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신축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으니, 숙종 대왕(肅宗大王)을 세실(世室)에 봉안한 경사에 따른 것이다. 대소(大小)의 신료(臣僚)와 기로(耆老) 및 군민(軍民)들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지극한 다스림이 삼대(三代) 시절처럼 융성(隆盛)했으니, 선열(先烈)을 추앙(推仰)하여 영구히 사모하였고, 훌륭한 덕이 있는 분은 반드시 백대(百代)토록 제사를 받들었으니, 옛날의 예법을 따라 시급히 거행하려 한다. 이미 길일(吉日)을 가리어 고성(告成)하고, 휘호(徽號)에 응하여 경사(慶事)를 반포(頒布)하노라. 생각해 보건대, 청묘(淸廟)의 제도에 본시 세실의 규정이 있었다. 대개 문소(文昭)와 무목(武穆)이 혹은 친진(親盡)할 때가 있게 되기 때문에 조(祖)의 공로와 종(宗)의 덕의(德義)를 보답하기 위하여 대서(代序)가 다하여도 조천(祧遷)하지 않은 것이다. 은(殷)나라와 주(周)나라 무렵의 이장(彝章)을 상고해 보더라도 후세에 본보기가 되었고, 또한 우리 8,9위(位)의 열성(列聖)들을 존숭하고 향사(享祀)하여 길이 궁진(窮盡)함이 없었다. 예법에 있어 또한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거룩한 일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숙종 대왕께서는 성신(聖神)하여 천명(天命)을 응집(凝集)하였고,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을 전승(傳承)하였다.
영명(英明)하고 효우(孝友)하는 자품이 고금에 뛰어났으며, 강의(剛毅)하고 홍대(弘大)한 덕은 제왕(帝王)들을 능가하셨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이 간절하였으며,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도의(道義)를 중히 여겨 즙희(緝熙)하는 공부가 극진하셨다. 오직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는 곧 실천 궁행(實踐躬行)을 근본으로 삼았고 시행과 조치는 하는 것마다 천리(天理)와 맞게 하시었다. 곤위(壼位)770) 를 재차 안정시켜 한(漢)나라나 송(宋)나라에서도 하지 못했던 예의(禮議)를 거행하였고, 원단(苑壇)771) 을 처음으로 세워 더없이 큰 춘추(春秋)의 의리를 밝히셨다. 임금과 신하 사이의 상제(喪制)를 빠짐없이 복구하였고, 대소(大小)의 궐전(厥典)을 모두 다시 닦았다. 예단(睿斷)이 보통보다 뛰어나 기술해 놓은 성용(聲容)과 문물(文物)이 가득하였고, 방례(邦禮)의 부족함이 없게 하였으니, 이름 붙일 수 없는 덕업(德業)과 공렬(功烈)이 한량없으셨다. 당저(當宁)의 시대에 태평을 누리어 성종(成宗) 무렵과 같은 밝은 국운을 다시 열어 놓았고 어첩(御帖)을 영수각(靈壽閣)772) 에 간직했으니, 태조(太祖) 이후에 다시 보는 거룩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50년 동안을 임어(臨御)하여 천백(千百)의 임금들보다 뛰어나셨다. 깊은 산골 외딴 섬까지 성명(聖明)의 덕화에 젖어 잊지 않았고, 성덕(聖德)이 두터운 땅덩이와 높은 하늘과 같게 되었으니, 어찌 민멸(泯滅)되겠는가? 비록 그 당일에 휘칭(徽稱)을 면응(勉膺)하게 되기는 했지만, 어찌 모두를 찬양하게 되었겠느냐? 돌아보건대, 성대한 예절(禮節)이 열성조(列聖祖)에서 고징할 수 있으니, 영원토록 약사(禴祀)를 누림이 마땅하다. 차례가 다 되지도 않아서 일찌감치 대론(大論)이 정해지고, 응당 거행해야 할 일이기에 대중의 심정이 똑같았다. 이륜(彛倫)을 내걺으로써 오세지묘(五世之廟)에서 덕(德)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의열(義烈)을 펼쳐 놓아 천추(千秋)에 할말이 있게 되었다. 제사 시작이 진실로 신명(神明)과 사람들의 마음에 맞게 되어 인정과 예문(禮文)에 유감스러움이 없었고, 어버이 나타내려는 마음은 상하(上下)의 차이가 없는 것이어서 감격과 기쁨이 서로 어울리게 되었다. 10실(十室)이나 되도록 똑같이 존숭함은 거룩하신 현성(賢聖)들께서 연달아 계승한 때문이요, 1만 년이 지나도록 헐어지지 않고 해와 달처럼 언제나 선명하게 빛이 나리라. 이에 본년 12월 초하룻날에 숙종 대왕을 존숭하여 세실(世室)에 올리는 일로써 대신을 보내어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 고하게 하였다. 이미 비궁(閟宮)에서 잔을 올리었고, 이어 법전(法殿)에서 윤음(綸音)을 환발(渙發)하였다. 신민(臣民)들이 귀를 쫑긋거리며 욕의(縟議)를 더위잡고서 다 같이 환호하게 되었고, 종사(宗社)에 더욱 빛이 났으니, 종전의 기쁨과 짝이 되어 경사가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진실로 견줄 데가 없는 아름다운 식전(式典)인데, 어찌 너그럽게 탕척(蕩滌)해 주는 은덕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만물과 함께 새로워질 생각을 하며, 이에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은혜를 펴기로 한다. 아!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하여 감히 소자(小子)의 지극한 정성을 말하는 것이니, 존숭하기를 더욱 높이 하여 진실로 온 나라에서 우러러 바라는 데에 부응(副應)하노라. 그래서 이렇게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마땅히 모두 알아차리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홍문관 제학 서명균(徐命均)이 지어 올린 것이다.】
12월 1일 신축
반사(頒赦)하고, 대신과 의논하여 경과(慶科)를 보이도록 명하였다.
신겸제(申兼濟)를 장령(掌令)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지평(持平)으로, 송수형(宋秀衡)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2월 2일 임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고려사(高麗史)》는 누가 찬술(撰述)한 것인가?"
하매, 검토관 신치근(申致謹)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가 찬술한 것입니다."
하고, 시강관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일찍이 옛적의 말을 들어보건대, 세종 대왕께서 정인지로 하여금 《고려사》를 찬술하게 할 때에 자주 유자(柚子)와 정과(正果)를 내리셨었는데, 인출(印出)했을 때에 미쳐 세종께서 하람(下覽)하시고는 유자와 정과가 아깝게 되었다는 분부가 계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아뢰기를,
"사형 죄수를 청단(聽斷)할 적에는 음악을 정지하고 소선(素饍)을 들게 되는데, 음악을 정지하는 것은 좋지만 소선을 드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매, 이종성이 아뢰기를,
"이는 예문(禮文)에 없는 것입니다. 음악을 정지함은 마음을 맑히며 재계(齋戒)하고자 하는 뜻일 것입니다."
하였다.
권적(權𥛚)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휘정(李彙貞)을 사간(司諫)으로, 허집(許集)을 헌납(獻納)으로, 조태언(趙泰彦)과 윤종하(尹宗夏)를 정언(正言)으로, 신방(申昉)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정우량(鄭羽良)을 교리(校理)로, 이만유(李萬維)와 유엄(柳儼)을 수찬(修撰)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삼았다.
