들끓게 하였고, ‘병환(病患)’이란 두 글자는 온 세상의 기휘(忌諱)로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변무(辨誣)하는 한 가지 일을 할 때가 없어져 사람들의 의혹(疑惑)하는 마음은 예와 똑같고 의리는 그전처럼 캄캄하게 막혀 있습니다. 어찌 그들의 흉악한 말을 언급할 수가 없음을 핑계로 와전(訛傳)하는 말을 잘라버리고 의혹하는 마음을 부수어버릴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통탄스럽습니다. 당인(黨人)들이 속이고 가린 죄를 덮어버리고 변명(辨明)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성명(聖明)께서도 이미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어찌 그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성궁(聖躬)에 더해진 모함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끝에다 또 윤선거(尹宣擧)의 일에 대해 말하기를,
"지난날 성교(聖敎) 가운데 ‘말년 무렵에 내리셨던 처분을 어제(御製) 속에 올렸던 것은 조상(朝象)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고, 선정신(先正臣) 윤선거의 문집 책판(冊板)을 부수어버릴 것을 청한 것은 선조(先朝) 때 종시 윤허하지 않으셨다…….’하셨습니다. 아! 이것은 무슨 말씀인지요? 참으로 그러하셨다면, 우리 성고(聖考)께서 그 당시 급히 책판을 부수어버리고 선정(先正)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신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그 당시 죄로 삭출(削黜)되었던 사람을 지금 선정이라고 부르고, 그 당시 책판을 부수어버리도록 분부했는데도 오늘날에는 윤허하지 않으셨다 하시니, 그때에 조태억(趙泰億)의 상소에 준엄하게 비답하신 것과 이세면(李世勉)을 견책하여 파직하도록 하신 뜻을 우리 전하께서 이제 이미 잊어버리신 것인지요? 우리 성고(聖考)께서 그 당시 그런 처분을 내리셨음은 비단 존현(尊賢)하고 척사(斥邪)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곧 성조(聖祖)에 대한 모함을 밝히고 부노(俘奴)가 된 사람의 죄안(罪案)을 결단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 어찌 한때 조상(朝象)을 진정시키려 한 것일 뿐이겠습니까? 뭇 간인(奸人)들이 뜻을 얻어 용사(用事)하게 되자 성고(聖考)의 뜻과 사업을 바꾸고 경종(景宗)의 성덕(聖德)을 덮어버려, 성고의 대처분(大處分)에 대해서도 감히 선왕(先王)의 본뜻이 아니었다며 제멋대로 이미 삭탈한 관작을 복구시켰으니, 양성(兩聖)의 뜻과 사업이 마침내 정지되고 어두워졌습니다.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의리를 깊이 강구(講究)하시고 시비(是非)를 굳게 정하시어 성고의 유훈(遺訓)을 준수하고 효종의 뜻과 사업을 추술(追述)하소서."
하였다. 상소를 들이자, 임금이 불러 보며 힐책한 뒤 상소를 도로 내주고 10년 동안 정거(停擧)016)  시킬 것을 명하고, 태학(太學)으로 하여금 그날로 본도(本道)로 발송(發送)시키도록 하였다.

 

인정문(仁政門)에서 조참(朝參)을 거행하고, 근시(近侍)를 보내 여제(癘祭)017)  를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홍진(紅疹)이 크게 번져 5부(五部)의 사망자를 거의 만수(萬數)로 헤아릴 지경이었다. 대신이 중춘(仲春)에 응당 거행할 사전(祀典)에는 따로 제문(祭文)을 지어 거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너무 늦었다며 날을 가릴 수 없이 즉시 거행하고 제도(諸道)에서는 경기(京畿)에서 먼저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경상 감사 박문수(朴文秀)가 호조(戶曹)의 연분 사목(年分事目)018)  의 급재(給災)019)  가 넉넉하지 않다하여 해조(該曹)를 극력 논척(論斥)하고, 드디어 조정에 품하지도 아니한 채 마음대로 분재(分災)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신이 중추(重推)하고, 조가(朝家)에서 급재한 것 이외의 것은 모두 환원시킬 것을 청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무신년020)  의 역변(逆變) 이후부터 연좌(連坐)되거나 간련(干連)된 사람들이 제도(諸道)에 두루 정배(定配)되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말할 것이 없지만, 무신년 이전에 찬배(竄配)된 사람으로 말하자면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고 대사(大赦)도 여러 차례 거쳤습니다. 바야흐로 양기(陽氣)가 화창한 때가 되었으니, 소설(昭雪)하여 석방하기에 합당한 자는 추조(秋曹)와 금오(金吾)의 도류안(徒流案)021)  을 가지고 경중(輕重)을 참작해 놓아 주기도 하고 옮겨 주기도 하여 광탕(曠蕩)의 뜻을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월 22일 신묘

우박이 쏟아졌는데, 모양이 소두(小豆)만 하였다.

 

권지(權贄)를 헌납으로, 조명익(趙明翼)을 수찬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23일 임진

수찬 조명익(趙明翼)이 상소하여 상소한 유생(儒生)을 신구(伸救)하기를,
"호남(湖南)의 여러 유생들이 1천 리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올라와 구중 궁궐에 소장(疏章)을 올렸습니다. 이는 조종조(祖宗朝)에서 배양한 효과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성상의 청아(菁莪)022)  의 교화(敎化)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논열(論列)한 말이 사리에 합당한 것이라면 써 주고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면 써 주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비록 과격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우악하게 용납하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야 진실로 성상의 덕이 빛날 것인데, 뜻밖에도 상소한 유생들을 인접(引接)하셨다가 곧장 파하여 곧바로 준엄한 분부를 잇따라 내리시되, 사의(辭意)가 박절하여 화평한 기상(氣象)에 어긋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조(擧措)가 비상하여 예대(禮待)하는 성덕(盛德)을 크게 잃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낙육(樂育)023)  의 교화에 부족함이 있는 것인데, 많은 선비들을 도성(都城) 문 밖으로 쫓아내기까지 하였으니, 지난날의 사첩(史牒)을 두루 보더라도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어찌 명성(明聖)하신 전하께서 이러한 그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를 하실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한 유생들이 지극히 의거할 데가 없었으니, 정거(停擧)하고 내보내도록 한 명도 또한 참작해서 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의 상소에 진달한 것이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가 상소하기를,
"궁가(宮家)의 제위전(祭位田)의 면세(免稅)를 반드시 4대로 한정한 것은 진실로 열성(列聖)의 옛사람을 생각하는 지극한 인덕(仁德)에서 나온 일인데, 지금 해조(該曹)에서 말하고 있는 4대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증손이 막 죽고 현손(玄孫)이 새로 대를 이었는데 억지로 4대가 이미 다 되었다고 합니다. 예문(禮文)으로 헤아려 보고 법전(法典)으로 참작해 보더라도 어찌 차마 현손이 제사하는 날에 제위전의 면세를 앞당겨 혁파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충익위(忠翊衛)의 원종 공신(原從功臣)024)  은 장자(長子)와 지자(支子)를 막론하고 모두 3대로 한정한 법을 거듭 밝히도록 명하였다. 대개 3대로 한정한 법을 간혹 그들의 상언(上言)으로 인해 원종 공신의 장파(長派)는 퇴한(退限)을 2대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아룀에 따라 기유년025)   이전에 소속된 사람은 분간하여 그대로 두고, 이 뒤로는 한결같이 구전(舊典)의 정식(定式)에 의하여 시행하였다.

 

1월 24일 계사

남을 악역(惡逆)으로 모함한 죄인 세국(世國)이 복주(伏誅)되었다. 세국은 황해도 해주(海州) 사령(使令)이었다. 본래 도둑질을 하는 무리로 형벌을 받고 멀리 귀양갔는데, 달아나 도적이 되었다. 병영(兵營)에 잡혀 오자 요언(妖言)을 지어냈으므로 병사(兵使)가 계문(啓聞)하니, 처음에는 포도청(捕盜廳)에 명하여 심문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대신이 왕부(王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므로 그가 끌어댄 문찬학(文贊學) 등을 또한 모두 잡아다가 대질시켰으나 증거가 없었고, 15차례 형신(刑訊)하자 지만(遲晩)026)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1월 25일 갑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빈궁(嬪宮)이 홍진(紅疹)을 앓으므로 약원(藥院)의 제조(提調) 1원(員)을 본원(本院)에서 직숙(直宿)하도록 명하였다.