12월 3일 계묘
햇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의 위에 관(冠)이 있었으며 관 위에 배(背)가 있었고, 빛깔이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푸르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진수(李眞洙)는 연고(緣故)가 있어 사조(辭朝)를 할 기약이 없게 되었습니다. 정언 정익하(鄭益河)가 지난해의 교문(敎文)에 관한 일을 들어 논계(論啓)하려고 하였는데, 영상(領相)이 만류하였으니, 그가 자처(自處)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진수는 임용(任用)하고 이거원(李巨源)은 어찌하여 임용하지 않는 것인가?"
하매,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거원이 목호룡(睦虎龍)에 대한 교문(敎文)을 지으면서 사류(士類)들에게 죄를 얻었습니다. 다만 김일경(金一鏡)이 이정소(李廷熽)를 잡아다가 국문(鞫問)하게 하려고 하여 이기성(李基聖)을 시켜 논계하게 했었는데, 이거원이 이기성을 논박하여 체직(遞職)하게 되었고 김일경이 또 이거원을 논박했었으므로, 입각(立脚)이 매우 좋게 되었었는데 마침내 청류(淸流)들의 버리는 바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니, 이진수를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징하(任徵夏)에 관한 계사(啓辭)에 있어서는 다시 조어(措語)하여 아뢰기를,
"임징하의 죄상은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다 같이 분개하게 되는 것으로서, 비록 요번에 성상께서 내리신 분부로 보더라도 천지 사이에 한 시각을 살아 있을 수 없음이 결정된 것입니다. 특히 그의 성미가 완강하게 견디며 감히 결안(結案)을 거부하여, 왕법(王法)에 반드시 죽여야 할 적(賊)이 지금도 오히려 목숨을 연장하고 있으니, 국가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 임징하를 국청(鞫廳)을 차리고 준엄하게 국문하여 공초를 받아 정법(正法)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의금부 도사 정선(鄭㵛)과 조동정(趙東鼎)은 다 같이 잡기(雜技)를 가지고 발신(發身)한 사람으로 모두가 이력(履歷)이 모자라고 또한 명칭(名稱)도 없으니, 둘 다 도태하여 버리도록 명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임징하는 금오(金五)로 하여금 준엄하게 신문(訊問)하도록 했는데, 무엇하러 국문할 것이 있겠느냐? 말단의 일에 있어서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2월 4일 갑진
경과(慶科)를 정시(庭試)773) 로 거행하도록 명하였으니, 대신의 의논에 따른 것이다.
해가 오래 된 포흠(逋欠)을 탕척(蕩滌)해 주어 백성과 더불어 경사를 함께 누리는 뜻을 보이게 하고,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서 더 쓴 것들에 있어서는 햇수를 헤아려 보아 출납(出納)하도록 명하였다.
서종옥(徐宗玉)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박사정(朴師正)을 사간(司諫)으로, 민정(閔珽)을 정언(正言)으로, 박필균(朴弼均)을 봉교(奉敎)로, 조상행(趙尙行)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12월 7일 정미
목성(木星)이 적시성(積尸星)을 범하였다.
조진희(趙鎭禧)를 집의(執義)로, 이행민(李行敏)과 이광부(李光溥)를 장령(掌令)으로, 윤언섭(尹彦燮)을 지평(持平)으로, 송진명(宋眞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기를,
"아! 한 번 지난해의 변란(變亂)이 있은 이후부터는 전하의 신자(臣子)가 된 사람이면 성상에 대한 무함을 밝히는 한 가지 일보다 시급한 것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어떻게 하는지를 들을 수가 없어, 그런 흉악한 말을 논하지 않는 속에 두어 버리고 성상의 덕을 어두컴컴한 데에 돌려버리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고 나도 시원치 않을 일이라 하겠습니다. 을사년774) 봄에 신(臣)이 시골에 머물러 있어 이천해(李天海)의 변이 생겼음을 들었었는데, 신이 조정에 왔을 때에 미쳐 혹자의 말은 ‘이천해는 미쳐서 제정신이 없는 사람으로서 길거리에 나와 요란하게 떠든 말을 두서(頭緖)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고, 혹자의 말은 ‘이천해가 비록 거짓으로 미쳐서 제정신이 없는 것처럼 모양을 꾸몄으나 그의 흉악한 음모가 반역을 도모한 정상은 지극히 망측(罔測)하다.’고 했었습니다.
신이 국문(鞫問)한 옥안(獄案)을 보지 못했으므로 의혹(疑惑)스러움을 견딜 수 없기에 감히 연석(筵席)에서 옥사(獄事)의 실정을 하문(下問)해 보시기를 청했었으나, 전하께서 ‘흉악한 말을 무엇하러 입술에 올릴 것이 있겠는가? 놓아두고 다시 말하지 않는 것이 가하다.’고 하셨습니다. 성상께서 분부가 이러하시기에, 신이 감히 다시 제론(提論)하지 못하였었는데, 그 뒤에 신이 약원(藥院)의 도제조(都提調)로 있으면서 우연히 갑진년775) 의 일기(日記)를 펼쳐 본 즉, ‘선왕(先王)께서 그 해 7월 17일부터 두통(頭痛) 증세가 있어 침식(寢食)이 모두 감퇴되고 오한(惡寒)과 열로 번뇌(煩惱)하다가 점차로 침중하게 되셨으며, 8월 20일에 이르러서는 또 가슴속이 번민(煩悶)스러운 증세가 있으셨고, 21일 이후에는 설사가 멎지 않으므로 23,24일에 연속해서 삼차(蔘茶)를 올렸으나 마침내 위독하게 되셨는데, 그 동안에 밤중에도 다급하게 의관(醫官)을 불러 무슨 약을 써야 될지 하문하시기를 여러 차례 하셨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질병이 빌미가 되고 40일을 침중(沈重)하시다가 영구히 신민(臣民)들의 지극한 애통이 맺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천해의 흉악한 말은 과연 어디에 의거한 것이며, 그때에 중외(中外)에서 증세(症勢)가 이러하셨음을 전연 듣지 못하게 되었었음은 또한 무슨 까닭이었겠습니까? 신이 이에 있어서 통탄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분개해지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곧장 살고 싶지 않게 되어집니다.
정미년776) 에 이르러 신들이 죄를 입고 물러난 뒤에 미쳐 또 듣건대, 서울과 외방(外方)에 잇달아 괘서(掛書)하는 변이 생기었고, 무신년777) 봄에는 과연 역적들이 군사를 일으키며 의거(義擧)라고 자칭하였습니다. 이에 비로소 이천해의 흉악한 말과 경외(京外)의 괘서가 전후에 배포(配布)된 것은 맥락(脈絡)이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서, 흉악한 음모를 빚어낸 것이 하루아침이나 하루저녁의 일이 아닌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청(鞫廳)의 죄수들이 공초(供招)한 것을 들어 보건대, 모두 다 말의 근거를 심유현(沈維賢)에게 돌렸었습니다. 대개 심유현은 궁액(宮掖)과 척분(戚分)이 있어 소원(疏遠)한 신하와 다르므로 그의 말이면 사방에서 듣는 자들에게 반드시 믿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제적(諸賊)들이 반드시 심유현을 교사(敎唆)하고 유인하여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은 이런 때문일 것입니다. 아!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일찍이 을사년에 저들 나라에서 조사(弔使)가 왔을 적에 역관(譯官)을 시켜 신에게 말을 보내 오기를, ‘주상(主上)께서 근심하는 얼굴빛과 서럽게 우는 것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으니, 이는 동국(東國)의 복이기에 감동하여 마음에 기뻐짐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삼가 치하(致賀)하는 말을 대신에게 올립니다.’라고 했었습니다. 대저 전하께서 효도하고 우애하시는 지극한 행실은 비록 다른 나라 사람일지라도 오히려 존경하여 감복할 줄 알았습니다. 저 심유현은 또한 전하의 신자(臣子)인 한 사람으로서 역시 사람의 형체를 갖추고 있는데, 어찌 전하의 훌륭한 덕과 지극한 선(善)을 알지 못하고, 차마 역적 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 등과 마음을 같이 하며 호응하여 그러한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난신(亂臣)이나 적자(賊子)가 어느 시대엔들 없겠습니까마는, 어찌 이 역적들처럼 한없이 흉측하고 극도로 패악한 자가 있겠습니까? 신이 진실로 이 손으로 그의 고기를 뜯어 먹고 싶으면서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갑진년 가을에는 성주(星州)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었기에 성후(聖候)가 편치 못하신 것을 전연 듣지 못하고 있다가, 고을의 아전이 갑자기 승하(昇遐)하신 기별을 알려 왔기에 놀라고 애통해 하느라 어찌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고을 성으로 달려갔었지만 무슨 증세로 인해 이처럼 대척(大慽)을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어 다만 스스로 반호(攀號)하며 애통해 할 뿐이었습니다. 신도 오히려 이러했는데, 저 시골의 미미한 선비나 백성들이 어디에서 듣게 되겠습니까? 진실로 그들의 마음이 이미 놀래고 의혹하게 되었을 것인데, 이처럼 놀래고 의혹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척완(戚畹)778) 에게서 나와 흉악한 말을 들었을 적에 사세가 진실로 곧이들으며 따르지 않게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건저(建儲)를 가리켜 폐립(廢立)이라 하고 참결(參決)을 가리켜 찬탈(簒奪)이라고 한 그 원위(源委)가 나온 데가 있은 것이겠습니까? 저 제도(諸道)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풍문(風聞)만 듣고서 역적들에게 붙게 된 것은 또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역적들의 군사가 이미 흩어지고 죄수들 국문(鞫問)이 바야흐로 한창임을 듣게 되면서는 생각에 박필몽과 박필현의 무리가 심유현을 종용(慫慂)한 것과 심유현이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낸 실정이 거의 모두 드러나게 되리라 여겼었습니다.
풍문에 듣건대, 전하께서 죄수들을 국문하실 적에 제적(諸賊)들이 성상의 몸을 향하여 그만 흉패(凶悖)한 말을 하게 되므로 전하께서 차마 듣지 못하시다가 더러는 눈물을 흘리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낸 근거를 당초부터 추궁하여 핵실(覈室)하지 않았고, 심유현에 있어서는 또한 무슨 까닭도 없이 앞질러 물고(物故)가 되었습니다. 비록 심상하게 남을 무함한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말을 조작해 낸 실정을 사핵(査覈)하여 승관(承款)을 받아내어 결안(結案)을 써 놓으면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될 것인데, 오늘날의 일은 성상의 몸에 관하여 망측(罔測)하게 무함한 것을 한 해가 다 가도록 신국(訊鞫)했지만, 언제 일찍이 명백하기가 이와 같은 것을 한 장이라도 공초(供招)받아 놓은 것이 있었습니까? 옥사(獄事)를 다스릴 적에 대저 되도록 너그럽게 완화(緩化)하기에만 주력하여, 베인 것은 대부분 지엽(枝葉)인 사람이 많았고 난만(爛漫)하게 역적을 추종한 사람에 있어서는 허다히 살리자는 의논에 부회(傅會)하여, 법망(法網)을 벗어나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 그 무리가 많았습니다. 전하께서 또한 일찍이 제도(諸道)에 교문(敎文)을 반포하여 제적(諸賊)들의 친척과 인우(姻友)들을 위안해 주셨고, 영남(嶺南) 사람들에 대하여는 해유(解由)에 구애(拘碍)하지 말고, 관직을 제수하도록 분부하시게 되었으니, 영남 사람들은 어찌 모두 반역을 했었기에 이러한 비상한 처분을 내림으로써 감동하여 기뻐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까? 대저 처벌이 그 죄에 합당하게 되면 죽게 되는 자도 또한 원망하지 않는 법이고, 은덕이 합당한 은덕이 아니게 되면 받는 자가 도리어 의혹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자신의 일을 변명하는 것을 혐오(嫌惡)하여 끝까지 추궁하지 않으려고 하시고, 또 반측자(反側者)들의 마음을 안정(安定)시켜 은혜에 감복하며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하시니, 성상께서 마음에 생각하고 계시는 바는 어찌 애연(藹然)하게 인후(仁厚)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저 효경(梟獍)779) 과 같은 성질은 마침내 감복시킬 수 없고, 도리어 전하께서 이와 같이 하시는 것은 외축(畏縮)에서 나온 약점(弱點)을 드러낸 것으로 여기게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습을 숨기며 베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마치 서리맞은 풀과 같이 시들하던 사람들이 현저한 호건(豪健)하게 자득(自得)한 모양이 있어 비록 입으로 감히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의욕(意慾)에 찬 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문에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와전(訛傳)되는 말이 파다하므로 민생들이 모두 보따리를 꾸리고 있어 마치 장차 파탕(波蕩)이 일게 될 듯한 사세입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은 구중 궁궐(九重宮闕)에 계시니, 또한 어떻게 물정(物情)이 이에 이른 것을 모두 통촉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 서리 뒤에는 얼음이 얼게 되는 것과 같은 조짐이 유래(由來)해온 지 오래입니다. 갑진년의 대상(大喪) 이래로 위란(危亂)을 의구(疑懼)하는 조짐과 속이어 현혹(眩惑)하는 사단이 한 가지만이 아니었는데, 마침내는 칭병(稱兵)하여 난을 일으키매 나라의 절반이 따라서 배반하게 되었었습니다. 그 뿌리가 굳어지고 깊어져 뻗어 나가는 것을 저지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진실로 고식적(姑息的)인 인자(仁慈)로는 복종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대저 전하의 한 몸은 곧 종사(宗社)의 주인이시기에 성상의 몸이 무함을 받는 것은 곧 종사가 무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 자신은 비록 가볍게 여기실지라도 종사가 무함받는 것을 돌보지 않으면서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핑계해버리고서 분명하게 변파(辨破)해 갈 바를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옛적의 우리 인묘 성조(仁廟聖祖)께서 훌륭한 공렬과 큰 업적이 마치 청천 백일(晴天百日)과 같으셨는데도 그 때의 흉악한 반역의 무리가 오히려 또 중국에 말을 전파하여 야사(野史)에 기록하게 되었기에, 전하께서 선조(先朝)를 위하여 변무(辨誣)하는 일을 여러 해가 되도록 더욱 부지런히 하셨었습니다. 