 

1월 26일 을미

대사간 유숭(兪崇)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치사(致仕)를 바랐다. 이때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승정원에 보류해 두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승정원에서 봉입(封入)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숭이 승정원에서 저지한 잘못을 곁들여 진달하자, 임금이 비로소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유숭이 또 상소하기를,
"신이 그윽이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근래 처분을 내리시어 밖에 있는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이고 계시는데 장차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지요? 실정(實情)이 있어 호소하고 싶은데도 금지하여 우러러 드러낼 수 없게 하다가, 임용(任用)하여 부리고 싶으면 위협하여 나오도록 독촉하여 호소하려는 말이 끊어지게 하고, 더러는 의례적인 비답조차 아껴 상소를 도로 내주고 더러는 분의(分義)를 들어 책망하되 사지(辭旨)를 더없이 준엄하게 하여,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억지로 머리를 숙이고 함묵(含默)하여 용신(容身)할 바가 없게 하시니, 옛 성왕(聖王)들이 신료(臣僚)들을 예(禮)로 부리던 도리에 크게 어긋남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한때 쓰려고 불러들이시는 것이라면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무엇하러 조용히 있으려고 물러가 있는 신하를 억지로 불러들일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어제 올린 상소의 끝에 진달한 말은 후원(喉院)027)  에서 가만히 성상의 뜻을 헤아려 멋대로 조종해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열어 한번 실정을 드러낼 수 없게 하는 것을 깊이 개탄하는 데서 나온 것인데, 지금 도리어 욕을 하고 짓밝으며 갖가지로 모욕을 하고 있습니다. ‘패류(悖謬)’ 두 글자를 들어 마치 장사치나 길거리의 아이들이 악담(惡談)을 마구 하듯 제멋대로 욕설한 데 이르러서는 다시는 청명(淸明)한 조정의 예양(禮讓)하는 풍습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러한 구업(口業)은 결단코 사대부(士大夫)의 꼴일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유(下諭)하기를,
"미원(微垣)028)  의 장(長)이 후원(喉院)에 대해 지나치게 기색(氣色)을 더하였다. ‘길거리의 아이들’ 등의 말은 어제의 상소보다 더욱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처분을 모두 들어 장차 승순(承順)하는 것으로 지목하였으니, 분의(分義)에 있어서 더욱 지극히 미안하다."
하고,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1월 27일 병신

햇무리하였다. 양이(兩珥)가 있고 무리의 윗쪽에 관(冠)이 있었다.

 

영중추부사 이광좌(李光佐)가 호남(湖南) 유생(儒生)들의 상소로 인하여 대변(對辯)하는 소장(疏章)을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그들의 상소를 보건대, 오로지 민형수(閔亨洙)와 이양신(李亮臣)의 남은 투식을 답습한 것이었습니다. 신(臣)은 이 두 사람의 상소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가 무망(誣罔)한 것임을 환히 변정(卞正)하였습니다. 또한 삼가 성상께서는 분부하신 것을 받들건대, 분명하게 석명(釋明)하심이 해와 달처럼 환하였으므로, 사람의 도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의심하고 멀리하는 마음이 확 풀릴 듯하였는데 오히려 다시 이미 변파(辨破)한 무망(誣罔)을 굳이 이처럼 단단히 지키니, 이는 그들의 뜻이 단지 신을 미워하고 신을 모함하는 데 있는 것이고 사실과 사리는 다시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이 무엇하러 다시 한 마디 말이라도 허비하여 도리어 스스로를 욕되게 할 것이 없겠습니까마는, 다만 그들이 억지로 흉악한 말을 밥 먹듯 더하고 꺼리거나 두려워하는 바 없이 제멋대로 입을 놀리는 것을 생각해 보면, 듣기만 해도 기가 질리고 오장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1월 28일 정유

밤에 유성(流星)이 헌원성(軒轅星) 아래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4,5자나 되었고 빛깔은 붉었다.