하물며 이들 심유현의 무리가 으슥한 자리에서 임금에게 후욕을 가하였고 터무니 없는 속에서 거짓말을 지어내어 대중의 귀를 현란(眩亂)시키고 온 나라 안을 요란하게 했으니, 후세를 위한 염려가 더욱 어떠하기에 오히려 그대로 태연히 있어 변무(辨誣)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선조(先朝)에 대한 무함에 있어서는 변무하고도 당저(當宁)에 대한 무함은 놓아 두며, 딴 나라에 있어서의 변무는 그들에게 달린 것인데도 기청(祈請)했으면서, 본국(本國)에 있어서의 변무는 우리에게 달린 것인데도 범연하게 소홀히 여기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의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또 ‘노(怒)하게 됨이 상대의 소위에 달린 것이니, 자기 자신이야 무슨 상관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분부하셨는데, 대저 ‘노하게 됨이 상대의 소위에 달린 것이지, 자기 자신이야 무슨 상관할 것이 있겠느냐?’ 란 것은 곧 정자(程子)가 한 말로서, 대순(大舜)이 사흉(四凶)780) 을 베인 것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 지의(旨義)를 추구(推究)해 보건대, 오늘날의 일과는 딱 들어맞지 않는 듯싶습니다. 하물며 또 정자의 말이 ‘요(堯)가 필부(匹夫)들 속에서 순(舜)을 찾아내어 제위(帝位)를 선양(禪讓)했을 적에 그 사흉들이 분노(憤怒)하고 불평하여 악이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에 순이 그들의 행적에 따라 베거나 귀양 보낸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사흉들의 죄가 어찌 순 자신에 상관이 없는 것이겠습니까마는, 순이 혐피(嫌避)하지 않고 베이게 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자기 자신이야 무슨 상관할 것이 있겠느냐?’ 란 것입니다. 천명(天命)을 받들고서 천토(天討)를 거행한 것이고, 그 사이에 있어서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남들이 자신의 소위를 사심(私心)을 쓰는 것이라고 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천리(天理)의 당연함을 따르지 않는다면 곧 이것이 사사 뜻인 것이니, 대순(大舜)이 어찌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전하께서 하신 전후의 처분은 이미 여러 차례 기의(機宜)를 잃어버려 흉도(凶徒)들을 섭복(懾服)할 수 없게 되었으니, 진실로 뒷처리를 잘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삼가 그윽이 생각하건대, 우리 동조(東朝) 두 전하(殿下)께서 만일에 성상의 몸이 이처럼 무함받게 되고 국가의 사세가 이처럼 우려스럽게 되어 있음을 듣게 되신다면 반드시 마음에 놀라고 뼈가 아파하시며 두려운 생각이 절박해질 것입니다. 갑진년 대상(大喪) 때의 증세(症勢)의 시말(始末)을 빠짐없이 들어 명백하게 분부를 내리시어 흉악한 말들을 부수어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게 하며 국가의 명맥(命脈)이 연장되게 하셔야 할 것인데, 아래에서 진품(陳稟)하는 일이 없었으니, 어떻게 외간(外間)의 사세를 내려다보실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백 가지로 애가 타기에 반복해서 깊이 생각해 보다가, 지난해에는 지금의 영상(領相) 홍치중(洪致中)에게 서찰(書札)을 보내어 백관들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서 두 동조(東朝)께 호소하여 하교(下敎)를 받아내어 팔방(八方)에 반포하기를 권했더니, ‘나의 뜻도 바로 그와 같다.’고 답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홍치중이 사람들의 논박을 만나 도성(都城)에서 나가게 되었었다가 다시 도성으로 들어옴에 미쳐 신이 또 서찰을 보내어 권면하자, 홍치중의 답이 또한 지난해와 같았었는데도 지금 여러 달이 되도록 또한 오히려 적연(寂然)하니, 신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이 한 가지 일이 또한 점점 시기가 늦어지게 되니, 신이 진실로 통탄하고 절박하게 여깁니다. 대저 선왕(先王)의 병세가 약원(藥院)의 일기(日記)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사람마다 모두 들을 수 있게 된다면 거의 변무(辨誣)하는 한 가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두 동조의 고유(誥諭)를 받아내어 분명하게 중외(中外)에 게시(揭示)하게 된다면, 성상의 덕을 밝은 일월(日月)처럼 높이게 되고 국가 형세를 반석(盤石)처럼 굳어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시급한 일이 과연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성상에 대한 무함을 가리기 전에는 자신이 천지 사이에 설 수 없음을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분명하게 말을 하고 극력 논하여 우리 임금께서 받은 모함을 변명(辨明)하는 자가 있었음을 들어볼 수가 없고 단지 머뭇거리며 그대로 함묵(緘默)하고 있을 뿐이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그 뜻이 마치 위로 성상께서 차마 듣지 못하시게 되는 뜻을 체념(體念)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실지는 우선만 편하기 위한 친애(親愛)입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일찍이 역적들의 변란이 겨우 진정된 다음에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포고(布告)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마땅히 흉악한 말들의 연유한 바를 깊이 구명(究明)하여 명백하게 말을 다하여 중외(中外)의 사람들 마음이 향배(向背)의 기미(機微)에 있어서 미혹(迷惑)되지 않도록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호하게 말을 하여 핵심(核心)을 깨뜨리지 못했으니, 자못 국가를 위하는 지극한 성의와 측은한 뜻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간사한 싹을 끊어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게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진실로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 시급히 묘당(廟堂)에 명하여 주밀하게 생각하고 난숙하게 강구(講究)하여 분명하게 팔로(八路)에 포유(布諭)하도록 하시되, 무릇 신이 진달한 이외에도 성상에 대한 무함을 변명하게 되는 것이나 사람의 이륜(彛倫)을 붙들게 되는 것에 있어서는 눈을 밝히고 용기를 내어 지극한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하여, 군신(君臣) 사이의 큰 예방(禮防)이 보존되도록 하게 하시고, 전하께서도 또한 마땅히 스스로 도모해 가시되 깊이 지난날의 난(亂)을 불러들이게 된 연유를 생각해 보시고서 통렬하게 하나의 혐자(嫌字)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무릇 갖가지의 처분에 있어 엄명(嚴明)하고 광대(光大)하게 하여 환히 남아 있는 찌꺼기를 제거하게 하신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자연히 기뻐하며 복종하게 되고, 화근(禍根)들이 자연히 소멸될 것이니, 진실로 국가가 만세토록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신의 말이 유망(謬妄)하고 미착(迷錯)한 것이어서 채택하여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신다면, 시급히 망령된 말을 한 죄를 가하여 온 세상에 경계가 되게 하소서. 오직 바라는 것은 신의 이 상소를 가지고 원근(遠近)에 반시(頒示)한다면, 도성(都城) 안의 사민(士民)들도 또한 거의 역신(逆臣)과 순신(順臣)의 분변에 있어서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내일 복주(伏誅)하게 되더라도 뒷날에 있어서 또한 달갑게 여기겠고 다시 남은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 뜻을 잃고 국가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감히 위를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뜻을 품었으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왕법(王法)에 걸리는 짓을 한 것인데, 나 자신에 있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물며 제적(諸賊)들은 모두 다 복주(伏誅)하게 되었다. 이미 지난해의 난역(亂逆)을 겪고난 뒤인데 조금이라도 병이(秉彛)781) 의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알게 되지 못하겠는가? 지나간 해에는 경(卿)의 마음에 혹 지난해를 염려하게 되기는 했지마는, 지금에 있어서 그런 염려는 곧 병통이 아니겠는가? 이런 데에 있어서 마음에 항시 경을 개탄하고 있다. 인용한 말이 미안스러운 것이고 생각이 주편(周遍)하지 못한 것이기에 내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경은 지난날과 같은 마음을 조금 덜어버리고 통쾌하게 서로 공경하고 합심할 생각을 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현록(李顯祿)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소하(疏下)의 삼적(三賊)들의 죄는 진실로 이미 위로 하늘에 닿게 된 것인데도 오히려 지금도 그들의 머리를 보존하고 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후에 대신(臺臣)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처음에는 율(律)을 감하자고 했다가 끝장에는 그만 정계(停啓)해 버렸으니, 진실로 일분(一分)이라도 두려워하고 기탄(忌憚)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이진유(李眞儒)가 교외(郊外)를 지나가며 여러 날을 유련(留連)할 적에 조정의 진신(搢紳)들이 다투어 한 곳으로 많이 모였으니 이도 이미 한심스러운 일이거니와, 이진유를 위하여 율(律)을 변경한다는 의논이 한때에 시끄럽게 전파되었습니다. 신(臣)은 그대로 풍문(風聞)이라고 여기며 곧이듣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마는, 그 뒤에 과연 김한운(金翰運)이 율을 감하기를 청하는 계사(啓辭)가 나왔었습니다. 김한운이 방자하고 기탄없는 짓을 한 것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거니와, 이진유의 기세와 위력이 참으로 두려워집니다. 아! 변란을 겪은 뒤부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누군들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역적 박필몽(朴弼夢)을 말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다만 이 일종(一種)의 당(黨)을 위해 죽으려는 무리에 있어서는 오히려 한 칼로 할단(割斷)해 버리지 못했습니다. 정계하고 싶지만 그래도 공론이 두려워지고 연속해서 아뢰려고 하다가도 진실로 차마 못하겠다고 생각하고서 그만 모두가 말을 꾸며 억지로 피혐(避嫌)을 하였고 까닭도 없이 패초(牌招)를 어기는 짓을 하여, 그 정태(情態)와 거조(擧措)가 남도 부끄러울 지경이었으니, 이는 성명(聖明)께서도 ‘차라리 사헌부를 혁파해야 한다.’는 분부가 계시게 된 것입니다. 김한운은 본시 비천(卑賤)한 사람으로서 일찍이 괴원(槐院)782) 에서 도태(淘汰)되었다가 요행으로 대관(臺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급급하게 투합(投合)하는 짓을 했습니다. 저번날에 김중기(金重器)에 관한 계사(啓辭)도 비록 반드시 딴 뜻이 있는 주대(奏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율명(律名)을 전착(顚錯)함으로써 자연히 변환(變換)하는 데로 돌아갔으니, 또한 진실로 가증(可憎)스러웠기 때문에 신이 핵론(劾論)하여 낙과(落科)로 처치한 것은 대략 규정(規正)하고 경계하는 뜻을 보였던 것인데, 오히려 징계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서 또 다시 제 임의로 거듭 나온 논계(論啓)를 멋대로 고치는 짓을 하여, 스스로 부적(附賊)하는 죄과에 빠지는 것을 달갑게 여겼으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역당(逆黨)들을 비호(庇護)한 죄는 마침내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삭출(削黜)하는 벌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앞서 제대신(諸大臣)을 인대(引對)하여 양신(兩臣)의 일을 논하게 되었을 적에 부수찬 신치근(申致謹)이 심지어는 ‘신은 그들이 죄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는 말들을 연석(筵席)에서 앙대(仰對)하였습니다. 아! 이는 무슨 말이겠습니까? 8월 18일에 처분을 내린 뒤에 감히 딴 의논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저 신치근이 돌연히 으르렁거리며 나서서 마구 악독한 간계(奸計)를 부렸으니, 또한 무슨 심장(心腸)이겠습니까? 과연 이렇게 함이 마땅하다면 저번에 성명(聖明)께서 연명하여 차자(箚子)를 올린 의리를 통쾌하게 신설(伸雪)해 주는 것이 또한 합당한 도리가 아닌 것이겠습니까? 성상께서 분부하신 내용에 ‘어떠한 자리인데 애핍(礙逼)하게 되었느냐?’라고 한 분부를 보더라도 하신 말씀이 엄숙하고 의리가 정대하여 참적(讒賊)들의 입을 막아버릴 수 있는데, 신치근이 유독 성명께서 내리신 처분에 불만을 품고 이에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신 거조(擧措)를 흐릿하여 명백하지 못한 데로 돌려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가령 신치근이 조금이라도 두려워하고 기탄(忌憚)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러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생각에 또한 준엄하게 견벌(譴罰)을 가하여 다른 사람들의 징계가 되도록 함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례의 비답을 내렸다.
장령 이행민(李行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 강 언덕의 사충사(四忠祠) 터를 돌아보매, 대중의 심정이 민울(悶鬱)해지고 길 가는 나그네도 슬퍼하여 상심하게 됩니다. 아! 사신(四臣)들이 임금을 친애(親愛)하고 떠받들며 보호한 정성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는 것이니, 그들이 억울함을 안고 매몰되어 있는 정상을 성명께서도 또한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지난번에 두 상신(相臣)의 관작(官爵)을 복구하도록 하신 명은 군하(群下)들의 한 마디 말도 기다릴 것 없이 진실로 대성인(大聖人)의 통쾌하신 결단에서 나왔으니, 무릇 보고 듣는 사람들이 거개 모두 우러르며 충신들의 원통함이 모두 폭백(暴白)되어 아득한 황천(黃泉)에서 흐느껴 욺을 위로해 주기를 바랐었는데, 소설(昭雪)해 주는 은덕이 단지 두 상신에게만 내리어 오히려 균등하게 시행해야 하는 은전(恩典)에 흠이 있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신으로는 감히 성상께서 뜻을 두시는 데가 있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일체로 충근(忠勤)한 신하들이어서 원래 피차(彼此)의 구별이 없었으니, 신원(伸冤)의 여부도 진실로 두 가지로 나눌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당면한 지금 대신과 제신(諸臣)들이 황야(荒野)에 물러가 있게 되는 것도 또한 반드시 사충(四忠)이 모두 신설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니, 삭출(削黜)하는 벌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12월 8일 무신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윤혜교(尹惠敎)·이유(李瑜)·서명빈(徐命彬)을 승지(承旨)로, 박추(朴樞)를 장령(掌令)으로, 조한위(趙漢緯)·정도은(鄭道殷)을 지평(持平)으로, 한현모(韓顯謨)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12월 9일 기유
햇무리가 겹으로 졌는데, 안쪽 햇무리에는 양이(兩珥)가 있고 햇무리의 위쪽에 관(冠)이 있었으며 햇무리의 아랫쪽에 이(履)가 있고 좌우에 극(戟)이 있었으며 빛깔이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푸르렀으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입직(入直)한 옥당(玉堂)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 번갈아 계신(戒愼)과 공구(恐懼)에 관한 뜻을 진달하였다. 응교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대우(大禹)처럼 좋은 술을 싫어하는 덕은 모자라고 오직 술을 제한없이 드시는 잘못이 있으시면서, 도리어 연석(筵席)에서 ‘입에 가까이 하지 말라.’는 분부가 계셨으니, 항간(巷間)에 소문이 낭자(狼藉)하며, 바깥 의논이 또 여색(女色)에 대한 경계를 근신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저(私邸)에 있을 때부터 한없이 그런 이름을 얻었었다. 환약(丸藥)을 복용(服用)하면서 술과 물에다 타서 마셨었는데, 생각해 보건대, 박필몽(朴弼夢)의 무리가 그런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내가 생맥산(生脈散)을 복용할 적에 오미자(五味子)의 빛깔이 자색(紫色)이었기 때문에 웃으면서 말하기를, ‘상담(常談)에 다병(荼甁)을 주병(酒甁)으로 여긴다.’ 하였었는데, 내가 이것을 마신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혹은 술을 마신다 한 것인가?"