 

판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가까이 모시며 서로 지켜 온 지 이제 이미 해가 지났는데 어둡고 미욱하여 아무 생각없이 준동(蠢動)029)  하고 있습니다. 아! 전하께서 신을 부르심이 어찌 그냥 부르신 것이겠습니까마는, 신이 진실로 우매하여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장차 전하께서 신의 머리가 하얘진 만년에 여러 차례 풍상(風霜)을 겪느라 지기(志氣)가 이미 사그라지고 곤궁하게 늙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관작과 봉록으로 묶어 놓고 우악(優渥)한 예의로 대우해 주시며, 근신스럽게 함묵(含默)하여 승순(承順)하면서 여러 대신(大臣)의 뒤에 끼여서 두루 용납하고 구차하게 화합하기를 모나는 바가 없이 하도록 하여, 탕평(蕩平)이 빛이 나고 보거나 듣기가 새로워지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까? 그윽이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뜻이 혹시라도 이에 있으시다면 신이 더욱 그대로 받들 수 없을 듯합니다. 아! 전하께서는 국가의 사세가 위태로움에 빠진 것을 상심하시고 붕당(朋黨)이 화(禍)가 됨을 개탄하시어, 기필코 하나의 ‘당(黨)’자를 타파해 인협(寅協)의 아름다움을 이루고자 하시니, 전하의 뜻이 더할 수 없이 거룩합니다. 전하의 신자(臣子)된 사람이 어느 누군들 그런 아름다운 명을 공경히 받들려 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자신의 지난날의 행동이 과연 당론(黨論)에 관계된 것이 있다면 마땅히 일체 씻어내어 위로 성상의 마음을 체념(體念)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삼가 듣건대 그 동안 신(臣) 등이 지켜 오던 토복(討復)의 의리를 전하께서는 또한 의심하고 멀리하는 당론으로 돌리시며 선천(先天)의 일로 여겨 버려 두도록 하십니다. 신이 일찍이 마음속으로 순성(循省)하며 반복해 토구(討究)하여 마침내 그것이 천지를 지탱해 주고 고금에 걸친 대경 대의(大經大義)임을 깨닫게 되었고, 혹시라도 당론에 가까운 것으로 알지 않았습니다. 오직 토죄(討罪)를 청한 흉역(凶逆)들은 평소에 이론(異論)을 가졌던 사람들이었고 그의 당(黨)이 또한 매우 힘써 치우치게 비호했기 때문에, 전하께서 그것이 당론(黨論)인 줄로 의심하시고 버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 죄악 중에서 무엇이 임금에게 무례한 것보다도 더 크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치 허튼 물건이나 자질구레한 일처럼 보아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비록 나약하여 감히 기력을 내어 다투지는 못합니다만, 이에 도리어 두려워 머리를 숙이고 쭉지를 움츠린 채 도사리고 앉아, 억지로 마치 그전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는 듯 회사(悔謝)하는 말을 하며 갖추 애걸하는 작태(作態)를 바쳐 임금의 총애(寵愛)를 바라려고 하는 짓은 신이 또한 한 가닥의 수오(羞惡)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에 차마 할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국가를 위한 정성은 내가 일찍부터 깊이 탄복해 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기에 내가 일찍이 깊이 개탄하였다. ‘성미가 치우쳐 극복(克服)해 가기 어려운 곳부터 극복해 간다.’는 말은 곧 성인의 교훈이다. 지금 내가 경(卿)에게 바라는 것은 용납하여 화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사관(史官)을 우선 소환(召還)하도록 하여 경의 마음을 편케 하겠다."
하였다.

 

1월 29일 무술

햇무리하였다. 양이(兩珥)가 있고 무리 위쪽에 관(冠)이 있었다.

 

중궁전(中宮殿)이 홍진을 겪지 않았다 하여 약원(藥院)에서 딴 처소로 옮겨 피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이날 경덕궁(慶德宮)에 이어(移御)했는데, 승지와 주서(注書) 각 2원(員), 병조의 당상과 낭관(郞官) 각 2원, 도총부(都摠府)의 당상 각 2원씩 모두 분차(分差)하여 입직(入直)하게 하였다. 내금위(內禁衛)의 3번(番)은 각기 그 번장(番將)이 인솔하고서 윤번으로 입직하도록 하고, 사은(謝恩)하는 인원(人員)은 대전(大殿)에 숙배(肅拜)한 뒤 이튿날 중궁전에 숙배하도록 하였다. 모두 신묘년030)  의 예를 따른 것이다.

 

1월 30일 기해

밤에 곤방(坤方)과 남방(南方)에 불빛과 같은 기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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