하매, 이종성이 아뢰기를,
"만일에 그런 일이 있으셨다면 분부하시는 말씀을 어찌 이처럼 정녕(丁寧)하게 질언(質言)하시겠습니까? 신(臣)이 전일에 깊이 근심하고 한없이 염려하던 것이 모두 해소되었습니다."
하였다.
12월 10일 경술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무지개의 변괴를 들어 인책(引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내가 부덕하기 때문이고 경(卿)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다."
하였다. 역관(譯官) 김문경(金文慶)을 사형에서 감등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으니, 은화(銀貨)를 팔포(八包) 이외에 더 가졌었기 때문이다. 집의 조진희(趙鎭禧)가 앞서 아뢴 일을 전계(傳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하(疏下)의 삼적(三賊)에 관한 일에 있어 다시 조어(措語)하기를,
"소하 제적(諸賊)들의 죄상은 어찌 베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는 이미 국가에 화의 근원이 되는 것이었고, 교문(敎文) 내용에 흉악한 말은 또한 지난해의 하늘에 사무치는 반역을 빚어냈습니다. 박필몽(朴弼夢)이 이미 칭병(稱兵)하였고 이명의(李明誼)는 또한 형장(刑杖) 아래 죽었는데도 삼적들은 오히려 머리를 보존하고 있으니, 국가에 형벌과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진유(李眞儒)에 있어서는 멋대로 권병(權柄)을 부리어 위복(威福)을 누렸으니, 제적들의 괴수가 되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경지(李慶祉)가 잡혔을 적에 몰래 그의 말[馬]을 가져갔었으니 그와 친밀했던 실상을 가리울 수 없는 일이고, 역적 박필현이 패전(敗戰)한 뒤에 박만정(朴萬鼎)을 잡아 바쳐 서로 얽혀 있는 흔적을 가리우려고 했으니, 그 사이의 정절(情節)이 더욱 지극히 망측(罔測)합니다. 그전의 죄상과 새 죄안(罪案)은 모두가 한 시각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다가, 하물며 김일경(金一鏡)과 박상검(朴尙儉)이 서로 안팎이 되어 성상의 몸을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한 정상이 난만(爛漫)했었으니, 함께 일을 해 온 제적들이 알지 못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이진유 등 삼적들을 준엄하게 국문(鞫問)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통쾌하게 국법대로 정형(正刑)하시기 바랍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소하의 삼적들이 진 범죄는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오늘날의 조정 신하인 사람으로서는 감히 조금도 고려(顧慮)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부응교 이종성(李宗城)은 일찍이 춘방(春坊)의 여럿이 있는 좌중에서 감히 삼적들을 위해 이견(異見)을 세우는 말들을 가지고 그대로 이야기하기를 조금도 기탄없이 했습니다. 이런 짓을 그대로 놓아 둔다면 장차 국론(國論)을 확정하여 편당하는 풍습을 징계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부응교 이종성을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았고 말단의 일만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헌납 허집(許集)이 앞서 아뢴 일을 전계(傳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국경 위에 있어서의 금지하는 조항(條項)은 지극히 엄중하여 한 번 이를 범하는 일이 있으면 결단코 용서해 줄 수 없는 것이니, 역관(譯官) 김문경(金文慶)을 정배(定配)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거두고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2월 11일 신해
이병상(李秉常)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교리 김상성(金尙星)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진희(趙鎭禧)는 일생의 행신(行身)이 사대부(士大夫)의 모양과 같지 않아, 그의 오장(五臟)과 뱃속에 버티고 있는 것이 오직 냄새를 좇아 다니며 먹을 것을 탐하는 것뿐입니다. 한미(寒微)한 선비 때부터 요로(要路)와 권문(權門)에 몸을 바치었고 사적(仕籍)에 들게 되면서는 이두(利竇)와 욕해(慾海)에 골몰하였으며, 입조(入朝)한 지 몇십년이 되지 않았는데 장차 몇 번이나 개두 환면(改頭換面)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저들에게 들어가서는 저들의 수족(手足)이 되었고 이들에게 들어와서는 이들의 수족이 되었으니,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손가락질하게 되고 오만 사람들의 눈을 가리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신축년783) 과 임인년784) 무렵의 일로 말하더라도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친압(親狎)하여 사생 동거(死生同居)의 친구가 되었고 박필기(朴弼夔)·박필현(朴弼顯)과 결탁하느라 인친(姻親)이 되어, 무릇 참혹하고 심각한 의논을 빚어내는 일이 모두 이 사람의 수단에서 나왔습니다. 박징빈(朴徵賓)을 사주(使嗾)한 사람이 누구이고 이기성(李基聖)을 모함한 사람이 누구이었습니까? 역적 김일경의 집 자리 하나가 조진희 때문에 다 망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이 어찌 그 당시 항간(巷間)에 떠도는 상담(常談)이 아니었습니까? 오늘날 김일경의 당을 준엄하게 다스리는 참에 있어서 어찌 그만 유독 면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오늘날에 과연 일분(一分)이라도 청의(淸議)가 있게 된다면, 이와 같은 사류(士流)에 끼이지 못할 사람은 감히 다시는 의관(衣冠)을 갖춘 진신(搢紳)에 들지 못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팔뚝을 걷어붙이며 기운을 뽐내어 자기 스스로 곁에 있는 공중(公衆)의 눈이 두려움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으니, 그는 역시 애처로운 사람입니다. 당면한 지금 이종성의 무리가 이들의 풍습을 깊이 미워하여, 무릇 진취(進取)의 길에 있어서 망령되이 격양(激揚)의 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조진희가 암암리에 독심(毒心)을 품어 온 지 이미 오래이었고, 저번날 사헌부에서 처치(處置)를 하게 될 적에 또한 허다(許多)한 기심(機心)을 허비하여 상하(上下)가 모호(模糊)하고 옳고 그름이 밝혀지지 않기 때문에, 이종성이 등대(登對)하게 될 때에 장차 논박하려는 뜻으로 승정원의 여럿이 모인 좌중에서 언급했었는데, 과연 이 말이 바로 전파하게 되어 신(臣)도 또한 들었었습니다. 등연(登筵)했을 적에 당하여 이종성이 미처 발언하기 전에 조진희가 도리어 앞질러 공격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른바 춘방(春坊)에서의 수작(酬酢)이란 것은 또한 그 임시에 다급하여 두찬(杜撰)785) 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이에 있어서는 이종성 자신이 마땅히 변명하게 될 것이기에 신이 ‘이러이러하다.’라고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유독 신이 통탄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조진희가 비록 무상(無狀)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또한 청명(淸明)한 조정의 삼사(三司) 중에 한 사람인데, 암암리에 자기에 대한 논란의 혐오를 갚기 위하여 앞질러 남을 제어하는 꾀를 발동하여, 탑전(榻前)의 지척(咫尺)인 자리에서 천청(天廳)을 속임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로 미루어 나간다면 또한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설령 이종성이 참으로 추기(樞機)를 근신하지 않는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제우(儕友)들끼리 이야기한 말은 더욱 지적하여 들추어낼 거리가 아닌 것입니다. 하물며 이번에 조진희가 급급하게 공격하기를 마치 진흙 속에 짐승의 발자취와 같음이 있으니, 이런 길이 한 번 열린다면 장차 조정 안에 완전한 사람이 없게 될까 싶습니다. 오늘날 사대부(士大夫)의 풍습이 무너져버리게 된 것은 또한 조진희가 주창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만일 분명하게 척벌(斥罰)을 가하여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깎아버리지 않는다면, 그 끼쳐지는 폐혜가 장차 세상의 도의가 무너져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파괴해버리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차자가 아니었으면 내가 장차 분명히 알지 못하게 될 뻔했다. 조진희의 행신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마는, 이러한 무리는 진신(搢紳)의 자리에 둘 수 없으니 집의 조진희를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깎아버리고, 전 응교 이종성은 흐릿한 상태(狀態)로 둘 수 없으니 잡아다가 추문(推問)하라. 경연(經筵)의 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소인(小人)들이 자행(恣行)하는 풍습을 배척하였음을 마음에 아름답게 여기니, 특별히 상방(尙方)의 활 1 장(張)을 내리라."
하였다.
12월 12일 임자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2월 13일 계축
김시혁(金始㷜)·김상규(金尙奎)·장태소(張泰紹)를 승지(承旨)로, 이만유(李萬維)를 집의(執義)로, 박필기(朴弼琦)를 사간(司諫)으로, 김권(金權)을 정언(正言)으로, 이흡(李潝)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12월 14일 갑인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집의 이만유(李萬維)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번에 채팽윤(蔡彭胤)이 패초(牌招)를 받들고 반궁(泮宮)에 들어갔었음은 곧 임금의 명을 받들고서 다사(多士)들에게 시험을 보이기 위한 것이므로 사체에 있어서 또한 중대한 일이었는데, 반궁의 유생(儒生)들이 여러 10년이 된 지나간 일을 들고 나와 마침내 구축(驅逐)하고야 말았으니, 아! 이는 무슨 거조(擧措)이겠습니까? 종사(從祀)에 관한 한 가지 일은 곧 거의 1백 년 동안이나 피차(彼此)가 서로 상지(相持)해 온 논의입니다. 이번에 전형(銓衡)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대개 채팽윤의 문장(文章)과 재화(才華)가 또래에서 뛰어남을 애석하게 여기고서 40년토록 오래 폐치(廢置)된 사람을 기용(起用)하여 예원(藝苑)의 문임(文任)을 맡긴 것이니, 이는 조정의 의논이 모두 같았고 공론이 조금 신장(伸張)되었음을 볼 수 있는 일인데, 한번 출각(出脚)하였다가 여지없이 낭패(狼狽)하였으니, 신(臣)이 그윽이 통탄(痛歎)스럽게 여깁니다. 전후에 종사(從祀)를 배척하던 사람으로서 문형(文衡)과 지공거(知貢擧)를 맡게 된 사람이 또한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기미(氣味)가 같지 않은 사자(士子)들로 일찍이 이를 들어 혐오(嫌惡)하며 방애(妨碍)하여 과거(科擧)를 폐하는 일은 없었으니, 어찌 유현(儒賢)을 사모하는 정성이 그전의 사람들은 지금 사람들만 못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바야흐로 탕평(蕩平)에 힘쓰시어 ‘지난 일은 선천(先天)에 붙이라.’는 분부를 여러 사륜(絲綸)에 발표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임금이 계시니 만일 아래에서 그대로 잘 받들어 간다면 2백 년 동안 고질이 되어온 편당하는 풍습이 거의 조금이라도 제거될 수 있을 것인데, 사람의 마음이란 똑같지 않은지라 더러는 이러한 종전(從前)에 없었던 이상한 거조가 있으니, 이러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신의 생각에는 나라 절반의 신료(臣僚)들이 다시는 조정에 있으며 임금을 섬기려는 사람이 없게 될까 싶습니다. 또 신이 《숙종보감(肅宗寶鑑)》 찬수(纂修)에 있어서 구구(區區)하나마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습니다. 아! 우리 숙종 대왕께서 50년을 임어(臨御)하시는 동안에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이 백왕(百王)들보다 우뚝하셨고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恩澤)이 사람들의 골수(骨髓)에 젖게 되었었으니, 이는 이른바 ‘문왕(文王)을 몰세(沒世)토록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미 욕의(縟儀)를 거행하여 백대(百代)토록 조천(祧遷)하지 않는 신위(神位)를 만들었고, 또한 《보감(寶鑑)》을 편찬하여 만세(萬世)토록 유전(遺傳)할 방책을 만들어 놓아, 이제는 우리 전하(殿下)의 성효(聖孝)가 또한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게 되었으니, 아! 거룩한 일입니다. 다만 삼가 듣건대, 방례(邦禮)에 관한 한 가지 조관은 수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대개 예송(禮訟)은 본시 지루한 글이 많아 하나하나 수록한다면 보감의 범례(凡例)에 맞지 않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하건대, 성고(聖考)께서 현종(顯宗)의 유의(遺意)를 체념(體念)하여 즉위(卽位)하신 원년(元年)에 맨 먼저 대례(大禮)를 바로잡아 금석(金石)처럼 없어지지 않을 전례(典禮)를 만들어 놓으신 지가 지금 50여 년이 되었고 보면, 이를 어찌 사가(私家)의 일을 당론(黨論)으로 만들어 조정에 밀어 올린 것과 똑같이 여기고서 일체로 삭제해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또한 이 한가지 일에 있어서는 그 대략을 들어, 수십년 동안 방례를 이미 그르쳤다가 다시 바로잡게 된 뜻으로 몇 줄의 문자(文字)를 만들어 분명하게 《보감》 속에 게재(揭載)하여, 성고의 업적이 빛이 나게 하고 오는 후세에 보여 주기를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상소를 입계(入啓)하니, 분부하기를,
"오늘날 탕평(蕩平)하도록 신칙(申飭)하였고 또 선천(先天)에 붙이도록 명한 일들은 곧 병신년786) 이후에 일어난 매우 미미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신축년787) 과 임인년788) , 을사년789) 과 병오년790) 까지에 이른 것이고, 기해년791) 과 기사년792) 의 일들은 원래 제론(提論)하지 않았었으니, 곧 선조(先朝)의 처분이 해와 별처럼 분명했었기 때문이다. 해가 오래 되고 세월이 깊어지매 구습(舊習)을 고치고 새로워지려고 가다듬는 사람에 있어서는 깊이 지색(枳塞)하지 말고 소통(疏通)시켜 조용(調用)하는 것이 곧 탕평하는 도리이니, 본사(本事)는 원래 선천(先天)에 혼동(混同)하여 붙인 것이 아니다. 지금 이만유가 사헌부의 직책을 빙자하고서 소회(所懷)라고 핑계대어 거의 40년이 된 처분을 어지럽히려고 하였으니, 너무도 통탄스럽고 놀라운 일이다. 하물며 이번의 분부를 내린 뒤에 있어서는 위에 있는 사람들로서의 경위(涇渭)가 본디 당연히 이러한데, 그로 하여금 만일 군부(君父)를 존엄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민이(民彛)와 윤상(倫常) 등의 말을 멋대로 군부에게 진언(進言)할 수 있겠느냐? 또 종사(從祀)와 방례(邦禮)를 제론하여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을 써먹으려 하고 처분 내린 것을 현란(眩亂)하려고 하였으니, 그가 만일 일분(一分)이라고 사람다운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러할 수가 있겠느냐? 사체(事體)의 통탄스럽고 놀랍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한 번 18일에 분부를 내린 뒤부터는 무릇 모든 구습(舊習)을 벗어버리지 않는 사람에 있어서 본시 심각하게 다스려 층격(層激)하게 됨을 조장하지 않으려고 했었다마는, 이는 관계가 미미하지 않은 것이어서 날뛰는 짓을 하게 될 조짐을 준엄하게 제방(隄防)을 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靜縣)의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
하였다.
12월 15일 을묘
햇무리가 졌는데, 우이(右珥)가 있었다.
김치후(金致垕)를 승지(承旨)로, 이현모(李顯謨)를 집의(執義)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응교(副應敎)로, 조적명(趙迪命)을 수찬(修撰)으로, 조명익(趙明翼)과 임정(任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이방(吏房) 승지와 병방(兵房) 승지에게 제도(諸道)의 전최(殿最)793) 를 가지고 들어오라 명하였다.
12월 16일 병진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원에서 【 헌납 허집(許集)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진잠 현감(鎭岑縣監) 김주(金鑄)는 지경 안의 민간의 산지(山地)를 공공연히 양탈(攘奪)하고, 족징(族徵)한 번포(番布)를 사유(私有)로 돌렸으니,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2월 20일 경신
대신과 비국(備局) 당상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장악원 정(掌樂院正) 김후연(金後衍)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니, 김후연은 자전(慈殿)의 동기(同氣)간이다. 장령 이광부(李光溥)와 헌납 허집(許集)이 앞서 아뢴 일을 전계(傳啓)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2월 21일 신유
밤에 달무리가 화성(火星)을 둘렀다.
권이진(權以鎭)을 우참찬(右參贊)으로, 김진상(金鎭商)을 부응교(副應敎)로, 조명익(趙明翼)을 교리(校理)로, 김상성(金尙星)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종백(李宗白)을 수찬(修撰)으로, 권혁(權爀)과 김상석(金相奭)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좌우(左右) 포도 대장(捕盜大將)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황해도 해주(海州) 사령(使令) 세국(世國)이 도둑질한 것 때문에 발배(發配)했었는데, 또 도망하여 도둑질하다가 병영(兵營)에 잡히어 있습니다."
하니, 포도청(捕盜廳)에서 심문하도록 명하였다. 그뒤에 대신이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준엄하게 국문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령에게 어찌 국청을 설치할 것이 있겠는가? 포도청에서 엄하게 형장을 가하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만일에 금부(禁府)로 하여금 발포(發捕)하도록 한다면 어찌 소란스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12월 23일 계해
햇무리가 졌는데, 좌이(左珥)가 있었다.
박사정(朴師正)을 집의(執義)로, 정우량(鄭羽良)과 한현모(韓顯謨)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12월 24일 갑자
햇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햇무리의 위쪽에 관(冠)이 있었고 햇무리 아래에 이(履)가 있었으며 빛깔이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푸르렀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12월 25일 을축
유엄(柳儼)을 집의(執義)로, 송필항(宋必恒)을 사간(司諫)으로, 김상익(金尙翼)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備局) 당상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조진희(趙鎭禧)의 일은 대저 나의 젊은 사람들의 괴격(乖激)한 논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마는, 국가 사세가 점점 풀려버리게 되는 일입니다."
하고,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전관(銓官)을 책하고 계시지만 신(臣)은 지혜가 다 되고 힘도 다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군하(群下)들에게 구습(舊習)을 고치고 스스로 새로워져 가는 도리를 권면하면서 한편으로는 앞서의 소견을 고친 것 때문에 죄를 받게 되었으니, 마침내 다스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먼저 발동하여 앞질러 공격하는 짓을 했다는 말은 오해받기 쉬운 혐의를 면하지 못한 것이다."
하고, 봉교(奉敎) 이철보(李喆輔)·박필균(朴弼均)과 검열(檢閱) 조상행(趙尙行)을 삭직(削職)하여 별겸춘추(別蒹春秋)로 차출(差出)하라 명하였다.
장령 이광부(李光溥)·정언 윤종하(尹宗夏)가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대사성 이덕수(李德壽)를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임금이 찬수(纂修)하는 역사를 하문하매, 이덕수가 신사년794) 에 처분했던 일을 들어 앙품(仰稟)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범례(凡例)를 쓰도록 하기를,
"강희(康熙)795) 40년인 신사년 8월 14일에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승하(昇遐)하신 뒤에 따라서 옥사(獄事)를 처분하게 되었고, 그 대처분(大處分)의 내용과 비망기(備忘記)의 말뜻이 지극히 명확하고 엄정(嚴正)하게 되어 있는데, 어찌 후세에 민멸(泯滅)하게 될 수 있겠는가? 오늘날에 제기(提起)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바가 있다. 또한 이미 국승(國乘)에 자세하게 실려 있기에, 여기에는 갖추어 기록하지 않는다. 대략 이렇게 범례(凡例)를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다."
하면서, 이대로 간행(刊行)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6일 병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28일 무진
사간원에서 【정언 윤종하(尹宗夏)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양근 군수(楊根郡守) 송수량(宋守良)은 일찍이 아산(牙山)을 맡았을 적에도 이미 다스려 가지 못하는 것이 많았거니와, 본군(本郡)에 오게 되어서도 한 가지의 잘 하는 것이 없고, 애첩(愛妾)을 데리고 살며 뇌물받는 길을 마구 열어 놓고 있으니,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12월 29일 기사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저(李著)를 장령(掌令)으로, 신치근(申致謹)과 정형복(鄭亨復)을 지평(持平)으로,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이 해에 서울 안 오부(五部)의 원호(元戶)는 3만 2천 3백 72호이고, 인구는 18만 6천 3백 5명이었다. 【남자 인구는 8만 9천 3백 92명이고 여자 인구는 9만 6천 13명이다.】 팔도(八道)의 원호는 1백 63만 8백 73호이고, 인구는 6백 94만 5천 2백 48명이었다. 【남자 인구는 3백 39만 9천 7백 45명이고, 여자 인구는 3백 54만 5천 5백 3명이다.】
【태백산사고본】 19책 24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182면
【분류】호구(戶口)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25권, 영조 6년 1730년 2월 (0) | 2025.09.09 |
|---|---|
| 영조실록25권, 영조 6년 1730년 1월 (0) | 2025.09.09 |
| 영조실록24권, 영조 5년 1729년 11월 (0) | 2025.09.02 |
| 영조실록24권, 영조 5년 1729년 10월 (0) | 2025.09.02 |
| 영조실록23권, 영조 5년 1729년 9월 (0) | 2025.09.02 |